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여 가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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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가림성 전경 |
백제의 수도였던 웅진성과 사비성을 방비하기 위한 목적으로 금강 하류 부근에 쌓은 산성이다.
성이 위치한 산 정상에서는 강경읍을 비롯한 인근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어서 방비용 성으로서의 그 입지가 상당히 훌륭하다. 전해지는 바로는 백제 동성왕 23년(501년)에 위사좌평 백가(苩加)가 쌓았다 한다. 가림성은 백제의 성 가운데 기록에 의해 축조 연대가 전해지는 유일한 성이고, 부여군의 옛 지명을 알 수 있는 유적이기도 하다.
1963년 1월 21일에 대한민국의 사적으로 지정되었다.[1] 지정될 당시 부여 성흥산성으로 지정되었다가 2011년 7월 28일 부여 가림성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성이 위치한 산 정상에서는 강경읍을 비롯한 인근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어서 방비용 성으로서의 그 입지가 상당히 훌륭하다. 전해지는 바로는 백제 동성왕 23년(501년)에 위사좌평 백가(苩加)가 쌓았다 한다. 가림성은 백제의 성 가운데 기록에 의해 축조 연대가 전해지는 유일한 성이고, 부여군의 옛 지명을 알 수 있는 유적이기도 하다.
1963년 1월 21일에 대한민국의 사적으로 지정되었다.[1] 지정될 당시 부여 성흥산성으로 지정되었다가 2011년 7월 28일 부여 가림성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성을 쌓은 백가는 동성왕이 자신을 이곳으로 보낸 것에 앙심을 품고 동성왕을 살해하고 난을 일으켰으나 무령왕이 왕위에 올라 난을 평정하고 백가를 죽였다고 전한다. 현대로 치면 국왕의 경호대장급의 직급인 위사좌평으로 하여금 성을 지키도록 하였다는 사실은 이 성의 전략적 중요성을 말해주고 있다.
11월에 왕이 웅천 북쪽 벌판과 사비 서쪽 벌판에서 사냥하였는데 큰 눈에 길이 막혀 마포촌(馬浦村)에서 묵었다. 이전에 왕이 백가로 하여금 가림성을 지키게 하였을 때 백가는 가기를 원하지 않아 병을 핑계로 퇴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왕은 이를 승낙하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백가는 왕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다. 이때에 와서 백가가 사람을 시켜 왕을 칼로 찔러서 12월에 이르러 왕이 사망하니 시호를 동성왕이라 하였다.《삼국사기》 권26 백제본기 제4(百濟本紀 第四) 동성왕(東城王) 23년 겨울 11월(二十三年冬十一月) 中
이 성은 백제부흥운동군의 거점지이기도 하였는데 당시 이곳을 공격하던 당나라 장수 유인궤(劉仁軌)가 이 성이 험하고 견고하여 공격하기 어렵다고 한 것에서 난공불락의 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복신은 이미 권력을 독차지하여 부여풍과 서로 질투하고 시기하게 되었다. 복신은 병이 들었다는 구실로 굴 속에 누워서 풍이 문병하러 오기를 기다려 그를 죽이고자 하였다. 풍이 이를 알고 심복들을 거느리고 복신을 급습하여 죽이고, 고구려와 왜국에 사람을 보내 군사를 요청하여 당나라 군사를 막았는데, 손인사가 중도에서 이들을 맞아 쳐부수고, 마침내 인원의 군사와 합세하니 군사의 사기가 크게 올랐다. 이에 모든 장수들이 공격의 방향을 의논하는데 어떤 자가 “가림성(加林城)이 수륙의 요충이므로 먼저 쳐버려야 한다.”고 말하니, 인궤가 대답하였다. “병법(兵法)에는 강한 곳을 피하고 약한 곳을 공격해야 한다고 하였다. 가림성은 험하고 튼튼하므로 공격하면 군사들이 상할 것이요, 밖에서 지키자면 날짜가 오래 걸릴 것이다. 주류성은 백제의 소굴로서 무리들이 모여 있으니, 만일 이곳을 쳐서 이기게 되면 여러 성은 저절로 항복할 것이다.” 이에 인사, 인원과 신라 왕 김법민은 육군을 거느리고 나아가고, 유인궤와 별수(別帥) 두상(杜爽)과 부여융은 수군과 군량 실은 배를 거느리고, 웅진강에서 백강으로 가서 육군과 합세하여 주류성으로 갔다.
가림성은 충남 부여군 임천면 성흥산 8부 능선에 자리한 산성이며, 백제 시대의 내성과 고려 시대의 외성이 어우러진 이중 구조의 성이다.
내성은 테뫼식 석축 산성으로, 성 둘레 약 1,325m, 면적 약 92,568㎡ 규모이다. 기반을 계단식으로 다진 뒤 다듬은 돌을 고르게 쌓고, 성벽 뒤는 돌과 흙으로 뒤채움하여 축조하였으며, 성벽 바깥은 석축, 안쪽은 흙으로 쌓았다.
내성에는 남문·동문·서문이 있으며, 각 문 안쪽에는 평탄한 지형이 형성되어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남문은 임천면 소재지로, 서문은 부여 방면 한고개로, 동문은 외성을 지나 부여 세도·강경 방면으로 이어지는 등산로와 연결되어 있다.
우물터는 3곳이 보고되었으나, 현재는 남쪽과 북동쪽 2곳만 확인된다. 북성벽 일대에서는 조선 시대에 조성된 수구와, 통일신라·조선 시기에 마련된 집수지가 확인되어 당시의 수리 시설을 보여 준다.
외성은 내성 동문지 북쪽 성벽에서 이어져 동쪽 성벽으로 연결되며, 길이 약 706m, 면적 약 38,138㎡ 규모이다. 기저부는 돌로 4∼5단 정도 쌓고 그 안쪽은 흙으로 채운 구조로 추정된다. 외성에는 남문과 북문이 보고되며, 남문 주변과 북동 성벽을 따라 형성된 평탄지는 건물터로 여겨진다.
성 입구에는 나당연합군에 맞서 싸우다 순국한 백제 장병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1985년에 세운 충혼사(忠魂祠)가 있다. 성 안에는 전쟁과 흉년으로 고통받던 백성을 위해 군량을 풀고 둔전을 운영하며 민생을 돌본 고려 명장 유금필의 선정을 기리는 사당 유태사지묘(庾太師之廟)가 있다. 이곳에는 유금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내성은 테뫼식 석축 산성으로, 성 둘레 약 1,325m, 면적 약 92,568㎡ 규모이다. 기반을 계단식으로 다진 뒤 다듬은 돌을 고르게 쌓고, 성벽 뒤는 돌과 흙으로 뒤채움하여 축조하였으며, 성벽 바깥은 석축, 안쪽은 흙으로 쌓았다.
내성에는 남문·동문·서문이 있으며, 각 문 안쪽에는 평탄한 지형이 형성되어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남문은 임천면 소재지로, 서문은 부여 방면 한고개로, 동문은 외성을 지나 부여 세도·강경 방면으로 이어지는 등산로와 연결되어 있다.
우물터는 3곳이 보고되었으나, 현재는 남쪽과 북동쪽 2곳만 확인된다. 북성벽 일대에서는 조선 시대에 조성된 수구와, 통일신라·조선 시기에 마련된 집수지가 확인되어 당시의 수리 시설을 보여 준다.
외성은 내성 동문지 북쪽 성벽에서 이어져 동쪽 성벽으로 연결되며, 길이 약 706m, 면적 약 38,138㎡ 규모이다. 기저부는 돌로 4∼5단 정도 쌓고 그 안쪽은 흙으로 채운 구조로 추정된다. 외성에는 남문과 북문이 보고되며, 남문 주변과 북동 성벽을 따라 형성된 평탄지는 건물터로 여겨진다.
성 입구에는 나당연합군에 맞서 싸우다 순국한 백제 장병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1985년에 세운 충혼사(忠魂祠)가 있다. 성 안에는 전쟁과 흉년으로 고통받던 백성을 위해 군량을 풀고 둔전을 운영하며 민생을 돌본 고려 명장 유금필의 선정을 기리는 사당 유태사지묘(庾太師之廟)가 있다. 이곳에는 유금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임천 충혼제는 매년 4월 가림성 내에 위치한 충혼사에서 나당연합군에 항전하다가 순국한 무명 장졸들의 넋을 달래고 우국충절을 기리기 위해 개최하는 제례행사이다. 충혼사에는 마지막까지 백제의 수도를 수호하던 장졸들의 신주(神主)에 해당하는 수성장졸제신위(守城將卒諸神位)라고 적힌 위패들이 모셔져 있다. 1979년에 거행한 이후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 1996년부터 총 6차례 발굴조사가 진행되어 동‧남문지 축조 형태, 백제 시대 성벽의 축성법, 백제~조선 시대 개축한 성벽의 흔적, 정상부의 평탄지에 자리한 건물지 등을 확인한 바 있다.
- 2019년 9월부터 7차 발굴조사로 북성벽 내측부에 대한 수구(水口)[4]와 집수 시설을 조사하여, 조선 시대에 사용한 사각형 집수정(우물)과 통일신라 시대에 사용한 원형 집수정이 확인되었다.
- 2021년 12월부터 진행된 8차 발굴조사로 가림성의 백제 시대의 처음 성벽이 조성된 후에 통일신라와 고려, 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5차례 이상 고쳐 쌓은 성벽의 흔적과 성벽을 다시 쌓을 때마다 성 안쪽에서도 시설물을 지속적으로 조성한 점을 확인하였다.
부여 가림성은 백제의 수도였던 웅진성과 사비성을 지키기 위하여 금강 하류 부근에 쌓은 석성(石城)이다. 산 정상에서는 강경읍을 비롯한 금강 하류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며, 백제 동성왕 23년(501)에 위사좌평 백가(苩加)가 쌓았다고 전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성을 쌓은 백가는 동성왕이 자신을 이곳으로 보낸 것에 앙심을 품고 동성왕을 살해하고 난을 일으켰으나 무녕왕이 왕위에 올라 난을 평정하고 백가를 죽였다고 전한다. 높은 관리인 위사좌평으로 하여금 성을 지키도록 하였다는 사실은 이 성의 전략적 중요성을 말해주고 있다.
성의 형태는 산꼭대기를 빙둘러 쌓은 테뫼식으로, 돌과 흙을 함께 사용하여 성벽을 쌓았다. 성 안에는 남·서·북문터와 군창터, 우물터 3곳과 돌로 쌓았던 방어시설인 보루가 남아있다. 또한, 백제 부흥운동군의 거점지이기도 한 이곳에는 고려 전기의 장수 유금필이 이곳에 들러 빈민구제를 하였다고 하여 해마다 제사드리는 사당이 있다.이 성은 백제 때 쌓은 성곽 가운데 연대를 확실히 알 수 있는 유일한 성이고, 옛 지명을 알 수 있는 유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부여성흥산성 → 부여 가림성)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1] 처음 지정될 당시 사적 제4호로 지정되었다. 현재는 문화유산에 번호를 매기는 것이 유산의 중요도로 오인될 수 있음을 고려해 따로 번호를 매기지 않고 있다.[2] 당 고종의 3번째 연호이다.[3] 성흥산 사랑나무라고도 불리며 나무의 가지 모양이 반쪽 하트모양을 하고 있어 촬영한 사진의 좌우 반전으로 하트모양을 만들 수 있다. 2007년 10월 1일 부여군의 향토문화유산 제88호로 지정되었다가, 2021년 8월 9일 대한민국의 천연기념물로 승격 지정되었다.[4] 물을 끌어들이거나 흘려 내보내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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