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암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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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 입암산성 長城 笠岩山城 Ibamsanseong Fortress, Jangseong | |
소재지 | |
분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성 / 성곽 |
수량/면적 | 1,359,079㎡ |
시대 | |
소유자 | 국가유산청 등 |
관리자 | |
지정일 | 1993-11-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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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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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 |
노령산맥을 따라 전라남도 장성군과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의 경계에 위치하며, 입암산의 험준함과 전남과 전북의 경계라는 특성 상 예로부터 호남 내륙을 방어하는 핵심 군사 요충지였다. 입암산성은 계곡 전체를 성벽으로 감싸는 포곡식 산성으로, 둘레는 약 5.2km이고 남아있는 부분은 3.2km 정도다. 성벽의 높이는 평군적으로 3m 정도다. 성 안에는 우물과 연못, 창고, 관아 건물 등이 갖추어져 있어 전쟁 시 주민과 군사가 함께 장기간 농성할 수 있도록 설계된 것이 특징이다.
정확히 언제 축조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1256년(고려 고종 43) 송군비 장군이 몽골군과 싸워 승리한 기록이 등장한다. 이를 통해 적어도 고려 중기 이전부터 산성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시대에는 1410년(태종 10년)에 왜구에 대비하기 위해 다른 성들과 함께 대대적인 보수가 이루어졌다. 이후 1434년(세종 16년)에 연해주 지역이 안정됨과 함께 읍성의 중요성이 대두되어 폐성되었다.
임진왜란 시기인 1593년 장성현감 이귀가 다시 수축하였으며, 당시 별장(別將)[1] 윤진(尹軫)이 입암산성에서 왜군에 맞서 산성을 방어하다 전사하였으며, 현재 산성 안에는 그의 충절을 기리는 순절비가 남아 있다. 이후 여러 차례 증축과 개축이 진행되었다가 1894년(고종 31년) 이후에 폐성된 것으로 보인다.
정확히 언제 축조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1256년(고려 고종 43) 송군비 장군이 몽골군과 싸워 승리한 기록이 등장한다. 이를 통해 적어도 고려 중기 이전부터 산성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시대에는 1410년(태종 10년)에 왜구에 대비하기 위해 다른 성들과 함께 대대적인 보수가 이루어졌다. 이후 1434년(세종 16년)에 연해주 지역이 안정됨과 함께 읍성의 중요성이 대두되어 폐성되었다.
임진왜란 시기인 1593년 장성현감 이귀가 다시 수축하였으며, 당시 별장(別將)[1] 윤진(尹軫)이 입암산성에서 왜군에 맞서 산성을 방어하다 전사하였으며, 현재 산성 안에는 그의 충절을 기리는 순절비가 남아 있다. 이후 여러 차례 증축과 개축이 진행되었다가 1894년(고종 31년) 이후에 폐성된 것으로 보인다.
전라도를 방어하는데 중요한 곳으로 노령산맥에 이어져 전북특별자치도 정읍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산성이다. 높이 626m인 입암산의 계곡 능선을 따라 만든 포곡식 산성으로 약 3.2㎞정도 남아 있다. 입암산성은 많은 고문헌에 기록이 남아 있으나 초축에 대하여는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은 없고, 산성에 대한 최초 기록은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서 확인되는데, 1256년(고종 43)에 송군비장군이 몽고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어 고려시대 이전부터 성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조선시대 태종 9년(1409)에 고쳐 쌓고 훗날 이귀와 이귀형이 성의 폭을 넓히고 낮은 곳을 높이 쌓았다. 현재 남문과 북문은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성벽은 수직에 가까우며 물을 막아 충분한 양의 물을 준비해 오랜 시간 성을 지킬 수 있도록 한, 조선 후기 방어시설의 대표적인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
장성 입암산성 長城 笠巖山城 사적 장성군 북하면 신성리 산20-2 예부터 전라도를 방어하는 요충지 역할을 했다. 입암산(626m)의 높고 험한 산세와 물이 풍부하여 산성 축조에 유리한 조건을 갖췄다. 해발 600m 내외에 형성된 포곡식(包谷) 산성(계곡을 감싸고 산 능선을 따라 쌓은 성)이다. 성벽은 협축법(夾築法, 앞 뒤 모두를 돌로 쌓은 형식)으로 쌓았다. 평면 형태는 장축방향 북서-남동쪽으로 타원형에 가깝다. 처음 쌓은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이 성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고려사』 에 나온다. 고종 43년(1256) 3월 기사에 몽고군이 전라도 지역을 공격하자 송군비(宋君斐) 장군이 입암산성에서 승전했다는 내용이다. 이후 조선시대에는 잦은 왜구 침입으로 성의 중요성이 커졌던 듯 여러 문헌에서 위치, 규모, 형태, 수축과정 등 많은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당시 성과 관련된 시설은 치첩(雉堞, 성위에 낮게 쌓은 담), 문 2개 소(북문, 남문), 장대(將臺, 장수가 지휘하던 곳) 등이, 성 안에는 진헌(進獻, 관청), 거안관(居安館, 숙소), 군기고(軍器庫, 무기 창고), 군량고(軍糧高, 양식 창고), 안국사(安國寺, 절), 우물 10개소 등이 있었다. 성은 별장(別莊, 무관으로 성의 수장)이 관할했다. 정유재란 때는 이곳에서 별장 윤진(尹軫, 1548~1597)이 왜적과 싸우다 순직하기도 했다. 2006년 정비 · 복원의 고증자료 확보를 위한 남문지 발굴조사를 실시한 바 있다. 그 결과 남문지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이고, 두 번 이상 고쳐 쌓았음을 밝혀냈다. 성벽의 전체 길이는 약 5,200m로 동벽과 북벽 구간이 보존 상태가 좋다. 고려시대~조선시대에 이르는 전남의 대표적 입보산성(立保山城 주변 고을 사람들과 군인들이 식량과 생활도구를 챙겨 들어가 적이 물러갈 때까지 살면서 방어하는 산성)으로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높은 호국 유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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