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곡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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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곡서원 전경 |
정암 조광조 선생은 훈구파로 인해 혼란해지자 견제가 필요했던 중종이 등용한 사림파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급진적인 사회개혁을 추진하다 주초위왕으로 유명한 기묘사화로 사약을 받고 죽게 됐다.
그뒤 효종 원년(1650)에 조광조 선생의 학덕과 충절을 기리기 위해 심곡이란 현판과 토지, 노비 등을 하사하며 서원을 설립하게 됐다. 이로 인해 서액서원이 됐다.
1935년에 작성된 심곡서원중건기와 심곡서원도 등의 자료를 참고하면 심곡서원에는 사당과 동, 서재가 최초에 건축됐고, 후에 강당이 세워졌으며, 현재의 연지 인근에 임심루, 산앙재, 문향각 등이 건축됐다고 기록되어 있다. 최초의 동, 서재는 현재 강당 뒤편에 있는 치사재와 정서각의 위치로 추정되며, 이후 현재 복원되어 있는 곳에 동, 서재가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동, 서재는 문정중학교의 부석 건물로 활용되다 철거되었다.
심곡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집권시기(1864~ 1873) 동안에 내려진 서폐령[1] 때에도 무사했던 47개의 서원 중 하나이다.
1972년 5월 4일 경기도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2015년 1월 28일 사적 제 530호로 지정됐다.
그뒤 효종 원년(1650)에 조광조 선생의 학덕과 충절을 기리기 위해 심곡이란 현판과 토지, 노비 등을 하사하며 서원을 설립하게 됐다. 이로 인해 서액서원이 됐다.
1935년에 작성된 심곡서원중건기와 심곡서원도 등의 자료를 참고하면 심곡서원에는 사당과 동, 서재가 최초에 건축됐고, 후에 강당이 세워졌으며, 현재의 연지 인근에 임심루, 산앙재, 문향각 등이 건축됐다고 기록되어 있다. 최초의 동, 서재는 현재 강당 뒤편에 있는 치사재와 정서각의 위치로 추정되며, 이후 현재 복원되어 있는 곳에 동, 서재가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동, 서재는 문정중학교의 부석 건물로 활용되다 철거되었다.
심곡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집권시기(1864~ 1873) 동안에 내려진 서폐령[1] 때에도 무사했던 47개의 서원 중 하나이다.
1972년 5월 4일 경기도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2015년 1월 28일 사적 제 530호로 지정됐다.
심곡서원 입구의 홍살문과 외삼문, 강당, 내삼문, 사우[2]가 거의 일적선으로 배치되어 있다. 강당은 서원 내의 행사를 치르고 유림들이 회의와 학문을 토론하던 곳이며, 각 칸마다 널문을 달아 사면을 전부 열 수 있게 했다. 또한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강당 내에는 숙종의 어제어필이 써진 현판과 심곡서원의 규약 등이 걸려 있다.
강당을 기준으로 남동쪽에는 서원의 책과 문서가 보관된 일종의 도서관인 장서각이 있고, 남서쪽에는 제사를 준비하는 재실이자 배향객들의 숙소인 고직사가 있다. 강당의 북쪽에 위치한 사당은 심곡서원의 건물 중 보존상태가 가장 높은 건물로 앞면에 트인 퇴칸[3]이 있으며, 옆면과 뒷면엔 화재를 방비하기 위해 만든 화방벽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 크기이며, 지붕은 맞배지붕이다. 사당 내에는 정암 조광조 선생과 학포 양팽손[4] 선생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사당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은 다듬지 않은 돌로 쌓았으며, 내삼문은 3칸의 솟을대문 형식이다.
심곡서원은 최초엔 사당을 중심으로 제향기능을 강조하며 지어졌고, 이후 앞쪽에 강당을 두고 뒤편에 재사[5]를 두는 전당후재(前堂後齋)의 모습을 보였고, 심곡서원도가 그려진 시기에 압서서 전재후당(前齋後堂)의 공간구성을 보이고 있음을 옛 자료를 통해 추정할 수 있다.
강당을 기준으로 남동쪽에는 서원의 책과 문서가 보관된 일종의 도서관인 장서각이 있고, 남서쪽에는 제사를 준비하는 재실이자 배향객들의 숙소인 고직사가 있다. 강당의 북쪽에 위치한 사당은 심곡서원의 건물 중 보존상태가 가장 높은 건물로 앞면에 트인 퇴칸[3]이 있으며, 옆면과 뒷면엔 화재를 방비하기 위해 만든 화방벽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 크기이며, 지붕은 맞배지붕이다. 사당 내에는 정암 조광조 선생과 학포 양팽손[4] 선생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사당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은 다듬지 않은 돌로 쌓았으며, 내삼문은 3칸의 솟을대문 형식이다.
심곡서원은 최초엔 사당을 중심으로 제향기능을 강조하며 지어졌고, 이후 앞쪽에 강당을 두고 뒤편에 재사[5]를 두는 전당후재(前堂後齋)의 모습을 보였고, 심곡서원도가 그려진 시기에 압서서 전재후당(前齋後堂)의 공간구성을 보이고 있음을 옛 자료를 통해 추정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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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삼문 |
심곡서원에 들어가기 위한 외삼문. 심곡서원의 외삼문이자 출입문이며, 심서원의 첫인상이 되는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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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당 |
강당은 학문 토론과 교육이 이루어지는 강학 공간으로, 우암 송시열이 쓴 「龍仁縣深谷書 院講堂記용인현심곡서원강당기1673년에는 1661년 지어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3칸,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각 칸의 문마다 판자문비를 달아 사방을 모두 열어 개방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강당의 현판은 1785년 정조 10월에 만들었으며, 정조대의 문신 문춘공 김종수의 낙관이 찍혀있다. 강당은 해방 이후인 1957년에 중수되어 문정중학교로 사용되었으며, 현재의 강당은 1974년 복원되어 보존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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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당 우측 | 강당 좌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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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 |
동·서재는 강당을 중심으로 동서 방향으로 대칭을 이루며 위치하며, 서원 학생들의 기숙사로 활용되었다. 서재는 의로움이 쉬는 곳이라는 뜻의 '유의재라고 불리며, 보통 동재에 기거하는 학생보다 어린 연배의 학생들이 기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건물은 해방 이후 문정중학교의 부속 건물로 활용되다 철거된 것으로 파악되는데, 2004년 동·서재의 위치 및 구조를 파악하기 위한 발굴조사 결과 현재 위치에서 'ㄴ'자 형태의 기단석렬 등 17~18세기대 존재한 서재의 흔적이 확인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발굴조사 결과를 토대로 2008년도에 복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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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지 |
연지는 서원 내부에 조성된 정사각형 연못 터로, 중앙에 둥근 섬이 있는 ‘방지원도’ 형태로
2022년 진행된 6차 발굴조사를 통해 연못의 동편과 서편 길이는 약 12.7m로 동일하게 확인되었고, 외곽은 돌로 쌓여 있고
또한, 물을 끌어들이는 3기의 도수로와 물길 밖으로 흐르게 하는 출수구 1기도 발굴되었다.
2022년 진행된 6차 발굴조사를 통해 연못의 동편과 서편 길이는 약 12.7m로 동일하게 확인되었고, 외곽은 돌로 쌓여 있고
또한, 물을 끌어들이는 3기의 도수로와 물길 밖으로 흐르게 하는 출수구 1기도 발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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