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덕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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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덕왕릉(聖德王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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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덕왕릉(聖德王陵)의 석사자상과 무인상 | |
많은 신라왕릉이 비정이 잘못됐다는 의혹을 받는 상황이지만, 성덕왕릉은 실제 성덕왕의 왕릉이 확실하다고 학계에서 대부분 인정받는 편이다. 아래에 설명하듯 이 시기 왕릉의 형식이 비교적 잘 보존돼있고, 이거사(移車寺) 남쪽에 장사지냈다고 하는데 이거사로 추정되는 전이거사지가 성덕왕릉 바로 북쪽에 있기 때문이다. 대체로 성덕왕의 왕릉이 맞다고 보나 그 비정에 여러 이견이 있어서 무덤 주인을 말하는 유물이 발견된 무열왕릉과 흥덕왕릉이나 교차검증이 완벽한 선덕여왕릉처럼 거의 반쯤 기정사실로 여겨지는 정도까지는 아닌 것인지, 성덕왕릉일 가능성이 있다는 뉘앙스로 말하는 주장과 성덕왕릉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2][3]
바로 옆에 전 왕이자 형인 효소왕의 효소왕릉이 있는데, 지금도 섬세한 장식이 남아있는 성덕왕릉에 비해 규모도 작고 초라해서 비교가 된다.[4] 성덕왕릉은 작은 소나무 숲에 둘러싸여있는데 신라 시대의 십이지상, 받침돌과 돌사자, 실제 사람 크기의 무인상 등이 남아있는 등 오래 재위한 명군답게 상당히 화려하고 보존 상태가 좋은 편이다.
바로 옆에 전 왕이자 형인 효소왕의 효소왕릉이 있는데, 지금도 섬세한 장식이 남아있는 성덕왕릉에 비해 규모도 작고 초라해서 비교가 된다.[4] 성덕왕릉은 작은 소나무 숲에 둘러싸여있는데 신라 시대의 십이지상, 받침돌과 돌사자, 실제 사람 크기의 무인상 등이 남아있는 등 오래 재위한 명군답게 상당히 화려하고 보존 상태가 좋은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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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덕왕릉(聖德王陵)의 십이지신상 |
입체 십이지상은 성덕왕릉의 가장 큰 특징이다. 다른 신라왕릉에는 대체로 십이지를 평평한 돌 위에 부조했다. 부조 문서의 이미지나 경주 김유신묘 십이지상 문서를 보면 어떤 느낌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성덕왕릉의 십이지상은 입체 조각상이다. 다른 왕릉이 2D라면 여기는 3D인 셈이다. 다만 아쉽게도 대부분 머리 부위가 훼손된 상태다. 다른 왕릉보다 좀 더 오래됐기도 하고, 십이지상이 넘어지면서 깨지고 천수백년 동안 전쟁도 겪다보니 대부분 부서졌고, 그나마 가장 보존 상태가 좋았던 원숭이상은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겼다. 다만 여러 근거를 들어 해당 십이지신상들은 성덕왕 사후 당대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후대 경덕왕 때에 보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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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 성덕왕릉귀부(聖德王陵龜趺) |
위치가 7번 국도 바로 옆이고 경주시 시내버스를 이용한다면 한국광고영상박물관 정류장에서 가까운 편이나, 문제는 능이 소나무숲 한복판에 위치해 있어 접근성은 매우 좋지 않다. 좁은 논두렁길을 한참 걸어서, 길도 이어져 있지 않은 숲을 헤치고 접근해야하며, 자가용을 끌고 가면 주차할 곳이 전혀 없어 난감하기 짝이 없다. 도로와 바로 연결되어 있을 뿐더러 주차장과 화장실까지 완비된 원성왕릉과는 하늘과 땅 차이. 도로와 왕릉 사이에 동해선 철도 철길이 있는데 2022년 기준으로 이 철길은 폐선되어 열차가 더 이상 다니지 않는다. 과거에 이 철도에 열차가 다닐 때는 버스 정류장 바로 옆에 철길을 가로질러 왕릉으로 가는 길이 닦여있었는데, 철도안전법 위반인 데다 굉장히 위험했고 철길을 건너지 않으려면 북동쪽 마을까지 돌아서 가야 했다.[6]
경주에서 불국사 방향으로 가는 길의 동남쪽 구릉 소나무숲 속에 자리하고 있는 신라 제33대 성덕왕(재위 701∼737)의 무덤이다.
성덕왕은 신문왕의 아들로 본명은 융기이다. 당과 적극적인 교류를 하였으며 정치적으로 가장 안정된 신라의 전성기를 이끌어 나갔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737년에 왕이 죽자 이거사(移車寺) 남쪽에 장사지냈다고 하는데, 현재 왕릉 북쪽에 이거사로 추정되는 절터가 있다.
이 능은 밑둘레 46m 높이5m이다.
무덤 아래부분에는 둘레돌을 배치하여 무덤을 보호하도록 하였는데, 높이 90㎝ 정도의 돌(면석)을 두르고 그 위에 덮개돌인 갑석을 올렸다. 면석 사이에는 기둥 역할을 하는 탱석을 끼워 고정시켰으며, 그 바깥쪽에 삼각형의 돌을 세워 받치고 있다. 삼각형의 받침돌 사이에 12지신상이 배치되어 있는데 네모난 돌 위에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고 서 있는 모습의 조각이 심하게 파손되어 있다.
무덤 앞쪽에는 석상이 놓여있고 무덤 주위의 4모서리에는 돌사자를 배치하였다. 석상 앞쪽 양 옆으로 문인석·무인석 각 1쌍을 세웠던 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무인석 1개와 상반신만 남은 석인(石人) 1개가 남아 있다.
성덕왕릉에서 보이고 있는 석물의 사실적인 조각기법은 통일신라 초기 양식에 속하며, 왕릉은 통일신라시대의 왕릉으로서 완비된 모습을 갖추고 있다.
※(신라성덕왕릉 → 경주 성덕왕릉)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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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舊 사적 제28호[2] 김용성 • 강제현, 2012 <신라 왕릉의 새로운 비정> <야외고고학> 15.[3] 강인구(1986)[4] 다만 지금 효소왕의 왕릉으로 알려진 이 무덤은 실제 효소왕의 무덤이 아니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효소왕릉 문서 참조.[5] 사실 비석이 지금까지 남아있는 조선 이전의 왕릉은 거의 없다. 귀부라도 그럭저럭 남아있는 성덕왕릉이 보존상태가 매우 좋은 편에 드는 것이다.[6] 이 철도를 폐선한 이유가 일제강점기에 닦은 현 동해선이 이 곳처럼 유적지들 바로 코앞이거나, 심하게는 사천왕사지나 동궁과 월지처럼 유적지 위를 지나는 경우가 많아 훼손의 위험도 있고 방문객 접근도 위협하고 있어서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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