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덕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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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 덕포진 |
김포 덕포진 金浦 德浦鎭 | |
소재지 | 경기도 김포시 대곶면 신안리 산103-1 |
분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성 / 성곽 |
면적 | 48,829㎡ |
지정연도 | 1981년 9월 25일 |
건축시기 | 조선 후기 |
경기도 김포시 대곶면 신안리에 위치한 조선 시대의 수군 진영이다. 서해에서 강화해협(염하)을 거쳐 도성(한양)으로 진입하는 길목인 손돌목에 설치된 전략적 요충지이다. 1981년 대한민국의 사적 제292호로 지정되었으며,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당시 외세의 침공을 막아낸 호국 유적지이다.
정확한 창건 연대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으나,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서해를 돌아 한강과 임진강 수로를 통해 한양으로 침입하는 것을 경험한 후 해안 방어의 중요성을 절감하여 조선 선조 연간에 처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 1666년 (현종 7년): 경기도 강화에 설치되어 경기 수영 소속으로 편제되어 있다가 통진으로 수군첨사(水軍僉使) 진을 이전하여 설치하였다.
- 1682년 (숙종 8년): 강화부의 주진(主鎭)으로 승격되어 영종과 안흥진을 관장하게 되었다. 당시 덕포진에는 종3품의 수군첨절제사가 주둔하며 수군 300여 명과 방선 2척, 병선 1척, 사후선 3척 등의 군선을 배치하여 강화해협의 방어를 담당하였다.
- 1760년 (영조 36년): 기록에 따르면 당시 수군 316명을 지휘하였으며, 전속 방어 거리는 남쪽으로 15리에 이르렀다.
19세기 후반 서구 열강의 이양선이 출몰하면서 도성을 사수하기 위한 수도권 방어 체계의 핵심 보루로서 그 전략적 가치가 더욱 극대화되었다.
- 1895년 (고종 32년): 근대적 군사 제도 개편에 따라 폐지되었다.
폐지 이후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군사 시설의 실체가 파괴되거나, 흙 속에 묻혀 수십 년 동안 역사의 뒤안길에 방치되어 있었다.
- 1980년: 유적지의 실체가 최초로 발견 및 발굴되었다. 발굴 조사 결과 돈대, 파수청, 포대 등의 시설물이 확인되었으며 중포와 소포 등 화포 6문과 포탄, 상평통보 등이 출토되었다.
- 1981년 9월 25일: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대한민국의 사적 제292호로 지정되었다.
- 1981년~1982년: 포대와 토성을 보수하고 돈대지와 파수청지를 정비하여 옛 모습대로 복원하였다.
- 2011년 7월: 공식 명칭을 '덕포진'에서 ‘김포 덕포진’으로 변경하였다.
- 2017년: 돈대 지역에 대한 재발굴 조사가 이루어져 하부 기초 시설 등을 확인하였다.
김포 덕포진은 지형지물을 활용하여 돈대와 파수청, 포대가 북쪽에서 남쪽 방향으로 차례로 배치되어 있다.
염하강을 따라 총 3개 구역(가, 나, 다)에 15개의 포좌가 설치되어 있다. 각 포대는 적 함선의 진입 방향과 강화해협의 폭을 고려하여 입체적으로 설계되었다.



- 가 포대 (약물터): 총 7개의 포좌로 구성되어 있으며 , 강화도의 덕진진 남장포대 및 덕진돈대와 정면으로 마주보고 있다. 덕포진과 강화도 측에서 동시에 사격할 경우 적 함선을 포화 속에 가두는 병목 지점 역할을 한다.
- 나 포대 (원돌터): 총 5개의 포좌가 있으며 , 강화도의 초지진 방향을 향하고 있다. 포구가 수면 높이에 가깝게 낮게 설계되어 있는데, 이는 적 함선의 흘수선(吃水線)을 직접 타격하여 침몰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공학적 설계이다.

- 다 포대 (굽도리): 총 3개의 포좌로 이루어져 있으며 , 강화도의 광성보 방향을 향한다. '가', '나' 포대와 달리 포좌의 지붕이 기와로 마감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1980년 발굴 당시 고정식 포가에 얹힌 중포 1문이 이곳에서 발견되었다.

포대와 돈대의 중심부에 위치한 작전 지휘소이자 군수 지원 시설이다. 포를 쏠 때 필요한 불씨를 보관하고 포병을 지휘하는 '장대(將臺)'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1980년 발굴 조사에서 건물의 기초부와 주춧돌, 화덕 자리가 확인되었다.
경내 최북단 염하 방면으로 뻗은 구릉 지대에 위치한 방어 시설이다. 주변 관측이 용이하도록 높은 평지에 설치되었으나 , 현재 지표상에서는 군 초소 등이 자리하고 있어 구체적인 흔적은 확인하기 어렵고 안내판으로 대신하고 있다. 2017년 재발굴 조사를 통해 하부 기초 시설과 수구(水口) 등이 확인되었다.
실질적으로 장수가 군을 지휘하던 본진은 현재의 사적지 구역이 아닌, 북동쪽으로 약 1km 떨어진 부래도 인근(신안1리 윗말)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해당 지역에는 본진 건물, 토루, 선박 접안시설 등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현재는 흔적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천주교 박해를 구실로 침공한 로즈 제독 휘하의 프랑스 함대와 교전하였다.
- 함대 진입 저지: 프랑스 함대는 강화도를 점령한 후 염하강을 거슬러 한양으로 진입하려 시도하였다. 이때 덕포진은 강화도 측의 포대들과 협력하여 프랑스 군함을 상대로 포격전을 전개하였다.
- 지형적 이점 활용: 당시 프랑스군은 근대적인 장사정포와 철갑선을 보유했으나, 덕포진 앞 손돌목의 좁은 수로와 매우 빠른 조류 조건으로 인해 함선 기동에 제약을 받았다.
- 전술적 결과: 화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지형을 활용하여 적의 진격을 지연시켰으며, 이는 프랑스군이 철수하게 만든 요인 중 하나로 작용하였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에 대한 사과와 통상 개방을 요구하며 침공한 미국 아세아함대와 치열한 포격전을 벌였다.
- 기술적 격차: 미군은 약 2시간에 걸친 맹렬한 함포 사격으로 조선군의 방어 시설을 무력화한 후 상륙을 단행하였다. 덕포진의 포병들은 폭발력이 없는 구형 쇠공 탄환(철환)으로 대응하는 등 무기 체계의 한계를 보였으나, 함대의 북상을 막기 위해 사격을 지속하였다.
- 수도 방어선 사수: 비록 맞은편 광성보 등에서 어재연 장군 휘하의 조선군 대다수가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으나, 덕포진을 포함한 방어진지의 저항으로 인해 미군 함대는 염하를 통한 한양으로의 북상을 포기하고 철수하였다.
김포 덕포진 앞바다인 강화해협의 좁은 물길, 손돌목에 전해 내려오는 설화이다. '손돌바람 설화', '손돌목 전설'이라고도 불린다.
- 의심과 처형: 피란길에 오른 왕과 일행은 뱃사공 손돌(孫乭)의 배를 타고 강화도로 향하게 되었다. 손돌은 안전한 물길을 택해 배를 몰았으나, 이곳은 지형상 앞이 막힌 것처럼 보이고 물살이 매우 험한 여울목이었다. 마음이 급했던 왕은 손돌이 자신을 해치기 위해 일부러 위험한 곳으로 배를 몬다고 의심하여 참수를 명하였다.
- 손돌의 충성: 손돌은 죽기 직전, "보기에는 막힌 듯하지만 좀 더 나아가면 길이 트일 것"이라며 거센 물살 위에 바가지를 띄우고 그것을 따라가면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 결과: 왕과 일행은 손돌의 말대로 바가지를 따라 험한 뱃길을 무사히 빠져나와 강화도에 도착하였다. 뒤늦게 자신의 경솔함을 깨달은 왕은 손돌의 장례를 성대하게 치러주고 사당을 세워 그의 넋을 위로하였다.
손돌이 참수된 곳이자 뱃길이 험한 이 여울목의 지명은 그의 이름을 따서 '손돌목'이 되었다. 손돌이 죽은 날인 음력 10월 20일경이 되면 매년 매서운 바람과 추위가 찾아오는데, 이를 손돌의 원혼이 일으키는 바람이라 하여 '손돌바람' 또는 '손돌풍'이라 부르고 이때의 추위를 '손돌추위'라 한다. 이 시기 어부들은 바다에 나가는 것을 삼가고, 사람들은 겨울옷을 마련하는 풍습이 생겨났다.

경기도 김포시 대곶면 신안리 덕포진 경내 최북단, 강화해협이 내려다보이는 구릉 위에 위치한다. 원래 있던 사당은 일제강점기에 헐렸으나, 1970년 지역 주민들과 향토사학자 김기송의 노력으로 묘가 복원되었다. 1989년부터 김포문화원 주관으로 매년 음력 10월 20일에 손돌의 넋을 기리는 진혼제(손돌제)를 거행하고 있다.
- 경기도 안성: 손돌이 힘센 장사로 등장하며, 시장에 옷을 사러 갔다가 날씨가 따뜻해 옷 대신 절구통을 사 왔는데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얼어 죽었다는 내용으로 전해진다.
- 충청북도 영동: 10월 20일을 '손사공 죽은 날' 또는 '모진 놈 죽은 날'이라 부르며, 무서운 성격의 인물로 굴절되어 전승되기도 한다.
관람료와 주차료는 모두 무료이다. 산책로가 잘 조성되어 있어 가볍게 둘러보기 좋으며, 소요 시간은 왕복 약 40분 정도이다.
1980년 발굴 당시 발견된 화포 6문 중 1문은 현재 덕포진 내 유물전시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 나머지 5문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외에도 포탄 7개와 조선 시대 화폐인 상평통보 2개가 함께 출토되었다.
출토된 화포에는 “동치십삼년오월(同治十三年五月)”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 동치(同治)는 청나라 목종의 연호로 13년은 조선 고종 11년(1874년)에 해당한다. 또한 이 화포들은 흥선대원군의 사가인 운현궁에서 직접 관리하여 제작된 것임이 확인되었다.
일제강점기 이후 흙 속에 묻혀 잊혀졌던 덕포진을 세상에 다시 드러낸 인물은 향토사학자 김기송 전 김포문화원장이다. 그는 1970년대 초부터 할머니에게 전해 들은 손돌묘와 덕포진의 기록을 바탕으로 사비를 들여 유적지를 찾아다녔고 , 끈질긴 설득 끝에 1980년 문화재청과 함께 발굴에 성공하였다. 현재 그는 덕포진에서 문화관광해설사로 활동하며 방문객들에게 역사를 전하고 있다.
지리적으로 강화해협을 사이에 두고 강화도의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와 마주 보고 있다. 덕포진의 각 포대는 이 전적지들을 향해 전략적으로 배치되어 있어 , 당시 양측에서 교차 사격이 가능한 구조였음을 알 수 있다.
원래 명칭은 '덕포진'이었으나, 지역 명칭을 명확히 하기 위해 2011년 7월에 ‘김포 덕포진’으로 공식 명칭이 변경되었다.
인근의 평화누리길 1코스와 연결되어 있어 트레킹 코스로도 자주 이용된다. 철책선을 따라 걷는 경로 덕분에 분단의 현실과 호국 유적의 의미를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장소로 꼽힌다.
1980년 발굴 당시 발견된 화포 6문 중 1문은 현재 덕포진 내 유물전시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 나머지 5문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외에도 포탄 7개와 조선 시대 화폐인 상평통보 2개가 함께 출토되었다.
출토된 화포에는 “동치십삼년오월(同治十三年五月)”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 동치(同治)는 청나라 목종의 연호로 13년은 조선 고종 11년(1874년)에 해당한다. 또한 이 화포들은 흥선대원군의 사가인 운현궁에서 직접 관리하여 제작된 것임이 확인되었다.
일제강점기 이후 흙 속에 묻혀 잊혀졌던 덕포진을 세상에 다시 드러낸 인물은 향토사학자 김기송 전 김포문화원장이다. 그는 1970년대 초부터 할머니에게 전해 들은 손돌묘와 덕포진의 기록을 바탕으로 사비를 들여 유적지를 찾아다녔고 , 끈질긴 설득 끝에 1980년 문화재청과 함께 발굴에 성공하였다. 현재 그는 덕포진에서 문화관광해설사로 활동하며 방문객들에게 역사를 전하고 있다.
지리적으로 강화해협을 사이에 두고 강화도의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와 마주 보고 있다. 덕포진의 각 포대는 이 전적지들을 향해 전략적으로 배치되어 있어 , 당시 양측에서 교차 사격이 가능한 구조였음을 알 수 있다.
원래 명칭은 '덕포진'이었으나, 지역 명칭을 명확히 하기 위해 2011년 7월에 ‘김포 덕포진’으로 공식 명칭이 변경되었다.
인근의 평화누리길 1코스와 연결되어 있어 트레킹 코스로도 자주 이용된다. 철책선을 따라 걷는 경로 덕분에 분단의 현실과 호국 유적의 의미를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장소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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