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최근 수정 시각:

분류

파일:나무위키+유도.png   다른 뜻에 대해서는 임진왜란(동음이의어)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파일:나무위키+상위문서.png   상위 문서: 전쟁 관련 정보

파일:나무위키+넘겨주기.png   관련 문서: 한국사 관련 정보

임진왜란 · 정유재란
壬辰倭亂 · 丁酉再亂

시기

1592년 5월 23일(음력 4월 13일) ~ 1598년 12월 16일(음력 11월 19일)

장소

한반도 전역

원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침략 야욕

교전국[1]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25px-Flag_of_the_King_of_Joseon_%28Fringeless%29.svg.png조선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128px-Flag_of_Ming_Dynasty.svg.png명(明)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920px-Goshichi_no_kiri_inverted.svg.png일본

지휘관[2]

조선

명(明)

일본

정부 수반
파일:external/6d1da4a29545f43b0170e7052587e69bcc5ff433118c0c6f957bea006164401c.png 국왕 선조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Coat_of_Arms_of_Prince_of_Joseon.png 왕세자·분조 광해군
지휘부
영의정 이산해[3]
좌의정 윤두수[4]
우의정 유홍[5]
도체찰사 류성룡[6]
도체찰부사 병조 판서 김응남
중앙군
도원수 김명원[7]
도순변사 신립
종사관 김여물†
순변사 김성일[8]
지방군
경상 좌방어사 성응일
경상 우방어사 조경
경상도 순찰사 김수
전라도 순찰사 권율[9]
경상 좌도 병마 절도사 이각[10]
경상 우도 병마 절도사 조대곤[11]
김해 부사 서예원[12]
동래 부사 송상현
밀양 부사 박진[13]
안동 부사 정희적
부산 첨사 정발
다대포 첨사 윤흥신[14]
경주 부사 윤인함[15]
경주 판관 박의장
진주 목사 김시민[16]
양산 군수 조영규†
황간 현감 박몽열†
울산 군수 이언성
함경북도 병마 절도사 한극함†
경상우도 병마 절도사 김응서
수군
삼도 수군 통제사 이순신[17]
경상 좌도 수군 절도사 박홍
경상 우도 수군 절도사 원균[18]
전라 좌도 수군 절도사 이순신[19]
전라 우도 수군 절도사 이억기[20]
충청도 수군 절도사 최호[21]
조방장 홍윤관†
조방장 유극량
조방장 변기
조방장 박종남
의병
곽재우
조헌
서산대사
사명당
김덕령
원연[22]
정인홍
권응수
고경명

정부 수반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40px-Imperial_seal_of_Ming_dynasty.svg.png 천자 만력제

지원군
병부 상서 석성
경략 조선 군무사 병부 상서 양호
병부 상서 계료 총독 비왜 총독 군문 형개
경략 군문 병부 시랑 송응창
제독 군무방해어왜총병관 도독 동지 이여송
제독 한토관병어왜총병관 도독 동지 유정
도독 정왜대장 마귀
전군 도독부 도독 진린
유격 장군 심유경
우군 유격 장군 오유충
좌협군 사령관 양원
우로군 사령관 장세작
중협군 사령관 이여매
우군 부총병(요동군) 조승훈
중로군 사령관 동일원, 이여백
수위사 천만리

정부 수반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03px-Taiko_Giri.svg.png 태합·태정대신 도요토미 히데요시
파일:external/f7fd296d92f7f693096895b37f2a95bd65611e248b68305bca481f62bbbcabba.png 관백 도요토미 히데츠구
지휘부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88px-Kaga_Umebachi%EF%BC%88No_background_and_Black_color_drawing%EF%BC%89.svg.png 대로 마에다 토시이에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Mitsubaaoi.jpg 대로 도쿠가와 이에야스[23]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14px-%E5%A4%A7%E4%B8%80%E5%A4%A7%E4%B8%87%E5%A4%A7%E5%90%89.svg.png 봉행 이시다 미츠나리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88px-Alex_K_Hiroshima_Asano_kamon.svg.png봉행 아사노 나가마사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88px-Japanese_crest_Tachibana.svg.png 봉행 마에다 겐이
봉행 마시타 나가모리
봉행 나쓰카 마사이에
총대장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60px-Jimonji.svg.png 일본군 총대장 우키다 히데이에[24]
제1군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E7%AB%8B%E8%8A%B1%E5%AE%B6%E5%BE%A1%E5%AE%9A%E7%B4%8B%E3%80%8C%E7%A5%87%E5%9C%92%E5%AE%88%E3%80%8D.jpg 1군 사령관 고니시 유키나가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42px-So_clan_mon2.svg.png 소 요시토시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88px-Japanese_Crest_Matura_mitu_Hosi.svg.png 마쓰라 시게노부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88px-Japanese_crest_Arima_Mokkou.svg.png 아리마 하루노부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88px-Japanese_crest_Arima_Mokkou.svg.png 오무라 요시아키
고토 스미하루☠
제2군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88px-Jyanome_%28No_background_and_Black_color_drawing%29.svg.png 2군 사령관 가토 기요마사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88px-Japanese_Crest_Nabesima_Gyouyou.svg.png 나베시마 나오시게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88px-Japanese_crest_Sagara_Umebachi.svg.png 사가라 요리후사
제3군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88px-Japanese_crest_Sagara_Umebachi.svg.png 3군 사령관 구로다 나가마사
제4군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88px-Japanese_crest_Maru_ni_Yahazu.svg.png4군 사령관 모리 요시나리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88px-Maru_ni_Jyuji%EF%BC%88No_background_and_Black_color_drawing%EF%BC%89.svg.png 시마즈 요시히로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Crest-of-Akizuki-Clan.jpg 다카하시 모토타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Crest-of-Akizuki-Clan.jpg 아키즈키 다네나가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Iori-mokko.jpg 이토 스케타카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88px-Maru_ni_Jyuji%EF%BC%88No_background_and_Black_color_drawing%EF%BC%89.svg.png 시마즈 토요히사
제5군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58px-Alex_K_Hiroshima_Fukushima_kamon.svg.png 5군 사령관 후쿠시마 마사노리
도다 가즈타카☠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Nanatsu_Katabami_inverted.png 조소카베 모토치카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88px-Japanese_Crest_Maru_ni_Hidari_Mannji.svg.png 하치스카 이에마사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88px-Japanese_Crest_Ikoma_kuruma.svg.png 이코마 지카마사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Kurusima_michifusa.png 도쿠이 미치유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Kurusima_michifusa.png 구루시마 미치후사
제6군
파일:external/0becd11707d78fdc6cddedb185904df476dc75400e1d6b653ce5227ed0b9d31c.png 6군 사령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88px-Japanese_Crest_Nagato_mitu_Hosi.svg.png 모리 히데카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88px-Japanese_Crest_Tachibana_Mamori.svg.png 다치바나 무네토라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88px-Japanese_Crest_Tachibana_Mamori.svg.png 다카하시 무네마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42px-So_clan_mon2.svg.png 쓰쿠시 히로카도
제7군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88px-Japanese_Crest_Nagato_mitu_Hosi.svg.png 7군 사령관 모리 데루모토
제8군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60px-Jimonji.svg.png 우키다 히데이에
나카가와 히데마사†
제9군
파일:external/f7fd296d92f7f693096895b37f2a95bd65611e248b68305bca481f62bbbcabba.png 9군 사령관 도요토미 히데카츠☠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50px-Kuyo.svg.png 나가오카 다다오키
하세가와 히데카즈☠
수군
하야카와 나가마사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88px-Japanese_crest_Maru_ni_Yahazu.svg.png 모리 다카마사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Maruni-kuginuki.jpg 모리 요시야스
히토츠야나기 나오모리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88px-Japanese_crest_Sagari_Fuji_of_Katou_Yosiaki.svg.png 가토 요시아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88px-Japanese_crest_Tuta.svg.png 도도 다카토라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500px-Japanese_Crest_Shichiyoumon.svg.png 핫토리 가즈타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px-Wachigai.svg.png 구키 요시타카
와키자카 야스하루

병력[25]

조선

명(明)

일본

동원 병력

188,000여 명

동원 병력

220,000여 명

동원 병력

470,000여 명

왜란 참전 병력

60,000여 명

왜란 참전 병력

74,000여 명

왜란 침공 병력

197,700 명

재란 참전 병력

37,600여 명

재란 참전 병력

117,000여 명

재란 침공 병력

141,400여 명

사상자

70,000여 명

사상자

83,700여 명

사상자

116,800여 명

결과

일본의 철군, 조·명 연합군의 최종 승리.

영향

조선의 사회·경제 초토화.
도쿠가와 이에야스, 에도 막부 수립. 명(明)의 쇠퇴와 후금의 굴기(倔起).


1. 개요2. 명칭
2.1. 교과서에서
3. 전쟁의 배경
3.1. 일본의 상황3.2. 조선의 대응
3.2.1. 조선 육군3.2.2. 조선 수군
3.3. 일본의 내부 사정3.4. 일본군 병력 구성
4. 전쟁의 경과
4.1. 전쟁의 시작4.2. 정규군의 붕괴와 파천4.3. 반격의 시작4.4. 명의 참전
4.4.1. 명군의 참전 이유4.4.2. 명군의 참전과 역할4.4.3. 명군이 악평을 들은 이유
4.5. 교착 상황과 강화 회담
4.5.1. 기존의 알려진 이야기4.5.2. 실제 사실
4.6. 정유재란과 전쟁의 종결4.7. 일본군 퇴각의 이유
5. 각종 오해들
5.1. 탁상공론에만 몰두한 조선 정부5.2. 율곡 이이의 10만 양병설5.3. 동원된 조선의 병력수5.4. 의병과 승병
6. 전후7. 한국의 평가8. 일본에서의 평가
8.1. 조선 - 일본 내의 적장 인식
9. 전투
9.1. 조선, 일본, 명의 3대 대첩
10. 조선, 명나라, 일본의 전후 상황
10.1. 조선의 전후10.2. 명과 일본
11. 기타12. 창작물
12.1. 소설12.2. 드라마 / 영화
12.2.1. 한국 드라마 / 영화12.2.2. 일본 드라마 / 영화
12.3. 게임12.4. 기타12.5. 보드게임
13. 위키에 등록된 임진왜란 링크
13.1. 조선 측 주요 인물
13.1.1. 조정13.1.2. 정규군 지휘관13.1.3. 의병장13.1.4. 기타 조선 측 인물
13.2. 명측 주요 인물13.3. 일본 측 주요 인물13.4. 전투 전개 과정13.5. 기타 전투13.6. 기타

1. 개요[편집]

언어별 명칭

한자

壬辰倭亂

한국어

임진왜란

영어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 1598)[26]

중국어

萬曆朝鮮之役 · 万历朝鲜之役(만력조선지역)[27]

일본어

(1910년 이전) 豊太閤の朝鮮征伐(호타이코의 조선 정벌)[28]

(1910년 이후) 文禄 · 慶長の役 (분로쿠·게이초의 역)[29]

라틴어

Bellum Corai[30]


16세기 말 동북아시아를 뒤흔든 전쟁, 조선 왕조가 세워진지 정확히 200년후에 일어난 전쟁[31]

1592년(조선 선조 25년 임진) 음력 4월 14일부터 1598년(선조 31년 무술년) 음력 11월 19일까지 7년간 조선명나라, 일본 사이에서 일어난 동아시아 국제 전쟁으로 조선에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많은 영향을 끼치고 더나아가 의 16세기 ~ 17세기 역사를 뒤흔든 전면전이다.[32]

일본 입장에서는 비록 '조선 정복' 이라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진 못했으나 백강 전투 이래 천 년 가까이 이어진 열도 고립을 깨고 오랜만에 외부 세계에 강렬한 존재감을 과시했던 전쟁이다. 동아시아에서 절대적 패권 국가로 군림해 왔지만 서서히 쇠락하던 명, 그리고 명과 더불어 동북아 세계관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나 오랜 평화로 인해 국가 기강이 무너지던 조선, 사회 전반에 걸쳐 무서운 상승세에 있던 일본의 대비를 보여준 전쟁이기도 하다. 실제 전국 통일과 임진왜란을 계기로 조선인들은 물론 명나라인들도 '일본은 무시 못할 나라'라는 공포감과 존재감을 얻었다. 또한, 도자기 기술 약탈 등 문화적 성과 역시 있었다.

전화를 고스란히 당한 조선은 제주도를 제외한 전 국토가 초토화되었다. 이후 북방 여진족들이 조선과 명의 통치에서 떨어져나갔다. 특히 명은 이자성의 내란과 북방의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에게 나라가 망했다. 반면 일본은 공식적으로 패배했는데도 전란이 끝난 지 단 2년 만에 역사상 최대 규모의 내전을 벌이기도 했고 임진왜란의 주축을 맡았던 사쓰마 번은 단독으로 류큐 왕국을 털어 복속시키는 등 오히려 국력이 팽창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후 에도 막부가 들어서고 경제 활성화 등에 따라 순식간에 발전을 거듭하며 겐로쿠 시대 등의 전성기에 들어선다. 관련 인구 통계를 보면 임진왜란 당시 1,700만 명 가량의 일본 인구는 에도 시대 이후 몇십 년 만에 2,700만 수준으로 성장하였다.[33] 반면 동시기 조선도 인구가 증가하긴 했으나 1,200만 명에서 1,800만 명으로 늘어나는 정도였고 20세기 중반 시점에도 3천만에 불과했다. 조선의 전성기는 18세기가 와서야 돌아왔다.

2. 명칭[편집]

흔히 '임진'년에 '왜'군이 벌인 '난동'이라고 하여 '임진왜란'이라 부른다. 하지만 본격적인 전쟁 기간은 2년에서 2년 반 남짓이다. 시기적으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나눠 부를 때도 있는데, 전쟁 발발 1년만에 한동안 전쟁이 잠잠해지고 명 - 일 간의 평화 협상이 열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1597년에 협상이 결렬[34]되어 일본군은 다시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의 수군을 박살내며 재침을 시작하니 이를 '정유재란'이라 부른다.

임진 전쟁, 조일 전쟁으로 부르자는 주장이 있으며, 위키피디아 기준으로는 위의 1592년 '일본의 조선 침공'이란 표현과 우리나라의 임진왜란에서 따온 '임진전 쟁' 두 개가 이 전쟁을 나타내는 표제어로 사용되고 있으며 동아시아사 교과서에서는 임진왜란을 임진 전쟁이라 부른다.

일본에서는 전통적으로는 연호를 따서 분로쿠(문록)의 역(文禄の役), 정유재란은 케이초(경장)의 역(慶長の役)이라고 불렀고 이후에는 조선 정벌 혹은 조선 출병이라고 부르며, 애초에 명을 친다는 것을 명분으로 하였으므로 대명정벌(大明征伐)이라고 부르기도 하나, 이는 오버스러워 보인다. 옛날부터 쓰이는 표현으로는 히데요시가 '중국(唐)'에 '들어가려는(入る)' 시도였다고 해서 카라이리(唐入り)라고도 한다.[35][36]

이를 두고 '임진왜란은 분로쿠, 케이초 텐노 시절에 일어났다'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분로쿠, 케이초는 둘 다 코요제이 텐노(後陽成天皇) 시절의 연호이고, 중간에 후시미 대지진 등 자연 재해 때문에 악운을 떨쳐내는 의미에서 한 차례 연호를 바꾼 것이다. 일본에서 '한 임금에 하나의 연호만을 사용하는' 일세 일원제가 확립된 건 메이지 이후.

중국에서는 '만력조선역(萬曆朝鮮役)', 항왜 원조 전쟁, '임진위국[37] 전쟁'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항왜 원조란 조선을 도와 일본에 대항한다라는 뜻으로, 6.25 전쟁은 항미 원조 전쟁이라고 부른다. 말 그대로 조선[38]을 도와 미국에 대항한다는 뜻. 조선을 돕기 위해 명나라는 국가 예산을 엄청나게 소모하여 원군을 파견했기 때문에, 신종 만력제 당시 명나라를 멸망의 길로 몰았던 대원정인 만력 3정의 하나로 꼽는다.

7년 동안 일어났다 하여 백년전쟁처럼 7년 전쟁이라고 부르는 이들도 있다. 국내 게임인 임진록2에서는 영어로 Seven Years War라고 표기했다. 영어권에서는 학술적으로 중립적인 입장에서 어느 한 나라식 표기가 아닌 Japanese invasions of Korea in 1592(1592년 일본의 한국 침공)라고 표기하지만 그냥 Imjin War라고 부르기도 한다. Korean-Japanese Seven Years War라고 표기하는 사례도 소수 있지만 명칭도 길고 서양에서 7년 전쟁이라 하면 18세기의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과 관련된 7년 전쟁을 의미하기 때문에 이런 표현은 서양에서 거의 쓰이지 않는다.

재미있게도 영미권에서 임진왜란에 관한 가장 유명한 책은 Stephen Turnbull이 쓴 The Samurai Invasion of Korea 1592-98과 Samuel Hawley가 쓴 The Imjin war인데 Turnbull은 일본 쪽 자료를 주로 인용해서 제목을 사무라이로 지었고, Hawley는 한국 쪽 사료를 주로 인용해서 임진전쟁이라 제목을 지었다. 다만 96페이지에 불과한 Samurai Invasion보다 600페이지가 넘는 Imjin war쪽이 더 내용이 충실한 건 당연한지라 자연스럽게 Imjin war라 부르는 서양인이 늘었다. 사실 영어로 구글 검색시에는 Imjin War라는 명칭이 많이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2.1. 교과서에서[편집]

2011년 9월 말에 인터넷 상에서는 임진왜란을 2012년부터 교과서에 임진 전쟁으로 바꿔서 서술한다는 소식이 확대 해석되면서 논란이 일었다.

사실 이것은 2011년 입학한 고교 1학년생이 배우는 커리큘럼(2014학년도 대학 수학 능력 시험부터 수능 사탐 과목으로 지정)부터 신설되는 "동아시아사" 과목 때문에 생겨난 일이다. 동아시아사는 한국사 위주의 관점에서 벗어나 새롭게 동아시아 관계를 들여다보자라는 취지로 한일 관계사 전문 강원대 손승철 교수와 한국 중세사 전문 한신대 안병우 교수가 집필한 교과서다.

"임진왜란"을 "임진전쟁"으로 표기하는 것은 전쟁에 대한 일본의 책임을 희석시킨다는 비판이 있었고, 여기에 기존 교과서에서 '일왕'으로 표기한 것을 '천황'으로 고친 것 등이 합쳐져 반일 감정이 강한 인터넷 상에서는 까임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 교과서가 기존의 국사를 당장 대체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인터넷상의 논쟁은 너무 과한 측면이 없지는 않다. 어디까지나 새로운 교과목이 나온 것이지 국사를 폐지하고 동아시아사로 대체한 것도 아닌데다가, 동아시아사는 통사로서 전 시대를 다루기 보다는 조선 시대 위주로 다루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손 교수는 "앞으로 한국사 교과서와 동아시아사 교과서의 차이나는 용어의 통일이 과제"라고 언급해 논란의 여지는 남아있다.

또한 인터넷에서의 임진 전쟁에 반대하는 의견 중 일부는 포인트를 잘못 잡고 있는데, 임진 전쟁으로 변경하자는 주장을 친일파, 나아가 뉴라이트라는 표현을 쓰며 이명박 정부의 하수인 격인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으로 공격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임진 전쟁을 주장하는 안병우 한신대 교수는 대운하 반대 교수에 이름을 올렸으며 # 2009년 사학자 시국 선언에도 참여하였을 정도#로 親정권 성향과는 거리가 있다. 게다가 1987년 5월에도 시국 선언에 참여했다.#

왜란이라는 표현에 반대하는 측에서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한다는데 이는 왜란이라는 표현에 반대하는 진짜 학자들의 주장과는 다르니 인터넷 자료로 참고만 하자. 1. '왜란'이라는 용어로 '일본'을 '왜'로 비하하고 있어서, 객관적이지 못한 역사 인식이 반영되어 있다. 사건의 명칭 자체에 가치 판단이 개입해 있어서 객관적이거나 새로운 평가를 막고 있는 셈. 2. '왜란'이란 용어는 왜구나 조선 주재 일본인들이 일으킨 일개 '사건'을 일컫는다. 다년간에 걸친 거국적 전쟁 규모의 사건을 다루기에는 부적절하다. 3. '왜란'이라는 단어는 동북아의 균형 관계를 뒤흔드는 대사건이자 국제 전쟁이었던 임진왜란의 역사적 의의를 과소 평가하는 것이다.[39] 4. 그 외 조선까들이 주장하듯 쓰레기 같은 조선이라는 나라가 일본에게 왜놈이라면서 오만하게 굴 주제도 못 된다고 주장하는 의견도 있다.

한국군 측에 따르면 전쟁은 상호 각국간의 전술적인 대립과 선전 포고 등 전술적 상황이 오간 상황에서 벌어진 사건을 전쟁으로 규명하기에 당시 조선이 왜측의 십만 양병설과 같은 견해에 대개 전술적 대비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일방적으로 벌어진 침공 사건을 시작으로 벌어졌던 사건으로 왜란이 아닌 전쟁이 시발점이 아니기에 부적절하다는 의견이 존재한다. 이는 국내외에서 한국전쟁으로 명명되는 6.25 전쟁 역시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규정하고 있는 부분과 마찬가지이다.

2017년 기준 고등학교 3학년 동아시아사 과목 교과서에선 실제로 '임진왜란'이 아닌 '임진전쟁'으로 표기하고 있으며, '정유재란' 또한 '정유전쟁'으로 표기하고 있다. 앞서 서술되었듯 동아시아사 과목은 기존의 민족주의적 사학관에서 벗어나 한국사를 소개하면서 동시대의 중국과 일본의 상황을 동시에 서술하면서, '비록 역사적 갈등을 빚고 있지만 동아시아는 경제적으로든 문화적으로든 함께 나아가는 협력 관계이다'라는 해당 교과목의 주제를 잘 표현하고 있다.

3. 전쟁의 배경[편집]

전쟁의 원인에는 앞서 언급했듯이 히데요시의 정복욕이 주된 요인이지만, 조선과 명이 삼포왜란 이후로 가뜩이나 부족한 면포 수출량을 더욱 통제하자 일본의 면포 값이 뛰었고, 그것이 전쟁의 원인 중 하나가 아닐까 하는 추측도 있다.[40]

3.1. 일본의 상황[편집]


1592년 일본 전국을 통일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국내의 불만 등을 억누르고 대륙을 차지하고자 하는 야심을 품고 조선을 상대로 일으킨 전쟁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실제로는 오래 전부터 계획된 것이었다. 도요토미는 1585년 7월 간바쿠 취임 직후부터 대륙 진출을 언급하였는데, 그는 9월 히토츠야나기 스에야스에게 보낸 서신에서 명을 정복하겠다는 언급을 한 바 있다. 그 이후로도 도요토미는 전쟁 때마다 자신의 어머니와 일가 친척에게 '우리는 이제 곧 한양에서 매년 여름을 보내고, 베이징에서 매년 겨울을 보낼 것이다'라고 호언장담했다고 한다. 이런 대륙 진출이라 일컫는 침공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전 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오다 노부나가가 여러 번 언급했다. 이런 언동은 초기엔 그저 말뿐이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노부나가의 유력 가신인 히데요시가 이에 충분히 영향을 받을 만 했다.

1587년 6월, 하카타에서 쓰시마 도주 소 씨(宗氏) 부자를 만난 도요토미는 조선과의 교섭을 명령했다. 일본이 통일되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조선 국왕을 불러와 자신을 알현토록 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 기한을 1588년까지로 못박았다. 또한 불응할 경우에는 조선을 정벌하겠다고 말하였다. 이에 대해 쓰시마 도주는 조선으로부터 거부당할 것이 뻔한 선조의 입조(入朝) 대신 인질과 공물을 요구하자고 제안했지만, 도요토미는 선조의 입조를 고집했다. 결국 쓰시마 도주는 가신인 타치바나 야스히로(橘康廣)를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로 파견, 일본 국내 사정의 변화를 설명하고 통신사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1587년인 선조 20년, 이 일본의 사신은 교섭이 여의치 않으면 병화가 일어날지 모른다고 암시하였다. 하지만 조선 신료들은 ‘교화가 미치지 않는 야만국의 사신을 제대로 접대할 수는 없으며 바닷길이 험해 통신사도 보낼 수 없다’라는 답변을 하며 통신사 파견을 거부하였다.[42]

이렇게 도요토미의 첫번째 외교가 실패하자 그는 1589년 여름까지 조선 국왕을 입조시키라고 쓰시마를 다시 채근했다. 따라서 조선에 1588년 10월과 1589년(선조 22) 6월, 쓰시마에서 두 차례에 사신이 왔다. 1589년 6월엔 신임 쓰시마 도주 소 요시토시고니시 유키나가의 사위이며, 대표적인 반전파이기도 했다. 도요토미의 거듭되는 독촉과 조일 양국 충돌시 겪게될 고통을 우려한 그는 1589년 6월, 하카타 쇼후쿠사(聖福寺)의 승려 겐소(玄蘇)와 함께 직접 조선으로 건너와 협상을 진행했다. 그는 쓰시마 도주로서 조선 조정에 통신사를 파견해주도록 다시 간청하면서 바닷길이 험하다면 자신들이 직접 직접 안내하겠다고 나서기까지 했다. 조선과 도요토미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이었다.

조선 조정은 조건을 제시했다. 본래 전라도 진도군 출신으로 왜구에 투항하여 노략질에 앞장섰던 사을화동(沙乙火同)이란 인물을 잡아 보내면 통신사 파견을 고려하겠다는 것이었다. 반드시 보내겠다는 의미도 아니었다. 쓰시마는 이를 확답으로 만들기 위해 사을화동은 물론 왜구에게 잡혀갔던 조선인들까지 송환하는 노력을 보였고, 그리하여 결국 류성룡이덕형의 주장으로 조선은 1589년 9월 일본의 통일을 축하한다는 명목으로 통신사를 파견하기로 결정한다. 늦게나마 일본의 변화된 정세를 탐지하기 위한 목적도 지니고 있었다. 통신사는 정사 황윤길[43], 부사 김성일, 서장관 허성[44] 등으로 구성되었다. 황윤길은 서인, 김성일은 남인, 허성은 북인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황윤길 일행은 1590년 3월 서울을 출발하여 7월에 교토에 도착했다. 하지만 일행은 도요토미를 바로 만나지 못하고 11월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가 동산도[45] 원정으로 출정하여[46] 아직 돌아오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돌아온 뒤에도 궁을 수리한다는 구실로 국서를 받지 않았다. 결국 11월 7일에야 통신사 일행을 접견했는데, 그리고 이 회견 자리에서 도요토미가 보인 태도는 방약무인 그 자체였다고 한다. 그는 황윤길 일행을 자신의 전국 통일을 축하하려고 온 대등국의 사절이 아니라 속국의 사신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또 통신사 일행이 가져온 선조의 국서에 대한 답서를 제때 주지 않는 무례를 저질렀다. 게다가 히데요시는 회견장에서 자신의 아들 도요토미 쓰루마쓰를 안고 데리고 오는 무례를 범했다. 아래 영상과 실록의 기록을 보면 알겠지만 아기가 오줌도 지렸다고...

이 장면을 일본 사극 NHK 대하드라마 고우 ~공주들의 전국.~ 24화의 한 장면을 통해 보자.

[47]

이건 일본 애니메이션 효게모노에서 묘사된 장면.

저 영상의 오줌 이야기는 결코 과장이 아닌 것이, 실록과 징비록에도 기록이 나온다.

秀吉容貌矮陋 面色皺黑 如猱玃狀 深目星眸 閃閃射人 紗帽 黑袍 重席地坐 諸臣數人列侍 使臣就席 不設宴具 前置一卓 熟餠一器 瓦甌行酒 酒亦濁 三巡而罷 無酬酢拜揖之禮 有頃 秀吉入內 在席者不動 俄而便服 抱小兒出來 徘徊堂上而已 出楹外招我國樂工 盛奏衆樂而聽之 小兒遺溺衣上 秀吉笑呼侍者 一女倭應聲出 乃授其兒 更他衣 皆肆意自得 傍若無人 使臣辭出 不復再見

수길의 용모는 왜소하고 못생겼으며 얼굴은 검고 주름져 원숭이 형상이었다. 눈은 쑥 들어갔으나 동자가 빛나 사람을 쏘아보았는데, 사모(紗帽)와 흑포(黑袍) 차림으로 방석을 포개어 앉고 신하 몇 명이 배열해 모시었다. 사신이 좌석으로 나아가니, 연회의 도구는 배설하지 않고 앞에다 탁자 하나를 놓고 그 위에 떡 한 접시를 놓았으며 옹기사발로 술을 치는데 술도 탁주였다. 세 순배를 돌리고 끝내었는데 수작(酬酢)하고 읍배(揖拜)하는 예는 없었다. 얼마 후 수길이 안으로 들어갔는데 자리에 있는 자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 후 편복(便服) 차림으로 어린 아기를 안고 나와서 당상(堂上)에서 서성거리더니 밖으로 나가 우리나라의 악공을 불러서 여러 음악을 성대하게 연주하도록 하여 듣는데, 어린 아이가 옷에다 오줌을 누었다. 수길이 웃으면서 시자(侍者)를 부르니 왜녀(倭女) 한 명이 대답하며 나와 그 아이를 받았고 수길은 다른 옷으로 갈아 입는데, 모두 태연자약하여 방약무인한 행동이었으며, 사신 일행이 사례하고 나온 뒤에는 다시 만나지 못하였다.

ㅡ 《조선 왕조 실록》 선조 수정 실록 25권(선조 24년, 1591) 3월 1일 세 번째 기사[48]


쓰루마쓰와 오줌 문제에 비하면 소소한 면이지만 다른 접대 문제도 있었다. 위에 인용한 실록의 기록처럼, 당시 회담장에서의 접대 및 상차림은 해도 너무한 수준이었다. 당시 일본에서는 식생활 또한 소박함을 지향했다지만, 당시 문헌을 보면 문화적 상대성을 고려하더라도 외국의 사신에게 대접하는 상차림과 예법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고 한다. 효게모노에서 도자기란 소재로 각색한 내용도 바로 이것이다.

거기에 뒤늦게 귀국길에 받은 답서의 내용을 본 조선 통신사 일행은 경악했다. 도요토미가 자신을 '태양의 아들'이라고 칭했는가 하면 명나라로 건너가 400여 주를 정복하겠다고 운운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선조를 전하(殿下)가 아닌 합하(閤下), 조선이 보낸 예물을 조공물을 뜻하는 방물(方物), 통신사의 일본 방문(來日)을 입조 등으로 서술했다. 이런 것들은 조선을 속국으로 여기는 듯한 무례한 문구들이었다. 통신사 일행은 격분하여 수정을 요구했지만 일본 쪽은 제대로 고치지 않았다.

실록에 나오는 도요토미의 답서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日本國關白 奉書朝鮮國王閤下 雁書薰讀 卷舒再三
일본국 관백(關白)은 조선 국왕 합하[49]에게 바칩니다. 보내신 글은 향불을 피우고 재삼 되풀이하여 읽었습니다.

吾國六十餘州 比年諸國分離 亂國綱 廢世禮 而不聽朝政 故予不勝感激 三四年之間 伐叛臣 討賊徒及異域遠島 悉歸掌握
우리 나라 60여 주는 근래 제국(諸國)이 분리되어 나라의 기강을 어지럽히고 대대로 내려오는 예의를 저버리고서 조정의 정사를 따르지 않기 때문에 내가 분격을 견디지 못하여 3년 ~ 4년 사이에 반신(叛臣)과 적도(賊徒)를 토벌하여 먼 섬들까지 모두 장악하였습니다.

竊諒余事蹟 鄙陋小臣也 雖然 余當托胎之時 慈母夢日輪入懷中 相士曰 日光所及 無不照臨 壯年必八表聞仁聲 四海蒙威名者 何其疑乎 依此奇異 作敵心 自然摧滅 戰必勝 攻必取 旣天下大治 撫育百姓 矜悶孤寡 故民富財足 土貢萬倍千古矣 本朝開闢以來 朝政盛事 洛陽壯麗 莫如此日也
삼가 나의 사적(事蹟)을 살펴보건대 비루한 소신(小臣)이지만, 일찍이 나를 잉태할 때에 자모(慈母)가 해가 품 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는데, 상사(相士)가 '햇빛은 비치지 않는 데가 없으니 커서 필시 팔방에 어진 명성을 드날리고 사해에 용맹스런 이름을 떨칠 것이 분명하다.' 하였는데, 이토록 기이한 징조를 인하여 나에게 적심(敵心)을 가진 자는 자연 기세가 꺾여 멸망하는지라, 싸움엔 반드시 이기고 공격하면 반드시 빼앗았습니다. 이제 천하를 평정한 뒤로 백성을 어루만져 기르고 외로운 자들을 불쌍히 여겨 위로하여 백성들이 부유하고 재물이 풍족하므로 토공(土貢)이 전보다 만 배나 늘었으니, 본조(本朝)가 개벽한 이래로 조정(朝政)의 성대함과 수도(首都)의 장관(壯觀)이 오늘날보다 더한 적이 없었습니다.

人生一世 不滿百齡焉 鬱鬱久居此乎 不屑國家之遠 山河之隔 欲一超直入大明國 欲易吾朝風俗於四百餘州 施帝都政化於億萬斯年者 在方寸中 貴國先驅入朝 依有遠慮無近憂者乎 遠方小島在海中者 後進輩不可作容許也 予入大明之日 將士卒望軍營 則彌可修隣盟
사람의 한평생이 백년을 넘지 못하는데 어찌 답답하게 이 곳에만 오래도록 있을 수 있겠습니까. 국가가 멀고 산하가 막혀 있음도 관계없이 한 번 뛰어서 곧바로 대명국(大明國)에 들어가 우리 나라의 풍속을 4백여 주에 바꾸어 놓고 제도(帝都)의 정화(政化)를 억만년토록 시행하고자 하는 것이 나의 마음입니다. 귀국이 선구(先驅)가 되어 입조(入朝)한다면 원려(遠慮)가 있음으로 해서 근우(近憂)가 없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먼 지방 작은 섬도 늦게 입조하는 무리는 허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대명에 들어가는 날 사졸을 거느리고 군영(軍營)에 임한다면 더욱 이웃으로서의 맹약(盟約)을 굳게 할 것입니다.

余願只願顯佳名於三國而已 方物如目錄領納 且至于管館 國政之輩 向日之輩皆改其人 當召分給 餘在別書 珍重保嗇 不宣
나의 소원은 삼국(三國)에 아름다운 명성을 떨치고자 하는 것일 뿐입니다. 방물(方物)은 목록대로 받았습니다. 그리고 국정(國政)을 관장하는 무리는 전일의 사람들을 다 바꾸었으니 불러서 나누어 주겠습니다. 나머지는 별지에 있습니다. 몸을 진중히 하고 아끼십시오. 이만 줄입니다.

天正十八年庚寅仲冬日秀吉奉復書
천정(天正) 18년[50] 경인 중동(仲冬) 일(日) 수길(秀吉)은 받들어 답서함

ㅡ 《조선 왕조 실록》 선조 수정 실록 25권(선조 24년, 1591) 3월 1일 네 번째 기사[51]

쉽게 말해, 일본을 통일한 나는 킹왕짱. 중국도 정복하려는데 너네가 협조 좀 해야겠음. 편지랑 주는 거 잘 받았음. 정도의 매우 거만한 답서였다는 얘기. 위의 번역도, 사실은 답신 내의 거만한 행간을 생각하면 아랫 사람에게 반말투로 하대하는 쪽으로 읽는 게 더 사실에 가까워 보인다.

3.2. 조선의 대응[편집]

파일:external/www.cha.go.kr/1611713.jpg

경복궁 근정전

요약하자면 조선의 반응은 개무시였다. 거만한 일본의 비위를 맞춰줄 생각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차후 따라올 보복에 대해서 충분히 대비하지도 않았다.[52]

왜인들이 명나라를 침범하고자 한다는 말이 류큐국까지 번져 있고 조선도 이미 일본에 굴복하여 삼백 명이 투항해 가서 길을 인도하기 위한 배를 만들고 있다는 말이 퍼져 있었다.


선조 실록 1581년 10월 23일

이런 일을 겪은 뒤 귀국한 조선 조정은 일본이 전쟁 준비 중이라는 사실을 간파했으나,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극렬한 대립 중이던 조정은 당파간 세력 다툼으로 인해 일본이 침략하느냐 아니냐조차 의견이 갈렸으며 당시 집권당이었던 동인 측의 판단이 맞는 것으로 사료되어 일본은 침략할 가능성이 없다고 결론났다고 배웠을 것이다. 만약 옛날, 즉 최소 제6차 교육 과정 이전 국사 시간에 역사 교사의 개인적 지식 또는 그 당시 학계의 다수설을 들었거나 국사를 수능 등의 이유로 대충 배웠다면 말이다.

필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며 풍신수길의 눈빛이 반짝반짝하여 담과 지략이 있는 사람인 듯 하였습니다."


황윤길(黃允吉. 정사 正使, 서인)


"그러한 정상은 발견하지 못하였는데 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인심이 동요되게 하니 사의에 매우 어긋납니다. 풍신수길의 눈은 쥐와 같으니 족히 두려워할 위인이 못됩니다"


김성일(金誠一. 부사 副使, 동인)


김성일이 말을 마치자 류성룡이 김성일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황의 말과 고의로 다르게 말하는데, 만일 병화가 있게 되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시오?"라고 하니, 김성일이 말하기를, "나도 어찌 왜적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하겠습니까. 다만 온 나라가 놀라고 의혹될까 두려워 그것을 풀어주려 그런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조선 왕조 실록》 1591년 3월 1일 기사

김성일과 류성룡의 대화는 훗날 동인의 실책을 덮기 위해 가필되었다는 설도 있다. 일본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한 이 발언 때문에 류성룡과 퇴계 이황의 수제자 자리를 다투던 거유인 김성일은 두고두고 당파 싸움에만 집착하여 나라의 흥망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간신으로 욕먹는다. 이 발언이 실상 조선의 전쟁 대비와는 별 상관도 없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고 임진왜란 기간 중 보여준 탁월한 수완과 업적조차 폄하된다. (김성일이 아니었으면 홍의 장군 곽재우는 지리산 은거 기인이 되거나 역적으로 죽었을 것이다.) 일반인들의 역사 인식과 달리 조정은 1555년의 을묘왜변 이후 일본의 침략 위험성을 인식하고서 꽤 많은 대책 마련을 했고 1592년 개전 직전까지 쉴새없이 진행시켰다.

특히 왜군을 직접적으로 상대할 남부 지역의 방어에 공을 들였다. 경상 감사 김수와 전라 감사 이광, 충청 감사 윤석각은 각기 성곽을 전면적으로 보수하고 군비를 확충했다. 특히 김수가 두드러졌는데 영천, 청도, 대구, 성주, 부산, 동래, 진주, 안동, 상주와 경상 좌우병영성이 모두 증축되거나 새로 쌓았다. 단순한 왜구의 노략질 정도로 보지도 않았다. 기존 왜구는 대마도를 거점으로 섬이 많은 경상 우도와 전라도 지역을 침탈하는 경우가 보통이었다. 만약 왜구의 침탈 정도로 생각했다면 경상 우도와 전라도 지역을 집중적으로 강화했을 것이다. 그러나 조정은 왜구의 주 공격루트가 아니었던 경상 좌도 방어에도 심혈을 기울여 2개의 첨사진만 있던 부산 - 동래 방면에 1개 만호진을 통합시키고 6개 만호진을 이전시켰다.

김수는 축성 인원 확보를 위해 백성들 뿐 아니라 유생들까지 동원했다. 향교 교생을 뽑는 고강을 엄격히 실시하여 낙강 유생들을 모조리 충군시켰고 이로인해 지역 사족층과 크게 충돌하기도 했다. 선조는 재위 기간 내내 방군 수포의 폐단을 잡으려고 적잖이 노력했다. 이로 인해 1570년대부터 부족한 군액을 보충하는 작업이 행해졌고, 1590년대에는 30만 이상의 군액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한 백성들이나 식자층의 시각은 매우 부정적이었다. 김수는 사족층과 사이가 틀어지면서 전쟁 발발 후에 곽재우와 크게 충돌했고 선조는 성을 높일수록 민심이 피폐해졌다며 전쟁 준비로 인한 민심 이반을 인정했다. 의병장 곽재우의 첩 장인인 이로는 동년배 친구였던 류성룡에게 서신을 보내 "우리 고을 앞에 정암진이 있는데 왜적이 어찌 날아서 쳐들어올 수 있겠나?"며 축성에 반대했다.[53] 전근대 시대의 대규모 토목 공사가 민간에 끼치는 피해를 감안하면 김성일의 주장은 당대의 여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조정은 꿋꿋이 전쟁 준비를 진행시켰고 이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조선이 반격을 감행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임진왜란 초기에 맥없이 무너졌다는 이유로 조선이 찌질하다고 비판하는 사람 중에 조선의 준비랑 초기 전역은 무시되고 있다.

또한 유능하다고 판단된 장수들은 남쪽 위주로 배치하기 시작했는데 대표적으로 종 6품 지방의 현감[54]였던 무명의 장수를 전쟁 발발 1년전인 1591년 2월 13일, 공을 세우라는 전교와 함께 단 하루만에 8단계를 뛰어넘어 정3품 전라 좌도 수군 절도사로 초수하기도 했다.[55][56] 그 외에 이억기, 이천, 양응지, 원균 등 당시 이름 있는 장수들을 대거 남쪽으로 배치했다.

이렇듯 조선은 나름대로 전쟁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름 열심히 대비를 했다는 것이지 대비를 잘 했다는 것아니다. 이 경우 통일된 일본이 15만이 넘는 대군을 동원할 수 있다는 걸 몰라서 많아야 수만 정도로 상정하고 대비했기 때문에 고전한 거지 대비 자체는 훌륭했다고 옹호하는 논리를 내세우기도 하는데, 초반에 상륙한 일본 제 1군, 2군, 3군은 5만 정도였다. 그리고 조선이 준비한 병력은 이 5만을 상대로 저지는커녕 유의미한 타격도 주지 못하고 붕괴되어 버렸다. 까놓고 말해서 고니시와 가토의 4만 병력으로도 평양까지 털어버리는 데 아무 어려움이 없었다. 경상도 방어 체계는 고니시의 1군 1만 8천 정도에 쓸려나갔다.

오랜 평화 때문에 기강이 해이해진 조선군이 전국시대를 통해 단련되고 조총까지 받아들인 일본군한테 진 건 어쩔 수 없었다고 옹호하는 의견도 있지만, 군대의 기강이 약해진 것과 군대가 아예 제구실을 못한 것을 동일선상에 놓는 것이 옳은 일인지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당시 조선군, 특히 남방 조선군은 제대로 된 군대로 보기엔 문제점이 너무 많았다.

  • 중앙 정부의 과도한 지방군 통제.
    태생이 태생인지라 조선 왕조는 제 2의 이성계가 나오는 걸 극도로 경계했고, 이시애의 난과 같은 지방 세력의 반란을 겪으면서 지방의 군사력을 중앙의 통제하에 놓는 데 심혈을 기울인다. 여기까지라면 사회 안정을 위해 흠 잡을 게 없는 정책이지만, 그게 과해서 군사력이 약해질 정도였기 때문에 문제였다. 조선의 변방에는 대군을 온전히 지휘할 수 있는 지휘관이 존재할 수 없었다. 각 도에는 최고 계급의 군지휘관으로 병마 절도사를 겸하는 관찰사들이 있었지만 이들은 대부분 행정 관료라 군무에 어두웠고, 무신들이 주로 임명되는 단병사는 유사시 지휘 가능한 군대의 수가 많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제승방략과 같은 허점 투성이의 제도가 나와버렸다. 반란의 위험을 막을 수는 있었지만 그 지역 사정과 지리를 모르는 장수가[57] 서울에서 파견되다보니 방어 측의 이점을 제대로 살릴 수 없었다.

    조선 조정도 이런 단점을 모르는 게 아니라서 여러 상황에 대비한 체계적인 매뉴얼을 준비해 놓긴 했다. 개전 초 각지의 조선군이 신속하게 집결지로 집결한 걸 보면 조선의 행정력은 훌륭하게 작동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매뉴얼인지라 상황에 따른 유연한 대처가 어렵고 한번 꼬여버리면 겉잡을 수가 없었다. 매뉴얼에 없는 상황에 부딪혔을 때는 일일이 조정에 보고하고 허락을 받아야했기 때문에 군대가 기민하게 움직이지 못했다. 최악의 단점은 후방에 있어서 현지 상황에도 어둡고 군사 전문가도 아닌 왕과 대신들의 훈수질에 군대를 말아먹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58]. 그 예시가 임진강 전투칠천량 해전이다.

  • 허리가 없는 지휘 체계.
    대다수의 조선군 부대는 군의 허리라 할 수 있는 부사관에 해당하는 장교들이 없거나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그래서 군 규모가 소수 일때는 괜찮지만 수만 단위 대군이 모이면 제대로 통제가 안 됐다. 개전 초에 조선에선 몇 번 수 만의 대군을 모아서 일본군과 야전을 시도했지만 (적군과 접촉 - 일부 부대가 나가서 적과 싸우다 궤멸 - 그걸 본 후방의 병사들이 패닉 상태에 빠져서 도주하기 시작 - 지휘관들이 수습해보려고 했지만 통제가 안 돼서 같이 도주 - 패전)의 패턴으로 와해되었다. 군사들의 훈련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탓도 있지만, 이후 각지로 흩어져 전열을 가다듬은 관군과 민간인들이 조직해 일어난 의병들이 소규모 단위로 많은 적군 앞에서 물러서지 않고 맹렬하게 싸운 걸 보면 부대 통제가 제대로 되지 않았던 이유가 더 크다.

    중앙군은 오위 진법을 만들면서 위(衛) - 부(部) - 통(統) - 여(旅) - 대(隊) - 오(伍)로 이어지는 체계적인 편제를 갖추었기 때문에 기강이 해이해진 당시에도 사정이 나았다. 반면 병력의 대다수를 구성한 지방군은 명확한 지휘 체계 없이 각지의 수령들이 적당히 자기 동네 병력을 거느렸다. 수령을 따르는 군관들이 있기는 했는데 숫자도 충분하지 않았고 수령의 보좌, 호위, 전령, 정찰병, 돌격장 역할까지 겸했기 때문에 제대로 된 부사관 노릇을 하기 힘들었다.

    또한 지휘권이 통합되지 않아서 일국의 군대가 아니라 거의 다국적 연합군 수준이었다. 대군을 통솔하는 직책인 도원수는 임시직이었고, 도순변사 역시 신립 외에 임명 사례가 없어 임시직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나마 있는 대부대 지휘관이 병마절도사지만 이 또한 목민관과 병사가 저마다 부대를 지휘한데다가 관찰사와 병마사는 똑같은 종2품이라 위계질서도 확실하지 않았다. 일례로 용인전투의 경우 삼도근왕군은 전라감사 이광을 맹주로 추대했는데 그야말로 봉건국가 군대에서나 나올법한 단어다. 일본도 여러 영주들의 군대가 모여 이루어진 군대였으나 이쪽은 그나마 만 단위로 뭉쳐져 있었는데 조선은 수백 ~ 수천의 병력들이 따로 노는데다 미숙한 지휘관들이 태반이었기 때문에 제대로된 전술을 사용하는 게 불가능에 가까웠다. 결과적으로 조선은 대군이 모여도 야전에서 일본군을 이길 수가 없었다.

  • 읍성 위주의 방어 전략.
    조선의 대비에 높은 점수를 줄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 역사적으로 한반도의 방어 전략은 산성 위주였다. 산지가 많은 지형에 적합한데다 성곽을 크게 짓지 않아도 지형을 잘 이용하면 평지성을 능가하는 방어력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반대 급부로 평지성을 축조하는 기술이 그다지 발달 못했고 이건 조선도 마찬가지였다. 방어력에 올인한 일본식 성을 상대로 공성전을 연마한 일본군 앞에서 단촐한 조선의 평지 읍성들은 매우 쉽게 함락되었다.[59]

    지킬 수만 있다면 산성보다 읍성의 이점이 더 크다. 읍성은 주거지 지역을 온전히 지킬 수 있고 전후 피해가 엄청나게 줄어든다. 하지만 평지성이 쓸만한 방어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높고 두꺼운 성벽, 깊고 넓은 해자, 각종 방어 시설들이 필수인데 이걸 완비하려면 산성보다 훨씬 많은 비용이 들어가고 발달된 기술이 필요하다. 그러나 징비록을 보면 당시 방비를 책임진 수령들의 대부분은 성을 확장하는 데만 치중했을 뿐 방어 시설을 갖추는 데는 무관심하거나 무지했다고 말한다. 그 예시로 진주성이 성을 평지 쪽으로 확장하면서 오히려 방어력이 약해진 일이 있다.[60]


당시 조선은 대비는 했지만 어설프게 대비했다.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조선이 일본 본토 군사력을 제대로 가늠하지 못하고 왜구와 비슷한 수준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상술한 문제점들의 공통점은 상대 국가의 군사력이 자신보다 한참 떨어진다고 상정했을 때나 나올 법한 대처라는 것이다. 이는 명나라 그리고 조선의 인식이 먼 과거 수준에서 달라진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인식 속에서 일본은 중화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한 변두리 깡촌이었으며 백성들은 죄다 해적떼였다. 사납고 싸움을 잘 하긴 했지만 약탈이 아니라 정규전으로 가면 문명국의 상대가 못 될거라 멋대로 판단한 것.

이러한 인식을 고칠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해동제국기 같은 기록과 사신의 활동 등으로 보아 일본 열도가 생각보다 넓고 인구도 많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져 있었으며, 을묘왜변 등 실전에서 왜구들에게 유린당한 전적도 있었으므로 인식을 수정하고 진지하게 일본과 맞서 싸울 기회가 충분히 있었다. 그러나 이 당시 인식은 안일함 그 자체로, 임진왜란 이전 비변사가 '왜적은 수전에 강하고 우리는 육전에 강하니 육지로 끌어들여 싸우자'라는 주장을 계책이랍시고 내놓는 등 현실인식은 안일하기 그지없었다. 분명 국방 분야는 국가 총생산에 큰 도움이 되지 않으므로 필요하지 않다면 최대한 긴축해야 하는 대상이긴 하나, 이미 통일 일본의 국력 팽창을 경계하고 있었으며 통신사를 파견했다가 푸대접을 받는 등 전쟁 위협으로 받아들일 시그널도 있었음에도 멋대로 행복회로를 돌리면서 '우리가 핸디캡을 좀 지고 싸워도 이 녀석들 정도는 이기겠지' 하고 오판하였으니 이기는게 이상한 전투였다. 하물며 조선군이 유능했다면 모를까 임진왜란 초기에는 일본군의 큰 수적 우위가 없음에도 전투마다 패배하였다.

이렇듯 조선은 적국의 역량은 물론이고 자국의 역량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3.2.1. 조선 육군[편집]

당시 조선군은 실제로 군대에 가서 복무하는 정군들의 대거 이탈로 이름만 유지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나마 정원이 실제 복무하는 군인과 일치하는 병영은 중앙의 근위대, 신립이 이끌던 북방 기병대, 4군 6진과 평양을 지키던 북방군 뿐이었다. 이외에도 약 6만 ~ 8만명의 5위군이 있었지만, 이들은 훈련을 받지 못하고 놀고있은지 오래였고, 사실상 조선의 육군은 북방 기병대, 북방군과 근위대 뿐이었다.

국정의 혼란과 군역의 문란으로 조선군의 병력은 줄어들었긴 했지만, 썩어도 준치라고 조선은 상당수의 정예 병력을 거느리고 있었다 임진왜란의 전투 기록으로 보건대, 조선군은 약 8,000명의 신립의 정예 기병대 (북방에서 전투 경험 보유), 10,000여 명의 북방군, 8,000여 명의 충청도 야전군단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 같다. 보통 조선군이 병농 일치였다고 하지만 이들은 직업 군인이었으며, 여진족과 왜구를 상대로 상당한 실전 경험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외에도 3금청 (내금위, 우림위, 금군)의 근위군과 근위 기병대인 겸사복 등 약 4,000명의 근위군까지 합하면 조선의 정예군은 20,000명까지 늘어난다. 북병사 한극함이 거느리고 있던 6진의 궁기병들과 팽배수들까지 합하면 조선은 무려 38,000여 명의 실전 경험이 있는 정예 병력을 거느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전쟁 초기의 탄금대 전투, 평양성 전투, 임진강 전투 등에서 전멸(...)해 버려서 전쟁 내내 조선 왕조는 정예병 부족에 시달려야 했다.

3.2.2. 조선 수군[편집]

수군은 상황이 조금 나아서 54,000명의 정원 중 절반이 넘는 30,000명이 복무 중이었고, 전선도 충실히 갖춰저 있었다. 특히 경상 좌수영과 우수영은 도합 180척의 판옥선을 보유하고 일본에 침입에 대비하고 있었고, 전라 좌수영과 우수영도 약 70척의 판옥선을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직전, 당시에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치명적인 문제점이 있었다. 바로 원균이다. 가장 규모가 크고 그 위치도 중요한 경상우수영의 책임자로 원균을 임명한 것은, 이후 개전 초기 경상도 지역의 방위가 완전히 무너지는 중요한 원인 중 하나를 차지한다. 결국 박홍의 도주와 원균의 수군 해산으로 인하여 조선 수군은 전체 수군의 2/3을 날리게 되었고,전쟁 발발 2주 후엔 전투 가능한 수군이 겨우 10,000명, 군선 150척이 되는 형편이 된다. (군선이라고 썼지만, 판옥선을 포함한 연락선, 보조선을 다 더한 수치다.) 불행 중 다행으로 조선 수군은 전라 좌수사 이순신, 우수사 이억기, 군관 나대용 등 유능한 장교들을 대거 보유 중이었으며, 좌수사 이순신의 노력으로 10,000명의 수군들도 모두 노련한 정예군이었다.

3.3. 일본의 내부 사정[편집]

파일:external/www.dongponews.net/21941_14034_2919.jpg
▲ '조선정벌대평정도', 가운데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양쪽으로 조선 침공에 참여한 각 지방 영주들이다.

히데요시의 막료 이시다 미츠나리는 전국 통일 후 무사들의 불만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부하 제장들의 여력을 해외에 사용하기 위해서 조선 침공을 계획했다고는 하나 그 역시 성공 가능성에 의문을 표했고, 고니시 유키나가 등 참전 주요 무장도 회의적으로 보았다. 그러나 히데요시 만큼은 늙은 모친에게 "올해 가을은 명의 황궁에서 보내실 수 있을 겁니다." 라고 말하는 등, 전쟁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은 면이 있다.

히데요시의 의도는 정말로 조선과 명을 정복하는 것이며, 성공하면 일본 내에서 자신에게 반항적인 군벌 따위는 무시해도 좋을 정도의 국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목적이었을 것이다. 만약 성공했다면 그대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아예 일본 본토 따위는 신경 쓸 필요가 없어질 정도로 말이다.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히데요시가 조선 침공을 발표했을때 도요토미 히데츠구 이하의 군대는 오슈 진압[61]에 동원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즉 일본의 통일도 다 이루어지지 않았을때 조선 침공을 계획한 것으로 이는 소속 무장이나 동맹 다이묘에게 상당한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조선에 파병된 군대는 히데요시파 군대가 중심이었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처럼 대표적인 히데요시 다음가는 대영주 이에야스에게는 아예 병력을 요청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임진왜란에서 입은 타격은 나중에 히데요시파가 도쿠가와파에게 패배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 때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억지로 참전시키려 했다면 일본 내부에서 내전이 일어났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일단 최선임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였으나 병력의 근간이 되는 고쿠다카는 오히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30만석 ~ 40만석이 더 많아서 도요토미가 도쿠가와를 힘으로 찍어 누를 수 없는 형국이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무엇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에게 전쟁에서 이기고 외교로 패배해서 히데요시에게 동조했을 뿐이다. 즉 히데요시에 대항하여 오다 노부카츠를 오다 가문의 후계자로 내세우고 이를 명분으로 하여, 킷포시를 오다 가문의 후계자로 내세우고 이를 명분으로 삼은 히데요시 군에게 코마키 나가쿠테에서 대승하고 히데요시 측의 이케다 츠네오키를 전사시키기까지 하며 아예 바른다. 그런데 루이스 프로이스에게 지능이 모자르다는 평가까지 받은 오다 노부카츠가 히데요시 편으로 들어가면서 전쟁의 명분이 사라지고, 히데요시 측에서 자신의 여동생과 자기 어머니를 인질로 바쳐가며 동맹을 맺은 것. 즉 애초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히데요시가 건드릴 수 없는 세력이었다. 게다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는 당대 최강이라는 장수인 혼다 타다카츠 등의 도쿠가와 사천왕으로 대표되는 명장들도 수두룩했다.

그 이외에도 호쿠리쿠 지역의 강력한 다이묘였던 우에스기 가문 역시 히데요시가 직접 가서 동맹을 권고한 세력이었지 패배하고 항복한 것이 아니며 히데요시 마저 크게 두려워했을 정도로 강한 세력이다보니 역시 건드릴 수 없었기에 사후 임진왜란에는 개전 후 우에스기 카게카츠를 자신의 대리로 하여 3개월간 전선을 감독하게 하고, 결국 소수 병력을 이끌고 도해하여 웅천에 왜성을 쌓고 철수, 이후에는 종전시까지 나고야성에만 머물렀다. 동북의 모가미 역시 히데요시에게 패배한 적도 없고, 강력한 세력이다보니 군량만 보내고 역시 임진왜란에 참전하지 않는다. 북륙의 마에다 가문 역시 어느 정도는 우에스기를 견제하는 의미도 있었지만 역시 마찬가지. 다테 같은 경우에는 어쨌든 패배했다고도 볼 수 있는 세력이라 소수의 병력만을 요청했는데 다테 마사무네가 자발적?? or 히데요시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다수 병력을 보낸다.[62] 반면에 동북 지역이라도 난부나 츠가루 같은 경우에는 히데요시에게 패배한 애들이라 다수 병력을 동원. 즉 결론적으로 엄밀히 말하자면 모리든, 시마즈든, 우키타든 히데요시에게 패배하고 항복하여 종속됐던 세력들만 임진왜란에 참전시킬 수 있었던 것이지, 히데요시에게 전쟁으로 패배해서 항복한게 아닌 대등한 다이묘들은 애초에 참전시킬 계획도 그럴 수도 없었던 것이다.

조선통신사가 귀국한 직후인 1591년 9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국의 다이묘들에게 조선 침략의 기일을 정해 통보했다. 그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에게 "원정이 성공하면 명나라 땅 가운데 20주를 주겠노라"고 약속하기도 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1년 규슈의 북단 나고야(名護屋)에 조선 침략을 위한 전진 기지를 건설하는 공사에 돌입한다. 거리나 지형으로 볼 때 조선으로 가는 침공군을 실어 나르기에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그는 규슈의 다이묘들에게 기지를 건설하라고 명령하고 가토 기요마사를 축성 책임자로 삼아 속도전을 벌였다. 1591년 10월에 시작한 공사는 2달 남짓 만에 끝났다. 그동안 병력과 물자 수송에 필요한 큰 배를 건조하고 승조원들을 차출하고 군량을 운반하는 작업이 병행되었다.

당시 히데요시의 동원 명령으로 나고야에 결집, 후에 조선에 침공한 일본군의 주 병력 편제 및 참전 장수들의 목록. 흔히 세간에는 20만이 침공에 동원됐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16만 ~ 17만 정도. 호왈해서 부풀렸을 가능성이 짚다. 당시 일본에서 히데요시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약 30만 정도였다고 추정하는데 그 중의 절반의 병력이 동원됐다는 것은 히데요시가 조선 침공에 나름대로 사활을 걸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63]

아래 편제를 보면 서 일본 내의 주요 무장들은 거진 다 참가 했으나 동 일본 내의 무장들의 참여도는 비교적 낮다. 하지만 개중에도 참전했거나 하다못해 군량이라도 댄 케이스는 적지 않다. 서 일본에서 주요 무장은 주코쿠 지방의 모리 가문, 간사이 지방의 우키다 히데이에, 큐슈 섬의 시마즈 가문, 시코쿠 섬의 초소카베 모토치카인데 이들은 전부 참가했다. 그러나 동 일본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필두로, 호리 히데하루, 마에다 토시이에 등 빠진 이들이 적지 않다. 다만, 다테 마사무네, 우에스기 카케카츠[64], 난부 노부나오[65] 등은 이후에 참전한 것으로 나와 있다. 다만 우에스기 카케카츠는 히데요시의 대리로서 3개월간 전선 감독만하고 돌아온다. 모가미 요시아키는 참전하지 않았으나 군량을 내놓아야 했다. 가모 우지사토[66]는 병 때문에 빠졌고 왜란 중에 죽었다. 나중에 히데요시의 유언 집행인으로 유명해진 오대로의 참전 여부만 보자면 서 일본의 모리 테루모토, 고바야카와 다가카게, 우키타 히데이에는 참전했으나, 동 일본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마에다 토시이에가 빠졌다. 다만, 훗날의 에도 막부[67]와는 달리 히데요시 정권 하[68]에서 다이묘 간 영지 격차는 그리 크지 않았다.

또 다른 특징은 히데요시의 시종 출신들이 선봉장을 맡은 것이다. 아버지의 신분조차 불분명한 히데요시는 가문 대대로 충성을 바치는 가로들이 없었다. 때문에 시종들을 중용했는데, 서 일본을 평정한 이후 이렇다할 공로가 없는 시종들에게 서 일본의 영지를 나누어 주고 다이묘로 신분을 격상 시켰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 즐비한 네임드 무장들을 배제하고 이들 시종 출신 다이묘에게 선봉장을 맡기거나 기타 주요한 자리를 주었다. 히데요시의 시종 출신 다이묘들은 히데요시의 처 조카인 후쿠시마 마사노리를 필두로 가토 기요마사, 가토 요시아키, 와키자카 야스하루이다.[69]

이들은 위에서 언급한 네임드급 무장에 비해 영지도 작고 듣보잡에 가까웠는데 히데요시는 이들에게 선봉장 자리를 주며 키워준다는 의미가 강하다. 1군 대장 고니시 유키나가와 3군 대장 구로다 나가마사는 그들의 아버지가 히데요시의 부하로 활약했고, 임진왜란 때야 처음으로 중요한 역할을 맡은 젊은이들로 역시 히데요시의 직계 부하를 키워주기 위한 배치다. 즉 1군, 2군, 3군, 5군 대장은 일본 내에서는 네임드 무장이라고 할 수 없는 무명의 젊은 장수들이다. 심지어 우키다 히데이에는 가문빨은 상당하지만 히데요시의 양자 버프로 10대 중반의 어린 나이로 8군 대장이자 총 사령관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사정을 알턱이 없는 조선에서는 가토 기요마사고니시 유키나가가 일본을 대표하는 장군 정도로 착각을 하였다. 이 때문에 일종의 외교 사절인 사명대사가 가토 기요마사에게 "네가 히데요시를 죽이고 왕을 하라!" 라고 설득하게 된 것이다. 가토 기요마사가 "천황은 만세일계이기 때문에 내가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라고 하자 사명 대사가 "히데요시가 왕이 아닌건가? 천황은 또 누구고?"라고 하는 촌극이 일어났다.[70]

3.4. 일본군 병력 구성[편집]


후속 부대가 16군까지 있었으나 절반은 본토에 남아 만약의 상황을 대비했고 그 중 일부는 쓰시마와 이키 섬에 주둔해있었다.

일본의 지역을 보면 서쪽부터 큐슈, 시코쿠, 주코쿠, 간사이, 주부, 간토, 도호쿠, 홋카이도 지역 등 8분할 된다. 그런데 위의 1군 ~ 9군의 지역을 보면 서쪽 지방의 다이묘들만 참전했다. 동부 지역의 다이묘들은 10군 ~ 16군 등으로 예비대로 편성되었고, 뒤이어 참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4. 전쟁의 경과[편집]

4.1. 전쟁의 시작[편집]

결국 일본은 침공했다. 그동안 조선이 비변사를 세우고, 성곽을 수리하는 등 대비책이 없진 않았으나 조선에는 내부적으로도 문제가 많았고 일본은 생각보다 최선을 다했다. 5만의 선봉에 전위는 싸그리 쓸려나갔고, 차후 이 규모가 20만 대군의 대규모 침공으로 불어나리라 예상한 조선 인사는 아무도 없었다.

1592년 4월 13일(양력 5월 23일)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시작되었다.[77]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 700척 18,700명(경상 우수사 원균은 90척, 경상 감사 김수는 400척으로 보고)을 이끌고 제일 먼저 침공했다. 갑작스레 적의 대군을 맞은 부산진 첨사 정발은 매뉴얼대로 백성들을 성안으로 대피시키고 배 3척을 자침시킨(전선, 중선, 방패선 각 1척) 다음 600명이 채 안되는 병력으로 끝까지 싸우다 전사했다. 개전 직전 서평포(부산 사하구 일대)와 통합된 다대포진 군사들도 첨사 윤흥신의 지휘 아래 14일 ~ 15일 이틀에 걸쳐 싸우다 전멸했다. 남동부 방위 중심지인 동래성에는 개전 하루도 채 되지 않은 4월 14일 경상 좌병사 이각과 양산 군수 조영규, 울산 군수 이언성의 병력이 집결했다. (경주 판관 박의장과 밀양 부사 박진은 도착하기 전에 동래성이 포위되었다.) 경상 좌수사 박홍도 군사들을 소집해 육전에 나섰다. 외침에 대비한 매뉴얼이 사전에 만들어져 있었고 급박한 상황에서도 작동한 것이다. 그러나 왜군은 너무 많고, 또 강했다. 동래성도 하루를 버티지 못했고 동래성 북쪽 소산역에 진을 친 박진의 500명의 군사도 압도적인 숫적 열세에 손쉽게 무너졌다.

경상 좌수사 박홍은 동래성 구원에 실패한 후[78] 경상 좌수영의 함선을 자침시킨 후 경주로 퇴각했고 경상 좌병사 이각은 자신이 지휘해야할 울산의 경상 좌병영 군사들을 내버린 후 북쪽으로 달아나 버렸다.

분군법에 따라 동래성을 지키러 떠난 양산 군수 대신 양산을 지키던 영산 현감 강효윤은 4월 17일 일본군 선봉대의 공격을 받자 북문으로 빠져나와 밀양으로 퇴각했다. 4월 18일 고니시 군의 본대가 양산에 입성했다. 1차 방어선이 무너지자 박진은 영남에서 북상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하는 낙동강변 험로 황산과 작원 잔도에 2차 방어선을 쳤다. 진주에서 개전 소식을 접한 경상 감사 김수는 4월 16일 낮 밀양에 도착해 도내 총동원령을 내리고 진주와 함안의 군사들을 동원해 박진을 지원하고자 했다. 당시 박진이 거느린 군사는 너무 적어서 황산과 작원 잔도 전체 구간을 방어하긴 무리여서 작원 잔도 끝부분만 차단하고 있었다. 황산 잔도를 건넌 고니시 군 선봉대는 작원에서 박진 군과 교전을 벌였다. 전투는 상당히 치열했는데 선두가 차단된 고니시 군 선봉대는 주력 일부를 금병산 능선으로 우회시켜 조선군의 배후를 차단해 포위 섬멸을 시도했다. 허를 찔린 박진 군은 무너지고 박진은 간신히 빠져나와 밀양성에 불을 지르고 가족을 대피시킨 다음 빠져나왔다. 이로서 영남의 2차 방어선도 무너졌다. 4월 17일 영산으로 물러났던 김수는 18일 박진의 패전 소식을 듣고 초계로 물러났다.

경상 우도는 4월 19일 구로다 나가마사와 모리 요시나리의 3번대, 4번대 485척이 김해 죽도에 상륙하면서 본격적인 전란에 휩싸였다, 김해성은 하루동안 치열하게 저항해 4차례 공격을 막아내었으나 초계 군수 이유검이 먼저 서문으로 달아나버렸다. 김해 부사 서예원이 이유검을 붙잡으려고 성을 나갔다 그대로 진주로 도망치면서 사기가 급격하게 떨어져 밤에 동문을 넘어온 왜군에게 함락되었다. 창원에 있던 경상 우병사 조대곤이 지원하려 했으나 급하게 모은 200여명의 병력으로는 성에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초계 군수 이유검은 4월 26일 김수에게 참수되었고 병력 운송 중에 사고가 생겨 아예 지원도 못간 의령 군수 오응창 역시 6월에 처형되었다.

한편 유사시 비상 연락망으로 쓰이던 봉화가 전달되지 않았다. 선조 수정 실록 4월자에 실린 경상 좌병사 이각의 장계에는 봉수군 오장이 왜선 400척을 목격하고 즉시 보고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봉화 체계가 완전히 작동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79] 그러나 당일 저녁에 한양으로 들어와야 했던 봉화는 들어오지 않았고[80], 여러 설이 있지만 가장 유력한 것은 봉수군이 실수로 반대 방향으로 봉화를 올렸다는 것. 한양의 조정은 4월 17실 신시, 저녁 무렵에나 상황을 파악하였다. 그리고 이 속도는 그냥 마편으로도 도달 가능한 속도인 만큼, 봉화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것이 맞다.

제승방략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의견도 있는데 중앙에서 경장을 파견하는 건 진관체제도 똑같다. 진관 체제는 소규모 병력이 각지에서 분산되어 방어하게 되어있고 각 진관이 윗선의 허가없이 타 진관을 지원하는 일은 성종 대에 법으로 금지되었다. 즉, 일개 고을 내지는 도 단위로 감당할 규모를 넘어선 대규모 공격에 대한 고민이 매우 부족했다. 그런 사태가 일어나면 1개 ~ 2개 도에서 병력을 모으고 중앙에서 파견한 경장이 이들을 지휘하는게 일반적이었다. 진관 체제라고 현지 지휘관에게 대규모 병력 지휘권을 주진 않았다. 그런 면에서 북방 지역은 현지 병사가 지휘하게 하고 남방도 지방군과 중앙군의 역할을 나눠 상당 부분 재량권을 부여해 병력을 집결시키고 다중으로 방어선을 구축한 제승방략은 상당히 진보된 제도였다. 왜침이 전례없는 대규모에 속도가 빨랐기 때문이지 제승방략이 병력 모아놓고 경장만 기다리는 제도라서 무너진게 아니다.

또한 임진왜란 이전의 조선군은 오위 진법을 기본 전법으로 채택하고 있었는데 이는 북방 기마 민족과의 투쟁에 적합하도록 고안된 대 기병 전술로 보병 중심인 왜군을 상대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았다. 이 문제는 전쟁 후 명의 절강 병법을 받아들인 후에 개선되었다.

4월 18일에는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제2군 22,000여 병력이 부산에,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이끄는 제3군 11,000여 병력이 다대포를 거쳐 김해에 상륙, 침공을 개시하였다. 이와 함께 구키 요시다카(九鬼嘉隆),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 등의 9,000여 수군 등 총병력은 약 17만이었다.

4.2. 정규군의 붕괴와 파천[편집]

상황이 그 상황인데도 당시 조선 조정은 삼포 왜란 같이 가벼운 왜구들의 준동으로만 파악하고 있었고, 조선 최고의 명장 중 하나라 칭송받던 이일을 내려보내 간단히 사태를 수습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일의 군대가 먼저 상주에서 가토에 의해 패배하였고, 당황한 조정은 북방에서 명성을 날린 신립을 보내나, 그 역시 탄금대 전투에서 패하고 자결했다.

신립이 이끌었던 경군(京軍) 기병대의 수효는 사료에 따라 다르나 5천에서 1만 정도로 보이고, 대략 8천으로 보기도 한다. 이 부대는 창기병 편제가 거의 없는 궁기병 위주였다. 궁장 경기병으로 유명한 몽골군이 병력의 5분의 2는 항시 중기병으로 무장한 것을 생각하면, 조선군 기병의 충격력은 상당히 빈약한 상태였다. 조선의 편제상 창기병은 반드시 일정 비율을 갖추어야 했지만, 세조 대에 조선군의 인사 고과가 철저히 궁시 위주로 재편되면서 창검의 운용은 사실상 잊혀졌고, 창기병 역시 대부분 궁기병으로 대체됐다.

신립은 전투에 앞서 넓은 들판으로 적을 끌어내어 기병전을 벌이려고 하였으나 패배했다. 신립이 그러한 탄금대를 전장으로 선택한 것에는 여러가지 설이 분분한데, 당시 신립이 지원받았던 병사들의 기량 문제가 크며, 병사들의 기강이 해이하고 심지어 행군 중에도 탈영할 정도였고, 이러한 병사들을 이끌고 싸우기 위해 신립은 배수진을 선택했다는 주장이 있다. 반면에 신립이 북방 유목민(주로 여진족)과의 기병 전투에서 승리하며 명성을 날린 것을 고려할 때 기병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평지를 고르다 보니 전투 장소가 탄금대로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81] 하지만 탄금대 전투 당일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바람에 질척거리는 땅 때문에 기병을 제대로 활용할 수 없어 신립은 지리멸렬하게 패주할 수밖에 없었다.[82]

다만 신립이 받았던 병사들이 저질이라는 말은 연려실기술에만 나오는 말로, 선조 수정 실록에는 이들은 한양을 지키던 중앙군과 군적에 올라간 병사들로서, 전마를 지급받은 경군 기병 8,000여 명과 거기에 경기도와 충청도의 정병 8,000명을 합한 16,000명의 대병력이었다. 따라서 신립의 부대가 오합지졸이었다는 설은 신립의 과오 덮어주기용이라는 시각도 존재한다.

프로이스 신부의 일본사에 이 탄금대 전투가 묘사되어있는데, 조선군이 8만이라는 점은 의구스러우나 반월진으로 돌격한 조선의 기병대가 양익에 조총 사격을 받고 후퇴했다가 1차례 - 2차례 재공격을 가했으며, 일본군이 붕괴하지 않고 창검 따위로 조직적으로 대응하자 조선군이 붕괴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탄금대 전투에 대한 자세한 서술은 #

신립의 공격은 3차에 걸쳐 진행되었다. 그러나 1차, 2차에서 성공을 거둔 조선군은 3차 공격에서 실패하고 말았다.결국 조선군은 탄금대에서 대패했으며,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왜군은 수급 3천개의 전과를 올렸다. 이로서 한양과 왜군 사이를 가로막는 야전군은 사라졌고 방법이 없어진 선조는 수도 한성을 버리고 북으로 피난을 택한다.

조정은 적군의 수도 공격에 대비하여 우의정 이양원(李陽元)을 수성대장(守城大將)으로 삼아 도성의 성곽을 축성하게 하는 한편 전 북병사(北兵使)였던 김명원(金命元)을 도원수(都元帥)를 삼아 한강을 수비하게 하였으나 실패하고 20일 만인 5월 3일 서울이 함락되었다.

한편 고니시 유키나가를 비롯한 일본군은 최단 시간 내에 한양을 점령할 수 있었으나[83] 선조를 잡지 못한지라 왕을 사로잡아 전쟁을 빨리 끝낸다는 목적은 실패했고, 최단 시간 한양 점령만을 목표로 하면서 제껴두었던 다른 지역들을 근거로 관군과 의병의 저항이 일어나면서 전쟁의 양상이 달라지게 된다. 특히 경부가도에서 비껴있어서 초기에 아무런 피해를 받지 않았던 조선 최대의 곡창 지대 호남이 아래 서술하는 반격의 근거지가 된다.

4.3. 반격의 시작[편집]

그러나 전라도를 중심으로 재야 인사 곽재우, 김덕령, 60세의 고령인 고경명 등이 이끄는 의병이 활발히 일어나고[84] 일본으로부터 건너오는 일본군의 물자와 병력을 수송하던 해군을 이순신 장군이 번번히 격퇴하자 전황은 고착된다. 이순신 장군의 활약과 의병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도 다 아래에서 설명할 권율 장군과 김시민 장군의 활약으로 육로에서 전라도를 잘 버텨냈기 때문에 수군 기지도 운용 가능했던 것.

이 과정에서 광해군이 급히 세자로 임명되어 분조를 이끌며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몸소 보여줘, 광해군의 인기가 상당히 올라갔다. 반면 임해군의 경우 부하였던 국경인이 임해군의 처신[85]에 불만을 가지고 임해군을 넘겼을 정도이니 말 다했다. 당시 선조는 분조를 맡긴 자기 아들 광해군마저 경계하는 형상을 보인다.[86]

왕이 몽진하자 도성에 분노한 민중이 들이닥쳐 방화와 약탈이 발생했다. 선조 수정 실록에 따르면 방화의 주체를 간민과 난민으로 지목하고 있다. 불은 장예원[87]에서 시작해 곧 전체 궁궐을 태워버렸다고 한다. 그런데 이 부분은 최근 일본에서 발견된 당시 한양에 도착한 일본군 병사의 것으로 보이는 기록에 궁궐 양식의 아름다움에 대한 극찬과 궁궐 전개도, 심지어 기와의 색까지 세심하게 기록되어 있어 부정하는 견해가 대두되고 있다. 이를 보면 적어도 일본군이 한양에 입성한 시기까지는 궁궐이 불타지 않았으므로 그 시간 차이를 생각할 때 일본군이 다시 밀려서 한양을 빠져나갈 때 불태우지 않았는가 하는 의견이 제기되었고, 실록에도 저자간에 떠도는 소문이 그렇다더라 식으로 적혀있다. 이 때문에 이 기록이 지배층에 대한 피지배층의 불신과 이를 의식한 지배층의 피지배층에 대한 적의에 가까운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냐는 주장도 있어 사회상 분석에는 유용하지만 진실로 보기는 어렵다는 견해가 많이 늘어나는 추세다.

의주로 피난간 선조는 조선을 버리고 요동으로 망명가려고 수 차례 요동 총독에게 가서 요청하였으나, 너무 빨리 도망쳐오니깐 오히려 일본과 합세해서 중원을 침공하려는걸로 의심한 명이 수행원을 100명으로 제한(사실상 오지말란 소리다)하고 배를 전부 자기들 쪽으로 가져가 버리자 뜻을 단념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요동에서도 조선의 왕이라는 작자가 자기 나라를 버리고 도망간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때 여진족을 이끌고 세력을 넓힐 기회를 노리던 누르하치가 입지를 넓히기 위해 몇 차례 원병을 제안했으나 선조는 이를 거절했다. 누르하치가 여진족 전체를 통일한 것은 1613년의 일이고 대칸의 직위에 오른 것, 즉 완전 평정이 끝난것은 1616년의 일이나, 이 때의 누르하치는 약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로 이미 이성량 등의 지원을 받아 거병한지 10년이 넘은 다음 으로, 1586년에 벌써 원수인 니칸 와이란을 죽이고 건주 여진을 완전히 통합하여 건주 여진의 칸이 되었고, 건주 여진의 수도까지 새롭게 축성할 정도로 강한 세를 키운 상태였고, 여진족 중 가장 강한 라이벌이었던 예허 부와는 사돈 관계를 맺고 동맹을 맺어 사실상 여진족 최강자로서 주변에 대적할 자들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급하다지만 질적으로나 수적으로나 뭐로보나 믿을수가 없는, 임진왜란 이전 최고 주적이었던 여진족에게까지 손을 벌릴 정도로 조선 조정이 분별이 없진 않았으며, 또한 실제로 여진족에 대한 위협은 자세한 정보 수집을 통해서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으며, 누르하치가 정말 엄청나게 위협적인 인물이라는 것도 이미 파악이 끝난 상태였기에 원병을 거절한다. 일본에는 마상에서 돌격하는 기병이 없으며 가토 기요마사 역시 함경도 이북에서 오랑캐들에게 발려서 진군을 그만 둔 기록이 있으니 원병이 왔다면 도움이 되었을 지도 모르겠지만. 남의 나라 전쟁에 과연 제대로 싸우기는 했을지가 의문이니 선조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고 본다.[88]

고니시의 부대는 평안도, 가토의 부대는 함경도, 구로다의 부대는 황해도로 진격하였다. 강원도와 황해도 방면으로 모병하러 간 임해군순화군은 현지에서 음식과 물목이 부족하다며 행패를 부리다 조선인의 밀고로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다. 가토의 부대는 이 시점에서 한발 더 나아가 본격적인 중국 침공의 맛보기(?) 차원에서 두만강 너머의 여진족들까지 공격하고 그들의 성 하나를 점령하여 일본 역사 최초의 대륙 침공에 성공했지만[89] 이후 여진족의 강렬한 반격을 계속 받자 피해를 최소화 하자는 차원에서 바로 후퇴하고 조선에만 집중하기로 결정한다.

4.4. 명의 참전[편집]

파일:external/www.iiconservation.org/5974-palace_museum_photo_1.jpg

자금성 태화전

4.4.1. 명군의 참전 이유[편집]

명나라가 임진왜란에 참전한 이유에 관해서는 명백한 사료가 남아있지 않다. 그런고로 여러가지 잡스러운 야사들이 많지만 이 전쟁의 목적이나 전략적인 시각에서 보나 참전할 필요성은 명백했다.

우선 상술한 내용을 보면 알다시피, 당장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쟁을 일으킨 궁극적인 목적은 명나라를 정복하여 중국 대륙에 진출하는 것이었지, 단지 조선을 정복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게다가 본래 도요토미가 조선에 보낸 국서에서 통보한 요구 사항도 정명향도(征明嚮導), 즉 명을 정벌할 것이니 조선은 일본에 복속하고 명을 치는 데 앞장서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 조선과의 외교 창구를 담당하고 있던 대마도 도주 소 요시토시는 그 요구 사항이 조선의 입장에서 받아들이기엔 너무나 불손한 내용이라고 판단한 나머지 국서의 내용을 온건하게 돌려 말한답시고 살짝 바꿔서 전했는데[90], 이 또한 정명가도(征明假道), 즉 명을 치러 가는데 조선은 그 침공할 길을 빌려달라는 것이었으므로, 어느 쪽이든 일본이 명나라를 침공하겠다는 의사는 분명했다.

또한 당시 명나라는 북쪽에는 북원과 적대적이라 베이얼 호 전투로 카라코룸을 파괴한 역사도 있었고 토목의 변이 일어난 적도 있었다. 남쪽 국경에는 베트남과도 전쟁을 치뤄 점령했다가 물러난 적도 있다. 게다가 이때까지는 큰 위협은 아니었지만 여진족도 있다. 이런 판국에 일본은 명나라를 정벌하겠다고 대놓고 적대적인데다가 20만 이상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데, 조선을 집어삼키면 국력이 더 커지고 명나라와 국경을 맞닥뜨려 요동, 동남부 해안가, 그리고 수도 북경이 위협받게 된다. 그러면 명나라의 동북 국경에 못해도 수십만 병력을 상시 주둔시켜야 하고 이 막대한 비용을 두고두고 감당해야 한다. 게다가 일본이 북원과 손을 잡고 명나라를 침공한다면 아무리 명나라라도 간단히 막아내기는 힘들 것이다. 반면에, 조선은 건국 이후 명나라에 침략은 커녕 절대적인 우호국이었으니, 당연히 조선을 살려두는게 명나라에 이득이 된다. 온 사방이 적국으로 둘러싸이는 건 명나라로서도 결코 바라지 않는 일이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단기적으로는 임진왜란에 참전하는게 명나라 재정에 큰 부담을 주었을지라도, 장기적으로는 참전하는 편이 훨씬 이득이었을 것이다.[91] [92]

4.4.2. 명군의 참전과 역할[편집]

아무튼 그 사이 조선의 연이은 요청으로 명나라도 심각성을 느끼고 대규모의 병력을 보내 참전했다. 참전 초기에는 빠르게 일본군을 밀어내며 금세 일본군을 몰아낼 줄 알았으나 오히려 일본군이 종전 협상을 요청할 때마다 그걸 들어주느라 시간을 끌어서 전쟁이 7년이나 지속되게 된 큰 이유가 되었다. 조선군이야 어떤 방법을 쓰던 당장 일본을 몰아내고 싶었겠지만, 명군은 일본이 한반도 전역을 차지하지 못하게만 하면 된다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싸우지 않고 공을 세울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을 것이다. 게다가 외교를 담당한게 심유경인 게 문제.[93]

제1차 조승훈의 5천명은 평양성 공격에 실패(7월), 제2차 이여송이 이끄는 4만명이 12월 압록강을 건너 다음해 정월 홍이포라는 신무기로 포격해 평양성을 탈환(1593년 1월 27일)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무리하게 남하하다가 고양 벽제관(碧蹄館)에서 매복에 걸려 패배하였고, 개성으로 퇴각한 뒤 전선은 임진강을 경계로 교착 상태를 벌인다. 그 뒤 일본군은 행주 대첩에서 패배, 북쪽으로는 명군 남쪽으로는 조선군으로 쌈싸먹힐 위기에 처하였고, 명나라와 교섭을 진행하여 결국 한양을 포기하고 후퇴하였다. (1593년 5월 18일)

파일:external/i11.tinypic.com/6239g0y.jpg

하지만 명군의 참전은 분명히 의의가 있었고, 벽제관 전투, 사천성 전투와 같은 몇몇 패배한 전투가 있기는 하지만 평양성 전투, 직산 전투처럼 승리한 전투도 있는 것을 보면 명군이 아예 못싸운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명군이 형편없는 군대였다면 전쟁 중 조선에서 명군의 편제와 교리, 무기를 다급하게 받아들일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특히 이여송이 평양을 우수한 화력과 기술력, 전략으로 점령했을 때, 일본군은 정말 심각한 패닉에 빠졌고 조선군의 사기는 고조되었다.[94] 당장 고니시가 평양 점령 후 선조를 추격하지 않은 원인의 근본 원인은 공세 종말점에 도달한 고니시 군의 상태이긴 하나 명군의 참전에 대한 소문이 심리적으로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아마 고니시 군이 지치지 않고 명의 참전에 대한 소문도 없었으면 이순신이나 조선 육군의 활약도 의미 없이 전쟁이 끝났을지도 모른다.

결론적으로 명군은 제 역할을 해냈으며,[95] 전란 중 각지에서 명군과 조선군이 연합해서 활약했다. 명군의 참전으로 인해 조선군의 사기는 크게 올라갔다. 그러나 전쟁 막바지에는 유정과 같이 명 육군이 전투를 회피하는 일이 빈번히 생겨 이순신 장군이 조금 고생하기도 한다. 반면 명 수군을 이끌던 진린은 유정과 달리 같이 싸우긴한다.

더불어 명군이 대규모의 육군을 파병하게 되면서 조선은 그때까지 유지하던 군인들을 고향에 돌려보내며 숫자를 줄이게 된다. 병농 일치제인 조선에게 있어 생산 가능 인구를 군대에 잡아두는건 국가 생산력에도 영향이 미칠 수밖에 없는 부담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란으로 조선 경제는 굉장히 피폐해진 상태여서 군인들을 고향에 돌려보내어 농사짓게 하는일이 급했다. 한때 17만에 육박했던 조선군은 명군의 참전 이후 크게 줄어든다.

따지고 보면 임진왜란 당시의 명군은 후반의 조선 조정의 주요 탱크 역할을 수행한 셈이고, 조선의 수군, 근왕병, 의병이 서폿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정유재란 즈음에는 숫적으로 명군이 주력이 되었다.[96] 임진왜란 당시에 조선군은 최대 17만, 명군은 약 5만이었지만 정유재란 당시에 조선군은 약 3만, 명군은 최대 11만에 달했다.

이 외에도 명군이 아니라 명나라가 조선에 큰 도움을 준 바가 또 있다. 가령, 임진년 이후부터 명나라는 산동 등지에서 군량을 조달하여 현지의 명나라 병사들과 조선인들에게 뿌렸는데, 이 덕에 전쟁과 기근[97]에 따른 조선의 식량 사정이 나아졌다. 사실 명나라 역시 자국 군대가 조선에 끼친 바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배려하는 의미도 있었다고 한다. (물론, 이때 지원한 식량은 후일 조선에서 환대미라 하여 다시 상환했다.)

선조는 이후 재조지은이라며 명군을 드높이는데 이는 명군의 역할이 큰 영향을 끼치기도 했으나 당시 선조가 조선군의 업적을 깡그리 무시한데는 정치적 입장도 반영되어 있다.[98] 한국 전쟁 당시 미군에 준할 레벨이다. 한국의 TV 드라마나 미디어에서는 민족주의 + 근대 이후로 중국을 멸시하게 된 풍조 + 사대주의에 대한 반감 등으로 명군의 활약을 묻어가는 경향이 강한데, 그리고 백성에게 패악질을 한게 잘한건 결코 아니지만, '끝까지 저항한 지역은 민간인까지 학살하는게 기본 옵션인[99] 왜군'과 '구성원 개개인의 도덕적 해이와 일탈로 패악질을 하는 명군'[100][101]을 같은 레벨로 볼 수는 없다.[102][103] 게다가 명군 개개인 단위의 횡포와는 별개로, 명나라 조정은 공식적으로 조선에 식량까지 지원해줬다. 또한 징비록에서는 백성들이 굶어 죽어가자 자기네 군량 50석을 내어줬다는 기록도 있다.

명나라는 피해를 준 부분이 있지만 분명 도움이 된 것이 사실이다. 사실 일본이 이길 줄 알고 일본군에 붙거나 협력한 조선인[104]들도 의외로 적지는 않았는데 명군이 참전해서 상대적으로 조선에 힘이 더 실려 그런 내부적 불안 요소를 제어할 수 있는 안정감이 생겼다. 일단 명의 조선 황제가 계속 지원을 해준다고 하니 조선 혼자서 일본이란 강적[105]과 싸울 때보다는 사기도 올랐을 것이다. 하지만 선조가 재조지은을 외친데에는 전란으로 인해 왕권이 땅에 떨어졌다는 점을 유의해야한다. 선조는 전란 극복의 공을 자국의 전쟁 영웅이 아니라 명나라에서 찾았는데 그 이유는 명나라를 높이 세우면서 명군을 요청한 자신의 공을 인정해달라는데 있다. 이후 조선 조정은 청조의 감시까지 피해가면서 경복궁 뒤뜰에 대보단을 만들어서 새벽에 제사를 지내기도 한다. 명군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이기도 하지만, 이것 역시 인조가 삼전도의 굴욕을 당하면서 청나라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하자 청에 대한 반발 심리 역시 적용된 것이다
.

4.4.3. 명군이 악평을 들은 이유[편집]

전쟁 도중 명나라가 조선을 얼마나 깔보았는지, 또 조선에 가한 내정 간섭이 어느 정도였는지 정리해놓은 링크다. 명나라는 전쟁 도중 많은 도움을 주었지만, 조선을 직접 통치 하려는 등 조선의 자주권을 무시하는 만행도 많이 저질렀다.

상기한 이유로 참전한 만큼의 몫을 톡톡히 해준 명군이지만 후대에 이르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고 민폐만 끼친 양 묘사되기도 한다. 이는 명군의 입장상 적극적인 전투 참여가 적었고[106] 벽제관 전투에서 패전하여 전선을 고착화시킨 것도 있지만, 명군의 심각한 약탈과 엉망진창인 군기의 역할이 컸다.[107][108] 그리고 수천 문의 화포를 동원해 성 안에서 방어만 하고 있어도 적 지휘관이나 부대를 전멸시키던 과거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쇠퇴하고 있었다.[109][110]

게다가 징비록 등 여러 신뢰할 만한 사료에서는 명군의 장수들이 조선의 장수와 관료를 폭행하거나 무례하게 군 일이 많아서[111] 애를 먹게 했다고 기록돼 있는데[112], 이렇게 명군이 장수와 병사 할 것 없이 조선의 조정, 백성들에게 일관되게 나쁜 모습을 보여준 탓에, 명은 멸망의 원인이 됐을 정도로 성심껏 자국의 역량을 다 들어바쳐서 조선을 도와주고도 비난받는 꼴이 됐다. 당시의 명군은 기강이 엉망이었고, 여러 지방에서 온 장수들이 군벌처럼 병사를 거느린 탓에 상호 협조나 전략적 교류가 제대로 되지 않는 문제점이 있었다. 실제로 몇 년 안가 모문룡 같은 막장스러운 장수[113]가 나타난 것도 명군의 말기적 상태를 보여주는 좋은 예.

약탈과 보급상 무리수가 발생한 이유를 살펴보자면, 명나라 군대의 규모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명나라 군대도 사람이니까, 식량은 먹어야 살기 때문이다. 명나라 군대가 식량을 조달할 방법은 2가지가 있는데, 조선에서 돈을 주고 사먹는 방법과 중국에서 조선까지 식량을 운반하는 방법이다.[114]

  • 첫번째 방법이 불가능한 이유는, 명군의 식량 보급이 명의 은본위제를 이용해 식량을 구매해서 사용하는 방식에 상당 부분 의존했는데 조선은 이때까지도 화폐 경제가 발달하지 않아 그게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명은 중기 이후로 식량을 직접 운반하는 방식을 포기하고 민간 상인을 이용해 식량을 운반하도록 하는 체제를 구축했다. 즉, 명의 중앙 정부가 직접 군량을 군대가 있는 곳까지 수송하는 것이 아니라 민간 상인들이 군량 수송을 맡겨서 병졸들에게 은을 지급하여 이것으로 알아서 식량을 사먹도록 한 것이다. 이는 명이 은본위 경제 체제를 구축한 것과 맞물려서 상당히 효율적으로 돌아갔고 상업을 활성화시키는 부수적인 효과까지 얻었다.[115] 그러나 이러한 명의 병참 체계는 조선에서는 활용할 수가 없었다. 조선은 아직 현물 경제 체제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116]

  • 결국 두번째 방법인 직접 수송을 시도했는데, 이것은 실로 엄청난 노동력을 요구하는 힘든 작업이었다. 명은 자국 상인들을 끌어들여 보급을 해결하려 했지만 조선까지는 너무 멀었기 때문에 협조를 많이 얻지 못했다. 거리가 너무 멀었기 때문에 수지 타산이 맞지 않고 위험 요소가 많았기 때문에 협조하는 상인들이 적었던 것이다. 협조하는 상인들도 이제까지 하던 대로 요동까지만 식량을 수송해 놓아서, 결국 요동에서부터 조선까지 식량을 운반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이러한 문제는 조선에게도 존재했다. 조선의 수송 체계는 수운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이러한 수운 체계 하에서 명군의 주요 기지인 평안도는 예외였기 때문에(공교롭게도 '명의 사신을 맞이할 때를 위해서' 라는 이유였다) 수운이 제대로 형성된 지역이 아니었고[117], 따라서 기껏 요동까지 식량을 실어와도 이걸 수운을 통해 전선까지 운반할 능력이 마련되지 않은 것이다. 황해도 일대에서 배를 끌어왔지만 이것도 수량이 부족했다. 결국 육상으로 병참을 대야 했는데, 그 결과 수십만의 조선군 및 백성들이 식량을 나르다 지쳐서 죽는 상황이 전개되어 버린 것이다.[118] 임진년 17만에 달하는 군대를 동원했던 조선이 이후 동원력이 점점 떨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조선은 말 그대로 필사적으로 식량을 공출했지만 그 식량을 제대로 실어 나르기가 너무나 힘들었고, 후방 거점에 쌓여서 제대로 수송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명군 참전 이후 의병들이 줄어든 것은 이런 사정도 있는데, 상당수의 의병들도 이 수송 작업에 동원되었기 때문이다.[119]


명은 조선에게도 식량을 사들일 것과 은광을 개발해 은을 채굴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전란으로 혼란스러운 조선 입장에서 이를 해결하는 것은 무리였다.[120] 여기에 이런 군량 수송을 맡은 명 상인들이 식량을 착복하는 행위가 자행되어 보급 문제를 심화하기도 했다.[121]

여기에 명군의 군기마저 매우 나빠서 문제는 더 심각해졌다. 당시 명군은 내몽골만주와의 국경을 지키는 몽골인여진족 그리고 다우르족 (거란 잔존 세력) 혼성 부대인 북병과 조총홍이포로 무장한 남병이 있었다. 북병은 주로 기병이었고 거의 주축은 몽골 기병이었으며 남병은 보병포병이었다. 여기서 북병은 대부분이 말도 안 통하던 오랑캐 출신들로 기강이 엉망이었으며 되려 평양을 몽골 기병대가 약탈하기까지 했다. 실제로 조선은 명군에 대해 그나마 군기가 살아있던 남병은 선호했으나 북병은 약탈이 너무 심하다면서 남병 중심으로 지원군이 왔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다. 유성룡도 이 부분을 징비록에서 수시로 불평하고 있다. 조총홍이포 그리고 불화살 등의 화약으로 무장한 명나라 남방군은 승률도 높고 조선군과 같이 싸우는 데 적극적이었던 데 반해 정작 이여송이 직접 통솔하는 북군은 전투를 회피했다는 것이다.[122]

이런저런 이유로 명군은 약탈을 자행했고, 이것이 명군에 대한 이미지를 극히 나쁘게 하여 후세에는 한것도 없이 짐만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온 것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약탈의 정도만 따지면 일본군이 심하면 심했지 당연히 덜하진 않았다.[123]

물론 이에 대해서 명군을 그럼 배제하면 되지 않느냐는 의견도 있긴 했지만, 그럼 전쟁은 조선이 패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의병들은 일본군을 상대로 유격전 이상의 활약을 기대하기 어려웠고[124], 정규군도 개편이 이뤄지기 전까지는 수성전에 치중했다. 그렇다 보니 조선으로서는 명군을 어떻게든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사실상 의병들보다 정규군이 주전력이자 활약을 많이 하였는데 정규군마저 사기와 훈련도가 그렇게 높지 않아서 조선이 자력으로 일본군을 이길 수 있을지는 의문인 상황이었다.[125]

단적인 사례로 고대일록(孤臺日錄) 1592년 6월 15일을 보면

○ 6월 15일 계묘(癸卯) 충청도 순찰사(忠淸道巡察使) 윤선각(尹先覺)ㆍ전라도 순찰사(全羅道巡察使) 이광(李洸)ㆍ경상도 순찰사(慶尙道巡察使) 김수(金睟)의 군대가 수원(水原)에서 궤멸되었다. 군대가 패배하던 날은 6월 초순이었지만 도로가 막히는 바람에 전갈이 비로소 도달했다. 이에 앞서 이광은 스스로 근왕(勤王)을 칭하며 군사 5천여 명을 거느리고, 윤선각은 수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김수는 50여 명을 거느리고 수원에 진을 쳤다. 일본 기병 여섯이 깃발을 세우고서 일본도를 휘두르며 오자, 1만여 명의 조선 군인들은 겁먹고 무너져 갑옷과 활을 내팽겨치면서 달아났다. 버려진 양식과 궁시(弓矢)ㆍ깃발ㆍ북 등의 물건이 산처럼 쌓였다. 그 외에 상실(喪失)한 것은 파악조차 할 수가 없었다.


보다시피 제대로 된 전투 병력이라 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진 병사들도 있었다. 그리고 가뜩이나 바다에서 제해권을 뺏겨 보급이 영 힘든 일본군 입장에서 명군의 참전은 일본군이 조선 정복에 회의적으로 변하게 만들었다. 물론 이는 전선에 있던 일본 장수들의 의견이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아니었다. 참고로 고대일록은 공문서나 사문서를 참고해 비교적 객관적·사실적으로 역사를 전하고 있으며, 특히 1592년부터 1593년까지의 임진왜란 초기 사회에 대한 기록이 상세하게 들어 있고 임진왜란 당시 사대부들이 겪은 애환과 향촌 사회 연구에 도움이 되는 내용들 또한 다수 포함하고 있어 높은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

4.5. 교착 상황과 강화 회담[편집]

한국과 일본에서는 흔희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모르게 고니시 유키나가와 심유경에 의해 조작된 것이 사이쇼 조타이에 의해 발각되어 파기되었다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히데요시는 회담의 진행 사항을 알고도 묵인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책봉을 받고 나서 자신의 요구가 하나도 관철되지 않았음을 확인한 후 '조선에서 사죄의 표시로 왕자가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화를 내고 얼마 후 세가지 이유를 들먹이며 전쟁을 재개하였다. 단적으로 히데요시의 책봉 교서와 만력제의 칙유, 관복, 인장이 지금까지 남아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이에 관한 한중일 학계의 결론은 임진왜란 이후 일본의 유학자와 병법가들이 내용을 왜곡하여 기록하였고 널리 퍼지면서 해당 이야기가 실제 사실로 알려졌다는 것이다. 국사 편찬 위원회의 한국사 콘텐츠의 내용 또한 이를 반영하고 있다.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34

4.5.1. 기존의 알려진 이야기[편집]

위조한 내용대로 글을 읊기로 한 승려 사이쇼 조타이(西笑承兌)가[126] 명의 봉공안을 그대로 읽어버렸고 히데요시는 분노했고 사신들을 추방함으로써 화의는 결렬되었다. 화의를 주선한 심유경은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일본으로 귀화하기 위해 남쪽으로 도주하다가 의령 부근에서 명나라 장수 양원에게 잡혀 국제 사기죄로 압송되어 목이 잘린다. 고니시도 히데요시한테 책임 추궁으로 처형 당할 뻔했으나 이시다 미츠나리의 만류로 다시 전장에 복귀했다. 그리고 이듬해(1597년) 정유년, 일본군은 재차 침입하게 되었다.

4.5.2. 실제 사실[편집]

위의 내용이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이지만 한중일 학계의 연구 결과 사실이 아닌 것으로 결론이 났고 1차 사료들을 바탕으로 사실을 파악하고 있다. 아래 내용은 이에 관한 논문과 연구들을 요약한 것이다. [127]
일본군은 임란 최대의 분수령인 이치 전투에서 권율 장군의 조선군에게 패배하고, 김시민 장군이 진주성을 지켜내어 진주성 함락이 수포로 돌아가자 조선의 전라도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실패한다. 그러다보니 일본군 내부에서도 더이상 진격하기 힘드니 물러서자는 분위기가 되었다. 진주성이 함락되었던 2차 진주성 전투(1593년 6월)는 그 물러나는 가운데 히데요시의 김시민에 대한 분풀이와 일본군의 세력 과시를 위해 벌어진 전투다.[128] 주로 조선군은 진주 대첩 때의 두 배 정도인 6000명 ~ 7천여 병력으로 방어전에 나섰으나[129] 9만 명이 넘는 적[130]을 상대로 9일동안이나 항전했으나 황진 등이 전사하고 갑작스런 폭우로 성벽 일부가 무너지면서[131] 성이 함락되고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학살되었다. 하지만 일본군 역시 성을 함락한다고 피해가 심각했다.

또한, 김덕령, 곽재우, 정문부 등의 의병들과 정기룡 같은 정신차린 관군들이 반격을 시작했고, 사명당이 승군을 조직하며 일본군을 곳곳에서 격파하고 향토의 방위를 책임진다.[132] 이 과정에서 의병 중 다수가 경험 부족과 전략적 결함으로 전사하기도 했다. 조헌과 고경명이 그 예.

1593년이 되어 행주 대첩의 승리로 한양을 되찾고 전선이 안정화되자 조선은 의병, 수군을 제외하고 13만 대군을 뽑는 기염을 토한다.[133] 그러나 평화 협상이 질질 늘어지고 소강 상태가 계속되다 보니 17만 5천의 군사는 3만 5천 정도로 줄어드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다른 주장이 있다.

  • 전쟁의 양상이 경상도 남해안에 한정된 국지전으로 변모해서 대규모 병력이 불필요했다.

  • 선조는 명군에게 전투를 맡기고, 조선군 병력은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서 재건을 서두르고 싶었다.

  • 선조는 계속된 명군의 삽질 때문에 명나라에 대해 원군을 요청한 결정 자체도 삽질이 아니냐는 눈초리를 불식시키기 위해서 명군에게 기회를 많이 주고 싶었다.

  • 선조는 군대가 비대해지는 것이 불안했고, 따라서 어차피 전쟁이 끝나면 돌아갈 명군에게 전투를 맡김으로서 조선군을 줄여 군의 규모를 통제가능한 수준으로 제한하려 했다.


그러는 사이 일본의 대표적 반전파인 고니시 유키나가와 명의 장군 이여송, 심유경 등이 주축이 되어 평화 협상을 벌이는데, 명에서는 협상의 대가로 도요토미를 일본의 왕으로 삼고 그 입공(入貢)을 허락한다는 봉공안(封貢案)을 보냄으로서 국면을 해결지으려 했으나 히데요시는 본인 특유의 허세와 블러핑이 섞인 요구조건을 제시한다.

1. 명나라 황녀를 일본 천황의 후궁으로 삼는다.[134]
2. 무역 증서제를 부활한다.[135]
3. 일본과 명나라 양국 대신이 각서를 교환한다.
4. 조선 8도 가운데 4도를 일본에 이양한다.[136]
5. 조선의 왕자와 신하를 볼모로 일본에 보낸다.
6. 포로로 잡고 있는 조선의 두 왕자를 석방한다.
7. 조선의 권신[137]이 일본을 배반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한다.

사실상 일본의 승전을 의미하는 거나 진배없는 협상이다.[138] 히데요시가 단순히 '정치적 이유'로만 이 전쟁을 벌인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한 조건들이었다.

히데요시는 이러한 조건들을 외교를 전담하던 오선승(五禪僧, 외교 담당 승려)을 통해 명의 강화사인 사용재와 서일관에게 물었으나 당연하게도 이대로 전할 수 없고 특히 명나라 황녀를 보내라는 첫 번째 조건은 절대적으로 불가하다는 답변을 들었다. 이에 무엇으로 증거를 삼을 것인가라고 질문하자 순의왕(알탄칸)의 예가[139] 있다면서 증거는 필요 없으니 조건을 삭제해달라고 하였다. 히데요시는 ‘명국 공주와 천황의 결혼, 조선 왕자의 인질이라는 조건이 아니면 4개 도를 반환할 수 없다’고 명확히 하며, ‘일본과 명의 관계가 끊긴지 오래이기에 조선을 통해 관계를 개선하려 했지만 조선이 시간만 끌고 속이기에 징벌하게 되었다. 이제 명의 사절이 왔으니 사절이 우리의 요구 조건을 잘 전달해 달라’고 하였다.

이에 대한 명나라 조정의 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1. 조선에서 완전히 물러갈 것.
2. 조선의 두 왕자를 송환할 것.
3.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번 전쟁을 공식적으로 사죄할 것.[140]


이러한 입장 차이는 실무진인 고니시 유키나가와 심유경의 논의를 거쳐 명나라가 받아들일 수 있는 온건한 조건으로 바뀌었고 가짜 항표문(항복 문서)이 명 조정에 전달이 된다. 히데요시의 요구는 명의 책봉과 조공 무역을 원한다는 것으로 정리되었고 책봉 할 무장의 명단도 함께 제출되었다.[141] 이에 명 조정은 이전의 조건과 더불어 책봉은 허가하지만 조공 무역은 허락할 수 없다는 점을 명확히 하였다. 이후 명의 책봉사가 부산에 도착하지만 일본군의 완전 철수를 요구하며 일본에 가기를 거부하였고 히데요시는 새로운 3가지 조건을 제시하였다.

1. 조선의 왕자를 자기에게 데려오면[142] 일본이 가지고 있는 조선의 4개 도를 반환한다.
2. 왕자가 고니시의 진영이 있는 웅천까지 오면 진영 15개 중 10개를 소각하고 일본군이 철수한다.
3. 명의 황제의 부탁 때문에 조선을 사면하는 대신 명의 칙사가 조문을 가져오고 무역의 재개를 바란다.

이러던 와중에 책봉 사절의 정사였던 이종성이 도망가는 사건이 있자 책봉 부사였던 양방형이 정사에 심유경이 부사가 되었고 일본으로 출발한다. 조선 측에서는 황신을 정사로 삼아 사절단을 보낸다.[143] 심유경은 정사보다 먼저 도착하여 히데요시를 만나는데 심유경의 행렬에는 사람들에게 명나라 황제가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에 임명한다는 것을 알리는 판자가 있었다고 프로이스가 기록하고 있다. 이후 책봉장에서는 다이묘들이 배석한 가운데 히데요시는 순화왕(順化王)에 다이묘들은 각기 서열에 따른 명나라 관직을 책봉을 받고 이에 따른 금인과 관면을 받았다고 한다. 이 장면을 대표적인 1차 사료들은 선재고, 프로이스의 기록, 일본왕환일기, 조선 왕조 실록인데 다이묘들이 명나라에서 하사한 관복을 입었다는 것은 공통적이고 직접 목격한 기록에서도 히데요시도 명나라의 관복을 입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우선, 일본 측의 기록인 선재고에 의하면 히데요시는 인을 받고 명복을 입고 만세삼창을 했다고 써있다. 프로이스의 기록에도 모두 일본 의식으로 히데요시와 책사는 다다미에 앉아서 양자가 대등한 형태로 알현하였다. 출석자는 家康(도쿠가와 이에야스), 筑前(마에다 토시이에), 越後(우에스기 카게카츠), 中納(우키타 히데이에), 金吾殿(코바야카와 히데아키), 毛利(모리 데루모토)이었지만 이들은 모두 일본 국토에서 최대의 국주들이었다. 주연 후에 관백은 영예있는 서책, 즉 커다란 황금 서판인 금인을 수리하고, 이것을 머리로 추대하고, 이때 관면(冠冕)도 수령했기 때문에 이것을 착용하기 해서 별실로 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 측 기록은 두 가지로 기록이 되어있다. 조선 측 사신단의 정사인 황신의 일본왕환일기를 보면 히데요시는 책봉을 받았고 다이묘 40명도 관대를 착용하고 수직(授職)하였다고 앞서의 기록과 동일하게 되어있지만 조선 왕조 실록에 기록된 조덕수의 보고에는 책봉장에 있었던 왕귀가 이야기한 것을 황신과 같이 들었다고 하는데 황신과 다르게 봉왕(封王)할 때에 적장(賊將) 40여 인은 다 당복(唐服)을 입고 행례하였으나, 관백만은 의관(衣冠)을 갖추지 않았습니다라고 보고한다. 그러나 우준민이 역관(譯官)·군관(軍官) 등이 다 보지 못하였으니, 그 사이의 사정은 어떤지 모릅니다라고 첨언하는 등 실제 보지 못했던 점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144][145][146] 책봉을 받은 후 책봉사와의 회담에서 히데요시는 조선의 왕자가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격노를 했고 몇일 후 다음 세 가지 이유로 전쟁을 재개한다.

1. 조선이 일본의 입장을 명에 전하지 않았음
2. 심유경의 중재로 조선을 용서하였으나 사례가 없었음
3. 조선이 명와 일본을 이간질하였음

책봉은 받겠으나 조선 때문에 전쟁이 일어났고 일방적 철군을 하면 자신이 손해 보는 장사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결과로 강화는 실패하게 되고 심유경은 감히 황제를 속이고 강화 실패의 책임을 물어 처벌을 받게 된다.

4.6. 정유재란과 전쟁의 종결[편집]

파일:천조장사전별도.jpg
천조장사전별도{天朝將士餞別圖} 중 일부[147]

정유재란에서 일본은 총 병력 14만[148]의 군세로 다시 조선을 침공했다. 조선에서도 하삼도를 청야하며 명나라에 지원을 요청하고 수군을 보내 배후를 차단하라는 명을 내렸다. 하지만 그 때 일어난 것이 칠천량 해전(…). 자세한 건 해당 문서와 원균 참고. 조선 수군이 무너지자 왜군은 바람같이 진격해서 1달만에 전라도 남원전주를 함락시키고 좌군은 전라도 전체를 점령하기 위해 남하하고 우군은 충청도로 북상한다.


이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코 베기가 시작됐는데, 남원성 전투 전후로 왜군 장수들이 바친 코 숫자가 3,500개가 넘는다. 자세한 건 귀무덤 참조. 장수들도 이건 아니다 싶었는지 죽이지는 않고 코를 베기도 했고, 할당량(?)을 채운 후에는 식량을 주고 안전을 약속하는 등 백성들에게 유화적인 모습을 보인다. 난중잡록을 보면 이것 때문에 항복한 백성들이 상당히 많았다. 더불어 조선의 백성들이나 관리들을 많이 잡아갔는데, 아무래도 조선에서의 지배가 오래 가지 못할 거라고 판단한 데다 노예 장사나 착취를 해서라도 전쟁에서 들어간 비용을 벌충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조선군은 흩어지거나 산성에 틀어박혀서 고립되어서 전멸을 당하는 편이고, 명군은 남원, 전주, 충주 등에 분산돼 있다가 각개 격파 당하거나 후퇴했다. 이렇게 순조로운 진군이 가능했던 것은 임진왜란과는 다르게 강으로 보급이 가능했기 때문. 이에 맞설 명군은 고작 5천 안팎으로 적이 경기도, 한성을 노리는 상황까지 가자 명군은 기병 4천 명을 출격시키는데 이것이 직산 전투다. 이때 명군이 적을 크게 격퇴했다고 하는데, 압도적인 병력의 차이로 실록을 보면 그 이후에도 일본군이 직산 근처에 남아 있거나 오히려 진격해 와서 조정이 혼란에 빠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149] 아무튼 직산 전투가 일본군의 진격을 저지시킨 것은 확실하며 9월 중순에 적이 갑작스럽게 후퇴하자 조정은 유인이 아니냐며 다시 혼란해 할 정도였다.

일본군이 정확히 무엇 때문에 후퇴했는지는 논란거리지만, 대체적으로 직산 전투로 인해 다시금 명 기병의 위력을 보았고, 명군이 빠르게 집결하기 시작했으며, 히데요시의 명령에서 한양을 무조건 공격할 필요는 없다고 한 것 등으로 짐작된다.[150]

당시 종군 승려였던 케이넨의 일기에는 '한양을 치기 위한 회의를 했다', '한양으로 가는 길이 즐겁다' 같은 말이 나오고 9월 중순부터 "항구"로 가기 위한 후퇴를 하는 모습도 나온다. 즉 이 때 일본군의 후퇴에는 해상으로의 보급이라는 이유가 있었고, 보급만 잘 된다면 재차 한양을 노릴 수 있는 전력이었다.

그 때문에 일본 수군은 육군의 진격에 맞추어 서해로의 해상 보급로를 확보하기 위해 진격하는데, 바로 이 때 벌어진 전투가 바로 그 명량 해전. 앞선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정예 병력을 궤멸시켰다고 판단한 일본 수군은, 133척의 압도적인 수군 병력의 우세를 믿고 서해 진출을 시도했으나, 단 13척의 병력으로 서해로의 길목을 차단하고 있던 돌아온 성웅에게 다시 한 번 처참하게 박살이 나고 만다. 이걸로 서해로의 보급 가능성은 완전히 끊기고 일본 수군은 전라도 무안까지 살짝 진출했다가 후퇴한다. 육군도 보급 가능성이 완전히 끝났으니 역시 그대로 후퇴한다.[151]

결국 일본군은 남해안 일대로 퇴각하여 왜성을 쌓고 농성전에 들어가고, 이후로 전쟁은 대치 상태에 이르게 된다. 이 와중에 가토 기요마사울산에서 조명 연합군에 의해 엄청난 손실을 입기도 했다.[152] 그 외에도 일본군이 자기들이 조선 남부에 쌓은 왜성들 속에 농성을 하여 조명 연합군이 공성 과정에서 피해만 크게 보고 함락도 못하였기에 명군도 필사적으로 싸우려는 의지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 결국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일본군이 본국으로 급거 귀국하게 되고, 고니시 유키나가 등의 철수를 차단하려는 조명 연합 수군과 일본군의 전투인 노량 해전과 일본군이 본국으로 철수 한 후 잔존 일본군을 소탕한 남해도 전투를 끝으로 7년간의 대전쟁이 종결됐다.

4.7. 일본군 퇴각의 이유[편집]

이 일련의 사태를 이해하려면 아래와 같은 지식이 필요하다.

당시 일본의 정부 체제는 조선이나 명나라 같은 중앙 집권식이 아닌, 힘 있는 영주들의 이해 관계가 맞물린 연합 성격이 강하며, 그중 제일 강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명령을 내리긴 했지만, 군사력 역시 통합 체제로 동원 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병사들은 각자 자신의 영주와 직속 상관에게만 충성했으며, 협력과 협조보다는 서로 반목하는데 더 능했을 정도다. 그리고 이 역사는 후손들이 충실히 반복한다 그로 인해 조선 정벌에 나선 병력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직속 병력들로 대략 20만 내외로 추산되며, 그나마도 이 20만 선봉조차 1군과 2군으로 나뉘어 서로 협력은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 총대장 우키다 히데이에는 개무시당하고, 1군 선봉이던 고니시 유키나가와 2군 선봉이던 가토 기요마사의 반목은 매우 극심했으며[153],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결국 편을 갈라 전쟁을 하는 지경에 이른다. 가토 기요마사 등은 서군 실세가 이시다 미츠나리라는 이유로 동군에 참가. 실제 서군의 대장은 흔히 알고 있는 이시다 미츠나리가 아니라 모리 데루모토였다. 그러나 실세가 이시다 미츠나리인 이유는 모리 데루모토는 말 그대로 바지 사장이기 때문. 자세한 내막은 관련 인물들을 볼 것.

결국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그 이후 벌어질 파워 싸움을 예측하고 전 병력을 물린 덕에 조선은 살아난 한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결과적으로 자기 살을 깎아먹은 탓에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시대를 만들어준 꼴이 돼버린다. 임진왜란의 최종 승자는 다름아닌 도쿠가와 이에야스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 인 셈.

5. 각종 오해들[편집]

5.1. 탁상공론에만 몰두한 조선 정부[편집]

임진왜란 때 정부 측(특히 선조)이 잘싸우는 장수들을 갈궜다는 이미지가 있어 왜란 당시 조선 조정에 대한 현대인의 인식은 매우 나쁘다. 심지어 이순신 관련 교육 만화만 보면 류성룡은 왠지 이순신 장군과 친한데 들러리, 윤두수는 지 친척 승진 시키려고 잘싸우는 사람 잡아먹으려는 찌질이 정도로 표현되는 수준이니 말 다했다. 참고로 저 두사람은 다수 매체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무능하거나 탁상 공론만 했던 인물들이 절대로 아니다.[154]

5.2. 율곡 이이의 10만 양병설[편집]

이이의 십만 양병설이 유명하지만, 현재로서는 실제로 이이가 이런 주장을 했는가에 대하여 의문이 많다. 나중에 서인이 정권을 잡은 뒤에 개수한 실록에 "이이가 십만을 양병하자고 했으나 류성룡이 반대하였다."라는 단 한 줄만 적혔다. 게다가 당대 기록에는 나오지 않고 후대의 이이의 제자들이 제기한 설이었다. 더욱이 병농일치제였던 조선은 편제상 10만 이상의 군대를 전시에 징집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 개전 1년 후 조선이 정규군만 17만 이상을 동원한 걸 보면 10만 양병설의 진의는 더욱 미심쩍어진다. 현재 국사 편찬 위원회에서도 이런 주장을 회의적으로 본다. 오히려 이 분야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민덕기 교수는 이이의 발언 시점(1580년대)을 주목하며 이 당시에는 남쪽의 왜구보다 북방의 니탕개를 위시한 여진족의 위협이 더 위협적이었다는 점을 들어 십만 양병설이 임진왜란을 겨낭하고 제안한 것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155]

이이의 십만양병설에 대한 논란은 이이(조선) 항목을 참조하기 바란다.

5.3. 동원된 조선의 병력수[편집]

일본의 대군에 맞서 싸우는 소수의 조선군 이란 이미지 덕분에 조선군의 수는 적었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실제로 조선군의 수는 적지 않았다. 당장 나무 위키 임진왜란 맨 위의 항목만 봐도 동원병이 무려 18만이 넘는다. 조선의 군 동원 능력은 절대 허접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행정 체계는 상당히 우수했다. 다만, 오랜 평화로 조선군 자체가 약체화된데다[156] 지휘관의 무능이 합쳐져서 각개격파 당했을 뿐이다.(....)[157] 전열을 재정비하고 합리적인 지휘관이 전투를 지휘하자 일본군을 상대로 대등 이상으로 싸웠다. 대표적인 예가 충무공.

  • 부산 방어시 부산진, 동래성에서 격파된 조선군이 3천명. 상주 전투에서 1천의 손실, 탄금대 8천 이상. 이것만 해도 1만 2천 이상.

  • 임진강 방어선에서 붕괴된 경기도, 황해도 조선군이 1만 3천. 여기까지 2만 5천 이상.

  • 용인 전투로 인해 박살난 경상 - 충청 - 전라 3도 근왕군이 5만 ~ 8만. 5만 이상이라고 해도 여기까지 약 8만 이상.

  • 평양 방어전에서 3천의 조선군 손실. 8만 3천 이상.

  • 이순신이 이끈 3도 수군이 1만 이상. 여기까지 9만 이상.

  • 이후 강원도, 함경도에서 가토에게 박살난 조선군과 진주성을 비롯하여 아직 일본에게 점령되지 않고 남은 남부 지방. 주로, 전라도에 주둔하고 있는 조선군, 그리고 선조의 호위 부대가 1만 이상.


대충 추려서 합쳐도 10만 이상 대군이 나온다. 그리고 실록에 나온 집계로는 임진년 초기에 조선이 동원한 병력이 14만이 넘는다. 조선이 임진강 방어선에 1만 3천명을 투입하고, 후방에서 3도 근왕군 5만 ~ 8만명이 북상하자 일본 측에선 크게 긴장했다. 이 당시엔 일본의 1군, 2군, 3군만 한양에 있어서 병력 상으로는 되려 조선이 더 많았다. 하지만 현실은 조선의 대패. 임진왜란 당시는 이러했으나, 정유재란 때는 대부분의 조선군이 농사 짓기 위해 가는 바람에 육군의 주력은 명군이 된다. 울산성 전투만 봐도 명군이 숫적으로 주력이었다.

5.4. 의병과 승병[편집]

한국 대중들에게 임란 당시 조선 정규군은 이순신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한 것이 없고 육군 중에도 권율과 같은 몇 인물을 제외하고 무능해서 의병으로 때웠다는 인식이 있지만 이는 실제와 다른 것으로 조선 관군은 비록 임란 초기에 상정한 규모를 넘어서는 왜군에 맞서 싸우는 바람에 상당히 무력한 모습을 보였으나 전쟁 전 준비한 사항들이 제대로 굴러가기 시작하자 시간이 지날수록 괜찮은 전적을 보여주게 된다. 당장 조선 전역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소규모의 유격전. 공성전 등의 승리는 관군이 이루어낸 것이며 조선 전기 때는 의병과 관군은 자주 힘을 합쳐 활동했고 후기가 될수록 의병은 관군에 흡수됐다. 사실상 이순신이나 권율 같은 눈에 보이는 큰 승리만 없다 뿐이지 일본군과 충돌하며 많은 피해를 입히고 받으며 피를 흘린 것은 조선 정부가 주관하는 관군들이였다.

의병이라고 불리는 민병대가 독자적으로 작전을 입안, 실시했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있는데 이는 오해. 의병들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정부의 명령을 받아 활동했고, 전쟁 초기의 혼란기가 지나간 뒤에는 사실상 관군이나 다름없었다. 애초에 상당수의 의병군은 전쟁 초기에 흩어진 관군 병졸들을 모집하는 것으로 기반을 쌓은데다가, 관에서 식량, 무기, 때로는 병력을 지원했기 때문에 사실상 준(準) 관군으로 봐도 무리가 아닐 정도이다. 의병을 일으킨 주체도 의병이 아닌 지방에 있던 전현직 관리와 토호들이었으며 이는 민중 봉기의 측면보다는 기득권층의 노블리스 오블리제 측면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158] 무능하기 짝이 없는 정부용감하고 굳센 의병이라는 널리 퍼진 통념과도 달리 전쟁은 어디까지나 정부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의병 부대의 구조가 그대로 유지된 것은 선조가 의병장들에게 정식으로 벼슬을 주고 지휘권을 인정해주면서[159] 자연스럽게 관의 영향하에 끌어들였기 때문인데 이 때문에 정식 공채로 관직에 있던 무관들과 전란 중에 무공으로 관직을 받은 의병장 출신 무관들의 알력이 발생하게 된다. 이것이 첨예화되어 폭발한 것이 김덕령 사건.

왜란 시기에는 의병들 못지 않게 승병들도 많이 활약하곤 했다. 그 공헌이 너무 지대한 나머지 억불 국가인 조선의 사신들 조차 이들 승려들을 까는 글을 거의 찾기 드물었고 오히려 무신들이나 비불교도[160]들을 디스하는 글들이 적지 않았다.[161] 특히 사명 대사 같은 경우는 일본인들이 중과 친숙하다는 특성 때문에 외교관으로 활동한 정황이 적지 않으며 훗날 선종할 당시 왕이 친히 병세를 살피고 약을 보내줬다고 했다.[162] 이 외에도 전공에 대한 대가로 사찰에 대한 수리 등 각종 혜택이 있었는데 어떤 의미로 임진왜란은 조선 불교가 그나마 사회적 위상을 높인 계기가 되었다 볼 수 있다.

6. 전후[편집]

임진왜란은 분명 명과 조선이 승리한 전쟁[163]이다. 일본의 전략적 목표는 엄연히 조선을 교두보로 삼은 명 침략 → 조선의 영토 획득[164]이었고, 조선의 전략 목표는 일본군을 자국의 영토에서 격퇴하는 것이었다.[165] 비록 전술적 측면에서 조선군은 일본군에 압도적인 패배를 당했고 명군 또한 보급 문제 등으로 일본군과의 답보 상태가 지속되었으며, 일본군의 철수도 패퇴가 아닌 일본 내의 정치지형 변화로 인한 전력 온존을 위해서였으므로 전술적으로는 일본군이 패배하였다 보기는 어려운 부분이 있다. 그러나 결국 전략적 측면에서 일본군은 원했던 전략 목표를 단 하나도 달성하지 못한 채 조선 반도를 떠나야 했으므로 일본군이 전략적으로 패배했음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166] 전후 처리나 결과 측면에서도 조선은 분명히 일본에게서 침공 행위에 대한 사죄와 포로 쇄환 등을 받으며 국교를 회복하였다.

다만 초기 목표를 달성하지 못함은 둘째치더라도 일본은 여력을 가지고 물러나 손해를 최소화한 측면이 분명 존재한다. 물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사후 정권을 그대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넘겨주면서 저승에서 피눈물을 흘렸겠지만 이는 일본의 내부적 사정에 가깝고 오히려 일본은 전란이 끝난 지 단 2년 만에 역사상 최대 규모의 내전을 벌이거나 임진왜란의 주축을 맡았던 사쓰마 번이 단독으로 류큐 왕국을 털어 복속시키는 등 전쟁 피해는커녕 엄청난 국력 팽창을 과시하고 대외적으로 일본의 존재를 널리 알렸다. 이후 260년의 에도시대가 열리고 순식간에 발전을 거듭하여 겐로쿠 시대 등의 전성기에 들어갔으니 전쟁을 통해서 이득을 봤는지는 둘째치더라도 전쟁을 계기로 크게 발전했음은 부정할 수 없다. 거기에 이에야스는 틈을 노려 사죄 퍼포먼스를 보여줌으로서 조선이 자존심을 지키면서 국교를 회복하게 도와주는 등 히데요시보다 나은 평가를 받는다.[167]

물질적 이득도 존재했는데, 특히 조선에서 엄청난 수의 포로가 끌려 가 포르투갈의 노예 상인들에게 팔리거나 일본에 정착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들 포로 중에는 이삼평과 심수관으로 대표되는 도자기 장인이 많았고, 덕분에 일본의 도자기 공업은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들 도자기 장인들은 임진왜란 직후 명-청 교체기가 도래하고 중국의 대외 무역이 일시적으로 파탄에 이르게 된 시기적 배경과 함께 일본이 세계 도자기 시장에서 중국을 밀어내고 1위를 석권하는데 큰 영향을 미친다. 일본의 도자기는 대체제를 찾던 유럽 및 아라비아 상인들을 만족시켰다. 또한 일본은 은 생산량 폭증 및 제련 기술의 향상으로 넘쳐나는 은을 소비할 무역 창구 확보를 절실히 노렸는데, 이후 청과의 직접 무역은 어려웠으나 조선을 통한 중계 무역을 통해 일정부분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 이렇듯 외부에 존재감을 과시하고 무역을 통해 실리까지 확보하는 동시에 전성기를 열어 차후 메이지 유신 및 개화까지의 발판을 마련했으니 이 전쟁을 계기로 일본이 얻은 이득은 어마무시하다.

반면 조선은 승전국임에도 무시무시한 피해를 입었다. 민간인 학살과 더불어 엄청난 수의 포로가 끌려가며 인구가 대폭 감소하였으며, 이들이 관리하던 농지도 대폭 감소했다. 특히 농업 국가인 조선은 농지가 무려 66%나 감소했으므로 이후 인구 증가폭도 크게 꺾였다. 그 결과 나온 정책이 여민휴식. 그나마 조선은 일본과 명분상 비교적 만족할만한 내용으로 국교 회복에 성공하고 청-일 직접 교역이 어려운 현실 속에서 양국 간의 육로 무역을 중개하면서 실로 막대한 무역 흑자를 누리게 된다.[168] 이후 농업 측면에서도 전란으로 인한 농업 생산력의 파탄이 역으로 대동법 개혁이 추진되는 동력으로 작용하여 농업 생산량이 급증한다. 국가적 재난으로 인해 조선이라는 국가 체제가 재정비되고, 이를 통해 17세기부터 조선의 국력은 크게 팽창한다. 그러나 이러한 중개 무역을 통한 흑자는 청-일 직접 교역이 실시되면서 사라졌고 그대로 조선의 재정적자로 이어지는 등 단점도 존재한다. 발달하는 화폐경제와는 다르게 조선 조정의 재정수입은 날로 약화되었고 국력 팽창도 지지부진해진 것이 사실.

이후 조선은 "쇄환사"라하여 포로 귀환에 힘썼으며, 이 과정에서 사명당이 활약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바로 직후에는 성사되지 않고 쓰시마를 통해 제한적으로 돌려받다, 1609년 기유약조 이후 조선과의 관계 정상화에 힘쓴 도쿠가와 막부에 의해 본격적인 포로 송환이 이루어졌다. 이 작업은 1655년 효종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일본 영주들은 미녀나 장인의 경우 쇄환사가 일본에서 조선 백성들을 찾기 위해 찾아오면 고의로 이들을 감추고 조선 포로들에게도 이 사실을 숨겼다. 조선에서 끌려온 도공들은 아직도 고향을 그리며 바다를 향해 제사를 지내는 풍습을 지키고 있다. 또한 메이지 유신 전까지도 조선식 성씨를 썼다고 한다.

유명한 인물 중엔 사쓰마 번, 가고시마 현 출신 도고 시게노리라는 2차 세계대전 때 일본 외무 대신을 지냈던 사람이 있다. 조선식 이름으론 박무덕. 아버지, 어머니 모두 끌려간 도공 집안이었고 박무덕이 도쿄 제국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진 계속 박씨 성을 유지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메이지 시대가 되면서 소수 민족에 대한 병합 정책에 못 이겨 사무라이 가문의 족보를 샀다고 한다. 가고시마 현 뿐만 아니라 가토 기요마사가 번주였던 구마모토 현에는 울산에서 살던 사람들이 끌려와 집성촌을 형성해서 지금도 울산町이라는 마을이 있다.

그런데 일본으로 잡혀간 포로들 중에는 조선에 돌아오기 싫어해 일본에 정착하며 살고싶어 한 사람들도 있었다. 링크 실제로 고향을 그리워한 사람도 있었지만 반대로 돌아가길 거부한 사람들도 있어서, 조선 통신사들의 기록을 보면 쇄환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는 현지 정착 포로들을 보며 통신사들이 분개하거나 어이없게 생각한 경우도 많이 보인다. 이삼평도공들 중에서는 이러한 사례가 적지 않았다고 하는데, 각 다이묘들은 이들을 장인으로써, 솜씨 좋은 기술자는 사무라이 수준으로 후하게 대접해줬기 때문이다. 그걸로 끝이 아니라 아예 뛰어난 도공에게 자기 딸을 내주며 사위로 삼아 친인척을 만들어버린 경우까지 있었다. 이들은 메이지 유신 이후 폐번령이 내려져 다이묘의 비호를 받지 못하게 된 이후에도 수 세기간 구축한 세력으로 독자적인 장인 가문을 만들어 지역에서 대접받으며 계속 대를 이을 수 있었다. 그래서 현대에 와서도 일본 전역에 조선 도공의 후예로 자처하는 사람이 적지 않은데 한국 언론에도 소개된 사람으로는 심수관 씨가 있다.#

하지만 좋은 취급은 도공 같은 특수 기술자들한테 한정될 뿐, 그 이외의 조선인들이 받은 대우는 당연히 좋지 못했다. 일본이 서양 상인들에게 노예로 판 조선인들의 경우가 대표적인 예. 특히나 당시 최고의 해상 네트웍으로 리즈시절을 맞았던 포르투갈 상인들에 의해 유럽으로 팔려나갔다고 한다. 일본 학자들에 따라서는 팔려간 노예의 단위는 만(萬) 단위로 보기도 한다. 선교사들은 이런 비인도적 행동을 몹시 나쁘게 생각해서 파문하겠다 위협하는 등 노예 상인들에게 경고했지만 실효는 미미했다.

일본 학자들의 표현에 의하면, 동아시아의 노비는 일종의 소작인같은 개념으로 결혼, 출산, 일부 재산 소유가 허용되는 지위였지만, 서양에서의 노예는 그냥 물건 취급받아 결혼과 출산은 물론 어떠한 인간 관계도 허락되지 않았고 그냥 죽도록 일시키다 그냥 죽게 했다고 한다. 실제로도 그랬고.

세계사적으로 봤을 때 상기했던 포르투갈 상인에 의해 노예 무역이 빈번하게 일어나기 시작했던 때가 바로 임진왜란을 전후했던 때였다. 특히 서아프리카 출신 흑인들이 노예로 팔려나가 유럽, 남미 등으로 팔려나갔던 시기가 바로 이 시기.

이 당시 조선인들은 아프리카인들보다 헐값에 판매되었는데, 당시 기준으로 쌀 2가마 4말에 해당하는 2.4 스쿠도였으며 참고로 아프리카 노예 가격이 170여 스쿠도에 이르렀다. 이들은 마카오 · 인도 고아항 · 유럽 대륙으로 나갔다.

파일:external/dk.breaknews.com/2014031912366721.jpg

이러한 조선인 노예에 대한 이야기는 토스카나 공화국의 페르디난도 1세 밑에서 공직을 맡았던 프란체스코 카를레티가 1701년 에 공식 출간한 《동서인도 여행기》이 대표적으로 나온다. 한편,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그림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기적>의 밑그림 중 포함된 동양풍 복식을 한 남자의 그림(한복 입은 남자)을 통해 당시 유럽으로 유입된 조선인의 존재를 엿볼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소설가 오세영 씨가 이 그림을 토대로 상상력을 발휘해 만든 소설 '베니스의 개성상인'이 시중에서 큰 인기를 모은 바 있다).

참고로 일본엔 '조선 사라미 타라미'라는 말이 있는데 조선인들을 노예로 만들기 위해 '조선 사라미 타라미'들을 불르며 사냥했다고 한다 조선인 여자 몸종을 テルマ(테루마), 각시를 カクセイ(카쿠세이), 고운 각시를 コカセイバー(코카쿠세이)라 부르며 무참히 노예로 팔렸다.마치 조선 사람을 출장 간 왜인 무장이 가족에게 선물을 하듯 노예로 보낸 것이 가관. 그 선물이 한국인들의 선조인 걸 생각하면 아이러니하다. 자세한건 http://halmi.egloos.com/m/625122

7. 한국의 평가[편집]

20세기까지도 조선 시대를 임란을 기점으로 전기 / 후기로 나누었던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최근의 한국 사학계는 사림이 중앙 정치를 주도했던 16세기 ~ 17세기를 하나의 시기로 간주, 조선 시대를 전기 / 후기의 양분하기보다는 전기 / 중기 / 후기로 나누어 보는 시기 구분론을 채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169] 왜냐하면 중기에는 임진왜란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변화가 그다지 없기 때문이다. 서울 대학교 사학과를 중심으로 조선을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전후로 나누는 대신 관학파 / 사림파 / 일당 독재의 3단계로 구분하는 구분법을 주장하였고, 현재 국사 교과서도 이를 따르고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한중일 동아시아 3국 모두에게 큰 영향을 끼친 국제 전쟁인 것이다.

8. 일본에서의 평가[편집]

대부분 말년의 히데요시가 멀쩡히 있던 조선과 명나라를 괜히 건드려서 벌어진 실책으로 취급한다. 임진왜란에 의한 전체적인 국력 소모도 명과 조선에 비교해서 적은 편이고, 그냥 히데요시 집권기의 분탕질 정도로 생각하는 정도. 이를 계기로 에도시대가 열렸음도 잘 알려지지 않아서 임진왜란, 그러니깐 분로쿠-케이쵸의 역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드물다. 일본 전국시대를 다룬 작품에서도 이 부분은 이순신만 짧게 언급하고 히데요시의 삽질이라는 것만 언급하고 넘어가는 등, 동아시아의 국제 정치적 측면에서도 엄청나게 큰 의미를 갖고, 일본의 정치 사회적 격변의 시점이 되는 사건임에도 인지도가 매우 낮다.

일본은 임진왜란을 히데요시가 개인적으로 일으킨 전쟁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며 사실상 이순신 같은 일부 인물들 외에는 조선에서 명의 원군과 싸웠다는 서술이 많으며 이는 어느정도 사실이다. 사실 일본은 수전과 몇몇 방어전만을 제외하면 수월하게 연승하며 파죽지세로 조선 반도를 점령하였으며, 이후 명군과의 대규모 충돌로 인해 진격이 멈추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일본에 큰 타격을 입힌 의병의 활약상이 알려져 있으나, 사실 이들 일화는 변변찮은 무기만 쥐어놓은 훈련되지 않은 농민들이 조직화된 일본군을 상대로 올린 전적이라기엔 의심이 가는 부분이 많은게 사실이다. 당장 일본 측 사료에서도 의병에 대한 언급이 간간히 등장하나 그 비중이 크지 않기 때문에 교차검증이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이다. 반면 조선군의 패퇴와 명군의 참전 및 전선 고착화는 한중일 3국의 사료로 충분한 교차검증이 이루어진 사례라 의심의 여지가 적다. 때문에 일본인들도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사실상 임진왜란은 조선을 교두보로 명과 치른 전쟁으로 인식하며 당장 전국 시대 관련 드라마만 봐도 명과 싸우러 간다고 하지 조선과 싸우러 간다는 말은 나오지도 않는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그렇게 유명한 전국 시대에서 임진왜란은 흑역사급으로 취급받는다. 기껏 얘기를 할 경우에 하는 말은 '필요 없는 전쟁이었다' 정도. 창작물에서도 "히데요시가 명을 치려다가 조선과 전쟁을 했다. 근데 졌다. 끝" 정도.[170] 크고 아름다운(?) 영웅들의 일대기를 그리는데 자세하게 하기도 힘들었을 듯. 가토가 호랑이 잡았다, 고바야가와가 벽제관에서 명군을 조졌다, 시마즈가 사천에서 명군을 조졌다, 노량 해전에서 시마즈가 이순신을 저격했다 정도.

야마오카 소하치도쿠가와 이에야스(소설)는 무려 32권짜리 역사 소설임에도 임진왜란 부분은 한 페이지 뿐이다. 임진왜란 중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에서 꽃놀이 하는 부분은 몇십페이지씩 차지함에도. 소설내에서 전쟁에 대한 비중이 매우 높음에도 무려 7년씩 끌었던 임진왜란에 대한 분량이 없는 것은 이례적이다. 이 뿐만이 아니라 같은 작가의 소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 직전까지만 글을 쓰고 끝내 버린다. 이를 요코야마 미츠테루 7권짜리 만화로 만들었는데 마지막 페이지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말년에 노망이 들어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끝." 달랑 이 문장 뿐이다. 야마오카 소하치 뿐만이 아니라 다른 유명한 역사 소설 작가들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기 작품도,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시키면서 끝난다. 전국 시대를 배경으로한 무협 소설 작가인 시바타 렌자부로의 "무사"[171]에서 임진왜란 진행 사항이 1페이지 반에 걸쳐 기술되었는데, 고작 무협 소설보다 많은 페이지를 할애해서 임진왜란을 묘사한 책을 찾아 보기 힘들다.

일본에서 임진왜란을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게 서애 류성룡이 쓴 징비록이다.[172] 현재까지 일본인들의 연구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성호사설에서 저자인 이익이 일본으로부터 수입해서 번역한[173] 저자 미상의 한 역사 평론에서는 임진왜란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수길 공이 본래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들을 편안히 할 만한 술법이 없으면서 한갓 쓸데없이 군사를 일으켜 멀리 이웃 나라를 쳐서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이고, 군량과 무기를 천릿길에 운수하여 우리의 생령을 못살게 한지라, 이 때문에 신명에 죄를 얻어 그 몸이 죽고 3년이 못 되어 나라가 크게 어지러웠으며, 그 아들 수뢰공까지 마침내 원화(元和)[174]의 전역[175]에 죽었다. 그러므로 작은 것으로써 큰 것을 치는 자는 앙화를 받는다 한다.[176]


이 외에도 강항간양록에서도 비슷한 반응이 있는데, 당시 강항과 대화를 했던 일본의 승려 등 몇몇은 조선의 처지를 동정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당시 강항도 간양록에서 '일본 애들 중에도 사람 꼴하고 사는 사람들은 꽤 있구나' 하는 견해를 표했다고 한다.

역사저널 그날에서 패널로 나왔던 일본 교수는 색다른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그것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명나라와의 무역을 독점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으며, 일본 본토와 조선에 끼어 있던 대마도주 때문에 전쟁이 확대, 장기화됐다는 주장이다. 애초에 대마도 번주는 대 조선 무역을 위해서도 조선과 관계를 적절히 유지해야 했지만, 그러면서도 일본과의 관계 또한 유지해야 했다. 그래서 이 번주가 일본이 조선을 치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지 여부를 염탐하기 위해 보낸 통신사를 조선이 일본의 명나라 공격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있는 항복 사절로 자기 맘대로 목적을 바꿔 전했다는 것. 도요토미 히데요시 입장에서는 자기가 명나라를 치면 온 조선이 자신의 편을 들어 합세할 것이라고 생각한 와중에 조선의 격렬한 저항을 받았기 때문에 이를 반역으로 규정, 코나 귀를 베는 등의 잔인한 진압을 했던 것이라는 것.

일본의 임진왜란 관련 저작을 여러권 본 사람이 말하기를 그 어느 책도 임진왜란을 잘했다고 한 책이 없으며 언제나 무익하고 허무하다고 평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순신 장군의 활약상은 적어도 한 줄은 있고 비중이 높아지면 적의 장군이 아니라 "주인공"http://blog.naver.com/halmi/40011769894.

도요토미 히데요시빠와 논쟁이 붙을 경우 임진왜란만 거론해도 한방에 데꿀멍시킬 수가 있다. 그만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인생 전체에서 최악으로 삽질한 행동이 바로 임진왜란이다.[177] 일본에서는 히데요시가 말년에 치매를 앓아서 정상적인 판단력을 잃은게 아니냐는 주장까지도 있다. 실제 도요토미는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치밀한 전략가로 명성이 높았고 그런 행보를 보여줬는데 임진왜란기 도요토미의 행보는 과대망상&어딘가 나사빠진 행보로 악명높았다.

일본어 위키 백과에서 한국사 전반에 대한 묘사가 그렇긴 하지만, 특히나 임진왜란 부분은 한국과의 사료 해석이 극명하게 갈리며, 조선에 대한 불명확한 묘사가 그득하다. 그 일례로 전쟁 전개 과정 설명 전 양측 전력 비교 문서에선, 조선군의 화포는 초기 사석포 보다도 못한 수준으로 사거리가 100m도 채 안 되며, 조선의 활은 일본의 하고유미 보다 사거리가 현저하게 떨어지며 조총보다 낮은 수준이라고 수년째 아직도 명기되어 있다. 하지만 징비록에 따르면 신립이 조총을 낮게 평가했는데 임진왜란 직전 당시 고위층은 조총이 뭔지 다 알고 있었다.[178] 소오 요시토시가 조선에 왔다 가면서 조총을 선물로 줬기 때문인데 그런데도 신립이 낮게 평가한 이유는 쏘는대로 다 맞겠냐는건데 실제로 이 시대의 조총은 명중률과 사거리가 활보다도 떨어졌다. 즉 신립이 조총을 우습게 생각한 데에는 그 이유가 있지만, 이는 당시 조총이 다수의 인원이 일제사격하여 화망을 형성해 공격하는 무기였음을 간과한 것이다. 참고로 명중률을 확보하기 힘든 사정거리 이상의 적에게 화망을 형성하여 공격한다는 개념은 기원전 이미 중국 등지에서 확립된 개념이므로 신립이 말한 '쏘는대로 다 맞겠느냐'라는 말은 당시 조총 부대의 운용법을 잘 인식하지 못하고 했던 소리다. 게다가 조총은 활과 달리 군집으로 쏘아대면 활보다 몇 배나 위력이 세다는 점도 간과하였다.[179] 조선 후기의 군제에서 조총의 사격 사거리는 활보다 더 먼 거리에서 쏘게 법으로 정했다.

8.1. 조선 - 일본 내의 적장 인식[편집]

조선에서 아는 일본 장수가 수괴인 풍신수길 외에 선봉장이자 외교를 담당했던 '가등청정'과 '소서행장' 딱 2명 뿐이었다. 그외에 몇명이 사서에 이름이 나와 있기는 했는데 일본 장수 이름을 한자 그대로 가등청정과 소서행장이라고 적으면 후대의 우리가 "아!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를 뜻하는구나!"라고 알겠지만 당시 우리 조상님들은 일본 장수의 이름을 발음이 들리는 대로 한자로 적었다. 그 바람에 사서에 나온 사람이 누군지 현재까지도 알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180] 사서에는 보통 '왜구', '왜적', '적'이라고 표기되었을 뿐이다. 적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것이 없었다.

이는 일본 측도 마찬가지였다. '징비록'이 일본으로 전래되기 전에는 일본에서 아는 조선 측 장수라고는 '이순신', '균'(원균), '모쿠소 한간'(牧使 判官, 진주 목사 김시민), '세루토스'(함경북도 병마 절도사 한극함) 등 4명 정도이다. 이순신을 제외한 3명은 일본군에게 패전하거나 죽었다는 특징이 있다. 다시 말해 일본은 이긴 전투와 이긴 상대방만 유명해졌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서는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한 그림책이 대유행 하였는데, 이런 책에서는 모쿠소 한간이나 세루토스 등이 최종 보스급으로 나온다. 이순신은 그냥 거북선을 사용한 장수로 나온다. 심지어 '균'보다 비중이 적다. 잘해야 노량 해전에서 패배하여 죽은 장수라는 개소리로 언급되는 정도. 다만 거북선이라는 것이 워낙 충격적이었는지 이순신이 등장하면 조선 수군이 전부 거북선이 되어 나온다.

이순신과 균이 누군지 더이상 설명할 필요는 없고, 일본 측에서는 뭐가 어떻게 잘못 전달된 것인지 모쿠소 한간은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를 담당하는 조선 최강의 장수로, 세루토스는 강원도, 황해도, 함경도, 평안도를 담당하는 조선 국방의 책임자로 알고 있었다. 진주 목사 김시민의 경우 1차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하였지만, 일본 측에서는 이 사실을 모른 채 2차 진주성 전투에서 후임자였던 진주 목사 서예원의 목을 베고 이것을 조선 최강의 장수인 모쿠소 한간의 목이라며 일본의 히데요시에게 보냈었다. 세루토스의 경우 더 황당한데 함경도 끝까지 진격했던 가토 기요마사에게 함경 북도 병마 절도사 한극함이 항복하였다.[181] 이를 가토 기요마사가 조선의 국방 최고 책임자이자 북쪽 4개도를 담당하는 세루토스라고 선전한 것이다. 세루토스는 절도사의 발음이 일본식으로 변한 것인데, 김시민의 일본식 직책인 '모쿠소 한간'처럼, 일본에서는 고유 명사화되었다.

이러한 일본 측의 착각은 17세기 말 류성룡의 징비록이 일본으로 건너가 번역하여 보급됨으로서 대부분의 착오들이 바로 잡혔고 이때서야 이순신의 이름이 일본 측에도 높이 평가되게 되었다. 조선 측 장수들의 정확한 이름이 알려지기도 했으며, 일본 장수들이 활약한 전투가 이때서야 재조명되기도 하였다. 다만 '세루토스'만은 비슷한 글자도 없고 해서 끝까지 세루토스와 한극함이 동일 인물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으며, 조선에서도 착각하여 세루토스를 조선에 표류한 외국인으로 오해한 조선 시대 기록물도 있을 정도다.

9. 전투[편집]

9.1. 조선, 일본, 명의 3대 대첩[편집]

조선의 3대 대첩은 진주 대첩, 행주 대첩, 한산도 대첩이다. 그러나 일본 측에서는 이 전투들을 잘 모른다. 모쿠소 한간 때문에 진주성 전투가 좀 유명한 정도. 행주 산성 전투는 조선 내 일본군 주요 다이묘들이 초호화 드림팀을 구성해서 10:1이라는 압도적인 병력으로 공격했다가 대패한 전투이지만 역시 잘 모른다. 17세기 경에 <징비록>이 일본에 유입될 때 까지, 일본인들은 행주 산성 전투에서 일본군을 이긴 것이 명군이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조선정벌기> 같은 당시 일본책에서는 이 전투를 안남성 전투라고 부르며, 털옷을 입은 이국적인 병사들이 산위에서 내려와 일본군을 공격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일본 내 주요 장수들이 다 출전한 진주성 전투, 행주 산성 전투와는 달리 한산도 해전은 일본에서 듣보잡인 와키자카 야스하루 같은 C급 장수들만 출전한 전투라 일본 측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반대로 일본 측에서 3대 대첩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벽제관 전투 (1593년), 가토 기요마사의 울산성 전투 (1597년 ~ 1598년), 시마즈 요시히로의 사천성 전투 (1598년) 이다.

벽제관 전투는 명나라 군이 기세 좋게 지원 왔다가 벽제관에서 고니시 유키나가의 일본군의 기습을 받고 대패하여 평양까지 도망간 전투로 역사책에 반드시 언급되는 중요한 전투이다. 울산성 전투와 사천 전투는 한국에서는 완벽한 듣보잡. 역사 매니아 아니면 도저히 모를만한 전투이다. 울산성 전투와 사천 전투는 조명 연합군이 임진왜란을 끝내기 위한 마지막 대공세인 사로병진 작전의 일환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조명연합군이 4방향으로 병진하여 육상 방향 3군데에서 패했는데 일본은 이를 임진왜란 최대의 대첩으로 보고 있지만, 반대로 우리는 남은 한 방향인 바다에서 진린과 이순신의 조명 연합 수군의 전투 노량 해전만 중요한 전투로 기억하고 있다. 서로 이긴 전투만 기억하는 것이다. 다만 일본은 노량 해전을 이긴 전투로 계산하고 있다.

조선 3대 패전을 쌍령 전투, 용인 전투, 칠천량 해전으로 보고 있고 그중 두개가 임진왜란 때이지만, 왠일인지 일본은 그 두 전투를 빼놓고 듣도 보지도 못한 전투를 3대 대첩으로 분류하고 있다.[182][183]

조선의 가장 큰 패배였던 용인 전투와 칠천량 해전이 아닌, 듣도 보지도 못한 전투 3개를 일본이 3대 대첩이라고 한 것은 3대 대첩의 지휘관이 일본 내에서 유명한 장수라는 점과, 조선과 일본의 전투가 아니라 명나라와 일본군 간의 전투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해당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벽제관 전투는 평양성에서 명군에게 패배하여 몰리다가 한방에 뒤집은 중요한 전투였고, 울산성 전투와 사천 전투의 경우 명나라가 패배하기는 했지만 일본군도 처절하게 싸운 전투이다.

일본의 임진왜란 3대 전투로 이치 전투, 평양성 전투, 벽제관 전투로 꼽는 평가도 있다.[185]

명나라에서는 평양성 전투. 행주 대첩, 벽제관 전투를 임진왜란 3대 전투로 치기도 한다.

10. 조선, 명나라, 일본의 전후 상황[편집]

10.1. 조선의 전후[편집]

조선의 역사는 명백하게 임진왜란 전과 후로 갈린다.

왜란이 일어난지 7년 동안 조선은 전국을 다 합쳐서 막대한 인명 피해와 물자 피해 등을 보았으며 전쟁동안 일본군들이 상륙하여 전국 각지를 공격하며 조선 병사들을 몰살시키고 양민들도 학살하였으며 농토와 농촌 지역도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대거 참전을 하였던 영향으로 젊은이들의 피해가 컸으며 미처 피난가지 못한 노인과 아이들 그리고 처녀와 부녀자들도 잇딴 피해를 입었고 여자들은 일본군에 의해 성추행, 성폭행, 임신까지 당하는 등 육체적, 정신적인 피해를 입었다.

이러한 전쟁 범죄의 책임은 물론 조선군과 명군에게도 있는데, 조선군 역시 종종 민간인들의 물자를 털어먹었고 개중에는 조직적인 약탈도 있었다. 명군도 마찬가지. 명군은 남해 지역의 민간인들을 일본군의 앞잡이로 몰아 학살하기도 했다. 그밖에도 조선 도적들은 이때다 싶어 힘없는 다른 조선인들을 유린하기도 했다.

문화재도 대거 피해를 입었다. 류성룡징비록과 이를 따른 선조 수정 실록에 따르면,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3궁이 방화로 없어졌고[186]# 여러 이설에 대해서는 여기 참고, 그야말로 종묘보신각, 사대문을 제외하고는 궁성과 육조가 다 타버렸다. 그나마도 일본군이 입성하면서 한번 더 손실을 입었다. 그 밖에 일부 사찰과 가옥들도 (당연히) 불에 타 없어졌으며 이 중 일부 문화재는 일본군이 약탈하여 일본 열도로 반출되어 버렸고 일부는 파손되었거나 완전히 흔적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없어지기도 하였다. 고려 실록은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었으며 조선 왕조 실록조차 전주 사고의 판본 1질만 남기고 다 소실되었다.

농업 및 산업 기반도 대거 파괴 되었다. 임진왜란 전까지만 해도 150만결에 달했던 경작지가 임진왜란 후엔 30만결로 대폭 줄어들어버렸다. 이후 잇따른 가뭄과 호란, 몇십년 후 경신대기근 등의 천재가 겹쳐 조선이 임란 직전의 경제 규모를 완전히 회복하는 것은 영조 때 가서였다.

전후 조선의 국민 감정은 때려잡자 풍신수길 즉 반왜(反倭), 척왜(斥倭) 성향 및 호국 의식이 발달하게 되었으며 전후 복구와 경제 회생 등에 총력을 기울였다.

보통 전쟁, 특히 방어전의 경우 무장들이 전공과 대중의 지지를 얻어 정치계에 큰 위치를 차지하는 경우가 많지만 조선의 경우엔 좀 달랐다. 당시로선 고도로 발달한 중앙 집권, 관료제 국가였던 조선은 원래 공직자인 무장들은 물론 향촌에서 일어난 의병들의 국가의 통제 아래 편입시키려 노력했고 성공했다. 무엇보다 도원수 권율이나 왜란 이후 의병 활동을 명분으로 집권한 북인의 예에서 알 수 있듯 지휘관 중에 적지 않은 수가 문신이었기에 무관들이 치고 올라올 여지가 별로 없었다. 굳이 뽑자면 이순신 정도가 치고 올라갈 여지가 있었고, 선조도 이를 알기에 엄청나게 경계했지만, 알다시피 이순신은 마지막 전투에서 전사한다.[187] 이순신의 예에서 보듯이 유능한 무장의 상당수가 전쟁에서 전사했기에 고려 말 신흥 무장들의 집권과 같은 일이 일어나기 힘든 환경이기도 했다.

다만 임진왜란이라는 미증유의 재난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바뀐 것이 하나도 없다라는 학계의 주장도 있다. 파병만 했을 뿐인 일본과 명나라도 망했는데, 모든 재난을 뒤집어 쓰고 나라가 초토화된 조선은 아무일도 없다는 듯 이후 몇백년을 거뜬히 버텨 나갔다. 모든 책임을 져야할 조선 왕 선조가 물러나거나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죽을 때 까지 더 강화된 왕권으로 호의호식 하다가 죽었다. 조선의 어떤 정치 체계가 바뀌거나 주자학 사상이 무너지지도 않았다. 워낙 중앙 집권의 관료제가 발달 되어 있어 어떤 재난을 격어도 조선의 통치 체계는 끄떡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 중기 보다 국방력이 어느 정도 강화된 정도. 다만 조선 초기보다 국방력이 강화되었냐고 보자면 '글쎄올시다'이다. 그냥 사상 최악이였던 선조 초기 보다 괜찮아진 정도이다. 즉 임진왜란을 격고 나서도 바뀐 것이 없었다. 오히려 일부 분야는 조선 초기보다 퇴화되었다. 예를들어 과학이나 국방력 같은.

하지만 조선이 바뀐 것 하나도 없다는 주장은 이제 학계에서는 거의 사라진 상태이다. 오히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일대 국란을 격고도 그 체제를 유지한 개혁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더 집중하는 추세. 즉 16세기부터 계속되었던 폐단들이 어떻게 17세기를 거치면서 개혁을 할 수 있었는가에 집중하고 있다. 예를 들면 대동법[188]

10.2. 명과 일본[편집]

명나라조선에 대군을 파병한 이후로 쇠퇴와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189] 조선과 왜에 집중하느라 여진족을 방치한 탓에 여진족이 세력을 키워 후금 - 왕조가 성립되어 심각한 위협을 주게 된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경진년의 대기근까지 겹치며 이자성, 장헌충 등 의 농민 반란#이 겹쳐서 일어나며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명나라는 이자성의 반군에게 베이징을 함락당하고 숭정제가 자살하였으며, 연달아 일어난 후금의 침략으로 완전히 멸망의 길을 걷고 만다.

하지만 임진왜란 탓에 명나라가 망했다라는 말은 직접적 인과 관계가 없음을 유의해야 한다. 명나라는 조선을 돕느라 막대한 전비와 군사력을 동원해 이후 멸망한 것으로 세간에 알려져 있으나, 사실 멸망까지는 몇십년의 세월이 더 소요되었다. 이미 만력제가 즉위하면서 이미 명나라는 국운이 기울기 시작했는데 만력제가 얼마나 막장 황제였냐 하면 후한영제(靈帝)에 비견되는 암군이였다. 따라서 이 당시 명나라는 후한 말에 비견될 정도로 이미 상태가 영 좋지 않았다. 결국 임진왜란이 아니었어도 다른 경로로 인해 왕조가 멸망했을 가능성이 높았던 상황이었다. 다만 수많은 원인 중에 하나이며, 임진왜란으로 인해 그 시기가 앞당겨졌다고 보면 된다.[190]

일본은 7년에 걸쳐 침공을 반복했으나 당장은 별다른 성과 없이 물러나야 했다. 침공을 주도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위신이 심각하게 떨어졌으며, 경제적으로도 도요토미 파는 막대한 물자를 헛되이 써버린 탓(다이묘들은 피해가 적었다.)에 큰 타격을 받았다. 게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어버리자, 히데요시가 억누르고 있었던 전국시대 말기의 라이벌들, 특히 파병을 회피하며 세력을 온존하고 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다시 일어서기 시작했다.[191]

일본 역사를 크게 본다면 학자와 기술자 납치, 불상과 서적 등 문화재 약탈을 통해 상당한 이익을 얻었다. 그러나, 이 시대에 살던 일본 서쪽 다이묘들과 그 백성들은 큰 피해를 입었다. 상식적으로도 명나라조차 조선 파병으로 재정이 흔들했을 정도인데, 명나라보다 경제력은 떨어지고 병력은 더 보낸 일본이 아무 문제도 없었을 리가 없다.

또한 일본은 병사들만 보낸게 아니라 병량 등 물자의 수송을 맡은 인부들, 왜성의 건축 등을 맡은 인부들도 잔뜩 보냈다.(戦夫라고 불렀다) 전후 적극적으로 전쟁에 참여했던 일본 서부 지방의 백성들은 막대한 병역과 부역으로 인해 피폐해 졌으며, 이걸로 인해 반란이 일어났고, 히데요시 정권이 흔들릴 정도였다. 오죽 일본 백성들의 고생이 심했으면 1594년 서생포왜성에 있던 가토 기요마사가 자기 영지인 히고의 인부들에게 '지금이라면 집단으로 히고로 돌아가더라도 대관의 단속이 없으니 도망치려면 지금이다"라고 지시를 내린 문서가 발견될 정도였다. 일본 측 최고 지휘관 중 하나가 자기 인부들에게 도망치라고 종용할 정도였으니 얼마나 고생이 심했을지는 알만하다. 아무튼 이 시대의 기록들을 보면 일본 백성들이 엄청나게 고생했다고 나오는데 일본 사극에서 임진왜란이 묘사될 때 비판적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도 이 영향일듯. 다만, 일본에는 조선왕조실록이나 명사(역사책)같은 국가 편찬 정사 역사서가 없고,[192] 정식 사료는 유력 가문들의 행장기 등을 통해 볼 수 밖에 없는지라 일본 측이 전체적으로 얼마나 피해를 입었는지는 집계하기가 힘들다.

서기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를 거쳐 일본을 지배하게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임진왜란은 모두 이미 죽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탓이며 자신은 오히려 그 도요토미 일족을 몰아냈고 침략에도 나서지 않았다며 전후 조선과 외교 복원을 요청하였다. 현대 시점에서 보면 매우 형식적이고 완전하지도 않았지만 전쟁 당시 일본군이 포로로 붙잡아온 조선 사람들을 어느 정도는 도로 돌려주는 사과 절차도 거쳤다. 그리하여 1609년에 조선과 일본은 기유약조를 체결하여 화해하고, 양국 간의 통신사 사절단을 파견하게 된다.

11. 기타[편집]

  • 일본군 사망자 중 군의 수장급 인물은 일본군 9군을 이끌다 거제도에서 병사한 하시바 히데카츠[193]밖에 없고, 다이묘 급은 당포 해전에서 전사한 도쿠이 미치유키, 명량에서 전사한 구루시마 미치후사 형제와 수원에서 매 사냥하다가 조선군의 기습으로 죽은 나카가와 히데마사, 부산에서 전사한 에가미 이에타네[194]. 총 4명으로 그 외에 다이묘급은 아니지만 야규 가문의 후계자 역 이자 장남이던 柳生久三郞도 전사. 나머지는 모두 병사했다 나머지는 모두 돌아가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전했다(6군 대장으로 참여한 고바야카와 다카카케는 휴전 중 일본으로 귀국 후 병사했다). 이렇게 일본 다이묘들은 전투에서 패해 할복하는 경우는 많지만 전투 현장에서 전사하는 경우가 드문 편이다. 그 이유는 부하 사무라이들이 자기 목숨을 바쳐가며 필사적으로 영주를 지키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본인이 유독 충성심이 강해서가 아니다. 조선, 명 등 관료제 국가와 달리 봉건제 국가 일본에서는 군인은 국가가 아닌 다이묘의 소속이고 다이묘가 패해서 죽으면 휘하 사무라이들은 보통 로닌이 되어 알거지로 떠돌며 비참하게 생활하다 죽게 되기 때문 인데, 조선에 파견된 일본 고위 무장 중에 전사자가 거의 없는 것도 이러한 일본의 사회 체제에 기인한다.

  • 조선의 전 국토가 전쟁터가 되다시피 했지만 유일하게 제주도만은 전화를 피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 이전에는 왜구가 출몰해서 노략질을 하는 등의 피해가 있었지만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제주도를 공격 점령했다면 고립된 제주도는 일본에게 장기간 점거당했을 수 있었을 것이나 소규모 왜구들의 준동과 대규모 정규군의 상륙전은 엄연히 달라서 일본군은 제주도에 대한 공격을 전혀 시도하지 않았다. 다만 이건 일본의 사정이고, 조선에서는 일본군이 제주도를 침공할 수 있다며 이에 대한 대책을 강구한 적이 있었다. 당시 제주 목사 이경록[195]이 병력을 선발해서 본토에 지원할 것을 건의했지만, 조정에서는 제주도의 방위가 매우 우려스럽다며 이를 거부하기도 했다. 대신 제주도에서 가축과 식량 등의 물자 지원을 하였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도 제주도에서 소나 돼지 등을 보내주었다는 기록이 몇 차례 나온다.

  • 언어 면에서는 반치음이 이쯤해서 소멸되며, 사람들이 하루에 얼마나 쓰는지도 모를만큼 많이 쓰는 주격 조사 '-가'도 이쯤해서 유입되었다(같은 역할인 '-ㅣ'는 체언에 받침이 있을 때만 쓰이게 된다) 그 외에도 많은 것들이 있으나 적자면 헤아릴 수가 없으니 각설하고, 고등학교 1학년 과정 국어와 국사를 공부하면 많은 내용을 알 수 있다.

    • 국어 학계에서는 정철 어머니의 서간문에서 '가'를 발견하고, 이것이 후대의 주격 조사 '가'의 전신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여기에서의 '가'는 동사 '가다'의 어간인 '가-'와 명확한 구분이 되지 않기 때문에 회의론자들 또한 많다. 일부 책에서 인선 왕후가 보낸 서간문에도 주격 조사 '가'가 발견되었고 1550년대의 일이라고 말하지만 역사상 인선 왕후는 효종의 비이고 최소 1650년대의 일이다. 위에서 말하는 인선 왕후는 인종의 비인 인성 왕후'와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 주격조사 '가'가 나타났다는 구절을 보면 조금 재미있는 것이 정철의 어머니의 서간문에는 '찬 구들에서 자니, 배 세니러서(꼿꼿이 일어나서, 여기에서는 폭풍같은 설사가 일어나서) 자주 (화장실에) 다니니'라는 구절이고 인선 왕후 어필에서는 '두드러기 불의예 도다 오르니'라는 구절로 모두 영 좋지 않은 상황에서 쓰였다는 것.]

  • 임진왜란 당시 고니시 유키나가는 자신이 점령한 조선 지역에서 양반 출신으로 추측되는 여자 아이를 줏어다 자신의 양녀로 삼고 키웠는데 그녀가 줄리아 오타아(ジュリア おたあ)이다. 그녀는 고니시 유키나가로부터 천주교를 줄리아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세키가하라 전투가 끝나면서 고니시 유키나가가 참수당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 아이를 데려다 키웠다. 그녀는 자라면서 굉장한 미인으로 성장했는데 이 때문에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무척이나 아끼고 좋아했다. 하지만 당시 천주교를 탄압하고 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줄리아 오타아에게 천주교를 그만 믿을 것을 권유하지만 줄리아 오타아는 이를 거부하고 끝가지 천주교에 대한 신앙을 지켰다. 결국 어쩔 수 없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줄리아 오타아를 유배보냈는데 줄리아 오타아는 유배지에서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 흑인 용병들이 조선군에 고용되어 참전하기도 했다. 명과 교역하던 포르투갈의 해군에서 용병으로 일하던 흑인 노예들을 참전시킨 것. 이들은 해귀(海鬼)라 불리는 해군 잠수병으로 복무했으며, 이들을 그린 그림이 남아 있고 실록에도 기록이 있다.[196] 사실 이들이 특별히 전투 중에 이룬 업적은 없었지만, 국가 권력자가 술까지 주었다는 말이 있는걸 보아 매우 특이한 존재로 인식하긴 한 모양.

  • 임진왜란 때 일본에서 고추와 담배가 국내에 들어왔다.[197][198] 조선 시대 이후의 곰방대는 결국 모두 임진왜란 이후에 존재하는 것이며 지금의 배추절이 김치, 통칭 묵은지 역시 임진왜란 이후부터 먹기 시작했는데 그 전의 조선의 김치는 동치미같은 백김치, 짠지에 가까웠다.[199]

  • 유튜브에 어느 서양인이 8개월간의 한, 중, 일의 자료 조사를 토대로 9편의 다큐멘터리를 만든 것이 있다. 영어로 되어 있으나 상당히 자세하고 양질의 자료를 정리해두었다. 1화 전투신은 불멸의 이순신, 징비록, 임진왜란 1592 등에서 따왔는데 일부는 제작자가 별도의 편집(음향 추가, 컷신 조정 등)을 가했다. 다만 국명 등을 '조선'(Joseon)이 아닌 '한국'(Korea)으로 통일한 등의 한계가 있다.

12. 창작물[편집]

동아시아 3개국이 모두 참전한 대규모 전쟁이고 조선 시대 자체를 둘로 나누는 중요한 사건이어서 한국에서는 이를 소재로 한 작품이 많은 편. 다만 밑을 참조하면 알겠지만, 발발 이전 상황부터 발발 및 종전까지 거시적으로 전체를 다룬 작품은 의외로 드물다. 아무래도 성웅 이순신 및 졸장 원균을 위주로 한 수군의 모습이 많고 대체 역사물도 많다. 소설뿐 아니라 영화나 드라마도 마찬가지다. 당장 한국인에게 가장 인상 깊은 영상 매체물을 꼽으라면 아마 불멸의 이순신명량을 꼽을 것이다. 그나마 최근에 흐름을 탈피한 징비록이 방영되었으나 거시적으로 보자는 초반의 취지를 잃은 채 천편일률적인 선악 대결로 찍어 흥행에 실패했다.

일본에서는 임진왜란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작품 부터가 많지 않다. 대표적인 일본 사극인 NHK 대하드라마 시리즈에서도 임진왜란에 대해서는 아예 생략하거나, 간접적인 묘사로 넘어가는 사례가 많다. 전국시대(일본)와 겹치고 전국 시대의 인물 중 임진왜란에 참전한 인물도 적지 않으나, 일본에서도 전국 시대 관련 역사는 관심 있는 사람이나 파는 분야라고 한다. 게다가 일본 입장에서 임진왜란을 다룬다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주연, 못해도 중요한 조연급으로 반드시 등장시켜야 하는데, 임진왜란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최악의 실책인 명백한 침략 전쟁이라서 어떻게 미화할 구석이 없다. 외국에 대한 판단력 부족이나 강화 협상에서 드러난 과대 망상 등 히데요시를 긍정적으로 볼 여지가 거의 없다.

인물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때 벌어진 전투들도 일본에선 그다지 관심 있는 대상이 아니라서 일본 시청자 / 독자들의 관심을 이끌어 내기가 영 어렵다. 지상전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해전은 도저히 일본 입장에서 흥미롭게 묘사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7년 내내 먼치킨에게 떼죽음을 당하며 고통스러워하는 일본 수군의 모습만 묘사하면서 무슨 재미를 만들 수 있을까?

그리고 임진왜란 자체가 한일관계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역사적 사건이라서 관심도가 매우 크며, 아주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바로 한일 관계에 악영향을 끼치기 쉽다.[200] 이는 창작자들에겐 대단히 부담스러운 일이다. 임진왜란과 한일 관계 문제에 대한 좋은 예가 바로 UN-GO 거북선 논란 사건이다. 물론 이 작품 자체는 일본의 과거사에 날선 비판을 가하는 작품이고 논란이 된 거북선 장면도 결코 역사 왜곡을 위한 장면이 아니었다. 하지만 단순히 연출의 실수로 치부될 수도 있었던 일이 이렇게 커졌다는 점만 봐도, 임진왜란과 관련된 소재를 이용한 창작물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간에 관심을 크게 가질 수 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이는 앞서 말한 창작의 부담으로 이어진다.

이런 이유들이 영향을 줘서인지, 일본 창작물에서 임진왜란이 등장한다면 100% 히데요시를 까는 내용이다. 만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서도 간략하게나마 무의미한 전쟁이라고 거하게 비판한다. 또한 군사 간베에에서도 주인공 간베에의 시선으로 막장 상태인 왜란 도중의 일본군을 보여주며 그의 입으로 이대로는 일본이 망한다고 얘기하는 등, 히데요시의 어두운 면을 다룬다면 임진왜란에 대한 비판은 꼭 나온다.

12.1. 소설[편집]

  • 박종화의 임진왜란
    역사 소설가 박종화의 대하 소설. 고전 소설 느낌이 강하게 난다. 소설속 역사관은 완전히 옛날 역사관으로 대인배에 성인군자급으로 나오는 선조, 붕당이 나라를 망쳤다는 통설, 막강한 명군, 허접 관군과 막강 의병 등 지금 보면 구닥다리인 사관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하지만 소설이 쓰여진 시기를 감안하면 박종화 특유의 필력에 녹아들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 김성한의 <7년전쟁>

    역사 소설로는 명작 반열에 드는 수작 -명지대 한명기 교수[201]

    '바비도'의 저자로 유명한 김성한의 대하 소설. 1980년부터 동아일보에서 연재했으며 1992년에 <임진왜란>을 제목으로 하여 7권 완결로 출판되었다. 작가가 작가인지라 상당히 퀄리티가 높고 외교전에 관한 분량이 많은 편이다. 그래서 심유경, 나이토 조안(소설에선 조선 측에서 부르던 별명인 소서비로 등장. 재출간본에서는 고니시히.), 윤두수, 윤근수 형제 등 외교관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챕터가 상당히 많다. 옛날 소설판에는 일본 측 인물들이 풍신수길, 소서행장 등 한국 한자음으로 불렀는데, 재출간판에서는 일본 발음에 기초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 등으로 적고 괄호 안에 한자음을 표기했다. 작가가 15년간 사료를 바탕으로 임란을 전반적으로 조명했고 당시 소설치고 흔치 않게 선조의 의심병과 찌질함, 원균의 미련하고 탐욕스러움도 제대로 묘사하고 있다. 고니시 유키나가에 대한 평가가 후한 편이다. 임진왜란 7주갑(420년)인 2012년 8월, 7년전쟁이라는 원래 연재시 제목으로 재출간되었다. 재출간본은 7권이 아니라 5권이다. 자세한 사항은 7년전쟁 참고.

  • 달과 칼
    홍성원의 대하 소설. '백성의 눈으로 본 임진왜란'이란 주제로 쓴 소설로 미시사적 측면에서 조명한 소설이다. 높으신 분들의 업적을 다루지 않았다고 예전 버전에 기술되어 있었으나, 이순신 등 당시 중요한 인물들의 동정과 승리에 대해서도 백성들의 소문과 목격담으로 생생히 묘사된다. 재미없다는 사람도 있으나 단순히 역사를 영웅들의 일대기가 아닌 마을 사람 A의 입장으로 보고 생각한다면 굉장히 재미있다.

  • 평!(平)
    방기혁의 역사 소설. 특이하게 임진왜란 종전 후 몇 백년 뒤 저승에서 염라대왕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처럼 임진왜란에 관련된 인물들을 처벌 및 진상을 규명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작가가 전공이 사학이 아닌 탓에 고증에 맞지 않는 장면이나 사실이 심심찮게 나온다.[202] 일단 제목인 평(平)부터, 조선에서 히데요시의 이름을 평수길이라고 쓴 데서 착안했는데, 작가는 평(平)이 다이라 씨를 나타내는 글자인 줄 전혀 모르고 십팔(十八)의 파자, 그러니까 히데요시를 욕하는 뜻으로 쓴 것이라고 주장하는 오류를 범했다.[203] 또한 작가가 조선왕조 오백년처럼 왜장들의 이름이 소서행장, 가등청정 이런 식으로 써서 읽는데 애로사항이 많다. 이일을 까는 소스 대부분이 여기서 나왔는지 이일 개인 한정으로 곡해가 많고, 특히 외교 사기꾼 심유경을 마키아밸리스트라고 칭송하는 등 정설보다는 작가 스스로의 개인 감상으로 인한 역사 왜곡이 많다.

  • 칼의 노래
    소설가 김훈의 작품. 2000년대 한국 문학계 최고의 베스트셀러이다. 애초에 사극 불멸의 이순신의 원작 중에 하나로 알려졌지만, 사실 큰 관련은 없고 저자는 자기 작품은 빼놓으라고 방송사에 거세게 항의했다. 다만 주연 김명민은 이 작품을 정독하고 연기에 반영했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

  • 조일전쟁
    재미 교포 작가인 백지원이 낸 인문 교양 서적. 그러나 저자가 전작 왕을 참하라에서 드러냈던 극렬 조선까 시각을 그대로 가져온데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세계 최강의 육군이라고 지나친 과장을 하는 바람에 수많은 역덕후들로부터 무수히 까였다. 1쇄 분에서는 이미 2005년에 반환된 북관대첩비가 아직도 일본에 있는 줄 알고 정치인들은 이런거나 돌려받지 뭐하고 있냐고 했다가 누군가에게 지적받았는지 2쇄 분에서는 부랴부랴 고쳤다. 또한, 임진왜란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미야모토 무사시 이야기가 마지막 부분에 떡 하니 들어가 있는 황당함은... 사실상 불쏘시개.

  • 잡초와 갈대
    고우영 화백의 만화. 전쟁 당시 산에 숨어 지낸 마을 사람들과 도래인 후손인 왜장이 나오는 이야기.

  • 불멸
    김탁환의 장편 소설. 이문열처럼 작품 작성 능력은 출중하지만, 원균을 이순신의 반대편에 위치한 명장이라며 무리수를 두면서 띄우다 보니 전반적으로 등장 인물에 대한 설정이나 서술이 반대 급부로 낮아지고 말았다. 작가가 해군 사관 학교에서 교수를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더욱 비난을 받았고, 작가가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하여 지은 다른 소설들이 대부분 호평을 받는다는 점을 생각하면 작가로서의 명성과 역량까지 저평가받게 만든 괴작.

  • 도쿠가와 이에야스 (대망)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주인공으로 한 야마오카 소하치의 장편 소설. 임진왜란에 대해 부정적으로 묘사되며 이순신의 이름이 언급된다. 다만 임진왜란 자체의 묘사는 적고 거의 없다시피하다. 이에 대한 일본 국내의 정치 상황에 대한 묘사가 더 많다.

12.2. 드라마 / 영화[편집]

12.2.1. 한국 드라마 / 영화[편집]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주인공으로 하며, 임진왜란이 주된 배경으로 존재한다. 원균 옹호론 등 병크적 고증 오류가 여럿 있으나 이순신 역을 맡은 김명민 등 출연진의 열연과 고증은 무시했을지언정 한국 사극 역사상 역대급으로 화끈했던 전투신으로 만회. 하지만 이 때 해상 전투신을 너무 공들여 찍은 탓인지, 이후 임진왜란 관련 드라마에서 해상 전투신을 찍을 때 죄다 불멸의 이순신에서 찍은 장면을 재활용하는 폐해(...)가 있기도 했다.

1592년 ~ 1598년 임진왜란
7년 전쟁이 시작된다
23전 23승
조국을 지켜낸
불패의 신화
불멸의 역사가 온다

12.2.2. 일본 드라마 / 영화[편집]

일본 드라마에서 임진왜란의 앞뒤인 전국 시대와 세키가하라 전투는 매우 단골 소재이기 때문에 임진왜란 시기가 중간에 끼는 경우가 많지만, 의도적으로 묘사를 기피한다는 느낌이 팍팍 들 만큼 간략하게 넘어가는 편이다. 대체로 히데요시가 말년에 미쳐서 뻘짓했다는 식으로 묘사되며 주인공은 잘못된 전쟁이라고 계속 전쟁에 반대하는 식으로 나오는 편이다.

  • 일본 드라마 도쿠가와 이에야스

주로 외교 장면만 나오며 전황은 지도로 간략히 표현된다. 명나라 사신 양방형과 심유경이 문제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에 책봉한다는 조서를 전해주고 이를 받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빡쳐서 "유키나가!"를 일갈하는 장면이 연출된다. 이 소리에 기겁한 고니시 유키나가의 표정이 심히 압권이다.

  • 일본 드라마 토시이에와 마츠 ~ 카가 백만석 이야기~
    주요 등장 인물들이 거의 대부분 일본에 남아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실제 묘사는 없지만 몇화에 걸쳐 인물간 대화에서는 나름 언급이 되는 편인데, "모름지기 위정자라면 남의 것을 빼앗아서라도 백성들을 풍요롭게 해 줘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히데요시에 대해 그 외의 전 등장 인물(정적이랄 수 있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물론이고, 가족인 친모 나카, 처남인 아사노 나가마사에 직속 신하인 이시다 미츠나리까지)들이 헛된 전쟁이라며 부정적으로 이야기 한다. 특히 나름 조심하면서 말하는 다이묘들과는 달리 가족들은 직설적으로 말하는 편인데 아사노 나가마사는 아예 히데요시 면전에서 대놓고 "조선 팔도를 불태우고, 일본의 수많은 젊은 목숨을 날려버린게 잘한 짓이오?"라며 극딜을 한다.

주인공 본인이 대한 해협을 넘어 임진왜란에 참전한 인물인만큼 일본 사극치고는 그나마 임진왜란에 대한 간략한 묘사가 등장하는데, 일본군의 현시창적인 장면이 나오며 히데요시의 망상으로 인한 전쟁에 주인공 간베에의 입으로 대의 명분이 없는 싸움이니 일본군끼리 싸우는 꼴이라며 전쟁을 계속하다간 일본이 망해버리겠다는 말까지 한다. 여담으로 조선 현지인들의 한국 말도 나오는데 고우 공주들의 전국에 비해 괜찮은 한국어를 보여주나 문제는 배경이 황해도인데 충청도 사투리(...).

  • 일본 드라마 고우 ~공주들의 전국.~

위의 통신사 씬처럼 조선인과 임진왜란이 약간이나마 나오는데 26화에선 거북선 그림도 나오며 조선 농부가 한국 말도 한다. 다만 일본인 배우라서 엄청 어설프다.

조선통신사 김성일과 황윤길에게 히데요시가 무례하게 구는 내용은 위 드라마들과 마찬가지로 나왔고, 히데요시가 무리한 해외 침략을 구상하는 것이 상당히 일찍부터 계속 언급되고 있다. 다만 한국인들의 인식과 달리 조선을 친다기보다는 '명나라를 친다'라고만 언급되고 있다. 하지만 한일 외교 관계 악화를 우려해서인지 임진왜란을 직접적으로 다루기 보다는 내레이션으로 처리하는 정도에 그쳤다. 많이 나와봤자 지도정도.. 이 드라마 자체가 일본 내부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도 보인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군사 칸베에의 주인공인 구로다 간베에는 조선 땅도 직접 밟은 인물이라 대놓고 임진왜란을 외면할 수 없지만, 이 작품의 주인공인 사나다 가의 인물들은 조선에 애초에 온 적도 없어서 굳이 임진왜란을 묘사할 이유가 없다.

12.3. 게임[편집]

  • 문명 5/시나리오 사무라이의 한국 침략 시나리오
    여기선 병자호란까지 합쳐졌다. 한국, 일본, 중국, 만주로 싸워야하는 시나리오. 플레이어는 4가지 문명 중 하나로 플레이해야 한다. 한국, 중국은 도시를 모두 수복해야 하고 일본과 만주는 서울과 베이징을 먹어야 한다. 한국은 '의병' 특성을 가지고 나오고 도시가 점령당하면 후에 지원 유닛이 나오고 유닛이 하나라도 남아있으면 멸망당하지 않는다. 그런데 분명 만주가 포함된걸 보아 병자호란도 포함된 것 같지만, 실제 역사처럼 만주가 중국을 정복하는 일은 거의 없다.
    조선으로 시작하면 그야말로 개판 5분전인데, 이유가 이쪽은 거북선 3기 삼단 노선 파이크병 화차 몇기가 단데, 일본 쪽은 사무라이 머스킷병 삼단 노선 캐터밸트까지 유닛 다 합치면 수십기다. 고난이도라면 서울, 부산, 강릉, 대구는 포기하고 평양 근처에서 화차로 막으면서 거북선으로 보급을 끊어줘야 한다. [204]

  • Europa Universalis 시리즈
    전투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3편까지는 이순신의 능력치도 낮게 평가되어 있고 해전도 명량 해전 하나만 기록되어 있는 등 고증이 부실하지만 3편의 확장팩 Divine Wind부터는 이순신의 능력치가 상향되고 Europa Universalis 4에서는 대부분의 전투가 기록되고 이순신의 능력치가 재평가되고, 이벤트를 통해서 이순신이 등장 하는 등 고증에 충실하려고 노력한 부분이 보인다.

  • 임진록(게임), 임진록 2,
    1편에서는 조선과 일본을 진영으로 선택할 수 있으며, 2편에서는 명나라가 추가. 다만 게임의 싱글 미션은 실제 역사와 다르며 이는 게임 안에서도 미리 밝혀놓고 있다.

12.4. 기타[편집]

12.5. 보드게임[편집]

  • 워해머 브랜드를 달고 나오는 미니어쳐 게임 중 하나인 '워해머 히스토리컬' 시리즈 종족 중에 사무라이 시리즈가 있는데, 그 사무라이의 적 테마인 '일본과 그 적들'에서 등장하게 된 진영 중의 하나가 흥미롭게도 '조선군'이다. 제작자는 모델러로 유명한 앨런 페리가 맡았다. 보통 사극에서 나타나는 모습에 따라서 포졸 복장의 안습한 조선군 모델이 출시되었는데, 마침 한국의 미니어쳐 게임 플레이어 한 명이 그 소식을 듣고 모델을 보고서는 조언을 하며 여러가지 자료를 제작자들에게 넘겨 주며 이글루스에서도 이슈화 되었다. 덕분에 제대로 된 완성품이 등장했다. 현재는 쌍검 기마병(앨런 페리는 '쌍검 기마병을 실제 편제에 포함한 군대가 있었다니 하악하악'과 비슷한 반응을 보이면서 크게 좋아했다고 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쌍검이 조선 기병의 보편적인 무기가 되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궁병, 신기전(화거라는 이름으로 등장), 심지어 의병이나 승병 등 질 좋은 주석 모델이 계속 출시 중.

  • 또다른 보드 게임으로 일본의 워게임 전문 잡지 게임 저널 31호로 일본 아마존에 재고가 있으니 일본어가 가능하고 이 게임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한번 구입을 고려해보는 것도 좋겠다. 다만 4만원 가까운 가격은 부담스럽다. 구글 이미지 검색에서 'ゲームジャーナル31号'으로 검색하면 구성 및 다양한 이미지들을 볼 수 있다. 31호 다운로드 주소가 있긴 하나 잡지를 구매해야 활성화시킬 수 있다.

    일본에서 만든 게임이라 일본어 판이지만 한글화 자료도 있으니 이걸로 수작업 한글 패치가 가능하다. 플레이해본 일본인들에 따르면 일본군의 난이도가 매우 높다. 초반에 쾌진격을 하지만 역사대로 선조는 한양을 버리고 평안도로 튀고... 바로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해 일본군이 2중, 3중으로 포위되버리는데다 일정 턴이 지나면 명군이 인해 전술을 벌이기 때문에 일본군이 각개 격파 당하기 일쑤라고. 의병의 봉기를 막겠다고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에 대한 점령전을 실시하려 해도 병력이 부족해서 불가능. 여기에 이순신이 보급로를 끊어버리기 때문에 일본군으로 이기는 게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한다.

    허나 이건 전략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데서 나온 결과일 뿐, 실제로는 고니시, 가토, 구로다의 3개 군만 동원해도 초반에 조선 8도를 거의 쓸어버릴 수 있다. 이후 병력을 차근차근 상륙시켜가면서 황해도로 진격하면 선조까지 잡고 일본이 승리할 수 있다.[205] 제대로 플레이한다면 일본이 질래야 질 수가 없는 수준이다.

13. 위키에 등록된 임진왜란 링크[편집]

13.1. 조선 측 주요 인물[편집]

13.1.1. 조정[편집]

13.1.2. 정규군 지휘관[편집]

13.1.3. 의병장[편집]

13.1.4. 기타 조선 측 인물[편집]

13.2. 명측 주요 인물[편집]

13.3. 일본 측 주요 인물[편집]

13.4. 전투 전개 과정[편집]

고등학교 교육 과정에서 다루어지는 중요한 해전은 ★ 표시를 한다. 또한 전쟁의 흐름상 아주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전투는 볼드 처리.

13.5. 기타 전투[편집]

13.6. 기타[편집]

[1] 조선, 명, 일본의 요청으로 오키나와의 류큐 왕국과 태국의 야유타야 왕국도 참전이 거론 되긴 했으나 무산되었다.[2] †표는 전사, ‡표는 처형이나 옥사, ☠는 병사.[3] 이산해류성룡이원익 순(順)으로 전임(轉任)[4] 윤두수이덕형 순(順)으로 전임(轉任)[5] 유홍정탁이항복 순(順)으로 전임(轉任)[6] 류성룡이원익 순(順)으로 전임(轉任)[7] 김명원권율 순(順)으로 전임(轉任)[8] 김성일이일 순(順)으로 전임(轉任)[9] 도원수로 전임(轉任)[10] 이각 → 고언백 순(順)으로 전임(轉任)[11] 조대곤→ 김성일☠ → 유숭인† 순(順)으로 전임(轉任)[12] 진주 목사로 전임(轉任)[13] 경상 좌병사로 전임(轉任)[14] 인종의 외척으로 문정 왕후와 윤원형에게 숙청당한 윤임의 아들이다. 복권된 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15] 윤인함→ 변응성 순(順)으로 전임(轉任)[16] 김시민†→ 서예원† 순(順)으로 전임(轉任)[17] 이순신원균† → 이순신† 순(順)으로 전임(轉任)[18] 원균권준배설무의공 이순신 순(順)으로 임관. 원균은 충청 병사 →전라 좌병사 →삼도 수군 통제사 순(順)으로 전임(轉任)[19] 이순신원균† → 이순신† 순(順)으로 전임(轉任)[20] 이억기†→ 김억추안위 순(順)으로 전임(轉任)[21] 최호†→ 권준→ 오응태 순(順)으로 전임(轉任)[22] 놀랍게도 원균의 동생이다. 하지만 형과는 반대로 인망이 있었고 활약도 했다![23] 실제로는 전투에 참전하지 않았다. 제일 거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는 나중에 도쿠가와가 집권후 조선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는 이유가 된다.[24] 8군 사령관 겸임[25] 壬辰倭亂史 / 國防部戰史編纂委員會 285p[26] 간혹 Samurai Invasion of Korea로 불리기도 한다.[27] 직역하면 '만력제 시대에 조선에서 벌어진 전쟁'이란 뜻이다.[28] 여기서 豊太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뜻한다. '호'처럼 이름의 한자를 음독으로 읽는 것은 일종의 존경을 나타낸 호칭이다.[29] 역(役)은 별로 대단치 않은 국지전 등을 일컫는다. 이 때문에 일본에서 일부러 임진왜란을 비하 내지는 격하시키려는 목적으로 사용하는 말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일본에서 쓰이는 역(役)은 임진왜란과 같이 대규모의 군대가 '동원'된 전쟁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기에 적절한 비판은 아니다. 그러나 왜 경술국치 때부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정벌"이 "분로쿠 게이조의 역"이라는 중립적인 명칭으로 바뀌었는지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30] 예수회 선교사들은 "코라이 전쟁"이라고 불렀다.[31]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은 조선 건국 200주년이다.[32] 한국 역사만 보아도 조선 전기와 후기를 구분하는 기준이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한국에 중대한 분수령이 된다. 일본은 도요토미 세력의 실각과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집권으로 이어지게 되고, 중국 - 왕조 교체에까지 상당한 영향을 준다.[33] 그 이후 거의 220년 동안 그 인구를 유지하였다가 메이지 시대에는 3200만으로 증가했고 이후 또 다시 4300만으로 급성장하였다. 20세기 중반에는 7천만에 달한다.[34] 당시 협상 내용이 일본이 말이 안되게 요구하는 바가 많았다. 조선 남부 4도를 일본에게 할양하라는 내용과 명나라 황제 딸을 일왕(천황)과 결혼시키라는 등[35] 명 왕조 시절이던 중국을 당나라라고 부른 것에는 이유가 있는데, 일본은 조선 왕조가 들어선 후에도 조선을 고려라고 부르거나 중국 등 대륙의 문물을 싸잡아서 '카라', 즉 당나라 것이라고 부르는 등, 대체로 상대국을 그 시점에서의 정식 국호로 호칭하지 않고 일본과 제일 밀접한 관계였을 시절의 국호로 대충 부르곤 했기 때문.[36] 일본 학생들이 역사 연표를 외울 때 고로아와세로 연도와 사건을 외우곤 하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은 "이국에 침입, 분로쿠의 역(異国に侵入、文禄の役)"이라 외우기도 한다. 1592가 일본어 고로와아세로 '이고쿠니(いごくに)'라고 쓸 수 있는데, 이게 '이국에(異国に, 이고쿠니)'와 동음이의어가 되기 때문. 또 일본이 조선에 쳐들어온 전쟁이기 때문에 '침입'만 붙여주면 제대로 외우기 쉽다.[37] 호위할 위에 나라 국. 즉 나라를 지킨다는 의미.[38] 여기서의 조선은 북한이다. 북한의 공식 국명은 지금도 '조선'이다.[39] 명 - 청 교체의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고, 일본에서도 도요토미 정권이 멸망하는 직접적 원인이 되었으며, 조선에서는 대동법 개혁 등 조선 전기와 후기를 구분짓는 근본적인 사회 변화를 일으켰다. 앞의 평가는 최근 서서히 부정되고 있으니 참고만 할 것.[40] 면포는 전쟁의 경과에도 큰 영향을 줬는데, 조선 수군이 판옥선 같은 대형선을 주력으로 쓸 수 있었던 것도 돛에 필요한 양질의 면포가 자체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임진왜란 시점까지 목화의 자체 재배에 계속 실패하고 있었기 때문에 면포의 대량 공급이 어려웠고 좀더 작은 돛으로도 추진 가능한 한체급 낮은 세키부네가 주력선이 된다.[41] 지금의 오사카 성은 오사카 전투 (오사카 여름의 진) 후 완전히 파괴된 것을 도쿠가와 막부가 재건한 것이 여러 이유로 소실되었고, 도요토미 시대와 도쿠가와 시기의 모습을 섞어서, 즉, 완전히 창조해서 일본 정부가 재건한 것이다. 따라서 현대의 오사카성 건물과는 거의 관련이 없다.[42]타치바나 야스히로는 실록이나 조선 측 기록에서 귤강광이라고 불리는 사람이다. 당시 반백이 넘은 나이로 사신을 빙자해 조선에 많은 어그로를 끈 인물이었다. 조선에 머물면서 지리를 정탐했고 여러 에피소드를 남겼다. 유명한 예로 조선군의 창을 보고 '너희들 창자루가 너무 짧구나'라고 비웃었다거나, 연회 도중 소매에서 후추를 던지자 악공과 기생, 노비들이 앞다투어 정신없이 후추를 줍는 우스꽝스러운 장면을 보고 '너희들 기강이 엄청 해이하니 국운이 망할 징조.'라고 깔보았다는 얘기가 있다. 덕분에 이 이야기들은 임진왜란 이전에 조선이 평화에 젖어 있었으며 전쟁을 대비하지 않았다고 까는 근거로 잘 이용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거만하던 야스히로는 조선 교섭 임무를 실패해 귀국 직후 히데요시의 화를 사 자신을 비롯한 온 가족이 몰살당했다.[43] 이 사람의 고조부가 그 유명한 황희다. 황희의 장남 황치신의 증손.[44] 홍길동전의 저자로 알려진 허균의 형이다.[45] 간토 및 도호쿠 지역.[46] 이 때가 바로 오다와라성을 공격하던 시기였다.[47] 참고로 이 장면에서 조선 사절단의 의상은 KBS에서 협찬해줬다. 본측 인물들의 표정이 더 심각해진다. 참고로 동영상에서 보면 통신사 중 한 명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관백 전하의 존안을 뵙게되어 영광입니다."라고 하는데, 이 사람이 황윤길로 추정된다. 대표로써 통신사로 가장 안쪽에 앉아있고 예를 표했기 때문. 가운데 앉은 사람은 사신 일행 중 부사를 맡은 김성일로 추정.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들어올때 츠루마츠를 대동하고 오니 심히 불쾌한 기색을 나타내고 있는데 실제로 처음부터 일본에게 예를 표할 필요가 없다고 한 동인으로써의 특성도 나오고 서열상 두번째였기 때문이다. 파란 옷은 서장관을 맡은 허성. 반대쪽 자리에 앉은 일본 사람들 중 왼쪽은 이시다 미츠나리, 중간에 두건을 쓴 사람이 바로 히데요시의 명참모였던 구로다 간베에다. 조선 사신들이 물러간 뒤 히데요시에게 너무 경솔하게 처신하셨다고 직언을 하지만... 오른쪽은 히데요시 누나 닛슈의 아들인 도요토미 히데츠구. 훗날 할복으로 사망한다.[48] 원문 출처는 조선 왕조 실록 홈페이지[49] 합하는 전하보다 낮은 경칭으로 재상급 인사에게 붙이는 것이다. 이런 경칭들은 기본적으로 본인보다 격이 낮거나, 아랫 사람에게 붙이는 경우는 없으나, 경칭의 격을 낮추면서, 조선 국왕을 은근히 모욕한 것이라고 볼수도 있다.[50] 1590년. 당시 일본의 연호[51] 원문 출처는 조선 왕조 실록 홈페이지[52] 나름 대비한다고 했는데 제대로 대비가 되었으면 전쟁 경과가 이렇게 흘러가지는 않았을 것이다.[53] 이에 대해 류성룡은 전후 집필한 징비록에서 '바다를 사이에 두고도 침입을 막지 못했는데 한 줄기 강물을 가지고 논하다니 우습기 짝이 없다'라고 비판하였다.[54] 정읍 현감이었다.[55] 이런 하루만에 이루어진 미친듯한 진급 속도는 1년 전에도 고사리진 병마첨절제사(종3품)로 임명하려 하자 진급 속도가 너무 빠르다며 반발했던 사간원의 반대를 피하기 위해서 였다.[56] 현대 군으로 치자면 대대장 정도가 맡아본 가장 높은 지위인 군인을 하루 아침에 사단장에 앉혀논 것이라고 보면 된다. 군필이라면 이게 얼마나 말이 안되는, 무리한 인사인지 단번에 이해가 갈 것이다.[57] 이건 남쪽 지역에만 한정. 북도는 현지 병마사가 최고 지휘관이 되었다[58] 당장 6.25 전쟁 당시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이 미 의회가 과도한 탄약 소모로 비난 및 청문회를 계획한다는 말을 듣자 전장에나 한번 와보고 그런 소리를 하라며 일갈했다.[59] 그래서 곽재우는 산성 위주의 방어 전략을 다시 세울 것을 주장했고 조정도 이를 긍정적으로 검토해 그에게 경상도 지역의 산성 축조를 맡겼다.[60] 하지만 진주성은 워낙 입지 조건이 좋은데다가 김시민이 방비 태세를 철저하게 갖춘 덕분에 진주대첩의 승전을 이끌 수 있었다. 읍성의 다른 승전 사례로는 이정암연안성 전투가 있다.[61] 당시 난부가 당주인 난부 하루마사의 후계 자리를 놓고 양자인 난부 노부나오와 사위인 코노헤 마사자네가 내전을 벌이고 있었다. 일명 코노헤의 난[62]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에 따르면, 이후 히데요시 정권 하에서 쿠데타를 선동하여 반란 죄로 거의 사형이나 개역에 쳐해질만한 혐의를 받는데, 히데요시가 니가 반란을 일으키려고 한건 다 알고는 있지만 임진왜란에 자발적으로 참전하였으니 목숨만은 살려준다. 다만 너는 다시는 니네 고향으로는 절대 못돌아 갈 것이다. 라는 기록이 있다.[63] 최관ㆍ김시덕 공제,<임진왜란 관련 일본 문헌 해제 : 근세편> 및 국립 진주 박물관, 장원철 - 오만 역 <프로이스의 (일본사)를 통해 다시 보는 - 임진왜란과 도요토미 히데요시>에서 발췌.[64] 고바야카와 다가카케가 1597년 사망하고 5대로가 되었다.[65] 이전 글에는 난부 시게나오라고 되어 있으나 이 사람은 17세기 사람이다.[66] 가모 히데아키의 아버지다.[67] 도쿠가와 직할령은 말 그대로 직할령 400만 석, 직속 가신인 하타모토의 300만 석으로 총 700만 석이었으나 그 밑의 다이묘들은 끽해야 초슈, 사쓰마, 마에다, 다테 가문 정도를 제하면 몇 십만 석에 그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68]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224만석 가량에 더해 광산, 무역 수입을 얻었다. 5대로 중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를 능가하는 260만 석을 웃도는 석고를 보유했으며 특히 그 둘의 격차가 고니시 유키나가의 석고보다 컸다. 또한 5대로를 포함해 어지간한 메이저 다이묘들은 100만 석 이상이거나 그와 비슷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69] 조선왕조실록에 가등청정이라는 한자이름으로 실린 가토 기요마사의 명성이 조선에서는 더 높지만,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히데요시의 처 조카이다. 가토 기요마사와는 이미 출발부터 다르다. 실제로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나이도 더 많고 힘도 쎄서 시종 시절부터 두목급이였다. 시즈카다케 전투로 처음 다이묘로 임명될 때부터 후쿠시마만 영지 5천석이 주어지고 가토 기요마사를 포함 나머지는 죄다 3천석. 임진왜란 이후에도 후쿠시마가 이들 시종 출신의 리더로 활약한다.[70] 조선 조정 자체는 천황제와 쇼군 또는 관백과의 관계 그리고 각 영주(조선에선 이를 거추, 즉 대추장이라고 불렀으며 당시 조선이랑 교류했던 대표적 거추는 오우치 씨지만 이 당시엔 이미 몰락했다.)와 쇼군 또는 관백과의 관계에 대하여 비교적 정확히 알고 있었으며 이를 참람하다고 생각했다. 다만 사명 대사는 국제 관계에 대하여 잘 모르는 중이기에 이러한 정보를 접하기 어려워서 이런 오해를 할만한 개연성이 충분하다.[71] 기록마다 병력 수가 차이가 난다. 16,700명이라는 기록도 있고 18,700명이란 기록도 있다. 추후에 징발된 가능성도 없잖아 있다.[72] 거제도랑 울릉도를 봉토로 받은 소 요시토시가 무리하게 병력을 이끌고 가는 바람에 가뜩이나 인구가 적었던 쓰시마는 사람들 씨가 말랐다고 한다. 여기에 쓰시마 도미 중 조선 말을 할 수 있는 사람 56명, 쓰시마에 살던 조선인 5명을 통역으로 종군 시켰다. 현재도 쓰시마의 인구는 4만 ~ 5만을 겨우 웃돈다. 소 대신 무네라고도 읽는다. 그래서 무네 요시토모라고도 한다.[73] 당시 고니시와 사이가 좋지않던 (앙숙 수준이였다.) 가토를 2군으로 보냄으로써 서로 경쟁토록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74] 일종의 후방 예비대, 보급대 성격이 강했다.[75] 명목상의 총사령관.[76] 히데요시에 의해 군 전체를 감독하고 비상시에 의견을 조율, 보고하는 군감직을 맡음.[77] 조선 조정이 전쟁의 발발을 알게 된 것은 꽤 늦은 4월 17일이었다. 봉수가 작동하지 않아 장계로서 파악하게 되었기 때문이다.[78] 원균이 이순신에게 보낸 공문에선 박홍과 이각은 한차례 동래성 북쪽으로 접근했다가 물러났다고 한다. 안방준의 묵재일기에선 제승방략에서 감사와 병사는 성안에 들어가지 않고 성밖에서 호응한다고 언급했다. 박동량의 기재사초에 박진과 이각이 소산역에서 전투 방식을 놓고 의견을 조율한 대목이 나오는걸 보면 적어도 이때까진 이각에게 싸울 의지가 있긴 했던 모양.[79] 이 400척을 왜군의 전력으로 판단해 왜군 규모를 1만 가량으로 추산하는 실책을 저지르고 만다.[80] 부산에서 서울까지의 봉화 전달은 기상 상태가 최고로 이상적일 때 2시간, 최대 12시간 정도 걸린다. 이를 감안하여 봉화의 일일 보고는 아침에 출발하여 해질녘에 목멱산 봉수대에서 확인할 수 있도록 짜여졌다.[81] 탄금대 vs 조령 논쟁은 전쟁 직후부터 지금까지 활발한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82] 또한 조총이란 물건은 현대인들이 흔히들 착각하는 것처럼 왜군이라면 누구나 들고 싸우던 주력 무기가 아니였다. 주력 무기는 어디까지나 창이었고, 당시 조총의 보급률은 20%도 채 못 미쳤으며 결국 전투의 승패를 가른 것은 백병전이였다. 100년간 전국 시대를 겪어 사무라이부터 하급 잡졸들까지 실전으로 단련된 왜군과는 달리 200여년간 태평성대를 만끽한 조선군의 역량차는 상당했을 것이 당연하다. 더욱이 조선은 백병전에 유독 약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긴 평화로 인해 실전성보단 휴대성을 높이기 위해 환도나 창이 점점 짧아졌기 때문에 전투에서 더욱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의 환도는 전쟁 중 점점 다시 길어지거나 아예 왜검을 노획 / 수입해 사용하고, 전쟁이 끝나자 다시 짧아진다.[83] 행군 속도가 400년 후 6.25 때 북한군 침략의 속도랑 맞먹었다.[84] 흔히들 말하는 것처럼 '민초들만의 힘으로' 일어난 것은 아니다. '임진왜란의 이해'에 기술.[85] 취미삼아 백성을 죽이고 첩을 빼앗기 위해 정승을 암살하는 지경으로 껍데기는 왕자인데 내용물은 김길태이니 누가 좋아하겠나.[86] 여러 번 양위 파동을 일으켜 전시 행정부를 혼란시켰다. 사실 명에서도 선조 대신 광해군으로 갈아치울 움직임이 있긴 했다. 그런데 전쟁 끝나고는 명에서 만력제의 후임 문제로 인해 자칫 광해군은 세자로 인정되지 못 할 뻔했다.[87] 누구 누구가 노비 임을 증명하는 문서들이 이 곳에 보관되어 있으므로 제일 먼저 방화됐다고 전해진다.[88] 반면에 누르하치 쪽에서도 파병을 하지 못한게 신의 한수가 되었는데, 파병 제안 다음 해에 사돈 관계를 맺었던 하다 부족과 예허 부 등이 누르하치를 견제하기 위하여 누르하치의 뒤통수를 쳐서 각 여진 부락을 규합, 무려 9개 부족이 연합하여 건주 여진을 침공하는 전쟁이 벌어진다. 이 전쟁에서 대 승리하며 넘볼 수 없는 여진 부족의 부동의 No.1 세력이 되었고, 그를 견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이성량과 명나라는 이미 조선에 파병하고 벽제관 전투로 주력이 터진 상황이라 누르하치를 전혀 견제하지 못하고 오히려 1595년 용호 장군으로 봉하며 누르하치를 지원해준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나서야 명은 그제서야 누르하치를 견제하고자 하였으나 그 때는 이미 늦어버린 상황.[89] 이 당시 여진족들의 끊임없는 약탈에 질린 함경도의 조선인들도 일본 편이 되어서 함께 침공했다고 한다.[90] 소 요시토시 입장에선 조선과 일본의 협력이 실리를 추구하는 데 이득이었기 때문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요구를 일부러 누그러뜨려 전달한 것으로 해석된다.게다가 그는 전쟁 반대를 주장해 온 고니시 유키나가의 사위이기도 했다.[91] 실제로 임진왜란은 만력제가 동의한 것도 사실이나 더 중요한건 당시 명나라 병부 상서인 석성의 적극적인 참전 주장 때문이었다. 석성은 홍순언과의 야사가 유명하지만, 종계변무를 읽어보면 알겠지만 야사는 야사. 실제로는 저런 야사 때문에 조선을 도운 게 아니라 병부 상서를 맡았던 인물인 만큼 당시 명나라의 국제 정세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92] 이는 현재 중국북한을 놓지 못 하는 이유기도 하다. 이 당시나 현재나 기갑 부대가(그 당시엔 기병) 신의주에서 출발하면 수도인 베이징(북경)이 직접적인 위협에 노출되기 때문에 그 중간에서 완충 역할 및 유사시 동해와 태평양으로 투사할 전력의 발판이 되어줄 북한이 필요하다 보고 있는 것. 현대 중공도 주변국이 대부분 적대국이란 상황 역시 왜란 당시 명과 유사하다. 인도, 베트남, 필리핀, 대만, 한국, 일본 전부 중공과는 영토 및 영해 분쟁으로 엮인 가상 적국이며 몇 안되는 우호국 중 하나인 북한은 정상적이지 못해 도움이 안되는 폐급 국가에 러시아와의 관계는 우호라고 보기엔 애매한 관계.[93] 더구나 명나라의 입장에서도 조선까지의 거리 때문에 식량 운반의 문제도 있고 해서 자기들이 필요할 때마다 강화 협상을 핑계로 시간을 질질 끌었는데 일본의 이해와도 맞아떨어진 셈.[94] 게다가 명군이 평양성 문을 뚫을 때 사용했다는 병기가 다름아닌 포르투갈에서 들여온 대포였다.[95] 애초 명군의 참전 이유는 전선이 명나라 땅으로 확대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으니 제 역할을 하긴 했다.[96] 사실 그 이전부터 숫적으로 몇 만은 족히 되었지만 임진왜란 때는 굳이 싸우려고 하지 않았고, 전투 의욕을 보인 시점은 정유재란 초기 때다.[97] 소빙기가 시작하여 거의 경신 대기근에 준하는 기근이었다.[98] 전란을 거치며 왕권은 땅에 떨어졌고 민심은 선조가 아니라 전쟁 영웅들로 향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선조는 자국 장수가 아닌 명군을 드높이면서 이러한 명군을 불러온 자신의 업적을 알리고, 자국 장수들의 업적을 폄하하며 스스로의 권위를 세우려했다. 실제로 실록에는 선조가 자국 장수들이 세운 공은 명군을 따라 다니며 얻은 것으로 작은 공밖에 세우지 못했다며 폄하하는 부분이 있다. [99] 이건 전국 시대 일본의 관습이다.[100] 말했듯이 명군의 행패는 어디까지나 병사 개인의 일탈이었지 명나라 군대 지휘부의 의도가 아니었다. 경략 송응창은 군대와 그를 지휘하는 장수들에게 군령삼십조(軍令三十條)를 하달하여 군기를 확립시켜 조선의 백성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도록 특별한 노력을 기울였다.[101] 이 '군령 삼십조'에는 조선 백성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말 것을 명하는 조항이 3개가 있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장관과 장졸들은 조선의 지방을 지나며 개와 닭이라 할지라도 놀라지 않도록 하여 조금도 범하지 말 것, 감히 민간의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라도 함부로 범하는 자는 군령에 의거해 목을 벤다.'(제 5조), '조선 부녀자를 함부로 범하는 자는 군령에 의거해 목을 벤다.'(제 6조), '조선의 강산은 곧 황상의 강산이며 조선의 백성들은 황상의 백성이니 함부로 조선의 남녀를 죽이거나, 투항한 자나 부역한 자를 죽이는 자는 군령에 의거해 목을 벤다.'(제 20조)[102] 명군도 멀쩡한 조선인을 왜군 앞잡이로 오해하거나 혹은 의도적으로 전공을 부풀리기 위해 살해한 사례는 있으나, 행정 구역 단위로 의도적인 학살을 한 적은 없다. 단, 정유재란 남원성 전투에서는 양원이 성을 버리고 도망가는 바람에 성 안의 사람들이 모두 몰살당하긴했다.[103]남원성 전투에서도 명군은 부총병관 양원 휘하의 병사 50여 명 만이 탈주하여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을 뿐이고, 3000명 이상의 명나라 군대는 남원성에서 조선 군민들과 함께 남아 끝까지 목숨을 걸고 싸운 끝에 전원 전사했다.[104] 일본 수군의 본질적인 한계와 이순신 덕분에 일본군은 본국에서의 보급과 지원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조선인들을 꽤 많이 징발하는데 성공하여 막강한 방어 능력을 갖춘 요새까지 건설할 정도였다. [105] 일본의 자료에 의하면 무쌍을 찍으면서 이기는 게 확실시 되었다. 물론 결국 물러날 때까지도 상당한 승산이 있는 것으로 몰아가는 측면(여담으로 일본 위키만 참조해도 제삼자인 여진족들도 일본군이 걍 이기고 있던 것으로 나오나 막상 당시 판단은 그 별것도 아닌 오랑캐들 때문에 중국 침공은 무리라는 식이었다.)이 있어 과장이 되었을 수도 있지만 명군하고 조선군의 양측 기록에서도 일본군이 강하게 나오기 때문에 신뢰성이 아주 없지는 않다.[106] 사실 그럴수밖에 없다. 자기 나라 놔두고 천리만리 떨어진 남의 나라에 목숨 바쳐 싸우라면 누가 좋아하겠는가.[107] 사실 이런 명군의 민폐는 현대 이전 군대에서 흔한 일이었다. 나폴레옹 전쟁 시기인 18세기만 해도 유럽에서도 자국 병사들을 적국 병사들만큼이나 두려워한 일은 흔했다.[108] 더구나 유목민 출신들이나 유목민들하고 살며 한족들도 구분하기 어렵다라고까지 말을 할 정도로 동화된 사람들로 주로 구성된 북병은 원래 살던 곳 마인드가 전쟁에서 약탈, 강간은 여간하면 기본(칭기즈칸 같은 유목민 영웅들도 아군이 하도 막장으로 약탈을 해서 못봐준 나머지 명령을 내려 금지시키기도 했다.)이라 징비록 등에서도 약탈이 너무 심하다는 평을 들었고 실제로 평양성을 함락시키니까 명군 소속의 몽골 기병대는 자의적 판단으로 약탈을 했다.[109] 시대가 발전해서 절대적인 기준에서는 더 나아진 무기들도 있었지만 과거에는 무장의 질적 구성이 좋았던 반면 이 시기에는 암군들의 영향으로 기강이 개판이라 전체적으로 쇠퇴하고 있었다. 비유하자면 과거에는 보병들이 소총으로 무장했지만 전차랑 자주포의 지원, 보급도 풍부한 반면에 이쯤 오면 보병들이 자동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지만 전차와 자주포 등의 지원이나 보급 수준이 크게 떨어졌다고 보면 된다. [110] 실제로 과거 서달의 북벌군만 해도 사막과 혹독한 기후를 넘어 카라코룸, 울란바토르까지 도시를 초토화시킬 정도의 보급을 유지할 체계가 되었으나 임진왜란 때는 조선에서의 삽질이 있었다고 해도 손실된 군마나 장비 등을 쉽게 보급하지 못하고 있었다. [111] 사소한 일로 매질하는 건 기본이고, 유능한 항왜인 여여문은 아무리 가해자가 심신 상실에 가까운 상태였다지만, 명군의 행동에 항의하다가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112] 심지어 진린의 경우에는 자기 비위 거슬리게 했다고 조선 관리를 묶어서 개처럼 끌고다니는 행패를 부렸다. 이거 보고 기가막힌 류성룡이 말려도 듣지 않았다고 한다.[113] 조선 땅을 점거하고 깽판을 부리면서 후금을 토벌하는 제 역할을 게을리하고 건방지게 황제까지 칭하는 지방 군벌, 반역자로 전락해 버렸다.[114] 사실 전근대에는 오늘날과 같은 정교한 보급 체계가 없어 어느정도는 현지 조달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115] 출처 : 「쾌락의 혼돈」, 티머시 브룩 저,「명청시대 사회경제사」, 오금성 저[116] 이는 명의 영향도 상당히 있다. 명은 주변국들에게서 은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였고, 스페인(필리핀을 통해 접촉)과 일본처럼 막대한 은을 산출하는 국가가 아니라면 은본위 경제 체제를 구축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조선 후기 화폐 경제 때도 은이 아닌 다른 것을 화폐로 삼은 것에서 이를 알 수 있다.[117] 조선 북방에서 사용한 조운선인 북조선은 일반 조운선보다 크기는 컸지만, 조선 북부 지역에서 걷은 세곡은 모두 함흥 별궁까지만 갔고 한양까지 전달되지 않았다. 당연히 거리가 그렇게 멀지 않으니 해상 운송의 수준이 그만큼 떨어질 수 밖에 없다.[118] 출처 : 「다시보는 임진전쟁사」, etc.[119] 결국 현지 보급을 통해 병참을 수행하는 것이 현실적이지만, 이미 임진년 전란을 거치며 관야에 비축한 식량은 남아난 게 없었다는 게 또 문제. 약탈없이 현지 보급이 이루어지려면 사회 지도층 내지는 관야에서 식량을 제공해야 하지만 이미 그런게 남아난 상황이 아니었다. 여기다 상국의 구원병이라는 오만함까지 있었기 때문에 약탈에 가까운 현지 조달이 일상화되었다.[120] 명군 참장 낙성지 등이 은광 개발을 건의했으나 처음부터 부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사실 그럴 수 밖에 없는게, 조선은 금은을 중국에 공물로 바치는 데 국가 부담이 매우 커서 세종 때 완화되기 전까지 엄청난 고생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임란 이후 명의 사신들은 무지막지하게 조선의 귀금속을 뇌물로 긁어갔다. 호란 이후 청나라도 귀금속을 좀 요구했지만, 임란 이후 명이 긁어간 수준하고는 비교가 안될 정도였다.[121] 출처 :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한명기 교수 저[122] 이여송이 전투를 회피한 것 맞다. 애초에 이여송이 총병직에서 물러나게 된 사유 자체가, 조선에서도 그렇고 심지어 명의 유정 등 부총병들도 이 총병이 싸우려 하지 않습니다. 라고 뭐라고 하니까 병부 상서 석성이 와서 직접 조사해보고 역시 싸움을 회피한다는 보고를 하여 탄핵당한 것이다. 조선도 아니고 명측에서 조사한 정식 탄핵 사유 자체가 싸움 회피인데 이걸 다르게 말하면 안된다.[123] 물론 그래도 당대에는 명이 더 많다는 평인지 왜놈은 얼레빗 명은 참빗 이라는 말도 있었다. 단, 깃카와 히로이에 군은 하루에만 10,040의 코를 전공으로 인정받았다는 둥의 내용으로 보아 실제 피해는 왜군이 압도적으로 많이 입혔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승려 게이넨의 기록에는 본토에서 건너온 노예 상인들이 부대를 따라다니며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사들였으며 목을 밧줄로 이어 앞장 서게 했고 걷지 못하는 사람은 지팡이나 몽둥이로 매질해서 강제로 걷게 했는데 이들이 바로 지옥의 죄인을 처벌하는 악마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다는 내용이 있다. 추가로 이거 게이넨도 이런 짓하는 자국의 병사들이 사람 같지가 않다고 욕할 정도였다. 일본군도 점점 사나워지기 시작하였는데, 처음 조선 정복을 위해서 조선인에게 유화책을 취하다가 히데요시가 명군 참전 이후 조선 정복이 실패할 가능성이 커지자 자존심 회복을 위해 조선에 참혹한 피해를 입히고 싶어 했다고 한다. 일례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신으로 두고 있는 도요쿠니 신사(豊国神社) 옆에는 이총공원(耳塚公園)이 있는데 당시 기록에 1597년 9월 12일 규슈의 나고야성에 조선 각지로부터 수집된 조선인 126,000여 명의 귀나 코를 15개의 나무통에 절여 실어온 뒤 이곳에 묻었다고 한다. 단, 거의 대부분은 코를 잘랐고 코무덤이라는 이름이 너무 잔인하다고 하여 이름을 귀무덤으로 바꾸어서 귀가 강조된 면이 있다. 물론 일본군의 전공 뻥튀기 가능성, 죽은 일본인의 귀나 코를 자른 경우 등도 있겠지만 그걸 감안해도 일본군의 학살은 극심하기 짝이 없었다. 부풀렸다고 해도 일단 단위가 정말 장난이 아니여서(...) 히데요시는 패배할 것 같은 생각이 들자 '조선인을 모조리 죽이고 조선을 빈 땅으로 만들어라'라는 망언을 하였으며, '일정 숫자의 조선인을 죽인 다음에야 조선인의 생포를 허가한다. 증거는 담당관에게 제출한 후 반드시 확인 받을 것'이라는 할당제(?) 같은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124] 왜냐하면 의병은 만명 단위의 대부대는 거의 없었다.[125] 임진왜란 개전 1년만에 일본군이 전체 병력의 40% 정도를 손실해서 조선이 의외로 만만치 않았다는 주장이 있긴 한데, 이게 조선군이 자력으로 만든 성과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 그때까지 조선과 일본 사이에 벌어졌던 전투 양상을 보면 이 수치는 전투에 의한 사상자가 아니라 익숙치 않은 추위와 당시에 창궐했던 전염병이 주된 요인으로 작용한 결과로 보여진다. 특히 전염병 문제가 심각했는데 당연하게도 일본군보다 조선군과 백성들이 더 큰 피해를 입었다. 조선 수군 같은 경우엔 사상자보다 훨씬 많은 수의 병력을 역병으로 잃었고 이순신 장군까지 앓아누운 적이 있었다. 육지 같은 경우엔 기근까지 겹쳐서 피해가 훨씬 심각했다. 결과적으로 조선은 국가의 근간이 흔들릴 만큼 엄청난 피해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군의 40%가 사라졌다고 한들 감히 우세하다고 말할 처지가 아니었다.[126] 대개 전국 시대의 무장들은 문맹이었다. 그래서 그 점을 이용한 고니시는 사전에 심유경과 짜고 사이쇼 조타이를 시켜 위조된 내용을 말하라고 했다. 참고로 이 사람이 게임 임진록2에 일본 영웅으로 등장하는 그 '세이쇼오'다. 이 인간은 진구황후 전설에 푹 빠져 산 인간으로 도요토미의 조선 정벌을 부추긴 장본인이기도 하다. 자세한 것은 사이쇼 조타이 문서 참조.[127] 豊臣秀吉의 冊封問題와 壬亂期의 講和交涉, 임진 전쟁기 강화 교섭 연구, 국사 편찬 위원회의 한국사 컨텐츠, 大君外交と東アジア, 한일 문화 교류 기금의 동아시아 세계와 文祿・慶長의 役, 文禄・慶長の役(壬辰倭乱)[128] 김시민이 이미 전사한 줄을 모르고 있던 히데요시는 2차 진주성 전투에서 김시민은 꼭 베어오라는 특명을 내린다. 그런데 당시 진주 목사인 찌질이 서예원이 살려달라고 울고 불고 난리치다가 잡혀 죽자 다테 마사무네는 그 목을 베어다가 김시민의 목이라고 소개하며 히데요시에게 갖다 줬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서예원이 명장은 아니어도 용맹한 장수였다는 주장도 있다. 즉 위에 적은 것처럼 겁쟁이에 찌질이라 울고 불고하지 않고 용맹하게 맞섰다는 것. 진주성으로 부임하기 전에 몇차례 전공을 세웠다던가 2차 진주성 싸움에 앞서 (필사의 각오로 싸우기 위해)온 가족을 진주성으로 불렀단 기록 등이 이를 뒷받침한다. 근데 이건 김천일의 후손과 서예원의 후손들이 서로 자기 조상 자랑하고 상대방 조상 욕하는 내용이라 진실은 알 수 없다. 좀 더 연구가 되면 확실한 결론이 나올 듯하다.[129] 진주성 방어에 나선 병력이 얼마인지 제대로 파악이 안되고 있다. 입성자와 전사자 관련 기록을 비교 대조해 보면 입성해 방어전에 들어갔단 이야기가 없는 부대가 전사자 수효에 다수 포함되고 막 그렇다.[130] 진주성 공격 시기의 일본 육군은 초기 병력의 40% 가까이를 상실해 약 10만여 정도 남긴 했는데 이때 참전 영주들 관련 기록을 보면 영지에 충원 병력 보내라고 막 닦달하고 있어서 총 규모도 제대로 파악이 안 된다.[131] 일본의 '회본태합기'에는 비가 올 때 귀갑차를 사용해 성에 접근해 성을 무너뜨렸다고 하고 있다.[132] 조선 시대 사료나 하멜 표류기들을 보면, 향토 방위는 승병들의 고유 의무였다. 추측건데 징병제 국가였던 조선에서 남정네들이 군대에 소집되었을 때 남자들이 믿고 마을을 맡기기에는 승병이 적합하지 않았을까? 어쨌건 마찬가지로 보부상들은 전시에는 척후병으로 징집되도록 되어 있었다.[133] 의병과 수군을 합치면 17만 5천이다. 사람들의 통념과 달리 임진왜란의 주력은 정규군이었다. 의병은 보조적 역할을 맡다가 결국 정규군에 편입되었는데, 병농 일치 징병제 국가인 조선의 시스템을 고려하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단 조선 후기부터는 모병제였다. 조선까들 중엔 17만이 장부상 기록이었다고 주장하는데 조선보다 인구도 딸리던 고구려도 주필산 전투 때 15만 모았고 고려도 2차 여요 전쟁 때 30만 모았는데 조선이 17만 못 모았을 가능성은 없다, 게다가 선조 때는 아직 조선이 세도 정치 시기만큼의 막장이 아니었다.[134] 여기서 히데요시가 천황의 정비, 혹은 최소한 실권자인 명이 봉하는 일본 국왕 히데요시 본인의 정실 부인으로 황녀를 맞이하겠다고 주장했다면 명나라로선 잠깐이나마 고려할 가치가 있었다. 역대 중국 왕조에서 황녀를 외국의 지배자에게 혼인하게 하고 이를 통해서 양국 관계를 우호적으로 만든 사례는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식 황후도 아니고 겨우 후궁이었으니 이는 고려하고 말고가 없는 무리한 요구였다. [135] 이를 감합 무역이라 부르는데 무로마치 막부 시절에 행했던 일로 이 배는 일본에서 명나라랑 무역하기 위해 온 배라는것을 증명하는 문서를 명나라에서 작성해 반쪽은 일본에 주고 반쪽은 명나라가 갖고 있다가 배가 오면 증서를 맞춰 맞으면 일본에서 온 배임을 인정하는 것인데 전국 시대에 다이묘들이 너나없이 명나라랑 교역하려고 하자 폐지되었다.[136] 7가지 항목 중에 제일 무리한 조건. 명이 강화 협상 당시 조선에 약속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조선 영토 보장. 즉 일본을 평화롭게 물러가도록 하겠다는 것이었고, 그게 아니라도 영토 절반을 빼앗길 판에 명나라가 강요한다고 해서 조선이 들을 리 만무하다. 명나라에서조차 이건 받아줄 마음이 처음부터 없었고, 명군 내부에서 벌어진 논쟁도 '철군한 뒤 조선에게 전쟁을 맡기자 vs 우리가 영토를 다 찾아주고 난 뒤에 철군하자'는 쪽으로 일찍 후퇴하냐 아니면 같이 싸워 이긴 뒤에 후퇴하냐가 요점이었지 '영토를 넘기느냐 마느냐'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로선 대륙 정벌의 망상에서 최소한 조선 절반이라도 건질려고 내건 조건이었겠으나 점령해봤자 반란만 잔뜩 일어날 놈의 땅을 달라고 씨도 안먹힐만한 욕심을 부리고 있으니 이 정도로 국제적 현실성이 결여되고 자기 혼자만의 욕심에 사로잡힌 요구는 들어줘도 문제다. 그래서 어찌어찌 조선의 4도를 일본이 먹었다 치자. 맨날 일어나는 반란은 어떻게 할 것인가? 소중화의 문명국임을 자부한 조선인이 야만인이라 멸시했던 일본의 지배를 받아들일리 절대 없었을 것이며 당시 일본은 전국 시대라서 자국의 통일조차도 엉성한 봉건 할거 상황이었고 조선 왕조를 멸망시키지도 못한 상태였으니 조선의 일본군은 그야말로 우르트메르의 십자군처럼 바다 건너 적대적인 피지배민 속에서 고립된 영지로 임나일본부 실사판이나 찍다가 히데요시 사후, 잘해봤자 얼마 못가 조선 점령지에서 쫓겨났을 것이 뻔하다.[137] 굳이 '권신'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당시 히데요시는 선조도 군주가 아니라 자신처럼 '덴노'의 아래에서 실권을 가진 신하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히데요시의 좁은 대외관을 엿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사례이다.[138]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심유경이 "이게 말이나 되오? 이건 완전 승자의 요구 아니오?" 라고 화내는 장면이 나올정도[139] 명나라를 끊임없이 괴롭히던 북로남왜 중 북로인 몽골족의 추장이었다. 명나라와 화의를 맺는 과정에서 황녀를 시집보내지 않았었다.[140] 이 전쟁의 공식적인 사죄는 오히려 이 전쟁에 불참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했다. 물론 이 사과를 딱히 이에야스가 평화주의자라서 했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곤란하다.[141] 명나라 조정에서 파악한 다이묘의 서열대로 초기 명단이 작성되지만 일본 측이 수정하여 제출되었다.[142] 다이묘로 삼는다고 했다.[143] 이 일을 기록한 책이 일본왕환일기이다. 히데요시는 조선 사절단의 접견을 거부하였고 책봉장의 상황을 전달받기만 할 수 밖에 없었다.[144] KBS 팩션 사극 임진왜란 1592에서는 이등체강 된 조선 왕과 똑같이 친왕의 붉은 곤룡포익선관을 착용하는 것으로 묘사한다.[145] 다른 논문에서는 이등체강되어 친왕 대우인 조선 왕과 다르게 삼등체강 된 군왕의 대우로 책봉하고 관인이 내려졌다고 한다.[146] 이 부분에 있어서 히데요시가 책봉의 의미에 대한 진지한 생각이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147] 종전 이후 1599년 2월, 명나라로 돌아가기 전의 명나라 장수와 병사들을 위해 훈련원에서 베푼 연회를 그린 그림이다.[148] 앞서 조선 수군에게 해전에서 당한 연패로 인해 특히 수군 쪽 전력이 강화되었다.[149] 양호가 서울을 떠나자 도망가는 거 아니냐며 선조가 가서 붙잡고, 그러면서 백성들에게 이건 피난 가는 게 아니다고 설명하라고 명령했다. 한편 양호는 서울을 무조건 지키겠다며 확실하게 약속하기도 하는 등 개판이다.[150]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에 대해서 다소 논란이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굳이 한양을 공격하지 않아도 되는것처럼 말했지만, 실제로는 한양 공격을 강하게 지시하고 있었다.[151] 이 무렵, 시기상 10월로 접어들고 있었기에 겨울이 머지 않았으므로, 보급 없이 계속 진격하다가는 그대로 고립되어버리는 상황에 처할 수 밖에 없었다.[152] 엄밀히 말하자면 패한 건 아니다. 울산성 함락 및 전멸의 위기 직전에 일본의 구원군이 포위망을 돌파하여 고전하긴 했어도 결국 일본군이 승리했다. 구원군이 좀만 늦었으면 가토 기요마사 포함 울산성의 일본군이 모두 전멸했겠지만.[153] 조선 조정에서도 잘 알고 있을 정도였다. 덕분에 이 일로 관광타게 된다.[154] 윤두수는 몰라도 류성룡의 경우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육지에서는 류성룡, 바다에서는 이순신만 없어도 이길수 있었을것이다." 라고 할 정도로 활약 많이 했다.[155] 당시 니탕개는 2만이라는 대군을 이끌고 조선 변방을 침공한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 때 활약한 장수가 바로 탄금대의 신립으로 니탕개의 난을 물리치는데 일조해 선조의 사돈이 되기까지 한다. 다만 선조의 신뢰를 받았다는 점과는 별개로 그의 작전 수행에는 현재에도 의문점을 가진 이들이 많은 편이다.[156] 위에서 서술했듯 조선의 건국 초부터 임진왜란 발생 전까지 주된 전선은 북방의 여진족이었고 그마저도 명의 질서 아래 큰 충돌없이 평화가 200년 가까이 지속되자 수도와 북쪽의 군대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군대가 기강이 헤이해지고 본래 만들어놨던 군복무와 동원시스템도 유명무실해진 상태였다. 수군의 경우 더 심해서 난중일기에 충무공께서 처음 전라도에 부임했을 때 당시 수군의 개판 5초전의 상황이 그대로 묘사되어 있다.[157] 실제로 고니시가 이끄는 1군 18,700명이 부산을 뚫고, 상주, 탄금대를 뚫고, 임진강 방어선 돌파까지 무려 3만에 가까운 조선군을 연달아 격파하고 한양 찍고 그 뒤로는 타 일본군과 연합하여 평양까지 뚫었다. 가토가 이끄는 22,000명은 경주를 거쳐 한양 입성 뒤, 강원도 - 함경도까지 다 뚫고 두만강 건넜다가 여진족에게 혼났을 정도.[158] 실제로 의병장 중에서는 기축 옥사로 쫓겨난 이들도 있었고 심지어 북인의 핵심 당원이던 정인홍도 있었다.[159] 실제로 해산하라고 하면 할 수밖에 없는게 의병이다. 안따르면 죽음 뿐이니까.[160] 실록에서는 육식자라고 나왔다.[161] 가령 중들도 이렇게 열심히 싸우는데 우리들은 뭐하냐는 식으로, 특히 사명당이 일본 군영을 살펴보고서 왜군과의 전투를 독려하는 글을 올리자 중이라도 말 참 잘했다는 논평도 실었다.[162] 심지어 사명당전에서는 병조 판서에 임명한다! 즉 국방부 장관직을 준 셈 물론 사명당은 사양하지만[163] 다만 피해는 차마 헤아릴수 없는 수준이었다. 어느 전쟁이든 전장이 된 방어 국가의 승리란 참으로 말하기 민망한 수준이다.[164] 전쟁 초기에는 현지에 대한 지식 부족으로 조선을 단순히 지나가는 통로 취급했지만 일본군이 조명 연합군에게 밀려서 휴전 협상에 들어갔을 때에는 전략 목표가 보다 현실적으로 수정되었고, 가장 중요한 협상 조건이 조선 8도 중 4도를 일본에 할양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것도 현실과는 한참 동떨어진 목표였지만.[165] 물론 여기에서 더 나아가 일본 본토에 반격한다던가 이럴 정신이 없었던 점도 생각해봐야 한다.[166] 예를 들어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미군탈레반을 상대로 아무리 압도적인 전비로 전술적 승리를 거둬봤자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이나 이슬람 극단주의를 근절하지도 못했고 친미 민주주의 정부를 세우지도 못했으며 아프간의 막장스러운 경제 사회를 복구하는 데도 실패했다. 이래서야 탈레반 테러리스트 개개인을 아무리 많이 죽였어도 미국 입장에선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167] 다만 이에야스는 인식과는 달리 평화주의자라고 할법한 인물은 아니며, 조선 또한 이에야스를 전폭적으로 신뢰하지는 않았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168] 당시의 주요 상인들은 자본의 몇 곱절에 가까운 엄청난 이득을 보았다고 할 정도이고, 이것은 독점적 민간 자본의 형성으로 이어진다. 조선이 원시적 농업 국가에 불과했다는 식민 사관의 논지를 반박하는 가장 중요한 단서 중 하나다.[169] 일반인들에게는 임란이 분기점이겠지만 사학계에서는 보통 임란을 기준으로 전후기를 쪼개기보다는 전기 중기 후기 3부분이나 말기를 추가해서 끊는 편이다. 500년의 조선을 전후기로 짜르기엔 사실 애매한 부분이 있다.[170] 아예 언급을 안 한 것도 아니고, 세계 각지의 첩보를 듣는 장면에서 조선을 까면서 "철포병 20만 앞세워서 두 달이면 되겠군"이라고 직접적으로 언급되었는데도 그렇다. 이렇게 문제되는 부분은 아예 덮어두고 얘기 자체를 꺼내지 않는다는 견해도 있다.[171] 임진왜란 때 용병으로 따라간 낭인이 조선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 내용. 책은 상하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임진왜란 당시 조선이 배경이다.[172] 에도 시대에 유학이 번성하면서 징비록도 일본에 건너갔는데 숙종 때 일본에 통신사의 일행으로 간 신유한의 '해유록'에서 신유한은 징비록이나 강항의 간양록 같은 조선의 임진왜란 관련 책들이 일본에 출판된 것을 보고 국가 기밀이 담긴 책들이 일본으로 건너간 걸 보니 우리 나라의 기강이 말이 아니다라고 한탄하였다.[173] 일본의 고문체는 조선 / 중국의 문체와 한자의 배열이 다르고 일본식 구결(가나)이 섞이는 등 조선인으로서는 이해가 굉장히 힘든데, 이익은 이 글을 한 자 한 자 다 따져 보면서 글자를 재배열해서 번역했다고 한다.[174] 일본 고미즈노오(後水尾) 덴노의 연호. 1615년 ~ 1624년까지 사용되었다. 일본어 발음으로는 '겐나'.[175] 겐나의 역, 즉 1615년의 오사카 공방전을 말한다. 도쿠가와 가문이 도요토미 가문을 완전히 멸망시킨 전투이다. 덧붙여 원화라는 연호는 오사카 전투가 끝난 후에 변경된 연호인데, 일본에서 완전히 전쟁이 끝났다는 의미로 바꾼 연호다. 그래서 전국 시대의 종결을 상징하는 '원화언무(元和偃武, 겐나엔부)'라는 말이 있다.[176] 성호사설 권12 인사문 일본지세변급 격조선론[177]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주인공인 태합입지전만 해도 임진왜란은 그냥 넘겨버리거나 조선이나 명나라를 공격하려 하면 부하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일본이 갈갈이 찢어진다. 심지어는 일본 고전 문학에선 사악한 텐구가 히데요시에 빙의해서 임진왜란을 일으켰다는 내용이 나올 정도로 병크 중의 병크로 여겨진다.[178] 즉 당대 명장으로 인정받던 신립도 조총이 뭐 어떤건지는 알고 있었다는 얘기[179] 조총을 사용하는데에 필수적인 흑색 화약을 제조하기 위한 필수품인 유황과 염초를 구하기 힘들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유황은 일본에서 전량 수입하였으며, 염초는 임진왜란 중반 이순신 장군이 독자적으로 대량 생산에 성공하여 자체 수급이 가능했을 정도였다. 임진왜란 전의 상황에서 조총은 어느 정도 제작 재료의 수급이 용이했던 활과 화살과는 달리 들어가는 재료와 유지비가 너무 높은 비효율적 무기였다.[180] 조상님의 기록만으로 누구인지 도통 알 수 없는 대표적인 인물이 가토 기요마사의 부하로 초전에 항복했다는 '김충선'이나, 이순신이 명량 해전에서 목을 친 '마다시'이다. 김충선은 지금까지도 누구인지 전혀 감도 못 잡는 상태이고, '마다시'는 '구루지마 미치후사'를 뜻하는 것 같기는 한데 한 글자도 같은 글자가 없어서 긴가민가 하는 정도이다.[181] 한극함은 후일 탈출해서 조선 진영으로 돌아오지만 임해군, 순화군이 포로로 잡혀간 책임을 뒤집어쓰고 선조에게 처형당했다.[182] 용인 전투야 역덕이 아닌 평범한 일본인이라면 도저히 알수 없는 와키자카 야스하루라는 다이묘가 수십명의 기병으로 공격하자, 밥먹고 있던 조선군 5만명이 모랄빵 났던 조선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단일 전투인데, 일본 측에서는 전투로 보지 않은 것 같다.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이순신의 라이벌로 설정된 '와키자카 야스하루'를 보고 "아! 이렇게 훌륭한 장수를 왜 우리가 지금까지 몰랐었지?"하는 일본 측 반응이 나올 정도.[183] 칠천량 해전은 조선 측에서는 전투로 보지 않고 '칠천량의 무너짐'이라고 표현했던 사건인데 조선 수군 134척 ~ 180척을 상대로 일본군 2척이 접근하자, 겁먹은 총지휘관인 원균이 배를 버리고 육지로 도망가고, 이를 본 다른 수군들이 모랄빵 나서 저절로 무너졌던 전투였다.[184] 일본 측에서는 3대 대첩 중 하나로 보기에는 너무 싱거웠던 듯.[184] 조선 수군이 무서워서 뒤에서 구경만 하고 있던 도도 다카도라의 50척은 이때야 뒤늦게 참전함. 모랄빵 나서 도망간 덕분에 조선군이 거의 죽지 않은 전투이기도 한데, 남해안 곳곳에 숨어있다가 이순신이 명량 해전에서 승리하자 데~헷! 하고 판옥선 까지 끌고 다 나타난다.[185] 일본 쪽 연구로는 일본군이 패배한 최대의 계기가 권율 장군의 이치 전투라고 꼽는다. 이치 전투에서 조선군이 승리해서, 한성 남쪽에서 행주 전투도 벌어질 수 있었다는 의미이다. 물론 일본군이 수적인 피해는 행주 전투에서 더 입기는 했다.그 외에도 한국사 최악의 3대 패전으로 꼽히는 원균칠천량 해전도 임진왜란에서 벌어졌다.[186] 나머지 두 궁은 전쟁이 끝난 후 복원하였다. 하지만 경복궁의 경우 큰 규모라서 조선 정부도 복원하는데 엄두를 내지 못하였고, 19세기 말 흥선대원군이 중건할 때까지 폐허로 방치되었다.[187] 왜란 후 선정된 선무일등공신 3명은 모두 당시에 사망한 인물들이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노량해전에서 전사, 권율 장군은 전란 종료 후 1년이 지나 사망하며, 원균 역시 죽었다고 공표된 인물이다.[188] 세조가 뿌린 모순이 연산군과 중종을 거치면서 심화된 조선은 16세기 말 고대 그리스 시대의 도시 국가였던 스파르타의 국가 체제와 유사한 천인들의 수가 많았던 노비 국가였고 이 상황에서 개혁 의지를 내는 인사도 조광조와 이이 정도밖에 없었다. 이런 국가 체제가 임진왜란이라는 전란을 거치며 인구의 감소와 신분을 규정하던 노비 문서 등이 소실되면서 결과적으로 노비의 수가 대폭 감소하게 된 보통 사회 체제로 전환되는 계기를 가져왔다. 이는 흑사병으로 인해 유럽의 농노 수가 감소하자 이후 농노에 대한 지위 상승이 이루어지게 된 것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189] 실제로 명은 이후 재조지은의 논리를 내세우면서 조선에 상당히 무리한 요구를 하게 되는데, 명의 입장에서 보면 나름 정당한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사실 논리적으로 보면 명군이 조선을 구원하는 데 큰 역할을 한 게 사실이라 틀린 주장은 아니었다. 허나 그것이 조선에겐 큰 부담이었고, 사신들의 개인적인 뇌물 받기 등이 겹쳐 현대까지 명에 대한 반감이 커지는 계기가 되었다.[190] 만력 3대정'이라고 해서, 당시 명나라가 치렀던 3개의 큰 전쟁이 있었고, 명나라가 조선에만 군사를 파견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이 시기에 커다란 전쟁 3개가 겹치고 줄줄히 출현한 암군들의 막장 행보로 명나라가 심각한 재정 문제를 겪게 된 것은 사실이다.[191] 어떻게 보면 이 전쟁의 진정한 승자라고도 볼수 있겠다[192] 일본도 중앙 정부가 그나마 강력하던 헤이안시대 이전에는 육국사로 불리는 정사 역사서가 있다. 하지만 전국 시대 무렵에는 중앙 정부가 이미 무력해진터라.[193] 도요토미 히데츠구의 동생, 즉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카이자 양자였다. 또, 거제도에서 병사한 인물로는 시마즈 요시히로의 차남인 시마즈 히사야스가 있다.[194] 대력강용하다고 평가받는 녀석으로 그 류조지 타카노부의 차남으로 하스이케 성의 영주이자, 아버지의 명으로 에가미 가문의 양자로 들어가 에가미 가문을 먹어치운 녀석이다. 심지어 나베시마 나오시게의 후계자인 나베시마 카츠시게를 양자로 까지 데리고 있었던 녀석인데. 가토 기요마사 휘하에 있었다[195] 이순신과 녹둔도에서 근무했던 동료로, 이순신이 백의종군하게 된 계기인 녹둔도 전투에도 함께 참여했고 백의종군 또한 함께 했다.[196] 조선 왕조 실록 선조 실록 선조 31년 5월 26일.[197] 일본인들은 Tobacco를 담박괴’(淡泊塊)라 음차표기 했는데, 이게 한국에서 담바귀로, 그러다 담배로 정착되었다.[198] 고추는 일본군이 생화학 무기처럼 사용하기도 했고 담배는 동래 인근에 많이 심었다.[199] 그런데 여기서도 다른 주장이 제기되는데,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고추가 16세기 ~ 17세기부터에나 수입되었다는 건데 그 짧은 기간동안 고추장은 몰론이고 지역별로 가지각색인 지역 고유의 김치들이 불과 2세기, 3세기만에 생겨나 정착했다는 말이 된다는 소리인데 이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이다. 다만 조선 시대 당시 기록에 고추를 왜에서 들어왔다고 왜초(성호사설), 왜자개(지봉유설) 등으로 부르는 것이 남아있고, 궁중 요리에서는 고종 재위기인 20세기 초까지도 고추를 잘 쓰지 않았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결정적으로 고추는 아메리카 대륙 원산인 작물이니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도달한 1492년 이전에는 구대륙에 존재할 수 조차 없다! [200] 피해자야 자기 입장에서 이야기를 해도 별 문제가 안 되지만 가해자는 입을 조금만 잘못 놀려도 외교에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이는 일제 식민지 이슈도 마찬가지. 넷우익 따위가 뭐라 떠들건객관적으로 일본이 가해자인 건 명백한지라 독도나 위안부 이슈 정도가 간신히, 일본 집권파의 정치적 필요가 있을 때만 철판 깔고 나오는 이유가 그거다. 이런 현실에서 일본 내에서도 흑역사로 치부해 교과서에서조차 제대로 가르치지도 않는 내용을 건드려 봤자 득보다 실이 훨씬 크다.[201]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전문가로 국내에서 손꼽힌다.[202] 전 농림 수산 식품부, 해양 수산부 소속 공무원이였다. 이후 원나라 역사책도 저술했다.[203] 또한 거제도에서 병사한 왜장(일본 장수) 하시바 히데카츠(羽柴秀勝)를 히데요시의 양자이며 오다 노부나가의 아들인 동명이인과 오인하는 오류를 저질렀다. 전쟁에 참여한 하시바는 히데요시 누나의 아들. 우에노 쥬리가 주연한 고우 공주의 남편이기도 했다.[204] 꼼수를 쓰지 않는다면, 농담이 아니라 그렇게 하기 싫어도 정말로 역사에서 나온 것처럼 진행이 된다.[205] 이순신 장군이 이벤트 카드로 등장하는데 조선에 존재하는 모든 왜군의 보급은 끊는게 가능하다. 이미 보급이 끊긴 왜군은 중복으로 보급 단절 효과를 받는것도 가능하다. 다만 가토 기요마사가 함경도에 존재하는 경우는 가토 기요마사의 호랑이 사냥 카드로 무효화 가능하다는 약점이 있다.[206] 당시 도원수는 권율의 전임자인 김명원.[207] 조선 관군, 의병을 통틀어 최초로 승리한 전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