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최근 수정 시각:

대한민국의 국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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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호
송조표전총류 권7
(宋朝表牋總類 卷七)

151호
(정족산사고본, 鼎足山史庫本)
(태백산사고본, 太白山史庫本)
(오대산사고본, 五臺山史庫本)
(기타산엽본, 基他散葉本)

152호
비변사등록
(備邊司謄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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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한글

조선왕조실록

영어

The Annals of the Choson Dynasty

프랑스어

Annales de la Dynastie Cho-son

국가·위치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소장·관리

서울대학교 규장각

등재유형

기록유산

등재연도

1997년

제작시기

1392~1863년

대한민국의 국보
National Treasures Of Korea

파일:external/pbs.twimg.com/Gn371bnO.jpg

공식
명칭

한글

조선왕조실록[1]

한자

朝鮮王朝實錄

영어

The Annals of the Choson Dynasty

분류번호

국보 151호

소재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관악구 관악로 1,103호 동,
서울대학교 규장각

분류

기록유산 / 전적류 / 필사본 / 고본

시설

1,181책[2], 848책[3], 74책[4], 21책[5]

지정연도

1973년 12월 31일

제작시기

조선, 1392년~1863년

1차사료

승정원일기

파일:external/news.chosun.com/200605300545_01.jpg

파일:external/www.donga.com/200303190359.jpg

왼쪽부터 세종실록, 중종실록, 성종실록이다.

국사편찬위원회와 서울시스템이 제작한 국역 조선왕조실록 CD.

파일:나무위키프로젝트.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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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2. 편찬
2.1. 세초(洗草)
3. 보관, 그리고 수난4. 평가
4.1. 옥에 티
5. 기타6. 사관들의 집념7. 이모저모8. 현대화 노력
8.1. 영인8.2. 번역과 전산화8.3. 번역의 문제점8.4. 실록 전산화의 영향
8.4.1. 사극8.4.2. 교양서8.4.3. 그 외
9. 목록과 분량
9.1. 고종실록, 순종실록
10. 관련 역사서11. 관련 항목12. 관련 영상

1. 소개[편집]

조선왕조실록(태조실록부터 순종실록까지 열람,검색 가능)

조선 왕조가 태조 이성계부터 철종에 이르기까지 25대, 472년 간의 역사를 편찬한 실록을 총칭하는 말.[6] 대한민국국보 제151호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다.[7] 북한에서는 '리조실록(李朝實錄)'이라고 한다.

영어 명칭은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Annals는 대략 '연대기' 정도의 의미로 풀어 쓰면 '조선 왕조 연대기' 정도의 의미를 갖는다.

2. 편찬[편집]


실록 편찬은 고려고려실록부터 있었으며 건국부터 왕들은 춘추관을 만들고 기록자인 사관(史官)을 두었다. 그리고 사관들은 왕들을 따라 다니면서 왕과 주변 관료들이 하는 행동을 빠짐없이 적은 기록물 사초(史草)를 만든다. 그외에도 춘추관 사관들은 3년마다 자신들이 작성한 사초와 각 관청의 기록물[8]을 모아 별도로 시정기(時政記)를 만들어 의정부와 사고에 보관한다. 사초와 시정기 모두 실록편찬의 공정성을 보장하고, 기록자를 정치적 탄압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왕조차 볼 수 없는 비공개 문서였다. 조선 시대 왕중 자신의 사초를 읽어본 왕은 한명도 없다. 연산군이 자신의 사초를 보았다고 알려진 경우가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며 연산군도 본인의 사초가 아니라 아버지의 사초를 읽었으며, 문제가 된 부분만을 신하가 베껴와 읽었다.

그리고 왕으로 즉위했던 인물이 사망하면[9], 현직 왕은 사관 같은 춘추관의 구성원과 정승급 고위 인사를 넣은 임시기구인 실록청(實綠廳)을 설치하고, 위에서 언급한 사초, 시정기와 승정원일기 같은 각 관청의 기록들을 모아서 죽은 왕의 실록을 편찬한다. 편찬과정은 3단계로 나누어 지는데 첫 단계는 실록청을 도청(都廳) 아래에 1~3의 방(房)으로 나누고(세종, 성종 같이 분량이 많은 실록의 경우 방을 6개까지 늘렸다고 한다). 각 방에서 1차 자료에서 중요한 사실을 가려 초초(初草)를 작성하고, 다음으로 방에서 작성한 초초본을 도청에서 편집해 중초(中草)를 작성하고, 마지막으로 실록청의 수장인 총재관과 도청 당상이 재차 수정하고 문장을 통일해 정초(正草)를 작성하면 실록이 완성된 것이었다.

이후 완성된 실록은 5개를 복사해서 춘추관에 1개를 두고 지방에 만들어 둔 사고(史庫)마다 1개씩 보관한다. 그리고 실록청은 마지막 작업으로 초초본과 중초본을 시냇물에 씻어 없애는 세초를 했는데, 그것은 하위 항목에서 설명하도록 한다.

2.1. 세초(洗草)[편집]

세초(洗草)란 초초와 중초를 기록한 종이들을 나중에 문제가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 아예 물에 씻어서 새 종이로 만들어 버리는 것을 말한다. 이 세초식은 실록 편찬의 '쫑파티' 역할을 하기도 했는데 세초식 장면을 그림으로 그려 남겨두기도 했다. 세초가 시행되는 곳은 현재도 남아있는 서울의 세검정. 세초 후에는 세초연이라는 파티를 열었다고 한다. 어떤 의미에서 실록 편찬 과정은 세계적인 역사기록의 편찬 과정이면서도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기록 말살의 과정인 셈이기도 한데, 광해군일기는 조선왕조실록 중 유일하게 중초본이 남아 있다. 그래서 정초본에 없는 광해군에 대한 기사가 실려 있다.

이 세초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 첫 번째는 물자를 아끼기 위해서이다. 왕도정치를 표방한 조선왕조는 꽤 검소하게 정부를 운영했기 때문에 모든 물자를 귀하게 여겼고 그런 조선 정부에게 초조본과 중초본의 제작에 들어가는 종이는 무척 아까운 지출이었다. 여기에 두 가지의 판본 외에도 사료 편찬을 위해 왕의 재위기간동안 사관들이 열심히 여러가지 일을 기록한 원본사료인 사초에 쓰인 종이까지 합하면 그 양이 어마어마했다. 이 정도의 양을 한번 쓰고 말기에는 너무 아깝다고 생각한 당시 사람들은 정초본이 완성되면서 필요성이 줄어든 다른 사료들을 전부 세초하는 것. 한지는 세초 작업을 통해 먹물을 빼낸 뒤 잘 말리면 다시 사용할 수 있다.

  • 두 번째 이유는 뒤에 나올 연산군조의제문 사건 때문이다. 연산군 이전까지는 왕이 실록을 열람할 수 없다는 금기가 지켜져 실록 편찬의 자율성이 보장되었다. 물론 이를 깨보고자 시도한 왕도 없는 건 아니었지만 넌지시 말을 꺼내볼 때마다 대신들의 격렬한 항의를 이기지 못하고 전부 뜻을 접었다. 이성계도 "사관이 나에 대해 어떻게 써 놓았는지 직접 보고 그것을 통치의 귀감으로 삼고자 한다."라는 얘기를 꺼냈다가 신하들이 "통치의 귀감으로 삼고자 하신다면 전대의 역사서를 읽는 것으로도 충분하옵니다."라고 나오자 더 말을 못 한 적이 있다. 참고로 이 실록 내용은 수능 언어 영역 기출이다(물론 국역본). 심지어 세종조차 편찬이 끝난 부왕의 실록을 보려고 했다가 "너님이 보는 순간 후대 임금들도 본받아 실록을 보고 고칠 겁니다"라고 신하들이 반대해 뜻을 접었다.오오 실록갓 세종 51권, 13년(1431 신해 / 명 선덕(宣德) 6년) 3월 20일(갑신) 2번째기사 물론 이것도 기출이다. 그런데 연산군이 실록의 기록을, 그것도 실록이 완성된 형태로 편찬되기 전에 사관들이 보고들은 바를 자유롭게 기록한 원본인 사초를 억지로 열람한 사건을 겪으면서[10] 사관을 비롯한 대신들은 엄청난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도 나름대로 여기저기 다듬어서 완성된 형태로 만든 실록과는 달리 사초는 그야말로 그 자리에 있었던 모든 상황과 사관의 생각이 여과 없이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게 왕의 손에 들어가고 그걸 읽은 왕이 분노할 경우 목이 달아날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연산군이 한 번 전례를 남겼으니 또 다른 왕이 비슷한 일을 시도하지 않을 거란 보장이 없었고, 대신들에게 있어 가장 좋은 방법은 기록 자체를 없애버리는 일이었다. 이 때문에 중종 때 대대적인 세초작업이 이뤄짐과 아울러 세초작업 자체가 의무로 규정되어 이전에 세초하지 않고 남겨뒀던 사초까지 모두 씻어버렸다. 다만 여기에 대해서는 이견도 있다. 성묘보전세초록 문서 참조.


연산군 이후 그런 막장짓을 한 임금은 없었다. 금기시되어 왔던 일인데다, 연산군 이후 사초 열람을 시도함 자체가 나는 연산군 같은 폭군이다! 하고 자랑하는 짓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명색이 '기록물'인데 왕이 실록을 참고조차 하지 않은 건 아니다. 왕이 실록을 직접 읽지는 않되, 조정에서 중요한 판단을 내려야 할 일이 있으면 그 전례를 찾아보기 위해서 왕이 사관에게 지시를 내려 열람하여 기록을 찾도록 했다.

이 작업 때문에 사라진 어마어마한 분량의 초초와 중초, 생생한 현장 자료들을 보지 못하게 되어 애석하게 여기는 역사학자들도 많다. 그나마 조선 후기는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 일성록 등 다른 자료들도 남아있지만 조선 전기는...

3. 보관, 그리고 수난[편집]

컴퓨터하드 디스크도 없던 시절에 백업을 얼마나 철저하게 했는지 보여주는 사례. 전왕조의 고려실록은 궁궐에 1부, 해인사에 1부 총 2부를 만들었는데 조선왕조실록은 항상 4~5부를 만들었다. 고려실록도 여요전쟁, 홍건적 등 난리가 나서 소실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에 그런 사태를 막기 위해서인 것으로 보인다.

《세종실록》때부터 실록이 완성되면 복사본의 오탈자를 막기 위해 활자로 4부를 인쇄해서 한양의 춘추관에 한부를 두고 나머지 3부는 지방에 사고를 설치하여 보관해서 3년에 한번씩 꺼내 볕에 말리는 "포쇄"라는 작업으로 곰팡이가 슬거나 좀이 먹는 것을 방지했다고 한다. 원래 실록의 사고는 궁궐의 춘추관 외에 충주시, 성주군, 전주시(4대 사고)에 설치되어 있었는데, 겉보기에 별다른 문제가 없는 것 같았지만 대사헌 양성지는 보관 장소에 이의를 제기하며 세조 12년(1466) 11월 17일에 상소를 올렸다. 양성지의 주장에 따르면 "춘추관은 한양에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지만, 하삼도(下三道)[11]에 있는 사고는 관청 옆에 붙어 있어 화재의 위험이 있으며 장차 왜적이 침입하면 소실될 수도 있으니선견지명 인적이 드문 궁벽한 곳으로 옮겨야 한다. 가령 전주 사고는 지리산으로, 성주 사고는 금오산으로, 충주 사고는 월악산으로 옮겨 그 고장의 절에 보관하고 땅을 지급해서 인근 백성들로 하여금 지키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조정에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런데 72년 후인 중종 33년(1538) 11월 6일에 성주 사고에 화재가 발생해 태조부터 연산군까지의 실록이 전소되자 나머지 사고에서 인쇄·필사해서 성주로 보냈는데, 사고의 위치는 바뀌지 않았다. 그로부터 54년 후인 1592년, 임진왜란 때 전주 사고본을 제외한 실록이 모두 불타버리고 말았다. 참고로 이 때 경복궁 춘추관에 있던 고려실록 외사고본도 유실되어 고려실록은 영영 사라져 버렸다. 양성지가 우려했던 사태가 모두 현실화된 것이다. 전주 사고본도 선비 둘(안의와 손홍록이라는 전주의 유생이었다)이 사재를 털어 사고의 책들을 전부 내장산으로 옮겨놓고 이듬해 관청에 넘겨줄 때까지 번갈아며 간신히 지켜냈다. 실록의 최대 위기시절

이후 광해군춘추관, 마니산, 오대산, 태백산, 묘향산(5대 사고)에 사고를 마련하고 전쟁 뒤의 어려운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재출판, 합해 모두 5부의 실록이 갖추어졌다. 이 중 춘추관 사고본은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모두 불타버렸고 청나라와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묘향산 사고본은 적상산으로, 마니산 사고본은 정족산으로 옮겨졌다.

일제강점기에 각지의 사고를 철폐하면서(...) 적상산 사고본은 창경원 장서각으로, 정족산본과 태백산본은 총독부로 옮겨졌으며 경성제국대학이 개교하면서 경성제대 도서관으로 다시 이관되어 근대적 장서학에 의한 관리를 받게 되었다. 또한, 실록이 처음 학술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한 것도 경성제국대학에서였다. 오대산 사고본[12]은 일제에 의해 동경제국대학 도서관으로 빼돌려졌다가 관동대지진 때 대출본 47권을 제외하고 소실되었다(...).

적상산본은 한국전쟁 당시 김일성의 명령으로 월북한 사학자 김석형의 건의를 받아들여 서울 점령 이후 평양으로 이송된 뒤 북한 김일성종합대학 도서관에서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한민국보다 먼저 번역된 '리조실록'의 원전이 되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북으로 이송되는 도중 수차례 폭격 맞을 뻔한 기회를 넘기고 천운으로 살아남은 실록본이다. 분명히 피난갈 때 부산행 기차에 실어서 출발한 것을 확인했는데 불구하고 실록이 통째로 사라져버린 한국전쟁 미스터리 중 하나로 꼽혔는데 나중에 확인 결과 인민군에게 기차가 통째로 노획됐다. 반면 남북교류 이전까지 남한측은 공식적으로 '행방 불명'으로 처리했다.

최종적으로 한국에는 2종류의 사고본이, 북한에는 1종류의 사고본이 남아 오늘날에 전해졌다. 정족산본은 서울대학교 규장각, 태백산본은 부산 국가기록원 역사기록관에 보관되어 있다. 남아있던 오대산 사고본은 2006년에야 한국에 반환되었다.[13]

이렇게 보관을 철저하게 했어도 현재 남아 있는 조선왕조실록은 100% 온전하지 못하다. 임진왜란 때 유일하게 남아 있던 전주 사고본의 문종실록 11권이 파본이었기 때문이다. 인쇄 실수로 9권에 11권 표지가 입혀진 것이 그 원인으로 그 이후 판본은 전주사고본을 원본으로 했기에 문종실록 11권은 소실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4. 평가[편집]

권수나 책수로는 동시대 중국의 대명실록이나 청실록에 비해 적지만, 내용의 풍부함과 상세한 묘사 등에서는 세계 최고 수준의 편년체 역사서로 평가받는다. 권수 자체는 적지만 글자 수는 조선왕조실록이 훨씬 더 많다. 대명실록은 2,909권으로 이루어지나 글자 수는 1600만 자 정도로 4,965만 자인 조선왕조실록의 1/3에 불과하다. 한자가 표의문자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글자수 = 내용의 양. 또한 명나라와 청나라가 중국을 통치하던 거대 국가이었다는 것을 미루면 중국에 비하여 강역이 아주 작은 조선이 수십 배 큰 국찬사서와 맞먹는 역사책을 만든 것이 오히려 무서운 일이다.

단순한 국가의 정무뿐만 아니라, 국왕과 신하들의 인물 정보, 외교와 군사 관계, 의례의 진행, 천문 관측 자료, 천재지변 기록, 법령과 전례 자료, 호구와 부세, 요역의 통계자료, 지방정보와 민간 동향, 계문, 차자, 상소와 비답 등, 당시 조선 시대의 거의 모든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외교적 동향을 파악할 수 있는 역사서로 평가받는다. 분류가 역사서고 이름이 조선왕조실록이지, 그 실체는 1400년 이후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의 데이터 베이스.

유네스코에서도 인정했듯이 이렇게 "꼼꼼하고 정확하게" 기록된 역사서는 세계에 흔치 않다. 실제 실록에 있는 기록들로 아래와 같은 것들이 있다.

"비가 내렸다. 진위(振威)[14] 사람 조용(曹龍)과 말 두 필이 벼락에 맞았다."


태종실록 25권, 태종 13년(1413년) 5월 25일 계묘 1번째 기사

"평안도 삼화현(三和縣)[15] 사람 박독동(朴禿同)과 강아지가 벼락을 맞았다."


세종실록 21권, 세종 5년(1423년) 7월 21일 기해 2번째 기사

"천둥과 번개가 치면서 비가 내렸는데, 반석방(盤石坊) 민가의 회화나무가 벼락을 맞았다."


문종실록 6권, 문종 1년(1451년) 3월 2일 신축 1번째 기사


이것만 보아도 조선이 얼마나 체계가 확고하게 잡힌 관료제 사회였는지를 알 수 있다. 동네 개가(...) 벼락 맞았다는 기록마저 있을 정도다.

특히 여진족(혹은 만주족)의 중흥을 연구하는 데 1차 사료로 꼽힌다. 청나라 건국 전에 만주족 스스로 남긴 사료가 거의 없는데, 조선에서는 북방을 항상 관심지역으로 여겨 국가 안보를 위해 여진족의 동태를 열심히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 남의 나라 기록까지 대신해주는 클라스

1997년에는 훈민정음 해례본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당시 문화재청에서는 아래의 4가지를 세계기록유산 등재 이유로 밝혔다.

① 조선왕조실록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그리고 천재지변 등 다방면의 자료를 수록하여 종합사료로서 가치가 높다.
② 일본 ․ 중국 ․ 월남 등 유교문화가 퍼진 곳에는 모두 실록이 있는데 편찬된 실록은 후손 왕이 보지 못한다는 원칙을 지킨 나라는 조선왕조뿐이다.
③ 이 원칙의 고수로 조선왕조실록은 기록에 대한 왜곡이나 고의적인 탈락이 없어 세계 어느 나라 실록보다 내용면에서 충실하다. 권수로 치면 중국 명 실록이 2,900권으로 더 많으나, 실제 지면수로는 조선왕조실록이 이 보다 훨씬 많아 분량면에서 세계 제일이다.
④ 일본 ․ 중국 ․ 월남의 다른 실록들은 모두 당대 만들어진 원본이 소실되었고 근현대에 만들어진 사본들만 남아 있으나 조선왕조실록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왕조 시기의 원본이 그대로 남아 있다.

4.1. 옥에 티[편집]

조선은 철저한 수도집중 중앙집권국가였기에 지방 기록이 적다.[16] 다만 서술목적 자체가 중앙정부의 역사기록물이라 중앙정부 중심이지 지방관련 기록은 지역에서 올라온 주요 공문서를 모은 각사등록이라는 책이 따로있다그리고 이것도 실록 못지않게 양이 많다

'사관은 논한다.(史臣曰)'는 문장으로 시작하면서 사관이 인물이나 사건에 대해 논평해 놓은 부분이 있는데, 사관도 사람이니만큼 가끔 지나치게 주관적이거나 당파에 치우친 생각을 적어 놓았다. 사관의 평을 읽으면 공감이 가거나 통쾌할 때도 있고,[17] 고개가 갸우뚱해질 때도 있다. 실록에 풍부하게 기록된 사실을 읽어보면 사관의 평이 옳은지, 그른지 충분히 판단할 수 있다.

또 후대 왕이 모아서 집필하기 때문에 정치적 상황에 따라서 실록의 내용이 사실관계가 왜곡되거나 빠진 경우도 존재한다, 무인정사 당시 정도전의 최후나 영, 정조때 사도세자 관련 기록, 계유정난 등이 대표적인 예. 비슷하게 같은 실록인데도 후대 사관들이 정리한 내용과 사건 당일의 기록이 모순되는 경우도 종종있는데[18] 대표적으로 연산군 일기에서 무오사화 때 이극돈의 행보를 들 수 있다.[19]

실록의 방대한 분량에 압도되어 '이것만 읽으면 조선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다' 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렇지는 않다.일단 맨정신으로 전부 읽을 수 있는가는 차치하더라도 일단 조선왕조실록은 어디까지나 사초와 승정원일기, 각종 공문서 및 개인사료를 가져다 편집해 만든 요약본이다. 하루 종일 회의가 이어진 경우 발언을 일일이 기록하지 않고 핵심적인 부분이나 결과만 수록했으며, '일일이 기록' 한 걸 보려면사초나 승정원일기 등을 잦아봐야 한다. 다만 요약을 했다고는 해도 마구 한 것은 아니라서 실록 편찬을 맡았던 실록청의 관련 사료들을 보면 어떻게 해야 분량을 적절히 줄이면서도 사실이 왜곡되지 않을지 고민하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정 정치적 견해에 치중되어 있다는 비판이 수용되어 수정실록이 편찬되기도 하였다.

또한 실록은 어디까지나 한양 중앙정부의 시각이 강하게 나타나 있으며 따라서 각 지역사에 대해서는 소홀할 수밖에 없고 중앙정부에 반하는 입장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치우친 견해가 나타날 수밖에 없다. 어떤 지역에서 민란이 일어난 것을 기록할 때 실록이 그 민란을 역적으로 쓰지, 일으킨 쪽 입장을 대변하여 적어주진 않는단 이야기다. 물론 '왜 이것이 일어났는가, 뭐가 문제였는가.' 를 파악하기 위한 노력과 밝혀진 사실들은 적힐 수 있지만 결국 중앙정부의 입장이라는 한계를 지닌다. 정조때의 실록을 읽은 다음에 북학의 같은 책을 한 번 읽어보면 같은 시대를 다룬 기록이라는 걸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다르다.

그리고 실록은 사회에 대한 인류학적 관심을 갖고 적은 사료가 아니다. 한양 정치현장의 기록이 대부분이고 그 사회의 미시적인 역사(예를 들어 속옷의 변천사, 화폐의 유통 범위등)에 대해서는 거의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한 부분까지 알아내려면 가문 기록이나 야사집이나, 야담집을 비롯한 잡기류, 일기등도 뒤져봐야 한다. 물론 이것들은 대부분이 한자라 대중적 접근도가 극히 떨어지거나 민감한 것들이 있기에 아직 연구자들만의 것으로 남아 있다.[20]

또 하나의 한계라면 역시 사람이 쓰다보니 민수의 옥 같은 사건도 있었고[21] 조선 후기로 갈수록 당쟁이 격화됨에 따라서 실록도 당파 입맛에 맞게 내용이 바뀐다. 이른바 '수정실록', '개수실록', '보궐정오'인데 물론 선조수정실록은 사초가 부족해서 그랬다는 실드라도 쳐줄수 있지만 현종개수실록이나 숙종보궐정오, 경종개수실록은 당연히 사초도 많은데 "어 저거 우리당파가 쓴거 아니네? 거짓" 정도의 논리로 씌어진거다.[22] 그리고 헌종실록, 철종실록은 아예 세도정치의 영향인지 사초도 줄어들어 실록 내용이 많지가 않다.다행히 이게 있다.

이순신이 활동시대에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가 먼 후대가 되는 정조 시기에 관련 기록에서 다수 나타나 이것이 후대의 조작이란 평도 있다. 그러나 하필 근거로 든 것인 명사가 이를 기록하지 않았다는 말이나 심지어 관련 문화재가 원본과는 확연히 달라 검증한 전문가가 그냥 단순히 진린이 주었다는 주장으로 인해, 오히려 조정의 일원이나 다름없는 사관들도 이를 의도적으로 기록하지 않았다는 의심을 한다. 세종시기 명이 기록하지 않은 명 황실이 시행한 고문 방법이 상세하게 기록된 처지라는 것을 염두한다면, 조선왕조실록도 소위 전쟁을 대비한다는 징비록처럼 그 소유 집단을 변명하기 위한 치부책에 불과한 것도 인지하고 봐야 한다.

5. 기타[편집]

실록은 한번 쓰여지면 왕조차도 볼 수 없었다. 이는 조선왕조실록이 왕권을 견제하기 위해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사관은 임금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여 사소한 것이라도 기록했고 왕은 그것을 확인조차 할 수 없었다. 실록은 한번 작성되면 두 번 다시 볼 수 없었고 세초는 깨끗이 씻어 없앴다.

6. 사관들의 집념[편집]

親御弓矢, 馳馬射獐, 因馬仆而墜, 不傷。 顧左右曰: "勿令史官知之"
친히 활과 화살을 가지고 말을 달려 노루를 쏘다가 말이 거꾸러짐으로 인하여 말에서 떨어졌으나 다치지는 않았다.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사관(史官)이 알게 하지 말라." 하였다.


태종실록 7권, 태종 4년(1404년) 2월 8일 기묘 4번째 기사 결국 사관한테 딱 걸려서 기록에 남았고 몇백 년 뒤 현대인들도 알게 되었다

이렇게 기록이 많이 남을 수 있었던 건 조선 사관들이 그만큼 근성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사관들은 자세한 기록을 위해 왕을 집요하게 따라다녔다. 한 예로 사냥을 나간 태종이 말에서 떨어지자 부끄러웠는지 '사관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말한 일이 있었는데 이 내용이 그대로 태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즉 왕이 알리기 싫어한 일조차 기어코 사관들이 알아내어 기록에 남겼고, 후대에도 그걸 없애지 않고 편찬까지 했다는 얘기.

특히 태종 때 민인생이란 사관은 경연 때 왕이 말하는 걸 들으려고 병풍 뒤에서 숨어 있던 경우도 있었고, 평범한 연회 때도 기록하려고 초대도 안 받고 불쑥 나타나지 않나. 태종 때 이름모를 사관은 왕과 중전 등이 거주하는 내전에 들어가려고 했었다고. 이 정도면 거의 스토커나 파파라치 저리가라 수준.

다음은 위에 언급된 태종 대의 사관 민인생이 남긴 '근성'의 흔적이다.


이러하듯 사관들의 기록정신에 성역은 없었다. 왕이 쪽팔린 일을 하고 '적지 마라'라고 한 것도 적고, 왕이 욕설을 쏟아내도 정직하게 적었으며 정치가 개판이었던 문정왕후 집권기에는 대놓고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수준의 문장을 실어놓기도 했고, 도둑이 생기는 원인을 살피지는 않고 때려잡자고만 주장하는 명종의 주장이 옳지 못하다고 왕의 주장을 반박하는 내용을 쓰기도 했다. 심지어 사관들은 자신들에게 불리한 내용까지도 적어야 했다. '사관들이 요즘 자꾸 조는데 한번 조져야겠다'라거나, '사관들 근태 관리가 안된다. 혼쭐을 내야 겠다'라는 대신들의 논의들까지도 울면서 모두 꼼꼼하게 적었다.[23]

이 때문에 왕은 사관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고 심지어 왕이 벌을 내리는 사례도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무오사화. 김일손이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실어서 터진 것으로 알고 있으나 그것 외에도 세조의 정당성 자체를 부정하는 기사들을 많이 실었었다. 결과는 피바다... 그리고 영조 1년 이천해의 공초에선 영조가 사관들에게 '죄인의 흉악한 말을 쓰지 마라'고 하자 사관이 '흉참하기 때문에 차마 쓸 수 없었습니다'라고 맞장구치며 설설긴 모습도 있다. 물론 이 얘기가 지금 여기 써 있다는 건, 앞에서는 그렇게 말해놓고 어느 책인가에는 적혀 내려갔단 뜻이다. 아닌 게 아니라, 30년 후 신치운이 경종 독살설과 게장을 언급하며 영조가 이성을 잃은 틈을 타, 당시 사관이 "지금 신치운의 게장 드립이 지난 이천해의 그 말과 같다"고 재치있게 기록했다.[24]

물론 사관들도 사람인만큼, 편찬자나 사관의 당색에 따라서 평가가 왔다갔다하는 것은 감안해야 한다. 시대를 막론하고 늘 일부 편파적인 평가나 곡필의 의심이 가는 부분들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 하지만 실록은 그런 편파서술이나 곡필을 압도적인 양의 팩트 서술로 극복해버리곤 한다. 즉, 일부 곡필된 부분이 있어도 면밀하게 기록된 전후사실들을 눈 똑바로 뜨고 분석만 잘 하면 진상이 떠오를 만큼 기록이 풍부하다!

7. 이모저모[편집]

  • 국사 교육과정에서 조선분량 ≥ 그 이전의 모든 분량 현상이 나타나게 된 주요 원인. 조선시대 이전 역사가 쓰여진 삼국유사, 삼국사기,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 조선 이전의 역사를 담은 모든 서적을 합쳐도 실록 하나보다 양이 적다. 그만큼 실록의 분량이 초월적으로 방대하고 자세하며, 조선시대 이전의 사서는 상대적으로 빈약하다. 이렇게 될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조선과 같이 역사서 집필을 체계적으로 관리하지 않은것도 원인이지만, 가장 큰 원인은 반란이나 전쟁등의 이유로 보관되어있던 전대의 역사서가 소실되어 버렸단 것이다. 한국사에서 사서의 대규모 소실이 있던 대전쟁만 해도 최근 1천년간 3개나 있다. 여몽전쟁, 임진왜란, 한국전쟁. 조선왕조실록 또한 한 부만 찍어서 보관했었다면 대부분의 실록이 소실되었을 가능성이 크며, 여러 부를 뽑아서 보관했음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과 한국전쟁 당시 소실을 겨우 넘기고 단 1부만이 남아 있을 정도.

  • 몇몇 경우에는 중국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은 사건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기도. 명나라 궁중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났을 때, 명사에는 치부를 감추기 위해 기록을 없앴지만 조선왕조실록에는 그 당시 고문을 당했던 조선 출신 궁녀의 증언으로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그도 그럴 게,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도 피해자도 둘 다 조선 출신 공녀였다. 중국인 여씨가 조선에서 온 여씨에게 성도 같으니 친하게 지내자고 했다가 거절당하자 앙심을 품고 영락제의 총애를 받다가 마침 급사한 조선 공녀 출신 권씨를 여씨가 독살했다고 무고한 것. 여기서 조선 출신 후궁들 여럿 죽었다. 겨우 살아남은 몇몇은 조선으로 도로 방출당했는데, 그들의 증언이 조선왕조실록에 남은 덕분에 명나라 궁중의 잔인한 고문법을 현대에도 알 수 있게 되었다.(…)

  • 위에도 잠깐 언급 되었지만 원칙적으로 왕은 절대 볼수 없었다. 그러나 책덕후 겸 지식덕후였던 세종대왕은 그 내용이 너무나 궁금했던 나머지 몇번이나 보려고 시도했지만 "태조실록"을 제외하곤 보지 못했다.

    • 태조실록이 편찬된 후, 세종은 "지금 태조실록은 1책(冊)뿐이잖아? 나중에 잃어버리면 큰일인데. 그러니 복사본을 만들어서 한 책은 춘추관, 한 책은 내가 볼수있게 해놓자. 이건 다 나라를 위한거야."라고 하는데 세종의 속셈을 알아챈 변계량이 "그건 아니되옵니다!!!"라며 결사 반대했고 결국 세종이 포기했다.(1425년 12월 5일)

  • 세종실록 80권 세종 20년 기사를 보면 세종이 "이미 《태조실록》을 보았으니 《태종실록》도 또한 보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겨지니 여러 겸춘추(兼春秋)에게 상의하라"라고 말한다. 그러자 황희신개등이 "역사서를 임금이 함부로 본다면 그 내용도 임금의 입맛에 맞을 것인데, 그렇다면 먼 후손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습니까!"라며 적극적으로 반발했다.(1438년 3월 2일)

  • 혜성의 출몰, 일식, 월식, 신성 출몰 등 각종 천문현상들도 다수 기록되어 있는데 그 중 SN 1604의 관측 기록은 이 초신성을 연구하는 데 상당히 중요한 자료로 꼽힌다. 선조실록에 기록된 SN 1604 관측 기록은 케플러를 비롯한 유럽의 천문학자들이 남긴 기록보다도 상세하며 특히 밝기 변화가 초신성 폭발 직후부터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서 이 초신성이 Ia형 초신성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8. 현대화 노력[편집]

8.1. 영인[편집]

영인(影印)이란 도서, 그림 등의 원본을 사진으로 찍어 기록하는 것을 말한다. 요새 감각으로 말하면 스캔본. 일제강점기에 경성제국대학에서 태백산본을 사진판으로 영인한 적이 있었고, 해방 이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다시 1955년부터 4년 간에 걸쳐 태백산본을 영인해 A4 크기의 양장본 48책으로 간행하였다. 현재는 영인이 아닌 책을 그대로 복제하는 복본 제작과정이 진행중이다. 가쿠슈인에서도 영인한 적이 있다고 한다. 1955년까진 이조실록이라고 불렀으나 이조가 멸칭이란 주장이 대두되어 1955년 10월 12일 조선왕조실록으로 공식적으로 개칭했다. 북한은 아직까지도 리조실록이라 부른다.

8.2. 번역과 전산화[편집]

기록은 모두 한문으로 되어 있어서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웠으나, 북한에서는 김일성6.25 도중에 서울에서 입수한 판본을 바탕으로 1980년 모두 400권으로 번역이 되어 '리조실록'이란 이름으로 출판되었다. 남한에서 고유명사와 용어를 살린 것과 달리 북한은 대중서를 지향하여 공식용어나 표현을 모조리 현대어로 고쳐서 내놓았다. (가령 '주상이 종친을 거느리고'라는 표현은 '임금이 가족들 데리고'로 고쳐졌다.) 남한에서는 세종대왕기념사업회와 민족문화추진회(현 한국고전번역원)가 주관하여 번역 작업에 들어가 1993년 말에야 번역이 완료되어 출판되었다.

1994년 4월 문화체육부, 교육부, 세종대왕기념사업회, 민족문화추진회, 서울시스템(주)의 합의로 '조선왕조실록 CD롬 간행위원회'가 발족되어 전산화 작업에 들어갔다. 그 결과 1995년 CD롬 초판이 간행되었고 이후 1997년에 1차 개정판, 1999년에 2차 개정판이자 보급판이 출시되었다. 뒤에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을 별도로 CD롬으로 제작했으며 원문 전산화도 뒤이어 이루어졌다.

현재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를 만들어 자유롭게 무료로 국역본과 원본을 열람할 수 있어서 역덕후들은 올레!

조선왕조실록 전산화는 전세계 지식인들은 물론 한국의 많은 작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전산화 과정에서 수많은 오류가 수정되고 새로운 점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한 권으로 보는 조선왕조실록 같은 책도 이 전산화가 없었으면 불가능했다. 현재도 꾸준히 증역, 오역 수정 등으로 보완 중에 있다. 또한 압도적인 분량을 자랑하다보니 승정원 일기, 일성록 등과 더불어 실록이 수많은 한문 학자들을 먹여살린다는 말도 있다. 워낙 방대한 양이라 번역/수정 작업이 끝도 없이 계속 필요하기 때문.

8.3. 번역의 문제점[편집]

문장 단위로도 번역이 그다지 매끄럽지 않은 부분이 많은데, 예를 들어 「朴君孝弑父之惡, 專由敎化不明之致也」 이 문장을 한자어 없이 풀어서 쓰면 '박군효가 아비를 죽이는 나쁜 일을 저지른 것은 백성을 일깨워주는 가르침을 베풀 때 부족한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도가 된다.[25] 현재 실록에서의 번역은 '박군효가 아비를 죽인 그 간악한 일은 오로지 교화가 밝지 못한 소치이다'라고 되어 있는데,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21세기의 일반인이 쉽게 읽을 수 있는 문장은 아니다. 이 나라 국어 평균은 5등급이라는 걸 생각해보라 [26] 致의 번역어로 '소치'처럼 일상생활에서 자주 쓰이지 않는 단어를 선정할 필요가 없었다. 또한 不明을 직역하여 '밝지 못하다'라고 번역했는데, 현재 우리말 '밝다'의 쓰임 중 부합하는 의미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자주 쓰이는 용례는 아니다. 사극 등에서 시대감을 살리기 위해 일부러 사어나 난해한 말을 쓰기도 하지만 그것도 시청자가 아직 한학 지식이 좀 있던 옛날 사극 얘기다.

일반 명사와 고유 명사를 혼동하여, 고유 명사로 된 것을 일반 명사로 풀어서 번역하거나 고유 명사가 아닌데도 이름이겠거니 하는 경우도 종종 눈에 띈다. 예를 들면 흥인지문(興仁之門)은 동대문을 가리키는 말인데 이걸 한자 하나하나 다 풀어서 '인(仁)을 일으키는 문' 이라고 하거나, 임진왜란 당시에 天將이라고 하면 명나라의 지휘관을 가리키는 말인데 이걸 '하늘의 장수' 로 번역하는 식. 직역이나 비표준어같은 건 시간과 예산의 문제로 인해 번역을 빨리 완성할 필요가 있었다는 이유라도 댈 수 있지만, 이런 건 그냥 오역이다.

8.4. 실록 전산화의 영향[편집]

8.4.1. 사극[편집]

수많은 사극이 실록의 전산화 덕을 많이 봤다. 그리고 한국 사극작가들의 애증이 교차하는 공포의 책.

쉽게 검색을 할 수 있으니까 새로운 인물들을 찾아내서 대입한다든가, 새로운 해석이 많아졌다. 진짜 검색만 해보면 다 나오는 수준이다.

조선시대 사극이 이전에는 연산군, 단종, 희빈 장씨 같은 몇몇 소재만 수십번은 우려먹었지만, 지금은 온갖 퓨전 사극이 나올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뭐 꼭 이런 자료가 있어야 퓨전 사극이 나오는건 아니겠지만.

다만 이렇게 풍부한 데이터베이스를 제공하는 덕에 아이러니하게도 사극작가들을 공포에 떨게하는 책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실록의 데이터가 워낙 방대하고 상세하여서 약간의 고증오류만 내더라도 전국의 역덕들이 물어뜯기 때문. 실록이 존재하는 한 고증오류는 사극작가들이 피해가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지뢰밭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딴에는 열심히 조사하고 '이쯤이면 완벽하겠지' 싶다가도 역덕들은 실록을 통해 귀신같이 오류를 찾아낸다.

8.4.2. 교양서[편집]

검색만 하면 교양서 하나가 나온다.

서점가에는 조선시대 교양서가 범람하게 되었다.

대충 주제 하나를 잡고,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해서 기사를 좀 복붙한 다음, 적당히 자신의 을 덧붙이면 그럴듯한 역사교양서가 하나 나온다.

책 쓰기 참 쉬워졌다. 실록이 공개된 후로 조선왕조를 다룬 책들은 거의 다 이런 상황이다. 덕분에, 실록만 대충 훑어보고 사료를 자기 주장에 들어맞는 것만 쥐어뜯어서 쓴 불쏘시개 수준의 역사교양서도 넘쳐나는게 문제.
대표적인 예가 원균명장설. 실록에서 선조가 원균에 대해 찬양한 발언만 적당히 짜맞추고, 다른 기록과 신하들의 의견과의 교차 대조는 전혀 하지 않은 상태에서 조합한 것이다. 게다가 임진왜란은 실록 이외에 신뢰할 만한 사적 기록도 상당히 많은데, 원균명장설에서는 오직 '원균행장'만을 취사선택한다.

8.4.3. 그 외[편집]

  • 자기 조상님의 업적을 찾아보려고 검색했더니 탐관오리였다는 충격적인 결과를 발견하기도 한다.[27]

  • 사관들이 보고 들은 모든 것을 적은 문서이긴 하나 일단은 공문서다보니 왕이나 주변인물들이 하던 욕설은 '흉참한 말', '입에 담을 수 없는 말', '차마 듣지 못할 하교' 같은 식으로 돌려서 말하는데, 자기 손자들에게 한 패드립에 대한 기록이 인조실록에 있다. 실록에서 찾아볼 수 있는 왕의 몇 안 되는 욕설 기록이다. 실록 외의 기록에는 정조의 비밀 편지 등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개새끼같은 것을 억지로 임금의 자식이라고 칭하니, 이것이 모욕이 아니고 무엇인가?
    狗雛强稱以君上之子, 此非侮辱而何?
    ㅡ 《조선왕조실록》인조 24년, 2월 9일 1번째 기사 자세한 내용은 민회빈 강씨 문서와 개새끼 문서 참조.

  • 그 이전 태종실록에는 태종의 욕설이 기록되어 있는데, 요언을 퍼뜨린 문가학(文可學)이라는 자를 잡아 가두면서 미친놈(狂者)이라는 욕설을 하는 기록이 있다. 다만 이건 전후 내용을 좀 살펴봐야 하는데 문가학이라는 인간이 주술을 벌이면서 역모를 준비했는데 이걸 역모죄로 다스리자는 신하들에게 단순히 문가학이라는 사람은 미쳐서 저런거니 역모로 처벌해서는 안되고, 같이 잡힌 문가학의 일당도 재조사해서 풀어줘야한다는 이야기였다.

    내 그 가학이라는 놈을 미친놈이라 여긴다. 천병과 신병을 제가 부를 수 있다니, 이는 미친놈의 말이 아니겠는가!
    予謂可學爲顚狂者。 天兵神兵, 吾能召致, 此非狂者之言乎!
    ㅡ 태종실록, 태종 6년 11월 15일

  • 외모평가를 거의 하지 않거나 해도 아주 박하게 평가를 한다. 만약 실록에서 외모평가가 나왔다면 아주 아름답거나 아주 특이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특히 양녕세자의 애첩이던 어리희빈 장씨처럼 실록에서 대놓고 미인이라고 기록된 경우는 한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아주 드문 편.

  • 지구과학 모의고사에는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천문현상을 이용한 문제가 출제되기도 한다.

9. 목록과 분량[편집]

실록의 분량을 말할 때 쓰는 '권' 과 '책' 에서 '권'은 '내용상 구분하여 나눈 단위' 이고 '책'은 '물리적으로 종이를 묶은 단위' 를 뜻한다. 즉 오늘날 흔히 말하는 '장(챕터)' 이 당시의 '권' 이고, '권' 이 당시의 '책' 이다. 예를 들어 태조실록이 15권 3책이라고 하면, 15개의 장이 3권의 책에 나뉘어 수록되었다는 의미다.

  • 태조실록(15권 3책)

  • 정종실록(6권 1책) : 숙종 때에 묘호를 받았기 때문에 실록 속 표제는 전부 '공정왕실록'이라고 적혀 있다.

  • 태종실록(36권 16책)

  • 세종실록(163권 67책) : 조선왕조실록 중에서 유일하게 세종실록오례, 세종실록지리지, 세종실록악보, 칠정산 내외편이 별도로 포함되어 있어 편년체 사서와 기전체 사서가 혼합된 듯한 형식을 보여준다.

  • 문종실록(13권 6책) : 문종 1년 12월에서 2년 1월까지 다룬 11권이 표지만 11권이고 내용은 9권이기 때문에 전체 실록 중 유일하게 공백이 있는 실록이다. 원인은 인쇄 중 실수로 표지와 내용이 바뀐 책이 전주사고에 봉인된 바람에 생긴 일이다. 반대로 말하면 임진왜란 때 소실된 다른 사고에 아마 표지만 9권이고 내용이 11권인 문종실록이 있었다는 것이다. 선조 33년 예문관 대교 권태일이 묘향산에 있던 실록을 열람하다가 문종실록의 표지가 11권인데 정작 내용은 9권의 내용이 거듭 실린 것을 확인했다. 이때 권태일은 분명 처음에 인쇄하여 나누어 저장할 때 권질이 잘못되어 서로 바뀌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는데 훗날 영조 9년 누락이 재확인되어 오대산에 있는 실록을 전서하자는 주장이 있었다. 하지만 오대산에 있던 실록도 결국 전주에 있던 실록을 복사한거라 의미가 없었고 결국 문종실록 11권은 영원히 찾을 수 없게 되었다.

  • 단종실록(14권 6책) : 숙종 때에야 묘호를 받았기 때문에 실록 속 표제에는 전부 '노산군일기'라고 적혀 있다.[28]

  • 세조실록(49권 18책) : 세조실록악보 등이 부록으로 추가되어 있다.

  • 예종실록(8권 3책)

  • 성종실록(297권 47책) : 권수가 가장 많은 실록. 원래 실록의 권 편성은 보통 1년치를 한 권으로 편성하고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반년치나 2개월치를 한 권으로 편성했지만 성종실록은 기사의 많고 적음을 불문하고 그냥 1개월치를 한 권으로 편성해 버려서 이렇게 되었다.

  • 연산군일기(63권 17책)

  • 중종실록(105권 53책)

  • 인종실록(2권 2책)[29]

  • 명종실록(34권 21책)

  • 선조실록(221권 116책) : 임진왜란으로 인해 관련 자료들이 대거 소실되면서 임진왜란 이전은 극히 소략하다. 반면 임진왜란부터 선조 말까지는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대거 들어가 분량이 비대해졌다. 선조 24년(1591년)까지가 25권 뿐인데 비해 선조 25년부터 41년까지는 196권이다. 그나마 선조 25년이 1월부터 3월까지가 빠졌음에도...

    • 선조수정실록(42권 8책) :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서인이 편집 주체가 되어 북인이 편집한 선조실록의 내용을 수정한 것. 효종 대에 완성되었다. 이이, 성혼 같은 서인 인사들에 대한 왜곡된 기록을 바로잡는걸 목적으로 수정된 것이다. 서인만 좋게 쓰면 눈치 보여서인지 유성룡 등 대북파에 의해 폄하된 남인도 좋게 써준 기술이 많다. 하지만 생각보다 고쳐진 부분은 많지 않다. 원균명장론이나 십만양병설 같은 주장들과 관련이 있어서 관련 논쟁에서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실록.

  • 광해군일기(중초본)(187권 64책)

    • 광해군일기(정초본)(187권 40책)

  • 인조실록(50권 50책)

  • 효종실록(21권 22책)

  • 현종실록(22권 23책)

    • 현종개수실록(28권 29책) : 남인이 편집 주체가 된 현종실록의 내용을 경신환국 이후 서인이 집권한 후 개수한 것. 고쳐진 실록 중 가장 많은 범위가 고쳐졌다. 고쳤다기보다는 아예 실록을 새로 하나 더 만들었다고 봐도 되며 기존의 현종실록보다 분량도 더 많다. 그 유명한 예송논쟁.

  • 숙종실록(65권 73책)

    • 숙종실록보궐정오 : 노론이 편집한 숙종실록을 소론이 집권하자 고친 실록. 그런데 가장 고쳐진 부분이 적다. '보궐정오'는 고쳐진 부분을 기존의 숙종실록 권말에 '어느어느 부분을 어떻게 고쳤다'는 식으로 수정부분을 부록 형식으로 끼워 넣은 것.

  • 경종실록(15권 7책)

    • 경종수정실록(5권 3책) : 소론 집권기에 편찬한 경종실록을 노론이 집권하자 내용을 일부 수정한 것. 노론에 대한 불리한 기록이 삭제, 수정되고 상대적으로 소론에게 불리한 기록이 실려 있다.

  • 영조실록(127권 83책) : 처음 받은 묘호가 '영종'이었기에 표지에는 '영종대왕실록'이라 적혀 있다.

  • 정조실록(54권 56책) : 처음 받은 묘호가 '정종'이었기에 표지에는 '정종대왕실록'이라 적혀 있다.

  • 순조실록(34권 36책)

  • 헌종실록(16권 9책)

  • 철종실록(15권 9책) : 순조 ~ 철종대의 실록들은 세도 가문에 불리한 기록이 대부분 삭제되는 등 이전 시기의 실록에 비해 분량이 적고 서술 자체가 빈약하다.

  • 총합 1894권 888책

9.1. 고종실록, 순종실록[편집]


일제강점기에는 실록이 쓰이지 않다가 순종이 죽은 뒤 이왕직(李王職)이라는 기구에서 1927년 4월 1일부터 1935년 3월 31일까지 고종과 순종의 기록을 실록이란 이름을 붙여서 써낸다.

비록 실록이라는 이름은 붙었고, 국가 공인의 최종 편집본이라 조약, 대외공문서등에 대한 기록은 잘 정리되어 있지만, 제대로 실록청을 열어서 쓴 실록이 아니고, 또 일제강점기에 쓰여져 상당 부분이 일제의 의도에 따라 왜곡되어 실록 목록, 유네스코 목록 모두 빠져 있다. 예를 들어 고종실록의 을미사변 내용을 보면 일본인이 명성황후를 살해했다는 구절은 단 한 문장도 없고, 한일 협상 조약(을사조약) 당시 일본의 불법행위는 하나도 수록되어 있지 않고 이토 히로부미 암살을 안타깝다고 하는 등. 때문에 일반적으로 고종 순종시대의 사료는 승정원 일기 같이 매달 써내던 공문서나 개인의 기록들을 중심으로 한다. 물론 고종실록, 순종실록 모두 《승정원일기》와 《일성록》 등의 주요 관찬사료를 채택하여 쓰여졌고 주요 조서‧칙령‧법률‧조약문 등을 망라하고 있으므로 역사적 사실을 아예 무시한 것은 아니지만 일제의 정략적 의도가 많이 들어가 있기에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은 비판적으로 분석해야 하고 때문에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이시기의 정부기록은 일본의 편집이 거의 없는 승정원 일기[30]를 주로 사용한다.

일제의 왜곡이 많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두 실록을 재편찬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봇물처럼 쏟아지다가 2017년까지 신편 고종시대사를 편찬하기로 했다. 고종시대사는 1960년대에 편찬되었으나, 여러 문제점으로 2017년까지 15억을 들여 여러 사료들과 전거를 들어 새로 편찬하기로 한 것이다. 이것을 바탕으로 향후 고종실록, 순종실록이 재편찬될 가능성이 높다.

참고로 조선왕조실록 사이트에서는 일단은 실록으로 취급하기 때문에 고종실록, 순종실록, 순종실록부록 모두 번역하여 제공하고 있다.

10. 관련 역사서[편집]

조선왕조실록은 당대에 편찬된 여러 사료들, 심지어 개인이 남긴 일기까지 참조하여 만들었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하면 2차 사료인 셈. 하지만 다행히 실록을 만들 때 참조했던 여러 사료들이 남아있다. 어떤 면에서 실록보다 더 자세한 경우가 많고, 전공자들은 실록과 함께 아래의 책들을 참조한다.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은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정도이지만 이 밖의 다른 자료들도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조선은 기록의 나라다.

11. 관련 항목[편집]

12. 관련 영상[편집]


[1] 조선왕조실록 정족산사고본, 조선왕조실록 태백산사고본, 조선왕조실록 오대산사고본, 조선왕조실록 기타산엽본.[2] 정족산사고본[3] 태백산사고본[4] 오대산사고본. 27책은 1973년에 국보 지정, 47책은 2007년에 국보 지정.[5] 기타산엽본[6] 고종실록과 순종실록도 원래 조선왕조실록의 일부지만 일제의 왜곡 문제로 유네스코 기록유산에는 빠져 있다.[7] 정족산사고본, 태백산사고본, 오대산사고본과 함께 국보명으론 기타산엽본이 유네스코 측에는 상편 21책으로 되어 있다.[8]승정원일기》, 《의정부등록》, 《조보(朝報)》, 《비변사등록》, 《일성록》등이 이에 해당하며, 승정원일기와 일성록은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있다.[9] 태조, 정종처럼 퇴위만 하면 해당 인물이 죽기 전까지는 실록이 쓰이지 않는다.[10] 무오사화가 일어날 당시 사초에 기록된 기사의 문제도 있었다. 무오사화, 김일손 문서 참조. 그리고 그 연산군도 아무렇게나 본 것도 아니었고 대신들이 문제가 된 부분만 추려서 왕에게 보여 주는 방식으로 열람했다.[11] 충주, 성주, 전주가 위치한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세 도를 의미한다. 아래 하(下)자가 붙은 이유는 남부지방이기 때문.[12] 참고로 오대산본은 다른 사고본과 달리 편찬, 교정하는 과정에서 어느 부분이 수정되고 고쳐졌는지가 명시되어 있었다고 한다. 때문에 실록 편찬시 오대산본을 모본으로 하여 다른 사고본을 편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13] 단 반환 방식이 도쿄대학 도서관에서 영구 대출하는 방식이어서 논란이 좀 있다. 말하자면 소장 기관은 여전히 도쿄대학 도서관인 셈.[14] 현재의 경기도 평택시.[15]북한 남포특별시.[16] 예를 들면 옆나라 일본의 경우 각 지역의 각 가문에서 쓴 기록이 많이 남아있고 주된 기록이라서, 일부 관찬 정사와 국가공문서들이 남아 이것들만 파도 큰 틀은 잡을 수 있는 한국과는 연구 방식도 다르다.[17] 가령 임꺽정 사건을 두고 사관이 아주 날카롭게 원인을 진단한 부분을 읽는다면 그럴만하다. 사관은 "대신이란 놈들이 뇌물이나 먹어대니 관리들이 백성들을 쥐어짜고 이러니 임꺽정같은 놈이 나오겠냐 안나오겠냐?" 라고 디스했기 때문 그리고 그게 사실이었다.[18] 정도전의 최후 부분에서는 앞에서는 비굴하게 죽었다고 나오면서도 뒤에는 죽기 전 아들 정담과 나눈 대화와 죽기 전 읊었다는 시의 내용을 보면 이게 같은 사람이 한것인지 의문이 들 정도[19] 연산군 문서에도 있지만, 연산군 일기의 경우가 이런 문제가 좀 많은 편이다.[20] 그나마 아주 가끔씩 나와주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인조실록에는 담배에 대한 기록이 있다.[21] 민수란 사관이 대신들의 잘못을 많이 써놓았는데 이로 인해 대신들의 미움을 살까봐 사초를 보관한 자기 친구에게 부탁해서 기록을 고쳤다가 들킨 사건이다.[22] 그래도 나름 장점이 있다면 원 실록과 수정실록 두 개를 교차검증할 수 있다는 점이다. 또한 당시 당파가 관련 사건에서 어떤 입장이었는지 알 수 있다. 당대의 헛짓거리가 후대에는 더 도움이 될 수 있다는게 아이러니하다.[23] 그러나 이런 기록정신이 조선 후기에 들어서 약화되는 경향이 나타난다. 왕이 '적지 말라'라고 한 것도 적는 중뿔난 사관은 태종 때의 일이고, 영정조 때의 사관들은 적지 말라고 말하는 건 적지 않았다. 가장 심해지는건 세도정치기로 일성록, 승정원일기와 실록이 다를 지경이다.[24] 사족으로 이덕일은 역사학자면서 실록도 제대로 읽지 않은 티가 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이 이천해 관련 부분이다. 책 <조선왕 독살사건> 서문에서 경종에 대한 충성심 가득한 이천해의 목숨을 건 흉역 운운하며 그 말이 도대체 뭔지는 모르겠다는 식으로 얼버무리는데, 좀만 찾아도 이천해가 영조를 상대로 무슨 말을 했는지 잘만 나와있다.[25] 물론 이렇게까지 풀어서 쓸 바에야 한자어를 좀 섞는 게 낫지만, 이 단락이 작성된 의도에 따라 최대한 풀어서 번역하였다[26] 농담처럼 써놓았지만, 정말 국민 대다수에게 진입장벽이 느껴지지 않으려면 아무리 못해도 5등급 컷인 상위 60% 학생이 읽었을 때 전혀 문제가 없어야 한다. 그렇다면 번역을 할 때 그 정도 점수대의 학생은 고전문학-어법-한자어를 모두 공부하지 않았을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는 말이다.[27] 조선 후기에서는 족보 위조나 족보 매매가 정말 흔했다. 즉 자신의 조상이 실제 자신의 조상이 아닐 수도 있는 것이기에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사실 이제 와서는 족보의 유무같은 걸 따지기도 어렵고 또 그럴 필요도 없지만. [28] 그리고 수양대군을 전부 '세조'라고 기록하고 있다. 단종이 죽은 뒤가 아닌 세조가 죽은 뒤에 편찬된 것이다. 또한 다른 실록과 일기에 다 실려있는 편찬에 관여한 사람들의 이름이 노산군일기에는 전혀 없다.[29] 인종이 죽은 뒤에 편찬되지 않고, 명종이 죽은 뒤에 명종실록을 편찬하면서 같이 편찬했다. 따라서 인종실록과 명종실록은 편찬에 관여한 사람이 같다.[30] 1달에 한번씩 모아서 편집한 책이라 후대의 가필이 들어갈 여지가 적어서, 당파적 논쟁이 심한 역사적 사실을 연구할 때 중립적인 사료로 평가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