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모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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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역은 현재 대한민국 기준
읍성 조창성  차단성·관문  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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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광객이 명소로 많이 찾는 곳은 굵게 표시함.
양주 대모산성
楊州 大母山城
Daemoseongsanseong Fortress, Yangju
[ 상세 정보 펼치기 · 접기 ]
소재지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 방성리 789번지 일원
분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성 / 성곽
면적
125,932㎡
지정연도
제작시기
삼국시대 (신라 6세기 중엽 이후)
주소
Yangju Daemosans...
양주 대모산성 성벽유구[1]
 
 
 
 
 
 
 
 
 

1. 개요2. 역사
2.1. 문헌 기록2.2. 시대별 변천2.3. 매소성 비정 논의
3. 구조 및 특징
3.1. 입지 및 규모3.2. 축성 방식3.3. 내부 시설3.4. 출토 유물
4. 주변 정보 및 관련 유적5. 같이 보기6. 외부 링크


 
 
 
 
 
 
 
 
 
 
 
 

1. 개요[편집]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 방성리와 유양동에 걸쳐 있는, 주로 화강편마암 등의 석재로 테뫼식으로 축조된 삼국시대산성이다. 사적 제526호로 지정됐으며, 일명 양주산성(楊州山城)으로도 불린다. 해발 212m인 대모산 정상부를 감싸며, 한강 유역과 임진강 유역을 연결하는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하여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관방시설로 기능했다.

특히 나당전쟁 당시 신라가 당나라 군대를 크게 격파한 매소성(買肖城)의 유력한 후보지로 알려져 있다.[2] 2023년 성내 집수시설에서 후삼국시대 태봉의 연호와 '무등'이라는 인명이 기록된 목간이, 2025년 11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백제시대 목간(439년 추정)이 발견돼 학계의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3]
 
 
 
 
 
 
 
 
 
 
 
 

2. 역사[편집]

 
 
 
 
 
 
 
 
 
 
 
 

2.1. 문헌 기록[편집]

 
 
 
 
 
 
 
 
 
 
 
 
대모산성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은 삼국시대 문헌에서는 명확히 확인되지 않으나, 지리적 위치와 고고학적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여러 역사적 사건과의 연관성이 논의되고 있다.

우선 『삼국사기』에 따르면 나당전쟁 당시 주요 격전지였던 매소성(買肖城)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유력하다. 『삼국사기』 지리지 한산군조에는 매성이 원래 고구려의 매성현(買省縣)이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만기요람』, 『경기지(京畿誌)』, 『경기읍지(京畿邑誌)』, 『여도비지(輿圖備志)』, 『대동지지(大東地志)』 등 다수의 조선시대 문헌에서 '양주 대모성산(大母城山)' 또는 '대모산성(大母山城)'이라는 명칭으로 꾸준히 기록되어 있어, 조선시대에도 이 산성의 존재와 중요성이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비롯하여 18세기 『지승(地乘)』, 『해동지도(海東地圖)』 등 다수의 고지도에도 그 위치가 명확히 표시되어 있다.
 
 
 
 
 
 
 
 
 
 
 
 

2.2. 시대별 변천[편집]

 
 
 
 
 
 
 
 
 
 
 
 
양주 지역은 한강과 임진강을 잇는 전략적 요충지로, 삼국시대부터 치열한 영토 각축장이었다.

백제의 경우, 기존에는 5세기 중엽까지 백제의 영역에 속했을 것으로 추정되어 왔으나, 15차 발굴조사에서 439년(기묘년)으로 추정되는 목간과 백제 토기류가 출토됨에 따라 한성백제 시기 대모산성이 백제의 실효적 지배하에 있었음이 고고학적으로 입증되었다. 특히 북서쪽 하단부 일대에서 5세기 이전 백제시대 저습지 및 수리시설 유구가 밀도 있게 발견된 점은 당시 백제의 활발한 점유 활동을 증명한다. 이후 장수왕의 남진 정책으로 고구려가 6세기 중엽까지 점령하여 '매성현(買省縣)'이라는 행정구역을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발굴조사 과정에서 고구려계 토기와 기와 등 관련 유물이 출토되어 고구려의 점유 사실을 뒷받침한다.

신라진흥왕 대 한강 유역 진출 이후 이곳을 차지하여 북방 방어 및 진출의 중요 거점으로 삼았다. 남아있는 석축 성벽의 축조 양식 등으로 미루어 보아, 6세기 중엽 이후 신라에 의해 본격적으로 축성되고 개보수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나당전쟁 당시 매소성 전투가 이곳에서 벌어졌다는 설이 유력하며, 이는 신라의 삼국통일 과정에서 대모산성이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음을 보여준다. 삼국통일 이후인 남북국시대고려 시대에도 지방 행정 및 군사적 요충지로서의 기능이 유지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시대의 인화문 토기, 고려시대의 청자편 등이 출토되어 지속적인 사용 흔적을 보여준다.

특히 후삼국시대에는 태봉 정권 하에서도 북방 지역의 중요한 거점으로 활용되었다. 2023년 성내 집수시설에서 태봉의 연호와 '무등'이라는 인물명이 기록된 목간이 발견된 점이 이를 증명한다. 조선 시대에도 여전히 중요한 관방시설로 인식되었으며, 각종 지리지와 지도에 그 존재가 기록되어 있다. 임진왜란 등 국가 위기 시에는 지역 방어 거점으로 활용되었을 가능성도 있으며, 출토 유물 중에는 조선시대 분청사기 및 백자편 등이 확인된다.
 
 
 
 
 
 
 
 
 
 
 
 

2.3. 매소성 비정 논의[편집]

 
 
 
 
 
 
 
 
 
 
 
 
대모산성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나당전쟁의 분수령이었던 매소성 전투의 현장으로 유력하게 거론된다. 지리적으로 당시 신라와 당의 주요 교통로이자 군사적 충돌 예상 지점인 한강 북부, 임진강 남안 지역에 위치한다는 점, 고고학적으로 출토된 신라 유물의 연대와 규모 및 산성의 전략적 중요성이 매소성의 기록과 부합한다는 점이 그 근거이다. 또한 문헌 기록상 고구려의 '매성현'을 신라가 계승했을 가능성과, 매소성의 '매(買)' 자와 대모산의 '모(母)' 자의 음운학적 유사성(당시 음가)도 일부 근거로 제시된다.

다만, 일부 학자들은 연천 대전리산성 등을 매소성의 다른 후보지로 제시하기도 하며, 결정적인 명문 자료가 발견되지 않아 아직 학계의 통설로 확립된 것은 아니다.
 
 
 
 
 
 
 
 
 
 
 
 

3. 구조 및 특징[편집]

 
 
 
 
 
 
 
 
 
 
 
 

3.1. 입지 및 규모[편집]

 
 
 
 
 
 
 
 
 
 
 
 
대모산성은 해발 212m의 대모산 정상부와 북쪽으로 뻗은 능선을 따라 축조된 테뫼식 석축 산성이다. 정밀실측조사 결과 둘레는 약 726m로 확인되었다. 성벽은 대부분 붕괴되었으나, 북문지 좌우측과 동쪽 능선부 일부 구간에는 높이 3~5m, 기저부 폭 약 5~7m의 성벽이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남아있다.

전략적으로 양주시 유양동과 백석읍의 경계에 위치하여, 북서쪽으로는 광적면 일대의 평야지대와 의주로로 이어지는 고대 교통로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또한, 동쪽으로는 천보산맥을 넘어 포천 방면으로, 남쪽으로는 불곡산을 거쳐 도봉산, 북한산 방면과도 연결되는 길목을 통제할 수 있는 핵심적인 위치이다. 남쪽의 수락산 봉수대와도 시각적으로 연결될 수 있어 군사 통신에도 유리했을 것으로 보인다. 산성 주변에는 방성리 유물산포지, 유양동 지석묘, 어둔동 사지, 불곡산 보루군 등 다양한 시대의 유적이 분포하고 있어, 이 일대가 선사시대부터 역사시대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생활 공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3.2. 축성 방식[편집]

 
 
 
 
 
 
 
 
 
 
 
 
대모산성의 성벽은 주로 현지에서 수급이 용이한 화강편마암 계통의 할석(깬돌)을 이용하여 축조되었으며, 신라 산성의 특징적인 축성 기법을 잘 보여준다. 대체로 가공되지 않은 자연석을 이용하여 면을 맞추어 쌓았으며, 큰 돌을 아래쪽에 배치하고 위로 갈수록 작은 돌을 사용하여 안정감을 높였다. 일부 구간에서는 쐐기돌을 사용하여 석재 간의 결합력을 강화한 모습도 관찰된다. 또한 성벽의 외벽은 하부에서 상부로 갈수록 안쪽으로 약간 기울어지게 쌓는 내경사(퇴물림쌓기) 기법을 사용하여 구조적 안정성을 확보하고 웅장함을 더했다. 이러한 축성 방식은 5~6세기 중엽 이후 신라가 한강 유역 및 중부 지역으로 진출하면서 축조하거나 개축한 산성들, 예를 들어 서울 아차산 일대 보루군, 이천 설성산성, 보은 삼년산성, 경주 명활산성 등과 유사한 특징을 공유하며, 이는 대모산성의 현존 성벽이 신라에 의해 주도적으로 축조되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3.3. 내부 시설[편집]

 
 
 
 
 
 
 
 
 
 
 
 
수차례의 발굴조사를 통해 성 내부에서 다양한 시설물들이 확인되었다. 문지(門址)는 총 3개소(북문지, 동문지, 서문지)가 확인되었는데, 주 출입구로 추정되는 북문지는 비교적 규모가 크고 주변에서 문루의 존재를 짐작게 하는 기와가 다량 출토되었다. 동문지와 서문지는 비교적 규모가 작은 암문(暗門) 형태로 비상시 출입이나 보급로로 이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건물지는 성내 평탄지 곳곳에서 확인되었으며, 15차 발굴조사를 통해 성내 최상단부(추정 장대지)에서 나말여초 시기의 기단석렬 건물지 2동과 북동쪽 돌출부 일대에서 성벽 구간과 중복된 대형 건물지 및 원형 수혈 등이 추가로 파악되었다. 이들 건물은 병영, 창고, 지휘소 등 다양한 용도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내에서 가장 중요한 시설 중 하나인 집수시설(集水施設) 등 수리시설 유구도 다수 확인되었다. 기존 집수시설에서는 태봉 목간(2023년)과 백제 목간(2025년)을 비롯하여 다량의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15차 발굴조사가 진행된 북서쪽 하단부 일대에서는 5세기 이전 백제시대 저습지 층위를 바탕으로 목곽으로 된 방형 우물, 석축 집수시설, 도수로 등이 밀도 있게 확인되었다. 이외에도 성벽의 일부 구간을 돌출시켜 방어력을 높인 치(雉)의 흔적, 저장 구덩이, 장대지, 채석장 추정지 등이 발견되었다.
 
 
 
 
 
 
 
 
 
 
 
 

3.4. 출토 유물[편집]

 
 
 
 
 
 
 
 
 
 
 
 
발굴조사를 통해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시기의 유물이 풍부하게 출토되어, 대모산성의 오랜 역사와 복합적인 성격을 잘 보여준다.

가장 주목할 만한 유물은 목간(木簡)이다. 2025년 15차 발굴조사에서는 연대 정보가 확인된 기묘년(己卯年) 목간이 출토되었는데, 함께 발견된 백제 토기 등을 고려할 때 439년(한성백제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돼 한국 최고(最古)로 유력하다. 이는 기존에 가장 오래된 것으로 여겨졌던 서울 몽촌토성 목간(551년 이전 추정)보다 약 100년 이상 앞선 것이다. 또한 금물노(今勿奴) 목간도 발견됐는데, '금물노'는 현재의 충청북도 진천군 일대를 가리키는 고대 지명이다.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고구려 지명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 목간이 고구려 점령(475년) 이전인 439년경 유물로 추정됨에 따라, 해당 지명이 백제 혹은 토착 지명이었을 가능성(가짜 고구려어 가설)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4] 2023년에는 길이 29.6cm의 소나무 판재에 총 123자가 묵서로 기록된 태봉국 목간이 출토되어 태봉의 연호와 인명, 군사 조직 등을 연구하는 데 획기적인 자료를 제공하였다. 이외에도 주술적 의미를 담은 주부(呪符) 목간을 비롯하여 제의용으로 추정되는 복골(卜骨) 및 수골(獸骨), 다량의 백제 토기류와 목기류 등이 한데 발굴되었다.

토기류는 15차 조사에서 쏟아져 나온 한성도읍기 백제 토기 조각들을 비롯하여, 고구려계 적갈색 경질토기, 신라계 회청색 경질토기, 통일신라시대의 인화문 토기, 고려시대 청자편, 조선시대 분청사기 및 백자편 등이 혼재되어 출토되었다. 기와류 역시 삼국시대의 고구려 및 신라계 기와편부터 고려, 조선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문양의 기와가 확인되어 각 시대별 건물의 존재를 입증한다. 금속유물은 총 600점 이상 출토되었는데, 철촉·철모 등의 무기류, 철부·철겸 등의 농공구류, 재갈·등자편 등의 마구류, 청동 팔찌·도장 등의 장신구 및 생활용품이 포함되어 산성의 군사적, 행정적 기능을 보여준다. 일부 건물지 하층에서는 간돌검편, 반월형 석도 등 청동기시대 선사시대 유물도 출토되어 이 지역의 오랜 거주 역사를 보여준다.
 
 
 
 
 
 
 
 
 
 
 
 

4. 주변 정보 및 관련 유적[편집]

 
 
 
 
 
 
 
 
 
 
 
 
대모산성 주변에는 다양한 시대의 문화유적이 분포하고 있어, 이 지역의 역사적 중요성과 문화적 층위를 더욱 풍부하게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대표적으로 고려 말~조선 초 최대의 왕실 사찰 터인 양주 회암사지 (사적 제128호), 조선시대 양주목의 관아가 있던 양주관아지 (경기도 기념물 제167호), 조선시대 지방 교육기관인 양주향교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2호) 등이 있다. 또한 대모산성과 연계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삼국시대 관방유적군인 불곡산 보루군, 삼국시대 유물이 확인되는 방성리 유물산포지, 청동기 및 고려시대 유적인 유양동 유물산포지 및 지석묘, 통일신라와 고려시대 흔적이 남은 어둔동 유물산포지 및 사지 등이 인접해 있다. 이외에도 유양동 말무덤, 백화암, 금화정, 윤규묘, 숙의 홍씨 묘역 등 다수의 문화유적이 산재해 있다.
 
 
 
 
 
 
 
 
 
 
 
 

5. 같이 보기[편집]

 
 
 
 
 
 
 
 
 
 
 
 

6. 외부 링크[편집]

 
 
 
 
 
 
 
 
 
 
 
 
[1]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2]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15년(675년)조 기록 및 지리적 위치 등을 근거로 한다.[3] 양주 대모산성서 1500년 전 '기록' 나왔다…"가장 오래된 목간", 연합뉴스, 2025-11-20[4]세종실록』 권149 지리지 충청도 청주목 진천현조(鎭川縣條). "本高句麗 今勿奴郡, 一云萬弩郡 新羅改名黑壤郡... 胎靈山 新羅眞平王時, 萬弩郡太守金舒玄之妻萬明姙身, 二十月生子, 名曰庾信, 藏胎於縣南十五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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