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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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부여고구려백제가야신라발해
후삼국고려대한제국대한민국 임시정부대한민국

파일:external/www.cnk-fs.com/%EC%A4%91%EC%A2%8520090815-6.jpg

묘호

중종(中宗)

시호

조선

휘문소무흠인성효대왕
(徽文昭武欽仁誠孝大王)

공희(恭僖)

본관

전주(全州)

능묘

정릉(靖陵)

성씨

이(李)

역(懌)

낙천(樂天)

사망 장소

한성 창경궁 환경전

왕비

단경왕후(端敬王后), 장경왕후(章敬王后), 문정왕후(文定王后)

부왕

조선 성종

모후

정현왕후(貞顯王后)

아들

이호, 이환

생몰
기간

음력

1488년 3월 5일 ~ 1544년 11월 15일

양력

1488년 4월 16일 ~ 1544년 11월 29일
(56년 7개월 13일, 2만 680일.)

재위
기간

음력

1506년 9월 2일 ~ 1544년 11월 15일

양력

1506년 9월 18일 ~ 1544년 11월 29일
(38년 2개월 11일, 1만 3,952일.)


1. 소개2. 생애
2.1. 조광조의 개혁2.2. 권신들의 시대2.3. 치세와 치적2.4. 양의 가면 뒤에 숨겨진 늑대의 얼굴2.5. 고변과 익명서의 시대2.6. 팔불출2.7. 백성에게는 따뜻하겠지
3. 가계4. 대중 매체에서
4.1. 사극에서4.2. 역대 중종 배우
5. 중종의 능6. 관련 항목

1. 소개[편집]

조선의 제11대 국왕. 묘호는 중종(中宗), 시호는 공희휘문소무흠인성효대왕(恭僖徽文昭武欽仁誠孝大王). 휘는 역(懌). 자는 낙천(樂天).

2. 생애[편집]

성종정현왕후 윤씨[1]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왕이 되기 이전에는 경남 진주에서 유래한 진성대군(晉城大君)으로 불렸다.[2] 연산군과는 이복 형제 지간이다. 왕인 형은 폐비의 자식, 그에 반해 자신은 후처 소생이라고는 하나 엄연히 중전의 소생인 대군인 탓에 권력 투쟁의 희생양이 될 소지가 다분했었다. 방계 출신은 아니다.(선조가 조선의 첫 방계 임금이다.)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근의 딸 신씨와 정략 결혼도 하고 연산군 치세 내내 숨죽이며 살아야 했다. (반정 후 단경왕후도 폐서인된다.)

1506년 박원종 등이 일으킨 반정에서 왕에 추대돼 연산군에 이어 왕위에 올랐다. 중종반정이다. 연산군 시절의 온갖 폐단들을 수습하려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애당초 정통적인 왕위 계승으로 왕위에 오른게 아니라 신하들이 주도한 반정에서 추대된 왕이라는 태생적인 한계 탓에 중종의 치세는 우유부단과 뒷걸음질로 점철되고 만다.[3] 훈구 공신들의 힘이 너무 커져 이를 견제해보려고 조광조 등 사림을 중용하려 했지만 조광조 역시 중종의 말을 안들었다. 그리고 일어난 기묘사화로 사림이 다 털려나가는 사단이... 그러나 윤원형, 심정 등 훈구 공신의 방자함을 견제하기 위해선 다시 사림들을 등용할 수 밖에 없게 한다. 결국 냉온탕을 왔다갔다하는 그의 인재 등용은 중종의 평가를 깎아먹는 제일 원인이 된다.

그래도 이미 조선은 퇴계 이황, 남명 조식, 서화담 등 조선 유학의 거두들이 이미 원숙의 경지를 뽐내고 있었고 회재 이언적, 사암 박순 등 중견은 물론 율곡 이이, 우계 성혼, 이산해, 류성룡신진 사림들을 잉태하고 있었던 시대로 권력이 훈구 공신으로부터 사림파로 옮아가는 과도기였다.

2.1. 조광조의 개혁[편집]

중종의 초기엔 자신을 추대한 공신들을 우대할 수 밖에 없었고, 이 때문에 첫 아내인 신씨왕비 책봉 7일만에 폐비시켜야 했다.[4] 반정 공신들을 중심으로 한 훈구 세력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증대시켜 나가 경제력과 군사력을 장악했기 때문이었다. 원래 정권을 바꾸면 권력층을 갈아엎어 뺏은 걸로 재분배를 할텐데 중종반정의 주력들은 연산군 때도 핵심층이었다. 임사홍 등 연산군의 최측근들 외에는 거의 그대로 중종 때도 권력을 이어간다. 쉽게 말해 더 줄 게 별로 없었다는 뜻. 왕좌의 권위는 실추되고 권신들의 힘은 더욱 커졌다. 공신 지정이나 공훈까지 지들 마음대로 하는 지경까지...

심지어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제한하려는 움직임을 느끼자 중종까지도 갈아치울 수 있음을 공공연히 내비쳤던 경우도 있다. 특히 병판 홍경주는 중종 면전에서 쿠데타 협박으로 기묘사화를 압박했다는 설이 있는데...진실은 저 너머에.[5]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이 중종 초년 일찍 죽을 때까지의 이야기고, 후년은 안 그랬다. 중종 4년 박원종, 중종 6년 유순정, 마지막으로 중종 7년 성희안이 죽으면서 반정 공신 세력은 병으로 줄줄이 역사에서 퇴장했다.

왕위에 오른지 10년이 지난 1515년, 중종은 본격적으로 자신의 치세를 열어보고자 했다. 그런 중종에 눈에 띈 사람이 바로 조광조. 도학 정치의 이상을 가지고 있던 조광조는 바로 신씨 복위권과 관련해 처벌을 주장하는 노신들을 효과적으로 제압하는데 성공했고 이에 왕권을 강화하려는 중종과 뜻이 맞게 되었다. 조광조는 소위 신진사류라 불리는 성리학적 이론으로 무장된 인재들을 적극 등용하여 왕도 정치를 구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조광조를 중심으로한 신진사류의 왕도 정치적 개혁에 반정을 주도했던 공신 세력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들은 자신들의 권력이 침해될까 우려했고, 소격서 혁파와 위훈 삭제(가짜 공신의 공신 명단 삭제)[6]로 결국 갈등은 최고조에 달하게 된다. 중종 자신도 처음과는 달리 지나치게 이상주의로 흐르는 조광조에게 염증을 느끼고 스스로의 권력도 제한되었다고 여겼다. 결국 중종은 1519년 기묘사화로 신진사류들을 숙청한다. 위훈 삭제 직후의 친위 쿠데타였다.[7]

이 사건과 관련해, 야사에서는 홍경주의 딸 희빈 홍씨가 궁녀들을 시켜 나뭇잎에 로 '주초위왕'(조씨가 왕이 된다)이라는 말을 써 개미들이 파먹게 한 뒤 그 잎을 왕에게 바쳐 조광조가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고했다고 한다..지만 실제로는 할 수 없는 일임이 역사스페셜에서 드러났다.[8] 실상은 중종이 주도하고 훈구 대신이나 남곤과 같은 온건 사림이 거든 사태에 가깝다.

2.2. 권신들의 시대[편집]

이후 중종의 치세는 도로 권신들이 주도하는 시대가 되었다. 1521년에는 조정에 남아있던 소수의 친 신진사류 계열의 정승 안당 등을 제거하고자 송사련의 무고로 일어난 신사무옥은 전형적인 사건이었다.[9] 이후에도 중종의 시대는 옥사와 피바람이 지속되었다.

권신들이 권력을 잡게되자 이번엔 권신들 안에서 권력 투쟁이 일어나 경빈 박씨 세력이 세자의 후견 세력이었던 김안로 일파를 몰아내고, 이후 김안로가 작서의 변을 이용하여 경빈과 복성군을 제거하고 권력을 잡는가 하면, 김안로가 몰락한 후 문정왕후의 남동생인 윤원형 일파가 득세하는 등 중종은 조광조의 도학 정치 개혁 시절을 제외하고는 정치적으로 자신의 뜻대로 정국을 이끌어나가 본 적이 없었다...

...지만, 사실 중종 시대의 권신들은 결이 다르다. 예컨데 전기(조광조 이전)의 반정 공신들과 달리, 중기(조광조 이후)의 남곤이나 김안로는 온건 사림이나 소장 사림들의 지지를 받았으며[10], 후기(김안로 이후)에는 대윤윤임, 소윤윤원로, 윤원형 등이 득세했다.

2.3. 치세와 치적[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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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는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8권.

설상가상으로 외부에서는 이민족들의 침략이 기승을 부렸다. 세종대왕세조 때에 평정된 여진족들이 북방에서 다시 힘을 회복하여 조선의 북방을 괴롭혔고, 남방에서는 왜구의 침략이 잇달았다. 그 왜구의 침략 중 가장 규모가 큰 것이 삼포 왜란이다. 비변사[11]가 생겨난 것도 이 때. 한마디로 안습한 시절을 지낸 왕이다.

그래도 나름대로의 공도 있다. 조광조를 등용한 시기에는 향약을 전국적으로 권장하여 중앙 집권을 강화하기도 했고, 다양한 책들을 발간했으며 군적을 개편하고 전국적으로 전라도, 평안도, 강원도의 양전 사업을 시행했으며 북방의 진들을 보수하고 여진족들을 격퇴하기도 했다.

사후에는 중종 역시 묘호중조(中祖)로 바꾸자는 논의가 있었다. 그 이유가 반정으로 연산군을 쫓아내고 나라를 중흥시킨 공이 있다고 후임 왕인 인종이 신하들에게 제기했던 것. 그러나 신하들은 '중종대왕은 성종대왕의 적통을 이은 왕이기 때문에 조로 바꾸는 것은 가당치 않습니다'라고 반대하였고 더군다나 중종이란 묘호 자체가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거나 망한 국가를 다시 세운 왕'이란 뜻을 가지고 있어서 결국 중종으로 남게 되었다. 한편 적통이 아닌 선종선조가 되고 열조인조가 되니...

2.4. 양의 가면 뒤에 숨겨진 늑대의 얼굴[편집]

上雖好善, 而至於讜直之論, 必改坐動容, 吾甚疑焉
"임금이 선(善)을 좋아하시기는 하나 곧은 말에 대해서 반드시 자세를 고치고 용색(容色)을 바꾸시니 나는 매우 의심스럽게 여긴다."
- 황효헌(黃孝獻), 중종실록 37권, 중종 14년(1519년) 11월 18일[12]

전일에 좌우에서 가까이 모시고 하루에 세 번씩 뵈었으니 정이 부자처럼 아주 가까울 터인데, 하루아침에 변이 일어나자 용서없이 엄하게 다스렸고 이제 죽인 것도 임금의 결단에서 나왔다. 조금도 가엾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으니, 전일 도타이 사랑하던 일에 비하면 마치 두 임금에게서 나온 일 같다.
- 중종실록 37권, 중종 14년(1519년) 12월 16일 2번째 기사 '조광조의 일을 전교하다' 사관의 논평 중.

일반적으로 중종은 우유부단하고 끌려다니는 나약한 군주의 인상이 강하지만, 사실 우유부단한 모습은 기반이 불안정한 처지에서 살아남기 위한 계책이었고 실상은 의외로 막후 정치의 달인이었다는 해석이 있다.

조광조와 그의 세력을 숙청했던 기묘사화를 시작으로, 그 이후 권신이 된 남곤, 심정, 이행, 이들을 몰아낸 김안로까지, 중종은 이들을 마치 신하들의 공론에 따라 몰아내는 것처럼 했지만, 조광조김안로의 경우엔 스스로 밀지를 내리는 등 직접 관여했다. 특히 그토록 총애했던 조광조기묘사화로 쳐냈을 땐 조광조의 정적이었던 남곤마저 삭탈관직에서 그치자고 주장했지만, 중종은 홀로 조광조사사시켜야 한다는 입장을 계속 피력하여 결국 이뤄내고 만다. [13][14]

남곤은 단지 현실론자였을 뿐, 뇌물을 멀리하고 검소하며 시와 문장에 뛰어난 인물이었다. 김종직의 직계 제자이기도 했고. 결국 남곤영의정의 자리에 올랐으나 죽을 때까지 조광조에게 저지른 짓을 후회하였으며, 죽을 때 자신의 무덤에 묘비를 세우지 말고 시호도 청하지 말며 그간 쓴 글은 모조리 태워버리라고 자식들에게 유언했다. 이런 반성 때문인지 그는 심정, 이행과 달리 천수를 누렸다. 대국적으로 보자면 사장(詞章, 문장 + 시가)을 중시한 조선 초기 도학파의 마지막 걸물로 불린다.

처음에는 조광조를 발탁해 팍팍 밀어주며 개혁을 이뤄보고자 했던 중종이 갑자기 하루아침에 저렇게 돌변한 것을 보고, 사관들은 "전일에 좌우에서 가까이 모시고 하루에 세 번씩 뵈었으니 정이 부자처럼 아주 가까울 터인데, 하루아침에 변이 일어나자 용서 없이 엄하게 다스렸고 이제 죽인 것도 임금의 결단에서 나왔다. 조금도 가엾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으니, 전일 도타이 사랑하던 일에 비하면 마치 두 임금에게서 나온 일 같다."라고 씁쓸한 논평을 적어놨다.

김안로를 축출할 땐 자식 김시의 혼인 날을 노려 틈을 주지 않고 단박에 박살내 버렸다! 이때 김시는 아버지가 잡혀가자 우왕좌왕했는데, 김안로는 "오늘 네가 장가들지 않으면 이후로 우리 집에 장가들고자 하는 집안이 없을 것"이라고 말렸다고.[15] 참고로 포악한 왕이라고 손꼽는 형 연산군보다도 숙청한 선비들의 수가 더 많다고 한다.[16]

그 외에는 쫀쫀한 면도 있고 변덕이 심해서 자질구레한 일에도 참견이 심했다고 한다. 열병을 할 때에도 병사들로 하여금 여기 모이라고 했다가 저기 모이라고 했다가 "아니, 아니. 다시 저쪽에 서 봐라"라면서 제멋대로 변덕을 부리기도 했고, 오래 재위하면서 궁궐 행사나 의례 등의 규칙, 절차에 대해 도통하게 되면서 행사 접전 중에 조그마한 실수가 발견되면 그 자리에서 바로 뭐가 틀렸다고 꼬치꼬치 따지며 아랫사람들을 마구 갈궜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공사가 있으면 현장에까지 가서 확인해가며 잔소리를 해 댔고, 바깥 행차를 할 때면 내구마(왕이 타는 말)들을 모조리 끌어내어 쉴새 없이 바꿔 타곤 했다. 그러다가 탄 말이 마음에 안들면 괜히 잔소리를 해대고 담당자를 처벌했을 정도. 한 마디로 말하면 자기는 일 잘하는 것도 아니면서 괜히 아랫사람들 갈구는 피곤한 상사였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에도 상당히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상사 타입.

이런 성격은 중종이 정계에서 가진 입지 때문에 형성된 측면도 있겠지만, 중종의 건강 상태도 큰 비중을 차지한 모양이다. 중종 14년인 1519년 6월 16일 기사엔 중종의 잇병, 즉 치통에 관해서 처음 언급된다. 이때부터 치통은 중종이 생을 마감하는 중종 39년까지 무려 25년이나 그를 괴롭혔다.

중종이 죽기 4개월 전인 중종 39년(1544년) 6월 29일에는 아픈 이가 빠지고 다른 이도 아프며 진물이 흐른다고 적혀있는데, 통증의 원인을 긁어내는 조치를 취하지 못한 이상, 중종은 최소 25년을 끔찍한 고통을 계속해서 겪었을 것[17]이다. 중종의 성격이 까탈스럽고 변덕을 심하게 부린 것도 이런 배경이 작용했을 것이다.

임용한 교수의 <조선국왕 이야기>에서는 중종을 늑대 같은 사나이로 표현하고 있으며[18], 이를 참고한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나약한 척, 안 되는 척 하면서 결국 숙청하고 싶은 사람을 끝내 숙청해 내고, 하고 싶은 건 결국 자기 뜻대로 해내고 마는 이런 면모를 두고 '두 얼굴의 사나이'라고 풍자하고 그려내기도 했다.

2.5. 고변과 익명서의 시대[편집]

중종 시기에는 역모 고변이나 익명서 사건이 많았는데 대개는 무고가 많았다고 한다.[19] 물론 '김공저 박경의 사건', '이과의 옥사' 등 실체가 있는 일도 있었지만, '정막개의 고변' 등 허황된 것도 많았고, '정막개의 고변' 이후에 팔자를 고쳐보겠다고 거짓 고변을 했다가 목 날아가는 사람도 많았다.

심지어 도박장을 운영하던 건달 형제가 먼저 역모성 발언을 하고 이에 그곳에 있던 친구들이 동조하자 이걸 가지고 고변했다. 물론 그 대가로 그 형제는 참수당했다. 익명서 또한 많았는데, 문제는 익명서 때문에 연산군 때 죽은 사람이 한둘이 아닌 만큼, 보면 즉각 없애버리는 게 당연한데, 그걸 가지고 정치적으로 활용을 했다는 점이다. 이런 식으로 고변과 익명서 사건 등으로 죽은 사람이 연산군 때보다 더 많았다고 한다.

2.6. 팔불출[편집]

그러나 본인은 매우 온화하고 부드러워 자식들을 꼼꼼히 챙겨주는 자상한 아버지였다고 한다. 중종이 자상한(?) 아버지임을 알리는 사례가 효정옹주 사건이다. 요약하자면 조선판 막장 드라마. 특히 그 중에서도 불륜 치정극.

효정옹주[20]는 숙원 이씨 소생이었는데 조의정에게 시집가게 된다. 효정옹주가 못생겼다는 이유로 맘에 들어하지 않던 조의정은 효정옹주를 소박놓고, 그녀가 궁에서 데려온 몸종 풍가이를 더 사랑해서 으로 삼는다. 부마는 첩을 들이지 못하는 법을 어긴 것이다.

이에 중종은 사위 조의정을 여러번 불러 꾸짖었으나 조의정은 태도를 고치지 않았고, 결국 중종은 풍가이를 귀양보내려고 마음먹는다. 이 와중에 효정옹주는 중종에게 2번이나 찾아가 선처를 부탁하는 비단결 같은 마음씨만 빛났을 따름이다.

그렇게 풍가이는 귀양을 갔..어야 했으나 조의정이 왕명에 불복하면서 가지 않았다! 조의정이 다른 몸종을 대신 귀양을 보내고, 풍가이는 빼돌려 자신의 고향집에 숨겨두고는 모친의 집에 간다는 핑계로 꾸준히 만난 것이다. 이는 명백히 왕명에 항명한 것이나 효정옹주가 함구하였으므로 조의정의 목숨이 붙어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효정옹주는 난산으로 몸을 심하게 상하였고, 끝내 출산한 지 15일 만에 숨을 거두게 된다. 이 때 조의정은 옹주가 난산한 이래 15일 동안이나 왕에게 보고도 하지 않다가 숨이 끊어지기 직전에서야 비로소 보고하였으며, 또 중종이 옹주를 구하기 위해 의녀를 보냈으나 문을 제때 열어주지 않아서 논란이 된다. 게다가 일전에 귀양을 갔어야 할 풍가이가 버젓이 한양에 머무르며 조의정의 첩 노릇을 계속하고 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서 더 큰 난리가 났다. 옹주를 박대한 것도 작은 죄가 아니지만, 왕명을 대놓고 어기며 왕을 기만했으니 역적죄를 써도 할 말이 없는 일이었다.

중종은 격노하여 조의정과 풍가이에게 중벌을 내리려고 했으나, 그나마 조의정은 부마를 지냈다는 이유로 재산을 몰수한 뒤 귀양형으로 끝날 수 있었다. 풍가이의 경우 11번의 국문 끝에 장 100대와 귀양형[21]을 내렸다. 그녀 자신의 의도야 어쨌든 왕명을 어긴 데다 '조의정이 효정옹주를 죽이고 풍가이를 정처로 앉히려 했다'는 소문까지 있었기 때문에 중종의 분노는 대단했다. 때문에 중종은 풍가이를 살려둘 생각이 없었으나 풍가이가 과거 자신의 어머니를 위해 손가락을 잘라 먹인 일로 동정심을 느낀 신하들이 풍가이의 목숨만은 살려주기 위해 간청했기에 [22]그나마 감형된 것이었다. 그러나 풍가이는 장 100대를 맞고 풀려난 직후 상궁 은대[23]에게 납치당한 뒤 10여 일 동안 갇힌다. 장을 100대나 맞을 경우 즉시 치료를 받아야만 생존이 가능하다는 것을 노렸던 것이다. 10여 일을 놔두어도 풍가이가 죽지 않자 자신의 하인을 시켜 장 맞은 곳을 다시 때리게 한다. 결국 풍가이는 20일 뒤 숨을 거둔다.

이에 신하들은 범행의 잔혹함과 풍가이에 대한 동정심 때문에 은대에 대한 처벌을 촉구했으나[24] 중종은 은대의 벌을 미적미적 처리했고 겨우 '잔인한 죄인을 방치하느냐!'는 신하들의 상소로 마지못해 은대를 유배 보냈지만 중종 사후 문정왕후에 의해 방면된다.[25]

참고로 왕이 조의정을 처형할 수 없었던 것은 당시에 이미 조의정과 효정옹주 사이에 낳은 5살 난 아들이 있었고[26] 조의정의 아버지인 조침은 홍문관 제학, 경주 병마절도사, 이조참판, 호조참의 등 요직을 두루 거친 거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외에도 훗날 인종이 되는 세자가 세자궁에 불이 나서 타 죽을 위험에 처한 적이 있었다. 세자빈이 세자에게 빨리나가자고 청했으나, 세자는 이 화재가 자신을 미워한 계모 문정왕후가 한 짓이라고 생각했고, 살아나가도 어차피 문정왕후의 심기를 건드려서 같은 일이 반복될 것이라고 여겨서 나가지 않고 세자빈과 함께 그대로 타 죽으려고 했다. 그런데 세자궁에 화재가 났다는 소식을 들은 중종이 의관도 갖추지 않고 잠옷 바람으로 달려가서 세자를 애타게 부르자, 이를 듣고 마음을 바꾸어 세자궁을 탈출했다는 일화도 있다.[27]

그 외에 작서의 변으로 모함을 받아 유배를 갔던 경빈 박씨와 서장자 복성군을 사사하자는 상소가 꾸준히 올라왔으나 18번이나 거절했다고 한다.[28] 여러 모로 자기 가족에게는 약했던 사람이었다.

...라고는 하지만, 조선 시대 왕 중에서 친아들을 죽인 2명 (유력 용의자 인조까지 포함하면 3명) 중 1명이기도 하다. 서자이긴 했지만 장남이었던 복성군을 결국에는 사사했으니...[29] 나머지 1명은 말할 필요도 없이 사도세자를 죽게 한 영조.

2.7. 백성에게는 따뜻하겠지 [편집]

실제로는 조선에서 가장 무서운 왕 중에 하나인 중종이지만, 그가 백성에게 보여준 모습은 따뜻하고 인자한 왕이었다.

중종 28년, 한성부에서 6살의 어린 노비 아이가 괴한에게 발목이 절단되어 버려진 일이 있었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스스로 국문을 주도하며[30], 범인을 찾아내려 한 동시에, "백성을 구휼하는 것은 정사 중에 가장 먼저 할 일로, 이같은 어린 아이를 구하는 것보다 더 급한 것은 없다"며 6살 노비 아이의 보호에 힘쓰는 모습을 보이는데[31] 자세한 내용은 다음링크를참조하자(PGR21) 이 이야기는 조선왕조실톡에서도 다루기도 했다.

의녀장금을 어의로 임명하는 등 호방한 면모도 있고, 서프라이즈에 소개된 바에 따르면 노비 출신의 반석평을 판서에 임명하는 등 개방적인 면모를 갖춘 군주인 듯 하다.

무서운 면모를 지녔던 것에 비해 백성에겐 좋은 지배자였다는 점에선 중국의 측천무후와 묘하게 닮기도 했다.[32]

3. 가계[편집]

4. 대중 매체에서[편집]

4.1. 사극에서[편집]

사극에서는 워낙 우유부단하고 안습스런 탓으로 주인공이기 보다는 조연으로 자주 등장한다. 오히려 당대 치세의 중종 주변의 인물들이 주인공으로 그려지는 탓에 사극에서도 안습한 임금.

<조광조>에서는 조광조의 도학 정치를 지지하다가 조광조를 제 뜻대로 움직일 수 없게 되자 결국 죽이는 우유부단한 임금으로 나온다. 이 드라마는 정사와는 좀 거리가 있는 전개를 보여주는데, 중종이 평생 단경왕후 신씨만을 사랑했다는 야사를 채택해 중종이 왕권을 세우고 도학정치를 펴려던 시도 역시 단경왕후를 다시 복위시키기 위한 것으로 해석[33]했다. 이 과정에서 '단경왕후 복위'라는 안건에 동의하지 않는 조광조와 끝까지 맞서 그를 설득시키지 못하고 결국 죽여버린다. 드라마 내내 사춘기 소년 같은 불안정한 심리 상태를 보여주는데, 의외로 누르고 참았다가 결국 자기 의사를 관철하고야 마는 중종의 다크사이드를 제대로 보여준다. 그러나 정상적인 정치 행위보다는 반은 눈물과 애원, 나머지 반은 분노와 저주... 극중에 묘사되는 단경왕후 신씨와의 사랑이 애절하긴 하다.

최종환[34]이 분한 여인천하에서는 문정 왕후, 경빈 등의 여인들과 조정 권신들에게 끌려다니는 임금으로 그려진다. 그나마 제일 좋게 나온 경우가 임호[35]가 배역을 맡은 대장금으로 미식가 임금이자 사상 최초의 여성 어의를 임명하는 대범한 임금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드라마 초기에는 '맛있구나, 이 XX 음식은 XXXX하고…' 하는 식의 대사밖에 없었기 때문에 시청자들에게 "저 인간 대체 뭐냐"는 불평을 듣기도 했다. 심지어 대장금 총집편에서 '정사는 멀리하고 미식만 즐겼는지' 운운하기도 했다. 다만 중종의 이름만 따온 사람이고 중종의 정치에 대해서 그리는 내용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왕과 비에선 가을동화에서 송승헌의 아역을 분했던 최우혁이 연기했다. 단, <왕과 비>가 끝나기 채 몇 회 남겨놓지 않은 상황에서 등장한데다 비중 또한 적다는 것이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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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천하에서의 명대사는 "그입 다물라! 다물라! 다물라!"

2017년 KBS2TV에서 방영된 7일의 왕비에선 한국 드라마 역사상 처음으로 주인공 역할로 등장했다. 극 중 중종(진성 대군) 역할은 배우 백승환(아역)과 연우진이 연기했다.[36]

처음으로 대중 매체 드라마에서 주인공 역할로 등장한 만큼 역사 속에서, 혹은 다른 드라마 속에서 그려진 중종과는 크게 다른 부분이 많다. 우선 대부분의 사극에선 중종이 등장하더라도 최소 30대 이상으로 나오며 이미 왕위에 등극한 상태로 등장한다. 아니면 왕이 되기 전 어린 시절(진성 대군)만 그려지곤 했다. 그러나 7일의 왕비에선 어린 시절부터 소년 시절[37], 중종 즉위 이후(30대 이후~)[38]까지 폭넓은 연령대가 다뤄졌다.

사실 그 동안 중종(진성 대군)이 사극 주인공으로 등장하지 않았던 이유는 한 작품의 주인공이 될 만큼 매력적인 인물이 아니라고 여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7일의 왕비가 로맨스 사극이라고 알려졌기 때문에 7일의 왕비의 남자 주인공이 중종이라는 소식이 들리자 부정적인 반응과 우려가 이어지기도 했다.[39] 하지만 남자 주인공으로 등장한 7일의 왕비 이역(중종의 본명)은 상당히 매력적으로 그려졌다. 어려서부터 한 여자[40]밖에 모르는 로맨티시스트[41]이며 친구들과의 우정을 목숨처럼 여기는 인물로 나왔다.

또 그 동안 중종은 역사적 기록을 비롯해 여러 작품으로 인해 왕이 될 의지가 하나도 없고 준비도 안 되어 있는데 반정 공신들 때문에 왕이 되어서 공신들 눈치나 보다가 조강지처도 못 지킨 한심한 인물로 인식돼 왔다. 하지만 7일의 왕비에선 이 또한 정반대로 그려진다. 처음부터 왕이 될 생각이 없었던 건 역사와 동일하지만 절대 유약한 인물도 아니고 오히려 형인 연산군 앞에서 할 말을 다 하는 캐릭터다. 7일의 왕비에서 중종(진성 대군)은 형인 연산군을 지지하는 간신 임사홍 및 요부 장녹수의 계략으로 죽을 위기에 처했다가 겨우 살아나는데 이 때문에 왕이 되어 형의 것을 다 빼앗고 복수하겠다는 마음까지 품는다.

왕이 되는 과정도 실제 역사와 정반대로 그려진다. 7일의 왕비에서는 진성 대군이 직접 반정 군사들을 이끌고 들어가 연산군을 벌한다. 때문에 역사에선 반정 공신들이 중종과 단경 왕후를 억지로 헤어지게 하고, 중종은 끽 소리도 못 하고 반정 공신들의 요구에 따르지만 극중에선 이런 요구를 하는 대신들을 중종이 카리스마로 제압한다.[42]

4.2. 역대 중종 배우[편집]

5. 중종의 능[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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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은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정릉(靖陵).[43] 아버지 성종이 묻힌 선릉과 가까운 곳에 묻혔다. 원래는 장경왕후가 묻힌 희릉에 합장했는데, 문정왕후가 경기도 고양에서 중종의 능을 천장시켜 지금의 강남으로 옮겼다. 그런데 비가 조금만 많이 오면 정자각 앞에 배가 떠 다닐 정도로 침수 문제가 심각했다. 사후에 남편과 함께 묻히려던 문정왕후는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홀로 태릉에 매장됐다. 게다가 정릉은 임진왜란통에 왜군에 의해 무덤이 파헤쳐지고 불태워졌다. 안습.

이 사건 때문에 종전 후 한때 외교 문제로 비화되기도 했다. 에도 막부에서 조선과의 수교를 트기 위해 범인들과 중종 유골이란 시신을 돌려보냈는데 심문해봤더니 범인들은 이 일과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들이었고 유골이 중종의 것이라 믿을 증거도 전혀 없었다. 조정은 한 때 크게 들끓었으나 결국 현실적인 필요에 의하여 "왜놈들이 그렇죠 뭐. 걍 없던 일로 치고 계속 수교 논의하시져"라는 온건론이 우세를 점하면서 1609년 기유약조를 통해 일본 - 조선은 수교를 다시 시작하였다.

아무튼 출처불명의 해골이 중종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기 위해 당시 조정은 젊은 시절 중종을 봤던 노인들을 수소문해 몽타주를 작성했다. 기록에 의하면 중종은 키와 덩치가 크고, 마른 체형에 얼굴은 갸름하나 천연두로 인해 좀 얽었고, 코가 높되 수염은 약간 노랗다고 전해진다. 덤으로 미간 사이에 큰 점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훼손된 탓에 선릉과 정릉은 시신이 훼손되었거나, 시신이 없는 빈 묘일 가능성이 크다. 중전은 셋을 두었지만 어떤 중전과도 함께 묻히지 못하고, 능 역시 빈 묘일 가능성을 생각하면 죽어서는 상당히 안습한 대우를 받는 임금.[44]

한국전쟁 종전 이후의 혼란기 속에 어진들이 대부분 타버리는 바람에 어진이 남아있는(사진이 남아있는 고종, 순종은 제외하고)태조, 세조, 영조, 철종을 제외한 조선 임금들의 얼굴을 알 길이 요원해졌으나, 그래도 이론적으로는 이를 알아낼 방법이 있으니 바로 무덤을 열어 보는 것. 영국 왕 리처드 3세의 사례도 있듯이 두개골만으로도 그 사람의 생전 모습을 거의 정확히 파악할 수 있으며, 게다가 석회로 두껍게 밀봉되어 있는 왕릉 특성상 내부의 시신이 미라화되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으므로 이 경우 용안 복원은 더욱 탄력을 받게 된다. 물론 이론적으로 그렇다는 얘기지, 이를 실행에 옮기는 건 사실상 불가능. 그나마 이론적으로도 그 얼굴이 어떤지 알 길이 영영 없어진 조선 임금이 바로 성종과 중종이다.

6. 관련 항목[편집]


[1] 원래 간택 후궁 출신이다. 조선에서 몇 안되는 후궁 출신 왕비 중 하나. 사실 바로 전의 왕비인 폐비 윤씨도 간택 후궁 출신.[2] 중종이 모티브인 조선공주실록의 주인공 이유나(이수련)의 봉호 진성공주도 여기서 따온 것으로 추측된다.[3] 반정이라고 해도 원칙적으로 말하면 반란으로 기존 정권을 몰아내고 새로운 정권을 세운 것이다. 반정으로 인해 신권이 강해진 상황이고 신하들이 힘을 모아 반정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한 상황에서 중종이 기를 펼 수 있을리가 없다. 아무리 맘에 안 드는 왕이라 한들 2번이나 갈아치우는 행동을 하긴 어려웠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한번 땅에 떨어진 왕권이 연달아 능멸당하는 일은 의외로 자주 일어난다. 바로 전조 고려무신정변 이후 임금 취급이 어땠는지, 아니 이성계가 조선을 세운 과정이 어떠하였는지만 살펴봐도 답이 나온다. 우왕 - 창왕 - 공양왕을 줄줄이 올리고 폐위시켰다가 결국 나라를 갈아치우지 않았는가. 오늘날에야 결과적으로 조선의 시스템이 고려보다 왕권 집중에 유리했다는 식으로 평가할 수 있겠지만 이건 결과론적인 얘기고, 당사자 입장에서는 일단 몸 사리는 도리밖에 없었을 것이다.[4]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근의 딸[5] 조광조가 군사 작전에 관여하고 병조판서 등이 데꿀멍하긴 했다. 이장곤(병조참판) 등은 사실 사림 출신이기도 했고, 실제로 기묘사화 때 조광조 등의 처벌을 반대하기도 했다. 애초에 조선 시대가 사병 집단 자체가 될 법도 아니었고, 뒤에 보듯 조광조 때는 공신들도 다 죽어버렸기에...[6] 반정을 주도한 박원종 등은 반정을 최대한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 임사홍, 신수근 형제 등 일부를 척살한 것을 제외하고는 연산군 치하에서 호의호식하던 대부분의 대신들도 끌어들여 반정 공신의 명단에 포함시켜줬다. 또한, 그것도 모자라 주요 공신들의 자식 및 형제도 공신의 명단에 포함시키는 지경에 이르렀으며 이는 신진사류 세력의 큰 반발을 불러왔다.[7] 신진사류의 과격화는 땡깡 수준으로까지 전개되었다. 예를 들어 위훈 삭제의 경우에는 "쟤는 공이 있는 건 맞는데 인품이 별로니까 공신 삭제 ㄱㄱ" 같은 주장을 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애초에 중종이 원하는 그림은 신진사류에 힘을 실어줘 공신 세력을 견제하려 했는데, 생각보다 공신 세력이 너무 힘없이 무너지니까 중종 주도 하에 골치 아파진 신진사류를 제거하였다고 분석하기도 한다.[8] 벌레들은 꿀은 신경쓰지 않고 나뭇잎 전체를 파먹거나 꿀만 빨아먹었다.[9] 송사련의 어머니 감정은 안당의 아버지 안돈후의 천첩 중금의 소생이였고 커서 평민 송린 집안에 시집가 송사련을 낳았다. 그래서 안당은 송사련과 혈연 상으로는 신분 차이가 있지만 외삼촌 관계로 종모법(從母法)이 시행되던 시대에 송사련의 신분을 풀어주고 벼슬까지 알선해 주었다. 그러나 송사련은 안당 일가와 친분을 이용해 배은망덕하게 안당의 아들 안처겸이 문상 온 조문객들과 임금의 성총을 흐리는 남곤, 심정 등 간신배들의 제거를 논의했다고 밀고했던 것이다. 안당은 이 일로 아들과 사사당하고 집안은 풍비박산, 멸문지화 당했으나 정작 송사련은 당상관에 오르는 등 제대로 출세했다. 그러다가 선조 때 안당이 신원되고 본래 출신이 노비였다는게 들통나 다시 안씨 집안 노비로 환속됐다. 이에 앙심을 품은 아들 송익필이 정여립 모반 사건의 배후로 암약하는 등 집안 전체가 배신과 밀고로 얼룩졌다.[10] 홍경주는 기묘사화 직후 일찍 죽었다.[11] 비변사는 이후 명종 대에 일어난 을묘왜변이 지난 시기에 상설 기구화되며, 많은 폐단을 낳게 된다.[12] 황효헌은 황희의 현손이고 조광조의 당여였던 기준과 동서지간이었다. 기묘사화가 일어나기 전 당시 홍문관은 조광조 일파가 장악하고 있었고 이때 황효헌은 홍문관 박사로 재직 중이었는데, 그 당시에 했던 발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13] 반대로 드라마 여인천하에서는 남곤, 심정, 홍경주 등이 사사의 주청을 아뢰는데 중종이 고민 끝에 사사를 명하는 걸로 나온다.[14] 실제 염증을 떠나서 숙청 직전의 조광조는 이미 중종이 위협을 느낄 정도의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사림의 견제로 훈구가 무너져 가고, 필연적으로 사림은 성장하는데 그 수장의 역할이 조광조였다. 게다가 조광조는 훈구에 대해 굉장히 공격적으로 대했으며, 이는 중종에게 위기 의식을 가져다 주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중종은 신하들의 반정으로 왕위에 옹립된 왕이다.[15] 이 충격적인 경험에 김시는 벼슬을 하지 않고 화가의 길을 걷게 된다. 김안로는 권세를 배경으로 그림에 관심이 많았다고 하니 그 영향도 있었을 듯.[16] 물론 숙청한 선비의 수로 폭군을 가릴 수는 없다. 일단 옹정제처럼 성군으로 분류되는 군주도 숙청을 했고, 자칫 잘못해서 신하 쪽의 권력이 커지면 그게 더 막장 상황이 되기 일쑤. 세도정치, 문벌귀족. 권문세족 항목 참조. 거기에 중종의 치세는 연산군보다 몇배 더 길어 조선 왕조에서도 손꼽히게 오랜 기간 동안의 치세였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또 중종은 그냥 죽였지만 연산군은 잔혹하게 죽였다. 또한, 중종 때의 경우 간신들에게 속아서 무고하게 죽인 사람들도 많이 포함된다[17] 중종과 그의 아버지 성종, 이복형 연산군 모두 치통으로 인해 재위 기간 내내 괴로움을 호소했다. 성종은 치통 때문에 음식마저 제대로 먹지 못했으며 연산군은 괴로움을 견디다 못해 칫솔을 만들어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기록된 최초의 칫솔 사용에 해당된다. 유전적인 요인이거나 혹은 세 사람의 식습관에 중요한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18] 중종 편의 부제부터가 '곰의 인내와 늑대의 지혜'[19] 역모 고변의 경우는 김안로가 무고한 사람을 모함하면서 고변한 것이 상당히 많다.[20] 어머니를 일찍 여의어서 중종이 더 아꼈다고도 한다.[21] 단, 귀양은 여자라 하여 돈을 내고 면제받을 수 있었다.[22] 효성이 지극한 자가 자신의 상전에게 불민할 리 없다는 주장이었다. 요즘 기준에서야 사실 여부를 떠나서 논리가 너무 비약되기는 했지만, 당시에는 충과 효가 따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23] 숙원 이씨의 자매, 즉 옹주의 이모라는 설과 (왕의 밀명을 받은) 궁중 내의 해결사라는 설이 있다. 그 이전에 효정옹주의 동복언니인 정순옹주와 결혼하여 여성위로 봉해진 부마가 몰래 첩을 두고 아이까지 가졌는데, 그 때도 은대가 나서서 장살하는 것으로 끝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24] 풍가이의 경우 조의정의 명령을 거역하기 힘든 상황이었으므로 조의정의 첩이 되거나 효정옹주가 박해받는 것에 속수무책이었을 것이고 때문에 조의정의 죄를 뒤집어 쓰는 것은 억울한 일이라고 신하들은 생각하였다.[25] 문정왕후는 명령을 내리는 카리스마가 다른지, 중종 때 기를 쓰고 은대를 처벌하라던 신하들이 이때는 다들 지당하십니다고 합창. 심지어는 중종 때 자신은 은대를 처벌한 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소수 의견으로 묻혀버려 안타까웠다는 말을 하는 신하들도 있었다.[26] 효정옹주는 18세에 조천계라는 첫 아들을 낳았고 저 난산은 23살 때의 일이었다.[27] 이때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신하들의 행동이 가관이였다.(중종 100권, 38년(1543년 계묘 / 명 가정(嘉靖) 22년) 1월 7일(임자) 1번째 기사) 승지와 사관 등이 정신없이 세자궁에 달려갔으나 불을 꺼야할 군사는 게을러 모이지 않았으며, 또한 기율도 없어 소란스럽기만 할 뿐 불을 끌 계책을 세우지 못했다고 한다. 더 가관인 것은 영의정 윤은보가 "세자가 어느 곳에 피했는지 살펴보았는가?"라고 물어봤더니 "미처 자세히 살피지 못했습니다. 아마 피하여 대내로 들어갔을 것"이라는 식으로 세자궁의 주인인 세자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중에 수소문해보니 세자는 중종과 같이 있었다. 요약하자면 세자는 중종이 직접 데려왔고 신하들은(심지어 중종의 옆을 따라다니면서 기록을 해야 할 사관마저) 멀뚱멀뚱 화재를 지켜보고만 있었다는 것이다.[28] 그럼에도 계속 죽이라 하자 결국 죽이라고 하면서도 시신이나마 온전히 거두게 해달라고 했다고한다.[29] 근데 이때 복성군을 죽이라고 강하게 청했던 게 조선 최강의 권신 중 하나인 김안로였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죽인 면도 있다. 그리고 중종은 이를 잊지않고 있다가 김안로의 아들이 결혼하는 당일 기습적으로 들이닥쳐김안로를 숙청한다.[30] 조선 왕조에서는 역모 사건이 아닌 한 왕이 국문을 명령할 수는 있어도 직접 국문을 주도할 수 없었다. 단 중종 외에 예외가 있다면 봉산 옥사, 계축 옥사를 직접 주도한 광해군이 있다.[31] 동상에 걸려 발이 절단된 거 아니냐는 주장도 나왔지만, 절단면이 칼로 잘린 게 확실해서 계속 수사했다. 하지만 끝내 범인은 못 잡았다.[32] 둘 다 정상적이지 않은 계승 방법으로 왕위를 얻은 것도 닮았다.[33] 극중 중종이 조광조를 등용할 것을 결심하고 가장 먼저 그를 데리고 간 곳이 폐비가 머무는 죽동궁이었다.[34] 최종환은 사극에는 자주 출연하지만 왕 역을 하는 배우는 아니었다. 이게 첫 왕 배역인 셈. 그후에 <제중원>에서 고종, <연개소문>에서 영류왕, <계백>에서 무왕을 연기했다. 그리고 사임당, 빛의 일기에서 다시 중종을 맡았다.[35] 왕 배역 전문 배우이다.[36] 두 배우가 너무 비슷하게 닮아서 아역과 성인의 싱크로율이 높은 드라마에 뽑히기도 했다.[37] 극 중 진성 대군의 나잇대 설정은 19세였다. 아역인 백승환은 대략 12세 ~ 14세 정도의 나잇대를 연기했고, 연우진이 19세 이후를 연기했다. 다행히 연우진이 동안인 편이라 잘 소화했다.[38] 연우진이 잠시 수염을 붙이고 등장한다.[39] 아마 중종이 드라마 '여인천하' 때문에 후궁 많은 왕 이미지가 너무 강하게 부각돼 그럴지도. 사실 조선의 왕들 중에는 중종처럼 10명 이상 후궁을 거느린 사례가 적지 않다. 당장 중종의 이복 형인 연산군은 기록에 나온 후궁만 20명 가까이 된다.[40] 중종의 조강지처인 단경 왕후 신씨. 극중에선 신채경이란 이름으로 나온다.[41] 드라마 7일의 왕비 작가가 중종 안티였던 건지 아니면 서브 연산군에 너무 닥빙을 한 탓인지 실컷 신채경바라기로 잘 그리다가 마지막 회 때쯤 중종이 신채경이 아닌 다른 여인을 중전으로 맞아들여 원자를 생산했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이 때문에 7일의 왕비 애청자들로부터 비난이 폭주했다. 어차피 역사와 다르게 중종을 로맨티시스트로 그리기 시작했으면 끝까지 그렇게 하지 왜 끝에 가서 갑자기 역사적 내용에 충실해서 흥을 다 깨냐며..[42] 심지어 1등 반정 공신인 박원종을 귀양 보내기까지 한다. 그래서 7일의 왕비 시청자들은 중종과 단경 왕후가 역사와 다르게 해피엔딩을 맞이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중종이 반정을 주도했기 때문에 왕권도 강력하고, 단경 왕후를 쫓아내자고 주장하는 박원종도 축출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굳이, 7일의 왕비 작가는 단경 왕후에게 연산군과의 추문 혐의를 뒤집어씌우고, 이 일로 인해 중종의 어머니인 자순 대비가 분노해서 단경 왕후를 무려 교수형에 처하라는 명을 내리게 되고, 이로인해 단경 왕후가 심신이 너덜너덜해져 스스로 중종의 곁을 떠나는 선택을 한다는 황당무계하고 기상천외한 결말을 내서 평생 먹을 욕을 다 먹게 된다.[43] 서울 성북구의 신덕왕후 능이자 지명인 '정릉', '정릉동'과는 한자가 다르다. 이 능은 貞陵.[44] 중종처럼 조선의 왕들 중 합장이든 동역이강 형태든간에 왕비와 함께 묻히지 못하고 혼자 묻힌 왕은 조선 태조와 단종이 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