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곶이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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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역사
정부상징
대한민국
보물 寶物
⠀[1~50호]⠀
[1] 1997년 1월 1일 해제,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64호로 재지정[2] 국보 제289호로 승격[3] 국보 제308호로 승격
⠀[51~100호]⠀
[4] 국보로 승격[5] 국보 제311호로 승격
⠀[101~150호]⠀
  1. 용감수경 <제3권,4권> [7]
[6] 국보로 승격[7] 국보 제291호로 승격[8] 국보 제315호로 승격[9] 국보 제48호로 승격[10] 국보 제292호로 승격[11] 국보 제290호로 승격[12] 국보 제328호로 승격[13] 국보로 승격
⠀[151~200호]⠀
[14] 국보 제293호로 승격[15] 국보 제312호로 승격
⠀[201~250호]⠀
[16] 국보로 승격.[17] 국보 323호로 승격.[18] 국보 제326호로 승격.[19] 국보 제294호로 승격.
⠀[251~200호]⠀
[20] 국보로 승격.[21] 국보로 승격.[22] 국보로 승격[23] 국보 305호로 승격.
⠀[301~350호]⠀
  1. 이순신 유물 일괄
    326-1. 장검 2점[25]

    326-2. 옥로
    326-3. 요대
    326-4. 복숭아 모양의 잔과 잔받침 2조
    326-5. 요대함
[24] 국보 제304호로 승격.[25] 국보로 승격[26] 국보로 승격[27] 이미 1962년 12월 20일에 국보 제116호로 지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행정 착오로 인해 1달 뒤에 보물로 중복 지정되어 지정 당일에 바로 지정해제됨
⠀[351~400호]⠀
[28] 국보로 승격.[29] 국보 제320호로 승격.
⠀[401~450호]⠀
[30] 국보 제332호로 승격[31] 국보 제306호로 승격[32] 국보 제306-4호로 승격[33] 국보 제306-2호로 승격[34] 국보 제307호로 승격
⠀[451~500호]⠀
⠀[501~550호]⠀
  1. 석보상절
    523-1. 석보상절 권6,9,13,19
    523-2. 석보상절 권23,24
    523-3. 석보상절 권11
⠀[551~600호]⠀
  1. 안중근의사 유묵
    569-1. 안중근의사유묵-백인당중유태화
    569-2. 안중근의사 유묵-일일부독서구중생형극
    569-3. 안중근의사 유묵-연년세세화상사세세연년인부동
    569-4. 안중근의사 유묵-치악의악식자부족여의
    569-5. 안중근의사 유묵-동양대세사묘현유지남아기안면화국미성유강계정략부개진가련
    569-6. 안중근의사 유묵-견리사의견위수명
    569-7. 안중근의사 유묵-용공난용연포기재
    569-8. 안중근의사 유묵-인무원려난성대업
    569-9. 안중근의사 유묵-오노봉위필삼상작연지청천일장지사아복중시
    569-10. 안중근의사 유묵-세한연후지송백지부조
    569-11. 안중근의사 유묵-사군천리망안욕천이표촌성행물부정
    569-12. 안중근의사 유묵-장부수사심여철의사임위기사운
    569-13. 안중근의사 유묵-박학어문약지이례
    569-14. 안중근의사 유묵-제일강산
    569-15. 안중근의사 유묵-청초당
    569-16. 안중근의사 유묵-고막고어자시
    569-17. 안중근의사 유묵-인지당
    569-18. 안중근의사 유묵-인내
    569-19. 안중근의사 유묵-
    569-20. 안중근의사 유묵-운재
    569-21. 안중근의사 유묵-욕보동양선개정략시과실기추회하급
    569-22. 안중근의사 유묵-국가안위노심초사
    569-23. 안중근의사 유묵-위국헌신군인본분
    569-24. 안중근의사 유묵-천여불수반수기앙이
    569-25. 안중근의사 유묵-언충신행독경만방가행
    569-26. 안중근의사 유묵-임적선진위장의무
    안중근의사 유묵-인무원려 필유근우
    안중근의사 유묵-일통청화공
    안중근의사 유묵-황금백만냥 불여일교자
    안중근의사 유묵-지사인인 살신성인
    안중근의사 유묵-세심대
[36] 국보로 승격[37] 국보 제322-1호로 승격[38] 국보 제329호로 승격[39] 국보 제249호로 승격
⠀[601~650호]⠀
⠀[651~700호]⠀
[41] 국보 제312호로 승격[42] 국보로 승격[43] 국보 제328호로 승격
⠀[701~750호]⠀
  1. 삼국사기 권44∼50
  1. 월인석보
    745-1. 월인석보 권1~2
    745-2. 월인석보 권7, 8
    745-3. 월인석보 권9, 10
    745-4. 월인석보 권13, 14
    745-5. 월인석보 권17~18
    745-6. 월인석보 권21
    745-7. 월인석보 권22
    745-8. 월인석보 권23
    745-9. 월인석보 권25
    745-10. 월인석보 권15
    745-11. 월인석보 권20
[44] 보물 제 710-2호로 지정변경[45] 보물 제 710-3호로 지정변경[46] 보물 제 710-4호로 지정변경[47] 보물 제 710-5호로 지정변경[48] 국보 제322-2호로 승격
⠀[751~800호]⠀
  1. 금강경삼가해
    772-1. 금강경삼가해 권1, 5
    772-2. 금강경삼가해 권2 ,3 ,4, 5
    772-3. 금강경삼가해 권1
    772-4. 금강경삼가해 권2
[49] 보물 767-2호로 지정변경[50] 보물 772-2호로 지정변경[51] 국보로 지정
⠀[801~850호]⠀
⠀[851~900호]⠀
  1. 대동운부군옥목판 및 고본
[54] 보물 제875-1호로 지정번호변경
⠀[901~950호]⠀
  1. 월인석보 권11,12
[55] 국보 제325호로 승격[56] 국보 제317호로 승격
⠀[951~1000호]⠀
[57] 국보 제333호로 승격
⠀[1001~1050호]⠀
[58] 국보 제233-1호로 승격.
⠀[1051~1100호]⠀
[59] 보물 제569-21호로 지정변경[60] 국보 제319호로 승격[61] 국보 제319-1호로 승격[62] 국보 제319-2호로 승격[63] 국보 제319-3호로 승격
⠀[1101~1150호]⠀
[64] 보물 제569-22호 및 제569-23호으로 지정변경
⠀[1151~1200호]⠀
[65] 보물 제875-2호로 지정변경[66] 보물 제767-3호로 지정변경
⠀[1201~1250호]⠀
⠀[1251~1300호]⠀
[67] 보물 제772-3호로 지정변경[68] 국보로 승격.[69] 국보로 승격.[70] 국보 324호로 승격.
⠀[1301~1350호]⠀
[71] 보물 제1306-1호로 지정번호 변경[72] 국보 제313호로 승격.
⠀[1351~1400호]⠀
[73] 국보 제314호로 승격[74] 국보로 승격
⠀[1401~1450호]⠀
[75] 국보 제309호로 승격[76] 국보 제310호로 승격
⠀[1451~1500호]⠀
  1. 용비어천가
    1463-1. 용비어천가 권8, 9, 10
    1463-2. 용비어천가 권3, 4
    1463-3. 용비어천가 권1~2
    1463-4. 용비어천가 권1~2, 7~8
⠀[1501~1550호]⠀
[77] 국보 제335호로 승격[78] 보물 제1543-1호로 지정번호 변경[79] 국보로 승격.
⠀[1551~1600호]⠀
⠀[1601~1650호]⠀
[80] 보물 제1946호와 제1947호로 분리지정[81] 보물 제1947호 숙명신한첩으로 지정변경[82] 보물 제1946호 신한첩 곤으로 지정변경
⠀[1651~1700호]⠀
⠀[1701~1750호]⠀
⠀[1751~1800호]⠀
[83] 국보 제318호로 승격[84] 국보 제327호로 승격[85] 국보로 승격[86] 국보로 승격
⠀[1801~1850호]⠀
⠀[1851~1900호]⠀
[87] 국보 제306-3호로 승격
⠀[1901~1950호]⠀
[88] 가치상실이나 승격 등으로 인한 지정해제와는 달리 대명률은 지정 사실 자체가 취소되었다.
⠀[1951~2000호]⠀
[89] 국보로 승격
⠀[2001~2050호]⠀
⠀[2051~2100호]⠀
⠀[2100~2142호]⠀
⠀[번호폐지 이후(번호없음-1)]⠀
⠀[번호없음-2]⠀
⠀[번호없음-3]⠀
⠀[번호없음-4]⠀
서울 살곶이 다리
서울 箭串橋
소재지
분류
유적건조물 / 교통통신 / 교통 / 교량
수량/면적
1기 / 10,618㎡
지정연도
제작시기
조선 세종 2년(1420), 성종 13년(1482)
길이
76m[1]
살곶이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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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곶이다리
 
 
 
 

1. 개요2. 내용
2.1. 위치2.2. 명칭2.3. 역사
3. 기타4. 외부 링크5. 문화재청 소개글6. 둘러보기

 
 
 
 

1. 개요[편집]

 
 
 
 
살곶이 다리는 중랑천에 위치한 조선 시대다리로, 전곶교()라고도 불리며, 한양으로 드나드는 교통로에 있어서 당대의 주요 교량이었다. 특히 이 길목은 송파나루, 천호 방향으로 가는 매우 중요한 길이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살곶이 다리가 세워졌다. 살곶이 다리는 길이 76m, 너비 6m로, 현존하는 조선시대의 돌다리 중 가장 길다.

서울 살곶이 다리는 2011년 보물로 지정됐다.
 
 
 
 

2. 내용[편집]

 
 
 
 
 
 
 
 
살곶이 다리가 위치한 곳은 청계천중랑천과 만나는 자리 부근인데, 현재 한양대학교에서도 내려다보면 여기가 바로 보인다.

이곳에 다리를 놓게 된 계기는 태종의 잦은 행차 때문이었다고 전해진다. 태종은 세종에게 왕위를 양위한 뒤에 약 4년 간 유유자적하며 지내면서 낙천정풍양궁을 오가며 거처했는데, 이렇게 다니면서 중랑천을 편히 지나기 위해 다리의 설치를 계획하게 되었다고 한다. 다만, 다리를 놓게 된 계기를 마련한 태종은 정작 살곶이 다리를 이용해보지도 못했다는 것이 아이러니한데, 자세한 내용은 후술할 역사 참조.
 
 
 
 
 
 
 
 
살곶이 다리는 '제반교(濟磐橋)', '전곶교', '전관교(箭串橋)'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나, 사실 제대로 된 이름은 '살곶이 다리'나 '전곶교'가 맞는 것이라고 한다. 특히 한자 이름인 ‘箭串橋’는 ‘전관교’로 읽기 십상인데, 여기서는 ‘전곶교’로 읽는 게 옳다고 한다.[2]

'살곶'이라는 특이한 명칭의 유래는 다음과 같이 알려져 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이성계)는 아들 이방원왕자의 난을 거쳐 태종으로 등극하자 함흥으로 내려가 은둔했다. 신하들의 간곡한 청으로 함흥에서 돌아오는 태조를 태종은 이곳 중랑천에서 맞이했는데, 이때 태조가 태종을 향해 을 쏘았다고 전해진다. 날아간 화살은 빗나가 땅에 꽂혔고, 그 이후로 이 지역을 '화살이 꽂힌 곳'이라 하여 '화살꽂이'에서 '살꽂이'를 거쳐 ‘살곶이’라는 지명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3]
 
 
 
 
 
 
 
 
1420년(세종 2년) 5월에 당시 상왕이었던 태종영의정부사 유정현박자청에게 돌다리 세우는 공사를 담당하게 했으나, 정작 완공을 보지 못하고 승하했다. 이곳을 자주 지나던 태종이 죽자 행차가 거의 없어졌기 때문인지, 공사는 일단 흐지부지됐다.

하지만 여기는 한양으로 드나드는 교통로 상에 있는 주요한 지역이었고 매번 배로 중랑천을 건너는 것은 너무 불편하기 때문에, 이 길목에 다리를 놓아야 한다는 주장이 지속적으로 제기 됐던 것으로 보인다. 성종은 1475년(성종 6년) 9월에 흐지부지 중단됐던 다리 공사를 재개하여 살곶이 다리를 완성시킬 것을 명했다. 하지만 토목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조선시대였기 때문에 다리를 놓는 것은 꽤나 난공사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반영하듯 조선 후기의 백과사전인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1482년 한 승려가 살곶이 다리를 완성시키기 위해 한 방법을 고안했고 이를 통해 다리가 완성되자, 임금이 완공을 치하하면서 다리가 집과 같이 평평하여 마치 평지를 걷는 것과 같다 하여 '제반교(濟盤橋)' 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다. 실제 살곶이 다리의 완공은 그 이듬해인 1483년(성종 14년)에 했으며, 이후로는 한양으로 향하는 주요 교통로 상의 주요 교량으로 잘 쓰여온 것으로 보인다.

살곶이 다리는 20세기 초반까지도 주요 교량으로 쓰여왔는데, 1913년에 들어서는 일제가 다리의 노후된 윗면을 콘크리트를 사용하여 보수하기도 했다. 하지만 1925년에 경성부 지방에 발생한 을축년 대홍수로 다리 일부가 물에 떠내려가 다리가 끊어져 버렸고, 이후 끊어진 상태 그대로 방치되었다고 한다. 그 후 1938년 5월에 살곶이 다리 옆에 아예 신식교량인 성동교가 새로 가설되자 기존의 물동량을 완전히 흡수해버렸고, 때문에 살곶이 다리는 1970년대까지 무너진 상태로 계속 방치됐다.

1972년에 들어서야 방치된 다리를 복원했지만, 이미 중랑천 하천의 폭이 조선시대보다 한참 넓어졌기 때문에, 다리 동쪽에 27m 정도의 콘크리트 교량을 잇대 증설함으로써 전체적으로는 본래 모양과 다소 차이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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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동교에서 의정부시 방면으로 찍은 살곶이다리와 한양대학교
위의 사진을 보면 천변 둔치에서부터 중랑천을 가로지르는 살곶이 다리가 보이는데, 땅 위에 놓여진 다리 부분과 물 위를 지나는 다리 부분으로 확연히 나뉘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여기서 땅 위에 놓인 다리가 본래의 살곶이 다리고, 물 위를 지나는 다리가 현대에 증설한 콘크리트 다리다.

2009년서울특별시 성동구에서 발굴조사를 거쳐 살곶이 다리 복원을 진행했다.

문화재청에서 1967년 살곶이 다리를 사적 제160호로 지정했었으나, 2011년 12월에 사적에서 해제하고 보물 제1738호로 재지정했다.[4]
 
 
 
 

3. 기타[편집]

 
 
 
 
  • 고종흥선대원군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자재 수급을 위해 살곶이 다리의 일부를 떼다가 궁궐 공사에 필요한 석재로 사용했다는 설이 있다.
 
 
 
 

4. 외부 링크[편집]

 
 
 
 

5. 문화재청 소개글[편집]

 
 
 
 
조선시대의 수도인 한양과 동남지방을 연결하는 주요통로로 사용되던 다리로 살곶이 다리라고도 한다.

이 다리는 정종과 태종의 잦은 행차 때문에 세종 2년(1420) 5월에 처음 만들어지기 시작했으나 태종이 죽자 왕의 행차가 거의 없어 완성되지 못하였다. 그 후 이 길을 자주 이용하는 백성들 때문에 다시 만들 필요성이 제기되어 성종 6년(1475)에 다시 공사를 시작하여 성종 14년(1483)에 완성했다. 마치 평평한 평지를 걷는 것과 같다하여 ‘제반교(濟盤橋)’라고도 불렀다.

조선 전기에 만들어진 다리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다리로 모두 64개의 돌기둥을 사용하여 만들었다. 돌기둥의 모양은 흐르는 물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 마름모형으로 고안되었다. 1920년대 서울에 내린 집중호우로 다리의 일부가 떠내려 가서 70년대에 다시 고쳐 지었으나, 다리의 오른쪽 부분에 콘크리트를 잇대어 복원함으로써 원래의 모습을 다소 잃었다.

※(전곶교 → 서울 살곶이 다리)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 (2011.07.28 고시)
 
 
 
 

6. 둘러보기[편집]

 
 
 
 
정부상징
대한민국
사적 史蹟
⠀[1~50호]⠀
⠀[51~100호]⠀

[9]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47호로 재지정[10]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48호로 재지정[11] 경상남도 문화유산자료 제275호로 재지정[12] 울산광역시 문화유산자료 제8호로 재지정[13] 경상남도 문화유산자료 제276호로 재지정[B] 14.1 14.2 사적 제510호 고령 사부동과 기산동 요지로 통합, 재지정[C] 16.1 16.2 16.3 사적 제513호 나주 반남 고분군으로 통합, 재지정[D] 19.1 19.2 사적 제514호로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으로 통합 재지정[E] 21.1 21.2 사적 제515호 함안 말이산 고분군으로 통합 재지정
⠀[101~150호]⠀
⠀[151~200호]⠀
⠀[201~250호]⠀
⠀[251~300호]⠀
⠀[301~350호]⠀
⠀[351~400호]⠀
⠀[401~450호]⠀
⠀[451~500호]⠀
⠀[501호~550호]⠀
⠀[번호폐지 이후(번호없음-1)]⠀
2021년 11월 19일부로 번호 지정제 폐지
2021.11.19 - 2026.05.14
[37] 내동리 쌍무덤. 옥야리 장동 방대형 고분 4기 총 5기
⠀[번호없음-2]⠀
2026.05.14 -
 
 
 
 
[1] 보행로 설치로 서북단 일부가 매몰되어 현재 길이는 62.9m 이다.[2] : 꿸 관, 땅이름 곶.[3] 출처: 서울 정보소통광장 - 슬픈 화살이 꽂힌 조선의 ‘살곶이 다리’[4] 문화재청은 2011년 12월 23일 고시에서 "대다수의 석교(石橋 = 돌다리)문화재가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고, 사적 지정요건인 인물, 역사, 사건 등을 고려해볼 때, 사적보다는 유형문화재로서의 성격이 강하므로 사적을 해제하고 보물로 변경 지정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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