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화 가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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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촬영된 가릉(嘉陵)[2] |
왕릉의 양식은 돌방무덤으로 특이하게 지하가 아닌 지상에 돌을 쌓아 석실을 만들었다.[7] 석실 상부에는 할석을 넓게 덮고 그 위에 봉분을 얹었으며 석실 윗면은 8각으로 봉분 지대석을 둘렀는데, 8각 지대석은 가릉과 석릉에서만 발견된 특이한 양식이다.[8]
석실 내부에는 원래 회칠을 한 것으로 보이지만 현재는 대부분 박리되어 거의 남아있지 않다. 다만 떨어져 나간 회벽에 그림을 그린 흔적이 남아 있어 고려가 석실 내부에 벽화를 그리던 전통을 따랐음을 알려준다.
석실 내부에는 원래 회칠을 한 것으로 보이지만 현재는 대부분 박리되어 거의 남아있지 않다. 다만 떨어져 나간 회벽에 그림을 그린 흔적이 남아 있어 고려가 석실 내부에 벽화를 그리던 전통을 따랐음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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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릉의 석호와 문인석[9] | |
능역에는 등신대 크기의 석인상 2개와 석수 2마리가 남아 있다. 석릉의 석인상보다 상태가 좋아서 신체 부분의 조각선이 살아있다. 얼굴은 제주도의 돌하르방이나 여타 장승과 다를 바 없으나 손에 홀(笏)을 들고 있어서 애초에 문석인으로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다만 발굴 당시 석인상의 하부에서 시멘트가 발견된 반면 이를 세우기 위한 토대인 적심이 확인되지 않았다. 때문에 1974년에 능역을 정비할 때 가릉과 가까이 있는 능내리 석실분에서 옮겨진 것으로 추정되나 확실하지는 않다.[10]
석수의 경우 사각기둥 몸체에 눈, 코, 입만 세부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석호(石虎)로 추정된다.
석수의 경우 사각기둥 몸체에 눈, 코, 입만 세부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석호(石虎)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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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릉(嘉陵)에서 출토된 은제나비장식과 옥장식 | |
또한 태후의 무덤인 만큼 당송시대 동전, 은제나비장식, 은제경첩, 새 모양 옥 장식품, 호박 구슬, 석간(石簡) 등 금속 유물과 여성용 장신구 등 출토되었다.
고려 원종(재위 1259∼1274)의 왕비 순경태후의 무덤이다.
순경태후는 장익공 김약선의 딸로서 고종 22년(1235) 원종이 태자가 되자 태자비인 경목현비가 되었으며, 다음해에 충렬왕을 낳았다. 지금의 자리에는 고종 31년(1244)경 사망한 뒤 모신 것으로 짐작한다. 고려 원종 3년(1262) 정순왕후로 추대되고 충렬왕이 즉위(1274)하여 순경태후로 높여졌다.
무덤 주변의 석물은 부서져 없어졌고, 봉분도 무너진 것을 1974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손질하여 고쳤다.
※(가릉 → 강화 가릉)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 (2011.07.28 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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