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 세종대왕자 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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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내동리 쌍무덤. 옥야리 장동 방대형 고분 4기 총 5기
⠀[번호없음-2]⠀
2026.05.14 -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
星州 世宗大王子 胎室
Placenta Chambers of King Sejong’s Sons, Seongju
소재지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산8번지
분류
유적건조물 / 무덤 / 왕실무덤 / 조선시대
수량/면적
5,950㎡
지정일
시대
소유단체
국가
관리단체
D9424BA79B734FA2...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 전경
 
 
 
 
 
 
 
 
 
 
 
 
 
 
 
 
1. 개요2. 역사3. 기타4. 외부 링크5. 국가유산 설명

 
 
 
 
 
 
 
 
 
 
 
 
 
 
 
 
 
 
 
 
 
 
 
 

1. 개요[편집]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선석산 아래의 태봉에 위치한 조선시대의 태실이다. 세종의 왕자들 중에서 문종을 제외한 18명의 왕자와 원손 단종의 태실 등 19기의 태실이 군집을 이루고 있다.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은 1975년 12월 30일에 경상북도 시도유형문화재 제88호로 지정됐다가 2003년 3월 6일에 사적으로 재지정 되었다.[1]
 
 
 
 
 
 
 
 
 
 
 
 
 
 
 
 
 
 
 
 
 
 
 
 

2. 역사[편집]

 
 
 
 
 
 
 
 
 
 
 
 
 
 
 
 
 
 
 
 
 
 
 
 
1438년(세종 20년)에서 1442년(세종 24년)에 조성되었다. 19기의 태실 중 5기는 훼손되어 있는데 이는 수양대군이 왕위에 올랐을 때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에 반대한 다섯 명의 왕자들[2]의 태실이며 수양대군이 즉위하면서 다섯 명의 태실을 파괴하라 명했기 때문에 훼손되어 있다. 즉위 후 세조 태실에는 별도의 가봉비를 태실비 앞에 세웠다.

본래 왕으로 즉위할 경우 새로운 부지를 찾아 기존의 태실을 옮겨서 새로 조성하는 것이 원칙이고 실제로 세조의 즉위 이후에도 신하들이 여러 차례 태실을 옮길 것을 주장했으나 세조는 형제들의 태가 여기 같이 있는데 어찌 옮기겠냐는 이유로 가봉비만 세우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형제와 조카를 죽인 장본인인데다 태실의 석물까지 파괴한 사람의 행보로써는 너무 모순적이라는 견해가 있지만 세조는 자신의 무덤인 광릉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간소함을 추구하고 자신에게 큰 돈을 쓰지 말 것을 당부했기 때문에 괜히 대규모 이장 작업을 추가로 벌여야 하는 새로운 태실 조성의 필요성 역시 느끼지 못하는 등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한 것이다.[3]
예조에서 아뢰기를,
"성주(星州) 선석산(禪石山)에 주상의 태실을 봉안하였으나, 그러나 여러 대군(大君)과 여러 군(君)과 난신(亂臣) 이유(李瑜) 금성대군(錦城大君) 의 태실이 그 사이에 섞여서 자리하였고, 또 법림산(法林山)에 노산군(魯山君)의 태실이 있으니, 청컨대 여러 대군(大君)과 여러 군(君)의 태실을 옮기고, 유(瑜)와 노산군(魯山君)의 태실은 철거(撤去)하게 하소서."

세조실록』13권, 세조 4년(1458) 7월 8일 계사(癸巳) 2번째 기사
먼저 예조에서 아뢰기를,
"어태실(御胎室)이 성주(星州)의 대군(大君)과 여러 군(君)의 태실 곁에 있으며, 또한 의물(儀物)도 없으니, 청컨대 장소를 가려서 이안(移安)하고 선왕의 구례(舊禮)에 의하여 의물을 설치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고 다만 명하여 표석(標石)을 없애고 비를 세워 구별하도록 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비를 세웠다. 그 글은 이러하였다.
"공손히 생각하건대, 우리 세종 장헌 대왕(世宗莊憲大王)께서 즉위(卽位)한 21년 에 유사(有司)에 명하여 땅을 점치게 하고 대군(大君)과 여러 군(君)의 태를 성주(星州) 북쪽 20리 선석산(禪石山)의 산등성이에 갈무리하게 하고 각각 돌을 세워 이를 표(標)하였는데, 주상의 성태(聖胎)도 또한 그 가운데 들어 있어 표하여 이르기를, ‘수양대군(首陽大君) 【휘(諱).】의 실(室)’이라 하였다.
지금은 하늘의 명을 받들어 왕위에 오른 지 이미 8년이 지났으므로 예관이 급히 조종(祖宗)의 고사(故事)에 의하여 따로 자리를 보아 어태(御胎)를 이안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형제가 태를 같이하였는데 어찌 고칠 필요가 있겠는가?’ 하시고, 의물(儀物)을 설치하기를 청하여도 역시 윤허하지 아니하시며 다만 표석을 없애고 비를 세워 기록할 것을 명하여 힘써 일을 덜게 하셨다.

『세조실록』29권, 세조 8년(1462) 9월 14일 을사(乙巳) 1번째 기사
 
 
 
 
 
 
 
 
 
 
 
 
 
 
 
 
 
 
 
 
 
 
 
 

3. 기타[편집]

 
 
 
 
 
 
 
 
 
 
 
 
 
 
 
 
 
 
 
 
 
 
 
 
매년 5월 중순 성주생명문화축제가 열릴 때 쯤 성주군에서는 세종대왕자 태실을 테마로 경복궁에서 태봉안 의식 재현과 광화문광장을 돌고 성주로 오는 태봉안 봉송 행렬을 재현한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왕족의 태실이 군집을 이루고 있고, 조선시대 태실의 초기 형태 연구에 중요한 자료인데다가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왕조 교체와 함께 왕실의 태실 조성 방식의 변화 양상을 볼 수 있다는 점과 한국의 생명 존중 문화를 잘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크다. 이러한 점으로 성주군에서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성주는 세종대왕자 태실 외에도 용암면에 태종태실과 가천면에 단종태실[4]이 있어 태실의 고장이라 평가받을 정도의 명당이었다.

세종대왕은 아들이 18명이고 막내아들인 담양군이 1439년생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 태실 군집에는 19번째 아들인 '이당'의 태실이 있다. 태실에 기록되기로는 1442년 7월 24일(음력)생으로 기록되었으며, 1446년 이전에 요절하여 봉군되지 못해 기록에도 누락된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에는 1442년 7월 24일 자를 전후하여 관련 기사가 없으며, 왕실 족보인 선원보에도 이당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점이 문제이다. 학계의 추가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

세종 본인의 태실은 비석 정도 흔적만 남기고 중앙 태석은 1967년 찍은 사진만 남았는데, 그중 개첨석과 중동석의 경우 2024년 심현용 한국태실연구소장이 이건희 회장이 기증해 국립청주박물관에 둔 석물과 파손 부위까지 일치하는 것을 발견하고 찾아냈다. #
 
 
 
 
 
 
 
 
 
 
 
 
 
 
 
 
 
 
 
 
 
 
 
 

4. 외부 링크[편집]

 
 
 
 
 
 
 
 
 
 
 
 
 
 
 
 
 
 
 
 
 
 
 
 

5. 국가유산 설명[편집]

 
 
 
 
 
 
 
 
 
 
 
 
 
 
 
 
 
 
 
 
 
 
 
 
세종대왕자태실은 성주군 월항면 선석산 아래 태봉(胎峰) 정상에 있으며, 세종의 적서(嫡庶) 18왕자와 세손 단종의 태실 등 19기가 군집을 이루고 있다. 태실은 왕실에 왕자나 공주 등이 태어났을 때 그 태를 넣어두던 곳을 말한다.

전체 19기중 14기는 조성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나 세조의 왕위찬탈에 반대한 다섯 왕자의 태실의 경우 방형의 연꽃잎이 새겨진 대석을 제외한 석물이 파괴되어 남아 있지 않으며, 세조 태실의 경우에는 즉위한 이후 특별히 귀부를 마련하여 가봉비(加封碑)를 태실비 앞에 세워두었다.

조선 세종 20년(1438)에서 24년(1442)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태봉은 당초 성주이씨의 중시조(中始祖) 이장경(李長庚)의 묘가 있었는데 왕실에서 이곳에 태실을 쓰면서 그의 묘를 옮기고 태를 안치하였다고 한다. 한편 1977년 태실에 대한 보수시 분청인화문대접·뚜껑, 평저호 및 지석(誌石) 등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세종대왕자태실은 조선초기 태실형태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며 우리나라에서 왕자태실이 완전하게 군집을 이룬 유일한 예라는 점, 그리고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왕조교체와 함께 왕실 태실 조성방식의 변화 양상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성주세종대왕자태실 →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1] 舊 사적 제444호[2] 안평대군, 금성대군, 한남군, 영풍군, 화의군.[3] 일반적으로 가봉 태실은 인종태실명종태실처럼 지상에 중앙 태석을 두고 주변으로 팔각 난간석을 화려하게 설치하는데, 세조태실은 그런 것조차도 없이 기존 아기 태실에 거북 형태의 가봉비 하나만 설치한 것이 그 증거이다.[4] 본래 세종대왕자 태실에 같이 봉안되어 있었다가 문종 대에 가야산 뒤쪽의 법림산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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