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영휘원과 숭인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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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영휘원과 숭인원 서울 永徽園과 崇仁園 Yeonghwiwon and Sunginwon Royal Tombs, Seoul | |
소재지 | |
분류 | 유적건조물 / 무덤 / 왕실무덤 / 조선시대 |
면적 | 55,015㎡ |
지정연도 | |
시대 | 1911년 |
소유단체 | |
관리단체 | |
서울특별시 동대문구에 위치한 대한제국 황실의 무덤군(群). 고종의 후궁이자 영친왕의 생모인 순헌황귀비 엄씨의 무덤인 영휘원(永徽園)과 영친왕의 장남 이진의 무덤인 숭인원(崇仁園)이 자리하고 있다.
원래 이곳은 명성황후의 능인 홍릉(洪陵)의 두 번째 장지였다.[1] 처음 명성황후의 능은 현종과 명성왕후의 능인 숭릉 근처에 있었는데, 1897년 10월에 이곳으로 이장했다. 그러나 1900년 고종의 명령으로 또다시 이장이 결정되며 공사가 시작되었고, 그 와중에 1911년 순헌황귀비 엄씨가 사망하여 이곳에 안장되며 잠시 홍릉과 영휘원이 함께하게 되었다. 이후 1919년 고종이 사망하자 남양주시 금곡동에 마련한 자리에 두 사람을 합장하며 영휘원만 남게 되었다. 이후 1922년 영친왕의 장남 이진이 사망하고 할머니 옆에 안장되며 지금의 모습이 완성되었다.
1991년 대한민국의 사적으로 지정되었고, 현재는 국가유산청 조선왕릉중부지구관리소에서 관리하고 있다.[2]
원래 이곳은 명성황후의 능인 홍릉(洪陵)의 두 번째 장지였다.[1] 처음 명성황후의 능은 현종과 명성왕후의 능인 숭릉 근처에 있었는데, 1897년 10월에 이곳으로 이장했다. 그러나 1900년 고종의 명령으로 또다시 이장이 결정되며 공사가 시작되었고, 그 와중에 1911년 순헌황귀비 엄씨가 사망하여 이곳에 안장되며 잠시 홍릉과 영휘원이 함께하게 되었다. 이후 1919년 고종이 사망하자 남양주시 금곡동에 마련한 자리에 두 사람을 합장하며 영휘원만 남게 되었다. 이후 1922년 영친왕의 장남 이진이 사망하고 할머니 옆에 안장되며 지금의 모습이 완성되었다.
1991년 대한민국의 사적으로 지정되었고, 현재는 국가유산청 조선왕릉중부지구관리소에서 관리하고 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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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휘원(永徽園) 전경 |
대한제국 고종의 후궁이자 영친왕의 생모인 순헌황귀비 엄씨가 안장된 원(園).
1911년 순헌황귀비 엄씨가 장티푸스로 사망하자 명성황후의 홍릉이 있던 지금의 자리 근처에 장지를 마련하고 영휘원(永徽園)이란 이름을 붙였다. 이후 1919년 홍릉이 남양주시 금곡동으로 이장하며 지금의 모습이 갖춰졌다.
1911년 순헌황귀비 엄씨가 장티푸스로 사망하자 명성황후의 홍릉이 있던 지금의 자리 근처에 장지를 마련하고 영휘원(永徽園)이란 이름을 붙였다. 이후 1919년 홍릉이 남양주시 금곡동으로 이장하며 지금의 모습이 갖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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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휘원(永徽園)의 원침과 장명등 |
영휘원은 조선시대 왕의 생모의 무덤을 조성하는 제도인 궁원제에 따라 조성되었다. 봉분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고 호석(護石)만 둘렀고, 문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 각 1쌍을 배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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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휘원(永徽園)의 표석 |
비각에는 표석이 1개 세워져 있다. 표석에는 '순헌귀비 영휘원(純獻貴妃 永徽園)'이라는 명문이 전서체로 음각되어 있다.
표석을 자세히 살펴보면 망국의 아픔이 깃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반적인 조선왕릉의 표석에는 서두에 조선국(朝鮮國) 혹은 대한(大韓)이라는 국호를 기재하나, 순헌황귀비가 사망한 이후 영휘원이 조성된 시점은 경술국치 이후인 1911년이었기 때문에 국호가 따로 적혀있지 않다. 대신 표석 뒤편에 사망할 당시 일본 천황의 연호가 새겨졌는데, 이는 광복 이후 지워졌다.
또한 표석에 어째선지 순헌황귀비가 아닌 순헌귀비라고만 적혀있는데, 이 역시 경술국치 이후 대한제국 황실이 이왕가로 격하되면서 호칭 역시 전부 제후국의 것으로 바뀌며 빠진 것이다.
표석을 자세히 살펴보면 망국의 아픔이 깃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반적인 조선왕릉의 표석에는 서두에 조선국(朝鮮國) 혹은 대한(大韓)이라는 국호를 기재하나, 순헌황귀비가 사망한 이후 영휘원이 조성된 시점은 경술국치 이후인 1911년이었기 때문에 국호가 따로 적혀있지 않다. 대신 표석 뒤편에 사망할 당시 일본 천황의 연호가 새겨졌는데, 이는 광복 이후 지워졌다.
또한 표석에 어째선지 순헌황귀비가 아닌 순헌귀비라고만 적혀있는데, 이 역시 경술국치 이후 대한제국 황실이 이왕가로 격하되면서 호칭 역시 전부 제후국의 것으로 바뀌며 빠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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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인원(崇仁園) 전경 |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장남 이진이 안장된 원(園).
1922년 부모와 함께 순종을 뵈러 조선에 온 이진이 갑작스레 사망하자 순종의 배려로 특별히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이후 영휘원 동쪽 언덕에 장지를 마련하고 숭인원(崇仁園)이란 이름을 붙였다.
1922년 부모와 함께 순종을 뵈러 조선에 온 이진이 갑작스레 사망하자 순종의 배려로 특별히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이후 영휘원 동쪽 언덕에 장지를 마련하고 숭인원(崇仁園)이란 이름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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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인원(崇仁園)의 원침과 석호 |
봉분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였고, 문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호 1쌍을 배치하였다. 전체적인 모습은 영휘원과 비슷하지만 봉분과 석물의 크기는 영휘원에 비해 작다. 조선왕릉의 석물들을 보면 요절한 인물의 능(陵), 원(園)일수록 석물의 크기가 작고 더욱 해학적으로 표현되는 경향이 보이는데, 숭인원의 석물은 유독 그러한 경향이 강하다.
특이하게도 정자각 앞에 향로만 마련되어 있고 어로가 없다.[3] 할머니의 무덤인 영휘원의 정자각과 비교하면 더욱 두드러지는 차이점이다.
특이하게도 정자각 앞에 향로만 마련되어 있고 어로가 없다.[3] 할머니의 무덤인 영휘원의 정자각과 비교하면 더욱 두드러지는 차이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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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인원(崇仁園)의 비각 |
비각 안에는 1개의 표석이 세워져 있다. 표석에는 '원손 숭인원(元孫 崇仁園)'이라는 글씨가 전서체로 음각되어 있다.
태어날 때부터 망국의 황손이었던 데다, 불과 7개월 만에 요절했던 탓인지 표석에 적힌 글도 단순하고 내용도 빈약하다. 뒤편에는 생년월일과 이름 등이 적혀있던 것으로 보이나 현재는 해당 부분이 훼손되어 정확한 내용을 알 수 없다. 정황상 일본 천황의 연호가 적혀있어 누군가 임의로 지워버린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망국의 황손이었던 데다, 불과 7개월 만에 요절했던 탓인지 표석에 적힌 글도 단순하고 내용도 빈약하다. 뒤편에는 생년월일과 이름 등이 적혀있던 것으로 보이나 현재는 해당 부분이 훼손되어 정확한 내용을 알 수 없다. 정황상 일본 천황의 연호가 적혀있어 누군가 임의로 지워버린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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