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최근 수정 시각:

분류

파일:나무위키+유도.png   '고려'의 다른 뜻에 대한 내용은 고려(동음이의어) 문서를, 고려의 역사에 대한 내용은 고려시대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파일:나무위키프로젝트.png
이 문서는 나무위키 한국사 프로젝트에서 다루는 문서입니다.
해당 프로젝트 문서를 방문하여 도움이 필요한 문서에 기여하여 주세요!

고려
高麗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500px-Royal_flag_of_Goryeo_%28Bong-gi%29.svg.pn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40px-Seal_of_Goryeo_King.svg.png

의장기

국새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80px-Goryeo_%28orthographic_projection%29.svg.png

공민왕 23년(1374년) 고려 영토.
각 시대의 강역은 아래 역사 단락 참고.

건국

918년 7월 25일

존속 기간

918년[1] ~ 1392년[2] (474년)

영토

함경북도양강도평안북도 일부를 제외한 한반도와 부속 도서[3]

수도

철원 태봉궁(918 - 919)
개경 만월대(919 - 1232, 1270 - 1392)
강도 고려궁(1232 - 1270)[4]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5]

국성

개성 왕씨

국가 원수

[6], 신성제왕, 천자(해동천자), 황왕, 황제

언어

중세 한국어

종족

한민족, 말갈족[7]

종교

불교[8]

주요 국왕

· 태조 (1대 918년 ~ 943년)
· 광종 (4대 949년 ~ 975년)
· 성종 (6대 981년 ~ 997)년
· 현종 (8대 1009년 ~ 1031년)
· 문종 (11대 1046년 ~ 1083년)
· 인종 (17대 1122년 ~ 1146년)
· 공민왕 (31대 1351년 ~ 1374년)

주요 사건

· 918년 태조 고려 건국
· 936년 후삼국 통일
· 993년 ~ 1019년 여요전쟁
· 1108년 동북 9성 축조
· 1170년 ~ 1270년 무신정권
· 1231년 ~ 1259년 여몽전쟁
· 1232년 ~ 1270년 강화도 천도
· 1270년 ~ 1351년 간섭기
· 1388년 위화도 회군
· 1392년 고려 왕조 멸망

성립 이전

태봉, 신라, 후백제, 탐라[9], 발해[10] 발해부흥운동

성립 이후

고려[11][12]

멸망 이후

조선

고려 대항 국가

대위국


[템플릿]

1. 개요2. 국호3. 역사4. 정치 / 사회상
4.1. 중앙 행정4.2. 지방 행정4.3. 군사4.4. 경제4.5. 고려는 황제국인가
4.5.1. 금석문, 외교 문서 종합
5. 문화6. 외교7. 평가
7.1. 최초의 자력 통일과 단일국가관7.2. 고구려 계승7.3. 무장의 나라7.4. 한국사 발전7.5. 한반도 왕조 비교
7.5.1. 이전 국가와의 비교7.5.2. 조선과의 비교
8. 왕사9. 고려/인물10. 고려사 연구의 난관11. 관련 문서
11.1. 건축11.2. 고려를 다룬 사서11.3. 당시 만들어진 책, 작품
12. 고려를 배경으로 한 작품13. 둘러보기

1. 개요[편집]

중세 시절 한반도 지역에 위치했던 국가. 통일신라의 분열 후 고려, 후백제, 신라로 나뉘어 대치하던 후삼국시대를 936년에 통일하였고, 이후 약 474년 동안 총 34명의 군주가 계승하여 1392년까지 한반도 대부분 지역을 지배하였다.

고려 전기 발해를 멸망시킨 요나라(거란족)와 송나라의 세력 균형 체제라는 국제적인 정세 속에서 고려는 요나라의 3차에 걸친 대규모 침략막아내며 동아시아에서 나름 위세를 뽐냈으나, 중기 이후 내부적으론 무신정권이 들어서고 외부적으론 금나라(여진족)의 부흥에 요와 북송이 차례로 털리고 금이 고려에 칭신을 요구하자 책봉 질서의 사대적 관계를 맺기 시작했고[14] 이후 글로벌 전투민족 몽골제국과 30년간의 항쟁 끝에 결국 패배하여 간섭기엔 심한 정치적 간섭을 받게 된다.

다만 남송을 포함한 유라시아 수십여개 국들이 몽골 제국에 쓸려나가는 동안, 고려는 끈질긴 저항과[15] 적절한 외교술로[16] 나라 자체가 멸망하진 않고, 이후 몽골의 부마국으로 존속하다 고려 후기 원이 쇠퇴하자 외교적 간섭에서 벗어나게 된다. 참고로 당시 몽골인들은 옛 송나라 영토나 서쪽 중앙아시아 사마르칸트 등으로 이주의 눈을 돌렸기 때문에 위구르계 장씨 정도 등을 빼면 생각보다 고려에 귀화한 몽골인은 수가 많이 적었다.

2. 국호[편집]

언어별 명칭

한국어

고려(高麗)[17], 고려 왕조(高麗王朝)

중국어

高麗 / 高麗王朝(정체), 高丽 / 王氏高丽 (간체)

일본어

高麗(こうらい、こま[18] )

베트남어

Cao Ly

몽골어

Kuryo[19]

러시아어

Корё

영어

Goryeo, Koryŏ


국호는 고구려의 국호에서 그대로 따왔다. 그 이유는 말 그대로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것.[20][21][22]

다만 고구려의 국호는 초기에는 고구려, 구려, 고려 등의 여러가지로 불렸는데 장수왕 대부터 고려(高麗)로 고정되어 사용됐다. 따라서 당시 사람들에게는 고구려보다는 고려가 더 익숙한 명칭이었으므로 고려를 사용한 것이다.

중국식 역사서가 편찬될만큼 한문학이 발달된 시기라 후연, 후당, 후조 같이 자국을 고려(고구려)땅에서 일어난 나라라고 "후고려"라고 표현한 금석문들이 종종 발견된다. 일반적으로 중국에서 후라는 앞글자는 건국한 땅의 옛국가에서 따온다는걸 생각해보면 이상할 것 없는 표현.

현대에 고구려를 당대에 널리 사용되던 고려 대신 고구려라고 부르는 이유는 첫째로 뒤의 고려와 구분하기 위해서, 둘째로 삼국사기에 그렇게 적혀 있기 때문이다. 궁예의 후고구려 역시 개국 당시의 국호는 고려였다. 이후 마진, 태봉으로 변경하긴 하지만, 왕건의 고려와 구분하기 위해 궁예의 고려는 후고구려라고 호칭된다. 때문에 한국의 외국 이름인 'Corea'의 어원을 제공한 나라가 왕건이 세운 고려일 수도 있지만, 언급했듯이 장수왕 이후인 고(구)려에서 이미 어원이 형성됐을 가능성도 있다.

3. 역사[편집]

4. 정치 / 사회상[편집]

파일:external/file.agora.media.daum.net/pcp_download.php?fhandle=MWpoMEhAZmlsZS5hZ29yYS5tZWRpYS5kYXVtLm5ldDovSzE1MC8xMzUvMTM1MDkuSlBH&filename=go4.jpg

신분 제도에 관한 내용은 계급 참조. 고려는 크게 양인과 천인으로 구별되고, 다시 양인을 왕족 - 귀족, 중간계층(남반, 향리, 서리, 하급 장교), 양인(백정, 양수척, 향 소 부곡민)로 3등급으로 세분화하여 천인(공노비, 사노비)과 더불어 4계층으로 나뉜다고 볼 수 있다. 신량역천[양천제(良賤制)의 신분제하에서 양인신분을 갖지만, 그 역이 고되어 사회적으로 천시되는 사회계층]이었던 향 / 소 / 부곡은 구분이 엄격하였으나 신분 상승(특히, 향 / 소 / 부곡의 현 승격에 따른 공동 신분 상승)은 가능했다.

파일:external/www.yuniljung.com/0091000301200501240125_16_4.jpg

4.1. 중앙 행정[편집]

고려는 태봉과 신라의 고유 관제를 바탕으로 당의 3성 6부제와 더불어 송의 중추원(추밀원), 삼사 등의 제도를 도입하였다. [23] 이에 태봉의 내의성, 내봉성, 광평성으로 이어지는 3성의 전통과 당의 3성제도를 결합하였으며, 내의성이 내사문하성을 거쳐 중서문하성이 되고, 내봉성이 상서성이 되며, 광평성이 어사도성을 거쳐 상서성 등으로 이어졌다.

현재 연구자 및 교과서에 따라 3성 6부, 2성 6부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 명예직 (최고 직위)

    • 3사 - 태사, 태부, 태보 / 정1품

    • 3공 - 태위, 사도, 사공 / 정1품

    • 중서령 (내사령) - 인신지극, 수상을 역임한 사람에게 명예직으로 부여 / 종1품

    • 상서령 - 왕족 종친(제왕)에게 수여 / 종1품

  • 재신 (5재, 8인)

    • 문하시중 - 이상 종1품, 수상(총재), 실질적인 최고 관직

    •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 문하시랑평장사

    • 중서시랑평장사, 아상(이재) / 정2품

    • 참지정사 - 3재

    • 정당문학 - 4재

    • 지문하성사 - 5재 / 종2품

  • 추신 (6추, 8인 )

    • 판중추원사 (판사) / 종2품

    • 중추원사 (사) - 2인

    • 지중추원사 (지사)

    • 동지중추원사 (동지사)

    • 중추원부사 (부사) - 2인 / 정3품

    • 첨서중추원사 (첨서사)

    • 중추원직학사 (직학사) - 충렬왕 떄 추가


이상 5재 6추 16명을 양부 재상이라 부르며 이들이 고려 재추회의 (재상회의)에서 국정을, 도병마사 (후기에는 중추원) 에서 군정을 주도하였다.

  • 조선시대의 영의정과 달리 고려시대의 문하시중이 항상 보임하지는 않았던 관계로 판이부사를 담당하는 사람을 수상 또는 총재라 일컬었다. 문하시중이 보임한 경우 판이부사를 겸하고 결원인 경우 차석의 평장사가 판이부사를 맡았다.

  • 중서문하성은 종2품이상의 재신과 간쟁과 봉박을 담당한 정3품 이하의 낭사 (간관, 성랑) 로 구성되었다. 문하시중이하 지문하성사 까지가 재신이며 간의대부 이하 정언까지를 말한다.

  • 상서성은 종1품 상서령 및 정2품 좌우복야가 있었으나 실제로는 재신들이 6부 판사를 겸직하였고 정3품 6부 상서를 추신(추밀)들이 겸직한 경우가 많아 재추에 의한 정치의 근거로 활용되어 왔다. 그러나 재추에 문벌귀족이 아닌 과거를 통한 관료재신들이 있었으며 또한 6부 판서를 모두 재신이 겸직하지 않은 경우가 더 많아 실제로는 왕권이 강했다는 연구도 진행되고 있다. 6부의 순서에서 고려는 사실 병부가 6부 중 2위에 있었다. 조선 때는 공조 바로 위로 강등되었다. 또한 예부 앞에 형부가 있었다. 즉 고려는 이부, 병부, 호부, 형부, 예부, 공부순으로 독자적인 구성을 갖추었다.

    상서성에는 상서령(尙書令 : 종1품) 1명, 좌우복야(左右僕射 : 정2품) 각 1명, 지성사(知省事 : 종2품) 1명, 좌우승(左右丞 : 종3품) 각 1명, 좌우사랑중(左右司郞中 : 종5품) 각 1명, 좌우사원외랑(左右司員外郞 : 정6품) 각 1명, 도사(都事 : 종7품) 2명, 이속(吏屬)으로는 주사(主事) 4명, 영사(令史) 6명, 서령사(書令史) 6명, 기관(記官) 20명, 산사(算士) 1명, 직성(直省) 2명이 있었다.

    상서성의 위상을 중서문하성의 아래로 보는 견해가 있는 데 이는 재신(재상)의 범위에 좌우복야, 지성사가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중추원 (후에 추밀원)은 왕명의 출납 및 궁중의 숙위, 군기를 담당하였으며 종2품 이상의 추밀(추신)과 정3품 이하의 승선으로 구분되었다. 추밀(추신)은 재추16인에 포함되는 고려의 재상이었으며 추부에 있었고 정3품 이하의 승선[24]은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며 승선방에 입직하였다.

  • 어사대는 시정을 논하고 풍속을 교정해 백관의 부정과 비위를 규찰하고, 탄핵하는 역할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사대의 독자적인 활동보다는 중서문하성의 간관(諫官)인 낭사(郎舍)와 상호불가분한 관계에서 직무가 수행되었다.

    따라서 본래의 임무에 봉박(封駁)·간쟁(諫諍)·시정논집(時政論執)·서경(署經) 등의 간관임무가 더해져 그 기능은 광범위하고 다양했다. 이러한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어사대의 관원에게는 불체포·불가범(不加犯)·면계(面戒 : 면전에서 충고함.) 등의 특권과 여러 은전이 부여되었다. 또한 청요직(淸要職)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할 학식·출신성분·인품·외모 등의 여러 가지 자격과 조건이 요구되었다. 즉 역임자들은 과거 출신자로서 인품이 청렴강직하고, 외모가 뛰어난 문벌귀족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고려시대의 어사대는 조선시대의 의금부와 사헌부의 기능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법제와 왕실의 격식을 담당하는 식목도감이 있었으며 수상(총재)을 맡은 판이부사가 사를 맡았다. 이외 전곡(錢穀)의 입출과 회계를 맡은 삼사(송의 영향을. 원 간섭기에도 존재), 천문을 보는 태사국 등의 중앙 행정기관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체제는 원 간섭기부터 즉, 충렬왕 대부터 제후국 체제로 관제가 격하되면서 변경되었다. 국가의 행정 업무는 2성이 1부(첨의부, 충렬왕 1년(수상은 첨의중찬, 좌우첨의중찬을 따로 부수상으로 둠))로 바뀌고, 6부는 4사(판서) (이부와 예부가 통합되고 공부가 폐지)가 되었으며, 다시 충렬왕 19년에 첨의부(첨의중찬)가 도첨의사사(도첨의시중)가 되었다. 충선왕이 복위 된 뒤로는 다시 도첨의부(도첨의정승)이 되었다. 이것이 오늘날과 같은 의정부와 정승의 시작이다.

    한편 추밀원은 밀직사가 되었고, 광정원으로 잠시 고쳤던 적이 있다. 충선왕 때는 밀직사가 첨의부와 동급이 되었다. 추밀원의 승선이 밀직사의 승지가 된 것이 조선시대 승정원 도승지 관직의 시작이다. 충선왕 때부터는 대언이라고 했었다. 금오대는 감찰사가 되었다가, 충렬왕 24년부터 사헌부가 되었다.

    공민왕 5년(1356년) 반원 자주 정책에 의해 2성은 중서문하성(문하시중), 상서성으로 회복되었으나, 6년 뒤 옛 이름인 도첨의부(첨의정승 - 첨의시중)로 통합되었으며, 7년 뒤 문하부(문하시중, 문하좌우시중이 부수상)가 되었다. 우왕 때 시중인 최영이성계의 쿠데타로 물러나자 문하좌시중이었던 이성계가 문하시중, 문화우시중이 된 조민수가 수문하시중이 되었다. 밀직사 역시 공민왕 5년 추밀원으로 부활했으나 6년 뒤 다시 밀직사로 낮춰졌다. 대언은 고치지 않았다가 조선 왕조에 가서야 승정원으로 고쳐진다.

    하지만 이런 변동에도 불구하고 실질적 문제는 군사 문제만을 논하던 임시기구 도병마사(성종조엔 병마사)가 변환된 도평의사사에서 처리하게 된다. 이는 조선의정부로 이어지며, 흥미롭게도 도병마사의 지위 변화는 조선 후기에 군사 임시 기구였던 비변사가 의정부를 대체하게 된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4.2. 지방 행정[편집]

파일:고려의 12목 위치 이미지.png

12군의 위치.

고려의 지방 행정 구역은 최초에는 8목이었으며, 성종 (995년) 때는 당나라를 모방한 10도 12군 체제였다.

10도는 관내도(關內道, 개경의 수도권), 중원도(中原道), 하남도(河南道), 강남도(江南道), 영남도(嶺南道), 영동도(嶺東道), 산남도(山南道), 해양도(海陽道), 삭방도(朔方道), 패서도(浿西道)였다.

한편 12군은 8목에서 늘린 12목에서 명칭을 바꾼 것으로, 양주(楊州)·광주(廣州)·충주(忠州)·청주(淸州)·공주(公州)·진주(晋州)·상주(尙州)·전주(全州)·나주(羅州)·승주(昇州. 훗날의 순천시해주(海州)·황주(黃州)로써 이 도시들은 조선 시대까지도 지방의 중심 도시 역할을 수행했다. 조선 태종 때 행정 구역을 개편하면서 州가 붙은 도시들이 많다는 이유로 이를 山 또는 川으로 변경했는데, 이 도시들은 대부분 州 호칭을 유지한 것도 알 수 있다.

또한 도읍 개경에 고려가 계승한 고구려의 도읍 서경 (평양성)에 더해 신라의 도읍 서라벌이었던 경주시동경으로 삼아(성종 6년) 삼경을 이루었다.

이후 현종 때는 5도 양계경기 체제로 변경되었으며 5도는 경상, 전라, 양광[25], 교주[26], 서해[27]이며 양계는 북계[28]와 동계[29]였다.

경기는 수도 개경 주변을 일컬었다. 정확히 말해 경기'도'가 아니다. 이 당시 고려는 경기를 도와 별개의 지역으로 설정했다.[30] 경기 지역은 오늘날의 개성, 개풍, 장단, 연백 일대였다. 고려 말에는 경기가 더욱 확장되어, 현재의 황해도(북한이 설정한 행정 구역으로는 황해북도) 일대 및 경기도의 한강 이북 지역이 편입된다.
서경(평양)과 그 인근 지역에는 서경기를 설치했으나 묘청의 난 진압 후 서경이 푸대접을 받게 되면서 폐지됐다.

문종 21년에는 삼경에 더해 양주의 일부에 남경(지금의 서울특별시)을 설치했다. 그러나 동경이 잦은 반란으로 강등되어 실제로는 그대로 3경 체제였다.

서경, 남경, 동경은 각각 삼국시대 삼국의 수도였던 곳과 대략 일치한다[31]. 애초에 동·서경은 각각 신라와 고구려를 염두에 두고 지정했으니 당연한 것이었다. 남경은 백제와 무관하게 터가 좋아 나중에 지정한 것이지만... 어차피 서울 일대가 백제의 수도였던 건 개로왕 때까지만이었으니 백제를 고려해서 현재의 서울 일대를 남경으로 지정할 리도 없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백제의 위례성이 들어섰던 것으로 추정되는 일대는 조선 시대 한성부의 행정 구역 밖이었을 것으로 보이고 고려 시대 남경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온조왕이 초기에 수도 위례성을 한강 이북에 지었다가 온조왕 14년(기원전 5년)에 다시 한강 이남으로 완전히 옮긴 것으로 보인다. 보통 풍납토성몽촌토성을 하남 위례성 일대로 보고, 하북 위례성은 유적이 없어서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으나 도봉구에 있었다는 추정이 있다. 이 추정이 맞다고 치면 위례성 일대가 현재의 서울로 편입된 건 오래되지 않았으므로 고려 남경 = 백제 위례성이라고 하기 곤란하다. 단지 현재의 서울특별시 일대가 옛날부터 매우 중요한 거점이었기 때문에 백제 때 수도가 있었고 고려 때 부수도가 있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5도는 그 아래에 주현과 속현이 있었는데, 주현은 규모가 큰 도시에 지방관이 파견된 고을을 말하고, 속현은 그 주현의 지휘를 받는 지방관이 없는 고을을 가리킨다. 고려 시대는 주현보다는 속현이 많았다. 심지어 조선 초까지도 속현이 존재했다. 지방에 외사정을 파견한 신라보다 중앙 집권 체제가 철저하지 못했다. 고려의 태생 자체가 호족들이 연합해서 세워졌기 때문이다.

도 아래에는 군, 현이 주를 이루었으나 특수 행정 구역인 향, 소, 부곡도 있었다. 이것들은 주로 천민들이 거주하는 지역이었는데 종류에 따라 수공업과 농업 기능을 가졌다고 2011년 기준으로 2년 ~ 3년 전까지의 국사 교과서에서 말해 왔다. 하지만 전부터 향, 소, 부곡민에 대해선 논쟁의 대상이었다. 학계에서는 이미 1960년대 이래 향, 소, 부곡민이 양민이었다는 설이 나오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향, 소, 부곡이 천민이 아니라 '신량역천', 즉 천민의 일을 하던 양인들이 살던 곳이라고 하는 주장이 나온다. 이것은 양인에 대한 해석에서 나온 것인데 양인은 국역을 지고 독립된 가호로서 존재하여 개인에 종속되어 국역을 지지 않는 천인과는 구별된다. 부곡민의 경우 중국의 부곡과 달리 주가의 호적에 부적되지도 않았던 데다 국가에 각종 공역을 지고 있다. 이는 분명 천인과는 다른 모습이다. 향, 부곡은 농사를, 소는 수공업을 생산하는 기능을 한다는 해석이 발표되었다. 또 소에선 일부만 수공업에 종사하고 소의 주민 대부분은 농사를 짓는다는 설도 존재한다. 또 소에서 수공업을 하는 주민은 소의 주민이 아니라 진정한 소의 주민은 농사를 짓는 주민들이란 설도 존재한다. 실상 사료가 적은 탓에 이리저리 많은 설들이 난무한다. 이러한 특수 지역은 고려 말이 되면 주민들의 저항과 생산력이 발전하면서 사실상 향, 소, 부곡 제도가 붕괴되어 다른 지역과 실질적으로 차이가 없어졌다. (웅진 지식 하우스, <미래를 여는 한국의 역사> 참조)

양계(북계, 동계)는 특수 군사 지역으로 그 아래에는 군현 대신 도호부와 진이 있었다. 속현이 많은 5도 지방과 다른 점은 대부분 진에 지방관이 파견되었다는 점인데 국방을 위해 당연한 조치라고 할 수 있겠다. 5도 양계였던 시절 동계는 특이하게 국경선에서 한참 떨어진 현재의 강원도 영동 지방까지 관할 지역으로 걸쳐 있었는데, 이는 여진족 해적들 때문이었다.

5도 양계 이외에 지금의 함경남도 지역에 여진족들을 직간접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기미주현을 설치하여 고려와 인접했던 여진족들을 관리하였다. 이곳에는 실제로 고려 관리들을 파견하여 고려 민호로 등록하고, 이 지역에 고려법을 적용하는 등 이곳을 관리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실제로 수천에서 만명 이상 규모의 여진족들이 지금의 길주 이북지역에서도 귀화하려고 했다.[32] 하지만 금나라를 세운 완안부와의 갈등으로 이 지역을 중심으로 동북 9성을 설치하였고, 이후 결국 동북 9성의 반환과 금나라의 건국으로 이 지역에 대한 고려의 영향력은 줄어들게 되었다.

수도인 개경 외에도 따로 부(副) 수도들이 존재했다. 흔히 고려 3경이라고 부르는데 사용되는 맥락에 따라 개경 + 부 수도 2곳('개경, 서경, 동경' 또는 '개경, 서경, 남경')을 가리키거나 개경을 제외한 나머지 세 곳(서경, 동경, 남경)을 지칭할 수도 있다. 개경을 포함한 3경에는 동경과 남경이 동시에 들어간 적이 없어서 시대에 따라 둘 중 하나가 빠졌다가 다시 포함되었다가를 반복했다.

고려 초기의 행정 구역. 성종 때의 10도 구역.
파일:attachment/고려/고려10도.jpg

고려 5도 양계천리장성
파일:2BF8McN.jpg

고려 후기의 행정 구역. 북방으로 영토가 확장되는 등 변동이 있어서 양계가 없어지고, 대신 동북면(고려 말 이성계의 본거지로 유명)과 서북면이 설치되었다. 그리고 경기 및 각 도의 행정 구역에도 여러 변동이 있었다. 동계의 영동 지방과 교주도가 '교주강릉도'로 통합되고, 서해도의 상당 부분과 양광도의 남경(한양), 양주, 부평, 인주 등 서북부 지역이 경기에 편입됐다. 이로써 이어지는 조선8도와 유사해졌다.

파일:attachment/고려/여말_행정구역.png

4.3. 군사[편집]

고려는 지방의 무인 호족들이 건국 주체였기 때문에 초기엔 상무(尙武)적 기질이 있었다. 그러나 무인 호족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무과 제도를 신설하지 않는 등 전반부터 무신들의 지위를 낮추었다. 절도사 출신인 송나라 태조 조광윤이 절도사의 권한을 철저히 약화한 것과 흡사하다. 허나 이것이 무신들의 불만을 사 이후 무신정권이 들어서는 빌미를 제공하기도 한다.

고려의 군사 제도는 중앙군은 2군 6위, 지방군은 주현군과 주진군 체제였다. 2군은 응양군과 용호군이었는데 국왕 직할 친위 부대였으며 6위는 좌우위, 신호위, 흥위위, 금오위, 천우위, 감문위로 경기 지방 방위를 담당했다. 평상시는 외적 침입보단 중앙의 치안과 내부 반란 억제의 의미가 컸다. 이는 이후 조선의 5위 혹은 5군영 체제도 마찬가지다. 무신 정변을 일으킨 군사 집단이 이 중에서도 국왕 직할 친위인 2군이었다. 군인 주체에 대해서는 사료 부족으로 인해 군반씨족설, 부병제설, 절충설 등이 나오고있다. (역사비평편집위원회, '논쟁으로 읽는 한국사1', 역사 비평사, 2009년, p188 - 189)

지방군은 5도 지역의 군대는 주현군, 양계 지역의 군대는 주진군으로 분리 운영되었다. 양계 지역은 북쪽 지방의 북계와 동계로써, 여진족이나 거란족(요)과 경계를 맞대고 있는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다. 다른 주현군은 군역보단 요역이 주였던데 반해, 주진군은 군역이 당연히 주였을 것으로 보고있다.

그러다가 퇴색되고, 도방, 삼별초 등의 사병 집단이 생겨나 이들이 실질적인 군사 집단이 됐다. 고려 말기 공민왕 시기에는 정예군인 사병과 징병군인 익군(농민군)을 주축으로 운영됐다.

거함 거포(?)에 심취해서 고려의 대포와 배는 높게 평가받았다. 몽골군이 1차 일본 원정 실패 이후 "남송의 배는 금방 부서지는데, 고려의 배는 튼튼하니 다시 일본을 공격할수 있다"고 평가했으며, 일본은 몽골군을 몰아낸뒤 설욕을 위해 고려를 치려고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일본 배로는 상륙하기도 전에 고려 해군에 다 박살날 처지라 포기했다고 한다. 관련 블로그

후에 조선 왕조에 의해 왕도(王都)로 승격되고 한국의 수도로 있는 서울도 이 때까지는 지방 도시였던지라, 개경에 비해서 크게 밀리는 편이었다. 물론 단순한 지방 도시는 아닌 삼경 중 하나인 남경이긴 했지만 지금과 같은 그런 큰 지위를 가지지 않은 곳이었다. 이런 곳이 후에 조선 왕조에 들어서 왕도로 지정되어서 600년 전통의 대도시가 될 줄은 이 때까지만 했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4.4. 경제[편집]

고려는 창업군주 왕건부터가 상업으로 세력을 키운 호족 가문 출신으로 국초부터 상업을 보호 육성했다. 태조 2년(919년)에 개경의 궁성 동문인 광화문에서 남대가(南大街)를 따라 십자가(十字街)에 이르는 중심 도로변에 시전이라는 시장을 설치했고 여기서 지배층 및 사찰과 연계된 상인들이 상업 활동을 했다. 고려 말을 기준으로 개경에는 최소한 1,200여 칸 이상의 시전 행랑에서 2,400명 ~ 3,600명 이상의 시전 상인이 영업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정부는 시전 운영에 적극 관여해서 각 시전의 판매 품종을 지정했고, 활동하는 상인에 대한 장부를 만들어 철저히 관리했다.(고려사 권85, 지39, 형법2, 금령, 공양왕 2년 4월).

시전 이외에 국가에서 운영하는 주점, 다점(찻집), 식미점 등 관영 상점이 있었는데 이들은 화폐의 민간 통용을 장려하기 위한 시설로 이용되었다. 상행위를 감독하기 위해 경시서를 설치했고, 경시서는 도량형을 감독하고 물가를 조절하며 불법 상행위를 단속하는 일을 했다.

개경서경, 동경 등 전국의 주요 도시에도 개경의 시전과 비슷한 관영 상가가 있었고, 전국 각지에 비상설 시장인 장시(場市)가 열렸다. 고려시대에는 최소한 조선 초기보다 훨씬 활발하게 장시가 운영되었다.[33] 송나라 사람 서긍이 1123년(인종 1년)에 사신으로 개경에서 한 달을 체류한 후 돌아가 쓴 『고려도경』에 아래와 같은 글귀가 있다.

고려의 고사(故事)에, 매양 사신이 이르게 되면 사람들이 모여 큰 저자를 이루고 온갖 물화를 나열하는데,… (중략)… 대개 그 풍속이 사람이 살면서 장사하는 가옥은 없고 오직 낮에 시장을 벌여(惟以日中爲虛) 남녀・노소・관리・공기(工技)들이 각기 자기가 가진 것으로써 교역하되 돈을 사용하는 법은 없다. 오직 저포나 은병으로 그 가치를 표준하여 교역하고,… (중략)… 그러나 백성들은 오래도록 그런 풍속에 익숙하여 스스로 편하게 여긴다.


고려도경, 권3 무역.


위 인용문 중 ‘허(虛)’는 허시(虛市), 즉 장시를 의미하는데 특정한 시설물이 없이 빈 터에 장이 섰다가 사라졌기 때문에 허시라고도 했다. 지방의 장시에서는 고려 정부에서 찍어내는 화폐보다는 쌀과 포로 매매가 주로 이뤄졌다. 고려 시대에는 여행객의 편의를 위해 조성된 원(院)이 발달했는데, 이 원은 상인의 숙박 시설을 넘어 그 자체가 상업 중심지가 되기도 했는데 예를 들어 한강광주의 사평원은 많은 배가 오가는 중요한 교역처였다. 고려의 지배 이념이자 종교였던 불교 역시 상업 활동에 호의적이고 사찰이 상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고려 말기 개혁파 신진사대부들은 성리학적 상업관(억말론, 抑末論)에 입각해 상업 활동에 비판적이었고 백성들이 농업에 집중하기를 장려해 왕조 교체를 거치며 상업 정책도 방향을 달리하게 되었다.

고려 시대의 무역은 공무역 중심으로, 통일신라 시기보다 사무역은 쇠퇴하였으나 화북의 이민족 왕조를 견제하기 위해 고려에 어느 정도 의존하는 송의 외교 상황과 맞물려 문화적 교류는 더욱 활발하였다. 개경에는 벽란도라는 무역항이 있어서, 이곳에서 무역이 상당히 활발했으며 이슬람 상인들까지 거쳐갔다고 한다.

한국의 비한자계 외국어 명칭이 코리아(Korea)가 되어 조선 시대를 거쳐 현대까지 사용되는 것도, 이때 이슬람 상인들이 '고려'를 그들 식으로 발음한 것이 어원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 다만 여기에는 이설도 있다. Korea란 명칭이 서역에 알려진 것은 751년 탈라스 전투고구려 유민 출신인 고선지의 용맹함이 이슬람 연합군에 알려지면서라는 설이다. 사실 고려와 고구려는 같은 말인데, '구려'는 옛말로 성, 읍, 나라의 뜻을 가진 단어고 한 글자로 줄여서 부를때 '려'로 불렀다. [34] 이는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기 이전 중국 사서에서도 고구려를 고려라 표기한 흔적에서도 나타난다. 고려의 ㅕ가 탈락하면서, 현대 우리말에도 '고을'이라는 단어로 나타난다.

대신 고려가 이슬람 사서에 기록된 것은 총 2회뿐이다. 물론 사서에 명시되지 않았다고 비중이 적어졌다고 보긴 힘들 것이다. 앞서 말한 송나라의 상황이나 코리아의 근원, 쌍화점을 보면 민간에 끼치는 영향은 적지 않았을 수준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전대의 신라에 비해 최소한 사서에서 나타날 정도로 공사에 중시되지 않았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특히 원나라 때에 와서는 공무역적인 사례는 아예 없어지고 사무역이나 외국인 거주 역시 사실상 없어지는 수준이 되는데, 이는 무슬림들이 제 2계급으로 광저우 등 황해 지방 도시의 지방관으로 자주 임명되었음에도 원의 시박사에서 이슬람 상인들의 무역을 통제했기 때문이다.

고려가 가장 빈번하게 교역한 나라는 송나라였다. 당나라에 있던 신라방처럼 송나라에, 특히 절강성, 복선성같은 강남지역의 해안지역에 고려인 거주지역이 있었다. 중국과의 교류에서 주로 압록강을 건너는 육로를 택했던 조선 시대와 달리 고려 시대에는 초기에는 산둥 반도의 등주에서 거의 직선 코스로 대동강 어구의 초도, 옹진, 예성강으로 이르는 길이 중심, 그리고 거란족의 위협을 느낀 이후로 전라도 방향으로 항해하기도 했다. 활발하던 양국 간의 무역은 남송 시대 이후 차츰 쇠퇴했다.

일본은 907년 견당사 파견을 중단한 이후 쇄국정책을 유지하며 왕건의 국서에 황제국 용어가 쓰였다며 국서를 거절했다. 하지만 현종대 여진해적들에게 잡혔던 일본인 포로를 송환하면서 관계가 본격적으로 성립되었다. 이후 다자이후진해를 중심으로 지역적인 경제교류가 진행되었다. 또한 고려는 대마도와 이키섬에 지방관들에게 관직을 주고 규슈지역의 지방관들의 조공을 받으며 왜구방지와 고려인의 해상활동을 보호했다.

거란과는 초창기 이후 국교를 트긴 했지만 교역은 송나라 방면에 비해 활발하지 않았다. 거란은 무역장 설치를 요구하는 등 비교적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고려의 반대로 각장 무역이 폐지되었기에, 양국의 무역에서는 조공 무역의 비중이 컸다.

고려와 여진족의 교류는 금나라가 성립되기 훨씬 전부터 있었는데, 고려사에 따르면 10세기 초반에서 11세기 초반까지 여진의 추장이 무역을 위해 고려에 온 것이 230여 회나 될 정도로 자주 왕래했다.고려로서는 경제적 부담이 , 안보적 측면을 고려해 여진과 교역했다. 금나라 건국 후에는 거란 때와는 달리 국경선 부근에 무역장(각장)을 설치해 비교적 활발하게 교역했다. 금나라는 각장에 세금도 부과하고 유출금지 품목이나 동전유출도 금지하였다.

상술했듯 고려 시대에는 아라비아 (대식국)인과의 교역도 종종 이루어졌는데, 당, 송 시대 이래로 무슬림들은 광저우 등 남중국을 중심으로 무역을 했으며, 송나라는 중국 역사상 가장 해외 무역을 장려하는 왕조였기에 이들이 고려에까지 진출했다. 1020년대에서 1040년대에 걸쳐 3차례 100여 명의 대규모 상단이 방문한 것이 확인되며 그 이후에도 계속된 것으로 추측되는데 수은, 향료, 상아 등 고려에서 귀한 사치품을 팔았다. 그러나 아라비아 상인단은 송나라의 시박사(市舶司)의 통제를 받았기 때문에 고려와 1대 1로 활발하게 교역하기는 어려웠고 주로 송을 매개로 간접적으로 교류하는 쪽이 주류였다.

훗날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세워진 후에도 주변 국가인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조선을 가리켜 여전히 '고려'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성계주원장과의 알력으로 명나라 황제의 책봉을 받지 못하자 왕건 때부터 전해 내려온 '고려권지국사'라는 명칭을 사용한 적도 있다. 당나라가 망한 뒤에도 일본에서 중국을 여전히 당이라고 부른 것이나, 진나라가 망했음에도 중국이 차이나라고 불리는 것과 같은 이치. 조선 측에서는 이러한 이름을 부담스러워 했고, 바뀌는데 시일이 걸렸으나, 한자문화권에서는 나라 이름을 조선으로 바꾸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이슬람쪽과는 교역이 없었기에, 이슬람과 서양쪽에 굳혀진 고려라는 이름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대한 제국은 영미권에서 Korean Empire로 불렸는데, 대한 제국(조선)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멸망시킨 전 왕조의 이름이었기 때문에 기겁하고 Empire of Dai Han 같은 이름을 열심히 밀었지만 끝까지 관철되지는 못했다. 러시아쪽도 마찬가지라 중국조선족이지만, 중앙아시아에서는 고려인이다. 정치적 문제도 있지만, 그 이전에 러시아어로 우리 민족을 조선이 아닌, 고려로 불렀다.

대외적으로 한반도 국가를 가리키는 명칭은 고려에서 비롯된 비한자 계통 외국어 이름인 'Korea'가 되어버리고, 심지어는 지리적 지형 자체가 '고려 반도'라는 뜻의 'Korean Peninsula'로 굳어져버렸다. 이는 현대에도 비슷하게 반복되어 대한민국에서 '한반도'나 '한민족'이라는 표현을 열심히 밀고는 있지만 아직까지 한자 문화권에서는 '조선 반도', '조선 민족'이라는 표현을 더 자주 볼 수 있다.

원 간섭기에 들어서 고려는 세계 제국 원나라와 단일 경제권에 속함으로서, 고려 후기의 대외 교역은 그 양적으로 현대 이전 한국사의 어느 때보다 활발했다. 원나라의 지폐인 보초가 고려에서도 활발히 사용되었다.

4.5. 고려는 황제국인가[편집]

먼저 '황제란 무엇인가'라는 것부터 따져야 한다. 일반적으로 동아시아 문화권의 황제라 함은 하늘의 뜻을 받들어 이 세계를 통제하는 군주를 말한다. 고로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있고 하늘의 법칙을 담은 역법을 제정, 연호를 정할 수 있다. 무엇보다 천자를 중심으로 한 세계가 있어야 하며 그 세계를 구성하는 번국이 필요하다.

고려의 경우 고조선 - 삼국 - 남북국을 통해 내려온 고유의 해동 천하관을 잇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특히 후삼국을 통일하며 내부의 호족을 내번으로 상정하고 북방의 여진족, 탐라 등을 외번으로 규정하여 고려 고유의 해동천하를 구성하였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여요전쟁의 승리 (1019년) 이후 북방의 통할력을 획득함으로서 고려만의 해동 천하를 완성하였다.

고려가 황제국 체제를 지향한 것은 사료와 금석문을 통해 드러나며 당대에 원구를 세워 천제를 지내고 군주의 복식을 황색으로 삼는가 하면 군주의 행차시 황토를 깔고 경칭을 폐하라 하였으며 태자에 대한 경칭을 "전하", 왕족에게 삼공의 직위를 부여하고 "제왕"이라 통칭하고 왕족 및 훈신들에게 오등작을 수여하였으며 특히 공,후의 반열은 종친의 경우 "영공전하", 훈신의 경우 "영공 저하"로 경칭하는 등 예법의 수준이 천자국과 동일하였다.

이러한 점은 당시의 외교 정세를 살펴야 이해가 가능하다. (외교 편 참조)

10~13세기의 동아시아는 다원적천하질서가 자리 잡고 있었으며 그 원인은 중국 대륙에 절대 강자가 존재하지 않았던 탓도 크다. 907년 당 멸망이후 1271년 원의 성립까지 약 3세기 반에 걸친 시기의 특성이라 할 수 있다.

이 시기 송, 요, 금, 고려, 대리국(남조), 월남, 일본은 각자의 천하관과 천자를 갖는 세계관을 지녔다. 다만 힘의 논리와 형식상의 의례가 일치하지는 않았다. 고려의 경우 여요전쟁 이후 원과의 강화 (1019년~1270년) 까지 250년간은 그들의 해동천하에서 살았다고 할 수 있다.
대요 관계는 승전국의 입장에서 북방의 제번에 대한 통할력을 획득하였으며 형식적으로 사대를 취함으로서 양자간의 화친관계를 수립하였고, 대금관계의 경우도 비록 과거 번국으로 삼았던 여진을 상국으로 섬겨야 하는 고려 내부의 딜레마에 빠졌으나 대체로 전조(요)와 동일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35] 대원 강화시기 (1270년~1351년)는 원나라의 부마국으로서 세계질서에 편입되었던 시기로서 최근 다양한 시각에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과거 세조구제에 따른 고려의 독자성에 초점을 맞췄다면 최근에는 팍스몽골리카 체계의 일원으로 독자성과 문화의 다양성, 세계화로 시선을 돌리고 있다.

상기와 같은 국제 정세 속에 고려는 남번(탐라), 북번(여진) 등을 거린 해동천하의 천자로서 군림하였으며 이 시대의 자부심은 당시의 금석문이 고려 국왕을 "황"으로 표현하는 등의 모습으로 비춰준다.

물론 유교적 질서에 따라 요, 금의 연호를 사용하고 국제적으로 황제를 칭하지 않은 한계는 있으나 고조선 이래 삼국, 남북국을 거쳐 내려온 독자적인 해동천하관을 이으며 해동천자를 훌륭히 참칭 [36] 한 국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4.5.1. 금석문, 외교 문서 종합[편집]

  • 금석문

황제(皇)께서 피석하여 공경을 다하였고...


『봉암사정진대사원오탑비』 (965년)


황제(皇帝) 폐하(陛下)께서 조칙을 내려 이르기를... 우리 황제(皇帝) 폐하(陛下)께서도 지극하신 정의로...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비』 (975년)


금상황제(今上皇帝)의 만세를 기원합니다.


『태평2년명마애약사불좌상』 (977년)


봉황(鳳皇)의 은혜를 입었으며...


『연곡사현각선사탑비』 (979년)


황제(皇)께서는 이에 크게 감동하고... 황유(皇猷)입음을 경축하여...


『지곡사진관선사비』 (981년)


광종대왕(光宗大王)이 황위(皇位)에 올랐다.


『거돈사원공국사승묘탑비』 (1025년)


엎드려 황제(皇帝) 폐하(陛下)의 덕이 하늘과 땅에 떨치고..


『보현사석탑』 (1044년)


황상(皇上)께서 결(訣) 패일(佩日)...


부석사원 융국사비』 (1053년)


황상(皇上)께서 천조(踐祚)에 오르시던 병술년 봄 정월에 이르러...


칠장사혜소국사비』 (1060년)


성황(聖皇)께서 국척 원신을 지극하게 기리는 것이다.


이자연묘지명』 (1061년)


무릇 우리 황제(皇)의 아들들은 모두 공의 생질이 되니... 황태자(儲皇)와 후비, 친왕 등에 이르러서는...


이정묘지명』 (1077년)


공이 황후(皇后)의 인척이므로 더욱 총애하여... 황후(皇后)가 안에서 공을 불러...


최계방묘지명』 (1117년)


5남 응추는 황자(皇子)인 극세승통에게 의탁하여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다.


이식묘지명』 (1156년)


황태자(儲皇) 역시 그 아름답고 고움을 슬피 여겨 특별히 제물을 내리고 각별히 총애하는 뜻을 보였다.


왕영녀왕씨묘지명』 (1186년)


때는 황상(皇上)께서 즉위하신 원년 모월 모일이다.


개천사석탑』 (1214년)


황태제(皇太弟)가 바로 신종(神宗)이다.


최충헌묘지명』 (1219년)


(거란의) 천자는 공(公)[37]이 우리 황제(皇)의 친족이고 또한... 칙명으로 특별히 잔치를 베풀어주니, 거란 사람들이 아름다운 일이라고 칭송하였다.


최의묘지명(1223년)


중성(中城)을 ?해서 '황도(皇都)의 울타리로 삼았다.


최항묘지명)

  • 대외 관련 내용

-금나라 (여진족) 관련 기록

신은 일찌기 식목집사가 되어 도감의 문서를 보다가, 우연히 금나라 조서 2통을 얻었다. 그 서문에 대금(大金) 황제(皇帝)는 고려국(高麗國) 황제(皇帝)에게 글을 부친다 등등 으로 이르고 있으니, 이는 형제를 맺은 확실한 증거인 것이다.


《제왕운기》 (1287년)


-일본 측 기록

고려국(高麗國) 황제(皇帝)가 첩장을 헌상했다고 대재수가 전했습니다.


미나모토노 토시후사의 '《수좌기》 조랴쿠 4년 (1080년)'


* 고려사

조서를 내리기를,
“제왕의 덕은 겸손이 첫째이다. 이 때문에 노자(老子)는 말하기를, '왕(王)ㆍ공(公)은 자칭하기를 고(孤 아비가 없다는 말)ㆍ과(寡 덕이 적다는 말)ㆍ불곡(不穀 착하지 못하다는 말)이라 한다.' 하였고, 한 나라 광무제(光武帝)는 조서를 내려 (신하들이)글을 올릴 적에 성(聖) 자를 쓰지 못하게 하였다.
지금 신하들이 임금을 높이고 덕을 찬미함에 있어 용어가 너무 지나치니, 심히 합당하지 않다.
지금부터는 무릇 장(章)ㆍ소(疏)를 올리거나 공용 문서에도 "신성제왕(神聖帝王)"이라 일컫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고려사인종(仁宗) 16년 2월

"우리 나라에서 태일(太一)의 별 방위에 따라 제사지내는 것은 실로 온당하지 못한 것이다. 고려 때에 해동 천자(海東天子)라고 참칭(僭稱)한 까닭으로, 중국에 조림(照臨)한 별을 망령되게 금년에는 어느 방위로 옮겼다고 이르고 곳곳에서 제사지냈는데, 천하로서 본다면 우리 나라는 하나의 나뭇잎과 같으니, 어찌 동·서·남·북을 나누어서 제사지낼 수 있겠는가. 중국에서 서방이라 하여 제사지내면 우리 나라에서도 서방이라 하여 황해도에서 제사지내는 것이 옳겠는가. 너희들은 그것을 의논하여 계문(啓聞)하라."

조선왕조실록 세종22년 2월 23일


5. 문화[편집]

6. 외교[편집]

10~13세기는 동북아시아 제국에 다원적 천하질서가 자리잡았던 시대였다. [38] 이에 송, 요, 서하,일본, 월남, 대리국 등 모두 자국의 군주를 천자나 그에 준한 존재로 자신들을 칭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이시기의 국제관계는 각국의 독자성을 기초로 형성되었다. 그러나 당시 동아시에서 국가간의 질서가 다중심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해서 국가 간의 차등적인 위상이 배제되었던 것은 아니다. 실례로 송과 요는 실질적으로는 대등한 대적국의 위치였으나 형식적으로는 상호 형제국으로 송이 형, 요가 아우의 위치에 있었으며 그 대가로 송은 요에게 공물의 성격을 지난 막대한 세폐를 요에 바쳐야 했다. 이에 형식적 위상은 실제 힘의 차이에 따른 관계와 괴리되어 있었다. (형인 송이 아우인 요에 세폐를 바침... 일종의 조공인 셈)

고려는 요에 대해 명목상 신하의 위치에 있었지만 실제로는 북방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두고 서로 다투는 사이였으며 여요전쟁에서 승리함으로서 북방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는데 성공하였다. 따라서 고려가 요에 대해 취한 신하로서의 위치는 명목상인 것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고려는 전쟁 이후 요와의 관계를 화찬 관계로 규정했고 그것이 당시 실정에 부합했다. [39] 여기서 화친관계란 양국간의 전쟁 이후 맺어진 평화적인 국제관계르 의미하며 주로 정치적인 관계를 중심으로 형성된 국제 평화 질서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 개념이다. [40]
고려의 해동 천자, 해동 천하 개념의 확립은 여요전쟁 승리 후 북방 제번에 대한 통할력이 생긴 이후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할 수있다.

고려와 송 사이도 역시 국제 관계의 형식과 내용이 괴리되고 있었다. 송이 고려에 대해 갖는 영향력은 극히 제한적으로 외교의 단절, 통교의 주도권은 고려가 지니고 있었으며 송은 그에 대해 막을 힘이 없었다. 고려의 송에 대한 관계는 통교 관계 이상이라 볼 수 없다. 통교관계는 무역, 통상, 무역교류 등을 중심으로 한 관계로 정부 대 정부의 성격은 약한 관계를 말한다.
송은 고려와의 외교 수준을 국신사 로 정리하여 진행하였으며 이는 당대 요와의 관계와 동일한 수준이었다.

한편 일본은 동아시아 세계의 외곽에 있으면서 다른 여러 나라에게 주목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외교적 대상이 될 가능성이 있었지만 일본 자체가 고립을 선택했고 그 바탕에는 자기 세계에 대한 자족적 인식이 깔려있었다. 그러나 고려, 송 등과의 경제적 교류는 있었으며 때로는 일본 상인이 팔관회에 참석하여 해동천하의 구성원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고려 해동천하는 10세기~13세기 중엽까지 지속되었으며 1126년 금나라에 대한 사대 외교를 정하면서 그 방향이 바뀐다. [41] 북방의 번국으로 여기던 여진이 금국으로 독립하면서 북방의 영향력 뿐만 아니라 번국의 상실은 해동천하의 붕괴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표면상 칭신사대였으나 고려에서는 화친으로 표현했으며 실제로도 그러하여 금과의 외교 관계 번반은 모두 이전 요와의 화친 격식에 준하여 성립되었고 금이 멸망할 때 까지 준수되었다. 그러나 한 때 번국이었던 여진에 대한 화친수용 및 칭신사대에 대해 고려 내부의 진통이 없을 수 없었다. [42]

다원적 천하질서는 13세기 몽골의 등장으로 그 수명을 다했으며 이후 명, 청으로 이어지는 강력한 중화제국과의 관계는 전통적인 해동천하관에 영향을 미쳐 고유의 천하관을 포기한 조선의 외교정책 수립으로 이러지게 되었다.

7. 평가[편집]

7.1. 최초의 자력 통일과 단일국가관[편집]

일찍이 신라삼국을 통일할 때 당나라 같은 외부 세력을 끌어들인 것과 달리, 왕건의 고려는 한반도 최초로 완전한 자력 통일을 성취한 나라로 잘 알려져 있다.

고려 역시 거란 등 외부 세력과 손을 잡을 의지가 없었기도 하지만, 당시 당나라만주 역시 후삼국에 버금가는 난세일본덴노 권력의 약화와 고립주의로 나아가고 있었기에 한반도 정세에 개입할 여력이 없었던 덕분이기도 하다. 이런 고려의 태도와 달리 고려와 겨루던 후백제거란, 일본과 힘을 합쳐 고려를 쌈싸먹으려고 열심히 해외에 사신을 보냈다. 그러나 일본에 보낸 사신은 문전박대당했고 거란에 보낸 사신단은 고려 해역을 피해 먼 바다로 다니다보니 풍랑을 만나 적국에 표착해서 모두 죽임을 당했다.

신라의 삼국 통일이 삼국을 처음으로 하나로 묶는 계기가 되었으나 신라 정권은 당대 사람들의 의식까지 완벽하게 통합하는 데에는 실패했기에 후삼국 분열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에 비해 고려는 패서 지역 기반의 성인인 단군, 기자, 동명성왕을 시조 급으로 끌어올리고 이들을 통해 삼국 유민들의 의식적 통합을 이뤄내는 데 성공해 단일 공동체라는 관념을 완성시켰다. 덕택에 단군과 기자가 통치한 고조선은 삼한에 건립된 최초의 국가이자 시조국으로 공인되었고,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성왕은 부벽루, 동명왕편 등의 고려 시대의 각종 문학 작품에 등장하게 된다.

신라에서는 처음에는 박혁거세를 시조로, 김씨가 왕조를 독점한 후부터는 김알지 혹은 성한왕을 시조 급으로 섬겼다. 신라의 시조 의식은 여러 세력이 난립했던 초기 역사와 마찬가지로 매우 복잡하다. 따라서 신라가 의식적 통합까지도 성공했다면 한민족의 시조가 적어도 단군은 아니었을 것이다.

즉 이렇게 고려 시대에 형성된 역사 의식과 단일 공동체 관념은 조선 시대를 거쳐 현대까지도 이어지게 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고려의 통일 이래 한국은 천년 이상 단일국가를 유지했고, 한반도에 사는 동일한 모국어 문화를 공유하는 한민족이라는, 현대까지도 이어지는 국가 관념의 기틀을 성립해냈으므로, 한국사에 고려가 끼친 영향력과 가치는 그야말로 지대하다.

7.2. 고구려 계승[편집]

고려는 개국시부터 고구려 계승을 표방해 국호를 아예 고구려에서 따왔고 관찬 사서인 삼국사기에서도 고구려를 본기에 포함시켰으며 단순히 표방한 것을 넘어 실질적으로도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을 중요시 해 제2의 수도(서경)로 삼고 서희의 담판을 통해 고구려 계승을 국제적으로도 공인받았다. 게다가 잊혀질 뻔 했던 동명성왕을 시조로 공인해 다시 국가적 숭배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이로써 고구려사가 중국사보다는 한국사에 깊은 관계를 맺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국가 이념적이나 문인의 의식적으로는 고구려 계승 의식이 제법 유행하였으나 12세기를 제외하면 세기마다 국가 단위의 외세와 맞서야 했던 고려에게 북진 정책은 요원한 일이었다. 게다가 유교적 정통 사관이 수입되면서 신라 계승 의식 또한 유행하게 된다. 물론 그렇다고 고구려를 아예 버리는 건 아니고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먹어서 한반도의 정통 왕조가 되었고 그 신라를 먹은 고려가 바로 진정한 정통 왕조라는 식의 결국 내가 킹왕짱 관념이었다.

보통은 외세와의 전쟁시에 고구려 계승 의식이 상승했다. 요나라(상대적으로 강한 외세):고구려 → 금나라(상대적으로 약한 외세):신라 → 대몽 항쟁기:고구려 → 원나라 간섭기:신라 혹은 고조선[43]으로 이동했다. 이것도 어떤 점에서는 상당히 현실적이었으며 이런 계승 의식과 관련해 구체적인 파당을 형성하여 대립을 보인 적은 없다.

그러나 예종의 여진 정벌이나 공민왕의 요동 정벌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고구려 계승 의지를 가지고 제1차 요동정벌을 비롯해 수 차례나 북방 원정을 나갔을 정도로 고구려 계승 의지는 고려 치세 내내 매우 중시되는 사항이었다.

이것이 바로 후대에서 조선과 평가가 갈리는 이유 중 하나이다. 조선은 고려보다 훨씬 나은 상황에서도 압록강, 두만강까지 진출한 후에는 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북방으로의 확장을 그다지 꾀하지 않았는데, 이것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이상을 위해 없는 힘을 쥐어짜내며 분투한 고려와 대비되었기 때문이다.[44][45]

이외에는 계승 의식과는 별개로 지정학적 조건 자체는 지배 영토가 유사한 신라보단 오히려 고구려와 유사해지게 되면서 문화적, 환경적 조건이 크게 변화하게 된다. 삼국 전쟁 이후 세워진 발해는 북방 민족들을 안정적으로 통제했고 패서 지역을 신라와의 완충 지대로 두면서 당나라 - 발해 - 신라 사이에 미묘하면서도 안정적인 균형 관계가 성립하게 되기 때문에 신라는 마치 섬나라와 같은 지정학적 조건을 가지게 되어 해양 국가적 속성을 발전시켜나갈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말갈을 비롯한 북방 민족과는 당연히 이렇다할 교류가 없었고, 신라의 주요 외교 상대는 동아시아의 어느 국가에게나 기본적으로 중요한 국가였던 당과 중심지의 위치상으로도 가장 가깝고 국가 초창기 때부터 좋든 싫든 항상 투닥거려 왔으며 사회 문화적 조건이 타국에 비해 비교적 유사한 일본이었다.

그러나 고려의 경우, 중심지가 일본보단 대륙과 교통상으로 훨씬 가까운 패서 지역이었고 북진 정책으로 인해 거란족, 여진족 등의 북방 민족들과 국경을 직접적으로 맞대게 되었으며 일본과의 교류는 거의 끊어져나가게 되면서 대면 대면한 관계가 된다.

이러한 변화로 인해 고려는 고구려가 그랬던 것처럼 대륙 세력과의 영원히 고통받는 항쟁의 무대에 들어서게 되고, 북방 민족 계통의 문화 또한 크게 유입되게 된다. 거란 잔당과의 전투인 강동성 전투 때 고려 영토 내에 직접적으로 들어와 항쟁한 거란인들만 해도 8만 명이었다. 거란의 전성기 때 벌어졌던 전쟁(여요전쟁)에서는 너무 많은 거란인들이 포로로 잡혀 남경(서울)에 포로 수용소를 따로 설치해야 할 정도였다. 특히 원 간섭기에는 격변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복식, 언어, 음식 등에서 북방 민족의 문화가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고려의 고구려 계승에 대해서는 무덤 양식 또한 좋은 비교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비슷한 경우로 금나라청나라의 관계를 생각해볼 수 있다. 금이 멸망하고 금의 중심 세력이었던 완안씨 황족이나 중앙 귀족들은 학살당하거나 숨어살게 되면서 완전히 와해되어 버렸고, 중심 세력과 한참 떨어져 방계 세력이라 할 수 있는 변방 호족 급의 여진족들이 원나라명나라의 지배 하에 복속되어 근근히 여진족의 정체를 이어갔을 뿐이었다. 금의 부흥을 기치로 들었던 누르하치의 선조들 또한 건주좌위지휘사(建州左衛指揮使)라는 명나라의 지방 관직을 대대로 하고 있었다. 또한 청나라는 내몽골을 정복하여 원나라의 국새를 얻은 후 황제국을 선포함으로써 원나라에 대한 계승 또한 강조하였다. 즉 자신들은 금나라의 후예이면서도 한때 유목 세계를 통일한 원나라의 대칸위 또한 계승했다는 것이다. 중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 명나라를 정복한 후에는 중원의 천자 또한 계승하였다고 선포하였다.

따라서 금나라고구려, 원나라신라, 청나라를 고려에 대응시켜놓고 생각해보면 고려의 입장이 보다 분명하게 보일 것이다. 이건 한마디로 여러 이익 집단과 현실에 대응하다보니 생긴 대응 방식이라고 봐야한다. 비슷한 사례로 오스만 제국이 있는데, 오스만 제국의 황제는 이슬람 세계에선 칼리파(종교 지도자) 겸 술탄 (정치 지도자), 기독교 세계에선 로마 제국의 황제, 예루살렘에선 성묘의 보호자 등의 타이틀을 모두 갖고 있었다.

발해의 고구려 계승 의식과 비교한다면 발해는 고구려 멸망 후 얼마 안 되어 그 유민들에 의해 건립되었으므로 상대적으로 당대의 기억이 많아 시간적으로 유리하고 고려는 고구려의 중심지와 수도 및 인구 밀집지를 확보하고 그 근처의 인적, 지리적 자원을 접수했기에 공간적으로 유리하다고 볼 수도 있다.

두 국가 모두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의 제도를 적극적으로 차용하였기에 제도적으로 유사한 모습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현대 한국인 기호로 봐선 '당대'와 '영토'에 대한 이상한 집착이 있다. 나름 타당한 이유는 있으나 다소 비합리적인 수준에까지 다다르기에 문제가 된다. 때문에 발해가 더 고구려에 가까워보이긴 하겠지만, 정작 국제 사회에서 고구려로 더 인정을 널리 받았던 건 전자가 아닌 후자였다. 즉 계승성에서 있어서 '당대'와 '영토 일치성'이 전부가 아니란 이야기다.[46]

게다가 그 영토로만 봐도 고구려가 가장 중요시 여겼던 영토는 요동이나 만주가 아니라 제1수도가 있는 평양성 일대(평안도, 옛 고조선/낙랑군 일대)와 그 배후 지인 제3수도가 있는 한성 일대(황해도, 옛 대방군 일대)였다.[47] 당대 동양 왕조들의 일반적인 인식 기준으로 수도와 그 배후지는 내지가 되고 여타 지역은 이민족에 대한 방어선이자 속지에 해당하는 외지가 된다. 고구려의 경우 평양성이나 한성 일대가 내지에 해당하고 요동이나 만주, 경기도, 강원도, 함경도 같은 지역은 외지에 해당한다. 즉 평양성과 한성을 모두 차지하는 데 성공한 고려는 발해보다 오히려 고구려의 중심지를 많이 차지하고 있었다. 서희의 담판에서 평양성 확보 여부가 고구려 계승에 있어서 강력한 근거가 된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있다.

여기에 이어서 발해가 차지한 북방 영토보다는 고려가 차지한 고구려의 내지가 당연히 고구려인들이 가장 많이 살던 지역이었다. 물론 성곽 유적은 요동에 가장 많이 남아있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군사 시설에 불과하다. 현대 한국 기준으로 생각해보면 강원도와 경기도 북부에 군 시설이 많다고 해서 그 지역이 한국의 중심지가 되지 않는 것과 같다. 즉, 현대 한국인들이 선호하는 만주(특히 요동 방어선)는 당대 고구려인들 기준으로 생각해보면 어디까지나 군역으로 끌려가는 강원도(...) 같은 포지션이었고[48] 될 수 있으면 당연히 경제 문화적으로 풍족한 내지에 붙어서 살고자 했다.

7.3. 무장의 나라[편집]

문관을 우대한 고려의 통치 제도와 대몽항쟁기에 원나라의 제후국이 된 굴욕적인 시절 때문에 약하다는 이미지가 있으나[49] 고려의 전쟁사를 보면 대륙의 대규모 침공이 빈번했고, 이에 맞서기 위해 상당한 규모의 병력을 동원해 침략국과 맞싸워 승리한 기록들이 보이고 심지어 고구려 처럼 대규모 원정을 떠난 사례도 있다.

대표적으로 3차례의 여요전쟁에서 승리하면서 고려 - 거란 - 북송간의 3각 구도를 편성하기도 했고,[50] 여진 정벌을 시도하기도 했다.[51] 여몽전쟁 때는 뼈 아픈 패배를 당했으나 1차 침공 때는 몽골 기병을 상대로 야전에서 승리를 거둔 모습이나, 일시적이나마 요동성과 주변 일대를 점령한 경험 등을 보면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라는 이름이 무색해지지 않게 느껴지는 부분이다.

이처럼 외부 세력의 침입과 내전이 많았던 시대였기 때문에 군인의 수요가 컸고, 후대 조선 시대에 비해 문치주의 성향이 약한 편이었기에 격구수박(무술)과 같은 실전성 높은 무술들이 국가적으로 성행했다. 정중부이의민도 무술 실력으로 왕의 눈에 띈 것이 출세의 시작이었을 정도. 무신정권까지 있던 나라라 그런지 무협지에나 나올 법한 활약을 보인 전설적인 무인들이 꽤나 많다.

  • 개국공신 중 유금필은 출동만 하면 지던 싸움도 전세가 역전되는 활약을 보였다.

  • 고려 2대 국왕 혜종은 통일 전쟁 때 활약한 무인으로, 방에 자객이 난입하자 맨주먹으로 때려잡았다.

  • 여요전쟁 때 양규는 1천여명의 병력으로 6천 거란군이 지키는 곽주성을 탈환했다. 이말은 즉, 6배가 넘는 적을 공성전(!!!)에서 승리했다는 뜻이다. 이후 소수 병력으로 기습전을 펼쳐 거란군을 괴롭히며 3만의 포로를 구출해 냈다.

  • 문종 때는 '유고'라는 절충군 대정이 있었다. 그는 10명의 병사와 함께 저녁에 순찰을 돌다가 40여명의 여진족 도적의 습격을 당했다. 병사들은 놀라서 숨었지만 유고는 단기로 앞장서서 40여인의 여진 도적들과 맞서 싸웠고 결국 여진인들은 도망쳐 버렸다. 출처는 고려사절요 문종 3년(1049년) 6월.

  • 여진전쟁 때 활약한 한국사 최강의 소드마스터 척준경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 무신정권의 이의민두경승수박의 고수였으며 궁궐에서 주먹으로 을 쳐서 힘겨루기를 한 일화가 정사에 기록되어 있다. 특히 이의민은 의종을 시해할 때 맨손으로 척추를 접어서 죽이고, 조위총을 토벌하던 전투 중 눈에 화살을 맞았는데 그래도 적진으로 돌진해 적군을 물리쳤다.

  • 경대승은 약관 (20세)에 고려 왕실 친위대 교위에 임명되고 26살에 기해정변으로 정중부를 죽이고 정권을 잡았는데, 무엇보다 그가 집권할 당시에는 (위에서 서술되어 있는 용력의 소유자인) 이의민이 그를 두려워해서 경주로 내려가 꼼짝도 하지 못했다.

  • 김경손귀주성 전투에서 12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몽골군 진영을 들쑤셔 놓고 돌아왔다.

  • 승려 김윤후는 화살 하나로 몽골군 장군 살리타이를 저격 사살했다. 후에 김윤후는 자신이 살리타이를 쏜 게 아니며, 그때 자신은 활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했다고 한다. 이후 충주성 전투에서 노비군을 이끌고 70여일을 농성하여 몽골군의 맹공으로부터 성을 지켜냈다. 이는 만화 살례탑에서 그려진다. 물론 김윤후가 사살한 것이 맞지만 겸양의 뜻으로 한 말일 수도 있다.

  • 합단적이 침입할때 합단적은 강원도의 치악, 즉 지금의 원주까지 내려왔다. 이때 합단적의 지휘관인 카다안은 원주에 도착해 노략질을 해서 전쟁 물자를 얻으려 했다. 그중 기병 50명은 치악산을 순찰하면서 소와 말을 약탈하고 있는데, 원주 별초 향공진사 원충갑은 보병 6명으로 기병 50명을 무찌른 후, 말 8필을 도로 빼았는 놀라운 전과를 보여준다.

  • 또한, 원충갑은 치악성(원주성)에서 전투가 발발해 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해있을때 7명의 궁병과 함께 기병 400명을 모두 죽였다. 더불어, 옆에 있는 장수 흥원창판관 조신은 '''단지 공을 세우려고 성 밖에 나가 적군 1명을 베었고, 화살이 그의 왼쪽 팔을 관통하였으나, 그는 북을 치며 성 밖에서 항전했다. 그러자 합단적은 사기가 극도로 저하되고, 합단적은 물러간다. 이때 조신은 합단적의 장수인 도라도의 머리에 칼을 꽂아 그의 목을 장창에 꽂은 후, 그 목을 걸어보이자 적은 모두 도망쳤다고 한다.

  • 충렬왕 때는 '한희유'라는 장군이 있었는데,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에 참전했을 때는 맨손으로 적의 칼을 빼앗아 적을 베었는데 손을 다쳤으나 그 부상 속에서도 용기를 내어 적들을 베었다. 카다안의 침입 때는 적군에 활을 잘 쏘는 적장이 있었는데 1장 8척(약 540cm!)의 창을 휘두르며 적진에 돌입하자 적들이 놀라 한쪽으로 밀렸고, 그 적장을 움켜잡아 베어 죽이고 장창에 그 목을 걸어보이자 적의 기가 꺾였다고 한다. 이 역시 전부 정사인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이 사람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여기 참고.

  • 최영원나라의 요청으로 중원에서 반란을 진압할 때 적들에게 창에 찔리면서도 전투를 속행하여 그대로 승리하였고 국내에선 홍산 전투에서 입술에 화살을 맞은 채로 전투를 벌여 그대로 승리했다. 고려를 침공한 왜구들이 "머리 하얀 최 만호"라고 부르며 두려워했을 정도.

  • 이성계의 궁술에 대해서도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으며, 활만 잘 쏜 것 뿐만 아니라 전략과 무력도 뛰어났고, 훌륭한 야전 사령관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부분도 약간 비판적으로 보아야 할 것이,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라 조선 태조인 이성계를 띄워주기 위한 기록일 수도 있기 때문. 하지만, 허나 여러 민족의 외적과 싸우면 서도 이성계의 무패의 기록과 고려사와 조선실록 이외에도 원사, 일본사에도 이성계의 초월적인 활 솜씨가 기록되어있다. 국내 기록에도 시종일관 신적인 내용으로 기록한 것을 보면, 다소 과장이 있다 하더라도, 활을 잘 쏘긴 어지간히 잘 쏜 모양이다. 활의 극한의 경지에 다다랐다고 볼 수 있다.

7.4. 한국사 발전[편집]

그리고 고려 때 삼국사기, 삼국유사와 같은 역사서가 편찬되서 고구려를 포함한 삼국의 역사가 지금까지도 전해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고대 한국사의 기록이 너무나도 부족한 것을 보면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존재가 그나마 역사학계에서 큰 도움이 되고있는 셈이다.

7.5. 한반도 왕조 비교[편집]

7.5.1. 이전 국가와의 비교[편집]

7.5.2. 조선과의 비교[편집]

8. 왕사[편집]

9. 고려/인물[편집]

10. 고려사 연구의 난관[편집]

고려 시대 연구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점은 사료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 시기를 다룬 주요 사서로는 조선 시대에 쓰여진 고려사, 고려사절요가 있으며 동시대 북송의 사신이었던 서긍이 쓴 고려도경이 중요 사료로 꼽힌다. 고려사, 고려사절요는 조선 시대에 편찬된 고려의 역사서다. 고려에도 고려실록이 있었으나 여요전쟁이나 대몽항쟁기 등의 전란 때 소실, 남아있는 실록 또한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는 조선 초에 남아있던 고려실록을 바탕으로 하여 만든 축약본이다.

그 외 3가지 사료 모두 편파성이 있다. 일단 조선의 입장에서 바라본 고려와, 북송의 입장에서 바라본 고려의 모습이기 때문에, 사실 그들 스스로 역사를 서술한 예는 드물다. 고려 시대에 삼국을 바라본 예가 삼국사기, 삼국유사이다. 이 두 역사서는 삼국의 역사를 서술했지만 고려의 시각에서 고대를 해석한 것과 똑같은 이치이다.

그나마 세종대왕이 각별히 신경써서 편파성을 줄인 고려사와 그런 거 없는 고려사절요는 고려가 멸망한 후 조선 초기에 고려의 사초를 바탕으로 편집되었는데, 아무래도 조선 건국의 정당성 홍보 요소가 제외될 수가 없다. 따라서 고려 말기의 사건들(특히 공민왕, 우왕, 창왕시기)은 여러 모로 비판을 받고있다. 거기다 요약집이나 다름없어 텍스트가 조선왕조실록과 비교해도 너무 부족하다. 이는 고려가 겪었던 여러 전란이 원인이기도 하다.

고려도경의 경우는 사신이 고려를 오가는 과정과 개경에 틀어박혀서 보고 들은 정보 위주로 송나라 황제에게 올린 글이기 때문에 주마간산이라거나 수박 겉핥기 같다. 몇 가지만 들면, 고려도경에서는 고려의 역사와 관리 등급을 설명하는 부분이 고구려와 뒤섞여 있다. 또한 서긍은 고려가 바닷가에 위치해 있으면서 선박이 지극히 단순하고 조잡하며 작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고려는 여진족 해적을 토벌하면서 일본까지 원정을 갈 정도로 선박 / 항해 기술이 뛰어났고(과선 문서 참조.), 근래 고려 시대의 고선 발굴을 통해 대형선의 존재도 입증되었다. 물론 당시 서긍 일행이 타고 온 사신선인 신주(神舟)에 비하면 보잘것없을지 몰라도, 신주 자체도 당대 송나라의 엄청난 기술력과 자본을 투자해 만든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고려의 선박 수준은 전혀 낮은 수준이 아니다. 더구나 원래 문서에는 도경이란 표현처럼 그림이 첨부되어 있었는데, 이게 세월이 흐르면서 난리통에 다 날아갔다. 때문에 이 세 사료 모두 철저한 사료 비판이 필요하다.

고려에도 분명히 실록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안타깝게도 전부 유실되었다. 조선왕조실록 중 선조수정실록을 보면 원래 한성 춘추관 사고에 고려 실록이 보존되어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유실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불행 중 다행으로 고려사고려사절요는 안의, 손흥록 등이 보존하여 오늘날에 이를수 있었다. 다만 조선왕조실록이 고려왕조실록의 것을 전범으로 삼았다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내에 짐, 외왕내제 등 조선 시대 사람으로선 상상도 못할 단어가 가감없이 들어갔다곤 하지만 고려 사람의 시각에서 고려시대를 기술한 것은 아니다. 또 고려도경은 중국의 입장에서 고려를 바라본 사서고 그 시기 또한 한정적이다. 그 외에 이규보 등의 문집이 있지만 고려 시대 전체를 파악하는 것은 너무나 어렵다. 드물게 문중에서 고려 시대 문서가 나온다 해도 그 수는 손가락에 꼽을 정도. 오죽하면 고려 시대 관직 임명장은 나오면 보물급이라는 말까지 할 정도다. 이 때문에 고려 시대사 연구자 대부분은 한문을 기본 소양으로 장착하고 몽골어, 만주어 등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면서 사료 탐색에 열을 올리고 있다.

여담으로 인하대 고조선 연구소[52]에서 2017년 5월 22일 고려의 천리장성이 요동에 있었다는 주장을 제기했으며, 5월 26일 관련 학술 대회를 열어 연구 결과를 발표하였다. 관련 기사 관련 기사 그러나 학술 대회를 반복적으로 열 뿐, 정식 논문으로는 단 한 차례도 제출된 바 없으며, 통용되어 쓰이는 압록(鴨錄)과 압록(鴨淥)이 서로 다른 강이라고 주장하는 등 논리적으로 문제가 많다.

11. 관련 문서[편집]

11.1. 건축[편집]

11.2. 고려를 다룬 사서[편집]

11.3. 당시 만들어진 책, 작품[편집]

12. 고려를 배경으로 한 작품[편집]

13. 둘러보기[편집]

[1] 태봉국궁예를 왕건이 쿠테타로 축출한 후 수도를 철원에서 개경으로 옮겨 고려를 건국했다.[2] 음력 : 918년 6월 15일(고려사절요에는 6월 병진일이라고 되어있다.) ~ 1392년 7월 17일, 양력 : 918년 7월 25일 ~ 1392년 8월 5일[3] 우산국, 탐라국 등. 단, 공민왕 때는 제1차 요동정벌을 통해 요동성을 일시적으로 점령하기도 했다.그리고 일부 역사서의 기록들을 무시하고 학계가 설정한것도 있다. 고려 영토에 대해선 아직 연구 중이다. 또한 동북9성의 해석에 따라 동북지방에 대한 비정이 달라질 수 있다. 당대에 고려의 동계가 전대의 고구려보다 더 동쪽이었다는 기록도 있다.[4] 대몽 항쟁기에는 강화도(강도, 江都)가 수도였다.[5] 무신정권때는 군정[6] 고려사고려사절요에서는 모조리 으로 표기했으나, 외왕내제였던 만큼 고려 내에서는 천자로 불리었다.[7] 대부분 발해 멸망 이후 고려가 발해의 유민들을 받아들였을때 들어왔다.[8] 다만, 고려는 불교를 국교로 삼았으나, 다른 종교도 금하지 않고 자유로이 믿게 하는 등 신앙의 자유를 인정했다.[9] 938년 합병. 숙종 시기에 행정 구역화되었으나 얼마 간의 자치권을 누리는 세습 '군주'가 존속되긴 했다. 이마저도 완전히 없어지는 건 조선 때.[10] 926년, 요나라에 의해 멸망한다.[11] 탐라국은 938년 탐라국 45대왕 자견왕 항복 / 합병 후 탐라국 멸망.[12] 정안국은 938~986년. 장안국과 국명이 유사해 혼동될 수 있으니 주의. 정안국 이후, 올야국, 흥료국, 대발해 같은 부흥국이 건국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망했다.[템플릿] 사진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EA%B3%A0%EB%A0%A4, https://ko.wikipedia.org/wiki/%EA%B3%A0%EB%A0%A4, https://ko.wikipedia.org/wiki/%EA%B3%A0%EB%A0%A4[14] 이전에 고려가 여진족들에게 조공받던 시절을 생각하면 격세지감.[15] 다만 고려에 쳐들어온 몽골군이 최정예군은 아니었다. 당시 몽골 최정예군은 중국 쪽에서 주로 활동하고 있었다. 당시 고려를 침공한 몽골군은 여진족 장수로서 혼성 부대를 지휘한 오야르 등의 군대나 혹은 예구 대왕의 동방 왕가 병력으로 볼 때 '타마(보조 경기병대)'로 추정되는데 타마의 주 역할은 전장에서의 보조 지원 및 정복지에 대한 치안 관리 및 유지였다. 또한 몽골군의 1차 침공 때 왕영조가 이끈 부대가 한군(漢軍)인데 한군의 주 역할은 몽골군이 접수한 요새나 고을을 지키는 주둔병 성격을 띄었다. 무신정권이란 이름이 무색해지는 순간 하지만 쿠빌라이 칸이 고려에 "아직 몽골에 항복하지 않은 나라는 남송과 너희 나라(고려) 뿐이다."라고 한 적도 있다는걸 보면 고려의 저항이 끈질기긴 했던 모양(물론 정확힌 베트남 등도 살아남았다). 더군다나 당시 쿠빌라이 칸은 남송정복전쟁을 직접 지휘하고 있었다.[16] '역사저널 그날 - 쿠빌라이와 원종의 만남, 고려의 운명을 바꾸다.' 편 참조.[17] 고려와 고구려는 사실 같다.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기 이전에 고구려가 고려로 이름을 바꾸었으나, 왕건의 고려와 구분하기 위해 그냥 고구려로 부르는 것. 실제로 중국 사서에는 고구려를 고려로 표기하기도 했다. 그리고 서양에는 Corea 내지는 Korea로 알려졌다.[18] 코마, 고구려 역시 코마라고 읽는 경우가 있다. 고마 신사(고구려 멸망 후 일본에 정착한 고구려 유민들이 세운 신사. 지금도 현존하고 있다.), 코마가와역 등.[19] 또는 Solongos도 있다. 고려 시대나 지금이나 몽골인들은 한국을 솔롱고스(Solongos)라고 부르지만, 현대 몽골어에서는 현대 코리아와 구별된 고려 시대의 고려를 Kuryo라고 부른다. Solongos는 몽골어로 '무지개의 나라'라는 뜻인데, 몽골 국립 할하 몽골어 학회에 따르면 몽골어로 한국을 이르는 말인 Solongos가 '해 뜨는 동쪽의 나라'라는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공식적으로 명시했다. 색동 저고리에서 유래됐다는 설도 있으나, 위에서 설명했듯이 근거없는 낭설이다.[20] 다만 중국과 국내 일부 재야학자들 사이에선 여전히 고려가 신라를 계승했다는 주장도 나온다. 무조건 어거지로만 보기도 뭐한게, 중국쪽 일부에서 신라가 고려를 계승했다는 인식은 단순히 동북공정의 여파가 아닌 오래 전부터 있던 인식이었기 때문. 실제로 고려 서희와 요나라 소손녕과의 회담에서도 소손녕이 고려는 신라를 계승한 나라이니 "통일 신라가 지배한 적이 없는 옛 고구려의 영토였던 한반도 북부의 영토 획득에 고려는 정당한 권리가 전혀 없음을 지적한다." 허나 이에 서희가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것이니 거란이야말로 동경(옛 고구려의 땅)을 정당한 권리도 없이 점거한 것이라고 반론하여 소손녕의 인식을 지적한 바 있다. 소손녕 또한 서희의 말에 수긍한다.[21] 다만 소손녕은 유목민족인 거란족이었기 때문에 비록 거란족의 요나라가 중국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세워진 나라이기는 하지만 그걸 보편적인 당대 중국인의 시각으로 볼 수 있는가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애초에 삼국이 현존하던 당나라대 중국에서는 삼한이라고 해서 고구려, 백제, 신라를 같은 족속으로 퉁쳐서 보는 시각이 많았다. 당장 중국에서 죽은 고구려인들의 묘지 비문만 봐도 요동삼한인이라고 지칭해놓은 게 상당하다. 게다가 요나라와 동시대에 존재했으며 정통 중국이라 할 수 있는 송나라의 지식인인 소식은 정작 고려를 비칭할 때 고구려를 까는 것과 마찬가지의 단어인 맥적(맥족 도적)을 그대로 사용했다. 마찬가지로 송의 서긍이 고려를 직접 방문하고 저술한 고려도경에서도 고려는 고씨 왕조가 망했다가 왕씨 왕조가 들고 일어난 걸로, 즉 고구려에서 고려로 그대로 이어지는 것으로 서술해놓았다.[22] 그 외 원이 새로 일어난 명에 달달 털려 북원으로 전락하던 시기에도 "요양성(遼陽省) 평장(平章) 유익(劉益)과 왕우승(王右丞) 등이 명나라에 귀순하려 하였으나 그들은 명나라가 주민을 이주시킬까 근심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요양이 본시 우리 땅이었으므로 만약 고려가 청하면 이주를 모면할 수 있지나 않을까 하여 사신을 파견하여 통보하여 왔다."라는 기록도 있다. 요양성은 옛 요동성을 가리키는데, 이에 의하면 원나라 장수와 고려 정부 모두 요동이 옛날에는 고려의 땅이었다고, 즉 '고구려=고려'라고 인식하고 있었다(물론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고구려 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들이 난립하는 형태였지만 당시엔 대부분 망하고 없었다). 한편, 좀 더 현실적인 시각으로 접근하자면 계승 의식은 고구려를 표방했지만 실질적 세력권은 신라 영역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즉, 고구려+신라(+백제)를 다 품은 것. 이는 한족이란 개념이 하상주나 진이 아닌 한나라에서 나온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다.[23] 송이 중추원, 삼사 등의 기관을 부설한 까닭은 송은 3성 6부제가 원활하지 않았던 이유가 있기도 하다.[24] 승선은 조선시대의 승지로 이해하면 된다.[25] 양주, 광주. 오늘날의 경기도, 충청도.[26] 오늘날의 강원도 영서.[27] 오늘날의 황해도.[28] 오늘날의 평안도.[29] 오늘날의 강원도 영동과 함경남도.[30] 비슷하게 과거 일본의 행정 구역도 기(畿)와 도를 구분해서 크게 5기 7도의 행정 구역(홋카이도가 추가된 뒤 5기 8도.)으로 나누었다.[31] 서경 - 고구려, 남경 - 백제, 동경 - 신라.[32] 하지만 고려에서는 길주 이북까지는 관리의 어려움으로 귀화를 거부하였다.[33] 조선의 경우엔 개국과 함께 억상 정책의 일환으로 초기에는 지방에 장시가 열리는 것을 금지하였다. 그러나 일상 생활에 필요한 물품에 수요가 없을 수가 없으므로 조선 초기를 지나 1470년경부터 전라도에서 다시 장문(場門)이라는 이름으로 태동하기 시작해 조선 중후기에 다시 활발하게 열리게 되었다.[34] 백제나 신라처럼 끝글자인 려를 사용했다. 여제, 나제동맹 처럼. [35] 고려사 예지에는 요, 금을 북조라 표현. 이 시기 사신을 맞는 예가 후대의 명청과는 다르며 예지에도 북조와 고려말엽 명 사신을 맞는 예가 달리 서술되어 있다[36] 조선의 시각에서[37] 최의를 가리킨다.[38] 13세기 몽골의 등장으로 다원적천하질서가 붕괴되기 시작하며 1227년 서하의 멸망, 1234년 금나라 멸망, 1270년 고려의 출륙과 개경 환도, 1271년 원의 건국으로 4세기에 걸친 다원적 질서는 끝이 난다[39] 실제 요, 금의 사신이 입경할 경우 왕이 북면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서면을 하는 것으로 일종의 손님을 맞는 예를 갖추었음. 고려사에 보면 북조의 사신을 맞는 예와 명의 사신을 맞는 예가 다름[40] 한국역사연구회시대사 총서 고려시대사 참조[41] 북방의 요와 송이 동시에 금에게 멸망하면서 고려는 1125년까지 국서에 표현하지 않던 신 이란 표현을 1126년부터 사용하기 시작한다[42] 묘청의 난[43] 전 국토가 갈려나가고 속국화되면서 오랜 역사에서 자존심을 찾기도 했다.[44] "북원(北元) 요양성(遼陽省) 평장(平章) 유익(劉益)과 왕우승(王右丞) 등이 명나라에 귀순하려 하였으나 그들은 명나라가 주민을 이주시킬까 근심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요양이 본시 우리 땅이었으므로 만약 우리 나라가 청하면 이주를 모면할 수가 있지나 않을까 하여 사신을 파견하여 통보하여 왔다." 고려사의 공민왕 대 기록이다. 고려 정부는 요동이 과거 자신들의 땅이었음을 인식하고 있었다.[45] 다만 이것이 고려가 조선보다 무조건 고평가받을 이유인지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데 자세한것은 고려/조선과의 비교원정 항목 참고또한 조선역시 고구려 계승의식은 있었다. [46] 이런 고구려 계승 인식은 조선에까지 이어지는데,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수양제당태종의 강력한 군대를 막아내던 고구려를 생각해서 조선이 전쟁 초기 허무하게 무너진 것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혹시 일본이랑 짜고 자기들을 공격하는 게 아닌가 오해를 했었다.아니 삼국시대라는 시대적 특성상 전쟁이 많을수밖에 없었고 그로 인해 단련된 고구려랑 200년간의평화기강이 해이해진 조선이 똑같을거라고 생각하다니....[47] 제2수도인 국내성은 비록 역사적으로는 가장 오래됐지만 기후와 토지가 별로 좋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평양성 천도 이후로는 경제 문화적 중심지에서는 밀려나고 남쪽에 치우쳐진 평양성에서 북방 영토를 컨트롤하기 위한 중간지가 돼버린다. 또한 백제에서도 비슷한 경우로 금마저 일대(전북 일대)가 수도인 사비성에 이어서 집중적으로 육성한 배후지에 해당한다.[48] 물론 부여의 수도였던 부여성은 나름의 생산력이 있어서 군사 배후지의 역할을 할 정도였기 때문에 현대의 최전방급은 아니었겠지만 어디까지나 지역 중심지에 불과하고 수도 일대에 비하면 큰 도시는 될 수 없었을 것이다.[49] 고려 말에 왜구들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고 개경 근처까지 털리는 시기도 있었으며 홍건적의 난 때는 수도 개경을 빼앗기기도 했다. 다만 결국 고려는 모조리 격퇴 하는데 성공했다. 더군다나 여몽 전쟁 당시 고려와 몽골의 인구는 500만 정도였는데 고려보다 인구도 많고 경제적으로 부유했던 남송,중동,서하 등 모조리 국가 자체가 망해버려 사라지고 대학살을 당한다. 이미 북송시대 중국의 인구는 1억 1천만을 돌파했다(!).[50] 한때 송나라를 압도적으로 털어 버리며 강함을 과시하던 거란은 고려에게 패배한 이후 점점 하락세를 타다. 금나라와 몽골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 결국 몽골과 중국에 흡수되 사라진 비운의 민족이 되버린다.[51] 여진 정벌은 절반의 성공으로 끝났지만 그 덕에 훗날 여진이 금나라를 건국한 후 북송을 밀어붙이는데 성공할 정도의 국력을 자랑할 때조차 여진 정벌 당시 고려에게 큰 코를 다친 경험 탓인지, 고려를 침공하지 않았다.[52] 참 골때리는게, 역사 학술 연구소를 표방하면서 정작 연구소장인 김연성 교수는 역사학 비전공자(경영학부)이다. 그나마 복기대 교수(융합고고학)가 사학 전공이지만 학계의 주류 학설과는 동떨어진 유사역사학 관련 주장을 펼쳐서 외면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