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족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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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삼랑성 江華 三郞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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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족산성[1] |
원래 정족산성은 원래 이름은 삼랑성(三郞城)으로 단군의 세 아들이 정족산[2]에 쌓았다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정족산성은 조그마한 산성으로 별로 유명하지 않다. 오히려 산성 안에 있는 전등사(傳燈寺)가 강화도 내에서 유명했다.
흥선대원군이 1866년 병인박해로 프랑스인 선교사 9명을 처형하자, 프랑스 정부는 화가 나서 해군 특전대 약 6백여 명을 조선에 파병하였다. 프랑스군은 문수산성에서 한성근이 이끄는 조선군과 맞서 사상자 27명을 내는 등 피해를 입지만 결국 강화도에 상륙한 뒤 해상봉쇄를 실시했다.[3] 양헌수는 휘하 군사 120명을 이끌고 기회를 엿보다 덕진진을 통해 이틀 밤에 걸쳐 기습적으로 도하해 유일하게 함락되지 않은 정족산성으로 들어가 수성장(守城將)[4]이 되었다. 프랑스군은 이를 알고 병력 160여 명을 보내었다. 양헌수는 사거리가 짧은 조총의 단점과 프랑스와의 전력차를 인정하고, 총을 잘 쏘는 포수들을 동원해 프랑스군이 성에 가까이 접근하면 쏘는 근접사격을 시도했다.
마침내 프랑스군이 성 가까이에 접근한 순간 근접사격을 가하자, 프랑스군은 전사자 6명에 부상자 80명이 생기는 피해를 입고 후퇴했다.[5] 당시 프랑스 병력들은 당연히 이길 거라 생각했는지 대포도 없이 음식을 잔뜩 싣고 정족산성에 당당하게 접근했으나[6] 결과는 좋지 못했다. 프랑스 장교들은 빡이 쳐서 정족산성을 다시 공격하자고 건의하지만, 지휘관 로즈 제독은 정족산성을 함락하기에는 병력이 모자라다는 이유로 강화도에서 철군하라고 명했다.
상기 정족산성 안의 사찰 전등사에는 과거 정족산 사고(鼎足山 史庫)가 있어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였다. 정족산을 지켜냄으로써 사고도 함께 지킬 수 있었다. 정족산성 전투의 공으로 양헌수는 승진하여 나중에는 공조판서까지 되었다. 조정은 이 전투를 기리기 위해 1873년 정족산성 입구에 승전비를 세웠는데, 훗날 인천시 기념물 제36호로 지정되었다.
흥선대원군이 1866년 병인박해로 프랑스인 선교사 9명을 처형하자, 프랑스 정부는 화가 나서 해군 특전대 약 6백여 명을 조선에 파병하였다. 프랑스군은 문수산성에서 한성근이 이끄는 조선군과 맞서 사상자 27명을 내는 등 피해를 입지만 결국 강화도에 상륙한 뒤 해상봉쇄를 실시했다.[3] 양헌수는 휘하 군사 120명을 이끌고 기회를 엿보다 덕진진을 통해 이틀 밤에 걸쳐 기습적으로 도하해 유일하게 함락되지 않은 정족산성으로 들어가 수성장(守城將)[4]이 되었다. 프랑스군은 이를 알고 병력 160여 명을 보내었다. 양헌수는 사거리가 짧은 조총의 단점과 프랑스와의 전력차를 인정하고, 총을 잘 쏘는 포수들을 동원해 프랑스군이 성에 가까이 접근하면 쏘는 근접사격을 시도했다.
마침내 프랑스군이 성 가까이에 접근한 순간 근접사격을 가하자, 프랑스군은 전사자 6명에 부상자 80명이 생기는 피해를 입고 후퇴했다.[5] 당시 프랑스 병력들은 당연히 이길 거라 생각했는지 대포도 없이 음식을 잔뜩 싣고 정족산성에 당당하게 접근했으나[6] 결과는 좋지 못했다. 프랑스 장교들은 빡이 쳐서 정족산성을 다시 공격하자고 건의하지만, 지휘관 로즈 제독은 정족산성을 함락하기에는 병력이 모자라다는 이유로 강화도에서 철군하라고 명했다.
상기 정족산성 안의 사찰 전등사에는 과거 정족산 사고(鼎足山 史庫)가 있어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였다. 정족산을 지켜냄으로써 사고도 함께 지킬 수 있었다. 정족산성 전투의 공으로 양헌수는 승진하여 나중에는 공조판서까지 되었다. 조정은 이 전투를 기리기 위해 1873년 정족산성 입구에 승전비를 세웠는데, 훗날 인천시 기념물 제36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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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족산성 종해루 안쪽 전경[7] |
정족산 전투는 오늘날에도 근대사를 배울 때 꼭 나온다. 김포 문수산성과 더불어 병인양요를 대표하는 격전지였다.
정족산성이라고도 하며 단군의 세 아들이 성을 쌓았다는 전설이 있어 삼랑성이라 부른다.
이 성이 만들어진 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나, 고려가 1259년 삼랑성 안에 궁궐을 만들었다고 하니 그 전에 이미 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성곽이 쌓여져 있는 모습을 보면 보은의 삼년산성이나 경주의 명활산성처럼 삼국시대 성의 구조를 찾을 수 있으므로,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성으로 추측된다.
고려 때 보수공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영조 15년(1739)에 성을 다시 쌓으면서 남문에 문루를 만들고 ‘종해루’라고 하였다. 조선 현종 1년(1660) 마니산의 사고에 보관되어 있던 『조선왕조실록』을 성 안에 있는 정족산사고로 옮기고, 왕실의 족보를 보관하는 선원보각을 함께 지었다. 그러나 지금은 둘 다 없어지고 전등사만 남아있다.
이곳은 고종 3년(1866)의 병인양요 때 동문과 남문으로 공격을 해오던 160여 명의 프랑스군을 무찌른 곳으로도 유명하다.
※(삼랑성 → 강화 삼랑성)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 (2011.07.28 고시)
[1] 사진 출처 - 문화재청.[2] 경남 양산 소재의 동명(한자도 동일: 솥 정(鼎), 발 족(足), 솥발산)의 산이 있으나 다른 산이다[3] 이 과정에서 외규장각에 있는 도서가 프랑스군 손에 넘어가는 등 문화적인 피해도 크게 입었다.[4] 성을 지키는 장수란 뜻[5] 이때는 프랑스군도 아직 전장식 강선총을 제식소총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본국에서는 초창기 볼트액션 소총인 샤스포 소총의 도입이 막 시작되었으나 도입 초창기였기에 식민지군까지 보급되었을 가능성은 낮다), 구식 화승총 따위로 무장한 군대도 프랑스군을 상대로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6] 함포지원을 계산했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정족산성에서 공격 가능한 유일한 문은 함포가 닿지 않는 각도였다...[7] 사진 출처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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