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파일:나무위키+유도.png   다른 뜻에 대해서는 아래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1. 개요2. 한 나라의 최고 권력자인 국왕3. 나라의 군주가 작위로서 주는 제후왕
3.1. 중국 왕조3.2. 한국 왕조3.3. 유럽 왕조3.4. 일본 왕조
4. 중국 왕조의 왕작 제도5. 고려/조선 국왕은?6. 곤충에서의 왕7. 창작물에서 왕인 캐릭터8.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파일:external/vegan8korean.files.wordpress.com/throneroom.jpg
경복궁 근정전의 옥좌

군왕은 백성이 함께 하면 편안하고 백성이 도와주면 강성하며, 백성이 반대하면 위태로워지고 백성이 등을 돌리면 멸망한다.
(百姓與之卽安 輔之則强 非之則危 背之則亡)

- 전한 한영(韓嬰)의 <한시외전>(韓詩外傳)


왕국군주(). 임금을 뜻하는 한자다. 갑골문에선 王은 아래 변이 넓고 위는 도끼 모양을 하고 있다. 고대 중국에선 도끼는 권력을 상징했기 때문에 도끼를 권력자의 상징으로 썼다. 이외에도 갑골문의 모양 해석에는 몇몇 이설이 있는데[1], 대표적으로 중국 한나라시대의 학자인 허신(許愼)은 갑골문을 보지 못했기에 전서(篆書) 등 이미 원형에서 많이 변형된 후세의 자체만 보고 하늘과 사람 사이(二)의 중간에 위치하여(一) 하늘과 백성을 연결하는 것(|)을 뜻하는 말로서 하늘의 명으로 만민을 통치하는 존재라고 풀이했다. 갑골문을 찾기 전까지는 이 허신의 해석이 널리 쓰였으나 갑골문이 나와 그 진짜 의미가 드러났다. 즉 "권력을 가진 높은 분"이라는 뜻.

추가로 원래 한자 문화권의 전통에서는 그리스 로마 신화 따위의 "~~의 신"이란 개념은 '신'이 아니라 '왕'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는듯하다. 우라누스의 이름을 딴 행성을 천성으로(해왕성, 명왕성 등도 같다.) 번역했다.

원래 한자 신(神)은 영어의 God보다는 Ghost에 가까운 개념이다. 명나라 때 중국에 입국한 가톨릭 선교사들이 그리스도교의 절대자를 신으로 번역하지 않고, 천주로 번역한 것도 이러한 이유다. 물론 신(神)이라는 글자에 God의 의미도 없지는 않았지만, 유일신 종교의 절대자 뉘앙스는 절대로 아니었고 애니미즘적인 정령, 산신 등에 쓰는 말이었다. 한자에서 절대자의 뉘앙스를 가지는 말은 천(天)이나 제(帝)이지 신(神)은 아니다.

한국의 역사에선 왕을 뜻하는 고유의 일반명사들이 있었는데 다음과 같다.

국가

호칭

고조선

단군

고구려

개차(皆次)

백제

건길지, 어라하

신라

거서간(居西干)

차차웅(次次雄)

이사금(尼師今)

마립간(麻立干)

매금(寐錦)[2]

발해

가독부(可毒夫)


이런 칭호들은 중국식 표현인 왕(王)이라는 칭호가 일반화 되면서[3] 신라 중대(통일신라), 고려 시대부터는 왕 칭호만 쓰게 되었다.

2. 한 나라의 최고 권력자인 국왕[편집]

군주의 가장 일반적인 칭호로서 페르시아의 나, 이슬람의 술탄 등도 왕으로 번역하는게 일반적이다.

일반적인 정의는 왕국의 군주. 보통 목차보면 알 수 있듯이 '국왕'이라고 칭한다. 훌륭한 업적을 세우면 대왕이라고 부른다. 유럽 역사에서 "대왕"은 위대한 왕을 부를때 쓰는 단어일 뿐이었지만, 한국사에선 위대한 왕을 부를 때 뿐만 아니라 실제로 군주의 칭호가 "대왕"인 경우가 많았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고려, 조선왕조가 "대왕"을 자국 군주의 정식 칭호로 사용했고, 신라와 백제 역시 자국의 임금의 정식 칭호를 "대왕"이라고 했다.

아직도 지구상에는 왕국이 여럿 남았으며, 대표적인 예로 스페인, 벨기에, 덴마크, 영국, 네덜란드, 노르웨이, 일본 등은 입헌군주제를 채택한 국가이다. 심지어 현대에도 전제군주제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왕도 일부 있다. 브루나이사우디아라비아 같은 나라가 그 대표적인 예. 반대로 부탄 같이 왕이 직접 국가체제를 전제군주제에서 입헌군주제로 전환한 사례도 있다. 국민들은 오히려 전제군주제를 원했는데 '국왕이 명하시니까' 여기에 따랐다는 이야기도 있다. 오히려 의회가 결사반대했다고 한다.

민주주의가 도입되면서 군주제가 위태롭다지만 세상의 모든 왕이 사라지더라도 체스판의 왕과 트럼프의 왕 4명, 그리고 영국왕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나세르가 이끄는 장교단의 쿠데타로 쫓겨난 이집트 국왕 파루크가 "20세기에는 각국의 왕실이 사라질 것이나 5명의 왕만은 건재할 것이니 트럼프의 왕 넷과 영국의 왕이다"라고 했다.

자세한 것은 군주 문서를, 정복군주는 정복 문서를 참조.

3. 나라의 군주가 작위로서 주는 제후왕[편집]

황제의 아래이면서 대공의 위.

동양에선 명목상으로라도 "천자의 땅을 대여받았기에 그에게 충성해야만하는 제후"의 자리이며 서양에선 봉건제도의 영토 위주 국가 시스템에서 계약직의 최고봉이라 할만 한 자리다.

3.1. 중국 왕조[편집]

한나라 이래로 황제가 가장 높은 지배자의 명칭으로 굳어진 한자문화권에서 왕은 작위의 일종으로도 활용되었의며 이를 "왕작(王爵)"이라 한다.

유명한 공후백자남의 오등작도 춘추전국시대의 난리판을 거치며 유사한 과정을 통해 왕의 아랫칸에 편입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어찌어찌 한 시스템에서 위아래로 배치된 계급 비슷하게 되었지만, 이 명칭들은 본래 서로 다른 집단에서 각자들 칭해 쓰던 군주의 다른 말이었다. 고조선만 해도 연나라의 칭왕에 맞서기 전 까지는 대외적인 군주의 명칭이 "후(侯)"였다.

그 이전까지는 왕 아래 제후(公)가 있는 봉건제 국가가 중원을 차지하고 있었으므로, 칭왕하는 것은 중원 왕조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것과 같았다. 즉 이 시기의 왕은 진 이후의 황제와 같은 위치였다. 이후 황제가 등장하기까지 대왕, 태왕, 패왕 등 왕과 차별화하기위한 명칭들도 나타났었다.

왕을 대신해 황제가 등장한 이후, 동아시아에서는 대공 작위를 거의 준 적이 없으므로 작위로서의 왕은 유럽에서 말하는 대공을 대신해서, 위계상 황제공작의 사이에 위치했다. 보통 황제의 가까운 황족에게 "친왕(親王)" 왕작을 줬다.
황제와 혈통상으로는 다소 멀더라도 공적이 높거나 세력이 강성할 경우 경우 군왕(郡王)에 봉했다. 단 청나라 시절 친왕과 군왕은 황제의 친자라도 공이 없으면 할 수 없었다. 방계라도 공을 세우면 가능했다.

물론 한나라 이후 통일왕조의 봉건제도는 유교 윤리상 주나라 제도를 흉내낸 것이기 때문에 분봉받은 왕이 직접 통치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고 절대왕정 시대 유럽의 공작이나 백작들처럼 작위명에 불과했다.

일반적으로 한족 왕조의 경우 황태자를 제외한 황제의 아들들, 즉 후계에서 제외된 친자들은 장성하기 전에 각 지역으로 분봉했다. 예외적으로 만력제의 아들 복왕 주상순은 일찍 낙양으로 분봉 받았으나 거의 예외적으로 장성해서도 임지로 보내지 않고 북경에서 끼고 살았다. 만력제가 태창제를 제끼고 황태자로 삼고 싶어한 데서 비롯한다. 이런 예외 이외에는 황자를 분봉했는데 황태자의 저위(儲位)를 방해하지 않고 중앙정계에서 후계다툼을 미리 방지하려고 한것이다.

반면 이민족 왕조인 청나라 시기에는 모든 황족은 북경성 안에서 살아야 했다.[4] 한편 한자문화권의 제국에서는 프린스의 의미와 어느 정도 일치하므로 보통 작위로서의 왕은 영어로 king 대신 prince로 번역한다.

작위인 경우의 '왕'에 경우 일단 다른 모든 신하들보다 작위는 높지만 예우상은 아니다. 분봉받은 왕의 경우 어디까지나 신하이기 때문에 천자의 조정에서의 신하들과 군신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봉건시대 예법의 기준인 주나라 예법은 경대부(천자-제후-대부-사 중에서 천자를 모시는 대부) 중에 삼공의 지위는 가장 높은 작위인 공작과 동급 대우 였고 이하의 벼슬도 직위에 따라 제후들과 매치 되었기 때문에 이후 왕조에서 황제가 분봉할때 작위가 공작 등에서 왕으로 격상되었어도 이같은 예법은 그대로 이어진다.

실질적으로 황제의 친자식이면 신하들보다 끝발은 쎄겠지만 오래된 종친이나 변방의 왕이라면 이하 서술되는 조선 국왕의 안습시대 경우처럼 별 듣보잡한테도 개무시 당할수 있다. 또한 중앙 관제에 속한다고 지방직은 경대부는 아니고 당나라때 절도사나 명청 시대 순무나 총독들은 제후 취급을 받기도 했다. 순무는 1개 성(省)의 행정관이고 총독은 1~2개 성의 지방행정과 군권까지 주어진다.

3.2. 한국 왕조[편집]

우리 왕조들은 자국만의 군주 칭호들을 사용하기도 했지만[5] 대부분 "왕" 칭호를 사용했다. 그렇기에 우리는 왕작을 내린 경우가 사실상 없는거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봉왕 사례가 각 왕조마다 가끔씩 있는데 제후왕 봉작, 타국왕 봉작, 타국왕을 자국 제후왕 취급, 친왕 봉작 네가지 사례가 있다. 의외로 백제가 봉왕 사례가 가장 많다.

고조선에선 "비왕"이라는 왕작이 있었다고 중국 사서엔 기록하고 있다. 이는 흉노의 "비소왕" 작위에서 따온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에선 제 3대 대무신왕이 부여 임금 대소의 동생을 왕으로 봉했다. 제 17, 18대 광개토 대왕과 장수왕은 신라, 백제의 임금들을 "매금", "잔주"라 부르면서 그들에게 옷을 주고 예우를 받으며 제후왕으로 취급하였다.

백제에선 제 21대 개로왕이 여러 신하에게 매로왕, 아착왕, 면중왕 등 왕작을 하사한 것이 중국 사서에 기록되어있다. 칠지도의 명문에는 일본국왕을 "후왕"이라고 칭하여 일본국왕을 제후왕 취급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에선 제 30대 문무왕이 고구려 왕족 안승에게 "보덕국 국왕"(보덕국왕) 작위를 내렸다. 제 38대 원성왕은 진골 김주원에게 "명주군국 군왕"(명주군왕) 작위를 주었다. 국왕의 친족에게 "갈문왕" 작위를 주었다. 형식상이었지만 후삼국 시대의 고려, 후백제도 신라의 제후왕임을 자처했다.

고려는 오등작을 시행했지만 왕작을 내리진 않았다. 다만 임금이 죽은 왕자에게 "조선국 양헌왕" 칭호를 내린적 있다.

대한 제국은 무늬만 제국이라도 친왕 봉작을 했는데 흥선헌의대원왕, 영친왕, 의친왕 등이 있다.

3.3. 유럽 왕조[편집]

유럽에서는 왕이 작위로 나올 경우가 거의 없다. 왕보다 높게 쳐주는 황제가 동로마 제국신성로마제국에만 존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유럽의 황제는 동양처럼 힘이 있으면 그 어느 누구라도 황제를 칭하고 인정받는 등 자신의 힘의 총량이 아닌 유럽 그 자체였던 로마 제국과의 증명된 연계를 통한 정통성이 있어야 한다. 즉 한 지역의 지배자가 아닌 유럽 세계 전체의 지배자다.

그런데 신성로마제국의 경우 작위로서 왕을 많이 쓴 편이었다. 일단 다음 황제로 선출된 자에겐 로마왕이란 작위를 주었고 황제를 선출할 권한이 있는 선제후들 중 한 명은 보헤미아왕이었다. 보헤미아 왕은 황제의 신하이기도 하지만 신성로마제국과는 이질적인 독립된 지방이 신성로마제국에 복속되어 보헤미아 공작으로 활동하다가 나중에 황제에게 왕의 칭호를 수여받았기 때문에 때문에 작위로서의 왕과 군주로서의 왕 두 가지 성격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동로마 제국의 계승은 동로마의 마지막 황녀와 결혼한 러시아의 차르가 이어받았다고 주장했지만 서유럽에선 무관심이었다. 한 지역의 왕이 황제를 주장하는 꼴이기 때문. 특히 러시아의 경우 로마 제국 시대에는 크림 반도 부분을 제외하면 거의 로마의 강역과는 관계가 없었다. 그리고 이 당시는 러시아가 서구화를 외치며 유럽 세계에 편입되지 않았을 때였다.

영국에서도 대영제국이라지만 유럽 최강국으로 올라서도 왕국에 여러 작위를 합친 군주였고 황제 드립은 무굴 제국을 멸망시키고 '인도 황제' 자리를 스스로 만들어서 나왔다. 이때에도 반대하는 사람들은 작위적이라는 비판을 하였다. 전통적으로 유럽의 황제는 자신의 힘의 총량이 아닌 유럽 그 자체였던 로마 제국과의 증명된 연계를 통한 정통성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나폴레옹이 황제를 자처했을 때 전 유럽에서 광역 어그로를 먹었다. 프로이센이 독일 제국을 외칠 수 있던 것도 독일 역사에서 독일 1제국인 신성 로마 제국 작센 왕조의 초대 황제가 오토 1세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프랑스의 경우에는 그 강한 국력을 가졌을 때에도 황제 드립을 나폴레옹 이전까지는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각국의 왕은 자기 나라 내에서는 황제와 같다 같은 정신승리적 발언을 했던 것. 이것을 나폴레옹이 깨트리면서 그 때부터 기존 유럽세계의 질서를 깨트리는 흉악한 간웅이라고 생각한 각국과 더 치열하게 싸우게 된다. 장기 중세를 말하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중세의 마지막의 절정기가 바로 이 나폴레옹의 황제 즉위라고(태동기는 프랑스 혁명, 완성은 1848년의 각국에서 벌어진 운동) 할 정도로 나폴레옹의 행동은 유럽 세계에 속한 국가들에게 기본 질서와 공식, 의식 공격을 하는 초 광역 어그로를 끈 셈.

그런데 유럽에서도 극히 드문 경우지만 King(왕)을 작위로서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는 군주가 여왕일 경우 남편에게 주어지는 칭호인데 정식명칭은 King consort다. 유럽에서 여왕왕비를 구분할 때 왕비에게는 Queen뒤에 consort를 붙이는 것과 똑같다. 여왕은 Queen regnant. 사실 군주인 왕도 엄밀히 따지면 King regnant인데 남성인 왕이 워낙 많아서 짧게 King으로 사용될 뿐이다.

그러나 이런 호칭은 이베리아 반도(스페인, 포르투갈) 쪽에서 주로 사용했으며, 스코틀랜드의 여왕이였던 메리 스튜어트의 남편인 헨리 스튜어트 단리의 예처럼 타국에서도 사용되었다. 다른 나라의 여왕의 부군의 경우는 호칭에 인색한 관계로 그냥 Prince consort의 작위를 주었다. 여자 왕의 남편은 한국에서는 부군/국서(國壻)로 번역한다. 사전을 찾아보면, 부군은 여왕의 남편 뿐만 아니라 남의 남편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국서는 여왕의 남편/부마(왕의 사위)의 뜻으로 한정.

3.4. 일본 왕조[편집]

일본에서는 덴노의 3세손(증손자)(1947년 이전에는 5세손) 이하의 남자 자손은 왕(王), 여자 자손은 여왕(女王)이라 하며, 중국의 군왕(郡王)과 비슷한 지위라고 볼 수 있다. 다만 1947년 신헌법 시행 이후로는 "왕"은 한 명도 태어나지 않고 있다.

4. 중국 왕조의 왕작 제도[편집]

  • 친왕(親王) : 황제와 비교적 가까운 친족, 예를 들면 황자나 황제의 아우들에게 내렸다.

    • 일자왕(一字王) : 수식어가 한 글자 뿐인 왕. 춘추전국시대에 존재했던 나라의 이름에서 따온다.

예) 초왕(楚王), 오왕(吳王), 제왕(齊王), 연왕(燕王) 등.

  • 이자왕(二字王) : 수식어가 두 글자인 왕. 대개 군이나 현의 명칭에서 따온다. 절대적이지는 않지만 대체적으로 일자왕보다는 낮게 여겨진다.

예) 임치왕, 동해왕, 성도왕 등.

  • 평왕(平王) : 기원은 당(통일왕조) 시대다. 이전부터 북평, 남평, 동평, 서평의 4왕의 칭호가 있었지만, 당나라의 권위가 저하하자 사방을 지키는 유력한 절도사에게 북평왕, 남평왕, 동평왕, 서평왕 등의 왕작을 내리기 시작했다. 오대십국시대에는 평왕 직위의 절도사들은 왕위를 세습하게 되어, 중앙에 반항하여 국가를 건설하는 등 반독립국으로 바뀌게 된다. 송북 시대에 절도사의 왕작은 폐지되었지만, 서평왕은 서하의 군주에게 남평왕은 베트남의 리 왕조에게 주었다. 하지만 원나라 이후에는 단순히 황족에게 주는 칭호로 바뀌게 되어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평왕의 의전서열은 일자왕과 이자왕 시이에 놓인다.

  • 군왕(郡王) : 군왕은 비교적 먼 황족에게 주어지는 칭호이다. 지방의 고장 이름에서 따온다.

  • 심양왕(瀋陽王) : 원나라 때 존재했던 작위. 처음에는 이자왕이었으나 후에 심왕(瀋王)으로 승격.

5. 고려/조선 국왕은?[편집]

이 문단은 우리 왕조 내부가 아닌 외부 즉, 중국 왕조의 시각에서 고려/조선을 어떤 위치로 바라보았는지에 대한 설명이다.

고려시대 때 상당한 예우가 있었다.

# "옛 현도(玄菟 : 고려국)의 땅을 그대에게 모두 주나니 영광은 옛날 일자왕(一字王)보다 높고, 조칙에 의해 부여받은 높은 직위는 삼공(三公)을 겸했다" 고려 정종 5년(1039) 기묘년 (국역 고려사: 세가, 2008.8.30, 경인문화사)

이 외에도 고려국 사신을 국신사라 하여 서하보다 위에 두고 사실상 요나라에 준하여 취급한 것을 보면 송나라에서도 예우받았다고 볼 수 있다. 원나라 시기 고려 국왕은 고려 국왕이라는 작제적 지위를 받았다. 원나라 당시에는 친왕, 번왕 이런 식으로 안 나누고 모두 왕으로 통일했다. 왕급 직위 중에서는 최고 직위였다. 또 고려 국왕은 정동행성 승상이라는 관료적 지위였다.

조선 국왕은 관료제적으로는 2품, 작제적 질서와 종법적 질서에서는 친왕급이었다. 조선 국왕은 중국의 군왕급이었다는 잘못된 지식이 있는데 예법상 이품체강(二等遞降) 원칙에 따라황제에서 이품(이등)급을 낮추면 황태자- 친왕 순이다. 이는 명나라가 조선의 관료의 위치를 일일이 정해주기보다는 조선 국왕의 위치를 정해 관료들의 위치를 간접적으로 정해주는 방식을 펴서였다.

그러므로 조선 시대에는 친왕 대우였다. 이는 조선 국왕 뿐만 아니라 조선의 벼슬아치도 마찬가지다. 조선의 의정부대신(삼정승)이나 좌우찬성은 조선에서 1품이지만 명나라 의전예우로는 3품대우이다. 양녕대군이 조선의 세자로 명나라에 입조한 적이 있었는데 이 때 영락제는 양녕대군을 정강왕(광서성 일대를 다스렸다고 한다.)의 예에 따라 대했다고 한다. 다만 초대 정강왕은 왕작을 군왕에서 시작해 친왕으로 올라갔다고 적었다. 이 정강왕이 초대 정강왕인지 그 후대인지 아니면 친왕으로 있을 당시인지 군왕으로 있을 당시인지는 확인바람.

또한 실록을 찾아보면 태종 2년 2월 기사에 명 건문제가

태종에게 면복을 주는데 칙서에

조선왕은 군왕의 벼슬이니 오장(五章)이나 칠장복(七章服)을 주어야 마땅하지만 이제 특명으로 친왕(親王)의 구장복(九章服)을 내려 주며...

라는 구절과 태종 9년 4월 기사에

사신을 중국에 보내어 고명(誥命)을 청하니, 영락(永樂) 원년 여름 4월에 황제가 도지휘사(都指揮使) 고득(高得) 등을 보내어, 조(詔)와 인(印)을 받들고 와서 우리 전하를 국왕(國王)으로 봉(封)하고, 이어서 한림 대조(翰林待詔) 왕연령(王延齡) 등을 보내어 와서 전하에게 곤면 구장(袞冕九章)을 하사하였으니, 품계(品階)가 친왕(親王)과 동일하였다.

라고 나온다. 그러므로 대우가 친왕에 해당함을 알 수 있다.

조선이 멀쩡할 때에는 조선이라는 나라를 꽤 크게(?) 여겼다. 지금도 대체로 인구 분포가 그렇지만 한반도나 베트남 같은 경우 땅이 괜찮은 편이라[6] 땅이 비교적 좁아보일지라도 중국 기준으로 만주, 몽골, 티베트 등지의 여러 칸들보다는 훨씬 백성 수가 많았다. 근대 이전까지는 멜서스의 주장대로 인구가 경제력 측정 기준이었으니 경제력, 문화력 측면에서도 우위였다. 의외로 따지고 볼 때 명나라나 청나라와 국경을 맞댄 나라들 중 조선보다 인구가 많은 나라는 지극히 드물었다.[7] 러시아와 인도는 청대에 들어 겨우 접했고 그나마도 중국의 직접 통치력이 약하다 보이는 몽골, 티베트 방면에서 접했다. 똑같이 친왕급 대우를 받은 베트남도 남부를 완전히 정복한 때는 조선 후기 시기에 해당하며, 그 이전에는 북부/중부 지역만을 지배했다. 티무르 제국에 대해서는 추가바람.

때믄에 명나라 시대에는 천자의 대리인으로 온 사신들도 조선 국왕을 만나면 칙서를 반포하기 전에는 공손하게 읍하며 예우를 했고 초기 환관을 보내던 데서 후기로 올수록 사신 지위도 높아졌다. 황제의 스승이자 공부상서를 지낸 사람이 올 정도였다. 이 사람은 정2품으로 조선 관직상 판서에 해당한다. 명나라는 재상을 없애고 1품 직위는 대학사, 즉 황제의 자문에 불과했기 때문에 관직상 오를 수 있는 최고직이다.

청나라의 숭덕제삼전도의 굴욕을 시전할 때 항복 절차가 끝나고 나서 "조선왕은 일국의 국왕이니 짐의 아우들 사이에 앉혀라" 했고, 조공국들 중에 조선이 그나마 나라꼴을 갖춰서 주요국으로 대우했기 때문에 사신으로는 만주인 고관을 보냈다. 그쪽에서 봐도 비교적 큰 나라인 조선 국왕에게 수천~수만에 불과한 몽고 추장 7~80명과 같은 왕 작위를 줬어도 대우는 현격히 달랐다...

반면 국세가 기울어 임진왜란시기 선조 시절에 나라가 털리고 나선 경략(해당 지역 책임자)으로 온 명나라 병부우시랑 송응창은 정 3품 조선 관직으론 병조참판 해당한다. 명나라 시절 남경 정부에 시랑하나 북경엔 좌우 시랑 청나라 시기엔 만한상서 2인 밑에 만인시랑 2명, 한인시랑 2명 등 총 4명이다. 또 듣보잡 연대장급 지휘관한테도 맞절하고 광해군은 아버지의 친구를 맞는 예로 인사할 지경이 되었다. 조선 막장테크인 고종 때는 황제도 아닌 북양대신 이홍장의 대리로 온 원세개(위안스카이)에게 조선 국왕 고종도 개무시받던 안습의 역사가 있다.

그렇게 왕이라는 칭호에 진절머리가 난 고종은 갑오개혁을 하면서 국왕이라는 칭호를 폐지하고 대군주라는 칭호를 사용했고, 외국의 국왕들도 전부 대군주로 번역하게 했다.

6. 곤충에서의 왕[편집]

수캐미는 오직 여왕개미정액셔틀(..)일 뿐인 개미와는 다르게 흰개미는 유시충(생식흰개미) 암수 한쌍이 평생 살면서 아이를 생산한다. 그래서 유시충 수컷을 왕이라고 부른다. 자세한 것은 흰개미 문서를 참조.

7. 창작물에서 왕인 캐릭터[편집]

8. 관련 문서[편집]

[1] 사람이 땅 위에 서 있는 모습이라는 설, 士 자의 분화자 설, 土 + 一/上 설 등. 사실 王 자의 음이 도끼의 상형문자인 戉(도끼 월) 자와 음이 멀어서 도끼의 상형자라고 단정 짓기는 어렵다.[2] 중원고구려비와 봉평신라비에서 등장. 마립간의 다른 표기로 보기도 한다.[3] 왕이라는 칭호자체를 쓰기 시작한건 기원전 4세기 때부터이기는 하다. 기록이 별로 남아있지 않다는 게 문제기는 하지만[4] 청조의 경우 황족포함 모든 만주족이 북경을 포함한 전국 주요 대도시에 소재한 팔기주방 내에서 거주할 의무가 있었다. 그것은 지배민족인 만주족이 한족을 사사로이 괴롭히는것을 막으려는 목적과 한족과 섞여살며 동화되지 않은 팔기의 군사조직을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애당초 북경의 옛 '여'자 모양 성벽중 자금성이 있는 위쪽 작은 직사각형 지역이 만주족 전용 주거지역이었다.[5] 고구려의 태왕, 신라의 거서간, 이사금, 차차웅, 마립간, 고려의 황제(광종 시기에만) 등등.[6] 인구 밀도로 보면 당시 조선이 훨씬 더 살기 괜찮았다. 1600년 경 당시 조선의 인구밀도는 1㎢당 50, 동남아 평균은 5.8[7] 다만 일본의 경우 전국시대 끝물부터 조선의 인구를 앞서나가며 중국 다음으로 동아시아에서 많은 인구를 차지했다. 일본이 메이지 유신 전에는 별볼일 없었다는 인식이 있는데 이미 일본 임진왜란 후 약탈한 조선의 문물과 네덜란드와의 교류로 조선과 격차를 상당히 벌려갔다. 일본의 메이지 유신은 급진적인 것이었으나 조선의 근대 태동기보다도 일본의 근대화에 대한 기반은 모두 갖추어져 있었다.[8] 부왕인 아버지를 손수 참살함으로써 방벽의 모든 주민들의 열렬한 지지와 경배를 이끌어 내는 데 성공, 레이스 가의 마지막 후손으로서 왕위를 자연스레 계승하여 왕이 되었다. 물론 배후 실세는 조사병단을 위시한 군부 세력이나 히스토리아 왕의 의지를 존중해주는 것으로 보이며 의지가 전보다 많이 강화된 히스토리아가 압박해 오는 군 세력의 지시를 가만히 순종하고 방관할 가능성도 절대적으로 만무하다. [9] 왕이라는 호칭만 대놓고 쓰지 않을 뿐. 실제로는 재벌 회장은 왕이나 다름없다. 자식에게 회장자리를 물려주고, 재벌들 끼리 정략결혼 한다던지 과거 유럽의 왕국들과 비슷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