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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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Coat_of_Arms_of_Joseon_Korea.png 조선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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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대 국왕
太祖
태조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King_Taejo_Yi_02.jpg

묘호

태조(太祖)

시호

조선

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
(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

대한제국

지인계운응천조통광훈영명성문신무정의광덕고황제
(太祖至仁啓運應天肇統廣勳永命聖文神武正義光德高皇帝)

본관

전주(全州)

능묘

건원릉(健元陵)

성계(成桂), 개명한 이후에는 단(旦)

중결(仲潔) / 군진(君晋)

송헌(松軒) / 송헌거사(松軒居士)

출생지

고려 동계 화령군[1]

사망지

조선 한성부 창덕궁 광연루 별전

왕비

신의왕후, 신덕왕후

부왕

조선 환조

모후

의혜왕후

생몰

1335년 10월 27일 ~ 1408년 6월 18일
(총 26533일.)

재위

1392년 8월 5일 ~ 1398년 10월 14일
(6년 2개월 9일, 2,261일.)

태상왕

1398년 10월 14일 ~ 1408년 6월 18일
(9년 8개월 4일, 3,534일.)

1. 소개2. 그의 집안의 고려 말까지의 상황
2.1. 전주 시절2.2. 목조의 동북면 이주2.3. 몽골에 투항, 천호가 되다2.4. 원나라의 쇠퇴와 이자춘의 고려 귀향
3. 청년 시절4. 한국사의 전설적인 무장으로서의 면모
4.1. 전설적인 무용담4.2. 불세출의 신궁4.3. 사용한 무구4.4. 세력4.5. 위화도 회군과 조선 건국
5. 새 왕조의 창건자가 되다6. 2번의 참극과 쓸쓸한 말년7. 최후와 능8. 시호, 묘호, 휘9. 배우자와 자녀들
9.1. 정비 : 신의왕후 한씨9.2. 계비 : 신덕왕후 강씨9.3. 후궁 및 자녀들
10. 어진
10.1. 청포 어진10.2. 홍포 어진10.3. 함흥본궁 어진
11. 이성계 여진족설12. 이야깃거리13. 북한의 평가14. 총평15. 대중 문화 속의 태조 이성계
15.1. 사극15.2. 영화15.3. 게임15.4. 소설
16. 관련 문서17. 둘러보기(계보)

1. 소개[편집]

조선조 500년의 초대 국왕으로 묘호는 태조(太祖), 시호는 고황제(高皇帝). 초명은 이성계(李成桂)로, 세간에는 다른 역대 국왕과 달리 태조라는 묘호보다는 이 이름으로 더 유명하다.[2] 조선의 국왕으로 즉위한 이후에 이름을 단(旦)으로 바꾸었다.[3] 후에 대한제국의 광무(光武)가 그를 황제로 추존하였다.

사방팔방에서 헬게이트가 열리며 멸망 직전까지 몰렸던 고려 말기에 전국 각지의 반란군과 한족 반란군인 홍건적, 멸망한 원나라군벌, 역사상 최악의 패악질을 부렸던 왜구, 그리고 심심하면 침입했던 여진족에 이르기까지, 당대의 동아시아에서 싸울 수 있었던 적들을 상대로 전부 승리하고 수만 명씩 개박살을 내버린 인간흉기다. 한마디로 왕이 되지 않았어도 이순신과 쌍벽을 이루는 '상승불패(常勝不敗)의 명장'으로 칭송받았을 위인.대신 이 되서 500년 내내 태조로 칭송받았다. 인생에 있어 딱 한 번 패한 싸움이 아들 이방원과의 싸움인 조사의의 난 뿐이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더니

고려 말기, 권문세족의 전횡으로 개판 5분 전이었던 현실에 불만이 폭발해버린 정도전, 남은, 조준, 윤소종신진사대부들과 손을 잡고 힘을 키운 뒤 요동 정벌, 명나라 공격에 떠밀려 참전하여[4] 압록강 위화도까지 갔던 때 반란을 일으켜 역으로 고려 조정을 공격한 위화도 회군 사건으로 우왕쿠데타로 몰아내고 4년 동안 권력 장악 준비 작업 끝에 마침내 공양왕을 쫓아내 고려를 뒤엎고 새롭게 조선을 개국한다. 정도전 등과 함께 조선 왕조 500년의 기반을 닦았으나, 후계자 문제로 아들 이방원반란을 겪고, 권력에서 밀려나 비교적 불우한 말년을 보낸 끝에 사망했다.

조선 왕조에서 영조 다음으로 장수하고, 동시에 두 번째로 많은 나이(64세)까지 재위한 왕이다. 숙종이 60세[5], 중종이 57세, 선조고종이 56세, 세종대왕이 54세, 태종이 53세, 광해군은 49세, 정종은 44세까지만 재위했다. 영조는 32세에 즉위해서 훙서하기까지 약 52년간 호랑이 등을 탔다. 조선 왕 평균 수명이 47세 정도인데, 이성계는 47세에 동북면 도지휘사(관찰사 수준)의 지위였고 의안대군 이방석을 낳고 있었다.

조선 왕조의 개국자였기에 조선 시대에 쓰인 기록에서는 행적에 대해서 필요 이상의 신격화도 많은 편이지만, 전반적인 기록을 보면 호방하고 성실하며, 전장에서는 적조차도 자신의 친위대로 삼아버리고 정적들조차도 친구라며 쉽게 죽이지 못했던 천연스러운 인간성이 발견된다. 표독스럽다는 평을 받는 아들 이방원과는 여러모로 다른 그 인간성과 전쟁에서의 실력 만큼은 한국사에서도 압도적인 영웅. 그러면서도 잔인해질 수 있을 때는 한없이 잔인해지거나, 여러 일화나 실제 기록으로도 흡사 곰 같은 체구의 용모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계산에도 능한 여우의 지혜도 갖추고 있었다.

거의 혼자서 고려를 구한 수준의 전설적인 전공을 세웠고 고려 말의 폐단에 사형 선고를 날리며 새 나라를 창업한 위인이지만, 그 과정에서 민중의 신망이 높았던 최영 장군을 죽이는데 일조하기도 하였고, 전국의 왕씨를 조직적으로 학살하는 등으로 인해 왕씨 문중에서는 가문의 철천지 원수나 다름없는 사람이기도 하다. 또한 왕씨가 아니라도 왕씨와 연을 맺고 있던 개성 사람들은 일가붙이를 학살한 이성계를 굉장히 증오했다.왕웨이중? 조선이 망할 때까지 조선과 한양 자체를 싫어했을 정도이다.[6] 특히 개성에는 위구르인들이 꽤 살았는데[7] 이잡듯이 학살한 이성계가 고려 말기에 그나마 중국에 비해 적은 수였던 몽골계란 몽골피는 다 없앴다고 볼수있다.

변방의 무인에서 시작하여, 외적과 맞서 싸워서 두각을 나타낸 끝에 결국 새로운 시대를 열었고,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의 아들의 반란으로 인해 권력의 자리에서 밀려나기까지의 인생 자체가 한 편의 무협지나 드라마의 연속이었던 인물이다.

2. 그의 집안의 고려 말까지의 상황[편집]

2.1. 전주 시절[편집]

본관은 전주 이씨. 때문에 이성계 본인이 전주에서 태어난 것은 아님에도 실록을 보면 이성계를, 또한 본인이 고려인이자 '전주 사람'으로 칭하는 부분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의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는 태조 1권 총서 1번째 기사에서는 계보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일단 실존이 확인되는 인물은 고려 중기 무신정권의 집권자로 유명한 이의방의 동생 이린(李璘)이다. 이성계의 실제 출생지는 함경도 영흥이지만, 조선 왕조는 왕조의 발상지를 전라도 전주로 하고 그곳을 풍패지향(豊沛之鄕)[8]으로 하였다. 한 고조 유방이 반란을 평정하고 돌아가는 길에 패군(沛郡) 풍현(豊縣) 즉 풍패(豊沛)에 들러 승리를 기념하며 고향 사람들을 모은 자리에서 대풍가(大風歌)를 읊었는데, 이성계는 왜구를 평정하고 돌아가는 길에 전주(全州)에 들러 황산대첩의 대승을 기념하며 전주 이씨 종친들을 모은 자리에서 대풍가(大風歌)를 읊은걸 보면 이성계 자신도 그런 의식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 시대 무신정변 주동자로써 반역자로 규정된 이의방혈연적으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 별로 내키지 않았는지, 과거 전주 이씨의 족보에는 이린의 한자가 다르게 되어 있다든가 하는 식으로 애매하게 기록되어 있는 경우도 있었다. 태조 총서의 기록에서도 李璘이 아니라, 李隣으로 기록되어 있다. 현재는 전주 이씨의 문중에서도 확실히 인정하고 있다.

하여간에 이린이의방정균에 의해 살해당할 때 죽지 않고 고향 전주로 돌아간다. 이때 이린은 시중(侍中)이었던 남평 문씨 문극겸(文克謙)의 사위였는데, 장인어른이 조금 도와주었을 수도 있다. 문극겸은 이의방이 죽은 후에도 비교적 꾸준하게 활약하였다.

이린이 문극겸의 딸과 결혼하여 낳은 아들이 이양무(李陽茂)다. 이양무의 아들이 이안사(李安社)이고, 나중에 추존되어 목조(穆祖)가 된 사람으로, 다시 이때부터 비교적 자세한 내용들이 기록되기 시작했다.

2.2. 목조의 동북면 이주[편집]

조선 왕조가 전주 이씨인만큼, 당연히 본래 이 가문도 전라도 전주(全州)에 있었다. 그런데 이곳과는 전혀 다른 함경도가 이성계의 근거지가 된 것은 조금 곡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세한 사항은 알 수 없지만, 기록으로 보면 이성계의 고조부인 이안사는 그 지역의 관리와 관청에 딸린 기생의 문제로 트러블이 생겼다고 한다. 여자 문제 가지고 트러블이 생겼는지 재산 관련 문제인지는 여하간에 알 수 없으나, 사이가 지저분하게 된 모양으로 문제가 생긴 관리는 윗선에 연락하고 심지어 군사까지 동원해서 이안사를 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이안사는 그 말을 듣고 강릉도(江陵道)의 삼척현(三陟縣)으로 이주했다. 이때, 이안사를 따라간 사람들의 숫자가 170여 가(家)나 된다고 하는데, 이를 볼 때 과장을 고려하더라도 전주에서 꽤 끗발을 날리던 가문으로 보인다.

삼척으로 옮겨간 이안사 집단은 오랜 기간 그곳에서 살면서, 자연스레 농사도 지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때 그들이 배 15척을 만들어 왜구를 방비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렇다면 이안사 집단은 이때도 왜구에 대비하여야 할 필요가 있을 정도로 경제적 기반이 있었다는 말이 된다. (『이성계의 경제적 기반에 대한 연구』 ─ 이형우)

2.3. 몽골에 투항, 천호가 되다[편집]

그렇게 기반을 가지고 있던 그들이었는데, 또 문제가 생겼다. 원나라의 야고(也古)라는 인물이 쳐들어올 때는 몸을 피해서 문제가 없었지만, 대략 그 무렵에 새로운 지방관이 이 지역으로 오게 되었는데, 하필 전날에 문제가 생겼던 그 관리였다.

얼른 자리 털고 뜨는게 나을 것으로 보였던 이안사는 동북면의 의주(宜州)로 이동했다. 이때도 170여 가가 따라 나섰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과장을 고려한다고 해도, 이안사가 상당한 수의 유이민 집단을 통솔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추정해볼 수 있다.

고려 조정에서는 그렇게 이주한 이안사를 의주병마사(宜州兵馬使)로 임명해서, 그렇게 된 바에야 원나라 군사를 막으라고 시켰지만, 산길대왕(散吉大王)이라는 원나라 장수가 두 차례 항복을 권유하자, 싸워 봐야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항복하는 편이 떡고물이 더 많을 것이라고 여겼는지 원나라에 항복하였다.

항복한 후 이안사는 같은 집안 사람을 산길에게 혼인시켜 서로 연줄을 만들어 놓고, 자의인지 타의인지 더 북쪽으로 가서 개원로(開元路) 남경(南京)의 알동(斡東)에 정착하였다. 알동은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두만강 하류 지역으로 보인다.

이안사는 산길의 주선으로 인해 알동천호소(斡東千戶所)가 이안사를 위해 세워지고 이안사 본인은 천호장를 겸하게 되었다. 이때 이안사의 집은 알동에 있었지만 거처가 일정하지는 않았다고 하는데, 이안사가 자신의 집단 유지를 위해 여러 곳을 왕래하면서 노력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고, 이안사의 집단이 여진족 거주 지역에 살면서 순수 농민적 성격에서 여진족과 같은 생활 방식으로 바뀌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안사가 사망한 뒤, 아들 이행리(李行里)가 그 기반을 이어 받았다. 한편 이행리는 충렬왕을 뵙고 자기가 원나라에 항복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을 설명하면서 용서를 구하기도 했다. 충렬왕은 "그대 행동을 보니 마음을 알겠다"라면서 이해한다는 식의 반응을 보였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이행리의 세력이 확대되고 위상도 제법 커지자, 근처에 있던 여진 천호(千戶)들이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익조의 위엄과 덕망이 점차 강성(强盛)하니, 여러 천호(千戶)의 수하(手下) 사람들이 진심으로 사모하여 좇는 사람이 많았다. 여러 천호들이 꺼려서 모해(謀害)하기를,

“이행리(李行里)는 본디 우리의 동류(同類)가 아니며, 지금 그 형세를 보건대 마침내 반드시 우리에게 이롭지 못할 것이니, 어찌 깊은 곳의 사람에게 군사를 청하여 이를 제거하고, 또 그 재산을 분배하지 않겠는가?”


태조실록』 1권 총서 9번째 기사


이행리는 우연히 그 과정을 알게 되고 가족들을 이끌고 달아났는데, 뒤를 보니 적이 무려 300여 명이나 되어 추격전을 벌이다가, 갑자기 건너는 곳의 강이 물이 열려 자신들은 돌파하고, 다시 강이 물이 막혀 적이 추격해올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런 기록은 과장이 있겠지만, 여하간에 다시 기반을 날리고 도망친 이행리는 여러 섬에서 조금 지내다가, 의주로 와서 그곳에서 다시 세력을 키웠다. 그리고 1300년, 쌍성 근처의 고려인들을 관리하는 다루가치(達魯花赤)에 임명되었다.

그 후 이행리가 죽고 아들인 이춘(李椿)이 이를 이어받았다. 이춘은 자신들의 본거지를 함주(咸州)로 옮겼는데, 우마를 기르는데 편리해서 그랬다고 한다. 또 이춘은 쌍성 총관(雙城摠管)의 조양기의 딸 조씨와 결혼했는데, 이로 볼 때 해당 지역에서 어느 정도 인정을 받은 세력으로 보인다. 고려 초기 벼슬을 했던 조지수의 아들은 항복하여 쌍성 총관부의 총관이 되었다. 한양 조씨이다.

원나라 조정에서는 알동에서 이씨 집안을 따라 이곳까지 이주한 사람들을 본래 자리로 되돌리려고 했지만, 이춘은 직접 원 조정에 글까지 올려 사정을 설명하고 이를 막아내었다. 이런 면으로 볼 때, 이춘에게 있어서 그 주민들은 경제적 기반을 위해 꼭 필요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2.4. 원나라의 쇠퇴와 이자춘의 고려 귀향[편집]

이춘이 사망하고 난 뒤에는 후계자를 놓고 내홍이 벌어졌는데, 처음에는 이춘의 큰아들인 탑사불화(塔思不花)[9]가 후계자가 되었는데 곧 죽고 말았다. 탑사불화의 아들이었던 교주(咬住)는 나이가 어렸는데, 이춘의 부인 중 박씨의 아들이었던 탑사불화, 이자춘의 세력에 대해, 조씨의 아들이었던 완자불화(完者不花), 나해(那海)와 누가 해먹을 것인가를 두고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이때 이자춘은 직접 개원로(開元路)로 나가 사정을 설명했고, 원나라에서 박씨 쪽의 손을 들어줌에 따라 이자춘이 어린 이교주 대신에 임시로 이씨 집안의 대장이 되었다. 그 후 이자춘은 나해를 때려잡았다. 일단 기록으로는 이교주가 나이가 차자, 이자춘은 자리를 다시 넘겨주려고 했다는데, 교주가 받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실상은 어떨지...

꽤 기민한 편이었던 이자춘은 당시 동아시아의 정세도 바로 꿰뚫어 보고 있었다. 원나라의 국력이 쇠약해지는 사실을 바로 알아차리고, 고려의 공민왕이 반원 정책을 시도하려는 것을 파악하여 직접 공민왕을 만났다. 당연히 도움이 필요했던 공민왕이자춘을 크게 환영하였으나 당장에 받아들이지는 않고 기다리라는 지시를 내린다. 이자춘공민왕의 밀지를 받고 쌍성총관부 공격에 동참한 그 결과, 고려는 쌍성 총관부 지역을 되찾았고, 이자춘은 당당하게 고려의 공신이 되어 동북면에서 세력을 확고하게 유지할 수 있게 되면서 고려 중앙 정계에도 진출할 기회를 얻는다.

그리고, 이자춘과 함께 쌍성총관부 공격에 참전한 아들이, 훗날 역사를 바꾸는 주역이 되었다.

3. 청년 시절[편집]

원나라에서 만호장이 되었다가 원나라가 망할 때쯤에 고려에 내응하여 쌍성총관부를 점령하는데 공을 세우고 고려의 신하가 되었다.[10] 아버지인 이자춘과 배다른 형인 이원계와 배다른 동생인 이화와 함께였다. 이원계는 위화도 회군 이후 절명시를 남기고 자살했다. 고려의 신하로서의 충절이었다고 하는데 당시 상황을 보면 정말로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아들들에게는 삼촌을 도우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래서인지 이원계의 둘째 아들인 이천우가 공신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고려에서는 첫째 부인 소생이나 둘째 부인 소생이나 모두 다 적통이다.[11] 먼저 들어온 사람이라고 적통, 어느 어머니의 신분이 더 높다고 적통 그런 거 없다. 게다가 이름을 보았을 때 '계'자 돌림임을 알 수 있다. 이원계와 이성계의 사촌의 이름을 보면 마찬가지로 '계'자 돌림인 걸 알 수 있다. 그렇게 치면 이화는 몰라도 최소한 이원계는 적자라는 말이다. 하지만 전주 이씨 족보에는 이성계를 제외한 두 사람은 서자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것은 왜곡[12]이다. 아마도 고려 시기에는 원나라몽골 유목 민족의 풍습으로 여러 부인을 두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다. 그게 아니더라도 고려 시대에 지방 호족이 존재하는 나라에서 호족을 감시하는 수단으로 수도에 소환해서 생활하게 하는 제도 때문에 고향의 아내인 '향처'와 수도의 아내인 '경처'가 따로 있던 시절이기도 하다. 그것이 후일에 그런 제도들은 사라진 뒤에 이해 부족으로 그렇게 기록된 것일 수도 있다.

젊어서 어느 절에서 쉬던 중 꿈에 무너지는 집의 서까래 세 개에 깔렸는데 깨어나 보니 등에 서까래에 눌린 상처가 있어 그 절의 중이던 무학대사가 이는 왕이 될 징조라고 말한 일화는 유명하다. 서까래 3개가 나란히 놓여져 있으니 석 삼(三)자 모양이 되고 이성계의 몸을 작대기(│)라고 하면, 둘이 합치면 임금 왕(王)자가 되기 때문이다.[13]

또 다른 일화로,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 전 용한 점술가를 찾아갔는데 그 앞에 얼짱거지가 거지 티가 안 날 정도로 옷을 멋지게 입고 와 있었다. 점술가가 한자를 하나 뽑아보라고 하는데 그 거지가 뽑은 한자는 물을 문(問). 점술가가 말하기를 "문(門) 앞에 입(口)이 있으니 당신은 거지 팔자요"라고 하자 그 거지가 "나 참 딱 걸렸네" 하고 투덜대면서 쓸쓸히 퇴장한다. 그 다음 이성계도 한자를 뽑았는데 역시 문(問)이었다. 그러나 이번엔 점술가가 놀라서 "이것은 좌로 보나 우로 보나 임금 군(君)이니, 왕이 될 팔자로군요"라고 했다고 한다.

다른 판으로, 이성계가 먼저 파자점 치는 점술가를 찾아가 물을 문(問)을 뽑았더니 점술가가 이성계에게 왕이 될 팔자라고 말해주고 그 다음 날 이성계가 근처에 있던 거지 하나를 멀쩡한 사람처럼 변장시켜서 똑같은 점술가를 찾아가 문(問)을 뽑게 하라고 시켰더니 점술가가 그 거지에게는 거지 팔자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별 상관은 없지만 이런 패턴은 이야기에서 자주 등장하는데, 높으신 분들보다 점술가의 지적 능력을 띄워주는 목적이 강하다.

또 다른 변주로 이성계 이후에 점을 본 사람이 거지가 아니라 이지란이며, 점쟁이의 거지 팔자 선언으로 날뛰는 이지란을(복채도 이성계의 2배나 냈다고 한다) 이성계가 말리면서 둘이 이때 의형제를 맺었다는 이야기 또한 있다.

십팔자위왕(十八子爲王) 즉 이씨(李)가 왕이 된다는 도참이 있어서, 고려 왕실에서는 오얏나무(李) 심고 베기를 반복하면서 이씨(李)의 기를 누른다는 의식을 행하기도 하였다. 조선 왕실의 문양을 같은 발음의 이화(梨花) 즉 배꽃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도 있는데 이화(李花)이다.

4. 한국사의 전설적인 무장으로서의 면모[편집]

최영과 나란히 고려의 수호신으로 통했던 한국사 최강의 맹장 중의 하나였다. 을 잘 쏘아서 '신궁(神弓)'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천하의 명궁으로 알려졌다. 훗날 이성계의 눈부신 활약상에 관해서는 여러 영웅담이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으며, 이성계는 30여 년 동안 전장에 나아가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다. 아버지 이자춘과 함께 고려에 귀순했으며 귀순 후 왕의 호위직인 애마를 맡아서 했다. 고려군과 내응하여 쌍성총관부를 함락시키는데 큰 공을 세운 것을 시작으로 고려의 무장으로서 고려를 침략해오는 몽골, 왜구, 홍건적, 여진족과 반란군들을 물리치는데 많은 공적을 세웠다.

개인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선배 무장인 최영과 절친한 사이였다고 하며 그와 함께 이인임 일파를 척살하고 수문하시중의 자리에 올랐다. 위화도 회군 이후를 생각하면 참 아이러니해지는 부분.

4.1. 전설적인 무용담[편집]

파일:4aDENSQ.png

그가 벌인 전투들. 위로는 나하추, 여진족, 원나라 아래로는 왜군, 그리고 고려 중앙군까지 동북아시아 대부분 세력들과 전투를 벌였고 모두 승리했다.


세세한 전공을 제외하고 굵직한 전공만 따지면 다음과 같다.

  • 1361년 10월 독로강(禿魯江) 만호(萬戶) 박의의 반란을 진압하고 박의를 죽였다.

  • 같은 해 10만 홍건적 침공. 수도 개경이 함락되자 이성계가 고려인과 여진족 2천으로 구성된 사병조직으로 개경 탈환에 성공해서 가장 먼저 입성하고 홍건적 두목을 활로 쏴 죽였다.

  • 1362년 원나라 장수 나하추의 수만 군사의 침입을 물리쳤다.

  • 1364년 원나라 황제의 명으로 침공한 덕흥군과 최유의 1만 군대를 최영과 함께 섬멸시켰다.

  • 1364년 1월 삼선(三善)과 삼개(三介)의 반란군이 함주를 함락하자 이를 물리치고 밀직부사. 단성양절익대공신에 책봉되었고, 동북면원수지문하성사, 화령부윤이 되었다.

  • 1370년 11월 지용수 등과 함께 만주의 동녕부(東寧府)를 점령함. (제1차 요동정벌)

  • 1377년 우왕 3년 왜구를 지리산에서 격퇴했다.

  • 1378년 수도 개경을 위협하던 왜구의 대군에 맞서 최영이 싸우다가 위기에 빠졌는데 기병을 이끌고 구원하여 격퇴하였다.

  • 1380년 내륙으로 진출한 왜구의 대군을 크게 섬멸했다. 이를 후세엔 황산 대첩이라 부르게 된다. 황산 대첩은 그를 국가적 영웅으로 자리매김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 1382년 여진족 호바투가 노략질을 할 때 동북면도지휘사가 되어 이지란과 함께 궤멸시킴.

  • 1384년 동북면도원수문하찬성사가 되어 함주를 공격한 왜구를 물리침.

  • 1388년 수문하시중이 되어 최영과 함께 이인임을 유배시킴. 임견미, 염흥방 척살.


이시기 이성계의 활약을 보면 조선왕조 측의 과장이 있을 것을 상당부분 고려해도 굉장한 수준이다. 국내에 침입한 왜구, 여진족, 원나라 잔당, 홍건적 등과 싸워서 전승했으며, 비록 일시적이긴 하나 공민왕 때의 제1차 요동정벌 때 요동성을 점령하기도 했다. 고려조 이후의 한국사에서 압록강을 건너 요동성을 점령한 마지막 장군이다. 특히 이성계 최대의 전역인 황산대첩 때에는 왜구의 피로 바위가 피로 물들어 그 바위를 '피바위'라 했을 정도로 왜구를 거의 전멸시켰다. 이 시기의 왜구들이 얼마나 위협적이었냐하면, 고려 말 왜구의 침입 항목에도 나와있듯이 고려라는 나라의 존망을 좌우하는 수준이었다. 명장 이성계의 눈부신 전공 3

그 뿐만이 아니다. 여진족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고, 그 당시에 상당한 네임드였던 나하추를 우주관광 태워버렸다. 이때 나하추는 장수 중 가장 뛰어난 자에게 붉은 기를 주었는데, 이걸 가지고 나간 장수는 관우 앞의 안량과 문추 꼴이 되었다.(...) 이에 열받은 나하추는 다음 날 장수 5명을 출진시켜서 이성계를 공격했는데, 5명 모두 올킬. 원사에도 나오는 내용이다. 이 상황이 벌어지자 나하추는 병력을 모두 평야로 이끌고 나왔으나 오히려 이성계의 거짓패퇴에 휩쓸려 완패한다.

또한 1361년 음력 10월에 고려 정부의 명령을 받고 출동하여 독로강 만호(禿魯江萬戶) 박의의 반란을 평정하였으며, 같은 달에 다시 압록강의 결빙을 이용하여 홍건적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의 영내에 침입하여 삽시간에 개경이 함락되자 이성계는 휘하의 고려인 및 여진족으로 구성된 강력한 친병 조직 2,000명을 거느리고 선봉에 서서 적을 대파했다. 이때 이성계가 보여준 무공은 그야말로 무신의 재림이라고 볼수도 있을 정도.

성을 공격하던 날, 적(홍건적)들은 궁지에 몰려 위축되기는 했으나, 보루를 쌓고 굳게 지키므로 모든 아군 부대들이 진격해 포위망을 좁혀들어 갔다. 태조는 길 가의 민가에 머물고 있었는데, 밤중에 적들이 포위망을 뚫고 도주하기 시작했다. 태조가 말을 달려 동문(東門)에 도달하였으나 성문에서 피아간에 마구 뒤섞여 전투를 벌이는 통에 문을 나갈 수가 없었다. 그 때 뒤에서 적이 달려들어 창으로 태조의 오른쪽 귀 뒤를 찔러 형세가 위급해졌다. 태조가 칼을 빼어 앞을 가로막는 적병 칠팔 명을 쳐서 죽이고 말을 몰아 성을 뛰어 넘었는데도 말이 넘어지지 않자 사람들이 모두 신기하게 여겼다.


『고려사』 권113, 열전26 안우·김득배·이방실

1364년에는 최유가 덕흥군을 왕위에 올리려고 쳐들어오자 이때 당시에 이성계는 기병 천명을 이끌고 구원을 갔는데 패한 장수들을 무시하자, 그들이 그럼 네가 한번 해봐라. 하면서 중앙, 좌, 우 군의 삼군의 모든 선봉을 이성계 군이 맡게 된다. 다만 정말 이성계의 부대만 움직인 것은 아니고 이성계가 종중의 원로들과 아버지 때부터 수하로 있었던 원로 가신들에게 사정해서 보다못한 그들의 군세도 움직였다. 한마디로 '네가 잘하면 얼마나 잘하나 보자' 식으로 엿을 먹어보라는 거였지만 문제는 저런 정신나간 상황에서도 이겼다는 것. 하지만 이후 이성계는 겸손의 미덕을 깨닫게 되고 오만한 행동은 줄어들게 된다. 눈 앞의 적보다 등 뒤의 아군이 등을 돌리면 더욱 위험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중요한 경험이었던 셈.

가능성은 크지 않으나 아마 우왕 때의 2차 요동정벌이 성공했다면 물론이고, 실패했어도 비극적으로 장렬히 전사한 희대의 영웅, 명장으로 추앙되었을 명장이었다. 아무튼 살펴볼수록 어마어마한데, 후대에 명장 소리 듣던 신립같은 경우와 비교하면 이성계의 전공들이 얼마나 사기적인 수준인지 알 수 있다. 물론 이렇게 대단한 이성계도 자기 아들 만큼은 이기지 못했다. 그 아들이 먼치킨이기는 했지만.

4.2. 불세출의 신궁[편집]

전공도 전공이지만, 이성계의 활실력은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를 자랑한다. 정말 무서운점은 그 충격과 공포의 활실력이 야사가 아니라 정사에도 많이 기록되었다는 것. 거기다 역사에 기록된 이성계의 활솜씨를 보면, 멀리서 저격하는 것 뿐만 아니라 말을타고 돌격하면서 근접백병전으로 활을 써서 적들을 갈아버린적도 꽤 된다는 것(...). 사실상 중국 역사상 최강의 무력으로 손꼽히는 항우급의 인간병기로 그야말로 신화나 전설이란 단어가 어울리는 수준이다.

기록에 나타난 이성계의 활실력에 관한 일화들 몇개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정사인 고려사고려사절요가 조선시대, 그러니까 이 사람이 세운 왕조에서 쓰였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때문에 아래의 일시오조와 같은 이야기들은 적절히 필터링할 필요가 있다. 또한 군사들이 목격한 무용담이 부풀려졌을 개연성도 충분히 존재한다.

그렇다고 이성계의 활솜씨가 뛰어났다는 설 자체를 허구로 볼 수는 없다. 중국의 정사인 원사나 일본 측의 기록에서도 일부 교차검증이 되기에 최소한 당대 최고의 활잡이인 것은 사실로 보인다.
거기다 현대에도 # 이런 식으로 활묘기를 재현해내는 사람이 있는 걸 보면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아닌 듯 싶다. 동영상을 보면 날아오는 화살을 화살로 맞출 정도인데, 지금과 달리 활이 더 중요하던 때이고, 이성계는 그 때 당시 동아시아 전역에서도 손꼽을 만한 신궁이니... 여담으로 동영상의 이 사람은 활도 전투용의 강궁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에게 주작질이라고 까이는데다가 활통의 유용성을 부정한 사람이라 문제점이 좀 있다.

이성계와 랄스 양반을 비교하는건 좀 무리가 있다고 할 수도 있는데, 현대 숙련된 남성 궁사들이 평균 50파운드 장력의 활을 사용한다. 반면 라스는 20파운드의, 현대 궁사들이라면 장난감처럼 느껴질 활을 사용한다. 영국에서 출토된 유물들에 의하면 그 시대 롱보우는 150파운드의 강궁이었고 한국의 각궁도 현대의 활보다 매우 강했을 것이 확실하다. 따라서 라스가 평가절하되기 보다는 이성계 쪽이 말도 안되는 괴물이라고 생각하는게 편하다.

  • 젊었을 때에는 훗날 정빈 김씨로 추봉되는 이자춘의 첩이자 여종이었던 김씨(의안대군 이화의 어머니)가 우연히 까마귀 5마리를 보고는 태조에게 활로 쏘아달라고 부탁하였다. 태조가 한 번의 활을 쏘아 5마리를 동시에 맞히자, 김씨는 태조에게 절대로 이러한 일을 아무데에도 발설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출처는 태조실록 1권 총서.

  • 보통 사람이 쓰는 것보다 훨씬 튼튼한 강궁을 썼는데, 이자춘이 이 활을 보고 사람이 쓸 물건이 아니라며 감탄했다고 전해진다.

  • 동녕부의 추장 고안위(高安慰)가 오녀산성에 웅거하면서 항전을 하자 이성계는 편전(애기살)을 이용하여 성의 병사들 얼굴에 70발을 쏴 70명 모두 맞혔다. 이를 보고 고안위는 기겁하여 도망갔으며, 성안의 적군들의 사기가 떨어져 곧 항복을 하였다. 적장이 활 시위를 한번 당길 때마다 아군이 하나씩 헤드샷으로 저승길. 그것도 현대전이라서 저격수에게 맞은 것도 아니고, 냉병기로 저 정도 전과다. 상상해보면 굉장히 무섭다 이것을 보고 주위 여러 성들이 항복하였는데 그 수가 1만 여 호나 되었다. 출처는 태조대왕실록. 당연히 정사다. 왕조차 함부로 못 읽던, 그리고 바로 그 이성계가 몇 번 읽어보자고 뻐꾸기를 날렸는데도 당당히 거부하던 조선왕조실록의 보안 수준을 생각해 보면 저것을 쓰던 사관들이 곡필을 했다고 보기도 힘들다. 고려사에도 동일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제1차 요동정벌 항목 참조.

  • 동녕부의 오녀산성을 점령한후, 요동성 전투에서 처명이라는 적장을 사로잡기 위해서 한발은 투구에, 한발은 허벅지에 맞힌 후 "마지막 한발은 니놈 머리통을 날려버리갔어!"라고 하자 용맹한 처명은 말에서 내려 고개를 숙였다고 한다. 항복한 처명은 이후 이성계 막하에서 부장으로 활약하여 황산 대첩 때에도 참전했다.

  • 황산대첩 때 왜구 적장 아기발도의 투구를 활로 맞혀 벗겼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그 뒤를 이어 이지란이 얼굴에 화살을 맞혀서 쓰러뜨렸다고 한다. 아기발도는 온몸을 감싸는 갑옷을 입고 얼굴을 가리는 구리투구까지 쓰고 있었는데, 일본 투구에는 원래 얼굴을 가리는 철가면인 멘구(面具)라는 부품이 있다. 이성계가 투구꼭지를 맞혀 투구가 떨어지면 이지란이 쏘는 걸로 되어 있었다. 물론 위대하신 이성계님께서는 투구꼭지를 맞히었으나 투구가 기울어질 뿐 떨어지지 않았고, 아기발도가 다시 쓴 투구를 이성계가 다시 맞히어 투구가 떨어지자 이지란이 얼굴을 쏴서 죽였다고 한다. 이 무협소설에 나와도 욕먹을 먼치킨 스토리가 야사에 나오는 것도 아니고, 정사고려사에 나오는 이야기다. 그런데 일본 갑옷의 투구를 보면 이성계가 맞히었다는 정자 부위가 상당히 큰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의 투구는 그 부분이 상당히 작으나 일본 투구에는 화려하다 못해 너무 크다 싶을 정도인 장식이 달렸기 때문에 정자도 크다. 그렇다 해도 전투 중이라서 필시 움직이는 상태였을 상대를 2번 다 같은 위치에 맞혔다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이건 현대 저격수들도 어려운 일이다.

  • 이성계는 왜구와의 격전을 앞두고 150보 떨어진 곳에서 투구를 놓아두고 3번 쏴 3번 다 맞히어 군사들의 사기를 높였다. 1보가 대략 1.8m니, 270m 거리를 백발백중으로 맞히는 실력이었던 셈이다. 이 정도 사거리는 웬만한 초기 화약병기를 상회하는 수준이다. 또한 가지고 있던 화살 20개중 17개를 쏘아 모두 맞히었는데 모두 왼쪽 눈초리에 명중했다고 한다. 출처는 역시 태조대왕실록.

  •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백보(180m) 밖에 있는 배나무를 쏴서 가지에 달려 있는 배를 떨어뜨려 그 배로 손님을 대접한 적도 있다고 한다. 이 역시 태조실록에 나오는 이야기.
    심지어 이런 일화도 있다.

    5월, 경상도 원수(慶尙道元帥) 우인열(禹仁烈)이 비보(飛報)하기를, "나졸(邏卒)들이 말하기를, '왜적이 대마도(對馬島)로부터 바다를 뒤덮고 오는데 돛대가 서로 바라다보인다.' 하니, 도와서 싸울 원수(元帥)를 보내 주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이때 왜적이 있는 곳은 가득히 찼으므로, 태조에게 명하여 가서 이를 치게 하였다. 태조가 행군하여 아직 이르지 않으니 인심(人心)이 흉흉하여 두려워하였다. 인열(仁烈)의 비보(飛報)가 계속해 이르므로, 태조는 밤낮으로 쉬지 않고 가서 적군과 지리산(智異山) 밑에서 싸우는데, 서로의 거리가 2백여 보(步)나 되었다.
    적 한 명이 등(背)을 세워 몸을 숙이고 손으로 그 궁둥이를 두드리며 두려움이 없음을 보이면서 욕설을 하므로, 태조가 편전(片箭)을 사용하여 이를 쏘아서 화살 한 개에 넘어뜨렸다. 이에 적군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기운이 쑥 빠졌으므로, 곧 크게 이를 부수었다. 적의 무리가 낭패를 당하여 산에 올라 깎아지른 듯한 낭떠러지에 임(臨)하여 칼과 창을 고슴도치털처럼 드리우고 있으니, 관군(官軍)이 올라갈 수가 없었다. 태조가 비장(裨將)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치게 했더니, 비장이 돌아와서 아뢰기를, "바위가 높고 가팔라서 말이 올라갈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태조가 이를 꾸짖고, 또 상왕(上王, 정종 이방과)으로 하여금 휘하의 용감한 군사를 나누어 그와 함께 가게 했더니, 상왕도 돌아와서 아뢰기를 또한 비장(裨將)의 말과 같았다. 태조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내가 마땅히 친히 가서 보겠다" 하면서, 이에 휘하의 군사들에게 이르기를, "내 말이 먼저 올라가면 너희들은 마땅히 뒤따라 올라올 것이다" 하였다. 드디어 말을 채찍질하여 함께 달려가서 그 지세(地勢)를 보고는 즉시 칼을 빼어 칼등으로 말을 때리니, 이때 해가 한낮이므로 칼빛이 번개처럼 번득였다. 말이 한번에 뛰어서 오르니, 군사들이 혹은 밀고 혹은 더위잡아서 따랐다. 이에 분발하여 적군을 냅다 치니, 적군이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은 사람이 반수 이상이나 되었다. 마침내 남은 적군까지 쳐서 이들을 다 죽였다. 태조는 평소에 인심을 얻었고, 또 사졸들이 뛰어나게 날래었으므로, 싸우면 이기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주군(州郡)에서 그를 구름과 무지개처럼 우러러보았다. 【원전】 1 집 7 면 【분류】 *인물(人物) / *왕실(王室) / *외교(外交) / *역사(歷史)

    이 이야기는 정도전(드라마)에서 황산대첩 직전에 각색이 가해져서 재현되었다. 사실은 황산 대첩 3년 전에 있었던 일화지만, 이성계의 활솜씨를 보여주기 위한 연출로 보인다.

  • 어느 날 신하들이 공민왕 앞에서 활을 내었는데 이성계가 100번을 쏴 다 맞히어 "오늘날의 활쏘기는 다만 이성계(李成桂) 한 사람뿐이다"라는 말을 들었다. 또한 원나라에서 활을 잘쏘기로 유명한 찬성사(贊成事) 황상(黃裳)이 이성계와 함께 활을 쏜 적도 있었는데, 족히 수백발을 쏘았다고 한다. 이 때 황상은 50발을 연달아 맞힌 후 맞히기도 하고 못 맞히기도 하였으나 이성계는 하나도 빗나간 것이 없다고 한다. 사실 지금 이성계랑 비교되니 초라해보이는 것이지 50발을 연달아 맞춘 것만 해도 엄청나게 굉장한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 국궁 승단체계에서 45발 중 39발 이상을 맞히면 9단이며, 이 정도 수준의 명궁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50발을 연달아 맞춘 황상도 충분히 명궁이다. 실제로 당시 원나라 황제가 그의 팔을 살펴보았을 정도라고 하니 황상의 실력이 얼마나 뛰어났을지 짐작이 갈 것이다. 그니까 100발을 적중시킨 이성계가 인간이 아니다

  • 여진정벌 당시에는 여진기병의 말의 눈을 쏘아 넘어뜨리기도 했으며, 온 몸에 갑옷을 입은 장수가 달려오자 투구를 쏘아 맞혔는데, 그 장수가 놀라서 입을 벌리자 입 안으로 화살을 쏘아 죽였다는 기록도 있다.

  • 그 외에 의형제인 이지란을 만났을 때 사냥한 사슴을 가지고 다투다가 서로에게 활을 쏘는 대결을 했는데 이지란의 화살을 모두 피하는 신기를 보였다. 여진족과 싸울때도 여진족들의 화살을 말 위에서 모두 피해냈다고 한다. 또한 이지란이 길거리를 걷는 아낙네의 머리에 얹은 물동이에 구멍을 내자 솜을 끼운 화살을 쏴 그 구멍을 막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야사의 기록이지만...그런데 정사에도 있다.

  • 야사에는 활 3발을 한 번에 쏴 모든 과녁에 명중, 그것도 마상궁으로 해냈다는 기절할 이야기도 있으나, 야사인만큼 반 정도는 깎아서 접수하도록 하자. 그런데 정사에 실려 있다는 얘기들을 보면 가능할 것도 같다.


기록에 따르면 활솜씨만이 아니라 검술(劍術), 마술(馬術)에도 능했던 듯 하다. 척준경까지는 아니지만 적병 7~8명 정도는 썰어버렸다는 기록이 몇군데 있다.

퇴마록 국내편 3권에서 이성계가 화살이 없이 기(氣)만으로 활을 쏠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봐도 알 수 있듯이 한국인들의 인식도 대부분 명궁이라고 알고 있고 아는 사람들의 인식은 신궁. 가히 근세 한국사 최강의 신궁. 역시 용장으로 이름난 송의 조광윤처럼 개국군주로서 특히 무예가 뛰어났다.[14]

원래 무골(武骨)이라서 그런지 노인이 되어도 정력이 강건하기 그지 없어서, 60대 중후반 쯤에 딸(숙신옹주)을 하나 낳았다.(…) 또한 훗날 나이가 들어 태상왕 시절 밖에 놀러 나갔다가 만취해서 가마를 타고 궁궐로 돌아올 때 주위에 시중드는 사람들에게 "말 타고 갈거니까 당장 말 가져와!"라며 징징댔다는 일화도 남아있다. 태조의 그림(위)을 보아도 어깨가 떡 벌어진 강인한 체격임을 알 수 있다. 창작물에서는 활 쏘는 사람들을 여리여리하게 표현하는 경향이 있지만, 실제로 실전을 위한 활을 쏘기 위해서는 상당한 근육 단련이 필요한데다가, 위에서 언급하였듯 이성계는 장수들이 놀랄 정도의 강력한 활을 사용하였으므로 저렇게 체격이 다부진게 당연하기는 하다.

4.3. 사용한 무구[편집]

태조는 대초명적(大哨鳴鏑)[15]을 쏘기를 좋아하였다. 싸리나무로써 살대를 만들고, 의 깃으로써 깃을 달아서, 폭이 넓고 길이가 길었으며, 순록(馴鹿)의 뿔로써 소리통(哨)을 만드니, 크기가 만 하였다. 살촉은 무겁고 살대는 길어서, 보통의 화살과 같지 않았으며, 활의 힘도 또한 보통 것보다 배나 세었다. 젊었을 때 환조를 따라 사냥을 하는데, 환조가 화살을 뽑아서 보고 말하기를, "사람의 쓸 것이 못된다."고 하였다.


태조실록 태조 총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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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가 사용했던 어궁구(御弓具)는 일제강점기까지 보존되었던 흔치 않은 활유물이었으며 사실상 조선 최고의 명궁으로 알려져 있다. 어궁구는 함흥의 조선 왕실 사당인 함흥본궁(咸興本宮)에 소장되어 있었지만, 불행히도 한국전쟁 중 함흥본궁이 불타버린 이후 행방이 묘연한 상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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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의 칼로 알려진 전어도(傳御刀)가 지금도 남아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자루 부분의 길이가 길어서 사진으로 보면 어째 단검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사실 길이가 150cm에 육박하는 대검이다. 길이 중 1/3가량, 약 50cm가 자루부분이라 이라기 보다도 폴암 같은 느낌. 더불어 일부에 알려진 바와 다르게 역날검은 아닌데, 칼날은 일반적인 환도처럼 휘어진 바깥에 있고 칼끝만 반대 방향으로 생긴 것. 칼끝 부분에는 양쪽에 날이 있는지라 일종의 펄스 엣지(False Edge)형 칼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지금 전해지는 유물은 실제 이성계가 쓰던 칼은 아니고 이방원이 환심을 사기 위해 만든 모방품 이라고 한다.

야사에 따르면 이 검은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환조)이 나옹대사와 무학대사의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되어 알게 된 명당 자리에서 얻게 된 것을 아들에게 준 것이라고 하며, 이 칼로 명당 자리를 지키던 괴물을 죽이고 묘를 이장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성계 일파가 우왕을 죽일 때 의 후손이라 그 어떤 무기도 통하지 않자, 이성계가 이 검으로 손수 베어 죽였다는 일화가 있다. 그 뒤 우왕이 가지고 있던 사진참사검이 저주를 내려 이성계의 수하들이 피를 토하며 죽어가자 무학의 조언에 따라 사진참사검 옆에 이 검을 꽂아 저주를 막았고, 두 칼은 3일 밤낮으로 싸우며 울다가 전어도는 박살나고 사진참사검은 금이 갔다고 한다.

사진참사검은 비록 망가졌지만, 이성계의 혈통에 내린 저주가 남아 있어서 그것을 막기 위해 조선 왕실에서는 용의 기운을 가진 사진참사검과는 정반대로 호랑이의 기운이 담긴 사인참사검을 신하들의 반발을 무시하고 정기적으로 제작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전어도와 사진참사검은 무학대사가 거두었고 현재는 행방이 묘연하다고 하는데, 어디까지나 야사인만큼 믿거나 말거나…

여튼 개성있고 뽀대 나는 외형에 여러가지 전설까지 양념처럼 버무려져 있고 특히 한국 대중문화에서 꽤 자주 등장하는 사진참사검과의 연관성까지 있는데다, 전설적인 무용을 자랑하던 창업군주의 칼이라는 점에서 안유명한게 이상할 정도이지만 안타깝게도 사용자가 보우마스터라… 안습.

또한 정사가 아닌 야사에만 나오는 내용이지만 이성계의 화살보다 빠른 말도 있다. 내용은 이성계가 젊은 시절 무예를 갈고 닦을때 어느 연못에서 튀어나온 한마리 용마가 있었는데, 이 용마는 몹시 사나워 아무도 길들이지 못했다고 한다. 그때 이성계가 이 소문을 듣고 찾아가 아무도 길들이지 못한 말을 길들이기에 성공해 자신의 말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후로 무예 연습을 계속하다가 자신의 말이 얼마나 빠른지, 그리고 자신의 실력이 얼마나 늘었는지 알기위해 과녁에 화살을 쏘고 말을 달려 화살을 따라잡기로(...)했다. 그러나 말을 타고 전력질주로 과녁에 도착하자 화살이 이미 박혀있는걸 보고 말이 화살보다 느린것에 빡친(...) 이성계는 말을 곧바로 죽여버린다. 하지만 과녁에 박혀있는 화살은 예전에 쏜 화살이었고, 말을 죽이자 자신이 쏜 화살이 날아와 과녁에 꽂히게 된다. 이걸 본 이성계는 자신의 급한 성격을 고쳤다는 훈훈한 이야기.(...) 사실 이 이야기는 견훤의 설화로 상주시에서, 김덕령의 설화로 광주광역시에서 전해 내려오기도 한다(...).

용비어천가에서는 8마리의 애마들도 확인된다. 이름은 각각 유린청, 횡운골, 추풍오, 현표, 발전자, 용등자, 응상백, 사자황이다. 이를 조선 왕실에서는 '태조의 팔준(八駿)'이라고 불렀는데, 동각잡기에 이 말들에 대한 간단한 내력도 기록되어 있다.

  • 유린청(遊麟靑): 함흥에서 난 말로 제1차 요동정벌황산 대첩 때 이 말을 탔고, 전장에서 화살 세 대를 맞았으며 31살 때 죽었는데 장사지낼 때 석조(石槽)에 넣어 묻었다. 실제로 이성계는 황산 대첩 때 혼전 중에 말 두 필을 잃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어쩌면 이 때 죽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 말만 유독 수명과 어떻게 장사지내줬는지까지 기록된 걸 보면 이 말이 이성계가 가장 아꼈던 말로 추정된다.

  • 횡운골(橫雲鶻): 여진산 말로 나하추와 싸울 때나 홍건적을 토벌할 때 탔다고 한다. 기록대로면 이성계가 가장 젊은 시절부터 활용했던 말이다.

  • 추풍오(追風烏): 여진산 말로 화살 한 대를 맞았다.

  • 발전자(發電赭): 안변에서 난 말.

  • 용등자(龍騰紫): 단천에서 난 말로 해주에서 왜구를 토벌할 때 탄 말이며 화살 한 대를 맞았다.

  • 응상백(凝霜白): 제주산 말로 위화도 회군 때 탔던 말이다.

  • 사자황(獅子黃): 강화 매도에서 난 말로 지리산에서 왜구를 토벌할 때 탔다.

  • 현표(玄豹): 함흥산 말로 토아동(兔兒洞)에서 왜구를 토벌할 때 탔다.

4.4. 세력[편집]

이자춘의 벼슬은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朔方道萬戶兼兵馬使)였으며, 이성계의 벼슬은 금오위상장군(金吾衛上將軍) 겸 동북면상만호(東北面上萬戶)였다. 이것이 원나라 벼슬 그대로 '만호장'이라는 뜻이면, 이성계 휘하에 1만호에 달하는 백성이 식읍과 같이 주어져 있었던 것이다. 이는 단지 상징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태종 시기에 남아 있던 이성계 직할 '가별초'가 5백호에 달했다는 기록을 보면 동북면의 상당한 토지와 인구를 '봉건 영주'처럼 지배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세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개경 탈환에서 이성계가 동원한 사병2,000명이나 되었다는 점에서 그 만한 사병을 유지할 수 있는 막대한 경제적 기반과 군사력을 갖추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성계의 사병 규모는 양적으로 상당한 규모였을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정예였는데, 이성계는 외적과 싸울 때도 아낌없이 자신의 사병을 동원했였으며 이들은 이성계의 화려한 전공을 뒷받침하는 정예병이었다. 그냥 정예 보병 정도도 아니라 이성계의 개인 사병 집단 대부분은 수천 명의 정예 기병이었다. 또한 이성계는 동북면 - 동만주 지역의 수많은 여진족 세력을 거느린 일대의 지배자였기 때문에 여차하면 전장에 이성계의 최대 전공 중 하나인 황산대첩에서처럼 여진족 기병까지 동원할 수 있었다. 이를 증명하듯이 이성계 휘하 무장들의 출신을 살펴보면 이성계가 적접 다스리던 고려인 농부, 평민들 뿐만 아니라 여진족, 몽골인들이 모두 잡다하게 섞인 다민족 혼성 부대였다는 점이 드러난다. 이런 정예 사병인 이성계 군단은 전투전에 대라(大螺)를 부는것이 일종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는데 적들이 그 소리를 듣고 바로 이성계가 왔다는 걸 알고 두려워 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그 명성이 고려 내에서 매우 드높았다.자세한 내용은 이글을 참고하자

이성계의 정예 부대인 가별초는 조선 왕조 건국 이후 왕자들에게 분배되었다가, 태종 시기에 혁파되어 일반 백성으로 편입되었다.

이후 이성계의 가산은 조선 왕실의 재산으로 편입되어 왕들의 비자금내탕금으로 사용되었다. 명목상으로 조선의 재산은 모두 왕의 재산이었으나 한국사 중에서 이례적으로 조선은 신하들의 동의 없이는 세금 등을 왕의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었다. 반면 이 가산은 왕의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개인 재산이나 마찬가지였다. 정도전 등은 이 재산도 국고로 환수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태종이 정도전을 제거한 후 이 가산은 왕의 개인 재산이라고 선포했다. 왕들은 내탕금을 사용하여 개인적으로 절을 짓거나 잔치 등을 여는데 활용하였으며, 흉년에 백성들을 구휼하거나 땅을 사들여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하였다.

이성계가 왕이 되었을 때 함경도 땅의 3분의 1이 이성계의 개인 재산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별도의 내시 기관인 '내수사'가 관리하였다. 내수사에서는 이 땅을 소작하거나, 소출로 이자 놀이를 해 재산을 늘렸는데 소작료와 이자가 시중에 비하여 낮았으며[16]이 관료들의 수탈도 없었기에 백성들은 앞다투어 내수사에 소작을 하거나 돈을 빌리려 하였다.

또 그는 동만주 북방 여진족들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후일의 청 태조인 누르하치의 6대조인 아이신기오로 먼터무도 이성계의 부하였을 정도. 당시 그의 세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이글을 참고하자.

4.5. 위화도 회군과 조선 건국[편집]

우왕의 명으로 제2차 요동 정벌을 위해 북상하다 역심을 품고 압록강의 섬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개경을 공격, 최영우왕을 몰아내고 창왕을 옹립하였다. 그랬다가 우왕이 공민왕이 아닌 신돈의 핏줄이라는 주장(폐가입진)을 하며 우왕과 창왕도 몰아내고 공양왕을 옹립한다. 그리고 최영에 이어 우왕과 창왕도 참살된다.[17]

공양왕 시기에 정몽주가 공양왕과 결탁하여 이성계 무리를 견제하기도 했으나, 정몽주가 이방원에게 참살되자 공양왕은 이성계에게 양위하고 고려는 멸망한다. 왕으로 등극한 후 명나라에 '권지고려국사'[18]로 외교 문서를 보내 왕이 되었음을 알렸는데 조선이 자주국이긴 했으나 명나라로부터 고명[19]을 받지 못하면 외교적으로 '권지국사(권지조선국사)'라 하고 '조선국왕'이라 칭하지 못했다.

자세한 것은 위화도 회군을 참고.

5. 새 왕조의 창건자가 되다[편집]

왕이 된 후의 평가는 업적은 많되 후계를 잘못 세우는 실수를 한 왕.

행정이나 정책적으로는 정도전을 재상으로 세우고 새 왕조의 기틀을 닦는 작업은 충실하게 행한 것으로 평가된다. 또한 개인적으로는 군인 출신답게 화통한 면이 있어서 조회 때에도 "번잡한 의식은 생략하고, 할 말 있는 대신은 빨랑 나와서 의견을 말해 봐"라는 식으로 말한 적도 많았으며, 소탈하고 격의 없는 스타일이었다고. 왕이 되던 날 아침 식사 메뉴가 물에 만 밥 한그릇이었다고 한다. 때문에 실록에는 "평소에는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분위기(포스)였지만 한번 여러 사람과 어울리면 하나의 화기(和氣) 덩어리가 되어 많은 이들이 태조를 사랑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만큼 보스 기질도 충분했고 한 나라의 창업자답게 친화력과 포용력이 대단한 사람이었다는 소리.

조선 개국을 정도전이 이성계를 부추겼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데, 황산대첩에서 승리를 거둔후 이성계가 대풍가(大風歌)를 읊으며 새로운 왕조를 개창할 뜻을 드러낸 때는 1380년, 이성계가 동북면도지휘사(東北面都指揮使)로 임명된 때는 1382년, 정도전이 이성계를 찾아가서 처음 만났을 때는 1383년, 즉 정도전이 이성계를 부추겼다는건 근거도 없고 억지스럽다.

정몽주에 대한 처우도 그렇다. 태종이나 다른 가신들이 정몽주를 제거하자고 말했지만 태조는 정몽주와의 인연으로 신진 사대부에 들어간 것이며 정몽주와 정치를 논하거나 술자리를 갖는 일등이 잦았고 그래서 끝까지 정몽주를 포용하려고 했다. 근데 그 정몽주는 이성계 주변 사람들 죽이려고 했다. 여러 기록이나 태조의 말로 미뤄 보면 정몽주 정도는 자신이 충분히 받아들이고 포용할 수 있는 인물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사실 개인적으로도 정몽주와 태조는 친밀한 관계여서 그런 탓도 있었겠지만. 또한 자기 주관도 너무나 강한 나머지 한양 천도도 자신의 강력한 입김으로 강행했으며 1년 만에 도성의 공사를 완료했을 정도였다.

장수로서 인기를 얻었던 것과 달리, 왕위에 오른 후 이성계에 대한 여론은 매우 나빴는데, 이는 즉위 후 수도 개경이나 지방 곳곳에 산재하던 권문세족같은 중앙귀족들이나 개성 왕씨들을 무자비하게 잡아 죽인 왕씨 몰살을 벌였기 때문이다.[20] 고려 왕조가 후삼국 시대 말기 신라를 흡수, 병합한 이후 신라의 전 왕실 가문이었던 김씨나 박씨 등을 대대로 우대했던 것과는 대비된다.[21] 특히 고려의 중심지였던 개성에서는 매우 안 좋은 취급을 받아서[22] 500여년이 지난 구한말까지도 조선과 이성계에 대한 인식이 매우 나빴다는 당대 외국인들이 기록이 남아있다. 이성계에 대한 증오의 감정을 담아 성계탕, 성계육 하며 대놓고 사람도 아닌 짐승에 빗댈 정도.

태조 치세 중에는 3차 요동 정벌이 제기되었던 적이 있다. 명 실록에는 주원장이 "조선의 20만 강군이 요동을 치면 맞설 방법이 없다"는 비관적인 보고를 받고 우려하는 기록이 나오기도 한다. 그런데 실제로 태조는 요동 정벌 자체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했으며 요동 정벌을 반대한 조준의 의견을 듣기도 했다. 태조는 1차 요동 정벌에서 요동 공략 중 식량 부족으로 죽을 고생을 하며 후퇴하기도 했고 2차 요동 정벌 때도 약소국이 강대국을 공격하는 것의 위험성을 들어 극렬 반대하고 위화도 회군까지 했던 사람이다. 그렇기에 요동 정벌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보고 있었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다.[23]

또 당시 조선도 실제로 동원 가능한 병력이 그렇게 많지 않았을 터이므로 학자들 가운데서도 진짜로 정도전이 요동 정벌을 하려고 했다기 보단 사병을 억제하고 중앙 군권을 강화하려 한 시도로 보는 이들도 있다. 당시 조선은 고려 말부터 홍건적, 왜구, 여진족 등의 침략으로 인해 나라가 매우 피폐한 상황이었고, 주원장이 저 말을 하기 고작 7년 전에 있었던 위화도 회군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실제로 당시 조선이 북벌에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5만 명 정도에 불과했다. 게다가 문제는 주원장이 저 말을 하는 당시에도 한반도 남부는 왜구의 침입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홍무제 주원장 본인의 문서에도 나오지만 주원장 역시 조선을 칠 마음같은건 없이 그냥 협박질을 한 것에 불과했으며 당시 일본에도 조선이랑 비슷한 수준의 협박질(...)을 했다가 반박을 받은 일이 있었다. 태조 시절 조선과 명의 대립은 양측 다 블러핑(...) 성격이 강했다는 말.

6. 2번의 참극과 쓸쓸한 말년[편집]

"어떤 물건이 목구멍 사이에 있는 듯하면서 내려가지 않는다."


『태조실록(太祖實錄)』, 권14, 7년 8월 26일 기록 中. 정도전박위가 참살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뒤 (아마도) 매핵기 증세를 호소하며.

하지만 말년에는 매우 고통스러운 삶을 살게 되는데 막내아들인 방석을 세자로 책봉했다가 1차 왕자의 난이라는 쿠데타를 일으킨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에게 권력을 빼앗기고 상왕으로 밀려나, 영락없는 뒷방 늙은이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태조는 고려로 귀순해 중앙 정계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정계 실력자들을 필두로 한 고려 지배층과 혼인 관계를 맺었다. 맏이 방우지윤의 딸과 결혼했고 이색의 손자 이숙묘를 사위로 들였다. 이색은 고려 말 정계와 학계의 구심점으로 창왕을 옹립하고 이성계에 맞섰던 인물이다. 게다가 방우는 이색과 함께 (조선 시대 역사관에선 신돈의 아들인) 창왕 옹립에 참여했다는 결정적인 약점이 있었다.[24] [25]

방과는 증문하좌시중(贈門下左侍中) 김천서(金天瑞)의 딸과 혼인했고 지윤의 두 딸을 (숙의 지씨, 성빈 지씨)으로 들였다. 3남 방의는 증문하찬성사(贈門下贊成事) 최인두(崔仁㺶)의 딸과 혼인했는데, 최인두는 동주 최씨로 바로 그 최영과 인척 관계에 있다. 4남 방간은 증문하찬성사(贈門下贊成事) 민선(閔璿)의 딸과 혼인했고, 5남 방원은 예문관대학사(藝文館大學士) 민제(閔霽)의 딸과 혼인했는데, 민선과 민제는 둘 다 황려 민씨(여흥 민씨)로 재상지종으로 꼽힌 유력 권문세가다.

신덕왕후 강씨의 딸인 경순공주이인임의 조카인 이제와 혼인했고 방번공양왕의 조카사위다. 즉, 신의왕후 한씨 소생 다섯 아들과 방번은 모두 고려 구 세력(심하면 왕족)과 혼맥을 중심으로 깊게 이어져 있었다.[26] 이러한 혼맥은 변방 무장 출신 태조가 중앙 정계에 순조롭게 연착륙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지만,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개창한 이후엔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에겐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어린 막내 아들 방석만이 고려 구 세력과의 혼맥이 없었기에 그를 선택했다는 것이다.[27]

무엇보다도 방석은 태조 자신이 각별히 총애하던 현 왕비 강씨의 아들이었다. 신의왕후 한씨는 조선 건국 이전에 사망했다. 건국 후 절비(節妃)란 시호를 내려 어느 정도 예우하긴 하였으나 죽은 그녀의 권위가 살아있는 왕비인 신덕왕후를 뛰어넘을 순 없었다. 태조 2년 한씨의 3년 상이 끝나고 잔치를 베푸는 것을 마지막으로 그녀에 대한 태조의 예우는 끝난다. 반면 개국 직후 공신들이 태조를 위해 잔치를 열 때 동시에 공신 부인들이 신덕왕후를 위해 잔치를 베풀었다는 기록에서[28] 알 수 있듯 신덕왕후의 권위는 공인되어 있었다. 태조 입장에선 왕의 아들이자 살아 있는 왕비의 아들인 방석의 세자 책봉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태조가 막내 아들을 후계자로 삼는 말자상속 풍습이 있는 유목 민족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몽골, 여진족 등 북방 유목 민족에서는 큰 아들부터 재산의 일정 지분을 주고 차례로 독립시키고 막내가 끝까지 본가에 남아 부모를 모시다 부모님 사후 나머지 재산을 상속 받아 본가의 후계자가 되는 풍습이 있다.[29]

이는 목초지 고갈 문제 때문에 항상 새로운 초지로 이동하며 살아가야 하는 유목민의 특성상 장성한 아들들은 빨리빨리 독립시켜 스스로 새로운 지역에서 목초지를 개척하면서 살도록 하는 생존 전략이다. 동북면에서 성장한 태조가 그 지역의 여진족을 비롯한 여러 유목민들의 풍속에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원래 태조가 세자로 책봉하려던 아들은 막내가 아닌 방번이었고, 배극렴, 정도전 등의 간언을 받아들여 결정을 바꿨기 때문에 이러한 가설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정치적 이유 등으로 신의왕후 소생의 아들을 배제한 후, 신덕왕후의 장남인 방번을 먼저 염두에 뒀다는 점에서 말자상속의 원칙으로 후계자를 세운 것은 아니다.

문제는 다수의 여론과 개국에 참여한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는 것이다. 태조가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에게 취한 태도는 어떻게 보면 철저한 토사구팽이었다. 왕자들과 고려 구 세력의 딸들을 혼인시켜 중앙 정계에 진출했으면서도, 정작 새 왕조가 세워지자 바로 그 인척 관계 때문에 왕자들을 권력의 중심에서 내치려 한 것이다.

게다가 한양 천도 직후 신덕왕후가 사망하면서 세자의 뒷배가 부실해졌다. 태조는 일부러 그녀의 릉인 정릉을 도성 내, 그것도 광화문 바로 남쪽에 조성하고 원찰로 흥천사를 창건해 강씨의 존재감과 권위를 유지해 세자의 권위를 지키려 했다. 또한 세자빈 심씨를 현비로 책봉하고 방석과 현비 사이에 아들이 태어나자 왕손의 개복신 초례(開福神 醮禮)를 세자전 남문에서 거행해 태조 - 세자 - 왕손의 후계 구도를 공고히 하려 했다. 그러나 왕손이나 세자나 아직 어렸고 신의왕후 때와 마찬가지로 죽은 사람 권위에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었다.[30] 그리고 이 와중에 사병 혁파와 요동 정벌 같은 급진적인 정책들이 시행되었고 군권과 조정 대권이 일부 종친과 공신들에게 집중되었다. 반대파 입장에선 세자와 왕손이 장성하고 기반이 완전히 날아가기 전에 거사해야 한다는 인식을 주게 되었다. 태조의 실수는 단순히 막내를 세자로 세웠다는 것이 아니라, 이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다른 왕자들과 종친, 구 세력들의 불만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태조도 나름대로 예방 조치에 심혈을 기울이긴 했다. 국초 왕자들과 사위의 군호를 정하면서 이들의 절제사(節制使) 임명도 병행해 친위 군사력을 재편성했는데 이때 방과, 방번, 이제가 함께 의흥친군위절제사(義興親軍衛節制使)로 임명되어 친위군의 중추가 되었다. 방번과 이제야 세자의 동복 형과 매형에게 힘을 실어주어 세자의 입지를 강화하겠다는 조치였고 개국에 공을 세운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도 아예 모른척 할 순 없으니 정치적으로 입지가 좁아진 방우 대신 방과를 대표로 중임을 맡긴 것이다. 이 조치 이후 10일 뒤에 방석이 세자로 책봉되었다.[31][32] 신의왕후 소생의 다른 왕자들에겐 중앙의 군권 대신 지방의 지휘권이 주어졌다. 이중 이성계에게 있어 가장 상징적인 동북면의 가별초 지휘권은 이방원에게 잠시 주어졌다 태조 3년 정도전의 군제 개편 제안으로 각 도에 절제사를 두고 종실이 이를 맡게 할 때[33] 방번이 넘겨받는다. (방원은 전라도 절제사로 전임) 이성계에게 동북면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하면 결국 세자 방석의 위상을 확고히하겠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사병 혁파와 요동 정벌 등 급진 정책에 반발은 태조의 예상 이상으로 거대했다. 왕실 집안 싸움이 되다보니 병사들도 혼동이 왔고 아우 이화나 조카 조온, 정도전과 절친한 사이였던 이무 등 친위 세력이 되어 줘야 할 인물들까지 대거 포섭되었다. 성품 문제는 있어도 세자의 동복형이니 세자의 편을 들어줄거라고 믿었던 방번은 무슨 심사였는지 친동생의 위기를 수수방관해 버렸고 이화의 교란으로 가장 적극적으로 세자를 지키려 했던 이제까지 행동에 나서지 못하면서 방석을 지킬 방패는 한없이 얇아져 버렸다.[34]

그래도 태조 본인이 워낙에 무력 만렙인데다 병력 지휘에도 익숙했고 또 당시에도 전주 이씨 문중과 동북면 가별초의 최고 대빵이었던 태조의 권위가 막강했기 때문에, 태조가 시퍼렇게 살아있는 한 왕자든 종친 나부랭이든 감히 태조의 결정에 반기를 들지 못할 것이었다. 아무리 태조의 나이가 많다고 해도 원체 강건한 무골이기 때문에 세자가 보위에 오를 때 까지만 건강하게 살아있으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타이밍 좋게 태조가 병환으로 인해 몇일간 거동을 제대로 못하게 되었고, 그 사이에 두 아들과 이복 동생이 주축이 되어 일으킨 난리는 이성계의 용상을 생지옥으로 만들고 만다.[35]

7. 최후와 능[편집]

"내가 젊었을 때에 어찌 오늘날이 있을 줄 알았으랴. 다만 오래 살기를 원하였더니 이제 70이 지났는데도 아직 죽지 않는다." - <태종실록> 태종 6년(1406년) 4월 4일, 연회 중 태상왕 태조의 발언


아들을 둘이나 보내버리고(이방원도 차마 이방간은 죽이지 못하고 유배를 보냈다) 스스로 왕위에 오른 이방원이 꼴도 보기 싫었는지, 이성계는 1401년 11월 한양을 탈출하여 소요산으로 행차한다. 함흥이라고도 한다.[36] 다음해인 1402년 이성계의 묵인 하에 조사의의 난이 벌어지게 된다. 조사의의 난이라고 불리지만, 실질적 주동자는 이성계라는 게 중론이다. 그러나 이방원은 이미 기반을 갖출 만큼 갖춘 상태였으므로 반란은 빠르게 진압되었고, 이성계는 그 해 12월 개경으로 돌아와 아들과 화해하게 되며 [37], 그 뒤 절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그로부터 6년 뒤인 1408년에 생을 마감했다.

이성계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본 사람은 이방원[38]이다.[39] 죽기 직전에 이성계는 이 심해서 일어나 앉아 있었는데 이를 본 태종이 청심원을 직접 아버지에게 올렸지만 이성계의 기력이 다했는지 이를 삼키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실록에서는 '눈을 들어 왕(태종)을 다시 쳐다보더니 이에 승하했다'고 이성계의 최후를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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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경기도 구리시 동구동 동구릉에 있는 건원릉(健元陵)이다.[40] 이후 역대 조선 국왕들의 왕릉 봉분이 잘 정돈된 것에 비해 태조의 건원릉은 오늘 날도 억새풀이 무성하여 매우 투박한데, 어떻게 보면 무덤 주인 이성계의 이미지와 잘 부합하는 왕릉. 억새풀이 무성하다보니 벌초를 안 하고 방치한다는 카더라부터 궁궐관리가 귀찮아 기와 테두리에 시멘트를 발랐다는 카더라가 떠돈다. 하지만 이는 지붕 용마루를 석회로 마감한 것이 매연으로 회색빛이 돌자 생겨난 소문. 그런데 우리나라 건축에서 쓰는 석회 마무리는 석회에 흙과 잘게 찢은 한지, 느릅나무 진 등을 섞어서 쓰니 넓은 의미에서 시멘트가 맞게 되기는 한다. 사실 석회를 주성분으로 다른 물질을 섞어 물에 개어 사용하는 원시적 형태 시멘트는 고대 이집트에서부터 쓰였다. 어쨌든 다른 왕도 아닌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무덤인데 관리를 안 할 리 없고,(건원릉이 있는 동구릉은 엄연히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록지다.) 억새풀을 놔두는 건 건원릉의 상징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벌초는 1년에 딱 한차례만 한다. 직접 구경하러 동구릉에 가면 아쉽게도 이 능침 바로 앞까지 올라갈 수 없고 정자각 쪽에서만 관람할 수 있다. 동구릉에서 제일 많은 사람들이 찾는 장소라서 '건원릉은 관람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니 이곳에서의 휴식은 자제해 주세요'라는 안내판까지 있다.

그 태조 이성계의 왕릉이니만큼 야사도 존재. 야사 내용들을 보면 태조가 내가 죽으면 고향 함흥 땅에 묻어달라고 유언했지만 아들이자 3대 임금인 태종은 나라의 창업자인 자기 아버지를 함흥에 묻는 것은 왕실의 위엄이 서지 않고 제사도 힘들다 생각해서 도성 근처에 모시고자 했지만. 아버지의 유언을 어긴 불효를 저지르게 되니 잔머리 대왕답게 여기서도 잔머리를 써서 아예 '함흥의 흙과 억새를 가져다가 태조의 능에 심어놓았다.' 부터 태조의 둘째 부인이자 태종의 계모 신덕왕후를 그리워하여 신덕왕후의 묘가 있는 정릉에 합장되기를 원했으나 생전 신덕왕후와 사이가 나빴던 태종은 차마 그 말을 따를 수 없이 새로운 묏자리를 알아봤고, 아버지의 유언을 어긴 죄책감에 평소 향수병이 있던 태조를 위해 함흥에서 자라나는 흙과 억새풀을 가져다 심었다는 내용 이렇게 존재한다.

일단 어느 쪽 내용이던 한양(지금의 서울)과 함흥은 거리가 가까운 건 아니니 그냥 파서 가져오면 가져오는 시간동안 억새가 말라 죽으니 이를 고민하던 태종이 한양에서 함흥까지 사람들을 일렬로 줄줄이 세워 릴레이 형식으로 억새를 운반해 건원릉에 심었다고 전해진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한양이 왜군에 의해 함락당했을 때 왜군은 건원릉에 불을 질렀으나 정자각에서 불어온 바람에 의해 불이 꺼지자 왜군이 몇 차례나 재방화를 펼쳤음에도 계속 실패하여 결국 방화를 단념했다는 야사를 비롯해서 여러 야사가 전해진다.

8. 시호, 묘호, 휘[편집]

원래 정식 시호는 태조강헌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太祖康獻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이었는데, 대한제국이 되면서 고황제(高皇帝)로 추증되었다. 함흥본궁의 위패 역시 태조고황제라 쓰여있다. 또한 명나라로부터 받은 시호인 '강헌(康獻)'이 빠지면서 정식 시호는 태조지인계운응천조통광훈영명성문신무정의광덕고황제(太祖至仁啓運應天肇統廣勳永命聖文神武正義光德高皇帝)이다.

왕건과 마찬가지로 본명이 매우 대중에게 익숙하다. 그래서 대중적으로도 이성계나 태조 이성계라 많이 부른다. 오늘날에 많이 쓰이는 표현은 아니지만, 과거에는 '이태조(李太祖)'라고도 많이 불렸는데, 오늘날에도 장년, 노년층에서 이성계를 이태조라고 부르는 사람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사실 이태조는 정확한 표현이 아니지만 조선시대에도 고려 태조 왕건을 가리켜 '왕태조(王太祖)'라고 부른 기록을 찾아 볼 수 있다. 어감영 좋지는 않지만 일본어 잔재론 같은 명칭은 아니다. 다만 정확한 표현은 아니기 때문에 안 쓰는 것이 좋다.[41]

왕이 되면서 피휘 문제 때문에 이름을 이단(李旦)으로 개명했다. 이성계의 성(成)자는 원래 이름으로 꽤 잘 쓰고, 일상적으로도 너무 자주 쓰이는 글자라서 아예 왕 본인이 갈아버린 것. 아침 단(旦)을 쓰고 있는데 조선에도 아침 조(朝)가 붙은 걸 보면 노린 듯. 피휘로 인해 조선시대의 문헌에서는 단(旦)자의 日과 一 사이를 연결하는 짧은 획을 하나 더 썼고, 함부로 글자를 고칠 수 없는 경전에서 이 글자가 나올 때에는 원래 음 대신에 됴(=조)로 독음을 달았다.

이단이라는 이름조차 군주의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것도 금기시 하기에 거의 불리지 않았다. 이단이라는 이름이 자주 쓰인 것은 구한말의 일로 피휘를 할 필요가 없던 서양인들은 조선의 역사를 소개할 때 이단이라는 이름을 직접 사용했다. 국내에서는 오랜 피휘의 역사 때문에 이단이라는 이름 자체가 잘 알려지지 않아서 역시 이성계라는 이름으로 주로 쓰인다.

9. 배우자와 자녀들[편집]

9.1. 정비 : 신의왕후 한씨[편집]

  • 정비 : 신의왕후 한씨(韓氏)

    • 진안대군(鎭安大君) 이방우(李芳雨), 태조 2년(1393년) 사망.

    • 영안대군(永安大君) 이방과(李芳果) - 조선 제2대 국왕 정종

    • 익안대군(益安大君) 이방의(李芳毅)

    • 회안대군(懷安大君) 이방간(李芳幹)

    • 정안대군(靖安大君) 이방원(李芳遠) - 조선 제3대 국왕 태종

    • 덕안대군(德安大君) 이방연(李芳衍)

    • 경신공주(慶愼公主), 하가(下嫁) 정사좌명공신(定社佐命功臣)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이애(李薆)

    • 경선공주(慶善公主), 하가(下嫁) 청원군(靑原君) 심종(沈淙)

9.2. 계비 : 신덕왕후 강씨[편집]

  • 계비 : 신덕왕후, 대한 신덕 고황후(神德 高皇后) 강씨(康氏)

    • 무안대군(撫安大君) 이방번(李芳蕃)

    • 의안대군(宜安大君) 이방석(李芳碩)

    • 경순공주(慶順公主), 하가(下嫁) 개국공신(開國功臣) 흥안군 이제(興安君 李濟)

9.3. 후궁 및 자녀들[편집]

  • 후궁 : 성비 원씨(誠妃 元氏)[42]

  • 후궁 : 정경궁주 유씨(貞慶宮主 柳氏)

  • 후궁 : 화의옹주 김씨(和義翁主 金氏)

    • 숙신옹주(淑愼翁主), 하가(下嫁) 당성위(唐城尉) 홍해(洪海)

  • 후궁 : 찬덕 주씨(贊德 周氏)

    • 의령옹주(宜寧翁主), 하가(下嫁) 계천위(啓川尉) 이등(李䔲)

10. 어진[편집]

10.1. 청포 어진[편집]

대한민국의 국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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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6호
완주 화암사 극락전
(完州 花巖寺 極樂殿])

317호
조선태조어진
(朝鮮太祖御眞)

318호
포항 중성리 신라비
(浦項 中城里 新羅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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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국보
National Treasures Of Korea

파일:external/pbs.twimg.com/Gn371bnO.jpg

공식명칭

한글

조선태조어진

한자

朝鮮太祖御眞

영어

분류 번호

국보 317호

소재지

대한민국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태조로 44-0

분류

유물 / 일반 회화 / 인물화/ 초상화

시설

1폭

지정 연도

2012년 6월 29일

제작 시기

조선, 1872년


http://www.cha.go.kr/unisearch/images/national_treasure/2284524.jpg

국보 제317호 조선태조어진
전북 전주시의 경기전에 봉안되어 있는 태조 어진. 지금까지 남아있는 조선 시대 어진 중 유일하게 훼손되지 않은 어진이다. 태조 재위 당시에 제작된 집경전의 어진을 1409년(태종 10년)에 모사하여 경기전에 봉안한 것을 1872년(고종 9년)에 다시 그대로 모사한 것이다. 청룡포 어진이 당대로부터 전해지는 유일한 어진이며, 아래 나오는 홍룡포 버전은 후대인 헌종 대에 왕명에 따라 홍색으로 용포 색깔을 바꾸어 모사한 것이다.

10.2. 홍포 어진[편집]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홍포 버전도 있다. 이 홍포 버전은 1837년 어진을 모사할 때 헌종이 곤룡포의 색상을 청색에서 홍색으로 바꿔 그리라는 지시에 따른 것이다. 조선 후기에 가면 실록에 "왜 태조대왕께서는 곤룡포가 청색이시지?" 하고 후대 임금들이 궁금해하는 대목이 간간히 보인다. 당시에 신하들이 내놓은 답은 "아마 고려의 곤룡포를 입으셔서 그런듯 합니다"였고, 그래서 1837년에 헌종이 이 그림을 그릴 때 조선의 곤룡포인 홍색 용포로 바꿔 그리라고 했다고 한다. 네이버 캐스트 자료
파일:attachment/이성계/태조홍포어진.jpg
현존하는 다른 조선 시대 어진들과 마찬가지로 한국전쟁 기간 동안 부산에 옮겨져 있던 중 화재로 얼굴을 포함한 절반이 타버렸다. 그래도 태조는 위의 어진이 남아 있었던 덕분에 얼굴은 그대로 옮겨서 그릴 수 있어서 붉은색 용포 버전의 어진은 복원할 수 있었다.
파일:external/www.museum.go.kr/20111011124903.jpg
2011년 위를 복원한 태조의 홍룡포 어진.
원본은 위에 나온 청포 어진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10.3. 함흥본궁 어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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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흥본궁에 봉안되어 있 태조 어진. 위의 어진보다는 이전 시기에 그려진 듯한 모습이며, 곤룡포에 가려져 있지만 기골이 가려지지 않아 왕년의 역전의 용장 포스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43] 이 어진은 일제강점기 때 촬영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함흥본궁이 한국전쟁 때 소실된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현재 행방을 알 수 없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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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위를 복원한 태조의 홍룡포 어진.

11. 이성계 여진족설[편집]

이성계가 조선의 건국군주이므로 조선까들은 그 뿌리를 흔들기 위해 이성계 출신에 대해 여진족설, 달단족설, 화교설 등을 만들어 주장하고 있다. 특히 그 중 여진족설은 가장 많이 알려져서 한국의 조선까뿐 아니라 일본이나 중국 혐한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단골 소재다. 일본어 위키페디아의 이성계 항목에도 매우 자세히 나와있다. 사실 이성계의 혈통과 관련한 역사왜곡 상당 부분이 일본이 출처다.

고대 혈통 문제는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과학적으로 알아내기가 힘든 편이라 해결이 안 된 문제가 많으며, 역사와 소설을 구분 못하는 사이비들이나 제멋대로 역사를 왜곡날조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지 기본적으로 역사는 사실이고 사료나 과학, 논리 등을 이용하여 사실을 알아내거나 그에 가깝게 접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학자들은 명확한 근거가 나올 때까지는 확정을 내리지 않는 것이 기본이다. 승자가 사서를 날조할 수 있을지언정 이미 발생한 과거의 역사를 바꿀 수는 없는 것이며, 또한 오늘날의 역사학은 학문이고 과학적 방법론으로 추구되어야 하는 것이지 감정적으로 맘대로 날조해도 되는게 아니다.[44]
.
이성계가 여진족이라는 근거랍시고 들이대는 것들도 하나같이 뻔한 논리적 오류 내지 역사적 거짓이라 진지하게 고려하는 것 자체가 역사학에 대한 모독일 정도이다.

  •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에 따르면 전주 이씨로, 본래 전주에서 상당한 세력을 갖추고 근거하던 가문 출신이라지만 정작 전주에 있던 시절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고 역대 선조로 기록된 인명은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은 교차검증이 되지 않는다?

  • 목조 이안사가 전주에서 삼척, 그리고 또 동북면으로 이주할 때 그에 딸린 1백 70여 가(家)가 따라서 같이 이주했다고 하는데, 당시의 1가는 현대의 핵가족보다 훨씬 큰 집단이었고 이런 대규모 가구가 유력 세력가를 따라 한꺼번에 멀리까지 이동하는 것은 농경사회보다 유목사회의 모습에 가깝다?

    • 중세의 농경체계는 현대의 농경과 달랐다. 농경에는 물론 정착이 유리하지만, 여타 사정으로 인해 정착지를 바꿔야 할 때가 오지 말란 법은 없다. 특히 집단이동을 문제삼는데 전근대의 농경이란 오늘날같이 한두명이 트랙터몰고 약쳐서 할 수있는게 아니었다. 당연히 다량의 노동력과 그 노동력을 통솔하는 유력자가 필요했으며 통솔된 노동력없이는 농사를 지을 수 없으니 유력자가 이동하면 농사짓는 사람들도 같이 이동하는게 자연스럽다. 다만 조선시대에는 향리의 권력이 약화되고 토지 소유가 제한되어서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을 뿐이지. 이에 반해 유목민은 끊임없이 물과 풀을 찾아서 돌아다녀야 하니 오히려 흩어지는 경향을 보이며, 거주를 집단으로 할 지언정 생업 목적의 이동을 대집단으로 하지는 않는다(물과 풀이 빨리 고갈되니까).

  • 태조실록 총서에서 이안사가 '석성(石城)을 쌓아 소와 말을 놓아 먹였다.'거나, 도조 이춘이 함주로 이주할 때 이주하는 이유로 목축(牧畜)하는 데 편리함을 언급했다는 점으로 농업보다 목축의 비중이 높았던 집단으로 보인다?

    • 농경민족은 목축을 안하나? 가축 키운다고 다 유목민이면 조선도 유목국가게? 그리고 말은 농경민족에게도 이동수단으로서 중요했다. 수렵이나 전쟁 간에 말을 활용한 것은 고구려때도 하던 것인데, 그럼 부여인이나 예맥인도 죄다 여진족이란 말인지? 그리고 소는 농업에 필요한데다 건조한 야지에서 살기 어려워 오히려 농경민족이 더 많이 키웠다. 지금도 건조지대의 유목민은 주로 양과 낙타를 키우지 소는 안키우는 걸 보라. 무엇보다 목축을 주업으로 할 수도 없는게, 그 동네 뒷산은 호랑이와 표범이 드글대기 때문에 돌로 성을 쌓아 가축을 지켜야 하니 사육규모가 제한된다.

  • 이성계의 선조들을 보좌하는 장수들은 퉁두란을 비롯해 주로 여진족 세력가들이었는데, 중세 사회에서 특별한 이유로 엮인 것도 아님에도 순수 농경지역 출신 지도자인 이성계 집안을 순순히 따랐다는 점이 역시 납득하기 힘든 점이다?

    • 여진족 데리고 다닌다고 다 여진족이라는 건 무슨 궤변인가. 고려시대의 유금필도 여진족들에게 대추장으로 추대되었으니 여진족인가? 본래 야인들은 일신의 무력에 경도되어 굴복하는 경향이 컸을 뿐이며, 이성계 개인의 무력은 충분히 여진 부족장들을 압도할 수준이었다. 어차피 사료상으로도 여진족들이 전주 이씨 일가를 동류로 여기지 않았다는 대목으로 간단히 반박된다.

  • 순수 농경지역인 전주 출신의 목조가 북방으로 이주한 후 금방 천호장과 다루가치의 지위를 원황제에게서 하사받는데 뜨내기에 불과한 목조에게 뜬금없이 고위직을 내린 것이고 이런 사실을 믿기 어렵다?

    • 다스리는 영지와 영민이 많은 세력가이자 실력자라서 천호장 지위를 받는건데 농경이고 유목이고가 무슨 상관인가? 게다가 목조가 간 곳은 함경남도 문천군 덕원면 근방인데 무슨 놈의 유목민이 자기 가축 다 죽으라고 유목에 부적합한 하천평야지대로 이주를 하는가?

  • 태조와 태종이 반대를 무릅쓰고 장자가 아닌 막내에게 양위한 점은 몽골 등 북방민족의 일반적 풍습과 같다?[45]

    • 실록은 읽고 하는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당시 처음부터 유목민족의 풍습에 따라 막내인 의안대군에게 양위하자고 하지 않았다. 애초에 유교국가에서 그럴 수도 없었고. 기록상으로는 어디까지나 신덕왕후의 장자인 무안대군의 성격적 결함때문에 그 다음인 의안대군이 받게된거다. 그리고 태종은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이 부적격자라서 그랬단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이런 점만 봐도 이성계 여진족설에 대해서는 이곳에서 조금의 긍정성도 고려해줄 일거의 가치도 없다는 것을 알 수있다.

게다가 이성계의 혈통이 여진족이라는 주장에는 문헌 근거가 전혀 없다. 이성계의 혈통은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의 서두에 상당히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에서 이안사에서 이성계로 이어지는 혈통은 심지어 외가의 외가까지 모두 기록되어 있다. 이성계의 혈통은 고려인 혈통으로만 이어졌다. 이성계 이전에도 금사, 송막기문 등에는 금나라 태조 완안아골타의 6대조는 김함보라는 신라-고려 교체기 시절의 인물로 그 계보가 기록되어있는데, 이를 보면 한반도에서 북쪽으로 이주하여 세력을 일으킨 사람이 적지 않았던 것 같다. 여진족들은 이성계 일족을 다른 족속으로 여기고 공격하기도 했다. 물론 통두란의 예에서 보듯이 우호적인 교류도 했겠지만, 고려인과 여진족이 서로를 다르게 보았다는 문헌적 근거가 있다.

한 마디로 이 지역의 고려인들과 여진인들은 서로를 혼동하지도 않았고 그럴 이유도 없었다.

여진족이라는 일방적인 주장의 근거는 고작 당시 정황상 이성계의 선조가 이주한 동북방에 여진족이 많이 살았다는 것 뿐이다. 쌍성총관부가 있는 동북 지역은 중부 지방과는 달리 여진족 역시 꽤 많이 살기는 했다. 사실 이 지역 함흥은 험한 산과 바다로 막혀 지리적 접근성은 떨어지는데, 그 지역 자체는 사람이 거주하기에 적당한 자연환경, 함흥 평야 지역이다. 이 때문에 고대부터 여러 민족이 거쳐간 지역으로(옥저가 있었던 곳이 여기) 시대에 따라 옥저, 고구려, 여진, 고려 등이 경합하는 지역이었다.

특히 고려는 이 지역의 여진족들을 회유하고 귀화시키거나, 다른 지역의 고려인들을 이주시킨다거나 하는 식으로 중요하게 여겨왔다. 공민왕이 함흥 지방의 쌍성총관부를 수복하면서, "본래 고려 영토"임을 확실하게 선언한 것도 이런 상황탓이다. 이는 조선에 들어와서 마찬가지였는데, 조선 초기에 함경도에서 여진족의 귀화를 받아들이고 조선인과 결혼시켜주는 등의 정책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니까 이성계 일족의 함흥 이주는 이러한 과정에서 정책적, 사회적으로 자연스럽게 일어난 결과이다. 전혀 특수한 일이 아니다.

게다가 기록에 따르면 이성계 일족의 이주는 달랑 한 가족이 혼자 이주한 것은 아니었다. 이안사를 따라간 사람들만 천호이며, 이안사 휘하에 있던 고려인은 거의 수천호가 된다고 한다. 전근대에서 집성촌을 이루고 살면 중앙보다는 민족색이 얕아질지 몰라도 고려인으로서의 정체성은 충분히 간직할 수 있다. 게다가 그들의 고향인 고려는 바로 이웃에 있었으며, 비록 주권이 많이 훼손되기는 했으나 국가를 유지하고 있었다. (고선지와는 이래서 다르다.)

이런 이주는 당대 상황에서 이성계 일족만의 특수한 경우가 아니었다. 고려사를 비롯한 각종 기록들을 보면, 무신 정권을 전후로 해서 고려 사회의 막장화가 가속화하면서 백성들이 유망이 심해지고 있었다. 이성계의 선조처럼, 자기 동네 향리나 지방관과의 마찰이 이주의 원인인 경우도 심심찮게 존재한다. 고려 시대 자체가 주현이 따로 있고, 속현이 따로 있는 시대로 중앙 정부의 지방에 대한 영향력이 그렇게 강한 시절이 아니었다.

비유하자면, 이성계 일족은 조선 말에 간도 이주, 개척 시기에 그쪽으로 흘러가 현재 중국의 조선족이 된 사람들과 비슷한 경우였다. 이들은 해방 후 60년이 지났지만 자치구를 유지하고 있으며, 장기간에 걸쳐 자신을 민족적으로 여전히 '조선계'인 중국인이라 생각하고 동화되는 중이다. 의무교육을 비롯해 각종 정책으로 하나의 중국을 강조하는 현대 중국에서도 이런데, 전근대의 문화적으로 차이가 있는 여진 - 고려 관계에서는 그 속도가 더 느리고 영향력도 적을 수밖에 없다.

또한 당시 여진족은 금나라의 멸망으로 완전히 몰락한 상태라 종족적으로 고려 이상으로 안습해졌다. 나라도 없고, 여러 부족으로 분열되어 있어, 통일된 정치 체제를 가진 민족도 아니고, 문화적인 헤게모니도 상실했다. 그저 몽골의 지배 아래 있는 여러 소수 민족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며, 심지어 고려 북방 지역에서도 야인(野人)이라 불리는 여러 종족 가운데 한 부족으로 전락한 상태였다.

여말선초의 문헌에서 이 지역의 부족들은 '여진'보다는 '야인'으로 통칭하는 경우가 많은데, 자신의 부족 이름을 '여진족'으로 삼는 종족만 있었던 게 아니기 때문이다. 북방 야인들이 '여진' - '만주'라는 정체성으로 통합되는 것은 후백년 뒤 후금의 건국을 기다려야 한다. 당시에 중심이 되는 문화는 원 제국으로서 패권을 잡고 있던 몽골 문화였다. 여진족도 몽골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청나라 시대까지 몽골어가 널리 쓰일 정도였다.

이런 면에서 차라리 원 제국의 일부로써 원나라 사람이라는 정체성이 생기지 문화적, 민족적 역량이나 색채가 약한 여진 민족이라는 정체성을 가질 가능성은 낮았다. 물론 이성계는 여진족과 긴밀한 교류를 가졌고, 그들을 통솔할 수 있는 배경에는 여진족과 문화, 민족 등에서 정체성의 공감 / 공유가 있겠지만, 그 정체성은 혈통적 정체성이 아니라 동북면 지역과 그 지역에 사는 사람이라는 지역적, 부족적 성격이었다. 여진족이라는 혈통적 정체성을 가졌다면 여진족 통합에 나서는 게 이치에 맞다. 하지만 이자춘은 원과 고려 사이에서 고려에 귀순하고 지배층의 일원이 된다. 그리고 이성계 가문이 가졌던 여진족의 문화적, 민족적 정체성에 대한 공감 / 공유과 교류는 지역 기반을 동북면에서 한반도 중심인 개성 - 한양으로 옮기자 단 1세대만에 사라졌다. 동북면 출신 어머니를 둔 정종, 태종조차 태조와 같은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본인들도 동북면 여진족과 연결을 강화하거나 과거 영향력을 복원하려고 하지 않았다. 반대로 여진족 역시 자신들의 윗사람이었던 태조 이성계의 혈족에 전과 같은 충성을 바치지 않았다.

특히 가장 중요한 점은, 이성계 일족은 자기들 스스로를 고려인이라고 말하고 있었다는 점. 일부의 편견과 달리 여진족과 한반도의 사람들은 고대부터 그 정체성이나 언어가 확실히 구분되는 별개의 민족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성계 가족이 실제로는 여진족이면서 고려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또, 그럴만한 이유도 없다. 애초에 이들이 여진족이었다면 공민왕을 편들어 쌍성총관부를 고려에 바칠 이유가 희박하다.

따라서 여진족 설은 조선 왕조에 대한 어떤 감정적인 해석, 혹은 만주 지역에 대한 민족주의적 감상에 따른 해석에서 비롯된 낭설로 봐야 될 것이다. 사실은 고려의 역사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내리는 상상에 불과하다.

색이 옅다는 것으로 따진다면 타국인과 교류하며 지냈던 국경 지방이나 외따로 떨어진 제주도는 우리 땅이 아니라고 하는 것, 경상도 해안지방에 왜관이 있었다고 일본인이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성계 여진족설과 같은 논리로 보면 마찬가지로 쌍성총관부에서 99년이나 살았던 한양 조씨들도 여진족이라는 말이 된다.

정확히 설명하자면, 쌍성총관부를 몽골에 넘긴 반란세력도 조씨에서 주도했고 다시 고려에 귀화시킨 세력도 조씨에서 주도했다.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이 고려에 귀화할 때 도움을 줌으로써 고려 정부에 출사하게 된다. 조씨 가문이 저렇게 상반된 행동을 하게 된 이유는 세대가 흐르면서 쌍성총관부의 관직세습 때문에 가문이 분열했기 때문이다.

균형을 맞추기 위해 조선까의 주장을 대충 소개하자면 여진족이 만주 지역만이 아니라 한반도 북방에도 꽤 살았다는 것과 으레 나오는 과거 족보의 신뢰성을 걸고 넘어지는데, 태조 총서의 기록에 李璘, 李隣 등으로 조상의 한자가 다르게 기록되는 혼선이 있고 족보의 가문도 전라도 전주(全州)에 있었는데, 갑자기 동북면 쪽이 근거지가 되는 행적을 증명하는 증거의 신뢰성이 약하기 때문에 이씨 족보[46]를 구매했을 것이라는 주장을 한다. 하지만 고려에서 여진족이 하루 아침에 족보를 사서 고려인 귀족 행세를 할 수 있다는 상상 자체가 역사적 무지를 그대로 드러내는 억지일 뿐이다.

  • 첫째, 고려는 폐쇄적인 문벌에 기반한 세습 귀족 계층이 주도하는 국가였으며 철저한 계급 체제를 갖추고 있었므로 세습 문벌 외의 잡상인이 족보를 살 수도, 산다고 귀족 행세를 할 수도 없었다. 적어도 가문의 방계나 인척, 지인들은 가짜 귀족이라는 것을 바로 눈치챌테니.

  • 둘째, 고려는 수백년동안 북방 야만족의 거듭된 침략에 저항하면서 확고한 민족 의식이 자리잡은 일종의 민족 국가로서, 북방 야만족에게 개방적이지도 않았을 뿐더러 야만족 출신이 주로 노비나 백정 계급으로서 천시되는 상황에서 여진족 나부랭이가 출신을 숨기고 귀족 행세를 할래야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47] 애초에 황제에게 천호장 직위를 받았다면 이미 원나라 조정에서도 그 신원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거나 최소한 명문가로 인증한 것이다. 황제국의 벼슬이란건 신원도 불분명한 자에게 아무렇게나 던져 줄 수있는게 아니니까. 그렇다면 이미 고려 지배층들도 모두 알고있을 것을 무슨 수로 속인단 말인가? 이것은 누구보다도 쌍성 총관부의 한양 조씨들이 증인이다. 이성계의 가문이 여진족이었다면 적어도 원나라 시절 쌍성 총관부에선 당연히 알고 있었을 텐데, 역사서 어디를 봐도 그런 내용은 전혀 없다.

  • 셋째, 이와 같은 상황 하에서 신천 강씨나 성주 이씨 등의 귀족 계급과 혼사를 틀려면 당연히 같은 고려인 귀족급이어야 가능한 것이다. 아무리 세력이 크다한들 당시에 전주 이씨 일가가 고려인인지도 확실치 않은 북방 군벌 나부랭이였다면 고려 중앙 정계의 귀족들과 가문대 가문으로 혼사를 트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민주주의가 들어온지 오래된 오늘날의 일본에도 부라쿠민 집안에서 천황가나 정치 귀족 집안과 가문대 가문으로 혼사를 트고 상류층으로 편입하는 것이 관습상 불가능에 가까운데, 하물며 수백년 전의 고려에서 어찌 그게 가능한 일이겠는가?


그러므로 이성계 여진족 썰은 작금 일본의 사회상만 참고해도 아무런 설득력이 없다는 것을 알 수있는 헛소리에 불과하다고 보면 된다.

12. 이야깃거리[편집]

  •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는 말은 이성계와 무학대사에 얽힌 야사에서 유래한 듯 하다. 이성계가 무학대사를 보고 장난 삼아 "내 눈에는 대사가 돼지처럼 보이는구려."라고 놀리자 무학대사가 이성계에게 "소승은 전하가 부처님처럼 보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성계가 "허허, 야자타임 진짜 못하네나는 대사를 돼지라고 했는데 대사는 왜 나를 부처님처럼 보인다고 하는 것이오?"라고 묻자 무학대사는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님 눈에는 부처님만 보이는 법이지요"(猪眼觀之卽猪 佛眼觀之卽佛)라고 받아쳐 이성계가 크게 웃었다고 한다.

  • 이 외에도 앞에서 설명했던 그 유명한 '집 무너지는 꿈'의 해몽 이야기 등으로 무학대사와 평생 동안의 우정과 관련한 일화가 많이 남아있다. 역사상으로도 무학대사는 이성계의 좋은 상담자이자 벗이었고 이성계에 의해 유교 국가 조선에서 고려의 불교 제도인 '왕사'로 무학대사를 임명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수도 한양의 위치를 정할 때 둘이서 같이 골몰하기도 했다. 봉우리가 딱 1백개였는데 하루 아침에 하나가 그냥 언덕으로 닳아버려서 명당에서 탈락했다는 원통이 고개 이야기도 이성계와 무학대사가 주인공이다.

  • 덧붙여 이성계는 돼지 띠다. 민간 설화 등을 보면 묘하게 돼지와 연관되곤 한다. 꿈에서 자를 문 돼지가 이성계의 꿈에 나타났다는 설화가 있고, 개성에서는 돼지 고기를 성계육이라 부르며 이성계를 두고두고 깠다는 민담도 있다. 그리고 그 돼지 고기로 끓인 탕을 성계탕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조선 시대 미륵 신앙 / 반정부 승려 조직인 당취(땡추)들은 아예 주기적으로 돼지를 죽인 뒤 그 생고기를 씹으며 이성계를 저주하는 의식을 치루었다고 한다. 또한 조랭이 떡은 이성계의 개성에 있는 고려 왕씨 일족을 몰살하는 행각에 분노하여 이성계의 주리를 튼다는 의미를 담아 만들어진 떡이다.

  • 주원장 비슷하게 무학대사가 종묘를 28간만 짓게 해서 조선이 28대까지 갈 것을 예언했다는 얘기가 있으나, 뻥이다. 종묘는 처음 지을 때 제후의 예법에 따라서 7간으로 지었고, 이후 정전을 확장하고 별전인 영녕전까지 지어서 지금은 추존 군주까지 포함하여 38군주 1황태자를 모시고 있다. 1980년대에 국내에 단전 호흡 붐을 일으켰던 소설 <단>에서도 이와 거의 같은 이야기가 나오니 최소 30년은 된 도시 전설이다.
    반면 조선 왕조의 멸망은 필연이었다는 일제의 선전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조선 왕조 관련한 어떤 모 역사책에선 무학대사가 수도를 한양[48]에 자리잡으려 할 때 그 일대를 가리키며 "이곳에 자리를 잡으면 약 5백년 정도는 갈 것입니다"라고 이성계에게 말했고 태조는 이에 흡족해하였다 이런 내용도 있다고..

  • 아들인 태종과의 사이는 매우 안 좋은 편이었지만 실록을 보면 연회를 가지거나 같이 식사를 하는 등 나름대로 화해를 하고 어느 정도의 부자 관계를 유지하였던 것이 보인다. 실록을 보면 태종이 임금 자리에 오르고 조사의의 난이 끝나고 돌아온 이후 죽을 때까지의 기록을 살펴 보면 수라를 헌수하거나, 연회를 베풀어 드리거나, 놀러 나갔다가 궁으로 돌아오는 태조를 마중나가거나 하는 일들이 여럿 기록되어 있다.

  • 조사의의 난이 진압된 후 끌려오다시피 한양으로 귀환한 후에는 태종의 감시를 받고 유폐되다시피 했다는 말이 있지만 조사의의 난 이후에도 온천에 요양을 가거나 왕실의 원찰(대표적으로 양주시회암사) 등 사찰로 행차하는 등 야외 활동을 한 여러 기록이 실록에 남아있다.

  • 함흥차사 야사와 이어지는 이야기로 함흥에서 돌아올 때 마중나온 아들 태종을 죽이려 했던 이야기도 유명하다. 태종이 이성계를 마중나가기 전 아버지를 맞고 나서 열 연회의 가건물을 설치할 때 태종의 참모인 하륜이 태종에게 건물의 기둥을 굵게 할 것을 주문했고 태종은 그 말을 따랐다. 이윽고 이성계가 도착하고 태종은 절을 올리려 했는데 이성계는 갑자기 활을 들어 아들을 향해 쏘려고 했다. 놀란 태종은 재빨리 기둥 뒤로 피했고 화살은 굵은 기둥에 박혀서 목숨을 건졌다.

  • 그리고 연회를 여는데 하륜이 또 귓속말로 태종에게 "전하께서 태상왕께 직접 술을 올리지 마시고 아랫사람을 통해 올리십시오"라고 진언했다. 태종은 그 말을 따라 아랫사람을 시켜 이성계에게 술을 올렸는데 이를 본 이성계는 "이 모두가 천운이구나"라며 허탈하게 웃더니 철퇴를 품 속에서 꺼내 상에 올려놨다고 한다.[49] 야사의 기록이고 실은 조사의의 난 이후 얌전히 돌아와서 편히 살았지만 이 이야기는 실은 아들에 대한 앙금이 남아 있었다는 것을 방증한다고 할 수 있다.

  • 조사의의 난 전 이야기지만 실록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연회 중에 태종과 신하들이 "불교를 좋아하시는 것은 이해합니다만 불공을 꼭 밖에서 드리셔야 합니까?"라고 묻자 이성계는 다음과 같이 쏘아붙여 태종을 무안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이 기록은 태조의 한이 얼마나 컸는지 보여주는 기록이다.

    "그대들의 뜻은 내 이미 알고 있다. 내가 부처를 좋아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다만 두 아들과 한 사람의 사위를 위함이다."(태종이 일으킨 1차 왕자의 난 때 죽은 방번과 방석, 사위인 흥안군 이제) 하고 공중에다 큰 소리로 말하기를, "우리는 이미 서방 정토로 가고 있다!" -《태종실록》태종 2년(1402년) 1월 28일

    어쩌면 이성계가 불교에 매달린 것은 모든 게 허상에 불과하다는 불교의 교리에 감복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기야 변방의 장수가 임금이 되어 조선을 개국했는데 아들내미와 싸우고 감시받는 신세가 되었으니… 게다가 이안사가 함흥으로 이주할 때부터 고려인이던 이씨 일가의 종교는 불교였다. 이는 고대 샤머니즘을 신봉하는 주위 여진족과는 대별되는 점이다. 비록 조선이 숭유억불을 기치로 삼았지만 이는 전조 고려에 대항하기 위한 구실이었고 실제로는 이 당시 원 황실로부터 들어온 티베트 불교의 잔재가 일소되고 고려 본래의 선종 중심의 불교로 일신되었다. 승려로서 조선 왕실의 국사가 된 무학이 바로 이런 저류를 반영한 것이며 이후 이성계는 조선 왕실의 원찰이면서 행궁 역할도 가능한 회암사를 창건하여 이런 친 불교적 성격을 분명히 했다. 즉, 그 당시 사대부들처럼 외적으로는 왕도 정치ㅡ도학 정치를 부르짖으면서도 집에서는 시침떼고 불교를 숭상했던 것이다. 이성계가 고려를 멸망시켰기 때문에 그 업보를 받았느니, 그래서 불교를 믿으며 참회했느니 하는 다양한 해석도 있다.
    그래도 말년에는 왕실에서 더 이상 유혈사태가 발생하지 않기를 바랐던 것은 확실했던 것 같다. 태종이 왕실의 사돈이었던 이거이 부자를 숙청할 무렵, 이를 태상왕 태조에게 고하자, 태조는 하늘을 한참 쳐다보다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네 뜻대로[50] 결정했겠지만, 회안이 이미 쫓겨나고, 익안군이 이미 죽고, 상왕이 출입하지 않으니, 친척 가운데 살아 있는 자가 몇 사람이냐? 일이 이루어질 때에는 돕는 자가 많지만, 일이 낭패할 때에는 돕는 자가 적다. 사생지간에 돕는 자는 친척 같은 것이 없다. 네가 그들을 보전하면, 국가의 재앙이나 천변(天變)·지괴(地怪)가 적어질 것이다. 이 일은 큰 것인데, 나는 장차 큰 근심이 있을까 두려워한다." - <태종실록> 태종 4년(1404년) 10월 20일

    저 말은 '방간이는 폐인 됐고, 방의는 죽고, 방과는 찌그러져 있는데, 우리 친척 중 살아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냐? 그래도 어려울 때 의지할 사람은 친척 뿐이야. 사돈네는 살려줘야지 나라에 나쁜 일이 안 생길 거야.'라는 요지의 훈계. 3남 이방의는 이 해 9월에 이미 병사한 뒤였다.

    이성계의 아들 8명 중 5명이 이성계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장남 이방우는 술병으로 죽었고 6남 이방연은 조선 건국 전에 요절했으며 7남 이방번과 8남 이방석은 왕자의 난 때 살해되었다. 이래저래 자식복은 없었다. 태조의 이 말을 들은 태종도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고 실록의 이 날 기록은 전한다. 결국 이거이 집안은 폐서인이 되고 고향으로 낙향하는 데 그치는데, 이렇게 관대한 처분을 받은 것은 태조의 절절한 이야기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을지도 모른다.[51]
    사실, 자식들이 서로를 죽이는 참극에서 이성계가 보여준 비통한 절규나 그래도 어려울 때 믿을 사람은 친족 뿐인데 친족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훈계(또는 호소)는 자신의 육친들이 서로를 죽이는 참극을 벌이는 데 대한 분노와 고통으로부터 나온 것이기도 하겠지만, 이성계의 성장 기반을 볼 때 아주 실용적인 처세 원칙이기도 하다는 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일단 이성계는 변방 국경의 반독립적 호족 출신이고, 게다가 국경 밖에 살던 이들은 주로 유목민(반유목민)이었으며, 이성계의 일족 자신도 그 영향을 어느정도 받았다는 점, 그리고 고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했기 때문에 주변의 여진족과 갈등 관계에 있었다.
    일단 유목민의 경우 떠돌아 다니며 방목하는 특성상 지연이나 학연 등의 의미가 없고,[52] 따라서 사회적으로 혈연의 의미가 그만큼 중요해질 수 밖에 없다. 또한, 한번 갈라주면 끝인 토지와는 달리 유목민의 재산인 가축은 형제가 많으면 각자의 몫이 좀 줄어들더라도 잘 키우면 쑥쑥 새끼를 낳아서 불어나기 때문에[53] 형제간의 유산 갈등이 농경민보다는 덜한 편이다.
    이 때문에 거친 유목민 사회에서는 유사시에 의지가 될 수 있는 친족[54]과의 관계를 그만큼 중시하게 되는 것. 더구나, 주변의 여진족들과 적대적인 관계에 빠지기 쉬운 변경의 호족 입장에서는 그만큼 친족들의 강한 유대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실제로, 이성계가 함부로 다른 장수들을 무시하다 위기에 빠졌을 때 그를 도와준 것도 종중의 다른 어른들이 보내준 병력이었고, 그의 아들들 역시 군사 활동이나 개국 과정 전반에서 아버지의 심복 부하로서 큰 활약을 했다.
    결국, 이성계의 세력 기반은 일족 공동체였고, 이 '이성계 일족'은 전주 이씨 친족 집단을 중심으로 고려계 유이민들이 뭉쳐 있는[55] 형태였다는 것. 이런 집단의 경우, 친족간의 유대가 극히 중요할 뿐 아니라, 친족의 수[56]가 그 일족의 세력을 나타내는 척도이기도 한 것.(이자춘이 유목민의 풍습을 받아들여 여러 부인을 맞아 많은 자식을 둔 것 역시 이런 상황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에 따라 보면, 왕권을 탐내 서로[57] 죽여대는 아들들의 행태는 이성계가 성장하고, 활약한 사회의 기준으로 보면 완전히 미친 짓이고, 당장 배고프다고 제 살 깎아먹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행태인 셈. 육친이 육친을 죽이는 것도 끔찍한 짓이지만, 그렇게 끔찍한 짓까지 해 가면서 일족의 자멸을 위한 최선의 노력까지 하는 꼬라지로 보일만 하다.
    예를 들어, 이런 일족 공동체에서는 다른 형제에게 가장 자리가 넘어가더라도 그냥 덮어놓고 협력하는 쪽이 현명하다. 내분을 벌이면 일족의 힘이 약해지고, 그만큼 외부의 위협에도 취약해지겠지만 계속 힘을 합치고 있으면 형제계승이나 숙질계승도 충분히 기대할 수 있으니까. 물론 조선 왕조는 그 후 500년 이상 유지되었고, 그 기간동안 조선 왕실의 정치적, 사회적 논리는 이성계에게 익숙했던 일족 논리와는 많이 달랐지만...

  • 주원장키배를 뜬 적이 있다(...). 항목 참조 본격 세기말 패왕 키보드 배틀. 주원장과 이성계 사이에는 희한한 전설이 있다. 주원장이 원래는 반도사람인데 어릴때 이성계 아버지와 명당을 다투다 주원장이 차지한 명당으로 주원장은 명 태조가 되고, 옆에 명당을 차지한 이성계는 조선 태조가 되었다는 전설. 명당 이야기를 떠나서 사실 명 왕조가 조선과 관련이 있다는 객관적인 근거들은 꽤 있음. 명나라가 국가사업으로 편찬한 지리서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 명 태조 주원장이 이르기를 "짐의 조상은 조선인이다. 짐의 조상의 묘소가 조선에 있다"라는 구절이 있다. 또한 주원장의 아들 명 성조 영락제의 생모가 고려사람이라는 기록도 있다. 즉 영락제의 생모가 효자고황후 마씨가 아닌 고려에서 원나라로 온 공비(貢妃)라는 기록. 명나라 황실 종묘의 제사를 주관하는 곳의 기록인 '남경태상시지(南京太常寺志)'에는 영락제의 생모는 공비(碽妃)라고 하였다. '경례남도봉선전기사(敬禮南都奉先殿紀事)'에는 "여러 비빈들이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한 비(妃)만이 서쪽에 있다. 성조(영락제)를 낳았기 때문에, 다른 비빈들이 감히 나란히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조선에서 명나라에 사신으로 간 권근도 이를 언급한 걸 보면 조선에서도 이를 인식하고 있었으니, 조선과 명나라가 유독 가까웠던데는 기저에 이러한 이유들도 있었을 것이다.

  • 이성계의 젊은 시절, 그는 명마를 얻어서 열심히 수련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하루는 활터에서 자신이 활을 쏘고 달려서 만약에 화살보다 늦게 오면 목을 벨 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화살을 쏜 다음 말을 몰고 달리기 시작했는데, 화살이 표적에 꽂혀 있었다. 자신이 화살보다 늦게 온 줄 알고 그가 약속대로 명마의 목을 베는 순간 화살이 과녁에 꽂혔는데 알고 보니 다른 이미 다른 화살이 꽂혀있던 걸 착각한 것이었다. 그는 성급한 자신을 후회하며 명마를 고이 묻어주었으며, 그 뒤 조선의 왕이 되었을 때도 이 일을 잊지 않고 말 묘비를 세워준 곳이 오늘날의 파주의 치마대가 되었다는 일화가 맹꽁이 서당에서도 소개가 됐다.

  • 단순히 무용만 믿고 싸우는 인물이 아닌데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고려말 1377년 서해도(지금의 황해도) 지역에서 날뛰던 왜구를 토벌하러 갔을 때 한차례 격퇴한 왜구가 험한 지형에서 섶으로 방벽을 만들고 버티기에 들어가자 느닷없이 풍악을 연주시키고 술을 마시고 있다가 기습적으로 병사들에게 왜구의 진 주변에 불을 질렀다. 왜구들은 그냥 당할 수 없어서 진에서 뛰쳐나와 고려군에게 달려들었지만 이를 예측하여 사방에서 왜구를 공격했다. 그럼에도 왜구들의 저항도 격렬해 왜구가 쏜 화살이 이성계의 술병까지 깼지만 이성계는 의연함을 잃지 않고 부하들에게 소탕을 명령해 이성계는 술을 마시며 왜구들이 타죽거나 무기에 맞아 죽는 모습을 구경했다.

  • 태조의 가문은 서진의 시초이자, 삼국지로 유명한 사마의 가문과 상당히 흡사하다. 명문가 출신의 전 왕조(위나라, 고려)의 우수한 전략 사령관이자, 중앙 정부의 권신 출신의 사마의와 이성계, 그리고 휘하에 아버지를 따라 무예와 군재에 재능을 가진 아들이 있고(사마사이방과)[58] 문재와 정치에 뛰어난 작은 아들이 형에게 모든 정권을 물려받았다. (사마소, 이방원)][59] 그리고 작은 아들은 권력을 잡자마자 무자비한 숙청을 일으키고, 아버지를 도와 반정(고평릉 사변, 위화도 회군)에도 활약을 했다.

또한 기가 세고 유력자 가문의 아내를 두었으며,(장춘화, 신덕왕후) 망나니와 같은 큰 손자(사마염, 양녕대군)와 그 밑에 공부를 좋아하는 총명한 작은 손자(사마유, 충녕대군)까지...거의 복사 + 붙여넣기 수준의 집안이다.

13. 북한의 평가[편집]

북한의 역사 교과서 조선력사에 이성계을 고려에 배반한 역적이라고 규정하고 리조 봉건 시대의 괴수라면서 엄청나게 폄하하고 있다. 심지어는 김일성이 금야군으로 지나가고 있을때는 아예 열차 커튼을 닫아서 보지않을만큼 엄청나게 싫어했다고. 이는 군사 정권 시절 한국 사회에서도 조선 시대를 무조건 당쟁이나 벌이던 뒤떨어진 시대로 매도하던 것과 같다. 이러한 역사 해석은 이전 시대의 이데올로기를 매도하여 당시의 이데올로기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이뤄졌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면 북조선이 아니라 북고려라고 하지 그랬냐

14. 총평[편집]

지용겸비의 불패명장이자 너그러운 덕장, 백성들을 위해 통치한 성군의 면모와 고려 기득권층들을 대거 숙청하는 잔인한 면모를 가진 칼 같은 군주.

안타까운 일이지만 활솜씨와 용병으로 멸망을 향해 달려가던 고려의 운명을 수없이 돌려세운 무적의 장수였음에도 불구하고 '불세출의 명장 이미지'보다는 '조선을 세운 임금' 이미지가 강하여 서브컬처쪽에서 많은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이성계가 세운 조선이 온갖 편견(+ 덤으로 근현대사의 군사정권에 대한 반동까지) 때문에 현대인에게 이미지가 안 좋게 박힌 것도 한 몫한 듯하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이성계의 무시무시한 전적과 무력이 알려진 덕에 척준경과 함께 현재는 한국사 ''사상 최강의 무력을 가진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동시에 한국사의 드문 대규모 학살자이기도 하다. 새 왕조가 건국되고 그 전 기득권 세력인 왕족이나 귀족세력이 숙청당하는 것은 드문은 일은 아니다. 하지만 한국사에서 이렇게 자세하게 전대 왕족을 몰살한 사람은 이성계가 유일할 것이다. 하지만 이는 정도전이 적극추진했던 이유도 있다.

15. 대중 문화 속의 태조 이성계[편집]

15.1. 사극[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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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 눈물에서의 태조 이성계(故 김무생).

워낙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을 겪었고 한국사의 왕조 창업 군주들 중에서 가장 인지도가 높은 사람이라서 이성계와 그의 시기는 사극에서도 자주 다뤄졌다. 고구려의 고주몽, 백제의 온조, 신라의 박혁거세, 발해의 대조영, 고려의 왕건 등도 있지만 조선을 세운 이성계에 비하면 이들 한국사 창업 군주들은 단 한번 밖에 사극화되지 않았거나 사극화되지 않고 있는 등 대중적인 인지도는 낮다.(그도 그럴 것이 조선 이전 시대는 정확한 사료가 거의 없으니..) 다만 분명히 모든 중요한 결정을 본인이 주도해서 했고 정도전은 이성계의 지지가 없으면 시체나 다름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용의 눈물 이후의 사극들은 하나같이 정도전에게 모든걸 맡기고 뒤에 앉아있는 허수아비 군주로 묘사되기 일쑤. 정도전을 부각시키기 시작한 인물은 일제시대 악명높은 식민사학자이자 경성제대 교수인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 그런 기조는 해방후 일제로부터 욱일중수훈장을 수여받은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이상백 등으로 이어지며 이병도,이상백 등이 주도한 진단학회가 집필한 을류문화사 한국사6권중 이상백은 조선건국부문을 기술하며 정도전을 부각시킴. 정도전의 삼봉집도 한문까지 전부 다 재편집하여 재탄생. 또 한영우는 이상백의 기조를 이어받아 정도전으로 학위까지 받고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가 되며 또 그 제자들이 국사학계의 중진으로 성장함. 뭐 그런식. 그런 기조에 대한 경계심 때문인지 정도전을 띄우려는 엄청난 노력에 비해서는 별로 안뜸

개국에서는 임동진이, 용의 눈물에서는 김무생이 열연했다. 특히 김무생은 용의 눈물은 물론 조선왕조 오백년에서도 태조를 연기할 만큼 이성계 전문배우였다.[60] 김무생 의 태조는 실록을 바탕으로 하여 아들인 이방원을 향한 무한한 혐오감이나 정도전과의 우정 등 인간적인 태조의 모습을 잘 표현했다는 평가다. 김무생 씨의 카리스마는 유동근의 태종 이방원과 더불어 용의 눈물을 압도하여 지금도 이성계하면 고 김무생이라고 할 정도이다. 태조 어진과의 외모상 싱크로율이 굉장히 높기도 했고. 가히 레퍼런스급의 명연기를 보여주었기에 지금도 고 김무생을 뛰어넘는 이성계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자세한 것은 이성계(용의 눈물) 참고. 허나 드라마 정도전이 방영된 이후로는 유동근이 그 자리를 위협하고 있다.

김무생이 열연한 이성계는 수많은 명장면이 있다. 그 중에서는 조사의의 난에서 진 태조가 돌아와 태종의 문안을 받으며 춤추는 장면이 있다. 태종은 "아바마마! 소자의 춤을 보시옵소서" 하면서 통곡하고 태조도 이내 슬퍼하며 태종을 끌어안는 장면은 최고의 장면 중 하나로 기억되기도 한다. 드라마 속에서는 야사의 이야기들도 거의 재현하고 있다.

무학대사와의 '뭐 눈엔 뭐만 보인다.'는 일화도 나오며 태종을 죽이려고 천막에 대고 화살을 쐈지만, 미리 하륜의 충고에 따라 기둥을 준비한 태종이 기둥 뒤로 숨고, 태조가 쏜 화살이 기둥에 박혀 태종이 살아남자, 나중에는 술자리에서 소매에 숨긴 작은 철퇴를 휘두르지만 태종이 피해내는 모습을 보고 "천운이로고. 과인이 이리하여도 막지 못하는 것을 어느 누가 막으랴"라며 체념하는 장면은 조선 개국왕조의 비애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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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드라마 정도전에서는 유동근이 이성계 역을 맡았다. 유동근이 용의 눈물에서 이성계의 애증의 대상이었던 아들 태종(이방원)을 맡았던 것을 생각하면 가히 최강의 배우개그. 헌데 포스가 故 김무생이 연기했던 이성계와 필적하는 수준이다. 실제로 유동근은 이성계 역을 맡으면서 故 김무생 선배 생각이 난다며 감회가 새롭다고 밝히기도 했다.# 자세한 것은 이성계(정도전) 항목 참고.

조부까지는 몽골의 천호로서, 아버지 대부터는 고려의 장수로서, 확실한 고려인도 몽고인도 아닌 자신의 정체성에 고민한다는 설정이다. 이 설정의 반영으로 작중 북방 사투리를 사용하는데, 일단 4회 예고편에서는 실제 출신 지역인 동북이 아니라 서북 방언을 쓰고 있다. 제작진이 그것을 모를리는 없겠으나 그렇다고 동북 방언을 쓰는 것도 시대상 맞지 않는다. 그래도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동북 방언서북 방언이 섞인 괴악한 북부 방언을 사용한다.[61] 애시당초 북방사투리 쓰는 설정은 제작진이 큰 고민을 하고 시작한게 아니라 피디가 북쪽사투리 한번 써보는게 어떨까 해서 하게됨

기본적으로는 서북 방언의 어휘를 사용하나 ~했지비, ~했음매라는 어미도 사용한다. 동북 방언 항목에도 들어가보면 알겠지만, ~했지비, ~했슴매는 동북 방언에서 주로 쓰이는 어미이다. 다만 이 어미는 만주어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여진족과 가까운 동북면의 특성상 꽤 오래전부터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 당대 동북방언을 복원할 수 없는 여건상 어휘는 같은 북부계통인 서북방언에서, 어미는 여진어의 영향을 받은 현 동북방언에서 취하는 것이 그나마 택할 수 있는 길일지도.

현재의 동북 방언은 놀랄만큼 동남 방언과 비슷하다. 그 이유는 드라마 시점에서 후대인 세종대왕 시절 4군 6진이 개척되며 시행된 사민정책으로 경상도 지역 사람들이 함경도 지방으로 넘어와 개척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MBC 드라마 신돈(드라마)에선 이진우가 역할을 맡았다. 극중 시기가 시기인만큼 여타 다른 사극과는 달리 장수로써 한참 활약하던 젊은 시절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SBS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천호진이 맡았다.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 참조.

KBS 대왕 세종에서는 종묘에서 근신 중이던 양녕대군의 회상씬으로 잠시 등장한다. 여기에선 말을 타고 왜구와 싸우는 무장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무술 감독 겸 배우인 정두홍 씨가 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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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장영실(드라마)에서 김기현이 맡고, 7화에서 한컷으로 등장한다.[62]

15.2. 영화[편집]

해적: 바다로 간 산적에선 이대연이 배역을 맡았다. 영화 초반, 원래 군관이었던 주인공 장사정(김남길)과 위화도 회군문제로 대립하던 과정에서 칼부딤까지 일어나는 극단적인 상황까지 치닫게 되었는데, 이때 장사정이 모흥갑(김태우)을 제압한 후 던진 검을 허리춤에 차고있던 칼을 뽑아 발도술로 튕겨내는 무시무시한 반사신경을 보여주었다. 결국 장사정은 군을 나가 산적이 되었다.

이후 시간이 흘러 조선이 건국되었을때, 명나라 황제에게서 국새를 받아 공식적으로 왕으로 인정받기 직전, 국새가 명나라에서 조선으로 이송되는 과정에 사신 한상질(오달수)의 실수로 국새를 고래가 삼켜버려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그리고 국새를 잃어버린 장본인인 한상질에게 15일 내로 국새를 되찾아오라는 명을 내린다. 결국 국새는 찾지 못했고, 국새를 다시받는 대신, 댓가로 명나라 황제에게 공녀 500명과 환관 200명을 바치기 위해서 백성들을 징집해야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지만, 어느날 야심한 밤 침소에 찾아와 자신에게 검을 겨눈 장사정과 재회하고, 그와의 짧은 대화 후 느낀게 있었는지 공물을 보내지 않기로 한다.

15.3. 게임[편집]

코에이의 원조비사와 징기스칸 4에서도 등장. 원조비사에서는 최영과 더불어 전투치 A를 받고 있고, 특히, 이성계는 다른 능력치도 준수해 고려의 먼치킨 무장으로 포진하고 있다. 징기스칸 4에서는 시나리오 2와 4에서 등장. 시나리오 2에서는 등장 시기도 늦고 능력치가 전부 70대(라고는 해도 이 게임에서 능력치가 70대를 찍으면 준먼치킨이다.)지만, 시나리오 4에서는 전투치가 80대로 올라 있으며 기존에 보유하고 있던 연사 특기에 능력치가 업그레이드되며 화공 특기까지 보유하게 되어 궁병이나 궁기병을 이끌면 사기에 가까운 능력을 발휘한다. 특히 공성전에서 적으로 만날 경우 상대하기 대단히 껄끄럽다. 어쩐 일인지 수군 적성도 A라 해전에서도 엄청난 면모를 발휘한다.

이 게임 전 시나리오 통틀어 고려 무장 중에서는 최고의 먼치킨으로 명의 서달이나 무로마치 막부아시카가 요시미츠 등과도 비등하게 싸울 수 있다. 코에이에서 고려 장수에게 이 정도 능력치를 준 것도 나름의 배려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한족, 몽골족, 여진족, 왜구와 모두 싸워서 이겼던 이성계가 완전 '국내용' 장수였음에도 전투치가 90대 중반을 찍은 미나모토노 요시츠네와 비교하자니 불만이 남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등용' 특기가 없다. 능력치 총합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 동일하다 요리토모가 정 87 전 68 지 76으로 총합 231, 이성계는 정 76 전 83 지 72로 역시 231. 파킷포함 능력치 총합으로는 요리토모와 함께 공동 41위이다.

여하간 시나리오 1 ~ 3의 고려와 달리 시나리오 4의 고려가 안습을 벗어나게 하는데 결정적인 장군이다. 코에이가 한국 인물에 이 정도로 대우를 해준 건 처음이라고 봐도 좋다. 이와 비슷한 대우를 받은 건 삼국지 시리즈에서 역사 무장으로 등장한 이순신 정도지만 삼국지 장수들보다 낮은 능력치를 받는 역사 무장들의 한계상 -물론 이순신 장군은 그중에서도 강한 편이지만- 가장 좋은 대우를 받은건 이성계다. 특히 일러스트가 가상 인물이 아니고 시나리오4 설명에서 중요한 장수라고 설명했다. 아무래도 징기스칸4의 특징인 왕조 창업자 버프가 한몫을 한듯하다.

플스판의 시나리오 2에선 다른 건 다 원판의 능력치인데 전투만 85로 파킷 때보다 더 올라갔다.(...) 수군 적성이 A인지라 일본의 공략 페이지에선 무로마치 막부에서 쳐들어오면 바다에서 다 요격하라고 써져있다.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에도 등장한다. 열풍전 PS판에서 고대 무장으로 등장한다. 능력치는 통솔 85 무력 74 지력 70 정치 72에 외교와 배락 특기를 가졌다. 적성은 수군 A, 족경 B, 기마 D, 철포 E. 주로 육전에서 말타고 이민족을 쫓아내던 무장인데 수군이 A고 육군은 바닥을 기고 있다. 징기스칸4에서도 그렇고 코에이가 또 조사를 대충 한듯하다. 왜구를 쫓아낸것을 크게 평가한 모양이지만 이성계군의 주력은 여진 + 고려인으로 이루어진 친위 기병대였고 전투 양상 또한 고려 내륙으로 침투해온 적들을 요격하는 형태였다. 특이하게도 열전을 보면 고려를 멸망시키고 황제가 되었다고 한다. 잘못된 열전과 별개로 역사적으로 일본은 조선에 사신을 보낼때 조선 국왕을 조선 황제 또는 고려 황제라고 표현한 경우가 종종 있다.

크래시 피버의 한국 서버 스토리로 인게임에 등장하였다. 초위저드급 퀘스트 클리어를 통해 획득할 수 있는 유닛으로 나오고, 상당한 업적들 때문인지 때문인지 웬만한 한정 유닛들을 압도하는 성능으로 나왔다. 게임의 스토리에서는 설정상 이방원의 무차별 숙청을 보다못해 근정전 액세스 키를 가지고 잠적하여 이성계를 찾으러 가는 게 퀘스트의 내용이다.

유로파 유니버셜리스 4에서는 'Seonggye (Taejo)'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며, 능력치는 행정, 외교, 군사 순으로 5,4,5 이다. 참고로 이 게임의 능력치 상한은 6이다.

15.4. 소설[편집]

고려 말을 무대로 하는 작품에는 무조건 등장한다.

김성한 작가 한국사 역사소설

요하

왕건

이성계

7년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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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한 작가의 소설 '조선태조 이성계'에서는 주인공. 작가의 역사소설 중 1960년대 말에 완성된 최초 작품이다. 고려 공민왕 10년 박의의 난을 진압하는 모습부터 등장하며 왕자의 난으로 양위를 하고 물러나는 모습까지 그리고 있다. 이성계뿐 아니라 여말선초의 많은 인물들의 시각에서도 전개된다. 절판 및 재출간을 반복하다가 최근 2014년 재출간되었다.

16. 관련 문서[편집]

17. 둘러보기(계보)[편집]

고려의 문하시중

최영

이성계

심덕부

고려의 명목상 국왕

전임
공양왕

1392년 ~ 1393년

후임
(국호 변경)

조선의 초대 국왕

전임
(국호 변경)

1393년 ~ 1398년

후임
정종


[1] 흔히 함흥으로 착각하는데, 정확하게는 함흥 인근의 화령(현 영흥군)이다. 그래도 함흥이 이성계의 본거지였던 것은 사실.[2] 다른 왕들처럼 그냥 '태조'라고만 하면 고려태조 왕건과 혼동이 되기 때문에 더욱 그러한 것으로 보인다. 가령 네이버에서는 '태조'를 치면 드라마 태조 왕건의 영향도 있어 태조 왕건이 더 상위에 자동 완성된다. 혹은 '태조 이성계'와 같은 식으로 묘호와 이름을 둘 다 쓰는 경우도 많다.[3] 왕의 이름은 피휘를 해야 하기 때문에 자주 쓰지 않는 한 글자 이름으로 바꾼 것. 당예종 이단의 휘와 한자까지 같다.[4] 애시당초 이성계는 명나라의 철령 이북에 대한 영유권 요구로 시작된 명나라와 고려의 외교 분쟁에서 요동 정벌을 통한 명나라와의 전쟁에 반대했다. 요동 정벌 직전 4불가론을 내세우며 괜히 고려 조정의 요동 정벌에 반대한게 아니다.[5] 환갑이라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환갑에 죽은게 아니다. 숙종은 만 59세에 사망했다.[6] 개성 지역에 전해지는 민담 가운데 이성계를 뒷담까는 내용의 민담이 유난히 많다.[7] 위구르족 출신으로 고려, 조선 조정에서 벼슬한 사람도 있는데 경주 설씨의 시조인 설장수(偰長壽, 1341년 ∼ 1399년). 공민왕 때에 아버지를 따라 홍건적의 난을 피해서 귀순해 주로 명과의 외교 업무를 담당했고(주원장의 일방적인 철령위 설치 통보를 고려에 전달한 사람도 이 사람) 조선이 세워진 뒤에는 개국 공신이 되었으며, 조선에서 통역관을 양성하는 사역원의 창설과 운영을 맡기도 했다.[8] 새로운 왕조를 일으킨 제왕의 고향을 말한다.[9] 몽골식 이름. 고려식 이름으로는 이자흥(李子興).[10] 사실 이들의 행보는 좋게 말하면 세상과 사회 현실을 보는 눈이 밝은 거고, 나쁘게 말하면 기회주의인 거다. 무엇보다 이성계는 자신의 가문을 키우는 염원이 매우 간절했을 것이다.[11] 이런 이유는 첫째 부인과 둘째 부인 둘다 "부인"이기 때문이다 둘째 부인은 첩이 아닌 정실이다. 일부다처에서 일부일처다첩이 된 건 조선 태종조 부터이다.[12] 이방원이 벌인 짓이다.[13] 혹은 더 노골적으로 무너지려는 집에서 상태가 뛰어나 몹시 탐이 나는 서까래 세 개를 짊어지고 나오는 꿈을 꿨다는 버전도 있다. 같은 원리로 이쪽도 임금 왕(王)자가 된다.[14] 조광윤은 창술로 유명했고 그가 만들었다는 송가창법은 중국에서도 대표적인 창술 중 하나이다.[15] 글자 그대로 큰 소리를 내며 날아가는 화살이다.[16] 성종 이에 대해서 신하들에게 변명한 기록도 있다.[17] 우왕과 창왕이 가짜라는 것은 고려를 무너뜨리고 이성계 스스로 왕이 되는 역성 혁명의 주요 명분 중 하나였기 때문에 조선 500년 동안 우왕창왕은 당연하게 신돈의 아들 취급 당했고 의문을 가진 선비도 간혹 있었지만 나라와 왕가 정당성의 뿌리를 흔드는 부분이었기 때문에 사회 분위기상 본격적으로 억울설을 제기하기는 어려웠다. 고려사에서도 우왕과 창왕을 세가가 아닌 열전, 그것도 반역전에 신우, 신창으로 들어가 있다. 그러나 조선이 망하고 이에 대한 언급이 자유로워진 현대에 들어서는 어느 쪽이 맞다는 확실한 근거는 없지만 정황상 군사 정변의 부족한 정당성을 세우기 위한 모략이었다고 여겨지고 있다. 용의 눈물 등 여말 선초를 다룬 창작물에서도 왕씨 겨드랑이의 용의 비늘 야사를 통해 사실 우왕은 왕씨 핏줄이 맞는데 모함을 당해 억울하게 희생된다는 식으로 연출하고 있다.[18] 또는 권서고려국사[19] 왕위의 사후 추인[20] 아예 왕씨의 사용 자체를 금했다. 사성된 경우는 본성으로 되돌렸고, 고려 왕실과 관계없는 왕씨라도 모친 쪽의 성씨를 쓰도록 했다. 다만 왕실과 관계없는 왕씨를 개성 왕씨라고 무고한 일에 대한 기록도 실록에 있으니 억울하게 죽은 이들 또한 있었을 수도 있다.[21] 다만 조선도 초기에만 탄압했지 나중에는 탄압을 중지하고 왕씨들을 복권해 주었다. 하지만 그게 문종 때였고 이미 죽일 사람은 다 죽이고 철저히 몰락시킨 다음이었으니 별 큰 의미는 없었다. 이 때문에 현재의 한국에서 김씨나 박씨, 이씨와 왕씨의 위상 차이는 비교도 안 된다. 대표적으로 한국의 유명한 여성 배우 전지현은 본명이나 집안 가문이 왕씨라고 화교중국인 취급을 받았을 정도였다.[22] 물론 조선 시대 내내 왕들의 중시조였기 때문에 대놓고 하지는 않고 간접적으로 디스했다.[23] 나라가 어지간히 막장이 아니라면 온건파는 정작 군인 출신들인 경우가 많다. 콜린 파월이라든지 제임스 매티스라든지. 전쟁을 직접 겪어봤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 오히려 매파에 전쟁 경험이 없는 책상물림들이 많고. 이성계도 온갖 전장을 돌아다니면서 전쟁에 회의를 느꼈을 가능성이 크다. 일본군이 좀 정신나간 집단이었던 셈.[24] 고려에 충절을 지켜 은거했다는 건 어디까지나 야사일 가능성이 높다. 실록에선 병권도 일부 쥐고 있었다고 나오며, 조상들에게 제를 지내는 등 정식 후계자가 되지 못했을 뿐 맏이로서의 역할을 했다. 그가 폭음을 일삼은 건 고려에 대한 충절 때문이 아니라 맏이 대우는 받으면서도 후계자는 되지 못한 현실에 대한 울분이었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25] 다만 그가 사신으로 간 직후, 이방원이 이색의 요청에 따라 이성계의 선택으로 서장관 자격으로 이색, 이숭인을 따라 간 적이 있는 만큼, 이방우의 사신 행도 이와 같이 강제성이 있었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또한 이방우에 대한 바로 앞의 주석에 기록된 내용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반론이 가능한데, 진안대군 항목을 참조할 것을 추천한다.[26] 태조실록 권4 태조 2년 9월 18일 기사.[27] 그리고 여기서 생각해 봐야 할 인물이 방석의 첫 부인인 폐세자빈 유씨. 그녀와 방석이 혼인한 시점은 명확하지 않은데, 만약 조선 건국 이전에 혼인한 고려 구 세력의 딸이라면 그녀의 폐출 이유로 흔히 알려진 내시 이만과의 간통이 누명일 가능성이 생긴다.[28] 태조실록 권1 태조 원년 8월 19일.[29] 이에 대한 반론으로는 태조는 다시 고려인으로 귀부하기 위하여 유목 민족에 영향을 받은 풍습을 완전히 끊어버린 인물인데 느닷없이 왕위 계승 문제에 유목민 풍습을 끌어들이는 것은 뜬금없다고 주장한다.[30] 태종이 뒷날 정릉을 파버리고 석물을 청계천에 처박은 것도 아버지의 정치적 고려를 다 헤아리고 맞대응을 한 것이다.[31] 태조실록 권1 원년 8월 20일[32] 군권 개편 후에도 방우에게 남아있던 군사들은 방우 사후 그의 아들 복근이 아니라 이성계의 형 이원계의 3남 이조(李朝)에게 인계된다. 태조실록 권4 태조 2년 9월 18일. 이는 곧 방우의 맏이로서의 위상을 그 장자 이복근에게 계승시키지 않겠다는 의미였다.[33] 태조실록 권5 태조 3년 2월 29일[34] 사실 조금만 생각해봐도 이화나 이무 등은 아무리 방석을 지켜줘봐야 좋은 일만 해주는 것이 명백했으니 이방원이 "이 나라가 이씨의 나라입니까, 정씨의 나라입니까?"하고 설득하면 당연히 넘어갈 수밖에 없고 방번은 자기 자리를 방석이 빼앗아갔다고 생각할 것이 뻔한데 도와줄 거라고 생각하는 것부터가 말도 안된다.[35] 병환설은 조작됐다는 주장도 있지만 아무리 타고난 무골에 강건한 사람이라도 나이가 6~70대 사이의 노인인데 건강 관리를 잘 했어도 감기 같은 잔병에라도 걸려 누웠을 확률이 높다. 태조가 멀쩡하다면 아무리 명분을 내세웠어도 엄연히 왕과 국가에 반역을 일으킨거다. 그리고 이렇게 반기를 들면 오히려 태조는 그렇지 않아도 그냥 놔두기 찜찜하던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을 정리할 명분이 생긴다. 1차 왕자의 난은 감정적으로 일으킨 것이 아니라 사전에 치밀한 준비를 하여 벌인 일인데 태조의 상태도 제대로 안 살피고 그냥 대뜸 들이닥쳤을 리는 없다.[36] 함흥차사라는 속담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조사의의 난이 끝나고 이성계가 개경으로 돌아오기 전 이방원이 이성계를 모시기 위해 여러 사람을 함흥차사로 보냈으나 이성계가 모두 활로 쏴서 죽여버려 돌아오지 못하자 무학대사를 보내 설득하였다. 무학대사는 차마 죽일 수 없었던 이성계가 뜻을 꺾고 돌아왔다는 이야기는 야사에서 비롯되었으며 한 번 간 사람이 돌아오지 않거나 소식이 없다는 뜻이지만 정사는 아니며 사실 함흥에 차사로 갔다가 이성계의 활 맞아 죽은 인물이 단 한 명도 없다. 함흥차사로 갔다가 죽었다는 인물중 송유나 박순은 조사의의 난에 휩쓸려서 죽었고, 성석린은 애초에 함흥에 간 적이 없다. 이렇게 죽은 사람은 없는데, 반대로 차사로 갔다가 살아왔다는 사람은 무학대사 제외하고도 많다. 애초에 태종이 차사로 보낸 사람이 엄청나고, 이중 반란에 휩쓸린 사람 제외하고는 다 살아왔다. |자세한 내용은 위키 참조[37] 두 사람이 뒤늦게나마 화해한 건 물론 이유가 있었다. 우선 이성계는 아들들이 서로 죽이는 걸 자기 눈으로 직접 보아야 했는데 그 꼴을 본 사람들은 그가 왕씨들을 잔혹하게 다뤘기에 자기 아들들의 죽음으로 천벌을 받은 거라고 여겨 동정하지 않았다. 이성계도 이 때문에 왕씨들을 너무 가혹하게 다뤘다고 후회했다고 한다. 그러나 얼마 후 왕위에서 강제로 물러나 함흥으로 쫓겨나게 되자 사람들은 이성계를 동정하고 이방원을 책망하기 시작한다. 결국 아버지를 외면했던 이방원은 뒤늦게나마 화해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성계 입장에서도 이제는 더 이상 후계자가 없었다. 아들들 대부분이 죽거나 유배되거나 무능력자로 판명난 상황에서 그나마 대안이 될 수 있는 건 이미 용상에 앉은 다섯째 아들 뿐이었다. 그리고 그 아들은 왕권을 튼튼히 다져 놓으며 흔들리던 왕조를 안정시킨 일등 공신이었으니, 자신의 분노만으로 아들과의 화해를 끝내 거부한다면 결국 나라가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두 사람은 더 큰 대의를 위해 화해를 한 것이다. 한 마디로 애증의 관계.[38] 고려를 위해 함께 해왔던 정몽주와 자신의 원훈인 정도전을 죽이고 이복 형제인 이방석, 이방번까지 참살한 나쁜 놈이자 동시에 자신의 왕조 창건을 도운 일등 공신이자 명군으로 그 자질을 인정받은 애증이 교차했을 아들인 태종 이방원.[39] 태종 항목에 나와있지만 처음부터 부자가 사이가 나빴던 건 아니다. 오히려 태종의 젊은 시절 태종은 무관에 대한 멸시가 저변에 깔린 고려에서 무관 집안 출신임에도 과거에 응시하여 합격한 후 고려 정계에서 활동하며 문관들과 교류해 이성계의 정계 진출에 도움을 줬다. 오죽하면 이성계가 이방원이 과거에 합격하자 "내가 손님과 즐겁게 보낼 수 있던 건 네 덕분이다."라고 칭찬했을 정도였다.[40] 동구릉에는 태조의 왕릉 건원릉을 비롯해 다른 임금들 및 왕후들이 묻혀있다. 동구릉이라는 뜻 자체가 동쪽에 있는 아홉 능이라는 뜻. 동구릉은 2009년 2월 27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41] 베트남의 경우 국호가 바뀌지않은 상태에서 왕조교체가 자주 일어나서 이태조, 여태조, 쩐태조 같이 성과 묘호를 붙어쓰는게 정식이다.[42] 태상왕이 된 이후에 정식 봉작되는 바람에 후궁으로 분류되었다.[43] 이성계가 태조가 됐을 때 나이가 50대 후반이라는 것과 당시 평균 체격을 감안하면 무인으로서는 축복 받은 체격.[44] 일본 위키에 나오는 것처럼 https://ja.wikipedia.org/wiki/%E6%9D%8E%E6%88%90%E6%A1%82 혐한들이 대놓고 왜곡을 벌이기도 하지만 저런 것들을 볼 때는 명확한 근거가 무엇인지 확인하는 편이 좋다. 저런 이상한 학자들이 일본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명확한 근거가 없는 이상 확정적 정설이니 세계에서도 그렇게 생각하니 이런 것들은 다 뻘소리에 불과하다.[45] 몽골을 비롯한 중세 동북아의 유목부족들은 대개 자식들이 성년이 되면 각자의 상속분을 챙겨 분가한 이후에 막내가 아버지의 남은 재산 모두를 상속받았다.[46] 당시 성씨는 그 가문의 봉토와 귀족의 증거라 성씨를 가진 고려인이 몽골에 귀화하면 반드시 자신의 성씨는 남겨 놓았다.[47] 정도전은 모계가 노비 출신이라는 의혹만 제기되었음에도 정치 생명은 물론 일신의 생명까지 끝장날 뻔 했음을 기억하라.[48] 원래 한양 전에 충청도 어디로 잡았다가 취소시키고 왕십리 일대로 수도를 재선정.[49] 철퇴가 아니라 던지는 무기인 철구(鐵球 : 쇠공)였다는 이야기도 있다.[50] 이 '네 뜻대로'는 의역이 아니다. 실록 원문에도 '너 여(汝)'자를 쓰고 있다. 태상왕 태조는 태종이 즉위한 이후에도 태종을 '주상'이라고 부르기도 했지만 태종을 사가에 있을 때처럼 격의 없이 '너'라고 부르기도 했던 듯.[51] 나중에 보면 알겠지만 태종의 외척 가문인 민씨 집안은 이거이 입장에서는 본인과 네명의 아들이 모두 폐서인된 것이 다행일 정도로 박살났다.[52] 지연은 물론이려니와 학연은 거의 없다. 학연이라봐야 자기 부족 내에서 말은 이렇게 타라 하는식의 교육뿐이니...[53] 물론 한파라도 찾아오면 확 줄어들기도 하고[54] 특히 형제등의 가까운 친족[55] 이들 유이민 집단 중에서 이씨는 아니지만 중요한 역할을 하는 가신들이 나왔을 것이다.[56] 특히 제몫을 할 수 있는 성인 남성의 수[57] 그리고 역시 중요한 혈연 동맹인 사위까지[58] 특히 둘은 기록상 외모까지도 흡사하다! 눈 밑에 혹이 있었던 무골의 사마사와, 실록에 묘사된 곰처럼 강건한 체구에 눈 밑에 큰 사마귀가 있다는 이방과.[59] 그러나 정치가로써의 기량을 비교하면 이방원이 몇 차원 쯤은 고단수다.[60] 뿐만 아니라 김무생은 1967년 TBC에서 방영한 이성계에도 출연한 적이 있다. 극본은 신봉승, 이 드라마는 방영된 지가 오래 되어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김무생이 당시 어떤 배역을 연기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이방원을 연기 했을거라 추측된다. 그 드라마에서 이성계 역은 김성원이 연기하였다.[61] 그러나 한 인터뷰에서 밝히기를, 대본 리딩 당시 제대로 된 동북방언을 구사했더니 알아듣기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 어쩔 수 없이 부정확하지만 익숙한 북한 사투리를 사용하는 것으로 했다고 한다. 일반적인 사람들의 인식은 "북한 사투리 = 서북 방언"이기에 내린 결정인듯.[62] 김기현은 김영철이 똑같이 이방원으로 나온 드라마 대왕 세종에서는 영의정 유정현 역할로 출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