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주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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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읍성 洪州邑城 | Hongju City Wall[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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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유산 명칭 | 홍성 홍주읍성(洪城洪州邑城) |
정식 명칭 | 홍주목읍성(洪州牧邑城) |
입지 | 평지성 |
기능 | |
건설 | 미상[후삼국시대?] 1451년 (문종 1년)[개축] |
폐성 | 1895년 (고종 32년) |
분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성 / 성지 |
면적 | 110,991.5㎡ |
지정연도 | |
건축시기 | |
링크 | |
소재지 | |
- 참고자료
현재의 홍주읍성이 축조된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최근 복원·정비 과정에서 후삼국시대에서 고려 초기로 추정되는 유물들과 토성 흔적이 발견되어 이때부터 사용했지 않았나 싶다.
이후,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이 본격화되면서 읍성 축성이 본격화되어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이르기까지 축성을 한 것으로 보여지는데, 현재의 읍성이 처음 개축된 시기는 1451년(문종 1)로 보인다.
한편,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둘레 5백 33보 23척이며, 안에 샘이 하나 있는데, 겨울이나 여름에도 마르지 아니한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후 문종 대에는 성의 둘레가 4,856척(약 1.5km), 높이는 11척(약 3.3m)이며 문은 4개가 있었고, 여장·적대 등의 여러 시설이 설치되었으며 안에는 우물 2개가 있었다고 한다.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가끔씩 보수하기도 했는데, 1824년(순조 24) 진장 김계묵과 목사 이현규가 성이 황폐해진 모습에 탄식하여 수리했다고 하며[4], 1870년(고종 7)에 1870년 홍주목사 한응필이 연봉금 3,000냥을 들여서 대대적으로 읍성과 관아를 개축했는데, 현재 남아있는 성벽과 동문인 조양문(朝陽門), 동헌인 안회당(安懷堂), 외삼문인 홍주아문(洪州衙門)이 이때의 흔적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동남쪽 성벽의 하단에는 일반적인 성돌과 달리 문양이 새겨진 돌들이 눈에 들어오는데, 이는 조선 초기 이 일대에 있었던 폐사지에서 가져온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읍성 성문[5]과 관아의 명칭에 대해서 당시 이 지역에 관심을 가지던 흥선대원군이 지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일례로 흥선대원군이 홍주에 내려왔을 때 조양문을 보며 '이 아름다운 성문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자, 홍주의 관리가 '이름이 없다'고 하자, 이에 흥선대원군이 홍주성의 동문이니 '아침 햇볕'이란 뜻의 '조양(朝陽)'문으로 이름을 달아주었다고 한다. 물론 흥선대원군 때 달아준 문루들은 이후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이 본격화되면서 읍성 축성이 본격화되어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이르기까지 축성을 한 것으로 보여지는데, 현재의 읍성이 처음 개축된 시기는 1451년(문종 1)로 보인다.
한편,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둘레 5백 33보 23척이며, 안에 샘이 하나 있는데, 겨울이나 여름에도 마르지 아니한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후 문종 대에는 성의 둘레가 4,856척(약 1.5km), 높이는 11척(약 3.3m)이며 문은 4개가 있었고, 여장·적대 등의 여러 시설이 설치되었으며 안에는 우물 2개가 있었다고 한다.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가끔씩 보수하기도 했는데, 1824년(순조 24) 진장 김계묵과 목사 이현규가 성이 황폐해진 모습에 탄식하여 수리했다고 하며[4], 1870년(고종 7)에 1870년 홍주목사 한응필이 연봉금 3,000냥을 들여서 대대적으로 읍성과 관아를 개축했는데, 현재 남아있는 성벽과 동문인 조양문(朝陽門), 동헌인 안회당(安懷堂), 외삼문인 홍주아문(洪州衙門)이 이때의 흔적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동남쪽 성벽의 하단에는 일반적인 성돌과 달리 문양이 새겨진 돌들이 눈에 들어오는데, 이는 조선 초기 이 일대에 있었던 폐사지에서 가져온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읍성 성문[5]과 관아의 명칭에 대해서 당시 이 지역에 관심을 가지던 흥선대원군이 지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일례로 흥선대원군이 홍주에 내려왔을 때 조양문을 보며 '이 아름다운 성문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자, 홍주의 관리가 '이름이 없다'고 하자, 이에 흥선대원군이 홍주성의 동문이니 '아침 햇볕'이란 뜻의 '조양(朝陽)'문으로 이름을 달아주었다고 한다. 물론 흥선대원군 때 달아준 문루들은 이후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축성과 보수를 통해 당시 1,800m가 넘는 성벽과 약 40여 곳의 관아 건물들이 있었지만, 동학농민운동과 지역 내 2차례의 항일의병 활동으로 인해서 많이 훼손되었다.
특히 1906년(광무 10) 을사의병 당시 민종식, 이세영 등이 읍성을 점령하고 열흘 간 항전하다가 통감부에 의해 파견된 일본군에 의해 와해되는 와중에 읍성 내 건물들의 일부가 소실된 것으로 보이며, 이후 1910년 국권피탈 이후 조선총독부에 의해 '읍성 철거령'이 진행되면서 지대가 높은 남쪽과 서쪽 일부 지역 약 800m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성벽과 관아 건물들이 모두 훼철되었다.
1913년에 경의문(서문)이, 1915년 망화문(북문)이 철거되었고, 관아에는 내삼문과 일부 건물들을 철거하고, 홍성군청, 대전지방검찰청 홍성지청, 대전지방법원 홍성지원[6], 홍성세무서, 홍성경찰서 등 여러 기관들이 읍성 안에 들어섰다.
특히, 주민들의 반발로 유지된 조양문(동문) 뒤에 자리했던 전영 자리에 전화국(현 KT 홍성지사)을 세우면서 경관을 많이 파괴[7]되었고, 잔존 성벽이 있던 남쪽에는 신사를 세워 민족말살정책을 시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1906년(광무 10) 을사의병 당시 민종식, 이세영 등이 읍성을 점령하고 열흘 간 항전하다가 통감부에 의해 파견된 일본군에 의해 와해되는 와중에 읍성 내 건물들의 일부가 소실된 것으로 보이며, 이후 1910년 국권피탈 이후 조선총독부에 의해 '읍성 철거령'이 진행되면서 지대가 높은 남쪽과 서쪽 일부 지역 약 800m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성벽과 관아 건물들이 모두 훼철되었다.
1913년에 경의문(서문)이, 1915년 망화문(북문)이 철거되었고, 관아에는 내삼문과 일부 건물들을 철거하고, 홍성군청, 대전지방검찰청 홍성지청, 대전지방법원 홍성지원[6], 홍성세무서, 홍성경찰서 등 여러 기관들이 읍성 안에 들어섰다.
특히, 주민들의 반발로 유지된 조양문(동문) 뒤에 자리했던 전영 자리에 전화국(현 KT 홍성지사)을 세우면서 경관을 많이 파괴[7]되었고, 잔존 성벽이 있던 남쪽에는 신사를 세워 민족말살정책을 시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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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루와 등성계단이 제외된 상태로 준공된 북문인 망화문 (2020년 3월) |
- 1972년 잔존 성벽과 조양문, 안회당, 여하정, 홍주아문을 묶어서 사적 제231호로 지정되었다.
- 1978년 홍성 지진이 벌어지면서 성벽 일부가 훼손되면서 성곽 주변의 민가를 매입하면서 보수 작업을 시작했다.
지역에서는 장기적인 계획으로 읍성을 최소 조선 후기의 모습으로 복원해 지역의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계획이지만, 일제강점기에 많은 부분 허물어진 후 성이 있던 자리는 대부분 민가와 기관들이 들어서 복원이 쉬운 편은 아니다. 특히 홍주읍성 유적 안에는 홍성군청(옛 관아 터)과 홍주초등학교, KT 홍성지사(조양문 뒤, 옛 전영 터)가 들어와 있기에 이전해야 한다는 여론도 많다. 이에 주민 투표를 거쳐 홍성군청은 옥암택지개발지구로 이전 중이고, 읍성 내에 70여년 동안 자리잡았던 홍주초등학교 또한 관내 학령 인구 감소 등의 이유로 2026년 3월에 내포신도시로 이전한 상태이다.
사실상 'KT 홍성지사'가 마지막 남은 걸림돌이 된 셈인데, KT는 여전히 비용 등을 문제로 거부하고 있다. 하지만 KT에서 계속해서 버티기도 어려운 것이 홍성군에서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온갖 난관을 헤치고 수백억 혹은 그 이상의 막대한 예산을 들여가며 추진해 온 사업인데 이제 와서 KT가 거부한다고 순순히 포기할 리도 없으며, 내포신도시 등 여러 이유로 침체되어 가고 있는 주변 상권의 유일한 희망으로 남은 홍주읍성 복원 및 관광지 조성사업을 KT가 혼자 떡하니 가로막고 있으면 지역 주민들의 비난[12]까지 십자포화로 맞게 될 게 뻔하니 KT로서는 버텨낼 재간이 없다. 현재는 계획 단계이고 군청과 초등학교의 이전이 완료된 후에야 본격적인 사업이 진행될 것으로 가닥이 잡혀있는 있는 만큼 아직 협의를 위한 시간도 넉넉히 남아있어 그 안에 타협점을 찾을 것으로 보인다.
- 홍화문(洪化門)
홍주읍성의 남문으로 지대가 높은 곳에 자리했는데, 과거에는 고지도에조차 표시되지 않아 빈 터로 남았다가 2012년 발굴, 복원했다.
- 경의문(敬義門)
홍주읍성의 서문으로 상술했듯이 일제강점기에 철거되어 현재는 홍주초등학교 뒤편 도로가에 자리해 있다. 군에서는 완전 복원을 위한 자료 확보를 위해 서문지를 발굴 조사했는데, 해당 도로가 홍성읍 중심가와 월산리를 지나는 주요 도로 중 하나(조양로)라 복원까지 다소 시일이 걸리 전망이다.
- 안회당(安懷堂)
홍주목사가 머물렀던 동헌으로 현 건물은 1977년에 보수한 것이다.
- 홍주아문(洪州衙門)
홍주목 관아의 외삼문(外三門)으로 홍성군청의 출입구 역할을 하고 있다. 따지고 보면, 현 홍성군청 및 홍성군 의회 건물이 있던 자리는 관아 내부라고 말할 수 있다.
余方宥公事 바야흐로 공사를 시작하여
作小樓二間 조그마한 누 2칸을 지었도다
懷伊水中央 연못의 물은 중앙으로 맴돌고
樹環焉泉縣 등나무가지는 샘가에 걸려 있노라
開方塘半畝 반이랑 정도 수문을 열러놓으니
九日湖之湄 햇빛에 비친 연못의 물살에 아름답구나
捨北官何求 북쪽을 다스릴 관리를 어떻게 구하리오
環除也皆山 물이 옥환으로 도는 곳 모두가 다 산인데
於北豈無隹 이 북쪽에 어찌 새가 살지 않으랴?
賓主東南美 손님과 주인이 동남을 좋아하니시
其必宥所樂 반드시 즐겨하는 바 거기에 있도다.홍주동헌 여하정 주련
- 옥사(獄舍)
죄인을 가두는 감옥으로 일제강점기에 훼철되어 대전지방검찰청 홍성지청 및 대전지방법원 홍성지원으로 쓰다가 기관이 이전되고 나서 2012년 복원되었다.
옥사 앞에는 음수대가 있는데, 과거 조선의 천주교 박해가 있었던 곳이라 천주교 신자들이 성지순례차 자주 들른다.
- 수구(水口) 유적
2015년 서쪽 성벽 보수 과정에서 발견되어 복원·정비되었다. 홍성읍 내 하천 중 하나인 월계천의 물을 이 수로를 끌여들어 성내 연못을 거쳐 홍성천으로 나가는 구조로 보인다.
1906년 홍주의병 당시 이 수구를 통해 읍성을 점령한 것으로 알려졌다.
- 홍주성수성비
1824년 홍주읍성을 수성하면서 세운 비로 충청남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주변에는 홍주목사(홍양현감)을 지낸 인물들의 선정비들이 설치되어 있는데, 과거 홍성읍 주변에 있다가 이전된 것이다.
- 홍주병오항일의병기념비
과거 이 비석이 있던 자리는 1906년 홍주의병에게 희생된 일본인들과 일진회원을 기리는 비석이 있었는데, 해방 이후 그 비석을 땅에 묻고, 1947년에 세운 비이다. 글씨는 지청천이 썼다.
- 홍주성역사관
과거 세무서와 문화원이 있던 자리에 건설된 박물관으로 홍주읍성을 비롯해 홍성의 역사와 문화를 전시, 보존하고 있다.
충남 홍성군에 있는 성으로, 길이 약 1,772m의 성벽 중 약 800m의 돌로 쌓은 성벽의 일부분이 남아있다. 처음 지어진 연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며, 『세종실록지리지』에 홍주성의 둘레와 여름과 겨울에도 마르지 않는 샘이 하나 있다는 기록만 있을 뿐이다.
왜구의 침입이 예상되는 고을의 읍성을 새로운 격식에 맞추어 쌓게 되었던 조선 세종 때에 처음 쌓기 시작하여 문종 1년(1451)에 새로 고쳐 쌓았다. 당시 성의 규모는 둘레가 4,856척(약 1.5km), 높이는 11척(약 3.3m)이며 문은 4개가 있었고, 여장·적대 등의 여러 시설이 설치되었으며 안에는 우물 2개가 있었다고 한다.
동문인 조양문은 현재까지 남아있고 1975년 복원한 것이다. 아문은 조양문의 문루를 설치할 때 함께 세운 것이며 ‘홍주아문’이란 글씨는 흥선대원군이 직접 썼으나 현재 남아있지 않다. 우리나라 아문 중에서 가장 크고 특이한 형태를 지니며 조선시대 관아의 구조와 형태를 살필 수 있는 자료가 된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에 반대하여 의병을 일으킨 민종식 등이 이 성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공격하여 덕산으로 격퇴시킨 일이 있다. 2012년에 남문인 홍화문을 복원하였다.
이 곳은 삼국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읍성으로 이어졌으며, 조선 초기 새로운 형식에 의해 쌓은 성이 남아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홍주성(조양문,아문,산성) → 홍성 홍주읍성)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 주요 관광지 ] | ||||||||
[ 홍성군의 축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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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가유산청 홈페이지에는 Hongjueupseong Walled Town, Hongseong으로 등재되어 있다.[2] 문화유산청 홈페이지에는 삼국시대로 소개되어 있으나 정확한 초축시기는 알 수 없다.[3] 여기에도 적혀있지만, 지역에서는 여전히 '시 승격'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간혹 있다.[4] 당시 이 사실을 기록한 비석이 지금도 홍주읍성 남문(홍화문) 주변에 남아있다.[5] 조양문과 북문인 망화문(望華門), 서문인 경의문(敬義門)[6] 처음에는 '공주지방검찰청', '공주지방법원'이었으나 1932년 충청남도청이 대전으로 이전하면서 명칭을 바꾸었다.[7] 조양문 사진마다 뒤쪽에 보이는 건물이 그 건물이다.[8] 1992년 홍성경찰서(옥암리), 2002년 홍성우체국(옥암리), 2005년 대전지검 홍성지청&대전지법 홍성지원(월산리), 홍성세무서(소향리), 홍성문화원(고암리), 2017년 홍성읍사무소(오관리 읍성 외곽(구 KT&G 홍성지사)).[9] 당시에는 위 사진처럼 문루와 등성계단이 제외되었지만, 이후 고증을 거처 문루를 복원했다.[10] 2022년까지는 읍성 내 일부 민가와 상점 등을 철거해 임시 주차장으로 사용했지만, 이후 체험관 건립과 후술되는 공원화 등으로 인해 읍성 밖의 건물들을 철거해 임시 주차장으로 쓰고 있다. 이마저도 북동쪽 지역은 발굴, 정비로 인해 폐쇄된 상태이다.[11] 함정은 기병의 침입을 막으려 구덩이를 파고 뾰족한 나무를 설치한 살상용 방어시설로, 기존에 발견된 것보다 보존상태가 우수하고 실물 함정은 강진 전라병영성 외에 확인된 사례가 없어 읍성 구조를 파악,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관련 기사)[12] 지역 언론에서는 '홍주읍성 복원'과 관련해서 KT 홍성지사 이전 문제를 수십년 이상 가끔씩 언급하고 있다.[13] 물론 지금도 지역 대표 상권 중 하나로 남아있긴 하지만, 영향력은 약화되고 있다.[14] 오관지구대 정류장 하차[15] 홍주초등학교 앞 삼거리 정류장 하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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