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칠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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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시 적성면 구읍리 중성산에 위치한 신라 시대 석축 산성. 대한민국의 사적 제437호로, 7세기 삼국통일전쟁 및 나당전쟁 시기 여러 차례 격전지였다. (칠중성 전투) 따라서 한국 고대사에서 평양성, 요동성, 안시성 등과 함께 전장으로 널리 알려진 성들 중 하나이다. 또한 삼년산성과 함께 소재지가 확실히 드러난 몇 안 되는 중부 지방의 신라성이기도 하다. 6.25 전쟁 때에도 전장이었고, 최근까지도 군부대가 주둔했다. 다만 그 이유로 성벽이 참호 건설에 쓰이는 등 보존 상태는 좋지 않다. '칠(七)'자 기와에 '묻지마' 사적지정…'왜? 1500년 국제화약고였으니까'

성의 이름은 적성 부근 임진강의 옛이름 칠중하에서 유래했고, 150m 정도인 중성산 정상과 서봉 일대를 두른다. 북쪽으로 임진강 평원이 펼쳐져 있어 감시에 좋고, 현대에도 개성과 서울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이다. 아직 발굴조사는 실시된 적이 없지만 정밀지표조사 결과 문지 2개, 수문 1개, 건물지 5개, 우물지 2개 등이 확인되었다. 한때 백제-고구려의 낭비성으로 비정되기도 했으나, 7세기 이전 유물이 거의 나오지 않아 해당 설은 학계에서 큰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다.
신라의 한강 유역 장악 후, 6세기 말 ~ 7세기 초엽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638년 고구려가 공격했으나 신라 대장군 알천이 격퇴했다. 다만 660년의 2차 침공 시에는 신라 장수 필부가 결사 항전했음에도 20일의 전투 끝에 고구려 군에게 함락되었다.
667년에 평양성으로 향하던 신라군이 칠중성 회복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이듬해 고구려 멸망 후에는 고구려부흥운동 세력의 거점이 되었다. 다만 673년 당나라 장수 이근행이 칠중성에서 고구려 부흥군을 격파하자, 후자는 신라에 투항한다. 이로써 칠중성은 13년 만에 신라령이 되었고, 나당전쟁 중인 675년 2월 당나라 장군 유인궤가 칠중성을 점령했다. 이때 성주 김유동이 전사했다.
유인궤가 이 전공으로 귀국 후 재상급인 좌복야 및 공작 직위를 받은 것으로 보아 칠중성의 난공불락의 명성이 중국에까지 퍼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같은해 9월의 매소성 전투에서 패배한 당나라 군대는 칠중성을 통해 철수했고, 신라군이 추격해 칠중성을 수복했다.
고려 시대 들어 칠중성은 군사적 중요성을 잃었고 조선 시대에는 토탄성, 토탄고성 등으로 기록되었다. 1950년 12월 31일 중국인민지원군이 칠중성 앞의 임진강을 넘어 남하했고, 1951년 2월에는 반격에 나선 유엔군이 일대를 수복했다. 그러자 중국인민지원군이 재차 공격하여 벌어진 설마리 전투에서 영국 글로스터 대대의 일부가 칠중성에 주둔했고, 캐슬 고지 (castle hill)라 지칭하며 지연전을 펼쳤으나 결국 공산군에 빼앗겼다.
전후로도 한국군이 계속 주둔했다. 2020년 군부대 철수 후 파주시는 2023년부터 칠중성 발굴 계획을 세우고 있다. 다만 2025년 현재까지는 별 진척이 없다.
667년에 평양성으로 향하던 신라군이 칠중성 회복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이듬해 고구려 멸망 후에는 고구려부흥운동 세력의 거점이 되었다. 다만 673년 당나라 장수 이근행이 칠중성에서 고구려 부흥군을 격파하자, 후자는 신라에 투항한다. 이로써 칠중성은 13년 만에 신라령이 되었고, 나당전쟁 중인 675년 2월 당나라 장군 유인궤가 칠중성을 점령했다. 이때 성주 김유동이 전사했다.
유인궤가 이 전공으로 귀국 후 재상급인 좌복야 및 공작 직위를 받은 것으로 보아 칠중성의 난공불락의 명성이 중국에까지 퍼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같은해 9월의 매소성 전투에서 패배한 당나라 군대는 칠중성을 통해 철수했고, 신라군이 추격해 칠중성을 수복했다.
고려 시대 들어 칠중성은 군사적 중요성을 잃었고 조선 시대에는 토탄성, 토탄고성 등으로 기록되었다. 1950년 12월 31일 중국인민지원군이 칠중성 앞의 임진강을 넘어 남하했고, 1951년 2월에는 반격에 나선 유엔군이 일대를 수복했다. 그러자 중국인민지원군이 재차 공격하여 벌어진 설마리 전투에서 영국 글로스터 대대의 일부가 칠중성에 주둔했고, 캐슬 고지 (castle hill)라 지칭하며 지연전을 펼쳤으나 결국 공산군에 빼앗겼다.
전후로도 한국군이 계속 주둔했다. 2020년 군부대 철수 후 파주시는 2023년부터 칠중성 발굴 계획을 세우고 있다. 다만 2025년 현재까지는 별 진척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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