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묘(공빈김씨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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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내동리 쌍무덤. 옥야리 장동 방대형 고분 4기 총 5기
⠀[번호없음-2]⠀
2026.05.14 -
조선 공빈 김씨의 묘
성묘

成墓
성묘 봉분(궁능유적본부)-mi...
매장지
조성형태
단분(單墳)
매장자
조성시기
홈페이지
홈페이지 아이콘

남양주 성묘
南楊州 成墓
Seongmyo Royal Tomb, Namyangju
소재지
분류
유적건조물 / 무덤 / 왕실무덤 / 조선시대
수량/면적
2,004㎡
지정일
시대
선조 10년(1577)
소유단체
관리단체
국가유산청
조선왕릉동부지구관리소
성묘 전경(궁능유적본부)-mi...
성묘(成墓) 전경
 

1. 개요2. 역사3. 그 외4. 사적 (舊 사적 제365호)

 

1. 개요[편집]

 
조선 제14대 국왕 선조후궁이자, 임해군과 제15대 국왕 광해군의 생모인 공빈 김씨가 안장된 무덤.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에 자리하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의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1]
 

2. 역사[편집]

 
성묘 곡장(궁능유적본부)-mi...
성묘(成墓)의 곡장
1577년(선조 10년) 5월 1일에 공빈 김씨가 산후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풍양 조씨 시조 묘소 뒤인 현재의 자리에 묘소를 조성하고 성묘(成墓)라고 이름지었다. 이후 그의 친아들인 광해군이 왕으로 즉위하고 1610년(광해군 2년)에 광해군이 공빈 김씨를 공성왕후(恭聖王后)로 추존하고, 성묘를 성릉(成陵)으로 추봉하고 석물을 다시 조성하였다. 조선왕조실록 기사 그러나 1623년에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자 공성왕후는 공빈으로 다시 강등되어 현재의 성묘(成墓)가 되었다.조선왕조실록 기사

성묘는 조선왕릉을 능원묘(陵園墓)의 등급으로 구분할 때 가장 격이 떨어지는 묘소임에도 왕릉의 격으로 조성이 되어있는데, 이는 1610년(광해군 2년)에 광해군이 자신의 생모인 공빈 김씨를 공성왕후(恭聖王后)로 추존하면서 성묘를 성릉(成陵)으로 추봉하였기 때문이다. 성릉으로 추봉된 이후에 왕릉의 능제에 맞게 다시 조성하여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과 호석을 둘렀으며 곡장을 설치하고 문석인 1쌍, 무석인 1쌍, 석마 2쌍,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1쌍, 석양 2쌍, 석호 2쌍을 배치하여 왕릉의 형식을 갖추었다.[2]
 

3. 그 외[편집]

 
성묘 바로 아래에는 풍양 조씨의 시조인 조맹(趙孟)의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 1630년(인조 8년) 5월 21일자 두 번째 기사에는 성묘와 조맹의 묘소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데, 처음 공빈 김씨가 죽고 성묘를 조성할 당시에 조맹의 묘소가 옆에 있으므로 조맹의 묘를 허물 것을 의논하였으나, 선조가 허락하지 않았다. 이후 광해군이 공빈 김씨를 공성왕후로 추존하고 성묘를 성릉으로 높이면서 조맹의 묘소를 파낼 것을 다시 의논하였으나, 봉분만 헐었다.[3] 인조반정으로 다시 성묘로 돌아간 이후, 서울에 있던 여러 풍양 조씨의 학자와 관료들이 상소하여 봉분을 다시 세웠다. 조선왕조실록 기사[4]

성묘에서 서쪽으로 약 650m 떨어진 곳에는 공빈 김씨의 아들인 광해군과 그의 부인이 묻혀 있는 광해군묘가 자리를 잡고 있다. 이는, 광해군이 세상을 떠나면서 어머니인 공빈 김씨 곁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남겼기 때문이다. 또한 북쪽으로 약 430m 떨어진 곳에는 공빈 김씨의 큰 아들인 임해군의 묘소도 위치하고 있다. 즉, 어머니와 두 아들의 묘소가 모두 근처에 자리를 잡고 있는 셈.
 

4. 사적 (舊 사적 제365호)[편집]

 
조선 14대 선조의 후궁이자 15대 광해군의 생모(사친) 공빈 김씨(1553~1577)의 묘이다.

공빈은 김희철의 딸로 선조의 후궁이 되어 임해군과 광해군을 낳았으나, 1577년(선조 10) 25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광해군은 왕위에 오른 후 어머니를 공성왕후(恭聖王后)로 추존하고 능의 이름을 성릉(成陵)이라 하였으며 신주를 종묘에 모셨다. 그러나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자 다시 공빈으로 강등되고 지금의 성묘가 되었다.

성묘는 성릉으로 추봉할 때 왕릉의 격식에 맞게 석물을 다시 조성하였기 때문에 문석인, 무석인, 장명등, 혼유석, 석양, 석호, 석마, 난간석이 그대로 남아있다.

※ 남양주 성묘는 사적지 원형 보존과 훼손 방지를 위하여 비공개로 관리중입니다. 학술조사 등 목적으로 관람을 희망하실 경우에는 사전에 관리소(031-573-8124)에서 허가를 받은 후 출입 가능합니다.
 
[1] 舊 사적 제365호[2] 다만, 여타 왕릉에 비해서 좌우폭이 좁아서 비좁다는 느낌을 주는데, 이는 처음에 묘소를 조성할 때 왕릉이 될 것을 염두에 두지 않고 묘소로 꾸몄기 때문일 것이다.[3] 원래 왕릉으로 조성하는 경우에 주변의 무덤은 모두 없애는 것이 예법에 맞는 사항이니, 왕릉 바로 앞에 묘소를 그대로 두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이다.[4]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성묘에서 왕릉의 형식에 맞는 석물들(무인석 등)은 없어지지 않고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아무래도 인조반정 이후 정묘호란병자호란 등 나라 안팎이 어지러운 점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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