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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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新羅

파일:신라기.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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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발[1]

인장

파일:신라의 지도 (진흥왕 시대).png

6세기 무렵 영토[2]

기원전 57년 ~ 기원후 935년 (도합 992년)

건국

기원전 57년 6월 8일
(갑자년 음력 4월 병진[3]일)

국호

사로[4]신라[5]

위치

한반도 동남부 → 한반도 중부 · 남부

수도

서라벌

소경

중원경(충주) · 북원경(원주) ·
서원경(청주) · 남원경(남원) ·
금관경(김해)

정치 체제

군주제전제군주제

국가 수반

거서간[6]
차차웅[7]
이사금[8]
마립간[9] / 매금[10]
[11][12]
황왕[13][14]

국성

· ·

언어

신라어[15]

종족

한민족[16]

종교

토속 신앙 → 불교

1. 개요[편집]

천년 왕국[18]

고대 한반도에 존재했던 국가. 《삼국사기》의 서술에 따르면 고대 한반도에 존재한 삼국건국 시기가 가장 빠르다.[19] 현대 한국어신라어를 기반으로 하며[20][21], 현대 한반도의 지명들 역시 다수가 이 나라 시절 붙여졌다.[22]

2. 국호[편집]

세계의 신라 국호

한국어

신라(新羅)
의미는 '덕업일사방 : 德業日四方’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이 말 뜻은 다음과 같이 풀이된다.
金富軾, 三國史記 卷4 新羅本記 第1 智證麻立干 "四年, 冬十月, 群臣上言, 始祖創業已來, 國名未定, 或稱斯羅, 或稱斯盧, 或言新羅, 臣等以爲, 新者德業日新, 羅者網羅四方之義, 則其爲國號宜矣, 又觀自古有國家者 皆稱帝稱王, 自我始祖立國, 至今二十二世, 但稱方言, 未正尊號, 今群臣一意, 謹上號新羅國王, 王從之"
김부식, 삼국사기 4권 신라 본기 지증왕 4년 10월에 군신(羣臣)이 말하기를, "시조께서 나라를 세운(創業) 이래로 나라 이름이 일정치 아니하여 사라(斯羅), 사로(斯盧), 신라(新羅)라 하였으나, 신(臣)들은 생각건대 '신'(新)은 덕업(德業)이 날로 새로운 뜻이요, '라'(羅)[23]는 사방을 망라한다는 뜻이므로, 그것으로 국호(國號)를 삼는 것이 좋을 듯하오며, 또 생각건대 자고로 국가를 가진 이가 다 제왕(帝王)이라 칭하였는데 우리 시조가 건국한 지 지금 제22대에 이르도록 단지 방언(邦言)으로 칭하여 존호(尊號)를 정하지 아니하였으니 지금 군신(羣臣)은 한뜻으로 삼가 신라국왕(新羅國王)이란 존호를 올리옵니다"고 하니, 왕이 거기에 좇았다.

다만 실제로는 '신라'라는 이름은 그 이전부터 존재하였다. 고구려와 함께 '신라'가 전진에 377년과 381년에 <자치통감> 등에서 기록되어 있고, 당대 사료인 광개토왕릉비에도 신라가 이미 등장하고 있다. 이 의미 풀이는 원래 존재하던 고유어를 한자로 표기하려는 과정에서 음도 의미도 적절한 한자를 찾아서 유교적인 해석을 끼워 맞춘 것이고 이전부터 사용되던 '신라'라는 이름을 유일한 공식 명칭으로 규정한 것으로 추정되며, 지증왕 대에 국호를 통일하기 이전까지는 사로, 사라 등 다른 표기를 혼용했다.

신라 이전에 불렸던 이름들은 걸의식국(乞衣食國), 비집기국(飛集基國), 시라(尸羅), 사라(斯羅), 시림(始林), 유계(有鷄), 계괴(鷄怪), 계림(鷄林)[24], 서야벌(徐耶伐), 서라벌(徐羅伐), 유잠국(有蠶國) 등으로 불렸는데, 이들 모두 가운데 일부가 누에치기와 관련된 이름들이라는 특이점이 있다. 일본에서 발견된 민정문서에서도 유달리 뽕나무 재배 수량이 많아 신라가 전통적으로 누에치기와 관련이 컸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에 관한 이름도 많은데 실제로 신라 건국설화에는 계룡이 등장한다.

중국어

신뤄(Xīnluó)

일본어

시라기(しらぎ) 혹은 신라(しんら)

초기부터 일본과 거리가 가깝고 서로 많이 얽혔던 관계라 백제를 쿠다라로 읽는 것과 같이 신라를 읽는 법이 따로 존재한다. 시라기는 일본서기의 훈을 따른 것이다. 때론 しんら, 즉 한국어 독음과 유사한 '신라'로 읽기도 하는데 이건 한자 新羅를 현대 일본어식으로 음독한 것으로 다만 한국어에서 신라를 읽을 때는 자음동화 현상으로 실제로는 저절로 '실라'라고 읽게 되지만 일본어로 しんら를 읽을 때는 실라가 아닌 '신'라 그대로 읽는다.

아랍어

알실라(Alshillaالسيلى) [25]

페르시아어

베실라(Beshilla), 바실라(Bashilla)

통일 신라 시기에는 아랍페르시아 사람들이 신라를 찾은 이후 아랍 문헌에선 신라의 국호가 '알실라(Alshillaالسيلى)', 페르시아 문헌에선 '베실라(Beshilla)' 등으로 표기됐다. 2010년 말 한국에 그 정체가 알려진, 신라에 관한 내용이 풍부한 페르시아의 대서사시 쿠쉬나메( کوش نامه, Kush Nama)에선 신라의 국호가 '신라(Shilla)' 또는 '바실라'라고 나타난다.

영어

SILLA/SHILLA

라틴어

SELLA [26]

인도

구구탁예설라(矩矩托禮說羅)

만주어

solho(솔호) / solongos(솔롱고스)

몽골어

Солонгос(솔롱고스)

3. 독자적 연호[편집]

신라는 한반도에 존재한 나라들 중 가장 오랜 기간 동안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한 국가이다.

신라의 연호

건원(建元)

법흥왕 ~ 진흥왕 (536년 ~ 551년)

개국(開國)

진흥왕 (551년 ~ 567년)

대창(大昌)

진흥왕 (568년 ~ 572년)

홍제(鴻濟)

진흥왕 ~ 진평왕 (572년 ~ 583년)

건복(建福)

진평왕 ~ 선덕여왕 (583년 ~ 634년)

인평(仁平)

선덕여왕 ~ 진덕여왕 (634년 ~ 647년)

태화(太和)

진덕여왕 (647년 ~ 650년)

4. 신라/역사[편집]

5. 사회[편집]

신라는 같은 삼국시대고구려, 백제에 비하면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 및 정착한 시기가 늦은 편으로 보인다. 나라를 세운 성씨 집안이 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왕위를 차지하는 등 왕실 세력이 일정했던 고구려백제, 발해고려, 조선과 달리[27] 신라는 건국 초기 박씨, 석씨, 김씨 등 서로 다른 성씨 집안 사람이 서로 번갈아 왕위를 이었다. 삼국 시대 중기 내물 마립간 이후 김씨 왕조에서는 고구려의 문화가 전파되는 동시에 불교를 장려하여 중앙 집권 국가가 되는 것에 힘썼다.
신라는 옛부터 왕을 "간"또는"간지"라고 불렀으며 간지라는 단어로부터 칸(khan)이라는 단어가 파생되었다고도 보이며, 동북아에서 칸(khan)이라는 단어가 기록상 가장 먼저 나오는 국가가 신라이다.거서간,마립간같은 단어를 사용하다가 동아시아에서 여러 민족들이(선비족,저족,왜인등등) 한자를 사용하는게 유행하는 추세에서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한다.

5.1. 골품제[편집]

신라에는 혈연에 따라 사회적 제약이 가해지는 신분제인 골품제가 있었다. 신라의 골품제가 유명해서 그렇지 백제고구려를 비롯한 고대 왕국들은 대부분 골품제와 유사한 폐쇄적인 신분 제도가 있었다. 신라가 멸망한 지 한참 뒤인 고려 시대까지도 옛 신라 출신 귀족들은 골품으로 서로를 텃세하며 같은 골품끼리 파벌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는 점을 볼 때, 신라에서 골품제의 전통이 얼마나 강했는지 알 수 있다. 다만 그렇게 서로 텃세해도 경순왕 귀부 전에 고려에 진출했던 6두품에 비교해 상당히 입장이 약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나말 여초에 발달한 전기 소설 가운데 김현감호(金現感虎) 조신(調信) 수삽석남(首揷石枏)」 등이 있는데 이것엔 신분간의 대립이 보이는 중에도 상층의 사고 방식과 말이 하층의 사고 방식이나 말과 활발히 교류하거나 뒤섞이는 특징이 보인다는 점은 흥미로운 사실이다.

5.2. 관직[편집]

신라 중앙 정치는 귀족들의 합의 기관인 화백회의의 의장인 상대등과, 국왕 직속의 행정 기관인 집사부의 장관인 시중의 대립으로 대표된다. 귀족들의 세력이 강할 때는 귀족의 대표자라고 할 수 있는 상대등이 강한 권력을 지녔고, 왕권이 강할 때는 왕의 최측근이라 할 수 있는 시중의 권력이 막강했다. 일반적으로 신라 초기에는 상대등이 중기에는 시중이 후기에는 다시 상대등의 권력이 강화되는 추세를 보인다.

서열

관직명

성골

진골

6두품

5두품

4두품

중시령

시랑, 경

도독

사신

군 태수

현령

1

이벌찬

2

이찬

3

잡찬

4

파진찬

5

대아찬

6

아찬

7

일길찬

8

사찬

9

급벌찬

10

대나마

11

나마

12

대사

13

사지

14

길사

15

대오

16

소오

17

조위


신라관직골품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17등급으로 구성되어 있고 골품에 따라 골품 당 최대한으로 승진할수 있는 등급이 제한되어 있었다. 진골은 1등급인 이벌찬까지 오를 수 있으며, 6두품은 6등급 아찬, 5두품은 10등급인 대나마, 4두품은 12등급 대사까지만 승진이 가능했다. 각부의 장관급 인사라고 할 수 있는 령(令)은 5등급인 대아찬 이상부터 오를수 있었으니 사실상 진골만이 이 지위를 획득할수 있었고 각부의 차관격인 경(卿)은 11관등에서 6관등의 사람, 즉 진골과 6두품만이 오를 수 있었다.

17관등 위에 특별직인 대각간, 태대각간이 있었다. 1등급 각간(이벌찬의 다른 이름)에 대 자를 붙여서 높인 것.

태봉후백제, 그리고 고려도 초기에 잠깐 동안 신라의 관등 체계를 가져다 쓰거나 조금 변형해서 쓰기도 했다. 물론 이쪽은 골품제는 적용되지 않은 듯.

5.3. 화랑[편집]

신라는 청소년들을 화랑도에 귀속시켜 국가적 인재 양성을 꾀하였다. 대체적으로 고위급 자체들이 화랑이 되고 하위 골품의 인원들이 낭도가 되어 따르는 방식이었으며 이들은 유명한 과 큰 을 찾아다니며 제천의식을 행하고 사냥전쟁, 유불선 사상을 학습하면서 국가의 인재들로 성장하여 삼국 통일의 중요한 축으로 자리매김했다. 다만 통일 신라기엔 그 과정에서 옛 백제나 옛 고구려 지역으로 쏘다니던 화랑들이 지역 사회에 민폐를 끼치는 현상이 일어났고, 화랑들이 딱히 옛 백제 유민이나 고구려 유민 등을 괴롭히려고 그랬던 건 아니었지만 이들의 뒤치다꺼리를 하던 지방민들은 결국 반신라 감정을 키우게 된다.[28]

6. 언어[편집]

현대 한국어의 뿌리는 고조선부터 시작해서 진국과 마한, 변한, 진한 그리고 신라와 고구려 그리고 백제와의 언어 교류 그리고 통일 신라에서의 융화로 인해 형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한가지 자료를 들자면 《일본서기》에 신라어가 하나 기록되어 있다.일본서기에 의하면 왜의 장수가 신라군에게 패하고 신라 장수와 맞닥뜨렸으나 그 왜장은 훌륭한 말을 타고 있어서 성의 해자를 뛰어넘어 도망칠 수 있었다. 신라 장수가 성의 해자에 이르러 탄식하면서 "구수니자리(久須尼自利)"라고 말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일본서기》 본문에도 '신라어를 그대로 적은 건데 뜻은 모른다'라고 부연되어 있다. 鬪將臨城洫而歎曰 久須尼自利 (此新羅語 未詳也) "신라 장군이 성의 해자가에 서서 “久須尼自利” (이는 신라말로 자세하지 않다) 라고 탄식하였다. 일본서기 562년 7월 아무래도 다 잡은 적장을 놓쳐서 탄식하며 한 말 일 테니 뭔가 아쉬움의 표현일 가능성이 높겠지만 다른 말일 수도 있을 것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일본서기 등을 보면 백제어고구려어,신라어는 같은 계통의 언어였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일본서기 비다츠 천황조에 의하면 백제어는 왜국어(고대 일본어)와 언어가 통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기본적으로는 삼한 계통의 국가였고 고조선계 유민들이 남하해왔기 때문에 조선(고조선)과 부여가 기본적으로 같은 종속이었다는 걸 감안하면''' 백제와 고구려 신라의 언어는 같았을 가능성이 높다. 어쨌거나 삼국유사나 해동고승전에 고구려와 신라 간의 기록을 보면 서로 간에 대화가 어렵지 않게 통한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삼국사기의 인명 자료에도 고구려와 신라의 것이 같다는 이유로 일본 학자 중에서도 고구려와 신라가 방언상 차이는 크지만 서로 언어가 통했을 거라고 추측하는 사람들이 있다.

부여어족을 일본어족과 연결시키는 게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 게 정작 당대 기록을 보면 고구려 약광왕 관련 사료만 봐도 고구려인들은 왜국인(일본인)들을 자신들의 동족이라 여기지 않았다는 기록이 대놓고 나온다. 그리고 일본서기나 속일본기 기록만 봐도 백제어를 일본어와 연결시키는 걸 대놓고 부정하는 기록이 나온다. 일본 내 사서들부터가 부여어족은 왜국과 다른 계통의 언어였다는 걸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비록 언어 동조대적 개념에서 고구려, 백제의 영향을 받은 언어적 어휘가 많이 전파되기는 했으나 부여어족과 일본어는 계통이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놀라운 건 일본서기 내에 나오는 가야어의 발음도 현대 한국어와 유사한 부분이 많다는 것이다. 가아야에서도 국가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현대 한국어와 동일한 '나라' 라고 표현하고 백제어에서도 곰을 뜻하는 단어로 고마, 곰, 고무 등이 있었다. 거의 똑같다. 고구려어나 가야어에서 '아래 (방향어)' 를 가리키는 단어로 아리라고 하여 현대 한국어의 아래와 발음의 굉장히 유사하다.

백제의 언어 경우 이기문 박사가 백제어가 계층별로 달랐다고 주장하나 삼국사기, 삼국유사나 일본서기 기록 등을 보면 이는 근거없는 주장일 가능성이 높다. 단지 건길지나 어라하 등의 칭호가 달랐다고 언어가 다르다고 할 근거는 없다. 조선 시대 때 신하들은 왕을 전하라고 부르고 일반 백성들은 임금님이라고 불렀다고 조선의 언어는 계층별로 달랐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더군다나 일본서기에서는 백제계 귀족들도 백제왕을 건길지에 해당하는 코니키시라고 부른다. 단순히 호칭상의 차이일뿐 이런 게 언어가 달랐다는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

일본서기 인명만 봐도 아직기, 아화 등을 아지키, 아콰 라고 표기하고 있다. 현대 한국어와 크게 차이가 없다는 게 놀랍다.

고구려, 백제, 가야언어가 이렇게 현대 한국어와 유사성을 보이는데 신라가 이들과 언어가 달랐을 거라 생각하기 힘들다. 더군다나 수서 동이전 신라전에서는 신라고구려, 백제의복이 같고 풍속도 같다고 한다. 의복도 같고 풍속도 같은데 언어가 다를 가능성은 낮다.

고구려는 부여에서 나왔고 백제도 부여계이며 마한과 변한, 진한으로 나뉜 진국도 고조선에서 나왔다.

백제어와 신라어가 같은 계통 언어였다는 건 삼국사기, 삼국유사보다 일본서기 내에 더 자세하게 나온다. 당시 일본은 백제, 신라 등 한반도의 국가들과는 언어가 통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경우도 한국어 계통으로 추정되는 고대 언어들과 퉁구스 제어가 통하지 않는다고 일관적으로 기록되어 있고 일본어의 경우도 한국어 계통의 고대 언어들과 표기상 차이가 분명하게 나타난다.

중국 사서들에 의거해도 고구려, 백제와 신라 간에도 언어가 통한 기록이 있다.

6.1. 경제[편집]

구릉과 산지가 많은 한반도 북부와 달리 남부에는 비록 산지가 많았지만 농사에 적합한 기후에 산과 산 사이로는 평지가 많았고, 결정적으로 신라의 거점이었던 경주에는 거대한 하천인[29] 형산강이 있어 울산에서 경주까지 형산강을 중심으로 광범위한 농경지가 형성되었다. 그래서 성립 초기부터 안정적으로 농업에 의존하며 세력을 형성하였고, 진흥왕 시기에는 한강 유역과 한반도 중부를 차지하여 막대한 농경지를 얻어 삼국 통일 이전부터 삼국 중 가장 많은 주요 농경 지역을 차지한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경기 지역과 경상도 지역은 현재에도 마찬가지지만, 벼와 곡물 생산지로 유명했다.

한강과 형산강을 중심으로 대규모 하천과 평야 지대를 많이 접한 신라였기에 농업 용수를 공급하고 관개 설비를 정비하며 논 농사가 수월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정확한 전체 농토 중 논과 밭이 어느 정도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통일 신라 시기를 다룬 행정 자료인 신라 촌락 문서에 기재된 촌락의 논과 밭의 비중은 논은 102결, 밭은 62결 정도로 밭보다 논이 더 많음이 확인된다. 물론 아직까지 전체적인 논과 밭을 다룬 토지 자료가 발굴된 적은 없기 때문에 전체 농토의 논 / 밭 비중이 어떠한지는 확실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논 / 밭의 비중과 별개로 농토의 공 / 민유지는 전체논의 10% 미만 정도가 국유지 내지는 관유지이고 나머지 90%는 농민들의 농토로 보인다.

농토의 크기는 결과 부, 속 등으로 그 규모를 표기하였는데, 이것이 조선 시대 결부의 개념처럼 농지의 생산력을 기준으로 한 것인지 절대 면적을 기준으로 한 것인지는 불분명하나 이 기준에 따라 조세를 부과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농토를 둘러싼 농민들의 소유 형태는 정전제를 볼때 오늘날 사유 재산의 개념처럼 온전히 백성의 사유지라기 보다 땅의 소유권은 전적으로 왕에게 있고 농민들은 그땅의 경작권만을 부여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땅을 파는 매매나, 땅을 담보로 하여 자금이나 물자를 빌린다거나, 땅의 소유권 등을 등기하는 것 등이 이루어졌는지, 이루어졌으면 오늘날처럼 자유롭게 이루어졌는지는 불분명하다.

정전제가 실시되었지만, 신라 말기에 호족 세력이 궐기한 점이나, 전체적으로 귀족의 경제력이 튼튼한 점 등 전체적으로 지방 유력가들이 막강한 권력을 누리고, 주변국의 상황도 비슷하였던 점을 미루어 볼 때, 외부의 도움이나 간섭없이 자기 땅을 경작하는 자영 농민보다 서구 농노나 조선 시대 노비나 조선 초기 전호들처럼 자기 논밭이 있지만, 휴경 등의 이유로 자신의 논밭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하기 힘들어, 귀족의 논밭을 경작해주는 대가로 식물의 종자나 대형 농기구를 빌리는 형태의 장원(농업) 경작이 이뤄졌다고 추정된다. 물론 통일 신라나 내외부적으로 전쟁이 줄어든 시기에 한정된 이야기이고 외부로의 세력 확대나 주변국의 침입, 전쟁이 빈번하던 삼국 초기에는 휴경기에 귀족의 논밭을 경작하기보다 농민들을 전쟁터에 내보내는 일도 많았을 가능성도 있다.

그 밖에 신라 촌락 문서를 살펴보면, 토지와 주택, 주거지의 규모, 가축과 임목의 숫자와 종류까지 정확히 파악하여, 인구의 증감, 재산의 증감을 아주 정확하게 살펴보고 있다. 농업 용지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후대에도 있었던 공통적인 사항이지만, 가축의 수를 정확히 파악하고 특히 농업용 가축이 아닌 말의 숫자를 파악하여 전쟁이나 군사적인 목적으로 상시 동원하고 관리할 체계를 갖추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도 산림 지역을 무주 공산으로 방치해 전국에 민둥산을 양산했던 조선 시대와 달리 산림의 나무를 심고 가꾸는 것까지 개수와 수종을 정확히 파악하고 관리하는 것이 확인된다. 해당 문서나 다른 자료에서 신라의 수공업이 어느 정도였는지 기록하고 있는 것이 부족하여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수공업 자재의 일종으로 수천그루의 나무를 집중적으로 육성한 것으로 보아 비단 생산이나 목공을 위한 대규모 공업 시설이나 수공업 체계의 존재 등이 추정되고, 전성기 신라의 수도 경주에 대한 기록에서 으로 요리를 하며 사치를 누렸다는 것이 등장하는데, 체계적인 임목 관리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땔감이나 목재의 공급이 안정적이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특히 문서에서는 전체 임목 중 뽕나무 재배 수량이 유달리 많은데, 촌락 문서에서 다루는 대상이 뽕나무 육성에 특화된 마을인지 아니면 신라가 전체적으로 뽕나무 육성에 주력하였는지는 이 시기 행정 자료가 촌락 문서 하나 뿐이라 더 상세히 알 수는 없다. 그런데 신라라는 나라 이름의 라(羅) 자체가 비단이라는 뜻이 있고, 이 촌락 문서가 작성되기 한참 이전인 삼국 통일 이전, 신라라는 국호가 지증왕 대에 확정되기 전부터도 유잠국(有蠶國) 같은 누에치기와 연관이 깊은 이름을 썼던 기록이 있어서 원래 신라가 뽕나무 및 누에치기에 국가적으로 관련이 컸을 가능성이 있다.

뽕나무는 보통 뽕잎이 누에의 먹이로써 비단 생산을 위한 필수적인 수단이었고, 뽕나무 자체가 활과 화살통을 만드는데 주요한 재료였다는 점, 나뭇잎이 넓은 활엽수는 비록 나무 전체의 크기가 크지는 않지만 목질이 단단하여 가구재로서 적합해 수공업이나 공업용 재료로서 적합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촌락 문서의 뽕나무 재배 수량이 많은 점은 상공업을 위해 육성한 것으로 보인다. 뽕나무 항목에서도 살펴볼 수 있지만, 열매 채집 시기가 모를 심는 농번기와 겹치고, 뽕나무를 심으면 그 주변에 뿌리를 내려 다른 작물의 식생을 방해하므로 보통 농지와 멀리 떨어진 늪지나 습지 혹은 외곽에 심는다. 그러므로 농업을 보조하거나, 도와주기에 적합한 수목은 결코 아니다.

수공업 면에서는 신라는 자가 생산 자가 소비를 위한 농촌 가내 수공업 외에 귀족이나 왕족을 위한 소비 재화를 만들기 위한 수공업자들이 존재하였는데, 국가 권력의 통제에 따라서 장인의 신분도 등급별로 나뉘어 골품을 하사받는 기술자가 있는가 하면, 부역에 동원되어 기술 노역만 제공하는 사람, 그외에 왕실 수공업을 위해 노비들이 대거 동원되기도 하였다. 시장에 관한 기록은 지방에 있는 시장보다 수도 위주로 언급되는 것이 대부분으로 관영이나 사영 기술자들의 생산품은 주로 귀족들이나 왕족들의 사치품이나 소비재를 생산하는 경우가 많았고, 백성들의 생필품 등은 농촌의 가내 수공업에서 자체적으로 생산하고 스스로 소비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체계적인 산업의 형태를 띄지는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밖에 국가의 인력 동원 체제 등을 문서에서 살펴볼 수 있는데, 구체적으로 정남은 20세 이상의 장정으로서 국가로부터 구분전(口分田)을 받고 요역(徭役)에 참가하는 사람, 조자는 정남을 도울 15세 이상의 남자, 제공은 요역을 면제받은 60세 이상의 연령층, 노공은 70세 이상의 노인 등으로 보인다. 또 호(戶)의 기준은 상상(上上)에서 하하(下下)까지로 나누었는데 그 구분은 인정(人丁)의 많고 적음에 따랐던 것 같다.

6.1.1. 무역[편집]

초기에 신라는 지리적으로 한반도 동남부에 위치해 있었고, 북쪽은 고구려, 서쪽은 백제, 남동쪽은 왜가 있어 국제적인 흐름이나 교류에 뒤쳐져있고 불리한 입장이었다. 그렇지만 5세기의 것으로 보이는 토우(흙 인형) 중에 코끼리, 원숭이의 모습을 본딴 것들이 출토되고 있으며[30] 다만 개미핥기와 비슷하게 생긴 은 동남아에도 서식한다.동유럽 불가리아에서 만들어진 신라 황금보검이나 로마 제국유리로 제작된 국보 제193호 유리병, 보물 624호 유리잔을 비롯해 황남대총 등에서 서역산 공예품이 말 그대로 쏟아졌기에, 외부 세계와의 교역은 이미 삼국통일 이전에도 활발히 계속되고 있었다.

통일신라의 경우 8세기까지는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공무역이 주축이 되었지만 9세기 이후 신라, 당, 일본 3국의 중앙 집권 체계가 약화되면서 민간 무역이 성행하였고 장보고등의 해상 세력은 당나라 산동 지역 등에 설치된 신라방 등을 통하여 활발한 민간 무역을 행하였다. 후에 무역으로 부력을 갖춘 호족들의 약진은 후일 호족들과 함께 후삼국 시대의 중요한 축으로 작용하였다.

당과의 무역에서는 초기에는 원자재나 지역 특산품을 수출품으로 내세우는 경우가 많았으나, 이후에는 비단 공예품과 금속 수공업품의 비중이 늘어나 신라 촌락 문서에서 대규모 뽕나무 숲을 육성한 것 역시 비단 생산을 위한 목적이 큰 것이라고 추정되고 있다. 공무역으로는 주로 금, 은, 우황, 인삼 등을 수출하고 당에서 비단과 당삼채 도자기 등을 수입했다. 삼국사기 잡지에 기재된 각종 외래 사치품은 주로 사무역을 통해 들여온 것으로 보는데 목도리, 중앙 아시아산 에메랄드로 상감한 빗과 모자, 바다 거북 껍데기로 만든 빗, 페르시아산 카페트 등이 있었다. 매신라물해 등 일본 기록에 남아있는 일본으로 수출하는 물품으로는 신라금(琴, 악기), 신라도((新羅刀, ), 구리 그릇 등이 있었다.

다만, 중국과 달리 화폐 제도는 민간에서는 본격적으로 자리잡지 못하여, 아직까지 물물 교환이 일상적이었다. 보통 거래의 결제 수단은 견포 즉 옷감으로 국가에서는 화폐로서 견포의 기준을 통일하기 위해 길이를 조정하고 정리하는 정책을 펼치기도 하였다.

6.2. 행정구역[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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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행정구역9주 5소경으로 대표된다. 9주 5소경 문서 참조.

통일 신라 이전 시대의 행정 구역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는데, 아직 신라의 영토가 경상도 일대에 영토가 머물러 있던 지증왕대인 514년에 지금의 함안군에 아시촌소경을 설치하고, 진흥왕 대 557년에는 충주에 국원소경을 설치한 기록이 있는 등 주(행정구역) + 소경식의 비슷한 행정 구역 체계는 삼국 통일 이전에도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7. 문화[편집]

7.1. 문학[편집]

한자가 주 문자 생활에 사용되었고 설총, 강수, 최치원 등의 유학자들이 활동하였으나 이들의 문학이 현재까지 전해지는건 그리 많지가 않다. 또 한자가 어렵고 고대 한국어와는 맞지 않는 부분도 많았기 때문에 이두(吏讀) 또는 향찰(鄕札), 방점, 서기체 등 한자를 이용해 한국어를 좀 더 정확하게 표기하려는 시도가 생겨나고, 그에 따른 문학도 발생한다. 또한 신라 하면 향가를 빼놓을 수 없다. 진성 여왕 때 편찬된 《삼대목(三代目)》에 향가를 모았으나 전해지지 않고 《삼국유사》등 몇몇 책에 향가의 일부가 전해지고 있다. 그 외에 통일 신라 대에는 중국한시도 유행하여, 중국 본토에서도 필력에 대한 평가가 높았던 최치원이 자신이 지은 시들을 고국에 소개하기 위해 요약 정리한 계원필경 등이 지금까지 전한다.

7.2. 미술[편집]

파일:/image/011/2009/12/01/jaharang200912012134430.jpg|파일:/image/011/2009/12/01/jaharang200912012134432.jpg
적외선 촬영된 천마총 기마 인물도와 서조도(瑞鳥圖)

  • 공예로는 굽다리(고배)양식의 신라토기가 유명하며 토우역시 예술성이 높다.

7.3. 음악[편집]

신라 대의 작곡가로 우륵, 백결선생이 유명하다.

김부식은 가야금, 거문고, 비파를 신라삼현(新羅三絃)으로 소개했다. 가야금은 이름대로 원래 가야(대가야, 반파국) 지역의 악기인데, 가야를 정복한 진흥왕이 가야인 악사 우륵을 우대한 계기로 신라에 전해져 발달했다. 우륵은 고향 가야 지방의 지명들을 딴 12개 곡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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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출처는 histopia, 사진의 원출처는 일본 정창원 홈페이지


현대의 가야금의 원류가 되는 신라 시대의 가야금이 일본정창원에 한 기가 보존되어 있는데, 일본에서는 이 악기를 신라금(新羅琴, 시라기고토)라고 부른다. 850년 11월에 이 시라기고토를 일본 궁중에서 연주하는 데 사용했다고 한다.[34]

거문고는 원래 고구려 지역의 악기였는데, 삼국 통일 과정에서 고구려 유민들이 신라에 들어오면서 도입되었다. 경덕왕 때 거문고의 대가 옥보고(玉寶高)가 거문고를 위한 새로운 노래 30곡을 짓고 신라 땅에 거문고를 보급했고, 이후에도 속명득(續命得)과 귀금선생(貴金先生)이 거문고의 대가로 활동했다.

비파는 당나라에서 들여온 악기이나 현을 바이올린 현 비슷한 철현을 쓰는 중국 비파와 다르게 독자적으로 발전시켰고 이후 시대에도 한국의 대표적 악기로 전승됐다.

신라의 음악은 정작 한반도보다 기록이 풍부한 중국, 일본 기록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다. 중국에서는 수나라 궁중에서 신라 음악이 연주되었는데, 신라기(新羅技)라 했다. 당나라 때도 진평왕이 여악(女樂) 두 명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어, 당나라 때도 신라 음악의 당나라 궁중 연주가 이뤄졌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일본에서도 신라 음악이 종종 공연됐는데, 453년에 80명이 연주한 것이 최초고 561년, 684년에도 관련 기록이 있다. 대보율령(大宝律令), 일본후기(日本後紀)에 따르면 통일신라 때도 신라 악사들이 소수 파견되어 악기 연주와 춤을 일본에서 가르쳤다고 한다.



일본의 악보 인지요록(仁智要錄)에 수록된 신라릉왕(新羅陵王, しんらりょうおう)이라는 아악 노래의 복원 연주 영상이다.

7.4. 건축[편집]

목조 건축 문화권이었던 한국에서 고대의 건축물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지만, 그나마 신라의 경우 안압지에서 온전한 건축 자재가 대량 발굴되기도 했고 문헌 기록도 그나마 더 많아서 알 수 있는 것이 많다. 국왕이 사는 궁전경주 월성이었으며, 문무왕삼국통일 이후 동쪽으로 궁전을 확장한 것이 동궁과 월지(구 안압지)이다. 이외에 일제강점기 이전 전 근대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던 황룡사 9층 목탑이 유명하다.

7.5. 역사[편집]

545년 진흥왕거칠부를 시켜 국사(國史)라는 역사책을 편찬했다. 삼국유사에도 《국사(國史)》 고려본기(高麗本紀)에서 인용한 글들로 있는 것으로 보아 신라 뿐 아니라 고구려나 백제를 포함해 주변 다양한 국가의 역사를 기록한 내용인 것으로 보인다. 이를 보아 삼국유사가 작성된 고려 시대 후반 원 간섭기까지는 국사의 원본이 존재했으나 이후에 실전되어 현전하지는 않는다. 삼국통일 후에도 정사를 편찬했을 법 한데 관련 기록이 없어 확실히 알 수는 없고, 8세기경 김대문이 계림잡전, 고승전, 한산기, 악본, 화랑세기 등을, 9세기에는 최치원제왕연대력이라는 역사서를 편찬했으며 이 책들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으나[35] 많은 내용이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쓰는 데 인용되었다.

7.6. 종교[편집]

7.6.1. 고유 토착신앙[편집]

신라는 불교의 원조 인도나 중간 경유지 중국에서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백제고구려에 비해 불교의 도입 시기는 비교적 늦은 편이었고, 그 전에는 박혁거세알영부인, 김알지 설화 등에서 짐작할 수 있듯 하늘의 신이 내려왔다는 천신 탄강을 골자로 하는 토착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특정 지역을 신성한 성지로 숭상하는 문화가 있었으며[36] 골품제의 근간이 되는 선민사상을 가지고 있어 외래 종교인 불교가 처음 전해졌을 때도 반대가 컸다.

신라의 자체적인 국가 신앙 시설로 신궁(神宮)이 있었다. 신라 김씨 왕조 조상들을 기리는 유교적 종묘 체계인 5묘와는 별개로 운영됐다. 신라 왕이 새로 즉위하면 즉위 초기에 신궁에서 크게 제사를 지내는 것이 신라의 관례였으며, 신궁에서 제사지낸 주신의 정체에 대해서는 이설이 많은데, 김씨 왕계 시조를 기리는 시설은 따로 있었기 때문에 신궁은 박혁거세설이 좀 더 일반적이다.

7.6.2. 불교[편집]

불교는 초기 미추 이사금, 눌지 마립간, 소지 마립간 때 일단 전해졌고 흥륜사 같은 절이 왕의 허가로 겨우 초가집 수준으로 지어지기도 했지만 결국 박해 속에 끝났고, 비로소 법흥왕이차돈순교와 불교의 공인 이후 급속도로 불교 국가화되었다. 신라 불교의 특징은 개개인의 구제보다는 국가의 발전을 비는 호국 불교의 성격이 매우 강했고, 인왕경이나 법화경 같은 호국경을 중요시했다. 임전무퇴를 제시한 원광 법사 역시 승려였다. 이후에는 불교가 융성하여 국가의 주도하에 많은 사찰 건축물이 창건되고 불교 미술품들이 활발하게 제작되었다.

신라 중대 ~ 통일 신라 대에 들어서면서 불교는 이전의 정치 이념으로서의 귀족 불교, 왕즉불 사상을 벗어나 대안, 혜숙, 혜공, 그리고 원효의상 등 여러 승려의 노력에 힘입어 거리의 불교, 신분을 초월한 불교 대중화로 나아갔다. 신라 불교계의 대체적 흐름은 9세기경을 경계로 해서 전반기와 후반기로 나눠볼 수 있는데 전반기는 형식과 교리, 경전을 중시하는 교종, 후반기는 실천적 불교인 선종(불교)이 유행했다.[37]

통일 신라 시대의 지배적인 사상이 된 불교 덕택에 신라 시기 사찰은 백제나 고구려에 비하면 그 명맥이 유지된 곳이 상당히 많다. 현재의 경주시 지역엔 신라에서 가장 중시되는 거대 사찰이었던 황룡사를 비롯해 사천왕사(四天王寺)·불국사(佛國寺)·분황사(芬皇寺)·흥륜사(興輪寺)·영흥사(永興寺)·봉덕사(奉德寺) 등 대사찰이 세워졌으며, 지방에는 부석사(浮石寺)·통도사(通度寺)·화엄사(華嚴寺)·범어사(梵魚寺)·법주사(法住寺) 등의 대사찰이 세워졌다. 그리고 이때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지금도 신라 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경상도는 전국에서 상대적으로 타 종교들에 비하여 불교가 초강세이다. 그러나 사찰의 창건 연대가 그러하다는 것이지 역시 목조 건축물 자체가 남은 것은 하나도 없으며, 대부분의 사찰들은 전부 고려 & 조선시대에 중건된 경우다. 현재까지 남은 신라의 건축물들은 석탑이거나 유허지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반면 석조 건축은 유명한 경주시의 석굴암, 그 외에 군위군 아미타 여래 삼존 석굴(소위 제2 석굴암) 등 신라 당대의 것이 남아있는 경우가 몇 있다.

7.6.3. 유교[편집]

유교의 경우 화랑(역사) 문화와 접목되어, 신라에서는 특히 신(信)과 충(忠)을 중요시하는 풍조가 강해서 세속오계임신서기석 등에서 이런 문화를 찾아볼 수 있다. 신문왕은 유교 교육 기관 국학을 설치하고, 거기서 오경을 가르치고 독서삼품과와 같은 제도를 실시해 유교를 보급했다.

또한 고유 조상 숭배 사상이 아닌 유교식으로 체계화된 종묘를 한국 역사상 처음 도입한 것도 신라였으며, 이는 고려조선의 종묘로 이어진다. 신라의 종묘 체계에 관해서는 종묘 문서 참조.

7.7. 과학[편집]

자연 과학 분야, 특히 농업천문학 분야에서도 통일 신라 시기에 발전하여 7세기에는 첨성대(瞻星臺)가 축조되고[38], 수학·의학이 발달하였다. 통일 신라 대에는 당나라와의 기술 교류가 활발해, 덕복(德福)은 당나라에서 가져온 기술을 이용해 역법을 만들었고, 김암(金巖) 등이 당나라에 유학해 천문학을 배워 신라에 보급하고, 그리고 일본에 사신으로 건너가서 전수하기도 했다. 그리고 삼국사기의 기록상으로는 718년(성덕왕 17년)에 물시계를 만들고 이것을 관리하는 관청을 두었다고 한다. 하지만 일본이 만든 최초의 물시계가 671년 백제의 영향을 받아 제작되었다는 기록으로 볼 때 삼국사기에 기록된 718년 훨씬 이전부터 물시계가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수학도 크게 발달하였을것으로 추정되는데 석굴암의 평면 구성이나 천장의 돔, 불국사 석가탑, 다보탑 등 여러 건축물의 균형 잡힌 비례 구성에는 모두 정밀한 수학적 지식이 활용되었을것으로 추측된다. 최고 학부인 국학에서는 수학 교육도 이뤄졌고, 717년에는 산박사(算博士) 제도를 시행했다.

또 기포가 거의 없이 완성도가 높은 성덕대왕신종을 제조하는 등 금속 공학 등의 측면에도 발전된 부분이 많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인쇄 제지술이 발달해, 신라산 한지인 저지(楮紙, 닥나무 종이)는 색이 희고 질겨 중국인들의 찬사를 받았다. 보존성이 뛰어나 불국사 석가탑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현재 남아있는 것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쇄물이며, 전란이 적었던 일본 땅에서 민정문서 등 신라 당대의 인쇄물이 발견되기도 했다.

8. 외교[편집]

백제와는 상쟁하면서 혈연 동맹을 맺기도 하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많은 전투가 있었고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 동맹을 맺은 적도 있다.서로 국가에 이득을 위해 혈연이 맺어지기도 하였다. 참고로 장수왕 즉위 후 전성기를 맞은 고구려라는 공통의 적과 공동 대응하기 위해 맺은 120년간의 나제동맹 기간. 하지만 국가의 이익을 따라서 나제 동맹도 결렬된다.(관산성 전투)

고구려와의 관계도 국가의 이득에 따라 동맹하였고 또는 싸웠다. 광개토대왕 시절 광개토대왕릉비 [廣開土大王陵碑]에 의하면 왜의 공격에 5만의 군사로 신라를 구원하였고( 十年庚子敎遣步騎五萬住救新羅) 신라가 조공하였다고 한다(寐錦家僕句請朝貢) 장수왕 대에 고구려가 남진 정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적대적인 관계가 되었다. 이후 진흥왕이 반격에 나서 고구려의 남쪽 영토를 대거 빼앗기도 하고 한강 유역을 차지한 이후 고구려군에게 잦은 공격을 받기도 하는 등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적대적인 관계를 지속하였다. 삼국 시대 말기까지도 무열왕은 고구려로 가서 연개소문을 찾아가 동맹을 하려고 하였다. 나당전쟁 과정에서 고구려 유민들과 적극적으로 협력하기도 하고, 그 후계 국가인 발해와도 대립하기도 했지만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데면데면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가야와는 초기부터 경쟁하는 관계였으나, 금관국을 멸망시킨 후 구형왕 가문을 진골로 편입시켯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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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의 관계는 고구려, 백제와 마찬가지로 조공이라는 교류를 하였으나 초기에는 한반도 동남부라는 지리적 위치상 한반도 서해의 중국과 직접 교역은 불가능해 많은 교류는 어려웠던 걸로 보인다. 그러다 진흥왕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서해안에 영토가 닿게 되면서 항구 도시 당항성을 통해 직접 교류가 가능해졌고, 고구려와 백제에게 남북으로 협공당하게 되자 수나라, 당나라와의 교류가 수월해졌다. 한때 나당전쟁으로 관계가 단절되기도 했지만 이후 발해를 치는 시늉을 한 뒤 회복되었고 통일신라 시대에도 신라의 인재들이 당나라에 유학을 가는 등 우호적인 편이었는데, 숙위 학생단이라는 유학생단을 만들어 10년 정도의 기간씩 교대로 유학하는 제도가 있었는데 한때 그 숫자가 105명에 이르기도 했으며 일부는 빈공과라는 당나라의 과거 시험에 응시해 당나라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고 귀국해 신라에서 관리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후 당나라가 멸망하고 중국에서 5대 10국 시대가 개막하고 태봉과 후백제가 신라에서 갈라져 후삼국 시대가 시작되어 한강 유역과 서해안을 상실한 이후에도 신라는 후당 등 중국의 5대 10국 국가들에 사신을 파견하는 등 멸망 직전에도 중국과 교류했다.

일본과 거리가 가장 가까운 영남 지역에 위치한 신라였지만 왜국과의 관계는 삼국사기에 의하면 많은 침략을 받았다. 삼국사기 기록에서만도 박혁거세 시대부터 수십 번 쳐들어오고, 신라도 말기의 신라구를 제외하면 직접 왜의 침략한 기록은 없지만 일본서기에는 527년 큐슈 북부의 유력자 이와이(磐井)에게 왜군의 신라 침공을 저지하게 포섭한 일이나, 신라 원정군을 꾸리던 일본 왕자에 대한 암살을 사주했다는 설이 있는 등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왜는 백제를 하나의 번국으로 보았고 백제가 멸망한 직후에도 신라를 공격하고 후속 공격을 준비하기도 했으나(일본의 신라 침공 계획) 백제가 완전히 멸망한 이후에는 신라와도 교류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 통일신라 때도 일본과 신라는 아주 사이가 나쁜 시기와 그나마 덜 나쁜 시기가 나뉘는데, 대체로 서로 상대방이 오만하고 무례하다고 비난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일본과 신라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편견과 달리, 이전 백제 때만큼은 아니지만 이후 시대인 고려조선 시대에 비해서는 양국간 교류량은 훨씬 많은 편이어서, 가령 조선 통신사 파견이 조선 후기 200여년간 고작 9회에 불과했지만 신라 때는 한일 양국의 사료를 종합해보면 670년부터 779년까지 1세기 동안 신라에서 일본으로 사신단이 39차례나 파견됐고, 동시기 일본 사신단은 신라를 25차례 방문했다. 사신단의 규모에 있어서도 성덕왕 2년(703년)에 204명의 사신단을 파견했다는 기록을 참고하면, 압도적으로 많은 횟수까지 감안했을 때 1회에 3백명 ~ 5백명을 파견한 조선 통신사에 크게 밀리지 않는다. 8세기 중후반으로 가면서 일본의 자존 의식이 지나치게 커지면서 자국을 상국으로 모실 것을 신라에 요구하는 형식적 외교 관례에 집착했고, 이러면 신라도 무례하다고 사신을 쫓아내고 개무시하면서 차츰 정부간 교류가 줄어들게 되는데 그래도 장보고로 대표되는 사무역이나 민간 교류는 9세기에도 꽤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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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 시대에는 중동 지역과도 교류가 있어서, 아라비아페르시아의 기록에 '알실라(Alshillaالسيلى)', '베실라(Beshilla)' 등의 이름으로 소개되었다. 중동인들은 대체로 신라를 이상향마냥 살기 좋은 곳으로 기록하였다. 일본 도다이지 쇼소인에서 소장 중인 매신라물해(買新羅物解)의 기록에 따르면 752년에는 아랍 상인단이 신라 사신단을 따라서 일본까지 갔다오기도 했다. 일부 중동인들은 신라에 정착하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39]

후삼국시대의 경우 태봉은 신라와는 거의 불구대천의 원수와 같았다. 궁예는 신라를 '멸도(滅都)'라고 칭하며, 우호적인 태도를 전혀 보이지 않고 적개심을 드러내었다.[40] 후백제는 태봉에 비하면 신라 눈치를 보는 시늉은 했지만[41] 역시 후백제의 창업자인 견훤이 신라에 반기를 들고 나라를 세웠기 때문에 그렇게 관계가 좋지 않았으며 후백제도 신라를 침략하여 경애왕을 죽이고 약탈하기까지 하였다. 반면 태봉국을 쿠데타로 무너트리고 즉위한 왕건고려는 궁예와는 상반되는 친 신라 정책을 펼쳤으며, 동시기에 존재한 후백제보다는 고려 쪽에 신라가 의탁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9. 군사[편집]

신라는 초기에 6부(部)의 장정을 징발하여 편성한 6부병(六部兵) 제도로 운용되었다. 군사력은 결국 중앙 집권이 제대로 이루어지는 법흥왕 때까지 분권화되어있었다고 보여진다. 하지만 급속도로 팽창하는 시점인 진흥왕 때부터 늘어난 영토의 방위 목적 등으로 군사 편제의 변화가 있어보이며 6부 체제는 6정의 6개 군단 편제로 바뀌게 된다. 나중에 이 체제는 더 증편되어 진평왕 때에는 10정(停)으로 바뀌게되며 통일 신라 초창기까지 운용되다가 9서당으로 완전 개편된다. 지방 체제의 군단 편제 외에도 중앙군도 개편에 맞추어서 서당(誓幢 : 583년), 낭당(郞幢 : 625년)이란 부대로 개편되었고 왕궁 수비대인 시위부(侍衛府 : 624년)도 창설되게 된다.관련 정보 이러한 개편은 결국 신라가 그간 수천명에 동원되던 수준의 원정 능력에서 만명 단위 이상의 동원 능력을 보이는 계기가 되며 기록상 과장이 들어갔다는 말이 있지만 삼국 전쟁 말기에 고구려 원정에는 신라역사상 최대 동원 능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신라군은 보병 위주의 군대였을 가능성이 높은데 이는 백제와 마찬가지로 말을 목축화하는데 어려운 지역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백제와 유사하게 보병 중심이나 기마병을 정예로 치고나 귀족들 위주의 부대로 개편 운용되었을 확률도 크다. 고구려의 영향 전에는 판갑을 주력으로 운용했을 것으로 보이며 고구려 광개토 태왕의 구원 이후 고구려의 영향 덕에 찰갑 등을 운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군 하면 딱 나오는 이미지는 적지만 통일 신라 초기 쇠뇌에 대한 신라의 기술적 우수성이 나오는 부분을 보건데 쇠뇌와 같은 병과에서 위력을 발휘한 것으로 보인다.

화랑이라는 제도 역시 운용하여 고구려의 경당 / 태학과 같은 역할 화랑 / 낭도 제도를 운용한 것도 특징. 대체적으로 화랑 / 낭도 형태로 아마도 고급 장교 - 하급 장교 / 부사관 급 인사를 확보하는 것을 목적으로 보는 편이다.

10. 평가[편집]

11. 시기 구분[편집]

한국사 다른 나라와 비교해도 특히 신라는 국가 존속 기간이 1,000여 년이나 되기 때문에, 시기별로 나라 체제의 차이가 커서 여러가지 시기 구분이 있어왔다. 옛날부터 사용되던 구분 방식으로는 삼국사기의 구분대로 상대, 중대, 하대로 구분하는 방법과 삼국유사의 구분대로 상고, 중고, 하고로 구분하는 방법이 있다. 전자는 유학자 김부식이 주도해 집필한 책인만큼 왕의 혈통을 기준(성골태종 무열왕진골내물왕계 진골)으로 했는데, 상대는 혁거세 거서간 ~ 진덕여왕, 중대는 태종 무열왕 ~ 혜공왕, 하대는 선덕왕 ~ 경순왕이다. 상대는 통일 이전, 중대는 왕권이 강했던 전성기, 하대는 쇠퇴기와 대강 맞아떨어지기 때문에 지금도 많이 사용되는 구분이다.[42] 후자는 승려 일연의 구분답게 불교와 연관됐는데, 불교 수용 이전(고유어 왕호) → 불교식 왕호 사용 → 중국식(유교식) 왕호 사용 시기와 맞아떨어진다. 상고는 혁거세 거서간 ~ 지증왕, 중고는 법흥왕 ~ 진덕여왕, 하고는 태종 무열왕 ~ 경순왕이다.

현대에는 좀 더 세분화해 여섯 시기로 구분하기도 한다. 사실 신화 시절을 포함하여 사로국으로 존속한 기간이 불분명하기는 하고 국가로 인정하기에는 미흡한 점들이 있기 때문에 신라의 역사를 정확히 언제부터인지 어떻게 구분해야할지에 대해선 논란이 많다,[43]

676년 이후의 신라통일신라로 부르는 문제에 있어서도 논란이 있다. '통일 신라시대'라는 용어는 발해까지 아울러 남북국시대라고 부르는 쪽으로 현대에는 대체가 된 편인데, 그럼 남북국 두 나라 중 남국인 신라를 뭐라고 불러야 하느냐고 하면 이 쪽은 지금도 통일신라라고 부르는 게 일반적이다. 신라의 통일이 불완전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것도 부적절한 호칭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딱히 자리잡은 대체 용어는 없고 학자에 따라 대 신라, 후기 신라 등의 이름으로 676년 이전(삼국 중 1개국으로서의 신라)과 구분하기도 한다.

재미있게도 고려의 존속 기간인 474년과 조선의 존속 기간인 518년을 더하면 정확하게 992가 나오는데 이는 고려조선의 전신인 신라의 존속 기간이다.

12. 왕사[편집]

12.1. 왕비[편집]

13. 신라의 인물들[편집]

14. 신라/문화재[편집]

15. 신라를 소재로 한 작품[편집]

16. 관련 문서[편집]

16.1. 통일신라[편집]

17. 둘러보기[편집]

파일:경주 천마총 장니 천마도.png
신라의 추존 국왕

태조대왕 김성한

문흥왕 김용춘

흥무왕 김유신

개성왕 김효방

현성왕 김법선

신영왕 김의관

흥평왕 김위문

명덕왕 김효양

혜충왕 김인겸

익성왕 김헌정

선강왕 김충공

혜강왕 김예영

성덕왕 김균정

의공왕 김계명

혜성왕 김위홍

흥렴왕 박문원

선성왕 박예겸

의흥왕 김실홍

신흥왕 김효종

[1] 링크 참조. "신라 사람들의 휘직은 띠를 푸르거나 붉거나 하는 등의 색깔로 구분하였고 모양은 반달의 형상을 취하였다. 계(罽) 또한 옷에 다는 것인데 그 길이의 길고 짦음에 대한 제도는 분명하지 않다."[2] 진흥왕 재위기의 영토이며, 진흥왕 사후 현재의 함경남도 지역은 고구려의 반격으로 빼앗겼고 실제로는 원산 정도까지 확장하였다.[3] 4월 정월 15일이라고 보는 경우도 있다.[4] 계림, 신라, 사라 등 여러 표기[5] 503년 국호 통일[6] 1대 박혁거세 또는 2대 남해[7] 2대 남해[8] 3대 유리 이사금 ~ 16대 흘해[9] 17대 내물 ~ 21대 소지[10] 광개토대왕릉비, 중원 고구려비에는 매금(寐錦)이라는 왕호도 등장한다. 또한, 울진 봉평리 신라비에서도 ‘모즉지매금왕’이란 표현이 등장한다.[11] 22대 지증 ~ 56대 경순[12] 다만 울진 봉평리 신라비 등의 금석문을 살펴볼 때, 법흥왕까지는 마립간(매금)이 혼용된 것으로 보인다.[13] '황왕'이라는 군주 칭호는 사서에는 안 나오고 금석문에서 주로 확인된다. 진흥왕 순수비 등 금석문에서는 황왕 외에도 제왕(帝王), 태왕(太王) 등의 칭호도 그 당시에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황제와 왕의 복합어로 외왕내제적 성격을 보여준다.[14] 제왕, 태왕[15] 고대 한국어[16] 예맥, , 말갈족[17][17] 대다수가 고구려 멸망 이후에 집중적으로 유입[18] 세계사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정말 긴 기간 동안 유지되었다. 다만 초기와 말기의 석씨, 박씨 집권기를 제외한 경주 김씨 단일 왕조는 약 550년 간 유지되었는데 이것만 쳐도 후대의 고려조선, 상나라, 주나라를 제외한 삼국 통일 이후 한국사와 중국사의 어떤 왕조들보다도 길다.[19] 그러나 신라 초기 왕들의 실존에 대해서는 쟁론이 많다. 초기 , , 삼가가 돌아가면서 왕위를 계승했다는 기록을 신라 지배층에 포섭된 성씨들을 대우하기 위해 술작된 왕권 전설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다.[20] 신라가 고구려백제를 병합한 이후 고구려어백제어는 거의 소멸되어 신라어로 통합되었다. 고려의 영토는 통일신라 시기의 영토와 거의 동일했기 때문에 사실상 현대에 이르는 한국어신라어에 기반을 두었다고 보는 의견도 있다.[21] 언어학자 이기문 교수는 삼국사기 「지리지」에서 추출한 어휘를 통해 볼 때 고구려어에는 분명하게 알타이적 요소가 있다고 주장했다. 대표적으로 ‘매(買)’를 들었다. 이는 ‘물(水)’을 뜻하는 말로, 에벤키어의 ‘mû’, 만주어 ‘muke’, 중세 몽골어 ‘mören’, 일본어 ‘midu’와 유사하며, 중세 국어의 ‘믈’로 이어져 현대 한국어 ‘물’이 되었다고 한다.[22] 조선의 수도인 ‘한양’이나 고려의 수도인 ‘송악’이 대표적인 예이다.[23] 어두에서는 두음 법칙에 따라 '나'이지만 둘째 음절 이하부터는 '라'로 발음.[24] 좁은 의미로는 경주시에 있는 작은 이름이자, 넓게는 신라국 전체를 이르는 이름. 공식적으로 신라라는 국명이 정해진 뒤에도 일종의 별명으로 불렸는데, 이후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의 별칭으로도 쓰였다. 이순신은 계림 최고의 장수라는 식.[25] 아랍어 정관사 ال(al)+سيلى(silla)의 합성일 경우, 아랍어의 음운변화에 따라 앗실라로 읽는게 맞다. 아랍어로 중국을 지칭하는 الصين (앗씬)같이 정관사+단어로 구성된 국명이 많은데, 신라도 이와 같은 가능성이 높다.[26] 라틴어로 의자라는 뜻도 있다.[27] 단, 해씨 고구려설, 비류백제왕 설과 같이 사실은 고구려나 백제도 주몽온조에서 이어지는 세력이 아니었다는 설도 있다.[28] 역사 지리학 강의 참조[29] 현재의 경주 시내 형산강은 보문관광단지의 인공 호수를 지으면서 수량이 줄어들어 쪼그라든 상태다. 원래는 지금보다는 넓은 강이었다.[30] 개미핥기 토우가 있다는 주장도 있는데 개미핥기가 맞나 의문이 들 정도로 안 닮았을 뿐더러 개미핥기처럼 꼬리가 수평인게 아니라 개처럼 꼬리가 엉덩이위까지 올라가 있다. http://blog.naver.com/gesekideska 애초에 개미핥기는 아메리카에 사는 동물인데 그 시절엔 개미핥기의 존재 자체를 알 방법이 없다.[31] 당시에 유리 구슬은 일종의 보석 취급을 받았다.[32] 낭공대사비, 전유암산가서에 그의 글씨가 남아있다.[33] 지리산 쌍계사의 진감선사비문이 대표적.[34] 일본 몬토쿠 덴노 실록 권2[35] 화랑세기와 제왕연대력은 필사본이라 주장하는 책이 존재한다.[36] 화백회의를 개최하는 장소이기도 했던 사령지, 그리고 천경림과 문잉림처럼 신성 구역으로 정해놓았던 등. 사실 신라의 성지순례 문화는 불교 공인 이후에도 화랑의 풍습으로 계승되기도 했으며 울주 천전리 암각화, 제천 점말 동굴 등이 그 예이다.[37] 하지만 선종의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교리는 신라 말의 혼란기에 여러 지방 호족에 의해 악용되었고, 특히 궁예는 스스로 미륵불이라 자처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궁예가 타락하고 멸망하게 되자 고려 초기에는 국가의 지원을 받는 호국 불교 교종을 국가 이념으로 삼아 선종을 박해했다.[38] 하지만 첨성대가 정말 천문대인지는 논란이 있다. 일단 형태적으로도 별을 관측하기 불편하고 관련 기록도 많지 않기 때문.[39] 처용을 이 예로 추측하는 학자들도 있다.[40] 어떤 국내 모 포털 사이트의 네티즌은 후백제의 견훤이 아니라 태봉의 궁예가 왕건의 쿠데타로 몰락하지 않고 신라를 침략했으면 신라 침공 후 경순왕만 세워놓고 괴뢰국화하는 선에서 그친 견훤과 달리 무력으로 멸망시킨 다음 태봉 영토로 강제 병합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41] 892년에 사실상 왕이 되었지만 신라 서면 도통 지휘 병마제치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 행 전주 자사 겸 어사중승 상주국 한남군 개국 공식 읍 이천호라는 형식상 신라의 신하로 깔고 들어가는 칭호를 자처했다. 백제왕 칭호는 8년 뒤엔 900년부터다.[42] 물론 세세하게 따지면 중대에도 너무 어린 왕이 즉위해 정국을 주도하지 못했기도 하고, 반대로 하대 초기에도 원성왕 ~ 헌덕왕처럼 개혁 정치를 통해 강한 전제 왕권을 추구했기도 하였기에 도식화가 완전히 맞아떨어지는 것은 아니다.[43] 고구려보다 국가 체제 발전이 늦었던 신라가 더 먼저 건국 되었을 가능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 이는 한국 고대 사학계의 쟁점 중 하나인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어디까지 믿을 것인가?'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다.[44] 신라가 익산에 세운 괴뢰국[45] 김헌창의난때 세운 국가[46] 이사부가 정벌한 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