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술국치

최근 수정 시각: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000px-Merchant_flag_of_Japan_%281870%29.svg.png 일본 제국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50px-Flag_of_Korea_%281899%29.svg.png대한제국 병합 과정

[ 펼치기 · 접기 ]

1904년 2월 23일

한일의정서

대한제국 영토의 전략적 이용

1904년 8월 22일

제1차 한일협약

외국인 고문을 두어 내정에 간섭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

통감부 설치, 외교권 박탈

1907년 7월 24일

정미 7조약

일본인 관리의 차관정치, 군대 해산

1909년 7월 12일

기유각서

사법권과 교도행정권 일본에 위탁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

한국병합

'' 한국 황제 폐하와 더불어 이 사태를 보고 한국을 들어서 일본제국에 병합하여 이로써 시세의 요구에 응함이 부득이한 것이 있음을 생각하여 이에 영구히 한국을 제국에 병합케 한다. 한국 황제 폐하 및 그 황실 각원(各員)은 병합 후라도 상당한 예우를 받을 것이며,[1] 민중은 직접 짐의 위무 아래에서 그 강복(康福)을 증진할 것이며, 산업 및 무역은 평온한 통치 아래에서 현저한 발달을 보이기에 이를 것이니, 동양의 평화가 이에 의하여 더욱 그 기초를 공고하게 함이 짐이 믿어 의심치 아니하는 바이다."

- 일본 메이지 덴노의 조서, 1910년 8월 29일.

황제는 이르노라. 짐(朕)이 부덕(否德)으로 간대(艱大)한 왕업(王業)을 이어 받들어 임어(臨御)한 이후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유신 정령(維新政令)에 관하여 속히 도모하고 여러모로 시험하여 힘써온 것이 일찍이 지극하지 않음이 없었으되 줄곧 쌓여진 나약함이 고질을 이루고 피폐(疲弊)가 극도(極度)에 이르러 단시일 사이에 만회(挽回)할 조처를 바랄 수 없으니, 밤중에 우려(憂慮)가 되어 뒷갈망을 잘할 계책이 망연(茫然)한지라. 이대로 버려두어 더욱 지리하게 되면 결국에는 수습을 하지 못하는 데에 이르게 될 것이니, 차라리 대임(大任)을 남에게 위탁하여 완전할 방법과 혁신(革新)의 공효(功效)를 이루게 하는 것만 못하겠다. 짐이 이에 구연(瞿然)히 안으로 반성하고, 확연(確然)히 스스로 판단하여 이에 한국의 통치권(統治權)을 종전부터 친근하고 신임(信任)하던 이웃 나라 대일본 황제 폐하께 양여(讓與)하여 밖으로 동양(東洋)의 평화를 공고히 하고, 안으로 팔도 민생(民生)을 보전케 하노니, 오직 그대 대소 신민(大小臣民)들은 나라의 형편과 시기의 적절함을 깊이 살펴서 번거롭게 동요하지 말고, 각각 그 생업에 편안히 하며 일본 제국(日本帝國)의 문명 신정(文明新政)에 복종하여 모두 행복을 받도록 하라. 짐의 오늘 이 거조는 그대들을 잊어버린 것이 아니라 그대들을 구활(救活)하자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이니, 그대 신민(臣民) 등은 짐의 이 뜻을 잘 체득하라.
- 승정원일기 마지막 날 기사, "한국의 통치권을 일본 천황에게 양여한다는 칙유를 내렸다", 1910년 8월 29일[2]


1. 개요2. 명칭과 관련해서3. 대한제국이 멸망하기까지의 과정4. 한일 병합 조약 전문5. 기타6. 병탄 전후 일본의 움직임
6.1. 행정6.2. 구 대한 제국 황실

1. 개요[편집]

庚戌國恥

1910년(경술년) 8월 29일대한제국이 멸망하고 대한제국이 다스리던 지역이 일본 제국에 병합된 사건

조약명은 한일 병합 조약. 명백한 외세로 간주되는 세력이 토착 권력을 몰아내고 한반도를 통치한 일제강점기의 공식적인 시작을 알리는 시점이다.

실제로는 1910년 8월 22일 조약이 체결되었으며, 일본 측에서 일주일 동안 발표를 안하고 있다가, 8월 29일에 순종황제의 조칙 형태로 발표를 했다. 그러나 8월 29일 발표된 조칙에는 칙명지보(勅命之寶)[3]라는 행정적 결재에만 사용하던 옥새(玉璽)가 찍혀있었을 뿐, 대한 제국의 국새(國璽)[4]가 찍혀있지 않았고 순종 황제의 서명조차 없었다. 이는 한일 병합 조약이 대한 제국의 정식 조약이 될 수 없으며 따라서 '조약은 원천 무효'라는 주장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제2차) 한일 병합 조약은 대한 제국이라는 나라가 일본령이 되었다고 공식적으로 선포한 사건이지, 사실상 일본령으로 만들기 위한 실질적인 작업들은 이미 끝나 있었다. 일본은 중국(청나라),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함에 따라 일본의 한반도 장악에 방해가 되는 국제 세력들을 제거했고, 1904년 한일의정서를 시작으로 1905년 을사 늑약을 맺어 대한 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였다. 또한 1907년 정미7조약으로 행정권 박탈 및 군대 해산, 1909년에는 기유각서로 경찰권과 사법권을 박탈하여 1909년 쯤에는 대한 제국은 명목상으로만 독립국이었을 뿐, 사실상 일본의 속령이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대한 제국은 이미 그 전부터 점진적인 과정을 거쳐 망해가고 있었으며, 경술국치는 단지 서류상의 명의 이전에 불과하다고 말해도 무리가 아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고종경술국적들의 과오가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난 후에는 한국의 국기인 태극기와 한국의 국가인 애국가도 금기물 또는 금지곡으로 지정되어 사용할 수도 없게 되었다 또한 조선의 500년 수도였던 서울(한성)도 한성부에서 경기도 경성부로 격하되면서 경기도 관할 지역으로 편입되기도 하였다. 1945년 8.15 광복 이후 경기도에서 분리 독립되어서 서울 특별 자유시로 승격되면서 국가 수도의 지위를 되찾는다.

국제적으로는 일본 제국의 식민지이자 속령지였기 때문에 일본제국령 조선(日本帝國領 朝鮮) 또는 일본령 조선(日本領 朝鮮)이라는 지역으로 분류되었다. 영문으로는 흔히 Korea under Japanese rule(일본 통치하 조선) 혹은 Korean Dependency of the Japanese Empire(일본 제국 속령 조선)로 불린다.

2. 명칭과 관련해서[편집]

한국에서는 주로 국권 피탈, 경술 왜란, 한일 합방, 한일 합병, 한일 병합, 한일 병탄, 경술국치라고도 하고, 일본에서는 일한병합(日韓併合), 또는 한국 병합(韓国 併合), 일한합방(日韓合邦), 조선병합(朝鮮併合)이라고도 한다. 원래 일본은 '병탄(併呑)'이란 말을 쓸까도 했지만, 힘이 센 한 쪽이 다른 쪽을 아울러 버린다는 의미가 한국인의 반발을 사서 저항을 불러 일으킬까봐 '병합'이라는 신조어를 만든 것.##2 현재 국어 사전에는 병합=합병 ≒ 합방이라고 되어 있다. 합병은 둘 이상의 단체, 조직, 국가를 합치는 것, 합방은 둘 이상의 국가를 합치는 것.

한국에서 이것을 "동등한 자격으로 합친다"라는 의미인 '합방'으로 바꿔서 부르는 경우가 있는 것은 정확한 의미에 대해 신경을 안 쓰고 읽은 것이데다 1990년도까지만 해도 “한일 합방”이라 부르는 경우가 많있다. 그게 이어지고 있는 것.

조약 체결 당시의 공식 명칭은 일본의 이러한 의지가 반영되어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韓國併合ニ關スル條約)'이다. 일본 정부는 지금도 이 명칭을 사용한다.

경술국치는 경술(庚戌)년에 겪은 국치(國恥, 나라의 치욕, 수치)라는 뜻으로 국가적 관점이 들어있다.

3. 대한제국이 멸망하기까지의 과정[편집]

경술년(1910년) 8월 22일에 일본의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대한제국의 친일파 이완용 사이에 조인된 이 조약이 1주일이 경과된 이날 공표됨에 따라 순종황제의 조칙이 발표되어 8월 29일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그렇게 대한제국은 멸망한 것이다.

그래도 마지막 충신은 있어서, 학부 대신 이용직은 "이 같은 망국안에는 목이 달아나도 찬성할 수 없다"라고 반대하면서 뛰쳐나갔다. 맹꽁이 서당에서는 이용직이 나가기 전 나는 일당처럼 길거리에서 칼에 찔리고 싶지는 않다며 어느 견공자제분을 디스하였다.

이때 일본에 협조한 매국노의 명단은 경술국적 항목을 참고.

이미 마지막 통감이자 초대 총독데라우치 마사다케가 계획서를 가지고 입국했다고 한다. 이토 히로부미 생전에 이미 정해져 있던 것.

경술국치로 인하여 식민지화가 완성된 것이 사실이지만, 이 조약 하나만으로 대한제국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은 아니다. 그 이전의 주변국들간의 전쟁, 여러 차례의 조약과 이권 침탈로 인해 이미 사실상 일본의 종속국이 된 상태에서, 경술국치는 그 이전의 조약들과는 달리 서류상 명의 이전의 성격이 강하다.

4. 한일 병합 조약 전문[편집]

한일 병합 조약 전문은 다음과 같다.

한국 황제 폐하(皇帝陛下) 및 일본국 황제 폐하(皇帝陛下)는 양국간의 특별히 친밀한 관계를 고려하여 상호 행복을 증진하며 동양의 평화를 영구히 확보하기 위하여, 이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면 한국을 일본국에 병합하는 것 만한 것이 없음을 확신하여 이에 양국 간에 병합 조약을 체결하기로 결정한다. 이를 위하여 한국 황제 폐하는 내각 총리대신(內閣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을, 일본 황제 폐하는 통감(統監) 자작(子爵)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를 각각 그 전권위원(全權委員)에 임명한다. 위의 전권 위원은 회동하여 협의하여 다음의 여러 조항을 협정한다.

제1조.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부(全部)에 관한 일체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한다.

제2조. 일본국 황제 폐하는 전조에 게재한 양여를 수락하고 또 완전히 한국을 일본 제국에 병합하는 것을 승낙한다.

제3조. 일본국 황제 폐하는 한국 황제 폐하, 태황제 폐하, 황태자 전하와 그 후비 및 후예로 하여금 각각 그 지위에 따라 상당한 존칭, 위엄 및 명예를 향유케 하고 또 이를 보지(保持)하는 데 충분한 세비(歲費)를 공급할 것을 약속한다.

제4조. 일본국 황제 폐하는 전조 이외에 한국의 황족(皇族) 및 후예에 대하여 각각 상당한 명예 및 대우를 향유케 하고 또 이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공여할 것을 약속한다.

제5조. 일본국 황제 폐하는 훈공이 있는 한인(韓人)으로서 특히 표창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인정되는 자에 대하여 영예 작위를 주고 또 은금(恩金)을 준다.

제6조. 일본국 정부는 전기(前記) 병합의 결과로 한국의 시정(施政)을 전적으로 담임하여 해지(該地)에 시행할 법규를 준수하는 한인의 신체 및 재산에 대하여 충분히 보호하고 또 그 복리의 증진을 도모한다.

제7조. 일본국 정부는 성의 있고 충실히 새 제도를 존중하는 한국인으로서 상당한 자격이 있는 자를 사정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한국에 있는 제국(帝國)의 관리에 등용한다.

제8조. 본 조약은 한국 황제 폐하 및 일본국 황제 폐하의 재가를 경유한 것이니 반포일로부터 이를 시행한다.

이를 증거로 삼아 양 전권 위원은 본 조약에 기명(記名)하고 조인(調印)한다.

융희(隆熙) 4년 8월 22일
내각 총리대신(內閣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

명치(明治) 43년 8월 22일
통감(統監) 자작(子爵)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5. 기타[편집]

일본에서도 안중근의 의거가 워낙 유명한 고로,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합병 반대파였으며 안중근의 의거 때문에 대한 제국이 합병을 자초하였다는 의견이 있다. 실제로 안중근 의사가 일본 내 온건파의 대표와 같은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면서 일본 내 과격파가 문자 그대로 과격하게 한반도를 침탈하는 동안 온건파가 제대로 이를 견제하지 못한게 사실이다. 오죽하면 순종마저 "이등박문은 나의 스승인데, 이를 암살한 안중근은 미치고 도덕을 모르는 자"라 하였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일본 내각은 이토 히로부미의 처단 3개월 전인 1909년 7월에 이미 대한 제국의 합병을 의결한 상태였다. 자세한 내용은 이토 히로부미 항목 참조. 즉, 온건파는 온건하게 한국을 합병하자는 쪽이었지 합병하지 말자고 주장하지는 아니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즉, 어차피 합병은 됐을 거라는 뜻이다. 물론 온건파들 힘이 컸으면 합병 시기가 좀 더 늦춰졌을순 있다만, 오히려 온건파들이 득세했다면 일제에 호감을 가지는 조선인들이 늘어나 일제 강점기가 길어졌을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긴 하다.

이위종의 아버지인 이범진은 주러 공사로 을사조약으로 대한 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된 이후에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남아 대한 제국의 국권 회복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조약 체결 소식을 듣고 적을 토벌할 수도 복수할 수도 없다는 깊은 절망에 빠져 자결하였다. 금산 군수로 <임꺽정>의 저자 벽초 홍명희의 아버지이기도 한 홍범식도 목을 매 자결하였으며[5] 그 외에도 <매천야록>의 저자 매천 황현 등 많은 선비들이 자결하였다. 그러나 을사늑약정미 7조약 때와는 달리 현직 고위 관료 중 자결한 는 없었다.

한편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냈다고 한다.# 이는 이미 을사 조약, 군대 해산, 고종 퇴위 등으로 나라가 망했다고 다들 체념한 상황이란 분석이 있다. 대조적으로 을사 조약 체결 시에는 온 나라가 뒤집혔고 백성들이 나라가 망했다고 공포에 떨며 울부짖었다는 유생들의 기록이 있다.

2009년 9월 이명박 대통령이 2010년에는 경술국치 100년 기념으로 일본의 덴노를 국내에 초대하고 싶다는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다.# 당연히 기념이라는 단어를 쓴 것에 대해 논란이 일었는데, 사실 사전을 찾아보면 알겠지만 기념은 무언가를 축하하거나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게 아닌 뜻깊은 일을 다시 한 번 되새긴다라는 중립적인 단어이다. 쉽게 말하자면 '기억'의 강화 버전이라 할 수 있다. 당장 전쟁기념관이나 6.25 전쟁 OO주기 기념식 같은 명칭만 봐도 알 수 있고, 가톨릭 교회미사에서도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한다는 표현을 쓴다. 다만 긍정적인 일 등에 쓰이는 비율이 압도적이라 착각할 여지가 충분한데도 기념이란 단어를 쓴 것은 부적절했다는 지적도 있다. 게다가 이게 덴노를 초대할 일인지도 의문.[6] 하여튼 이것 등으로 인해 코너에 몰렸다고 생각했는지 2012년에 이명박 대통령은 독도를 방문하고 덴노의 사과 요구까지 하며 대일 강경 노선을 취하는데, 덕분에 한일 관계가 급격히 악화되었던걸 보면 새삼 격세지감이 드는 대목.

파일:/news/201001/04/khan/20100104105319968.jpg
많은 사람들이 이 사진을 경술국치가 일어난 날 경복궁 근정전에 걸린 일장기를 찍은 사진이라고 알고 있다. 한때 본 항목에도 그러한 설명과 함께 올라와 있었다. 하지만 이 사진은 경술국치 때 찍힌 사진이 아니다.# 링크된 글을 살펴보면 알겠지만 이 사진은 1915년 10월 1일 조선물산공진회 행사용으로 섭외한 비행기를 담은 사진이다. 동아일보가 '사진으로 보는 한국 백년'이란 책을 내면서 이 사진을 경술국치 때의 사진이라고 소개하고, 또 그 뒤로 비행기가 찍힌 부분을 잘라낸 사진이 여기저기 실리면서 오해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진 것이다.

6. 병탄 전후 일본의 움직임[편집]

6.1. 행정[편집]

일본은 1909년 7월의 각의에서 대한 제국 병합을 방침으로 잡은 이후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우선 건강상으로 골골거리던 통감 소네 아라스케를 대체해서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임명했으며 부통감직을 신설하여 야마가타 이사부로를 임명했다.

이 들이 제일 먼저 준비한 것은 조선을 통치할 엘리트 관료들의 모집이었다. 한일 합방 조약이 발효됨에 따라 대한 제국의 주권을 완전히 손아귀에 얻는 일본은 즉각 대한 제국의 관청과 통감부 조직들을 개편하여 10월 1일 조선총독부를 설치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조직들이 흡수, 통합, 폐지되었고 1,434명의 직원들이 해고되었다.

한국인 고등관들은 모조리 해고되었고 각 도 관찰사들도 6명만 남기고 모두 해고했다. 당연히 빈 자리는 일본인들이 차지했다. 이 중엔 전 대만 총독인 고마다 겐타로 밑에서 대만 통치에 관여했던 인물들이 많이 포함되었는데 이들의 실무 경력도 경력이었지만 고마다가 데라우치와 동향 사람이라 같은 파벌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후일 사이온지 긴모치에 의해 무능하단 이유로 내쫓긴 인물들로 인맥, 지연, 학연을 통해 등용된 무능한 인물들이 많았다. 이들 중 상당수가 고등문관시험을 치르지 않았다.

이후 야마모토 내각은 조선의 개발을 위해 감찰관으로 내무성 지방 국장 고바시 이치타를 파견했는데 그는 일본인 도장관들이 지극히 무능하고 상당수가 대장성 출신이라 이들 밑에선 조선이 개발되지 않을 것이라 혹평했다. 겨우 남은 한국인 장관들도 실질적으론 허수아비라서 밑의 내무부장, 재무부장이 모든 일을 담당했고 이에 괜히 한국인 장관들의 기분만 상할 판이니 한국인 도장관을 전폐하잔 주장이 제기되었다.

6.2. 구 대한 제국 황실[편집]

대한제국 황실은 황제국의 직위를 박탈당하고[7] 황제도 이왕이라는 봉호로 강등되었다. 일제에 적극 협력한 기존 지배층들은 조선 귀족령의 선포로 일본의 지배층에 포섭되었다. 일제는 자신들의 체제 선전과 조선인들의 복종을 이끌어내기 위해 고종순종을 이용했다. 특히 재위 시절 나라를 강탈 당한 순종은 한국의 역대 군주 중에 가장 많은 순행, 행행을 행해야 했다.[8]

일제는 암묵적으로 고종과 순종을 이전처럼 일국의 군주로서 대접을 해주었다. 일제는 경성에 주재하는 외교관들에게 고종과 순종을 알현하는 규칙을 만들었다. 1911년 정초와 고종의 탄신일에는 학생들이 대한문 앞에 모여 '황제 폐하 만세'를 외쳤는데, 원칙적으로 안되는 일이었지만 조선총독부는 이를 눈감아주었다. 또한 구황실에 막대한 세비도 지급되어 1911년에만 150만 엔의 생활비가 지급되었고, 고종과 순종에게 당구, 담배, 영화 등의 취미 생활을 제공하는가 하면 영친왕의 일본 생활에 대한 영상물을 찍어 보여주기도 했다.

1917년 함흥 순행도 눈여겨볼만한데 이때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황제의 깃발들이 휘날리기도 해서 일부 일본인들을 놀라게 했다. 의례를 지내는 순종도 황제의 복식을 갖추었다. 일본 군함을 타고 도쿄까지 행행한 것은 여러모로 당시 조선인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고종순종조차도 이왕작위와 봉록을 거부하지 않았으며, 많은 구황족들이 적극적으로 대일 항전에 동참하지 않고 일제가 제공한 지위에 안주하거나 몇몇은 적극적으로 부역하기도 했다. 그 결과 이왕가에 대한 배신감으로 조선인들은 왕정에 완전히 등을 돌렸다. 1919년 3.1운동의 민족 대표 33인에도 유학자나 근왕주의자는 단 한명도 없다. 또한 1919년에 성립된 임시 정부도 대한 제국 임시 정부가 아니라 대한민국 임시 정부이다. 구 황실을 우대한다는 조건이 있긴 하지만 언제까지나 대한민국 국민으로써 우대하는 것이다. 고종이 사망한 것이 1919년 1월 21일인 것을 생각하면 당시 사람들의 조선 왕실에 대한 실망감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자업자득으로 가뜩이나 한국에선 황실에 대한 이미지가 나빴는데, 정권을 잡은 이승만은 정부의 정통성이 훼손될 것을 염려해 구 황족 입국을 철저하게 방해하는 등 애초에 구심점이 만들어질 여지조차 남기지 않아 황실 복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후 영친왕을 비롯한 해외 구황족의 귀국은 박정희가 정권을 잡고 나서야 가능해졌는데, 이것조차 군부 독재 시대라 구황족이 그 이상을 감히 요구할 계재는 못되었다. 애초에 박씨 일가가 신황족이던 시절. 그나마 귀국조차 세월이 흘러 대중들의 감정이 사그라들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사실 당시에 대한 제국 황실이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기도 했다. 고종의 비자금러시아와 일제에 의해 행방이 묘연해졌기에 독립군을 금전적으로 지원하는 것도 불가능했고, 일제가 주는 구황실 지원금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애초에 당시 선진 지식인들이 대부분 공화정을 선호하는 추세였기에[9] 황실과는 대립 관계라 이들과 연대하는 것 역시 말이 안되었다. 대표적으로 1917년 발표한 대동 단결 선언문만 봐도 "융희 황제가 삼보를 포기한 8월 29일은 우리 동지가 삼보를 계승한 날로서 황제권이 소멸한 때가 곧 민권이 발생한 날입니다."라고 했다.

[1] 한국과 일본을 1:1로 통합하여 (미국이나 오스트리아 - 헝가리 제국처럼) 연방 국가 내지는 통일 제국을 구성하겠다던 기존 일본의 명분을 걷어 차버린 대목이다. 실제 이에 낚인 사회인들도 당시엔 상당했다. 그렇지만 일본은 최소한 이왕가(李王家)를 대접해주겠다는 약속 자체는 어기지 않았고, 따라서 한국 황실은 확실히 상당한 대우를 받았는데, 일본 귀족인 화족보다는 1단계 위로, 일본 황실보다는 반단계 ~ 1단계 아래로 쳐줬다. 하지만 이렇게 좋은 대접을 받은 데에 만족하여 한국의 독립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지 않은 대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물론(다만 임정 강령에는 '구황실을 예우한다'는 조항이 있긴 했다) 해방 후의 대한민국은 황실 복원을 거부하고 공화국 체제를 수립하게 된다. 물론 이와 별개로 공화주의자들에게 황실은 가당치도 않았을테지만.[2] 참고로 승정원일기 마지막 기사한창수 등에게 상전을 내렸다이다.[3] 1907년 7월 고종 황제 강제 퇴위 당시 일본이 뺏어간 것이라고 한다.[4] 국가 간의 조약에는 국새를 사용해야 한다.[5] 아이러니하게도 홍명희의 할아버지이자 홍범식의 아버지 홍승목은 친일파로서 조선 총독부에서 주는 작위를 받았다고 한다.[6] 당시 아키히토 덴노가 과거사에 대한 반성을 진지하게 한다고 평가받는 왕이었기 때문에, 한국에 초대해 이를 매듭짓고 싶은 맘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7] 칭호도 다시 대한제국 이전 조선시대 때처럼 폐하전하, 태자세자 식으로 제후의 격으로 격하되었다.[8] 1917년의 함흥 순행은 병환으로 몸져 누워 있는 순종을 억지로 끌어 내리다시피 행해졌다.[9] 이는 무능한 황실이 스스로 자초한 측면도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