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덕여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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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내려다 본 진덕여왕릉(眞德女王陵) |
다른 여러 중고기 신라왕릉들과 달리 경주 시내에서 북쪽으로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1997년 8월에 도굴을 시도하는 사건이 있었지만 다행히 가득 메워진 흙 때문에 석실 내부까지는 진입하지 못한 것으로 확인되어 석실내부 유물이 도굴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고 한다.출처1출처2
1965년에도 도굴 시도가 있었지만 미수로 끝난 일이 있었다.출처
다만 이 고분이 진덕여왕릉으로 비정된 건 체계적인 학문이 도입되지 않았던 조선시대의 비정으로, 오늘날엔 이 고분이 실제 진덕여왕의 능이 아니라는 주장이 이근직 교수 등 학계에서 제기되고 있다. 진덕여왕 재위기간을 감안하면 앞뒤 선덕여왕릉과 무열왕릉의 중간 시대인데, 이 두 고분은 해당 왕의 능이 거의 확실하다고 인정받고 있으므로[7] 이 두 왕릉과의 공통점, 그리고 선덕여왕릉에서 무열왕릉으로 넘어가는 과정의 양식의 흐름이 보여야 하는데, 정작 고분의 축조양식을 살펴보면 우선 12지신상 둘레돌부터가 신라 하대 양식으로, 한참 후대의 것이다. 한병삼 국립중앙박물관장은 후대에 보수하여 12지신상을 설치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7세기 고분이라고 보기엔 힘들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경주 시내 방면으로 위치가 비정되는 사량부에 장사지냈다는 기록과 달리 경주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것도 있다.[C]
1997년 8월에 도굴을 시도하는 사건이 있었지만 다행히 가득 메워진 흙 때문에 석실 내부까지는 진입하지 못한 것으로 확인되어 석실내부 유물이 도굴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고 한다.출처1출처2
1965년에도 도굴 시도가 있었지만 미수로 끝난 일이 있었다.출처
다만 이 고분이 진덕여왕릉으로 비정된 건 체계적인 학문이 도입되지 않았던 조선시대의 비정으로, 오늘날엔 이 고분이 실제 진덕여왕의 능이 아니라는 주장이 이근직 교수 등 학계에서 제기되고 있다. 진덕여왕 재위기간을 감안하면 앞뒤 선덕여왕릉과 무열왕릉의 중간 시대인데, 이 두 고분은 해당 왕의 능이 거의 확실하다고 인정받고 있으므로[7] 이 두 왕릉과의 공통점, 그리고 선덕여왕릉에서 무열왕릉으로 넘어가는 과정의 양식의 흐름이 보여야 하는데, 정작 고분의 축조양식을 살펴보면 우선 12지신상 둘레돌부터가 신라 하대 양식으로, 한참 후대의 것이다. 한병삼 국립중앙박물관장은 후대에 보수하여 12지신상을 설치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7세기 고분이라고 보기엔 힘들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경주 시내 방면으로 위치가 비정되는 사량부에 장사지냈다는 기록과 달리 경주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것도 있다.[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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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덕여왕릉(眞德女王陵) 측면 십이지신상 | |
이근직 교수는 이 고분이 실제로는 신무왕의 왕릉일 것으로 비정했으며,[A] 그 외에 문성왕의 태자의 무덤이란 설도 있다.[B] 진덕여왕릉 뒷편에는 꽤나 규모가 큰 대형의 봉토분 1기가 연접해 위치하여 있는데,[11] 이 봉토분 또한 왕릉으로 본다면 같은 공작지(孔雀趾)라는 장소에 장사지냈다고 하는 문성왕과 헌안왕의 왕릉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12] 그리고 진성여왕이 삼국유사에 화장했고 모량부에 뼛가루를 뿌렸다는 기록과 진덕여왕릉이 모량부의 영역으로 추정되는 현곡면 오류리에 위치한 사실 등을 고려하여, 진덕여왕릉이 진성여왕의 뼈를 안치한 왕릉이라는 주장도 있다.[C] 물론 이근직 교수의 비정도 옛날 조선시대 문중의 비정보다는 설득력이 있지만 이마저도 지석이 출토된 것도 아닌 이상 100% 맞다고 할 수는 없다.
강인구는 1986년의 주장에 의하면 지마왕릉을 진짜 진덕여왕릉이라 주장하였고,# 박홍국 위덕대박물관장의 주장에 의하면 경주 도당산에 왕릉급 고분이 있는데, 이 고분이 진짜 진덕여왕릉이라고 주장하였다.#
강인구는 1986년의 주장에 의하면 지마왕릉을 진짜 진덕여왕릉이라 주장하였고,# 박홍국 위덕대박물관장의 주장에 의하면 경주 도당산에 왕릉급 고분이 있는데, 이 고분이 진짜 진덕여왕릉이라고 주장하였다.#
경주 시내에서 동북쪽으로 멀리 떨어진 구릉의 중간에 자리하고 있는 신라 제28대 진덕여왕(재위 647∼654)의 무덤이다.
진덕여왕은 선덕여왕의 뒤를 이은 신라의 2번째 여왕으로 본명은 승만이다. 진평왕의 동생인 국반갈문왕과 월명부인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신라의 마지막 성골 출신 왕이다. 7년간 왕으로 있는 동안 국력을 기르고 당나라와 적극적 외교를 통해 고구려와 백제를 견제하여 삼국통일의 기초를 닦았다.
무덤은 흙으로 덮은 둥근 모양이고, 아래부분에는 둘레돌을 배치하였다. 둘레돌 사이사이에는 기둥 역할을 하는 12개의 탱석을 끼워 넣었는데, 방향에 따라 12지신상을 새겼다. 그 위에는 긴 돌을 한번 더 올려 놓았는데, 뒤에 보수하여 원래의 것이 아닌 것도 있다. 둘레돌에서 일정한 간격을 두고 돌난간을 세운 듯하나 지금은 거의 다 없어져 남아있지 않다. 무덤 앞에는 이외에 별다른 석조물이 없고, 최근에 만든 통로와 축대가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654년에 왕이 죽자 ‘진덕(眞德)’이라 하고 사량부에 장사지냈다고 전한다. 사량부는 현재 경주 시내의 서남쪽 일대로 짐작되는데, 이 무덤과는 정반대 방향이다. 무덤 형식도 제33대 성덕왕 이후에 발달한 형식이고, 12지신상의 조각수법도 신라왕릉의 12지신상 중 가장 늦은 것이다. 이런 점을 들어 이 무덤이 진덕여왕의 능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신라진덕여왕릉 → 경주 진덕여왕릉)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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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재 진덕여왕을 능주로 비정하는 학설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A] 2.1 2.2 2.3 이근직(2012)[B] 3.1 3.2 배노찬(2023)[C] 4.1 4.2 4.3 전덕재, 2013 <신라 왕경에서 차지하는 왕릉의 위치 및 관계 고찰>[6] 舊 사적 제24호[7] 선덕여왕릉은 문헌에서 표현된 위치와 현 위치가 아주 부합하고, 무열왕릉은 무열왕릉비라는 확실한 증거가 있다.[11] 옛 위성사진에는 진덕여왕릉과 이 고분까지 나무가 감싸고 있어서 같이 관리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나 현재 뒷편의 봉토분은 나무에 둘러싸여 있어서 고분의 흔적을 찾기 힘들다.[12] 이 경우 문성왕과 헌안왕 외에도 같은 보리사(菩提寺) 동남쪽에 묻혔다고 기록된 헌강왕과 정강왕 또한 후보 중 하나로 비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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