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정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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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문성[경주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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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경기도와 겹침. [B]: 서울특별시와 겹침. [울산시계], [경주시계]: 울산-경주 시계를 정확히 따르며 시계를 구성하는 용도로 사용중. [경주건천]: 경주시 건천읍에 있는 성. [경주남산]: 경주시 남산에 있는 성. [양동마을]: 경주시 양동마을 바로 인근에 있는 성. [포항]: 포항 소재 성.
행정구역은 현재 대한민국 기준
읍성 조창성  차단성·관문  왜성
금정산성
金井山城
소재지
부산광역시 금정구 금성동 43번지
분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성 / 성곽
면적
818,177㎡
지정연도
1971년 2월 9일
제작시기
삼국시대(추정)
위치
 
 
 
 
1. 개요2. 역사와 변천3. 특징4. 시설
4.1. 성문 (城門)
4.1.1. 금정산성 동문(金井山城東門)4.1.2. 금정산성 서문(金井山城西門)4.1.3. 금정산성 남문(金井山城南門)4.1.4. 금정산성 북문(金井山城北門)4.1.5. 금정산성 중문(金井山城中門)4.1.6. 암문(暗門)
4.2. 망루 및 망대 (望樓 및 望臺)
4.2.1. 금정산성 제1 망루4.2.2. 금정산성 제2 망루4.2.3. 금정산성 제3 망루4.2.4. 금정산성 제4 망루
4.3. 기타 시설물들
5. 금정산성부설비(金井山城復設碑)6. 사적 제215호7. 여담

 
 
 
 

1. 개요[편집]

 
 
 
 
부산광역시 금정산에 있는 삼국시대성곽이다.1971년 2월 9일에 사적 제215호로 지정되었다.
전체길이는 18.8km, 성벽 높이 1.5∼3m, 총면적 약 818,177㎡의 국내에서 규모가 가장 큰 산성이다. 행정 구역상 금정구, 북구, 동래구, 경남 양산시와 성벽을 기점으로 경계(境界)하고 있으며 산 능선을 따라 성을 쌓았다.

2026년 3월 3일 금정산국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금정산성도 함께 국립공원 권역에 포함되어, 지금은 부산광역시가 아닌 국립공원공단이 관리를 하고 있다.

바다로 침입하는 적에 대응하기 위해 쌓은 산성으로 부산 전역이 내려다보이는 전략적 요충지다. 언제부터 성을 쌓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삼국시대 신라에 왜구의 침임이 많았다는 사실로 보아 신라시대 축조했다는 견해도 있고 그 이전부터 있었다는 견해도 있다.

현재의 성곽조선시대 숙종 29년 (1703) 임진왜란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방어시설을 강화하기 위해 쌓았다. 이후 버려지다시피한 산성순조 대에 이르러 동래부사 오한원이 보수하였는데 이때의 기록은 지금도 남아있는 금정산성부설비를 통해 상세히 확인할 수 있다. #
금정산성3
금정산성(왼쪽 멀리 보이는 봉우리가 고당봉이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많이 훼손되었지만 1972년부터 복원사업을 시작하여 동, 서, 남, 북문과 2, 3, 4망루가 복원되었다. 현재는 금정산성 일대를 예전모습으로 조금씩 복원하는 중이며, 남아있는 일부 금정산 성곽과 등산로에 옛 성곽의 자재들이 돌무더기로 남아있다.

동서남북으로 망루관문이 각 4개씩 있고 장대와 암문도 남아 있다. 보통 산성을 비롯한 의 문에는 이름을 붙였지만 금정산성에서는 이름이 붙여지지 않았다. 때문에 그동안 편의상 방위에 따라 동문, 서문, 남문, 북문으로 불렀으나, 2017년에 각 문에 이름을 붙이기로 결정하고 시민투표를 했다. 그리고 2017년 7월에 각 문의 이름이 발표되었는데, 동문은 관해문(關海門), 서문은 해월문(海月門), 남문은 명해문(鳴海門), 북문은 세심문(洗心門)이 되었다.

다만 300년 넘게 동문 서문 남문 북문으로 불렸던 탓에 아직도 각 문들의 새 이름은 잘 쓰이지 않아서 금정산성 공식 홈페이지에서도 이 이름이 언급되지 않을 정도이다. 이 이름들은 시간이 지나야 정착될 것으로 보인다.
 
 
 
 

2. 역사와 변천[편집]

 
 
 
 
동래산성이라고도 한다.

성벽은 18,845m, 성벽 둘레는 9,011보, 높이가 15척이다. 낙동강 하구와 동래 일대가 내려다보이는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다. 동서남북 4곳의 성문과 물이 흘러 나가는 수구문, 누가 없이 만들어진 암문 등이 있다.

1667년(현종 8)에 보수를 건의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이미 축성되었다. 이후 여러 차례 수축과 개축이 이루어졌다. 금정산성은 조선 시대 국방사 연구와 해안 관방체계 연구에 중요한 산성이다.

돌로 쌓은 산성으로, 낙동강 하구와 동래 일대가 내려다 보이는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다. 임진왜란병자호란을 겪고 난 뒤 국방을 튼튼히 하고 바다를 지킬 목적으로 다시 쌓았다. 해발 801m의 금정산 꼭대기에서 서남쪽으로 계곡을 따라 축조되었다.

산성은 1667년(현종 8)에 통제사 이지형(李枝馨)이 금정산성의 보수를 건의한 것으로 보아, 이전에 이미 축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1]에는 1701년(숙종 27)∼1703년에 쌓았으며, 성벽의 둘레는 9,011보, 높이가 15척으로, 사방에 성문이 있었다고 하였다.

또한 1740년(영조 16)에 발간된 『동래부지(東萊府誌)』 관해 및 성곽조에는 1707년에 동래부사 한배하(韓配夏)가 너무 넓기에 남북으로 두 구역을 구분하는 중성(中城)을 쌓고 좌기청(座起廳)[2] · 내동헌(內東軒)[3] 등의 관아 건물과 장대(將臺), 중군소(中軍所)[4], 교련청(敎鍊廳)[5], 군기고(軍器庫), 화약고(火藥庫), 승장소(僧將所)[6], 산성창(山城倉)[7] 등을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뒤 1806년(순조 6)에는 동래부사 오한원(吳翰源)이 중수하고 동문을 신축하였으며, 서문 · 남문 · 북문에 문루를 만들고는 수비군을 배치하였다. 당시 성벽의 길이는 32리였으며, 산성 수비는 동래부사가 맡았다고 한다.

1872년(고종 9)에 제작된 규장각 소장 「금정산성진지도(金井山城鎭地圖)」에는 장대가 동서남북 4곳의 대문과 국청사 뒤쪽에 1곳씩 있고, 본성과 중성에 각각 10곳과 2곳 등 총 12곳의 망대(望臺)가 있었으며, 그 밖에 수문 3곳, 중성 석문 1곳, 아문(亞門)[8] 1곳 등의 성내 시설물이 자리한 모습이 그려져 있다.

숙종 이래로 산성 수축공사의 경위를 새긴 금정산성부설비(金井山城復設碑)가 현재 남아 있다.

산성의 수비는 동래독진의 수성장을 겸하고 있는 동래부사가 맡았으며, 중군, 승병장, 군기감(軍器監)[9], 도계도(圖契都)[10], 군뇌(軍牢)[11], 문직(文職)[12] 등의 직책을 가진 사람과 군병 등의 상비군 및 인근 사찰의 승려가 지켰다. 그리고 유사시에는 동래, 양산, 기장의 3개 읍 소속군과 3개 읍 소재 사찰 승려들이 군사로 차출되어 방어토록 했었다.

숙종실록에는 성안의 해월사[13]와 국청사[14] 승려 1백 명, 범어사 승려 3백 명으로 수첩(守堞)케하고 앞서의 3개읍 승려 수천 명으로 대(隊)를 조직해 산성을 방비케 한 사실이 남아있다. 금정구 금성동 397번지 국청사는 실제 임진왜란 때 승병들의 집합장소로 쓰였다. 지금도 국청사에서 보관하고 있는 '금정산성승장인(金井山城僧將印)'[15]이 이 사실을 증명한다.

해월사는 현재 부산교육원일대에 절터만 남아있다. 한때 무리가 있었던 국청사에는 현재 두 명의 스님이 호국영령들을 지키고 있다. 성만스님은 "기록상 해월사가 북서문을, 국청사가 동남문을 맡아 방비한 기록이 동래부지 등에 남아있다"며, 국청사 승려들이 성역(城役)에 종사한 현판기록 등을 내세운다.
 
 
 
 

3. 특징[편집]

 
 
 
 
성벽의 몸체인 체성벽에서 성벽 위 여장(女墻)의 기초석인 미석(眉石)까지는 높이가 낮은 곳이 표토에서 1.5m이고 높은 곳은 1.8∼2.1m이다. 미석은 두께 10㎝ 내외의 판석을 사용하였는데, 20㎝ 정도 돌출시켜 설치하였다.

여장(女墻)은 20∼80㎝ 정도 높이로 남아 있으며, 동문터 주변의 복원된 부분은 높이가 90㎝에 이른다. 가장 높게 남아 있는 북쪽벽 일부는 안쪽벽 바닥에서 여장 윗부분까지의 높이가 1.2m여서, 조선시대 여느 성곽의 여장 높이와 같다.

다만 바깥벽 미석을 기준으로 하면 높이가 80㎝이며, 특히 미륵암[16] 북쪽 암반 주변에는 약 1m 정도의 성벽도 남아 있다. 따라서 여장을 포함한 성벽의 높이는 원래 3m 전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돈대(墩臺)로 추정되는 제3망루 남쪽과 일부 구간에서만 여장에 총안(銃眼)이 설치되어 있어, 여장은 특수한 곳만 설치되었거나 복원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2004년에 실시된 죽전마을 금성동 일대 시굴조사에서는 높이 30∼80㎝, 너비 70∼80㎝, 석축 2∼4단이 잔존하는 동서 5.6m, 남북 2.4m 규모의 석축 담장 유구가 총 8m가량 확인되었는데, 고지도에 있는 금정진의 외곽 담장으로 추정된다.
체성벽은 기저부에서 높이 1.5m까지는 길이 0.8∼1.1m, 두께 25∼70㎝ 크기의 큰 깬돌과 조그마한 돌을 이용하여 쌓았으며, 그 위로에는 길이 30∼50㎝, 두께 15∼30㎝ 크기의 납작한 깬돌〔板狀割石〕과 조그마한 돌을 쌓았다. 성벽에 사용된 돌은 금정산화강암을 사용하였기에 구간별로 다양한 모습을 보인다.
중성벽은 길이 0.4∼1.2m, 두께 50∼70㎝ 크기의 비교적 큰 돌을 사용하여 쌓았는데, 부산 주변 수군진성(水軍陣城)의 성벽처럼 큰 깬돌 사이로 조그마한 돌을 끼워가며 세워쌓기한 수법도 보인다.

또한 아문(亞門) 주변의 성 바깥벽 및 남문 동쪽벽에서는 약 5m 구간마다 수직줄눈이 보여, 일정한 구간별로 순차적으로 성벽을 축조해 나갔던 것 같다. 경사면 성벽 윗부분에서는 2.1∼3m 간격으로 체성벽과 직각으로 교차하는 성벽이 곳곳에서 확인되어, 2∼3m 구간마다 계단식으로 축대를 덧붙여 쌓아 성벽의 안정성을 높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벽에 사용된 돌은 대부분 주변의 자연 암반에서 떼어낸 화강암제의 납작한 깬돌이며, 제4망루와 동성벽 사이, 문터 주변, 중성벽은 비교적 큰 네모난 깬돌이 사용되었다.

금정산성4

이들 구간은 평평한 편으로 방어에 취약하기에, 주로 동래쪽 성벽에 큰 돌을 사용하여 보다 견고하게 축조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중성벽의 너비는 3.5m 내외인데, 대부분 바깥쪽은 큰 돌로 쌓고 안쪽은 작은 돌로 채운 내탁식(內托式)으로 축조되어, 바깥벽에서 1.1∼2.1m 안쪽까지는 막돌로 채웠으며, 그 안쪽은 흙으로 뒷채움을 하였다. 한편 문터 주변과 경사지에서는 안쪽벽의 안쪽을 따라 자연 배수가 되도록 한 너비 5∼15m, 깊이 5m 정도의 ‘V’자형 도랑〔溝〕이 확인되는데 내황(內隍)[17]으로 보인다. 또한 동성벽과 북성벽에서는 활모양〔弧形〕의 치상유구(雉狀遺構)[18]가 다수 확인되었는데, 외견상 둥근 모양의 치 같기도 하지만, 성벽 윗부분이 훼손된 바깥벽 기저부에 덧붙여 축조한 것으로 후대에 성벽을 보강하거나 보수할 때 쌓은 것으로 보인다.

금정산성은 축성 과정과 역사적 변천 과정을 명확히 확인할 수 있는 국내에서 가장 큰 규모의 산성이자, 동래읍성(東萊邑城)과 함께 부산 지역의 대표적인 조선시대 산성으로 평가되고 있다. 임진왜란병자호란 이후 조선시대 국방사 연구와 해안 관방체계 연구에 중요한 가치를 지닌 산성이다.

산성의 보수정비는 사적으로 지정된 이후인 1972년 동문과 남문, 1973년 서문, 1986년 북문을 복원하였고, 1976년∼1979년 제1망루, 제2망루, 제3망루, 제4망루를 복원하였으며, 붕괴·훼손된 성곽보수 등 금정산성 정비계획에 의거 연차적 사업으로 지속적으로 보수 정비하고 있다.
 
 
 
 

4. 시설[편집]

 
 
 
 
산성지도3
금정산성의 성문과 망루위치 지도
산성에는 4곳의 성문, 그리고 중문과 4곳의 망루가 있다.

지금은 남아 있지 않지만 기록에 있는 건물은 좌기청(座起廳)[19] 6간, 좌우행랑(左右行廊)[20] 각 5간, 군기고(軍器庫)[21] 4간, 화약고(火藥庫)[22] 1간, 내동헌(內東軒)[23] 3간, 별전청[24] 4간과 그 외에 장대, 중군소[25], 교련청[26], 승장소[27], 산성창[28] 등이 있었으며, 축성(築城)[29]에는 동래부민(東萊府民)[30]경상감영 각군에서 차역한 민정으로 이룩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기록상으로 망대, 수문 등 여러 시설들이 있었다 하여, 현재도 꾸준히 복원작업을 하고 있다.
 
 
 
 
 
 
 
 
4개의 성문이 성을 둘러싸고 있으며 성내에는 물이 흘러 나가는 수문(水門) 3개소, 중성 석문(中城 石門) 1개소, 아문(衙門) 1개소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4.1.1. 금정산성 동문(金井山城東門)[편집]

 
 
 
 
동문3
금정산성 동문
부산광역시 금정구 금성동 금정산성 동쪽에 있는 조선 후기의 성문으로 금정산성 동쪽 고갯마루 해발 415m의 높은 곳에 위치한다.

금정산성 동문은 1703년(숙종 29) 금정산성을 축조하면서 함께 설치되었다. 1806년(순조 6) 동래 부사 오한원(吳翰源)이 동래읍성의 배후 성지로서 금정산성의 경영을 요청하여, 1807년 가을에 동문을 완성하였고, 1824년(순조 24)에 수리 축조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금정산성 동문이 허물어져 육축(陸築)[31] 일부만 남아 있었는데, 1972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부분적인 보수와 해체 보수가 이루어졌다.

진입로의 입구는 경사져 있어 성문보다 낮은 편이어서 사람이 말을 타고 통과하기가 어렵다. 또 앞쪽에서 휘어져 들어오게 되는 지형지세를 이용하였는데, 이는 성문이 직접 눈에 띄지 않게 방어력을 높여 적의 공격을 곧바로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규모는 육축 부분이 63.11㎡ 정도이고, 문루가 31.50㎡이며 폭은 610㎝이다. 성문의 폭은 300㎝, 홍예의 높이는 340㎝이다. 성문의 형식은 앞면과 뒷면 모두 홍예식(虹霓式)[32]으로 되어 있다.

성문 위에 성가퀴(몸을 숨기기 위해 성 위에 낮게 쌓은 담)는 설치되어 있으나 총안(銃眼)(성가퀴 또는 포사(砲舍) 안에서 적을 내다보고 총을 쏠 수 있게 한 구멍)은 설치되어 있지 않다.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정면의 어간(어칸/御間)[33]을 좌우 협간(夾間)[34]보다 두 배 정도 넓게 잡았다. 겹처마 팔작지붕의 단층 문루로서 양성 바름(지붕마루의 수직면에 회사 반죽 또는 회반죽을 바른 것)으로 되어 있다. 고갯마루에 입지하므로 문의 좌·우측을 만곡(彎曲)되게 내어 쌓아 나팔 모양을 이루어 적대(敵臺)[35]의 역할을 하도록 되어 있다.

현재는 완전히 복원되어 웅장한 옛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동래 방면에서 금정산성으로 출입하는 성문으로서 관문의 역할을 겸하고 있으며, 비교적 큰 돌을 사용하여 견고하게 축조되어 있다.

우리나라 최대의 산성인 금정산성 4성문 중의 하나로서 일제강점기에 방치되어 훼손되었으나, 현재는 조선 시대 산성의 문루를 잘 보여 주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4.1.2. 금정산성 서문(金井山城西門)[편집]

 
 
 
 
서문3
금정산성 서문
부산광역시 금정구 금성동 부산 금정산성(釜山金井山城) 서쪽에 있는 조선 후기의 성문.

금정산성 서문(金井山城西門)과 금정산성 동문(金井山城東門)을 재건할 때의 전설이 다음과 같이 전해 오고 있다.

동래 부사 정현덕(鄭顯德)은 금정산성 동문과 금정산성 서문을 완벽하게 재건하고자 전국에 이름난 석공을 수소문한 끝에 사제 관계인 두 석공을 찾았다.

정현덕은 스승에게는 금정산성 동문을, 제자에게는 금정산성 서문을 만들게 하였다. 야욕과 욕심이 많은 스승은 금정산성 동문을 웅대하게 지으려고 하였던 반면, 금정산성 서문을 맡은 제자는 기술을 앞세워 정교함과 아름다움을 살려 스승보다 먼저 만들게 되었다.

스승이 제자의 뛰어난 기술을 시기하고 질투하니, 당시 사람들은 그 스승을 미워하고 제자의 뛰어난 기술을 칭송하였다. 이후 이들 사제는 밀양영남루(嶺南樓) 공사를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낙동강에서 [[북구(부산|북구)] 화명동의 대천천을 따라 올라가면 산성 마을이 나오는데, 금정산성 서문은 산성 마을 입구의 북쪽 구릉지 해발 230m에 위치한다.

1703년(숙종 29)에 금정산성과 함께 축조되었다.

1806년(순조 6) 동래 부사 오한원(吳翰源)이 동래읍성의 배후 성지로서 금정산성의 경영을 요청하여, 1807년 가을부터 1808년 초봄까지 금정산성 남문을 쌓아 완성하였다.

1824년(순조 24)에 금정산성 서문의 문루를 만들었는데, 성문 중에서 유일하게 계곡에 세워졌다. 그 이전에는 육축(陸築)(성문을 축조하기 위하여 무사석 등 큰 돌로 축조한 성벽)과 성문만 축조되고, 성문에는 문루가 없었다. 성문 위에 지은 초루(譙樓)[36]와 ‘ㄷ’ 자 모양으로 조성한 성곽은 그 모습이 견고하고 아름다웠으며, 금정산성 서문을 통해 낙동강구포 김해 방면으로 왕래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방치되어 서문이 허물어져 육축 일부만 남아 있었는데, 1973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 정비하였다.

규모는 육축 부분이 72.34㎡ 정도이고, 문루가 36.04㎡이다.

성문의 형식은 앞면과 뒷면 모두 홍예식([虹霓式)[37]으로 되어 있다.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정면의 어간을 좌우 협간보다 두 배 정도 넓게 잡았다.

구릉지에 자리 잡고 있어, 적군의 침입을 효율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좌우에 길이 5m, 높이 5m, 폭 4m 규모의 적대(敵臺)를 설치하였다. 수문은 대천천[38]에 교량식의 홍예형으로서 높이 3m, 폭 2.5m인 3개의 수구(水口)를 마련하였는데, 그 모습은 아치 형태를 이루고 있다. 현재는 예전과 다름없이 웅장한 옛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4.1.3. 금정산성 남문(金井山城南門)[편집]

 
 
 
 
남문3
금정산성 남문
부산광역시 금정구 금성동 금정산성 남쪽에 있는 조선 후기의 성문으로 금정산성의 남쪽 능선 해발 510m의 높은 곳에서 완만하게 낮아진 자리에 위치한다.

금정산성 남문은 1703년(숙종 29)에 부산 금정산성과 함께 축조되었다.

1806년(순조 6) 동래 부사 오한원(吳翰源)이 동래읍성(東萊邑城)의 배후 성지로서 금정산성의 경영을 요청하여, 1807년(순조 7) 가을부터 1808년(순조 8) 초봄까지 쌓아 완성하였다. 일제강점기에 남문이 허물어져 육축(陸築)[39] 일부만 남아 있었는데, 1972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2009년에는 남문의 상부 주변에 성가퀴(몸을 숨기기 위해 성 위에 낮게 쌓은 담)가 복원되었다.

규모는 육축 부분이 41.53㎡ 정도이고, 문루가 18.63㎡이다. 성문의 형식은 앞면과 뒷면 모두 평거식(平据式)[40]의 문으로 되어 있다.

나무로 된 성문의 폭은 290㎝, 높이는 280㎝이고, 육축의 폭은 480㎝이다.

아치형 문의 높이는 5m, 너비는 2m, 두께는 4m이다. 두 짝의 나무문에는 철엽(鐵葉)[41]을 달았다. 금정산성 남문은 금정산성 동문(金井山城東門)이나 금정산성 서문(金井山城西門)보다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다.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정면의 어간을 좌우 협간보다 두 배 정도 넓게 잡았다. 겹처마 팔작지붕의 단층 문루로서 양성 바름[42]으로 되어 있다.

현재는 완전히 복원되어 웅장한 옛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남문은 동래 온천장 방면에서 금정산성으로 출입하는 주 통로이며, 성문 바깥쪽으로 굴곡이 져 있어 적대(敵臺)[43]와 유사한 역할을 하고 있다.
 
 
 
 

4.1.4. 금정산성 북문(金井山城北門)[편집]

 
 
 
 
북문3
금정산성 북문
부산광역시 금정구 금성동 금정산성 북쪽에 있는 조선 후기의 성문으로 금정산성의 북쪽 해발 620m의 높은 곳에 위치한다. 범어사(梵魚寺)에서 범어천을 따라 돌계단으로 서쪽으로 2㎞쯤 올라가면 잘록한 분지에 자리하고 있다.

금정산성 북문은 1703년(숙종 29)에 금정산성을 축조하면서 함께 설치되었다.

1824년(순조 24)에는 금정산성 북문에 문루를 만들고 수비군을 배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어, 그 이전에는 육축(陸築)(성문을 축조하기 위하여 무사석 등 큰 돌로 축조한 성벽)과 성문만 축조되고 성문에는 문루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북문이 허물어져 육축 일부만 남아 있었는데, 1986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 정비하였다. 이후에도 부분적인 보수와 해체 보수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규모는 육축 부분이 6.64㎡ 정도이고, 문루가 11.4㎡이다. 성문의 형식은 앞면과 뒷면 모두 평거식(平据式)으로 되어 있다. 성문의 폭은 250㎝이고, 측면이 350㎝이다.

문루는 정면 1칸, 측면 1칸이며, 홑처마 우진각 지붕의 단층 문루로서 양성 바름(지붕마루의 수직면에 회사 반죽 또는 회반죽을 바른 것)으로 되어 있다. 성문 위에 성가퀴(몸을 숨기기 위해 성 위에 낮게 쌓은 담)는 설치되어 있으나 총안(銃眼)[44]은 설치되어 있지 않다.

현재는 완전히 복원되어 소박한 옛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팔송범어사 방면에서 이 북문을 통해 금정산성으로 출입하며, 경상남도 양산시 물금읍으로 가는 성문으로서 가장 투박하고 거칠며 다른 성문보다 작다.
 
 
 
 

4.1.5. 금정산성 중문(金井山城中門)[편집]

 
 
 
 
중문3
금정산성 중문
부산광역시 금정구 금성동 금정산성(釜山金井山城) 중앙에 있는 조선 후기의 성문.

『금정산성진지도(金井山城鎭之圖)』에 의하면 망대가 본성에 10개, 중성(中城)에 2개 그려져 있다. 이들 망대는 방위별로 성벽의 모퉁이나 성벽 중간에 있는 산봉우리 가운데, 조망권이 넓고 좋은 암반이 솟아오른 지역과 일치하는 장소에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금정산성 중문(金井山城中門)은 중성 벽의 구간 중 지형 상으로 낮은 서쪽 ‘약물 골짜기(현 정수암 부근)’에 위치한다.

1707년(숙종 33) 동래 부사 한배하(韓配夏)가 성이 너무 넓다 하여 남북 두 구역으로 구분하는 중성을 쌓을 때 축조하였다.

이후 1824년(순조 24)에 동래 부사 오한원(吳翰源)이 수리 축조하였다. 중문은 내성에서 외성으로 연결되는 석문(石門)이며, 금정구 금성동의 사시골로 가는 주요 통로문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방치되어 중문이 허물어져 육축(陸築)(성문을 축조하기 위하여 무사석 등 큰 돌로 축조한 성벽) 일부만 남아 있었는데, 1972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네 모퉁이에는 60x210㎝ 크기의 우주석(隅柱石)[45]이 배치되어 있으며, 그 위로 장대석 4~5매를 걸친 평거식(平据式)의 암문(暗門)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육축의 폭은 300㎝ 정도이고, 문의 폭은 약 150㎝, 높이는 210㎝ 규모로 일반 아문(衙門)의 규모보다 약간 작다.

문지 내에는 윗면과 아랫면 좌우로 직경 10㎝ 내외의 주공 4개가 있다. 외벽에서 30㎝ 안쪽, 지상 90㎝ 지점에 14~15㎝x13~15㎝ 크기의 사각형 빗장 홈이 있는데, 구조상 북쪽 외벽 쪽으로 문이 닫히도록 턱이 있다.

지금은 완전히 복원되어 옛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4.1.6. 암문(暗門)[편집]

 
 
 
 
암문의 유적은 확인되었으며, 일부 복원되어 있다. 암문은 '비밀의 문'이라는 뜻으로, 평소에는 사용하지 않고 적에게 들키지 않도록 성벽의 외진 곳이나 깊숙한 곳에 작게 만든다.

전시에는 군수물자를 나르거나 몰래 드나드는 통로로 사용되었다.

금정산성 역시 동·서·남·북 4대문과 수구문 외에 암문 등의 시설이 배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복원 사업 목록에도 암문 복원이 포함되어 추진되어 왔다.

실제로 금정산성 암문의 흔적은 여러 곳에서 확인되었으며[46], 현재는 복원되거나 발굴된 암문지를 따라 산성을 탐방할 수 있다.
 
 
 
 

4.2. 망루 및 망대 (望樓 및 望臺)[편집]

 
 
 
 
현재 4개의 망루(제1망루~제4망루)가 복원되어 있다.

하지만 1872년에 제작된 「금정산성진지도」에는 망루 대신 망대(望臺) 12곳(본성에 10곳, 중성에 2곳)이 그려져 있어, 복원된 시설물의 성격에 대한 학술적 논의가 진행되기도 했다.
 
 
 
 

4.2.1. 금정산성 제1 망루[편집]

 
 
 
 
1망루3
금정산성 제1망루
부산광역시 금정구 금성동 금정산성에 있는 조선 후기의 망루.

금정산성 제1 망루(金井山城第一望樓)는 상계봉[47] 북쪽에서 약 300m 떨어진 해발 650m 지점에 세워져 있다.

남쪽으로 수영구는 물론 민락동광안대교, 영도까지, 서쪽으로는 낙동강 하구와 구포 김해평야까지 조망되는 뛰어난 명소이다. 『금정산성 진지도(金井山城鎭之圖)』에는 망대(望臺)가 본성에 10개, 중성(中城)에 2개 그려져 있다. 이들 망대는 방위별로 성벽의 모퉁이나 성벽 중간에 있는 산봉우리 가운데, 조망권이 넓고 좋은 암반이 솟아오른 지역과 일치하는 장소에 형성되었다.

1707년(숙종 33)에 동래 부사 한배하(韓配夏)가 성이 너무 넓다 하여 남북 두 구역으로 구분하는 중성을 쌓을 때 축조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방치되어 훼손되었다가, 1990년에 담장 유구 안에 정면 2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망루를 복원하였다. 1995년에는 누각을 고정시켰다.

그러나 1995년 태풍 제니스호로 인하여 무너져 1996년에 해체되었으며, 성가퀴(성벽 위에 설치한 높이가 낮은 담, 女牆) 및 초석만 남아 있다.

망루를 두르고 있는 석축 담 둘레는 남북이 1,580㎝이며, 동서가 1,225㎝ 정도이다. 담은 성벽에서부터 내벽 쪽으로 떨어져서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있다. 북쪽으로 난 석문(石門) 터의 잔존 규모는 높이가 210~220㎝, 문의 폭이 110~120㎝로 상부를 2개의 장대형 할석(割石)[48]으로 덮었다. 문의 좌·우측에는 돌기둥이 배치되어 있으며, 담장의 상부에는 총안(銃眼)[49]이 있는 성가퀴가 설치되어 있다. 그러나 복원과 관련하여 전후의 상황을 알 수 있는 자료는 없는 실정이다.

태풍의 피해로 현재는 성가퀴 및 초석만이 남아 있는 상태이다. 부산의 관방 유산인 금정산성 전체를 이해할 수 있도록 금정산성 제1 망루가 하루빨리 복원될 필요가 있다.
 
 
 
 

4.2.2. 금정산성 제2 망루[편집]

 
 
 
 
2망루3
금정산성 제2망루
부산광역시 금정구 금성동 금정산성에 있는 조선 후기의 제2 망루.

『금정산성 진지도(金井山城鎭之圖)』에 의하면 망대가 본성에 10개, 중성(中城)에 2개 그려져 있다. 이들 망대는 방위별로 성벽의 모퉁이나 성벽 중간에 있는 산봉우리 가운데, 조망권이 넓고 좋은 암반이 솟아오른 지역과 일치하는 장소에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금정산성 제2 망루(金井山城第二望樓)는 금정산성 동문(金井山城東門)에서 약 2.5㎞, 금정산성 남문(金井山城南門)에서 약 400m 되는 지점에 동쪽 끝으로 돌출한 해발 545m의 암반 위에 위치한다.

동쪽으로는 장산수영 일대 그리고 동해가 보이며, 서쪽으로는 상계봉이, 남쪽으로는 백양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북쪽으로는 금정산 고당봉[50]과 금정산성(金井山城)이 파노라마처럼 전개되어 있다.
1707년(숙종 33) 동래 부사 한배하(韓配夏)가 성이 너무 넓다 하여 남북 두 구역으로 구분하는 중성을 쌓을 때 축조하였다.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방치되어 자연스럽게 훼손되었다가, 1979년 당시 조사된 제4 건물 터를 토대로 금정산성 제2 망루가 복원되었다. 1991년 망루의 기둥을 교체하고 방충 조치를 취하였으며, 1998년에는 여장(女牆)을 보수하였다.

면적은 11.99㎡이다. 정면 2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로, 정면은 기둥 사이의 거리가 215~240㎝이고, 측면은 기둥 사이의 거리가 255㎝이다.

현재는 발굴 조사를 토대로 완전히 복원되어 조선 시대 산성망루 모습을 잘 보여 주고 있다.
 
 
 
 

4.2.3. 금정산성 제3 망루[편집]

 
 
 
 
3망루3
금정산성 제3망루
부산광역시 금정구 금성동 금정산성에 있는 조선 후기의 제3 망루.

금정산성 제3 망루(金井山城第三望樓)는 금정산성 동문(金井山城東門)에서 북쪽으로 약 1㎞ 지점, 해발 550m의 암반이 솟아오른 절벽 위에 절묘하게 얹혀 있는 것처럼 자리하고 있다. 출입구 서쪽 10여 m 앞의 바위 면에 음각으로 ‘번위돈(蕃威墩)’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돈대(墩臺)[51]가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1707년(숙종 33) 동래 부사 한배하(韓配夏)가 성이 너무 넓다 하여 남북 두 구역으로 구분하는 중성을 쌓을 때 축조하였다.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방치되어 자연스럽게 훼손되었다가, 1979년 제3 건물 터를 발굴 조사하여 이를 토대로 금정산성 제3 망루가 복원되었다.

면적 9.4㎡인 정면 2칸, 측면 1칸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기둥 사이의 거리가 195~205㎝인 정면 2칸과 기둥 사이의 거리가 215~257㎝인 측면 1칸의 초석이 있다. 가늘고 가파른 바위 면에 미끄럼을 방지하기 위해 홈을 파서 계단을 만들어 놓았다.

현재는 완전히 복원되어 옛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금정산성 제3 망루는 금정산의 유명한 나비 바위와 부채 바위 사이의 천구만별(千龜萬鼈)[52]과 같은 아름다운 자연 경관으로 찬탄을 자아내고 있다.
 
 
 
 

4.2.4. 금정산성 제4 망루[편집]

 
 
 
 
4망루3
금정산성 제4망루
부산광역시 금정구 금성동 금정산성에 있는 조선 후기의 제4 망루.

금정산성 제4 망루(金井山城第四望樓)는 중성(中城)이 시작되는 곳으로, 금정산성 북문(金井山城北門) 남쪽 주 능선 해발 610m 고지에 자리 잡고 있다. 제4 망루가 있는 곳은 용호봉 (의상봉) 남쪽으로 외성(外城)의 동쪽 성곽과 중성의 동쪽 끝이 만나는 삼각점이기도 하다. 동쪽으로는 회동수원지가 보이고, 금정구 노포동두구동이 한눈에 들어온다.

서쪽으로는 낙동강구포가 보이고, 남쪽으로는 금정산성 동문(金井山城東門)에 이르는 성벽이 계속되고 있다. 북쪽은 고당봉으로 이어지고 있다.

1707년(숙종 33) 동래 부사 한배하(韓配夏)가 성이 너무 넓다 하여 남북 두 구역으로 구분하는 중성을 쌓을 때 축조하였다. 일제강점기에 방치되어 자연적으로 훼손되었다가, 1988년과 1995년에 보수하고, 2001년에는 해체하여 보수하였다.

이후 2004년에는 금정산성 제4 망루에서 금정산성 북문 방향의 성곽도 보수하였다.

면적은 10.52㎡이다. 기둥 사이의 거리가 218㎝인 정면 2칸과 기둥 사이의 거리가 236㎝인 측면 1칸의 초석에 홑처마 맞배지붕 양식으로 되어 있다.

현재는 완전히 복원되어 조선 시대 산성망루를 잘 보여 주고 있다.
 
 
 
 

4.3. 기타 시설물들[편집]

 
 
 
 
장대3
금정산성 장대
  • 장대 (將臺)는 지휘관이 올라서서 군사를 지휘하던 시설인데, 「금정산성진지도」에는 국청사 뒤쪽에 1개소의 장대가 그려져 있다.
    • 2008년 발굴조사에서 초석 등이 온전히 발견되었고, 2009년 5월에 고증 절차를 거쳐 복원되었다.
  • 수문 (水門)은 성벽을 따라 흐르는 계곡물이 성 밖으로 빠져나가도록 만든 시설이다. 이는 성벽의 붕괴를 막고, 평상시에는 물의 흐름을 유지하며, 전시에는 적의 침입로가 되지 않도록 방어하는 기능을 한다.
    • 금정산성에는 성곽의 주요 계곡을 따라 3개소의 수문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 대표적으로 서문과 남문 사이의 골짜기에 있었던 수문 자리가 확인된다.
    • 일반적인 수문은 아치형이나 네모난 형태의 터널식으로 만들어지며, 물이 빠져나가는 구멍 위아래를 튼튼한 돌로 쌓아 올린다.
  • 중성 (中城)은 본성(外城) 안에 다시 쌓은 작은 성벽을 말하는데, 금정산성의 중성은 본성의 방어 취약점을 보완하고, 전란 시에는 최후의 방어 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축조되었다.
    • 북문(北門) 안쪽, 원효봉[53]과 의상봉[54] 일대의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축조되었다.
    • 임진왜란 이후 산성을 수축할 때, 동래부의 중심지인 동래읍성(동래부)과 금정산성의 연결 및 방어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추가로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 중성 자체에 다시 작은 석문인 중성 석문을 두어 출입을 통제했다. 이는 본성이 무너지더라도 중성에서 장기간 항전할 수 있는 방어 시스템을 구축한 것이다.

이 외에도 발굴 조사를 통해 망루로 복원된 일부 건물터가 화포를 쏘던 돈대(墩臺)나 무기고 등 창고였을 가능성이 제기되는 등, 금정산성 내의 부속 시설물에 대한 연구와 정비는 계속되고 있다.
 
 
 
 

5. 금정산성부설비(金井山城復設碑)[편집]

 
 
 
 
부산광역시 금정구 장전동에 있는 조선 후기 금정산성을 보수한 내역을 기록한 비.

금정산성부설비(金井山城復設碑)는 1808년(순조 8) “동래부가 점령되더라도 영남을 지키는 튼튼한 성이 필요하다”는 당시 동래부사 오한원(吳翰源)[55]의 건의에 따라 금정산성을 대대적으로 보수하여 산성의 면모를 새롭게 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

비의 크기는 높이 185㎝, 너비 72㎝, 두께 35㎝이다. 재질은 화강석으로 귀부(鬼阜)[56]와 이수(螭首)[57] 없이 바위 위에 세워져 있다.
  • 금석문 (金石文)[58]
    비석의 앞면에 새겨져 있는 글은 모두 16행으로 금정산성을 처음 쌓은 때부터 대대적으로 보수할 때까지의 경위와 부설(復設) 공사의 내용 등이 기록되어 있으며, 뒷면에는 비바람에 마멸되어 판독하기는 어려우나 동역(董役)[59], 공사 감독 등의 명단이 새겨져 있다. 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동래부의 관할 지역은 동남쪽 바닷가에 걸쳐 있어 섬 오랑캐들이 들어오는 길이 되니, 우리나라의 요충지이다. 임진년의 변란성이 지켜지지 못하고 천곡(泉谷) 송상현 공이 죽으니, 드디어 왜적들이 대대적으로 몰아 들이닥쳐 나라를 어지럽힌 것이 예닐곱 해가 되었다. 만약 신종 황제(神宗皇帝)[60]께서 다시 일으켜 주시는 은혜가 아니었다면 우리나라 선비들은 오랑캐 복장을 하였을 것이다.

강화를 맺고 난 뒤 관수왜(館守倭)[61]는 관사에 거처하게 하고, 사개(使价)[62]는 예절로 접대하니, 이는 실로 성상(聖上)의 덕화가 먼 곳의 사람들을 회유하는 정책이지만, 원한을 품은 것도 또한 수백 년이 되었다. 이곳에 수령을 두는 데는 조정에서 정하되 전주(銓注)를 거치지 않고, 군사 일을 따지는 데에는 진영을 설치하여 두 고을을 전결하게 하였다. 당초의 시설이 위엄 있고 엄중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다만 성곽과 못이 견고하지 못하여 지난날의 화를 면하지 못한 것이 통탄할 일이다.

동래부 북쪽의 금정산은 바다와 육지의 목에 들어 있고, 사방이 엄중하게 막혀 있으니, 참으로 하늘이 만들어 준 험준한 곳이요, 반드시 지켜야 할 곳이다. 지난 계미년에 부사 이무(李埜)가 그 위에 처음으로 산성을 창건하였는데, 둘레가 9,200여 보이다.

시설과 규모가 우뚝하게 영남 바닷가의 방패가 되어, 변방의 백성들이 이를 믿고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 뒤 갑오년에 성이 너무 크다고 말하는 자가 있어 결국 산성을 폐지하고 만 것이 지금까지 95년이 되었다. 초루는 이미 폐허가 되었고, 성가퀴는 단지 형적만 남아 사람들이 애석히 여기지 않는 이가 없다.

지금 주상 6년 병인년[1806]에 내가 이 고을의 태수가 되어, 일찍이 한번 이 산에 올라 옛터를 둘러보게 되었는데, 오랜 시간 방황하며 차마 떠날 수 없었다. 아! 오늘날 동래부의 읍성은 7리[약 2.74㎞]에 불과한 작은 성곽인데, 믿을 만한 험준한 곳이 없으니, 만약 국경에 경계해야 할 일이라도 발생한다면, 어찌 소름 끼치는 일이 아니겠는가?

옛적에 자양(子襄)은 영(郢) 땅에 성을 쌓을 것을 계획하였고, 무신(巫臣)은 전차(戰車) 타는 것을 가르쳤으니, 이로 보면 성곽을 수리하지 않는 것은 그 땅을 적에게 주는 것이고, 병졸을 훈련하지 않는 것은 그 백성을 적에게 내어 주는 것임을 알 것이다. 대개 병력이란 평소에 양성하지 않아서는 안 되며, 성곽은 험준한 곳에 웅거하지 않으면 안 되고, 군대에는 하루라도 먹을 것이 없어서도 안 되는 것이다.

이에 나는 옛사람들이 원대한 근심을 하였던 것을 생각하고, 비가 내릴 때의 대비가 없음을 개탄하여 상소문을 지어 몇 가지 조목을 조정에 아뢰었다.

첫째는 변방의 금령을 엄중히 하는 것이요, 둘째는 군포를 덜어 주는 것이고, 셋째는 위병(衛兵)을 선발하는 것이며, 산성을 다시 쌓는 것이 그 네 번째이다.

소를 올리자 모두 좋다는 허락을 받았는데, 다만 산성을 쌓는 조항에 대해서는 특별히 감사에게 명령하여 충분히 의논하여 편의대로 보고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세 고을의 곡식 1만 섬을 옮겨 산성의 양식으로 삼고, 해마다 2,000냥씩의 돈을 20년 기한으로 한정해서 지급하여 세 군문(軍門)의 건물과 군기(軍器) 및 성을 지키는 물자를 조달하는 데 쓰도록 한 것은 도(道)에서 계획하여 품의한 것이고, 동문을 새로 짓고 성곽을 수리하는 것을 본 읍에서 전담하는 것은 내가 소청한 것이었다. 위병 500명을 먼저 선발하여 한 영(營)을 만들고, 활과 총 쏘는 것을 권장하며 임금을 섬길 것을 가르치니, 일 년이 채 못 되어 그 재능들이 쓸 만하였다.

정묘년 늦가을에 토목 공사를 잇달아 일으켜 한 달 만에 동문이 완성되었고, 다음 해 초봄에는 기둥과 들보를 100리[약 39.27㎞] 밖에서 옮겨 오고, 벼랑 끝에서 험준한 바위를 깎아 내어지고 끌어당기기를 온 인부가 힘을 함께한 지 149일 만에 서남북의 초루(譙樓)[63]가 완성되었다. 사방으로 통하는 길목에 창고를 시설하여 물자 수송을 고르게 하였고, 여러 계곡의 물줄기를 이끌어 강과 바다로 통하게 하니, 성벽이 평탄한 곳에서 시작되어 산 정상에서 그치기를 가로로 32리[약 12.56㎞]에 다다르는 것으로 공사를 끝내었다.

동래 사람으로 부역한 사람들이 이곳을 의지할 곳으로 여겨 즐거이 달려오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것이 이루어진 데에는 마치 신의 도움이 있은 듯하니, 이 역사의 성공은 여러 사람의 마음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에 일을 감독한 막료들과 여러 교리들이 모두 말하기를, 사실에 대한 기록이 없을 수 없다고 하여 내 사양하지 못하고 그 전말을 이와 같이 간략히 쓴다.

숭정 기원 후 네 번째 무진년[1808], 통정대부 동래부사 금성 오한원 짓고 쓰다.

부설비3
금정산성부설비[ 金井山城復設碑 ]
萊之治 處東南海上 爲島夷路 東國之要衝 壬辰之變 城不守 泉谷宋公死之 遂長驅入域 搶攘殆六七年 若非神宗皇帝再造之恩 東士幾左衽矣 及其講和 守倭則以館而處 使价則以禮而享 此實聖化之綏遠 而含怨亦數百年 置守焉 廟剡而不用銓注 詰戎焉 設鎭而專制二邑 當初設施 非不威重 惟其城池之不固 未免有曩時之禍 可勝痛哉 府北之金井一山 據水陸咽喉 四面嚴阻 眞天設之險 必守之地也 在昔癸未 府使李公埜 始創山城於其上 周爲九千二百餘步 設施規模 屹然爲嶺海捍蔽 邊民恃而不恐 逮甲午 有以闊大爲言者 城遂廢 今爲九十五年 譙廨已虛 而圮堞只有形址 人莫不爲之嗟惜 上之六年丙寅 余守是邦 蓋嘗一登 周覽舊墟 彷徨之久 不能去 噫 今之府城 不過七里短堞 無險可恃 苟彊場有警 寧不凜然 昔子襄謀城郭 巫臣訓乘車 是知城郭不修以其地與敵也·士卒不鍊以其民與敵也 夫兵不可以不素養 城不可以不據險 軍旅亦不可一日去食 余於是念前人之遠慮 慨陰雨之無備 遂以一疏條陳于朝 一嚴邊禁也 二蠲軍布也 三選衛兵也 山城復築 卽其四也旣徹 俱蒙允可 而惟於築城條 特下道帥臣議久之以便宜聞 三邑穀萬石之移作山餉 歲劃二千緡之錢 限以二十年 助辦於三門廨廠及軍器守城之資者 道啓之所區劃也 東門之新建 城堞之修築 本邑專當者 賤臣之疏請也 衛兵五百 先已簡取 創爲一營 勸以射放 敎以親上 未朞而材可用 及至丁卯季秋 土木繼興 一月東門成 翌年孟春 運柱樑於百里 斲巉巖於崖巓 擔曳如雲 萬夫齊力 計百四十有九日 西南北譙樓成 設倉廨於四達之逵 以均轉輸 導衆谷之奔流 以通江海 城起于平夷 止干山頂 橫亘三十二里 而功告訖焉 萊人之赴之者 莫不視爲依歸之所·樂趨勇往 其就也 若有神助 可見是役之成 成於衆心也 董事之 幕佐諸吏校 咸曰 記實不可闕也 余不能辭 遂略書其顚末如右云爾 崇禎紀元後 四戊辰 通政大夫 東萊府使 錦城吳翰源 撰並書.”

1972년 6월 26일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15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부산광역시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

금정산성부설비는 조선 후기 성곽 축성 및 사회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을 뿐 아니라, 큰 암반 위에 세워져 있어 처음 세워진 후 한 차례도 옮겨지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동래읍성에서 금정산성으로 가는 출입로의 위치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금정산성 연구의 가장 확실한 자료가 되는 문화재이다.
 
 
 
 

6. 사적 제215호[편집]

 
 
 
 
조선시대에 돌로 쌓은 석성으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후인 숙종 29년(1703)에 동래는 바닷길을 막는 중요한 지역으로 적이 침입하는 첫길목에 해당되지만 방어 시설이 소홀하다 하여 쌓은 곳이다. 전체길이는 약 18,845m이다.

『증보문헌비고』에 의하면 박태항에게 책임지어 쌓게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에 앞서 현종 8년(1667) 통제사 이지형이 왕에게 금정산성을 고칠 것을 건의하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오래 전에 쌓은 것으로 보인다.

낙동강 하구와 동래지방이 내려다 보이는 중요한 곳에 있어 바다로 침입하는 적에 대비한 성임을 알 수 있으며, 성의 크기나 성벽을 쌓은 양식으로 볼 때 처음 성을 쌓은 시기는 보다 앞선 시기까지도 올려 볼 수 있다.

숙종 33년(1707)에는 성이 너무 넓다 해서 성의 중간에 남북을 구분하는 성을 쌓았고 영조 50년(1774)에는 성이 너무 커서 지키기 어렵다 하여 일단 폐지하였다. 순조 6년(1806)에 성을 다시 고쳤으며, 성벽은 화강암을 자연석 그대로 이용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에 의해 파괴된 것을 1972년부터 1974년까지 동문·서문·남문을 복원하였으며, 1989년에 북문을 복원하였다.

현재 4㎞의 성벽이 남아 있으나, 조선 후기에 도성과 주변의 대규모 방어시설을 충실히 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산성으로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7. 여담[편집]

 
 
 
 
  • 금정산성 주변에서 전통적으로 빚어온 쌀 막걸리를 산성막걸리라고 한다.
  • 북문이 범어사와 가장 가까우므로 고당봉 등산객들은 대부분 북문을 통해서 산성 성곽에 오른다.
  • 성곽 한바퀴를 돌면 4개의 성문뿐만 아니라 금정산의 11개 봉우리[65]와 곳곳에 위치한 암자들을 돌아볼 수 있다.
  • 동래부사 한배하(韓配夏, 1705년 ~ 1774년)는 조선 후기 영조(英祖) 시대의 문신이자 관료로, 특히 1748년부터 1752년까지 동래부사(東萊府使)로 재임하면서 금정산성 복원에 큰 공헌을 한 인물이다. 또한 복원 공사와 함께 성곽의 구조, 군사 배치, 시설 위치 등을 상세히 기록한 금정산성 진지도(金井山城鎭之圖)를 제작하게 했다.
  • 부산대학교가 인근에 있다 보니 부산대 학생들, 교수들, 직원들이 외식하러 가기도 한다.
  • 성문 축성일인 5월 25일을 전후로 매년 금정산성축제를 금정문화재단에서 개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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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 후기의 중요한 관찬(官撰) 백과사전으로, 조선 시대의 각종 제도와 문물을 집대성한 자료집[2] 조선 시대의 관청이나 사찰, 또는 목장 같은 공공 시설에서 관원이나 담당자가 업무를 보고 집무를 수행하던 공간[3] 고을의 수령(현감, 군수 등)이 거처하던 사적인 주거 공간[4] 군대의 2인자이자 실무 총책임자인 중군(中軍)이 머물며 집무를 보던 곳[5] 군사들을 교육하고 훈련(교련)하는 업무를 담당하던 관청[6] 승군(僧軍, 승려 군대)을 지휘하던 승장(僧將)들이 머물며 업무를 보던 집무소[7] 군량미나 군수물자를 비축, 보관하는 곳[8] 적이 눈치채지 못하게 성벽의 구석진 곳에 작게 만든 비밀 통로[9] 조선 시대 중앙의 무기 제조 및 관리를 총괄했던 핵심 관청[10] 대규모 측량, 지도 제작, 또는 성곽 축조 등에서 경계를 확정하고 설계도를 관리하는 업무를 맡았던 임시 조직의 우두머리 또는 실무자[11] 지방 군영이나 관아에 소속되어 행정 보조 및 실무(포졸, 잡역)를 담당했던 하급 인력[12] 문관(文官)이 맡는 직책을 통틀어 이르는 말[13] 부산광역시 금정구 금성동 에 있었던 조선 후기의 절터.[14] 부산광역시 금정구 금성동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소속 사찰.[15] 조선시대 금정산성 승병(僧兵)을 지휘하고 관할하기 위해 사용된 철제 도장(직인)으로, 부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44호이며 승병장의 권위를 상징하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임진왜란 당시 호국 불교의 중심지였던 국청사에서 승병들이 사용했던 유물로, 승군 사령부의 역할을 했던 역사적 배경을 보여준다.[16] 부산광역시 금정구 청룡동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4교구 본사 범어사 소속 암자.[17] 성벽의 안쪽에 파놓은 도랑이나 연못과 같은 시설[18] 성벽에 바싹 붙어 성벽을 기어오르려는 적병을 위에서, 또는 좌우 측면에서 공격하는 데 최적화된 시설[19] 관원들이 상관에게 보고하고 인사를 올리는 등의 중요한 의례(좌기)를 행하던 장소[20] 주요 건물을 중심으로 좌우에 길게 지어진 부속 건물[21] 군사(軍)의 무기(器)를 보관하는 창고(庫)[22] 화약 및 폭발물, 그리고 화약 무기의 제조에 필요한 원료를 안전하게 보관하는 시설[23] 지방 수령이 공무를 마치고 휴식을 취하거나 가족과 거주하던 사적이고 내부적인 공간[24] 인재를 추천하고 선발했던 곳[25] 조선 시대 각 군영(軍營)의 대장 또는 사(使)를 보좌하며 실무를 총괄하던 무관(武官)이 거처하거나 집무를 보던 장소[26] 군사를 가르치고 훈련시키는 곳[27] 전시에 승군을 조직하고 훈련시키며 지휘하던 장수의 임시 거처나 본부[28] 산성(山城) 안에 설치된 창고(倉)[29] 축성(築城)'은 말 그대로 성(城)을 쌓는(築) 행위를 의미하며,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국방의 기본이 되는 가장 중요한 토목 공사[30] 동래부 지역에 거주하던 모든 주민과 백성[31] 성문을 축조하기 위하여 무사석 등 큰 돌로 축조한 성벽[32] 문의 윗부분을 무지개 모양으로 반쯤 둥글게 만든 방식[33] 주요 건물(대청, 정전 등)의 중앙 칸[34] 중요한 건물이나 공간의 양옆에 있는 칸[35] 성문을 보호하고 방어 능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설치하는 중요한 부속 시설[36] 망을 보거나 시간을 알리는 등의 역할을 하는 높은 누각[37] 문의 윗부분을 무지개 모양으로 반쯤 둥글게 만든 방식[38] 부산광역시 북구 화명동을 흐르는 하천.[39] 성문을 축조하기 위하여 무사석 등 큰 돌로 축조한 성벽[40] 성벽이나 석축을 쌓을 때, 돌을 가로로 길게 놓아 아래쪽의 돌과 맞물려 수평으로 안정되게 쌓는 방식[41] 갑옷(甲胄) 제작에 사용되었던 재료 및 그 재료로 만든 갑옷 자체[42] 지붕마루의 수직면에 회사 반죽 또는 회반죽을 바른 것[43] 성문 양쪽에 설치하여 적을 방어하고 공격하는 시설[44] 성가퀴 또는 포사(砲舍) 안에서 적을 내다보고 총을 쏠 수 있게 한 구멍[45] 석조(石造) 구조물이나 성곽 건축에서 사용되는 전문 용어로, 건물의 모서리를 지탱하는 데 쓰이는 돌[46] 북한산성도 암문이 8곳 있으며, 남한산성에는 16곳이나 있다.[47] 북구 화명동에 소재한 봉이다(고도 : 640m). 고시 지명은 상학산이나, 지역에서는 상계봉으로 부른다. 금정산의 봉우리의 하나이다.[48] 돌을 쪼개거나 나누는 행위 또는 쪼개어 만든 돌[49] 성곽이나 성벽, 또는 방어용 구조물에서 총포를 발사하기 위해 만든 작은 구멍[50] 금정산의 주봉으로 해발 801.5m이다.[51] 성안의 높직한 평지 위에 높게 쌓아 올린 포대(砲臺)[52] 1,000개의 거북과 1만 개의 자라 형상을 한 바위가 널려 있다는 의미[53] 금정산의 봉우리 중 하나로 봉우리에 해골바가지 형상을 한 바위가 있어 원효봉이라 하였다고도 하고, 원효암이 있어 붙은 이름이라고도 한다.[54] 원효봉 옆의 638m암봉으로 동사면은 전문장비를 가지고 올라야 한다.[55] 동래부사(東來府使)로 재직하면서 금정산성(金井山城)을 중수(重修)하고 성곽과 성문을 정비한 역사적 인물[56] 높게 쌓은 방어용 구조물, 또는 위협적 언덕을 상징[57] 지붕 기와 끝에 있는 용머리 장식. 불법을 막고 재앙을 물리친다는 의미를 담음.[58] 금속이나 돌에 새겨진 문자[59] 관청이나 공공기관에서 맡는 책임·직무[60] 명나라 신종(神宗, 1563~1620, 재위 1572~1620)[61] 조선 시대에 왜관을 관리하던 왜인[62] 지방 관청에서 중앙으로 보내는 사신 경비나, 관리의 출장비[63] 멀리 내다보기 위해 높게 지은 다락집[64] 흑염소 요리로 유명하다.[65] 고당봉, 대륙봉, 동제봉, 미륵봉, 사기봉, 원효봉, 의상봉, 망미봉, 상계봉, 장골봉, 파리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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