
서울 한양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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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 낙산 일원 |
문화유산채널에서 제작한 한양도성 관련 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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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성도〉(18세기 제작 추정) [1] |
한양도성(漢陽都城)은 조선의 수도였던 한성의 주위를 둘러싼 성곽과 문을 일컫는 말이다. 대한민국의 사적이다.[2]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1396년에 수도를 한양으로 옮긴 후 궁궐과 도시를 방위하기 위해 지은 도성이다. 흔히 한양도성하면 성벽만을 생각하는데 숭례문, 흥인지문을 비롯한 서울 4대문과 그외 문도 한양도성에 포함된다.
'서울성곽'이라는 이름도 한때 이 도성의 공식 명칭이었지만 2011년 7월 사적의 통일된 지정명칭 부여 사업의 일환으로 지금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그래도 여전히 서울 성곽이라는 단어는 통용되고 있으며 문화재 안내판에도 서울 성곽이라고 표기된 곳이 많으며 서울시가 정한 도성 순례길의 명칭도 '서울 성곽길'이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1396년에 수도를 한양으로 옮긴 후 궁궐과 도시를 방위하기 위해 지은 도성이다. 흔히 한양도성하면 성벽만을 생각하는데 숭례문, 흥인지문을 비롯한 서울 4대문과 그외 문도 한양도성에 포함된다.
'서울성곽'이라는 이름도 한때 이 도성의 공식 명칭이었지만 2011년 7월 사적의 통일된 지정명칭 부여 사업의 일환으로 지금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그래도 여전히 서울 성곽이라는 단어는 통용되고 있으며 문화재 안내판에도 서울 성곽이라고 표기된 곳이 많으며 서울시가 정한 도성 순례길의 명칭도 '서울 성곽길'이다.
도성에는 총 8문이 있다. 흔히 4대문과 4소문으로 나뉘며, 4대문에는 숭례문(남대문), 흥인문(동대문), 돈의문(신문), 숙정문이, 4소문에는 소의문(서소문), 광희문, 창의문, 혜화문(동소문)이 대응된다. <사대문>의 실 용례는 실록 등에서 주로 기우제, 기청제를 지내는 기사에 언급되며 이는 관념상의 구분, 즉 동서남북 방위에 맞추어 부른 것으로 추측된다. (숙종 29년 6월 28일 기사 참고.) 실질적인 조선시대에 실제로 대문이라 자주 불리고 규모면에서 이름값을 한 문은 숭례문과 흥인문 둘이다. 돈의문은 신문(新門)이라 불렸으며, 숙정문은 산 속에 있어서 그냥 존재감이 없었다. <사소문>의 용례는 찾아볼 수 없다.
한편 조선 후기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는 실제 운영 양상과 비교할 수 있다. 홍순민 명지대 교수의 경우 조선 후기 '승정원 일기(정조 11년 기사)', '대전통편(大典通編)', '육전조례(六典條例)' 등의 예를 들어 정문(正門)과 간문(間門)이라는 관리상 구분체계를 주목했다. 이 체계는 통행량을 기준으로 삼은 것으로 보이며 고종 4년 편찬된 법전인 육전조례의 경우 정문은 숭례문, 흥인문, 돈의문, 혜화문을 나타내고 간문은 소의문, 창의문, 광희문, 숙정문으로 정해져 있다. 둘의 차이는 관리 관원의 직책, 인원 수 등이다.#[3]
이외에 세조~예종 시기에 광희문 남쪽의 남산 동측 자락에 남소문(南小門)이 운영된 적이 있으나 폐쇄되었다.
다음 표에서 각 문에 관한 내용을 열람할 수 있다. 지금은 없는 문은 취소선 표시.
한편 조선 후기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는 실제 운영 양상과 비교할 수 있다. 홍순민 명지대 교수의 경우 조선 후기 '승정원 일기(정조 11년 기사)', '대전통편(大典通編)', '육전조례(六典條例)' 등의 예를 들어 정문(正門)과 간문(間門)이라는 관리상 구분체계를 주목했다. 이 체계는 통행량을 기준으로 삼은 것으로 보이며 고종 4년 편찬된 법전인 육전조례의 경우 정문은 숭례문, 흥인문, 돈의문, 혜화문을 나타내고 간문은 소의문, 창의문, 광희문, 숙정문으로 정해져 있다. 둘의 차이는 관리 관원의 직책, 인원 수 등이다.#[3]
이외에 세조~예종 시기에 광희문 남쪽의 남산 동측 자락에 남소문(南小門)이 운영된 적이 있으나 폐쇄되었다.
다음 표에서 각 문에 관한 내용을 열람할 수 있다. 지금은 없는 문은 취소선 표시.
지형적으로 살펴보면 사이사이에 산들이 위치해 있기 때문에 (북문인 숙정문을 제외하고는) 산을 피하여 성문을 설치하였고 방위가 엄격하게 지켜지지는 않았다. 크게 보아 북쪽에는 북악산과 인왕산, 남쪽에는 목멱산이 있으므로 서쪽 편에서 돈의문(서문), 소의문(남서문), 숭례문(남문)은 인왕산~목멱산 사이 서쪽~서남쪽에 집중되고 창의문(북서문)은 인왕산과 북악산 사이의 골에 위치하여 서측의 의주로, 삼남로 등과 통해 있다. 동쪽 편에서 흥인문(동문)과 광희문(동남문)은 각각 낙산 기슭, 목멱산 기슭에 설치하고 혜화문은 낙산과 북악산 사이의 골에 설치하여 동쪽 교통을 담당하였다. 마지막으로 숙정문은 북악산 산중에 설치하여 실질적인 통로 역할을 하지 않았다. 공통적으로, 성문의 방어력을 조금이라도 높이기 위해 한쪽 성벽을 산지 지형에 의지하였다.
조선 후기 영조 대에 이르러서는 성벽 및 성문의 관리와 수비, 도성 밖 순찰을 삼군영, 즉 훈련도감(訓鍊都監), 금위영(禁衛營), 어영청(御營廳)이 나누어 맡게 했는데, 그 영역은 <도성삼군문분계지도>(都城三軍門分界之圖)에 구체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숙정문~돈의문은 훈련도감, 돈의문~광희문은 금위영, 광희문~숙정문은 어영청) 여기에서 비롯된 용어로는 어영청이 순찰을 담당하던 소의문~숭례문 바깥의 시장을 일곱 번째 구역이라고 부르던 것에서 유래된 칠패(七牌)시장 등이 있다.
1395년 수도 한양을 방위하기 위해 이성계는 도성을 건축할 계획을 세우는데 이를 위해 도성건축 담당기구인 '도성축조도감(都城築造都監)'을 설치하고 청성백(靑城伯) 심덕부(沈德符)가 감독하여 건설했다.
성이 낙성된 후에는 배수지(排水地)로 5칸 수문(五間水門)·2칸 수문 등을 만드는 한편 성곽의 관문(關門)으로 숙청문[4](肅淸門: 북대문)·흥인문(興仁門: 동대문)·돈의문(敦義門: 서대문)·숭례문(崇禮門: 남대문)의 4대문과 혜화문(惠化門: 동소문)·광희문(光熙門: 시구문)·창의문(彰義門)·소덕문(昭德門: 서소문) 4소문을 합해 8문을 완성하였다.[5]
초축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태종, 세종, 숙종 연간 등의 여러 시기에 걸쳐 유지보수된 흔적이 남아있으며 그에 따라서 성석을 쌓은 모습이 차이가 있다. 그 양상의 변화는 태조 시절에는 일정한 패턴 없이 자연석을 쌓는 모습에서, 점차 정방형(정사각형)의 석재로 가공해서 쌓는 방법으로 변화하며 숙종 대에 이르러서는 정교한 정방형의 형태가 완성된다. 북악산 안내소의 팜플렛에 이러한 시대별 축조 차이가 설명되어 있으며, 성벽을 조금만 살펴보면 쉽게 볼 수 있으니 알아두면 투어의 소소한 재미가 될 것이다.한양도성 성벽의 시대별 쌓기 변화 성벽 바위에는 그 구역 축성을 담당한 고을과 책임자의 이름을 새겨 결과에 대해 책임 소재를 명확히 했다.
성벽의 높이는 현재 소실된 높은 구간은 10 m가 넘었지만 낮은 구간은 5m 남짓이었고 해자조차 없었기 때문에 전시에 방어를 기대하긴 어려웠다. 그래서 적이 한양까지 쳐들어오면 한양을 버리고 도주해야만 했다. 임진왜란,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 모두 그러했다. 이에 대해 조선시대에도 이전 시대와 마찬가지로, 도성은 전쟁이나 내란 방어용 성곽이라기보다는 왕권의 상징이란 의미가 더 컸고, 실용적 시설이라는 측면보다 인의와 예를 강조하여 평온을 기원하고자 했던 관념적으로 운영된 성격이 컸다고 설명한다.[6]
여러 전란을 겪는 동안 한양 방위체제는 계속해서 개편되었다. 또한 한양도성이 토성이 아닌 석성이 된 이유는 조선 전기 동아시아에서 왕권을 상징하는 것이 석성으로 둘러싸인 도성이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한양도성을 처음 축성했을 때 사대문을 제외한 대부분 성곽 축성기간이 49일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경이롭지만, 이렇게 넓고 긴 성곽을 49일 만에 올렸다는 건 실전성을 어느 정도 포기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군사적으로도 한양도성은 처음부터 지키기 힘든 곳이다. 일단 규모가 너무 커서 방어하려면 병력이 많이 필요하다. 모든 성벽을 제대로 방어하려면 정예병력 5만 명 이상이 필요한데, 그만한 병력이 있다면 더 요긴한 다른 선택지가 많다. 또한 숭례문, 흥인지문 일대는 완전한 평지라서 지형상 불리하다. 게다가 성 바깥에 잇는 안산, 인왕산, 남산, 북한산 등은 그 자체만으로도 한성 내부를 관측할 수 있는 감제고지가 된다. 이런 상황에서 한성 자체의 방위력을 확보하려면, 막대한 예산과 인력을 동원해서 성벽을 요새화하고 대규모 상비군을 주둔시켜야 한다. 하지만 이는 매우 비효율적이었다. 그래서 조선도 한양도성 자체의 방위력은 최소화하고 대신 남한산성, 북한산성과 같이 인근의 요새화한 산성을 방어거점으로 사용하는 방위전략을 세운 것이다.
성이 낙성된 후에는 배수지(排水地)로 5칸 수문(五間水門)·2칸 수문 등을 만드는 한편 성곽의 관문(關門)으로 숙청문[4](肅淸門: 북대문)·흥인문(興仁門: 동대문)·돈의문(敦義門: 서대문)·숭례문(崇禮門: 남대문)의 4대문과 혜화문(惠化門: 동소문)·광희문(光熙門: 시구문)·창의문(彰義門)·소덕문(昭德門: 서소문) 4소문을 합해 8문을 완성하였다.[5]
초축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태종, 세종, 숙종 연간 등의 여러 시기에 걸쳐 유지보수된 흔적이 남아있으며 그에 따라서 성석을 쌓은 모습이 차이가 있다. 그 양상의 변화는 태조 시절에는 일정한 패턴 없이 자연석을 쌓는 모습에서, 점차 정방형(정사각형)의 석재로 가공해서 쌓는 방법으로 변화하며 숙종 대에 이르러서는 정교한 정방형의 형태가 완성된다. 북악산 안내소의 팜플렛에 이러한 시대별 축조 차이가 설명되어 있으며, 성벽을 조금만 살펴보면 쉽게 볼 수 있으니 알아두면 투어의 소소한 재미가 될 것이다.한양도성 성벽의 시대별 쌓기 변화 성벽 바위에는 그 구역 축성을 담당한 고을과 책임자의 이름을 새겨 결과에 대해 책임 소재를 명확히 했다.
성벽의 높이는 현재 소실된 높은 구간은 10 m가 넘었지만 낮은 구간은 5m 남짓이었고 해자조차 없었기 때문에 전시에 방어를 기대하긴 어려웠다. 그래서 적이 한양까지 쳐들어오면 한양을 버리고 도주해야만 했다. 임진왜란,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 모두 그러했다. 이에 대해 조선시대에도 이전 시대와 마찬가지로, 도성은 전쟁이나 내란 방어용 성곽이라기보다는 왕권의 상징이란 의미가 더 컸고, 실용적 시설이라는 측면보다 인의와 예를 강조하여 평온을 기원하고자 했던 관념적으로 운영된 성격이 컸다고 설명한다.[6]
여러 전란을 겪는 동안 한양 방위체제는 계속해서 개편되었다. 또한 한양도성이 토성이 아닌 석성이 된 이유는 조선 전기 동아시아에서 왕권을 상징하는 것이 석성으로 둘러싸인 도성이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한양도성을 처음 축성했을 때 사대문을 제외한 대부분 성곽 축성기간이 49일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경이롭지만, 이렇게 넓고 긴 성곽을 49일 만에 올렸다는 건 실전성을 어느 정도 포기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군사적으로도 한양도성은 처음부터 지키기 힘든 곳이다. 일단 규모가 너무 커서 방어하려면 병력이 많이 필요하다. 모든 성벽을 제대로 방어하려면 정예병력 5만 명 이상이 필요한데, 그만한 병력이 있다면 더 요긴한 다른 선택지가 많다. 또한 숭례문, 흥인지문 일대는 완전한 평지라서 지형상 불리하다. 게다가 성 바깥에 잇는 안산, 인왕산, 남산, 북한산 등은 그 자체만으로도 한성 내부를 관측할 수 있는 감제고지가 된다. 이런 상황에서 한성 자체의 방위력을 확보하려면, 막대한 예산과 인력을 동원해서 성벽을 요새화하고 대규모 상비군을 주둔시켜야 한다. 하지만 이는 매우 비효율적이었다. 그래서 조선도 한양도성 자체의 방위력은 최소화하고 대신 남한산성, 북한산성과 같이 인근의 요새화한 산성을 방어거점으로 사용하는 방위전략을 세운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성곽의 일부가 부서지고 광해군이 복원 작업을 진행했지만, 이후의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의 조약 중 성곽을 복원도 추가로 쌓지도 하지 말라는 조약으로 그냥 방치되다가 1704년(숙종 30년) 이조판서 이유(李儒)의 주장으로 5군문(五軍門)의 장정을 동원하여 1711년(숙종 37)까지 수축하였으며, 1743년(영조 19년)에 다시 고쳤다. 그 밖에도 효종·현종·영조·순조 시대에 부분적인 개수를 행했으나 현재 남아 있는 서울의 성곽은 대체로 태조·세종·숙종 때의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한양도성은 90% 가량 복원되었으나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으로 도성의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과거에는 성벽으로 연결되어 있었지만 조선총독부가 교통 문제로 성문쪽은 성벽을 철거했다.# 그래서 낙산 같이 산 같은 곳은 성벽들이 보존되어 있다.[7]
4대문의 경우 북대문은 산 속에 위치한 덕분에, 남대문과 동대문은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가 입성한 곳이라는 타이틀 덕분에 일제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서대문은 얄짤없이 헐려버렸고, 그 자리에 도로와 건물이 들어서버려 현재로서는 복원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또한 안타깝게도 남대문은 2008년 숭례문 방화 사건으로 인해 옛날 그대로의 모습을 잃고 처음부터 다시 복원될 수밖에 없었다.
상대적으로 존재감이 적은 4소문은 더 심각하다. 북소문의 경우 북대문과 비슷하게 산 속에 위치한 덕분에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으로부터 온전히 살아남은 유일한 4소문이 되었다. 서소문 역시 서대문과 비슷하게 일제에 의해 헐린 뒤 현재까지 복원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남소문과 동소문의 경우 일제에 의해 파괴된 후 현재 복원되긴 했으나, 원래 있던 제자리에 복원되지 못했다.
4대문의 경우 북대문은 산 속에 위치한 덕분에, 남대문과 동대문은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가 입성한 곳이라는 타이틀 덕분에 일제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서대문은 얄짤없이 헐려버렸고, 그 자리에 도로와 건물이 들어서버려 현재로서는 복원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또한 안타깝게도 남대문은 2008년 숭례문 방화 사건으로 인해 옛날 그대로의 모습을 잃고 처음부터 다시 복원될 수밖에 없었다.
상대적으로 존재감이 적은 4소문은 더 심각하다. 북소문의 경우 북대문과 비슷하게 산 속에 위치한 덕분에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으로부터 온전히 살아남은 유일한 4소문이 되었다. 서소문 역시 서대문과 비슷하게 일제에 의해 헐린 뒤 현재까지 복원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남소문과 동소문의 경우 일제에 의해 파괴된 후 현재 복원되긴 했으나, 원래 있던 제자리에 복원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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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성곽 복원 개요도. 2012년 자료다. |
1974년 박정희 대통령의 국방 유적 보존 및 정비 지시에 따라 구자춘 서울특별시장이 본격적으로 복원사업을 시작하였다. 1975년 광희문 문루 복원을 시작으로 훼손된 체성과 여장 복원, 주변 가옥 매입 등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1975년부터 삼청지구(창의문~숙정문) 복원에 이어 2013년까지 진행된 인왕산 정상구간까지 총 길이 18,627m 중 69%인 12,771m의 복원작업이 완료되었다.
2013년 5월 4일 숭례문 복구 기념식과 함께 숭례문 남동측 광장구간 성벽복원까지 마무리 됐으며 남산 구간, 시장공관 구간, 동대문 성곽공원 구간이 추가로 복원될 예정이다.
2019년 정동길에서 돈의문터에 이르는 순성길을 정비하기로 했다. 그동안 사유지였거나 이화여자외국어고등학교, 창덕여자중학교에 속해 있어 우회해야 했던 순성길을 원래 도성터 근처로 정비하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성곽이 건물에 가려져 있거나 아직도 땅속에 파묻혀 있으며, 일부는 여장이 없는 채로 복원된 곳도 있다. 그리고 숭례문같은 대문에 비해 성곽은 인지도가 많이 떨어져 일반인들의 관심도 필요할 듯하다.
땅에 묻혔던 서울 남산 한양도성 유적 100여 년 만에 공개된다.
2013년 5월 4일 숭례문 복구 기념식과 함께 숭례문 남동측 광장구간 성벽복원까지 마무리 됐으며 남산 구간, 시장공관 구간, 동대문 성곽공원 구간이 추가로 복원될 예정이다.
2019년 정동길에서 돈의문터에 이르는 순성길을 정비하기로 했다. 그동안 사유지였거나 이화여자외국어고등학교, 창덕여자중학교에 속해 있어 우회해야 했던 순성길을 원래 도성터 근처로 정비하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성곽이 건물에 가려져 있거나 아직도 땅속에 파묻혀 있으며, 일부는 여장이 없는 채로 복원된 곳도 있다. 그리고 숭례문같은 대문에 비해 성곽은 인지도가 많이 떨어져 일반인들의 관심도 필요할 듯하다.
땅에 묻혔던 서울 남산 한양도성 유적 100여 년 만에 공개된다.
2012년 11월 23일 서울한양도성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되었다.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오르면 1년 뒤부터 등재신청 자격이 주어진다.
이에 따라 서울시는 유네스코 권고 기준에 맞는 보존 관리를 하기 위해 올해 한양도성 전담부서를 신설한 데 이어 내년에 한양도성 연결 사업 등에 71억 원가량을 우선적으로 투입할 계획이다. 2013년부터는 연차별로 총서와 자료집을 발간해 이를 바탕으로 2014년 초 세계문화유산 등재신청서를 제출하기로 했다.
만약 서울 한양도성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면 성곽은 물론 그 외 숭례문, 흥인지문, 숙정문같은 서울 4대문도 세계유산에 등재될 수 있다.[8] 서울시는 체계적인 한양도성 관리를 위해 시 내부에 전담조직인 한양도성도감을 올해 하반기에 새로 만들고 책임자로 ‘도제조’[9]를 두기로 했다. 책임자는 4급 공무원이 맡게 될 예정으로 규모는 시 조직의 1개 과 정도가 될 것으로 보인다. 시는 동대문역사문화공원 내 공간을 활용해 한양도성 박물관과 연구소도 설립하기로 했다.
하지만 2017년 3월 21일 이코모스로부터 다른 나라의 세계유산 도시 성벽과 비교해 ‘탁월한 보편적 가치(Outstanding Universal Value)’를 충족하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아 등재 반려되었다.#
현재 2022년 세계유산 등재를 목표로 자료를 보강하여 재추진하는 중이다. 참고로 이 성 내에 자리한 5대 궁궐중 하나인 창덕궁과 종묘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2022년 12월 한양도성과 북한산성, 탕춘대성을 한 데 묶어《조선 수도성곽과 방어산성》이라는 제목으로 세계유산 우선등재목록에 등록 성공하여 추진 중이다.# 이어서 2025년 8월 등재신청대상 선정으로 2026년 1월 신청서를 최종 제출할 예정이다. 아래 문서 참조.
이에 따라 서울시는 유네스코 권고 기준에 맞는 보존 관리를 하기 위해 올해 한양도성 전담부서를 신설한 데 이어 내년에 한양도성 연결 사업 등에 71억 원가량을 우선적으로 투입할 계획이다. 2013년부터는 연차별로 총서와 자료집을 발간해 이를 바탕으로 2014년 초 세계문화유산 등재신청서를 제출하기로 했다.
만약 서울 한양도성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면 성곽은 물론 그 외 숭례문, 흥인지문, 숙정문같은 서울 4대문도 세계유산에 등재될 수 있다.[8] 서울시는 체계적인 한양도성 관리를 위해 시 내부에 전담조직인 한양도성도감을 올해 하반기에 새로 만들고 책임자로 ‘도제조’[9]를 두기로 했다. 책임자는 4급 공무원이 맡게 될 예정으로 규모는 시 조직의 1개 과 정도가 될 것으로 보인다. 시는 동대문역사문화공원 내 공간을 활용해 한양도성 박물관과 연구소도 설립하기로 했다.
하지만 2017년 3월 21일 이코모스로부터 다른 나라의 세계유산 도시 성벽과 비교해 ‘탁월한 보편적 가치(Outstanding Universal Value)’를 충족하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아 등재 반려되었다.#
현재 2022년 세계유산 등재를 목표로 자료를 보강하여 재추진하는 중이다. 참고로 이 성 내에 자리한 5대 궁궐중 하나인 창덕궁과 종묘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2022년 12월 한양도성과 북한산성, 탕춘대성을 한 데 묶어《조선 수도성곽과 방어산성》이라는 제목으로 세계유산 우선등재목록에 등록 성공하여 추진 중이다.# 이어서 2025년 8월 등재신청대상 선정으로 2026년 1월 신청서를 최종 제출할 예정이다. 아래 문서 참조.
한양도성은 서울 도심을 순환하며 수록이 적당히 우거져 시원하면서 보기 좋고 높낮이도 적당히 있어서 산책하기에 매우 좋다. 과거에도 한양도성을 따라 걸으면서 주변의 풍경을 감상하는 여행을 순성(巡城)놀이라고 하며 조선시대 당시 한성부 사람들이 여가활동으로 하였다. 현대까지 풍경이 잘 남아있는 인왕산-북악산 지역은 물론이고 낙산, 목멱산(남산)등지 또한 조선시대에는 서울의 명승지였다. 최근들어 한양도성 순성길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시내에 위치한 순성길 주변에 많은 편의 시설이 갖춰지기 시작했으며 외국인 들에게도 인기코스가 되어가고 있다.
그런 산책의 소소한 재미로 각 구간에서 지정된 가장 높은 곳에서 인증 셀카를 찍어서 홈페이지에 등록하면 인증 배지를 받을 수 있으며 사계절 인증 배지 네 개를 모두 모으면 인증메달을 받을 수 있다. 동대문이 있는 동대문역에 한양도성박물관도 있다.
그런 산책의 소소한 재미로 각 구간에서 지정된 가장 높은 곳에서 인증 셀카를 찍어서 홈페이지에 등록하면 인증 배지를 받을 수 있으며 사계절 인증 배지 네 개를 모두 모으면 인증메달을 받을 수 있다. 동대문이 있는 동대문역에 한양도성박물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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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 순성길 세부지도, 2012년 자료[10] |
강북삼성병원 입구 돈의문 터에서 인왕산 정상, 창의문에 이르는 인왕산 구간은 비교적 최근 지어진 경희궁자이 단지를 끼고 있어 무난히 출발할 수 있다. 가는 길 중간에 홍난파 가옥과 사직터널 위를 통과하며 세븐일레븐 편의점 앞 길을 건너면서 본격적인 산행 코스가 시작된다. 평소에 운동을 좀 했다면 무난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꽤 힘든 여정이 될 수 있다. 의외로 외부 순성길에서 바라보는 성벽이 훨씬 멋지므로 외부 순성길을 통해서 오르다가 인왕산 정상에 가까워 질 무렵 내부 순성길로 들어갈 수 있다. 참고로 해가 지기 1시간 반 정도 전부터 강북삼성병원에서 오르기 시작하면 서울 사대문 도심의 마천루들이 조명을 켜는 순간을 볼 수 있으므로 일몰 시간을 체크한다면 멋진 서울 도심의 야경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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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왕산 중턱에서 본 사대문안 도심 |
참고로 인왕산 정산뿐만 아니라 인왕산 정상에서 좌측으로 꺾어 창의문, 윤동주 기념관 방향으로 5-10분가량 걷다보면 시야가 홍제동, 한강 하류 방향과 서울 사대문 도심 방향이 모두 보이는 포인트가 있으니 참고할 수 있다. 입산 시간이 한정되는 북악산 구간에 비해 산행이 자유로우며 풍경은 그에 못지않아 야경을 보기 위해서는 낙산 구간과 더불어 서울 야경을 위한 멋진 코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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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문 방면 야경 포인트에서 바라본 사대문안 |
참고로 반대편에 보이는 입장료를 지불해야 들어갈 수 있는 남산서울타워에서 보는 서울 야경보다 인왕산-창의문 구간에서 보는 서울 아경이 더 멋지다고 하는 외국인 후기들도 많다. 인왕산을 거쳐 창의문으로 들어오게 되면 윤동주 시인의 언덕과 기념관이 있는데, 운영시간에 맞춰 들어가면 윤동주 관련 동영상(12분)뿐만 아니라 윤동주의 일생에 대해서도 훑어볼 수도 있다. 저녁 때 창의문까지 왔다면 북악산 구간을 입산 제한 시간으로 바로 들어갈 수는 없으므로, 버스를 타고 광화문 인근으로 와서 삼청동에서 택시를 타고 삼청터널을 거쳐 한성대학교 쪽에 있는 혜화문-낙산 구간으로 이동하거나, 삼청동-계동길을 거쳐 와룡공원-경신고-혜화문 구간을 거쳐 낙산 구간을 향할 수 있다. 계동길도 중앙고등학교와 창덕궁 후원, 북촌한옥마을, 사대문안 종로 도심과 더불어 상당히 멋진 풍경을 제공한다.
숙정문 부터 혜화문까지의 순성 구간으로, 북악산을 지난다. 한옥 건축가로 유명한 황두진이 지은 ‘당신의 서울은 어디입니까’(2005년 출판, 해냄출판사)를 보면 그 당시만 해도 개방되지 않은 구간이라 상상으로 북악산 정상에서 바라본 서울 사대문안을 스케치한 이미지를 실을 정도로 이 구간에서 바라본 사대문 도심, 경복궁과 창덕궁 후원이 매우 아름다울 것으로 예상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북악산, 청운대뿐만 아니라 구간 대부분에서 서울 사대문안이 멋진 모습으로 보이며 인왕구간의 곡장처럼 이곳도 곡장이 있어 아리랑 고개 뒷편과 성북동 방향도 아주 잘 보인다. 창의문 방향에서 숙정문 방향으로 가다보면 1.21 소나무(1968년 무장공비 침투 때 생긴 총탄 흔적)도 볼 수 있다. 2007년에야 개방되었기에 나무가 꽤 우거졌다. 말바위 안내소에 있는 화장실은 사용된 물을 정화해서 다시 사용하는 순환수세식 화장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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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악 구간 스케치[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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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모습 |
창의문 안내소-말바위 안내소 구간의 순성길은 탐방시간과 출입구에 제한이 있다. 1968년 김신조 일행이 침투해 온 루트였기 때문에 국가보안상 중요한 곳이기 때문. 사건 이후 40년 동안 민간인 통행 불가지역이었던 이곳은 2007년 4월 오픈되었는데, 양끝의 안내소를 통해서만 출입이 가능하며, 신분증[12]을 보여주고 신청서를 작성하면 표찰을 빌려주며 반대편 안내소로 나갈 때 반납하면 된다. 오픈시간은 하절기는 09시부터 18시까지(입산은 16시까지), 동절기는 09시부터 17시까지(입산은 15시까지)였다. 2019년 4월 5일부터 탐방시간이 확대 개방되었다. 겨울(4개월, 11~2월)은 09시부터 17시, 봄가을(4개월, 3~4월/9~10월)은 07시부터 18시, 여름(4개월, 5~8월)은 07시부터 19시까지다. 동시에 탐방절차가 간소화되어, 신분 확인 절차가 생략되어 바로 표찰을 빌려준다. 신분증은 필요하지 않게 되었지만 여전히 수시로 등산복 차림의 군인들이 계속 오르내리면서 순찰하고 있으며, 곳곳에 CCTV와 탐조등과 감지 장비가 있다. 특히 드론 촬영은 군사지역이라 허가 받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그러나 현재는 시간만 맞추면 표찰 없이 바로 출입이 가능하다. 대통령실의 용산 이전으로 인해 청와대를 쓰지 않게 되어 안내소도 폐쇄했고 군인도 돌아다니지 않는다. 창의문 안내소 입구로 그냥 시간 맞춰서 들어가면 한양도성 순성길을 그대로 탐방할 수 있게 되었다. 단, 2024년 여름 집중 호우로 인해 북악산 순성길이 무너져 일부 구간이 폐쇄되어 있으므로 북악산 순성길은 외부로 돌아가야 한다는 게 흠이다. 2025년 여름까지 다시 복구해서 출입이 가능하게 만들려는 듯하다.
하지만 2025년 이후 이재명 정부의 청와대 복귀로 인해 이전처럼 자유롭게 순성을 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2025년 9월 현재 일부구간이 폐쇄되어 완전한 순성을 하기에는 어려운 시점이며 청와대 복귀 후에는 예전처럼 출입 제한을 둘 가능성이 높아졌다.
혜화문 옆을 통과하는 창경궁로를 건너면 바로 낙산 구간에 진입할 수 있다. 한양도성 성곽의 산 구간 중 가장 완만하고 듬성 듬성 있는 장수마을 카페나 외부 순성길의 도성은 특히 저녁이나 밤에 로맨틱한 광경을 제공해 내국인만이 아니라 외국인들에게 인기가 많다. 길게 연결된 도성에 비치는 조명이 상당히 독특하면서 로맨틱한 장면으로 보이는 듯. 낙산공원 정상에서 동숭동, 서울대 병원 방면으로 나지막히 보이는 도심 풍경과 멋진 구간이다. 이후 암문을 거쳐 내부 순성길을 통해 이화벽화마을로 진입할 수 있으며 이후, YWCA방면으로 갈 수도 있다. 계속 순성길을 따라 남쪽으로 걷다보면 한양도성박물관 - 서울성곽공원 - 흥인지문까지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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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공원 인근의 한양도성 |
한양도성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소의문(소덕문, 서소문)과 돈의문(서대문, 새문)의 멸실 과정에 대해 많이 들어봤을 것이며 이후, 도시화 과정을 거치며 이 구간 대부분의 도성은 멸실되었다. 현재 이 구간은 외국계 회사 지사, HSBC빌딩, 상공회의소 건물이 세워져 있고, 현재 남아 있는 구간도 그 위에 빌딩이나 학교가 들어서 있어 앞으로의 복원에도 어려움이 따를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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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문 폐문 시간 이후 소의문 근처 성벽을 넘는 외국인과 안내인 소년: 한양도성박물관 내 모형 촬영 |
한양도성박물관에 가면, 폐문 시간에 급한 일이 있어 소의문 근처 도성 낮은 부분을 넘어가는 외국인과 그를 안내한 소년의 모습을 모형으로 전시한 것을 볼 수 있다. 박물관 기록에 따르면 실제 있었던 일을 재현한 듯하다. 숭례문 양측의 성벽이 복원되기 이전에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 인근에 있던 소의문을 잊고 살았음을 느끼게 해준다.
- 남산과 인왕산, 북악산은 객관적인 높이 자체는 높지 않지만 서울이 낮은 평지가 많다보니 꽤 경사가 있다. 특히 북악산을 창의문(북소문)쪽에서 올라가기 시작한다면 단번에 200m를 계단으로 걸어올라가야 하니 급격히 증가하는 운동량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바꾸어말하면 넓은 평지 위에 드문 산이니 올라가면 서울 일대가 한눈에 보이며 나름 굉장한 장관이니 운동을 겸해서 종종 올라가면 재미가 있다.
- 성벽 위에 올라가는 것은 금지되어 있어서 위험하다고 곳곳에 써있지만, 감시가 느슨한 곳에서 위에 걸터앉거나, 올라서서 사진을 찍는 외국인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 극소수의 조선시대의 벽돌이 아직까지 남아서 사용되고 있으니 잘 찾아보면 보인다. 글자를 새긴 성벽돌이란 뜻에서 각자성석(刻字城石)이라고 하는데, 특정구간마다 책임자를 지정하고 그 책임자의 이름과 건축기간 등의 정보를 성벽의 돌에 새겨넣어, 해당 구간의 성벽이 무너진다던가 하면 그 사람에게 책임을 물었다. 일종의 건축실명제인 셈.
- 길이가 상당히 긴 편에 속하는데 한양도성의 총 길이는 18.627㎞이고 현재 길이는 12.344km이다.[14] 해외의 도시성곽과 비교해 보면 세계 최장의 성은 중국의 남경성으로 총 길이는 약 34km이고 현재 길이는 약 25km이다.출처 비교해 보면 길이가 남경성의 절반 정도가 된다고 할 수 있다. 그 외에 긴 성벽으로 역사상 총 길이가 약 19km였던 로마시의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이나 그보다 더 거대했던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테오도시우스 성벽이 있다. 그러나 이 둘은 한양 도성보다 보존상태가 좋지 않다. 콘스탄티노플 성벽은 가장 두꺼운 삼중성벽 부분만 잘 보존되어 있으며,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의 경우 3분의 2 정도 남았지만 한양도성의 현재 길이보다 약간 짧다. 과거 춘추전국시대 중국 최대의 도시였던 임치의 성벽둘레는 21km였고 전한시대의 장안성벽의 둘레는 25km, 당나라 장안성의 경우 36.7Km에 달하였지만 오늘날에는 고고학 조사를 통하여 그 흔적을 찾을 수 있을 뿐이다.[15] 국내에 소재하는 도시성곽과 비교해 보면 개경 나성은 길이가 약 16km, 개경성 총길이는 23km로 더 길고출처[16] 평양성은 총 길이가 약 16km로 약간 짧으며 성벽의 총 연장길이까지 따지면 약 23km로 더 길다.출처 태봉국 철원성은 총 길이가 약 12.6km이며 수원 화성은 총 길이 약 5.5km이다.
- 역사적으로 1980년대 무렵까지 '서울 시내'는 한양도성이 있던 전통적 중심지인 사대문 안 중구와 종로구 일대를 지칭하는 표현이었지만, 이후 부도심이 발전하고 서울 내에서 생활권이 분산되면서 근래에는 거의 쓰이지 않는 표현이 되었다. 단, '사대문안'이라는 표현은 2020년대에도 여전히 쓰이고 있다.[17]
- 이랬던 게 2020년 들어 녹색교통지역이라는 말로 사실상 나름 중요한 표현이 되었다. 이 경계를 따라 배출가스 5등급 이하의 차량은 출입이 금지되기 때문에 특히 해당 차량을 운전하는 사람들, 특히 지방 차량은 주의해야 하기 때문이다.[18] 앞으로 이 규제는 좀 더 상위 등급의 차량으로 확대될 예정이라 특히 디젤차량 소유주들에게는 중요한 문제다.
-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서 나름 중요한 무대로 활용된 이유로 2025년 8월 이후 외국인들의 방문이 크게 늘었다. 실제 무대 장소로 알려진 대학로 낙산 부근은 서울시에서 마련한 여기가 바로 그 장소라는 안내문까지 붙어 있다.
⠀[1~50호]⠀⠀[51~100호]⠀
⠀[101~150호]⠀⠀[151~200호]⠀⠀[201~250호]⠀⠀[251~300호]⠀⠀[301~350호]⠀⠀[351~400호]⠀⠀[401~450호]⠀⠀[451~500호]⠀⠀[501호~550호]⠀⠀[번호폐지 이후(번호없음-1)]⠀⠀[번호없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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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북이 반대로 그려져 있다. 즉 위쪽이 남산, 아래쪽이 북악산이다.[2] 처음 지정될 당시 사적 제10호로 지정되었다. 현재는 문화유산에 번호를 매기는 것이 유산의 중요도로 오인될 수 있음을 고려해 따로 번호를 매기지 않고 있다.[3] 홍순민, "조선후기 도성문 관리 방식의 변동", 서울과 역사, 2019, vol., no.101, pp. 61-105 KCI[4] 또는 숙정문(肅靖門)[5] 위키백과[6] 나각순. 2012. "서울 한양도성의 기능과 방위체제". 향토서울 80. 서울역사편찬원 자료제공[7] 산은 성벽이 있으나 없으나 낭떠러지이므로 지나갈 수 없으니 그냥 놔둔 것이다.[8] 돈의문은 아직 복원을 못했다.[9] 실지 제조, 도제조는 대게 판서, 정승급의 대신들이 겸직했다. 그리고 도제조는 정일품 관료들의 명예직이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우측 링크를 참조. #[10] 연합뉴스 인터랙티브 미디어 랩에서 원본 이미지 열람 및 다운로드가 가능하다.[11] 그림 출처 - 《당신의 서울은 어디입니까》, 황두진 저, 2005, 해냄출판사.[12] 반드시 원본이 필요하고 사본이나 사진은 인정되지 않는다.[13] 잠두봉 등[14] 4. 복원 단락 이미지 참조[15] 현재 시안 시에 있는 성벽은 명나라의 것으로, 약 14km이다.[16] 개경성은 한양도성처럼 1단 구조가 아닌 4단 겹구조이다. 가장 바깥의 외성만 있는 것이 아니고 내성, 황성, 궁성이 외성 안에 또 있었다. 개경성은 강감찬 제의 왕가도 건설으로 1009년~1029년의 21년간 30만 4천여 명을 동원하여 나성(외성), 황성(발어참성), 궁성 3중 구조로 건설하고 여말선초 1391년~1393년 8.5㎞의 내성 축조로 총 둘레 약 23㎞의 나성(외성), 내성, 황성(발어참성), 궁성 구조의 4중구조, 25개 성문으로 완성되었다.[17] 이와 비슷한 표현이 '서울 도심'이 있다. 다만,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 위주로는 여전히 쓰고 있는 단어다.[18] 서울의 경우 계절관리제 기간 동안에는 사용에 큰 제약을 받기 때문에 크게 불편한 관계로 대부분 대책을 마련(폐차, 저감장치 설치)하여 제한차량이 거의 없다. 문제는 지방 차량들이 서울에 진입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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