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주삼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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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삼릉 坡州 三陵 | Three Royal Tombs, Paju | |
소재지 | |
분류 | 유적건조물 / 무덤 / 왕실무덤 / 조선시대 |
면적 | 1,318,078.4㎡ |
지정연도 | |
시대 | |
소유단체 | |
관리단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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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삼릉 안내도 |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에 위치한 조선시대 왕릉군(群)이다. 공릉(恭陵), 순릉(順陵), 영릉(永陵) 총 3개의 능이 자리잡고 있어서 공순영릉이라고도 불린다. 총 3개의 왕릉이 위치한 나름 큰 왕릉군이지만[1], 2개의 능은 젊은 나이에 일찍 요절하였던 왕비의 능(참고로 둘 다 한명회의 딸), 다른 1개의 능은 추존왕과 왕비를 모아놓은 능이고, 안장되어 있는 무덤의 주인들이 역사적으로 큰 주목을 받고 있지 못한 인물들이다 보니 동구릉이나 서오릉, 서삼릉 등 여타 조선왕릉 군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낮다.
홈페이지
파주삼릉의 조성 역사는 대략적으로 아래와 같은데, 1462년부터 1908년까지 조성이 이루어졌다.
홈페이지
파주삼릉의 조성 역사는 대략적으로 아래와 같은데, 1462년부터 1908년까지 조성이 이루어졌다.
조선 장순왕후의 왕릉 | 파주 삼릉 내 1기 공릉 恭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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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장지 | |
조성형태 | 단릉(單陵) |
매장자 | |
조성시기 | |
홈페이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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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릉(恭陵) 전경 |
조선 제8대 국왕 예종의 정비인 장순왕후가 안장된 능이다.
1461년(세조 7년) 12월 5일에 당시 왕세자였던 해양대군(훗날 8대 왕 예종)의 부인인 왕세자빈 한씨가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인 1462년(세조 8년) 2월 25일에 파주 보시동(普施洞) 현재의 자리에 묘를 조성하였다.조선왕조실록 기사1 조선왕조실록 기사2
그러다가, 이후 1470년(성종 1년) 1월 22일에 왕세자빈 한씨를 장순왕후로 추존하고 능의 이름을 공릉(恭陵)이라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기사 그렇게 왕릉으로 격은 높아졌지만, 당시 대왕대비였던 정희왕후(세조의 왕비)의 명에 따라서 추가적인 의물(儀物)들을 가설하지 않았으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조선왕조실록 기사
1461년(세조 7년) 12월 5일에 당시 왕세자였던 해양대군(훗날 8대 왕 예종)의 부인인 왕세자빈 한씨가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인 1462년(세조 8년) 2월 25일에 파주 보시동(普施洞) 현재의 자리에 묘를 조성하였다.조선왕조실록 기사1 조선왕조실록 기사2
그러다가, 이후 1470년(성종 1년) 1월 22일에 왕세자빈 한씨를 장순왕후로 추존하고 능의 이름을 공릉(恭陵)이라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기사 그렇게 왕릉으로 격은 높아졌지만, 당시 대왕대비였던 정희왕후(세조의 왕비)의 명에 따라서 추가적인 의물(儀物)들을 가설하지 않았으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조선왕조실록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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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릉(恭陵)의 능침과 문석인 |
공릉은 왕릉의 격을 가지고 있지만, 능의 주인인 장순왕후가 왕세자빈의 신분에서 세상을 떠난데다가 왕릉으로 격이 올라갈 당시에도 정희왕후의 명에 따라서 왕릉의 격에 맞는 추가적인 석물을 설치하지 않아 원(園)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대표적으로 봉분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이 모두 생략되어 있으며, 무석인 1쌍이 생략되어 있고 석마와 석양, 석호도 2쌍씩이 아니라 1쌍씩만 설치되어 있다. 또한 망주석 1쌍도 생략되어 있다. 장명등은 다른 왕릉의 그것에 비해서 꽤나 높이가 낮지만, 봉분은 꽤나 큰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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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릉(恭陵)의 표석 |
비각의 표석에는 "조선국 장순왕후 공릉(朝鮮國 章順王后 恭陵)"이라는 글씨가 전서체로 새겨져 있으며, 표석이 세워진 년도는 숭정 기원후 190년(1817년, 순조 17년)이다.
조선 공혜왕후의 왕릉 | 파주 삼릉 내 2기 순릉 順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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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장지 | |
조성형태 | 단릉(單陵) |
매장자 | |
조성시기 | |
홈페이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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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릉(順陵) 전경 |
조선 제9대 국왕 성종의 정비인 공혜왕후가 안장된 능이다.
1475년(성종 5년) 공혜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언니 장순왕후의 공릉 근처 현재의 자리에 조성되었다. 순릉은 파주 삼릉에 있는 3기의 능 중에서 유일하게 왕릉의 형식으로 조성된 능인데, 이는 공혜왕후가 공식적으로 중전의 신분에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3]
1475년(성종 5년) 공혜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언니 장순왕후의 공릉 근처 현재의 자리에 조성되었다. 순릉은 파주 삼릉에 있는 3기의 능 중에서 유일하게 왕릉의 형식으로 조성된 능인데, 이는 공혜왕후가 공식적으로 중전의 신분에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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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릉(順陵)의 능침과 무석인 |
봉분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고, 왕릉의 형식에 맞게 문석인, 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 2쌍을 배치하였다. 또한 혼유석을 받치는 고석(鼓石)의[4] 귀면 무늬가 넓게 조각된 것이 특이하다. 능침 아래에는 정자각, 비각, 수라간, 수복방 등이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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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릉(順陵)의 표석 |
비각에는 1개의 표석이 세워져 있다. 표석 전면에는 '조선국 공혜왕후 순릉(朝鮮國 恭惠王后 順陵)'이라는 글씨가 전서체로 음각되어 있다.
조선 진종과 효순왕후의 왕릉 | 파주 삼릉 내 3기 영릉 永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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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장지 | |
조성형태 | 쌍릉(雙陵) |
매장자 | |
조성시기 | |
홈페이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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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릉(永陵) 전경 |
조선 제21대 국왕 영조의 장남이자 추존 국왕인 진종 소황제와[5] 그의 부인 효순소황후가[6] 안장된 쌍릉. 세종대왕과 소헌왕후를 모신 영릉(英陵)과 효종과 인선왕후를 모신 영릉(寧陵)과는 한자가 다르니 유의하자.
1728년(영조 4년) 효장세자가 세상을 떠나자, 1729년(영조 5년)에 순릉 왼쪽 언덕인 현재의 자리에 무덤을 조성하였다. 이후 1751년(영조 27) 효순왕후가 왕세자빈(현빈)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자, 1752년(영조 28년) 효장세자묘 동쪽에 무덤을 조성하였다.
이후 1776년 영조가 사망하고 왕위에 오른 정조는 자신의 양아버지였던 효장세자를[7] 왕으로 추존하고 진종(眞宗)이란 묘호를 바쳤다. 이때 효장세자묘 또한 영릉(永陵)의 능호를 받고 왕릉으로 격상되었다.
그러나 정조의 법적 아버지이자 고종의 족보상 고조부임에도 불구하고 대한제국 선포 이후 황제로 추존되진 않았는데, 이는 고종을 비롯한 당대 조정이 정조의 아버지를 효장세자가 아닌 사도세자로 인식하고 그를 장조 의황제(莊祖 懿皇帝)로 추존했기 때문이다. 결국 고종이 퇴위한 이후인 1908년, 순종이 진종을 헌종, 철종과 함께 황제로 추존하면서 비로소 진종 소황제(昭皇帝)가 되었다.
1728년(영조 4년) 효장세자가 세상을 떠나자, 1729년(영조 5년)에 순릉 왼쪽 언덕인 현재의 자리에 무덤을 조성하였다. 이후 1751년(영조 27) 효순왕후가 왕세자빈(현빈)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자, 1752년(영조 28년) 효장세자묘 동쪽에 무덤을 조성하였다.
이후 1776년 영조가 사망하고 왕위에 오른 정조는 자신의 양아버지였던 효장세자를[7] 왕으로 추존하고 진종(眞宗)이란 묘호를 바쳤다. 이때 효장세자묘 또한 영릉(永陵)의 능호를 받고 왕릉으로 격상되었다.
그러나 정조의 법적 아버지이자 고종의 족보상 고조부임에도 불구하고 대한제국 선포 이후 황제로 추존되진 않았는데, 이는 고종을 비롯한 당대 조정이 정조의 아버지를 효장세자가 아닌 사도세자로 인식하고 그를 장조 의황제(莊祖 懿皇帝)로 추존했기 때문이다. 결국 고종이 퇴위한 이후인 1908년, 순종이 진종을 헌종, 철종과 함께 황제로 추존하면서 비로소 진종 소황제(昭皇帝)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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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릉(永陵)의 능침과 석물 |
영릉은 조성 당시 왕세자와 왕세자빈의 묘였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모습이 많이 간소하다. 봉분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였고 문석인, 석마, 장명등, 석상(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 각 1쌍을 배치하였다.
왕릉임에도 불구하고 석물들의 상태나 전체적인 묘제의 짜임세를 보면 정조의 생부인 사도세자의 융릉만도 못한 모습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정조가 친아버지인 사도세자를 더욱 신경썼기 때문이다. 법적 친아버지의 무덤이자 엄연히 왕릉이었던 진종의 영릉은 좋게 봐줘야 원(園)의 형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반면, 생부인 사도세자의 융릉은 조성 당시 왕세자의 원(園)[8]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석물들의 품질과 예술성이 원(園)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화려하고 기교가 넘치는 것을 알 수 있다.[9]
왕릉임에도 불구하고 석물들의 상태나 전체적인 묘제의 짜임세를 보면 정조의 생부인 사도세자의 융릉만도 못한 모습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정조가 친아버지인 사도세자를 더욱 신경썼기 때문이다. 법적 친아버지의 무덤이자 엄연히 왕릉이었던 진종의 영릉은 좋게 봐줘야 원(園)의 형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반면, 생부인 사도세자의 융릉은 조성 당시 왕세자의 원(園)[8]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석물들의 품질과 예술성이 원(園)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화려하고 기교가 넘치는 것을 알 수 있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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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릉(永陵)의 표석들 | ||
영릉에는 2개의 비각이 세워져 있는데, 이 안에 총 3개의 표석이 세워져 있다. 첫 번째 표석은 왕세자와 왕세자빈 시절의 묘비, 두 번째 표석은 왕과 왕후로 추존된 이후 세워진 것, 세 번째 표석은 황제와 황후로 추존된 이후 세워진 것이다. 이는 효장세자가 추존될 때마다 표석을 새로 세웠기 때문이다.
각 표석 별 전면 문구는 다음과 같으며, 모두 전서체로 음각되어 있다.
각 표석 별 전면 문구는 다음과 같으며, 모두 전서체로 음각되어 있다.
- 첫 번째: 조선국 효장세자묘 효순현빈 부좌(朝鮮國 孝章世子墓 孝順賢嬪 祔左)
- 두 번째: 조선국 진종대왕 영릉 효순왕후 부좌(朝鮮國 眞宗大王 永陵 孝順王后 祔左)
- 세 번째: 대한 진종소황제 영릉 효순소황후 부좌(大韓 眞宗昭皇帝 永陵 孝順昭皇后 祔左)
⠀[1~50호]⠀⠀[51~100호]⠀
⠀[101~150호]⠀⠀[151~200호]⠀⠀[201~250호]⠀⠀[251~300호]⠀⠀[301~350호]⠀⠀[351~400호]⠀⠀[401~450호]⠀⠀[451~500호]⠀⠀[501호~550호]⠀⠀[번호폐지 이후(번호없음-1)]⠀⠀[번호없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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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왕릉 군중에서 이보다 큰 왕릉군은 동구릉, 서오릉, 서삼릉 세 개뿐이다. 보통 왕릉군은 2개의 릉이 있는 게 대부분이며 그게 너무 많아서 이릉(二陵)이라고 불리는 곳은 없다. 2개보다 더 많은 조선왕릉군은 동구릉, 서오릉, 서삼릉, 파주삼릉이 전부다.[2] 舊 사적 제205호[3] 나머지 두 왕릉의 주인들은 모두 사후에 추존된 인물들이다.[4] 혼유석을 받치는 4개의 북 모양 석재.[5] 대한제국 선포 이후 황제로 추존되었다.[6] 남편이 황제로 추존되면서 함께 황후로 추존되었다.[7] 임오화변 이후 영조는 자신의 사후 보위에 오를 세손의 정통성 시비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정조를 효장세자의 양아들로 입적시켜버렸다.[8] 사도세자가 황제로 추존된 시기는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이후이다. 정조가 재위할 당시에는 능(陵)이 아닌 원(園)이었다.[9] 사실 정조 입장에서는 얼굴도 모르고 겨우 10살에 죽은 큰아버지 겸 양아버지에게 감정 이입이 될 리 없었을 것이다. 애초에 효장세자를 진종으로 추존한 이유도 영조가 남긴 유언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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