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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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대 충렬왕 왕거

26대 충선왕 왕장

26대 충선왕 왕장

25대 충렬왕 왕거(복위)

26대 충선왕 왕장(복위)

묘호

없음

시호

충렬광문선덕경효대왕
(忠烈光文宣德景孝大王)

능묘

경릉(慶陵)

왕(王)

심(諶) / 거(昛)

중앙(仲昻)

몽골식 이름

불명

절일

수원절(壽元節)[1]

왕비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 정화궁주(貞和宮主)

부왕

고려 원종

모후

정순왕후(靜順王后)

생몰년도

음력

1236년 2월 26일 ~ 1308년 7월 13일

양력

1236년 4월 3일 ~ 1308년 7월 30일 (72세)

재위 기간

음력

1274년 6월 계해일 ~ 1298년 1월 갑진일 (24년)

양력

재위 기간
(복위후)

음력

1298년 8월 임신일 ~ 1308년 7월 갑인일 (11년)

양력


1. 소개2. 재위3. 양위, 그리고 복위4. 원 간섭기5. 제국대장공주6. 업적7. 아들과의 대립8. 며느리 계국대장공주 개가 책동9. 기타

1. 소개[편집]

쿠빌라이 칸의 유일한 이방인 사위
하지만 본격 '충'자 돌림이라는 굴욕시작[2]

고려의 제25대 국왕. 묘호는 없고, 시호는 충렬광문선덕경효대왕(忠烈光文宣德景孝大王). 원래 이름은 심(諶)이었는데, 왕으로 즉위한 후에 거(昛)로 개명. 원종의 맏아들. 어머니는 정순왕후. 참고로 할아버지 고종이 승하했을 때 원종은 몽골에 가있었기 때문에 부왕이 돌아오기 전까지 잠깐 섭정을 했다.

2. 재위[편집]

1260년, 아버지 원종이 즉위한 이듬해 태자에 책봉되었고 1271년 원나라에 갔으며 세조 쿠빌라이 칸의 딸인 제국대장공주와 혼인했고 1274년, 원종이 죽자 고려에 돌아와서 즉위했다. 귀국할 때 몽골식으로 머리를 변발하고 옷도 몽골식으로 입고 있어서 거리에서 보고 통곡하다가 기절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부왕 시절 원나라에 굴복한 데다가 충렬왕이 쿠빌라이 칸사위가 되면서 고려는 원나라의 부마국이 되어 원나라의 간섭이 심해졌지만, 세조구제 이후로 다루가치를 내보내고 몽골군을 철수시키며, 고려의 복식을 지키는 등 독립성을 유지하는 데 힘썼다. 또한 황제의 부마라는 위치는 상당한 것이라 쿠릴타이에 참석할 권한도 있으며[3], 원의 사신과 다루가치도 술잔을 받을 때는 절을 하고 받아야 할 정도로 함부도 굴지 못했다.

쿠빌라이는 원종 시절부터 일본을 공격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일본 정벌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결국 즉위하자마자 쿠빌라이는 일본 원정을 실시하여 흔도를 사령관으로 일본에 파견했고, 충렬왕 즉위 원년(1274년) 고려도 김방경을 사령관으로 한 일본 원정군을 파견했다. 고려군은 나름대로 선전했지만 잘 알려진 태풍[4] 때문에 일본 정벌은 실패로 돌아갔고, 이후 1281년에도 재차 침공했지만 이 역시 태풍으로 실패했다. 근데 이 두 원정은 모두 여름에 행해졌다. 굳이 왜 매년 태풍이 몰려오는 여름을 택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각에서는 사실은 원나라 엿먹이기 위한 고려의 술책이었다고 보는 설도 있다. 흠좀무. 이 원정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 항목을 참고할 것.

어쨌든 이 원정 준비 때문에 고려는 재정적으로 큰 손해를 입었으며 전쟁 물자 징발로 백성들의 삶은 더 피폐해졌다. 특히 제주도에 군마를 키우기 위한 목마장을 설치했는데, 이 때문에 제주도이 많아졌다고 한다. 또한 1290년에는 원나라의 반란 세력이 고려를 공격하는 카다안의 침입이 일어났다. 이때 충렬왕의 태도는 가히 가관인데, 자세한 부분은 항목 참조. 몽골의 침입은 끝났지만 아주 수난이 많은 시기였다.

다만 원나라 역시 고려가 망하는 걸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쟁 물자에 대한 지불은 확실히 했으며, 1291년엔 고려에 기근이 들자 10만 석을 공짜로 주기도 했다.

3. 양위, 그리고 복위[편집]

측근 세력들을 활용하여 왕권이 강화된 후에는 긴장감이 풀어졌는지 잔치와 매사냥을 즐기다가, 이러던 중 1297년 몽골에서 세자의 혼인을 마치고 돌아온 후 왕비 제국대장공주가 죽자 정치에 염증을 느꼈는지 1298년 아들 장(충선왕)에게 선위할 뜻을 밝히고 결국 양위하고 물러났다. 그러나 충선왕의 개혁 정책에 대한 반발과 왕실의 치정 문제(자세한 것은 아래 항목 참고)와 두 부자의 사이를 모략하는 무리가 생기는 등 여러 문제가 겹쳐 결국 7개월 만에 다시 복위했다. 충선왕은 다시 원나라로 돌아가서 충렬왕이 죽은 10년 후에야 고려에 돌아온다.

복위 후에도 충렬왕은 정치에 뜻을 잃고 사냥과 음주가무 등으로 소일하다가 복위 10년 째인 1308년 7월, 신효사에서 죽었다. 향년 73세로 고려의 역대 국왕 중 제일 장수했다[5]. 시호는 충렬광문선덕경효대왕(忠烈光文宣德景孝大王)으로 '충렬'이 원나라에서 내려준 시호라서 고려에서 붙인 시호인 경효왕(景孝王)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31대 공민왕(에서 내려준 시호)의 고려 측 시호인 경효왕(敬孝王)과 글자가 같아서인지 많이 쓰이지는 않는다. 뭔가 경자 돌림이 신라 느낌이 나기도 하다.

4. 원 간섭기[편집]

충렬왕 치세는 원 간섭기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던 시기로, 이 치세에 원의 문물과 풍습이 많이 들어왔다. 충렬왕 또한 원나라에 자주 들락거리며[6] 원의 문물제도를 받아들이는 데 앞장섰다. 관복은 몽골식으로 많이 바뀌었지만 백성들에게는 강요하지 않았다.그러나 원의 부마국이 되면서 내정 간섭을 많이 받았고, 관직명도 원의 속방에 위치에 있는 만큼 격하해야만 했으며, 원에 빌붙은 권문세족들이 토지를 많이 소유하면서 농민들의 삶은 곤궁해졌다.

의복을 몽골식으로 바꾸게 했는데 충렬왕 8년에 고려의 사신 강수형(康守衡)에게 쿠빌라이 칸이 "고려의 복색은 요즘 어떠냐??"고 묻자 “달단의[7] 의복과 모자를 입었고 조서를 맞이하든지 절일을 하례할 때에는 고려 의복을 입고 일을 봅니다."라고 대답했고, 쿠빌라이 칸은 “내가 고려 풍속은 그대로 놔두겠다고 했고[8], 이제껏 바꾸라고 내가 뭐라고 한 적도 없었는데, 왜 그렇게 갑자기 바꿨다냐?"라고 의아해했다.

문화적인 면으로는 제법 볼만한데 일연의 <삼국유사>가 완성된 시대이며, 이승휴의 <제왕운기>가 간행되는 등 문화적으로 가치 있는 서적들이 많이 간행되었다. 그리고 유명한 고려 가요 <쌍화점>이 나온 시기도 충렬왕 치세로 알려져 있다. 충렬왕 개인적으로 음악을 즐겼기에 당대에 신하들에게 노래를 자주 작곡하게 했는데 그 중 하나였다고 한다.

고려사에서는 충렬왕을 "태자 때는 학문에 충실하고 성격도 좋아서 잘 나가다가 막판에 참소하는 말이나 듣고 아들하고 싸우며 항락에 빠지는 등 완전히 시ㅋ망ㅋ한 왕"이란 식으로 평가하고 있다. 사실 충렬왕으로써도 재위 초기에는 고려를 지키기 위해 힘썼지만, 왕권이 강화된 이후로는 향락에 빠지는 등 왕으로써 무책임했던 군주였다는 비판은 피할 수 없을 듯 하다.

5. 제국대장공주[편집]

오히려 제국대장공주가 고려의 상업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녀는 1274년 15세에 충렬왕과 결혼했고, 자신의 상인을 데려와서 고려인삼, 종이, 모시 따위를 원나라가 장악한 실크로드를 통해 러시아아랍에까지 팔아먹었다. 이 때부터 고려의 물건이 세계에 본격적으로 전파되기 시작했다. 특히 결혼한 지 8년 뒤, 원나라남송을 점령하고 중국을 집어삼킨 뒤론 인삼 교역에 날개가 달렸다. 또 백성들의 삶에 관심을 가지거나, 사냥을 멈추고 정사에 힘을 쓸 것을 왕에게 간하기도 하는 등, 정작 고려인인 왕보다 훨씬 더 개념찬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9] 충렬왕 11년(1285년)에는 환관 김자정(金子廷)을 동경 부사(東京副使)로 삼았는데, 다음은 이때 충렬왕과 제국대장공주 사이에 오간 대화.

공주 : 저는 동경이 대왕의 외가 고을이라 들었는데[10] 맞나요?
충렬왕 : 그렇소.
공주가 : 그러면 그런 중요한 고을 수령에 집안에서 심부름이나 하는 사람을 임명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언제부터 고려에서 남반(南班) 출신이 그런 요직을 맡게 된 거죠?
충렬왕 : 충경왕[11] 때부터요.
공주 :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군. 대왕께서는 역시 선왕의 아드님이시네요.


하지만 결혼 생활은 정략결혼인 만큼 행복하지 못했다. 부부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었다고 한다. 또 이 여자가 좀 한 성격 하는 여자이기도 했다. 아빠가 쿠빌라이칸이고 증조부가 징기즈칸이니까... 아들(충선왕)이 태어난 것을 하례하는 연회에서 미리 설치된 높은 자리에 앉았는데, 그 연회에 마침 정화궁주 왕씨도 참석해 있었다. 충렬왕이 연회 중에 제국대장공주를 한 번 쳐다봤는데 그걸 "왜 쳐다봐요? 내가 정화궁주한테 막 대한다고 뭐, 지금 따지는 거임?" 하고는 "연회상이고 뭐고 갈아엎고, 나 내 아들 있는 데로 갈 거니까, 당장 가마 가져오라."고 생떼를 부렸다. 그녀는 과거 충렬왕의 정비였던 정화궁주 왕씨의 서열이나, 그녀와 자신의 시종 수에 관해 질투하기도 했다.

제국대장공주는 충렬왕 23년(1297년)에 3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당시 23세의 충선왕은 어머니가 죽은 이유가 충렬왕의 총애를 받던 후궁 무비(無比) 탓이라고 생각하여 주변 사람들을 잡아 죽이거나 귀양보냈고, 당시 63세이던 충렬왕은 이에 환멸을 느껴 잠시 왕위를 양위했으나 곧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6. 업적[편집]

매사냥과 여색에 너무 빠져 있어 백성들의 고충이 심해 제국대장공주가 말릴 정도였으니 왕으로서는 결코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겠지만, 그래도 확실한 업적이 있다. 20년 전 원종쿠빌라이 칸에게 받은 ‘불개토풍’의 약속과 고려의 존속을 확실히 도장 찍고 구체적으로 확약받고 왔다는 점이다.

충렬왕은 1278년 다시 원나라로 찾아가서 20년 전 약속을 빌미로 원나라 주둔군을 고려에서 철수시키고, 다루가치를 내쫓았으며 이후 원나라의 군대나 관리가 고려에 주둔하지 않게 된다.

원나라의 호구조사 요구를 거부하고 고려에서 독자적으로 하기로 했으며, 고려의 독자적인 조세징수 권한을 확답받은 것도 이 사람의 업적. 덕분에 고려의 백성들은 직접적으로 원나라에 세금을 바치지 않아도 되었다. 물론 원나라에서는 공출이라며 고려 조정에서 요청해 뜯어가긴 하지만, 적어도 백성들이 직접 매년 매년 세금을 내는 것보다는 훨씬 다행한 일이었다.

또한, 원종 때 잃어버린 땅을 돌려받은 것도 충렬왕 시기의 일이다. 1290년에 자비령 이북의 땅을, 1301년에 탐라 총관부를 원나라로부터 돌려받았다. 다만 고종 때 빼앗긴 쌍성 총관부는 돌려받지 못했는데 이것은 훗날 공민왕이 무력을 써서 탈환한다.

이후 고려의 여몽 관계가 확립된 것은 충렬왕의 업적이니 협상력 하나는 인정해야 할 듯하다.

사실 완전히 개혁과 무관했던 것은 아니다. 홍자번의 편민 18사가 이때 나왔고, 이후 고려 왕들이 개혁 조치를 위해서 설치하는 전민변정도감을 재설한 것도(최초는 원종) 충렬왕이다. 몽골은 몽골과 중국식으로 노비양천제를 실시하려고 했는데 일천제를 통해 노비를 불려나가던 권세가들 및 국왕은 이를 맹렬히 반대하여 무위로 돌렸다. 몽골 역시 크게 문제 삼지는 않아 결국 무위로 돌아갔는데 전민변정도감은 한때 해방된 노비들을 다시 노비로 되돌리는 작업을 수행했다.(...) 권문세족에 대한 견제가 이루어지긴 했으나 이 또한 국왕이 귀족들을 믿지 못하여 천출 측근들을 띄우면서 이뤄진 일로 그 측근들도 권문세족화하여 온갖 악행을 일삼았다. 편민 18사를 내놓은 홍자번도 권문세족이라, 편민18사도 수취체제 중심의 온건한 개혁이었을 뿐 아니라, 관료 부패를 지적한 부분은 대부분 지방관 등 다른 세력에게 돌리고 권문세족 관련은 사소한 부분만 언급하고 있다. 고려가 시궁창이 된 원인 중 하나는 충렬왕의 측근 정치와 무능, 부패라 해도 좋을 정도.

유학과 관련해서는 국학을 개칭했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성균관의 전신인 성균이다. 그리고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문묘가 이 시기에 만들어졌으며, 안향의 건의로 장학재단인 섬학전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원래 고려에는 예종이 설립한 장학재단 양현고가 존재하였지만, 이 시기에는 이미 너무 부실해져서 이를 대체하기 위해서 섬학전을 설치한 것이다. 고려 시대의 국학 부흥책은 거의 전시기에 걸쳐있엇지만 전시기에 걸쳐서 실패했다. 이것은 조선 시대 역시 마찬가지. 어느 시기건 국초에 아주 잠깐 관학이 일어났다가 바로 사교육에 휩쓸리고는 했다. 현대의 사교육 열풍은 짧게 잡아도 최충까지는 거슬러 올라간다. 안향에서 감 잡은 사람도 있겠지만, 성리학이 한반도에 최초 전래된 시기도 충렬왕 대이다.

다만 이 모두가 그렇게까지 효과를 보지는 못했고 이미지도 약하기 때문에, 왕으로서의 업적은 두드러지지 않는다. 공민왕 이전의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은 나름대로 개혁을 시도는 하지만 모두 좌절하고 개혁을 염증을 느끼는 전개를 탔다. 어떤 의미에서는 공민왕 역시 마찬가지. 그나마 이것은 원 성종기의 문치적인 정책이 영향을 준 것이라 여겨지기도 한다. 실제 충선왕 때의 서적 입고 및 성리학 보급은 원의 문치적 정책으로 충선왕과 만권당이 힘을 얻은 바가 컸다.

7. 아들과의 대립[편집]

충렬왕-충선왕 부자의 악연은 이미 일찌감찌 조짐이 보였다. 이미 어린 시절부터 충선왕은 부왕의 잦은 사냥에 비판적이었고, 이러한 세자를 왕은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갈등이 불거지기 시작한 것은 제국대장공주의 죽음이었다.

그 때 당시 충렬왕의 총애를 받던 무비(無比)라는 후궁[12] 이 있었는데, 왕은 그녀를 대단히 아껴서 사냥하러 갈 때도 항상 대동하고 다닐 정도였다. 당연히 제국대장공주에게 질투 및 핍박의 대상이었고, 그러던 중 제국대장공주가 죽자 당시 세자였던 충선왕원나라에서 급히 귀국하였다. 평소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충선왕은 어머니의 죽음을 평소에 미움받던 무비 등이 꾸민 소행이라 보고, 무비와 그녀의 측근 40여 명을 죽인다. 하지만 이게 실질적으로는 충렬왕의 수족을 잘라버린 것과 다름없던 것이었다. 마침 원나라 황실의 부마라는 끈도 떨어졌고 수족마저 잘린 상황에서 충렬왕은 결국 양위를 결심하고[13], 1298년 1월 세자에게 양위하였다. 그리고 충선왕은 고려 26대 왕위에 오른다.

즉위와 함께 충선왕은 대대적인 개혁 정책을 발표한다. 당장 그의 즉위 교서에만 봐도 잘 드러난다.[14] 앞으로의 개혁 방안부터 시작해 구체적인 사항까지 세세히 열거하였다. 그러한 개혁 정책 중 하나가 원나라의 간섭으로 격하된 기존 관제 복구였는데, 이것은 충분히 반원 정책으로 보일 수 있는 조치였다.[15] 결국 이러한 행동으로 인해 충선왕은 즉위한 지 불과 7개월 만에 왕위를 빼앗긴 후[16] 원나라로 끌려가고, 충렬왕이 다시 복위하게 되었다.

조선의 인조와 소현세자와의 관계랑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여기까지만 보면 부자 간의 알력이 그렇게 크게 불거지지 않지만 결국 폭발하게 되는 사건이 터지게 된다.

8. 며느리 계국대장공주 개가 책동[편집]

충렬왕-제국대장공주의 금슬이 별로 좋지 않았듯이, 충선왕-계국대장공주의 금슬도 좋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부왕보다 더 심한 편이었다.[17] 그리고 이것을 충렬왕파 신하였던 송균, 송린, 왕유소, 송방영 등이 부자간을 이간질하는데 이용하게 된다. 바로 계국대장공주충선왕이혼시키고 다른 왕족과 재혼하게끔 하여 충선왕의 즉위를 막는 것이었다. 언뜻 봐서는 무슨 상관이 있나 싶겠지만, 당시 원나라 공주의 영향력은 고려의 왕위를 좌지우지할 정도로 컸다. 당장 충렬왕이 제국대장공주 사후 양위했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리고 계국대장공주를 개가시킬 왕족으로 서흥후 왕전(王琠)이 결정되었다. 그는 본래 정화궁주의 조카로 신종의 후손이었지만, 충렬왕의 이복동생으로 요절한 시양후 태(珆)의 양자로 들어가게 됨으로서 형식적으로는 충렬왕의 조카가 되었기 때문에...... 는 페이크고 사실은 잘생겨서 그런 거다. 그가 이 계획을 어떻게 생각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계국대장공주가 있는 원나라로 가게 되었고, 결국 계국대장공주의 마음을 사로잡는데 성공한다. 흠좀무

거기다 이 일은 당시 원나라에서 원성종 테무르 칸의 뒤를 이을 후계자를 결정하는 문제에 얽히면서, 양측 모두 사생결단으로 진행된다.

당시 테무르 칸은 후계자가 없는 상태인데다 오늘 내일 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황후 브루간을 위시한 온기라트 부족[18]은 종제였던 안서왕 아난다를 옹립하려 했고, 반황후파는 황제의 조카였던 카이샨을 지지하고 있던 상황. 여기서 중요한 것은 충선왕이 카이샨과 그 동생인 아유르바르와다와 절친이었다는 것. 자연 충선왕 일파는 카이샨 형제를 지지했고 그에 반하는 충렬왕 세력은 아난다를 밀게 됨으로서, 상황은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흘러간다. 결국 신하들이 선수를 쳐서 카이샨(무종)을 옹립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충렬왕파 신하였던 송균, 송린, 왕유소, 송방연 등은 모두 처형되었다. 형식적으로는 아난다를 지지했다는 이유였지만.. 참고로 왕전도 처형되었다. 충선왕이 말렸다지만 소용없었다.

또한 계국대장공주의 개가도 당근 실패했고, 충렬왕은 모든 권한을 빼앗긴 채 쓸쓸히 고려로 귀국[19]하고 1년 후 세상을 떠난다.

9. 기타[편집]

이후의 고려의 국왕들은 모두 그의 후손이다. 창왕까지는 충선왕의 후손이며, 공양왕은 모계 쪽으로 충렬왕의 현손자가 된다.

충렬왕은 쿠빌라이 칸이 두려워서 제국대장공주와 크게 충돌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사에서 찾아볼 수 있는 제1호 공처가이다.

외할머니 최씨가 최우의 장녀다. 즉 최충헌의 먼 후손인 셈. 친고손은 아니지만 어찌되었든 고손이다. 충렬왕의 외할머니의 할아버지가 최충헌이므로.

2017년 MBC 드라마 왕은 사랑한다에서는 배우 정보석이 충렬왕 역할을 맡아 출연했다.[20]

[1] 왕태자 시절의 절일.[2] 사실 충자가 들어가는 시호를 최초로 받은 고려의 왕은 원종이다. 원종이 원나라에게 받은 시호는 충경왕이다. [3] 자기 마누라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아들보다 서열이 낮긴 했다[4] 일본에서는 카미카제라고 부른다.[5] 재위는 고종이 가장 길고, 문종이 그 다음이다.[6] 쿠빌라이 칸 사후 그 후계자인 원성종 테무르의 즉위식에 참가한 적이 있는데, 이 때 테무르가 상석에 앉고 충렬왕은 제후국의 군주로써 위에서 7번째 자리에 앉았다고 한다.[7] 타타르. 여기서는 몽골을 의미한다.[8] 고려원나라 사이의 화친 조건 가운데, 고려의 풍속과 제도를 그대로 유지한다는 불개토풍(不改土風)의 조항을 의미한다.[9] 충렬왕이 사냥 나간 곳에 따라 나가서 사냥감이 변변한 것이 없자 "국정 돌보기도 바쁜 왕을, 왜 이런 거위 새끼 한 마리 없는 곳까지 끌고 오냐??"고 호종한 신하들을 갈군다던지, 음악에 취미를 가져 내시 및 악공들과 풍류를 즐기는 충렬왕에게 "음악을 가지고 나라를 다스린다는 말을 들어본 적 없거든요?"고 해서 중지시킨다던지.[10] 충렬왕의 어머니 순경태후(順敬太后) 김씨는 경주 김씨로 김약선의 딸.[11] 충렬왕의 아버지인 원종을 말한다. 충경왕은 원에서 내린 시호.[12] 무비(시무비)는 천인이었기 때문에 정식 후궁은 아니었다. 그냥 끼고노는 비공식 첩이라 보는게 합당하다.[13] 자의도 있었겠지만 압력도 어느 정도 있었을 것이다.[14] 보통 왕의 즉위 교서는 형식적인 표현들이 대부분이었다.[15] 이것 말고도 다루가치나 정동행성 등도 개혁 대상으로 다루고 있었다.[16] 말 그대로 뺏긴 거다. 원나라의 사신이 다짜고짜 옥새를 빼앗았다.[17] 둘이 아예 별거하고 있었다. 원나라에서나 고려에서나.[18] 대대로 황후를 배출한 원나라 대의 대표적인 외척 집안[19] 당시 충렬왕과 충선왕 모두 원나라에 있었다. 거기다 충렬왕은 아들의 사저에 거처했다.[20] 재미있게도 MBC 사극인 무신에서는 외할머니 최씨의 아버지, 즉 외증조할아버지인 최우로 출연했고, 같은 MBC 사극 신돈에서는 충렬왕의 증손자 공민왕을 연기했다. 앞 뒤로 3대 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