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릉(서울 성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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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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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지된 능호
조선 신덕왕후의 왕릉
정릉

貞陵
정릉 능침(궁능유적본부)-mi...
매장지
조성 형태
단릉(單陵)
매장자
조성 시기

국가유산 정보 [ 펼치기 · 접기 ]

서울 정릉
서울 貞陵
Jeongneung Royal Tomb, Seoul
소재지
분류
유적건조물 / 무덤 / 왕실무덤 / 조선시대
면적
297,798㎡
지정 연도
시대
조선 태종 9년(1409), 조선 현종 10년(1669)
소유 단체
관리 단체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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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3. 구조4. 창작물에서5. 관련 문서6. 둘러보기

 
 
 
 
 
 
 
 
 
 
 
 
 
 
 
 
 
 
 
 
 
 
 
 
 
 
 
 
 
 
 
 
 
 
 
 
 
 
 
 

1. 개요[편집]

 
 
 
 
 
 
 
 
 
 
 
 
 
 
 
 
 
 
 
 
 
 
 
 
 
 
 
 
 
 
 
 
 
 
 
 
 
 
 
 
정릉 전경(궁능유적본부)-mi...
정릉(貞陵)의 전경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에 위치한 태조 이성계의 계비 신덕왕후의 능. 현재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1]
 
 
 
 
 
 
 
 
 
 
 
 
 
 
 
 
 
 
 
 
 
 
 
 
 
 
 
 
 
 
 
 
 
 
 
 
 
 
 
 

2. 상세[편집]

 
 
 
 
 
 
 
 
 
 
 
 
 
 
 
 
 
 
 
 
 
 
 
 
 
 
 
 
 
 
 
 
 
 
 
 
 
 
 
 
정릉 능침 전경(궁능유적본부)...
정릉(貞陵)의 능침
본래 도성 안쪽 지역인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에 있었던 능이었다. 살아생전 신덕왕후를 총애했던 이성계가 자신이 기거하던 경복궁 인근에 그녀의 능을 두고자 했기 때문에 4대문 안쪽 지역인 정동에 장지를 마련했다. 그러나 1409년 태종의 명령에 따라 지금의 자리인 정릉동으로 옮겨졌다. 한양의 중심가였던 4대문 안쪽에서 당시로서는 외곽이었던 정릉동으로 무덤이 옮겨진 것은 계모 신덕왕후에 대한 이방원의 증오심과 경계심 때문인데 자세한 내용은 아래에 후술한다. 처음 능지를 정한 곳은 정동이었으나 묘역을 조성할 때 물이 솟아나와 지금의 정릉동 자리로 정해지게 되었다.

능을 이장하면서 능 주변에 있던 비석 및 석상을 모두 제거하고 능을 묘로 격하, 사실상 주인없는 가묘(假墓)로 전락시켰다. 세종대왕 때는 영정마저 불살랐다. 그러다가 1669년 우암 송시열현종에게 제창하면서 종묘에 모셔지고 이때 들어서 정릉으로 봉안되었다.

태종 이방원이성계를 꼬드겨 이복동생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하게 한 계모 신덕왕후를 싫어하였으며, 신덕왕후 역시 방원을 경계하였다. 신덕왕후가 사망한 후, 결국 이방원은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을 잡아두고 이복동생 이방번이방석을 붙잡아 죽였다.

이후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면서 신덕왕후(를 비롯한 외척)에 대한 경계심을 버리지 못해 결국 정동에 있던 능을 지금의 정릉동으로 강제이장시키고 능에서 묘로 격하하며 심지어 정릉에 있던 석물들을 청계천 다리 공사에 쓰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청계천 광통교 밑을 지나가다 보면 광통교 돌다리나 벽돌에 화려한 무늬가 새겨져 있는 돌들을 볼 수 있는데, 이게 바로 정동 정릉에 있던 석물들이다. 그리고 이 돌들을 보면 제대로 놓은 게 아니라 아예 뒤집힌 채 끼워진 돌들도 볼 수 있다. 조선이 사라진 후인 오늘날까지도 신덕왕후태종의 악연을 제대로 보여주는 건축물.[2]

아이러니 한 것은 이방원이 정릉 석물들을 광통교 밑에 처박아 놨기 때문에 청계천에 잠겨 사람 손이 타지 않았고 비교적 온전한 상태로 21세기까지 남아있다는 것이다. 조각들을 보면 구름에 휩싸인 도사나 스님이 들고 다니는 금강저등이 보이는데 도교적이거나 불교적이어서 아직 유교 문화가 강고히 정착하기 이전 고려 말 조선 초의 문화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특히 금강저에는 중앙에 조선왕조의 어기에도 그려저 있는 태극 문양이 있어서 흥미로움을 자아낸다.

서울 중구의 정동은 정릉을 처음 조성한 곳이었기 때문에 동네 이름을 그대로 정릉의 '정'에서 가져왔으며, 이후 정릉을 현 위치로 이장하면서 그곳의 마을 이름 역시 능 이름을 다시 가져와 현재의 성북구 정릉동이 되었다.
 
 
 
 
 
 
 
 
 
 
 
 
 
 
 
 
 
 
 
 
 
 
 
 
 
 
 
 
 
 
 
 
 
 
 
 
 
 
 
 

3. 구조[편집]

 
 
 
 
 
 
 
 
 
 
 
 
 
 
 
 
 
 
 
 
 
 
 
 
 
 
 
 
 
 
 
 
 
 
 
 
 
 
 
 
정릉 문석인(궁능유적본부)-m...
정릉 장명등(궁능유적본부)-m...
정릉(貞陵)의 문석인과 장명등
정릉의 능침 봉분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였고, 봉분 주변에는 문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이 있으며, 석양과 석호는 1쌍씩 배치하였다. 능침 석물 중 장명등과 혼유석을 받치는 고석(鼓石)만 옛 정릉의 석물이고 나머지는 현종 대에 다시 만든 석물이다. 장명등은 고려 공민왕릉의 양식을 따른 것으로 조선왕릉 중 가장 오래된 석물이다. 향로와 어로는 지형에 맞게 조성하여 한 번 꺾여있다.[3]
정릉 표석(궁능유적본부)-mi...
정릉(貞陵)의 표석
능역에는 1개의 비각이 설치되어 있고, 그 안에 1개의 표석이 세워져 있다. 표석 전면에는 '대한 신덕고황후 정릉(大韓 神德高皇后 貞陵)'이란 글씨가 전서체로 음각되어 있고, 뒷면에는 신덕왕후의 일생을 약술한 음기(陰記)가 기록되어 있다.[4]
<원문> 順元顯敬神德高皇后康氏 太祖高皇帝繼后 六月十四日 誕生壬申開國冊封 顯妃丙子八月十三日 昇遐丁丑正月葬于漢城皇華坊 太宗己丑二月二十三日 移葬于楊州南沙阿里庚坐之原 顯宗己酉追祔 太廟追上 徽號順元顯敬光武三年己亥十一月追尊恭上 諡號曰 高皇后敬書前面與陰記庸伸小子之微忱焉
光武四年 月 日

<해석> 순원현경 신덕고황후 강씨태조 고황제의 계후이시다. 6월 14일에 탄생하여 임신년에 개국하면서 현비로 책봉되어 병자년 8월 13일에 승하하였다. 정축년 정월에 한성의 황화방에 장사지냈다가, 태종 기축년 2월 23일양주 위 남쪽 상리의 경좌의 언덕에 이장하였다. 현종 기유년에 태묘에 추존하여 삼가 고황후의 시호를 올리고 능표의 전면과 음기를 삼가 써서 소자의 작은 정성을 표한다.

광무 4년(1900년) 월 일


여담으로 서울특별시 강남구에 또 하나의 정릉(靖陵)이 존재는데, 이 곳은 조선 제11대 국왕 중종이 안장된 능이다.
 
 
 
 
 
 
 
 
 
 
 
 
 
 
 
 
 
 
 
 
 
 
 
 
 
 
 
 
 
 
 
 
 
 
 
 
 
 
 
 

4. 창작물에서[편집]

 
 
 
 
 
 
 
 
 
 
 
 
 
 
 
 
 
 
 
 
 
 
 
 
 
 
 
 
 
 
 
 
 
 
 
 
 
 
 
 
  •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정릉이 누구의 무덤이냐"는 교수의 질문에 여주인공 양서연(수지)은 자신없는 목소리로 "정조?"라고 대답한다. 정답이 아닌 거 같자 "정종?", "정약용?"이라고 연이어 틀린 답을 내놓고 강의실 학생들의 웃음소리가 커진다.[5]
  • KBS 대하드라마 《용의 눈물》133회 어전회의 대목에서 태종이 정릉의 석물을 청계천 돌다리에 사용하고, 자신의 친어머니인 신의왕후 한씨가 정통성있는 조선의 첫 국모라는 것을 신하들 앞에서 천명한다. 한편 태종은 아버지 태조 시기의 역사인 실록을 속히 편찬할 것을 명하고 그 총책임에 하륜을 명한다. 이에 하륜 및 주변 신료들은 크게 놀란다. 1차 왕자의 난에 적극 참여했던 조영무마저 역사책은 당대의 인물들이 모두 조정에서 물러난 후에 기록해야 한다고 아뢰지만 태종은 있는 그대로 쓰면 된다고 모든 반론을 제압해 버린다.
    한편 신덕왕후의 국모로서의 권위를 훼손하기 위해 정릉의 석물을 청계천 돌다리로 사용하버리라는 명령에[6] 조정 신료들 모두 경악을 금치 못한다. 특히 1차 왕자의 난의 주동자로서 어쩌면 신덕왕후의 철천지 원수인 하륜마저도 국모의 무덤을 파헤쳐서 훼손시키는 행태에 대경실색한다.
    성우 이강식의 해설로 정릉에 대한 사연, 200여 년 후에야 재정비된 사연 등이 시청자들에게 설명된다. 그리고 정릉이 당한 수모를 전해 들은 상왕 정종(태민영 배우 분)과 당시 병석에 누워 있던 정안왕후 김씨(박윤선 배우 분) 부부도 경악을 금치 못한다. 혹시 자신들의 무덤도 저런 취급을 받지 않을까 대놓고 걱정하는 대사까지 한다.
 
 
 
 
 
 
 
 
 
 
 
 
 
 
 
 
 
 
 
 
 
 
 
 
 
 
 
 
 
 
 
 
 
 
 
 
 
 
 
 

5. 관련 문서[편집]

 
 
 
 
 
 
 
 
 
 
 
 
 
 
 
 
 
 
 
 
 
 
 
 
 
 
 
 
 
 
 
 
 
 
 
 
 
 
 
 
 
 
 
 
 
 
 
 
 
 
 
 
 
 
 
 
 
 
 
 
 
 
 
 
 
 
 
 
 
 
 
 

6.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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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150호]⠀
⠀[151~200호]⠀
⠀[201~250호]⠀
⠀[251~300호]⠀
⠀[301~350호]⠀
⠀[351~400호]⠀
⠀[401~450호]⠀
⠀[451~500호]⠀
⠀[501호~550호]⠀
⠀[번호폐지 이후(번호없음-1)]⠀
2021년 11월 19일부로 번호 지정제 폐지
2021.11.19 - 2026.05.14
[37] 내동리 쌍무덤. 옥야리 장동 방대형 고분 4기 총 5기
⠀[번호없음-2]⠀
2026.05.14 -
 
 
 
 
 
 
 
 
 
 
 
 
 
 
 
 
 
 
 
 
 
 
 
 
 
 
 
 
 
 
 
 
 
 
 
 
 
 
 
 
[1] 舊 사적 제208호[2] 여담으로 이 광통교 정릉 석물들은 2005년 청계천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는데, 복원되기 전에는 청계고가차도 밑에 묻혀있었다.[3] 출처: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4] 모두 고종의 어필(御筆)이다.[5] 사실 학생들이 웃긴 하지만 정릉의 능주(陵主)를 정확히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다만 엄연히 왕릉인데 왕이 아닌 게 분명한 정약용이 나온 것은 개그.[6] 원래는 나무로 만들어진 다리로 비가와서 물이 불어 망가졌는데 태종은 기왕 새로 만드는 거 튼튼(...)하게 돌다리로 만드는 게 좋겠다면서 가져다 써버리라고 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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