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화 석릉
최근 수정 시각:
⠀[1~50호]⠀⠀[51~100호]⠀
⠀[101~150호]⠀⠀[151~200호]⠀⠀[201~250호]⠀⠀[251~300호]⠀⠀[301~350호]⠀⠀[351~400호]⠀⠀[401~450호]⠀⠀[451~500호]⠀⠀[501호~550호]⠀⠀[번호폐지 이후(번호없음-1)]⠀⠀[번호없음-2]⠀
|
![]() |
일제강점기에 촬영된 석릉(碩陵)[4] |
수창궁 사변으로 폐위된 뒤 교동도에 유배되어 있던 희종은 1237년(고종 24년) 8월 10일 근처의 절인 법천정사에서 승하하였다. 이후 1237년(고종 24년) 10월 19일에 석릉(碩陵)에 장사를 지냈다.[7]
이후 시간이 흐르고 왕조가 바뀌며 두 번의 전란이 온 국토를 휩쓰는 동안 존재가 잊혀졌다가, 현종 5년(1664년) 강화유수로 재직하던 조복양(趙復陽)[8]이 현종의 명을 받아 보수하였다.[9] 이후 관원들이 해마다 순찰을 돌며 능역을 관리하였고, 고종 4년(1867년) 위치가 확인된 고려왕릉 전체를 일시에 정비하면서 '고려희종석릉(高麗熙宗碩陵)'이라 적힌 표석이 세워졌다.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거치며 왕릉이 도굴당하고 봉분이 무너지는 수모를 겪었으나, 1974년에 이를 보수, 정비하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이때 본래의 모습을 많이 잃었으나 2000년과 2001년에 발굴 조사를 통해 석실과 능역의 자세한 구조를 확인하였고[10], 그 결과를 토대로 하여 지금의 모습으로 전해오고 있다.
이후 시간이 흐르고 왕조가 바뀌며 두 번의 전란이 온 국토를 휩쓰는 동안 존재가 잊혀졌다가, 현종 5년(1664년) 강화유수로 재직하던 조복양(趙復陽)[8]이 현종의 명을 받아 보수하였다.[9] 이후 관원들이 해마다 순찰을 돌며 능역을 관리하였고, 고종 4년(1867년) 위치가 확인된 고려왕릉 전체를 일시에 정비하면서 '고려희종석릉(高麗熙宗碩陵)'이라 적힌 표석이 세워졌다.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거치며 왕릉이 도굴당하고 봉분이 무너지는 수모를 겪었으나, 1974년에 이를 보수, 정비하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이때 본래의 모습을 많이 잃었으나 2000년과 2001년에 발굴 조사를 통해 석실과 능역의 자세한 구조를 확인하였고[10], 그 결과를 토대로 하여 지금의 모습으로 전해오고 있다.
석릉은 고려왕릉의 일반적인 석축구조인 3단 구조나 4단 구조가 아닌 5단 구조를 띠고 있다. 최상단인 1단에는 봉분을 중심으로 할석[13]을 쌓아올려 만든 곡장이 '⊓'모양으로 둘러져 있고, 곡장의 서쪽 전면에는 머리와 몸통이 분리된 문인상 1기가 세워져 있다. 봉분과 곡장 사이에는 부정형(不整形) 판석이 깔려있다.
석실은 길이 3.3m, 너비 2.2m, 높이 2.3m의 횡구식 석실구조[14]로 지하에 조성되었다. 벽면은 할석과 장대석[15]을 이용해 쌓아올렸으며 천장은 3매의 커다란 판석을 덮어 마무리하였다.[16] 천장 상부에는 8각으로 병풍석을 두르고 봉분을 조성하였는데, 이 8각 병풍석은 현재까지 석릉과 가릉에서만 확인되고 있는 특이한 양식이다.[17] 또한 발굴조사 과정에서 병풍석 외곽에 묻혀있던 난간석이 발견되어 조성 당시 석릉에 난간이 둘러져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석실 가운데에는 4매의 석재로 테두리 두른 다음 그 안을 돌이나 흙으로 채운 길이 2.2m, 너비 0.8m의 조립식 관대가 놓여져있다. 입구는 문지방석과 문기둥돌을 세워 축조한 다음 바깥에 커다란 판석 1매를 세워 폐쇄하였고, 판석의 전면에 보강석을 세워놓았다.
석실은 길이 3.3m, 너비 2.2m, 높이 2.3m의 횡구식 석실구조[14]로 지하에 조성되었다. 벽면은 할석과 장대석[15]을 이용해 쌓아올렸으며 천장은 3매의 커다란 판석을 덮어 마무리하였다.[16] 천장 상부에는 8각으로 병풍석을 두르고 봉분을 조성하였는데, 이 8각 병풍석은 현재까지 석릉과 가릉에서만 확인되고 있는 특이한 양식이다.[17] 또한 발굴조사 과정에서 병풍석 외곽에 묻혀있던 난간석이 발견되어 조성 당시 석릉에 난간이 둘러져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석실 가운데에는 4매의 석재로 테두리 두른 다음 그 안을 돌이나 흙으로 채운 길이 2.2m, 너비 0.8m의 조립식 관대가 놓여져있다. 입구는 문지방석과 문기둥돌을 세워 축조한 다음 바깥에 커다란 판석 1매를 세워 폐쇄하였고, 판석의 전면에 보강석을 세워놓았다.
![]() | ![]() |
석릉(碩陵)의 표석과 문인상[18] | |
최근 연구에 의하면 현재 희종의 석릉이 비정이 잘못됐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성평왕후 임씨도 강화 천도 시기에 사망했기에 그녀의 능인 '소릉'(紹陵)도 희종의 '석릉' 근처에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능묘의 석수, 부장품, 무덤 구조로 보아 정순왕후의 능인 '가릉'이 성평왕후의 소릉이고, 위쪽의 능내리 석실 고분군을 가릉으로 비정한 결과도 있다.
이 경우 희종의 석릉은 사실 원덕태후의 곤릉이고, 원덕태후의 곤릉이라고 알려진 왕릉이 바로 진짜 희종이 묻힌 석릉이라고 본다. 위계 상으로는 곤릉의 위계가 석릉보다 더 높게 조성되었다고 볼 정황이 있기 때문이다.[20]#
이 경우 희종의 석릉은 사실 원덕태후의 곤릉이고, 원덕태후의 곤릉이라고 알려진 왕릉이 바로 진짜 희종이 묻힌 석릉이라고 본다. 위계 상으로는 곤릉의 위계가 석릉보다 더 높게 조성되었다고 볼 정황이 있기 때문이다.[20]#
고려 희종 (재위 : 1204∼1211)의 무덤이다.
이 당시는 정치적으로 최씨 집권시기였으며 밖으로는 거란·몽골의 침입 등으로 고통받았던 시기이다. 고종 18년(1231)부터 여러 차례에 거친 몽골의 침입으로 인해 국토는 초토화되고, 인명과 문화 유산의 손실 또한 매우 컸다. 고종은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대장경을 만드는 등 문화상의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이것이 현재 합천 해인사에 남아있는 『고려대장경』이다.
원래의 홍릉은 높게 쌓은 3단의 축대로 이루어져 제일 아래에 정자각, 2단에는 사람형상을 한 조각, 가장 높은 곳에는 왕릉이 배치된 형식이었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으며, 무덤 주위에는 난간으로 두른 돌의 일부가 남아 있었다고 전한다. 무덤의 4모서리에는 짐승을 조각한 돌이 1개씩 배치되어 있었으나 없어졌고, 현재는 사람 모양의 돌조각 2구가 남아있다.
최근에 난간을 보수하고, 봉토 아랫부분에 능을 보호하는 돌을 설치하였다.
※(석릉 → 강화 석릉)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 (2011.07.28 고시)
[1] 능주(陵主)에 대해선 이견이 있는 상황이다.[음력] 2.1 2.2 [4] 출처: 조선고적도보 七, #[5] 출처: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6] 당시에는 사적 제369호로 지정되었다. 지금은 번호를 매기는 것이 문화유산의 중요도로 오인될 수 있음을 고려해 따로 번호를 매기지 않고 있다.[7] 고려사 기록[8] 형조판서, 이조판서, 대제학 등을 역임한 조선 후기의 문신. 이 사람은 강화도 내에 잔존한 나머지 고려왕릉들의 보수 및 관리를 총괄하기도 했다.[9] 현재까지 전해지는 고려왕릉들의 능주(陵主) 대부분이 이때 비정되었다.[10] 이때 석실 내부에서 도굴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해머와 그 도굴범의 물건으로 추정되는 패트병 소주 1병이 발견되기도 했다.[11] 출처: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12] 해당 문인상이 원래 석릉에 설치되었던 석물인지는 의견이 분분하다.[13] 주변의 자연석을 적당한 크기로 깬 석재를 뜻하는 말.[14] 3면의 벽과 천장을 먼저 완성한 다음 개방된 한 쪽 벽으로 시신을 넣고 그 벽을 막아서 만든 무덤. 앞트기식 고분이라고도 한다.[15] 섬돌 층계나 축대에 쓸 수 있도록 길게 다듬은 돌.[16] 이때 벽면과 천장 전체에 회칠을 하고 그 위에 벽화를 그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는 회칠의 흔적 일부만이 남아있다.[17] 일반적인 고려왕릉은 12각으로 병풍석을 둘렀다. 대표적으로 고려 고종의 능인 홍릉이 12각으로 병풍석을 둘러놓았다.[18] 출처: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19] 고려왕릉은 현정릉과 같은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능역에 문인상만 설치하고 무인상을 설치하지 않았다.[20] 고종의 홍릉은 비정에 문제가 없다고 보았다.
![]()
이 저작물은 CC BY-NC-SA 2.0 KR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단, 라이선스가 명시된 일부 문서 및 삽화 제외)
기여하신 문서의 저작권은 각 기여자에게 있으며, 각 기여자는 기여하신 부분의 저작권을 갖습니다.
나무위키는 백과사전이 아니며 검증되지 않았거나, 편향적이거나, 잘못된 서술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무위키는 위키위키입니다. 여러분이 직접 문서를 고칠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의 의견을 원할 경우 직접 토론을 발제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