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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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조 · 익조 · 도조 · 환조 · 덕종 · 원종 · 진종 · 장조 · 문조

고조선부여고구려백제가야신라발해
후삼국고려대한제국대한민국 임시정부대한민국

조선 제3대 국왕
太宗
태종

파일:external/librewiki.net/%ED%83%9C%EC%A2%85%EC%96%B4%EC%A7%84.jpg
태종 상상화[1]

묘호

태종(太宗)

시호

조선

성덕신공건천체극대정계우문무예철성렬광효대왕
(聖德神功建天體極大正啓佑文武睿哲成烈光孝大王)

공정(恭定)

방원(芳遠)

유덕(遺德)

출생

1367년 6월 13일
고려 동계 함흥부 귀주(歸州) 이성계 사저

사망

1422년 6월 11일
(54년 11개월 18일, 20,087일)
조선 한성부 연화방 수강궁 별전

능묘

헌릉(獻陵)

재위

왕세자

1398년 9월 ~ 1400년 11월 28일

1400년 11월 28일 ~ 1418년 9월 9일
(17년 9개월 11일, 6494일.)

태상왕[2]

1418년 9월 9일 ~ 1422년 6월 11일
(3년 9개월 2일, 1371일.)

본관

전주(全州)

부모

부왕 태조, 모후 신의왕후 한씨

왕비

원경왕후 민씨

1. 개요2. 안변댁네의 영특한 다섯째 아들3. 격변의 난세 속에서 피로써 일족을 지켜내다
3.1. 계모와 이복동생들의 목숨을 구하다 3.2. 위기에 빠진 아버지의 목숨을 구하다3.3. 정몽주를 죽이고 형제들과 숙부들을 구하다
4. 아비의 눈 밖에 난 왕자5. 피도 눈물도 없이, 용상을 향하여6. 용상에 올라 왕조의 기틀을 다지다
6.1. 사병 혁파6.2. 관제 정비6.3. 경제 정책6.4. 계모와의 악연, 그리고 의 척살6.5. 공신 숙청6.6. 지방 행정 조직 정비6.7. 명과의 우호 관계
7. 인물됨과 일화
7.1. 심술쟁이 군주7.2. 사냥 애호가7.3. 여성 편력7.4. 아들바보7.5. 부엉이 트라우마7.6. 관대한 면모
8. 호랑이 등에서 내리다9. 기타10. 세조와의 비교11. 태종우12. 사극에서13.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조선왕조 500년의 반석을 다진 철혈명군.

조선의 제 3대 국왕. 묘호는 태종(太宗)이며, 시호는 공정성덕신공건천체극대정계우문무예철성렬광효대왕(恭定聖德神功建天體極大正啓佑文武睿哲成烈光孝大王). 휘는 방원(芳遠), 자는 유덕(遺德)으로 '덕을 남기다'라는 뜻으로 본인은 덕과는 거리가 있는 삶을 살았으나 후계자(세종)를 잘 두었다는 측면에서 생각한다면 적절한 자라고 볼 수도 있다.

자신의 강력한 결단력으로 조선 정치의 질서를 잡았으며 뒤를 이을 세종이 선정을 펼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줬다는 평가를 듣는다. 태조 이성계의 5남이자 세종대왕의 아버지. 조선 건국에 큰 공을 세웠으나 세자로 책봉되지 못하였다. 그러자 직접 난을 일으켜 세자와 정적을 죽인 후 형 방과를 왕으로 옹립, 권력을 잡았고 이후에는 (사실상 외부의 강압에 의한) 양위를 받아 조선의 3대 임금으로 즉위한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Sign_of_Taejong_of_Joseon.jpg

태종의 서명.[3]

왕이 되면 피휘 때문에 보통은 이름을 바꾸는데 태종은 승하할 때까지 개명 없이 흔히 쓰이는 꽃다울 방과 멀 원자를 이름으로 계속해서 썼다.[4] 사실 피휘에 대한 규칙을 담고 있는 예기 단궁 하(檀弓 下)편에는 공자의 어머니인 징재의 예를 들면서, 피휘할 이름이 두 글자로 이루어진 경우에는 그 중 한 글자만 쓰는 것은 허용된다고 했다. 그래도 아버지 이성계는 왕이 되고 '이단'으로 이름을 바꾸고, 형인 정종 이방과는 '이경'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니 이방원이 특이한 케이스인 것은 사실이다.[5] 어쨌든 본명인 이방원으로도 유명하다. 한국사의 많은 임금들 중 매우 친숙한 임금들 중 하나.[6]

왕자였을 때 받은 작위는 정안군, 정안공(靖安公)이다. 정안대군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나, 조선왕조실록 원문에는 정안군 또는 정안공이라고 적혀있다. 태조 시절에는 정안군으로 기록되어 있고, 정종 시절에는 정안공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조선 초기에는 작위 호칭이 제대로 확립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애초에 대군이라는 호칭은 태종이 고려 시대의 공후백자남 오등작을 폐지하면서 등장시킨 것으로 태종 즉위 후의 일이다.

즉 태종은 '정안대군'이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따라서 정안대군이라는 호칭은 당대에는 전혀 쓰이지 않은, 엄밀히 따지면 잘못된 호칭. 따라서 당대 기록인 실록에는 당연히 정안대군이라는 표현이 없고 연려실기술처럼 후대에 쓰인 책들에서 즉위 이전의 태종을 언급할 때만 정안대군이라는 호칭을 쓴다. 정안대군이라는 표현이 널리 알려지게 된 이유는 조선왕조실록이 번역되기 이전의 사극이나 소설의 영향.[7] 마찬가지로, 정종 역시 영안대군으로 불렸던 적은 한번도 없다.

역대 조선 왕들 중 그의 아버지 못지않게 정말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았던 왕 중 하나. 신병주 교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최고의 킬러 본능을 가진 사람. 사실상 숙청의 인생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숙청을 많이 했다. 정몽주를 죽여 조선 창업에 이바지했고, 정도전, 심효생, 남은, 자신의 형제들을 죽여 왕이 되었고, 처남들인 민씨 형제를 죽여 외척을 쳐냈고, 갖은 구실로 아들 세종의 장인인 심온까지 죽여 아들조차 외척에 휘둘리지 않도록 철저히 대비했다. 세종이 조선조 최고의 성군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태종이 세종이 걸어갈 길을 닦아놓았기 때문이라는 시각도 있다. 분명 왕조의 초기에 불안정한 정국을 확실하게 휘어잡고, 세종을 위협할 만한 세력들을 다 제거해서 세종은 정국 안정에 덜 신경쓸 수 있게 한 것을 보았을 때 분명 틀린 말은 아니다.[8][9] 용재총화의 저자인 성현은 태종을 문관으로 패업을 이룬 유일한 인물이라고 평가한 적이 있고, 조선 말엽 미국인 선교사이자 한국사를 많이 연구한 호머 헐버트는 태종을 영국의 청교도 혁명을 이끈 인물인 올리버 크롬웰에 비유하기도 했다.

2. 안변댁네의 영특한 다섯째 아들[편집]

고려 동북면 화령부윤 이성계의 향처 한씨의 5남으로 태어났으며, 실질적인 막내였다.[10] 장성하여는 과거에 응시하여 병과 7등의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하였다.[11] 나중에 보인 행적들을 보면 굉장히 과감하고 패기가 넘치기에 흔히 야성적, 무인적인 인물로 생각되지만, 사실 고려시대에 과거에 급제할 정도면 그 정체는 지적 엘리트에 가까웠던 셈이다.[12] 또한 체형 또한 몸 좋은 무인 스타일이 아니라 호리호리한 편으로 추정된다. 훗날 이방원이 명나라에 입조하러 갈때 이성계가 이방원을 걱정하며 한 말도 "너는 체격이 약하고 몸도 허약한데 머나먼 명나라까지 탈 없이 갈수 있겠냐."라는 것이었다.[13]

이방원은 조선의 국왕 가운데 유일한 과거(오늘날로 치면 행정고시) 급제와 관직 근무 경력 둘 다를 가진 국왕이다.[14] 이방원의 과거 급제 사령장(합격 증명서)을 받았을 때,[15] 이성계는 너무 기뻐서 그 사령장을 몇 번이고 읽게 했고 자신도 계속 읽었으며 궁궐에서 몇번이고 절을 했다고 한다. '촌뜨기 무인 집안'이라는 열등감[16]을 확 씻어준 아들에 대한 이성계의 기쁨을 엿볼 수 있는 부분. 아닌게 아니라 이방원은 전주 이씨 집안이 이자춘 대에 고려로 귀순한 이래 가문 전체에서 최초로 배출한 과거 합격자인데다, 고려 시대의 과거는 그 악명 높은 조선 후기 시대의 과거보다 진입 장벽이 훨씬 높아서 준비 단계부터 수도 개경의 유명한 사립 학원에서 집중적인 사교육을 받은 중앙 귀족의 자제들이나 볼만한 수준이었던걸 감안하면[17] 이성계가 그렇게 기뻐한 것도 이상한 것은 아닐 것이다. 오늘날에도 가문 최초로 고시에 합격하면 충분히 문중의 자랑거리가 될 만하다. 이방원의 형들인 방우나 방과 등도 관직 생활을 하긴 했지만, 이성계처럼 무신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거나[18] 음서를 통해 진출한 것이라서 이성계의 열등감을 완전히 씻어내주진 못했다.

과거 합격 후 이방원은 개경에서 지낼 때 문신으로서 주로 인사 교류에 활동하며 이성계에게 도움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성계가 직접 "내가 손님과 함께 즐김에는 네 힘이 많이 있었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3. 격변의 난세 속에서 피로써 일족을 지켜내다[편집]

3.1. 계모와 이복동생들의 목숨을 구하다 [편집]

1388년 21세의 이방원은 아버지 이성계가 일으킨 위화도 회군 당시 전리정랑(典理正郞) 직위를 맡아 개경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방원은 아버지를 지원하러 간 형님들 대신 아직 개경에 있는 어머니와 동생들을 구조하는 역할을 담당했고, 이들을 무사히 이천으로 피신시킨 후 사태가 수습되자 돌아왔다. 이방원이 이 임무에 실패했다면 정변의 성공 여부에 관계없이 경처 강씨는 물론 방번, 방석까지 분노한 최영에게 잡혀서 죽었을 것이다.[19]

3.2. 위기에 빠진 아버지의 목숨을 구하다[편집]

1392년(공양왕 4년) 3월 당시 이방원은 친어머니 신의왕후의 3년상(1391년 사망)을 치르고 있었는데, 아버지 이성계가 세자 왕석이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것을 환영하기 위해, 해주에 마중나가 사냥을 하다가 낙마하여 중상을 입고 벽란도에서 발이 묶이는 일이 발생했다. 하필 그 때가 이방원의 친모인 향처 한씨의 3년상 중인 관계로 이방원을 포함한 이성계의 장성한 아들들도 죄다 발이 묶여있었다. 정몽주를 중심으로 한 반 이성계 세력은 이성계가 완전히 무력화된 틈을 타 고려 왕실의 위협이던 이성계 일파들을 숙청하고 이성계도 죽이려하였다. 정몽주는 공양왕의 암묵적인 지원 하에 정도전, 조준, 남은 등 이성계 세력의 핵심 인물들을 모두 귀양 보낸다. 이렇게 이성계 일파가 모조리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실록에 따르면 이방원이 이제를 통해서 이 위기 소식을 듣고는, 곧장 3년상을 접고 벽란도로 달려가 부상을 입은 이성계를 개경에 데려와 전세를 다시 이성계 쪽으로 역전시키고 이성계파를 몰락 위기에서 구했다라고 태조실록에서는 전하고 있다. 사실이라면 이성계가 살면서 가장 큰 생명의 위협을 당하고 있을 때 형제들 중 홀로 나서서 아버지를 지켜낸 셈이다.

3.3. 정몽주를 죽이고 형제들과 숙부들을 구하다[20][편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67px-Goryeo-Portrait_of_Jeong_Mongju-02.jpg

정적 정몽주

비록 이성계의 개경 귀환으로 이성계 일파 숙청에 브레이크가 걸렸지만, 여전히 정몽주 일파는 성현의 관리들을 시켜서 정도전, 조준의 사형을 주장했고, 공양왕도 이성계가 두려워 대놓고 승인을 못할 뿐 사실상 정몽주에게 동조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방원은 아버지 이성계에게 정몽주를 제거할 뜻을 보였다. 그러나 이성계는 돌아가서 어머니 3년상이나 마치라고 핀잔을 주며 강력히 반대하였다.

하지만 이방원은 형 이방과, 숙부 이화, 매제 이제, 의숙부 이지란 등을 모아서 정몽주를 제거할 것을 주장한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이성계의 반대 때문에 이지란처럼 살해 계획에 반대하는 사람도 나왔지만, 이방원은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말하며 정몽주 살해 계획을 강행하고, 직후 조영규, 고여, 이부, 조영무에게 지시를 내리고 도평의사사를 살해 장소로 계획하는 등 살해 계획을 차근차근 준비한다.

한편 정몽주는 변중량을 통해서 자신의 살해 계획을 듣게 되는데 이에 정몽주는 1392년 음력 4월 4일 이성계의 집에 문병을 오게되고 이성계에게 환대를 받는다. 태조실록에 따르면 이화가 이성계의 환대에 정몽주 살해를 주저하자 이방원이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살해를 강행했고, 처음에는 정몽주가 사는 동리 입구에서 살해할 계획을 잡고 근처의 이방과의 집에서 무기를 준비한다. 정몽주가 유원(柳源)의 장례식에 참석하느라 늦기는 했지만 최종적으로는 대낮에 길바닥에서 철퇴로 죽인다. 이런 냉혹한 정치적 결단을 내렸을 당시 이방원의 나이는 26세였다.

  • 일설에는 이방원이 정몽주를 마지막으로 회유하면서 하여가를 불렀고 이에 정몽주는 단심가로 답했다는 일화가 유명하지만 당대에 기록된 태조실록이나 고려사에는 해당 시조가 없다. 애초에 기록상에는 이방원은 정몽주를 살해하기로 이전부터 마음을 먹었고 최종적으로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살해를 감행했다. 일설[21]에는 이 시조는 후대에 창작된 것일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 있는데, 하여가의 만수산이라는 산은 그 시절에는 없었던 산이라는 것. 한편, 이 내용이 매우 극적이기 때문에 관련 작품들에서 이 장면이 나오지 않는 경우는 드물다.

  • 정몽주 암살을 정말 이방원이 주도했는지, 이방원만의 소행인지는 확실치 않다. 태조실록의 정몽주 암살을 다룬 부분을 보면 공양왕 즉위 후 조준과 정도전 등을 제거하고자 한 정몽주의 시도를 저지하기 위하여 이성계가 방과, 이화, 이제와 휘하 부하들을 보내 공양왕에게 계하도록 했다고 적었다. 이후 암살 모의가 벌어지는데 이 모의에 참여한 이방원, 이지란, 이방과, 이화, 이제, 조영무 중에서 가장 실권에서 멀었고 공적이 적었던 사람이 방원이다. 특히 정몽주 암살 이후 공양왕을 압박해 정몽주 측 인사들을 쳐낸 사람이 방과인데 그런 그들을 가장 입지가 약한 이방원이 전부 끌고 갔다는 공식이 도출된다. 지위와 연배를 고려하면 방원은 실행조에 머물렀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22]

  • 다만 이성계가 이를 알고나서 이방원을 질책했을 때, 이방원이 집안의 어른들과 형님들의 말이라 따랐다고 변명하기는 커녕 같이 논의했다는 이야기조차 일절 꺼내지 않은 것으로 보아서 누가 결정했던 이성계의 살기어린 분노를 혼자서 감당하기로 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실제로 이성계의 분노는 내내 이방원에게만 집중되었다. 그리고 백주대낮에 대놓고 죽인 것도 아예 자신이 범인이라는 것을 확실히 못 박으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밤에 암살해서 누가 죽였는지 잘 알려지지 않았다면 이성계가 정몽주 살해 사건을 수사한다고 범인을 찾느라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는게 먼저였을테고 다른 집안 사람들도 모조리 의심하고 추궁했을 것이다. 신 왕조 건국을 앞둔 마당에 태조가 될 사람이 내막을 알고 자신의 절친을 살해할 목적으로 열린 회의에 가담한 자신의 동생들, 아들들과 모조리 의절하는 사태가 발생하면 역성혁명에 엄청난 차질이 빚어졌을 것이다.[25]


이방원이 이성계에게 정몽주가 피살되었음을 알리자 이성계는 "내가 사약을 마시고 죽고 싶은 심정이다."라며 크게 분노한다. 이성계와 정몽주는 둘이 같이 여러 번 왜구를 토벌하고 후에 손자 손녀들끼리 혼인시킬만큼 친분이 돈독했으며 공양왕 즉위 때까지 정치적으로도 동지 관계였다. 게다가 공적인 면에서도 분노할 이유는 충분했다. 고려의 실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당장이라도 무력으로 왕위를 찬탈할 수 있는 이성계가 왜 정몽주를 진작에 물리적으로 공격하지 않고 정치적으로만 대립했는지 생각해보자. 당시 정몽주는 단순한 이성계의 정적 수준이 아니었다. 백성들의 지지와 자신의 능력을 바탕으로 고려 왕조를 떠받치는 마지막 버팀목이었다. 이런 인물을 은밀한 암살도 아니고 백주 대낮에 살해하는 테러를 저질렀다는 것은 이성계 본인의 명분을 엄청나게 깎아먹는 행위였다. 이성계로선 이방원은 참으로 '고얀 놈'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이 사건을 두고, 이후 수십년간 두고두고 지속된 이성계와 이방원 간의 애증 관계의 시발점이라는 해석도 있다.

고려의 마지막 기둥이었던 정몽주가 사라지자 조선 건국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반 이성계 일파를 숙청하고나서 정도전, 조준 등을 복귀시킨 후, 최종적으로는 공양왕을 퇴위시키고 1392년 7월 17일 이성계는 수창궁에서 즉위식을 가지고 왕위에 오르게 된다. 정몽주가 살해된 후 불과 석달만의 일이었다.관련기사

4. 아비의 눈 밖에 난 왕자[편집]

아버지 이성계가 왕이 되자 이방원도 왕자로서 군작호를 받아 정안군(靖安君)으로 봉해지지만, 정작 실권에서는 점점 배제되었다. 이는 무엇보다도 정몽주 척살로 인해 이성계에게 미움을 산 것이 크게 작용하였다.

물론 정몽주 척살에는 둘째 형 방과와 매제 이제, 숙부 이화도 동참했으나 실제로 척살을 실행한 것은 방원이었고, 무엇보다도 당시 이성계가 정몽주 살해 건으로 이방원에게 대노했을 때 사죄나 변명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자리에 있던 신덕왕후(당시는 경처 강씨)에게 자신을 변호해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는 사실상 이방원이 아버지의 절친한 친구를 죽여놓고도 일말의 감정적 동요도 없는 사이코패스였거나 자신이 실행조가 되어서 형님들 대신 일부러 아버지의 분노를 감당했던 것이었을텐데, 역전의 용사이자 맹장이며 유사 이래 최고의 신궁인 아버지 앞에서 그렇게 대들다가는 그날로 아버지 손에 끝장 날 수도 있다는 것을 몰랐을 리도 없고[26], 또 방원은 향처 한씨 소생 중에서는 막내나 다름없었으니 둘째 큰형님과 문중의 어르신이 시켜서 했다고 변명해도 되며, 여차하면 아버지와 형님들의 목숨을 구하려고 한 것이니 용서해달라고 사죄를 할 수있었는데도 아버지의 분노를 자신의 앞으로 끌어낸 것을 보면 결국은 후자 쪽이 아닌가 싶다.[27]

이렇게 되서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세워지자 첫째 형둘째 형도 자신도 아닌, 문중의 적장손인 이복근보다도 새파랗게 어린 막내 이복 아우 의안대군 이방석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견해가 존재하는데, 적장자 대신 후처에서 얻은 막내를 편애해 나라를 흔드는 전형적인 창업 군주의 실책이였다는 주장과[28] 이성계가 보기에 가장 적절한 조건을 갖춘 인물이 방석이었다는 주장이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은 의안대군 이방석 문서 참조.

그러나 문제는 이게 태조의 입장에서 합리적인 결정이었지, 이방원 등 개국에 참여한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는 것이다. 태조가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에게 취한 태도는 어떻게 보면 철저한 토사구팽이었다. 자신의 아들들과 고려의 기득권층의 딸들을 혼인시켜 중앙 정계에 진출했으면서도, 정작 새 왕조가 세워지자 바로 그 인척 관계 때문에 왕자들을 권력의 중심에서 내치려 한 것이다. 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세습 왕조 국가에서, 막내가 정통성에 치명적인 흠이 있는데다 장성한 형제들을 제치고 왕위에 올랐을 때에는 그 다음에 할 일이란 뻔한 것이다.

그런데 방석이 세자가 되어서 이방원에게 있어 다행이라는 주장도 있다. 만약 장자 계승의 원칙을 철저히 받들어 방우나 방과가 세자가 됐으면 오히려 이방원은 왕좌에서 완전히 멀어졌을 것이다. 정변을 일으켜 세자를 바꿀 명분도 없을 뿐더러 방우나 방과에게 적자가 없어도 서열상 손윗형님인 방의와 방간이 있으니 그 다음 대에도 세자가 되는 것은 힘들었을 것이다.[29][30]

5. 피도 눈물도 없이, 용상을 향하여[편집]

5.1. 왕위를 물려받는 것이다, 아우야[편집]

이방원 vs 정도전

결정적으로 한양 천도 직후 신덕왕후가 사망하면서 세자 이방석의 지지세력은 큰 타격을 입었다. 태조 이성계는 일부러 그녀의 릉인 정릉을 도성 내에 조성해가며 강씨의 존재감과 권위를 유지해 세자의 권위를 지키려 했지만 신의왕후 때와 마찬가지로 죽은 사람의 권위에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었다.[31] 그리고 이 와중에 사병 혁파와 요동 정벌같은 급진적인 정책들이 시행되었고 군권과 조정의 대권이 외척과 공신들에게 집중되었다. 태조의 실수는 단순히 막내를 세자로 세웠다는 것이 아니라, 이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다른 왕자들과 전주 이씨 문중의 종친, 고려의 구 세력의 불만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32]

그리하여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과 방계 종친, 사병 혁파 등 정도전의 급격한 개혁에 반발한 이들이 모의해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을 척살하고 세자 이방석도 죽여버렸다. 귀양을 보냈는데 이거이가 손을 써서 죽였다는 것은 실록의 기록이고, 사실은 쿠데타 당일에 그냥 죽여버렸다. 경순공주의 남편이자 군대의 중진이었던 이제도 살해당했다. 물론 실록에는 "나는 죽이라고 하지는 않았는데 아랫사람들이 멋대로 그런 것이다!"라고 나와 있지만 정말 그랬을 가능성은 없다.[33]

1차 왕자의 난에 관련된 기록은 전반적으로 곡필이 심한 편이다. 예를 들면 방원 측의 병력은 무기 수도 모자라서 부러뜨려 둘로 나눈 몽둥이와 창자루 든 군사 몇십 명밖에 없었다고 하는데 이것으로 나라의 정궁인 경복궁을 그냥 발라버린다. 실록에 따르면 세자(방석)가 친위대를 이끌고(조선의 왕실 친위대의 대장은 세자가 맡는 관습이 있었다.) 반란을 진압하나 광화문부터 남산까지 횃불이 가득 차 있어서 두려워했다는 서술이 있다. 즉, 몇십 명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은 지어낸 말이고 동원된 군사가 수천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34]

또한, 실록에 따르면 정도전과 남은이 나이 어린 세자 방석을 끼고 다른 왕자들을 모두 죽이려 했기 때문에 정당방위로 군사를 일으켰다고 되어있다. 그런데 정도전 본인은 그런 어마어마한 계획이 실행되던 당일에 판만 짜 놓고 태평하게 남은의 첩실의 집에서 술이나 마시고 있다가 잡혀서 죽었다고 한다. 조금만 생각을 해보아도 말이 안 되는 부분 투성이니 이때의 실록 기록은 그대로 믿으면 곤란하다.

그리고 정도전은 오늘날에 알려진 것만큼 이방원을 경계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오늘날 사극이나 영상물을 보면 조선 건국 후 대놓고 이방원과 정도전이 대립하고 부딪치는 내용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태조 초기부터 실권에서 벗어나 있었다. 태조는 왕자들과 사위의 군호를 정하면서 이들의 절제사(節制使) 임명도 병행해 친위 군사력을 재편성했다. 이때 신의왕후 소생 중에서는 방과가 아직 살아있던 방우를 제치고 방번, 이제와 함께 의흥친군위절제사(義興親軍衛節制使)로 임명되었다. 방번과 이제는 세자의 동복형과 매형에게 힘을 싣어주어 세자의 입지를 강화하겠다는 조치였고 개국에 공을 세운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을 아예 모른척할 수는 없으니 정치적으로 입지가 좁아진 방우 대신 방과를 대표로 중임을 맡긴 것이다. 이 조치 이후 10일 뒤에 방석이 세자로 책봉되었다.[35][36] 방원을 비롯한 다른 왕자들에겐 중앙의 군권 대신 지방의 지휘권이 주어졌다. 방원은 처음에는 동북면의 가별초를 받았으나 태조 3년 정도전의 군제 개편 제안으로 각 도에 절제사를 두고 종실이 이를 맡게 할 때[37] 방번에게 동북면 가별초를 넘겨주고 전라도 절제사로 임명되었다. 이성계에게 동북면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하면 결국 세자 방석의 위상을 확고히 하겠다는 의미였다.

즉, 정도전이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을 경계했다면 방우가 배제된 이후 장남의 위치를 차지했고 이성계가 일개 무신일 때부터 보좌하여 공도 크며 중앙 군권을 쥔 실력자인 방과를 더 위협적으로 여겼으면 여겼지 방원을 집중 경계했을 가능성은 낮다. 또한, 정도전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모든 권한을 위임받은 권신이 아니라 국왕 태조의 비호 아래 모든 일을 추진한 총신인 바[38] 사극에 나오는 것마냥 종실 인사들과 대놓고 척을 질 수는 없었다. 쿠데타 발생 석 달 전까지 저서(이때 완성한 것이 불씨잡변.) 작업에 몰두했던 것을 보면 쿠데타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것이 정론이다.

태조가 1차 왕자의 난 당시 중병에 걸려있었다는 주장 역시 믿기 어려운 주장이다. 걸핏하면 골골대며 드러눕는 말년의 태조라면 모를까 당시 태조의 행보와는 꽤나 거리가 있다. 죽기 직전에 딸까지 얻을 정도로 건강한 사람이 태조였다. 태종의 반란군들이 제일 처음으로 들이친 곳은 정도전이 친구들과 놀고 있던 술집이 아닌 태조가 있던 경복궁이었고 태조는 태종의 반란군들에 의해 체포, 구금당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다만 이를 두고 와병설을 완전히 부정하기는 어렵고 중병은 아니어도 감기 같은 가벼운 병을 앓고 있어서 그 때문에 경계가 흐트러졌을 수도 있다. 태조가 멀쩡한 상태에서 경복궁으로 쳐들어온다? 그러면 직접 반란 진압을 시도했을 수 있어 명분에서 한참 밀리고 방원의 군사들은 태조를 마주치는 즉시 살아있는 과녁이 되었을 것이다.[39] 대중 매체 등에서는 대체적으로 이 와병설을 받아들인다.

5.2. 방간 형님, 왕위는 제 것입니다[편집]

이방원 vs 이방간 물론 스펙 차이는 이방원이 압도적 위

이후 적자가 없던 정종의 계승자 자리를 넷째형인 회안대군 이방간이 탐내어 박포와 손을 잡고 자신을 죽이려하자 이방원은 이들마저 가차 없이 진압하는 무자비함을 보이며 자신의 권력을 지켜냈다. 이른바 2차 왕자의 난인데 앞선 1차 왕자의 난이 소수 정예병에 의한 궁궐 점거 쿠데타였음에 비해 이쪽은 거의 시가전의 양상이었던 듯하다. 1차 왕자의 난 당시 수도는 한양이었는데 1차 왕자의 난으로 민심이 흉흉해진 것 때문에 잠깐 개성으로 옮겼다. 개성으로 수도를 잠시 옮긴 이후 2차 왕자의 난이 발생, 선죽교를 사이에 두고 화살이 오가는 양측의 교전이 있었고 여기에 밀린 방간이 패했다. 결과는 이방원의 압승. 다만 역시 방번, 방석과는 달리 동복 형제를 죽이기는 싫었던지 박포만 악당으로 몰아 죽여버리고 방간은 유배만 보내는 대인적 면모(?)를 과시한다. 사실 동복 형제라는 사적인 이유도 있지만, 공적인 이유도 충분히 있었다. 이미 1차 왕자의 난으로 이복 동생들과 아버지의 측근들을 대거 살해하면서 이미지를 크게 깎아먹었는데, 여기서 동복 형제인 방간까지 죽였다간 이방원의 이미지는 회복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게 된다. 이방원으로선 숙청은 하더라도 형님의 목숨만은 살려야 자신에게도 정치적, 대외적 이득이었던 것.

어쨌든 동복 형제라는 덕을 봐서 방간 자신은 유배되어서도 그럭저럭 잘 살다 죽었으나, 아버지를 돕는다고 이방원과 이방원의 가족을 공격하는데 적극적으로 나선 방간의 아들 맹종은 혐의가 혐의인지라 태종이 상왕 시절 사사되었고 이방간의 자손들은 숙종 때에 복권되기 전까진 대대로 역적의 후손에 폐서인으로 취급되서 평민과 똑같이 군역과 노역이 부과되었다.

한편 이 2차 왕자의 난은 태종 측에서 눈엣가시였던 방간이 '반란을 일으켜 자멸하도록' 유도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5.3. 세자에 책봉되다[편집]

조선의 역대 왕세자

정종 이경

태종 이방원

양녕대군 이제

작위

정안공(靖安公) / 왕세자(王世子)

방원(芳遠)

유덕(遺德)

세자 책봉

1398년 9월

국왕 즉위

1400년 11월


세자였던 형 방과가 즉위한 후 이방원 본인은 세자가 되었다. 형의 뒤를 잇는 것이니 '세제'가 맞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들어왔지만 그냥 넘긴다. 정종 본인도 "오늘부터 동생을 아들 삼으면 되지 뭐 그런 걸 가지고."라며 넘긴다.[40]

조선왕조실록의 실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임금의 아우 정안공을 책립하여 왕세자로 삼아 군국의 중사를 맡게 하였다. 임금은 이렇게 말하였다. ……이 때에 대신으로 헌의하는 자가 말하기를, “옛날부터 제왕이 동모제를 세우면 모두 황태제를 봉하였고, 세자를 삼은 일은 없었습니다. 청하건대, 왕태제를 삼으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나는 직접 이 아우를 아들로 삼겠다.” 하였다.
冊立弟靖安公<諱>爲王世子 句當軍國重事 王若曰……時大臣獻議者 以爲自古帝王 立母弟則皆封皇太弟 未有以爲世子者也 請立爲王太弟 上曰 今予則直以此弟爲子


정종실록 권제3, 9장 뒤쪽~10장 앞쪽, 정종 2년 2월 4일(기해)


사실 정종과 태종의 나이 차는 겨우 10살이었다. 그리고 이웃나라 일본에서도 다이묘들이 자식이 없어서 동생을 양자로 들이는 사례는 흔했다. 결국 방원이 정종의 양자로 들어가 세제가 아닌 세자가 된다. 아마 형인 정종은 어차피 자신은 별로 중요치 않은 인물이니, 위안으로 삼으려고 동생 방원을 자신의 아들로 삼음으로써 자신을 태조 이성계의 유일한 '아들'이자 '세자'로 만들고 싶었던 것 같다. 얼마 있지 않아 정종은 세자 방원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난다. 사실 더 버티고 있었으면 본인의 안위도 보장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래도 태종은 형에게는 매우 깍듯해서 이후 정종은 상왕으로서 제대로 대접받았다. 태종이 세종에게 양위한 후에는 둘이서 명절날마다 같이 장난도 치고 사냥도 같이 나갔다는 기사가 실록에 있을 정도이다.

6. 용상에 올라 왕조의 기틀을 다지다[편집]

6.1. 사병 혁파[편집]

태종이 정치의 고단수였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실적.[41]

우선 왕족과 대신들의 사병을 모조리 없애 군권을 일원적으로 재편하여 삼군부에 주었다. 바로 아버지와 본인이 사병을 이용해서 왕위를 차지했기 때문에 사병만큼은 철저하게 분쇄하고 인원을 흡수하여 모조리 국가 소속 군대로 만들어 버린다. 정도전 역시 1차 왕자의 난 이전에 판의흥 삼군부사로서 사병 혁파를 통하여 태종에게 결정타를 날리려다 역으로 살해당했음을 상기하면 태종의 정치적 수완이 상당히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된 인물이 이거이다. 이거이는 태조와 사돈 관계에 있던 인물로 왕자의 난 때에는 태종에 붙어서 공신까지 되었던 인물이지만 정종 때에는 사병 혁파에 반대하다가 유배를 가게 된다. 복귀 후에는 영의정까지 올랐으나, 나중에 이와는 다른 '불충'이라는 이유로 귀양을 가고 그 뒤에 그곳에서 죽게 된다. 이 귀양이 태종의 공신 견제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비슷하게 사병 혁파를 반대했지만 처신을 잘해서 죽을 때까지 별탈없이 산 조영무와는 반대되는 모습. 사실 정도전은 사상가이자 이념가였으나 정치적으로는 수완이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42]

6.2. 관제 정비[편집]

태조 때만 해도 제 기능을 하지 못했던, 오늘날의 언론에 해당되는 대간과 사관 등의 기관에 상당한 힘을 실어 주었으며,[43] 전제 개혁도 이 시절에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었다. 간언하는 간관들이나 사관을 귀찮아했고 틈만 나면 때려잡으려고도 했지만 조선의 기틀을 이루는 유교의 근간인 이들의 존재는 부정하지 않았으며,[44] 간관의 비판에 시달리던 대신들이 간관들을 좀 자제시켜달라고 하자, "간관들이 없으면 무능력하고 악독한 자들을 어찌 걸러내라는 것인가?"라며 물리치기도 했다.[45] 우선 본인부터가 간관들의 비판이나 사관들을 대단히 귀찮아했음에도 이렇게까지 두둔해 가면서 그 필요성을 인정한 것을 보면 명군은 명군이다. 실제로 조선 시대의 삼사가 확립된 것은 태종 대이다. 관리 감찰 기관인 사간원을 독립 기관으로 만들어서 간쟁 기능을 담당시킨 것이 태종이기 때문이다.

사실 태조는 능력이 매우 뛰어난데다 코드까지 환상적으로 들어맞는 정도전에게 모든 일을 위임하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에 제도적인 면으로는 정비된 것이 별로 없었다. 이 때문에 이후 군약신강의 틀이 되는 재상 중심의 정치 이론(군신공치)이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재상 중심의 정치에 가장 강력하게 반발한 인물이 바로 태종이다. 이 때문에 옛 고려의, 조선과는 정치적 성향이 그다지 맞지 않는 인물들까지 대거 포섭해 가면서 정국을 꾸렸음에도 개혁안들을 보면 상당히 과감한 것들이 많다. 고려 시대의 도평의사사비로소 폐지되고, 의정부가 설치되는 등 국가 운영 방식의 기본 골격이 만들어지고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한 것도 이 때이다. 물론 정도전을 때려잡은 태종답게 의정부에 자문기능 만을 부여하고 실무 관청인 육조를 국왕이 직접 관할하는 6조 직계제를 시행했다.

6.3. 경제 정책[편집]

중국의 화폐제도를 모방하여 저화라고 불리는 일종의 지폐를 통용하기 위해 화폐 개혁을 실시했지만 결과는 대실패. 당시 조선은 교역이 상당히 미약한 수준이었고 물물교환이 주를 이뤘기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46] 그리고 이 화폐개혁은 아들인 세종대왕이 재추진했으나 역시 대실패. 이 화폐 개혁은 많은 시도를 거친 후 조선 후기에 상업이 활발해진 숙종대에 이르러서야 상평통보로 꽃피게 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는 것이 있는데, 비록 화폐 개혁은 실패했으나 단군 이래로 오늘날까지 국가 재정이 꾸준히 흑자를 기록한 것은 태종 때가 유일하다.[47] 때문에 다음 대의 왕인 세종이 대규모 사업이나 개혁을 시행할 수 있게 한 기본적인 재력을 마련한 것도 어떻게 보면 태종이다. 게다가 계유정난 당시 단종김종서수양대군의 쿠데타에 쉽게 무너진 이유도 세종 때 대규모 사업을 많이 벌여서 국가재정이 다 떨어져 단종의 왕권이 약해진 까닭이라는 분석도 있다. 그래서 그런지 수양대군은 왕위에 오른 후에 훈구파 신하들과 같이 경제정책에 대해 몰두하곤 했다.[48]

6.4. 계모와의 악연, 그리고 의 척살[편집]

태종은 공신들을 숙청할 때에는 죽이기보다 적당한 곳으로 귀양을 보내놓고 잊어버리거나(…) 직위를 강등시키는 수법으로 실권을 빼앗았다. 그러나 외척에 대해선 이상할 정도로 자비가 없어서 처가인 여흥 민씨 네 명의 처남을 싸그리 다 죽여버리고, 나중엔 후계자 세종의 처가인 청송 심씨마저 박살을 내버렸다. 외척에 대해서는 알레르기 수준의 경각심을 갖고 있었던 듯 한데, 이에 대해선 계모였던 신덕왕후 강씨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다.[49]

실제로 신덕왕후에 대한 태종의 적개심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태조 이성계는 두 번째 아내인 신덕왕후를 지극히 사랑해서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을 서울 도성 안에 조성했다. 사실 왕릉은 도성 안에 조성할 수 없는 것이 조선 왕조의 법이지만 태조가 강씨를 너무 사랑한 탓에 법률을 어긴 것이다.

그런데 태종은 그녀의 무덤 근처의 땅을 공신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특히 하륜이 가장 많이 받았다고 한다.[50] 신덕왕후의 능 근처에 공신들의 집이 지어지는 것을 보곤 태조는 그저 말없이 울었다고 한다. 나중엔 신덕왕후의 기일이 되어도 조회를 파하지도 않다가, 아버지의 체면을 생각해서 그냥 형식적인 제사만 올리고 끝내기까지 했다.

태조가 죽은 뒤에는 그녀에 대한 예우를 왕비 격에서 후궁 격으로 완전히 격하시켜 버렸다. 원래 신덕왕후의 능은 오늘날의 중구 정동에 뒀지만, 성북구 정릉동으로 옮겨버렸고, 한 술 더 떠서 묘의 봉분을 완전히 깎아 무덤의 흔적을 남기지 말도록 명했으며, 또한 신덕왕후 능의 석상과 석물, 그리고 능에 사용되었던 12지상들은 청계천을 치수할 때 쓰이는 광교의 재료로 사용해 물 속에 거꾸로 처박아 버렸다. 그래서 광교를 잘 보면 석물에 새겨진 문양이 뭔가 화려한 걸 볼 수 있다.

태조는 신덕왕후 강씨와 정식으로 혼인했기 때문에 분명한 정식 부인이었고, 이 때문에 그녀는 왕비로 정식 책봉이 되었다. 명백히 태종의 사감이 드러나는 부분이다.[51] 그녀는 현종대에 가서야 송시열의 건의로 복권되었고, 이에 그녀의 무덤은 능으로 복구되었다.조선 태조의 무덤이 동쪽으로 간 까닭은?

기록에 따르면 정릉이 태종의 손에 의해 파헤쳐지던 날 많은 비가 쏟아져 당시 이를 지켜보던 백성들이 신덕왕후의 눈물이라고 수근거렸는데 훗날 250여년이 지나 1669년(현종 10년) 음력 8월 5일 송시열에 의해 신덕왕후가 복권되던 날에도 엄청난 비가 왔다고 한다. 이때도 사람들은 신덕왕후의 원혼이 흘리는 눈물이라 했다고 한다.

이쯤 되면 신덕왕후가 대체 의붓아들들과 첫 번째 부인에게 무슨 지독한 짓을 했나 싶은데, 기록에 의하면 조선이 건국되기 전까지만 해도 강씨 부인과 의붓 아들들은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신덕왕후가 정도전과 손을 잡고 막내 아들 의안대군을 세자로 올리는 과정에서 사이가 매우 나빠졌다.

그도 그럴 것이 정종 이방과가 아버지를 도와 전장을 누비며 아버지를 도울 때, 태종 본인은 도성에서 아버지의 정적들을 견제 및 제거해가며 나라를 세우는 데 이바지한 일등 공신이다.[52] 태조가 세자로 장남 이방우나 차남 이방과를 세자로 삼았다면, 아무리 권좌에 대한 야심이 강한 태종이라 해도 자기가 왕위에 오를 명분을 찾는데 엄청 애를 먹었거나, 아니면 끝내 권좌에 오르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장남 이방우는 태조의 첫째 부인인 신의왕후 한씨가 낳은 첫 번째 아들로, 장자 승계 원칙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적장자였고, 이방과는 이방우가 일찍 죽은 후 실질적인 적장자의 위치를 가졌으며 군사적인 전공 면에선 태종을 능가했기 때문이다. 그런 형들도, 자신도 아닌, 정작 아무것도 한 게 없는 막내가 세자 자리를 차지했고 이후에 정도전 등이 사병 혁파를 빌미로 첫째 부인의 아들들을 제거하려고 드니 그 적개심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듯 하다.

태종실록을 보면 신하들에게 신덕왕후의 일을 논하며 이렇게 말했다. "정릉(貞陵)은 내게 조금의 은의(恩義)도 없었다. 내가 어머니의 집에서 자라났고 장가를 들어서 따로 살았으니, 어찌 은의가 있겠는가? 다만 부왕(父王)이 애중(愛重)하시던 의리를 생각하여 기신(忌晨)의 재제(齋祭)를 어머니와 다름없이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53]

다만, 태조가 어째서 장성한 아들들을 건너 뛰고 가장 어린 막내 아들을 세자로 삼은 것에 대한 책임을 태조가 아니라 신덕왕후와 정도전 일파에게 몰기 위해 태종이 일부러 저렇게 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다. 또 원한도 원한이지만 정통성의 문제도 걸려 있는데, 신덕왕후를 정실 부인으로 인정하면 의안대군은 적자로서 그 정통성을 인정받게 되고 이는 태종과 그 후손들의 정통성 확립에 좋을 게 전혀 없다. 그러나 신덕왕후를 후궁으로 격하시키면 의안대군은 후궁의 자식이 되므로 정통성도 없이 세자가 된 것이 된다. 정통성 문제가 엮여 있기 때문에 단순히 사적인 원한이라고만 단정짓는 것도 섣부른 판단이 될 수 있다.

한편, 원경왕후의 친정을 숙청한 것은 다른 이유가 있다는 설도 있다. 양녕대군 이전에 태어난 자식들은 요절한 까닭에 원경왕후 민씨가 "이번엔 아이를 외가에서 기르면 괜찮지 않을까" 하여 친정에서 양녕대군을 자라게 하였다고 하는데, 일각에선 이 때문에 양녕대군은 외가인 민씨 집안의 입김을 강하게 받을 수 밖에 없었고 그로 인해 태종이 민씨 일문을 숙청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정작 양녕대군은 외숙부들이 숙청될 때... 자세한 건 해당 문서 참조.

결국 양녕대군이 폐세자로 처리되고 세종대왕이 뒤를 이었으니 어찌보면 민씨 일가는 억울하게 숙청당했다고 볼 수도 있다. 양녕대군이 좀 더 일찍 세자에서 물러났다면 굳이 민씨 일족을 숙청할 필요가 없었을 수 있다.[54]

양녕대군이 혼인을 할 때, 즉 첫 번째 세자빈을 고를 때도 태종은 상당히 신중을 기했다. 세자빈 김씨의 아버지는 태종의 과거 시험 동기인 김한로였다. 과거 시험에 장원 급제를 한 수재이긴 했지만 조선 건국에 딱히 세운 공도 없고, 확고한 신념이나 정치적 야심도 없을 뿐더러 처세술에도 잼병인 책상물림형 관료였다.

태종은 그가 훗날 국구(임금의 장인) 자리에 오른다 해도 딱히 권세를 휘두를 만한 인물이 아니라고 여긴 것이다. 다만 김한로 역시 외척 숙청의 칼날을 완전히 피하지는 못하고 폐서인되어 고향으로 쫒겨났는데, 이쪽은 자기 사위(양녕대군)에게 불륜을 주선하는 등 난행을 저지르도록 유도한 혐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태종의 사돈들 중에서 숙청을 피한 것은, 왕위 계승과는 전혀 상관없던 효령대군성녕대군, 그리고 서자들의 처가 정도였다.

그리고 양녕대군의 혼인과 관련해서 민씨 일족이 본의 아니게 태종에게 위기감을 느끼도록 한 사례가 있다. 양녕대군이 세자빈 김씨와 혼인하기 전, 명나라의 공주와 결혼하는 것이 어떨지에 대한 검토를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명의 사신과의 논의가 영 진전이 되지 않자 흐지부지되는 듯 했고 태종도 이를 포기한 채 위에 언급한 김한로의 딸과의 혼인을 진행했다.

그런데 공부, 이현 등이 민제를 찾아가서 명 공주와의 결혼을 다시 추진하자고 건의하였다. 이때 민제는 태종의 압력에 못 이겨 사직한 상태라서 자신이 "감히 주상에게 아뢸 일이 아니며, 민제의 아들들도 말할 자신이 없다"며 논의 자체에서 빠지려 했다.

이 사실을 안 태종은 사사롭게 국가의 큰 일에 관여하려 했다며 공부와 이현을 처벌하였다. 겉으로는 단순한 소동이었지만 이는 태종에겐 민씨 가문의 위세를 다시 한 번 경험하게 된 사건이었다. 왕세자의 혼인이라는 중요한 국정 문제를 국왕이나 현직 대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민씨 가문에서 논의하려 한 것 자체가 그들의 위상을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세종이 즉위한 직후엔 측근인 강상인까지 이용해 세종의 장인인 심온의 집안을 숙청했다. 당시 병조 참판이었던 강상인은 군사 업무를 세종에게만 보고했다가, 상왕으로 물러났지만 여전히 실권자였던 태종의 명을 어긴 죄로 파직 후 관노로 떨어졌는데, 이후 다시 강상인을 고문해서 태종과 세종을 이간질시키려 했으며 여기에 심온이 동조했다는 진술을 받아낸 뒤 심온을 체포해 사약을 내렸다.

또한 심온의 아들들과 아내는 변방에 관노로 보냈는데 이들은 태종이 죽은 뒤에야 복권되었다. 이들을 복권할 당시 세종은 "사실 이들을 복권시키는 것은 아바마마께서도 내심 원하신 건데 갑자기 돌아가셔서 못한 것"이라고 아버지를 변호했다. 즉, 정리하자면 딸이 조선의 정실 왕비이고, 사위는 왕인데 정작 그 장모와 처남들은 변방에서 노비로 굴렀다는 말이 된다. 그렇게 만든 사돈이 죽고도 왕이 된 사위가 자기 아버지가 하신 일이니 선뜻 고치질 못하고 한동안 그렇게 내버려 뒀다는 상황.

외척인 민씨 형제나 이숙번과 같은 공신들을 처리한 것은 그나마 이들은 왕권에 대해 위험분자의 속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 있으나, 이 심온 숙청은 조금 지나쳤다는 평가가 있다. 심온도 양녕대군의 장인인 김한로와 같이 집안 배경이 좀 좋은 것 외에는 그저 과거로 벼슬살이를 시작한 전형적인 행정 관료였지 주변 세력을 결집시켜 파벌을 이루려는 권신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되려 자신의 딸이 충녕대군과 맺어지자 다소 부담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그나마 이 시기의 세종은 그냥 똑똑한 왕자였을 뿐, 권좌 코스가 예정된 세자가 아니었으니 별 일 있겠냐는 식으로 넘어갔지만, 후계 순위 1순위였던 양녕이 폐출되고 덜컥 자기 사위가 세자가 되었으니...

심온 숙청 직후 박은 등이 소헌왕후도 폐출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이는 태종이 거절했다. 이미 소헌왕후는 아들을 셋이나 낳았고 친가가 박살났으므로 왕후로서 국정에 간섭할 힘이 없었으므로 더 이상 손을 댈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소헌왕후를 폐출하고 세종이 새 왕비를 들이면 그 새 왕비의 가문도 또 어느 정도 박살내야 하는데다, 이 새 왕비가 아들을 낳으면 소헌왕후의 자식들 때문에 정통성이 문제가 된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태종으로선 소헌왕후의 폐출은 막아야 했던 것이다.

용의 눈물에서도 태종은 심온 일가에 대한 숙청을 멈춰달라는 원경왕후 민씨와 아들 세종 이도의 청을 묵살하고 숙청 작업을 그대로 진행시키면서도, 소헌왕후를 폐서인시켜야 한다는 신하들의 주장 또한 거부하는데 결국은 폭발해 "나더러 이런 사람 잡는 짓거리를 또 하란 말이냐!"면서 소헌왕후를 폐비시키라는 신하들에게 격노를 터뜨리는 장면이 나온다.

다만 소헌왕후로서는 가뜩이나 임신 중에 친정이 완전히 초토화되었으니 오히려 폐출당하고 싶은 심정인데도 막아버렸으니 시아버지 태종이 배로 원망스러웠을 것이다. 소헌왕후가 불굴의 의지로 국모의 자리를 지켰기에 망정이지 보통 여인이라면 홧병으로 유산하고 고대로 병사했어도 이상할 일이 아니었다.

결과론적인 말이지만, 태종이 이렇게 소헌왕후의 수명을 대폭 줄여놓는 바람에(...) 후일 손자쿠데타가 성공하는데 일조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리고 후에 외척의 힘을 줄이지 않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 지 순조가 확인사살 해주었다.

6.5. 공신 숙청[편집]

파일:숙청의 시간.jpg
[55]
계유정난으로 집권한 손자 세조와 가장 차이를 드러내는 부분이다.

손자 세조와 다르게, 태종은 자신을 도와준 공신들을 싹 숙청해 버렸다. 심지어 자신의 오른팔이었던 이숙번자신의 처갓집, 사돈집마저 사정없이 개박살 내버렸다.

이숙번은 왕자의 난에서 시작해 조사의의 난에서까지 맹활약하며 태종의 옹립을 도운 최측근이었다. 그런 이숙번의 죄목은 거만하다는 것이었다.[56] 이숙번은 사망하기 직전까지도 복권이 안 되었고, 세종대왕 때 태종실록의 일부 기록들을 보완하기 위해 자문이라는 명목으로 한양에 잠깐 불렀다가 기록 보완이 완성되고나서 다시 유배지로 돌려보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57]

태종의 공신들 중 숙청의 칼날을 피하고 평생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던 사람들은 하륜조영무 정도였다. 이 중 조영무는 처신을 잘해서 피한 것이었고[58] 하륜의 경우엔 나이가 많은 점이 작용한 게 크다.[59] 또한 그 밖의 다른 공신들도 나이와 같은 이유로 품계는 높아보이지만 실권은 없는 명예직으로 보내거나 명예 퇴직을 권유하는 경우도 있었다[60].

그래도 태종이 권력을 손에 넣는 과정에서 손에 피를 많이 묻혔을지언정, 공신 숙청에 한해서는 당시의 기준으로는 상당히 온건한 편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61] 명나라의 창건자 홍무제는 중원을 통일한 이후 호남의 옥을 필두로 수많은 옥사를 일으켜 1등 공신 이선장을 비롯한 수많은 공신들과 그들의 가족들을 죽였는데, 최대 9만 명 정도가 처형되거나 연좌되어 유배 혹은 관노로 떨어지거나 고문으로 죽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여기에는 문자의 옥을 일으켜 온갖 구실로 문사들을 살육하고 그들의 입을 틀어막았으며 재상 직을 폐지하고 황제가 기분 내키는대로 시행하는 태형인 정장을 불문법화하는 등 황권에 걸리적거린다 싶어 제거한 사람이 모두 포함된다. 그 뒤를 이은 영락제 또한 태종과 비슷하게 쿠데타로 집권했지만 태종에 비하면 집권의 명분이 지극히 부족했고, 끓어오르는 반대 여론을 십족을 멸하는 대숙청을 통해 잠재워야했다. 살생을 해도 제거 대상을 최소한으로 한정시키고, 진절머리를 치면서도 간언과 사관같은 언론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그들을 지켜준 태종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나는 부분이다.

대신들이 '전하께서도 이들을 귀찮아 하겠지' 하고 대신들이 간관들의 탄핵을 받아도 탄핵이 확정되기 전까지는 업무를 볼 수 있게 해달라고 태종에게 간했는데, '그럴 수 없다'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명나라의 홍무제는 숙청을 너무나 많이 한 나머지, 역으로 후계자인 건문제를 봐줄 후견인이 없어져버려 제대로 된 숙청에 실패한 반면, 태종은 직접적인 위협 대상만 아니면 건드리지 않았다. 세종대왕 때의 주요 정승들이었던 황희, 맹사성, 허조 등은 모두 세종대왕 이전부터 있던 관료들이다. 그야말로 후계자에게 알짜배기 인재들을 물려준 셈.

그나마 태종에 의해 찍히지 않고 살아남았던 공신 하륜과 조영무의 경우 하륜은 태종보다 스무살 연상의 고령이라서, 조영무는 너무 처신을 잘해서 흠 잡을게 없어서[62] 넘어갔던 이들이며 둘 다 태종보다 먼저 죽었다.[63]

그리고 태종은 사건이 터지면 주모자만 처벌하는 편이었기에 사람들이 흔히 오해하는 학살이나 피의 숙청 같은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사람을 죽인 숫자는 세조, 연산군, 중종, 선조[64], 광해군, 숙종,영조 때가 태종 때보다 훨씬 많았다.

본인이 악역을 자처하고 벌인 일이지만, 손에 너무도 많은 피를 묻힌 나머지 성군으로는 평가받지 못한다. 본인도 말년인 상왕시절 최측근들과 술자리를 가질 때면 "과인은 덕이 없으므로..." 라고 자조하며 담소를 나누었다고 한다.

조선의 통치 체계를 완성했다는 평가를 받는 성종이 어마어마하게 커진 훈구파들 좀 잡아보겠다고 사림파들을 불러들였다가 역으로 사림파들에게 쥐락펴락 당하며 좋아하는 매 한 마리 마음대로 날리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던 것을 생각하면,[65] 결과적으로 이는 아들 세종의 치세에 막대한 도움이 되었다.

6.6. 지방 행정 조직 정비[편집]

또한 태종은 지방 행정 조직도 대대적으로 개편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그 유명한 팔도다. 태종은 고려 시대의 특수 행정 구역이던 향, 부곡, 소를 일반 군현으로 승격시켰다. 이어 태종은 전국을 8도로 나누고 그 아래에 부•목•군•현을 두었으며 각 도에 관찰사를 파견했다.

6.7. 명과의 우호 관계[편집]

애초에 2차 요동 정벌[66]에 참여하여 명나라를 침략할 뻔 하다 위화도 회군을 일으켜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하여 왕이 된 아버지 이성계를 몰아내고 , 요동 정벌을 계획하던 정도전을 죽이고 권력을 차지했던만큼 명은 이방원을 친명파라 여겨 그를 친근하게 대했다. 그 전부터 태종 본인이 명에 여러 차례 사신으로 갔던 적이 있고,[67] 홍무제영락제도 모두 접견해본 적이 있다. 심지어 영락제와는 서로 보위 계승자의 신분으로 길거리에서 만나 아래와 같이 서로 환담을 나누기도 했다.

태종이 연부를 떠나서 도중에 있을 때, 연왕(훗날 영락제)이 서울〈금릉〉에 조회하기 위하여 편안한 연(轝)을 타고 말을 몰아서 빨리 달려갔다. 태종이 말 위에서 내려 길가에서 인사하니, 연왕이 수레를 멈추고 재빨리 연의 휘장을 열고서 오래도록 온순한 말로 서로 이야기하다가 지나갔다.


이렇게 궁합이 좋았던 두 사람의 통치 기간이 겹친 시기였던만큼 조선과 명의 관계는 매우 좋았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이는 사대주의에 대한 평가와 직결되는 부분이기 때문에 설왕설래 비판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태종은 조선의 주권을 위협할만한 요소들은 홍무제 대의 증거까지 들이대며 철저히 막았다. 명이 주도하는 질서에 앞장서 참여했고, 영락제와의 개인적인 친분도 어느정도 작용했는지 조공 무역을 1년에 3회[68] 로 늘리는 파격적인 환대를 받게 된다.[69]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그 외에 정도전이 요동 정벌을 계획하던 시기는 명도 내부 사정으로 한창 혼란스러웠던 시기라서, 정도전의 발안대로 했다면 요동을 얻을 수 있었을텐데 태종이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내전을 벌여서 좌절되었다는 비판적 시각도 있긴 하다.[70]

7. 인물됨과 일화[편집]

과거 급제자 출신인 정치 10단[71]의 군주

태종은 역사적으로도 드물지만 조선의 역대 군주들 중에서 유일하게 과거에 붙어 관리 일을 해보았던 사람이다. 요즘에 비유하자면 행시 출신으로 공무원 생활을 좀 해 본 사람이 대통령이 된 경우. 세조영의정을 역임한 적이 있긴 하나 이건 찬탈에 가까워서 비교하기엔 무리가 있다. 학식이 좀 떨어지던 무인 집안 출신인 전주 이씨 가문에서 최초로 나온 급제자라서 이성계가 눈물나게 좋아했을 정도로 굉장히 머리가 비상한 인물이었다.

태종은 사람을 다루는 용인술이 뛰어났고 산전수전 다 겪은 끝에 왕위에 올랐던만큼 신하들을 가지고 노는 것을 즐겼던 듯하다. 종종 깜짝 양위 쇼를 벌였다. 조선 시대에 국왕이 손쉽게 일으킬 수 있는 왕권 강화 이벤트가 양위 소동이었다. 이 경우 세자부터 신하들까지 전부 '죽여주시옵소서 전하' 모드가 되기 때문에 왕권은 하늘을 찌른다. 문제는 이를 남발할 경우 반대로 세자의 기반이 약해진다는 것으로, 이런 점에서 최악의 본보기가 양위 소동을 자주 왕권 강화의 수단으로 사용하였던 선조, 영조이다. 이런 정치적 이벤트는 왕권 강화의 일환이자 신하들의 충성도 테스트였을 확률이 높지만, 이런 방식으로 허구한 날 대전 밖에서 "양위는 아니 되옵니다!"나 "역적 누구 누구를 벌하소서!"를 외치는 신하들을 보며 나름의 희열도 느꼈던 듯 하다. 물론 신하들은 대단히 피곤했을 것이다. 다만 충녕이 후계자로 확정된 후엔 진짜로 양위를 했다.

신하들의 머리 꼭대기에서 놀며 각종 권모술수로 신하들을 쥐락펴락하는 것으로는 조선의 임금들 중에선 최강자. 신하들을 괴롭히기로 악명(?) 높은 세종대왕도 이 점에서만큼은 태종에 미치지 못할 지경이다. 부연 설명을 덧붙이자면, 세종의 경우는 압도적인 공부량에 기반한 방대한 지식을 이용해 상대를 논파하는 지식인의 괴롭히기다. 반면 태종은 워낙에 다사다난한 삶을 살았기에 신하들의 행동 반경을 손쉽게 파악할 수 있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빌미가 잡히면 숙청하는, 책략가의 괴롭히기다. 물론 태종도 세종 못지 않게 아는 것이 많았다. 아래의 수강궁 에피소드도 있지만 자신은 아는데 신하들이 모르는 것으로 농락하기도 했다. 그리고 세종도 마음만 먹으면 태종과 같은 화법으로 상대를 찍어누를 수 있었는데, 훈민정음 반포 당시 최만리 등 반대 신하들을 갈구는 방식이 아버지와 많이 비슷하다(...)

또한 외척 및 공신들의 숙청을 진행할 때의 연기력(?)도 매우 탁월했다. 태종이 숙청을 진행할 때의 패턴이 따로 있을 지경. 그리고 이 패턴은 후대의 조선 국왕들이 두고두고 써먹는 신하 길들이기의 방법 중 하나가 된다.

  • 태종 본인이 정보를 흘리거나, 최측근을 통해서 숙청 대상을 처벌할 만한 꼬투리들을 일반 신하들에게 흘려낸다. 신하들이 이 정보를 입수하고 '○○란 자에게 죄가 있으니 마땅한 처벌을 내려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 태종은 해당 인사에 대한 정보를 다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 놀라는 척 한다. '왕실의 외척', 혹은 '공이 큰 공신이므로 함부로 처벌할 수 없다'라며 처벌에 반대하는 척 한다. 그러면서도 처벌을 반대하는 것은 자신의 본심이 아님을 은근슬쩍 암시한다.

  • 신하들은 여기에 낚여서 처벌을 내려야 한다고 더 강하게 주장한다. 그리고 태종은 '신하들의 요구가 워낙 강하므로 어쩔 수 없이' 처벌을 한다. 단, '그래도 외척인데/공을 세운 공신인데 더 심한 처벌을 어찌 내리란 말인가?'라고 연기하며 처음엔 가벼운 처벌을 내리도록 한다. 그 와중에도 추가 정보를 흘려내서 신하들이 더 강한 처벌을 내리도록 유도한다.

  • 신하들은 또 여기에 낚여서 더 강한 처벌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태종은 단계적으로 조금씩 처벌의 강도를 높여나가지 한번에 처벌을 완료하지 않는다.

  • 태종 자신이 원하는 수준으로 처벌의 강도가 정해질 때까지 이 과정을 반복한다. 이를 통해 '나는 외척과 공신들을 소중하게 대하고 싶지만 신하들의 주장 또한 따라야 하고 법도를 지켜야 하므로 내 본심은 아니나 어쩔 수 없이 처벌을 내림'이라는 명분을 확보한다.

  • 숙청 완료.

7.1. 심술쟁이 군주[편집]

앞서 언급 했듯이 태종 이방원하면 무인의 이미지를 더 많이 떠올리지만 실제 그는 고려 시대의 과거에 급제한 문관, 즉 엘리트 공무원 출신이다. 이런 점에서 유추해볼 때 태종의 성리학 수준은 적어도 신료들과 비등했다 볼 수 있다. 이런 지식과 말꼬리 잡아 물고 늘어지는 치사한 수법, 게다가 여말 시절 관직 생활을 하면서 얻은 경험으로 정계의 여러가지 역학 관계를 모조리 꿰뚫어 보는 능력도 상당했다. 단순히 관직 생활만 한 것이 아니라, 정도전과 함께 아버지 이성계의 정적들을 견제하고, 조선을 건국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다. 또한 그 스스로도 대권을 잡기 위해 숱한 피의 숙청과 왕자의 난을 겪으며 단련된(?) 사람이니, 권력관계나 정치에서 보이는 암투에 대해서는 도가 텄다고 볼 수 있다. 거기에다 이라는 권위와 위상까지 더해지면 신하들은 도저히 버틸 수가 없다. 신하들을 갖고 노는 일화는 실록에도 많이 전하는데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계속 거절하는데도 간언이 또 올라오자 예기의 한 구절을 인용해 '옛말엔 세 번 간언해서 왕이 듣지 않으면 간관직을 그만둔다던데 그대는 왜 아직도 나오는가? 어서 짐싸서 다른 나라로 가거라' 같은 말을 하기도 했다.[72] 이 구절은 부모가 잘못할 때와 군주가 잘못할 때를 구분해서 논하는 구절인데, 부모에게는 간하고 듣지 않으면 그대로 따르는 것이 도리지만 군주에게는 세 번 말한 걸로 군신간의 의리는 다 지켰으니까 그만하라는 얘기. 사실 계속 간언하다가 목이 날아갈 수도 있으니 도리와 목숨을 모두 챙기려는 타협책에 가깝다. 문제는 예기가 쓰였던 고대 중국에서는 관직에서 물러나 다른 나라 가는 게 일종의 동종업계 이직처럼 제법 가벼운 개념이었지만(풍습도 비슷하고, '나라'의 크기도 작고 수는 많고) 시대가 변하면서 현실이 달라진다. 애초에 조선 시대 쯤 되면 물러나서 갈 다른 나라가 언어도 풍습도 너무 다른 명나라 아니면 일본밖에 없다.... 그리고 이게 진짜 신하들 불쌍하게 만드는 말인 게, 예기는 해당 문서에서도 나오지만 공자로부터 시작해서 한나라 시대에 이르기까지 집대성된 방대한 양의 경전이다. 사서 중 대학이나 중용이 예기의 '일부'다. 비유하면 정치학 교과서 같은 건데, 그 중에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한 구절 가져와서 꼬투리잡는 거다. 기억을 하는 사람도 별로 없고, 지키는 사람도 없는 그런 구절을 언급한 것.

  • 별궁 짓는 것을 신하들이 반대하자 '아니 그러면 지금 집도 절도 없는데 나더러 길바닥에서 이슬을 맞으면서 잠을 청하란 것이냐?'라고 버럭 했더니 신하들이 무서워서 우리 전하께서 성군이 되긴 글렀다며 통곡을 하자(!) '그냥 화 좀 내 봤다.'라며 넘어간 적도 있다. 참고로 결국 별궁은 자신이 짓고 싶었던 대로 지었다(…).

  • 창덕궁에 새로운 정자를 지어 놓고 당시 도승지였던 황희를 통해 신하들에게 "이번에 새로 지은 정자 이름을 뭐라고 지을까 하고 권근하고 의논했는데, 권근은 '청녕'이란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근데 난 이거보다는 '해온'이라는 이름이 더 마음에 든다. 그대들의 생각은 어떠한가?"라고 다른 신하들에게 묻자 그들은 "아이고 최고의 이름입니다 전하"으로 일관했다. 그러자 태종 가라사대, "임금이 뭔 말만 하면 신하들은 아부하기만 바쁘구나. 하여간 비위 맞춰주는데는 도들이 텄어. 쯧쯧. 권근이랑 다시 의논해서 결정하라."라고 받아쳤다. 결국 권근도 여기에 동의해서 정자 이름은 자기 뜻대로 해온이라고 지었다. 이 이야기의 출처는 태종실록 1406년 4월 9일자 기록.기사

  • 박자청이라는 신하는 대형 공사의 책임을 자주 맡아 태종의 신임을 받았는데, 어느 날 일꾼들과 현장에 앉아 있다가 자기보다 직급이 낮은 이중위가 자기 앞을 말을 타고 지나가자 건방지다며 그를 붙잡아 폭행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중위는 형조에 고발하여 형조에서는 박자청을 벌할 것을 청했다. 박자청은 태종에게 폭행 사실을 부인했고 태종도 박자청을 신임했기에 벌을 주고 싶지 않았는지 "박자청은 과인에게 폭행한 사실이 없다고 맹세까지 했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신하들이 "이중위도 맞은게 분명하다고 맹세했습니다?"라고 말하자 태종 왈, "이래서 맹세는 믿을 수 없어.이런 사소한 일에 일일이 죄를 주면 백성들이 안심하겠는가? 사직과 관련된 게 아니면 용서해야하노라!"참고로 사헌부에서도 박자청을 죄줄 걸 청했지만 박자청에게 벌을 내렸다는 기록은 없다. 결국 어물쩍 넘어가 버린 모양. 근데 이것은 엄밀히 말해서, 일이 좀 커지면 이 박자청이란 사람은 임금에게, 그것도 태종 이방원에게 거짓말을 한 기군망상죄 혐의를 받을 수도 있는 일이다(...)왕권에 위협이 가지 않는 인물이다 싶으면 어지간한 것은 그냥 넘겼던 임금다운 일이다.

  • 상왕이 된 후 이랑 강원도 평강에 놀러갈 계획을 세우고 영의정 유정현, 좌의정 박은 등을 불러 "내가 평강에 놀러갔다 오고 싶은데 수행원을 조금만 데려갈 건데 괜찮겠지?"라고 묻자 유정현은 "지금 한창 농사철인데 수행원이 적어도 임금이 두 분이나 가시면 곤란할 듯 합니다."이라며 반대의 뜻을 밝혔고 박은은 가도 좋다고 말했다. 태종은 바로 다음과 같이 말해서 박은을 무안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영의정의 말은 내가 새겨 듣겠다. 그런데 좌의정의 말인들 어찌 망령된 신하라고 하겠는가''[73][74]

    박은은 태종의 의중을 잘 읽어서 태종의 비위 맞추기 선수였다. 태종도 박은에게 힘을 실어 줘서 박은의 라이벌 격인 세종의 장인 심온 집안을 박살냈지만, 태종의 말은 박은의 아부를 돌려서 깎아내린 것. 세종 역시 박은을 두고 "아부밖에 모르는 신하"라고 힐난했다. 다만 그 덕분에 박살나지 않을 수 있었다고 볼 수도 있는데 너무 유능했어도 숙청의 칼날을 피하기 어려웠을 테니까 말이다.

  • 역시 상왕이 된 후에 태종이 거처할 궁궐의 이름을 신하들이 수강궁(壽康宮)이라고 지어 올렸다. 목숨 수(壽)편안할 강(康)[75]을 쓴 좋은 의미의 궁궐 이름이었는데 이 궁 이름을 듣고 박은 등을 불러서 "수강궁이라면 옛날 북송 광종이 6년간 유폐되었다가 죽은 궁 이름이다. 그런 이름을 왜 이 궁에 붙이는 건가? 이것은 <송감>[76]이라는 역사책에 나오는 얘기다"라고 면박을 주었다. 신하들이 당황하며 궁 이름을 다시 지어 올리겠다고 용서를 빌자 태종은 쿨하게 넘어 갔다.[77] 아버지에게도 공부 안 한다고 면박받고 그 아들에게도 공부 안 한다고 면박받은 조선 초기 신료들이 이쯤 되면 불쌍할 지경.

  • 목인해라는 인물이 공신의 자손이자 왕실 인척이었던 조대림이 역모를 꾀하려 한다는 무고 사건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조대림은 개국 공신 조준의 아들이자 태종의 사위. 그는 당시 종친 중에서 유일하게 군부에 있었던 인물이었다. 이는 태종이 군대를 장악하기 위해 일부러 조대림을 군부에 넣어두었기 때문이다. 태종은 목인해의 고변 이전에 정보망으로 이미 무고 사건이라는 걸 알았는데. 그걸 뻔히 알면서 내버려 두었다가 역모 고변이 일어나는 시점에 조대림을 본인이 역모로 몰아 구금시킨 다음 맹사성 등에게 암묵적으로 지시를 내려서 조대림에게 곤장을 때리게 했다. 그 다음에 조대림이 무고하다는 걸 본인이 직접 밝힌 다음에 맹사성을 종친을 모함해 왕실을 능멸했다는 이유로 재빨리 가두고 사형 선고 까지 내렸다. 결국 두고 볼 수 없었던 조정 중신들의 사정 끝에 맹사성을 살려주는 결정을 내리는데 태종은 맹사성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고 사형장에 끌려갈 때 사면 결정을 내려서 망나니 칼이 목에 닿기 직전에 맹사성을 살려줬다고 한다. 조대림 사건 참고.

  • 즉흥적인 면모도 있었다.

    • 출중해서 우열을 가리기 어려운 세 장의 과거 시험 답안지 중 하나를 장원으로 뽑아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사전에 검사한 시험관들은 셋 모두 수준이 거의 비슷하나 하나는 아주 약간 모자라고, 나머지 둘의 수준이 비등하다고 평가했다. 이에 태종은 답안지를 읽어보지도 않고 "내가 집는 게 장원이야!"라며 한 장을 집어 장원 급제를 시켰다. 이 행운의 당첨자(?)가 바로 세종 시대의 유명한 학자이자 정치가인 정인지다. 다만, 이 일화에 경우 실은 이미 정인지로 합격자를 내정하고서는 쇼맨십으로 저랬다는 분석도 있다.

    • 개성에서 한양으로 다시 돌아올 당시 도성을 다시 바꿀지에 대해서 논의가 오갔는데, 기존의 한양과 하륜이 주장한 무악(현대의 신촌)이 후보로 올랐는데, 이에 대해 태종은 동전으로 점을 쳐보겠다고 했고, 종묘에서 점을 친 결과 한양을 도성으로 유지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다만 이에 대해선 어차피 태종은 한양에 대해 마음이 가 있었으므로, 점을 쳐서 결과가 아니었더라도 어차피 한양으로 밀고 나갔을게 뻔하다는 것이 후대의 해석이다.

7.2. 사냥 애호가[편집]

정쟁(政爭)에서 참아야 할 일이 있을 때는 몇 년이고 참아가며 엄청난 자제력을 발휘했으면서 자기 취미에 관해서는 자제심이 거의 없었던 모양으로 "전하께선 사냥을 너무 다니시니 걱정입니다."라고 간한 기사가 자주 나온다. 상왕이 되고 나서도 사냥을 가려고 은근슬쩍 아들인 세종대왕이 살이 너무 쪘으니 함께 사냥을 나가야겠다며 아들까지 끌어들여서 핑계를 댈 정도.

그도 그럴 것이 왕조 시대 왕의 사냥은 많은 이들을 피곤하게 했다. 왕을 수행할 수행원들은 물론이고, 사냥 가는 지역 수령은 임금이 자기 관내에 들어오니 당연히 초긴장 상태. 더욱이 그 지역 주민들은 왕의 사냥 준비를 도맡아 해야 했으니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게다가 많은 군사들이 동원되어 몰이꾼 역할을 했으므로 여기에도 막대한 비용이 들었다. 사냥터를 확보하기 위해 농지를 싹 갈아엎느라 한해 농사를 망치는 것은 기본.

하여튼 이런 간언에 응수하는 것도 정말 고단수의 면모를 보여준다. 어떤 때에는 "내가 과거에는 붙었어도 원래 무인 집안 사람이라 가끔 몸을 움직여줘야 기가 잘 돈다"는 핑계를 대고, 어떤 때에는 "내가 원래 대궐에서 자란 사람이 아닌데, 매 사냥은 잠저에서 살 때부터 즐겨하던 것"이라는 핑계를 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사간 대부 윤사영이 "3일 전에 우박도 내리고 분위기도 안좋아서 반성부터 하셔야 되는데 전하는 왜 사냥으로 즐거움만 추구하시느냐"고 따지자, 태종은 "그래도 한 번 해볼건데 그대들이 날 강제로 못하게 할것이냐"고 고집을 꺾지 않았다. 《태종실록》 권12 6년 9월 25일 신사 1번째 기사

그런가 하면 <대학연의>를 펴들고 "이 책에서도 사냥을 권장하고 있는데 왜들 지랄임?"이라고 온갖 핑계를 다 대서 결국 실컷 즐기고 돌아오곤 했다. 《태종실록》 권6 3년 10월 1일 을사 1번째 기사 그런데 일반 행정에서 자기 의견을 관철할 필요가 있을 때나, 자기가 좀 배운 사람이라는 티를 낼 때에는 앞서 보인 모습과는 반대로 "내가 무인 집안이긴 해도 과거 급제자 출신이라서…."라는 식이다. 이쯤 되면 도저히 말로는 이길 수가 없다.

다만 사초를 기록하는 사관들을 두려워하여 사냥을 가도 "지금 나 사냥 온 거 사관들이 아는가 모르는가?"고 끊임없이 물어봤다고. 한 번은 사냥을 나갔다가 말에서 떨어진 적이 있었는데, 다치지는 않았지만 그보다 부끄러운 것이 더 신경쓰였는지 "사관한테 내가 낙마했단 얘기 하지 마라."라고 지시를 내렸다.

...라고 실록에 적혀있다. 즉 낙마한 사실과 그 얘기 하지 말랬단 사실까지 고스란히 사관이 듣고 사초에 적어 실록으로까지 편찬된 것이다. 그야말로 철혈 군주의 굴욕. 이 기록은 결국 태종실록 태종 4년(1404년) 2월 8일자 기사# 에 남아 있다. 조선 왕조 실록과 사관의 위대함을 언급할 때 제일 많이 인용되는 기록 중 하나[78].

7.3. 여성 편력[편집]

이미 즉위 다음달부터 조선왕조실록에 아내의 투기를 피해서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 할 수 없어 경연청으로 열흘 동안이나 도망가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정종실록》 권6 2년 12월 19일 기유 3번째 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ba_10212019_003[79][80]

여자에 관해서는 그의 가족관계를 보면 잘 나타나지만 한 번은 김우와 황상이라는 무관이 한 기생을 두고 싸우는 폭력사태가 벌어지자 황상과 김우의 수하 양춘무 등 4명을 벌줬는데[81] 그래놓고 그 기생은 자기가 데려갔다(...)[82] 이것과 비슷한 일화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에도 나온다. 다만 거기서는 그게 화가 되어 신하들이 역모를 꾸며 결국 나라가 망한다(...).

'영웅호색'이라는 말에 부합되는 인물이었던 만큼 사냥과 여자를 광적으로 좋아했다. 자녀 많은 조선 군주 랭킹 1위가 태종. 슬하에 세종을 포함하여 12남 17녀(29명). 참고로 2위가 성종의 16남 12녀(28명), 다음이 선조의 14남 11녀(25명), 4위로 정종의 15남 8녀(23명)이다. 정종과 태종 두 형제의 소생 수만 해도 50명을 넘는다. 흠좀무.

상왕으로 물러난 이후에도 후궁들을 들였는데, 그 중 신순궁주는 본인이 직접 유배 보낸 이직의 차녀었다[83]. 이직의 장녀는 원경왕후의 남동생인 민무휼의 부인이었으니, 한마디로 자기 처남댁의 동복 자매를 첩으로 들인 것. 또한 신순궁주는 당시 한 번 결혼을 했던 과부였고, 같은 시기에 후궁으로 들인 혜순궁주 또한 과부였으니, 이를 통해 여성의 재가를 금기시 하지 않았던 고려시대의 문화가 아직 남아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간택후궁들도 여럿 들였지만 궁녀 출신 승은후궁도 많았다. 특히 원경왕후의 나인 출신인 효빈 김씨신빈 신씨가 있다. 우연인지 아닌지 모르겠으나 태종이 총애한 후궁들은 원경왕후의 궁녀였다.

이처럼 여성 편력이 심했으니 자연히 부부관계가 매우 나빴다. 즉위 초기부터 원경왕후 민씨와 피터지는 부부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하루가 멀다하고 남편이란 작자가 젊은 궁녀들을 처소로 끌어들였으니. 보통의 내명부 여인이라면 참고 견뎠겠지만, 원경왕후는 조선 역사상 가장 활동력 강하고 다혈질 성향인 왕비였다는 점이 문제.[84] 민씨는 태종에게 바가지를 긁고, 태종 역시 그에 못지않는 성격이라서 똑같이 화내다 보니 부부싸움으로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참다못한 원경왕후태종의 승은을 입은 궁녀를 벌주자 대노한 태종이 교태전 소속 궁녀와 내관들을 모두 궐 밖으로 내친 일도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궁녀와 내관들을 내친 것이지만 원경왕후의 수족을 잘라버린 것이다.

태종은 그 이후에도 여자문제로 원경왕후와 박터지게 싸웠다. 원경왕후는 남편의 외도에 식음을 전폐하며 눈물을 쏟았지만 태종은 보란듯이 신하들에게 후궁의 법제화를 논의케 하였다. 그리고 제후는 9명의 부인을 둔다는 고사를 들며 가례색까지 설치해 9명의 후궁을 들였다. 당연히 원경왕후는 크나큰 배신감을 느꼈고 이후에도 마찰은 계속되었다. 그나마 마지막 배려인지 당시 태종의 첫 간택후궁이었던 의빈 권씨 과의 성대한 혼인식만은 취소하고 단순히 궁궐로 들이는 것만 행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계속 후궁과 궁녀를 들였다.

유명한 예가 야사에도 자주 등장하는 효빈 김씨와 관련된 이야기다. 효빈 김씨는 본래 원경왕후의 친정에서 거느리던 노비였는데, 미모가 상당해서 태종이 그녀와 동침해 태종의 아이를 임신했다.[85] 그러자 원경왕후는 친정에 일러 김씨를 학대하게 했다. 실록의 표현에 따르면, 한겨울인 음력 12월에 만삭인 김씨를 문바깥에 방치하고,[86] 아기를 낳은 뒤에도 난방이 되지 않는 방에 방치했다. 몇몇 노비가 동정심에 이불 등을 가져다 줘서 김씨는 간신히 아기를 낳아 살릴 수 있었다.[87] 이 아기가 태종의 서장자인 경녕군 이비이다. 태종은 차마 왕비가 투기 때문에 이런 짓을 직접 저질렀다고 공표하기는 곤란해서[88], 민무휼과 민무회가 이런 학대를 멋대로 행했다고 죄를 뒤집어 씌웠다. 물론 이에 대해 원경왕후가 항의한 것은 뻔하다.

계속되는 아내의 바가지에 지친(...) 태종은 침소를 경연하는 곳으로 옮겨버리고 원경왕후 대신 궐 안의 살림을 대신할 규수를 찾아보라고 명을 내린다. 내명부를 다스리는 권한을 원경왕후에게서 빼앗겠다는 선전포고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당연히 원경왕후는 식음을 전폐하고 드러누웠고, 태종의 결정엔 절대로 간섭하지 않던 형인 상왕 정종마저 나서서 "나는 아들이 없어도 젊은 날의 정으로 삽니다. 주상은 아들도 많으면서 왜 또 장가를 들려 합니까" 하며 만류했다.[89] 위에도 언급하였듯이 결국 가례색까지 설치했던 후궁간택은 정종의 만류로 없던 일이 되기는 하였으나 태종은 상왕으로 물러난 이후에도 계속해서 간택후궁과 승은후궁도 여럿 들이는 등 여자문제로 정처인 원경왕후의 속을 꽤나 썩였다...

하지만 이렇게 투닥거렸음에도 불구하고 태종과 원경왕후와의 자식이 4남 4녀(+4명[90])[91] 태종 즉위 후 둘의 관계가 급격히 냉각된 걸 생각하면... 게다가 성녕대군은 태종과 원경왕후 둘 다 너무나도 사랑해서, 12살에 결혼했음에도 궐 밖으로 보내긴커녕 죽을 때까지 궐 안에서 "어이구 내 새끼" 하며 키웠다. [92]으로 결코 적지 않고 죽을 때까지 해로한 것을 보면, 이 부부의 애증 관계는 참으로 지독했을 것이 틀림없다. 자세한 사항은 태종(조선)/가족관계 문서를 참조.

여담으로 이런 여성 편력은 과도한 외척의 권력 남용을 견제한다는 목적도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위에 나와있듯 태종은 공신들이 잘못할 땐 벌을 주더라도 외처로 보내는 정도로 끝냈지만, 외척들에겐 정말 심할 정도로 자비가 없어서 민제 일가 및 심온이 과하다 싶을 정도로 고생 + 억울한 죽음을 맞았다. 이런 사람이니 중전에 대한 견제 목적[93]으로 여자를 밝히는 정치적 고단수가 숨어있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그래도 어느 정도는 그냥 여자가 좋아서인거같은데

7.4. 아들바보[편집]

“옛 사람이 말하기를, ‘나라에 훌륭한 임금이 있으면 사직(社稷)의 복(福)이 된다.’고 하였다. 효령대군(孝寧大君)은 자질(姿質)이 미약하고, 또 성질이 심히 곧아서 개좌(開坐)하는 것이 없다. 내 말을 들으면 그저 빙긋이 웃기만 할 뿐이므로, 나와 중궁(中宮)[94]은 효령이 항상 웃는 것만을 보았다[95]. 충녕대군(忠寧大君)은 천성(天性)이 총명하고 민첩하고 자못 학문을 좋아하여, 비록 몹시 추운 때나 몹시 더운 때를 당하더라도 밤이 새도록 글을 읽으므로, 나는 그가 병이 날까봐 두려워하여 항상 밤에 글 읽는 것을 금지하였다[96]. 그러나, 나의 큰 책(冊)은 모두 청하여 가져갔다. 또 치체(治體)를 알아서 매양 큰 일에 헌의(獻議)하는 것이 진실로 합당하고, 또 생각 밖에서 나왔다. 만약 중국의 사신을 접대할 적이면 신채(身彩)와 언어 동작(言語動作)이 두루 예(禮)에 부합하였고, 술을 마시는 것이 비록 무익(無益)하나, 그러나, 중국의 사신을 대하여 주인으로서 한 모금도 능히 마실 수 없다면 어찌 손님을 권하여서 그 마음을 즐겁게 할 수 있겠느냐? 충녕은 비록 술을 잘 마시지 못하나 적당히 마시고 그친다[97]. 또 그 아들 가운데 장대(壯大)한 놈이 있다. 효령대군은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니, 이것도 또한 불가(不可)하다[98]. 충녕대군이 대위(大位)를 맡을 만하니, 나는 충녕으로서 세자를 정하겠다.”
유정현 등이, “신 등이 이른바 어진 사람을 고르자는 것[擇賢]도 또한 충녕대군을 가리킨 것입니다.” 하여, 의논이 이미 정하여지자, 임금이 통곡하여 흐느끼다가 목이 메었다. -<태종실록> 태종 18년(1418년) 6월 3일


이러한 철혈 군주의 이미지와는 달리 자신의 아들 앞에서는 매우 약했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는 기록이 의외로 꽤 많다. 양녕대군의 수없는 망나니 짓도 끝까지 참으려고 했으며, 결국 양녕을 폐세자 시킨 후에도 당시 태종과 사이가 매우 안 좋았던 중전의 핑계를 대며 양녕을 자신의 곁에 두며 가능한 보호하려고 했었다. 위의 기사에서 보듯이, 양녕을 폐하고도 목이 메도록 울었을 정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종이 양녕을 폐세자시킨 것에서는 자식의 목숨도 포기하는 냉혈 군주의 모습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하지만 수많은 피를 흘리며 어렵게 새 나라를 건국한 입장에서는 종묘 사직을 위해 불가피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마도 정몽주나 정도전을 죽일 때처럼 폐세자는 불가피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역사의 뒷이야기를 아는 우리들은 잘 느끼지 못할 수도 있는데 태종이 양녕을 폐한 것은 당시 기준으로 사실상 사형 선고를 내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왕조국가에서 한번 후계자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 멀쩡히 살아 있다는 것은 차기 왕에게 있어서 위험 요소 1순위이며, 만약 세종의 치세가 좋지 못하다면 거기에 반발하여 난이 일어났을 때 반란 세력이 양녕을 옹호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명분도 혈통도 멀쩡하니 양녕을 구심점으로 사람이 뭉치기도 쉬울테고 설령 다른 사람의 뜻이 없더라도 폐세자가 된 양녕대군 스스로가 앙심을 품고 반란세력의 주축이 될 가능성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태종과 주변 사람들이 살아왔던 여말선초 시기에 우왕, 창왕, 공양왕 그리고 1차 왕자의 난에서 희생된 이방석까지 왕의 자리에 있었거나 후계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실권을 잃거나 폐해지면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봐왔을 것이다. 따라서 태종이 죽은 후 세종이 양녕대군을 제거하는 것은 당시 모든 사람이 생각하는 매우 당연하고 바람직한(?) 시나리오였기 때문에 태종 입장에서는 아들을 죽이겠다는 선고나 다름없었던 것. 실제로 태종은 양녕이 종묘 사직에 해가 된다면 죽여도 좋다라는 유언을 남겼고 세종 때에도 양녕대군을 처형하라는 상소가 수 없이 이어졌다. 물론 세종은 양녕대군을 죽이지 않고 끝까지 곁에 두어 모두의 예상을 빗나가게 했다.

양녕이 사라졌지만 돌아왔을 때 양녕을 꾸짖는 모습은 냉혹한 철혈 군주였던 그 역시 평범한 아버지였음을 보여준다.

양녕이 어둘 녘에 성안에 들어와 스스로 부끄러워서 옷소매로 낯을 가리고 수강궁에 나아가니, 상왕은 보고 슬픔과 기쁨에 잠겨 순순히 훈계하며, 또 이르기를, "네가 도망했을 적에, 주상이 듣고 음식을 전폐하며 서러운 눈물이 그치지 아니했다. 너는 어찌 이 모양이냐. 너의 소행이 너무도 패악하나 나는 특히 부자의 정으로써 가련하게 여기는 것이다."고 하였다. - <세종실록> 세종 1년(1419년) 2월 1일


요즘 식으로 말하면 방탕한 아들 보고 '이놈아. 니놈 가출했을 때. 네 동생은 밥도 안먹고 울기만 했는데(동생 보기에 부끄럽지도 않냐), 아빠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네놈이 이렇게 막나가도 네놈 인생이 어찌될지 걱정하는 사람은 아빠밖에 없다!.'라고 탄식하는 여느 아버지와 다를 바 없는 모습. 그래 놓고 이 말을 한 이틀 뒤에 양녕에게 "내가 눈물을 흘린 것은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에 부끄러웠기 때문이다"라고 훈계하기도 했다.

양녕이 세자 시절, 기생 봉지련과 정을 통하는게 들통나서 봉지련이 쫓겨나자 식음을 전폐한 일이 있다.[99] 잘못을 하고도 오히려 떼를 쓰니 혼을 내야하지만 아들에게 한없이 약한 태종은 봉지련도 풀어주고 비단과 고기까지 내려가며 아들을 달래기도 했다.

1회 면피용이나 다름없던 양녕의 반성을 알면서도 매번 믿으려 애썼고, 하도 공부를 안 하려는 양녕을 대전 옆에 두고 공부를 열심히 하는지 감시하라는 신하들의 주청에도 그러면 오히려 부자 간의 사이만 나빠진다며 끝까지 아들을 배려해주었다.

거기다 워낙 고기를 좋아하던 세종대왕이 큰아버지인 상왕 정종의 상중에 고기를 잠시 끊자 "주상이 고기반찬 없이 식사를 하시다니!"라고 기뻐했다는 기록도 있다.[100] 또한 유언으로 '내 상중에는 고기 반찬 드시게 해라' 말까지 남길 정도. 그 뿐만 아니고 한창 신덕왕후의 압박으로 입지가 위태로울 때 위의 세 아들은 잃고 넷째 양녕은 외가에 보내고 다섯째 효령은 다른 집에 맡기고 슬하에 남은 거라곤 갓 태어난 충녕대군 뿐이라 애지중지하며 길렀다고 한다.

형제들과 꽤 터울을 두고 태어난 막내인 성녕대군의 경우는 몸이 약한 것도 있어서 그랬는지 결혼한 왕자는 모두 궁궐을 나가서 살아야한다는 법도를 깨고 결혼시킨 후에도 옆에서 끼고 살았다. 결국 병약했던 이 아들이 병을 앓다가 14살에 요절했을 때는 그야말로 낙심천만이었던 듯. 참고로 양녕대군은 막내동생이 요절해서 부모형제가 모두 슬퍼할 때 사냥하고 놀러다니고 술을 마셔댔다. 여기에는 태종도 인내심이 바닥나서 노발대발해 양녕에게 "사람의 마음이 없다."라고 했고 앙녕의 스승까지 "부모도 못 가르치는 걸 스승이 가르칠 수는 없겠지만 벌하지 않을 수도 없다."라고 책임을 물어 벌했다.

태종은 조선의 국시인 숭유억불 정책을 매우 철저하게 시행했고 심지어는 1차 왕자의 난 때 죽은 자식들과 사위를 애도하기 위해 태조가 드리는 불공에 대해서도 잔소리를 할 정도로 불교를 혐오했는데 정작 성녕대군이 죽고 나서는 대자사(大慈寺)라는 절을 세웠다. 그것도 처음에는 한양 안에다가 절을 지으려 했다!!![101] 태종은 이 대자사를 대군의 무덤을 살피는 원찰로 삼았는데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여 부지와 절에 딸린 전답이 수만평이었고 그 규모가 임진왜란으로 소실되기 전까지는 조선 최대규모였다고 할 정도. 아직도 그 사적지에는 당시 토기 파편이 어마어마하게 나온다. 죽은 성녕대군의 부인에게도 변한국대부인이라는 작호를 주고 후하게 대접했다. 다른 대군부인이 부부인 작호를 받은 것과 차이가 있다.

이후에도 성녕대군의 처갓집 사람들을 보면 아들 생각이 난다면서 슬퍼했고 거처를 옮기려고 했을 때도 지나가는 길에 성녕대군의 집이 있어서 울까봐 못가겠다고 중지한 적도 있다. 죽을 때도 세종에게 성녕대군의 처갓집 사람들을 공신의 예로 대우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는데 그 덕에 태종과 세종 시절에 그 집안 사람들은 각별한 대우를 받았다. 심지어는 14살에 죽은 성녕대군이 제삿밥 못 먹을 것을 걱정해서 양자를 들여서 후사를 이으려고 시도했다. 그 당시만 해도 그런 전례가 없었기 때문에 그만둘 수 밖에 없었지만 결국 세종대왕 이후에 자신의 아들을 성녕대군의 양자로 입적시켰다.

태종은 양녕 위로 아들이 셋이 더 있었는데 모두 어린 시절에 죽어버렸던 기억 때문인지 자식들에게 무르게 대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도, 태종 자신이 형제들에게 칼끝을 겨누고 피바람을 불러 일으킨 왕자의 난 중심에 있었기에 자기 아들들에게는 이러한 형제간의 피바람이 없기를 기원했기에 이런 태도를 보여줬다고 할 수 있다. 특히나 양녕을 폐세자 하는데 심각한 고민을 하는 것은 더더욱. 첫째인 양녕을 폐세자 시켜버리고 셋째를 국본으로 세우고 왕위를 잇게 한다면? 필시 양녕이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왕자의 난의 주인공이었던 태종이니 만큼 필히 이 부분에 걱정을 했을 듯.

아들에게 극진했던 것 때문이었는지 이후 세종은 국가 정책을 결정할 때도 태종 시기의 예를 들고 아버지께선 이랬을 것인가 하는 대목도 많이 보이고, 실록이 완성되었을 때는 실록을 보고 싶어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무려 2번이나 태종실록을 보려고 시도한 적이 있다. 둘 다 주변의 반대로 보는 것을 단념하게 된다. 두 번째 시도 이후 이틀만에 갑자기 태종이 태조실록을 본 적이 있는지를 주변에 묻고 없다고 하니 그냥 넘어갔는데, 아무래도 선례가 있으면 자신도 태종실록을 볼 수 있는 명분이 생기기 때문으로 여겼거나 그냥 보고싶은 미련이 남아 한 말인 것으로 보인다. 이 사건은 연산군사례와 함께 실록을 왕이 보는 것은 윤리적으로 어긋난다는 선례(물론 후자는 반면교사)로 남게 되어 조선왕조실록 편찬이 왕권으로부터 보호받게 되는 원인이 되어준다.

충녕을 위하여 자신이 왕위에서 물러날 때쯤, 충녕이 정책을 펼칠 때 반대세력이 될만한 사람들을 모두 없애버렸다. 즉, 자신이 아들을 위해 아들이 져야 할 모든 짐을 다 지고 간 셈. 정말 극진한 부성애다. 세종대왕이 한국사 최고의 왕이라고 불리는데는 아마 태종의 희생도 많이 있지 않았을까? 한글을 쓰는 모든 이는 세종대왕은 물론이거니와, 형제와 공신을 척살해가면서까지 왕권을 강화시키는데 갖은 노력을 다한 태종과, 세종대왕의 어머니이신 원경왕후의 은혜를 입고 있는것이다. 이 부부 덕분에 세종이 태어나셨고, 세종께서 천재이셨기에 한글을 만드셨고, 태종 덕에 왕권이 강력했기에 한자가 있음에도 한글을 반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신권이 강력했다면 그놈의 유교때문에 독자적인 우리의 문자인 한글은 세종께서 만드셨더라도 반포는커녕 오랑캐하는 짓거리라 폄훼하며 그저 구전만 되었을 것. 실제로 최만리 등은 비슷한 상소를 올리기도 했고. 왕권이 강력했지만 학자들을 존중했기에 그나마 그들이 왕이 하시는 일에 대해 딴지 걸고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 사극에서 최만리 등이 악역으로 그려지는 것은 한글을 바탕으로 교육받고 생활하는 사람들의 원초적인 반발이기도 할것이다.

그리고 세종도 태종의 이런 점을 물려 받아서 그런지 막내인 영응대군을 늘 아꼈다고 한다.

7.5. 부엉이 트라우마[편집]

냉혹한 군주라는 이미지가 강한 태종이지만 의외로 부엉이를 몹시 싫어하고 심지어는 두려워 하기까지 했다[102].

태종 6년 8월 5일에 부엉이가 경복궁의 누각과 침전에서 울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그 며칠뒤인 8월 13일에는 부엉이가 경복궁 근정전에서 울었고, 그 다음날인 8월 14일에는 경복궁 침전에서 울었으며 그 다음날인 8월 15일에는 침전과 근정전에서 울었다고 실록에 기록되었다. 8월 18일에는 창덕궁 서쪽 액정에서, 8월 19일에는 전농시의 제기고에서 부엉이가 울었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연달아 부엉이가 나타나자 태종은 대단히 불안해했는데 9월 1일에 양녕대군에게 양위할 뜻을 내비쳐서 파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물론 양위 소동은 태종의 술수이기도 했으나 어쨌든 부엉이 때문에 신경이 거슬렸던건 분명한듯 하다. 부엉이 때문에 성밖으로 이어하려고{이주, 혹은 이사} 하자 대간에서 상소를 올려서 이를 반대했는데 태종은 이 상소에 대해서 이런 비답을 내렸다.

“몸을 삼가고 행실을 닦는 것이 비록 고론(高論)은 되지만, 내가 옛글을 보았더니 이어(移御)하였다는 글도 없지 않았다. 오늘날 야조(野鳥)가 집으로 들어오고, 또 지붕 위에서 우니, 술자(術者)가 말하기를, ‘다른 곳으로 피하여야 합니다.’하고, 또 근일에 태백성(太白星)[103]이 대낮에 나타나고, 다시 헌원성(軒轅星)을[104] 범(犯)하게 되어, 내 마지못해 이렇게 하는 것이니, 그대들은 많은 말을 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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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를 논할 정도로 부엉이가 파문을 일으킨 가운데 9월 3일에도 부엉이가 근정전에서 울었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부엉이에 노이로제에 걸릴지경이 된 태종은 여기저기로 이어를 하기도 하고 궁궐 수비대에게 잡귀를 쫓는 방상씨탈을 쓰고 경계 근무를 서게 했는가 하면 부엉이를 쫓으려고 한밤중에 궁 전체에 불을 환하게 밝히도록 명했을 정도였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부엉이는 불길한 새로 여겨지긴 했지만 태종의 반응은 거의 트라우마 수준인데 세간에서는 이를 두고 태종이 신덕왕후 강씨의 원혼이 부엉이로 나타났다고 여겨서 부엉이를 질색하고 무서워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고 한다.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서는 부엉이를 정도전의 환생으로 여겨 태종이 질색했다고 묘사되었다. 정도전이 태종의 최대 걸림돌로 나왔기 때문에 이를 부각시키는 극중 장치로 보인다.

7.6. 관대한 면모[편집]

외척이나 공신들을 냉정하게 때려잡던 모습과는 달리, 일반 백성들에게는 관대한 모습을 보였다. 철저하게 왕권에 위협이 될 자들만 숙청하고 그 외의 사람들에게는 매우 관대한 모습을 보인다.

  • 아이들이 혜정교 거리에서 공에다 주상(=태종), 효령군, 충녕군 등의 이름을 붙이고 차면서 놀다 잡혀온 일이 있었다. 일반인 이름 가지고 저래도 욕먹을 일인데, 저 시절은 왕정 시대에 군주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기 위해 피휘도 하던 시절이었고 특히 혜정교는 오늘날 광화문 교보문고가 있는 곳, 즉 궁궐 코앞에서 이런 놀이를 한 것이다. 그런데 태종은 관대하게 '아이들이 그런거 가지고 뭐' 하며 그냥 넘어갔고, '다시는 이 일을 말하지 말라' 며 뒷말이 나올 여지도 차단했다. 태종 25권, 13년(1413년 계사 / 명 영락(永樂) 11년) 2월 30일(기묘) 1번째 기사

  • 시골에서 상경한 '손귀생'이라는 사람이 창덕궁을 봤는데, 난생 처음 보는 크고 아름다운 건물에 감탄하여 멋도 모르고 들어와 돌아다니며 구경하다 광연루에서 붙잡혔다. 순금사에서는 장 80 대를 선고했는데, 장 80 대면 사실상 때려죽이는 것이다. 그런데 태종은 모르고 한 일을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며 방면했다. 태종 17권, 9년(1409년 기축 / 명 영락(永樂) 7년) 4월 18일(경인) 2번째 기사

  • 그리고 앞서 '조서[105]'라는 관리가 친구를 궐에 데려와 숙직실에서 같이 잔 일이 있는데, 친구가 아침에 나가려다 길을 잃고 헤메던 중 태종의 침전에 들어가 버렸다. 고관대작이라도 왕의 침전에 허락없이 들어가는건 매우 무례한 일이고, 암살의 위험도 있기에 큰 벌을 받을만한 일이다. 뜬금없이 외부인이 나타나서 궁인들이 기겁하고, 이 사람도 당황하여 '나가려 했다'고 변명했는데, 태종은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니 괜찮다' 라고 하고, '남들이 알면 법대로 처벌하자고 할테니 이 일은 알리지 말고, 넌 빨리 가라.' 하며 내보냈다. 이 일이 전해진 것을 보면 거기에 사관이 있었거나[106] 궁인들이나 태종 본인이 알리기는 한듯.

  • 1403년 5월 5일에 경상도 조운선(물길을 통해 조세를 한양으로 운반하는 배) 34척이 침몰해 사람이 죽는 사태가 발생했다.(해당 실록 기사) 실록을 보면 사망자가 정확히 파악되지는 않고 신하들이 천여 명이라고 말하고 있는 걸 보면 대단히 큰 사고였는데, 이 때 생존자 한 명이 도망가다가 붙잡혔는데, 머리를 깎고 이 조운을 운반하는 힘든 일에서 벗어나려고 했다는 말을 했다. 이를 듣고 태종은 이렇게 탄식했다.

    책임은 내게 있다(責乃在予). 만인(萬人)을 몰아서 사지(死地)에 나가게 한 것이 아닌가? 닷샛날은 음양(陰陽)에 수사일(受死日)이고, 또 바람 기운이 대단히 심하여 행선(行船)할 날이 아닌데, 바람이 심한 것을 알면서 배를 출발시켰으니, 이것은 실로 백성을 몰아서 사지(死地)로 나가게 한 것이다.

    그리고 "쌀은 아까울 것이 없지만 사람 죽은 것이 대단히 불쌍하구나. 그 부모와 처자의 마음이 어떠하겠는가"라고 탄식하면서 조운하는 작업이 힘들어서 도망치는 사람이 나오는 것도 당연한 것이라고 말했다. 한 신하가 "그렇다고 조세를 육로로 옮기면 어려움이 심합니다"라고 발언하자 태종은 "육로로 운반하면 소나 말이 수고를 할 뿐이지, 적어도 사람이 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고 한다.[107] 이 일은 세월호 참사 이후 이어지는 2016년의 정국을 비판하는 JTBC 뉴스룸앵커 브리핑에 인용되기도 했다.

8. 호랑이 등에서 내리다[편집]

1418년, 태종은 세종에게 양위하고 상왕이 되었다. 양위의 뜻을 내비치면서 신하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18년 동안이나 호랑이 등에 탔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 참고로 자신의 자발적인 의지에 따라 양위한 사람은 태종이 유일하다.[108][야사]그런데 군권만은 자신이 쥐고 있었다. 그리고 세종의 외척이 권력을 휘두르는 상황을 막기 위해 세종의 장인 심온을 사사하고 그 집안을 박살낸 것 때문에 그 당시 심온의 가문인 청송 심씨에서는 박은과 그의 가문 반남 박씨를 열렬히 비판하였다. 태종을 대놓고 비판할 순 없으므로 대신 심온 숙청을 주도한 박은을 비판한 것. 또한 세종 즉위 초기에 이루어진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기해동정) 계획을 수립하고 실행에 옮기는 등 주도적으로 활약했다. 그렇게 상왕이 되어서도 조선의 안정과 세종의 왕권 안정을 위해 노력했고, 말년에는 놀러 다니려고 각지에 정자를 짓고, 좋아하는 사냥을 다니는 등 신나게 살았지만 해야할 일은 꾸준히 했다. 게다가 자신이 후계자로 삼은 세종대왕의 뛰어난 자질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고 이에 만족하는 말도 남겼으며, 명의 사신들이 세종대왕을 극찬하는 말을 듣고 기뻐하기도 했다. 이렇듯 말년을 평안하게 보내다가 1422년 5월 초10일, 한성 연화방(지금의 서울 종로구 원남동 주변)의 이궁에서 향년 56세의 나이에 눈을 감았다. 공교롭게도 원경왕후랑 같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원경왕후가 태종보다 2년 먼저 태어났으며, 태종 보다 2년 일찍 사망했다). 아직 병석에 누워 있을 때 세종에게 자신이 과거 유배를 보냈던 황희를 다시 불러 중히 쓰라고 충고하였고, 태종이 숨을 거두었을 때는 황희가 도착한 지 얼마 안된 후였다.

능은 서울 서초구 내곡동에 위치한 헌릉(獻陵)이다. 애증의 관계였을 부인 원경왕후 민씨와 나란히 잠들어 있다. 그리고 이 능역 근처에 23대 국왕 순조의 인릉(仁陵)이 있는데, 이를 묶어서 흔히 '헌인릉'이라고 부른다. 여담으로 헌릉의 병풍석과 난간석은 태종과 원경왕후의 두 봉분을 이어주는 형태로 연결되어 있는데, 조선의 왕릉 중 헌릉만이 이런 형태로 되어 있다. 이는 사이가 좋지 않았던 부왕과 모후가 저세상에서라도 서로 화해하고 잘 지내기를 바란 세종대왕의 뜻이었다고 한다. 세종의 효심이 잘 드러나는 부분.

9. 기타[편집]

  • 태종 이방원이 권력을 잡기 위해 어린 동생들을 죽이고, 형과 싸웠는데 천하의 이성계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태종이 즉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태상왕의 신분으로 전국 곳곳을 떠돌아다니던 이성계는 본래 자신의 토착적 기반이었던 함흥 지역에서 일종의 쿠데타를 일으킨다. 실록에는 '조사의의 난'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 조사의라는 사람은 신덕왕후 강씨의 조카라고 하며, 봉기의 명분도 신덕왕후와 관련된 것이었다. 그러나 신덕왕후 강씨가 개경의 권문 출신으로 함흥에는 그냥 가볼 일도 거의 없었을 것임을 생각하면 조사의의 난의 실제 주동자는 이성계였을 가능성이 크다. 초기의 조사의의 난은 정치적 명분에 힘을 실어주는 태상왕의 존재 + 강력한 함흥의 군세를 바탕으로 꽤나 맹위를 떨쳤다. 결국 태종은 한양 수비를 신하들에게 맡기고 친아버지를 상대로 친정(親征)에 나서는 조선 역사상 최초이자 최후의 막장 행각을 벌인다. 그리고 이 전투는 조선 국왕이 '친정'한 마지막 전투이기도 하다. 이후에는 국왕이 직접 전장에 나서는 일은 없었다. 이성계는 조선 왕조의 개창자이기 이전에 평생동안 출전한 전투에서 패배한 적이 없었던 불패의 명장이었으나, 이 때 아들 이방원과 벌인 부자간의 전투에서만은 이기지 못했다. 이 전투에서의 패배는 아마 이성계의 삶에 있어서 처음이자 마지막임과 동시에, 가장 쓰라린 패배였을 것이다. 물론 태조든 태종이든 부자간의 싸움에서 누가 이겼더라도 뒷맛이 좋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이 전투에서 패배한 뒤 이성계는 사실상 지지를 잃고 아들에게 투항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다. 동정 여론도 알아서 거둬졌다. 그래도 태종이 아버지를 강제로 끌고오는 건 차마 할 수 없어서 계속 설득을 하고, 이성계는 체면상 안 가겠다고 좀 거부해 보는데, 이 때를 배경으로 해서 나온 이야기가 바로 함흥차사다. 형제, 사위, 동지들까지 다 죽여버린 후레자식같은 아들 놈에게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덤볐다가 그나마도 패배하고, 허수아비 같은 처량한 신세였던 이성계가 함흥차사 이야기에서는 절대적으로 우위를 점하는 포지션인 것이 흥미롭다. 함흥차사에 대한 좀 더 자세한 내용은 위키피디아에 있으니 참고.
    이런 면에서 묘하게 당태종과 겹친다. 실제로 조선 태종과 당 태종 둘 다 아버지를 도와 나라를 세우는데 큰 공을 세웠고 도덕적으로는 패륜아라고 욕을 먹지만 두 군주 모두 유능해서 나라의 기초를 단단히 하며 당대의 백성들에기는 최고의 성군이라고 칭송 받았으며, 인재들이 앞을 다투어 재야에서 쏟아져 나왔었다. 또한 창업 군주와 수성 군주의 사이에 낀 애매한 위치이며, 묘호도 같다. 심지어 자식들의 싸움이 일어날까봐 유능하고 성격 좋은 자식을 골라 왕위를 물려주었다는 점까지 비슷하다. 차이점이 있다면 조선 태종은 젊었을 때 문관이었는데, 당 태종은 젊었을 때 무관의 기질이 더 우세했다. 또한 조선 태종의 후계자는 너무나 유능해서 후대 사람들에게도 최고의 성군으로 칭송받지만,[110] 당 태종의 후계자는 전쟁을 많이 벌여 성공했긴 했으나, 부인에게 권력을 쥐어주어 사후에 왕조가 찬탈당하게 되는 경위를 제공한다. 그리고 조선 태종은 아버지를 즉위시키는데 큰 공을 세웠지만, 당 태종은 그냥 아버지를 즉위시켰다.

  • 고려의 왕족인 개성 왕씨 일족을 보호하기 시작한 무렵도 태종부터였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정적이 아닌 사람에 대해서는 매우 관대한 인물이었던 듯. 당시 왕씨의 후손 한 명이 체포되었는데 신하들은 당연히 그를 죽여야 한다고 나섰다. 이때 태종이 "역사책을 살펴보니 역성혁명을 하고서도 전조(前朝)의 후손들을 완전히 멸망시킨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것은 임금의 도리가 아니다. 앞으로 나는 왕씨의 후예를 보전하겠다." 아버지 태조 이성계의 조치를 뒤집는 발언이어서 신하들은 벌떼처럼 일어났다. 이에 태종은 "이씨가 도(道)가 있으면 백 명의 왕씨가 있다 하더라도 무얼 걱정하겠는가? 그렇지 않고 이씨가 도를 잃으면 왕씨가 아니라도 천명(天命)을 받아 일어나는 자가 없겠는가?"라고 하며 그를 살려주었다. 이후 태종은 "예전에 태조가 왕씨를 제거한 것은 실은 태조의 본의가 아니었다"는 말로 아버지와의 의견 충돌을 무마했지만, 이건 아버지를 차마 대놓고 나쁜 사람 취급할 수가 없어서 적당히 돌려말한 거다. 알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태종실록 13년 11월 26일자 기사
    이후에 왕씨의 후손을 주살하라는 대신들의 벌떼같은 청이 있었는데 태종은 "혁명(革命)한 뒤에도 오히려 전대의 후예(後裔)가 살아 있을까봐 두려워하여 모조리 죽여서 유종(遺種)을 없애는 것은, 용렬한 군주(君主)가 하는 짓이다. 내가 어찌 차마 하겠는가? 경 등은 나의 아름다운 뜻을 따르려 하지 않고 어찌 이처럼 번거롭게 구는가? 왕씨(王氏)의 유종(遺種)은 죄가 없는데 죽이는 것은 내 마음으로는 불가하다고 생각한다. 이제 이미 결정되었으니 다시 진언(進言)하지 말라"라고 씹었다. 시대를 앞선 명언. 물론 1400년에 즉위한 태종이 1413년, 즉 즉위 기간의 절반을 넘긴 후 왕씨 몰살을 중단시킨 점은 함정.태종실록 13년 12월 1일자 기사 실제 태종의 예상은 틀리지 않아, 결국 천명을 받아 일어난 자는 없어도 조선 왕조는 후일 망했고, 일제 강점기를 거쳐 남쪽은 공화국으로, 북쪽은 김씨 왕조로 교체되었다. 물론 태종이 이렇게 했긴 했어도 한동안 왕씨 탄압은 계속 되어서 왕씨 탄압이 완전히 사라진건 문종때다. 이때의 왕씨 인물은 왕우지로 그와 사이가 안좋았던 사람이 "쟤 왕씨래요." 라고 고발했는데 나라에선 "어이구 왕씨네요? 너님 벼슬 받으세요." 라는 식으로 벼슬에도 앉혀 주고 문종~성종 시기 의전상 예우를 받기까지 했다.

  • 야사 중에는 메뚜기떼가 창궐하자 몇 마리를 잡아오게 한 후 가장 큰 놈을 골라 네놈이 백성의 곡식을 갉아 먹는다니 차라리 내 오장육부나 갉아먹어라!!!라고 대성일갈을 내지르면서[111] 먹은 뒤 메뚜기 떼가 사라졌다고 한다. 중국 당 태종에게도 같은 일화가 있으며 야사라는 특성을 감안하면 어느 쪽이던 성군의 면모를 나타내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후손인 정조도 아버지 사도 세자 무덤과 관련한 비슷한 일화[112]가 있다.

  • 일부에서 나오는, 신권(臣權) 중심 정치 질서를 세우려던 정도전을 죽이고 전제 군주제를 세워 조선의 정치 선진화를 늦췄다는 비판은 무리한 이론이다. 애초에 정도전의 신권주의는 일단 이론적으로는 군사부일체 즉 임금과 신하는 어버이와 자식 사이와 같다는 유교식 서열론에 비추어볼 때 유교에 역행하는 것이나 다를바 없는 사문난적의 내용이다. 정도전 본인도 자기 손으로 만든 유교 국가 조선에서 자식이 아버지를 제치고 집안을 다스린다는 반유교적 발상이 정말 완벽히 통하리라고 생각하진 않았을 것이다. 또한 재상으로서 정도전의 권력이 가장 강력했을 때에도 당시 임금이던 태조 이성계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은 자기 주관대로 다 밀어붙여서 했으니 전제 군주제 운운하려거든 이방원을 탓하기 전에 한양 천도나 세자 책봉 같은 국가 중대사를 자기 맘대로 처리한 태조 이성계부터 탓해야한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전제 군주제란 것은 기본적으로 군주에게 걸리는 제도적 제약이 거의 없음을 일컫는 것인데, 강력한 왕권을 가졌음에도 자신을 견제할 수있는 사관과 간관이라는 시스템을 확실히 정비해서 제동을 걸 수 있도록 한 임금이 바로 태종 이방원이다. 군주가 권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되 폭주하지 않도록 신하들이 견제할 수 있는 제도를 확립한 왕을 가지고 권력이 강력했다는 이유로 전제 군주제 운운하는 것은 우를 범하는 것이고 언어 도단이다. 더구나 그것을 기초로 하여 다음 세종 대에서 역사상 군권과 신권이 최상의 조화를 이룩할 수 있었다는 것이 그 증거이다. 그리고 정치 체제는 상대적인 것이지 그 안에 우열이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더구나 왕권주의가 강력해서 폭군이 등장했다는 낭설에는 신권이 강한 귀족 국가였던 고려의 충혜왕이라는 훌륭한 반박 증거를 댈 수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건 태종이 왕권을 강화하지 못했다면 세종대왕이 뛰어난 업적을 남기지 못했을수도 있다.

  • 임금의 모든 행적을 기록하여 실록으로 만든는 사관들을 매우 싫어했다. 말에서 낙마한뒤 사관들에게 비밀로 하라했지만 당연히 사관들은 기록, 게다가 민인생이란 사관은 내가 쉬는 편전에 들어오지 말라하는데도 기어들어왔다가 잡혔을 정도였다고.

  • 우리나라에서 코끼리를 처음 길들여본 왕이기도 하다. 일본에서 바친 코끼리를 선물받았으나 코끼리가 사람을 죽이자 다시 일본으로 되돌려보냈다.

10. 세조와의 비교[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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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 세조
행적은 비슷하나 평가는 서로 갈린다.

안 좋은 건 닮고 좋은 건 안 닮은 손자
비교 자체가 태종에 대한 모욕

본인보다 정치적인 상관이었던 혈육을 죽인 점, 왕권 강화의 목적으로 6조 직계제를 시행해 의정부를 유명무실하게 만들었다는 공통점 때문에 태종은 손자 세조와 자주 비교된다.

그러나 태종이 제거한 이방석의 경우 태조의 정치적 의도가 있었다고는 하나 둘째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막내가 첫째 부인의 장성한 형들을 제치고 후계자가 된 모양새라는 한계가 있었기에 책봉 당시에도 잡음이 많았다. 수백 년이 지난 현재에도 이런 일이 생기면 구설수에 오르는데[113] 한 개의 대기업조차 그래서는 아니 되거늘 한 나라의 왕조는 오죽할까? 하물며 유교적 가치를 건국 이념으로 세운 조선에서는 어떠했겠는가. 심지어 당시는 건국 초기라 정통성 면에서 잡음이 나올 가능성을 최대한 줄여도 모자랄 때였다. 이 때문에 적어도 명분면에서는 납득할 만하다는 평이 많다. 반면 세조가 축출한 단종은 조선 역사상 유일한 원손 - 세손 - 세자 - 국왕 테크를 타서 최강의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다. 약점이라면 나이가 너무 어린 것 밖에 없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게 세조의 행위를 정당화할 수 없다. 이 부족한 명분 문제는 세조 당대 뿐만이 아니라 두고두고 조선 왕실의 발목을 잡았다.

단, 이미 언급된 것과 같이 신덕왕후는 이성계의 단순한 두 번째 부인이 아니라 정식으로 왕비로 책봉된 당시까지도 살아있던 국모였다. 또한 이방번이 세자가 되지 못한점은 혼인 관계 탓도 있었다.이방번은 정양군 왕우의 딸과 혼인을 했는데 만약 이방번이 세자가 되면 이성계는 왕씨 가문과 사돈을 맺어야했기때문에 신료들이 반대를 했다. 즉,이방석은 이성계가 유별나게 아껴서 세자가 된것이 아니다.왕후의 아들 중 가장 결격 사유가 적으면서도 나이로도 많은 편에 속했기 때문이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은 이방석 문서 참조

왕이 된 다음의 행보에서도 세조는 공신의 부정부패를 묵인하고, 간관과 사관의 언론 활동을 제재하고 경연을 폐지하는 등[114] 부지런한 암군이라 할 정도로 국가 대계에 대한 체계적인 개념이 없었다. 반면 태종은 간관은 물론 사관들에게 스토킹에 가까운 간섭을 받고, 본인도 간관과 사관을 혐오하는 성향을 드러냈음에도 불구하고, 사관의 언론 활동을 통한 대신 견제가 국가의 대계에 필요함을 알고 사관들을 인정하고 대신들로부터 보호해주었다.[115] 그리고 공신들을 지나치게 키운 세조에 반해 공신들에 대해서도 이들이 너무 커지면 훗날 골치 아파진다는 것을 알기에 최대한 권력에서 멀어지게 하거나 필요에 따라서는 과감하게 숙청을 단행하기까지 했다. 한편으론 세조 나름대로의 업적이 있긴 한데, 식읍을 폐지했다는 것과 향, 소, 부곡민 문제를 다 마무리 지었다는 점과 말도 많고 탈도 많던 과전법을[116] 직전법으로 바꿨다는 점에서는 나름의 업적이었다.[117] 무엇보다 세조는 중앙집권제의 확립을 마무리 지어서 이시애의 난이라는 부작용이 있기도 했지만 어쨌든 이 시기에 들어서 조선은 전국에 수령을 파견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유교정치의 근간을 이룰 율령을 만들기 시작하기도 했다.

결론은 세조의 경우 공이 있는 반면 과도 심각해 폭군 논란이 끊이지 않을 정도인데, 태종 또한 마찬가지로 논란이 될만한 부분이 있지만 냉정하게 일관된 그 태도를 통해 왕의로써의 그릇이 뛰어남에 의심의 여지가 없어 그다지 논란은 없는 상황.

11. 태종우[편집]

야사에 의하면 태종이 승하한 날인 음력 5월 초열흘날(10일)에 비가 내려 이를 '태종우(太宗雨)'라 불렀다고 한다. 용의 눈물이 바로 이것을 뜻하는 것이다.

태종이 만년에 노쇠하여 앞날이 얼마 남지 않았을 무렵에 날씨가 오래 가물어서 내외의 거의 모든 산천에 두루 기우제를 올릴 정도였다. 상이 이를 근심하여 이르기를, “날씨가 이와 같이 가무니 백성들이 장차 어떻게 산단 말인가. 내가 마땅히 하늘에 올라가서 이를 고하여 즉시 단비를 내리게 하겠다.” 하였는데, 과연 이튿날 상이 승하하고 이어서 경기 일원에 큰비가 와서 마침내 풍년이 들었다. 이후로 매년 이날에 비가 오지 않은 적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이를 일러 태종우라고 하였다.

조선 후기의 기록인 임하필기.출처:한국고전종합DB

조선 전기의 문신 이행(李荇 : 1478년 ~ 1534년)(성종 대의 사람)의 시문집인 용재집에 이미 "태종우를 갈망한 지도 오래건만 / 久望太宗雨"이라는 문장이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주 오래된 전설로 보인다. 인조 때의 기재잡기(박동량의 책)에도 "5월 10일에 내리는 비를 사람들이 태종우(太宗雨)라 하는데, 이백 년 동안에 금년에 처음으로 비가 내리지 않아 식자들이 은근히 걱정하였다."라는 문장이 있다. 그리고 이 때의 연도가 태종이 세상을 떠난지 172년이 지난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한 해였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정유년 일기 음력 5월 10일)에도 '오늘은 태종의 기일이다. 이 날에는 날마다 비가 내린다고 하던데...'라고 적혀 있다. 하지만 이 때 이순신 장군이 이 비를 '태종우'라는 명칭으로 인식하였는지에 대해서는 확실치는 않다.

경종, 영조 때에는 조선왕조실록에도 태종우 전설이 나오고, 영조 40년 갑신(1764년) 5월 10일에 비가 내리자 영조가 "이는 선조들이 주신 것이다."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어 당대의 왕실도 이미 태종우를 정설로 받아들인 듯 하다.

고종 때는 태조우(太祖雨)까지 생겨났다.

“지난해 오늘 과연 단비가 쏟아졌었다. 5월 24일(이성계의 기일) 에 내리는 비를 ‘태조우(太祖雨)’라고 하고 10일에 내리는 비를 ‘태종우(太宗雨)’라고 한다. 이는 전해 내려오는 말이다. 하늘을 오르내리시는 성조(聖祖)의 영령들께서 백성들의 일을 안타까이 염려하시기 때문에 이렇게 저승에서 감응하는 것이다.”승정원일기, 고종 10년 계유(1873년, 동치 12) 5월 24일 (신축)

출처:한국고전종합DB

사극 용의 눈물 마지막 장면에서 태종이 기우제를 지내는 장면은 바로 이 태종우 전설을 토대로 각색한 것이다. 오늘날에도 매년 음력 5월 초열흘 즈음이 되면 인터넷 뉴스 등지에서 꼭 태종우 관련 뉴스나 칼럼 등이 올라온다.

그런데 실제로는 태종이 죽을 때쯤, 1422년의 기록을 뒤져보면 다른 해에 비해서 비가 많이 왔다고 한다.#KBS <과학의 향기> 2005년 11월 19일에 방송한 태종의 비와 세종이 햇무리를 참고하라. 관련 기사

기상청 자료를 토대로 1960년부터 2015년까지 음력 5월 10일의 강수 여부를 조사한 결과, 총 56년 중 비가 온 날은 30번[118]뿐(??)이다. 대한민국의 6월 평균 강수 일수는 10일[119] 이므로, 기댓값인 18.7번보다는 11번이나 비가 더 온 셈이지만... 그저 전설은 전설일 뿐이니 웃고 넘기자.[120] 연도별 음력 5월 10일 강수 현황은 다음과 같다.

  • 2012년 6월 29일 : 중부 지방에 몇달동안 극심한 가뭄이 지속되다가 오랜만에 이날에 단비가 내려 가뭄이 해소되었다.

  • 2013년 6월 18일 : 비가 내렸다.

  • 2014년 6월 7일 : 비가 오지 않았다.

  • 2015년 6월 25일 : 소양강댐까지 바닥을 드러낼 정도로 가뭄이 심각한 상황에서 6.25 전쟁 발발인인 6월 25일에 중부 지방에 비가 내렸다.(물론 남부 지방은 그 전날 비가 내렸다) 2015년 대한민국 메르스 유행과 가뭄이라는 쌍연타를 맞고 휘청인 대한민국을 어엿비 녀겨 하늘나라로 간 태종이 비를 내린 듯 하다...

  • 2016년 6월 14일 : 비가 내렸다.

  • 2017년 6월 4일 : 비가 오지 않았으나, 윤달이 끼는 바람에 윤달로 음력 5월 10일이 되는 7월 3일에는 장마가 시작되면서 강원, 충청, 경북 일대에 호우 특보가 내려졌고 제주도 남쪽 해상에서는 태풍 난마돌까지 북상을 하다 결국은 일본으로 가서 소멸했다. 무리수를 두자면 가뭄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위해 태종이 윤달로나마 비를 뿌리고 간 셈이다.

  • 2018년 6월 23일: 비가 오지 않았으나, 이틀 후인 25일 밤부터 전국에 장마가 시작되었다. 월드컵 보느라 타이밍을 놓치신 전하 그리고 조선은...

  • 재밌는 것은 중국에도 태종우와 비슷하게, 특정한 날에 항상 비가 온다라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흑룡강을 다스리는 흑룡이 있는데 이 용은 원래 산동성 지방에 나고 자랐기 때문에 흑룡강을 건너는 사람이 산동성 사람이면 절대 침몰시키지 않았고 매년 음력 5월 13일이면 산동성으로 돌아가 어머니의 묘에 참배를 하였기 때문에 산동성에는 이날 반드시 비가 내렸다고 한다. 산동성이 한국과 매우 가까운 거리라는 것을 생각해볼 때 뭔가 지역적인 기후현상이었을 가능성도 있을 듯하다. (출처 : 도교의 신들, 마노 다카야 저, 들녁, p.214)

12. 사극에서[편집]

아마도 훗날 세종이 조선조 최고의 성군이 된 것은 태종의 이러한 철저한 정지 작업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로 볼 때 태종이 한 일이 어찌 세종보다 가볍다 할 수 있겠는가!


용의 눈물 마지막 회 나레이션 中


여말선초라는 시대적 격변기에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다 간 인물이며, 조선 왕조 뿐만 아니라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강력하고 인상적인 행보를 보인 군주라 사극에서 인기가 많은 편이다. 특히 여말선초 중 조선 건국 편에서는 주인공으로 나오는 확률이 높고 조연이더라도 비중이 상당한 주연급 조연으로 등장한다.

지금까지 태종을 가장 잘 표현한 드라마로는 1996년부터 방영된 용의 눈물에서 유동근이 연기한 이방원(용의 눈물)이 꼽히고 있다. 사실 용의 눈물이라는 드라마 자체가 원작[121]에서 태종 부분을 들어내서 만든 것이니 진주인공이다. 애초에 용의 눈물이라는 제목 자체가 태종을 말하는 것이다. 故 김무생이 연기한 첫 부분 주인공인 이성계 파트부터 조용하지만 강력한 카리스마를 잘 표현하였으며, 본격적으로 스포트라이트가 비춰지는 후반부에 와서는 그야말로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급의 연기를 보여줬다. 특히 고증에 정말 많은 신경을 써서, 아버지 이성계와의 갈등은 정말이지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내용과 매우 유사하였다.

나중에 이성계가 조사의의 난에서 패배한 후 궁으로 돌아오자 그 앞에서 "아바마마! 소자의 춤을 보시옵소서!"라며 어린애처럼 춤을 추다가 아버지 품에 안기며 화해하는 장면은 최고의 명장면 중 하나.링크 이후 이성계가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를 떠올리며 용상 앞에서 "아바마마! 소자가 잘못했사옵니다!"하며 오열한 연기도 일품이다. 또한 "모든 악업은 내가 지고 갈 터이니 주상께선 성군이 되시오."라는 불후의 명대사를 남겼는데 이것이 태종의 성격과 군주관을 잘 나타내는 명언이 되고 있다.링크 이 말은 실제 태종이 상왕으로 물러나고 신왕으로 즉위한 세종에게 한 말이기도 하다.

게다가 태조 이성계의 죽음 이후 자신의 집권기의 내용 또한 볼만하다. 이숙번을 쥐락펴락하는 모습, 가만히 지켜보다가 양위 소동을 일으켜 민씨 형제를 촘촘한 그물망 속으로 빠뜨리는 모습 등에서는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을 정확히 반영한 노회한 책략가의 모습 그 자체. 이숙번이 민씨 형제를 경계하라고 진언하니 되려 이숙번더러 '사람이 변했다, 제 몸 보신을 위해 남을 헐뜯는 법도 배웠는가'라며 힐난하곤 듣는 척도 안하더니, 그 이후엔 아주 천연덕스럽게 민씨 형제를 장남과 차남, 그 뒤에는 삼남과 사남까지 사지로 밀어넣는다. 이 과정에서 원경왕후 민씨와 엄청난 갈등을 벌이면서도 태연하게 이숙번을 방패로 내세우는 장면에서는 소름이 끼칠 지경. 정작 이숙번은 민씨 형제의 세력을 가볍게 견제하고 위축시킬 생각이었을 뿐인데 태종이 막상 강경하게 박살을 내려고 하자 당황한다. 그래서 이숙번은 민씨 형제를 추궁하라는 태종의 명을 사양하는데, 태종은 그런 그를 보며 또 사람이 변했다면서 핀잔을 준다. 표적이 된 자들은 철저히 몰아부치는 것도 모자라서 그 반대편에 있는 신하들조차 오들오들 떨게 만드는 모습이 백미.

여기서 끝이 아니다! 양녕의 폐세자 이후 새로 세자로 책봉된 충녕대군에게 정말로 양위를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표면적으로는 군왕의 자리에 앉혀두고 태종 자신은 군권만 쥔 채로 군왕의 수업을 직접 시키고자 한다는 이유로 신하들을 설득시킨다. 정작 양위 전날에는 군권을 쥔 상태로 왕실에 해를 끼칠 가능성이 남아있는 인척이 또 누가 있는가를 곰곰히 생각하다가 충녕대군의 장인인 심온과 그 파벌을 지목한다. 그리고 보위를 넘겨준 직후에 바로 그 일파를 깡그리 소탕하는 기염을 선보인다. 작중 원경왕후는 '야차나 귀신 그 자체다'라는 폭언을 퍼부을 정도.

대왕 세종에서는 김영철이 배역을 맡았는데, 이 드라마에선 주인공이 세종이었으므로 용의 눈물에서 보여준 압도적인 포스가 비교적 누그러지고 '세종의 아버지'라는 쪽에 초점을 맞춰 그려졌다. 그 때문에 신하들을 머리 위에서 농락하던 태종의 포스가 많이 사라졌다고 불만을 표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신하들을 찍어누르기는 고사하고 상왕 정종에게도 기고 원경왕후에게 치이고 조선의 국체를 부정하는 아들에게 까이고 실록에선 태종에게 꼼짝도 못하던 하륜을 위시한 신하들은 태종을 기망하고... 그 중 백미는 양위 후 병조판서 조말생의 계락에 빠져 군권을 빼앗기고 충격에 쓰러지는 장면으로 가뜩이나 가상의 내용으로 말이 많았던 작중에서도 손꼽히는 역사 왜곡 장면이다. 그나마 외롭게 지존의 자리를 지켜가는 군왕의 모습 자체는 잘 표현되었고 상왕 등극 이후엔 대마도 정벌을 단호하게 추진하는 등 그나마 원래 태종에 가깝게 나온다. 일단 노련한 대배우답게 작중 연기는 아주 훌륭했다. 원경왕후가 세상을 떠난지 얼마 안 되어 본인도 손자 문종이 활쏘기 연습을 하는 걸 지켜보며 몇 마디 충고를 해주곤[122]문종이 관중[123]을 하는 걸 지켜보고 조용히 숨을 거둔다. 세종은 그 모습을 보곤 조용히 속으로 읊는다. '그동안... 참으로 고단하셨습니다, 아버지... 이제... 편히 쉬십시오...'

뿌리깊은 나무에선 백윤식이 태종을 맡았는데, 초반부터 세종과 다른 정치 노선으로 대립하는 포지션을 취한다. 태종과 세종간의 관계에 주목한 점이 특이점. 세종의 아버지라기보다는 세종에게 군주로서의 도를 가르치는 '세종의 스승'이라는 이미지가 더 강한 편. 죽기 직전에 자신과는 다른 왕도를 걸으려는 세종에게 "이놈, 해내거라! 해내! 그래야 너를 왕위에 올린 것이 나의 제일 큰 업적으로 남을 것이니!"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는다.

대풍수에서는 청소년기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최태준이 분했다. 첫 등장이 좀 꼴사나운데 주인공 지상이 건물을 짓지 말라고 했던 곳에 무리하게 공사를 한 데다가 인부 하나 다치는 것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식의 태도로 나오다가 지상에게 싸닥션을 맞는다. 그러다가 지상에게 자기가 누군지 아느냐고 찌질대다가 결국 뒤에서 나타난 아버지에게 펀치를 맞는 것이 첫 등장. 흔히 노회하고 카리스마 있는 정치가의 모습으로 조명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대풍수에서의 등장은 이례적인 등장이다. 그래도 명나라에 인질로 잡혀있어도 담대한 모습을 보였고 이성계의 부장과도 팔씨름을 이길 때까지 해서 왼손으로 해서라도 이겨버리며, 이성계도 무학대사를 불러 아들들 중 처음으로 방원의 관상을 보게 하는 것을 보면 이성계가 아끼는 비범한 아들이긴 하다. 계모 강씨 부인과의 미묘한 알력도 묘사되고 있다.

정도전에서는 안재모가 배역을 맡아 연기했다. 용의 눈물에서 안재모가 세종 역을 맡아 태종 역의 유동근과 부자지간을 연기한 것을 감안할 때, 정도전에서 태조 이성계 역을 맡은 유동근과 함께 가히 최강의 배우개그라 아니할 수 없다. 또한 야인시대에서 안재모의 미래 모습을 연기한 김영철이 대왕 세종에서 태종 역을 맡았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태종이 김두한으로 환생한다는 배우개그도 가능하다. 자세한 것은 이방원(정도전) 항목 참고.

2015년 개봉한 영화 순수의 시대에서는 장혁이 분했다.

2015년 10월 5일부터 2016년 3월 22일까지 방영한 SBS 월화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유아인이 맡았다. 자세한 것은 이방원(육룡이 나르샤) 항목 참조. [124]

2016년 1월에 방영한 장영실에서는 대왕 세종에서 태종을 맡았던 김영철이 다시 태종을 맡게 됨으로서, 김영철은 처음으로 두 번이나 태종을 맡게 된 배우가 되었다. [125] 대왕 세종에서와는 달리 여기서는 조선의 왕권을 다지기 위해 힘쓰는 카리스마 철혈 군주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13. 관련 문서[편집]


[1] 말 그대로 상상화다. 실제 생김새는 태조익안대군을 참고하면 어느 정도는 유추해볼 수 있다.[2] 세종 12년에야 태상왕으로의 존숭을 허락했다.[3] 이름인 방원(芳遠)을 갈겨 쓴 것으로 보인다.[4] 이 것 때문에 문제가 된 것이 중국사 대표 피휘 사례 중 하나인 한나라의 고조 유방이다. 이름이 '邦' 자인데, 건달에서 황제가 된 뒤에도 이름을 바꾸지 않아서 이 글자를 갑자기 못 쓰게 되어 버렸고, 그래서 그 때까지 '수도' 라는 뜻으로 쓰이던 '國' 자가 나라를 뜻하는 글자로 대신 쓰이게 되었다.[5] 때문에 피휘는 그냥 무시할 수 밖에 없었다. 꽃다울 방(芳) 자는 8형제가 다 쓰는 돌림자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멀 원(遠)자는 길 가다 발에 채일 만큼 흔한 글자여서 현실적으로 피휘가 불가능했던 것이다.[6] 본명은 아니지만, 왕자 시절의 칭호(군호 등)로 유명한 왕으로는 수양대군이 있다.[7] 조선왕조실록과 연려실기술을 같이 활용한 드라마 용의 눈물에선 정안군, 정안공, 정안대군 3가지 호칭을 모두 들을 수 있다.[8] 여기에 더해 이덕일처럼 "태종의 제 1 업적은 세종"이라고 평하는 사람들도 있다. 세종이라는 희대의 성군이 제 뜻을 펼칠 환경을 완벽히 조성해놓았다는 점에서 그의 숙청 경력까지 묻어버릴 수 있다는 의미로.[9] 실제로 이렇게 기반을 다져놨음에도 세종의 초기에는 신하들과 세종간의 알력싸움이 일어나기도 했다. 자세한 내용은 세종대왕 항목의 즉위 후 문단 참조.[10] 밑으로 동생 이방연이 있었으나, 태조 2년 환조의 비를 세울 당시 이미 “조몰(早歿)”하여 원윤(元尹)으로 증직(贈職)하였다는 내용이 보여 개국 이전에 요절한 것으로 추정된다. [11] 이것이 얼마나 우수한 성적이냐면, 전국의 과거 응시자들 중 전국 17위의 성적이다.[12] 오히려 조용하고 유약한 이미지가 강한 형 이방과야말로 실은 아버지 이성계를 따라 고려 말의 숱한 전장을 누빈 무장이다.[13] 태조실록 태조 3년 갑술(1394년) 6월 1일 기사.[14] 수양대군이 영의정에 오른 적이 있지만 과거는 치르지 않았다. 이후 왕족 종친이 벼슬에 임하는 제도는 성종 대에 구성군(영의정 역임)을 끝으로 폐지되었... 으나, 훗날 고종 때 중부(仲父), 즉 흥선대원군의 형인 흥인군이 좌의정, 영의정을 역임하기도 했다.[15] 물론 등수가 아주 높은건 아니라서 병과 급제였다. 하지만 급제를 한 것만도 집안의 경사였다.[16] 무신 정변 시절에 단적으로 드러나듯이 고려 시대에 무신에 대한 문신들의 차별은 상당했다.[17] 최충의 9재 학당과 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사학 12도를 생각해보면 고려 시대의 과거는 아예 최고 수준의 사립 학원에서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고서는 합격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참고로 이방원은 과거 시험 공부를 정몽주 밑에서 배웠다.(당시만 해도 이성계와 정몽주는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18] 방과의 경우 아버지를 따라 여러번 전투에 나섰던 전형적인 무인이다.[19] 그런데 훗날 이 이복 동생들을 자신이 직접 죽였으니 참으로 얄궂은 일이다.[20] 여기서는 구했다는 말의 의미가 좀 다르다. 자세한 내용은 후술[21] 강전섭 저, 단심가와 하여가의 소원적 연구, 동방학지, 1983년 & 박규형 저, 단가 정형의 발생기 재고, 한민족어문학, 1988년[22] 물론 그 반대로 정말로 이방원이 주도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크다. 분명 지위와 연배 면에서는 방원이 가장 낮을 지는 몰라도 방원은 엄연한 문관이라 대궐에 드나드는 것도 자유롭고 정몽주의 정보를 가장 입수하기 쉽고, 또 그런 만큼 정몽주의 위협을 가장 피부로 느꼈을 입장이다. 그리고 다른 이들은 비록 지위와 연배는 방원보다 위지만 다들 순수한 무부들이라 이런 계략을 능숙하게 짤 수 있을지 의문이고[23] 아들이라는 입장상 이성계의 분노를 직접 받아 낼 수 있는 데다가 또, 무부인 다른 자들은 주군인 이성계의 영향을 직접 받는 입장이라 함부로 이성계의 명을 어기기 힘들지만 이방원은 이성계의 아들이면서도 오히려 문관이라 이성계의 직계 신하는 아니라서 처신이 비교적 자유롭다는[24] 묘한 입장에 서 있기도 하다.[23] 당장 이방과만 해도 입장상 방원보다 훨씬 위에다 아버지 이성계와 함께 전쟁터를 누빈 숙장이지만 정치력으로는 방원의 상대가 전혀 되지 않았다. 만약 이방과가 이런 계획을 스스로 세울 수 있는 인물이었다면 이방원은 감히 왕좌를 넘보지도 못했을 것이다.[24] 그래서 위화도 회군 당시에도 눈치를 채고 새어머니와 의붓동생들을 구출하러 나설 수 있었다.[25] 한편으로 정몽주 암살은 조선 건국에 있어서 제일 큰 공이기 때문에 그 공을 독차지하기 위해서라는 분석도 있다. 고려는 최영이 사라지고, 공양왕이 즉위하고 있을 때는 이미 언제든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그 멸망 직전의 고려를 어떻게든 붙잡고 있던 사람이 정몽주다. 그 정몽주를 암살한다는 초강수는 고려에 있어서는 최악의 상황이지만, 조선 건국에 있어서는 최고의 공로다. 이 공로를 혼자서 독식한다는 것만으로도 이방원은 개국 이후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일등 공신이 되는 것이다.[26] 단지 아들이기 때문에 살려두기엔 이방원이 죽인 인물이 사적으로든 공적으로든 너무나 중요한 인물이었다.[27] 아래에 서술되어있는 부드러운 면모들을 보면 냉혹할지언정 사이코패스일리는 없다.[28] 이는 태종이 만들어 놓은 사관을 충실히 따라가는 입장이다. 1차 왕자의 난 이후 정종과 태종은 정당화 과정에서 이러한 견해를 명분으로 내세웠고, 이것이 수백 년 동안 국론으로 이어지면서 보편적인 설이 되었다. 여말선초의 복잡한 사정을 잘 모르는 일반인에게도 과거의 선례가 많은 이런 종류의 설명이 좀 더 잘 와닿았을 것이다.[29] 세상을 떠난 순서만으로 봐도 얼핏 보면 태종이 가장 나중에 죽었으니 기회가 있었을거 같지만 가장 마지막에 죽은 회안대군 이방간의 경우 1421년 태종이 승하하기 1년 전에 죽었다.[30] 하지만 형 방과는 자식 없이 죽었고 방의나 방간은 용렬한 자라는게 대체적인 평가라 방과도 유능하고 사이도 좋았던 방원에게 왕좌를 넘겨줬을 가능성도 적지 않은 편이다.[31] 태종이 뒷날 정릉을 파헤치도록 하고 석물을 청계천에 거꾸로 처박아 버린 것도 아버지의 정치적 고려를 다 헤아리고 맞대응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32] 본인이 와병중이라 일선에 나설수 없었던 것이 가장 치명적이었다. 구 세력의 불만으로부터 왕실을 보위해줘야할 왕자와 종친들이 그들과 결탁을 해버려 왕실에 내분이 일어나는 바람에 친위세력이 제대로 대응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태조가 나서서 명분을 가져오고 반군의 사기를 꺾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다.[33] 그럴만한 것이 그렇게 치밀하게 계획하고 실행한 정변에서는 죽일 사람과 살려서 끌고갈 사람까지 미리 정해두는 것이 원칙이다. 게다가 이제를 살려둘 경우 후대에 문종의 사위인 정종이 문종의 하나뿐인 아들 단종의 복위사건을 도모한 것처럼 잡음이 생길 여지도 많았기에 본인의 승인이 없었다고 부인할 뿐이지, 이미 동의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34] 드라마 정도전에서는 이 두 가지 기록을 모두 반영했는데, 전자의 경우 이숙번이 이끄는 나무 몽둥이를 든 병사 수십이 무기를 탈취하기 위하여 무기고를 습격하는 장면으로, 후자의 경우 충청도 관찰사 하륜이 이끄는 병력이 이숙번의 원군으로 등장하여 숙위병들을 무찌르고 삼군부를 장악하는 장면으로 묘사된다.[35] 태조실록 권1 원년 8월 20일.[36] 군권 개편 후에도 방우에게 남아있던 군사들은 방우 사후 그의 아들 복근이 아니라 이성계의 형 이원계의 3남 이조(李朝)에게 인계된다. 태조 실록 권4 태조 2년 9월 18일.[37] 태조 실록 권5 태조 3년 2월 29일[38] 이성계와 정도전이 가고자 하는 방향이 비슷해서 정도전이 힘을 얻은 것이지 정도전이 주도해서 국가를 끌고가는 것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둘 사이에 의견이 갈릴 경우 태조는 그냥 자기 마음대로 했다. 세자 책봉, 공신 책봉, 천도, 불교 정책을 전부 자기 뜻대로 한 임금이 왕권이 약할 리가.[39] 아파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꼭 허약한 사람이 죽을 병에 걸려 쓰러져 의식잃고 오늘 내일해야 자리에 눕는게 아니다. 멀쩡한 사람도 숙취 앞엔 장사없다. 그리고 체력과 직접적인 상관이 없는 치통이나 편두통으로도 사람이 드러눕기도 하며, 건강한 사람도 운동 안하다가 무리해서 허리를 삐거나 등에 담이 걸렸을 땐 일어나려고만 해도 통증이 심해서 화장실도 자기 맘대로 못간다. 게다가 당시 이성계의 나이가 60 ~ 70 이었으니... 생명과 의식에는 전혀 지장이 없는 지병이니까 국가 비상 사태까지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도 당시 의료 수준 상태에서 나이든 몸으로 나중에 회복한 것만 봐도 태조가 상당히 건강한 사람인 건 맞다. 앓아 눕게 된 타이밍이 정말로 좋지 않았을 뿐. [40] 그리고 먼 훗날 경종 때 이복 동생인 연잉군이 왕세제로 책봉되었다가 경종 사후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영조다.[41] 동서양을 막론하고 귀족들에게 있어 가장 민감한 사안이 바로 사병이다. 자신의 재산과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수단인 사병을 국가에 헌납하라고 하는 것은 당시의 귀족들에게 있어 자신들의 모든 것을 갖다 바치라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정도전이 공신들로부터 반발을 산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사병 혁파였을 정도. 비단 어느 나라의 군주든 사병 혁파라는 중요한 과제를 피를 보지 않고 해내는 것만으로도 정치력이 상당한 고단수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42] 아직 고려가 남아있던 시절에는 반대파 대신을 탄핵하려던중 그 계획이 발각되어 자신이 역으로 곤란에 처해졌을 정도이다. 이는 정도전이 20대 시절에 벼슬에서 밀려난 이후 40대쯤에 되어서야 다시 복귀한 것의 영향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남들은 20, 30, 40대에 걸쳐 벼슬을 역임해 정치에서 잔뼈가 굵은 반면 이쪽은 20,30,40대에는 자신의 이상과 이념을 다지는데 보냈고 정치적으로는 배제되어 있었으니 정치적 수완이 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43] 세자빈이 쫓겨나고 내시 이만이 처형되는 사건이 생겼는데, 이유가 둘이 정을 통해서란 소문이 있었고, 이에 대간에서 제대로 수사를 해서 진상을 밝혀야 한다고 태조에게 간했는데... 태조는 대로하여 "지금 왕실을 능멸하는것이냐?" 라고 하면서 공신을 제외한 대간 전체를 죄다 유배보내버렸다. 이러니 대간이 제기능을 수행할 수 없었다.[44] 오히려 태조 시절에는 거의 준 내관 취급이었던 사관의 대우를 격상시켜 준 것도 태종이다.[45] 이점이 똑같이 종친들을 죽이고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손자와는 다르게 태종이 명군이라 평가받는 이유들 중 하나이다. 태종은 단순히 욕심 때문에 왕위를 취한 것이 아니라 나라를 위한 비전이 있었으며, 이를 관철시킬 카리스마와 정치력이 있었다. 설사 본인의 역린을 건드리는 일이라도 나라를 위해서라면 참아냈으며, 본인에게 이득이 되는 사람도 나라에 해를 끼칠 위험이 있으면 가차없이 내쳤다. 이 때문에, 세조 때와는 달리 태종 대에는 조선 왕조 역사상 유일하게 재정이 흑자를 기록했으며, 다음 대에 세종이라는 희대의 성군이 나올 수 있었다.[46] 이는 당시 조선의 경제가 상업이 아닌 농업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은 교통로가 활성화되지 못한 데다가 사농공상이라 하여 상업을 천시했기 때문에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지정한 시전 상인들을 제외하고는 대규모 상업이 발달하지 못했다. 이는 조선 후기에 민간 경제가 발달하고 상업이 발달하면서 비로소 해결된다. 이를 대표하는 사건이 바로 금난전권 폐지이다.[47] 현대에는 상황적인 문제도 있지만 일부러 재정흑자를 내지 않는 측면이 있음도 고려해야 한다. 정책적으로도 재정흑자는 경기위축, 즉 불황을 야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원칙적으로 세입과 세출을 일치시켜야 하기 때문에 흑자 재정이 실질적으로 막혀있으며, 어쩌다 남는 금액은 우선적으로 국채 상환에 써야 하고 정부예비비도 일정 수준으로 제한되고 있다.[48] 그래서 훈구파가 아닌 사림에 가까운 신하들은 주상이 너무 잡학에 몰두한다며 비판했다가 세조의 미움을 받아 유배를 가기도 했다.[49] 게다가 정릉이 묘로 격하되어 버린 때도 심온 숙청 이후에 일어난 일이다.[50] 하륜은 사위들까지 동원하여 노른자 땅을 가장 먼저 제 것으로 하였다.[51] 태종으로서는 신덕왕후에 대한 감정이 좋을 수가 없는 것이, 신덕왕후는 의안대군 이방석을 세자로 세우기 위해 장자계승의 원칙을 어기기까지 했다. 또한,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을 지속적으로 경계했으며, 그중 가장 많이 견제당한 사람이 바로 다섯 아들 중 가장 능력이 뛰어났던 태종이었다. 비록 방석을 세자로 삼은 일에는 태조의 의중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긴 하나, 조선 건국의 일등공신인 자신을 향해 지속적으로 견제를 하고, 목숨까지 빼앗으려고 했던 그녀를 태종의 입장에서는 좋게 볼 수 없었다.[52] 광해군 vs 영창대군의 사례와 비슷하다.[53] 자신은 신덕왕후를 어머니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아버지를 봐서 제사만은 지내주겠다는 말이다.[54] 다만 양녕대군이 아닌 다른 왕자가 세자가 되었어도 왕권 강화를 위해 민씨 집안을 숙청했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 민씨 집안은 두 차례의 왕자의 난에서 공을 세워 상당히 권력이 강한 공신들이었던 데다가 아예 원경왕후가 민씨 집안이다. 외척에 대한 경계심이 비정상적일 정도로 심했던 태종 입장에서는 권력이 강했던 외척을 어떻게든 제거하려 했을 것이다.[55] 만화의 장면은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2권. 실제 장면은 아직 이숙번, 민무구민무질 형제가 숙청당하는 태종대 이전으로 1차 왕자의 난 이후 박포를 유배보내는 장면이다. 조선시대의 공신 책봉이라는 건 정치적인 필요성이 크게 좌우하기 때문에 실제 왕자의 난에 별 공이 없던 조준이 1등 공신이었던 반면 가장 공이 컸던 이숙번 등은 2등 공신인 대신 실제론 막대한 이득을 얻었는데, 이를 모르고 박포가 불평하고 다니자 "바보 같은 놈, 생각 좀 하고 와라."이라면서 태종이 화를 낸 것. 이후 3권에서는 이들의 숙청 과정을 아주 상세하게 보여준다.[56] 다만 초창기엔 많이 감싸주었다.[57] 그래도 세종대왕은 이숙번은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판단해서 신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세종대왕은 선왕인 태종이 내렸던 결정들은 웬만해선 존중했다.) 경기도에서 사는 것을 허락했다. 이것이 이숙번에게는 조금은 다행이었는데 원래의 유배지는 경상도였다. 유배지는 죄의 경중과 이전의 공적을 고려해 도읍지인 한양과 얼마나 가까울지, 멀지가 결정된다. 과거 민무구, 민무질 형제가 마지막엔 유배지가 제주도로 옮겨진 것만 보더라도 이숙번의 유배지가 경상도에서 경기도로 보다 도읍지에 가까운 곳으로 옮겨진 것은 그의 명예가 어느정도 회복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58] 뇌물도 안 받고 일처리도 조심스레 하고 권세가 높다고 거들먹거리지도 않아서 무장 출신임에도 그의 졸기는 칭찬뿐이다.[59] 그런데 품행은 워낙 엉망이라 태종이 억지까지 부리며 보호해야 했다.[60] 대표적으로 태종의 공신이였던 이천우, 조온 등이 이런 식으로 실권을 빼앗겼다.[61] 실제로, 태종의 치세에는 사화나 환국 같은 대형 사건들은 없었고, 태종은 살생은 하되 피를 보는 것을 최소화하려 했다. 위에 서술한 것처럼 숙청의 방식도 살생보다는 유배를 보내거나 실권을 빼앗는, 비교적 온건한 방법을 썼다.[62] 사관은 대개 문신들이며, 문신들은 무신들을 깔보기 쉬운데, 그런 이들마저 조영무의 졸기에는 '소박하고 공정하며 바른말 하기를 잘했다.' 라고 평가했다.(소박한게 왜 칭찬이냐면 소박한 것은 검소하다는 뜻이고, 유교 사회에는 검소함을 숭상했기 때문.[63] 하륜은 태종 16년 조영무는 태종 14년.[64] 기축옥사 때 무려 1000여명이 희생되었다.[65] 물론 성종이 언제나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어우동의 사형은 간통의 원인이 강간인데다 강상죄 등과 연관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신료 대부분이 반대했지만 성종이 밀어붙였으며, 정 처형할 거면 강간에 가담한 자도 색출해 처형하자는 주장도 받아들이지 않았다.[66] 고려는 제1차 요동정벌 당시, 오녀산성을 비롯해 아주 잠깐 요동을 점령하였다. 이 때 큰 활약을 한 인물이 바로 이성계. 그리고 위화도 회군과도 관련이 있다.[67] 한번은 사신이 아니라 명나라가 왕자를 보내달라고 요구해서 간 적도 있었다.[68] 이를 중국에 대한 맹목적인 사대로 보는 것은 엄청난 오해이다. 실제로 명과의 조공 무역은 조선의 입장에서는 엄청난 이득이었다. 서양 열강의 동방으로 손을 뻗기 이전까지 중국은 동아시아의 중심이자 강대국이었기에 조공 무역은 말 그대로 우리가 이만큼 성의를 보였는데 황제국으로서 설마 빈손 대접을 할거냐고 은근히 압박하는거라 어쩔 수 없이 선물을 줘야하는데, 이 대부분은 조선에서는 볼 수 없는 귀중품이나 발전한 물건들인지라 조선은 이걸 받아서 자체적으로 발전에 필요한 재료 및 국고로 활용이 가능했다. 쉽게 비유하면 설날에 조카삼촌에게 세배하고 적당히 비위를 맞춰주면 세뱃돈을 두둑히 주는 것과 같다.[69] 명의 입장에서는 변방국인 일본은 조공을 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지만 10년에 1회(...)가 최대였다. 명나라는 이후에는 조선에게 조공 좀 그만하라고 했지만 조공 무역으로 들어오는 막대한 이득을 조선이 포기했을 리가...[70] 그렇지만 영락제가 명나라 최고의 정복 군주인걸 생각해보면....어차피 정벌해봤자 다시 빼앗겼을 공산이 크다. 그리고 태종은 아버지 태조가 요동 정벌을 일시적으로 성공했다가 여러 한계로 인해 다시 포기하고 철수했던 것을 알고 있던 인물이기에 그 역시도 요동 정벌의 현실적인 어려움들을 모를 리 없다.[71]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3권의 작가 후기에서 그를 정치 10단으로 표현했다.[72] 《태종실록》 권31 16년 6월 4일 갑자 2번째 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ca_11606004_002 [73] 한마디로 "좌의정은 말 하나는 남 비위 맞춰주는 데 선수야.[74] 세종실록의 1422년 5월 9일 박은의 졸기.[75] 만수무강에 들어가는 글자들이기도 하다.[76] 여기서 송감은 중국 송나라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책으로, 중국의 기본 역사서들인 '흠사 25사' 에는 들어가 있지 않지만(송나라 때의 역사서로는 <송사>가 들어간다) 왕이 서연에서 공부해야 하는 역사서 가운데 하나다.[77] 세종실록 5권, 1년 9월 28일 기사.[78] 참고로 저 당시 실록을 기록하던 사람이 바로 민인생. 근데 이 사람은 사관이 아니라 거의 스토커 수준이라서 태종이 측근들만 데리러 갔을 때는 몰래 일행인 척 하면서 따라가질 않나 한 번은 내려가다가 다리를 헛딛은 적이 있었는데 누가 보지 않았나하고 안심했지만 민인생은 왕궁의 돌다리 아래에서 다 지켜보고 있어 적어놓았고, 태종이 잠자리에 들려고 할 때 뭔가 인기척이 있어서 놀라 병풍을 치우니 민인생이 있질 않나... 태종 입장에서는 거의 찰거머리 그 자체였다. 참다못해 한 번은 호되게 호통친 적이 있었으나 민인생이 그 대화 자체도 적겠다고 하자 꼬리를 내렸지만, 나중에 보복으로 사관에서 짤리게 만들었다(...)아무리 날뛰는 사관이라도 자리 앉히고 내리게 하는 것은 왕의 몫(...)[79] 이전 판까지 이 내용은 정종 항목에 서술되어 있었는데, 이는 조선 초기 실록 편찬 방식을 이해하지 못한 편집자의 오류이다. 비록 정종실록에 기록되어 있어도, 그 해 11월에 태종이 즉위했기 때문에 12월에 중궁이라 불리는 사람은 원경왕후가 맞다. 태조 실록 등 조선 초에는 새 임금이 즉위한 해 12월 기록까지 선왕의 실록에 포함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80] 용의 눈물도 이 상황을 묘사해 방영했던 적이 있다. 경연청에서 이부자리를 펼치면서 친구이자 지신사였던 박석명과 이야기를 나눈다.[81] 김우는 2차 왕자의 난때 활약한 공신이라 벌주지 않았다.[82] 혜선옹주 홍씨로, 기명 가희아(可喜兒). 드라마 하녀들에서 이채영이 연기한 인물이다.[83] 이 때문에 이직은 딸을 태종에게 후궁으로 들여서 정가에 복귀하려 하는거 아니냐며 대간들에게 한소리를 들어야 했다.[84] 실제로 2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은 안 돌아오고 이방원의 말만 집으로 찾아오자, 남편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고 생각해서 직접 창을 들고 나가 싸우겠다며 달려나가려 한 일이 있었을 정도였다.[85] 서모인 신덕왕후가 살아있을 때, 태종이 신덕왕후의 여종과 정을 통했다고도 하니 말 다했다. 다만 이때는 원경왕후도 새시어머니인 신덕왕후가 싫어서인지, 신덕왕후의 앞에서는 이 여종을 자신이 혼내주겠다고 해놓고, 뒤에서는 몰래 칭찬해주긴 했다.[86] 말이 12월이지 이게 음력이다. 양력으로는 1월이라는 것인데, 다들 알겠지만 12월보다 1월이 더 춥다. 이런 행위는 "얼어죽어라!" 라는것과 다를바 없다.[87] ...라지만 이 일은 태종이 일방적으로 밝힌 거라...[88] 투기, 즉 질투는 당시 사회에서 해서는 안 되는 것들 중 하나였다. 더구나 왕실에서, 그것도 왕비가 투기를 했다는 것이 알려진다면 왕실의 체면이 그야말로 넝마꼴이 되는 것이다. 하물며 왕실의 생활은 그 나라의 생활양식을 대표한다고 봐도 무리가 없을 정도인데 왕비가 대놓고 사회의 금기를 행한다면..[89] 조선국왕 자녀순위 2위라고 위에 써놨으면서 왜 아들 없냐고 하냐고 묻는 위키러를 위해 설명하자면, 저기 나오는 아들은 정실 부인이 낳은 아들, 즉 적자를 말하는 거다. 정종은 정실 부인 정안왕후 김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가 없고, 전부 다 첩들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들, 즉 서자뿐이었다. 그리고 이 일은 태종이 뭘 하던 일절 간섭하지 않던 정종이 태종에게 국정에 관해 발언한 유일한(!) 사건이라고 한다. 아무리 조용히 지낸 정종이라지만 이것만은 동생이 하는 행동이 막장으로 보였나보다. 사실 내명부 권한을 뺏는건 그냥 폐비에 준하는거라 태종 입장에서도 했다면 부담이 컸을것이다. 안좋은 선례도 남겼을테고[90] 태종실록 12년 6월 "중궁이 해산했고 약 덕분에 난산을 하지 않았다"며 상을 내린 기록이 있다. 이 때 원경왕후의 나이는 무려 47살...[91] 태종의 적자 4남 중 막내인 성녕대군은 태종이 즉위한 후에 태어났다.[92] 원래 왕자공주든 결혼하면 궐 밖으로 나가야 한다. 특히나 신분에 상관없이 왕이 아닌 남자는 10살 이상이 되면 궐 밖에 나가는게 법도였다. 물론 궐 밖에 나간다고 맘대로 활동하는 건 불가능하지만[93] 즉, 왕의 총애가 없는 중전은 그냥 끈 떨어진 연에 불과하니 곧 외척의 발호를 견제하는 효과를 본다.[94] 중전, 즉 원경왕후를 가리킨다.[95] 자기 의견을 개진하거나 표현하는 능력이 없었음을 의미한다. 이런 성격은 신하들에게 휘둘릴 가능성이 커서 태종은 왕이 될 자질이 효령에겐 없음을 밝힌 것이다.[96] 정말이지 무시무시한 책벌레였다. 심지어 병상에서 조차 책을 읽는것을 그만두지 않았다. 보다못해 아버지였던 태종이 동궁전(세자의 처소)의 모든 책을 압수해 오라고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충녕 대군은 아무도 모르게 숨겨놓은 책을 가져다가 그것으로 충족하였다는 일화까지 있으니..[97] 이를 토대로 볼 때, 세종은 애주가는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한편으로 보면 사교적인 성격을 가진 술자리에는 어울리는 인물이 아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98] 위에서 언급한대로 하다못해 외교사절을 접대함에도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이어가기 위한 목적으로도 필요한 것이 음주인데 효령은 금주가여서 이에 대한 문제가 있을것을 언급했던 것.[99] 이때 양녕은 아버지도 첩실 여럿 들이고 재미 보시는데 나는 왜 못함? 이라는 취지의 편지를 써서 태종의 뒷목을 잡게 만들었다.[100] 정종은 세종이 왕위에 오른 이후에 승하하였다.[101] 정확히는 한양 내에 있는 성녕대군의 집(훗날 나이가 차면 나가서 살 집)을 절로 개축하자고 한것이지만 당연히 신하들은 반대했고 대신에 성녕대군 묘 근처에 암자를 하나 지어서 명복을 빌어주자고 제안한 것을 태종이 받아들인 것이다.[102] 사실 부엉이란 새 자체가 야행성인데다 우는 소리마저 섬뜩한 면이 있는지라 태종이 두려움을 느꼈던 것도 무리는 아니다.[103] 금성을 가리킴.[104] 왕이나 여왕을 상징하며 천궁도의 사자자리로 보고있다.[105] 개국공신이면서 태종의 최측근 무신인 조영무의 장남. 무신인 아버지와는 달리 과거에 급제한 문신인데 세종실록의 졸기를 보면 사관들에게도 꽤 사람 좋고 능력도 좋은 관료라는 평가를 받는 인물이기도 하다.[106] 태종 시대의 사관 민인생이 좀 중증 스토커였기도 하다. "위에는 하늘이 있습니다. 그러니 저는 바르게 기록해야 합니다!" 라는 명언을 남기기도 한 인물이다.[107] 다만 그래도 어쨌든 조선은 수로로 운반했다. 육로로 운반할 경우 가장 큰 문제는 효율 문제였다. 육로로 운반하면 육로로 운반하는 데에 쓰는 마소의 여물은 여물대로 챙겨야 하고 덤으로 사람 먹을 것 까지 챙겨야 한다. 그러다보니 종종 옮기는 양보다 비용이 더 컸다. 속도도 수운이 훨씬 빨랐고. 치안 문제는 사실 큰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108] 형식상 스스로 양위한 왕은 태조, 정종, 태종, 세조, 고종 총 5명이 있었다. 그 중 태조와 정종은 태종의 무언의 압박으로 자의 반(권력에 대한 회의와 환멸) 타의 반으로 어쩔 수 없이 물려줬고, 세조는 죽기 하루 전에 물려줘서 사실상 양위라고 볼 수 없으며, 고종은 헤이그 특사 파견으로 인해 일본이 강제로 쫓아냈다.[야사] 즉위식 때 세자인 충녕이 아직 왕이 되고 싶지 않아 세자가 사용하는 양산을 집어들었는데, 태종이 굳이 왕의 양산을 손에 들려준 후에 절하며 '주상, 이 조선을 잘 부탁드립니다'하고 예를 갖추니 그 자리에 있던 신하들이 통곡했다는 이야기가 있다.[110] 사실 세종대왕은 태종이 다져놓은 기반 위에 벽체를 쌓고, 내부 정리를 하여 조선이라는 멋진 집을 완성시킨 것이다.[111] 맹꽁이 서당에도 이에 관한 이야기가 있는데 이 대성일갈을 들은 메뚜기가 "무식한 말씀 마시오. 메뚜기는 초식 곤충이라 곡식 외엔 안 먹소이다."라고 대꾸했다.[112] 송충이가 크게 번져 사도 세자 묘의 소나무가 모두 말라죽는 일이 일어났다. 인부들이 잡아온 송충이를 집어 "내 아비가 억울하게 죽어 이 곳에 누워 계신데 그 나무를 갉아먹는단 말이냐."하고 호통을 치고 그 송충이를 씹어 삼켰다. 이후로 무덤 근처에 송충이가 싹 사라졌다는 전설이 있다.[113] 만일 재벌 그룹의 회장이 장성하고 능력이나 인품에도 결격이 없는 형들을 제쳐놓고 막내아들에게 그룹을 물려준다고 가정해보자. 더군다나 그 막내 아들은 열 몇 살짜리 어린아이라면 이게 과연 합당한 일이라 생각할 수 있을까?[114] 다만 이는 세조 입장에서는 조금 억울할 일인데 사실 경연을 좋아한 왕은 얼마 안된다. 웬만한 호학의 군주가 아니고서야 경연은 짜증만 나는 자리라서 그들중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태조는 경연을 조금 느슨하게 하려고 했다가 역관광 당했고 연산군은 좀 하다가 경연 폐지 현종은 건강 핑계로 경연을 자주 하지 않았다.땡땡이 친거 빼면 어째 축소 시도했다가 털렸거나 폭군이라는 설명이다 게다가 세조의 경우 경연은 폐지했어도 세자 교육인 서연은 지속했고 성균관 유생과 무신들에게 끊임없이 배울것을 권했다.지는 하기 싫다는 거네[115] 다만 태종도 공신의 부정부패는 상당히 봐줬고 간관과 사관의 경우 어느정도는 제어를 시도해서 태종 시기에 곤장을 맞거나 유배되는 간관들도 있었다. 그래도 세조처럼 머리채 잡아끄는 짓은 안했다. 뭐든지 정도의 문제. 사관들의 유명한 대쪽같은 일화가 태종 때에 많은 것만 보더라도 태종 본인이 짜증나는 것에 대해 화풀이를 하려는 모습이 없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냉정하게 보면 국가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보면 그들의 활동을 제대로 보장해준 것은 틀림이 없다.[116] 과전법은 자리에서 물러나면 반납해야 하는데 흉양전,수신전 명목으로 세습화 되는 폐단이 있었다.[117] 다만 여기엔 공신들의 땅따먹기가 심해져서 지급할 땅이 부족해졌다는 평가도 있다.[118] 1960년, 1964년, 1967년, 1971년, 1972년, 1976년, 1978년, 1979년, 1981년, 1982년, 1983년, 1984년, 1985년, 1986년, 1987년, 1992년, 1993년, 1994년, 1998년, 1999년, 2001년, 2002년, 2005년, 2007년, 2009년, 2010년, 2011년, 2012년, 2013년, 2015년. 날씨 정보는 기상청 서울 지상 관측 자료, 음양력 변환은 한국 천문 연구원 음양력 변환을 참조함.[119] 참조.[120] 이러한 야사는 사실인지 아닌지보다는, 조선 사람들의 태종에 대한 인식이 어떠했는가를 추정하는 자료로 봐야 한다.[121] 월탄 박종화의 세종대왕.[122] 문종: 아바마마와 제 뜻이 다를 때는 어찌해야 합니까?
태종: 반대해야 한다. 그래도 널 향한 네 아비의 사랑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123] 과녁 정중앙에 화살을 맞히는 것.[124] 여기서도 배우 개그가 생기니, 바로 유아인이 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에서는 숙종을, 2년 후 영화 사도에선 사도세자로 분하는데 이방원과 먼 후손 두명이 같은 얼굴이라는 배우 개그가 된다.[125] 김상경 또한 대왕 세종에서 세종을 맡았는데 장영실에서 또 세종을 맡게 됨으로서, 그도 세종을 두 번 맡게 된 배우가 되었다.[126] 1408년, 태종 8년.[127] 1433년, 세종 1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