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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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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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문성[경주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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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경기도와 겹침. [B]: 서울특별시와 겹침. [울산시계], [경주시계]: 울산-경주 시계를 정확히 따르며 시계를 구성하는 용도로 사용중. [경주건천]: 경주시 건천읍에 있는 성. [경주남산]: 경주시 남산에 있는 성. [양동마을]: 경주시 양동마을 바로 인근에 있는 성. [포항]: 포항 소재 성.
행정구역은 현재 대한민국 기준
읍성 조창성  차단성·관문  왜성
정부상징
대한민국
사적 史蹟
⠀[1~50호]⠀
⠀[51~100호]⠀

[9]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47호로 재지정[10]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48호로 재지정[11] 경상남도 문화유산자료 제275호로 재지정[12] 울산광역시 문화유산자료 제8호로 재지정[13] 경상남도 문화유산자료 제276호로 재지정[B] 14.1 14.2 사적 제510호 고령 사부동과 기산동 요지로 통합, 재지정[C] 16.1 16.2 16.3 사적 제513호 나주 반남 고분군으로 통합, 재지정[D] 19.1 19.2 사적 제514호로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으로 통합 재지정[E] 21.1 21.2 사적 제515호 함안 말이산 고분군으로 통합 재지정
⠀[101~150호]⠀
⠀[151~200호]⠀
⠀[201~250호]⠀
⠀[251~300호]⠀
⠀[301~350호]⠀
⠀[351~400호]⠀
⠀[401~450호]⠀
⠀[451~500호]⠀
⠀[501호~550호]⠀
⠀[번호폐지 이후(번호없음-1)]⠀
2021년 11월 19일부로 번호 지정제 폐지
2021.11.19 - 2026.05.14
[37] 내동리 쌍무덤. 옥야리 장동 방대형 고분 4기 총 5기
⠀[번호없음-2]⠀
2026.05.14 -
원주 영원산성
原州 領願山城
Yeongwonsanseong Fortress, Wonju
소재지
강원도 원주시 판부면 금대리 산50-2번지 외 1필
분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성 / 성곽
수량/면적
221,644㎡
지정일
시대
소유단체
관리단체
영원산성02
영원산성
영원산성01
영원산성 안내판
 
 
 
 
 
 
 
 
 
1. 개요2. 역사3. 구조4. 기타5. 외부 링크6. 사적 제447호

 
 
 
 
 
 
 
 
 
 
 
 

1. 개요[편집]

 
 
 
 
 
 
 
 
 
 
 
 
강원특별자치도 원주시 판부면에 있는 통일신라 시기에 포곡식[2]으로 축조한 산성으로 치악산에 위치하고 있다.

대몽항쟁기 당시 주민들이 외세의 침입을 피해 몸을 피하고 농성[3](籠城)에 사용되었던 산성이다. 이후 임진왜란 때에도 다시 활용되어 지역 방어의 거점으로 기능하였으며, 18세기까지 지속적으로 이용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러한 역사적 흔적은 영원산성이 단순한 군사 시설을 넘어, 위기 속에서 주민들의 삶과 안정을 지켜 온 중요한 유적임을 보여 준다.

2003년 6월 2일에 사적으로 지정됐다. [4]
 
 
 
 
 
 
 
 
 
 
 
 

2. 역사[편집]

 
 
 
 
 
 
 
 
 
 
 
 
영원산성은 고려 충렬왕 17년(1291년)에 몽골의 일족으로 세력다툼에서 밀려난 합단족의 침입을 물리쳐 나라를 구한 성지이다. 충렬왕은 강화도로 피신하고 합단적은 원주 이북을 모두 점령하여 고려는 큰 위기에 처했다. 고려사의 기록에 따르면 원주의 향공진사[5] 원충갑, 홍원창[6] 판관[7] 조신, 별장 강백송, 주리[8] 원현, 부행란 원종수 등과 원주 주민들은 치악성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적과 싸워 이겼다.
충렬왕 때 합단(哈丹, 카다안) 적이 철령(鐵嶺)을 넘어 쳐들어오자, 주현에서는 위세만 보고 달아나고 붕괴되어 이에 맞서는 자가 없었다. 적이 쳐들어와 원주에 진을 치고 50여기를 보내 치악성(雉岳城) 아래에서 재빠르게 노략질을 하자, 원충갑이 보졸(步卒) 6명을 거느리고 그들을 쫓아내면서 적의 말 여덟 필을 빼앗아 돌아왔다. 도랄도(都剌闍, 토라도)·독어내(禿於乃, 토에나)·패란(孛蘭, 보랄) 등이 병사 400을 거느리고 다시 성 아래에 이르러 녹전미[9](祿轉米)를 빼앗자 원충갑과 죽기를 각오한 병사 중산(仲山) 등 7명이 이를 엿보며 기다렸다. 중산이 먼저 적중으로 뛰어들어 한 명을 베고 추격하여 형문(荊門) 밖까지 이르니, 적은 안장 얹은 말을 버리고 황급히 달아났다. 방호별감[10](防護別監) 복규(卜奎)가 크게 기뻐하며 빼앗은 말 25필을 모두 그들에게 주었다. 적이 다시 쳐들어오면서 기치[11](旗幟)를 많이 펼치고는 성을 여러 겹으로 포위한 뒤 한 사람을 보내 글을 전하여 항복할 것을 유도하였다. 원충갑이 갑자기 뛰쳐나가 그를 베고는 머리에 그 글을 매달고 던졌다.
적이 물러나 많은 공성할 무기를 수리하자 성안 사람들은 크게 두려워하였다. 적이 다시 포로로 잡은 여자 2명을 보내어 항복을 유도하자, 원충갑은 그들마저도 죽여 버렸다. 적이 북을 치면서 진격하며 온갖 계책으로 공격하였다. 화살이 쏟아지는 것이 비와 같아 성이 거의 함락될 지경이 되었다. 흥원창판관(興元倉判官) 조신(曺愼)이 성 밖으로 나가 적과 싸우고 원충갑이 신속하게 말을 달려 동쪽 봉우리로 올라가 한 명을 베니 적은 차츰 혼란에 빠졌다. 별장(別將) 강백송(康伯松) 등 30여 명이 이를 도왔고, 주리(州吏) 원현(元玄)·부행란(傅行蘭)·원종수(元鍾秀)가 국학생[12](國學生) 안수정(安守貞) 등 100여 명과 함께 서쪽 봉우리에서 내려와 협공하였다. 조신이 북채를 잡고 북을 치는데 화살이 오른쪽 팔뚝에 꽂혔으나 북소리는 줄어들지 않았다. 적의 선봉이 약간 후퇴하자, 뒤에 있던 자들은 놀라 소란에 빠졌고 자기들끼리 서로 짓밟았다. 주병(州兵)이 합세하여 공격하자 소리가 산악을 진동시켰는데, 전후 열 차례나 싸우면서 적을 크게 물리치던 중 도랄도 등 68명을 베었고, 사살한 자도 거의 반이나 되었다. 이로부터 적은 예봉이 꺾여 감히 공략하지 못하였고, 여러 성도 견고하게 지키니, 비로소 적을 가벼이 보는 마음이 생겼는데, 모두 원충갑의 힘이었으므로 이 공으로 6차례 옮겨 삼사우윤(三司右尹)이 되었다.

《고려사》열전 권제17 제신[13](諸臣) 원충갑(元冲甲) 中

전쟁이 끝나고 몇 년 뒤 충렬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충선왕은 백성에게 본을 보이고자 즉위해에 특별한 조치를 시행하였다. 합단족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지킨 공을 기리며 원주 주민에게 3년 동안 세금부역을 면제해 주었다.
합단(哈丹, 카단)이 침입해왔을 때, 주군(州郡)들은 소문만 듣고도 항복하였지만 오직 원주(原州)만은 외로운 성(城)이면서도 적의 예봉(銳鋒)을 꺾었다. 그 후에 여러 성들이 그것을 본받아 적의 무리를 모두 쓸어버렸으니 삼한(三韓)이 다시 안정을 찾을 수 있었으며, 선제의 원수를 갚았으니 그 공은 만세에 잊을 수 없도다. 원주의 방호별감(防護別監)으로 판서(判書)로 치사(致仕)한 복규(卜奎)와 전사(戰士)인 중랑장(中郞將) 원충갑(元冲甲), 그 고을의 수령과 군사들, 장리[14](長吏) 중에 공을 이룬 자들은 비록 이미 포상하였다고 해도 오히려 부족한 부분이 있으니 마땅히 관직에 발탁하여 등용함으로써 후대 사람들의 귀감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 읍의 상요[15](常徭)와 잡공[16](雜貢)은 3년 동안 면제하라.

《고려사》세가 권제33 충선왕(忠宣王) 즉위년 1월 中

조선 선조 25년(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영원산성 전투가 벌어져 원주 목사 김제갑이 왜군 장수 모리 요시나리가 이끄는 왜적과 맞서 싸우다 전사했고, 아들 김시백, 부인 이씨도 함께 순절했다.
적병이 원주(原州) 영원 산성(鴒原山城)을 함락시켰는데, 목사 김제갑(金悌甲)이 전사하였다. 이에 앞서 관동(關東)의 주현(州縣)이 모두 적에게 노략질을 당하였으나 원주만은 온전하였다. 적이 이미 원호(元豪)의 군사를 패배시키고 드디어 곧바로 원주로 침입하니, 원주 목사 김제갑이 고을 안의 사대부와 서민 그리고 온 가족을 데리고 산성으로 들어갔는데 험한 지세만 믿고 설비를 하지 않았다. 적이 두세 번 성 밖까지 왔다가 되돌아가므로 성 안의 사람들은 더욱 그들을 얕잡아보았다. 하루는 적이 잠깐 퇴각하는 체하다가 곧바로 군사를 돌려 헛점을 틈타 습격하였으므로 성이 금방 함락되었다. 김제갑은 굴하지 않고 전사하였는데, 처자(妻子)도 모두 따라 죽었으므로 사람들이 한 가문(家門)에 충효열(忠孝烈)이 나왔다고 하였다. 왜적이 드디어 원주에 주둔하고 군영을 지평현[17](砥平縣)까지 연결하여 경성에 이르는 길을 확보하였다.

선조수정실록》26권 선조 25년 8월 1일 中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는 김제갑 목사가 영원산성에서 왜적을 꾸짖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목사(牧使)인 김제갑(金悌甲)은 서울 사람이다. 임진왜란 때 원주 목사로 있으면서 영원성(鴒原城)으로 들어가 성을 지키고 있었는데, 하루는 왜적이 성에 이르러서 글로써 달래기도 하고, 협박하기도 하므로 김제갑이 그 사자(使者)를 목 베어 버렸다. 〈그러자 왜적이 공격해 왔는데〉 성중(城中) 사람들이 모두 이르기를, “왜적을 피하시오.”라고 하였지만 김제갑은 이르기를, “지역을 지키던 신하가 이곳을 버리고 어디로 가겠는가? 감히 피하자고 말하는 자는 목을 벨 것이다.”라고 하였다. 성이 함락되자 김제갑은 군복을 입고 의자에 걸터앉아 내려오지 않으므로 왜적이 협박하여 절하라 하였으나, 끝내 굽히지 않고 꾸짖기를 입에서 그치지 않으니, 그 아들 김시백(金時伯) 이와 더불어 함께 죽임을 당하였다. 부인 이씨(李氏)도 성에서 떨어져 죽었다. 선조 임금께서는 이조판서를 추증하시고, 지금의 임금께서 정문을 내리셨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3집 충신도(忠臣圖) 권1 제갑매적(悌甲罵賊) 中

세종실록지리지》에 '영원산 석성(靈原山石城)이 주(州) 동쪽 30리에 있다.【둘레가 6백 46보(步)이며, 샘이 2가 있는데, 사시(四時)에 마르지 아니하며, 또 창고 9간이 있다. 】'이라고 전한다.
 
 
 
 
 
 
 
 
 
 
 
 

3. 구조[편집]

 
 
 
 
 
 
 
 
 
 
 
 
영원산성은 삼각형에 가까운 부정타원형 평면을 가진 산성으로, 성벽의 길이는 약 2.4km이다. 다듬지 않은 돌을 차곡차곡 쌓아 올린 성벽이 비교적 잘 남아 있으며, 일부 구간은 높이 3m에 이른다.

동북 모서리에는 능선을 따라 이어진 용도(甬道)[18]가 남아 있어, 다른 지역과의 연락에 유리하고 남대령 방면에서 접근하는 적을 관찰하고 방어하기에 적합한 지형이다. 능선을 따라 성벽이 꺾이는 곳마다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곡성이 설치되어 있다.

성문은 남문과 북문이 확인되며, 서문지도 추정된다. 북문 동쪽에는 치성이 설치되어 방어력을 높였고, 성내에는 배수용 수구문과 건물지, 숯가마터 등이 남아 있다. 옛 기록에는 우물 한 곳과 샘 다섯 곳이 있었다고 전한다.

영원산성은 체성[19]과 여장[20]이 구분되면서도 외부에서는 그 차이를 알아보기 어려우며, 여장에 사혈[21]이 없는 점이 특징이다.
 
 
 
 
 
 
 
 
 
 
 
 

4. 기타[편집]

 
 
 
 
 
 
 
 
 
 
 
 
  • 신라 문무왕때 축조되었다고 하나, 명확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 삼국사기》에 양길이 [궁예에게] 병사를 주어 치악산(雉岳山) 석남사(石南寺)에 나가 머물면서 주변 현을 돌아다니면서 습격하여 그곳들을 모두 항복시켰다는 내용이 있어 당시 궁예가 이 산성을 이용하였던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 3차례에 걸친 발굴 조사를 통하여 남문지는 초축 후 3차례에 걸쳐 수축이 진행되었으며, 성벽도 동일한 수리가 진행된 것으로 파악되었다.
 
 
 
 
 
 
 
 
 
 
 
 

5. 외부 링크[편집]

 
 
 
 
 
 
 
 
 
 
 
 

6. 사적 제447호[편집]

 
 
 
 
 
 
 
 
 
 
 
 
영원산성은 원주의 치악산(해발 1,288m)에 위치한 돌로 쌓은 산성이다.

이 산성은 축조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신라말 가장 큰 지방세력이었던 북원(北原)의 양길(梁吉)·궁예(弓裔)와 관련되어 있는 사적으로 인식되어 왔다. 또한 고려 충렬왕 17년(1291) 원충갑(元冲甲)이 지역의 방위군과 합단(哈丹)의 침략군을 통쾌히 무찌른 곳일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 때 목사 김제갑의 지휘 아래 원주 일대의 주민들이 끝까지 항전하다가 함락되어 수많은 장졸들이 목숨을 잃은 비극의 현장이기도 하다. 그 후 이 산성은 한강 상류의 요진(要鎭)으로 한동안 경영되다가 폐허가 되었다.

이 성의 전체적인 평면은 삼각형에 가까운 불규칙한 부정타원형으로, 성벽의 총 연장은 약 2.4㎞이며, 다듬지 않은 돌덩이를 차곡차곡 쌓아올린 모습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다. 동북 모서리에서 보다 높은 산봉우리를 이어서 꼬리처럼 된 용도(甬道)를 만들었는데, 이 곳은 다른 지역과의 연락에 유리한 곳일 뿐만 아니라, 남대령(南台嶺) 방면에서 능선을 타고 접근하는 적을 쉽사리 관찰하고 공격할 수 있는 곳이다. 한편 능선상에 성벽이 꺾어지는 곳은 능선을 타고 진입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하여 곡성(曲城)을 마련하였는데, 동남쪽 성벽에 4곳, 북쪽 성벽에 4곳, 서쪽 성벽에 4곳이 있다.

옛 기록에 의하면 ‘영원성은 석축성으로 둘레 3,749척, 성내에 우물 1개, 샘이 5곳 있었으나, 지금은 폐하였다’고 한다. 지금 성안에는 남·북·서문터와 성안의 물이 배수되는 수구(水口)가 남아 있는데, 북문의 동쪽에는 치성(雉城)을 설치하여 방어력을 높이고 있다. 또한 성안에는 여러 곳에서 건물터가 확인되었으며, 세 곳에 숯가마가 남아 있다. 수습된 유물들은 고려·조선시대에 사용되었던 도자기와 기와류 등으로 그 종류와 수량은 많지 않다.

이 산성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체성(體城)과 여장(女墻)이 확실히 구분되면서도 성의 외벽에서는 구분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며, 또한 여장에 사혈(射穴)이 없다는 점이다. 아울러 축성의 형식에 있어서도 우리나라 산성 축조방식에 있어서 가장 전형적인 산성의 완전한 모습을 보여 준다. 즉, 위치의 선정, 용도 시설의 활용, 여장의 완전한 잔존, 성문과 치성의 구조 등에서 고려시대 산성의 특징을 가장 잘 알 수 있다.

원주 영원산성은 학술적으로는 중세 산성의 특징(여장, 치성, 성문 등)을 잘 보여주는 산성이며, 역사적으로는 고려·조선시대를 걸쳐 전란시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던 역사교육의 현장으로 귀중한 유적이다.
 
 
 
 
 
 
 
 
 
 
 
 
[1] 문화재청은 원주 영원산성의 축조시기를 밝히지 않았다.[2] 산성(山城)의 한 종류로, 산 정상과 능선뿐만 아니라 그 사이의 계곡까지 포함하여 성벽을 쌓은 형태.[3] 성문을 굳게 닫고 성을 지키는 것.[4] 처음 지정될 당시 사적 제447호로 지정되었다. 현재는 문화유산에 번호를 매기는 것이 유산의 중요도로 오인될 수 있음을 고려해 따로 번호를 매기지 않고 있다.[5] 고려시대 계수관시(界首官試)에 합격한 사람에 대한 호칭이 향공이었고 이어서 국자감시에 합격하면 향공진사(鄕貢進士)가 되었다.[6] 남한강과 섬강이 합류하는 원주 지역에 위치해 강을 이용하여 세금으로 거둔 곡식을 모아 개경으로 보내던 주요 조창(租倉).[7] 고려 전기의 지방관직.[8] 지방 행정의 실무를 담당했던 하급 관리 계층인 향리(鄕吏) 중, '주(州)' 단위 지방관청에 소속되어 행정을 맡아보던 이들을 지칭한다.[9] 국가가 관리들에게 월급(녹봉)으로 지급하기 위해 백성으로부터 거둔 세금으로 낸 쌀.[10] 고려 후기 왜(倭)와 몽고군, 그리고 합단(哈丹)이 침략하였을 때 산성 등 요지에 파견된 군대의 지휘관이다.[11] 옛날 군대에서 쓰던 깃발.[12] 국가가 세운 최고 교육기관인 국자감(國子監) 또는 국학(國學)에 입학하여 유학이나 기술학을 배우던 학생.[13] 특정 시기 중요한 결정을 내린 신하들.[14] 고려·조선 시대에, 각 고을을 맡아 다스리던 지방관들을 통틀어 이르는 말.[15] 역이 중앙정부 차원의 노동력 징발이었다면 상요는 지방 수령에게 필요한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16] 고려 · 조선시대에 일반 농민에게 부과되었던 부세(賦稅)이다.[17] 현재 경기도 양평 지역의 옛 이름.[18] 양쪽에 담(성벽)을 쌓아 만든 좁고 긴 길로, 주로 성곽 구조에서 성벽이 튀어나온 능선이나 지형상 성벽으로 감싸기 어려운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설치되며, 적의 침입을 방어하고 병력과 물자를 수송하는 역할을 하는 방어 시설이자 통로.[19] 성곽의 가장 기본이 되는 몸체 부분을 뜻한다.[20] 성곽에서 몸을 숨기기 위해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을 말한다.[21] 적을 공격하기 위해 밖으로 뚫어 놓은 작은 구멍이나 틈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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