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

최근 수정 시각: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Coat_of_Arms_of_Joseon_Korea.png 조선 국왕

[ 펼치기 · 접기 ]

光海君
광해군

묘호

없음

시호

없음

존호

체천흥운준덕홍공신성영숙흠문인무서륜입기명성광렬융
봉현보무정중희예철장의장헌순정건의수정창도숭업대왕
(體天興運俊德弘功神聖英肅欽文仁武敍倫立紀明誠光烈隆
奉顯保懋定重熙睿哲莊毅章憲順靖建義守正彰道崇業大王)[1]
→없음(폐위)

군호

광해군(光海君)[2]

능묘

광해군묘[3]

본관

전주(全州)

혼(琿)

미상

출생지

조선 한성부

사망지

제주도[4]

배우자

폐비 유씨(廢妃 柳氏)

부왕

조선 선조

모후

공빈 김씨[5]

생몰

음력 1575년 4월 26일 ~ 1641년 7월 1일
양력 1575년 6월 4일 ~ 1641년 8월 7일
(66년 2개월 3일, 2만 4,171일)

재위

음력 1608년 2월 2일 ~ 1623년 3월 14일
양력 1608년 3월 17일 ~ 1623년 4월 13일
(15년 25일, 5,505일)

파일:external/blog.joins.com/497da7fe393b5.jpg


1. 개요2. 광해군의 생애 및 후대의 평가3. 평가4. 특이사항5. 가족 관계6. 광해군묘7. 광해군을 다룬 영상 매체

1. 개요[편집]

조선의 제15대 국왕. 묘호와 시호는 없고, 존호는 체천흥운준덕홍공신성영숙흠문인무서륜입기명성광렬융봉현보무정중희예철장의장헌순정건의수정창도숭업대왕(體天興運俊德弘功神聖英肅欽文仁武敍倫立紀明誠光烈隆奉顯保懋定重熙睿哲莊毅章憲順靖建義守正彰道崇業大王). 휘는 혼(琿).

폐위 후 복권되지 못해서 연산군과 함께 둘뿐인 군호로 불리는 조선 국왕이다. 전왕 선조차남이자 서자로서, 훗날 이복동생적자 영창대군이 태어났지만 광해군이 나이도 많고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적 위기 당시 세자로 책봉되고 전란 극복의 공적을 쌓아 왕위에 올랐다. 선조의 아들들은 영창대군을 제외하면 모두가 서자들이고, 광해군은 그들 서자들 중에서도 장남이 아닌 차남이었기에 최초의 서손 국왕인 선조만큼은 아니었지만 위치가 불안정했다.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인경궁, 자수궁 등의 무리한 토목 공사로 조선의 재정을 파탄냈고, 잦은 정치적 숙청[6]으로 아버지가 물려준 인재정적들을 쫓아냈으며, 말년에 다시 서인들과 남인들을 끌어안으려 했지만 결국 역으로 그것이 원인이 되어 몰락했다. 당파성이 적은 중신들만 처음처럼 계속 중용했어도 몰락하진 않았을 것이다. 20세기에 들어서 광해군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가 시작되기도 하였다. 폐위된 왕치곤 후대에 재조명을 받은 몇 안 되는 왕 중 하나로, 사극이나 창작물의 소재로도 자주 등장한다. 하지만 과도한 긍정적 재평가에 반발한 사람들이 여러 이유를 들어 혼군이라는 전통주의적 시각을 복권시키는 등 광해군에 대한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광해군은 양위 및 폐위로 묘호가 추숭되지 않았던 4인의 조선 국왕 중 한 임금이기도 하다. 다른 3명은 2대 공정왕, 6대 노산군, 10대 연산군이다. 다만 공정왕과 노산군은 숙종 대에 들어서 각각 정종단종으로 추숭되었으므로 결국에는 연산군과 같이 둘밖에 남지 않았다. 더불어 광해군은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노산군, 연산군과 같이 '실록'이 아닌 '일기'의 형식으로 그들에 대한 기록이 실린[7] 단 셋 뿐인 임금이다. 다만 재위 내내 숙부에게 끌려다니다 죽어 동정을 받는 단종과 역으로 오직 전횡만을 일삼아 비판을 받는 연산군과는 다르게,[8] 광해군은 치적의 공과가 뚜렷하여 그 평가의 폭이 상당히 넓은 편. 재위기를 떼놓고 보더라도 세자 시절 구국을 위해 전장을 누볐던 면모부터 노년기 제주도에서 유배 생활 끝에 숨을 거두기에 이르기까지, 군주가 아닌 한 인간의 생애로 보더라도 굉장히 파란만장하고 굴곡이 큰 편이기도 하다.

묘호와는 별도로, 광해군은 재위 도중에 따로 존호를 받은 바가 있었다. 체천흥운준덕홍공신성영숙흠문인무서륜입기명성광렬융봉현보무정중희예철장의장헌순정건의수정창도숭업대왕(體天興運俊德弘功神聖英肅欽文仁武敍倫立紀明誠光烈隆奉顯保懋定重熙睿哲莊毅章憲順靖建義守正彰道崇業大王). 이것이 그에게 주어진 시호와 무관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조선 역대 국왕의 존호 중에서도 압도적인 길이이다. 숙청을 할 때마다 존호가 덧붙여졌는데 재위 기간 내내 정치적 숙청을 하다보니 아주 길어진 것. 이러한 존호들 가운데 일부는 명나라의 황제가 내린 칙서의 령을 받들기 거부하면서 표면적으로는 예를 표하고자 바쳐진 존호였다.

2. 광해군의 생애 및 후대의 평가[편집]

3. 평가[편집]

세자 시절 약관의 나이로 펼친 초특급 업적으로 인해 자질은 뛰어났다고 평가된다. 특히 현대에 와서는 반정을 일으켜 왕에 오른 인조삼전도의 굴욕 때문에 이미지가 너무 좋지 않아서, 상대적으로 고평가 받는 경향이 있다. 때문에 내치는 광인의 폭정, 외치는 뛰어났다는 평이 많다.

조선 내내 연산군과 양대 폭군으로 손꼽혔는데,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지지하는 북인이 씨가 말라 버렸고, 정통성을 확보한 서인 세력이 조선 말까지 정권을 잡았으니 당연한 일이다.

근대 이후 처음으로 광해군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 문헌은, 1920년대 간행된 만선지리역사연구보고(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에 실린 일본 학자 이케우치 히로시(池内宏)의 논문이다. 이 책에서 그는 광해군의 밀지를 받아 후금에 투항했다고 하는 강홍립의 주장을 받아들여 중립 외교를 수행하려 했던 식견 높은 군주로 평가했다. 그러나 책 자체는 만주사와 한국사를 연결 시키려는 일제의 만선 경영이 목적이며, 조선이 문약하고 당파 싸움에 시달렸다는 시각을 기반으로 하고 있어서 이 주장은 식민사관과 만선 사관의 일환으로 취급 받는 경우가 많다. 이 이케우치 히로시의 평가가 식민 사관과 무관하다는 주장도 있지만 한명기 교수의 책에도 식민 사관이 광해군의 평가에 영향을 주었음을 언급한 바 있다.[9]

실제로 그와 비슷한 시기인 1920 ~ 1930년대 국내에서도 광해군 치세에 대해 상당히 호의적인 평가가 나오기 시작한다. 그 중 독립운동가이자 사학자로 잘 알려진 신채호는 광해군 치세 실권당인 대북을 높게 평가했으며, 그 중에서도 사상적 기반이자 핵심적 인물인 정인홍을지문덕, 이순신과 같이 조선 3걸로 꼽으며 옥중에서 홍명희에게 전달한 친서에서도 필생의 저서인 정인홍공약전(鄭仁弘公略傳)이 세상에 빛을 보이지 못함을 아쉬워했을 정도였다고.

그러나 궁궐 공사 등으로 인한 재정파탄과 민생의 피해는 정말 심각했다. 실록인 광해군일기의 사료성을 무시할 수도 없다. 비록 광해군 일기가 서인이 집필한 면이 있다 치더라도 그들도 사관인만큼 없는 이야기를 지어서 쓰지는 않았다.[10] 광해군의 궁궐 공사가 백성에게 큰 피해를 주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아마도 자신의 고통스러웠던 세자 시절에 대한 보상 심리로 궁궐 증축에 과하게 집착한 것으로 보인다. 다른 것은 몰라도 지나친 궁궐 공사는 결국 당대에는 물론이고, 오늘날에도 크게 비판 받는 점이다.

어쨌든 한국에는 광해군 재평가에 적극적인 사람들이 꽤 있다. 그런 면이 반영되어 국사 교과서에서는 광해군을 외치 중심으로 설명하고 대동법은 신하들의 공으로 나온다. 또한 임진왜란 이후 전후 복구 사업을 활발히 펼치고, 대동법을 경기 지방에 실시하는 등의 세제 개편을 보여[11] 조선이 근대로 가는 첫 관문을 연 왕으로 평가하고 있다.

선조가 세자 시절부터 괴롭힌 트라우마가 심리적으로 악영향을 끼쳤다고는 하나, 그런 식의 변호는 나름 왕 노릇 잘하다 외국의 침략으로 비참한 신세가 되었던 선조의 의심병도 이해해 줘야 한다는 논리로 반박할 수 있다. 광해군은 적법한 절차에 따라 즉위했기 때문에 세자 시절의 활약으로 대신들의 많은 기대를 받고 있었다. 물론 기대를 많이 받았다고 해서 좋은 군주가 되지는 않지만 말이다. 또, 잘못 알려진 사실로 서인이 광해군을 경계해서 광해군의 즉위를 방해했다는 이야기인데, 광해군을 반대하는 세력은 대북과 같은 북인인 소북이었으며, 소북 중에서도 광해군의 처남 류희분이 소속된 청소북은 광해군에 우호적이었다. 남은 반 광해군파인 류영경의 탁소북조차 선조 사망 후에는 죄다 청소북을 자처하면서 자멸하는 등 광해군 즉위 초 상황이 그렇게 나쁜 환경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한 악조건에서 성군이 된 사례도 많았으며 중립 내지는 광해군에게 동조하였던 일부 서인남인[12]을 내몰면서 적으로 만드는 실수를 하였다.

물론 광해군도 이이첨의 권력이 급격히 강해지면서 사사건건 대립하였다.[13] 그리고 마침 소북인 박승종이 이이첨의 뒷통수를 후려쳐[14] 이이첨이 소성대비를 죽이려 하면 박승종이 가솔들까지 이끌고 나서는 수준에 이르렀다.

말년의 광해군은 자신의 내치를 후회하는지 균형을 시도했다. 광해군이 총애하던 신하가 서인 중 유명한 윤두수의 아들 윤휘였다는 점이 증거다.[15] 하지만 바로 그 균형 감각 때문이었을까? 박승종의 고변 역시 크게 신뢰하지 않으면서 (어쩌면 옥사에 질린 탓인지) 느린 대책을 보여서 몰락을 자초했다.

게다가 이이첨의 반대 급부로 중용된 임취정 같은 인물은 임진왜란 때는 파천 길에 사초를 태우고 도망갔다고 비판받고, 광해군과의 인연도 조카가 후궁이란 이유였으며, 제 2의 이이첨이 되어 권력을 농단하는 등 막장이었다.[16][17][18]

어쨌든 광해군은 세자시절 임진왜란 당시 도성을 버린 부왕을 대신해 일본군에 맞서 전란에 휩싸인 나라를 돌보고 분조를 이끌어 많은 공을 세웠다. 또한 군사들을 독려하고 군량과 병기들을 조달했다. 이런 세자 시절의 모습은 선조인조가 전쟁이 터지자 구국보다는 일신 보전에 급급했던 모습과는 큰 차이가 있다. 하지만 15년동안 집권하면서 숱한 옥사(김직재의 옥, 칠서의 옥, 신경희의 옥, 계축옥사)를 거치며 점차 비대해진 김개시와 측근들의 전횡을 제어하지 못했고, 폐모로 반정의 구실을 만들었으며, 필요 이상의 궁궐 공사로 인한 치명적인 재정난과 민생난을 초래했다는 부정적 측면이 크기 때문이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광해군 일기 편은 전반부는 세자 시절의 활약과 이에 따른 선조의 질투심 및 후계 과정의 어려움, 재위기의 이런저런 치적들, 후반부는 인조반정에 이르는 과정과 광해군 시대의 옥사가 주로 서술되어 있다. 임해군 옥사, 봉산 옥사부터 시작해서 계축 옥사, 허균의 옥사 등. 아무튼 광해의 총명함을 흐리게 한 결정적인 요인으로 바로 광해가 벌였던 옥사를 들고 있다. 불안했던 광해의 입지를 강하게 만든 것도 옥사였지만 반대로 옥사로 타 정파와 사대부가 소외되고 이이첨의 힘이 커지게 되자 광해의 입지는 약화되었다고 적고 있으며. '인사에 관한 한 광해는 부왕 선조보다 하수'라고도 쓰고 있다.

이복 남동생 영창대군의 죽음을 접한 광해가 "내가 부덕하여 이 아이로 하여금 섬에서 병으로 죽게 했으니 비통하다. 예를 갖춰 장례를 치러 줘라."고 말은 하지만 비정하고 위선적인 모습으로 묘사되는 장면은, 조선왕조실록 전체에서 유일한 파스텔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마지막 장면은 광해군이 신선처럼 구름을 걸으면서 "세자 시절의 아픈 경험으로부터 조금만 자유로웠다면, 빛나는 외교에서 보이듯 열린 이성과 현실 감각, 유려한 솜씨로 내치도 성공할 수 있었으리라. 그런 상황을 만든 부왕 선조의 책임이 크겠지만, 누굴 탓하랴. 극복하지 못한 자신의 몫인 것을"이라는 글로 마무리하는데, 명군의 자질을 갖고 있었으면서도 주어진 조건과 내면적 불안으로 인해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던 광해군에 대한 기대와 안타까움이 동시에 묻어 나는 대목이다. 다만 이런 평가는 공중파 교양 프로의 인터뷰에서 박시백 화백이 가장 좋아하는 조선 국왕 3위로 광해군을 꼽았던 것#에서도 드러나듯 박시백 화백 자체가 광해에게 매우 우호적인 성향인 점을 감안해야 한다.

정리하자면,

1. 대중의 의식은 일제강점기부터 시작된 복권론을 이어받은 사극이나 창작물의 영향으로 매우 긍정적이다.

2.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광해군은 대동법에 반대하고 확대를 저지했다. 물론 딱 잘라 반대했다고 단언할 수는 없으나 광해군이 해당 법안의 시행을 꺼리거나 지나치게 신중론으로 접근하는 것이 다수 문서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 문제. 반면, 이미 선조 대에 북인의 반발로 폐지된 작미법(대동법의 전신)을 북인이 집권하고 있는 시기에 부활시켰다는 정황상 결국엔 광해군이 대동법 시행 자체에는 뜻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다만 대중에 알려진 것처럼 대동법의 선구자라거나 적극적이었다는 등의 서술은 재고할 여지가 있다. 대동법 참조

3. 세자 때는 민심 수습과 전시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해냈지만 즉위 후엔 궁궐병과 재정 파탄 사태으로 조선 내정에 어마어마한 악영향을 미쳤다. 특히 궁궐 건축 사업은 대중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야말로 재앙에 가까운 악영향을 미쳐, 당시 국가 재정의 15% ~ 25% 가까운 자원을 소비함은 물론 관련된 비리가 전혀 관리가 되지 않아 민중들에 대한 갖가지 수탈로 이어졌다. 대동법 등과 더불어 민중을 위했던 군주, 라는 이미지와는 전혀 맞지 않는 사실이다.

4. 광해군은 정충신 등에게 첩보를 명하여 후금의 권력 구도나 병력, 군수 물자 등을 세세히 파악하게 하면서도 강홍립에게 따로 편지를 받아서 추가적인 정보를 얻어내기도 했다.

5. 재미있는 것은 자신이 키워준 세력이 자신의 뜻과 정면으로 대치했다는 점이다. 즉위 초에는 혼란스럽기는 했지만, 영창대군 즉위에 찬성하는 사람은 소북파 정도이고, 인목왕후는 그냥 권력을 넘겨주었다. 그런데 광해군은 무슨 이유인지 영창대군을 죽여버렸고, 인목왕후를 폐비하며 대북파를 극단적으로 키우는 무리수를 범했다. 자기를 지지하는 중신 이원익을 필두로 반대가 넘치는데도 모두 쫓아내는 자승자박을 한 것. (당장 광해군의 외교의 협력자인 윤휘, 정충신은 서인이고 박승종은 소북 인사다.) 결국 훈련대장 이흥립의 내부 배신으로 몰락하고 말았다.

6. 광해군일기나 인조실록에서 광해군이 군사를 육성한 것이 간접적으로 묘사된다는 점도 특이점. 당장 광해군일기에서 도성 내의 군사들까지 북방 수비로 보낸다고 비판하는 것이나 인조실록에서 이귀나 남이흥 등이 5년, 6년간 군사를 징발한 것을 그만뒀다느니, 올해에는 군사를 징발하지 않았다느니 등 광해군 때의 군사력 강화병이 간접적으로 묘사된다. 당장 이괄의 난 직후 정충신이 광해군 때의 절반만 복구해도 후금을 상대로 방어전이 가능하다고 평했기도 하다.

7. 대체로 조선왕조실록에선 광해군을 까면서 공민왕을 들먹이는 내용이 나오는데, 행보나 말기 그리고 정신적으로 이상해졌다는 것도 비슷하다.


한마디로 장점과 한계가 명확한 인물. 부상하는 후금을 상대하면서 예리한 국제 감각과 외교적 기술을 보여주었지만, 내치적으로는 전쟁으로 피폐해진 조선의 경제 상황을 무시한 무리한 궁궐 공사로 재정 파탄을 불러일으키고 이를 벌충하기 위해 수탈에 가까운 고율의 세금과 매관매직을 일상화함으로써 백성들의 고통을 가중시켰다. 다만 사르후 전투에 파병해서 날려먹은 병력만 1만 명에 가까운 점을 두고 오항녕은 무슨 중립 정책이 금쪽 같은 포수 1만 명을 날려먹느냐며 강력하게 비판했다.

4. 특이사항[편집]

왕으로선 꽤 특이한 기록이 있는데, 최다 공신 배출, 최다 존호 보유, 친국(親鞫) 참여 등이 있단 거다. 존호 보유는 그의 나름대로 강력했던 왕권을 입증한다고 한다.

그의 탯줄을 묻은 곳이 대구광역시 연경동의 산이라고 한다. 동네에 도는 이야기 중에는 폐위당한 왕이라서 관리가 안 되다 보니 탯줄을 묻은 위치에 있던 석상 등을 집 지으려고 부숴서 가져갔다가 돌 조각을 부숴서 가져간 사람들이 안 좋은 일을 몇번 겪자 조각을 다시 다 모아서 원래 있던 위치에 던져놨다고 한다. 지금도 산에 올라가 보면 비석이나 거북이 조각 등의 잔해가 남아있다.

그를 재평가 하는 사람 중에 그를 왕으로 추존하는 경우도 꽤나 많은데, '광'해군이란 이유로 광종(光宗)이라고 불리는 경우가 많다. 덧붙여 역사 기반 가상 사회 사이트인 '사이버 조선왕조'라는 사이트에서는 2002년 11월 15일부로 묘호는 혜종(惠宗), 시호를 경렬성평민무헌문대왕(景烈成平愍武獻文大王)으로 추숭 복위하고, 그의 정실인 문성군부인 유씨는 혜장왕후(惠章王后)로 추숭 복위했다. 아울러 능호는 열릉(烈陵)이라 하였다. 물론 어디까지나 사시일 뿐이니 정식으로 인정받지는 못한다.[19]

#(사이버 조선왕조 사이트의 혜종대왕 행장)

담배 냄새를 몹시 싫어하여 궁중은 물론 신분이 높은 사람이나 어른 앞에서는 담배를 피우지 못하게 하는 예절을 만든 인물이기도 하다.

계축일기에 따르면 고기를 먹을 때 익힌 고기는 먹지 않고 육회나 살짝 불에 익힌 정도로만 해서 먹었다고 한다.

광해군일기 1년 9월 25일에는 강원도에서 미확인비행물체가 나타난 기록이 있다. 해당 실록 국역 링크 해당 내용을 설정에 써먹은 드라마나 작품이 많다. 기찰비록이나 설희, 별에서 온 그대.

5. 가족 관계[편집]

  • 정비 : 문성군부인 류씨

    • 아들 : 폐세자 지(祬)

      • 손녀 : 현주 - 김문거(金文擧)에게 하가

    • 며느리 : 폐세자빈 밀양 박씨

  • 후궁 : 소의 윤씨(昭儀尹氏)

    • 딸 : 옹주 - 박징원(朴澂遠)에게 하가

  • 후궁 : 소의 홍씨(昭儀洪氏)

  • 후궁 : 소의 권씨(昭儀權氏)

  • 후궁 : 숙의 허씨(淑儀許氏)

  • 후궁 : 숙의 원씨(淑儀元氏)

  • 후궁 : 소용 정씨(昭容鄭氏)

  • 후궁 : 소용 임씨(昭容任氏)

  • 후궁 : 소원 신씨(昭媛辛氏) - 인빈 김씨의 조카

  • 후궁 : 숙원 한씨(淑媛韓氏)

  • 후궁 : 상궁 이씨(尙宮李氏)

  • 후궁 : 상궁 최씨(尙宮崔氏)

  • 후궁 : 궁인 조씨(宮人趙氏)

  • 후궁 : 궁인 변씨(宮人邊氏)


폐비 유씨(문성군부인)와의 사이에서 4명의 자식을 두었다. 그 중에서 유일하게 요절하지 않고 장성했던 아들인 폐세자 이지는 부인인 폐세자빈 박씨와 함께 유배지인 강화도에서 동반 자살 시도를 했으나 죽지 않았다. 마침 한양에서 가위를 보내온 걸 보고 유배지 탈출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그 해 음력 4월, 26일 동안 숟가락과 가위로 땅굴을 파며 바깥으로 나오는데 성공했다. 박씨는 파낸 흙을 자루에 담아 방으로 옮겼다. 불행히도 이지는 도주 3일만에 인조의 감시자들에게 붙잡혔는데, 박씨는 폐세자의 도주 당일 나무 위에 올라가 남편이 안전하게 도망치는지 망을 보다가 그만 군졸들에게 들켜 떨어져 몸을 상했고, 이후 남편이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자 절망하여 스스로 아까운 나이에 목숨을 끊었다. 이어서 붙잡힌 이지도 자결을 명령받아 죽음으로써 25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20]

광해군과 같이 유배당한 문성군부인 류씨는 아들 내외의 비참한 소식을 접하고 홧병으로 죽었다. 야사 대동야승에서는 아들 부부가 죽자 스스로 식음을 전폐해서 아사했다는 기록도 있다. 참고로 류씨는 광해군 재위기에도 숭명배금을 주장했을 정도로 강단 있는 여인이었다.[21] 그녀가 왕비였던 시절, 사찰을 돌아다니며 "내생엔 두 번 다시 왕가의 며느리가 되지 않게 하소서"라 빌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22] 그녀의 형제들도 반정 직후 모두 처형되었으니 실로 비극의 가계라 할 만하다.

광해군은 소의 윤씨에게서 옹주를 1명 낳았는데, 옹주는 인조반정 이후 폐서인되었고, 이후 박징원과 결혼해 2남 3녀를 낳았다. 광해군의 아들 이지가 후손이 없었으므로, 옹주의 후손들이 광해군의 묘를 돌보았고 지금도 제사를 지내고 있다.

손자녀로는 폐세자와 폐세자빈 사이에서 자식이 없고[23] 후궁 소생의 현주가 1명 있었는데 김문거와 결혼하였다.

6. 광해군묘[편집]

파일:external/blog.joins.com/497da7fe393b5.jpg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릉리에 위치한 광해군묘.[24] 어머니인 공빈 김씨성묘(成墓) 근처에 있다.

더불어 난간석, 무인석, 동물상도 조성되어 있지 않다. 옆에 같이 안장된 사람은 그의 왕비였던 문성군부인 유씨다. 다른 폐군인 연산군의 묘는 서울특별시 시가지 근방에 있는지라 상당히 찾기 쉬운 위치에 있는데 반해서 광해군의 묘는 찾아 들어가기가 복잡하고 규모도 작은 편이다.

광해군과 그의 아내 유씨의 묘의 위치가 설명되어 있는 안내문은 주변의 교회가 운영하는 공원묘지 앞의 식당 간판과 같다. 공원묘지 너머 숲 속에 이 두 묘가 있는데, 제대로 된 길이 없으므로 산등성이를 타고 돌아가야 닿을 수 있다. 만약 찾아가고 싶다면 금곡역(경춘선)에서 64번 버스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25]

7. 광해군을 다룬 영상 매체[편집]

★은 주연

  • 인목대비 (1962년)
    허장강이 광해군 역을 맡았다. 안현철 감독 작품으로 옛날 영화라 여기선 광해군이 단순한 악인으로 나온다. 재위 중 행적이 연산군 비슷하게 묘사되다 결국 인조반정으로 실각했는데, 인목대비에게 자비를 청하자 인조가 "그냥 사사하자"고 하니 인목 대비가 "그러면 저 자와 내가 다를 것이 없지 않느냐?" 라면서 너그럽게 살려주는 위엄을 보이지만 현실은 시궁창. 실제론 오히려 반대로 인목대비가 열렬히 나서서 죽이려고 했으나 다른 이들이 뜯어말렸다. 이 영화는 흥행도 평가도 좋지 않았다.

  • MBC 여인열전 서궁마마 (1982년)
    이덕화가 광해군 역을 맡았다.★

  • 왕의 여자 (2003년 ~ 2004년)
    파일:external/elcamino.namoweb.net/1071227553.jpg
    지성이 광해군 역을 맡았다.★ 광해군을 다룬 작품 중 그의 인간적인 내면 묘사가 가장 잘 드러나 있다. 하지만 시청률대장금이라는 매머드급 경쟁작 때문에 안습. 사강이라는 예명으로 가수 활동 중이던 홍유진이 모처럼 드라마로 복귀해 비극의 왕비 문성군부인 유씨 역으로 출연했다.

  • 탐나는 도다 (2009년)
    이호성이 광해군 역을 맡았다. 극 초반까지는 버진이네 동네를 떠돌아다니는 미치광이 영감처럼 페이크를 취했다. 그러다 박규에게 제주도에 유배 중인 말년의 광해군이라는 게 들통나고, 그 후로 그에게 권력의 무상함을 말하며 여러 가지 현명한 조언을 해주며 상담역으로 활약한다.

  • 광해, 왕이 된 남자 (2012년)
    이병헌이 광해군 역을 맡았다.★ 참고로 이병헌은 이 영화에서 광해군과 똑같이 생긴 천민 '하선' 역도 맡았다. 광해군에 대한 인식 변화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영화.

  • 구암 허준 (2013년)
    인교진이 광해군 역을 맡았다. 1999년판 허준과 마찬가지로 왕자 시절의 인연을 통해 허준에게 호의를 보였으며, 동의보감 집필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 불의 여신 정이 (2013년)
    이상윤이 광해군 역을 맡았다.★ 국왕으로서의 냉철함보다는 왕자 시절이 중심이 되어 한 인간으로서의 감성적인 모습을 조명했다. 여기서 그는 주인공 문근영이 배역을 맡은 도공 유정에게 이성으로서 호감을 갖는다. 여담으로, 형인 임해군 (이광수 분)보다 더 늙어보인다는 이야기가 있었다.[26]

  • 왕의 얼굴 (2014년 ~ 2015년)
    서인국이 광해군 역을 맡았다.★ 서자 출신으로 세자에 올라 16년간 내부의 적과 외부의 난으로부터 끊임없이 군주의 자질을 시험 받으며 끝내 왕으로 우뚝 서기까지의 세자 광해군의 성장 스토리를 보여준다.

  • 화정 (2015년)
    차승원이 광해군 역을 맡았다.★ 초반부 선조와의 갈등 속에서 세자 자리마저 위태로웠던 광해군의 상황과 이복 여동생 정명공주에게 따뜻한 인간적인 모습이 함께 그려졌으며, 군주의 자리에 오른 후에는 국왕으로써의 카리스마 넘치는 위엄을 갖추지만 김개시의 계략 앞에서는 다소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인다. 또한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사실상 적대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는 강주선과도 손을 잡으려 하는 냉정하면서도 실리를 추구하는 군주의 모습이 연출되었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역사의 냉혹한 모습은 가고 감성적인 인물이 되기 시작했다.
    원래 역사에서 직접 친국을 단행해 무고한 자들도 죽였던 광해군이 반대파 숙청을 머뭇거리거나 명나라 파병에 조성하에게 협력을 부탁하는 등[27] 여러모로 실제 광해군의 비해 유약한 모습을 보인다. 다만 정명공주가 주인공이라 이 이상의 부각은 무리겠지만, 광해군이 얼마나 고단하게 권력을 유지하고, 외롭게 중립 외교를 지지했는지 나름 잘 묘사하였다. 폐위된 광해군의 쓸쓸함을 보여주며 마지막까지 나라를 걱정하는 멋진 모습으로 퇴장하였다.

  • 대립군 (2017년)
    여진구가 광해 역을 맡았다. ★ 광해, 왕이 된 남자에서 후반의 광해군을 보여줬다면 이번 영화에서는 막 세자에 올라와 여린 광해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1] 폐위되었기 때문에 묘호, 시호, 능호 모두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재위 기간 중에 썼던 존호가 이것이다. 물론 폐위된 후 이 존호 역시 무효화되었다.[2] 군호는 강원도 춘천의 옛 지명인 광해주(光海州)에서 유래했다[3] 폐위되었기 때문에 '능'이 아니라 '묘'로 불린다.[4] 폐위 후 그대로 유배지에서 살다 죽었다. 인조는 반정의 명분으로 폐모살제를 주장했으니, 차마 가족을, 그것도 선왕을 죽이지는 못했다. 때문에 유배 당한 것 치곤 꽤 장수 한 편.[5] 광해군 즉위 후 공성왕후(恭聖王后)로 추숭되었으나 인조반정 후 삭탈되었다.[6] 일례로, 왕이 직접 국문하는 친국(親鞫) 회수가 344건인데, 이는 초장기 집권을 했던 영조의 401건 다음으로 많은 회수이다.[7] 노산군일기는 후에 단종실록으로 개수되었으나 알맹이까지 바꾸진 못했다.[8] 사실 연산군도 즉위 초반까지는 나름대로 나라를 잘 이끌어갔다. 문제는 갑자사화 이후다.[9] 참조.[10] 하지만 아닌 경우도 있다! 단종의 죽음이 실록에는 사약을 내리자 자살했고 예로서 장례 지냈다고 쓰여 있지만 다른 기록도 보인다.[11] 단 광해군이 자발적으로 찬성하지는 않았다. 대동법참조.[12] 실제로 서인의 영수인 이항복은 광해군의 폐세자에 반대하던 대표적 인물 중 하나였다.[13] 앞서 "허풍쟁이"라고 말한 것이 바로 이이첨의 대북당이며, 아예 광해군은 이이첨더러 "네가 붓으로 한번 싸워봐라!"라고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14] 이이첨의 딸과 박승종의 맏아들이 혼인을 맺은 후 방심하던 이이첨의 손발을 묶어버린 것. 자기 가솔들까지 동원하여 이이첨과 극한의 대립을 하기도 했다.[15] 윤휘는 인조반정 강경파에 속한 서인들에게 이 때문에 배신자로 취급되기도 해서 살해 위협도 받았다.[16] 임취정은 반정 이후 의외로 파직에 그쳤으나, 1628년 임경후(任慶後)·박동기(朴東起)·이종충(李宗忠)·오현(吳玹)·이후강(李後崗)·안대홍(安大弘)·고경성(高景星) 등과 함께 광해군의 복위를 모의 하다가 실패해 죽었다.[17] 다만 임상원이 쓴 임취정의 조카 임유후의 행장에서는 임취정이 진짜로 반역을 꾸민건 아니고 모함당해 억울하게 죽었다고 나온다. 물론 조카의 행장에 쓰여있는 내용이라 100% 신뢰할 수 있는 기록은 아니다 [18] 임취정이 인조반정 이후 바로 처단되지 않고 파직에 그친 이유는 아마 대북 이이첨과 대립 관계였던데다 중북과 관련된 인물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광해군 일기를 보면 유대건이 임귀인의 숙부 임취정과 관계를 맺었고 임취정의 아들 임흥후가 기수발과 함께 유대건의 당이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유대건은 중북이고(묵재일기 연평일기 연려실기술의 기록에 의하면 유대건은 김자점의 외삼촌이라고 하여, 탄핵을 당했는데. 광해군이 대북파가 중북(中北)을 모함하고 여겼다는 기록이 있다) 기수발은 중북 기자헌의 조카다.[19] 이건 말 그대로 사이버 사회에서 이루어진 가상의 일인데 이 때문인지 외국 쪽(특히 중국어판) 위키백과에서는 아예 광해군의 묘호가 혜종이라 소개되는 오류도 벌어졌다.[20] 만약 광해군이 실제 수명대로 만 66세까지 왕에 있었다면, 이지는 (사도세자 같이 되지 않는다면) 만 42세 7개월의 나이에 즉위할 뻔 했다. 이는 사도세자가 살아있었다면 영조가 죽었을 때의 나이인 만 41세보다 많은 것이며, 문종은 만 36세, 광해군과 순종 황제는 만 33세에 즉위했으니 이 기록을 갱신했을 나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이다. 연산군이 이복 동생 중종만큼 오래 살았다면, 이황도 만 37세에 계승하게 된다. 하지만 연산군이 그렇게 반정을 겪지 않고 장수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지 않은가? (흥미롭게도 소현세자 역시 순조롭게 계승했다면 만 37세였을 것이다.)[21] 이 때문에 광해군의 고립됨이 얼마나 심했는지 알 수 있다. 당장 아내부터가 현실을 보지 못하는 판국이었으니.[22] 이전에 거의 유사한 말을 한 사람이 있는데 중국 유송의 마지막 황제였던 순제 유준이었다. 그는 "내세에는 제왕의 가문에서 태어나지 않기를 바란다."라고 했다.[23] 딸이 하나 있었으나 요절하였다.[24] 연산군묘처럼 폐위당한 임금이기 때문에 능(陵)이 아니라 묘(墓)이다. 당연히 묘역 관리는 다른 임금들의 능에 비해 조악한 편이다. 그의 시신은 왕자의 예로 안장되었기 때문에 그의 묘 규모는 초라하다.[25] 남양주시의 공영버스 참조.[26] 이는 당연한 게 이광수가 노안이기는 하지만 이상윤이 더 나이가 많은 데다가 이상윤도 얼굴이 노안이라서다. 그런지라 당연히 형으로 보인다.[27] 실제 역사에서 광해군은 대북파의 대명배금을 결사적으로 혼자! 반대했다. 그럴 만큼 강단도 있는 광해군의 모습이 잘 나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