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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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高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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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장기

국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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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 23년(1374년) 고려 영토.
각 시대의 강역은 아래 역사 단락 참고.

건국

918년 7월 25일

존속 기간

918년[1]~ 1392년[2] (474년)

영토

함경북도양강도평안북도 일부를 제외한 한반도 전역 외 부속도서 [3][4]

수도

철원 태봉궁 → 개경 만월대강도 고려궁[5] → 개경 만월대

정치체제

전제군주제

국성

개성 왕씨

국가원수

(황제)[6]

언어

중세 한국어

종족

한민족, 말갈족[7], 여진족

종교

불교[8]

주요 국왕

· 태조 왕건 (제1대 918년~943년)
· 광종 왕소 (제4대 949년~975년)
· 성종 왕치 (제6대 981년~997년)
· 현종 왕순 (제8대 1009년~1031년)
· 문종 왕휘 (제11대 1046년~1083년)
· 공민왕 왕전 (제31대 1351년~1374년)

주요 사건

· 918년 태조 고려 건국
· 936년 후삼국통일
· 993년~1019년 여요전쟁
· 1108년 동북 9성 축조
· 1170년~1270년 무신정권
· 1231년~1259년 여몽전쟁
· 1232년~1270년 강화도 천도
· 1270~1351년 간섭기
· 1388년 6월 26일 위화도 회군
· 1392년 8월 5일 고려 왕조 멸망

성립 이전

태봉, 신라, 후백제, 탐라[9]발해[10], 발해부흥국

성립 이후

고려, 탐라국, 정안국[11][12][13]

멸망 이후

조선

고려 대항국가

대위국

1. 개요2. 국호3. 역사4. 정치/사회상
4.1. 중앙행정4.2. 지방행정4.3. 군사4.4. 경제4.5. 고려는 황제국인가
4.5.1. 금석문, 외교문서 종합
5. 문화6. 외교7. 평가
7.1. 최초의 자력 통일과 단일국가관7.2. 고구려 계승7.3. 용맹한 무장의 나라7.4. 한국사 발전7.5. 여타 한반도 왕조들과의 비교
7.5.1. 이전 국가들과의 비교7.5.2. 조선과의 비교
8. 왕사9. 고려/인물10. 고려사 연구의 난관11. 관련 문서
11.1. 건축11.2. 고려를 다룬 사서11.3. 당시 만들어진 책, 작품
12. 고려를 배경으로 한 작품
12.1. 영화12.2. 게임12.3. 드라마12.4. 만화12.5. 소설12.6. 연극
13. 다른 위키의 '고려' 문서

[템플릿사진출처]

언어별 명칭

한국어

고려(高麗)[15], 고려 왕조(高麗王朝)

중국어

高麗 / 高麗王朝(정체), 高丽 / 王氏高丽 (간체)

일본어

高麗(こうらい、こま[16] )

베트남어

Cao Ly

몽골어

Kuryo[17]

러시아어

Корё

영어

Goryeo, Koryŏ


1. 개요[편집]

918년 태조 왕건궁예후고구려를 무너뜨리고 고구려 계승을 표방하여 세운 나라. 통일신라의 분열 후 고려, 후백제, 신라로 나뉘어 대치하던 후삼국을 통일하였고, 이후 약 474년동안 총 34명의 군주가 계승하여 1392년까지 한반도 대부분 지역을 지배했다.

고려는 지방의 무인 호족들이 건국 주체였기 때문에 초기엔 상무(尙武)적 기질이 있었다. 또한 이러한 이미지는 현대 대중에게도 어느 정도 각인되어 있다. 그러나 무인 호족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무과제도를 신설하지 않는 등 전반부터 무신들의 지위를 낮추었다. 절도사 출신인 송나라 태조 조광윤이 절도사의 권한을 철저히 약화한 것과 흡사하다.

문약하다는 이미지가 있는 조선과 달리 정말 '외세와 피터지게 싸운 나라'다. 고려 전기 요나라(거란족)와 송나라의 세력 균형 체제라는 국제적인 정세는, 고려가 자주성을 어느 정도 지킬 수 있는 유리한 여건을 형성해주었다. 요나라의 3차에 걸친 대규모 침략을 막아내며, 군사적으로 고려의 위상을 높인 것도 이러한 자주성 유지에 도움이 되었다. 물론 이때도 형식상 이들 나라에 대한 조공 질서에서 벗어나진 못했다.

그러다 중기 이후 금나라(여진족)의 위협으로 책봉 질서의 사대적 관계를 맺기 시작했고 이후 몽골제국의 장기적인 침략에 굴복하여 간섭기엔 속국화되어 고려의 자주성은 한때 조선보다도 더 크게 침해를 받기도 했다.[18]

2. 국호[편집]

국호는 고구려의 국호에서 그대로 따왔다. 고구려의 국호는 초기에는 고구려, 구려, 고려 등의 여러가지로 불렸는데 장수왕대부터 고려(高麗)로 고정되어 사용됐다. 따라서 당시 사람들에게는 고구려보다는 고려가 더 익숙한 명칭이었으므로 고려를 사용한 것이다.

현대에 고구려를 당대에 널리 사용되던 고려 대신 고구려라고 부르는 이유는 첫째로 뒤의 고려와 구분하기 위해서, 둘째로 삼국사기에 그렇게 적혀 있기 때문이다. 궁예의 후고구려 역시 개국 당시의 국호는 고려였다. 이후 마진, 태봉으로 변경하긴 하지만, 왕건의 고려와 구분하기 위해 궁예의 고려는 후고구려라고 호칭된다. 때문에 한국의 외국 이름인 'Corea'의 어원을 제공한 나라가 왕건이 세운 고려일 수도 있지만, 언급했듯이 장수왕 이후인 고(구)려에서 이미 어원이 형성됐을 가능성도 있다.

3. 역사[편집]

고려/역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정치/사회상[편집]

파일:external/file.agora.media.daum.net/pcp_download.php?fhandle=MWpoMEhAZmlsZS5hZ29yYS5tZWRpYS5kYXVtLm5ldDovSzE1MC8xMzUvMTM1MDkuSlBH&filename=go4.jpg

신분제도에 관한 내용은 계급 참조. 고려는 크게 양인과 천인으로 구별되고, 다시 양인을 왕족-귀족, 중간계층(남반, 향리, 서리, 하급장교), 양인(백정, 양수척, 향 소 부곡민)로 3등급으로 세분화하여 천인(공노비, 사노비)과 더불어 4계층으로 나뉜다고 볼 수 있다. 왕족 - 귀족 - 향리 - 평민 - 천민으로 천민의 구분이 향/소/부곡으로 엄격하였으나 신분 상승(특히, 향/소/부곡의 현 승격에 따른 공동 신분상승)은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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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중앙행정[편집]

고려는 전기에는 당나라부터 이어져 북송에서 쓰던 3성 6부제를 받아들였는데 그것을 그대로 도입하지는 않았다. 중서성과 문하성을 합하여 중서문하성(고려 문종 15년에 제정)으로 하고 따로 상서성이 존재했다. 그러므로 2성6부.

이는 국사교과서 등에서 고려의 독자성의 예로서 흔히 드는 것인데 여기에 대해 반론이 있다. 중국에서도 이미 당조 시기부터 중서성과 문하성이 합쳐져 중서문하성 역할을 하는 경향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의견도 있고, 나라가 작아 2성으로 고친 것이란 이야기도 있다. 실제로 태봉도 이미 2성 6부체제였고, 내의성과 광평성은 이를 그대로 물려받은 것이다. 결국 3성 6부제를 그대로 쓰지 않고 2성을 사용한 것은 강역이 작기 때문에 3성을 유지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당의 경우 6부에 각기 4사의 속사가 딸려 모두 24사사지만 고려는 이부의 고공사와 형부의 도관 두 속사만 있을 뿐 단사제를 원칙으로 하는 단순한 체제에서 알 수 있다. 이와 별도로 고려에선 3성이 따로 존재했다는 학설도 존재한다.

기구

관직

비고

중서문하성

문하시중 → 문하시랑(종1품)

최고 책임자

중서령

내의령, 내사령(종1품)

수상

중서시랑평장사, 문하시랑평장사와(정2품)

부수상

중서평장사, 문하평장사(정2품)

부부수상

상서성

상서령(종1품)

실질적 서열 2위, 6조 관할

좌우복야정2품 / 지성사종2품

중서문하성의 변동사

개국 당시

내의성, 내사성, 문하성

성종 1년

내사문하성

문종 15년

중서문하성

  • 중서문하성은 문하시랑을 최고 책임자로 하였으며 국정 최고 기구인 동시에 감찰 기능을 지녔다. 종1품, 이전에는 시중으로 불렸으며 성종 1년 이후 문하시중으로 변경되었고 문종때 중서문하성으로 변경하며 문하시랑으로 변경. 이후 공민왕 때 (문하)시중으로 부활하면서, 보통 문하시중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 문하시중보다는 낮지만 종1품인 내하성에서 내려온 그 내의령(내사령)이 중서령으로 이어졌으며, 그 아래에는 네 명의 평장사(정2품)가 있었다. 부수상인 중서시랑평장사, 문하시랑평장사와 부부수상격인 중서평장사, 문하평장사이다. 그 밑으로 참지정사(종2품), 좌우상시(정3품), 직문하(종3품), 좌우간의대부(정4품)이 있었다.

  • 상서성은 6부(이부, 호부, 예부, 병부, 형부, 공부)를 지휘하며 실질적 행정 업무를 담당했다. 6부의 순서에서 고려는 사실 병부가 6부 중 2위에 있었다. 조선 때는 공조 바로 위로 강등되었다. 또한 예부 앞에 형부가 있었다. 즉 고려는 이부, 병부, 호부, 형부, 예부, 공부순으로 독자적인 구성을 갖추었다.

    고려의 경우는 상서성이 중서문하성 아래에 있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상서성의 최고 관직인 상서령은 별로 하는 일 없이 왕족에게 주는 자리이거나 지방과의 연락 혹은 개성인근지방을 다스리는 한직에 불과했다. 역사로 치면 (개국 당시) 광평성 - 성종 1년 : 어사도성 - 성종 14년 : 상서(도)성이다. 상서성에는 상서령(尙書令 : 종1품) 1명, 좌우복야(左右僕射 : 정2품) 각 1명, 지성사(知省事 : 종2품) 1명, 좌우승(左右丞 : 종3품) 각 1명, 좌우사랑중(左右司郞中 : 종5품) 각 1명, 좌우사원외랑(左右司員外郞 : 정6품) 각 1명, 도사(都事 : 종7품) 2명, 이속(吏屬)으로는 주사(主事) 4명, 영사(令史) 6명, 서령사(書令史) 6명, 기관(記官) 20명, 산사(算士) 1명, 직성(直省) 2명이 있었다.

  • 그 외에 (북송의 추밀원을 모방한) 왕명의 출납과 궁궐 경비를 담당하는 중추원(헌종 이후 추밀원으로 개명), 정치의 잘잘못을 따지고 백관을 규찰하던 어사대(현종 이후 금오대로 개명., 법제와 왕실의 격식을 담당하는 식목도감, 전곡(錢穀)의 입출과 회계를 맡은 삼사(송의 영향을. 원간섭기에도 존재), 천문을 보는 태사국 등의 중앙 행정기관이 있었다.


이러한 체제는 원 간섭기부터 즉, 충렬왕 대부터 제후국 체제로 관제가 격하되면서 변경되었다. 국가의 행정업무는 2성이 1부(첨의부, 충렬왕 1년(수상은 첨의중찬, 좌우첨의중찬을 따로 부수상으로 둠))로 바뀌고, 6부는 4사(판서)(이부와 예부가 통합되고 공부가 폐지)가 되었으며, 다시 충렬왕 19년에 첨의부(첨의중찬)가 도첨의사사(도첨의시중)가 되었다. 충선왕이 복위 된 뒤로는 다시 도첨의부(도첨의정승)이 되었다. 이것이 오늘날과 같은 의정부와 정승의 시작이다.

한편 추밀원은 밀직사가 되었고, 광정원으로 잠시 고쳤던 적이 있다. 충선왕 때는 밀직사가 첨의부와 동급이 되었다. 추밀원의 승선이 밀직사의 승지가 된 것이 조선시대 승정원 도승지 관직의 시작이다. 충선왕 때부터는 대언이라고 했었다. 금오대는 감찰사가 되었다가, 충렬왕 24년부터 사헌부가 되었다.

공민왕 5년(1356) 반원 자주정책에 의해 2성은 중서문하성(문하시중), 상서성으로 회복되었으나, 6년 뒤 옛 이름인 도첨의부(첨의정승 - 첨의시중)로 통합되었으며, 7년 뒤 문하부(문하시중, 문하좌우시중이 부수상)가 되었다. 우왕 때 시중인 최영이성계의 쿠데타로 물러나자 문하좌시중이었던 이성계가 문하시중, 문화우시중이 된 조민수가 수문하시중이 되었다. 밀직사 역시 공민왕 5년 추밀원으로 부활했으나 6년 뒤 다시 밀직사로 낮춰졌다. 대언은 고치지 않았다가 조선왕조에 가서야 승정원으로 고쳐진다.

하지만 이런 변동에도 불구하고 실질적 문제는 군사문제만을 논하던 임시기구 도병마사(성종조엔 병마사)가 변환된 도평의사사에서 처리하게 된다. 이는 조선의정부로 이어지며, 흥미롭게도 도병마사의 지위변화는 조선 후기에 군사 임시기구였던 비변사가 의정부를 대체하게 된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4.2. 지방행정[편집]

고려의 지방 행정 구역은 최초에는 8목이었으며, 성종(995년) 때는 당나라를 모방한 10도 12군 체제였다. 10도는 관내도(關內道, 개경의 수도권, 중원도(中原道), 하남도(河南道), 강남도(江南道), 영남도(嶺南道), 영동도(嶺東道), 산남도(山南道), 해양도(海陽道), 삭방도(朔方道), 패서도(浿西道)이었다. 한편 12군은 8목에서 늘린 12목에서 명칭을 바꾼 것으로, 양주(楊州)·광주(廣州)·충주(忠州)·청주(淸州)·공주(公州)·진주(晋州)·상주(尙州)·전주(全州)·나주(羅州)·승주(昇州. 훗날의 순천시해주(海州)·황주(黃州)로써 이 도시들은 조선 시대까지도 지방의 중심도시 역할을 수행했다. 조선 태종 때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州가 붙은 도시들이 많다는 이유로 이를 山 또는 川으로 변경했는데, 이 도시들은 대부분 州 호칭을 유지한 것도 알 수 있다. 또한 도읍 개경에 고려가 계승한 고구려의 도읍 서경(평양성)에 더해 신라의 도읍 서라벌이었던 경주시동경으로 삼아(성종 6년) 삼경을 이루었다.

이후 현종 때는 5도 양계경기 체제로 변경되었으며 5도는 경상, 전라, 양광(양주, 광주. 오늘날의 경기도, 충청도), 교주(오늘날의 강원도 영서), 서해(오늘날의 황해도)이며 양계는 북계(오늘날의 평안도)와 동계(오늘날의 강원도 영동과 함경남도)였다. 경기는 수도 개경 주변을 일컬었다. 정확히 말해 경기'도'가 아니다. 이 당시 고려는 경기를 도와 별개의 지역으로 설정했다. 비슷하게 과거 일본의 행정구역도 기(畿)와 도를 구분해서 크게 5기 7도의 행정구역(홋카이도가 추가된 뒤 5기 8도)으로 나누었다. 경기 지역은 오늘날의 개성, 개풍, 장단, 연백 일대였다. 고려 말에는 경기가 더욱 확장되어, 현재의 황해도(북한이 설정한 행정구역으로는 황해북도) 일대 및 경기도의 한강 이북 지역이 편입된다. 서경(평양)과 그 인근 지역에는 서경기를 설치했으나 묘청의 난 진압 후 서경이 푸대접을 받게 되면서 폐지됐다. 문종 21년에는 삼경에 더해 양주의 일부에 남경(지금의 서울특별시)을 설치했다. 그러나 동경이 잦은 반란으로 강등되어 실제로는 그대로 3경 체제였다.

서경, 남경, 동경은 각각 삼국시대 삼국의 수도였던 곳과 대략 일치한다(서경-고구려, 남경-백제, 동경-신라). 애초에 동·서경은 각각 신라와 고구려를 염두에 두고 지정했으니 당연한 것이었다. 남경은 백제와 무관하게 터가 좋아 나중에 지정한 것이지만... 어차피 서울 일대가 백제의 수도였던 건 개로왕 때까지만이었으니 백제를 고려해서 현재의 서울 일대를 남경으로 지정할 리도 없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백제의 위례성이 들어섰던 것으로 추정되는 일대는 조선시대 한성부의 행정구역 밖이었을 것으로 보이고 고려시대 남경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온조왕이 초기에 수도 위례성을 한강 이북에 지었다가(이것을 일명 하북위례성이라고 함) 온조왕 14년(기원전 5년)에 다시 한강 이남으로 완전히 옮긴 것으로 보인다(이것을 일명 하남위례성이라고 함). 보통 풍납토성몽촌토성을 하남 위례성 일대로 보고, 하북 위례성은 유적이 없어서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으나 도봉구에 있었다는 추정이 있다. 이 추정이 맞다고 치면 위례성 일대가 현재의 서울로 편입된 건 오래되지 않았으므로 고려 남경=백제 위례성이라고 하기 곤란하다.

5도는 그 아래에 주현과 속현이 있었는데, 주현은 규모가 큰 도시에 지방관이 파견된 고을을 말하고, 속현은 그 주현의 지휘를 받는 지방관이 없는 고을을 가리킨다. 고려시대는 주현보다는 속현이 많았다. 심지어 조선 초까지도 속현이 존재했다. 지방에 외사정을 파견한 신라보다 중앙집권체제가 철저하지 못했다. 고려의 태생자체가 호족들이 연합해서 세워졌기 때문이다. 도 아래에는 군, 현이 주를 이루었으나 특수행정구역은 향, 소, 부곡도 있었다. 이것들은 주로 천민들이 거주하는 지역이었는데 종류에 따라 수공업과 농업 기능을 가졌다고 2011년 기준으로 2 ~ 3년 전까지의 국사교과서에서 말해 왔다. 하지만 전부터 향, 소, 부곡민에 대해선 논쟁의 대상이었다. 학계에서는 이미 1960년대 이래 향, 소, 부곡민이 양민이었다는 설이 나오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향, 소, 부곡이 천민이 아니라 신량역천, 즉 천민의 일을 하던 양인들이 살던곳이라고 하는 주장이 나온다. 이것은 양인에 대한 해석에서 나온 것인데 양인은 국역을 지고 독립된 가호로서 존재하여 개인에 종속되어 국역을 지지 않는 천인과는 구별된다. 부곡민의 경우 중국의 부곡과 달리 주가의 호적에 부적되지도 않았던 데다 국가에 각종 공역을 지고 있다. 이는 분명 천인과는 다른 모습이다. 향, 부곡은 농사를 소는 수공업을 생산하는 기능을 한다는 해석이 발표되었다. 또 소에선 일부만 수공업에 종사하고 소의 주민 대부분은 농사를 짓는다는 설도 존재한다. 또 소에서 수공업을 하는 주민은 소의 주민이 아니라 진정한 소의 주민은 농사를 짓는 주민들이란 설도 존재한다. 실상 사료가 적은 탓에 이리저리 많은 설들이 난무한다. 이러한 특수지역은 고려 말이 되면 주민들의 저항과 생산력이 발전하면서 사실상 향, 소, 부곡제도가 붕괴되어 다른 지역과 실질적으로 차이가 없어졌다. (웅진지식하우스, <미래를 여는 한국의 역사>참조)

양계(북계, 동계)는 특수 군사지역으로 그 아래에는 군현 대신 도호부와 진이 있었다. 속현이 많은 5도 지방과 다른 점은 대부분 진에 지방관이 파견되었다는 점인데 국방을 위해 당연한 조치라고 할 수 있겠다. 5도 양계였던 시절 동계는 특이하게 국경선에서 한참 떨어진 현재의 강원도 영동 지방까지 관할 지역으로 걸쳐 있었는데, 이는 여진족 해적들 때문이었다.

수도인 개경 외에도 따로 부(副)수도들이 존재했다. 흔히 고려 3경이라고 부르는데 사용되는 맥락에 따라 개경+부수도 2곳('개경, 서경, 동경' 또는 '개경, 서경, 남경')을 가리키거나 개경을 제외한 나머지 세 곳(서경, 동경, 남경)을 지칭할 수도 있다. 개경을 포함한 3경에는 동경과 남경이 동시에 들어간 적이 없어서 시대에 따라 둘 중 하나가 빠졌다가 다시 포함되었다가를 반복했다.

고려 초기의 행정구역. 성종 때의 10도 구역.
파일:attachment/고려/고려10도.jpg

고려 5도 양계천리장성
파일:2BF8McN.jpg

고려 후기의 행정구역. 북방으로 영토가 확장되는 등 변동이 있어서 양계가 없어지고 대신 동북면(고려 말 이성계의 본거지로 유명)과 서북면이 설치되었다. 그리고 경기 및 각 도의 행정구역에도 여러 변동이 있었다.
파일:attachment/고려/여말_행정구역.png

4.3. 군사[편집]

고려의 군사제도는 중앙군은 2군 6위, 지방군은 주현군과 주진군 체제였다. 2군은 응양군과 용호군이었는데 국왕 직할 친위 부대였으며 6위는 좌우위, 신호위, 흥위위, 금오위, 천우위, 감문위로 경기 지방 방위를 담당했다. 평상시는 외적 침입보단 중앙의 치안과 내부 반란 억제의 의미가 컸다. 이는 이후 조선의 5위 혹은 5군영 체제도 마찬가지다. 무신정변을 일으킨 군사집단이 이 중에서도 국왕 직할 친위인 2군이었다. 군인 주체에 대해서는 사료 부족으로 인해 군반씨족설, 부병제설, 절충설 등이 나오고있다. (역사비평 편집위원회,'논쟁으로 읽는 한국사1', 역사비평사, 2009, p188-189)

지방군은 5도 지역의 군대는 주현군, 양계 지역의 군대는 주진군으로 분리 운영되었다. 양계 지역은 북쪽 지방의 북계와 동계로써, 여진족이나 거란족(요)과 경계를 맞대고 있는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다. 다른 주현군은 군역보단 요역이 주였던데 반해, 주진군은 군역이 당연히 주였을 것으로 보고있다.

그러다가 퇴색되고, 도방, 삼별초 등의 사병집단이 생겨나 이들이 실질적인 군사 집단이 됐다. 고려 말기 공민왕 시기에는 정예군인 사병과 징병군인 익군(농민군)을 주축으로 운영됐다.

거함거포(?)에 심취해서 고려의 대포와 배는 높게 평가받았다. 몽골군이 1차 일본원정실패 이후 "남송의 배는 금방 부서지는데, 고려의 배는 튼튼하니 다시 일본을 공격할수 있다"고 평가했으며, 일본은 몽골군을 몰아낸뒤 설욕을 위해 고려를 치려고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일본 배로는 상륙하기도 전에 고려 해군에 다 박살날 처지라 포기했다고 한다. http://idealist.egloos.com/5139482

후에 조선왕조에 의해 왕도(王都)로 승격되고 대한민국의 수도로 있는 서울도 이 때까지는 지방도시였던지라, 개경에 비해서 크게 밀리는 편이었다. 물론 단순한 지방도시는 아닌 삼경 중 하나인 남경이긴 했지만 지금과 같은 그런 큰 지위를 가지지 않은 곳이었다. 이런 곳이 후에 조선왕조에 들어서 왕도로 지정되어서 600년 전통의 대도시가 될 줄은 이 때까지만 했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4.4. 경제[편집]

고려는 창업군주 왕건부터가 상업으로 세력을 키운 호족 가문 출신으로 국초부터 상업을 보호 육성했다. 태조 2년(919)에 개경의 궁성 동문인 광화문에서 남대가(南大街)를 따라 십자가(十字街)에 이르는 중심 도로변에 시전이라는 시장을 설치했고 여기서 지배층 및 사찰과 연계된 상인들이 상업 활동을 했다. 고려 말을 기준으로 개경에는 최소한 1,200여 칸 이상의 시전 행랑에서 2,400~3,600명 이상의 시전 상인이 영업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정부는 시전 운영에 적극 관여해서 각 시전의 판매 품종을 지정했고, 활동하는 상인에 대한 장부를 만들어 철저히 관리했다.(고려사 권85, 지39, 형법2, 금령, 공양왕 2년 4월).

시전 이외에 국가에서 운영하는 주점, 다점(찻집), 식미점 등 관영 상점이 있었는데 이들은 화폐의 민간 통용을 장려하기 위한 시설로 이용되었다. 상행위를 감독하기 위해 경시서를 설치했고, 경시서는 도량형을 감독하고 물가를 조절하며 불법 상행위를 단속하는 일을 했다.

개경서경, 동경 등 전국의 주요 도시에도 개경의 시전과 비슷한 관영 상가가 있었고, 전국 각지에 비상설 시장인 장시(場市)가 열렸다. 고려시대에는 최소한 조선 초기보다 훨씬 활발하게 장시가 운영되었다.

조선은 개국과 함께 억상 정책의 일환으로 초기에는 지방에 장시가 열리는 것을 금지하였다. 그러나 일상생활에 필요한 물품에 수요가 없을 수가 없으므로 조선 초기를 지나 1470년경부터 전라도에서 다시 장문(場門)이라는 이름으로 태동하기 시작해 조선 중후기에 다시 활발하게 열리게 되었다.

고려의 경우 송나라 사람 서긍이 1123년(인종 1년)에 사신으로 개경에서 한 달을 체류한 후 돌아가 쓴 『고려도경』에 아래와 같은 글귀가 있다.

고려의 고사(故事)에, 매양 사신이 이르게 되면 사람들이 모여 큰 저자를 이루고 온갖 물화를 나열하는데,… (중략)… 대개 그 풍속이 사람이 살면서 장사하는 가옥은 없고 오직 낮에 시장을 벌여(惟以日中爲虛) 남녀・노소・관리・공기(工技)들이 각기 자기가 가진 것으로써 교역하되 돈을 사용하는 법은 없다. 오직 저포나 은병으로 그 가치를 표준하여 교역하고,… (중략)… 그러나 백성들은 오래도록 그런 풍속에 익숙하여 스스로 편하게 여긴다.
(고려도경, 권3 무역)


위 인용문 중 ‘허(虛)’는 허시(虛市), 즉 장시를 의미하는데 특정한 시설물이 없이 빈 터에 장이 섰다가 사라졌기 때문에 허시라고도 했다. 지방의 장시에서는 고려 정부에서 찍어내는 화폐보다는 쌀과 포로 매매가 주로 이뤄졌다. 고려시대에는 여행객의 편의를 위해 조성된 원(院)이 발달했는데, 이 원은 상인의 숙박시설을 넘어 그 자체가 상업 중심지가 되기도 했는데 예를 들어 한강광주의 사평원은 많은 배가 오가는 중요한 교역처였다. 고려의 지배 이념이자 종교였던 불교 역시 상업 활동에 호의적이고 사찰이 상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고려 말기 개혁파 신진사대부들은 성리학적 상업관(억말론, 抑末論)에 입각해 상업 활동에 비판적이었고 백성들이 농업에 집중하기를 장려해 왕조 교체를 거치며 상업 정책도 방향을 달리하게 되었다.

고려시대의 무역은 공무역 중심으로, 통일신라 시기보다 사무역은 쇠퇴하였으나 화북의 이민족 왕조를 견제하기 위해 고려에 어느정도 의존하는 송의 외교 상황과 맞물려 문화적 교류는 더욱 활발하였다. 개경에는 벽란도라는 무역항이 있어서, 이곳에서 무역이 상당히 활발했으며 이슬람 상인들까지 거쳐갔다고 한다.

한국의 비한자계 외국어 명칭이 코리아(Korea)가 되어 조선시대를 거쳐 현대까지 사용되는 것도, 이때 이슬람 상인들이 '고려'를 그들 식으로 발음한 것이 어원이다.

여기에는 이설도 있다. Korea란 명칭이 서역에 알려진 것은 751년 탈라스 전투고구려 유민 출신인 고선지의 용맹함이 이슬람 연합군에 알려지면서라는 설이다. 사실 고려와 고구려는 같은 말인데, '구려'는 옛말로 성, 읍, 나라의 뜻을 가진 단어고 그 줄임말이 '려'다. 이는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기 이전 중국 사서에서도 고구려를 고려라 표기한 흔적에서도 나타난다.

대신 고려가 이슬람 사서에 기록된 것은 총 2회뿐이다. 물론 사서에 명시되지 않았다고 비중이 적어졌다고 보긴 힘들 것이다. 앞서 말한 송나라의 상황이나 코리아의 근원, 쌍화점을 보면 민간에 끼치는 영향은 적지 않았을 수준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전대의 신라에 비해 최소한 사서에서 나타날 정도로 공사에 중시되지 않았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특히 원나라 때에 와서는 공무역적인 사례는 아예 없어지고 사무역이나 외국인 거주 역시 사실상 없어지는 수준이 되는데, 이는 무슬림들이 제 2계급으로 광저우 등 황해지방 도시의 지방관으로 자주 임명되었음에도 원의 시박사에서 이슬람 상인들의 무역을 통제했기 때문이다.

고려가 가장 빈번하게 교역한 나라는 송나라였다. 중국과의 교류에서 주로 압록강을 건너는 육로를 택했던 조선시대와 달리 고려시대에는 초기에는 산둥 반도의 등주에서 거의 직선 코스로 대동강 어구의 초도, 옹진, 예성강으로 이르는 길이 중심, 그리고 거란족의 위협을 느낀 이후로 전라도 방향으로 항해하기도 했다. 활발하던 양국 간의 무역은 남송 시대 이후 차츰 쇠퇴했다.

거란과는 초창기 이후 국교를 트긴 했지만 교역은 송나라 방면에 비해 활발하지 않았다. 거란은 무역장 설치를 요구하는 등 비교적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고려의 반대로 각장무역이 폐지되었기에, 양국의 무역에서는 조공 무역의 비중이 컸다.

고려와 여진족의 교류는 금나라가 성립되기 훨씬 전부터 있었는데, 고려사에 따르면 10세기 초반에서 11세기 초반까지 여진의 추장이 무역을 위해 고려에 온 것이 230여 회나 될 정도로 자주 왕래했다.고려로서는 경제적 부담이 있었지만, 안보적 측면을 고려해 여진과 교역했다. 금나라 건국 후에는 거란 때와는 달리 국경선 부근에 무역장(각장)을 설치해 비교적 활발하게 교역했다.

상술했듯 고려시대에는 아라비아(대식국)인과의 교역도 종종 이루어졌는데, 당송시대 이래로 무슬림들은 광저우 등 남중국을 중심으로 무역을 했으며, 송나라는 중국 역사상 가장 해외 무역을 장려하는 왕조였기에 이들이 고려에까지 진출했다. 1020년대에서 1040년대에 걸쳐 3차례 100여 명의 대규모 상단이 방문한 것이 확인되며 그 이후에도 계속된 것으로 추측되는데 수은, 향료, 상아 등 고려에서 귀한 사치품을 팔았다. 그러나 아라비아 상인단은 송나라의 시박사(市舶司)의 통제를 받았기 때문에 고려와 1대 1로 활발하게 교역하기는 어려웠고 주로 송을 매개로 간접적으로 교류하는 쪽이 주류였다.

훗날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세워진 후에도 주변 국가인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조선을 가리켜 여전히 '고려'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성계주원장과의 알력으로 명나라 황제의 책봉을 받지 못하자 왕건 때부터 전해 내려온 '고려권지국사'라는 명칭을 사용한 적도 있다. 당나라가 망한 뒤에도 일본에서 중국을 여전히 당이라고 부른 것이나, 진나라가 망했음에도 중국이 차이나라고 불리는 것과 같은 이치. 조선 측에서는 이러한 이름을 부담스러워 해서 홍보도 해보았지만[19] 결국 대외적으로 한반도 국가를 가리키는 명칭은 고려에서 비롯된 비한자 계통 외국어이름인 'Korea'가 되어버리고, 심지어는 지리적 지형 자체가 '고려 반도'라는 뜻의 'Korean Peninsula'로 굳어져버렸다. 이는 현대에도 비슷하게 반복되어 대한민국에서 '한반도'나 '한민족'이라는 표현을 열심히 밀고는 있지만 아직까지 한자문화권에서는 '조선 반도', '조선 민족'이라는 표현을 더 자주 볼 수 있다.

원 간섭기에 들어서 고려는 세계 제국 원나라와 단일 경제권에 속함으로서, 고려 후기의 대외 교역은 그 양적으로 현대 이전 한국사의 어느 때보다 활발했다. 원나라의 지폐인 보초가 고려에서도 활발히 사용되었다.

4.5. 고려는 황제국인가[편집]

먼저 '황제란 무엇인가' 라는 것부터 따져야 한다. 일반적으로 동아시아 문화권의 황제라 함은 하늘의 뜻을 받들어 이 세계를 통제하는 군주를 말한다. 고로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있고 하늘의 법칙을 담은 역법을 제정, 연호를 정할 수 있다. 그리고 하늘의 뜻을 받든 군주와 국가라 주변 국가보다 우위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한테서 조공도 받을 수 있고 주변 제후국들에게 자신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게 할 수 있고 사후 종, 조와 같은 묘호를 갖는다.

또한 주변에 제후들과 자신을 차별화하기 위해 독자적인 용어를 사용하는데 황제, 폐하, 태자, , 칙령, 만세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며 이는 제후국의 용어인 왕, 전하, 세자, 과인(또는 고), 하교(下敎), 천세 등의 용어와 대응한다. 그리고 그 밑의 관료기구 역시 황제국에 맞게 3성 6부제를 이용하기도 한다.

고려의 경우는 황제국, 제후국 체제 양자를 모두 채택한 외왕내제라고 할 수 있다. 안에서는 황제라 칭하고 밖에서는 왕이라고 한 것이다. 고려 말부터 원나라의 간섭을 크게 받으면서 안에서도 황제라 칭하기 어렵게 됐지만... 이는 국내 사학계의 정설이기도 하다.

고려가 황제국 체제를 지향한 것은 사료와 금석문을 통해 드러난다. 고려사엔 태조가 "천수(天授)"라는 연호를 사용했고, 4대 광종(光宗)은 "광덕(光德)", "준풍(峻豊)"란 연호를 사용했다고 나온다. 고려 경종 때 만들어진 하남 교산동 약사여래상엔 "금상황제만세원(今上皇帝萬歲願)"이란 표현이 있다. 고려사에서는 현종 때의 장군이 현종에게 "폐하"라고 칭하는 부분이있고 인종 때에는 왕에게 표문을 올릴 때는 "성상 폐하", 태자한테는 "태자 전하"라고 임금과 태자를 부르는 경칭을 통일하자는 상소가 있었다. 이 예로 삼국사기 서문에서 김부식은 인종의 경칭을 "성상 폐하"라고 쓰고 있다.

이 밖에도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원구단을 가졌으며 도성 성문도 5문으로 황제국과 그 격이 같다. 황제만이 입을 수 있다는 황색 의복들을 고려 초부터 원 간섭기 이전까지 입었으며 종, 조와 같은 묘호도 사용했고 , , , , 과 같은 오등작도 시행했다. 또 고려왕은 팔관회를 통해 여진족, 일본, 북송, 탐라 사신과 상인을 불러들여 조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대놓고 황제국이었냐면 그건 무리가 있다. 우선 고려는 후주, 북송,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에 조공을 바치고 그들의 연호를 쓴 제후국이다. 칭제건원을 노골적으로 표시한 기간은 광종 대만이며, 그것도 몇 년 되지 않았다. 이후 인종 때 묘청 일파가 칭제건원을 해야 한다고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킬 정도였다. 진공대사탑비같은 금석문에서는 황제가 아닌 왕이란 표현이 나온다. 봉작제도 문종이 오등봉작제를 만들기 전엔 봉군제와 태자 칭호까지 섞어서 썼다 . 성종때는 제후국 태묘방식인 오묘제를 설립했다가 지속적으로 개수되어 의종 때 황제국의 칠묘제로 바뀌게 된다.

이렇듯 고려는 황제국과 제후국의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중간 형식을 취한다.

이렇게 된 이유엔 다음과 같다. 우선 고려가 3성 6부제(정확히는 2성 6부제)를 시행한 이유 굳이 황제국을 지향해서라기 보다는 당나라의 제도를 그대로 받아들인 탓이 크다. 왜냐하면 3성 6부보다 격이 낮은 제후국의 예가 아직 없었기 때문이다. (출처필요)

그리고 완전한 황제국 체제를 지향하기엔 주변에 강국들이 많았다. 따라서 고려는 외부 과시보다는 본래 전 왕조들이 쓰던 것들을 계속 쓰거나, 내부의 왕권 강화를 위해 외왕내제(外王內帝)의 형식을 취했다고 볼 수 있다. 고려 의종을 일본에서 황제라고 부른 기록이 있긴 한데, 그건 조선 성종에게도 그랬다. 물론 미나모토노 토시후사의 수좌기 4년조(1080년)에 '고려국 황제' 라고 분명하게 언급해서 의종 관련 기록이 단순 립서비스에 불과했다고 보긴 무리이기도 하지만 말하자면 그렇다.[20]

또한 고려 지배층의 천하관이 대체로 일치하지 않고 나뉘어 있었던 것도 고려가 외왕내제를 취하는 원인이 되었다. 고려 지배층의 천하관은 대체로 국수주의적 천하관, 다원적 천하관, 화이론을 들 수 있다.

국수주의적 천하관은 쉽게 말하면 '우리가 최고'라는 천하관으로, 그렇기에 대외적인 칭제건원에도 긍정적이었다. 이러한 천하관을 지녔던 세력으로는 광종 대의 조정이나 묘청 일파를 들 수 있다.

다원적 천하관은 각 국가마다 자신의 천하를 가지고 있다는 주장으로 말하자면 송나라에는 송나라의 천하가 있고, 요나라에는 요나라의 천하가 있으며, 금나라에는 금나라의 천하가 있고, 고려 역시 고려의 천하가 있다는 것으로, 고려의 군주는 고려의 천하 안에서 천자라는 것이다. 이는 전 왕조인 고구려의 천하관과 유사하다. 이러한 천하관을 지닌 자로는 제왕운기이승휴가 있다.

화이론은 말 그대로 중국의 중화사상을 그대로 받아들인 천하관으로, 고려 역시 오랑캐이기 때문에 고려는 제후국의 예를 갖추어야 한다고 보았다. 고려에서 유명한 화이론자로는 시무 28조를 올렸던 최승로를 들 수 있다.

원 간섭기 이전까지 고려 지배층의 천하관은 이 셋으로 나뉘어져 있었으며, 최승로가 활약했던 성종 대에는 잠시 제후국을 자칭하기도 했다. 하지만 고려의 지배층 다수는 다원적 천하관을 가졌던 것으로 보여 황제국 체제를 표방하는 데 거부감은 없었으나, 대외적으로도 황제국을 자칭하기에는 위에서 언급한 대로 주변에 강국들이 너무 많았기에 외왕내제 체제를 선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위에서 화이론의 대표주자로 쓰인 최승로 역시 완전한 화이론자로 보기 어려운데 그는 경종의 즉위를 "천위(天位)를 이었다"고 표현했고 경종의 형제를 "황가의 나뭇가지와 잎사귀(皇家之枝葉)"로 표현했다. 또 다른 화이론자로 알려진 김부식도 "낙랑국 개국후" 작위를 받았고 상술했듯이 인종에게 "폐하"라고 불렀으며 삼국사기를 황제의 역사서인 "본기(本紀)"로 서술했다.

말하자면 고려는 명분이 있는 중화권 국가인 북송, 그리고 무력이 강한 요나라, 금나라에게만 한 수 접어서 제후의 예를 표했으며, 이 외에 탐라[21], 금 건국 이전의 여진족, 일본 등에게는 황제국의 예로써 표했다.

즉, 고려 임금이 실제로 내부적으로 황제를 간간이 칭한 것은 사실이 맞고 왕이라 한 경우에도 내부 격식을 황제급으로 한 경우가 많긴 했지만 대외적으로 중화권 국가를 상대로 황제국이라고 공표할 정도로 노골적으로 칭제했던 것은 아니었고, 이는 역시 황제국 체제라기보가는 외왕내제 체제라고 보아야 한다. 비슷한 사례로는 베트남 응우옌 왕조의 황제들이 있다. 이들도 베트남 내부에서는 스스로 황제라 칭했지만 중국 청나라에게는 제후국을 자칭했다.

그냥 고려는 부단히 황제국체제를 유지하려고 노력했을 뿐이다. (탐라, 여진족이라는 제후국이 있지만 여진은 금나라로 성장하여 고려에 형제국관계를 요구하며 스스로 고려의 형임을 자청했다는 것이 함정..)

4.5.1. 금석문, 외교문서 종합[편집]

  • 금석문

황제(皇)께서 피석하여 공경을 다하였고...


『봉암사정진대사원오탑비』 (965년)


황제(皇帝) 폐하(陛下)께서 조칙을 내려 이르기를... 우리 황제(皇帝) 폐하(陛下)께서도 지극하신 정의로...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비』 (975년)


금상황제(今上皇帝)의 만세를 기원합니다.


『태평2년명마애약사불좌상』 (977년)


봉황(鳳皇)의 은혜를 입었으며...


『연곡사현각선사탑비』 (979년)


황제(皇)께서는 이에 크게 감동하고... 황유(皇猷)입음을 경축하여...


『지곡사진관선사비』 (981년)


광종대왕(光宗大王)이 황위(皇位)에 올랐다.


『거돈사원공국사승묘탑비』 (1025년)


엎드려 황제(皇帝) 폐하(陛下)의 덕이 하늘과 땅에 떨치고..


『보현사석탑』 (1044년)


황상(皇上)께서 결(訣) 패일(佩日)...


부석사원 『융국사비』 (1053년)


황상(皇上)께서 천조(踐祚)에 오르시던 병술년 봄 정월에 이르러...


『칠장사혜소국사비』 (1060년)


성황(聖皇)께서 국척 원신을 지극하게 기리는 것이다.


『이자연묘지명』 (1061년)


무릇 우리 황제(皇)의 아들들은 모두 공의 생질이 되니... 황태자(儲皇)와 후비, 친왕 등에 이르러서는...


『이정묘지명』 (1077년)


공이 황후(皇后)의 인척이므로 더욱 총애하여... 황후(皇后)가 안에서 공을 불러...


『최계방묘지명』 (1117년)


5남 응추는 황자(皇子)인 극세승통에게 의탁하여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다.


『이식묘지명』 (1156년)


황태자(儲皇) 역시 그 아름답고 고움을 슬피 여겨 특별히 제물을 내리고 각별히 총애하는 뜻을 보였다.


『왕영녀왕씨묘지명』 (1186년)


때는 황상(皇上)께서 즉위하신 원년 모월 모일이다.


『개천사석탑』 (1214년)


황태제(皇太弟)가 바로 신종(神宗)이다.


『최충헌묘지명』 (1219년)


(거란의) 천자는 공(公)[22]이 우리 황제(皇)의 친족이고 또한... 칙명으로 특별히 잔치를 베풀어주니, 거란 사람들이 아름다운 일이라고 칭송하였다.


『최의묘지명』 (1223년)


중성(中城)을 ?해서 '황도(皇都)의 울타리로 삼았다.


『최항묘지명』 (1257년)

  • 대외 관련 내용


-금나라(여진족) 관련 기록

신은 일찌기 식목집사가 되어 도감의 문서를 보다가, 우연히 금나라 조서 2통을 얻었다. 그 서문에 대금(大金) 황제(皇帝)는 고려국(高麗國) 황제(皇帝)에게 글을 부친다 등등 으로 이르고 있으니, 이는 형제를 맺은 확실한 증거인 것이다.


《제왕운기》 (1287년)


-일본 측 기록

고려국(高麗國) 황제(皇帝)가 첩장을 헌상했다고 대재수가 전했습니다.


미나모토노 토시후사의 '《수좌기》 조랴쿠 4년 (1080년)'


5. 문화[편집]

고려/문화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 외교[편집]

고려의 외교는 초중기의 전성기에는 탄력적인 줄타기 외교를 통해 슈퍼 을로 군림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중국 송나라는 명목상 고려의 상국이었으나, 끝없이 북방 유목민족국가의 위협을 받으면서 그런 북방민족을 후방에서 견제할 수 있는 고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기 때문. 슈퍼 을질이 너무 심해서 소동파는 고려를 매우 싫어하고 비판했으나, 그조차도 의천가이드 노릇을 하기도 했다(...) 흔히 이 부분을 병자호란으로 이어진 17세기조선의 외교적 실패와 비교하여 찬양하는 것이 일반적 인식이다. 자세한 사항은 북송 문서의 고려와의 관계 단락 참조.

고려 초기에 북쪽 국경을 마주했던 거란에 대해서는 인식이 좋지 않았고, 창업군주왕건만부교 사건훈요 10조를 통해서 거란과 친교를 맺지 않겠다는 의지를 대놓고 천명했다. 거란은 고려로 가는 길목의 발해정안국을 차례차례 정복한 후 여요전쟁을 일으켰고, 고려는 이를 격퇴하는 동시에 한때 겉으로 숙이는 외교적 기만책을 펼치기도 했지만 줄곧 송나라 방면 외교를 중시했다. 여진족의 경우 한때 기미정책으로 접근하기도 했지만 거란을 대체해 금나라가 북방의 패자가 되자 금나라의 외교적 우위를 인정하고 전쟁을 피했다.

일본과의 외교가 매우 활발했던 삼국시대나, 삼국시대만큼은 아니지만 상당한 정기적 교류가 있었던 남북국시대와 달리 고려시대 들어서 일본과의 관계는 매우 줄어들기도 했다. 사실 신라 말기~후삼국시대와 동시대에 일본 역시 큰 정치적 변동을 맞았고, 갈수록 국풍이 강화되는 변화가 있었다. 그래도 문종 10년(1056) 일본 사신이 고려에 온 것을 계기로 교역은 어느 정도 이루어졌고,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시인 금주 객관에서 담당하였다. 그러나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으로 반고려감정이 생기고 고려 말 왜구의 침입으로 교역이 거의 단절되었다.[23]

7. 평가[편집]

7.1. 최초의 자력 통일과 단일국가관[편집]

일찍이 신라삼국을 통일할 때 당나라 같은 외부 세력을 끌어들인 것과 달리, 왕건의 고려는 한반도 최초로 완전한 자력 통일을 성취한 나라로 잘 알려져 있다.

고려 역시 거란 등 외부 세력과 손을 잡을 의지가 없었기도 하지만, 당시 당나라만주 역시 후삼국에 버금가는 난세일본덴노 권력의 약화와 고립주의로 나아가고 있었기에 한반도 정세에 개입할 여력이 없었던 덕분이기도 하다. 이런 고려의 태도와 달리 고려와 겨루던 후백제거란, 일본과 힘을 합쳐 고려를 쌈싸먹으려고 열심히 해외에 사신을 보냈다. 그러나 일본에 보낸 사신은 문전박대당했고 거란에 보낸 사신단은 고려 해역을 피해 먼 바다로 다니다보니 풍랑을 만나 적국에 표착해서 모두 죽임을 당했다.

신라의 삼국통일이 삼국을 처음으로 하나로 묶는 계기가 되었으나 신라 정권은 당대 사람들의 의식까지 완벽하게 통합하는 데에는 실패했기에 후삼국 분열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에 비해 고려는 패서지역 기반의 성인인 단군, 기자, 동명성왕을 시조급으로 끌어올리고 이들을 통해 삼국 유민들의 의식적 통합을 이뤄내는 데 성공해 단일공동체라는 관념을 완성시켰다. 덕택에 단군과 기자가 통치한 고조선은 삼한에 건립된 최초의 국가이자 시조국으로 공인되었고,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성왕은 부벽루, 동명왕편 등의 고려시대의 각종 문학 작품에 등장하게 된다.

신라에서는 처음에는 박혁거세를 시조로, 김씨가 왕조를 독점한 후부터는 김알지 혹은 성한왕을 시조급으로 섬겼다. 신라의 시조의식은 여러 세력이 난립했던 초기 역사와 마찬가지로 매우 복잡하다. 따라서 신라가 의식적 통합까지도 성공했다면 한민족의 시조가 적어도 단군은 아니었을 것이다.

즉 이렇게 고려시대에 형성된 역사의식과 단일공동체 관념은 조선시대를 거쳐 현대까지도 이어지게 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고려의 통일 이래 한국은 다시 국가 단위로 나뉘는 일이 없었으며, 한반도에 사는 동일한 모국어 문화를 공유하는 한민족이라는, 현대까지도 이어지는 국가 관념의 기틀을 성립해냈으므로, 한국사에 고려가 끼친 영향력과 가치는 그야말로 지대하다.

7.2. 고구려 계승[편집]

고려는 개국시부터 고구려 계승을 표방해 국호를 아예 고구려에서 따왔고 관찬사서인 삼국사기에서도 고구려를 본기에 포함시켰으며 단순히 표방한 것을 넘어 실질적으로도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을 중요시 해 제2수도(서경)로 삼고 서희의 담판을 통해 고구려 계승을 국제적으로도 공인받았다. 게다가 잊혀질 뻔 했던 동명성왕을 시조로 공인해 다시 국가적 숭배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이로써 고구려사가 중국사보다는 한국사에 깊은 관계를 맺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국가이념적이나 문인의 의식적으로는 고구려 계승 의식이 제법 유행하였으나 12세기를 제외하면 세기마다 국가 단위의 외세와 맞서야 했던 고려에게 북진정책은 요원한 일이었다. 게다가 유교적 정통사관이 수입되면서 신라 계승 의식 또한 유행하였다. 물론 그렇다고 고구려를 아예 버리는 건 아니고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먹어서 한반도의 정통 왕조가 되었고 그 신라를 먹은 고려가 바로 진정한 정통 왕조라는 식의 관념이었다.

보통은 외세와의 전쟁시에 고구려 계승 의식이 상승했다. 요나라(상대적으로 강한 외세): 고구려 → 금나라(상대적으로 약한 외세): 신라 → 대몽항쟁기: 고구려 → 원나라 간섭기: 신라 혹은 고조선[24]으로 이동했다. 이것도 어떤 점에서는 상당히 현실적이었으며 이런 계승 의식과 관련해 구체적인 파당을 형성하여 대립을 보인 적은 없다.

그러나 예종의 여진 정벌이나 공민왕의 요동 정벌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고구려 계승 의지를 가지고 제1차 요동정벌을 비롯해 수 차례나 북방 원정을 나갔을 정도로 고구려 계승 의지는 고려 치세 내내 매우 중시되는 사항이었다.

이것이 바로 후대에서 조선과 평가가 갈리는 이유 중 하나이다. 조선은 고려보다 훨씬 나은 상황에서도 압록강, 두만강까지 진출한 후에는 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북방으로의 확장을 그다지 꾀하지 않았는데, 이것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이상을 위해 없는 힘을 쥐어짜내며 분투한 고려와 대비되었기 때문이다.[25]

이외에는 계승의식과는 별개로 지정학적 조건 자체는 지배영토가 유사한 신라보단 오히려 고구려와 유사해지게 되면서 문화적, 환경적 조건이 크게 변화하게 된다. 삼국전쟁 이후 세워진 발해는 북방민족들을 안정적으로 통제했고 패서지역을 신라와의 완충지대로 두면서 당나라-발해-신라 사이에 미묘하면서도 안정적인 균형관계가 성립하게 되기 때문에 신라는 마치 섬나라와 같은 지정학적 조건을 가지게 되어 해양국가적 속성을 발전시켜나갈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말갈을 비롯한 북방민족과는 당연히 이렇다할 교류가 없었고, 신라의 주요 외교상대는 동아시아의 어느 국가에게나 기본적으로 중요한 국가였던 당과 중심지의 위치상으로도 가장 가깝고 국가 초창기 때부터 좋든 싫든 항상 투닥거려 왔으며 사회문화적 조건이 타국에 비해 비교적 유사한 일본이었다.

그러나 고려의 경우, 중심지가 일본보단 대륙과 교통상으로 훨씬 가까운 패서지역이었고 북진정책으로 인해 거란족, 여진족 등의 북방민족들과 국경을 직접적으로 맞대게 되었으며 일본과의 교류는 거의 끊어져나가게 되면서 대면대면한 관계가 된다.

이러한 변화로 인해 고려는 고구려가 그랬던 것처럼 대륙세력과의 영원히 고통받는 항쟁의 무대에 들어서게 되고, 북방민족계통의 문화 또한 크게 유입되게 된다. 거란 잔당과의 전투인 강동성 전투 때 고려 영토 내에 직접적으로 들어와 항쟁한 거란인들만 해도 8만 명이었다. 거란의 전성기 때 벌어졌던 전쟁(여요전쟁)에서는 너무 많은 거란인들이 포로로 잡혀 남경(서울)에 포로수용소를 따로 설치해야 할 정도였다. 특히 원 간섭기에는 격변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복식, 언어, 음식 등에서 북방민족의 문화가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고려의 고구려 계승에 대해서는 무덤 양식 또한 좋은 비교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비슷한 경우로 금나라청나라의 관계를 생각해볼 수 있다. 금이 멸망하고 금의 중심세력이었던 완안씨 황족이나 중앙 귀족들은 학살당하거나 숨어살게 되면서 완전히 와해되어 버렸고, 중심세력과 한참 떨어져 방계세력이라 할 수 있는 변방호족급의 여진족들이 원나라명나라의 지배 하에 복속되어 근근히 여진족의 정체를 이어갔을 뿐이었다. 금의 부흥을 기치로 들었던 누르하치의 선조들 또한 건주좌위지휘사(建州左衛指揮使)라는 명나라의 지방관직을 대대로 하고 있었다. 또한 청나라는 내몽골을 정복하여 원나라의 국새를 얻은 후 황제국을 선포함으로써 원나라에 대한 계승 또한 강조하였다. 즉 자신들은 금나라의 후예이면서도 한때 유목세계를 통일한 원나라의 대칸위 또한 계승했다는 것이다. 중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 명나라를 정복한 후에는 중원의 천자 또한 계승하였다고 선포하였다.

따라서 금나라고구려, 원나라신라, 청나라를 고려에 대응시켜놓고 생각해보면 고려의 입장이 보다 분명하게 보일 것이다. 이건 한마디로 여러 이익집단과 현실에 대응하다보니 생긴 대응 방식이라고 봐야한다. 비슷한 사례로 오스만 제국이 있는데, 오스만 제국의 황제는 이슬람 세계에선 칼리파(종교 지도자) 겸 술탄(정치 지도자), 기독교 세계에선 로마 제국의 황제, 예루살렘에선 성묘의 보호자 등의 타이틀을 모두 갖고 있었다.

발해의 고구려 계승 의식과 비교한다면 발해는 고구려 멸망 후 얼마 안 되어 그 유민들에 의해 건립되었으므로 상대적으로 당대의 기억이 많아 시간적으로 유리하고 고려는 고구려의 중심지와 수도 및 인구밀집지를 확보하고 그 근처의 인적, 지리적 자원을 접수했기에 공간적으로 유리하다고 볼 수도 있다.

재미있는 건 두 국가 모두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의 제도를 적극적으로 차용하였기에 제도적으로 유사한 모습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현대 한국인 기호로 봐선 '당대'와 '영토'에 대한 이상한 집착이 있다. 나름 타당한 이유는 있으나 다소 비합리적인 수준에까지 다다르기에 문제가 된다. 때문에 발해가 더 고구려에 가까워보이긴 하겠지만, 정작 국제 사회에서 고구려로 더 인정을 널리 받았던 건 전자가 아닌 후자였다. 즉 계승성에서 있어서 '당대'와 '영토 일치성'이 전부가 아니란 이야기다.[26]

7.3. 용맹한 무장의 나라[편집]

문관을 우대한 고려의 통치제도와 대몽항쟁기에 원나라의 속국이 된 안습한 시절 때문에 연약한 이미지가 있으나[27] 고려의 전쟁사를 보면 의외의 모습들이 보여진다. 대륙의 대규모 침공이 빈번했고, 이에 맞서기 위해 상당한 규모의 병력을 동원해 침략국과 맞싸워 승리한 기록들이 보이고 심지어 고구려 처럼 대규모 원정을 떠난 사례도 있다.

대표적으로 3차례의 고구려-거란 전쟁을 막아내는데 성공하며 고려-거란-북송간의 3각 구도를 편성하기도 했으며, 여진 정벌을 시도하기도 했다.[28] 여몽전쟁 전쟁 때는 무참히 짖밟혔으나 1차 침공 때는 몽골 기병을 상대로 야전에서 승리를 거둔 모습이나, 일시적이나마 요동성과 주변 일대를 점령한 경험등을 보면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라는 이름이 무색해지지 않게 느껴지는 부분이다.

이처럼 외부 세력의 침입과 내전이 많았던 시대였기 때문에 군인의 수요가 컸고, 후대 조선시대에 비해 문치주의 성향이 약한 편이었기에 격구수박(무술)과 같은 실전성 높은 무술들이 국가적으로 성행했다. 정중부이의민도 무술 실력으로 왕의 눈에 띈 것이 출세의 시작이었을 정도. 무신정권까지 있던 나라라 그런지 무협지에나 나올 법한 활약을 보인 전설적인 무인들이 꽤나 많다.

  • 개국공신 중 유금필은 출동만 하면 지던 싸움도 전세가 역전되는 활약을 보였다.

  • 고려 2대 국왕 혜종은 통일전쟁 때 활약한 무인으로, 방에 자객이 난입하자 맨주먹으로 때려잡았다.

  • 여요전쟁 때 양규는 1천여명의 병력으로 6천 거란군이 지키는 곽주성을 탈환했다.이말은 즉 6배가 넘는 적을 공성전(!!!)에서 승리했다는 뜻이다. 이후 소수 병력으로 기습전을 펼쳐 거란군을 괴롭히며 3만의 포로를 구출해 냈다.

  • 문종 때는 '유고'라는 절충군 대정이 있었다. 그는 10명의 병사와 함께 저녁에 순찰을 돌다가 40여명의 여진족 도적의 습격을 당했다. 병사들은 놀라서 숨었지만 유고는 단기로 앞장서서 40여인의 여진 도적들과 맞서 싸웠고 결국 여진인들은 도망쳐 버렸다. 출처는 고려사절요 문종 3년(1049년) 6월.

  • 여진전쟁 때 활약한 한국사 최강의 소드 마스터 척준경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 무신정권의 이의민두경승수박의 고수였으며 궁궐에서 주먹으로 벽을 쳐서 힘겨루기를 한 일화가 정사에 기록되어 있다. 특히 이의민은 의종을 시해할 때 맨손으로 척추를 접어서 죽이고, 조위총을 토벌하던 전투 중 눈에 화살을 맞았는데 그래도 적진으로 돌진해 적군을 물리쳤다.

  • 경대승은 약관 (20세)에 고려 왕실 친위대 교위에 임명되고 26살에 기해정변으로 정중부를 죽이고 정권을 잡았는데, 무엇보다 그가 집권할 당시에는 (위에서 서술되어 있는 용력의 소유자인) 이의민이 그를 두려워해서 경주로 내려가 꼼짝도 하지 못했다.

  • 김경손귀주성 전투에서 12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몽골군 진영을 들쑤셔 놓고 돌아왔다.

  • 승려 김윤후는 화살 하나로 몽골군 장군 살리타이를 저격 사살했다. 후에 김윤후는 자신이 살리타이를 쏜 게 아니며, 그때 자신은 활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했다고 한다. 이후 충주성 전투에서 노비군을 이끌고 70여일을 농성하여 몽골군의 맹공으로부터 성을 지켜냈다. 이는 만화 살례탑에서 그려진다. 물론 김윤후가 사살한 것이 맞지만 겸양의 뜻으로 한 말일 수도 있다.

  • 충렬왕 때는 '한희유'라는 장군이 있었는데,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에 참전했을 때는 맨손으로 적의 칼을 빼앗아 적을 베었는데 손을 다쳤으나 그 부상 속에서도 용기를 내어 적들을 베었다. 카다안의 침입 때는 적군에 활을 잘 쏘는 적장이 있었는데 1장 8척(약 540cm!)의 창을 휘두르며 적진에 돌입하자 적들이 놀라 한쪽으로 밀렸고, 그 적장을 움켜잡아 베어 죽이고 장창에 그 목을 걸어보이자 적의 기가 꺾였다고 한다. 이 역시 전부 정사인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 최영원나라의 요청으로 중원에서 반란을 진압할때 적들에게 창에 찔리면서도 전투를 속행하여 그대로 승리하였고 국내에선 홍산 전투에서 입술에 화살을 맞은 채로 전투를 벌여 그대로 승리했다. 고려를 침공한 왜구들이 "머리 하얀 최 만호"라고 부르며 두려워했을 정도.

  • 이성계의 궁술에 대해서도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으며, 활만 잘 쏜 것뿐만 아니라 다른 무예에도 뛰어났고, 훌륭한 야전사령관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부분도 약간 비판적으로 보아야 할 것이,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라 조선 태조인 이성계를 띄워주기 위한 기록일 수도 있기 때문.

7.4. 한국사 발전[편집]

그리고 고려 때 삼국사기, 삼국유사와 같은 역사서가 편찬되서 고구려를 포함한 삼국의 역사가 지금까지도 전해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고대 한국사의 기록이 너무나도 부족한 것을 보면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존재가 그나마 역사학계에서 큰 도움이 되고있는 셈이다.

7.5. 여타 한반도 왕조들과의 비교[편집]

7.5.1. 이전 국가들과의 비교[편집]

고려/이전 국가들과의 비교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5.2. 조선과의 비교[편집]

고려/조선과의 비교 문서를 참고하십시오.(고려와 조선의 장점을 뒤섞으면 된다.)

8. 왕사[편집]

9. 고려/인물[편집]

고려/인물 문서 참고.

10. 고려사 연구의 난관[편집]

고려시대 연구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점은 사료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 시기를 다룬 주요 사서로는 조선시대에 쓰여진 고려사, 고려사절요가 있으며 동시대 북송의 사신이었던 서긍이 쓴 고려도경이 중요 사료로 꼽힌다. 고려사, 고려사절요는 조선시대에 편찬된 고려의 역사서다. 고려에도 고려실록이 있었으나 여요전쟁이나 대몽항쟁기 등의 전란 때 소실, 남아있는 실록 또한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는조선초에 남아있던 고려실록을 바탕으로 하여 만든 축약본이다.

그 외 3가지 사료 모두 편파성이 있다. 일단 조선의 입장에서 바라본 고려와, 북송의 입장에서 바라본 고려의 모습이기 때문에, 사실 그들 스스로 역사를 서술한 예는 드물다. 고려시대에 삼국을 바라본 예가 삼국사기, 삼국유사이다. 이 두 역사서는 삼국의 역사를 서술했지만 고려의 시각에서 고대를 해석한 것과 똑같은 이치이다.

그나마 세종대왕이 각별히 신경써서 편파성을 줄인 고려사와 그런 거 없는 고려사절요는 고려가 멸망한 후 조선 초기에 고려의 사초를 바탕으로 편집되었는데, 아무래도 조선건국의 정당성 홍보 요소가 제외될 수가 없다. 따라서 고려 말기의 사건들(특히 공민왕, 우왕, 창왕시기)은 여러 모로 비판을 받고있다. 거기다 요약집이나 다름없어 텍스트가 조선왕조실록과 비교해도 너무 부족하다. 이는 고려가 겪었던 여러 전란이 원인이기도 하다.

고려도경의 경우는 사신이 고려를 오가는 과정과 개경에 틀어박혀서 보고 들은 정보 위주로 송나라 황제에게 올린 글이기 때문에 주마간산이라거나 수박 겉핥기 같다. 몇 가지만 들면, 고려도경에서는 고려의 역사와 관리 등급을 설명하는 부분이 고구려와 뒤섞여 있다. 또한 서긍은 고려가 바닷가에 위치해 있으면서 선박이 지극히 단순하고 조잡하며 작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고려는 여진족 해적을 토벌하면서 일본까지 원정을 갈 정도로 선박/항해기술이 뛰어났고(과선 문서 참조.), 근래 고려시대의 고선 발굴을 통해 대형선의 존재도 입증되었다. 물론 당시 서긍 일행이 타고 온 사신선인 신주(神舟)에 비하면 보잘것없을지 몰라도, 신주 자체도 당대 송나라의 엄청난 기술력과 자본을 투자해 만든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고려의 선박 수준은 전혀 낮은 수준이 아니다. 더구나 원래 문서에는 도경이란 표현처럼 그림이 첨부되어 있었는데, 이게 세월이 흐르면서 난리통에 다 날아갔다. 때문에 이 세 사료 모두 철저한 사료 비판이 필요하다.

고려에도 분명히 실록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안타깝게도 전부 유실되었다. 조선왕조실록 중 선조수정실록을 보면 원래 한성 춘추관 사고에 고려 실록이 보존되어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유실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불행중 다행으로 고려사고려사절요는 안의, 손흥록 등이 보존하여 오늘날에 이를수 있었다. 다만 조선왕조실록이 고려왕조실록의 것을 전범으로 삼았다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내에 짐, 외왕내제 등 조선시대 사람으로선 상상도 못할 단어가 가감없이 들어갔다곤 하지만 고려 사람의 시각에서 고려시대를 기술한 것은 아니다. 또 고려도경은 중국의 입장에서 고려를 바라본 사서고 그 시기 또한 한정적이다. 그 외에 이규보 등의 문집이 있지만 고려시대 전체를 파악하는 것은 너무나 어렵다. 드물게 문중에서 고려시대 문서가 나온다 해도 그 수는 손가락에 꼽을 정도. 오죽하면 고려시대 관직임명장은 나오면 보물급이라는 말까지 할 정도다. 이 때문에 고려시대사 연구자 대부분은 한문을 기본소양으로 장착하고 몽골어, 만주어 등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면서 사료 탐색에 열을 올리고 있다.

여담으로 인하대 고조선연구소에서 2017년 5월 22일 고려의 천리장성이 요동에 있었다는 주장을 제기했으며, 5월 26일 관련 학술대회를 열어 연구결과를 발표하였다. 관련기사 관련기사 그러나 학술대회를 반복적으로 열 뿐, 정식 논문으로는 단 한 차례도 제출된 바 없으며, 통용되어 쓰이는 압록(鴨錄)과 압록(鴨淥)이 서로 다른 강이라고 주장하는 등 논리적으로 문제가 많다.

11. 관련 문서[편집]

11.1. 건축[편집]

11.2. 고려를 다룬 사서[편집]

11.3. 당시 만들어진 책, 작품[편집]

12. 고려를 배경으로 한 작품[편집]

  • 가장 왼쪽에 표시된 것이 원작, 오른쪽이 파생 작품으로 원작보다 유명한 경우에는 굵은 표시를 한다.

12.1. 영화[편집]

12.2. 게임[편집]

12.3. 드라마[편집]

  • 개국, 조선왕조 5백년 추동궁마마 (1983)
    이 두 드라마의 초반부는 고려 말인 우왕~공양왕 시대를 다루었다. 다루는 시기가 여말선초고 조선개국 세력을 다룬다는 점에서 엄밀하게 말하면 온전한 고려사라고 볼 수만은 없지만. 개국의 경우 신군부옹호 논란이 있기도 했다.

  • 태조 왕건 (2000)
    고려를 개창한 태조 왕건을 주인공으로 후삼국시대를 주된 배경으로 삼는 드라마. 그 이전까지 조선이나 삼국시대만을 줄곧 다룬 KBS 대하드라마 사상 처음으로 대히트를 친 고려 시대 사극이다. 문제는 후삼국시대 종결과 함께 막을 내려 실질적인 통일 고려의 비중은 별로 없다는 점이다. 그래도 인기는 많아서 이 사극을 토대로 소설이나 게임 등이 나오기도 했다.

  • 제국의 아침 (2002)
    2대 혜종부터 4대 광종까지의 시대상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같은 방영 시기 같은 작가가 집필했던 야인시대가 대박났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제국의 아침은 워낙 전개가 느리고 극적 흥미도가 떨어져서 인기가 낮았다. 결정적으로 성격 자체가 히스테릭했던 그 광종이 주인공이었는지라 시청층이 감정을 이입하기 힘든 것이 문제였던 듯.

  • 무인시대 (2003)
    18대 의종의 폐위부터 23대 고종의 재위 초까지 무려 50년에 걸친 무신정권기를 조명했다. 단일 사극으로는 꽤나 긴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으로 등장 군주가 6명이나 되는데 이 기록은 왕과 비에 이어 2위이다. 무신시대 전반기의 집권자들(이고, 이의방,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 최충헌)이 순차적으로 주연을 맡았다. 역대 사극 중 반란 묘사가 가장 많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무신정권 초기 시대상이 고려 뿐 아니라 한국사를 통틀어서도 가장 내홍이 심한 편이었기 때문이다.

  • 신돈 (2005)
    30대 충정왕에서 31대 공민왕에 이르는 고려 말 권문세족 집권기를 배경으로 한다. 역사적으로 가장 논란이 많은 인물에 속하는 요승 신돈과 공민왕을 주제삼아 상당히 퓨전사극적인 면을 띠었다. 이미 줄거리부터가 개혁가의 흑화 탓에 나라를 말아먹는다는 심히 충공깽한 내용으로 실제 역사적으로도 그러했다. 결말도 완전히 비극으로 끝나버렸기에 지금도 괴작으로 아는 이들이 많다.

  • 천추태후 (2009)
    5대 경종부터 8대 현종까지의 시대를 배경으로, 사학계에서 대체로 악녀로 평가되는 천추태후천사태후 영웅적 주인공으로 각색하여 만든 작품. 역사적 사실들을 지나치게 각본가의 입맛에 맞춰 각색해버린 바람에 시청률도 망하고 작품성도 망해서 사극계의 괴작중 하나로 꼽힌다. 게다가 고려사는 아니지만 연이어 요상한 대하드라마들이 출현하면서…

  • 무신 (2012)
    23대 고종부터 24대 원종까지의 최씨 정권과 몽골 침입기를 배경으로 삼는 작품. 역사상 난신적자로 유명한 무신집권자 김준의 일대기를 그린다. 그런데 역시 고려판 트론소리를 듣고 최씨 가문 띄워주기에 바쁜 졸작이다.

  • 신의 (2012)
    현대의 의사가 과거로 간다는 내용으로 배경은 공민왕 시기.

  • 대풍수 (2012)
    국운이 다한 고려 말기 조선을 창업하는 태조 이성계를 중심으로 숨겨진 영웅들의 이야기를 다룬 사극.

  • 기황후 (2013)
    배경은 원나라지만, 시대적으로는 고려 말엽 원 간섭기에 해당하며 주인공이 고려 사람이다.

  • 육룡이 나르샤 (2015)
    정도전과 같은 소재, 같은 시대를 다룬 퓨전 사극 리메이크?? 조선 건국을 다루고 있지만 시대 배경은 대부분 고려.

  • 달의 연인 - 보보경심 려 (2016)
    원작은 중국의 소설인 보보경심으로 국적이 다른 작품이라 원작은 배경이 청나라, 한국에서 하는 드라마는 배경이 고려이다.

12.4. 만화[편집]

  • 더칸

  • 목호

  • 무장

  • 문아

  • 살례탑

  • 패왕 - 처음에는 이 제목으로 나와서 연재하다가 중단되었지만 드라마 태조 왕건이 방영되면서 그 인기에 힘입어 태조 왕건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연재된 것으로 보인다.

  • 푸른바람 척준경

12.5. 소설[편집]

  • 개경 세원록 - 12세기 고려 문신 최윤의가 직접 쓴 아내의 묘지명이 모티브. 현대와 고려 말, 충원왕 시대를 왔다갔다하며 이야기가 전개된다.

  • 경대승(이주홍 저)

  • 고려태조 왕건(김성한 저)
    바비도로 유명한 김성한 작가의 역사소설. 고려 이전 신라 말기부터 이야기가 시작한다. 절판과 재출간을 반복하다가 절판된 상태였는데 최근 2016년 2월 고려태조 왕건이라는 제목으로 재출간되었다.

  • 김사미와 효심

  • 다정불심

  • 만전춘별사

  • 망이(금성청년출판사 저)

  • 빛나거나 미치거나 - 빛나거나 미치거나(드라마)(2015)
    원작은 로맨스 소설로 드라마가 더 유명하며, 드라마 소개를 하자면 고려 초 태조부터 광종까지를 다룬 사극으로 정확히는 3대 정종 시기가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주인공은 왕소(광종)로 원작의 장르로 인해 왕소(광종)와 신율의 로맨스가 중심 이야기를 차지하고 있다. 4대 광종의 왕자시절을 배경으로 한 퓨전 사극으로 광종의 '광'자를 여러 면모로 해석한 작품. 고려시대 저주받은 황자와 버려진 공주가 궁궐 안에서 펼치는 로맨스를 담은 드라마.

  • 아아, 삼별초

  • 어머니(이주홍 저)

  • 왕건(신봉승 저)

  • 탐라, 노을 속에 지다

12.6. 연극[편집]

  • 명학소의 북소리

  • 파몽기

13. 다른 위키의 '고려' 문서[편집]

[1] 태봉국궁예를 왕건이 쿠테타로 축출한 후 수도를 철원에서 개경으로 옮겨 고려를 건국했다.[2] 음력 : 918년 6월 15일(고려사절요에는 6월 병진일이라고 되어있다.) ~ 1392년 7월 17일, 양력 : 918년 7월 25일 ~ 1392년 8월 5일[3] 우산국, 탐라국 등[4] 단, 공민왕 때는 제1차 요동정벌을 통해 요동성을 일시적으로 점령하기도 했다.그리고 일부 역사서의 기록들을 무시하고 학계가 설정한것도 있다.고려영토에대해선 아직연구중이다.[5] 대몽 항쟁기에는 강화도(강도, 江都)가 수도였다.[6] 광종 대 노골적인 칭제를 했으나 다른 임금 대에는 소극적인 칭제를 했다.(임금을 "황"이라 하는 등)[7] 대부분 발해 멸망 이후 고려가 발해의 유민들을 받아들였을때 들어왔다.[8] 다만, 고려는 불교를 국교로 삼았으나 다른 종교도 금하지 않고 자유로이 믿게 하는 등 신앙의 자유를 인정했다.[9] 숙종 시기에 행정구역화되었으나 얼마 간의 자치권을 누리는 세습 '군주'가 존속되긴 했다. 이마저도 완전히 없어지는 건 조선 때.[10] 926년에 요에 의해 망한다.[11] 938년 ~ 986년[12] 장안국과 국명이 유사해 혼동될 수 있으니 주의 [13] 정안국이후, 올야국, 흥료국, 대발해같은 부흥국이 건국되고 얼마지나지 않아 망했다. [템플릿사진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A%B3%A0%EB%A0%A4, https://ko.wikipedia.org/wiki/%EA%B3%A0%EB%A0%A4, https://ko.wikipedia.org/wiki/%EA%B3%A0%EB%A0%A4[15] 고려와 고구려는 사실 같다.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기 이전에 고구려가 고려로 이름을 바꾸었으나 왕건의 고려와 구분하기 위해 그냥 고구려로 부른다. 실제로 중국사서에는 고구려를 고려로 표기하기도 했다. 서양에는 Corea 내지는 Korea로 알려졌다.[16] 코마, 고구려 역시 코마라고 읽는 경우가 있다. 고마 신사, 코마가와역[17] 또는 Solongos도 있다. 고려시대나 21세기나 몽골인들은 한국을 솔롱고스(Solongos)라고 부르지만, 현대 몽골어에서는 현대 대한민국과 구별된 고려시대의 고려를 Kuryo라고 부른다. Solongos는 몽골어로 '무지개의 나라'라는 뜻인데, 몽골국립할하몽골어학회에 따르면 몽골어로 한국을 이르는 말인 Solongos가 '해 뜨는 동쪽의 나라'라는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공식적으로 명시했다. 색동저고리에서 유래됐다는 설도 있으나, 위에서 설명했듯이 근거없는 낭설이다.[18] 거기다 고려에 쳐들어온 몽골군은 정예군이 아니었다. 정예군은 중국 쪽에서 주로 활동하고 있었다. 당시 고려를 침공한 몽골군은, 여진족 장수로서 혼성 부대를 지휘한 오야르 등의 군대나, 예구 대왕의 동방 왕가 병력으로 볼 때, '타마(보조 경기병대)'로 추정되는데 타마의 주 역할은, 전장에서의 보조 지원 및 정복지에 대한 치안 관리 및 유지다. 또한 몽골군의 1차 침공 때 왕영조가 이끈 부대가 한군(漢軍)인데 한군의 주 역할은, 몽골군이 접수한 요새나 고을을 지키는 주둔병 성격을 띄었다.[19] 대한제국은 영미권에서 Korean Empire로 불렸는데, 대한제국(조선)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멸망시킨 전 왕조의 이름이었기 때문에 기겁하고 Dai Han Empire같은 이름을 열심히 밀었지만 끝까지 관철되지는 못했다.[20] 일본 기록을 보면 의종때 이전부터 줄기차게 고려에서는 일본에게 자신들이 황제국이라고 표방했던 듯 하다.문종때도 고려 사절단이 보낸 문서에 성지(聖紙:황제의 교서)라고 적혀있었고 이전부터 계속된 이런 호칭과 소개를 했다.물론 일본은 좋지 않게 여겼고 실제 이를 빌미로 문종때 일본에서 뛰어난 의사를 보내달라는 고려 요청을 무례하다고 거절하기도 했다.[21] 고려 초기의 제주도는 "탐라"라는 이름으로 명목상 독립국이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고려 영토나 다름없었으며, 탐라는 고려에게 조공을 바치고 제후국처럼 행동했다.[22] 최의를 가리킨다.[23] 고려 말 왜구 침입 때는 일본도 남북조시대의 내전 중이었기 때문에 공식 교역 루트를 트려고 한다 해도 상대할 중앙정부 자체가 없었다.[24] 전 국토가 갈려나가고 속국화되면서 오랜 역사에서 자존심을 찾기도 했다.[25] "북원(北元) 요양성(遼陽省) 평장(平章) 유익(劉益)과 왕우승(王右丞) 등이 명나라에 귀순하려 하였으나 그들은 명나라가 주민을 이주시킬까 근심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요양이 본시 우리 땅이었으므로 만약 우리 나라가 청하면 이주를 모면할 수가 있지나 않을까 하여 사신을 파견하여 통보하여 왔다." 고려사의 공민왕대 기록이다. 고려 정부는 요동이 과거 자신들의 땅이었음을 인식하고 있었다.[26] 이런 고구려 계승 인식은 조선에까지 이어지는데,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수양제당태종의 강력한 군대를 막아내던 고구려를 생각해서 조선이 전쟁 초기 허무하게 무너진 것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혹시 일본이랑 짜고 자기들을 공격하는 게 아닌가 오해를 했었다.[27] 고려 말에 왜구들에게 쑥대밭이 되고 개경 근처까지 털리는 시기도 있었으며 홍건적의 난때는 수도 개경을 빼앗기기도 했다. 다만 이 사건들의 경우엔 앞의 두 사례에 비해해 인지도가 떨어지는 편.[28] 여진 정벌은 절반의 성공으로 끝났지만 그 덕에 훗날 여진이 금나라를 건국한 후 북송을 밀어붙이는데 성공할 정도의 국력을 자랑할 때조차 여진 정벌당시 고려에게 큰 코를 다친 경험 탓인지, 고려를 침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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