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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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산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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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문성 關門城 Gwanmunseong Fortres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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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문성 터[1] |
성덕왕 21년, 모벌군(毛伐郡)에 성을 쌓아 일본이 노략질하는 길을 막았다.
개원(開元) 10년 임술(서기 722)에 비로소 모화군(毛火郡)에 관문(闕門)을 쌓았다. 지금의 모화촌(毛火村)으로 경주(慶州) 동남쪽 경계에 속하는데, 일본(日本)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요새였다. 둘레가 6,792보 5자였으며, 동원된 인부는 39,262명으로 감독자는 원진(元眞) 각간(角干)이었다.
관문성은 본부 동쪽 45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6,799척이다. 지금은 허물어졌다.
(중략)
임관군 부의 동쪽 45리에 있다. 성덕왕 때에 모화군에 성을 쌓아 일본이 침략해 오는 길을 막았는데, 경덕왕이 임관이라 고쳐 불렀다. 고려시대에 주에 예속시켰다. 석성의 남은 터가 아직까지 남아 있는데, 사람들이 관문이라 한다.《신증동국여지승람》 경상도 경주부 성곽조(城郭條)와 고적조(古跡條).
통일신라 성덕왕 시대에 수도 서라벌 남쪽을 왜구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지어졌다. 정확히 말하면 모벌군성(毛伐郡城)혹은 모벌관문(毛伐關門)이라 불렸으며 각간 원진이 감독하에 건설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름대로 경주 외곽을 막는 관문 역할을 했던 성으로 꽤나 유명한 요새였는지 당나라 기록에도 관문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그 나라의 산은 수십리씩 연결되어 있는데, 입구의 골짜기에 튼튼한 쇠문짝을 만들어 달고 관문(關門)이라 한다. 신라는 이 곳에 항상 궁사 수천명을 주둔시켜 지킨다.
지도를 보면 알 수 있지만 경주와 울산의 경계지점인 여기는 울산항으로 왜군이 상륙했을 때 지나쳐야 하는 좁은 협곡 지형으로 척 봐도 방어하기 좋은 요충지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현 경주 외동읍까지 왕경 경주 범위로 간주되었던 것을 볼 때[3] 이 관문성이 왕경 경주와 지방인 울산을 구분하는 경계선으로 기능했던 것으로도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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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문성을 '신라의 만리장성'으로 소개한 뉴스 영상 |
성벽 12km가 산능선을 따라 쭉 이어져 있어서 '신라의 만리장성'삼십리장성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관문성을 설명할 때 거의 언급되는 편으로 반쯤 공식 별명수준. 그런데 상당히 과장섞인 별명 같지만 가리는 나무가 산에 별로 없었던 옛날에 찍은 사진들을 보면 그럭저럭 장성스러운 느낌이 난다. 사실 조선 시대부터 이 성을 만리성(萬里城)이라고 불러왔다고 하니 현대에 급조된 별명은 아니다.
관문성(關門城)
부의 동쪽 45리 울산 경계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6799척이다. 지금은 만리성(萬里城)이라 부른다. 【이상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데 사이사이에 빠진 것을 보충했다.】《동경잡기》. 184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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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문성 옛 사진 |
마멸과 후대의 보수 등에 의해 현재 8개만 확인되고 있다. 작업 거리가 보·척·촌까지 세밀하게 기록되어 있고 각 군현이 맡은 담당 구역의 길이가 북쪽·남쪽 경계와 함께 명확하게 기록되어서, 당시 척도의 정확한 길이를 알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당시의 1보=6척, 1척=10촌이고 당척(唐尺)과 같은 약 29.4cm이었음을 알 수 있다.※
왜적의 침입으로부터 경주를 보호하기 위해 신라 성덕왕 21년(722)에 쌓은 산성이다.
원래 이름은 모벌군성(毛伐郡城)·모벌관문(毛伐關門)이었는데, 조선시대에 관문성으로 부르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박천이라는 냇물을 사이에 두고 동해를 향하여 쌓았으며, 673년에 쌓은 북형산성과 함께 경주의 동쪽을 지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관문성은 경주의 다른 산성들과 다르게 산과 산을 연결하며 길게 쌓은 특수한 방식의 산성으로, 그 규모가 12㎞에 달해 신라의 만리장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성 안에는 성문자리로 보이는 곳과 창고자리·건물자리 등이 군데군데 남아 있다.
잘 다듬은 돌과 자연석을 이용하여 쌓은 산성으로, 경주의 남산성과 비교해볼 때 성쌓기 방식에서 훨씬 발달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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