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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왕자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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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자의 난

1차 왕자의 난

2차 왕자의 난


1. 소개2. 발생 원인
2.1. 태조의 후계자는 누가 될것인가2.2. 간과한 것2.3. 예방책?2.4. 정도전의 대명강경책과 군제개혁
3. 쿠데타의 전개와 결과4. 여타 기록 왜곡5. 태조의 병환
5.1. 태조 병환 조작설5.2. 반론
6. 1차 왕자의 난을 다룬 사극

1. 소개[편집]

봉화백 정도전·의성군 남은과 부성군 심효생 등이 여러 왕자들을 해치려 꾀하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형벌에 복종하여 참형을 당하였다.
-태조실록 14권, 태조 7년 (1398년) 8월 26일 기사 1번째 기사.[1]




조선 초, 태종 이방원이 왕자 시절에 일으킨 난. 무인년(戊寅年, 1398년)에 일어났다 하여 무인정사(戊寅靖社)라고도 하며, 이방원이 주도하여 일으킨 난이라고 하여, '방원의 난'이라고도 한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음력 8월 26일에 있었던 일이다. 여기서 정사란 사직을 안정시켰다는 뜻. 삼봉집에서는 '공소(恭昭)의 난'이라는 표현도 보이는데, 이는 이 난으로 살해된 무안대군 이방번의 시호 공순(恭順)과 의안대군 이방석의 시호 소도(昭悼)에서 한 글자씩 따서 부른 표현이다.[2]

신덕왕후 소생 방석을 세자로 삼고 사병혁파 등 급진적인 정책을 추진한 것에 대해 신의왕후 한씨 소생인 왕자들과 방계 종친들이 불만을 품고 일으킨 쿠데타이다. 흔히 이방원의 난으로 알려져 있으나 참여한 인물들의 면면을 보면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과 방계 왕족들이 태조에게 반기를 든 왕실 내분이다. 이성계의 막내동생 이화, 이성계의 조카 이천우(이성계의 이복형 이원계의 아들)와 조온(이성계 누이의 아들), 3남 이방의, 4남 이방간, 사위 이저(경신공주의 남편)와 그의 아버지 이거이 등이 자기 휘하의 사병들을 이끌고 적극 가담했고 장자 진안대군 이방우의 아들이자 장손인 이복근도 이방원을 지지했다.[3] 주요 친인척들 중 참여기록이 없는 사람은 차남 이방과뿐 이다.

2. 발생 원인[편집]

2.1. 태조의 후계자는 누가 될것인가[편집]

조선이 건국되었을 때 태조는 50대 후반이라 후계자를 생각해야 할 나이였다.

왕후

아들

비고

신의왕후 한씨

진안군 이방우

배제[4]

영안군 이방과

실질적 장남, 개국 공헌

익안군 이방의

개국 공헌

회안군 이방간

개국 공헌

정안군 이방원

개국 공헌

문안군[5] 이방연

사망[6]

신덕왕후 강씨

무안군 이방번

-

의안군 이방석

-


당시 태조의 아들들을 살펴보면 장남 이방우[7], 차남으로 훗날 정종이 된 이방과, 셋째 이방의, 넷째 이방간, 다섯째로 훗날의 태종인 이방원, 여섯째로 이미 요절한 이방연, 일곱째 이방번, 여덟째 의안대군 이방석이 있다. 방연까지가 개국 이전에 사망한 신의왕후 한씨 소생의 아들이고, 방번과 방석은 신덕왕후 강씨 소생의 아들이다. 세자 책봉 당시 이방번은 12세, 이방석은 11세로, 당시 이방과가 36세, 이방원이 26세였으며 여섯째 이방연이 살아있었다면 20살 이상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므로[8] 신의왕후 소생의 아들들과 나이 차이가 심했다.[9] 이미 장성해 있던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은 요절한 방연을 제외하면 크건 작건 다들 개국과정에 참여해서 일정한 공을 세웠다.

일반적인 적장자 계승 원칙을 따른다면 이방우가 세자가 돼야 했겠지만, 그는 조선 역사관에선 신돈의 손자였던 창왕의 즉위에 공헌한 일로 공양왕 즉위 이후 정계에서 사라진다. (이방우 문서 참조.) 게다가 폭음으로 조선 개국 직후인 1393년에 사망해 버린다. 방우가 생전에 가졌던 '적장자'로서의 위상은 방우의 아들 이복근 대신 차남 이방과에게 내려가 방우의 후손들은 정치실권에서 완전히 배제된다. 방우 문제는 그렇게 일단락 되었지만 여전히 걸리는 게 있었다.

태조는 고려로 귀순해 중앙정계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정계 실력자들을 필두로 한 고려 지배층과 적극적으로 혼인관계를 맺었다. 맏이 방우는 지윤의 딸과 결혼했고 이색의 손자 이숙묘를 사위로 들였다. 이색은 고려말 정계와 학계의 구심점으로 창왕을 옹립하고 이성계에 맞섰던 인물이다. 게다가 방우는 이색과 함께 (조선시대 역사관에선 신돈의 손자인) 창왕 옹립에 참여했다는 결정적인 약점이 있었다.[10][11] 방과는 증문하좌시중(贈門下左侍中) 김천서(金天瑞)의 딸과 혼인했고 지윤의 두 딸을 첩으로 들였다.(숙의 지씨, 성빈 지씨) 방의는 증문하찬성사(贈門下贊成事) 최인두(崔仁㺶)의 딸과 혼인했는데 최인두는 동주최씨로 바로 그 최영과 인척관계에 있다. 방간은 증문하찬성사(贈門下贊成事) 민선(閔璿)의 딸과 혼인했고, 이방원은 예문관대학사(藝文館大學士) 민제(閔霽)의 딸과 혼인했는데 민선과 민제는 모두 황려민씨(여흥민씨)로 재상지종으로 불린 유력 권문세가다. 신덕왕후 강씨의 딸인 경순공주는 그 이인임의 조카인 이제와 혼인했고 방번에 이르면 공양왕의 조카사위(…)다. 즉, 신의왕후 한씨 소생 다섯 아들과 방번은 모두 고려 구세력(심하면 왕족)과 혼맥을 중심으로 이어져 있었다.[12] 이러한 혼맥은 변방무장 출신 태조가 중앙정계에 순조롭게 연착륙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지만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개창된 이후엔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에겐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해석이 있다. 막내 아들 방석만이 고려 구세력과의 접점이 없었다.[13]

무엇보다도 방석은 왕의 총애를 한몸에 받고 있는 현 왕비 신덕왕후 강씨의 아들이었다. 신의왕후 한씨는 조선 건국 이전에 사망했다. 건국 후 절비(節妃)란 시호를 내려 어느정도 예우를 갖추긴 하였으나 죽은 신의왕후의 권세가 현 국왕의 총애를 받고 있는 현 왕비인 신덕왕후를 뛰어넘을 순 없었다. 태조 2년 한씨의 3년 상이 끝나고 잔치를 베푸는 것을 마지막으로 그녀에 대한 태조의 예우는 끝난다. 반면 개국 직후 공신들이 태조를 위해 잔치를 열 때 동시에 공신부인들이 강씨를 위해 잔치를 베풀었다는 기록에서[14] 알 수 있듯 강씨의 권세는 공인되어 있었다.[15]

일각에는 막내아들을 후계자로 삼는 말자상속 풍습이 있는 유목 민족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으나 생각해보면 이것은 신빙성이 없다. 이성계는 아버지와 함께 공민왕에게 귀부할 때부터 고려인을 자부했고 고려인 대우를 받기 원했으며 여진족 티를 내지 않고 철저히 개경의 중앙귀족으로 정착하려 하였기 때문에 유목민 풍습을 따르고 싶어도 따를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이성계 다음 대에는 고려귀족으로서 형제간의 서열과 가문의 후계구도가 정착되어서 장남 방우가 개경의 대귀족인 전주이씨 가문의 차기 당주로서의 특권으로 음서로 벼슬에 나아갈 수 있었고, 차남 방과 또한 이미 동북면 영지와 가별초를 물려받을 군사방면의 후계자로서 아버지에게 군인 수업을 받고있었다. 더구나 조선 건국을 주도한 세력이 사대부 중에서도 공민왕 이래의 급진 반몽주의자들이었던 것만 봐도 이에 관련하여 몽골유목민의 말자상속제는 재고할 가치가 없다.

어쨌든 문제는 조선이 유목제국이나 봉건국가가 아니었다는 것이다.[16] 게다가 태조가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에게 취한 태도는 토사구팽으로 받아들여질 여지가 많았다. 왕자들과 고려 구 세력의 딸들을 혼인시켜 중앙 정계에 진출했으면서도, 정작 새 왕조가 세워지자 왕자들을 권력의 중심에서 내치려 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한양 천도 직후 신덕왕후가 사망하면서 세자의 배후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살아있는 현 왕비의 아들이라는 타이틀이 어머니 신덕왕후의 사망으로 사라지면서 이복형들과 다를 바 없게 된 것이다. 태조는 일부러 그녀의 능 정릉(貞陵)을 도성 내, 그것도 광화문 바로 남쪽에 조성하고 원찰로 흥천사를 창건해 강씨의 존재감과 권위를 유지해 세자의 권위를 지키려 했다. 또한 세자빈 심씨를 현비로 책봉하고 방석과 현비 사이에 아들이 태어나자 왕손의 개복신 초례(開福神 醮禮)를 세자전 남문에서 거행해 태조 - 세자 - 왕손의 후계구도를 공고히 하려 했다. 그러나 왕손이나 세자나 아직 어렸고 신의왕후 때와 마찬가지로 죽은 사람의 권위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2.2. 간과한 것[편집]

태조나 공신들이 막내를 세자로 만들었을 때는 나름대로 명분(현존 왕후의 자식)은 있고 재상 중심 정치를 만들기 위한 정도전의 구상[17] 때문에 결정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는 나중에 큰 혼란을 만들어낸다.

공신 측에선 '지금 왕후가 누구신데 당연히 왕후의 자식께서 세자가 되셔야지!', '무엇보다 왕이 결정하신 거다!'라는 명분을 가지고 있었고, 마찬가지 방과, 방원 등도 불평하거나 반발하는 순간 불충으로 찍힐 수 있어서 일단 따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안의 분노와 실망은 절대로 지울 수 없었다.

아무리 태조에게 자신만의 명분이 있다 해도, 조선이 건국되고 제왕학이나 역사를 배웠다면 막내에게 물려주다가 멸문당한 문벌군웅, 동생이 태자 책봉 직전까지 가서 친족을 약화시킨 황제 등 장자상속을 지키지 않아 혼란의 시대가 온 사례가 수도 없이 많았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이미 한국사에서 이성계와 똑같이 자수성가하여 무력에 기반해서 나라를 세우고 장자를 무시하고 후처 소생의 막내를 후계자로 세우다가 쿠데타로 모든 것을 잃은 견훤이라는 반면교사가 있었다. 아무리 봐도 막내를 책봉한 건 엄청난 리스크를 가질 수 밖에 없었다.

  • ① 현 왕비 신덕왕후 적자. - 신덕왕후 급사
    세자에게 가장 확실하고 빠른 정통성 부여 수단이 왕과 왕비의 자식이란 점인데 공인된 조선의 초대 왕비 신덕왕후의 적자라는 시선으로 보면 방석의 세자 책봉은 이상할 게 없었다. 동복형 방번에겐 아주 치명적인 결격사유(공양왕의 조카사위)가 있었기 때문. 문제는 신덕왕후가 한양 천도 이후 사망해 버린 것. 다른 그 어떤 이유보다 신덕왕후의 죽음이 무인정사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 동복형이 몇 명 있던 종법상 왕자들의 어미인 신덕왕후가 멀쩡했으면 서자 운운하는 말이 나올 수 없었고 쿠데타 자체가 발생할 수 없었다. 신덕왕후가 사라지고 그 권위를 유지하기 위한 태조의 노력도 한계가 자명했기에 방석의 입지는 급격하게 위태해졌다.
    이건 방석의 불행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데 신덕왕후는 사망 당시 고작 40세였다. 이성계의 맏아들 이방우보다 어리고 이방과보다 겨우 1살 많던 그녀가 그렇게 일찍 세상을 떠날 줄 누가 예상할 수 있었겠는가?

  • ② 형들이 많은데 막내가 되었다.
    고려 권문세가를 처가로 둔 형들은 모두 똑똑하고 능력있으며, 개국 과정에서 공헌을 했음에도 다 제쳐지고 막내가 세자가 되었다. 일개 여염집이라고 해도 만약에 아버지가 재산을 나눠줄 때 같이 뼈빠지게 일하고 같이 고생한 아들들을 제쳐두고 아직 애교나 부리는 어린 막내에게 재산을 많이 물려주면 당연히 화가 날 수 밖에 없고, 아버지 사후 싸움이 일어날 가능성이 대단히 크다. 하물며 차기 국왕의 자리인 세자 자리이고, 시기가 매우 민감한 건국 초기라면 불만과 혼란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18]
    다만 첫 번째 리스크와는 달리 세자를 폐위시키려면 명분이 있어야 했는데, 바로 적장자를 놔두고 서자가 웬 말이냐!였다. 즉 '건국에 나름 공헌을 하고 장자 역할을 충실히 하는 방과를 놔두고 방석을 세우는 건 잘못된 도리다'라는 논리였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이방원 측은 이성계 사후에 신덕왕후에 대한 예우를 아예 후궁격으로 격하시켜버린다. 사실 이성계 생전에도 제대로 예우하지 않았지만 될 수 있으면 아버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완전히 격하시키진 않았다.[19] 여기에 '정도전 등 간신들이 태조를 설득해 방석으로 책봉했고, 그리고 그를 바탕으로 걸림돌이 되는 우리를 죽이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우리가 나선 거다'라고 주장했다.이 주장이 맞다면 태조는 아무 것도 못하는 바보라는 거다[20]

  • ③ 방번, 방석은 개국에 공헌한 업적이 하나도 없다.
    방번, 방석은 1381년, 1382년 생이라 조선이 세워질 때 겨우 10살쯤밖에 안 되었다. 반면 이복형들은 달랐다. 관직에 오래 머무른 방우, 아버지를 따라 여러 전투에서 활약한 방과, 그리고 과거 시험에 합격하고 아버지의 가장 큰 정적인 정몽주까지 살해하며 조선을 세우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방원 등은 개국 공헌에 힘쓴 무서운 형들이었다. 특히 업적을 생각한다면 방원을 세자로 안 세우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하지만 태조는 이를 무시하고 방석을 세자로 삼은 데다가 그 명분을 제공하지도 못했다. 이는 고생한 자식들을 홀대하고 새엄마의 자식만 편애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었다. 아무리 태조가 무섭더라도, 섭섭함과 실망감은 감추기 어려웠다.[21]

2.3. 예방책?[편집]

태조도 이에 대한 걱정을 안 한게 아니라서 나름대로는 예방 조치에 심혈을 기울였다. 국초 왕자들과 사위의 군호를 정하면서 이들의 절제사(節制使) 임명도 병행해 친위군사력을 재편성했는데 이때 이방과와 이방번, 이제가 함께 의흥친군위절제사(義興親軍衛節制使)로 임명되어 친위군의 중추가 되었다. 이제야 세자의 동복형과 매형에게 힘을 실어주어 세자의 입지를 강화하겠다는 조치였고 개국에 공을 세운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도 아예 모른 척 할 순 없으니 정치적으로 입지가 좁아진 방우 대신 방과를 대표로 중임을 맡긴 것이다. 이 조치 이후 10일 뒤에 방석이 세자로 책봉되었다.[22] 신의왕후 소생의 다른 왕자들에겐 중앙의 군권 대신 지방의 지휘권이 주어졌다. 이성계에게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동북면의 가별초 지휘권은 이방원에게 잠시 주어졌다. 태조 3년 정도전의 군제개편 제안으로 각 도에 절제사를 두고 종실이 이를 맡게 할 때[23] 방번이 넘겨받는다.(방원은 전라도 절제사로 전임) 이성계에게 동북면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하면 결국 세자 방석의 위상을 확고히 하겠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정도전 일파에 대한 불만, 사병혁파와 요동정벌 등 급진정책에 대한 반발은 태조의 예상 이상으로 거세었다. 사병혁파와 요동정벌을 위한 군사 징집은 반대파로서는 자신들의 수족을 자르려는 것으로 생각되었고, 실제로 이방원의 경우 신덕왕후에 대한 경계심까지 합쳐져 사병혁파를 계기로 목숨의 위협을 받기도 했다. 정도전은 행정능력 면에서 출중한 인물이지만 정치적 능력은 뛰어난 인물이 아니었다. 이런 정책은 건국 초기 필요한 것이었지만 너무 급진적으로 전개한데다, 반대파의 반발을 너무 강경하게만 대처했기에 그 불만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했다.

2.4. 정도전의 대명강경책과 군제개혁[편집]

이렇게 세자 문제로 혼돈의 폭풍이 휘몰아치는 와중에, 정도전은 요동정벌을 발표한다. 당시 조선과 명은 표전문 사건 등 외교문제로 인한 사신 억류 등의 문제가 터지면서 골이 깊어지고 있었는데[24] 이 때 표전문을 짓는데 참여했던 권근은 태조가 따로 부르지도 않았어도 스스로 찾아가서 '저도 표전문 사건에 관련되어 있으니 제가 가서 직접 해결하게 오겠습니다.'라고 하며 자원해서 명에 갔다왔다.[25] 권근의 노고로 일은 잘 처리되었고 권근도 황제(주원장)에게 대접까지 융숭하게 받으며 성공적으로 귀국했다. 하지만 정도전과 그 파벌은 일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온 권근을 사헌부를 통해 탄핵해버렸다. 이유는 정총 등 표전문 관련으로 억류된 이들 가운데에 홀로 살아 돌아왔다는 것. 물론 태조는 '만리 길 마다 않고 자원해서 일 처리하고 온 권근에게 상은커녕 무슨 탄핵이냐?' 라며 씹어버렸다. 결국 정도전은 이에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 민심과 사대부의 지지만 잃어버렸다. 물론 그렇다고 태조가 그를 버리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표전문 사건이 마무리된 후 정도전은 이참에 아예 요동을 공격하여 명에 본때를 보여주자는 과격한 모습을 보였고 그를 위한 군사 개편까지 기획했다. 그리고 그 첫발로 공신과 종친이 보유하고 있는 사병들을 회수하여 조선의 중앙군을 강화하는 '사병 혁파'를 추진한다.

하지만 그의 사병 혁파 시도는 말처럼 쉽지 않았다. 애초에 이성계 본인이 사병을 가지고 왕이 된 만큼 이를 모두 혁파하려면 사병의 준동을 진압할 수 있는 훌륭한 관군이 확보되어야 가능하다. 그런데 당시 조선의 중앙군이라곤 본래 함흥의 이성계 일가에게 충성하던 직속 가별초들이었다. 이들이 함흥과는 아무 인연이 없는 정도전이나 이방번에게 복종하여 다른 전주 이씨 문중 인사들을 가차없이 적대할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또한 함흥 출신 왕자들과 문중의 종친이 보유하는 사병들 또한 본래 가별초였기 때문에 이성계의 지휘 아래 생사고락을 함께하며 수많은 주변 이민족들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역전의 용사들이다. 이들은 일반 사병보다도 더 특정 가문에 대한 사병화의 정도가 심각했기 때문에 모시는 주군들이 극구 반대하는 관군으로의 강제편입을 순순히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당장 사병 몰수 대상 리스트에 있는 이지란이 가별초의 실질적 2인자, 이방과가 가별초의 차기 대빵이었는데 아무리 1인자의 위세를 빌린다 한들 낙하산 먹물꼬붕과 큰마님을 밀어낸 첩실의 꼬맹이 아들이 가별초에 발휘할 수있는 영향력은 한계가 명백하지 않았겠는가.

물론 사병혁파는 필요한 정책이었지만 당시 실행자가 당시 신권정치 실현을 빌미로 정계의 온갖 어그로란 어그로는 다 끌고다니던 정도전이었다는 게 문제였다. 정도전은 이러한 사병혁파를 추진하면서 당연하게도 공신은 물론 신의왕후 소생의 왕자들과 왕실 종친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특히 신의왕후 소생의 왕자들은 안그래도 세자 책봉 문제로 골이 깊은 상황에서 이러한 발표가 나오니 자신들의 수족이 잘린다는 생각을 넘어서 정도전 이놈이 기어이 아버님으로부터 나라를 뺏기 위해 우리를 모조리 죽여버리려고 수작을 부리는구나!라며 이를 박박 갈았다.
즉 이들 대다수의 눈에는 전주 이씨인 자신들의 사병이 나라의 관군으로 편입되는 게 아니라 봉화 정씨의 사병이 되는 것이나 진배없이 보였다.

게다가 조선 자체가 다른 것도 아니고 위화도 회군을 계기로 고려를 뒤엎고 일어난 국가인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고려 멸망을 주도한 정도전이 이제 와서 요동 정벌을 주장하며 사병을 몰수한다는 것이 왕족과 신료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을지 달리 설명이 필요할까? 당연히 이들 공신과 종친 세력은 무인정사가 벌어졌을 때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 편에 서서 적극적으로 병력을 지원하거나 직간접적인 지지를 표명해 정도전과 그 일당을 열세로 몰아넣었다.

3. 쿠데타의 전개와 결과[편집]

기본적으로 실록의 내용 자체와 당대 문집과 증언들이 하나로 일관되지 못하고 전부 제각각이다. 어떤 것이 진실인지 알기 어렵다. 반군의 병력이 많았다고 하기도 하고 적었다고 말하기도 하며, 전투가 있었다고 하기도 하고 없었다고 하기도 한다. 박위가 이방원의 군세를 살피러 갔다가 잡혀 죽었다고 하기도 하고, 난전 중에 전사하였다고 하기도 한다. 김사형과 이무 등은 미리 포섭된 것인지 아니면 나중에 투항한 것인지 알 수 없다.

객관적 기록으로 보자면, 이숙번, 하륜 등은 확실히 반군 편에 서서 군대를 지원했고 정도전, 남은, 심효생, 장지화, 이제, 유만수, 변중량 등이 살해되고 왕씨 학살에서 겨우 빗겨났던 개성 왕씨들도 다수가 죽임을 당했다. 신덕왕후 소생의 세자 이방석과 무안군 이방번 또한 살해되었다.[26]

이직은 원래 제거 대상에 있었으나 종으로 위장하여 목숨을 건졌다[27]. 영안대군 방과는 반란 소식을 듣자 아버지의 쾌유를 위한 제사를 준비하다 달아나 숨었고, 익안군 방의와 회안군 방간은 실록 묘사를 빌리면 말도 없이 뛰다가 자빠지기까지 하면서 열렬히 반란에 호응했다. 이방우의 장남이자 이성계의 적장손인 봉녕군 이복근은 이방원 편에 붙어서 공을 세우고 봉녕부원군의 작위를 얻었다.[28]

궁궐수비대 총지휘관 박위 또한 살해당하고 공동으로 지휘를 맡았던 조온은 반군에 합류했다.[29] 궁궐 내 다른 곳의 수비를 맡았던 이무도 조온이 투항하고 박위가 죽었단 소식을 듣자마자 투항했다. 특기할 만한 것으로 궁궐 오위군 중 하나인 호분위의 군사 전원이 이성계 가문 가별초(사병)들이었다는 것. 이들은 이성계의 지휘 아래 황산 대첩, 개경 탈환 작전, 나하추 전투, 이오르 티무르 전투 등에서 승리한 당시 조선 최고의 정예부대였다.

전개 과정을 추정해 보면 이렇다. 오랜 세월 동북면에서 이성계 일가에 충성을 바쳤던 가별초들이, 태조가 직접 내린 공격명령이나 태조가 시해될 정황이 없는데 자기들이 도련님으로 모셨던 동북면 출신 왕자들에게 칼을 빼들고 대항할 가능성은 없었다고 봐야 하고, 또한 동북면 출신 왕자들이 주축인 반군도 전심전력으로 자기 가문의 정예 사병들과 적대할 계획은 없었을 것이다. 가별초를 포함한 수비대 전원을 전멸시킨다면 피해가 심할 것은 자명했기에 미리 지휘관들을 포섭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30].

그렇게 보면, 반군이 공성전을 하지 않았을 것이고 궁궐에 입성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당일 현장을 지휘하던 박위는 이미 궁궐 내의 다수가 사전모략을 했거나 포섭됐다는 것을 파악하고 전투의지를 상실해 투항했을 것으로 보인다. 아니면 아예 조온, 이무 등에게 포로로 잡혔을 가능성도 있다. 박위, 조온, 이무 등이 이끌던 지휘부 군대가 모두 투항한 후, 궁궐 내 다른 곳을 지키던 나머지 잔존 부대도 전세가 꺾였다는 걸 알고 투항, 모두 무장해제 당한 후 집으로 돌려보내졌다고 한다. 그렇다면 실록에서 묘사되었듯 전투가 거의 없었다는 것이 납득이 간다.[31]

또한 다른 방어군은 가별초를 포함한 대군과 대치했다는 것만으로도 사기가 빠르게 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반군 측 자체 군세도 결코 적지는 않았을 것이다. 불확실한 숙위군 지휘관들과의 밀약만 믿고 일을 진행할 순 없으니까. 실록에선 세자 이방석이 연이어 줄지어진 병력을 보고 놀랐다는 듯한 기록이 있다. 계유정난처럼 정말 세력이 약한 상황에서 주저하는 사람들 걷어차 가며 일을 벌였다기보다는 사전에 주도면밀하게 계획된 쿠데타였다.

난이 일단락된 후, 신하들이 태조에게 정도전, 남은, 박위 등이 역적이라 죽였다는 문서에 서명을 요구하자 이름을 적고는 토하려다가 그리하지 못하고 "목에 뭐가 걸린 것 같은데 넘어가질 않는다."라고 말하며 울었다고 한다.

1차 왕자의 난으로 이방원은 단번에 권력을 장악했다. 이후 2차 왕자의 난도 불만분자의 돌출행동에 가깝고 별다른 위협조차 되지 못했다.[32] 1차 왕자의 난으로 태조 이성계는 상왕이 되어 실권이 없어졌고 새로 왕이 된 정종도 별다른 실권이 없었다.[33] 반면 이방원은 실권을 쥐고 세자가 되어서[34] 공식적인 왕위 계승권자가 되었고 측근들이 조정을 장악했다. 보통 이런 경우 있을 법한 반대 세력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고 왕위 등극 후 가장 큰 위협인 조사의의 난조차 초기 진압에 성공했다.[35] 왕위를 사수하는 중 입니다, 아버지!

반면에 태조는 쿠데타 한 번에 너무나 쉽게 무력화 되고 말았다. 여러 면에서 판박이인 견훤의 경우 신검은 쿠데타 후에도 쉽게 정부를 장악하지 못했다. 신검의 쿠데타는 견훤에 충성하는 이들을 숙청은커녕 군대를 맡겨서 전쟁터에 끌고 나올 수밖에 없었을 정도로 기반이 취약했다. 견훤이 고려로 망명 후 고려군을 이끌고 쳐들어왔을 때 후백제의 중신들은 견훤을 보고는 별다른 저항없이 투항했다.[36] 하지만 왕자의 난은 쿠데타 과정에서 중신들과 왕실 친인척의 지지를 받았고, 당일에 이복동생 세자를 폐세자 후 살해는 물론이고 이성계의 손발이 될 측근을 모조리 참살해버리고 빈자리에 자기 사람들을 심는 데 성공했다. 덕분에 궁궐에 고립된 이성계는 이방원에게 변변한 반격 한 번 못해봤다. 건국 왕이라는 권위가 있음에도 최측근만 정리되자 중앙에 고립된 건 막내 세자 책봉이라는 무리수로 엄청난 지지를 잃었다는 반증이다.[37]

4. 여타 기록 왜곡[편집]

1차 왕자의 난에 관해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왜곡되어 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는 1차 왕자의 난에 대한 기사가 실린 태조실록이 반란의 주동자인 태종 시절에 편찬되었기 때문이고, 실록 편찬 멤버들 또한 직간접적으로 1차 왕자의 난에 가담한 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실록에는 이방원의 군사들이 무기가 없어 서로 창을 쪼개어서 들었다고 하고 또 겨우 수십 명이 경복궁 앞에서 진을 쳤다고 하지만 당연히 그대로 믿으면 안된다. 실제로는 충청도 관찰사 하륜이나 안산군수 이숙번 등 쟁쟁한 사람들이 지휘했고 군사는 최소 수천 명은 되었을 것이다. 그래야 군부의 최고기관인 삼군부와 궁궐의 근위병들에 맞설 수 있는 군세가 되니까. 실록이 사실이라면 나라 꼴이 참 막장이라고 할 수 있다. 수십 명 남짓 되는 사람들에게 나라가 무너진다는 것 자체가 정말 어이없는 일이다. 그런데 충청도에서 군대가 북상하고 있는데 그걸 감지 못한 것도 어이 없는 일이긴 하다[38]

당시 경복궁 숙위병 사령관은 이방석이었는데, 당연히 이에 대처를 하려고 했지만 저항을 못했다. 숙위병의 수가 적어 중과부적으로 밀려서 변변한 전투 한 번 치르지도 못하고 제압당했든지, 아니면 숙위병들마저도 창을 거꾸로 잡았든지, 그도 아니면 숙위병이 대처하기도 전에 반란군이 들이닥쳤을 것이다. 여하튼 이방원 측에서 적지 않은 병력을 동원해 급습했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정도전의 최후에 대해 실록에서는 정안대군 이방원에게 목숨을 구걸하다가 처형되었다고 나와 있으나 이 역시 왜곡되었을 공산이 크다. 자세한 얘기는 정도전 문서를 참조할 것.

게다가 실록의 1차 사료라고 할 수 있는 승정원일기마저도 임진왜란 당시 조선 초기에 해당하는 기록들이 불타버려서 정확한 사실에 접근하기는 아직도 요원하다. 사실 승정원일기라고 조작 없이 멀쩡했을지도 의문이지만.

5. 태조의 병환[편집]

5.1. 태조 병환 조작설[편집]

태종이 반란군을 이끌고 가장 먼저 제압한 곳은 정도전과 친구들이 놀고있던 술집이 아니라 태조가 기거하고 있던 경복궁이다. 실록에는 태조가 당시 와병 중이었다고 나와있지만, 실제로는 반란군들에게 체포, 구금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태조는 1차, 2차 왕자의 난 이후에도 아주 건강하게 지냈으며 조사의의 난 때는 태종을 겨냥해 실질적으로 군대를 지휘하기도 하는 등 와병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당시 왕자의 난 전후한 실록의 기록을 보면, 태조의 병환에 대한 기록은 총 6번인데, 태조 7년에 무려 5번이 몰려 있고[39] 그 중에 왕자의 난이 발생한 8월에 4번이 몰려 있다. 그런데 8월 아파서 누웠다는 사람이 3일 만에 흥덕사에 가서 신덕왕후의 명복을 비는 모순된 기록이 보이고, 태조가 아팠다면 아내 신덕왕후 때처럼 거처를 옮긴다든가 대사령이나 불공처럼 회복을 기원하는 행동이라도 보여야 하는데 1차 왕자의 난 직전 태조의 회복을 위한 행동은 오로지 영안군 이방과가 태조의 건강을 위한 제사를 지냈다는 것 하나뿐이다. 그리고 정종에게 선위하는 이유 중 하나가 건강 문제임을 봐서는 태조의 와병은 조작이고 태조가 구금되었을 가능성은 매우 크다는 논리다.

당시 태조의 나이가 언제 갑자기 급사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나이(62세)이고, 요동 정벌을 앞두고 있는 비상한 상황인 시기인 것도 모자라 태조가 몸이 아픈데 재상이자 의흥삼군부사로서 군권을 모두 틀어쥐고 있던 정도전이 밖에서 술을 마신다? 태조가 아프면 병환의 중한 정도를 떠나 즉각 입궐해 상황을 살펴야 하는 정도전이다. 대응력이 떨어질 정도의 상황으로 태조에게 병환이 있었다면 그 전에 이미 정도전은 경복궁에 들어가 상황을 살피며 계엄령을 선포할 것인가 저울질하고 있었을 것이다.

실록에 나와있는 것처럼 태조가 걸핏하면 골골대며 자리에 누워버렸다면 상왕이나 태상왕으로 물러났을 때 심심하면 사냥을 나가거나 타 지역으로 유랑을 갈 수 없었을 것이고 조사의의 난 때 군대 지휘 또한 불가능했을 것이다. 죽기 몇 년 전에 딸을 얻을 정도로 매우 건강한 사람이 태조였다.

5.2. 반론[편집]

실록의 기록을 믿는다면 태조가 진짜 아팠다는 쪽에 힘이 실린다. 태조가 하필이면 그날만 앓아누웠다 하더라도 무인정사 당시 태조의 나이(64세)라면 한 번쯤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겉보기에 건강해도 어느 날 손바닥 뒤집히듯 바뀌는 게 노인들 건강이다. 일례로 1994년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었을 당시, 직접 평양에 가서 김일성을 만나보고 온 지미 카터는 그가 건강하다고 평가했지만 서울에서 TV화면으로만 김일성을 본 김영삼그의 건강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바로 간파해냈고 김일성은 그로부터 보름도 안 되어 죽었다. 김영삼의 아버지가 김일성과 비슷한 연배(김일성은 1912년생, 故 김홍조 옹은 1911년생)라서 노인의 건강상태를 살피는 데는 일가견이 있었기 때문. 20세기에 온갖 호사를 누리며 산 독재자가 이런데 하물며 15세기의 60대라면 말할 것도 없다. 실제로 실록에 기록된 태조의 병환은 난이 일어난 그때 갑자기 등장한 게 아니라 1398년 내내 꾸준히 등장한다. 후일 태조가 건강했다 한들 그 당시의 병환을 의심하는 건 음모론에 지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실록 기록을 보면 예전의 씩씩했던 태조치고는 너무 무기력해보인다. 다만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로 위독한 상태라면 정도전 일파가 그렇게 술이나 마시면서 있을 가능성은 없으니 중병까지는 아니었고, 단지 며칠 푹 쉬고 약 잘 먹으면 완쾌될 정도라서 회복에 집중하느라 태조의 대응력이 떨어진 상황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태조가 대응하고 싶어도 병환 중 태조를 대신할 인물이 없고 경복궁이 장악된 상태라서 태조가 적극적으로 나서기 어려웠을 공산이 크다. 현대에도 감기나 독감 같은 가벼운 병이라도 중병과 똑같이 병에 걸렸다고 여긴다. 태조 역시 처방 잘 받고 하루이틀 푹 쉬면 나을 잔병이었을 수 있다. 물론 하필이면 그 시기에 일이 터졌다는게 문제.

만약 태조가 멀쩡한 상태에서 쳐들어왔다면? 그냥 아들이고 뭐고 거기서 끝났다. 태조가 아무리 늙어도 신궁 수준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고 무인 출신이라 반란 진압은 쉬웠을 것이다.(그 자신이 반란을 일으켜 왕위에 올랐는데 반란에 대응하는 법을 잘 알 것이다.) 태조 개인의 무력이야 노령으로 인해 쇠퇴했다 쳐도 그는 무인정사보다 더한 아수라장을 수없이 돌파해온 경험이 있다. 거기다 왕이 있는 궁궐에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온것 자체가 반역죄로 삼족을 멸해도 할말 없을 때였다. 명분에서 한참 밀리는 게, 만약 태조가 직접 진압에 나선다고 하면 과연 군사들은 누구 편을 들것인가? 멀쩡한 왕에게 갈것인가, 무턱대고 들어온 이방원 편을 들 것인가? 오히려 태조도 눈엣가시였던 이방원과 다른 야심있는 인물들을 쳐낼 좋은 타이밍일 수도 있었다.

이 경우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이방원 일파가 마침 태조가 병이 나서 드러누워 있는 사이 전격적으로 쿠데타를 성공시켰다고 해석할 수 있다. 따지고보면 태조가 신속하게 밀어붙인 위화도 회군과 비슷하게 1차 왕자의 난도 신속하게 펼쳐졌다.

여담으로 과거 이 항목은 드라마 정도전이 종영된 이후 기레기들에 의해 토씨 하나 수정되지 않고 무단 도용되었다.(...)기사 1, 기사 2 지금은 항목에 수정이 좀 가해진 상태.

6. 1차 왕자의 난을 다룬 사극[편집]

뭐니뭐니해도 용의 눈물이다. 1차 왕자의 난을 대단히 스펙타클하게 그려냈으며 정예 병사들이 입고 있는 경번갑도 볼거리. 세자 방석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죽이라고 이방원은 눈치를 보냈고, 방번과 이제는 함께 그냥 보내주었으나 이들은 뒤쫒아간 이방간에게 제거된다.[40] 정도전의 최후에 대해서는 실록의 상반된 기록을 참고하여 의미 있는 모습을 그려냈다고 평가받는다. 여기서 태조는 기록에 따라 병으로 인해 아무 것도 하지 못하던 상황으로 등장. 나레이션에서 이방원은 딱히 동생들을 죽일 생각이 없었는데 주변에서 멋대로 죽여서 화가 나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고 변명하였다는 기록을 언급하며 어디서 설득력 없는 소리를 하냐고 디스한다.

다만 한명회의 살생부 씬을 가져다 쓰는 바람[41]에 실제 왕자의 난 전개 과정과 차이가 생겼다. 본시 남은의 첩실 집에 모여있던 인물은 정도전, 남은, 심효생은 물론이고 장지화, 이근, 이직, 이무 등 다수였는데; 극중에서는 정도전, 남은, 심효생만 있는 것으로 묘사했고 본시 이 자리에서 죽는 장지화, 이근은 입궐하란 명을 받고 궁문에 들어섰다가 이숙번이 살생부에 줄을 긋는 것과 동시에 무사들의 철퇴에 맞아죽는 걸로 바뀌었다. 본시 습격 현장에서 하인 복색으로 변장하고 도망치는 데 성공한 이직도 궁문을 들어서다 맞아죽는 오류가 나왔다. 다행히 이직이 비중이 크지 않았기에 남은의 형 남재와 함께 이방원을 찾아가 등용되는 장면으로 은근슬쩍 부활시킬 수 있었다.

드라마 정도전에서도 정도전의 최후를 장식하는 사건이기에 최종화로서 이 사건을 다룬다. 이방원이 죽이자, 제거하자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등 싹수를 보이기도 했지만, 이방원은 거사가 일어나기 전에 정도전에게 목숨을 위협받은 상황에서 하륜의 충청도 병력이 올라오는 것을 계기로 무인정사를 일으킨다.[42] 태조는 요동정벌을 위한 군사훈련 덕에 무리를 하게 되면서 자리에 눕게 되었으며, 도당 내에서 정도전의 우군이 없었기에 이지란이나 조준 등 이방원에게 호의적이라 볼 수 없는 사람들도 결국 이 사건을 방조하거나 받아들인다. 작중에서 정도전은 도망치지 않아 억류된 뒤, 이방원에게 '재상정치에 대한 포기를 대가로 모든 정책을 받아들이겠으니 내 부하로 들어오라'고 회유를 받으나 거절하고 참살당한다. '정도전은 도망치다 붙잡혀 애원하다가 살해당하였다'고 태조가 이방원에게 왜곡된 사실을 듣는 장면이 나오면서 양자택일이 아니라 두 설을 모두 채택하는 모습을 보였다. 참고로 용의 눈물에서 이방원을 맡았던 유동근은 정도전에서는 태조로, 용의 눈물에서 세종 이도 역을 맡았던 안재모는 정도전에서 이방원으로 출연한다(…).

2015년 3월에 개봉했던 영화 순수의 시대 또한 이 사건을 다루는 작품이다. 여기서는 장혁이 이방원을 맡았는데 영화 자체의 평가는 나빴어도 장혁의 킬방원(…) 연기는 괜찮았다는 평가.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47회에서 본격적으로 다뤄졌다. 일단 태조 와병설을 택한 듯, 태조는 등창에 걸려있었다. 물론 다른 드라마들과 달리 물흐르듯 진행되지 않고 이래저래 삐걱거리는 순간이 많았지만 운좋게 요동 출정이 연기되고, 안산군수 이숙번의 병력이 예정대로 이방원 병력과 합류했다. 그리고 이방원 - 이방간의 사병은 정도전 일행이 머무르던 송현방(남은의 별장)을 피바다로 만들며 정도전, 남은을 제외한 주요 인사들을 모조리 주살하고 그에 이어서 삼군부를 공격하여 그곳을 그들의 통제 하에 놓이게 하였다. 물론 정도전의 경호원인 이방지를 떨어뜨려 놓아 방해요소를 제거한 상태. 그리고 결국은 성균관 대성전으로 피신한 정도전을 이방원이 직접 주살해버린다.[43] 48회에서는 남은이 도망치다가 죽임을 당하고[44] 이방원은 궁으로 진격하여 세자 이방석도 참살한다. 한편 이방석의 형 이방번은 정황상 이방간이 죽인 것으로 보인다.

[1] 태조실록에 기록된 공식 사건 개요이다. 물론 현실은... 이하 내용 참조.[2] …9월에 공소의 난에 공(정도전)이 천년(天年)을 마치지 못했다. -삼봉집, 8권 부록 중 <사실>(事實).[3] 방우에게 남아 있던 군사들은 방우 사후 그의 아들 복근이 아니라 이성계의 형 이원계의 3남 이조(李朝)에게 인계되었기에 다른 종친들과 달리 실질적인 보탬이 되진 못했을 것이다. 태조실록 권4 태조 2년 9월 18일[4] 역성혁명에 참여하지 않았고, 위화도 회군 이후 가족들을 이끌고 철원에 은거, 건국 이후 고향인 함흥에 기거하며 술만 마시다가 일찍 사망하였다.[5] 태종 때 문안군으로 추증. 고종 때 덕안 대군으로 재추증.[6] 건국 전에 사망하였다.[7] 당시 그의 장남이자 태조의 장손인 이복근이 16세쯤 되었다.[8] 1385년 과거에 합격했다는 기록이 있다. 참고로 이방원은 1382년 당시 16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였다.[9] 신의왕후와 신덕왕후는 무려 19살 차이로, 신덕왕후는 방우보다 어리다. 방과와도 고작 1살 차이밖에 나지 않을 정도니 자식의 나이 차 역시 당연하다.[10] 고려에 충절을 지켜 은거했다는건 야사에 불과하며 실록에선 병권도 일부 쥐고 있었고 맏이로서 조상들에게 제를 지내는 등 후계자가 되지 못했을 뿐 맏이로서 역할을 했다. 그가 폭음을 일삼은 건 고려에 대한 충절 때문이 아니라 맏이 대우는 하면서 후계자는 되지 못한데 현실에 대한 울분이었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11] 다만 그가 사신으로 간 직후, 이방원이 이색의 요청에 따라 이성계의 선택으로 서장관 자격으로 이색, 이숭인을 따라 간 적이 있는 만큼, 이방우의 사신 행도 이와 같이 강제성이 있었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또한 이방우에 대한 바로 앞의 주석에 기록된 내용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반론이 가능한데, 진안대군 항목을 참조할 것을 추천한다.[12] 태조실록 권4 태조 2년 9월 18일 기사.[13] 그리고 여기서 생각해 봐야 할 인물이 방석의 첫 부인인 폐세자빈 유씨. 그녀와 방석이 혼인한 시점은 명확하지 않은데 만약 조선 건국 이전에 혼인한 고려 구세력의 딸이라면 그녀의 폐출 이유로 흔히 알려진 내시 이만과의 간통이 누명일 가능성이 생긴다.[14] 태조실록 권1 태조 원년 8월 19일[15] 현종과 명성왕후의 적자인 숙종이 조선왕 중 가장 강한 왕권을 자랑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 왕비의 자식이라는 점은 왕의 자식이라는 거 못지 않게 정통성에 보탬이 되는 요소였다. 신하들에게 혈통상 권위를 완벽하게 인정받고 더 나아가 제대로 된 후계자를 갖춘 태조 자신의 권위도 높아진다.[16] 보통 왕조국가는 정국의 안정을 위해서 나이로 형제 간의 왕위계승 서열을 구분하고 장자계승을 실시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뭐 고려 태조 왕건처럼 제대로 준비를 안 하고 적장자 계승을 밀어붙였다가 후계자가 오히려 낭패를 본 경우도 있지만, 적장자 계승을 제대로 지키지 않아서 나라 말아먹는 경우의 리스크가 더 컸다.[17] 하지만 처음부터 정도전이 방석을 세자로 세우자고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나라가 안정될 때는 장자, 혼란스러울 때는 능력있는 아들'을 주장했다. 이는 여차하면 방원도 세자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둔 것. 하지만 태조가 신덕왕후 소생이 세자가 되어야 한다고 못박았기 때문에 그나마 사리분별이 있는 방석을 추천했다.[18] 게다가 건국 초기인 만큼 왕조의 정통성 확보가 중요하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장자도 아니고 건국공신도 아닌 방석은 신덕왕후의 아들이라는 점을 감안해도 정통성이 한참 부족했다. 능력이라도 가장 출중했다면 모르겠으나, 능력 면에서는 아버지 이성계를 뛰어넘은 먼치킨인 이방원이라는 형이 있었다. 신덕왕후가 살아있었을 때는 살아있는 정비의 아들이라는 명분에다가 생모인 신덕왕후가 직접 보호해줄 수 있었지만 신덕왕후가 죽자마자 이 보호막이 사라져버린 것.[19] 이는 조선의 첫 번째 임금인 태조의 권위를 훼손한다면 왕실의 권위가 같이 훼손될 위험이 있기 때문에 더 이상 태조의 권위를 훼손하지 않기 위한 정치적인 계산이기도 하고, 동시에 아버지에 대한 미안함과 아버지와 대립한 끝에 직접 칼까지 맞댔던 불효자라는 죄책감이라는 개인적인 감정에서 나온 행동일 가능성이 높다.[20]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닌 것이, 건국 초기 태조는 정도전에게 국가 정비의 거의 모든 것을 다 일임했다고 봐도 될 정도로 정도전에게 모든 업무를 맡겼다. 태조가 국가 운영에 대해 모르는 바보라서라기보다는 그만큼 정도전을 신뢰하고 동시에 정도전의 능력이 상당히 뛰어나서였다. 하지만 정도전의 급진적인 정책은 그걸 지지하던 태조가 앓아눕게 되면서 버팀목이 사라졌고, 결국 정도전이 살해당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21] 그런데 이방원은 정몽주를 독단으로 암살하여 태조에게 찍힌지라 태조가 세자 자리를 줄 가능성도 낮았다. 물론 다른 형제들도 정몽주 암살에 찬동하기는 했지만 책임은 이방원 혼자 오롯이 뒤집어쓴다. 정몽주 암살에 가장 적극적으로 행동한 것이 이방원이다.[22] 태조실록 권1 원년 8월 20일[23] 태조실록 권5 태조 3년 2월 29일[24] 이 과정에서 홍무제는 정도전 파벌이면 억류하거나 죽이고 그의 반대파나 중도파면 우대해 자신의 뜻을 전한다.[25] 이때 태조는 권근이 노모가 계시는데도 스스로 자원하여 명에 가는 것에 고마워서 노자까지 두둑히 주어 그를 배웅했다.[26] 아이러니한 것이 이방원은 태조가 위화도 회군을 일으켰을 때 신덕왕후와 두 이복동생이 고려 조정에 의해 인질이 되거나 보복 살해를 당하지 못하게 구해줬는데, 신덕왕후와는 척을 지고, 두 이복동생은 자기가 죽이고 말았다.[27] 운 좋게도 그의 딸이 태종의 장인인 민제의 자손들과 혼사를 맺은 게 그의 생명을 구원해주었을 가능성도 크다. 그는 이후 다시 복귀하여 태종 대에 우의정까지 오르는 등 탄탄대로를 걸었지만 양녕대군의 폐세자 문제와 민무휼 - 민무회 옥사로 귀양크리를 타는 등 크게 곤욕을 치렀고 세종이 즉위하고 나서야 정계에 복귀할 수 있었다.[28] 이 시점에서 이성계의 적장남은 방과다. 이복근한텐 왕위를 주장할 정통성 같은 건 없었다.[29] 이로 인해 이성계의 노여움을 사 조영무와 함께 잠깐 유배당한다. 정황상 미리 포섭당한 인물이었을 것으로 보인다.[30] 그래서인지 용의 눈물에서는 조영무와 이천우가 궁궐수비대와 대치하면서 투항을 종용하고, 박위는 궁궐 수비병력의 부재에 전전긍긍하는 모습이 부각된다. [31] 이 점은 후에 동북면을 거점으로 벌어진 조사의의 난이 이성계의 주도라는 데 큰 설득력을 부여한다. 친위군이라는 직함을 달고도 태조의 직접적인 지휘가 없이는 왕자들을 상대로 아무 것도 못한 가별초들인데 하물며 그 본향인 동북면의 병사들이 고작 경처의 친척들 따위에게 포섭되어 동북면 출신 임금을 상대로 난을 일으킬 이유가 있을까?[32] 심지어 당시 이방원이라면 백정 놈이라며 이를 갈았던 태조조차도 방간의 반란 소식에 방간이 바보같은 짓을 했다며 방간을 나무랐다.[33] 명목상 왕은 정종이었으나, 정종에게 올라오는 모든 상소와 국서는 이방원이 모두 보고 있었으며, 정종은 항상 이방원과 상의한 후에 정책을 시행했고, 대부분은 이방원의 뜻대로 되었다.[34] 정종의 아우이니 세제(世弟)가 맞지 않냐는 사람이 있는데 이방원은 당시에 세자가 맞다. 정종도 '아우를 어떻게 세자라 할 수 있느냐' 는 신하들의 말에 '이참에 아우님을 아들 삼아버리면 되지 않느냐' 고 대답했다.[35] 조사의의 난의 경우는 명목상 조사의가 들고 일어난 난이지만 실제로는 태조가 배후에서 지휘하여 일으킨 난이라는 것이 정론이며, 실제로 태조의 거처에 태종이 방문한 뒤로 손쉽게 와해되었다. 이는 태조가 스스로 태종의 국왕지위를 인정해서든, 아니면 태종의 협박에 굴복해서든 태조가 태종의 정통성을 인정해준 것이며, 이로써 태종은 확고한 정통성을 얻을 수 있었다.[36] 신검의 경우에는 견훤이 금강을 세자로 세우려는 것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과 왕위 욕심에서 쿠데타를 일으킨 것일 뿐이다. 신검의 지지층으로서는 딱히 견훤에게 불만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는 신검이 왕위에 오르고 나서도 민심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고, 견훤이 고려군으로서 침공했을 때 후백제의 군사들이 쉽게 무너진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즉, 태조와 정도전의 정책에 불만을 가진 공신이라는 지지층이 있던 이방원과 달리 신검은 개인적인 욕심에서 쿠데타를 일으켰을 뿐, 신하들의 입장에서는 딱히 견훤의 구정권에 불만을 느끼지 못한 상황이라 공신들의 지지가 약했고 신검 본인의 통치능력도 이방원에 비해 한참 모자라 정부 장악에 실패한 것이다.[37] 막내를 세자로 책봉했다는 것 자체보다는 방석을 세자로 책봉함과 동시에 진행되는 일련의 정책에서 고려 왕실과 연관성이 있는 것들을 모조리 끊어내겠다는 태조의 의지가 보였으며, 이것이 신하의 지지를 잃게 했다. 종친과 신하들은 사병혁파와 방석의 세자 책봉을 통해 태조가 고려 구 왕실과 연관이 있는 자신들의 수족을 끊으려한다는 위협을 느끼게 되었으며, 동시에 자신들을 통해 중앙 정계로 진출하고 끝내 왕에 오르게 되었으면서도 막상 임금이 되자 토사구팽을 하려는 태조에게 분노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태조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게 된 것이다.[38] 그나마 먼곳의 군사가 동원된 인조반정만 해도 비교적 수도에서 가까웠던 황해도 장단군강원도 이천군의 군사였다. 이를 통해 충청도보다는 안산에서 동원된 병력의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볼 수 있다. 용의 눈물(과 그 원작 세종대왕)에서는 이숙번이 정릉숙위군 교대를 위해 안산의 병력을 이끌고 올라오는 시기를 쿠데타 결행시기로 잡고 하륜이 충청도의 병력을 상여행렬로 위장해 도성에서 합류한 것으로 묘사했다(원작 한정). 만일 정말로 이랬다면 정릉을 굳이 도성 안에 쓴 태조의 고집이 파멸을 불러온 셈.[39] 그 중 한 번은 천도를 위해 순방하던 중에 난 병으로 인한 물갈이로 추측된다.[40] 사실 방원이 죽인 거나 마찬가지다. 살려주겠다 해놓고 막상 옆에 있던 방간이 칼 들고 뛰어가자 "형님!" 하고 그를 딱 한번 부르기만 하고 그냥 지켜본다. 이방원 본인은 보내줬는데 이방간이 독단적으로 쫓아가 죽인 것이니 이방원 입장에서 거짓말을 한 건 아니다. 이방원에게 살려달라고 했지, 이방간에게 살려달라고 하지는 않았으니까.[41] 해당작가가 1990년 집필한 파천무의 살생부 씬을 그대로 써먹었다.[42] 작중에는 이방원이 밀리다가 하륜의 충청도 군대가 투입되면서 전세를 뒤집는 것으로 묘사된다.[43] 다만 용의 눈물이나 정도전 등의 사극에서는 베어 죽인 반면에 여기서는 찔러 죽인다.[44] 용의 눈물과 정도전에서는 남은이 정도전보다 먼저 죽었다. 다만 태종의 의심(조영규 장례식에 온 주변 지인들을 사랑채로 모셨으나 이신적만큼은 제외했다)을 받는 이신적이 태종 밑에서 입신양명 할 수 있게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이다. 추격하는 병사들에게 칼을 맞아서 도망가기도 어려운 상황이었으니. 물론 이 일로 이신적은 관직에 복귀하게 되고 후속작에서 보듯이 우의정까지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