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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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역대 국왕

3대 태종 이방원

4대 세종 이도

5대 문종 이향

파일:세종대왕.jpg

세종대왕, 1976년[1], 운보 김기창

묘호

세종(世宗)

시호


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
(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

장헌(莊憲)

능묘

영릉(英陵)

본관

전주(全州)

막동(莫同, 아명)/이도(李祹)

원정(元正)

출생지

한성 준수방 정안군 사저[2]
(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통인동 부근)

사망지

한성 영응대군저 동별궁

배우자

소헌왕후(昭憲王后)

아버지

조선 태종

어머니

원경왕후(元敬王后)

생몰
기간

음력

1397년(태조 6년) 4월 10일 ~ 1450년 2월 17일

양력

1397년 5월 7일 ~ 1450년 3월 30일
(52년 10개월 23일, 1만 9,319일.)

재위
기간

음력

1418년 8월 10일 ~ 1450년 2월 17일

양력

1418년 9월 9일 ~ 1450년 3월 30일
(31년 6개월 21일, 1만 1,525일.)

종교

불교[3]

1. 개요2. 진정한 군왕이 되기까지
2.1. 즉위 전2.2. 즉위 후
3. 세종대왕의 업적4. 가족5. 특이한 기록들6. 사건
6.1. 한성 대화재
7. 비판8. 세종대왕의 용안?9. 오늘날의 세종대왕
9.1. 영릉9.2. 익선관 발견 해프닝9.3. 사극
9.3.1. 세종대왕을 연기한 배우들
9.4. 문명 5에서의 세종
10. 이모저모
10.1. 세종에 대한 어록
11. 관련 항목

1. 개요[편집]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튼튼해야만 나라가 평안하게 된다.


『세종실록』 1441년 12월 17일.


한국사 최고의 성군

조선의 제4대 임금. 태종 이방원원경왕후 민씨의 셋째 아들이며, 이름은 도(祹), 자는 원정(元正). 존시는 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 아명은 막동(莫同)이었다고 한다. 물론 막내라는 뜻. 막내 동생인 성녕대군 종이 한참 터울을 두고 태어났기 때문에 꽤 오랜 기간 동안 막내였다.

고려 왕조에서 신하로 일하다가 왕위에 오른 세 선왕과 달리, 조선시대에 조선사람으로 태어나 왕위에 오른 첫 임금이다. 양력 생일 1397년 5월 7일(율리우스력), 그레고리력으로는 5월 15일이다. 스승의 날이 탄신일인데, 실제로 스승의 날은 세종대왕이 태어난 날에서 따와 만든 것이다. 글자를 만들어 백성들을 깨우친 한민족의 큰 스승이라는 뜻으로.

한국인이 사용하는 글자인 훈민정음(한글)을 창제한 인물광개토대왕, 이순신, 안중근 등 한국인들이 우리 역사 속 훌륭한 인물들 중에서도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힌다. 광개토대왕과 함께 대왕이라는 칭호를 받은 유이한 왕이다.[4]

2. 진정한 군왕이 되기까지[편집]

2.1. 즉위 전[편집]

조선의 역대 왕세자

양녕대군 이제

세종 이도

문종 이향 (왕세자)

단종 이홍위 (왕세손)

작위

충녕대군(忠寧大君) / 왕세자(王世子)

도(祹)

원정(元正)

세자책봉

1418년

국왕 즉위

1418년 8월

생몰년

1397년 ~ 1450년


1408년에 충녕군에, 1413년에 충녕대군에 봉해졌다. 왕자 시절부터 이미 될 성 부른 떡잎을 보여, 한 번 잡은 책은 닳아 없어질 때까지 읽었다고 한다. 원래, 왕자는 종친일 뿐 과거를 봐서 벼슬길에 오를 수도 없었기 때문에 뛰어난 재주가 안쓰러웠던 태종은 아들의 취미생활들을 전적으로 지원해줬다고 한다. 덕분에 학문은 물론 미술, 음악, 수석까지 다양한 부분을 섭렵했고 오히려 대군이었기 때문에 제한받지 않고 다양한 분야를 공부하였으므로 다양한 분야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대군으로서의 생활이 다재다능한 왕으로서의 실력을 키워주는 데 복이 된 셈.

셋째 왕자이기 때문에 본래 왕위계승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첫째 왕자(폐세자 양녕대군)가 평소의 망나니, 개차반 짓 때문에 끝내 폐세자가 되고, 그전부터 영특하고 어질기로 유명했던 충녕대군이 왕통을 잇게 되었다. 일부에선 세자가 일부러 양보했다고 하나, 실상은 지나친 말종 짓 때문에 끝내 태종이 그를 비호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이후에도 양녕대군은 제 버릇 못 고치고 여전히 망나니짓을 하며 세종의 속을 긁었고, 긁은 정도로 끝나는 게 아니라 왕족의 위신을 떨어뜨려서 재위기간 초기에 세종의 약점이 되기까지 했다.[5] 그러나 세종의 힘이 점점 강해지면서 도리어 양녕대군의 처우도 점점 좋아졌다.

아버지 이방원피비린내 나는 쟁탈전으로 왕위를 차지하며 왕통을 세우려고 했으나, 결국 자식농사가 뜻대로 되지 않아 장자계승의 원칙을 버려야 했다는 것, 태종 이방원은 양녕대군을 계속 왕위에 올리려 했지만 양녕대군의 계속되는 망나니짓에 포기하고 말았다고 한다. 장자계승의 원칙을 버린 그 결과 한국사 최고의 성군이 나왔다는 점에서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낄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선왕이 외척, 친척, 공신 가리지 않고 걸림돌 될 거 같으면 싹 다 조져놨으니 그 카리스마에 나댈 수가 있나. 개기는 놈이 없으니 좋은 정책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이다. 태종이 상왕으로서 왕위에서만 물러나 세종의 보디가드 역할을 해준 것도 신의 한수.

한편, 둘째인 효령대군은 평생 부처를 받드는 선비가 되었다.[6] 효령대군이 차남임에도 불구하고 왕위계승에서 동생 세종에게 밀린 이유는 공식적으로는 을 못 마셔서. 태종에 따르면, "술은 너무 많이 마셔도 안 되지만, 못 마셔도 문제가 되는데 전에 사신들이 왔을 때 보니까, 효령대군이 술을 잘 못 하는데 충녕대군은 마신다"는 이유였다. 원래부터 불가에 뜻이 있기 때문에 계승권에 관심이 없었다는 해석도 일리가 있다.[7]

보통 위인전에서는 세종대왕이 왕자 시절 사심 없이 그저 공부만 열심히 해서 태종의 눈에 들어 왕이 된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어느 정도 왕자들 간 암암리에 경쟁 의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크게 3가지 모습에서 확인할 수 있다.

  • 첫째로 세자가 기행과 방탕함으로 입지가 약화되어 가고 있을 때에 맞추어, 충녕이 공적인 자리에서 총명함을 드러내었다. 이때마다 어김없이 태종이 칭찬하고 신하들이 칭찬하는 분위기로 흘렀고, 이는 세자의 심기를 많이 건드렸다.

  • 둘째로 세자의 망동에 대놓고 직언으로 간하기도 했다. 세자가 매형인 이백강이 거느린 기생을 데려가려 하자, 한 집안에서 뭐하는 짓이냐고 꾸짖으며 "할머니(신의왕후 한씨)의 제삿날에 소인배들하고 어울려서 놀다니 이건 또 뭐하는 짓인가?"하고 디스한 것이 대표적. 또 한 번은 "나 새 옷 장만했다." 라고 자랑하는 세자에게 먼저 마음을 갈고 닦으라고 충고했으며, 옆에 있는 신하들도 대군의 말이 맞는다며 모두 세자를 까는 등 속을 있는 대로 다 긁었다. 열받은 세자가 태종에게 "그래봐야 말만 번지르르하지, 충녕은 심약한 놈이 틀림없다"고 헐뜯자 태종이 "충녕, 그 아이가 겉으론 유약해도 결단력에서 있어서 당할 자가 없다!" 라고 오히려 두둔. 대충 보면 알겠지만 누구라도 욕할 짓만 세자가 골라 했다. 이런 일은 실록에 자주 나타난다.

  • 셋째가 아주 결정적이다. 충녕은 자신의 집에서 1차 왕자의 난 당시에 살해된 남은의 형이자 태종이 즉위하는 데 큰 공을 세운 남재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연회 도중 남재가 갑자기 충녕에게 "제가 예전에 잠저 시절의 주상(태종)께 학문을 권했더니 '왕위도 못잇는데 학문은 해서 뭐합니까?' 라고 하셔서 '임금의 아들이라면 왕위에 오를수 있지 않겠습니까?' 라고 한적이 있었습니다. 대군께서 학문을 좋아하시니 기쁩니다" 라는 말을 했다. 이 때 남재와 충녕 두 사람만 있던 것도 아니고 연회에 참석한 다른 사람들이 다 듣고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충녕대군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정상적인 케이스라면 "헐, 당신 지금 제정신이야?" 하고 꾸짖어야 했지만, 충녕은 태종에게 보고하는 것으로 끝냈고 태종은 "그 늙은이 과감하구나!" 하고 껄껄 웃을 뿐이었다.[8] 만일 충녕이 꾸짖고 부왕에게 고발했다면 남재는 사형감, 그렇지 않더라도 의금부에 끌려가 죽도록 고문을 당하고 멀리 귀양살이를 할 일이다.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왕실에선 사석이든 공석이든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목숨을 좌지우지 할 수도 있는 것이 정치판이다. 하물며 왕자가 보는 앞에서 대놓고 꼬드겼으니… 조금만 삐끗했어도 남재는 물론이고 충녕까지 싸잡아서 역모죄를 의심받을 수도 있던 상황이었다.


이상의 크게 세 일화를 살펴볼 때, 충녕은 흔히 알려진 대로 처음부터 세자 자리에 욕심이 전혀 없었던 게 아니라 세자 이제가 망나니스러운 행동으로 점차 부왕의 신임을 잃어가자 본인도 세자 자리, 멀리 봐서 왕위에 대한 생각을 은연 중에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장에 아버지인 태종부터가 왕위를 쟁취해서 딴 것이니…

따지고 보면, 건국 초기 시절이라 아직 적장자(嫡長子)가 왕위에 오른 사례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능력이 만렙이거나 야심만 있으면 누구든지 왕위계승자로 지목되거나 왕위에 오를 수도 있던 시대였다. 조선 건국자인 할아버지 태조 이성계가 고려 왕실의 옥새를 빼앗아 조선의 초대 국왕으로 등극한 바 있고, 또한 아버지 태종 이방원도 다섯째 왕자로 왕위계승 자리에 불리한 위치에 있다가 2차례의 왕자의 난으로 결국 국왕으로 등극한 선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방원은 개국에 가장 공이 컸고 군왕의 자질을 갖춘 사람이었기에, 개국 초에 신료들이 적장자(이방우, 이후 이방우가 병사한 뒤엔 이방과) 아니면 공이 큰 왕자를 세자를 책봉하는 게 옳다고 의견을 낸 만큼 가장 유력한 세자 후보가 바로 이방원이었다. 문제는 계모이자 이성계의 계비인 신덕왕후가 자기 소생의 자식들을 세자 자리에 앉히려고 무리수를 두었고, 이성계와 정도전도 동의한 바람에 엉뚱하게도 개국 과정에서 가장 공이 없고 나이도 어린 이방석이 떡하니 세자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이에 신의왕후 한씨 소생의 왕자들, 특히 이방원은 가장 불만이 클 수밖에 없었고, 이는 왕자의 난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적장자 계승'을 명분으로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국왕에 오른 부왕 태종[9]은 자신부터는 왕위 적장자 승계 원칙을 누구보다 철저히 확립시켜 왕권 다툼에 대한 예방과 왕권 안정을 도모하고 싶었고[10], 그래서 장남인 세자의 계속된 비행에도 누구보다 세자가 정신 차리고 제대로 왕위를 물려받길 바랐다. 무엇보다 사랑하는 자식들이 자신처럼 왕좌를 노리고 서로를 죽고 죽이는 유혈 투쟁을 하는 꼴은 부모로서도 보기가 싫었을 것이다. 원경왕후 민씨 역시 형제 간의 골육상쟁이 두려웠는지 세자를 폐하고 충녕을 새로운 국본으로 삼는 일에 끝까지 반대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세자는 계속 부왕 태종에 눈 밖에 어긋나는 짓을 일삼다는 게 문제.

이런 와중에 셋째 충녕은 부왕 태종에게 세자의 행동을 고자질을 하는 등 세자를 압박하면서 견제하는 동시에, 자신의 모범생다운 행실을 보여주면서 태종과 신하들에게 점수를 땄다. 세종대왕의 즉위 뒤 쓰여졌다는 문제점은 있지만, 후에 양녕대군으로 폐해지는 세자에게 대놓고 면박을 주거나 자신의 총명함을 드러낸 사실은 조선왕조실록에도 그대로 수록되어 있다. 그래서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3권 태종실록 후기에서도 충녕(세종)이 알고보면 야심가였을지도 모른다는 평이 수록되어 있다.그런데 세종대왕님쯤 되면 야심 가져도 된다.

능력만이 아니라 인성 면에서도 두 왕자가 대조를 이루었던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막내아우 성녕대군의 죽음이었다. 성녕대군이 큰 병에 걸려 죽게 될 때, 충녕대군은 의원과 함께 어린 동생 곁을 지키면서 의서를 탐독하고 열심히 간호하여 궁궐의 사람들이 모두 탄복했던 반면에, 세자는 이때 활쏘기나 하면서 놀고 있었다는 것이 나중에 드러나고 말았다. 그렇게 세자를 감싸던 태종마저도 이 사실을 알고는 "하는 짓이 사람의 마음을 가진 것 같지 않다"라며 깊은 실망을 드러냈다.

사실 세자(후의 양녕)에게는 태생적인 결점이 있었다. 태종은 세자를 위해 외척을 견제하기 위해서 평생 원경왕후의 원망을 들어가면서까지 처가인 민씨 집안을 멸문했다. 그런데 바로 세자는 태종이 사저에 있던 시절 외가에서 자라 숙청된 외삼촌들과 매우 가까웠다. '혹시 그래서 폐세자가 되지 않았을까?'라는 의문이 드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폐세자의 원인은 아니었던 것 같다. 정작 세자는 자기네 외삼촌들이 궁지에 몰리자 헌신짝인 양 내던졌다. 심지어 민무휼 등이 원경왕후의 병문안을 왔다가 세자에게 "우리 형들이 죄 없는데 죽었으니, 우리만큼은 보전시켜 주소서."라고 했는데 세자는 "외삼촌들은 죽어도 싸다." 하고 비웃었고 제대로 빡친 민무회가 "마마는 어느 집안에서 자랐나요?" 라고 폭발해 버렸다. 어린 시절 세자가 민씨 집안에서 자랐기 때문에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는 의미로 한 말이다. 같이 있던 민무휼이 수습하긴 했지만, 결국 각종 개차반짓으로 입지가 좁아진 세자는 점수를 벌어보겠다고 얼마 안 있어 그 일을 죄다 윗전(=태종)에 고변해서 민무휼, 민무회도 죽여버렸다. 비록 토사구팽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자기의 마지막 뒷배가 되어줄 수 있는 민씨 숙청에 가담한 세자는 현명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생각이 짧았던 것일까...[11]

아아! 너 충녕대군 도는 관홍장중(寬弘莊重)하다.

태종실록 35권, 태종 18년 6월 17일 병신 2번째기사. 정전에 나아가 세자와 경빈에게 책보를 내려주다.[12]

2.2. 즉위 후[편집]

1418년 6월 3일, 태종은 세자를 폐하고 충녕을 새 세자로 책봉한다. 폐세자 직후에는 양녕의 장남, 순성군을 세우겠다고 했으나 박은 등 대신들이 반발해 뜻을 거둔다. 다음으로는 점을 쳐서 세자를 정하겠다고 했으나 다시 이 의견을 바꾸고 어진 사람을 골라야 한다는 이유로 충녕을 세자로 지명한다. 별 다른 이유 없이 앞선 두 의견을 물린 것으로 보아 형식적인 절차로 보인다.

이후 태종은 세자 책봉 2달여 만에 전격적으로 왕위에서 물러났다. 이는 불안정한 셋째 아들의 왕권을 안정시키는 데 태종 자신의 남은 여생을 쓰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은 1422년 죽을 때까지 4년간 실권을 쥐고 있었으며 세종은 태종이 죽은 뒤에야 진정한 조선의 국왕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이라는 나라의 기틀을 완전히 잡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그 첫 작업은 어찌보면 당연하지만 어찌보면 그로테스크했다. 태종은 세종의 처가인 심씨마저 멸문했던 것이다. 태종은 선위 직후 상왕으로 심온을 영의정 + 세종의 즉위를 알리는 명나라 사신으로 임명하며 힘을 실어주는 척 안심시켰다가, 시답잖은 사건을 끄집어냈다. 이른바 강상인 사건으로 병조참판 강상인이 군사 부분의 일을 태종에게 보고하지 않고 세종에게 보고하자 그를 국문해 함경도 관노로 보냈다. 태종이 이미 "왕이 30살이 될 때까지는 내가 맡겠다"고 했는데 이를 어겼다는 죄목. 그가 태종을 아주 오랫동안 모셔온 공신임을 감안하면 매우 큰 형벌이다. 1달 뒤, 심온이 명나라 간 사이에 재조사해 박습[13], 이조판서 심정, 동부총재 이관, 심온과 논의했다는 답을 얻어내 엮어냈다. 그러고는 강상인은 거열형, 이관과 심정은 참수형에 처해버려 잽싸게 죽였다. 그리고 귀국길의 심온을 붙잡아 고문했다. 이때 심온은 하루에 곤장을 2번 맞고 압슬형을 5번이나 받고도 자복하지 않았다가 유정현이 "이보시오, 심공, 당신 지위가 뭔지 알면 이게 뭐 하는 건지 알 텐데 왜 자복 안 하시오?" 라고 하자 결국 자복한다. 유정현의 말을 듣고 심온도 처음부터 태종이 꾸민 짓이라는 걸 깨달은 모양. 심온은 다음 날 바로 사약을 마셔버렸다.[14]

야사에는 "앞으로 박씨와는 혼인하지 말라" 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하는데 박은을 두고 한 말 같은데 실제로 박은도 이 일에 유정현처럼 연루되어 있어서 애초에 심온을 경계했고 소헌왕후를 폐비해야 한다고 하기도 했다. 그리고 세종비인 소헌왕후 심씨의 어머니를 노비로 강등시킨다. 사실 이건 명나라에게도 불경할 수 있는 짓이었다. 명나라까지 직접 사신으로 다녀 온 사람을 처형해 버리고 그의 아내를 노비로 만들었으니, 이렇게 되면 외교 상 명나라에서 불편해할 가능성[15]이 분명히 있었다. 그래서 태종은 애써 몸이 안 좋아 시골로 내려갔다며 거짓말까지 하라고 지시했다. 사실 중종반정 직후 연산군이 죽었는지도 몰랐던 걸 보면 홍무제 이후로는 명나라의 정보력도 생각보다 높지 않았던 것 같다.[16] 이는 조선의 내정에 간섭은 안 하지만 상황은 빠삭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초기의 청나라와 대비되는 모습이다. 1, 2차 왕자의 난까지 고려하면 세종은 왕위에 오르기 전에 3대가 멸족을 당한 셈이다. 세종대왕은 태종 사후 황희 등의 주청을 받아들여 태종과 원경왕후의 유훈이라는 핑계로 장모와 처제들을 노비에서 풀어주고 직첩도 돌려주었으나, 그의 장인 심온의 사면은 받아들여지지 않아 아들 문종대에 가서야 사면이 되었다. 이는 선왕의 결정을 바꾸는 것은 선왕의 결정에 문제가 있다는 결론이 나와 선왕에게 불효가 된다는 유교사상에 의한 것이기도 했다. 효를 행하는 것 중 하나가 선친(혹은 선왕) 사후 3년간(3년상 기간)은 생전의 처분을 바꾸지 않는 것이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세종에게 충분한 시간이 있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효 이전에 심온 본인에 대해서는 그렇게 중대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17]

심온 옥사 재수사는 세종이 물갈이를 하기에 가장 적합한 일이었고, 명분도 분명했던 정치보복이었으나 세종은 일체의 정치보복을 하지 않았다. 옥사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박은은 태종이 사망하기 직전에 병사했는데 사후 관직 박탈과 같은 처벌을 전혀 받지 않았다. 심온에게 자복을 받아내고 심온 가족의 처벌 뿐만 아니라 소헌왕후의 폐비까지 주장했던 유정현도 계속 좌의정으로 일하며 국가의 재정 분야의 일을 하면서 궤장까지 받는 명예를 얻었으며, 72세가 되어서야 은퇴해서 곧 자연사했다. 선왕 대의 단호한 폐비 결정으로 정통성에 문제가 있었던 연산군, 광해군, 경종 등은 어머니들을 조금이라도 복권하려고 했다. 이들은 피바람이라는 무리수를 써서라도 목적을 이뤄냈던 반면, 세종은 그러지 않았다. 정조 또한 사도세자의 복권을 관철하기 위해 애를 썼으며, 작게나마 복수도 행했는데 말이다. 30년간에 걸친 세종의 숙청 없는 정치란 조선 역사를 통틀어서도 참 특이한 일이다. 다만 그 때문에 소헌왕후는 개인적으로 고생했을 가능성이 크다. 심지어 자기 아버지 심온이 죽을 당시에 왕후 본인은 임산부(4남인 임영대군을 임신 중)였다.[18]

어쨌든 이러한 일련의 과정 이후, 세종은 즉위한지 4년만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제대로 된 왕이 되었다...는 건 아직 이른 말이었다. 태종은 죽었으나 아직 조정엔 태종의 사람들 뿐. 세종 4년 당시, 영의정 유정현[19], 좌의정 이원[20], 우의정 정탁[21], 병조판서 조말생, 이조판서 허조, 호조판서 이지강 등 주변엔 태종의 사람들만이 있었다. 이 신하들은 초장부터 세종을 잡으려는 의도였는지, 세종의 말에 따르질 아니하고 자신들의 맘대로 일을 진행하려는 속내를 내비친다. 대표적인 일이 폐세자 양녕에 관한 일. 태종의 상을 치르기 위해 유배에서 서울로 올라왔던 양녕을 탈상 전부터 다시 유배지로 내보내라는 상소를 사헌부, 사간원, 육조, 의정부 등지에서 끊임없이 올리기 시작한다. 이 때 상소의 내용 중 하나는 "양녕의 거취는 신들이 태종에게 위임 받은 것이니, 전하도 사적으론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라는 것. 즉, 양녕의 일은 신하들이 태종한테 위임받았으니 지금 왕이라 할지라도 간섭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러한 상소가 줄을 잇자 세종은 "상소를 판에 찍어 왔느냐" 며 상소를 던지기도 하고, 무시도 하지만 결국 신하들의 압박에 못이겨 양녕을 내보내게 된다.

이러한 즉위 초의 상황은 세종이 진정한 군왕이 되기까진 험한 길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런 상황이 계속 되던 중, 세종에게 한가지 반전의 기회가 주어지는데, 이는 소위 말하는 '김도련 노비 뇌물 사건' 이다. 사정은 이렇다. 고려 말 김도련이라는 사람의 아버지가 함경도에서 426명의 양인을 불법적으로 노비로 만들어 자신이 관리하면서, 당시의 권문세가였던 임견미에게 뇌물청탁을 하면서 이것이 허용이 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임견미가 죽고 고려가 망하면서 이 노비들이 다시 양인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조선조에 들어와서 그 아들인 김도련이 426명의 노비들, 그리고 그 자손들까지, 거의 1000명에 달하는 노비들을 모두 되찾으려 한 일이 벌어진다. 이 때 문제가 된 것은 김도련이 당시 조선의 권력자들에게 노비로 뇌물을 주었다는 것이다. 이 때 병조판서 조말생 부터 시작해서 평성부원군, 우의정, 좌의정, 곡산부원군 등 여러 권력자들이 연루되었고 이때 바쳐진 총 노비 수만 132구(口 : 당시 노비 한명을 한 구로 세었다.). 가히 조선 초 최고의 뇌물 스캔들이라 할 만 했다. 당시 노비 한 구당 현재 가치로 천만원 정도[22] 였고, 노비도 사람인지라 자손을 낳기 시작하면 그 가치가 어마어마하게 불어나므로 이 뇌물 스캔들의 사이즈가 어느 정도인지 가히 짐작이 가능하다. 그 중 가장 중요했던 인물이 당시 병조판서였던 조말생 으로써, 무려 36구의 노비를 뇌물로 받으면서 이 뇌물 스캔들의 가장 큰 인물로 떠오른다.

이 사건이 벌어진 것은 세종 4년으로, 이 때에는 별다른 문제로 떠오르지 않았으나, 이 사건이 일어나고 4년 뒤에 사헌부에서 문제가 제기된다. 이 즉시 조말생은 파직되고 유배를 보내게 되는데, 세종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함경도에 사람을 보내 낱낱이 조사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조말생의 다른 죄들이 드러나기 시작하는데, 이 때 드러난 뇌물이 노비 36명에 장물 7백 80관, 현재가치로 약 14억원 정도의 뇌물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게 된다. 이 때 조말생은 교형을 받을 뻔하였으나 유배로 그치게 된다. 자세한 것은 조말생 항목 참고. 이 때 17명의 관리가 132명의 노비를 뇌물로 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세종은 이 사건을 계기로 노비 뇌물사건 관련자들에게 유배 혹은 파면 등의 처벌을 내리게 되고, 이로 인해 태종의 구신들을 몰아내고 세종의 세력으로 조정을 채우게 된 것이다. 이 후 바로 1년 후인 세종 9년 1월에 황희좌의정으로, 맹사성우의정 으로 승진시키면서 세종의 본격적인 성군으로써의 행보가 시작되게 된다. 서울시립대 사학과 이익주 교수는 역사저널 그날 시즌 2 155회에서 이 사건을 가르켜 "고려의 정치체계에서 조선의 정치체계로 변화하는 계기를 마련한 사건" 이라 평한다.

3. 세종대왕의 업적[편집]

4. 가족[편집]

문서 참조

5. 특이한 기록들[편집]

6. 사건[편집]

6.1. 한성 대화재[편집]

세종 8년 2월(1426년)에 한성에서 대화재가 발생했다. 세종에게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훌륭하게 후속 대책을 시행하긴 했지만 이 화재는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다. 조선 왕조 500여년 동안, 임진왜란과 같은 전쟁이 아닌 평시에 발생한 재해 중 한성을 가장 큰 규모로 파괴한 재난이었다.

시작은 1426년 2월 15일의 화재였다. 이날 경시서(京市署)[23]와 북쪽의 행랑 106간, 한성부 중부(中部)의 인가 1630호, 남부의 350호, 동부의 190호가 불에 탔다. 당시 세종과 세자 문종은 군사 훈련인 강무를 위해 강원도 횡성에 있었으므로 중전인 소헌왕후가 대응을 맡았는데, 그것도 금성대군[24]임신한 상태로 화재 진압을 직접 진두지휘했다.[25][26] 또한 다음날인 16일에는 전옥서[27]와 행랑 8간, 민가 200여 호가 불에 탔으며 보신각 종루까지 불에 탈 뻔했으나 간신히 진압했다.

세종은 16일에 급보를 접하고 19일에 한성에 돌아와서 대응을 지휘했다. 큰 화재는 잡혔지만 소소한 화재가 계속 발생하고 이를 틈타 도적들이 기승을 부리는 등 재난이 끝나지 않자, 세종은 계속해서 대책을 수립했다. 부상자의 치료와 이재민에 대한 식량의 배급 등 1차적인 대책을 수립한 한편, 화재 예방을 담당하는 금화도감을 설치하고 가옥의 개량 및 지나치게 좁은 도로들을 정비해 큰 화재가 더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했다.[28]

7. 비판[편집]

8. 세종대왕의 용안?[편집]

항목 최상단에 올려져 있는 세종의 어진은 1973년 운보 김기창이 그린 정부지정 표준영정이다. 충무공 이순신에 이은 표준영정 2호며, 당연하지만 이 그림이 세종의 진짜 어진일 수는 없다. 한국전쟁 기간에 부산으로 옮겨서 보관하던 중 1954년 12월 불의의 화재로 인해 창고에 보관중이던 조선왕조 어진들의 대부분이 불에 타 절반에서 전체가 소실되었고, 이때 소실을 면한 것은 단 3점(태조, 영조, 철종)뿐이다.

뭐 세종 자신은 도화원과 전국각지에 남아 있던 고려 왕과 왕비 재상들의 어진이나 초상화를 깡그리 태우거나 묻어버린 전과있는 양반이라...

단, 1935년에 일제가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이미 그때에도 세종의 어진은 없었다고 한다.# 임진왜란때 세종의 어진이 소실된것으로 추정되는데 임진왜란에서 화를 면한 어진은 태조와 반쯤 타버린 문종의 어진, 그리고 이이첨이 구해낸 세조의 어진 밖에 없었다고 한다. 역사의식 함양을 위해 당시 박정희 정부에서는 표준영정 지정사업을 시작했는데, 이때 세종의 어진을 그리게 된 이가 바로 김기창이었다. 하지만 당시부터 어진의 얼굴을 자신의 얼굴과 흡사하게 그렸다고 하여 논란이 많았다. #

실제로는 더 후덕하고 수염이 그닥 많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는데, 상상해보고 싶다면 할아버지 태조 이성계[29]효령대군, 차남 세조의 초상 자료가 남아 있으니 참조해 보자. 특히 실록에는 양녕대군, 효령대군, 세종대왕 3형제의 얼굴이 무척 닮았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며, 아버지 태종은 먼저 죽은 세종의 동생 성녕대군에 대해 회상을 하며 "성녕은 내 아들 중 유일하게 얼굴이 다른 녀석이었다."고 회상한 바 있다. 아마 효령대군과 가장 유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그렇다면 수염이 적었다고 단정짓기는 어렵다. 효령대군 초상화는 생각보다 숱이 짙은 수염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태조는 수염이 성글다는 말도 있으나, 지금은 실전된 장년기의 어진 사진을 보면 역시 제법 짙은 수염을 확인할 수 있다. 세종의 아들 중 세조는 수염이 매우 적지만, 반대로 문종은 수염이 풍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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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어진은 안태성 교수가 그린 세종대왕 어진이다. 참고로 과거에는 안태성이 현재 남아있는 세조의 어진과 효령대군의 초상화로 복원한 심히 충공깽스러운 어진을 그렸지만, (삭제됨) 다시 태조 어진과 왕족들의 초상화를 참고하여 안태성 교수가 다시 복원한 세종대왕 어진을 복원을 하였다. 복원 과정 링크. 다만 복원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근거가 부족한 것이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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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광장에 세워진 동상. 충무공 이순신 장군 동상 뒷편에 있다. 이 동상은 위의 표준영정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고 하지만 제작자인 홍익대 김영원 교수는 "표준영정을 참고했지만, 애민정신을 담아내기에 부족했습니다. 제 상상력을 불러일으켜서 작품을 완성했습니다."라고 평했다. 역시나 그럴 줄 알았는데...

2014년 9월 6일 KBS 여유만만에 출연한 고종황제의 손자인 이석의 말에 따르면 광화문 동상의 경우 현재까지 남아있는 효녕대군의 초상화와 자신의 얼굴을 섞어서 만들었다고 말을 하였다.# 다만 황손 이석 씨의 발언은 전반적으로 과장과 허황이 있으니 가려 살펴야 한다. 자세한 이유는 이석 문서 참조.

이순신 장군 동상에 비해 상당히 큰 데다가 시선이 장군의 뒤통수를 바라보는 터라 묘하게 세종대왕 앞에서 경비를 서는 느낌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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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수가 그린 어진


김학수가 세종대왕의 얼굴을 상상하여 그린 어진이다.

9. 오늘날의 세종대왕[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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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생활에서 가장 자주 접할 수 있는 세종대왕. 그래서 만 원짜리 화폐를 달리 이르는 말로도 쓰인다.

존경하는 역사적인 인물로 설문조사를 하면 대부분의 경우 이순신 장군 아니면 세종대왕이 1위를 하며 한국사의 군주들 중에서도 고구려광개토대왕과 더불어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다. 또한, 이순신 장군과 함께 한국에서 제일 많이 동상이 세워진 사람이다. 서울에만 해도 덕수궁, 여의도, 그리고 윗 사진의 광화문광장까지 3개의 큰 동상이 있으며 하다못해 전국 각지의 초등학교에 세워진 동상 삼대장 중 하나가 세종대왕의 동상이다. (나머지 둘은 이순신 장군 동상, 그리고 단군 할아버지 동상)

광화문광장의 동상의 밑에는 세종대왕 관련 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여기에는 세종대왕의 개인 프로필도 적혀 있는데 여기에 세종의 취미가 공부라고 적혀 있다. 사실이다.[30]

그만큼 한국인들에게 지금까지도 먼치킨급으로 존경받고 있고, '세종대로', '세종과학기지', '세종특별자치시', '세종대학교' 세종과학고등학교 등 세종대왕이 들어간 명칭도 많다. 10,000원권 지폐에 실린 인물도 세종대왕이니 거의 매일 이분의 얼굴을 보고 살고 있는 셈. 인천국제공항의 원래 이름도 '세종국제공항'으로 계획되었으나 인천광역시의 극렬한 반발로 무산되었다. 그리고 이 분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고자 대한민국 해군 최초의 이지스함에도 명명되었다. 함명은 세종대왕함. 솔직히 이지스함이나 항공모함 정도의 함정에 이분 아니면 충무공 이순신 밖에 어울릴 만한 이름이 또 없기도 하고.

유네스코가 제정한 '세계 각국의 문맹 퇴치에 공로가 있는 개인이나 단체에 주는 상'이 바로 '세종대왕상'. 폴란드에는 '세종대왕 고등학교'가 있었다. 세종대왕상은 한국 정부가 출연한 기금[31]으로 운영되는 상이고, 2014년 현재, 세종대왕 고등학교는 재정 문제로 폐교되었다고 한다.

스승의 날인 5월 15일은 바로 세종대왕의 탄신일이다. 한민족의 큰 스승이라는 의미로 이날로 정한 것. 대만도 비슷하게 공자 탄신일을 스승의 날로 하고 있다.

2012학년도 연세대학교 창의에세이 시험에서는 난데없이 2040년에 나타나 외계인과 면담을 하여 1,818명의 창의에세이 응시자를 당혹케했다. 이하는 2012학년도 창의에세이 2번 문제 전문.관련기사

2040년에 세종대왕이 외계인과 만나는 상황을 가정하고, 둘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갔을지 그 내용을 서술하시오.


외계인 이전에, 이미 옛날에 사망한 세종대왕이 무려 2040년에 나타나는 것도 문제여서, 시간여행, 영혼과의 면담, 홀로그램, 부활, 평행세계 등, 세종대왕을 살려내기 위한 각종 바리에이션이 난무했다고. 더불어 시험시간은 120분인데 1번 문제도 쉽게 쓸 수 있는 내용은 아니어서, 1번 문제에서 시간을 다 쓰는 바람에 이 문제를 제대로 못 쓴 수험생도 많다고 카더라.

Europa Universalis 3에서는 6.4.3이라는 안습 그 자체인 능력치를 가지고 있다. 지못미. 참고로 평균이 5.5.5이고 만렙이 9.9.9이다. 영락제도 4.4.5이기는 하지만. 만약 이 게임의 이름이 유로파가 아니라 아시아였으면 세종은 9/9/6에 영락제는 7/7/9 정도 되었을 것이고, 명과 조선은 화포를 기본 유닛으로 가지고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후속작인 Europa Universalis 4에서는 6.6.6이 만점으로 뒤바뀐 상황에서 6.6.5으로 능력치가 대폭 향상되었다. 전작의 능력치로 치환하면 9.9.8인 셈. 참고로 영락제도 5.6.6으로 대폭 향상되었지만 시작 시간대가 좀 뒤로 옮겨져서 등장하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첫 시나리오에서 게임을 시작하면 의외로 AI 조선이 커서 만주일본을 집어삼키는 장면이 나오는데 대부분 세종이 오래 살면 기술 차이로 이렇게 된다. 사실 조선이 세종과 이순신에 모든 스탯을 몰아 받았기 때문에 이후 모든 시나리오에서 왕의 능력치가 좋지않다.[32]

화이트 울프 사의 TRPG게임 월드 오브 다크니스 메이지 디 어센션의 중세 시대를 배경으로 한 하위 룰북인 소서러 크루세이드에서는 중세시대에 활약했던 다이달리안의 위대한 마스터들 중 하나로 언급된다.[33] 그런데, 화이트 울프 사에서 착각을 한 것인지 아니면 일부러 그런건지, 태종의 업적에 가까운 숭유억불 정책을 써놨다.[34]

9.1. 영릉[편집]

  • 해당 문서 참 조

9.2. 익선관 발견 해프닝[편집]

관련기사

2013년 2월, 세종의 것으로 추정되는 익선관이 발견되어 학계를 발칵 뒤집어놓았으나, 결국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자세한 내용은 익선관 항목 참조.

9.3. 사극[편집]

워낙 '성군'이란 이미지가 강해서인지 정치암투나 전쟁이 좋은 소재가 되곤 하는 사극에서 중심인물로 등장한 적은 많지 않다. 15세기 조선군주가 아니라 백성을 우주로 여기는 고금에 없는 초월적인 군주상으로 그려지는 게 특징이다. 보통 나오면 완벽초인에 백성과 나라 걱정에 여념이 없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뭐 실제 역사에서도 그렇긴 했다만...

허균의 소설 홍길동전에서는 이 세종대왕의 치세로 시작한다. 세종 15년에 홍길동의 아버지인 홍 판서가 첩 춘섬과 동침해서 낳았다는 설정. 다만 홍길동이 본격적으로 활동하는 시기를 계산하면 세종 시기를 벗어난다. 또한 시작부터 세종대왕 시대를 '사방에 일이 없고 도적이 없으며 시화연풍하여 나라가 태평하더라'라고 표현하는 것을 보면, 허균은 딱히 세종대왕을 비판할 생각은 없고 단지 과거의 모습을 나타내기 위한 단순 설정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오히려 홍길동전에서 나타나는 적서차별의 폐단을 강조하기 위해 일부러 끌어다 쓴 설정이라는 해석도 있다. 즉, 허균을 비롯한 당대 조선인이 생각하는 최전성기인 세종대왕 시대에도 적서 차별만은 어쩔 수 없었음을 주장하기 위함이라는 것.

용의 눈물에서 안재모가 연기하여 호평받았다.

대왕 세종에서도 김상경이 배역을 맡아 좋은 연기를 보여줬고, 이 사극 자체에도 제법 주목할 만한 면도 있었지만 흥행이란 면에서는 그렇게 잘 나간 편은 아니었다. 다만 대왕 세종의 경우, 아내인 소헌왕후와의 관계와 적장녀(嫡長女) 정소공주와의 이야기와 세자와의 갈등 등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점도 많았다.

뿌리깊은 나무에서는 젊은 시절에는 송중기, 성인 배역은 한석규가 맡았는데, 이제까지의 세종대왕의 모습과는 달리 이 드라마에서는 성질 급한 욕쟁이. 한석규가 처음 등장하자마자 "하례는 지랄!", "지랄하고 자빠졌네!" 라는 충격적인 말을 구사하면서 등장했으며, 젠장이나 우라질 등의 욕설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왕으로 등장한다. 역사적인 면모라고 하기에는 좀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세종대왕의 이미지와는 달리 개성적인 캐릭터를 잘 구축해냈다. 자세한 것은 세종(뿌리깊은 나무) 참고.

나는 왕이로소이다에서는 주지훈이 맡았다. 이 작품에서의 세종대왕은 그저 고기를 좋아하고 책에만 파묻혀 살았으나, 성격이 소심하여 왕위를 양도받는 것을 꺼려하는 캐릭터로 나오고, 자신을 닮은 거지와 역할을 바꿔서 살아가게 되나, 거지로 다니면서 백성들의 고뇌와 고난을 함께 하면서 결국은 성군으로 성장해나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9.3.1. 세종대왕을 연기한 배우들[편집]

9.4. 문명 5에서의 세종[편집]

세종대왕(문명 5) 항목 참조. 혹시 게임상에서의 활약을 찾는다면 문명 5/등장 문명/한국 항목 참조.

10. 이모저모[편집]

  • 한국 역사에서 으뜸가는 성군으로 추앙받아서인지, 현대에 다른 왕을 높여 부르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유독 세종대왕을 칭할 때는 높임법을 쓰는 경우가 많이 보인다. "세종께서"라고 검색하면 현대인이 현대인에게 쓴 글도 많이 보이지만 저 자리에 다른 왕을 집어넣으면 왕조실록 풍으로 쓰는 글이 대다수인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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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DG-991 세종대왕함

  • 한국 최초의 이지스 구축함인 KD-3 1번함은 이 왕의 이름을 따 세종대왕함으로 명명되었으며 이후 동일함급은 세종대왕급 구축함이 된다. 이지스함 1번함에 불릴만한 인물이라면 세종 아니면 이순신 뿐이지만, 충무공 이순신의 이름이 KD-2 구축함에 명명되면서 후속함인 KD-3 1번함에 세종이 낙점된 듯하다. 두급의 구축함 모두 한국 해군 제7기동전단의 일원으로서 활동중이다.

  • 세종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세종이라는 이름을 붙인 고유명사가 매우 많다. 상기한 것처럼 세종대왕급 구축함 이외에, 세종시, 세종과학기지, 세종로 등등… 이름 자체가 갖는 이미지가 너무 엄청나서 그런 듯하다.

  • 세종의 뛰어난 업적 때문인지 별로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세종 재위 시기인 1446년에는 대성산에서 도적떼가 나타나자 이를 진압했다.

  • 태종이 좇아보낸 양녕대군을 세종이 차마 내칠 수 없어서 궁에 들여보내 줬을 때, 이를 말리는 상소문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때 세종 왈, "야, 이제부터 형님 관련해서 올라오는 상소문 받지마. 어떻게 몇일 전부터 올라오는 상소문들 내용이 전부 토씨하나 안틀리고 똑같을 수가 있냐? 무슨 인쇄소에서 찍어낸 찌라시도 아니고. 그리고 이 건 또 뭐야, 거꾸로 접어서 보냈네?."

    "이제부터는 양녕이 들어온 때에 이와 같은 봉장(封章)은 다 접수하지 말라. 또 이 봉장의 글은 도대체가 진부한 말뿐이다. 전일에 올린 것과 다름이 없으니, 목판에 새겨 두고 찍어서 들여오는 것이 아니냐. 또 이 봉장은 거꾸로 접어서 봉(封)하였구나.


    『세종실록』 세종 15년 12월 27일 병자

10.1. 세종에 대한 어록[편집]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 서로 통하지 않으므로 이런 까닭에 어리석은 백성이 이르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그 뜻을 능히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를 불쌍히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들었으니 사람마다 하여금 쉽게 익혀 날로 씀에 편안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훈민정음 언해》 서문

"그는 족보로 된 임금이 아니다. 전주 이씨의 임금이 아니라 하늘이 낸 임금이었다. 그가 정음을 짓고 모든 책의 언해를 만든 것은 모두 민중을 위한 것이었다. 정말 민족 걱정을 한 이요, 정말 인생 걱정을 한 이다. 어쩌면 그런 어진 마음이 이 역사에도 났을까? 공자관중의 역사적 공로를 칭찬하여 "이 사람이 아니었다면 내가 오랑캐가 되었을 것이야!" 하였다지만, 오늘 우리야말로 이 사람이 아니고 그냥 짜 먹자는 그놈들만이 있었다면 정말 짐승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함석헌

11. 관련 항목[편집]

[1] 상상도이며 실제 어진은 소실되었다.[2] 역대 조선 임금들 중 최초로 한양에서 태어난 임금이다.[3] 재위 초반에 첫째 정소공주가 13살에 요절하고, 재위 후반엔 광평대군이 갑작스럽게 죽은 뒤, 평원대군도 잇따라 요절하여, 세종과 소헌왕후는 슬픔에 빠졌고 곧 불교 사찰을 찾아다니며 명복을 빌었다. 아내 소헌왕후마저 죽으면서 세종은 생애 후반 불교에 귀의하게 되고 개종한다. 조선의 건국 이념은 유교 성리학이었기에 유학자들의 반발이 거셌으나, 세종은 이에 개의치 않고 궁궐 내에 법당을 만들고 불사 중창과 법회에 참석하였다.[4] 물론 왕조가 존속하는 한 선왕들은 모두 대왕으로 숭앙받는다. 본문의 의미는 왕조가 끝장난 민주 공화국 시대에도 역사적 위인으로서 대왕 칭호가 어색하지 않은 군주들을 일컬음이다.[5] 참고로 세종 집권 당시의 여러가지 망나니짓은 백성들 사이에서 양녕대군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위기에 처하지 않기 위한(역모에 엮인다든가 하는) 나름의 처신이라는 설이 있다.[6] 일반적으로 출가해 스님이 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불교를 멀리하려는 조선의 왕족인 만큼 그러지는 못했다.[7] 사실 세종도 술을 잘 못 마셨다. 소주도 겨우 한두 잔 마실까 말까 할 정도.[8] 출처 : 태종실록 30권, 태종 15년 12월 30일 계사 3번째 기사[9] 태종은 사실 정종의 양자 자격으로 왕위에 올랐다. 정종에게는 서자들만 있었을 뿐, 적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정안군 이방원은 정종의 후계자로 지명될 때 세제가 아닌 세자 책봉을 받았다. 신하들은 정안군이 정종의 양자이기에 앞서 아우이기 때문에 세제로 책봉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이 많았지만, 정안군은 세자로서 책봉받는 안을 고집했고 이를 관철시켰다. 이는 정안군 자신이 적장자로서 왕위를 잇겠다는 의지의 발로로 해석된다.[10] 참고로 이 점은 세종과도 비슷해서, 세종도 아들인 문종을 좋은 임금 만들려고 노력을 엄청 기울였다. 태종과 다른 점이라면 태종은 실패했고 세종은 성공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문종이 일찍 세상을 떠났고 손자다른 아들의 손에 의해 끌어내려진다.[11] 다만 일단 잠깐의 위기를 모면하려면 외삼촌들의 뒷통수를 치는게 더 나았다. 태종의 스타일 상 양녕대군이 뒷치기 안해도 알아서 족쳐버릴것이며 가만히 있다가 그 발언이 심문 중에 나오면 본인에게 해가 갈 수도 있다. 이유는 구태여 숨길 필요가 없는 말인데도 숨겼으니까.(어차피 사적으로야 생질-외삼촌 관계지만 공적으로는 세자-신하다. 즉 신하가 세자를 핍박한거니 당연히 드러내도 이상할거 없다.) 게다가 무휼과 무회가 날아가도 양녕대군이 이제 뒷배경이 없음을 직감하고 행동을 잘 하면 태종이 "어이구 니 외삼촌들 때려잡은거 보람이 있구나" 하면서 얼씨구나 해서 즉위하는것도 가능했다.(본인 잘못은 아니지만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죄인으로 몰려 죽은 후 정조는 영조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고 그 결과 영조의 뒤를 잇는데 성공했다.) 문제는 그 정도 감각도 없었는지 그 후에도 계속 사고를 쳤다.[12] 1418년(태종18년) 6월 17일 태종이 양녕대군을 폐세자시키고 충녕대군을 새롭게 세자로 책봉하는 글 첫머리에 나오는 말이다. 너그럽고, 그릇이 크고, 품위가 있으며, 진중하다는 뜻.[13] 단 이 인간은 이미 강상인 사건으로 경상도로 유배 가 있었는데 이유는 그가 병조판서이었기 때문[14] 나중에 창작된건지는 몰라도 이전에 세종대왕이 왕자시절에 튀는 행동을 자주 하자 박은이 "사위 단속좀 하십쇼" 했는데 심온이 씹어버린 기록이 나온다. 사실이라면 어떻게 보면 외척에 극도로 민감한 태종의 마음을 읽지 못한게 잘못이라면 잘못이라 할 수 있겠다.[15] 현대로 비유하면 다음과 같다. 한국과의 사이가 매우 밀접한 우방국인 국가의 외교관이 한국을 방문해서 한국과의 중요한 외교 문제를 잘 해결하고 귀국한다. 그런데 귀국하자마자 해당 국가의 권력자가 갑자기 그 외교관에게 심각한 국기 문란을 저질렀다는 누명을 씌워서 본인은 중형을 선고받고 가족들도 뿔뿔이 흩어지는 중대 사건이 벌어진다고 생각해보자. 한국 정부와 국민들이 대체 무슨 일이냐며 의아하게 여길 것은 당연하다.[16] 홍무제의 정보력에 대해서는 고려 말 왜구의 침입 항목 참조[17] 결국 심온은 문종이 사면시켰다.[18] 게다가 죽을때까지 아버지가 신원되는것을 보지 못했다. 어쩌면 문종이 심온을 사면시킨것도 이같은 어머니의 마음 고생을 보아서 그랬을지도(...)[19] 태종의 뜻에 따라 충녕을 세자에 책봉토록 건의했던 인물[20] 제 2차 왕자의 난 공신(좌명 4등)[21] 제1차 왕자의 난 공신(정사 2등)[22] 노비 한 명 당 말 한 필과 같은 가치를 가졌다고 여겨진다.[23] 한성의 시전을 관리하는 관청[24] 금성대군은 같은 해 3월 28일에 태어났으므로 이 때 소헌왕후는 말 그대로 만삭이었다.[25] 즉위식도 만삭인채로 치뤘다. 애초에 소헌왕후가 애를 많이 낳긴 했다.[26] 실제로(?) 조선때에도 세종은 제일 명군취급 받았는데 그럼 최고의 왕비 취급은 누가 받았냐면 소헌왕후다.[27] 감옥과 죄수들을 관리하는 관청[28] 금화도감(요즘으로 치면 소방서)이 생긴것도 이같은 대응의 일환이다.[29] 외모가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으므로[30] 경연에서 신하들이 빌빌거리는 장면이 나올정도 이같은 모습은 세종대왕 외에 태종,정조 등 아주 적다.[31] 대부분의 유네스코상은 국가나 기업의 지원으로 운영된다.[32] 참고로 작중 이 것보다 능력치가 높은 지도자는 앙리 4세, 루이 14세, 악바르 대제, 프리드리히 대왕, 표트르 대제, 구스타브 2세 아돌프, 조지 워싱턴, 제르지 카스트리오티(스칸데르베그) 밖에 없다.[33] 참고로 함께 언급된 인물 중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나 오더 오브 리즌의 마스터 로널드 호프만 등이 있다. 출처:The Artisans Handbook p69.[34] 물론 세종 때에도 불교 종단을 통폐합하여 선교 양종만 남기고, 태종의 폐불정책 이후 전국에 남아있던 사찰들을 다시 무너뜨려 오직 36개만 남긴 다음 승려들의 도성 내 출입을 금지한것처럼 억불정책은 유지되었으나, 내불당을 설치하고 승려 신미를 총애하고 승과를 실시하는 등 상당한 친불정책을 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훈민정음을 보급하기 위해 백성들에게 친숙한 부처의 이야기를 책으로 낸 것을 보면 당시 백성들의 불교신앙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이런점에서 보면 세종 본인은 태종과 달리 불교에 그렇게까지 부정적이지는 않은것으로 보여진다[35] 그리고 아버지가 자신의 외가를 숙청했던걸 신덕왕후에게 복수한다(...)[36] 태종역을 맡은 사람도 두 드라마 다 김영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