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성왕릉
최근 수정 시각:
[ 펼치기 · 접기 ]
| ||||||||||||||||||||||||||||||
![]() |
원성왕릉(元聖王陵) | 괘릉(掛陵) |
![]() |
하늘에서 내려다 본 원성왕릉(元聖王陵) |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에 위치한 신라 제38대 국왕 원성왕 김경신의 능이다. 1963년 대한민국의 사적으로[1] 지정되었으며, '괘릉(掛陵)'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흥덕왕릉과 함께 하대 신라왕릉의 능원 양식이 잘 보존된 양대산맥이고 주변 정비도 잘 되었으며, 7번 국도(산업로)[2] 변에 위치해 있어 교통이 좋은 편이다.[3] 동해고속도로 남경주IC에서 진출하면 금방 도착할 수 있다. 그래서 경주 외곽의 신라왕릉 중에서는 가장 방문객이 많이 찾아오는 편이다.
경순왕릉을 제외한 신라 왕릉 중 유일하게 외동읍에 있는 왕릉이다. 신라 왕릉은 철저하게 서라벌, 즉 경주시 시내지구와 인근 안강읍에 있는데 유일하게 원성왕릉만 외동읍에 나와 있다.
흥덕왕릉과 함께 하대 신라왕릉의 능원 양식이 잘 보존된 양대산맥이고 주변 정비도 잘 되었으며, 7번 국도(산업로)[2] 변에 위치해 있어 교통이 좋은 편이다.[3] 동해고속도로 남경주IC에서 진출하면 금방 도착할 수 있다. 그래서 경주 외곽의 신라왕릉 중에서는 가장 방문객이 많이 찾아오는 편이다.
경순왕릉을 제외한 신라 왕릉 중 유일하게 외동읍에 있는 왕릉이다. 신라 왕릉은 철저하게 서라벌, 즉 경주시 시내지구와 인근 안강읍에 있는데 유일하게 원성왕릉만 외동읍에 나와 있다.
원성왕은 798년 12월에 사망했다. 사후 왕의 시신을 봉덕사 남쪽에서 화장했다고 하는데, 삼국사기에는 화장한 후 왕의 유해를 어떻게 했는지에 대해 기록이 없다. 문무왕이나 효성왕처럼 화장하여 유골을 바다에 뿌렸다는 기록도 없다. 다만 삼국유사에는 왕의 유해가 경주 토함산 서쪽 동곡사(洞鵠寺)에 있는데, 그곳에는 최치원이 찬술한 비가 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최치원이 저술한 초월산대숭복사비문(初月山大崇福寺碑文)에 의하면, '동곡사'라는 절은 본래 파진찬 벼슬을 한 김원양이라는 사람이 세웠지만 이 절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원성왕의 능을 옛 절터에 조성했으며, 동곡사는 이전된 뒤 '숭복사'라고 개명했다고 한다. 숭복사는 후대에 사라졌지만, 숭복사 터가 경주시 외동읍에 남아있다. 이 교차검증에 따라 숭복사 터 아래쪽에 '괘릉(掛陵)'이라는 능이 있었는데 원성왕의 능으로 밝혀졌다.
능치고는 좀 이상하게 '괘릉'이라는[4] 이름이 붙은 이유는 이렇다. 괘릉을 조성한 자리에는 본래 절의 연못이 있었는데 연못을 메워 능을 조성했다. 그런데 원래 샘이 솟는 곳이다 보니 물이 괴어 왕의 시신을 바닥에 그대로 안치하지 못해서, 양쪽으로 관을 거는 장치를 만들고 거기에 시신을 안치했다. 그래서 걸 괘(掛)자를 써서 괘릉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지금도 능 주위는 항상 축축한 편이다.
오늘날에도 괘릉에 가면 능 뒤편으로 깎은 석축에서 물이 흐르는데, 물줄기를 돌리기 위해 수로를 따로 만들었음을 볼 수 있다.[5] '괘릉'이란 명칭은 현재 '괘릉리'라는 지명으로도 쓰인다.
괘릉은 1950년대까지는 문무왕의 가묘로 잘못 알려졌었다. 그래서 유튜브에서 일제강점기에 촬영한 영상을 보면 괘릉 앞에 있는 표지판에 '신라 중흥 문무왕릉'이라고 써 있었다. 괘릉이라는 이름이 붙은 사연이 문무왕의 장례와 같이 '물'과 관련이 있기도 하고, 삼국사기 기록대로 문무왕의 유해는 동해 바다에 뿌렸지만, 조선시대의 유교적 관념상 어쨌든 제사를 지낼 장소는 필요하므로 경주 땅에 따로 가묘를 조성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 때문에 오랫동안 문무왕의 가묘로 비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1955년 정인보가 괘릉이 문무왕릉이라는 설을 부정했고, 위에 언급된 숭복사 비문이 판독된 데다가 오늘날 문무대왕릉으로 알려진 대왕암이 발견되자[6] 괘릉이 문무왕 가묘라는 설은 부정되고 원성왕릉으로 인정되었다. 1960년대까지는 문무왕의 능이라고 알리는 비석이 있었으나, 원성왕릉으로 밝혀진 후 그 비석을 파냈다. 지금도 그때 세웠던 비석의 받침이 남아 있다. 그러나 무덤 주인을 말하는 유물이 발견된 무열왕릉과 흥덕왕릉이나 교차검증이 완벽한 선덕여왕릉과 달리 숭복사비에 나오는 ‘곡암’이라는 바위를 찾지 못해 원성왕릉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학자들도 있다.[7][8]
괘릉은 신라의 왕릉 중 완성도가 높고 보존상태가 뛰어나기로 손꼽힌다. 괘릉의 십이지신상이나 여러 석물들은 그야말로 괘릉의 백미라 할 수 있는 유물들로, 이 석상들은 보물 제1427호 '경주 원성왕릉 석상 및 석주 일괄(慶州 元聖王陵 石像 및 石柱 一括)'로 지정되었다.
괘릉 더 이전 시대의 왕릉은 봉분 자체는 거대하기도 하지만 능원이 간략한 편이고, 더 이후 시대는 왕권 약화로 다시 단순화된다. 원성왕릉과 완성도가 비견되는 것은 흥덕왕릉 정도로,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흔적이 강하게 보인다.


석물 중 무인상은 눈이 깊고 코가 큰 서역인의 모습을 하였는데, 그 모델을 두고 중동인[9]이라고 추정하는 학자들이 많다. 그래서 당대 신라가 서역과 교류가 있었다는 정황 증거 중 하나로 제시되기도 한다.[10] 무인상은 앞으로 칼을 짚고 갑옷은 외투 안쪽에 입었으며, 뒤쪽에는 복주머니 같은 것을 찼는데 계산기 역할을 하는 주판 등을 넣는 산낭(算囊)이라고 추정된다. 흥덕왕릉에도 비교적 밋밋하지만 비슷하게 무인석상이 서역인의 형상을 하였다.
한편, 이런 소위 호인상(胡人像)이나 석사자 등 석물의 구성, 괘릉의 앞에 놓인 단면 육각형 기둥, 그리고 무덤과 배치 관계를 보면 당나라 묘제의 영향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미 신라 후기부터 당의 복식이나 일부 제도들을 모방했으므로 충분히 가능한 말이다. 물론 현지화 과정에서 달라진 부분도 있어서 완전히 똑같지는 않은데, 예를 들어 십이지신상을 장식한다거나 봉분의 둘레에 난간석을 만들거나 돌 담을 둘러치는 장식들은 신라의 고유한 요소이고, 석사자상의 배치 또한 당 양식과 차이가 약간 있다. 어찌됐든 신라가 그만큼 7~8세기 동아시아를 휩쓴 세계화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였음을 보여주는 요소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런데 최치원이 저술한 초월산대숭복사비문(初月山大崇福寺碑文)에 의하면, '동곡사'라는 절은 본래 파진찬 벼슬을 한 김원양이라는 사람이 세웠지만 이 절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원성왕의 능을 옛 절터에 조성했으며, 동곡사는 이전된 뒤 '숭복사'라고 개명했다고 한다. 숭복사는 후대에 사라졌지만, 숭복사 터가 경주시 외동읍에 남아있다. 이 교차검증에 따라 숭복사 터 아래쪽에 '괘릉(掛陵)'이라는 능이 있었는데 원성왕의 능으로 밝혀졌다.
능치고는 좀 이상하게 '괘릉'이라는[4] 이름이 붙은 이유는 이렇다. 괘릉을 조성한 자리에는 본래 절의 연못이 있었는데 연못을 메워 능을 조성했다. 그런데 원래 샘이 솟는 곳이다 보니 물이 괴어 왕의 시신을 바닥에 그대로 안치하지 못해서, 양쪽으로 관을 거는 장치를 만들고 거기에 시신을 안치했다. 그래서 걸 괘(掛)자를 써서 괘릉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지금도 능 주위는 항상 축축한 편이다.
오늘날에도 괘릉에 가면 능 뒤편으로 깎은 석축에서 물이 흐르는데, 물줄기를 돌리기 위해 수로를 따로 만들었음을 볼 수 있다.[5] '괘릉'이란 명칭은 현재 '괘릉리'라는 지명으로도 쓰인다.
괘릉은 1950년대까지는 문무왕의 가묘로 잘못 알려졌었다. 그래서 유튜브에서 일제강점기에 촬영한 영상을 보면 괘릉 앞에 있는 표지판에 '신라 중흥 문무왕릉'이라고 써 있었다. 괘릉이라는 이름이 붙은 사연이 문무왕의 장례와 같이 '물'과 관련이 있기도 하고, 삼국사기 기록대로 문무왕의 유해는 동해 바다에 뿌렸지만, 조선시대의 유교적 관념상 어쨌든 제사를 지낼 장소는 필요하므로 경주 땅에 따로 가묘를 조성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 때문에 오랫동안 문무왕의 가묘로 비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1955년 정인보가 괘릉이 문무왕릉이라는 설을 부정했고, 위에 언급된 숭복사 비문이 판독된 데다가 오늘날 문무대왕릉으로 알려진 대왕암이 발견되자[6] 괘릉이 문무왕 가묘라는 설은 부정되고 원성왕릉으로 인정되었다. 1960년대까지는 문무왕의 능이라고 알리는 비석이 있었으나, 원성왕릉으로 밝혀진 후 그 비석을 파냈다. 지금도 그때 세웠던 비석의 받침이 남아 있다. 그러나 무덤 주인을 말하는 유물이 발견된 무열왕릉과 흥덕왕릉이나 교차검증이 완벽한 선덕여왕릉과 달리 숭복사비에 나오는 ‘곡암’이라는 바위를 찾지 못해 원성왕릉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학자들도 있다.[7][8]
괘릉은 신라의 왕릉 중 완성도가 높고 보존상태가 뛰어나기로 손꼽힌다. 괘릉의 십이지신상이나 여러 석물들은 그야말로 괘릉의 백미라 할 수 있는 유물들로, 이 석상들은 보물 제1427호 '경주 원성왕릉 석상 및 석주 일괄(慶州 元聖王陵 石像 및 石柱 一括)'로 지정되었다.
괘릉 더 이전 시대의 왕릉은 봉분 자체는 거대하기도 하지만 능원이 간략한 편이고, 더 이후 시대는 왕권 약화로 다시 단순화된다. 원성왕릉과 완성도가 비견되는 것은 흥덕왕릉 정도로,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흔적이 강하게 보인다.

석물 중 무인상은 눈이 깊고 코가 큰 서역인의 모습을 하였는데, 그 모델을 두고 중동인[9]이라고 추정하는 학자들이 많다. 그래서 당대 신라가 서역과 교류가 있었다는 정황 증거 중 하나로 제시되기도 한다.[10] 무인상은 앞으로 칼을 짚고 갑옷은 외투 안쪽에 입었으며, 뒤쪽에는 복주머니 같은 것을 찼는데 계산기 역할을 하는 주판 등을 넣는 산낭(算囊)이라고 추정된다. 흥덕왕릉에도 비교적 밋밋하지만 비슷하게 무인석상이 서역인의 형상을 하였다.
한편, 이런 소위 호인상(胡人像)이나 석사자 등 석물의 구성, 괘릉의 앞에 놓인 단면 육각형 기둥, 그리고 무덤과 배치 관계를 보면 당나라 묘제의 영향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미 신라 후기부터 당의 복식이나 일부 제도들을 모방했으므로 충분히 가능한 말이다. 물론 현지화 과정에서 달라진 부분도 있어서 완전히 똑같지는 않은데, 예를 들어 십이지신상을 장식한다거나 봉분의 둘레에 난간석을 만들거나 돌 담을 둘러치는 장식들은 신라의 고유한 요소이고, 석사자상의 배치 또한 당 양식과 차이가 약간 있다. 어찌됐든 신라가 그만큼 7~8세기 동아시아를 휩쓴 세계화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였음을 보여주는 요소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원성왕릉은 낮은 구릉의 남쪽 소나무 숲에 있는 것으로 신라 제38대 원성왕(재위 785∼798)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원성왕의 이름은 경신이며 내물왕의 12대 후손으로 독서삼품과를 새로 설치하고 벽골제를 늘려쌓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왕릉이 만들어지기 전에 원래는 작은 연못이 있었는데, 연못의 모습을 변경하지 않고 왕의 시체를 수면 위에 걸어 장례하였다는 속설에 따라 괘릉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 능은 원형 봉토분으로 지름 약 23m, 높이 약 6m이다.
흙으로 덮은 둥근 모양의 무덤 아래에는 무덤의 보호를 위한 둘레석이 있는데, 이 돌에 12지신상이 조각되어 있다. 봉분 바로 앞에는 4각 석상이 놓였고 그 앞으로 약 80m 떨어진 지점부터 양 옆으로 돌사자 두쌍·문인석 한쌍·무인석 한쌍과 무덤을 표시해주는 화표석(華表石) 한쌍이 마주보고 서 있다. 이 석조물들의 조각수법은 매우 당당하고 치밀하여 신라 조각품 중 가장 우수한 것으로 꼽히고 있는데, 특히 힘이 넘치는 모습의 무인석은 서역인의 얼굴을 하고 있어 페르시아인이라는 주장도 있다.
원성왕릉의 무덤제도는 당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이지만 둘레돌에 배치된 12지신상과 같은 세부적인 수법은 신라의 독창적인 것이다. 또한 각종 석물에서 보여지는 뛰어난 조각수법은 신라인의 예술적 경지를 잘 나타내고 있다.
※(경주괘릉 → 경주 원성왕릉)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 동천이 이곳 인근에서 발원한다.
⠀[1~50호]⠀⠀[51~100호]⠀
⠀[101~150호]⠀⠀[151~200호]⠀⠀[201~250호]⠀⠀[251~300호]⠀⠀[301~350호]⠀⠀[351~400호]⠀⠀[401~450호]⠀⠀[451~500호]⠀⠀[501호~550호]⠀⠀[번호폐지 이후(번호없음-1)]⠀⠀[번호없음-2]⠀
|
[1] 舊 사적 제26호[2] 지금은 동해고속도로 울산포항 구간 개통(2016년)에 발맞춰서 7번 국도를 14번 국도와 중복 지정하여 내남 방면으로 우회하게 변경되어 원성왕릉 앞 구간은 일반 경주시도로 격하되었다.[3] 반면, 비슷하게 잘 보존됐다는 평가를 받는 흥덕왕릉은 위치가 매우 외진 곳이라 홍보가 잘 안 되었다.[4] 고려와 조선의 능호는 모두 시호법에 따라 정해진 것이나, 괘릉은 시호법을 따른 능호가 아니다.[5] 요즘 기준에서 보면 물이 나오는 묫자리는 흉당이다.(...) 다만 신라 시대에는 명당에 대한 기준이 달랐을수도 있다. 애초에 풍수지리가 신라 말기에 중국에서 새로 유입된 것이다. 풍수지리 개념을 챙기지 않았던 신라가 풍수지리를 챙긴 고려나 조선보다 더 오래 존속했고 김씨 가문도 현대까지 번창하니... 석굴암도 원래 물이 많이 흐르는 땅 위에 지었고 물줄기가 흐르는 수로를 만들어뒀는데 무식한(...) 근대인들이 이 수로를 잘못 건드렸다가 지금은 유리벽으로 막고 365일 내내 에어컨을 틀어놔야 하는 상태가 됐다. 자세한건 석굴암 문서 참조. 이를 보면 신라인들은 습한 땅에 시설물을 세울 때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는지 상당히 체계적인 노하우가 있었던 듯하다.[6] 물론 문무대왕릉에 대해서 말이 많긴 하지만(유골을 바다에 매장했다는 설과 문무왕 유골의 산골처라는 설 등), 감은사와 이견대의 용도 및 위치와 바다를 바라보는 구조, 인공적으로 대왕암 바위를 다듬은 흔적, 현지 주민들에게 예로부터 내려오던 전승 등이 일치하는 것을 보면 문무대왕릉이 단순한 자연물이 아니라 문무왕의 장례와 관련 있는 장소임은 분명하다. 신라 왕릉의 묘제를 연구했던 이근직 경주대학교 교수는 신라 왕릉 가운데 전승과 실제가 부합하는 분묘는 8기밖에 없다고 하면서, 그 8기 가운데 괘릉을 꼽았다.[7] 鵠巖과 鵠林 그리고 경주 원성왕릉[8] 강인구(1986)[9] 소그드인(페르시아인) 등.[10] 2013년 방영한 KBS 다큐에선 사산조 페르시아 왕 바흐람의 부조와 이 석상의 형태가 비슷하다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영상
![]()
이 저작물은 CC BY-NC-SA 2.0 KR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단, 라이선스가 명시된 일부 문서 및 삽화 제외)
기여하신 문서의 저작권은 각 기여자에게 있으며, 각 기여자는 기여하신 부분의 저작권을 갖습니다.
나무위키는 백과사전이 아니며 검증되지 않았거나, 편향적이거나, 잘못된 서술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무위키는 위키위키입니다. 여러분이 직접 문서를 고칠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의 의견을 원할 경우 직접 토론을 발제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