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백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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和白會議

1. 개요2. 설명3. 기타

1. 개요[편집]

2. 설명[편집]

신라의 귀족회의이며 만장일치제로 잘 알려져 있다. 잘 살펴보면 마그나카르타 직후의 영국 의회또는 나무위키 토론와 유사한 점이 많다(…).[1]

초기에는 서라벌의 6개 촌[2]의 우두머리들이 모여서 열었고, 국가의 기틀이 잡힌 후에는 상대등의 주관 하에 대등들이 열었던 회의다. 문제는 진골만 대등이 될 수 있어서 사실상 종친회의로 전락해버린 것이다.《수서(隋書)》와 《당서(唐書)》에 단편적이나마 신라의 화백제도에 관하여 자료를 제시하고 있다.

其有大事, 則聚群臣, 詳議而定之.
큰 일이 있으면 여러 신하를 모아 상의하여 정했다.


수서》 <신라전>


事必與衆議, 號和白, 一人異則罷.
일에는 반드시 여럿의 뜻을 모았으니 화백이라 하였으며 한 사람만 달라도 그만두었다.


당서》 <신라전>

이에 따르면 화백회의는 국가에 중대사건이 있어야 개최되고, 회의의 참석자는 일반 백성이 아니라 군관(群官 혹은 백관百官)이며[3], 또한 단 한 명의 반대자가 있어도 계획이 통과되지 않는, 다수결이 아닌 만장일치로 성립되는 회의체제였다.[4] 이러한 특성을 통해 화백회의가 귀족 사회적인 합의제도임을 알 수 있다.

왕의 시대에 알천공(閼川公)ㆍ임종공(林宗公)ㆍ술종공(述宗公)ㆍ호림공(虎林公)【자장(慈藏)의 아버지이다.】ㆍ염장공(廉長公)ㆍ유신공(庾信公) 등이 남산의 우지암(亐知巖)에 모여 나라 일을 의논하였다.


《삼국유사》 삼국유사 제1권 기이 제1 진덕왕

화백회의를 개최하는 장소는 신라 국내에서 신령스러운 장소로 유명한 4곳을 차례대로 돌아가며 정했는데, 이를 사령지(四靈地)라고 한다. 서라벌을 중심으로 동쪽의 청송산(靑松山), 남쪽의 오지산(亐知山), 서쪽의 피전(皮田), 북쪽의 금강산(金剛山)이었다.

화백회의 초기에는 국왕이 직접 주재를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지증왕대의 포항 냉수리 신라비법흥왕대의 울진 봉평리 신라비에서 에서 확인되고 있다. 하지만 531년에 귀족의 우두머리격 관직상대등이 처음 임명되었고 이 시기부터 왕은 화백회의에서 벗어나고 새롭게 진골 귀족의 우두머리인 상대등이 대신해서 회의를 주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왕의 주재에서 벗어났다고는 하나 당시는 귀족이 위세를 떨치던 사회였으므로 화백회의의 위세도 막강했다. 그래서 국왕직 수행에 하자가 있다고 판단한 진지왕을 퇴위시키는 결정을 하고 실제 실행에 옮기기도 했다. 또한 화백회의의 장(長)인 상대등은 정당한 왕위계승권을 가진 자가 따로 없을 경우 왕위를 계승할 주요 후보자로 여겨졌다. 이후 문무왕, 신문왕 등 신라 중대를 거치면서 왕권이 강해지고 상대등과 화백회의의 위상이 약화되었다가 다시 왕권이 추락하는 신라 하대에 다시 강화된 것으로 여겨진다.

화백회의는 강력한 신권의 상징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귀족 합의제는 후에 고려의 도병마사(도평의사사)에서도 보여진다.

한국뿐만 아니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서도 귀족들의 "만장일치"(리베룸베토)를 중심으로 하는 의회 '세임'이 있었는데, 그러다가 망했다(...). 주변의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 스웨덴 입장에서는 의원 단 하나만 매수해도 폴란드 정계를 올스톱시킬수 있었기 때문이다. 1791년 스타니스와프 2세 때 5.3 헌법이 제정되며 만장일치에서 2/3 다수결 제도로 전환되었는데, [5] 만장일치제라서 헌법을 가결시키는 것도 한 명이라도 반대하면 불가능했다. 그래서 헌법이 가결될 당시 의회에는 국왕의 조카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6]가 군대를 이끌고 들어와 있었다. 그러나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이런 움직임을 경계한 러시아가 간섭군을 보내서 반동 세력을 지원했고, 이미 1차 폴란드 분할때 개입했던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도 끼어들면서 두 번에 걸쳐 추가 분할이 이어졌다. 이를 통해 폴란드 자체가 1795년에 망하며 새로 제정한 헌법도 휴지조각이 됐다.

3. 기타[편집]

경주시에서 이 이름을 따서 전시장경주화백컨벤션센터를 지었다.

3.1. 선덕여왕(드라마)[편집]

주인공 덕만이 추진하는 조세개혁이 화백회의를 통과해야 하는데 화백회의의 대등들은 모두 대귀족들이라 조세개혁에 찬성할 리가 없었다. 더구나 대등 10명 중에 2명은 덕만파라 설득할 수 있다 쳐도 나머지 8명은 미실파였다. 그래도 중소귀족들의 조세개혁 열망이 높아 눈치는 보였는지 미실파가 꼼수를 썼는데, 만장일치제인 화백회의의 특성을 악용하여 조세개혁안을 찬성 9, 반대 1로 부결되도록 만들어 덕만파를 제대로 엿먹였다.(...)

그러자 덕만이 또 한 가지 안건을 내놓는데 만장일치제인 화백회의를 다수결로 바꾸자는 것이었다. 물론 덕만파 2명만 찬성해주고 나머지가 반대해서 이는 부결. 덕만도 이를 예상했지만 화백회의 무용론을 중소귀족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 나름대로 성과였다고 덕만은 생각했다. 그러나 나중에 덕만을 만났을 때 미실은 덕만이야말로 화백회의의 수혜자라는 사실을 역설한다. 만약 다수결 체제에서 '덕만공주가 정무에서 손을 떼게 한다'는 안건이 나오면 대등 10명 중 미실파가 8명이므로 덕만은 어찌할 방법이 없다. 그나마 만장일치제에서는 덕만파가 2명 있어서 이걸 막을 수 있다는 것. 덕만도 이를 딱히 반박하지 못한다.

[1] 이게 왜 중요하냐면, 한국은 초기부터 신권이 왕권보다 오히려 강했다는 사실을 말해주기 때문. 조선시대까지도, 아니면 전근대적인 시점이긴 하지만 대통령을 왕으로 본다면 현대까지도 기나긴 역사 속 사건의 상당 부분은 왕권과 신권의 힘겨루기로 인해 발생했다. 사실 대부분의 나라들에서 왕이 절대적인 권력을 누린 경우는 많지 않았다. 중국은 명나라 이전까지도 지방 군벌들에 의해서 중앙 권력이 와해되어 아에 전국토를 다스리는 황제라는 직위 자체가 날라가 버린 경우도 많았다. 그리고 일본의 경우도 전국이 지역별로 쪼개졌던 전국시대는 말할 것도 없고 에도 막부 이후에도 봉건제의 틀을 유지했으며 유럽의 절대왕정도 근대 이전에서야 성립이 된다.[2] 이씨의 양산촌, 최씨의 고허촌, 정씨의 진지촌, 손씨의 대수촌, 배씨의 가리촌, 설씨의 고야촌[3]귀족 독재정.[4] 단 한번의 예외가 있었는데 경순왕의 고려에 대한 항복 결정이다. 반대하는 의견이 만만치 않았음에도 경순왕은 고려에 항복하고 말았다. 만일 신라가 항복하지 않고 고려에 대항하였다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5] 그 외에도 입헌군주정, 세습군주정, 국왕의 자유도시, 종교의 자유, 귀족에 대한 과세, 귀족들이 농민들을 자의적으로 재판하지 못하게 하는 것, 농노제를 소작제로 전환 등등이 포함 되어 있었다.[6] 후에 나폴레옹의 휘하에서 싸우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한 폴란드의 성웅. 나폴레옹의 26인 원수 중 유일한 외국인이며, 그에 걸맞는 활약을 펼쳤다. 그러나 결국 1813년에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어이없이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