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탈해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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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탈해왕릉 慶州 脫解王陵 Tomb of King Gyeongdeok, Gyeongju | |
소재지 | |
분류 | 유적건조물 / 무덤 / 왕실무덤 / 고대 |
면적 | 98,907㎡ |
지정연도 | |
시대 | |
소유단체 | |
관리단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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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해왕릉(脫解王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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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해왕릉(脫解王陵) 전경[2] |
탈해왕릉으로 전해지는 무덤은 경주 시가지 북동쪽의 동천동, 소금강산 남쪽 자락에 있다. 높이 4.4m, 지름 15.7m의 상당히 큰 봉분으로 된 원형봉토분이다.
바로 옆에는 조선 시대에 탈해왕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만든 사당 숭신전이 있는데, 석탈해는 석씨(昔) 왕가의 시조로서 조선시대에 여러 신라 왕들 중에서도 비교적 격이 높은 대우와 관리를 받은 것이다. 이 숭신전을 오릉에 있는 박씨의 사당 숭덕전과 대릉원 남쪽의 김씨의 사당 숭혜전과 함께 경주 3전이라고 한다.#
석탈해의 유해는 삼국사기에서는 성 북쪽의 양정(壤井) 언덕에 장사지냈다고 하고, 삼국유사 탈해왕조에 의하면 본래 소천구(䟽川丘)라는 곳에 장사지냈는데 신라 중기, 탈해의 계시를 받은 문무왕이 탈해왕릉을 열어서 유골을 수습해, 유골을 담은 소상(塑像)을 만들어 토함산에 봉안하고 제사지냈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현재 존재하는 탈해왕릉이 진짜 석탈해의 왕릉이라고 비정한 것은 신라 때부터 쭉 내려온 게 아니라 신라 이후 수백 년이 지난 조선시대에 문중이 비정한 것으로 과학적인 접근이 아니었다.[3] 탈해 이사금은 분명 신라 초기에 재위했던 임금인데, 탈해왕릉의 무덤 내부는 전형적인 신라 후기 양식인 굴식 돌방무덤으로 보여서 여기가 진짜로 탈해왕릉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4] 그러나 조선시대 비정된 이래 수백 년간 제사를 지낸 석씨 문중과도 얽혀있는 등 어른의 사정으로 지금도 탈해왕릉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런 양식상의 모순에 대해 신라 후기에 오래된 무덤이 북천의 범람으로 훼손된 것을[5] 수리하면서 그때 신라 후기 양식으로 다시 세웠다는 설을 제기하기도 한다.
바로 옆에 경주 이씨의 시조 알평과 관련된 표암봉(瓢嵒峰)이 있다.
바로 옆에는 조선 시대에 탈해왕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만든 사당 숭신전이 있는데, 석탈해는 석씨(昔) 왕가의 시조로서 조선시대에 여러 신라 왕들 중에서도 비교적 격이 높은 대우와 관리를 받은 것이다. 이 숭신전을 오릉에 있는 박씨의 사당 숭덕전과 대릉원 남쪽의 김씨의 사당 숭혜전과 함께 경주 3전이라고 한다.#
석탈해의 유해는 삼국사기에서는 성 북쪽의 양정(壤井) 언덕에 장사지냈다고 하고, 삼국유사 탈해왕조에 의하면 본래 소천구(䟽川丘)라는 곳에 장사지냈는데 신라 중기, 탈해의 계시를 받은 문무왕이 탈해왕릉을 열어서 유골을 수습해, 유골을 담은 소상(塑像)을 만들어 토함산에 봉안하고 제사지냈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현재 존재하는 탈해왕릉이 진짜 석탈해의 왕릉이라고 비정한 것은 신라 때부터 쭉 내려온 게 아니라 신라 이후 수백 년이 지난 조선시대에 문중이 비정한 것으로 과학적인 접근이 아니었다.[3] 탈해 이사금은 분명 신라 초기에 재위했던 임금인데, 탈해왕릉의 무덤 내부는 전형적인 신라 후기 양식인 굴식 돌방무덤으로 보여서 여기가 진짜로 탈해왕릉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4] 그러나 조선시대 비정된 이래 수백 년간 제사를 지낸 석씨 문중과도 얽혀있는 등 어른의 사정으로 지금도 탈해왕릉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런 양식상의 모순에 대해 신라 후기에 오래된 무덤이 북천의 범람으로 훼손된 것을[5] 수리하면서 그때 신라 후기 양식으로 다시 세웠다는 설을 제기하기도 한다.
바로 옆에 경주 이씨의 시조 알평과 관련된 표암봉(瓢嵒峰)이 있다.
신라 탈해왕(재위 57∼80)의 무덤으로 소나무숲으로 둘러싸여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왜국 동북 1,000리 지점에 다파나국의 왕비가 알을 낳았는데 불길하다 하여 보물과 함께 궤짝에 넣어 바다에 띄워 보냈다. 처음에는 금관국(김해)에 닿았으나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겨 아무도 거두지 않았고 다시 진한의 아진포에 닿았는데 노파가 거두어 키웠다. 궤짝이 떠오를 때 까치 한 마리가 따라다니며 울었다고 하여 까치 작(鵲)자에서 조(鳥)를 떼고 석(昔)으로 성을 삼고, 아이가 궤를 풀고 나왔다 해서 이름을 탈해(脫解)라 지었다. 탈해왕은 석(昔)씨의 시조로서 신라 최초 석씨 왕이 되었다. 높이 4.5m, 지름 14.3m의 둥글게 흙을 쌓아올린 원형 봉토무덤이다. 주변에 아무런 시설을 하지 않았으며, 겉으로 보아 내부는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으로 추측된다. ※(신라탈해왕릉 → 경주 탈해왕릉)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
경주 탈해왕릉 慶州 脫海王陵 사적 이곳은 신라 제4대 탈해왕57~80 재위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왕은 석씨昔氏로 이름은 ‘탈해’이고, 왕호는 ‘이사금尼師今’이다. 탈해왕은 62세 때 유리왕琉璃王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23년간 재위하였다. 「삼국사기」에는 왕이 다파나국*의 왕과 왕비 사이에서 알로 태어나 불길하다 하여 보물과 함께 궤짝에 넣어 바다에 버려졌다가 신라로 떠 내려와 성장했다는 설화가 실려 있다. 탈해왕이 세상을 뜨자 성의 북쪽인 양정壤井 언덕에서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 능은 경주 금강산 남쪽 자락에 있다. 봉분을 장식한 석물은 확인되지 않는다. 1974년에 내부 구조가 굴식돌방무덤**인 것을 확인하였다. 능의 주변에는 신라 화백회의의 근원이 되는 장소인 표암***과 이를 기리기 위하여 1925년에 건립한 표암재瓢巖齋가 있다. 또한 탈해왕의 제향****을 드리기 위하여 1980년에 현재의 자리로 옮겨 온 숭신전崇信殿도 있다. *다파나국(多婆那國): 신라 건국기에 있었던 나라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 돌을 쌓아 무덤방을 만들어 시신을 넣고, 한쪽 벽 또는 그 벽의 일부에 외부로 통하는 출입구를 만든 뒤 흙으로 덮은 무덤 ***표암(瓢巖): 표암이란 ‘박바위’, ‘밝은바위’를 뜻하는데, 신라 6촌 가운데 알천 양산촌의 시조 이알평이 이 바위에 내려와 세상을 밝게 하였다 하여 표암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기원전 69년 6촌장이 여기에 모여 화백회의를 열고 신라 건국을 의결했으며, 그후 기원전 57년 신라가 건국되었다. 이와 같이 표암은 신라 건국의 산실이고 화백이라는 민주 정치제도의 발상지인 성스러운 곳이다. ****제향(祭享): 각종의 제사 의식(祭祀儀式)을 말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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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舊 사적 제174호[2] 왼편에 보이는 건물이 경주 이씨의 발상지이자 신라시대 화백회의가 열렸던 표암(瓢巖)이며, 오른편에 자리한 건물이 탈해 이사금의 사당인 숭신전(崇信殿)이다.[3] 조선 후기 정부에서 예우 차원으로 옛 신라 왕실 가문들에게 제향을 올릴 왕들의 능묘가 있으면 조상님들 모시는데 보태 쓰라고 토지를 하사하기로 했다. 그래서 이 시기를 기점으로 갑자기 경주 지역에 "○○왕릉"이라고 이름붙여진 고분들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문중들도 나름대로 삼국사기 등 남아있는 옛 기록을 참고하기는 했지만 무열왕릉을 비롯해 정보가 확실한 일부를 제외하면 어느 산 동쪽이다 이 정도의 정보만 가지고 그 쪽에 가서 보이는 왕릉 같은 큰 무덤이 있으면 때려맞추는 정도였다. 그나마 왕릉의 위치가 어느 산 동쪽 북쪽 이 정도라도 쓰여진 건 법흥왕 이후 왕들이지 그 이전 초기 왕들은 그 정도 힌트도 없다.[4] 고분의 양식을 봐선 신라 후기 귀족의 무덤일 가능성이 높다.[5] 마찬가지로 동천동에 있는 헌덕왕릉도 북천의 범람으로 원형이 많이 훼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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