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문왕릉
최근 수정 시각:
[ 펼치기 · 접기 ]
| ||||||||||||||||||||||||||||||
![]() |
신문왕릉(神文王陵) |
사실 이 곳은 신문왕의 능이 아니라 아들인 효소왕의 능이라는 견해가 있다.[3] 신라왕릉은 각자 수 년~수십년의 텀을 두고 만들었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양식이 변하는 흐름이 존재하는데, 일단 이 무덤은 주인이 명확하게 밝혀져 있는 두 왕릉인 무열왕릉과 성덕왕릉 사이 어떤 왕의 왕릉인 것은 거의 확실하다. 둘레돌 같은 석물 형태가 두 시대 사이 과도기기 때문이다.
효소왕릉설의 근거는 황복사 3층 석탑의 금동사리함기에 새겨진 명문에 두고 있는데, 본래 황복사 삼층석탑은 신문왕이 692년 7월에 죽자 왕후와 왕위를 계승할 효소왕이 건립하였고, 몇년 뒤에 신목왕후와 효소왕이 죽자 706년에 신문왕의 차남 성덕왕이 불사리나 다라니경을 넣어 죽은 신문왕, 신목왕후, 효소왕의 명복을 빌었다는 것이다. 효소왕은 망덕사 동쪽에 묻혔다고 하는데, 전신문왕릉은 망덕사 바로 동쪽에 위치해 기록과도 부합한다.
황복사는 원래 가장 먼저 승하한 신문왕을 위해 건립된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경주 낭산[4] 동쪽에 있는 황복사 터 옆에 당시 신라 왕릉 주변에 장식하던 십이지신상이 파괴된 채로 흩어져 있으며 봉분도 무너진 채 남은 능터가 하나 있다. 그것이 진짜 신문왕의 능이고 배반동의 신문왕릉은 사실 효소왕의 능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배반동의 신문왕릉은 낭산의 '남쪽'에 위치한다. 그러나 구황동 왕릉지라고 불리는 이 유적을 2017년 발굴조사했는데, 이 과정에서 여기가 실제로 왕이 묻힌 무덤이 아닌 미완성된 왕릉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 매장 주체부가 확인되지 않고[5] 일부 석재는 통일신라 시대 건물지의 기단을 보수하는 데 사용된 점 등을 고려하면 이 유적은 신문왕릉이 아닌 효성왕의 가릉으로 여겨지는 것이 맞다.
효소왕릉설의 근거는 황복사 3층 석탑의 금동사리함기에 새겨진 명문에 두고 있는데, 본래 황복사 삼층석탑은 신문왕이 692년 7월에 죽자 왕후와 왕위를 계승할 효소왕이 건립하였고, 몇년 뒤에 신목왕후와 효소왕이 죽자 706년에 신문왕의 차남 성덕왕이 불사리나 다라니경을 넣어 죽은 신문왕, 신목왕후, 효소왕의 명복을 빌었다는 것이다. 효소왕은 망덕사 동쪽에 묻혔다고 하는데, 전신문왕릉은 망덕사 바로 동쪽에 위치해 기록과도 부합한다.
황복사는 원래 가장 먼저 승하한 신문왕을 위해 건립된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경주 낭산[4] 동쪽에 있는 황복사 터 옆에 당시 신라 왕릉 주변에 장식하던 십이지신상이 파괴된 채로 흩어져 있으며 봉분도 무너진 채 남은 능터가 하나 있다. 그것이 진짜 신문왕의 능이고 배반동의 신문왕릉은 사실 효소왕의 능으로 추정하는 것이다. 배반동의 신문왕릉은 낭산의 '남쪽'에 위치한다. 그러나 구황동 왕릉지라고 불리는 이 유적을 2017년 발굴조사했는데, 이 과정에서 여기가 실제로 왕이 묻힌 무덤이 아닌 미완성된 왕릉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 매장 주체부가 확인되지 않고[5] 일부 석재는 통일신라 시대 건물지의 기단을 보수하는 데 사용된 점 등을 고려하면 이 유적은 신문왕릉이 아닌 효성왕의 가릉으로 여겨지는 것이 맞다.
2019년 사천왕사 터에서 발견된 비편이 해석되어 신문왕릉비일 가능성이 제기되며 다시금 신문왕릉을 뒷받침 하는 견해도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7] 일제 강점기부터 발굴 조사가 완료된 2012년까지 사천왕사지에서 4종의 비편이 발견되었다. 3종은 각 1편, 1종은 5편인데, 석질, 이수·비신·귀부의 양식, 정간의 크기, 구양순풍 해서, 필법과 각법이 동일한 5편이 ‘신문왕릉비’임을 명문의 내용으로 밝혔다. 다섯 비편은 신문왕의 몰년(692)을 기록해 비가 692년경 세워졌음을 알려 준 ‘次壬辰’명, 신문왕의 十德을 기록한 ‘無窮其德十也’명(2편), 신문왕을 칭송하는 銘辭의 시작을 알리는 ‘銘曰’명, 이들과 정간의 양식, 필법과 각법이 같은 ‘鏘’명이다. 더하여 실제 전액 또는 그 연습용으로 추정되는 ‘之碑’명의 기필과 수필 필법이 무열왕 능비의 전액과 일치함도 밝혔다.
신라 31대 신문왕(재위 681∼692)의 무덤이다.
신문왕은 문무왕의 아들로 귀족들의 반란을 진압한 후 신라 중대 전제왕권을 확고히 하였다. 국립교육기관인 국학을 설립하고, 지방통치를 위해 9주5소경제도를 설치하였고, 고구려·백제·말갈인을 포함시킨 중앙 군사조직인 9서당을 완성하는 등 중앙과 지방의 정치제도를 정비하여 전제왕권을 다졌다.
높이 7.6m, 지름 29.3m의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 봉토무덤이다. 둘레돌은 벽돌모양으로 다듬어 5단으로 쌓았고 44개의 삼각형 받침돌이 둘레돌을 튼튼하게 받치고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낭산(狼山) 동쪽에 신문왕을 장사지냈다고 되어있어, 낭산 동쪽 황복사터 아래쪽 12지신상이 남아있는 무너진 왕릉을 신문왕 무덤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신라신문왕릉 → 경주 신문왕릉)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1~50호]⠀⠀[51~100호]⠀
⠀[101~150호]⠀⠀[151~200호]⠀⠀[201~250호]⠀⠀[251~300호]⠀⠀[301~350호]⠀⠀[351~400호]⠀⠀[401~450호]⠀⠀[451~500호]⠀⠀[501호~550호]⠀⠀[번호폐지 이후(번호없음-1)]⠀⠀[번호없음-2]⠀
|
[1] 舊 사적 제181호[2] 예를 들면 여기서 가까운 선덕여왕릉과 비교해 봐도 그렇다.[3] 이근직 교수는 현재 효소왕릉으로 알려진, 경주시 조양동에 있는 성덕왕릉 옆의 대형 고분은 실제로는 효소왕이 묻힌 것이 아니라 어느 신라 귀족의 무덤으로 추정하였다.[4] 남산이 아니며 낭산이 맞다.[5] 왕릉의 둘레를 이루는 호석만 발견되었다.[6] 사실 이건 신문왕만의 문제가 아니라 신라왕릉 중 능 주인이 정확히 확인되는 왕릉은 몇 기 안 된다. 능의 주인이 비교적 정확하게 밝혀진 건 위치상 거의 확실해 보이는 선덕여왕릉이나, 신라 당시 왕릉비의 일부가 발견된 무열왕릉과 흥덕왕릉 등이 있다. 그 외에 원성왕릉, 성덕왕릉과 헌덕왕릉도 실제 그 왕의 능이 확실하다고 인정되는 편. 그 외 대부분의 신라 왕릉은 '전(傳) ~왕릉'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7] 정현숙,《신라 사천왕사지 출토 비편의 새로운 이해* -다섯 비편은 ‘신문왕릉비’다-》, 목간과문자 제22호, 2019
![]()
이 저작물은 CC BY-NC-SA 2.0 KR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단, 라이선스가 명시된 일부 문서 및 삽화 제외)
기여하신 문서의 저작권은 각 기여자에게 있으며, 각 기여자는 기여하신 부분의 저작권을 갖습니다.
나무위키는 백과사전이 아니며 검증되지 않았거나, 편향적이거나, 잘못된 서술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무위키는 위키위키입니다. 여러분이 직접 문서를 고칠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의 의견을 원할 경우 직접 토론을 발제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