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월 정양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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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 정양산성 전경 |
영월 정양산성은 남한강으로 길게 돌출된 정양산(해발 약 430~565m)의 험준한 자연지형을 그대로 활용해 축조한 돌산성이다. 고구려가 남하하던 시기 중부 내륙 방어와 진출을 위한 핵심 거점으로 기능한 것으로 보이며, 한강 상류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산성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성벽과 문터, 곡성·치성[1]은 물론 후대에 축조된 외성과 차단벽까지 고루 갖춘 드문 사례로, 보존 상태가 양호해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매우 큰 문화유산이다.
정양산성을 중심으로 주변에 축조된 태화산성(太華山城), 대야산성(大野山城), 온달산성(溫達山城), 완택산성(莞澤山城) 등도 축조 시기와 성격에서 서로 관련이 있을 것이라 여겨진다.
2003년 6월 2일에 대한민국의 사적으로 지정되었다.[2]
성의 전체적인 평면모습은 서북쪽을 향하여 넓은 사다리꼴 또는 키모양을 이루고 있다. 성벽은 내성 1,060m, 외성 570m로, 총 둘레가 1,630m에 이른다. 내성 남벽 서쪽의 일부 구간과 외성의 일부 구간은 자연적인 험준한 지세를 이용하여, 실제로 축조한 성벽은 1,360m 정도이다. 그리고 북서쪽에 자리잡은 정양리에서 계곡을 따라 오르는 곳에 5개, 외성 내에 2∼3개의 차단벽을 갖고 있다.
성벽은 납작하고 반듯한 점판암 석재를 적당히 치석하여 장방형으로 매우 정교하게 쌓았다. 동쪽에서 북문지로 연결되는 성벽은 가장 보존 상태가 양호한 곳으로 구간에 따라 높이 10~12m 정도 되는 곳도 있다. 부분적으로 무너진 곳이 있지만 전체적인 성벽의 잔존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대부분의 성벽은 처음에 축조한 그대로이며 상단 부분에 부분적으로 후대에 개수한 흔적이 발견된다. 한편 남서쪽 일대에는 여장(女墻)이 남아 있다.
산의 서쪽에서 남서 방향 저지대 일대에는 비교적 넓은 평지가 형성되어 있고 이 일대에서 기와편과 토기, 도기편이 다량으로 발견되는 점으로 보아 이곳에 성내 주요 건물이 위치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우물지가 있으며 아마 그 앞쪽에는 연못지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3군데에 다락문 같은 현문(懸門)[3]형식의 문터가 있고, 성벽이 꺾어지는 3군데에서는 성벽 바깥으로 돌출하여 만든 시설물인 치성(雉城), 혹은 곡성(曲城)의 흔적이 남아 있다.
성벽은 납작하고 반듯한 점판암 석재를 적당히 치석하여 장방형으로 매우 정교하게 쌓았다. 동쪽에서 북문지로 연결되는 성벽은 가장 보존 상태가 양호한 곳으로 구간에 따라 높이 10~12m 정도 되는 곳도 있다. 부분적으로 무너진 곳이 있지만 전체적인 성벽의 잔존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대부분의 성벽은 처음에 축조한 그대로이며 상단 부분에 부분적으로 후대에 개수한 흔적이 발견된다. 한편 남서쪽 일대에는 여장(女墻)이 남아 있다.
산의 서쪽에서 남서 방향 저지대 일대에는 비교적 넓은 평지가 형성되어 있고 이 일대에서 기와편과 토기, 도기편이 다량으로 발견되는 점으로 보아 이곳에 성내 주요 건물이 위치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우물지가 있으며 아마 그 앞쪽에는 연못지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3군데에 다락문 같은 현문(懸門)[3]형식의 문터가 있고, 성벽이 꺾어지는 3군데에서는 성벽 바깥으로 돌출하여 만든 시설물인 치성(雉城), 혹은 곡성(曲城)의 흔적이 남아 있다.
- 거란족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왕검’이라는 사람이 쌓았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며 현재는 대개 ‘왕검성’이라 칭하고 있다.
- 정양산성으로 오르는 길 도중에 정조대왕 태실과 태실비 그리고 수호사찰로 여겨지는 정양사지가 존재한다.
영월 정양산성은 남한강에 돌출된 정양산(해발 430―565m)의 자연지형을 잘 이용하여 돌로 쌓은 산성이다.
이 성은 문헌기록상 그 축조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삼국이 한강 유역을 놓고 다투던 삼국시대에 처음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며, 『세종실록지리지』에 ‘둘레 798보, 성안에 샘이 하나 있고, 창고 5칸이 있다’는 기록을 통해 조선 전기까지 계속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성의 전체적인 평면모습은 서북쪽을 향하여 넓은 사다리꼴 또는 키모양을 이루고 있다. 이 성은 내성과 외성으로 크게 구분되는데, 내성의 둘레는 1,060m, 외성의 둘레는 570m로서 성벽의 총 연장은 1,630m에 달한다. 그리고 북서쪽에 자리잡은 정양리에서 계곡을 따라 오르는 곳에 5개, 외성 내에 2-3개의 차단벽을 갖고 있다.
성벽은 자연석을 적당히 다듬어 매우 정교하게 쌓았는데, 현재 남아 있는 성벽만 해도 높이가 최고 11.5m에 달한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고대 산성 중에서 성벽 규모만으로 볼 때 최대로 꼽히고 있는 보은의 삼년산성(사적)과 비교된다. 한편 남서쪽 일대에는 여장(女墻)이 남아 있다.
남쪽의 낮은 지대에는 비교적 넓은 평지가 형성되어 있는데, 여러 건물터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3군데에 다락문 같은 현문(懸門) 형식의 문터가 있고, 성벽이 꺾어지는 3군데에서는 성벽 바깥으로 돌출하여 만든 시설물인 치성(雉城), 혹은 곡성(曲城)의 흔적이 남아 있다.
영월 정양산성은 한강 상류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산성일 뿐만 아니라 성벽과 문터, 곡성과 치성, 그리고 후대의 외성과 차단벽을 갖춘 유일한 산성으로 보존상태도 양호하여 역사상·학술상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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