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최근 수정 시각:

파일:나무위키+유도.png   현대 한국군과 북한군의 전쟁 시나리오에 대해서는 한국군 vs 북한군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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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스 데스포의 Flight of refugees accross wrecked bridge[1], 1950년 12월 4일 촬영했으며 이 사진으로 맥스 데스포는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6.25 전쟁
영어 : Korean War
중국어 (간체/번체) : 朝鲜战争/朝鮮戰爭

파일:attachment/korea_war.gif
저작자: Roke(2006.06.05.)

시기

1950.6.25 ~ 현재 (휴전일: 1953.7.27)

장소

제주도를 제외한 한반도 전역

원인

김일성적화통일 야욕에 의한 북한의 남침

교전국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px-Flag_of_the_United_Nations.svg.png 유엔군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px-Flag_of_South_Korea_%281984-1997%29.svg.png 대한민국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px-US_flag_48_stars.svg.png 미합중국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px-Flag_of_the_United_Kingdom.svg.png 영국
파일:external/77b134537c60bcb8847ec33292ae8dfd316fa68645f6e1015f58e0c19bdf6c23.png 터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3px-Canadian_Red_Ensign_1921-1957.svg.png 캐나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3px-Flag_of_Australia.svg.png 오스트레일리아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3px-Flag_of_New_Zealand.svg.png 뉴질랜드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3px-Flag_of_Ethiopia_%281897-1936%3B_1941-1974%29.svg.png 에티오피아 제국
파일:external/98890efeabbad8be83d275626abe9564f029bf3c36b51a379135520b7e268826.png 프랑스 제4공화국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px-Flag_of_Belgium_%28civil%29.svg.png 벨기에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px-Flag_of_the_Netherlands.svg.png 네덜란드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px-Flag_of_Luxembourg.svg.png 룩셈부르크
파일:external/e6789d88b8674abe92fad8ba2ec74ce530406fa2f8527dfe1e8c3506d1882e97.png 태국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px-Flag_of_the_Philippines.svg.png 필리핀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px-State_Flag_of_Greece_%281863-1924_and_1935-1970%29.svg.png 그리스 왕국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px-Flag_of_South_Africa_%281928-1994%29.svg.png 남아프리카 연방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px-Flag_of_Colombia.svg.png 콜롬비아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14px-Hammer_and_sickle.svg.png 공산군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px-Flag_of_North_Korea.svg.png 북한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px-Flag_of_the_Soviet_Union_%281923-1955%29.svg.png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파일:external/3ac35d4e38440b244517e36ed521a90301633948734b3fb185f005214ebf73f3.png 중화인민공화국

의료 지원국

파일:external/2011b3de5a8d1924a856252114e6337d4512a9c4077797c913c7db207ffbed59.png 스웨덴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Flag_of_Norway.svg.png 노르웨이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70px-Flag_of_Denmark.svg.png 덴마크
파일:external/2eeeb3e0d201e5bcd8d01c1a525988228e6b68a0dd1b590eac32b4b5cd455260.png 이탈리아[2]
파일:external/de8631a07b15862f0b73874828227a0eea6cc7bffcbf6a0a1edbaab1cd275a9c.png 인도 공화국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20px-Flag_of_East_Germany.svg.png 독일 민주 공화국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Flag_of_Romania_%281965-1989%29.svg.png 루마니아 인민 공화국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Flag_of_Hungary_%281957-1989%3B_unofficial%29.png 헝가리 인민 공화국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900px-Flag_of_the_Czech_Republic.svg.png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
파일:external/7bdcffbeeb765053ea54f87a7ee6259eb840e0e8a094752a41112fa2ca2abc60.png 폴란드 인민 공화국

물자 및 기타 지원국

일본
파일:external/6f5fe4695f9a88498194909818952b8fe0a9f2a48abc5389fff8df8fce450335.png 과테말라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Flag_of_Israel.svg.png 이스라엘
파일:attachment/ARG_Flag.jpg 아르헨티나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Flag_of_Uruguay.svg.png 우루과이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Flag_of_Costa_Rica_%28state%29.svg.png 코스타리카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Flag_of_Mexico.svg.png 멕시코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750px-Flag_of_the_Dominican_Republic.svg.png 도미니카 공화국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60px-Flag_of_Venezuela_%28state%29.svg.png 베네수엘라
파일:external/www.worldstatesmen.org/ir.gif 이란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Flag_of_Germany.svg.png 독일 연방 공화국
파일:external/ce1acf9c37c20c0c55bbea529356238555e22e6fe2af922e2673bf488bbdad98.png 라이베리아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750px-Flag_of_Lebanon.svg.png 레바논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Flag_of_Liechtenstein.svg.png 리히텐슈타인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750px-Flag_of_Monaco.svg.png 모나코
파일:external/66e220cf413cf745c945ffcb8c755978bbad87c96658752653313a4e4fcdf5f2.png 교황청
파일:external/06ea9181a644d9d3ca20493902a83044e93d4f1f159459720f144751edb87aca.png 남베트남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40px-Flag_of_Saudi_Arabia_%281938_to_1973%29.svg.png 사우디아라비아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80px-Flag_of_Switzerland.svg.png 스위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40px-Flag_of_Spain_%281945_-_1977%29.svg.png 스페인국[3]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20px-Flag_of_Cuba.svg.png 쿠바[4]
파일:external/www.worldstatesmen.org/mm-73.gif 버마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40px-Flag_of_the_Republic_of_China.svg.png 중화민국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Flag_of_Syria_%281932-1958%3B_1961-1963%29.svg.png 시리아 이집트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40px-Flag_of_Indonesia.svg.png 인도네시아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Flag_of_Hungary_%281957-1989%3B_unofficial%29.png 헝가리 인민 공화국[5]

지원 의사 표명국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Flag_of_Nicaragua.svg.png 니카라과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40px-Flag_of_Bolivia.svg.png볼리비아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40px-Flag_of_Brazil_%281889-1960%29.svg.png 브라질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20px-Flag_of_the_People%27s_Republic_of_Mongolia_%281940-1992%29.svg.png 몽골 인민 공화국
파일:external/de8631a07b15862f0b73874828227a0eea6cc7bffcbf6a0a1edbaab1cd275a9c.png 인도 공화국

지휘관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px-Flag_of_South_Korea_%281984-1997%29.svg.png 이승만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px-US_flag_48_stars.svg.png 해리 S. 트루먼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px-US_flag_48_stars.svg.png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px-Flag_of_the_United_Kingdom.svg.png 윈스턴 처칠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px-Flag_of_the_United_Kingdom.svg.png 클레멘트 애틀리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px-Flag_of_the_United_Nations.svg.pn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px-US_flag_48_stars.svg.png 더글라스 맥아더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px-Flag_of_the_United_Nations.svg.pn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px-US_flag_48_stars.svg.png 매튜 B. 리지웨이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px-Flag_of_the_United_Nations.svg.pn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px-US_flag_48_stars.svg.png 월튼 워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px-Flag_of_the_United_Nations.svg.pn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px-US_flag_48_stars.svg.png 제임스 밴 플리트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px-Flag_of_South_Korea_%281984-1997%29.svg.png 신성모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px-Flag_of_South_Korea_%281984-1997%29.svg.png 백선엽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px-Flag_of_South_Korea_%281984-1997%29.svg.png 김종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px-Flag_of_South_Korea_%281984-1997%29.svg.png 채병덕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px-Flag_of_South_Korea_%281984-1997%29.svg.png 조성열
정일권
파일:external/77b134537c60bcb8847ec33292ae8dfd316fa68645f6e1015f58e0c19bdf6c23.png 타흐신 야즈즈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px-Flag_of_North_Korea.svg.png 김일성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px-Flag_of_North_Korea.svg.png 박헌영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px-Flag_of_North_Korea.svg.png 최용건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px-Flag_of_North_Korea.svg.png 김두봉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px-Flag_of_North_Korea.svg.png 남일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px-Flag_of_North_Korea.svg.png 김책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px-Flag_of_North_Korea.svg.png 김광협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px-Flag_of_the_Soviet_Union_%281923-1955%29.svg.png 이오시프 스탈린
파일:external/3ac35d4e38440b244517e36ed521a90301633948734b3fb185f005214ebf73f3.png 마오쩌둥
파일:external/3ac35d4e38440b244517e36ed521a90301633948734b3fb185f005214ebf73f3.png 펑더화이
파일:external/3ac35d4e38440b244517e36ed521a90301633948734b3fb185f005214ebf73f3.png 쑹스룬

결과

휴전[6]

영향

수많은 사상자, 이산가족의 발생
북한에서의 남로당 계열의 숙청
주한미군의 대한민국 주둔

참전 병력

최소 92만 명[7]+전투협조 병력

최대 200만여 명

인적 피해

군인 26만 명[8],
민간인 99만 명 추정[9]
일부 민간인이 납북당하거나 월북

군인과 민간인을
합쳐 최소 250만여 명[10]
수백만 명의 민간인이 월남함

물적 피해

공업기반의 절반,
30억달러 또는 국부의 1/4[11]

전력의 74%, 연료 공업 89%,
화학공업의 70%[12]


1. 개요2. 명칭3. 전쟁 발발
3.1. 침략을 주도한 전쟁범죄자3.2. 용어
3.2.1. 북한의 남침 증거
3.2.1.1. 스탈린 배후 조종설3.2.1.2. 스탈린미국개입유도설3.2.1.3. 6.25 전쟁이 발발한 시간
3.2.2. 남침유도설?
3.3. 전쟁 전야
4. 전쟁의 전개5. 미군의 참전과 역할6. 전쟁의 영향7. 전쟁에 대한 인식
7.1. 명칭에 관하여
7.1.1. 미국의 '잊혀진 전쟁'(The Forgotten War)7.1.2. 내전이다.7.1.3. 국제전이다.
7.2. 주한UN군의 참전과 국제적 인식7.3. 유엔과 국제 세계의 시각 및 활동7.4. 북침이 아닌 남침이다7.5. 중공과 6.25 전쟁7.6. 6.25 전쟁 10대 미스테리7.7. 독도와 일본7.8. 유럽 지성계의 반응
8. 관련 기록9. 전쟁범죄10. 6.25 전쟁 결과의 대체역사
10.1. 완전 적화통일10.2. 제주도로의 정부 이전10.3. 현재보다 남쪽에서 휴전선이 맺어졌을 경우10.4. 38선으로 원상복구할 경우10.5. 현재보다 북쪽에서 휴전선이 맺어졌을 경우10.6. 북진통일 성공
11. 기타12. 다룬 책
12.1. 역사학계에서12.2. 군사적 자료12.3. 다큐멘터리
13. 관련 작품
13.1. 문학13.2. 영화13.3. 드라마13.4. 뮤지컬13.5. 만화13.6. PC게임13.7. Mobile 게임13.8. 노래
14. 참고 문서15. 어록




1. 개요[편집]

갈라진 한반도

냉전의 시작을 알린, 한반도 사상 최대이자 최악의 비극

1950년 6월 25일한반도 북부를 통치하던 북한이 선전포고 없이 기습적으로 한반도 남부를 통치하던 대한민국을 침공하여 발발한 전쟁으로, 1953년 7월 27일 부로 휴전되어 현재까지 종결되지 않은 전쟁이다.

2. 명칭[편집]

이 전쟁은 한국전쟁이라는 명칭으로도 불리는데, 이는 주로 영미권에서 이 전쟁을 가리키는 명칭인 Korean War를 번역한 것이다. 대한민국에서는 1973년 제정한 각종 기념일에 관한 규정에서 6·25 사변일(六二五事變日)을 공식 명칭으로 써왔으나, 2014년 3월 24일 개정으로 6·25 전쟁일이라고 규정한다. 대한민국의 국정 국사 교과서에는 6·25 전쟁으로 표기했는데, 이는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을 따른 것이며, 대한민국에서는 공식적으로 한국 전쟁보다 6·25 전쟁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반면 학술용어로는 한국전쟁(Korean War)라는 용어도 쓰인다. 6.25는 이 전쟁의 배경과 과정, 그 결과 및 여파를 아우르기 어려운 단어라는 의견이 있다. 또는 경인공란(庚寅共亂)이라고 불린다. 6.25라고 부르는 것은 전쟁이 6월 25일 그날 시작되었다는 의미밖에 안되어 여러 복잡한 사건의 추이와 전개과정을 포괄하는데 적절치 않은 용어라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6.25라는 말을 6월 25일 이전에 있었던 일련의 흐름을 축소시키고 우리측에 유리한 입장을 부각하기 위해 정부 권력차원에서 정착시켰을 것이라 추정하기도 한다. 어쨌거나, 한국은 해방후 오랜기간 이 전쟁을 6.25라고 불렀고 많은 논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6.25라는 말이 자주 쓰이며, 현재는 6.25를 혼용해서 쓰이고도 있다. 어르신들은 6.25 사변이 입에 붙어 있어 6.25 사변이라 부르고 있다.

하지만 한국전쟁이라는 용어에 대해서 반대하는 의견도 있다. 한국전쟁이라는 용어가 학계에 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무렵부터다. 브루스 커밍스의 저서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이라는 책이 운동권 학생들에게 크게 반향을 얻으면서부터다. 해외에서는 'Korean War'라는 표현을 쓰지만 자기네 나라 전쟁을 타의적 표현을 빌려쓰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는 지적이 있다.

또한 Korean이 북한에서는 조선으로 해석되기 때문에 한국전쟁도 객관적인 용어라고 보기 힘들다는 지적도 있다. 조선과 한국은 엄연히 다른 정체성, 인식, 역사성을 내포하고 있는데 Korean을 한국으로 번역하는 것은 그런 역사적 맥락을 간과한 표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당대에 사용하지도 않은 용어를 굳이 쓸 필요가 있냐는 비판도 제기된다. 사건의 성격을 왜곡하는 것이 아니라면 당대에 쓰인 명칭을 주로 존중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그것 또한 역사적 산물이라는 것이다. 또한 한국의 역사에서 벌어진 전쟁이 비단 6.25전쟁만이 아닌데 한국전쟁이라고 부르는 것은 혼동이 있을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이를테면, 6.10만세운동, 3.1운동, 5.18 광주민주화운동 등이 그런 사례이다. 6.25가 그 사건의 성격을 포괄하지 못하는 것이라면 다른 사건들의 명칭도 바꾸어야 하냐는 문제에 봉착할 수도 있다. 유럽에서도 2월 혁명이나 7월 혁명처럼 그 사건이 발생한 시기를 기점으로 사건의 명칭을 부여한 예도 존재한다. 따라서 6.25전쟁이라고 쓰는 것이 문제 없다는 것이다. 물론 어떤 역사용어를 쓰느냐 하는 것도 그 사건을 바라보는 이에 따라서 다양할 수 있다. 그것 역시도 하나의 해석의 산물이자, 사관을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국사편찬위원회와 국방부 지정 공식용어는 '6.25전쟁'이며, 정부에서도 6.25전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6.25 동란(動亂)이란 표현도 있다.

당시 미국 의회에서는 군사적인 충돌의 의미를 가진 Conflict라는 단어를 사용해 6.25전쟁을 지칭했다. 6.25 전쟁이 대규모 국제 전쟁으로 비치면 안된다고 봤던 트루먼과 미 의원들에 의해 War라는 단어의 사용이 사실상 금기시 되었다. 6.25 전쟁이 World War III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에 공산권 국가와 서방의 대중들에게 6.25전쟁이 '전쟁이지만 전쟁 같이 느껴지지 않도록' 이를 축소시켜 지칭한 것이었다.(당시엔 Korean Conflict라 불렸다.) 후에 6.25 전쟁이 정치인들의 손에서 역사가들의 손으로 넘겨질 때 쯤, War라는 단어가 학계에서 보편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중공은 역사가들의 손을 거치면서 항미원조전쟁이라는 말이 조선전쟁이라는 말로 바뀌어 통용되었다.

소련에서는 지원에 소극적이었지만 중공군으로 위장을 한 파일럿들을 일부 보낸 바 있다. 이 파일럿들의 통신이 감청되기도 했지만 소련이 개입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될 경우 확전을 우려한 미군과 UN군에서는 이를 일부러 무시했다. 6.25전쟁이 무조건 한반도 내의 국지전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생각을 가진 당시 미 대통령 트루먼 입장에서는 자꾸 전쟁 스케일을 키울려고 하는 맥아더가 굉장히 위험한 인물로 비춰졌다. 결국 트루먼에 의해 해임된 맥아더는 일단 전쟁 영웅으로 미국에 귀국하지만 이후 미 의회 상원위원회 청문 과정에서 그 진실이 까발려져 명예를 실추당한다. 6.25 전쟁이 제3차 세계 대전으로 확전되면 안 된다고 봤던 사람은 트루먼 뿐만이 아니었고 공개된 스탈린의 서필을 통해 스탈린 역시 6.25 전쟁이 제3차 세계 대전으로 확전 될까봐 크나큰 내적 괴로움을 겪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양쪽 모두 확전의 두려움에 자기 나름대로 어느정도의 전쟁 억지력을 확보해 전쟁이 커지는 것을 막았다.

1980년대까지 대한민국 제1~제5공화국에서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의 정권에서 국시로 삼았던 반공, 북한에서 김일성이 전후 독재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정적을 제거하는 명분 역시 반동분자를 없애야 한다는 것이라는 것에서 국가운영과 국민여론 및 의식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군사정권 당시 한국의 지도층과 오늘날까지 이어가는 북한 수괴층의 통치를 합리화하는 명분으로 오용됐다.

제2차 세계 대전 종결과 함께 전개된 냉전 구도가 열전(熱戰)으로 폭발하게 된 거의 최초의 사례로 꼽히며,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이었던 미국, 소련, 중국이 직간접적으로 전쟁을 벌인 사례이기도 하다. 또한 6.25 전쟁은 지금까지도 해외에서 한국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될 정도로 현대 한국에 대한 인식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사실 1949년 그리스 내전도 있긴 하다. 하지만 그리스 내전의 경우 미국과 영국, 소련의 암묵적인 합의로 그리스는 자유진영으로 유지시키기로 합의한 상황이라 소련과 공산권의 지원을 받지 못한 그리스 공산 게릴라들이 패배했다. 한편으로 일본이 중흥하고[13] 대만 섬에 유배된 중화민국이 살아나는 어부지리에도 영향을 주었다.

3. 전쟁 발발[편집]

굳이 끼워 맞추자면 저 상황은 애치슨 라인이 설정된 직후라고 보면 된다. 다만 스탈린은 저 그림 상의 상황과는 달리 김일성이 전쟁 일으키자는 땡깡을 48번이나 기각시켰다. 그러나 애치슨 라인을 알게 된 스탈린이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거라 생각하고 결국 김일성의 남침을 허락하는 상황으로 끼워맞출 수도 있다. 그러나 이미 과거 소련의 비밀공문서가 공개된 후 애치슨 라인의 설정이 6.25 전쟁 발발에 끼친 영향이 미미한 것이 밝혀진 시점에서 위와 같은 기존의 가설들은 모두 유보되고 있는 실정이다.

실제로는 해방 이후 남북 간에 크고 작은 충돌이 벌어지고 있었다. 전쟁은 6월 25일 갑자기 뻥 하고 터진 것이 아니라, 이전에 이미 교전 상태였다. 나이드신 분들은 45년 해방 후부터 전쟁 전까지 있던 여러 소란을 기억한다. 또한 당시에는 이러한 소란으로 인해 최전방(경기도와 강원도)인근에 살던 사람들은 죽창으로 무장시키거나 군사훈련을 종종했다고 한다. 디테일한 부분에는 논란이 있으며 이 기간 동안의 문제는 이데올로기 또는 남북한 양쪽 정부의 기원 내지는 본질 문제와 결합되어 매우 혼탁하다. 얼마전까지 일부러 이러한 미묘한 부분은 연구자들이 회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군사정부 시절에는 아예 연구자들이 이런 미묘한 부분은 방치했다. 말 잘못했다가 끌려갔기 때문이다.

3.1. 침략을 주도한 전쟁범죄자[편집]

  • 김일성 : 북한 영토와 인민 전체를 도박판에 올인해 놓고, 그 실책마저 박헌영을 비롯한 정적에게 뒤집어씌워 자신의 권력 공고화에 써먹은 자. 직책은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 수상

  • 박헌영 : 6.25전쟁의 시나리오를 제안했으며 전쟁을 일으키면 남로당 잔존 세력이 들고 일어날 것이라는 주장[14]으로 전쟁을 선동한 선동가. 직책은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 부수상 & 외무상

  • 테렌티 시티코프 : 소련군정 사령관을 역임했고, 김일성의 침략을 적극적으로 도운 인물

  • 이오시프 스탈린 : 스탈린이 김일성의 침략 요구를 거절한 것은 사실이나 최종적으로 침략을 승인해준 것은 스탈린이며 지원은 물론이고 침공 계획까지 짜서 준 게 스탈린이었다.

  • 중공군 참여 관련

    • 마오쩌둥 : 마오쩌둥은 김일성을 적극적으로 도와주기로 했으며 이는 김일성이 스탈린을 설득하는데 영향을 준다.

    • 쑹스룬 : 마오쩌둥의 명령에 의해 김일성을 도와줬다.

3.2. 용어[편집]

현재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6.25 전쟁은 북한이 남한으로 침략하면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누구나 안다. 다만 한자어의 어감 문제로, 제대로 이해하고 있으면서도 '남침'이라는 용어만 북침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일반적인 한자어에서의 동서남북 방위는 부사어로 해석된다. 즉 '남침'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침략했다'라는 의미로, 방위가 들어간 다른 한자어인 '남하, 북상, 동진, 서정' 역시 '남쪽으로 내려감, 북쪽으로 올라감, 동쪽으로 나아감, 서쪽으로 정벌함'으로 해석한다. '효종 시기의 북벌론'이나 '제갈량의 북벌'에서의 '북벌' 역시 마찬가지 경우로, 이 단어들에서의 '북'은 '북쪽으로의 정벌'이라는 풀이에서 부사어 역할을 한다.

사실 이 부분이 극명하게 헷갈리는 일상 생활에서 방위가 들어간 한자어를 많이 쓰지 않는다는 점, 가장 많이 쓰는 예시가 바로 '바람'이라는 점 때문이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부는 바람이 북풍이다.

물론 한자어에는 부사어+서술어가 아니라 주어+서술어 구조인 단어도 적지 않기에, '북'을 주어로 삼아 '북쪽 침략함'으로 이해하여 '북침'이 옳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상당하다. 물론 이 경우에도 사실 관계를 오해한 것이 아니라, '북→남'이라는 침략 사실은 제대로 이해한 상태에서 단지 용어만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상기한 '북벌'을 주어+서술어로 이해할 경우 '(누군가를 향한) 북쪽의 정벌'이 되니 만큼 방위가 들어가는 일반적인 한자어에서는 그 방위를 부사어로 해석하는 게 좋다.

북침인가 남침인가는 중국어 문법에서도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다. 한자의 표현은 주술 구조인가 부술 구조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관습에 따른 해석 문제이기 때문이다. 과거 중국 문헌에서는 북침이라는 표현이 수없이 쓰였는데 이건 보통 북쪽이 남쪽을 침략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아닌 경우도 있다. 주어가 누구인지에 따라 북쪽을 침략했다라는 뜻으로도 쓰였다) 그런데 북벌이라는 표현은 북쪽을 정벌한다는 뜻으로 쓰이는 것으로 어떠한 이견도 없다. 즉 문법적 표현의 문제가 아니라 단어가 문장에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로 판단해야 하는것으로 이것을 문법적으로 받아들인 한국인들이 주술이니 부술이니 따지는것 자체가 외국인들이 한국어 문법을 가지고 갑론을박하는 우스운 모습과 다를바가 없다. 더 엄밀히 따지면 언어상 조사 기능적 문화권인 한국과 조사 형식적인 문화권인 중국의 언어적 충돌이다.

한자 고어는 문법적으로 완성 되지 않은채로 천년 넘도록 지속 되어 왔다. 그것을 메우는 역할을 한것은 해석상 관습(이 사람 이런뜻으로 썼을거야.) 에 의한 것으로 지금도 삼국시대나 고려시대 한국 문헌들을 둘러 싸고 해석 논란이 끊이지 않는 이유다.

파일:attachment/6.25 전쟁/20080610000838_0.jpg

세르비아어

한국어 번역

Туђу хумор
очигледна настава
КОРЕЈА
Сеул
МАНЏУРИЈА
Вот, како је извршена инвазија Северне Кореје.
("Вашингтон Пост")

외국 만평
명백한 설명
한국
서울
만주
보시오, 북한이 이렇게 침공당했단 말이오.
'워싱턴 포스트'

그 당시 같은 공산주의 국가[16]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 신문 '폴리티카'에서 실은 만평. 지도를 뒤집어 놓고 남침을 북침이라고 우기는 소련을 까고 있다.[17]

3.2.1. 북한의 남침 증거[편집]

2010년대까지 밝혀진 자료에 의하면, 정권 확립과 당시의 우세를 활용해 조기에 남한을 제압하려던 김일성과 공산 파르티잔 세력을 비롯한 남조선로동당 인맥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려던 박헌영의 주도로 전쟁이 일어났다는 것이 정설이다. 북한이나 남한의 극소수 세력은 북침이나 소련의 배후 조종설을 주장하기도 했으나, 소련 기밀문서의 공개 등으로 대부분 설득력을 잃었다. 그렇다고 소련과 중국이 전쟁의 원흉이 아니라는 뜻도 아니다. 애초에 소련, 중국이 개전 허가를 안 하고 지원을 안 해줬다면 6.25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북한의 주장을 제외하면 정말로 남한이 북한을 선공했다는 북침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문자 그대로 극소수에 불과하다. '북침설을 주장한다.'고 지목되는 학자들의 대부분은 반공 이데올로기로 인해 가려진 부분을 지적하는 것을 의도했던 것이 대부분이다. 대표적으로 지목되는 브루스 커밍스의 The Origin of Korean War에서도 6월 25일날 먼저 총공세를 펼친 것은 북한이 맞다고 서술하고 있다. 다만 그 이전에 38선 부근에서 서로 2 ~ 10㎞씩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는 국지전이 있었다는 사실을 국내 학계에선 최초로 도마 위에 올렸고, 6.25 전쟁은 그것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주장했을 뿐이다. 참고로 브루스 커밍스는 대표적인 수정주의 학자로, 미국 외교 기밀 문서가 공개되면서 그에 기반해서 냉전사를 해석하였다. 미국의 외교 기밀 문서들은 25년을 시한으로 공개되기 때문에 가능한 것.

그러나 국지전은 매우 소규모의 무력시위에 불과했다. 일단 규모 자체도 어떤 경우엔 분대급에 불과했고 보통 중대급, 커봐야 대대급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런 국지전이 6.25 전쟁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는 것이 학계의 결론이다. 굳이 6.25 전쟁과 국지전이 관련이 있다면 당시 교전 규모를 봤을 때 38선 부근의 국지전은 신생 북한군의 전투 경험 습득과 교리 시험을 위해 북한이 지속적으로 남한지역을 내습한 것이라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전면전 발발 이전부터 북한은 부단히 전쟁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1949년 쯤 가면 개성시시에서 북한군 부대가 박격포로 하도 공격을 해대는 지경에 주민들이 항의하는 수준까지 갔다고 한다. 그러니까 커밍스가 틀렸다.

북한군이 미리 전쟁을 준비했다는 가장 큰 증거는 남침 직후 수십~수백 킬로미터 수준의 작전기동을 했다는 것 자체다. 군필자들은 알겠지만 미리 계획을 세우고 충분한 준비를 해두지 않았다면 부대는 자기 주둔지를 함부로 떠날 수 없다. 게다가 개전 직후 전황을 보면 더 참담하다. 주성하 기자도 북한 학교에서 남한이 북침했다는 역사 교과서 내용을 배우면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어떻게 남한이 먼저 공격했는데 바로 쳐발리고 수도까지 순식간에 밀려버릴 수가 있냐는 문제였다.

그러나 커밍스의 연구는 해당 분야에 대한 극초기의 연구이므로 이는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21세기에 들어와서 전쟁 직전의 한국군은 물자와 장비가 부족하고 군사훈련도 제대로 안 되어 있어 전면전의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는 결론이 학계의 정설이다. 그저 물자와 장비, 병력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UN 한국위원회와 미국의 극심한 통제 속에서 전쟁 준비 같은 걸 생각할 수 있는 상황조차 되지 못했다. 이 당시 UN 한국위원회의 한국군 통제는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이었다. 하다 못해 소총 한 발도 한국위원회의 승인 없이 불출할 수 없었다. 특히 1990년대 공산권이 붕괴되면서 소련 측 외교문서가 공개되자 신전통주의적 해석이 지지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소련의 배후 조종설 또한 오해의 소지가 있다. 이 주장의 핵심은 북한 지도부는 아무런 기능을 하지 못했고, 소련 정부가 표면상 내세우는 꼭두각시에 불과했다는 것에 있다. 그러나 6.25 전쟁사와 관련된 연구 초기부터 6.25 전쟁 발발 이전에 북한에 대한 소련의 막대한 물자 공여와 장교 파견이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냉전 종결 이후 소련의 기밀 문서가 공개됨으로써 이것은 기정사실이 되었으나 이것이 과연 소련이 주도한 것인지는 의문점이 남는다. 김일성이 이전부터 마오쩌둥, 스탈린과 접촉한 징후가 보이기 때문. 즉 김일성이 공산권 거대 국가들에게 지원을 요청하고 공산권 국가들이 이를 들어준 모습이다.

스탈린은 김일성이 전쟁을 일으키고 싶어 안달하는데도 그걸 48번씩이나 거절했는데 김일성이 그치지 않고 애치슨 라인까지 들먹이며 요구를 하자 끝내 승인했다고 한다. 스탈린이 무슨 평화주의자라서 이 전쟁을 반대한 것이 아니라 전면전을 할 경우 제3차 세계 대전으로 일이 크게 번지는 것을 두려워한 것일 뿐이었다. 그리고 스탈린 개인은 소련의 현 전투력이 미국에게 많이 뒤쳐져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전투력 측면에서 비교하지 않더라도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미국이 입은 피해와 소련이 입은 피해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했다. 미국은 전체 인명 피해가 50만여 명이었던 데 비해 소련은 공식 집계만 2900만명이었고 거기에 공업 시설까지 대부분 파괴되었으며 경제까지 파탄 직전이었다는 것이어서 소련이 한참 불리한 것이 당연하다.)전면전을 반대한 것이었지만 김일성은 철딱서니없게도 이러한 국제정세는 무시하고 본인 사리사욕만 채우려고 스탈린에게 땡깡을 부린 것이었다.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보낸 친필 러시아어 서문

소련이 해체되면서 공개된 기밀 자료 중에 6.25 전쟁 당시 북한 주재 소련 대사이자 북한군 배속 소련군사고문단장인 라주바예프 장군이 당시 상황을 보고한 라주바예프 보고서에는 라주바예프 장군이 6.25 전쟁 중인 북한에 착임하게 된 과정과 그 이후 전쟁 전개 과정에 대한 분석이 실려 있다.

매우 생생한 묘사와 서술로 사료가치가 높고 더군다나 소련의 개입에 대해서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특히 라주바예프 중장이 착임하게 되는 1950년 10월 경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묘사는 소련의 한국전 개입을 확실하게 설명한다. 개전 당시인 6월 25일의 북한 주재 소련 대사는 스티코프 중장, 군사고문단장은 바실리예프 중장이었다.

스탈린은 제3차 세계 대전을 우려해 소련인 군사고문은 38선을 넘지 못하게 했다. 이것이 군사고문의 작전지도에 애로사항으로 작용했고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뒤집히자 스탈린은 현지에 파견된 소련 대사와 군사고문단장의 무능에 격노하여 이 둘을 교체하고 라주바예프 중장을 파견해 위의 두 직위를 겸직하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심지어 소련은 한때 제2차 세계 대전의 영웅 로디온 말리노프스키 원수를 파견해 조선인민군을 지휘하게 하는 문제를 심각하게 검토했다고 한다.

심지어 한국 전쟁 초기에 한국군에 투항한 북한군 장교출신자는 2010년 경 방영된 KBS의 한국전쟁에서 "6월 25일 개전을 앞두고 소련군 고문이 훈련담당 고문에서 작전담당 고문으로 싹 교체되는 걸 보고 전쟁을 직감했다" 라고 증언한 바도 있다. 이 사람은 인민군 6사단 출신으로 당시 6사단은 개전을 앞두고 중국 팔로군조선인 부대에서 조선인민군으로 일괄 이관된 인원으로 구성된 조선인민군의 정예부대였다.

전쟁 당시 신의주에서 교사를 지냈던 성문종합영어의 저자 송성문6.25 전쟁이 북한 지도부에 의해 1947년부터 주도면밀하게 계획된 남침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결론은 정말로 북한은 가만히 있는데 남한이 먼저 공격했다거나, 북한은 그럴 의지가 없는데 소련이 시켜서 한 짓이라고 주장하는 학설이 전혀 없지는 않지만 퇴출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는 것이다. 다만 북한을 자주성이 없는 정권이라고 까기 위해 소련이 시켜서 한 것이라는 주장을 인용하는 경우도 있다. 결국 이래도 까고 저래도 까는 것.

같은 공산주의 국가에서도 한국군의 북침설을 잘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1960년대 중국에서도 북한의 남침으로 교과서 수정이 이루어졌다. '남침 자체는 빼도박도 못하는 진실이기 때문이다. 대신 전쟁 주체 및 과정을 중국에 유리하게 해석하여 중국의 개입을 정당화하고 있다.

북한 지도부는 현재도 북침설을 주장하며 미국의 조종을 받는 한국군과 미군이 북침했다는 주장으로 일관하지만 앞에서 봤듯이 실제로는 중국 및 소련의 지원을 받는 북한이 남침을 한 것이다. 실제로 전쟁 발발 직전에 남한의 미국의 군사 고문단은 철수 중이었지만 소련은 북한에 영관급 장교를 군사고문단으로 파견했다. 중국과 러시아에서 기밀 해제된 문서들은 아예 정확한 날짜와 과정을 열거하며 남침 준비를 위한 준비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3.2.1.1. 스탈린 배후 조종설[편집]

스탈린이 배후에서 김일성을 조종해 전쟁을 일으키고, 그를 통해서 유럽에서 미국의 압박을 분산시키려 하였다는 이론이다. 즉, 6.25 전쟁은 스탈린의 소련팽창정책의 일환으로 미국의 봉쇄정책을 타계하기 위한 하나의 방안으로 기획되었다는 것이다. 국내학자로는 김영호 서울대 교수가 있다. 이 이론을 지지하는 이유는 먼저 스탈린과 김일성의 관계에 주목한다.

스탈린은 공산혁명의 1세대이고, 소련의 근대화의 상징이면서, 대학살을 감행했고, 제2차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지도자이다. 그에 비해 김일성은 이제 막 북한이라는 한 지역의 지도자가 된 자였고, 그것도 소련군의 힘으로 된 것이었다. 이 둘의 관계는 달린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스탈린은 상위단위이고 김일성은 하위단위에 속한다. 쉽게 말하면 스탈린은 대통령이고 김일성은 한 부처 국장정도라는 것이다. 그 국장이 좋은 기획안을 작성해서 보고했고, 대통령이 나중에 그것을 승인하였고, 기획안을 집행하였다. 그런데 그 결과가 최악으로 귀결됬다면 그 책임은 누가 지어야 하는가? 기획안을 제출한 부장인가? 아니면 그것을 승인한 대통령인가? 정책의 실패는 결국 그것을 승인한 대통령에게 있는 것이다.

스탈린 배후 조종설은 이러한 관점에서 6.25 전쟁을 바라보고 있다. 즉, 전쟁을 기획입안한 것에 김일성이 주도했다는 것은 의심할 바가 없지만 그 전쟁을 승인한 것은 공산사회의 최고정점인 소련이었고, 당연히 소련이 승인하였으니, 최고결정권자로써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북한이 소련의 하위단위였다는 것은 김일성이 무려 48번이나 소련을 찾아가 전쟁승인허가를 받으려 했다는 점이다. 즉, 북한은 소련의 승인없이 자국의 군대를 동원할 수도 없는 존재였고, 당연히 공산사회라는 거대한 세계질서에 하부구조로써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전쟁이 발발하게 된 최종책임은 스탈린에게 있고, 스탈린이 배후에서 조종했다는 것이다.

특히 소련은 이 전쟁을 고착화시켜서 미국의 시선을 아시아에 붙잡아 두려고 하였고, 그래서 일부러 유엔 안보리 불참하여 유엔군이 결성되는데 아무런 방해를 하지 않았고, 또한 북한에 대한 적정한 수준의 군사적 지원과 원조를 통해 유엔군이 쉽게 전쟁을 끝맺지 못하게 하였다. 공군지원도 적정수준에서 운용하였고, 특히 38선 이남에 대한 공습을 최소화하였다. 그래서 일부러 T-44, T-54, IS-3, IS-4 같은 소련제 최신예 전차들을 북한과 중공군에 전혀 제공하지 않고, 2차세계대전에 쓰던 구식무기를 지원하였다는 것이다.

스탈린은 국제적 정세를 살피다가 미국의 시선을 분산시키고 동유럽에서의 확장을 도모하기 위하여 6.25 전쟁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러시아제국시절부터 소련의 대외정책은 유럽중심정책이고, 유럽에서의 영향력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동유럽에서의 미국의 압박이 강화되고, 베를린 봉쇄의 실패와 런던에 핵무기가 배치하겠다는 미국의 선전에 대해 대응하기 위해서 한국에 전쟁을 일으켜 유럽에 집중된 미국의 시선을 분산하기 위한 고도의 기획전쟁이라는 것이 스탈린 배후 조종설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론에 대한 반박도 만만치 않다. 먼저, 기획된 전쟁이라면 왜 소련이 먼저 전쟁을 기획하지 않았고, 왜 48번이나 거부의사를 밝혔다는 것인가? 둘째, 전쟁보다는 국지전을 확대하는 것이 미국의 시선을 잡아두는 것이 더 효율적이지 않는가 하는 문제이다. 전쟁은 당연히 막대한 물자가 소비된다. 그에 비해 국지전은 적은 비용으로 사회불안을 가중시킬 수 있고, 당연히 전쟁발발위험으로인해 미국도 시선을 잡아둘 수 있다. 전쟁위기도 충분히 미국의 시선을 잡을 수 있다. 실제로 베를린봉쇄는 전쟁위기까지 이야기되었고, 이에 미국은 런던에 핵무기를 배치한다는 신문선전과 항공기를 통한 대규모 공중보급을 통해 소련을 압박하기도 했다. 셋째, 소련의 소극적인 행보이다. 6.25 전쟁 이전부터 이후까지 소련의 행보는 상당히 소극적이었다는 것이다. 무기보급도 사실 신형전차를 공급하는 것이 그렇게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양해각서를 체결하고 소련이 북한의 국방강화를 위해 무기를 지원한다는 식으로 무기를 지원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실제로 T-34전차도 이러한 방식으로 공급하였다.

문제는 스탈린 배후설이 타당하다는 근거도, 잘못되었다는 근거도 부족한 상황이다. 구소련군사외교문서는 러시아정부가 취사선택하여 공개된 자료이다. 당연히 자료선택과정에서 러시아에 불리한 것을 삭제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과정에서 구소련군사외교문서만을 근거로 결론을 내리기는 부족하다. 즉, 스탈린 배후설은 아직 논쟁 중인 이론이고 단순히 이 이론이 폐기되었다고 하기에는 아직은 생명력이 있는 이론이라는 것이다.

3.2.1.2. 스탈린미국개입유도설[편집]

2000년 이후 스탈린과 고트발트의 편지내용이 담겨있는데 이 편지 내용에 따라 미국개입유도설이 제기됐다. 자세한 건 해당 문서 참조.

3.2.1.3. 6.25 전쟁이 발발한 시간[편집]

북한군이 1950년 6월 25일 오전 4시 경에 38선을 넘은 이후다. 전략적으로 본다면 새벽에 상대 진영을 공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는 초보들도 알 수 있는 사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1950년 6월 25일이 '일요일'이라는 것이다.

당시 군에서 복무했던 분의 증언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군 체계는 미국을 그대로 모방하고 있었다. 그래서 당시 국군도 토요일 오전이 되면 필요한 최소한의 인원을 제외한 전원이 외박을 나가 일요일 오후에 들어왔다.

즉, 북한군이 38선을 넘은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오전 4시 경에 우리 군은 각자의 집에서 취침중이었다.

이 전쟁이 시작하기 불과 1시간 전 1950 브라질 월드컵이 개막했다.

3.2.2. 남침유도설?[편집]

단, 북한이 쳐들어올 걸 뻔히 알면서도 미국에서 수수방관했다는 음모론은 존재한다. 남한이 북한을 공격했던 몽금포 전투가 있던걸 보면 아마 이것 때문으로 보인다. 일명 남침유도설로, 2차대전 중 돈을 신나게 빨았던 미국의 군수산업이 종전이 되자 만든 물건 어디 써먹을 데 없나 걱정이었는데 김일성이가 뻘짓하는 게 빤히 보이니 낚싯줄을 드리웠다는 것이 그 골자다.

당시 이승만 정권의 군비 군수 확장 요청에도 미군은 거절로 일관했고[18]이에 대해서는 북진을 공공연히 주장한 이승만의 탓이 없지 않다. 남한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통일을 시도하면 소련과의 전면전이 불가피할 것이라 판단한 미국 정부는 이승만의 호전적인 태도에 응해줄 수 없었다.

그리고 애초에 한국은 미국의 주요 관심사도 아니었고 미국 정부와 이승만은 사이가 안 좋았다. 또한 애치슨 라인에서도 한반도를 제외함으로써 확인사살까지 했다.

이걸 밀고 들어가서 "북한은 미국의 음모에 휘말린 또 하나의 희생자일 뿐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이는 마치 제2차 세계대전도 나치 독일의 책임이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의 음모에 히틀러가 휘말렸을 뿐이라는 주장과 같다. 불공평한 베르사유 조약이 2차대전의 가장 큰 원인인건 사실이다.

더군다나 만약에 남침유도설이 맞다면 한국군이 박살나는 거야 그렇다 쳐도 남침을 유도해놓고 요격에 나선 미군 역시 투입하는 족족 박살이 난데다 이후에도 삽질을 거듭한 이유가 무엇인가를 설명해야 한다. 만약 진짜로 남침을 유도했다면 로켓포 한기로 들려보내는 뻘짓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특히 전선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전쟁 초기에는 미군 병사들도 제대로 된 훈련을 받지 못해 한국에 보내지는 족족 총알받이로 내몰려 무더기로 죽어나갔으며, 개전 초 미군이 북한군의 공격에 연이어 패한 데는 이러한 병력의 자질 문제도 있다. 게다가 군수산업을 돌릴 큰 시장을 미국이 원했다면 차라리 중국의 국공내전을 장기화하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실례로 미국은 장제스의 군사적 도움요청을 거절했다.

게다가 요격에 나섰다는게 겨우 1개 대대, 그것도 2개 중대로 이루어진, 대대원 540명에 장교숫자는 겨우 15명 안팎 정도밖에 안되는 찰스 스미스 대대 요거 하나밖에 없었는데 이게 쳐발리고 나서야 윌리엄 딘 장군의 미 24사단이 나섰다. 남침을 유도해 놓고서 남침한 북한군을 때려잡는다는 게 1개 대대밖에 안된다면 남침유도 자체가 말이 안된다.

더불어 소련의 비밀문서가 공개되면서 남침유도설은 완전히 박살나고 말았다. 최근에도 남침유도설을 정설로 주장하는 서적이 나오곤 하지만 순전히 책을 팔아먹기 위한 수작일 뿐이다. 일례로 남침유도설을 정론으로 내세운 <한국전쟁의 수수께끼>의 경우 6.25 전쟁 50주년을 노리고 출판했다가 반응이 시들하자 10년 후에 6.25 전쟁 60주년 기념으로 <6.25 미스터리>라는 제목으로 내용을 살짝만 바꾸어 신간으로 속여 출판했다. 저자 자체가 이글루스에 스스로 만점 먹이면서 완벽한 책이라고 홍보하다가 왕창 까이고도 계속 남침유도설이 만고의 진리임을 전파하는 걸 보면 정말 책 팔고 싶은가 보다.

3.3. 전쟁 전야[편집]

전쟁 직전 남북한 병력 상황 비교 (단위 : 명)

육군 소계

육군 전투 병력

지원 • 특수 병력

해군

공군

국군

103,827

94,974

67,416(8개 사단•22개 연대)

27,558

6,956

1,897

인민군

201,050

182,680

120,860(10개 사단•30개 연대)

61,820

15,570

2,800


6.25전쟁 관련 문서 공개 이전까지는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 미,영,소 3국 수뇌가 38선을 경계로 신탁통치안을 합의했다고 여겼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문서번호 (319-ABC File 1942-1948, NO.387), 케네디 정부 시절 국무장관을 지낸, 당시 정책과장補 딘 러스크 (Dean Rusk)의 냉전비망록 (내가 본 대로?)에 따르면 38선은 1945년 8월 10일 일본이 항복 의사를 표명한 당일 자정 무렵 소련이 한반도 전역을 점령하려 하자 전쟁부 전략정책단 정책과장 본스틸과 함께 급히 그은 군사적 저지선이었다. 소련도 미국의 의견을 인정하고 38선에서 진군을 멈췄다. 이를 군사적 편의론이라 한다.[19]

하지만, 남북한 모두 남북 분단이 가시화된 시점부터 상대 지역을 '미수복 영토'로 보고 북한에서는 '북한을 먼저 공산주의화시켜 민주 기지로 삼은 뒤 남한을 점령해 공산주의화시킨다'는 민주 기지론을, 남한에서는 이승만 정권이 주장했던 북진 통일론을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남한의 북진 통일론은 진정성이 있었는지, 그저 반공 이데올로기 조성을 위한 것이 아닌지에 대해 많은 의심을 받고 있다. 게다가 이를 근거로 무기와 군사적 보조를 요구하는 이승만의 요구는 미국에게 그대로 묵살당했고, 당시 남한의 경제력은 사야할 무기도 제대로 못 사오는 등 형편없었다.

전차만 해도 한국군은 이미 소련에서 북한에 전차를 지원한 사실을 파악하고 전차의 도입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미국 측은 한국군이 전차를 보유할 경우 이를 이용해 북진을 추진할 가능성을 북한이 남침할 가능성보다 훨씬 높게 보았다. 어처구니 없게도 보이지만 그럴 가능성이 없지는 않았다. 미군이 남북전쟁 때 수준이라고 폄하한 한국군의 전력이 한때 인민군보다 강했던 적이 있었던 것이다. 실제 인민군의 무력이 우리가 아는 야크기와 전차 242대 로 증가한 것은 1949년 말에 들어서였다. 김일성이 무기 값으로 금괴를 보내기 전까지 스탈린이 꿈쩍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무튼 이때부터 북한군도 본격적으로 전쟁 준비에 들어갔다. 미국도 이에 대한 첩보를 입수하고 한국군에 전차와 전투기를 지원하는 계획을 세워놓았지만 계획을 실행하기 전에 전쟁이 터져버렸다.

물론 한반도의 지형적 요건상 전차의 활용도가 높지 않고 한국군에게 지원한 바주카나 대전차지뢰 정도로도 충분히 대응이 가능할 것이라는 판단도 크게 작용하긴 했다. 문제는 사실 근거리에선 해 볼만 하는데 실탄 연습의 부족과 미 군사고문단의 숙련된 대전차병과 교관의 부재로 인한 교리 미숙 등도 한 몫 제대로 했다.

당시 남한에는 전차가 0대, 전투기도 0대로 연습기만 10여 대가 있었던 반면 북한은 소련제 T-34 242대와 전투기 170여대를 보유한 상태이다. 당연히 김일성으로서는 적화통일의 구미가 당기는 상황이었다. 중국 대륙 내에 있던 일본 전차라도 소유하고 있던 중국 국민당과는 달리, 미국은 한반도와 제주도에 있는 모든 일본 전차를 태워서 폐기했다.

북한 내부에서는 서서히 김일성에게 정치적인 힘이 기울어가고 있었다. 연안파 세력은 국공내전에 실제로 참전 중인데다가 소수 조선의용군이나마 입성하다가 소련에게 무장 해제를 당하는 등 북한 내에서 입지를 넓히기에 힘이 달렸고, 소련파 또한 행정가로서는 뛰어났지만 소련에서 태어난 한인 2, 3세로 구성되어 북한 내에 기반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 결과 두 세력은 김일성파에게 협력하는 식으로 정권에 참여해야 했다. 남조선노동당 세력은 활동의 연혁이 오래되어 지지 폭은 넓었으나 말 그대로 남한에서 쫓겨온 식이라 실질적으로 정치적 입지가 좁았다.

김일성은 서서히 이들을 압박해 나갔고, 그 결과 박헌영은 "우리가 남침을 행한다면 남한 해방을 원하는 빨치산 10만 명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호언장담했지만, 1994년 공개된 북한-소련 외교문서에 의하면 김일성은 이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며 남로당 봉기설은 접었다. 출처는 KBS 역사스페셜 한국전쟁 최대 미스터리! 북한군, 왜 3일간 서울에서 머물렀나?#

김일성의 계획안은 대략 이러했다.

  • 한반도를 적화통일시킬 경우

    • 한국이 소련에 편입될 경우 김일성은 소비에트 연방의 '까레야 공화국' 서기장이 된다.

    • 독립을 유지한 상태로 공산국가가 된다면 김일성은 적화통일된 북한의 수령이 된다.

  • 전쟁에서 북한이 패배했는데 땅을 잃지 않을 경우

    • 패배를 핑계로 패전의 책임을 박헌영을 비롯한 정적(政敵)들에게 죄다 뒤집어 씌워서 싹 숙청하고 비록 반쪽짜리일지언정 북한의 수령이 된다. 결과적으로는 이렇게 되었다. 실제로 1953년에 휴전이 되자 김일성은 이걸 핑계로 1955년에 자신의 정적인 박헌영 등을 포함해 연안파, 소련파를 숙청했다. 다만 최용건은 바지사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숙청하지 않았다.

  • 이 전쟁에서 북한이 패배하고 땅마저 잃었을 경우

    • 멸(승)공통일, 백화통일이라고도 한다. 김일성은 소련으로 망명해서 그곳의 군 수뇌부 중의 한 명이 되거나 중국 간도로 패주해서 북한 임시정부를 꾸린다. 언젠가는 다시 공산국가로 만들게 될 한국의 임시통치자의 직함도 겸하게 된다. 다만 이 정도라도 김일성의 안위를 매우 위태롭게 할 수는 있었겠지만 정규전 이후라면 모를까 정면 승부 자체로는 도저히 북한이 질 것 같지가 않았을 것이다.


즉 김일성에게 불리한 카드는 거의 없는 상황이었고, 김일성은 전쟁 계획을 더욱 가속화할 수 있었다. 결국 김일성이 나름대로 생각한 6.25 전쟁은 전혀 밑질 것이 없는 장사인 셈이었다. 이기면 소련과 싸바싸바해서 득할 간도회복+한반도 적화통일하여 공산 대조선국가를 세워 수령이 되는거고 패배함으로 인해서 잃는 것은 자신의 정적들이다. 최악의 경우까지 상정해도 보신할 수 있는 보험이 있었다. 김일성의 이러한 정치적인 목적 역시 6.25 전쟁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김일성 혼자만의 착각이자 망상일 뿐이며 실제로 김일성과 스탈린의 생각 중에서 비교해본다면 스탈린이 옳은 것이다. 만약 남한을 함부로 건드렸다가 미국과 전쟁에 말려들고 이게 제3차 세계대전으로 번지게 되면 김일성 본인 정도가 아니라 한반도에 있는 모든 인간들은 기본적으로 씨가 마를 수 있고 더 나아가서는 전세계 인구의 과반수 이상이 죽어나갈 수도 있는 엄청난 상황을 초래할 수도 있었다.

제3차 세계대전을 걱정했던 것은 미국도 마찬가지인지라 1.4 후퇴 당시 소련이 북한에 공군을 지원한 걸 미군이 눈치챘으나, 미군은 제3차 세계대전을 우려하여 이 공군이 소련군인 것을 알면서도 중공군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미국과 소련은 서로의 눈치를 엄청나게 봤다. 결국 김일성 혼자만의 야욕 하나 때문에 인류사에 크게 악영향을 끼쳤다.

이에 따라 김일성은 소련과 중국에 계속해서 지원을 요청했으나 1949년 이전까지 중국과 소련은 북한을 돕기에 곤란한 요소가 많았다.

중국은 비록 마무리 단계이기는 했으나 국공내전을 진행하고 있었고, 소련도 제2차 세계대전 참전으로 국토가 황폐화된 이래 미국에 대한 군사적 열세 의식을 지니고 있어 참전을 꺼렸다.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국공내전에서 우세를 굳히면서 1949년 10월 1일 정식으로 건국을 선언했고, 1950년 5월에는 전쟁이 종결되었다. 이때 중국 내 한국인들로 편성해 총괄하였던 조선의용군 2~3만 명이 북한 내로 유입되어 조선인민군을 증강했다.

소련도 생각보다 미국에게 밀리지 않고 냉전이 굳혀지는 상황을 확인했고, 1949년 6월 핵실험에 성공하면서 군사적인 자신감을 회복했으며, 결정적으로 애치슨 라인을 보면서 마음을 돌리게 된 것으로 보는 주장이 있으나, 현재는 소련 문서의 공개로 부정되고 있다.

반면 1949년 후반부터 1950년 초반까지 미국은 동아시아 지역의 정세에 대해 다소 혼란스럽게 생각했던 듯하나, 앞서 언급했듯 대체적인 골자는 '남한 침공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였던 듯하다. 1949년 12월 작성된 미국의 NSC-48/2에서는 한국을 방위 지역에 넣지 않았으며, 1950년 1월 '애치슨 라인'에서도 한국과 대만을 방위 지역에서 제외했다.

미국의 정보기관들이 북한의 공격 준비 움직임을 포착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38선 지역의 교량 건설 작업이나 북한군의 배치 상황 등이 수많은 루트를 통해 맥아더 사령부로 흘러들어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맥아더는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알면서도 무시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냥 안중에 없었던 것에 가깝다.

애초에 한국은 형식만 맥아더의 관리지 미국정부가 직접 관할하는 곳이라서 맥아더는 일본의 통치에만 골몰했으며, 트루먼을 비롯한 미국 고위관료들의 인식 속에 북한은 소련의 꼭두각시 이미지로 남아 있었기에 미국은 소련이 미국과 전면전을 벌일 생각이 아니라면 북한을 이용해서 남한을 밀고 들어오진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전략을 구상하고 있었다. 즉 "남침할 것 같은데 일단 지켜본다"가 아니라 "그래봐야 남침 가능성은 거의 없다" 정도의 태도였던 것이다.

문제는 아래에도 서술되는 바와 같이 영 꺼림칙해하는 스탈린을 김일성과 박헌영이 설득해서 원조 협정을 받아낸 데 있다. 미국의 인식과는 달리 북한 정부는 훨씬 더 독립적인 행동을 취하면서 독자적으로 남침을 계획하고 있었다.

다만 1950년 4월, NSC-68에서는 이러한 눈치를 집약해 좀 더 적극적인 방위안을 계획했으나, 여전히 한국에는 특별한 군사적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1948년 12월, 소련이 북한에 주둔하던 소련군을 철수시키면서 간접적인 압박을 받아 군사 고문단만을 남겨둔 채 1949년 6월 남한에 주둔하던 미군이 철수한 바 있었고, 이를 원하지 않았던 이승만과의 갈등도 커졌다. 앞서 말했듯, 이승만과의 갈등은 도리어 가뜩이나 대대적인 군축중인 미국의 한국에 대한 군사적 지원이 더욱 축소되는 결과를 낳았다.

한편 앞서 언급했듯, 6.25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도 남북간의 충돌은 소규모로나마 제법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1948년 남북한에 독립 정부가 구성된 이후부터 남북한 양측은 각자 내부에서 좌우익 간의 대립으로 혼란스러운 상태였고 38선에서는 크고 작은 국지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육군의 육탄 십용사도 이 당시 이야기다.

주로 개성특급시, 옹진군, 의정부시 등에서 이러한 국지전이 벌어졌는데, 대개 38선에 걸친 산과 봉우리를 두고 분란이 벌어졌다. 개성과 옹진은 도시를 남한이 영유하고 그 뒷산을 북한이 영유한 상태였으며 북한은 여기에 진지 구축을 시작했다. 비교적 뒤늦게 이러한 상황을 파악한 대한민국 국군은 이를 완화하기 위해 38선에서 걸친 고지의 점유에 보다 적극적이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벌어졌다. 단, 이러한 국지전은 1949년 6월부터 8월 경까지 활발해지는데, 여기에 대해서 주한미군의 철수로 인해 불안해진 이승만이 국제적 관심을 환기하기 위해서 공방전에 보다 적극적이었다는 설이 있다.

한편 한국에서도 북한의 남침을 예측하기도 했다. 1949년 12월 17일 정보국이 상부에 올린 '연말종합적정판단서'인데, 놀라울 정도로 북한의 초기 작전을 예측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과 한국 정부는 이 보고서를 무시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북한은 1949년 말까지 남침 준비를 완료했다. 적의 병력은 전차 150대, 항공기 200여 대, 각종 포 2000여 문으로 장비된 10개 보병사단 약 19만여명으로 판단된다. 적은 주공을 동두천-의정부-서울로, 조공을 개성-문산-서울, 춘천-원주, 속초-강릉으로 하여 선제공격할 것이다. 적의 기습 시기는 50년 3월경으로 예측되나 동북 지방의 중공군 출신 의용군 편입이 늦어질 경우 6~8월로 연기될 가능성도 있다. 적의 전차는 아군에 대한 결정적 위협이 될 것이며 공중 지원과 해상 게릴라의 상륙 침투를 병행할 것이다. 남침을 전후해서 무장 공비에 의한 남한 후방 교란 활동을 격화시킬 것이다. 적은 위장된 평화 정치 공세를 더욱 강화할 것이다.


이 보고서는 우파에서 간혹 이야기하는, 박정희가 작성했다는 문서다. 출처는 정재경이 쓴 한국전쟁사 115~116p. 참고.

그리고 6월 중순, 하순은 남한 지역의 농번기였고 당시에는 농업이 국가의 주력산업이었다. 실제로 인구의 60~70%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한국군에서는 농번기에 장병들에게 모내기 휴가를 대대적으로 보내어 6.25 전쟁 개전 당시 한국 육군 전 병력의 3분의 1 가량이 휴가 상태였다. 물론 한국 정부나 국군이 바보라서 이렇게 휴가를 내보낸 건 아니었다.

1950년 2월에 총선거 일정이 그 해 5월로 결정되면서 한국군은 비상대비태세에 돌입했다. 당시만 해도 전후방을 가리지 않고 무장빨치산이 준동하던 때였고 3~4월에 걸쳐 전선에서 '위기설'이 퍼지고 있었던 시기다. 1950년 초반의 신문들을 찾아보면 이때까지도 빨치산 소탕작전으로 정신없던 모습을 볼 수 있다. 문제는 계속적으로 비상대비태세가 발령후 해제되지 않아 전군의 피로도는 심각한 수준에 달해 있었다는 것.

여기에 6월 중순 한국에 방문한 UN 한국위원회에서도 한국군이 불필요하게 비상대비태세를 유지하고 있는 점을 문제삼으면서 한국군은 별 수 없이 6월 23일을 기해 비상대비태세를 전면 해제하고 전 군에 대대적인 휴가를 지시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왜 하필이면 비상대비태세를 해제하자마자 대대적인 휴가를 실시했는지가 의문일 수 있는데, 3개월이 넘게 휴가 외출 외박 없는 비상대비태세를 유지하다 보니 군량미가 바닥났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휴가 장병들에게 건빵을 지급했는데, 상황이 이러니 반대로 건빵은 창고에 가득 남아있었다. 이러니 울며 겨자먹기로 병사들을 밖으로 내보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4. 전쟁의 전개[편집]

해당 문서 문서 참조.

5. 미군의 참전과 역할[편집]

해당 문서 문서 참조.

6. 전쟁의 영향[편집]

해당 문서 문서 참조.

7. 전쟁에 대한 인식[편집]

7.1. 명칭에 관하여[편집]

미국을 비롯한 해외에서 부르는 'Korean War'의 번역된 명칭인 한국 전쟁 역시 국내에서 널리 사용된다. 위키백과에서는 이 명칭을 쓰고 있다. 한국 전쟁이란 명칭을 사용하는 데에는 대한민국(ROK) 역사상 본토에서 치른 사실상 유일한 전쟁이라는 점, (표면적으로는) 두 'Korea' 간의 전쟁이었다는 점,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학술적 명칭이라는 점 등의 이유가 존재한다. 반대측에서는 자국에서 일어난 전쟁을 외국식으로 불러야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반박한다. 그러나 현재 학술적으로는 '한국 전쟁' 이라는 표현이 "6.25 전쟁"보다 상대적으로 많이 쓰이는 것으로 보인다.

6.25 전쟁은 한국 전쟁 발발일을 강조하여 북한의 남침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라는 시각도 존재한다. 서방에서는 가끔씩 Korean war말고도 The forgotten war(잊혀진 전쟁)이라고도 불린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현재까지 가장 많은 미군 사상자가 난 전쟁인데도 불구하고, 베트남 전쟁과 이라크 전쟁에 묻혀 그리 알려진 전쟁이 아니기 때문. 물론 단순히 이런 이유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에 관해서는 아래 문단에 자세히 후술.

한편 6.25 사변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사변'은 선전포고 없이 다른 나라를 공격하는 것이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육이오 전쟁'과 '한국 전쟁'으로 올라와 있다. 옛날에는 남북전쟁이라고 불리기도 했지만 단어 자체가 1860년대 미국의 내전을 지칭하는 단어로 인식되는 경향이 강해서인지 요즘은 잘 안 쓰이는 추세.

북한에서는 조국해방전쟁이라 부르지만 국내에서는 당연히 이 표현이 통용되지 않는다. 북한학 전공자가 아닌데 이런 표현을 자주 사용하는 사람이 보인다면 일단 회사연락을 취하자. 이 명칭이 북침설을 반박하는 또 다른 이유가 될 수 있는데, 북한이 먼저 공격받았다면 "조국방어전쟁" 혹은 "조국수호전쟁"이라 불렀을 테지 "조국해방전쟁"이라는 말은 쓰지 않았을 것이다.

반대로 한국의 우익단체 중에서도 극히 일부에서는 아예 북한의 정통성이 없음을 보다 강조하는 표현으로 김일성의 난이라는 표현을 쓴다. 더 나아가서는 김일성 가짜설에 의거해 김성주의 난이라고도 한다. 1950년이 경인(庚寅)년임에 착안하여 경인년에 공산당이 일으킨 난이라는 뜻으로 경인공란(庚寅共亂)이라고 하기도 한다. 물론 학술적으로 전혀 적절하지 못한 표현이며, 학술 영역 외에서도 보편적으로 사용되지 않는 표현이다.

해외에서야 한국이나 조선이나 모두 'Korea' 로 칭해지니 상관없지만, 대한민국을 제외한 한자문화권에서는 남북한을 어우르는 명칭이 조선(朝鮮)이다. 중국/베트남/일본/대만/홍콩에서는 '한(韓)'은 오직 남한이라는 나라에 한정되는 개념에만 사용한다.[20] 대한민국은 '대한' 이라는 명칭을 밀지만, 북한은 스스로를 '조선'으로 밀고 있으며, 중국이나 일본 입장에선 수백년 동안 존속한 '조선' 이라는 국가와 그 지명이 더 익숙하고, 한국이라는 나라는 2차대전 후 자유주의를 표방하여 서방세계 진영에 선 현대적 국가로서 탄생한 국가이기 때문에 비하가 아니라, 그들에게는 '조선'이라는 이름이 훨씬 익숙하다. 따라서 한국에선 '한국 전쟁'이나 '6.25 전쟁' 이라고 부르지만, 다른 한자문화권 국가들에선 이 전쟁을 대부분 조선 전쟁(朝鮮戰爭)으로 부른다.

중국측에서는 현재 보통 중립적으로 조선전쟁(朝鲜战争)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항미원조전쟁(抗美援朝战争)이라는 표현도 사용되는데, 미국에 대항해서 북조선(북한)을 도와준 전쟁이라는 뜻. 이런 6.25 전쟁에 대한 중국의 인식이 한국과의 국교 수립 이후 문제가 되자 중국에서는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발발하여 중공군이 개입하기 이전까지는 '조선전쟁', 중공군이 개입하기 시작한 1950년 10월 말부터 종전까지를 '항미원조전쟁'으로 구별해서 불러야 한다는 학설이 주장되기 시작했다. 즉 6.25 전쟁의 개전 당시인 조선전쟁은 남북한 간의 내전에 불과하나, 미군을 주축으로 한 UN군의 진격으로 한만 국경에까지 도달하는 등 중국이 위협받기 시작하자 중국을 지키기 위해 북한을 도와 참전한 전쟁인 항미원조전쟁은 구별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항미원조전쟁의 개념을 완전히 부정하면 당시 중공군은 침략군이 되어버리며, 그렇다고 계속해서 밀고 나가자니 한국과의 외교 마찰이 발생하는 모순을 피하기 위해 만들어낸 조금은 억지스러운 개념. 이게 넌센스인 것이 실제로는 중공은 해방 직후부터 북한군의 창설에 개입해왔다. 조선족 사단을 파견하여 군정대학을 만들고 인민군을 육성, 남침준비단계부터 철저히 개입했다. 또한 6.25 개전 초기엔 조선족 사단이 인민군 안에 편성되어 남침하였고 중공군의 남침시에도 그 길잡이가 되었다. 현재도 조선족 학교나 단체에서는 그것을 항미원조라고 가르치고 매년 기념행사를 갖는다. 동시에 조선족은 이 참전에 대한 포상으로 조선족 자치구를 부여받았다. 이후 타 지역과 병합하면서 오히려 한 단계 낮은 조선족 자치주가 되었다.

일본에서도 '조선전쟁(朝鮮戦争, ちょうせんせんそう)'으로 부르며, 베트남에서도 '조선전쟁(Chiến tranh Triều Tiên, 戰爭朝鮮)'으로 부르고, 대만/홍콩과 같은 중화권에서도 '조선전쟁(朝鮮戰爭)'으로 부른다.

7.1.1. 미국의 '잊혀진 전쟁'(The Forgotten War)[편집]

미국에서는 이 전쟁을 'Korean War' 외에도 '잊혀진 전쟁(The Forgotten War)', '알려지지 않은 전쟁(The Unknown War)'이라고 흔히 부르며, 한국 전쟁을 다룬 다큐멘터리들은 대체로 이런 제목들이 붙는다. 단어가 문학적이기 때문에 형식을 갖춘 문서의 경우가 아니면 오히려 이 쪽이 더 흔하게 보인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베트남 전쟁 사이에 발생한 데다가,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고(그러나 전사자 수는 수만명에 육박한다. 그만큼 2차대전과 월남전쟁의 스케일이 크긴 했다), 세월이 오래 흘렀기 때문이다. 잊혀진 전쟁 문서 참조.

동 제목의 6.25 전쟁을 소재로 한 게임도 있다. 당시 미국 대통령 해리 S. 트루먼의 이름을 따 'Truman's War(트루먼 전쟁)'라고도 부른다.

또한, 미국은 6.25 전쟁 참전 당시 트루먼 대통령이 제대로 된 전쟁(War, Total War)이 아니라 'Police Action'이라고 발표했다는 것도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트루먼이 이렇게 불렀던 것은 대놓고 선전포고 때리며 전쟁이라고 부르기에는 3차 세계 대전이 두려웠던 것도 있고, Police Action은 유엔헌장 42조와 53조에 합법적인 행위로 규정되어 미국의 참전이 국제법적으로 적법한 행동이었다는 걸 주장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물론 이건 정치적 이유에서의 분류였고, 6.25 전쟁의 규모나 미국이 투입한 병력을 보면 'Police Action'이라는 말은 그다지 적합하다고 보기 어렵다.

7.1.2. 내전이다.[편집]

대한민국과 북한정권은 서로를 정식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자기측 중앙정부에 반하는 반국가단체로 여긴다.


대한민국 헌법에 의하면 북한과 조선로동당은 대한민국의 국토인 한반도를 참절하고 대한민국 정부에 맞서 '정부'를 참칭하는 반국가적 단체이자 반군이므로, 국가보안법에 의거하여 한국 전쟁은 김일성이 일으킨 내란, 김일성은 반란수괴범, 김일성의 부하와 조선로동당원 및 조선인민군은 목적수행범으로 규정할 수 있다. 물론 현실은 시궁창 하지만 실제로 노무현은 한국 전쟁이 내전이라 언급했다가 일부 학계의 비판을 받은 바 있다. 당시는 외국인물에게 대한민국이 어려운 상황들을 많이 겪었지만 세계적인 국가로 성장했다는 이야기를 하며 내전도 겪고 라고 발언한 것이라 6.25 전쟁에 대한 정의나 가치관을 드러낸 것이라고는 보기 어렵다.

남북이 생각하는 서로의 지위가 자국내 반역단체이기에 중공군과 UN군의 참전이 없었다면 서로서로 내전으로 규정하고 넘어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외국군대들의 참전 이전까지만을 내전으로 보는게 옳은 듯하다. 중공군을 파견하여 북한을 도왔던 중국도 1950년 10월을 기준으로 이 전쟁을 둘로 나누어 부르고 있으니 말이다. 중국은 중공군 참전 이전을 조선전쟁, 중공군 참전 이후를 항미원조전쟁이라 하여 따로 취급한다.

7.1.3. 국제전이다.[편집]

남북한이 각각 국가라는 관점에 의하면, 남북한이 서로를 어떻게 바라보든간에 국제적으로 남북한이 모두 국가로 인정받고 있기 때문에 6.25 전쟁은 국제전이라고 볼 수 있다. 유엔군이 38선 이북으로 북진하려 할 때 반대가 컸지만 무시하고 강행한 바 있다.

실제로 이승만 전 대통령은 평양 '수복' 이후 대한민국 대통령이 아닌 개인자격으로 평양을 방문해서 연설했다고 한다. 비록 헌법상 북한지역은 대한민국의 영토이지만 국제적으로는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개인자격으로 방문할 수 밖에 없었고, 이승만도 이를 잘 알았기에 '유엔과 협의해서 대한민국이 북한 지역에 대한 통치를 보장받도록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는 유엔 총회에서 대한민국이 한반도 전체를 대표하는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받았다고 우기는 주장을 반박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기도 한다.

다만 인용된 자료만 가지고는 당시 북한 지역이 국제적으로 대한민국의 영토로 인정되지 않았다고 볼 충분한 근거가 되기에는 다소 부족한 면이 있다. 또한 '실리주의자인 이승만대통령의 성향으로 봤을 때, 개인 자격 방문은 자격 여부에 개의치 않고 가장 빠르게 평양을 방문할 방법이었기 때문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도 없다. 즉, 개인 자격 방문이라는 것이 북한 지역이 국제적으로 대한민국의 영토가 아니어서 그럴 수 밖에 없었다고 보는 것은 근거가 다소 미약한 편이라는 것.

한편으로는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더라도 6.25 전쟁의 성격을 국가 대 국가의 전쟁으로도 볼 수 있다. 김일성을 그저 소련, 중국의 꼭두각시로 본다면 김일성을 앞잡이로 한 소련, 중국의 대한민국에 대한 침략이므로 명백한 국제전이라는 것이다. 또한 다국적군인 유엔군의 참전을 근거로 해도 국제전이 된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7.2. 주한UN군의 참전과 국제적 인식[편집]

당사국인 대한민국과 북한에 더해, 전투병을 파병한 참전국의 숫자로 보면 미국 이외에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그리스, 터키, 필리핀, 태국, 콜롬비아, 에티오피아,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캐나다,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구성된 UN군 16개국과 중국의 총 17개국.

의료지원부대를 파병한 국가는 스웨덴, 인도 공화국, 덴마크, 노르웨이, 이탈리아, 체코슬로바키아 6개국이다. 여기서 이탈리아는 UN에도 가입하지 못한 상황에서 적십자 소속의 의료지원팀을 꾸려 파견했으며 체코슬로바키아는 북한측으로 파병했다.

그 외에 물자 지원과 전투, 물자 협력국을 포함, 대한민국을 지원한 국가는 총 67개국이다.

6.25 전쟁은 한편으로 역사상 가장 많은 국가가 단 한 나라(대한민국)를 돕고자 지원한 것으로 기록된 전쟁이며 이에 따라 기네스북에 오른 전쟁이기도 하다. 당시 대한민국에 병력, 물자, 전후복구를 지원한 나라는 자그마치 67개국으로, 당시 세계 국가들 중 73%에 달한다. 이 중에는 아이티, 인도네시아처럼 별다른 이해관계가 없었거나 경제력이 낙후된 국가들조차 포함될 정도다. 특히 영국이나 프랑스 등은 이전에 2차 세계대전까지 타국의 침공을 당했던 경험도 있었기 때문에 이들 국가들은 그 때의 참상을 기억하면서 참전하였다고 한다.

또한 가장 오랫동안 평화협정 없이 휴전이 지속된 전쟁으로도 기록되었고 일본도 소련이랑 평화협정 안맺었는데? 소련은 망했으므로 지속된다고 볼 수 없다, 지금도 하루하루 그 기록을 계속 경신중이다. 6.25 전쟁은 명목상(De Jure)으로든 실질적(De Facto)으로든 언제든지 휴전이 파기될 수 있는 현재 진행형인 전쟁으로, 굳이 따질려면 평화협정을 맺은 바가 없는 제3차 포에니 전쟁(...)이 있겠으나, 어쨌든 이건 당사국들이 이미 존재하지 않는 실질적으론 종전된 전쟁이라... 아직 끝나지 않았고 언제든지 다시 재개될수 있다.

이는 개전 당시 북한이 저지른 명분도 선전포고도 없이 기습적 무력 침공이 전세계적으로도 인면수심의 인물들이나 하는 짓으로 취급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근거 중 하나이기도 하다. 물론 상술했듯 선전포고는 없어도 전쟁 수행이 가능하다. 하지만 여전히 뾰족한 명분 없이 북한이 침공했다는건 충분히 문제될 만하다. 일부 친북 세력들이 '사실 남한 or 미국이 먼저 건드려서 반응한 것일 뿐임!'이라고 우기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북한은 명분을 갖고 싸운거다'라는 주장을 내세워 북한이 인면수심의 장본인이 아니라고 우기기 위한 것이 목적이다.

미국이 이라크와 전쟁을 벌이면서 그 명분으로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있다'고 우긴 것을 생각해 보자. 러시아도 남오세티야 전쟁을 벌일때 사실 그 전부터 조지아를 조지려는 생각은 있었지만 먼저 조지아를 치지 않고 조지아가 남오세티야를 침공할 때 까지 기다렸다가 침공이 들어오는 순간 '우리의 동맹을 공격하다니 용서할 수 없다!'면서 바로 기다렸던대로 조지아를 조져버렸다. 한마디로, 조지아를 조지고 싶었지만 조지아가 남오세티아를 조지려 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조지아를 조진거. 언어유희 쩌네 저 두 국가가 마음만 먹으면 3차 세계대전을 치룰수도 있는 국제사회 초강대국들임에도 주변국들을 상대로 치졸하기까지한(...) 변명을 내세우며 전쟁을 벌인것은 명분 없는 전쟁은 아무나 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

관련 기사 이렇게 북한이 인면수심의 장본인 취급을 받은 이유는 역시 이 무렵이 2차대전이 막 끝난 무렵이었다는 사실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2차대전의 악몽이 가시지 않은 통에 비인도적, 비신사적인 침략전쟁이 일어났으니 당연히 세계의 시선이 곱지 않을 수밖에 없었던 것. 여기에 당시 세계정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지 겨우 5년밖에 안 된 상황에서 또 전쟁 당시의 후속처리와 후유증을 처리하는데 정신이 없었다. 그런데 김일성인간이기를 포기한 어떤 쌍놈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자기의 야심만 채우려고 하는통에 더 골치 아프게 만든 것이었다. 상술한 것이긴 하지만 당시의 세계정세는 다시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위해 서로 몸사리던 시대였다는 사실을 모르고 설쳐댄 김일성이 악질이었던 것. 당장 수에즈 운하 사건이 일어났을 때 미국소련영국, 프랑스, 이집트, 이스라엘을 윽박질러 전쟁까지 가는 걸 막으려했던 사실을 상기하자.

이외에 소련과 일본도 비밀리에 참전하여 각각 항공 지원과 소해 임무를 담당했다. 참전한 소련 조종사들은 중국인민지원군으로 위장하기 위해 슬라브계 백인이 아닌 몽골계 혈통의 소련인들로 선발하였고 중국어조선어 학습을 받았지만 치열한 교전 중에 낯선 외국어를 쓰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기 때문에 스탈린에게 간절하게 부탁해서 승낙을 받아 실제 작전 중에는 그냥 러시아어로 교신했다고 한다.

물론 그 전에도 긴급상황시 러시아어로 된 무선통신이 들리는 경우를 UN군이 밥 먹듯이 캐치하고 보고했으나, 소련군이 참전했다는 사실이 외부로 알려지면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까 두려웠기 때문에 해당 보고를 받은 상부 및 지도자층을 포함해서 다 모르는 척했다고 한다. 사실 소련도 공군력 딸리는 북한과 중공을 지원하긴 해야겠는데 대놓고 지원하면 자기들이 귀찮아지니까 비밀스럽게 진행했다. 한마디로 말해 양쪽이 서로 알고도 모른 척 한 셈. 아무리 위장을 한다 해도 조종사는 소련인이고 격추되는 일도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그 당시에도 자유 진영이 이 계획을 알게 된다. 이른바 북한 전투기를 격추시켰더니 조종사가 소련군 백인.[21] 이들은 공식적으로는 중국군으로 처리되어 포로 대우를 받았으며, 송환거부포로 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중국군은 그대로 송환되었기 때문에 이들 역시 전쟁 이후 중국을 거쳐 소련으로 갔을 것으로 보인다.

이 사실은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 특히 소련 모두 전쟁에 개입하면서도 제3차 세계대전으로 확전될 것을 우려해 최대한 한반도의 영토와 사람 내에서 모든것들이 다 해결되도록 꾹꾹 눌러담아 은폐했으며 더불어 이 전쟁이 한반도 외부로 퍼지지 않도록 힘을 썼다. 그래서 소련은 소련 붕괴전까지 자신들의 전쟁 개입을 부인했으며 실제로 휴전협정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참전국의 숫자만 따지면 위에서도 밝혔듯이 세계 73%의 국가가 대한민국을 지원했으며 북한측에도 막대한 소련의 병기와 중국의 전투병이 지원되었으므로, 6.25전쟁은 거의 세계대전에 준하는 규모의 대규모 전쟁이었던 것이다. UN군의 절대 다수(90% 정도)가 미군이었으나 67개국의 지원국 가운데에는 꼭 병력 지원만 한 나라만 있었던 게 아니라 물자와 의료진, 기술자를 지원한 나라도 역시 매우 많았기 때문에 단순히 병력만으로 지원국을 규정하는 것은 편협한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유엔군으로 참전한 일부 국가의 경우, 이들 나라가 미국과의 특별한 관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국을 지원했다던가, 2차대전 직후 미국 눈치를 안 볼 국가가 없다면서 이들 국가가 유엔군으로 참전한 이유를 단순히 미국 눈치를 보고 미국에게 잘 보이기 위한 것이라고 정의하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22] 미국의 유럽 참전 국가들은 나토 창설 멤버이기 때문에 참전했다고 치더라도 태국, 에티오피아,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 터키, 남아공은 미국의 뜻과는 별개로 참전한 것이다. 또 15개국 군대가 독자적인 작전을 수행한 게 아니라 미군에 배속되어 전투를 했다고도 하는데 이 또한 사실이 아니다. 미군을 포함한 모든 병력은 유엔군 소속이었고 그 수장이 미군 출신인 더글러스 맥아더였을 뿐이다. 다국적 연합군에서 지휘관이 한국군 출신이라고 다국적군이 한국군은 아니듯이 말이다.

사실 UN군의 지휘권이 미군 장성에게 돌아간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한국군이 1950년 7월 초 북한군의 공격을 막고 있는 동안 유엔의 '한국 군사원조 결의'에 따라 미국의 육, 해, 공군이 참전했고, 이어 영국의 해군과 호주의 해, 공군, 뉴질랜드 해군도 전선에 투입됐으며, 이외에도 다수의 유엔 회원국이 참전을 준비하고 있어서 이들에 대한 지휘 통제 문제가 대두됐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트리그브 리 유엔 사무총장은 7월 3일 6.25전쟁의 가장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미국이 유엔군을 지휘하도록 제의했다. 결국 대한민국 방위를 위한 회원국들의 군사행동에 통일성을 유지하고자, 안전보장이사회는 7월 7일 미국이 작성하고 영국과 프랑스가 제안한 '유엔군사령부 설치'를 의결함으로써 유엔군을 지휘하는 통합군사령부가 발족하게 됐다.

이 결의안의 주요 골자는 '안전보장이사회를 대신해 한국에서 침략자 북한과의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권한을 미국의 대통령에게 위임하고, 유엔 회원국들이 파견한 군대를 미국의 통일된 지휘하에 둔다'는 것이다. 유엔 사무총장은 초대 유엔군사령관에 미 극동군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을 임명하고, 그에게 "미국의 작전 임무는 국제 정치상 어디까지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지원하에 이루어진다"는 지침을 전달했다. 유엔 회원국 중 대부분의 국가가 지지하는 가운데 결성된 유엔군은 한국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을 갖고 있으며, 파견 병력 규모와 지원능력 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미국에 의해 좌우될 수 밖에 없었다. 미국 이외의 국가의 참전은 주로 미국의 국무부와 트리그브 리 유엔 사무총장의 협의하에 이루어졌다. (출처: <6.25전쟁 프랑스군 참전사> - 국가보훈처 편저, 2004년)

이와 같이 UN군의 혼란스러운 지휘체계를 안정시키기 위해 UN 안보리와 회원국들이 미군 장성에게 UN군 지휘권을 양도한 것일 뿐이다.

이 전쟁을 보는 시각에는,

  • 미국으로 대표되는 자유주의 진영과 소련으로 대표되는 사회주의 진영을 각각 남북이 대리자의 역할로 전쟁했다는 대리전으로 보는 시각.

  • 남북의 국내전으로 보는 시각. 단, 이 시각의 경우 남쪽이든 북쪽이든 각각 처음부터 미국과 소련, 중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왔다. 당장 북한이 초기공세 때 쓴 T-34 전차를 과연 어디서 구했을까? 미국과 중국은 자신들의 '정규군'을 보냈었던 만큼, 서로 UN군이니 의용군이니 하는 그럴싸한 대외적 명분을 내거는 수를 쓰긴 했지만 이렇게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 마지막으로 대리전이 아니라 자유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 자체가 맞부딪힌 세계전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당장 1951년 UN군이 북쪽으로 북상할 때쯤 맥아더가 트루먼 대통령과의 마찰이 생겼는데, 맥아더가 중국(정확히는 만주 지역)에 핵폭탄을 사용해서라도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하자 트루먼은 전쟁의 확대를 우려해서 1951년 4월 11일 맥아더를 해임시킨 바 있다. 이러한 전쟁의 성격으로 인해 6.25 전쟁은 냉전 시대 세계 각지에서 벌어진 대리전의 시초로 평가된다.


일단 전쟁의 당사자는 성격이야 어쨌건 남한과 북한일 뿐이고, 중국은 엄연히 제3자다. 그래서 중공군이 이 전쟁에 개입한 것을 '불법개입'이라고 한다. 그런 중국에 무력 개입을 넣는 순간 당연히 중국이 가만히 있을리 만무하고 중국쯤 되는 큰 국가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다른 공산국가들도 체면상 안 나설 수가 없게 되며 당연히 세계적인 규모의 트러블이 된다.

7.3. 유엔과 국제 세계의 시각 및 활동[편집]

6.25전쟁은 사실상 거의 유일하게 유엔군이 전쟁의 한 쪽 당사자로 참전한 전쟁이다.

유엔이 성립한 후 개입한 전쟁이나 국제분쟁에서 유엔은 거의 예외 없이 평화유지군, 즉 양측의 성격이 어쨌건 간에 서로를 중재시키고 양측을 대신해 치안을 수호하는 '중재자' 역으로 참여한 반면, 6.25 전쟁에서만큼은 유엔군이 UN 깃발을 달고 북한 및 중공군을 상대로 전투를 수행하였다. 이것은 본 전쟁이 최초이자 거의 마지막이며 이후 벌어진 전쟁에서 유엔군이 한쪽을 위해서만 유엔 명의로 참전한 적은 없다. 베트남 전쟁, 걸프 전쟁, 이라크 전쟁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걸프 전쟁'이나 '리비아 내전'처럼 '안전보장이사회 승인'을 얻은 전쟁이라 하더라도 거기에 참여한 각 나라 군대들은 각자의 명의로 참전하였다.

물론 어느 한쪽이 평화유지군을 먼저 공격한다면 그에 대한 방어전이야 수행하지만 본 전쟁처럼 유엔군이 선공을 당한 것이 아님에도 한쪽만을 위해 적극적으로 참전한것은 분명 의의가 있다. 그래도 시리아 내전을 계기로 자국민에게 잔혹한 정권을 국제 사회의 힘으로 응징하기 위해 다시 결성될 필요성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으나, 본 전쟁과 내전은 그 성격이 서로 극명히 다른 데다 무엇보다 양쪽이 다 악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에 앞으로도 오랜 기간 유엔군이 한쪽을 위해 싸워줄 일은 없어 보인다.

7.4. 북침이 아닌 남침이다[편집]

2013년 6월에 뜬금없이 고교생들의 6.25 전쟁 인식이 논란이 되었다. 서울신문이 한 여론조사 기관에 의뢰해서 고교생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고교생의 69%가 6.25 전쟁을 북침이라고 생각한다고 응답한다는 기사가 나왔고 이는 국민들에게 심한 충공깽을 일으켰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 기사를 인용하면서 역사왜곡 문제를 바로잡겠다고 발언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실제 이 기사와 여론조사 설문을 분석해보니 오해하기 쉽게 만든 설문이었다고 한다. 애당초 이 기사의 의도 자체는 고교생의 6.25 전쟁 인식문제를 다룬게 아니라 한국사 교육의 문제를 지적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고교생 69%가 북침이라고 생각한다는 말에 보수성향의 국민들과 박 대통령은 이 대목에만 폭발했다는 것. 게다가 설문의 내용도 문제였는데 "6.25 전쟁을 남침이라 생각하는가 북침이라 생각하는가"라고 단순하게 물어본 것이 화근이라는 지적이 많다. 실제 한 고등학교 교사가 학생들에게 물어보니 북침의 뜻을 북한 침략한 것으로 아는 학생들이 많았다는 것. 2004년 보훈처의 여론조사에서도 학생들의 겨우 0.7% ~~한해 수능보는 학생이 60만명에 12개의 학년이다. 0.7% 약 5천명만이 남한이 북침했다로 응답했고 거의 대다수는 북한의 남침이라고 올바로 파악하고 있었으며, 전교조에서 보훈처가 진행한 여론조사와 같은 질문으로 서울지역 중고생 1499명에게 설문조사한 결과에서도 89.4%가 6.25 전쟁은 북한이 일으킨거라고(남침) 응답했다. 대체 남한이 북한을 침공했다고 한 10.6%는 뭐냐 당연히 중간에 모른다나 무응답이 있겠지 독도가 한국 땅이라고 해도 5프로는 반대라고 한다. 물론 장난으로

문제의 근본은 한문 해독에 있다. '동(東)', '서(西)', '남(南)', '북(北)' 등 추상적인 방위를 나타내는 단어는 방향성 있는 동사와 결합할 경우 부사로 쓰여 그 동사가 말하는 동작의 방향을 나타낸다. '동진(東進)', '서천(西遷)', '남하(南下)', '북상(北上)' 등이 그 예시다. 마찬가지로 '북침'의 북(北)은 명사가 아니라 부사로, '북쪽 침범함'이 아니라 '북쪽으로 침범함'이란 뜻이다. 한문의 문법이 실사(뜻이 있는 글자)와 허사(뜻이 없고 문법적 요소로 작용하는 글자)로 큰 범위에서는 잘 나뉘지만 작은 범위에서는 품사의 전용성(轉用性)이 매우 커서[23] 한자어가 줄임말로 만들어지는 것처럼 인식되곤 하는데, 그런 오해가 낳은 사태인 것.

결국 이젠 한문이 영 쓰이질 않는 현실을 고려해 국방부에서 교육용 용어를 '남침' 에서 북한의 남침으로 좀 더 명확하게 들리도록 수정했다.

다르게 보면 북침 남침이란 단어 자체가 쓰임이 줄어든 게 원인이라고 볼 수도 있다. 북상, 남하 등은 요즘도 많이 쓰이니 한문 문법을 몰라도 단어 자체로 기억하는데 북침 남침은 그렇지 않다는 것. 예전엔 아예 "6.25 남침 사건"이라고 묶어서 가르쳤는데 이젠 남침이란 단어가 교과서에서 전쟁 발발을 설명할 때 한 번 나오고 전쟁 자체는 그냥 "6.25 전쟁"이라고 표현하니 남침이란 단어의 사용 빈도가 많이 줄어들었다는 것.

이 때문에 국한문 혼용을 옹호하는 학자들이 학생들의 한문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에 국한문 혼용 반대론자들은 그냥 한문 한자어 따지지 말고 간단히 '북한이 남한을 침략했다.'라고만 적으면 더 문제가 없었을 것이라며 반대했다.

7.5. 중공과 6.25 전쟁[편집]

마오쩌둥의 아들 마오안잉이 이 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했다. 당시 인민해방군 총사령관 펑더화이는 혹시라도 마오안잉에게 위해가 끼칠까봐 전선으로 보내지 않고 사령부에서 러시아어 통역관으로 근무하도록 했는데 사령부가 네이팜탄 폭격을 맞아 전사했다. 마오쩌둥은 아들이 전사하자 며느리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시신을 중국으로 운구하지 않고 전사한 그 자리에 무덤을 만들라고 지시했고 마오안잉의 영구는 아직까지 북한에 묻혀 있다. 이 묘는 중화인민공화국과 북한의 혈맹관계를 상징하는 중요한 정치적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시체팔이

7.6. 6.25 전쟁 10대 미스테리[편집]

6.25 전쟁 10대 미스테리 문서 참조.

7.7. 독도와 일본[편집]

6.25 전쟁의 물자재정지원국이자 몰론 기뢰제거 및 일부 역할[24]을 맡아온 일본은 실상 6.25 전쟁 동안 대한민국령 독도를 국지적으로 계속 노려왔다. 1951년 8월 31일 일본 외무성이 독도를 일본 땅에 편입하려는 의지가 담긴 견해를 표명한데 이어 일본 어선이 맥아더 라인을 침범하여 어업 활동을 벌이자 이승만 대통령이 엄중대처와 재무장 반대를 언명했고 곧이어 대한민국 외무부가 1951년 9월 3일 일본 외무성 주장에 반박했다.[25]

1953년에도 일본 무장순시선 등이 수 차례에 걸쳐 독도에 불법 침입해 독도에 일본 영토 표지목을 무단 설치하고 어로 작업을 하는 우리 어민들을 협박하는 등 독도를 노리자, 홍순칠과 참전용사 33인의 민간인들은 1953년 4월 20일 독도의용수비대를 결성하였다. 이후 독도의용수비대는 현 독도경비대에 순시권을 반환한다.

7.8. 유럽 지성계의 반응[편집]

6.25 전쟁은 (비록 명분상이지만) 공산집단이 아무런 명분도 없는 침략 전쟁을 일으켰다는 점에서 불과 몇 년 전까지 나치의 침략과 광기를 겪었던 유럽의 좌파 지식인들에게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때문에 6.25 전쟁을 놓고 좌우간에, 혹은 좌파 내부간에 적잖은 논란이 일어나게 되는데, 물론 좌파 일각에서도 북한의 침략 행위를 비판하는 시각도 존재했지만, 대체로 남한과 미국의 도발에 대한 북한의 자위적 전쟁이라며 옹호하는 분위기가 우세했다. 말하자면 북한은 가만히 있는데, 남한과 미국이 자꾸 집적거리니 북한이 자위권을 발동한 것이라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그리고 당시 좌파에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서 많은 지식인들이 이러한 주장에 낚였는데, 그 중에는 시대의 지성으로 불리는 장폴 사르트르도 있었다. 이러한 얼토당토않는 주장에 세기의 지성까지 낚이게 된 것은 물론 한국에 대한 유럽 지성인들의 무지도 한몫했지만, 파시즘의 피해자이자 파시즘 타도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한 소련에 대한 우호적인 분위기도 한몫 했다. 그러니까 북한의 침략 행위를 사실대로 비판하면 그 북한을 탄생시킨 소련에 대해 비판을 가하는 셈이 되는 것이다. 결국 사르트르는 북한의 침략을 비난하는 모리스 메를로퐁티와 대판 싸우고 결별하게 되는데, 북한의 현 상황을 놓고 본다면 결과적으로 메를로퐁티의 판단이 옳았다. 사실 김일성이 우리가 아는 그런 자라는 걸 당시로서는 알 수 없었다.애당초 잘 알지도 못하면서 옹호는 왜 했대? 이 당시 북한 정권은 어쨋든 각종 좌파, 공산 세력의 연합 정권이었고, 레지스탕스 문서에 나와 있듯이 프랑스를 비롯하여 서유럽 각지에서는 자국의 반파시스트, 반나치 투쟁의 중심에 공산주의 세력이 있었기에 공산권에게 진 빚이 있다고 느낀 사람들이 많았다.

8. 관련 기록[편집]

6.25 전쟁/관련 기록 문서 참조.

9. 전쟁범죄[편집]

9.1. 대한민국[편집]


반공이 국시였던 지난세기 "북한의 악함과 국군의 영웅적희생"을 강조하기 위해 부각되지 않았지만, 대한민국정부도 전쟁범죄의 주체였다는 사실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대표적으로 보도연맹 학살사건 이 있는데, 대한민국 국군과 서북청년단과 같은 극우단체에 의해 10~20만의 38선 이남에 거주하는 대한민국 국민이 학살당한 사건이다.

그외에도 한강 인도교 폭파, 소년병징집 (자발에 의한 종군이던 학도병과 별개이다), 국민방위군 사건, 한국군 위안부등이 있다.

독전대를 운영하거나 즉결처형을 허가하기도 했다.

9.1.1. 미국[편집]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

9.2. 북한[편집]

인민재판으로 알려져 있는 행위가 가장 유명하다.

지역주민을 모아놓고 지역 유력가, 정치인등을 처형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였다. 어떤 경우에는 유명인사들을 북쪽으로 납치해가기도 하였다. 그 외에 포로에 대한 처우가 처참했다는 말도 있다.

알려진 개별 사건으로는 서울대병원 학살사건이 있다. 인민군이 서울로 진격했을 당시, 전방에서 후송된 국군환자가 입원해 있다는 이유로 천여명의 환자와 간병인을 학살한 사건이다.

9.2.1. 중공[편집]

한국전쟁을 겪은 사람들의 회고에 따르면 가장 신사적이였다고 한다. 중공이 빨치산활동을 할때의 경험으로 지역주민의 협조를 중요시하였고, 병사들 개개인에게 참전명분에 대한 동기부여가 잘되었기 때문이다.

중공에 의한 전쟁범죄 추가바람.

10. 6.25 전쟁 결과의 대체역사[편집]

10.1. 완전 적화통일[편집]

지금의 북한의 김씨왕조보다는 나았을지는 몰라도 경제적으로 잘 사는 국가는 아니었을것이다.

미국 정부에서는 서사모아 제도 에 망명정부를 구성하려는 계획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 경우 독도가 일본 땅이 될 수도 있고, 한국정부가 미군에 사실상 조차해 한개의 원래 한국땅인 섬만을 명목상 통치하는 망명정부로 남았을 수도 있다. 미군과 한국군이 공동으로 경비를 하면서 일부 자유진영 국가로부터 인정받는 정식 국가로서 존속하는 것이다. 태평양 한가운데서(...) 그야말로 한민족 역사상 졸지에 신세계로 떨어진 셈이 되는데 문제는 서사모아에도 원주민이 있다는 것이니 많은 민족 문제가 생겼을 것이다.

다만 적화통일이 된 한반도는 현재의 북한처럼 완전히 막장이 되진 않았을 가능성이 큰데, 적화통일로 인하여 남로당, 연안파, 소련파들이 김일성과 권력쟁탈전을 펼치거나 김일성의 독주를 견제 할 것이기 때문에 잘 되면 김씨일가의 왕국인 현 북한이 되기보단 평범한 공산국가가 되었거나 자본주의적 요소를 일부 받아들어 약간 개방적인 공산국가가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탈북자 출신 기자 주성하아마 폴스카(폴란드) 정도 되지 않았을까 하는 의견을 피력한 바 있었고 아마도 1960, 70년대 당시 폴란드헝가리, 체코, 불가리아 같은 동유럽의 공산권 국가들이나 또는 1975년 남북 통일 이후 베트남처럼 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다만 현재의 김씨 왕조보다는 나을 뿐 공산주의 체제의 특성상 지금의 경제대국인 한국이 되지 못 하고 경제력 등 모든 부문에서 그저 그런 빈약한 국가로 전락했을 가능성이 높다. 나중에 체제를 정비해서 경제대국이 되었다 할지라도 공산국가를 경험한 뒤 급성장하는 후발주자 신세라 성장 과정에서 상당히 불안정한 시기를 거쳤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10.2. 제주도로의 정부 이전[편집]

한국판 국부천대

전쟁 당시 남한 본토를 포기하고 제주도로 대한민국 정부를 이전하게 되었다면, 한국은 제 2의 대만이 되었을 것이다.졸지에 대만과 형제국이 된다 제주도 본도 및 더 낙관적으론 낙동강 전선에 처박혀있던 때까지 경찰부대에서 점유하고 있던 전라남도의 일부 군소도서를 대한민국이 차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전라남도가 푸젠 성(중화민국)의 한국판이 되는 것. 경상도에서 피난한 군대들과 완도 등지로 후퇴했던 경찰부대가 합세하여, 경찰부대 또한 차지하지 않고 있었고 인민군도 진입하지 않았던 가거도, 진도, 만재도 삼시세끼 어촌편은 찍을 수 있게 됐을 것이다등의 외곽도서를 점령했을 가능성이 높다. 맹골도 일대의 점령도 가능했을 수 있으며 흑산도태도군도도 점령했을 가능성이 높다.[26] 그리고 보길도와 그 이웃한 섬인 소안군도들은 군부대의 지원을 받아 유지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완도 본도와 이웃한 섬들의 경우 전선에 쳐박혀있던 때까지 경찰부대에서 점유하고 있었지만, 너무 가깝기에 인민군의 총공세에 넘겨주게 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거문도백도, 손죽도 등은 대한민국이 점유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결국 전쟁 당시 행정구역을 기준으로 무안군, 진도군의 일부와 완도군 대부분, 여천군 일부를 유지하였을 것이다. 이 경우 망명 도청은 소안군도(보길도 일대)에 둘 수도 있고, 너무 위험하다고 생각되면 원래는 전라도 땅이었던 추자군도에 두었을 수 있다. 도지사 및 군수는 폐지할 수도 있고, 흑산군도(가거도 일대) 쪽이나 여천군의 경우 면장이 겸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경상남도의 일부 도서(거제도 등)를 유지하였을 수도 있다.

이 경우 울릉도와 독도가 문제가 되는데, 북한군이 울릉도로 진격하긴 쉽지 않았다는 것을 고려하면 남한의 월경지 형태나 심지어는 일본의 영토로 남았을 수도 있다. 대한민국 정부가 어쨌든 살아있기에, 미국맘대로 독도를 아예 멋대로 일본에 넘겨버리는 것은 쉽지 않다. 제주도에 망명한 대한민국 정부가 미국에 독도에 레이다 기지 등을 설치할 수 있도록 사실상 미국에 조차하는 협정을 맺고, 주일미군이 대신 독도를 지켜주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

울릉도 주민 뿐 아니라 재일 한국인 중 제주도로 망명한 대한민국 정부를 지지하는 자원입대자로 구성된 부대가 미국의 군사비 지원을 받아 울릉도와 독도를 지키는 상황도 생각할 수 있다. 제주도로 망명한 대한민국 장병들이 직접 울릉도를 지키러 가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

다만 제주도는 섬 지역이긴 해도 그나마 국토 면적이 좀 넓은 대만[27]과 달리 영토 면적이 너무 작은데다 자체 생산이 어려운 조그마한 도서 지역이라 현재 대만 하나만 겨우 지배하고 있는 중화민국이나 남명 시대 정씨왕조처럼 섬나라를 운영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나마 대만이나 남명 당시 정씨 대만 지역은 일본이 대만을 지배할 당시 일본이 세우고 간 제조업등 산업이나 자체 생산이 가능한 농토라도 있었지만 제주도와 울릉도는 농토도 척박하고 제조업 등 주요 산업과 국가를 굴릴수 있는 인구 인력들도 대부분 남한 본토에 집중되어 있고 이들 지역에는 거의 없다. 결국 중국 대륙과 화북 지역을 중국공산당과 청나라에게 잃고 대만으로 달아난 뒤에도 경제적인 부익부를 어느 정도 유지했던 현재 중화민국이나 남명 시대, 청나라 초기 연평왕국보다 더 나쁘게 가난한 빈국 상태로 전락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설사 달아난다고 해도 한반도 전역을 석권한 북한이 제주도로 도피한 대한민국을 냅둘지는 의문이다. 당장에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이 중국 대륙을 버리고 대만으로 도망갔던 중화민국에게 어떤 행위를 하고 있는지를 고려하면[28] 한반도 본토 전체를 석권한 북한이 국제 외교 무대에서 육지 본토를 잃고 섬나라 소국으로 전락한 대한민국에게 한반도 정통 정부 지위 강탈에 대한민국과 수교한 국가들과의 단교 요구 등을 강경하게 밀어붙이며 북한이 일방적으로 뺏어 먹어가면서 외교적으로 고립시켰을 공산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가 멸망하지 않고 남한 본토를 버리고 제주도로 정부를 이전해 섬나라 소국이 되었다고 해도 적화통일에 성공한 북한이 국제 외교 무대에서 자신이 유일의 한국 합법 정부임을 강조하여 자국과의 수교 조건으로 해외 여러 국가들에게 대한민국과의 단교를 강요하며 현재 중국이 대만에게 하듯이 대한민국을 정치적, 외교적으로 고립시키려고 들었을지는 의문이다. 중국 내부의 국민당과 공산당의 갈등이 내전으로 촉발되어 전쟁에서 승리한 공산당이 대륙을 차지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하고, 부패와 민심 이반으로 패한 국민당이 대만으로 달아나 전쟁에서 패전하여 중국 대륙 영토를 잃어버린 중화민국 국민당 정부가 중국 정통정부로서의 지위와 국격을 대놓고 훼손시켜버림으로서 중화민국의 국제 사회 고립의 빌미를 초래한 국공내전 이후의 중국과 대만의 양안관계와 달리 한반도의 남북한 관계는 대한민국이 6.25 전쟁 발발 전 유엔으로부터 정식 합법정부, 주권국가로서 승인받았던 상황이였고, 북한은 남한을 침략하면서 일으킨 6.25 전쟁으로 인해 국가, 정부로서의 정통성 자체가 훼손되었던데다 1950년대 당시 야만적인 공산주의 침략국가로 낙인 찍혔던 상황이라 설사 전쟁에서 이기고 한반도 전역을 석권하였다고 해도 한반도 전역을 장악한 북한을 한반도의 합법정부로 인정하되 제주도와 인근 도서 지역만 남은 대한민국을 독립국으로 인정하라고 미국등 서방 세계가 역으로 압력을 넣었을 가능성도 있다. 게다가 북한 주도의 적화통일이 되고도 대한민국 정부가 멸망하지 않고 장악당한 한반도 본토를 포기하고 제주도나 울릉도 등 기타 도서 지역으로 정부를 이전하게 될 경우 남한과 북한을 부르는 국제적 명칭도 한반도 본토를 석권한 북한은 노스 코리아 대신 코리아, 대한민국은 사우스 코리아 대신 제주란 명칭으로 불려지게 될 가능성도 크다.

대한민국이 제주도에 본진을 차렸다면 대만같이 역시 한반도에서 밀려내려온 이승만 휘하 한반도 본토인외도인들이 주도권을 쥐고 제주도 본도인본도인들을 통치하며 상당기간 대립할 가능성이 높다. 거기다 제주 역시 2.26 사건의 대만 때처럼 전쟁 이전 4.3 사건이 터졌단걸 상기한다면 많은 진통이 예상될 것이다. 지역갈등이 극심해지고 분단이 길어진다면 분리주의가 고조되어 제주 독립운동을 일으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제주 방언중화민국에서의 대만어객가어 수준으로 위상이 급상승(?) 했었을 듯하다. 대한민국 정치인들이 선거 때마다 제주 방언으로 유세하는 꼴을 봤었을지도 모르겠다.

허나 위의 상황처럼 대한민국 정부가 아예 북한군에 의해 멸망당하지 않고 한반도 본토와 서울, 대구, 부산, 광주등 남한 본토내 주요 도시들을 북한에게 빼앗기고 제주도나 울릉도, 마라도 같은 섬 지역 영토만 지배하는 섬나라 소국이 된다고 해도 대한민국이 섬나라가 된 상황을 순순이 채념하며 현재의 대만처럼 이를 현실로 받아들일 가능성은 더욱 적다. 결국 남한 수복을 외치며 한반도를 전역을 장악한 통일된 북한과 더 크게 대립할 가능성도 있고 자급자족조차 안되는 조그마한 대한민국 섬 지역들의 특성상[29] 이 상황까지 간다고 해도 섬나라 소국으로 전락한 상황을 현실로 받아들일 확률도 낮아 국제사회와 유엔에 북한의 행태와 전쟁범죄 만행들을 고발하며 명분을 쌓고 미국과 서방세계 국가들의 군사지원 도움을 받아 북한 김씨 왕조에게 점령당한 남한 본토를 탈환하려는 군사작전을 펼쳐 육지 본토를 잃고 섬나라로 전락해 본토를 탈환하려는 대한민국 국군, 미군, 서방 연합군과 남한 본토 전역을 사수하려드는 북한 사이에 다시금 전쟁이 벌어질 가능성도 있다.

10.3. 현재보다 남쪽에서 휴전선이 맺어졌을 경우[편집]

이 경우는 1.4 후퇴 당시의 전선이나 3남 지역, 더욱 극단적으로 낙동강 방어선을 경계로 휴전선이 그어졌다면이라는 시나리오다. 그러면 한국의 수도는 여전히 부산일 것이고, 산업화가 이루어져도 한국의 외교상의 입지는 현재보다 좁을 것이다.

10.4. 38선으로 원상복구할 경우[편집]

6.25 전쟁에서 중국 및 미국은 전세가 영 좋지 않을 때 전쟁 이전의 영토, 즉 38선 경계를 원상복구할려고 했으며 특히 휴전 회담에서 북한은 38선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만약 전전 이전대로 38선 경계로 되돌아갔다면 서부전선에서 북한이 강점하고 있던 경기도, 황해도개성시, 연안군, 옹진군 반도는 다시 한국이 되물릴 수 있었겠으나 반면 당시 UN군이 되물린 서부, 중부, 동부전선의 연천군, 포천시, 고성군, 인제군, 양구군, 화천군, 철원군 등 경기도, 강원도 지역은 다시 북한 영토가 되었을 것이다. 설악산 역시 북한땅으로 남았을 것이다.

10.5. 현재보다 북쪽에서 휴전선이 맺어졌을 경우[편집]

서부전선이 38선으로, 송악산, 예성강을 경계로 최소 개성시 수복만 해도 서울에 대한 보위력이 배로 증가한다. 맹조의 발톱 작전이 축소된 형태로 성공하였다면 고성군(북한)이 완전 회복되고 통천군금강산까지 탈환하였을 것이다.그리고 금강산 관광이 가능해진다 전쟁 막판 금성 전투를 치르지 않았다면 금성이 한국땅이 되고 금성 돌출지역덕분에 휴전선 종심 설정(민통선도 포함)이 가능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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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유엔군 역시 북한 분할의 영역인 평양-원산선의 경우 6.25 전쟁 때 1950년 11월 총공세 좌절과 중공군 참전 이후 1.4 후퇴 이전 검토했던 전선이었으며 전쟁 도중 39도선의 북진을 수차례 검토하였다. 우선 1950년 12월 평양-원산선에서 방어선을 구축하고 저지하는 전략 전술은 중국조차도 예상한 것이었으며, 실제로 방어가 가능한 상황이었다. 휴전 협상이 시작한 후에도 8군 사령관 밴플리트는 동부 전선에서 북진하여 통천군, 금강산을 점령하고 평양-원산선 이북으로 전선을 대치시키다는 이른바 맹조의 발톱 작전을 구상하였으며 실현되었을 경우 머지않아서 39도선으로써의 북진 작전이 개시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평양-원산만선, 청천강-함흥만선은 38선이나 현재의 휴전선보다 오히려 방어선이 더 좁아지기 때문에 압록강-두만강에서 중국군이 쳐내려왔듯이 중국군이 유엔군의 틈등짝을 노리는 것이 어려웠으며, 유엔군이 제때 병력 재건에 성공했으면 종전선에서 벌어질 고지 쟁탈전이 38선에서 39~40도선으로 북상해서 치뤄졌을 것이다.

당시 6.25 전쟁이 발발하고 나서 중공군이 남북 통일을 막으려고 전쟁에 개입한 이후로 한미 연합군은 중국이 예상한 것처럼 평양-원산선, 선(혹은 청천강-함흥)에서 방어할 수 밖에 없었다. 실제 중국이 11월 대공세 당시 최종 목표로 한 게 이 정도였다. 중공군도 당연히 유엔군이 북한 전체를 쉽사리 포기할 것이라고는 생각치 못했었다.[30]

만약, 북위 39도선에서(대동강-원산만) 휴전협정이 맺어졌을 경우, 황해도 대부분과 강원도 북부(현재 북한 강원도) 대부분, 그리고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평안남도함경남도 일부가 남한령이 되었을 것이다.후기신라 아마 39도선 이남의 황해도는 수도권 버프를 받아[31] 엄청난 성장을 했을 지도 모르고, 또 현재의 수도권은 북한의 군사적 위협에서부터 훨씬 자유로워젔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 입장에서는 많은 곡창지대와 인구를 빼앗기고, 최대 도시인 평양직할시가 직접적인 군사적 위협 아래 놓이게 되기 때문에 지금보다 북한이 훨씬 불리했을 것이다.

북위 40도선(청천강-함흥만), 평양을 포함해 평안남도의 대부분과 함경남도의 함흥 이남 지역이 한국땅이 되었다면, 북한은 더더욱 불리했을 것이다.고려 이 경우 휴전선에서 수십킬로미터 떨어진 평양이 남한의 주요 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을 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대도시 수준으로는 성장이 가능했을 것이다. 평안남도를 영원군, 대흥군 일대만 빼고 거의다 북한이 뺏기게 된다면, 평안북도에서 자강도로 가는 것도 힘들어진다. 왜냐면 철도가 안주와 개천을 통해 이어지기 때문, 청천강 가에 강의 북안을 따라 철도를 놓는다고 하더라도 새 휴전선에서 지나치게 가까워진다.

결과적으로 이 상황의 한국은 실제 역사의 대한민국보다 훨씬 유리한 입장에 놓이게 된다. 일단 대한민국의 영토가 38선 이북에 걸쳐져 있는 데다가, 38선 이북 영토가 한반도 북부의 인구밀집지역이자 평야지대인 평양을 포함한 서북지방이다. 만약에 이러한 상황에서 제 2차 6.25전쟁과 같은 내전이 발발한다고 해도 기본적인 영토나 인구의 역량에서 실제 역사와는 비교가 안 되게 남한이 유리하다. 여기서 북한이 지배할 영토라고 해봤자 평안남북도-함경남북도가 전부인데, 이곳에는 한반도 최악의 혹한지대인 개마고원이 자리하고 있으며 농사를 지을 만한 토지가 거의 없어 식량 생산에도 불리하며 인구도 적다. 그나마 이점이라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설치한 함흥, 흥남 등의 중화학 공업지대 정도인데 전쟁 당시 다 캐발살나서 이것만으로 북한의 경제력을 떠받치기엔 역부족이다. 더 좋은 사실은 대동강-원산만 이남에는 현재 북한 인구 중 30% 정도가 거주하고 있단 사실이다.[32]

대동강-원산만 경계선을 두고 휴전하였을 경우 한국은 후기신라의 영토로 복구할 수 있으며 북한의 중추지인 개성, 황해(남북)도, 평안남도 일부, 강원도의 영토를 얻게 되어 한반도 7,500만명 중 5,800만명의 인구를 수용하게 되어 북부지방의 인구 약 1700만명과 세 배 이상으로 인구 격차를 벌리게 된다. 게다가 북한 입장에서는 평양을 비롯해 평안도-함경도 사이의 평원선 구간이 최전방이 되어 수도를 이전해야 하고, 국토가 사실상 둘로 분열되는 치명적인 단점을 얻게 된다. 남한 입장에서 가장 큰 장점은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이 즉 북한의 직접적인 포격이나 핵공격 등의 대규모 파괴 위협에게서 마침내 해방된다는 것을 의미한다.다시 말해, 서울, 수도권이 군사적인 전방에서 한발짝 벗어나 지금의 충청 지역과 같은 군사적인 입지로 변화하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미사일을 비롯한 장거리 공격 무기는 막기는 어럽겠지만 최소한 북한이랑 전쟁이 한국의 파멸 위협으로 이어진다는 코리안 리스크를 막기 쉬워진다는 점은 제일의 장점이며, 북한을 상대로 현재처럼 약간만 의심이 가도 전면전을 택일할 수 밖에 없는 상황도 막을 수 있다.

따라서 한국은 북한을 상대로 평안남도랑 강원도 일대에서 광범위한 전선을 형성하여 큰 피해 없이 북한군의 도발에 맞서 이길 수 있다. 최소한 지금보다는 북한의 대남 도발의 위험은 매우 크게 감소했을 것이다. 남한의 압도적인 인구와 부양력을 갖춘 대부분의 평야지역을 얻게 되고, 이렇게 상승한 국제적 위상를 활용하여 북한의 국제적 지위를 크게 축소하고 사실상의 체제 경쟁에서 훨씬 이른 시기에 승리하여 한반도의 정통 국가로 인정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이 사실을 북한이 모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상태로 휴전협정을 했을 때 받아들일 가능성은 낮았을 것이다. 북한 입장에서 평양, 황해(남북)도의 일대의 영역은 한국에게 저항할 수 있는 인적 물적자원이 존재하는 곳이다. 평안남도, 평안북도, 함경남도, 함경북도(+자강도,양강도)에 한정된 영역을 보유할 경우에는 북한은 한국에게 저항할 수 있는 물적 인적자원이랑 군사적 기반을 상당수 상실하게 된다. 따라서 북한은 절대 분할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했을 테지만, 당시에 여러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던 중국과 소련 입장에서는 미국과의 대결 구도 부담을 덜기 위해 39도선 이북의 완충지대라도 확보하기 위해 종전에 나섰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을 것이다.

북한이랑 제 2차 6.25전쟁이 터질 경우 북한초살 한국은 서울 수도권이 피해를 보진 않겠지만 평양을 비롯하여 중북부 지역이 피해를 입는 것까지는 면하기 힘들다. 대동강-원산만 이북 지역에도 현재 1700만~1800만명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으므로 실제 사상자가 수십만명 정도는 예상가능하고, 복구비용도 엄청날 것이다. 그로 인하여 한국정부는 북한이랑 접경 지대에 대한 개발을 제대로 하지 않다가 지역민들의 반발을 부를 수도 있다. 물론 이를 감안하더라도 지금보다 북한이랑 대치가 훨씬 수월해진다는 것은 확실하다. 한국의 인구도 현재의 5,100만명 인구에서 현 한반도 인구의 약 75% 이상인 5,800만명 정도 인구로 하드웨어가 확장될 것이고 북한은 1700만~1800만 명 정도의 인구로 한국이랑 대치해야 하기 때문이다.

반면 북한의 중소 종속이 심화된다. 이는 중국과 소련이 북한을 장악하기가 그만큼 수월해짐을 의미한다. 북한 입장에서는 아무리 보충 인력을 끌어모아도 50만명을 충병하기 힘든 수준에서 평시에는 6~70만명, 전시에는 100만명이 넘어갈 수 있는 남한군의 대군을 맞설 엄두도 내지 못할 것이다.한국은 버프하고 북한은 너프된다 중국과 소련은 완전히 약체화된 북한 보호를 명분으로 중공군 및 소련군을 주둔시킬 확률이 높으며,주조중군? 주조소군? 이는 한국이 6.25 전쟁 이후 한국이 상대해야 할 적이 북한이 아니라 중국 및 소련이라는 것이다. 이는 북한이랑 차원이 다른 문제가 될 것이다.

대신에 대동강-원산만 남안에 배치될 한국군 또는 UN군을 경계하여 휴전선 경계지대에 상당한 군사력이 집중되었을 가능성이 있고, 중국-소련이 북한과 연계하여 수시로 한국과 국경충돌을 벌였을 가능성은 있다. 설령 중공-소련군의 침공으로 북한을 구원했다 하더라도 이럴 경우 한국은 이미 북한과의 체제경쟁을 이긴거나 다름없기에 냉전이 종료될 시점에 북한이 자동적으로 체제 붕괴되어 한국에 흡수통일됐을 가능성이 높다.

10.6. 북진통일 성공[편집]

북진통일이 성공했다면 김일성은 개털이 되어 연변조선족자치주로 피난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중국 땅에서 망명정부 형태로 살아남거나, 소련의 후견 하에 간도의 일부를 얻어내 명목상의 북한 영토를 직접 통치하는 정식정부의 지도자로 김일성이 남았을 수도 있다. 중국으로부터 연변조선족자치주 전체를 양도받는 것은 현실성이 거의 없고, 연길 일대의 조선시대에 원래 간도분쟁이 있던 조그만 지역(20,000 km2 정도) 만 얻어내어 잠정적이나 정식 북한땅으로 통치하게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당시 정황을 봤을 땐, 일제강점기의 임시정부처럼 간도나 연해주 지역에 공관을 내주고 망명정부 수준에서 처리를 한 다음에 전쟁 패배에 승복하여 남한 정부의 독자적인 한반도 지배를 승인했을 가능성이 높다. 중국과 소련 입장에서 망명정부를 받아들인다 해도 그들의 내외적 정책상 자신의 영토를 떼어준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결국 명목상으로만 김일성이 지도자로 남게 되고 한반도 전역이 통일이 되는 상황이 왔겠지만, 북쪽 내부에 남아있는 공산당 잔당들의 게릴라 저항이 심했을 것이며, 이미 한반도 전역을 휩쓸고간 전쟁의 상처가 너무나 컸기 때문에 양측의 갈등이 다시 폭발하여 제2의 내전이 발발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 당시 한반도는 일제강점기에서 막 독립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양쪽 모두 제대로 된 체제가 확립된 상황이 아니었던데다, 민주주의를 경험해보지 못한 신생국이었기에 지금의 아프리카나 1970, 80년대의 동남아시아와 같은 혼란이 오래 지속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중국과 소련 입장에선 미군과 직접 국경을 맞닿게 되는 아찔한 상황이 현실이 되기 때문에 패배는 인정하되 미군이 38선 이북에 주둔하지 못하게 한다던가, 아니면 아예 완전철수를 요구하고 한반도를 사실상의 중립국으로 남도록 협상을 진행했을 가능성이 높다. 즉, 북진통일이 성공하였더라도 한반도가 쉽게 안정화되지는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이다.

11. 기타[편집]

  • 미국의 역사학자 존 톨랜드가 딘 장군의 유족을 찾아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당시 딘 장군이 전쟁 중에 얻어먹었던 음식 중 하나가 마늘 장아찌였는데, 딘 장군은 마늘 장아찌의 맛에 매우 감탄하여 일부러 하산해서 더 얻어오기까지 했다. 전후 샌프란시스코 육군장교회관에서 백선엽과 점심을 먹으면서 그가 하는 말이 "백 장군, 요즘 내가 말이지요, 김치를 잘 담근답니다. 한국에서 생활하다가 김치 맛에 푹 빠졌나 봅니다."

  • 정전 협정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전선 각지의 부대에 알리는 전보를 쳤던 사람이 바로 송해였다고 추정된다. 고향이 이북인 송해는 6.25 전쟁 당시 전보병으로 근무했는데, KBS2 김승우의 승승장구에 출연하여 몇 십 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히 당시에 쳤던 모스 부호를 기억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앞서 소개된 이승만과 로버트슨의 소휴전회담 중 1번 항목의 상호 안전보장 조약은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결실을 맺었다.

  • 스탈린은 6.25 전쟁 중 인민재판에 대한 정보를 전파받자마자 "김일성 동무는 이 미친 짓을 규제하지 않고 무얼 하는 건가?"라며 격분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공산군이라는 집단은 인민의 협조를 얻는 것을 미덕으로 하는데 그 인민에게 반감을 불러 일으키는 짓을 하는 건 정신나간 행태이기 때문이다.

  • 근세기 가톨릭 성인 중 가장 유명한 성인 중 한 명인 파드레 비오의 경우에는 6.25 전쟁을 세상 종말의 전조라는 사적 계시를 하기도 했다. 1950년에 일어난 전쟁은 6.25 전쟁뿐이므로 6.25 전쟁을 두고 말하는 게 분명하겠지만 이 사적계시의 날짜가 6.25 전쟁이 일어나기 거의 5달 전인 2월이다.

  • 북한의 남침 1시간전 지구반대편 브라질에서는 제4회 브라질 월드컵의 개막전 킥오프가 있었다.

  • 관우의 67대손이자 관평의 66대손인 관충금(關忠金)이 중공군 신분으로 이 전쟁의 1.4 후퇴에 참전하여 국군과 UN군을 사살했다.

  • 1960 로마 올림픽1964 도쿄 올림픽 남자 마라톤을 2연패한 아베베 비킬라가 이 전쟁에서 에티오피아군 참전부대인 각뉴부대의 대대장 경호병으로 참전했었다.

  • 아폴로 계획 당시의 우주 비행사였던 닐 암스트롱 역시 6.25 전쟁 참전용사이다. F9F-2B 팬서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하였다.

  • 영국의 원로 영화배우 마이클 케인 역시 이 전쟁에 영국 육군의 병사로 참전하였다.

  • 케이툰에서 매주 금요일마다 연재되는 웹툰 야오네집 21화에서는 6.25 전쟁을 거쳤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작가의 어머니는 피난길에 친어머니에게 버려졌다가 유엔군의 흑인 군인, 북한 인민군 병사(추정) 덕에 목숨을 건졌고 한국군 장교의 지인에게 맡겨졌다가 우연히 그 집을 찾아왔던 영어교사 부인이 데려가 부부가 양녀로 삼았다고 한다. 덧붙여 작가가 어린 시절 옆집에 살았던 할머니는 평소보다 불편했던 체험 쯤으로 회고했다고 하고 작가의 시어머니는 맛있는 음식들이 많았던 시절로 기억하고 작가의 아버지는 평범하게 모내기하다 미군 부대 카투사에 들어가 스크램블 에그 하는 법을 배워온 게 다라고 한다. 한 시대를 통과한 사람들이 모두 같은 기억을 가지지는 않았다는 작가의 말이 와닿는다.

12. 다룬 책[편집]

12.1. 역사학계에서[편집]

현재까지는 다음 학자들이 역사학계에서 최고의 업적을 이뤘다고 평가받는다.

  • 브루스 커밍스 :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Vol. 1은 6.25 전쟁 발발전까지 남한의 내부상황을 다뤘는데 최고의 실증연구를 보여줬고 실제 많은 한국의 학자들이 넘사벽을 느꼈다. 그러나 정작 6.25 전쟁과 그 이후를 다룬 2권은 추측과 근거없는 음모론으로 가득해서 가루처럼 까였다. 1권은 소련문서 공개 이후에도 가치가 높은 학술서라 평가받는다. 그러나 2권은 당시에도 비판받았고 소련문서가 더 공개되자 가치를 잃었다. 그가 좌파적 시각을 가진 탓도 있을 수 있겟으나 군사학적 분석을 무시한 지나친 실증주의 집착이 주 원인이었다. 반대로 1권은 주로 한국 내부를 미군 문서를 중심으로 분석했기 때문에 실증주의 집착이 오히려 강점이 됐다.

  • 박명림 : 정치학 박사 학위 논문으로 브루스 커밍스의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에서 주장된 남침유도설을 논파하였다. 사실상 한국 전쟁의 기원에 대한 연구는 박명림에서 완결이 났다고 볼 수 있다. 당시 기준에선 최고의 실증업적을 해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학술적인 연구를 할 때 꼭 봐야하는 책이다. 그러나 러시아가 내놓은 한국전 요약의 비중이 크다는 한계가 있다. 이 요약은 당시 스탈린과 소련의 개입을 축소했다는 점이 문제로 지적됐다. 그리고 아직 미국에서 소련문서 번역이 완벽하게 이뤄진 상황이 아니었다.

  • 김영호 : 대표 연구저서 '한국전쟁의 기원과 전개과정', 스탈린의 세계전략이 6.25 전쟁에 미친 파급력을 분석하였다.

  • 김명섭 : 대표 연구저서 『전쟁과 평화 (6.25전쟁과 정전체제의 탄생)』, 정전협정과 한미동맹으로 구성된 6.25 전쟁과 정전체제에 관해서 집대성하였다.

  • 정병준 : 대한민국, 북한, 미국, 소련의 문서들을 전부 교차검증한 최초의 학술도서다. 실제 정병준 교수는 미군 문서와 북한군 노획 문서를 미국까지 가서 1년이 넘게 직접 확인하고 복사해서 가져왔다. 또한 당시 소련 문서는 미국에서 완벽히 번역된 상태였다. 실증연구로 브루스 커밍스와 박명림을 능가하는 최고의 성과를 이뤄냈다. 이건 정병준이 꼭 박명림이나 브루스 커밍스보다 뛰어난 학자라기보단 당시에 소련 문서가 미국에서 완벽하게 번역된 이유도 있고, 정병준 자신도 이 점을 자세히 설명하며 미국 측 학계의 대단한 점을 저서 '한국전쟁'에서 자세히 설명하며 찬사를 보내고 있다.

  • 김동춘 : 대표 연구저서 '전쟁과 사회'

  • 박태균 : 한국전쟁 발발 이전부터 한국전쟁 발발, 정전과정 등 개략적으로 다룬 대중역사서.

12.2. 군사적 자료[편집]

아마존에서 'Korean War'로 검색하면 5,263종의 책이 검색된다. 절반 이상이 참전용사들의 수기.

퓰리쳐상을 수상한 저명한 저널리스트 데이비드 핼버스탬(David Halberstam)저《콜디스트 윈터: 한국전쟁의 감추어진 역사》(The Coldest Winter)는 꼭 읽어보도록 하자. 한국전을 둘러싼 열강들의 정치싸움과 맥아더의 삽질을 잘 알게 될 것이다. 단, 미국인이 지은 책인 만큼 한국의 시각과 한국군에 대한 내용은 전무하다시피 하니 이 점은 참고하도록 하자.

군 복무 중인 밀덕이라면 한국군이 편찬한 <한국전사>#[33]를 열람해볼 수도 있다. 몇 가지 버전이 있지만 21세기 들어서 아주 크고 아름다운 파란색 표지 버전으로 6.25전쟁사라는 이름을 새로 붙여서 출간되고 있으며, 11권으로 완간 되었다. 이 <한국전사>는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서 웹으로도 공개돼 있는데 PDF로 다 공개돼 있으니 관심 있으신 위키러들은 언제든지 참고 가능. 세금이 아깝지 않은 훌륭한 사례 중 하나다. 물론 책으로 소장하려면 구입도 가능하다. 오프라인상으로는 서울 용산구에 있는 전쟁기념관 내부 1층 우측의 카페에 책꽂이에 판매도서용이라 해서 진열되어 팔고있다. (2016/09/11 수정자의 실제구입경험), 재고가 있다면 1권당 거의 2만원대돈으로 살수야 있겠지만 상업용서적(?)이 아닌 비매품에 가까운 책이라 상설재고 여부는 불투명하다. 책의 분량은 거의 A4크기로 800페이지다. 군 기관에서 발간한 책인만큼 민간 서적에 비해 훨씬 자세하게 전쟁기간동안 군사적, 전술적 상황에 많은 비중을 할애했다. 두드러진점은 어느 전투, 전역, 작전이 있으면 세부내용과 특정전장의 지리환경, 투입부대, 전투서열과 각 제대 지휘관 성명, 전술지도(?)로 당시 상황 구현과 일자별 각 제대,부대의 전투기록명시가 있다. 구체적으로 대입하자면... 네이버 블로그에 태평양전쟁 연재로 유명한 파워블로거 대사가 서술하는 내용의 수준이 이 책에서 엇비슷하게 구현되었다고 보면 된다. 위 한국전사는 2016년 현재, "6.25전쟁사" 총3권으로 편찬된 상태. 물론,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홈피에서 다운로드하여 볼 수 있다.(17.04.06현제 각 권마다 1개의 PDF파일로 전11권)

그 외에는 우정문고에서 출판한 책인 <6.25전쟁1129일>이 있다. 내용이 충실하고 지도나 사진등의 자료도 많으니 볼 가치가 많다. 다만 비매품인게 흠. 학교, 국공립도서관에 있는 경우가 좀 있으니 거기서 보자. 계룡대 견학때 무료로 줄때도 있다.

그 이전인 1970~1980년대 출간된 서적들은 대체로 한자의 압박이 좀 크다. 특히 전투사는 아직 재간이 되고 있지 않다. 한자가 후달리는 밀덕에겐 약간 아쉬운 부분. 하긴 영어, 한자는 기본에 일본어/러시아어/독일어 해독능력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코어 밀덕에게는 문제가 아닐지도.

12.3. 다큐멘터리[편집]

  • 컬러로 보는 한국전쟁 - 잔인한 장면이 있으니 시청에 주의할 것.

1부 영상, 2부 영상

밀덕질/역덕질은 아니고 개론적이지만 전반적으로 꼼꼼히 설명된 자료를 찾는다면, KBS에서 제작, 방영한 10부작 <한국전쟁> 다큐멘터리를 추천할 만하다. 원작은 1990년에 제작, 방영되었고 그해 방송대상까지 받았던 작품. 이후 2010년에 리메이크되는데 이때 구 소련 해체 이후 공개된 문서/영상자료와 중국측의 협조를 받은 자료 등을 대폭 보강하였다. 이 다큐에는 전쟁의 배경, 당시 한반도와 관련된 국제적 역학, 관련 인물들의 증언 등이 잘 소개되어 있다.

특히 1990년판 당시 생존해 있던 여러 관련자들의 증언을 많이 실어놓았는데 DVD에서 갑자기 화면비가 4:3으로 나오는 부분이 있다면 90년판 내용을 활용한 부분이라고 보면 된다. 한편으로는 비참한 전쟁의 충격에 대한 당시 '휘말린' 사람들[34]에 대한 인터뷰도 많이 담겨 있다. 다만 DVD 판매 때문에 KBS 홈페이지에서 다시 보기는 할 수 없으며, DVD로 구입해야 하는데 선례들이 그렇듯이 좀 비싼 편.

한편 국내에 소개된 국외 제작 6.25 전쟁 관련 다큐멘터리로는 1988년에 KBS를 통해 방영된 영국 BBC 제작 다큐멘터리 '한국전쟁(4부작)'과 1994년 SBS에서 방영된 러시아 오스탄키노에서 제작한 '한국전쟁의 실상(2부작)'이 있다.

'한국전쟁의 실상(2부작)'은 SBS에서 먼저 방영되고 다음날 KBS에서 방영되었다. 당초 방송 3사가 공동 구매하기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SBS 측이 이를 깨고 프리미엄을 얹어서 독점 방영권을 따냈고, 이에 KBS 측이 시청자의 보편적 접근권을 내세워 항의하는 바람에 SBS는 해당 프로그램을 KBS에 무상으로 제공해야 했다. 당시 SBS 가시청권은 서울 및 수도권으로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KBS의 주장은 일리가 있었고, KBS는 정규 편성을 변경하여 긴급 편성 방영했다.

BBC 제작 다큐멘터리 '한국전쟁'은 고품격의 다큐멘터리를 많이 제작한 BBC의 명성에 비해 여러모로 아쉬운 점이 없지 않지만, 당시 국내에서 접하기 어려웠던 중국 인민지원군 참전자들의 증언을 들을 수 있다. 그리고 러시아 오스탄키노에서 제작한 '한국전쟁의 실상'은 6.25 전쟁 당시 소련, 중국 등 공산권의 동향을 소개하고 있는데, 특히 기밀 해제된 구 소련 문서를 통해 당시 소련이 6.25 전쟁에 비공식적으로 참전했음을 증명하고 있다.

그 외의 6.25 전쟁 관련 다큐멘터리

  • 76인의 포로들 - MBC에서 제작된 2부작 다큐멘터리로 1993년 방영되었으며, 그해 한국방송대상을 수상했다. 6.25 전쟁 당시 남북한 대신 중립국행을 택한 76인의 포로들의 이후 행적과 현재의 삶을 추적한 다큐멘터리로, 인도, 브라질, 아르헨티나 현지 취재를 통해 제작되었다.

13. 관련 작품[편집]

외국 것도 많기는 한데 , 당연히 한국의 작품들이 더 많다.

13.1. 문학[편집]

13.2. 영화[편집]

한국 영화가 아닌 것은 괄호 안에 제작국가를 명시하였다.

13.3. 드라마[편집]

13.4. 뮤지컬[편집]

13.5. 만화[편집]

13.6. PC게임[편집]

  • 워게임: 레드 드래곤은 6.25 전쟁이 직접적인 배경은 아니지만 부산 포위의 작전 계획이 낙동강 방어선, 인천상륙작전과 유사한 부분이 있다. 또 2번째 DLC로 추가된 신규 캠페인이 '제2차 한국전쟁'이기도 하다.

13.7. Mobile 게임[편집]

13.8. 노래[편집]

14. 참고 문서[편집]

15. 어록[편집]

"조선 문제는 결코 조선에만 한정된 문제가 아니다. 조선 문제는 동양의 발칸 문제다. 조선은 세계 평화와 혼란을 좌우하는 열쇠다. 전세계의 문제이자 전 인류의 문제다."

"포탄 맞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요? 조그맣게 갈비 조각이 나요. 사람이 분해돼 버리고 아무것도 없어요. 펑 하고 터지고 나서 가 보면 (손바닥을 반절쯤 붙잡아 보이며) 나무에 창자 조각 요만큼 걸려 있고 살 토막 요만큼 걸려 있고 그래요. 포탄 맞으면 아무것도 없어요... 버린 게 아니라 (시체를) 찾을 수가 있어야 버리죠. (영화 고지전을 보았느냐는 질문에) ...그런데 그건 애들 장난이지."

- 6.25 전쟁 참전용사 김달육(8사단 16연대)

"지금 한국 국민이 전쟁 속에서 고통당하고 있는데, 이를 돕지 않는 것은 제 양심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 윌리엄 쇼

"모두들 앉아 내 말을 들어라. 그동안 잘 싸워주어 고맙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더 후퇴할 장소가 없다. 더 밀리면 곧 망국이다. 우리가 더 갈 곳은 바다밖에 없다. 저 미군을 보라. 미군은 우리를 믿고 싸우고 있는데 우리가 후퇴하다니 무슨 꼴이냐. 대한 남아로서 다시 싸우자. 내가 선두에 서서 돌격하겠다. 내가 후퇴하면 너희들이 나를 쏴라."

"내가 여기서 죽더라도 끝까지 한국을 지키겠다."

"Stand or die."
사수 혹은 죽음뿐.

"국군은 대통령으로부터 명령을 기다리고 있으며, 명령만 있으면 점심은 평양에서 먹고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을 수 있다."

"어느 나라에서든 인민은 그들의 주권과 독립을 위해서 유혈전쟁을 수행하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우리는 승리를 얻기 위해 어떠한 희생도 주저해서는 안되고 지금부터라도 장기전을 계획하지 않으면 안된다."

"서울시민 여러분, 안심하고 서울을 지키십시오. 적은 패주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여러분과 함께 서울에 머물 것입니다. 국군의 총반격으로 적은 퇴각 중입니다. 우리 국군은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할 것입니다. 이 기회에 우리 국군은 적을 압록강까지 추격하여 민족의 숙원인 통일을 달성하고야 말 것입니다."

"우리 인민군대는 전투를 계속하면서 부득이 후퇴하지 않을 수 없다. 인민군은 마지막 피 한 방울을 다 흘릴 때까지 용감히 싸우라."

- 인천 상륙 작전 이후 평양에 방송된 김일성의 음성. 그리고 몇시간 뒤 김일성은 평양에서 도망쳤다.

"야, 이 자식아! 전쟁이 잘못되면 나뿐 아니라 도 책임이 있어!"'[37]

"조선통일은 무력에 의해서만 가능하며 미국이 남한 같은 작은 나라 때문에 3차대전을 시작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미국의 개입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남한은 미국에서 수 천 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작은 나라지만, 그 곳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든 미국인들에게 중요합니다. 6월 25일 공산주의자들이 남한을 공격했습니다. 이는 공산주의자들이 독립 국가들을 정복하기 위해 군사력을 사용하려 한다는 것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북한의 남침은 유엔헌장 위반이고 평화를 침해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도전에 정면으로 대응해야 합니다."

"그 개새끼들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합니다!"

"미국은 어려움에 처한 친구를 버리는 나라가 아닙니다."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통일에 착수하자는 조선사람들의 제청에 동의한다. 그러나 이는 중국과 조선이 공동으로 결정해야 할 문제이고 중국동지들이 동의하지 않을 경우에는 다시 검토할 때까지 연기되어야 한다."

"나는 인천상륙작전이 5000 대 1의 도박이라는 점을 알고 있지만 그 정도 확률을 감당하는 데 이미 익숙합니다. 우리는 인천에 상륙할 것이고 적을 분쇄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인천 앞바다에 와 있습니다. 우리는 드디어 오늘 상륙작전을 감행하게 되었습니다. 이 작전이야말로 불법 남침한 북괴군을 분쇄하고 위기에 처한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정의와 자유를 회복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 손원일인천상륙작전을 앞두고 USS Pikaway (APA-222)함 함교에서 상륙개시를 기다리는 해병대 장병들에게 한 훈시

"국군과 유엔군은 수도 서울을 탈환했다."

"정전의 실현은 외래 제국주의 연합세력과 미제의 앞잡이 이승만 매국도당을 반대하며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수호하기 위한 우리 인민의 3년간에 걸친 영웅적 투쟁의 결과이며 우리 인민이 쟁취한 역사적 승리입니다."

"나는 정전이라는 것이 결코 싸움을 적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게 하며 고난과 파괴를 더하고 전쟁과 파괴적 행동으로 공산 측이 더욱 전진하여 오게 되는 서곡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였기 때문에 정전의 조인을 반대하여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정전이 조인되었음에 나는 정전의 결과에 대한 나의 그동안 판단이 옳지 않았던 것이 되기를 바란다."
- 이승만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원한이야 피에 맺힌 적군을 무찌르고서
꽃잎처럼 사라져 간 전우야 잘 자라

우거진 수풀을 헤치면서 앞으로 앞으로
추풍령아 잘 있거라 우리는 돌진한다
달빛어린 고개에서 마지막 나누어 먹던
화랑 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야

고개를 넘어서 물을 건너 앞으로 앞으로
한강수야 잘 있더냐 우리는 돌아왔다
들국화도 송이송이 피어나 반기어주는
노들강변 언덕 위에 잠들은 전우야

터지는 포탄을 무릅쓰고 앞으로 앞으로
우리들이 가는 곳에 삼팔선 무너진다
흙이 묻은 철갑모를 손으로 어루만지니
떠오른다 네 얼굴이 꽃같이 별같이

- 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 현인 노래, 전우여 잘 자라라는 노래이다. 매우 황당하게도 이 노래를 1980년대에 초등학생(당시는 국민학생) 정도의 소녀들이 고무줄 놀이를 하면서 부르기도 했다.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조국을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맨 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 발을 굴러 땅을 치며 의분에 떤 날을
이제야 갚으리 그날의 원수를 쫓기는 적의 무리 쫓고 또 쫓아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이제야 빛내리 이 나라 이 겨레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불의의 역도들을 멧도적 오랑캐를
하늘의 힘을 빌려 모조리 쳐부수어 흘려온 값진 피의 원한을 씻으리
이제야 갚으리 그날의 원수를 쫓기는 적의 무리 쫓고 또 쫓아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이제야 빛내리 이 나라 이 겨레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정의는 이기는 것 이기고야 마는 것
자유를 위하여서 싸우고 또 싸워 다시는 이런 날이 오지 않게하리
이제야 갚으리 그날의 원수를 쫓기는 적의 무리 쫓고 또 쫓아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이제야 빛내리 이 나라 이 겨레

- 6.25의 노래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1] 흔히 한강철교라고 잘못 알고 있는 사진이지만 실제로는 대동강 철교다. 그때 당시 한국군과 유엔군은 평양 철수를 하고 있었다.[2] 사실 이탈리아는 6.25 전쟁 발발 5년 후인 1955년 12월 22일에 UN에 가입했지만 6.25 전쟁 당시에는 유엔군의 이름으로 참전하였다. 링크[3] 프란시스코 프랑코 독재 체제의 스페인국 시절.[4] 당시에는 카스트로 정권 수립 전이여서 국군 측으로 의료 및 물자 지원을 했다.[5] 한국어 위키피디아에는 물자지원국의 하나로 기재되어 있다.[6] 침략국인 북한적화통일이라는 목적을 끝내 이루지 못했다. 방어전이라는 목적에서만 보면 대한민국이 성공했지만 한국군 및 유엔군도 방어전을 넘어 38도선 이북 지역 수복을 위해 북진했다가 후퇴했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전쟁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고 양측 국가에게 극심한 손해였을 뿐 이익은 없었다.[7] 전쟁 말기 한국군 58만, 미군 34만 가량이었기에 이 이상의 수치로 추산된다. 최대 수치는 공산군보다 적은걸로 추정된다.[8] 미군 사망자는 4만 명 가량이고 한국군 사망자가 14만이지만 한국군의 경우 의용군 등으로 입대한 상태에서 전사하여 군복무 기록이 남지 않은 경우. 북한에 억류된 뒤 그대로 거기서 학살당한 사람 등이 굉장히 많아서 정확한 통계를 내기가 쉽지 않다.[9] 보도연맹 등 학살 피해자 20만여 명 포함[10] 공산군 역시 UN군과 비슷한 사례로 누락된 수치가 많기에 정확한 수치 추산은 힘들다. 그래서 자료를 보면 온갖 추측이 다 있다.[11] 이대근, 현대한국경제론: 고도성장의 동력을 찾아서, 경기: 한울 아카데미, 2008, p.60[12] # [13] 특히 일본은 서유럽과 마찬가지로 이미 완성된 인적 자원과 사회 구조를 가진 국가였고 6.25 전쟁 이전부터 경제 재건에 착수한 상태였기에 전쟁이 없었어도 경제력을 재건하기는 했을 것이지만 6.25 전쟁이 이를 크게 앞당긴 것은 분명하다.[14] 어느 정도냐 하면 20만명이 봉기할 거라고 했다. 그런데 정작 이떄 남로당은 대한민국 국군의 토벌로 죄다 사라졌거나 귀하하였다. 지하에 숨어 저항하는 박갑동[15] 이현상 같은 이들이 남아있다 쳐도 사실상 사라진 거나 다름없었다.[15] 박헌영의 비서 남로당 숙청 당시 사형까지 갔으나 스탈린 격하 운동으로 석방된 후 중국, 홍콩을 거쳐 일본으로 망명하여 현재 도쿄에 거주 중이다.[16] 당시 유고슬라비아는 코민포름에서 제명당하여 비동맹 국가에 속하였다. 즉 체제는 공산주의지만 친소는 아니었다.[17] 정확히는 워싱턴 포스트지의 만평을 #인용한 것이다. 만평 맨 위를 보면 'Туђу хумор', 해외 만평이라고 적혀있고, 아래에 인용처인 워싱턴 포스트지를 'Вашингтон Пост'라고 인용해놓은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이 점이 유고슬라비아가 북한의 남침을 인정했다는 사실을 흔드는 것은 아니다. 언론에서 북침설을 비판하는 내용을 게재한 것은 사실이다.[18] 이 시기엔 38선 부근에서 국지전이 일어나던 상태로, 함부로 무기를 쥐어줬다간 확전될수도 있었고 소련 등 공산권을 자극할수도 있었다. 즉 평화를 해칠수 있다는 이야기.[19] 그러나 이완범은 논문(1995)에서 준비부족론과 군사적 편의론을 비판하였다. 8월 11일 급작스럽게 지어졌다는 준비 부족론은 증언 당시 사용된 지도는 30도선과 40도선이 표기되어 있었는데 30분만에 두 대령이 책임지고 업무를 추진한 것은 불가능 하며, 1944년 초부터 한반도의 군사점령은 논의되었고 1944년 12월 전략정책단장 런컨 준장이 일반명령 1호 초안을 작성하면서 정보부로부터 받은 자료와 지도들을 토대로 구상되어 온 것이며, 1945년 7월 4일 한반도 4분할안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45년 2월 OSS가 일찍히 작성한 38선을 인지할수 있는 더 낮은 축척의 지도를 사용하였고 이쯤을 전후로 38도선이 안이 등장했을 것으로 보이며, 이를 뒷받침 하기 위해 군사적 편의론을 비판하며 정치적 분할선의 의미를 주장한다. 양 국가 모두 모험을 강행한다면 미,소 모두 독점이 가능한 한반도였지만 준주변부적인 전략적 위치로 세력분할적 사고에 따르면 반분하는 위치가 극단론자를 제외하면 가장 알맞았으며, 7월 25일 포츠담에서 국무장관 제임스 번즈의 질문에 전쟁부 작전국장 헐 중장은 38선을 가장 중요한 위치로 판단한다고 하였다. 또한 38선은 양국 점령후에 바로 봉쇄돼면서 단순히 무장해제를 위한 군사분할선이 아닌 실질적 세력선이 되었다. [20] 다만 대만의 경우 과거 반공정책에 따라, 홍콩은 대만의 영향을 받아 Korea의 뜻으로 한(韓)도 섞어 쓴다. 예를 들어 대만과 홍콩에서는 북한을 뉴스에서도 北韓이라고 칭하는 경우가 많다.[21] 사실 6.25 전쟁은 하늘에서 제트기제트기를 격추시킨 최초의 전쟁이다.[22] 그러나 사실이 아니라고 딱 잘라서 서술하기는 어렵다. 후술 언급한 국가들중 터키는 실제로 끊임없이 히틀러의 참전요구를 거절만 하면서 중립만 유지하다가 이미 대세가 기울대로 기운 1945년 3월에야 연합국에 붙었기 때문에 미국의 우방임을 적극 어필해야할 입장이었다. 서방국가와 친한 이웃 그리스와 사이가 나쁘기 때문에 더욱그래야했다. 소련이 카프카스에 진출하면서 안보적 위협이 커지기도 하였고 말이다. 에티오피아는 이탈리아에 정복되었다가 독립한 신생국 입장이라 국제사회에서 입지확보 기회가 필요했으며 태국은 비록 자의는 아니었으나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군이 통과가능하도록 국경을 열어줬던 사실상의 협력국이라는 약점이 있었다. 그외의 나라는 모두 미영과 안보적 이해가 비슷한 영연방 국가다.[23] 쉽게 말하면 一(일)은 맥락에 따라 '하나'라는 뜻의 명사로 쓰일 수도 있고 '하나로 하다, 즉 통일하다'라는 뜻의 동사로 쓰일 수도 있고 '한 번'이라는 뜻의 부사의 뜻을 나타낼 수도 있다는 것이다.[24] 출처 [25] 이승만 대통령의 경우 신기할 만치 반일, 친미 주의자이다. 실제로 임시정부 시절부터 활동, 구미 외교관에서 활동하는 등 미국에 사는 한인들의 파벌싸움이나 너무 친미적인 사고방식으로 비판를 끼치긴 했어도 한국의 독립에 영향을 준건 사실이다.[26] 가거도의 경우는 전쟁 난 줄도 모르고 있다 전쟁이 거진 끝나고 나서야 전쟁이 난 사실을 알게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27] 경상도 정도 면적이다.[28] 당장에 해외에서 범죄를 저질렀던 대만인 범죄자들도 대만으로 인도되지 않고 중국으로 강제송환될 정도다.[29] 바베이도스나 도미니카 연방, 사모아 등 현존하는 남태평양이나 카리브해의 섬나라 소국들의 섬 영토들보다 국가 운영을 하기에는 외세의 지원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할 정도로 영토 면적이 굉장히 협소하다.[30] 실제로 중공군의 총사령관 펑더화이는 유엔군이 평양을 너무 빨리 포기하였다고 생각해 놀랐다고 한다.[31] 수도권 버프의 힘은 엄청나서 충청남도 북부나 강원도 영서 지방까지 수도권의 영향을 받을 정도이다.[32] 대동강 이남 평양 인구 약 100만명, 황해남·북도 442만명, 강원도 148만명 → 총합 690만명, 북한 전체인구 2,400만명 (2008년 기준)[33] 링크에 있는 문서는 간략하게 문답식으로 되어있는것이고 간행물안내 항목의 원문서비스를 들어가면 11권 전권을 다운로드 할 수 있다.[34] 참전 당시 끔찍한 기억을 증언하는 군인이나 학살이 일어난 지역의 주민 등[35] 중국판 이름은 아적전쟁. 참고로 이 영화의 홍보 동영상이 중국군의 6.25 참전을 미화하고 한국 측을 조롱하여 문제가 되었다. 물론 영화는 흥행 평가 모두 거하게 망했다.[36] 6.25 전쟁과 관련이 깊지 않지만 정치인이나 외교관이 아닌 (어찌보면) 일개 변호사가 무서울 만큼 한반도의 중요성을 정확하게 통찰했다고 볼 수 있다.[37] 1950년 11월7일 피난 당시 만포진에 있는 소련 대사관 파티에서 만취한 김일성이 박헌영 부수상과 전쟁에 대한 이견으로 언쟁할 때 대리석으로 된 잉크병을 박헌영에게 던지며 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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