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헌안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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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헌안왕릉 慶州 憲安王陵 Tomb of King Heonan, Gyeongju | |
소재지 | |
분류 | 유적건조물 / 무덤 / 왕실무덤 / 고대 |
면적 | 384㎡ |
지정연도 | |
시대 | |
소유단체 | |
관리단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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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안왕릉(憲安王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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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에 세워진 '신라헌안왕릉(新羅憲安王陵)' 표석 |
삼국사기에 의하면 861년 1월 헌안왕이 죽자, 시호를 헌안(憲安)이라 하고 공작지(孔雀趾)에 장사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만 이 공작지(孔雀趾)의 정확한 위치는 확인되지 않았다.
자연석을 둘러 흙이 흘러내리지 않게 한 높이 약 4m의 봉분 하나만 있으며, 바로 옆에 진흥왕릉, 진지왕릉, 문성왕릉이, 500m 거리에 무열왕릉, 서악동 고분군이 있다.
다만 이 고분이 헌안왕릉으로 비정된 것은 조선 시대 경주 김씨 문중에 의한 것으로, 대부분의 신라왕릉이 그렇듯 능주를 잘못 비정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런 지적은 조선 후기의 김정희, 유의건 등 유학자들부터 오늘날의 역사학계까지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현재 학계에서는 정강왕릉이나 진덕여왕릉 뒷편의 대형 봉토분을 진짜 헌안왕릉으로 거론하고 있다.
자연석을 둘러 흙이 흘러내리지 않게 한 높이 약 4m의 봉분 하나만 있으며, 바로 옆에 진흥왕릉, 진지왕릉, 문성왕릉이, 500m 거리에 무열왕릉, 서악동 고분군이 있다.
다만 이 고분이 헌안왕릉으로 비정된 것은 조선 시대 경주 김씨 문중에 의한 것으로, 대부분의 신라왕릉이 그렇듯 능주를 잘못 비정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런 지적은 조선 후기의 김정희, 유의건 등 유학자들부터 오늘날의 역사학계까지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현재 학계에서는 정강왕릉이나 진덕여왕릉 뒷편의 대형 봉토분을 진짜 헌안왕릉으로 거론하고 있다.
신라 47대 헌안왕(재위 857∼861)의 무덤이다.
헌안왕은 본명이 김의정으로, 45대 신무왕의 이복동생이다. 재위기간 동안 특별한 치적은 없으나 제방을 수리하는 등 농사를 장려하는데 힘썼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861년 1월에 왕이 죽자 시호를 헌안(憲安)이라 하고 공작지(孔雀趾)에 장사지냈다고 하였으나 공작지의 위치는 알 수 없다.
무덤의 형태는 가장 단순한 형식의 무덤으로 높이 4.3m, 지름 15.3m의 원형 봉토분이다. 밑둘레에는 자연석을 이용하여 둘레돌을 둘렀으나, 현재 몇 개만이 남아 있다. 내부는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으로 추정된다.
※(신라헌안왕릉 → 경주 헌안왕릉)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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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舊 사적 제17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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