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삼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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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시 시정슬로건 민선9기(1...
파주 삼릉
坡州 三陵 | Three Royal Tombs, Paju
소재지
분류
유적건조물 / 무덤 / 왕실무덤 / 조선시대
면적
1,318,078.4㎡
지정연도
시대
공릉: 1462년(세조 8년)
순릉: 1474년(성종 5년)
영릉: 1729년(영조 5년)
소유단체
관리단체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조선왕릉서부지구관리소
파주삼릉 전체보기
파주 삼릉 안내도
 

1. 개요2. 공릉(恭陵)3. 순릉(順陵)4. 영릉(永陵)5. 교통6. 둘러보기

 

1. 개요[편집]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에 위치한 조선시대 왕릉군(群)이다. 공릉(恭陵), 순릉(順陵), 영릉(永陵) 총 3개의 능이 자리잡고 있어서 공순영릉이라고도 불린다. 총 3개의 왕릉이 위치한 나름 큰 왕릉군이지만[1], 2개의 능은 젊은 나이에 일찍 요절하였던 왕비의 능(참고로 둘 다 한명회의 딸), 다른 1개의 능은 추존왕과 왕비를 모아놓은 능이고, 안장되어 있는 무덤의 주인들이 역사적으로 큰 주목을 받고 있지 못한 인물들이다 보니 동구릉이나 서오릉, 서삼릉 등 여타 조선왕릉 군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낮다.

홈페이지

파주삼릉의 조성 역사는 대략적으로 아래와 같은데, 1462년부터 1908년까지 조성이 이루어졌다.
  • 1462년(세조 8년) 해양대군의 부인인 세자빈 한씨(장순빈) 안장, 세자빈묘로 조성
  • 1470년(성종 1년) 장순빈이 장순왕후로 추존되고, 세자빈묘를 공릉(恭陵)으로 추숭
  • 1474년(성종 5년) 성종의 원비 공혜왕후 안장, 순릉(順陵) 조성
  • 1729년(영조 5년) 효장세자 안장, 세자묘로 조성
  • 1752년(영조 28년) 효장세자의 부인 현빈(賢嬪) 안장
  • 1776년(정조 즉위년) 효장세자와 현빈을 각각 진종효순왕후로 추존하고, 묘를 영릉(永陵)으로 추숭
  • 1908년(융희 2년) 진종과 효순왕후를 각각 진종소황제와 효순소황후로 높이고, 황제의 격에 맞춰서 비각의 표석을 세움

1970년 대한민국의 사적으로[2] 지정되었으며, 200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조선 장순왕후의 왕릉 | 파주 삼릉 내 1기
공릉

恭陵
파주 삼릉 공릉 능침(궁능유적...
매장지
조성형태
단릉(單陵)
매장자
조성시기
홈페이지
홈페이지 아이콘
파주 삼릉 공릉 전경(궁능유적...
공릉(恭陵) 전경

조선 제8대 국왕 예종의 정비인 장순왕후가 안장된 능이다.

1461년(세조 7년) 12월 5일에 당시 왕세자였던 해양대군(훗날 8대 왕 예종)의 부인인 왕세자빈 한씨가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인 1462년(세조 8년) 2월 25일에 파주 보시동(普施洞) 현재의 자리에 묘를 조성하였다.조선왕조실록 기사1 조선왕조실록 기사2

그러다가, 이후 1470년(성종 1년) 1월 22일에 왕세자빈 한씨를 장순왕후로 추존하고 능의 이름을 공릉(恭陵)이라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기사 그렇게 왕릉으로 격은 높아졌지만, 당시 대왕대비였던 정희왕후(세조의 왕비)의 명에 따라서 추가적인 의물(儀物)들을 가설하지 않았으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조선왕조실록 기사
파주 삼릉 공릉 능침 전경(궁...
파주 삼릉 공릉 문석인(궁능유...
공릉(恭陵)의 능침과 문석인
공릉은 왕릉의 격을 가지고 있지만, 능의 주인인 장순왕후왕세자빈의 신분에서 세상을 떠난데다가 왕릉으로 격이 올라갈 당시에도 정희왕후의 명에 따라서 왕릉의 격에 맞는 추가적인 석물을 설치하지 않아 원(園)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대표적으로 봉분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이 모두 생략되어 있으며, 무석인 1쌍이 생략되어 있고 석마와 석양, 석호도 2쌍씩이 아니라 1쌍씩만 설치되어 있다. 또한 망주석 1쌍도 생략되어 있다. 장명등은 다른 왕릉의 그것에 비해서 꽤나 높이가 낮지만, 봉분은 꽤나 큰 편이다.
공릉 비문(2012.03.22...
공릉(恭陵)의 표석
비각의 표석에는 "조선국 장순왕후 공릉(朝鮮國 章順王后 恭陵)"이라는 글씨가 전서체로 새겨져 있으며, 표석이 세워진 년도는 숭정 기원후 190년(1817년, 순조 17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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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공혜왕후의 왕릉 | 파주 삼릉 내 2기
순릉

順陵
파주 삼릉 순릉 능침(궁능유적...
매장지
조성형태
단릉(單陵)
매장자
조성시기
홈페이지
홈페이지 아이콘
파주 삼릉 순릉 전경(궁능유적...
순릉(順陵) 전경

조선 제9대 국왕 성종의 정비인 공혜왕후가 안장된 능이다.

1475년(성종 5년) 공혜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언니 장순왕후의 공릉 근처 현재의 자리에 조성되었다. 순릉은 파주 삼릉에 있는 3기의 능 중에서 유일하게 왕릉의 형식으로 조성된 능인데, 이는 공혜왕후가 공식적으로 중전의 신분에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3]
파주 삼릉 순릉 능침 전경(궁...
파주 삼릉 순릉 무석인(궁능유...
순릉(順陵)의 능침과 무석인
봉분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고, 왕릉의 형식에 맞게 문석인, 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 2쌍을 배치하였다. 또한 혼유석을 받치는 고석(鼓石)의[4] 귀면 무늬가 넓게 조각된 것이 특이하다. 능침 아래에는 정자각, 비각, 수라간, 수복방 등이 자리하고 있다.
순릉 비문(2012.03.22...
순릉(順陵)의 표석
비각에는 1개의 표석이 세워져 있다. 표석 전면에는 '조선국 공혜왕후 순릉(朝鮮國 恭惠王后 順陵)'이라는 글씨가 전서체로 음각되어 있다.
 
 
조선 진종과 효순왕후의 왕릉 | 파주 삼릉 내 3기
영릉

永陵
파주 삼릉 영릉 능침(궁능유적...
매장지
조성형태
쌍릉(雙陵)
매장자
조성시기
홈페이지
홈페이지 아이콘
파주 삼릉 영릉 전경(궁능유적...
영릉(永陵) 전경

조선 제21대 국왕 영조의 장남이자 추존 국왕인 진종 소황제[5] 그의 부인 효순소황후[6] 안장된 쌍릉. 세종대왕소헌왕후를 모신 영릉(英陵)효종인선왕후를 모신 영릉(寧陵)과는 한자가 다르니 유의하자.

1728년(영조 4년) 효장세자가 세상을 떠나자, 1729년(영조 5년)에 순릉 왼쪽 언덕인 현재의 자리에 무덤을 조성하였다. 이후 1751년(영조 27) 효순왕후가 왕세자빈(현빈)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자, 1752년(영조 28년) 효장세자묘 동쪽에 무덤을 조성하였다.

이후 1776년 영조가 사망하고 왕위에 오른 정조는 자신의 양아버지였던 효장세자[7] 왕으로 추존하고 진종(眞宗)이란 묘호를 바쳤다. 이때 효장세자묘 또한 영릉(永陵)의 능호를 받고 왕릉으로 격상되었다.

그러나 정조의 법적 아버지이자 고종의 족보상 고조부임에도 불구하고 대한제국 선포 이후 황제로 추존되진 않았는데, 이는 고종을 비롯한 당대 조정이 정조의 아버지를 효장세자가 아닌 사도세자로 인식하고 그를 장조 의황제(莊祖 懿皇帝)로 추존했기 때문이다. 결국 고종이 퇴위한 이후인 1908년, 순종이 진종을 헌종, 철종과 함께 황제로 추존하면서 비로소 진종 소황제(昭皇帝)가 되었다.
파주 삼릉 영릉 능침 전경(궁...
파주 삼릉 영릉 석마(궁능유적...
영릉(永陵)의 능침과 석물
영릉은 조성 당시 왕세자왕세자빈의 묘였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모습이 많이 간소하다. 봉분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였고 문석인, 석마, 장명등, 석상(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 각 1쌍을 배치하였다.

왕릉임에도 불구하고 석물들의 상태나 전체적인 묘제의 짜임세를 보면 정조의 생부인 사도세자융릉만도 못한 모습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정조가 친아버지인 사도세자를 더욱 신경썼기 때문이다. 법적 친아버지의 무덤이자 엄연히 왕릉이었던 진종의 영릉은 좋게 봐줘야 원(園)의 형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반면, 생부인 사도세자의 융릉은 조성 당시 왕세자의 원(園)[8]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석물들의 품질과 예술성이 원(園)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화려하고 기교가 넘치는 것을 알 수 있다.[9]
파주 삼릉 영릉 표석(세자)(...
파주 삼릉 영릉 표석(대왕)(...
파주 삼릉 영릉 표석(황제)(...
영릉(永陵)의 표석들
영릉에는 2개의 비각이 세워져 있는데, 이 안에 총 3개의 표석이 세워져 있다. 첫 번째 표석은 왕세자왕세자빈 시절의 묘비, 두 번째 표석은 왕후로 추존된 이후 세워진 것, 세 번째 표석은 황제황후로 추존된 이후 세워진 것이다. 이는 효장세자가 추존될 때마다 표석을 새로 세웠기 때문이다.

각 표석 별 전면 문구는 다음과 같으며, 모두 전서체로 음각되어 있다.
  • 첫 번째: 조선국 효장세자묘 효순현빈 부좌(朝鮮國 孝章世子墓 孝順賢嬪 祔左)
  • 두 번째: 조선국 진종대왕 영릉 효순왕후 부좌(朝鮮國 眞宗大王 永陵 孝順王后 祔左)
  • 세 번째: 대한 진종소황제 영릉 효순소황후 부좌(大韓 眞宗昭皇帝 永陵 孝順昭皇后 祔左)
 

5. 교통[편집]

 
  • 전철역에서 꽤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어서 대중교통을 이용하는데는 버스가 편하다. 전철을 이용하는 경우에는 경의중앙선 금촌역이나 수도권 전철 3호선 삼송역에서 버스를 이용하는 것이 편하다.
  • 광역버스로는 9709번 버스, 9710번 버스가 파주삼릉 근처에 정차한다.
  • 그 외 일반버스/마을버스로는 17번, 30번, 31번, 799번, 064번, 088번이 있다. 이 중 유일하게 088번만 삼릉 바로 앞까지 들어가며, 나머지는 정류장에서 내려서 약 10분 정도 걸어 들어가야 된다.
 

6. 둘러보기[편집]

 
정부상징
대한민국
사적 史蹟
⠀[1~50호]⠀
⠀[51~100호]⠀

[9]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47호로 재지정[10]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48호로 재지정[11] 경상남도 문화유산자료 제275호로 재지정[12] 울산광역시 문화유산자료 제8호로 재지정[13] 경상남도 문화유산자료 제276호로 재지정[B] 14.1 14.2 사적 제510호 고령 사부동과 기산동 요지로 통합, 재지정[C] 16.1 16.2 16.3 사적 제513호 나주 반남 고분군으로 통합, 재지정[D] 19.1 19.2 사적 제514호로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으로 통합 재지정[E] 21.1 21.2 사적 제515호 함안 말이산 고분군으로 통합 재지정
⠀[101~150호]⠀
⠀[151~200호]⠀
⠀[201~250호]⠀
⠀[251~300호]⠀
⠀[301~350호]⠀
⠀[351~400호]⠀
⠀[401~450호]⠀
⠀[451~500호]⠀
⠀[501호~550호]⠀
⠀[번호폐지 이후(번호없음-1)]⠀
2021년 11월 19일부로 번호 지정제 폐지
2021.11.19 - 2026.05.14
[37] 내동리 쌍무덤. 옥야리 장동 방대형 고분 4기 총 5기
⠀[번호없음-2]⠀
2026.05.14 -
 
[1] 조선왕릉 군중에서 이보다 큰 왕릉군은 동구릉, 서오릉, 서삼릉 세 개뿐이다. 보통 왕릉군은 2개의 릉이 있는 게 대부분이며 그게 너무 많아서 이릉(二陵)이라고 불리는 곳은 없다. 2개보다 더 많은 조선왕릉군은 동구릉, 서오릉, 서삼릉, 파주삼릉이 전부다.[2] 舊 사적 제205호[3] 나머지 두 왕릉의 주인들은 모두 사후에 추존된 인물들이다.[4] 혼유석을 받치는 4개의 북 모양 석재.[5] 대한제국 선포 이후 황제로 추존되었다.[6] 남편이 황제로 추존되면서 함께 황후로 추존되었다.[7] 임오화변 이후 영조는 자신의 사후 보위에 오를 세손의 정통성 시비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정조를 효장세자의 양아들로 입적시켜버렸다.[8] 사도세자가 황제로 추존된 시기는 고종대한제국을 선포한 이후이다. 정조가 재위할 당시에는 능(陵)이 아닌 원(園)이었다.[9] 사실 정조 입장에서는 얼굴도 모르고 겨우 10살에 죽은 큰아버지 겸 양아버지에게 감정 이입이 될 리 없었을 것이다. 애초에 효장세자를 진종으로 추존한 이유도 영조가 남긴 유언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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