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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儒敎 (Confucianism, 공자주의[1])

1. 개요2. 중국에서의 발전
2.1. 주나라의 종교2.2. 춘추시대2.3. 전국시대2.4. 진한시대2.5. 위진남북조 시대와 당송 시대2.6. 명청시대
3. 한국에서의 발전
3.1. 조선 중기 이전3.2. 조선 중기3.3. 조선 후기3.4. 근현대사
4. 일본에서의 유교5. 류큐 왕국에서의 유교6. 베트남에서의 유교7. 종교? 철학?
7.1. 천명(天命)7.2. 제사(祭祀)7.3. 인문화의 역사
8. 경전9. 교육10. 유교에 대한 비판적 의견과 반론11. 유명한 유학자
11.1. 중국11.2. 한국11.3. 일본11.4. 류큐11.5. 베트남
12. 기타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춘추시대 태동한 제자백가의 한 분파이자, 공자가 이전 시대의 문화와 사상을 정리한 것을 공자학파의 사상가들이 계승하여 체계화한 중국 사상의 한 조류. 최초로 중국 전토를 '안정적으로' 지배한 한나라의 지배 이념으로 채택된 덕에 춘추시대부터 경쟁했던 쟁쟁한 사상들을 누르고 최후의 승자가 되었다. 이후 후학들의 많은 보완 혹은 변용을 거치기도 했으며, 19세기까지 정치, 제도, 철학, 종교 등에 넓게 걸쳐 있으면서 동아시아 세계 모든 분야의 근간으로 작용했다. 19세기 이후에는 서양 세력의 진입과 자체적인 비판에 부딪치면서 국가 이념으로서의 의미는 퇴색되었지만, 현재까지도 사회 규범이나 문화적으로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원래 '유교'는 유학(儒學), 정학(正學), 도학(道學) 등으로 많이 불렸고, 유교(儒敎)라는 표현은 '유학의 가르침'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20세기 이후 교(敎)라는 글자가 종교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례가 한정된 이후에는 유교라는 표현이 오해를 불러올 소지가 있으니 주의를 필요로 한다. 유교 자체도 내세에 대해 일정한 기준점이 있어서 다른 종교와 동시에 행하기는 어렵다는 점 탓에 종교적 성격이 있다고 보기도 하며, 특히 그리스도교 계열 종교들이 유교적 제례인 제사 참여를 허용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식의 쟁점은 심심하면 등장하는 주된 종교적 떡밥 중 하나다. 그래도 지금 어르신들은 물론 젊은 세대까지도 '조상님께 제사 드리는 종교'로 인식하는 것은 사실이다.

유교가 종교와 깔끔하게 분리되느냐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우리에게는 종교와 학문이 깔끔하게 분리되지만 고대에 살았던 사람들에게도 우리와 같은 구분이 있었다는 보장은 없다. 당장 유교의 경전이나 사상가들에 대한 선비들의 태도는 종교의 경전이나 성인(聖人)에 대한 종교인의 태도와 별반 다르지 않다. 단적으로 알고리즘 교과서를 라면 받침대로 쓴다고 격심히 비난할 현대인은 없지만, 논어를 라면 받침대로 쓰는 모습을 조선 시대 선비가 본다면 난리가 날 것이다. 학문을 대하는 자세가 원천적으로 다르기에 우리의 구분 기준이 저들에게도 적용된다고 보장하기 어렵다. 이는 유교뿐 아니라 많은 고대 학문에서 종종 찾아볼 수 있는 특성이다. 수학에 대한 피타고라스학파의 태도나 영혼에 대한 플라톤의 논의 등 고대 철학의 많은 분야에서 종교와 유사한 성격을 갖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후대의 유가는 자신들의 사상적인 연원을 삼황오제 시대로까지 올려 잡는 경우도 있으나, 논어를 보면 공자는 하은주 삼대를 기준으로 잡고 있고 그 중에서도 하나라은나라는 자료가 부족하다는 말을 하고 있다. 삼황오제가 본격적으로 언급된 건 공자 이후 전국시대 때부터.

후대의 유가에서 말하는 주나라도 실제 주나라는 아니다. 예를 들어 『주례』는 주나라의 명의를 빙자한 이상국가의 제도로서 구성된 것이고, 맹자정전제도 주나라의 법이 아니라 맹자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세금 제도였다. 당연히 공자가 말하는 주나라도 실제 주나라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공자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국가 질서를 의미한다. 맹자를 보면 맹자 본인이 "주나라의 제도는 많이 손실되어서 정확히 알 수 없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시경, 서경, 춘추 등의 경전도 어떤 확실한 원본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판본으로 계승되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맹자를 보면 서로 다른 판본의 이야기들을 가지고 논쟁을 벌이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후대에도 고대경전의 진위 여부를 가지고 논쟁을 자주 벌였다.

논어에서 공자는 시(詩)에 대해 "시 300편을 한 마디로 말하자면 '생각함에 사특함이 없다(詩三百、一言以蔽之思無邪)'는 것이다."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건 노래(詩)에서 표현하고 있는 생각이 삐뚤어진 데가 없다는 뜻이지, 사특한 내용을 추려냈다는 뜻이 아니다. 시가 본래 3,000여 편이었다가 300여 편으로 추려졌다는 표현은 매우 후대의 정통주의적인 발상이므로 공자 본인이 추렸다고 보는 건 억지다. 논어를 보면 공자는 항상 "옛날 자료가 손실되어서 자료 수집이 잘 안 된다"고 한탄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3,000여 편이나 되는 귀중한 자료를 자기 구미에 안 맞는다고 90%를 잘라낸다는 건 헛소리. 시경이라는 문헌 자체가 그렇게 거룩하고 올바른 문헌이 아니다. 현재 시경을 봐도 매우 에로틱한 내용이 많다. 애초에 시(詩)라는 건 거룩한 말씀 같은 게 아니라 그냥 동네 민요가 대부분이다. 동네민요를 정(正)과 사(邪)로 구분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유교에 대해서 아는 척 좀 하고 싶으면 1차 자료인 유교문헌부터 이해하고 썰을 풀자.

공자주나라 전성기의 이상적인 질서를 중심하여 패악질이 난무하는 춘추시대의 사회 질서의 재건을 시도했으며, 이를 위해 사(士)라고 불리는 계층을 교육하는 데 노력했다. 흔히 이 글자의 뜻은 선비로 알려져 있지만, 사는 주 대의 하층 귀족이었다가 춘추전국시대 들어 다양한 경로를 통해 유력 인사들이 유입되어 형성된 계층이었다. 그러나 시대의 무질서로 인해 이들 중에는 문적 교양이 전혀 갖추어지지 못한 인물들이 많았고, 공자는 이들을 교육해 바로잡으려 한 것.

단순한 부국강병이나 패도의 결과주의에 안주하지 않고 도덕적 가치를 구현하기 위한 덕목들을 규정하여 후에 유(儒)로 불리게 될 학문적인 집단을 구축했다. 공자는 춘추시대의 귀족사회에서 능력주의 전국시대로 이행하는 사회의 흐름에 맞추어 사회와 국정 경영을 위해 필요한 덕목과 실력을 교육하여, 학파에 따른 인재 육성과 등용을 처음으로 구체화하였다. 이러한 유가의 학문적인 성과는 유가뿐만 아니라 묵가, 법가 등 여러 유파의 형성이나 사상적 흐름에 영향을 미쳤다.

전국시대 말기에 유가는 정치 경영 이념으로 법가에 밀리게 되었고, 중국 통일 이후에는 유교와 법가가 뒤섞이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그러나 어쨌든 한나라의 국정 이념으로 채택됨으로써 다른 그 어떤 동양 사상보다 굳건히 중국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위진남북조시대에는 유교가 일시적으로 쇠락해 불교도교에게 자리를 많이 내주었고, 당나라 때까지도 사회의 중심적 지위는 불교도교에 비해 미약한 편이었으나, 이들 종교들도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유교적 통치질서를 뒤바꿔놓지는 못했다.

이후 당나라 후기부터 송나라 때까지 유교와 불교적 신비주의가 융합되는 과정에서 성리학이라는 유교의 재해석이 일어나 이후 명나라, 청나라, 조선 등에서 과거시험의 과목이 됨으로써 국가 이념으로 존속했다. 물론 중국에서는 양명학, 고증학 등이 대두되었으나, 이때도 과거 과목은 성리학이었다. 성리학은 일본베트남에도 유입되어 사상의 한 조류로 자리 잡았다.

19세기 서양의 침공과 근대의 충격으로 기존의 유교질서는 상당히 붕괴하고, 20세기 초반에는 탈유교 혹은 반유교적인 움직임이 크게 일어났으나, 현재에도 종법적 질서, 연공 중시, 상급자에 대한 복종, 조상 숭배, 가부장제 등과 같은 유교적인 관습과 정서는 사회에 계속해서 잔재로 남아 동아시아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나 현대 한국 사회에서 '유교'라고 하면 구시대의 악습을 모조리 뒤집어 쓴 이미지라서 인식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며, 유교 이념 자체보다는 변질된 유교적 전통이라는 파행적 현상 자체에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

유교는 단순히 개인적 철학일 뿐 아니라 국가제도와 법질서를 모두 포괄하기 때문에 적어도 동아시아의 한자문화권에서는 문명 그 자체나 다름없다. 한자의 기본어휘 중 상당수가 유교 경전인 사서오경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중국은 물론이고 한국, 베트남, 일본도 모두 한자를 사용하는 나라인데 그 중에서도 한국은 조선 시대의 영향으로 그 어떤 나라보다 유교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아들였다. 게다가 한중일 3국은 개화기 이후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면서 기존에 없던 서양의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기술 용어들의 대다수를 유교경전에서 따와서 번역하였다.

한국에서 유림은 고려말부터 정치세력화하여 조선왕조 500년을 지배한 세력이었으나 조선왕조 말부터 크게 쇠락하기 시작하면서 대원군 실각 이후에 정치세력으로서의 구실을 거의 잃었고 1919년 파리 장서 사건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영향력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현재 유교 종단 측에서는 자체집계 통계로 신자가 1,000만명에 달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실제 인구주택총조사의 종교통계를 보면 10만명 정도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것이 실제 유교의 위세를 나타내는 해석이 될 수는 없는데, 유교를 서양식의 종교 개념이 아닌 생활 사상이나 정치 철학, 순수 철학 등으로 파악하는 시각이 지배적이기 때문. 즉 애초에 사람들에게 이해되는 프레임 자체가 굉장히 다르다. 이는 불교도교[2]가 서양식의 종교 개념에 의해 빠르게 정의된 것과는 다른, 동양 사상 중에서도 특이한 경우다. 그리고 이러한 복합적인 성격 때문에 '나는 유학을 따르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대부분의 사람도 '유학적 삶의 형태'는 많이 따르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다만 이 경우는 유학 자체의 본질이나 학문적 성격관 거리가 멀고, 말 그대로 유학에서 파생된 부수적인 관습과 사고(소위 변질된 유학적 전통을 포함하는 관습이라는 이름의 악습)를 따른다고 보아야 한다.

2. 중국에서의 발전[편집]

2.1. 주나라의 종교[편집]

유교의 사상적인 기초는 공자가 이상화한 주공단으로서 상징되는, 주나라의 종교이자 종법질서다.

공자는 이를 주공이 만든 것으로 보았으며, 역사적으로 주나라의 종법 질서는 왕위 계승 분쟁 등을 해결하기 위하여 서서히 만들어졌다. 찬란한 문명을 가진 주나라는 다양한 문헌을 만들었는데, 이 가운데 유교에서 채택된 것이 바로 '삼경'으로서 이는 시(詩), 역(易), 서(書)이다.

삼경 역시 순수하게 주나라 만의 문헌은 아니며, 주나라 시기에 기반을 두고 춘추시대에 점진적으로 편찬된 것으로 보인다.

2.2. 춘추시대[편집]

유교는 다른 학파보다 더 중국의 이전 시대의 역사 전통을 보전하고 계승하려는 태도를 강하게 보였다. 이는 공자가 패자들이 날뛰는 춘추시대에 살면서 주나라의 이상적인 질서를 회복하려는 사상가였기 때문이다. 이 때 공자가 제시한 원칙이 바로 정명(正名)이었다. 그리고 공자 스스로는 춘추를 통해 주 귀족들의 파행적 행태를 지적하면서 자기 직분의 훼손을 지탄하고, 주 대에 형성된 천하 질서[3]의 수호를 시도했다. 예를 들어 왕이 제 역할을 못하거나 제후가 참람하면 지위를 깎아내려 기록하는 식이다.

이 정명 사상을 설명할 때 명분이라는 말을 사용해서 본래적 의미가 오히려 전달이 안 되는 측면이 있는데, 명분이라는 말을 그냥 '자신의 자리에 있으면서 다해야 할 원칙'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낫다[4]. 쉽게 말해서 왕은 왕으로서 신하를 의롭게 대하고, 신하는 신하로서 왕을 진심으로 보좌해야 한다는 것. 단순히 수직 관계적으로 닥치고 충성하라는 소리가 아니다. 왕이 불의를 자행하고, 신하가 사익에 눈이 멀어서 세상이 어지러워졌으니 똑바로 하라는 뜻이다. 아버지면 아버지답게, 아들이면 아들답게라는 말도 마찬가지 맥락이며, 그냥 아비에게 두들겨맞아도 복종하라는 수준의 소리가 아니다. 기존의 귀족 질서가 상명하달식의 질서에 가까웠다면 공자는 '위에서 똑바로 안 하면 그것도 당연히 지탄받아야 한다' 식의 의문을 제기하고 실천에 옮긴 것. (정작 지배 이데올로기가 되면서는 지배자의 권위를 공고화하는 쪽으로 변질되지만)

이러한 기본적인 정명 사상에 따라 '사람도 사람다워야 한다'는 기치를 내걸었고 이 '사람답다'는 말을 '인(仁)'이라고 하며, 이것이 사람에게 내재된 '도(道)'이다. 이 시점에서 유가는 인간의 차원을 넘어 온 세상을 운행하며 모든 것을 계속해서 바꾸어놓는 천도(天道)에서 제 역할을 찾는 도가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된다. 물론 유가에게도 천도를 지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5] 유가는 도가와는 달리 천도의 실현을 개인과 개인에게 주어진 직분에게서 찾는다. 초기 유가가 도가와 달리 신비주의를 거세하고 현실 학문으로 방향을 튼 것이 이 지점이다.

그런데 사람이 가져야 할 자기 직분은 개인 스스로가 만들 수 없고, 사회가 형성되어 자기 일을 나누어 받으면서 형성된다. 그렇기 때문에 유가는 자연히 인적인 관계를 중시하게 되고, 내적인 인(仁)을 외부로 표현하며 형성되는 제반 사회 관계의 통칭이 '예(禮)'이다. 흔히 예를 설명하면서 단순한 '예절, 에티켓'뿐만 아니라 유교 사회에서 형성되는 거의 모든 사회 활동을 포괄하게 된다는 설명이 많이 등장하는데, 크게 어려운 이유 때문이 아니라 인을 외부로 잘 실현하는 것 그 자체가 예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리고 이러한 이상상을 찾아내는 출구가 바로 과거로부터 전해지는 성인의 모범이고, 이를 모방하여 익혀나가는 것, 즉 학(學)이 또다른 유가의 축이다[6] 이를 통해 모든 사회 구성원이 자기 사회 직분에 맞추어 인과 예를 잘 실천하게 되면, 서로 다른 역할을 하고 있으면서 사회는 조화롭게 잘 운영되게 된다(和而不同).

어쨌건 이러한 유가의 이상을 잘 실현할 수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전통적인 표현으로 성인이라고 하고, 공자가 자신을 군자라고 칭하면서 군자라고도 하고, 맹자 대에 대인이라는 표현도 나타나고 뭐 기타 다양한 표현이 많지만, 유교를 따르는 이들의 정체성이 된 표현은 말 그대로 '유(儒)'이다[7]. 본래 유(儒)는 제사를 치르는 사회 신분을 의미하는 말인데, 주 대에 종묘를 비롯한 시조 제사 등의 여러 제사가 확립되면서 인문주의적이고 신분 질서에 입각한 제사가 보편화되었다. 이후 유가에서 이 개념을 받아들여 자신들을 규정하는 말로 정의하였고, 후대에 계속해서 전하게 되었다.

요약하자면 공자가 세운 유교의 기본 교리는 (유토피아인) 주나라의 천하 질서를 회복하고, 자신의 직분에 따라(正名) 사람다움(仁)을 실현함으로써 예(禮)를 회복하여, 서로 다른 역할을 수행하면서도 조화로운 사회(和而不同)를 구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김용옥 등을 중심으로 이 시대의 유가가 도가와 큰 차이를 두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의견이 있는데, 물론 선입견을 깨는데 이러한 비판이 중요하기는 하나 조심스럽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논어의 첫 구절부터가 "배우고 또 때가 날 때마다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不亦說乎?)"인 반면, 노자 48장에서는 "배움을 행하면 날마다 더해지고, 도를 행하면 날마다 덜어진다. 덜고 또 덜어내면 하는 것이 없는 것(무위)에 이른다. 하는 것이 없으면 하지 않는 것이 없다(爲學日益、爲道日損、損之又損、以至於無爲、無爲而無不爲)."고 했다. 애초에 노자 1장에서 "이름 지을 수 있는 이름은 항구적인 이름이 아니다(名可名、非常名)."고 하여 유가의 기본적인 정명 사상을 비판하고 있다[8].

2.3. 전국시대[편집]

전국시대는 특히 혼란한 시대를 바로잡고 인간이 해야 하는 도리를 퍼뜨리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던 시기이다. 대부분 학자들은 일생을 제후들을 찾아다니면서 설득하거나 제자를 양성하는 일에 쏟아부었다. 당시 시대에 데카당트해서 지배계층의 도덕관은 상당히 아스트랄한 편이기도 했다. 근친상간을 저지른 제나라의 군주 제양공 같은 사례가 대표적이다.

춘추시대에는 그나마 나았지만, 전국시대가 되면서 국가나 사상이나 여러모로 경쟁이 굉장히 치열했고, 이 과정에서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유교의 체계가 잡혔다. 사실 제자백가 상당수가 공자의 제자들과 연관된 경우가 많다. 이때 두각을 나타낸 인물 중 하나가 맹자인데, 사실 송나라 이전까지는 잘 조명받지 못했다.

맹자에 들어서면 시대 상황에 따라 더욱 날카로워진다. 맹자 시대에는 이미 주나라의 질서가 갈 데까지 간 상황이라, 주 천자를 중심으로 천하 질서를 회복하겠다는 의지는 보이지 않는다. 대신 맹자는 새로운 천자가 될 인물을 찾아다녔는데, 이를 주나라 대부터 전해지던 '천명(天命)' 이론을 통해 정당화한다. 옛날에는 공자춘추를 써서 왕과 제후들을 지적하는 것만으로 자극을 줄 수 있는 시대였다지만, 맹자 시대에는 그런 게 씨알도 안 먹히는 전국시대였으니, 아예 천도를 따르지 않는 군주나 제후는 천에 의해 갈려버린다(革命)는 게 맹자의 주장이다. 그리고 맹자의 시대에는 이제 새 천자가 나올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그나마 주나라 시기에 봉건된 제후들의 가문 혈통이 유지되고 있던 춘추시대와는 달리 전국시대에는 봉건 제후들의 가문이 단절되는 사태가 왕왕 벌어졌다. 본래 진(晉)의 신하였던 위(魏), 조(趙), 한(韓)의 삼진에 의한 진(晉)의 분할, 제나라 강씨(姜氏)의 신하였던 전씨(田氏)에 의한 제(齊)의 찬탈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 외 수없이 많은 소국이 병탄되어 아예 소멸해버렸고, 강력해진 공후(公侯)들은 감히 주나라 천자만이 자칭할 수 있었던 왕(王)을 칭하기 시작하여 각지에 왕이 난립하게 되었다. 주나라 왕실 자체마저도 분열과 대립하는 시대였으니, 주 천자의 권위는 커녕 현실 중국에 어떤 통합된 권위란 것이 존재하는 지도 불확실하게 보이게 된 것은 당연한 이치며, 이러한 현실에서 '혁명'을 주장한 것도 당연히 나타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천명은 세계 질서에 가깝다. 인격신으로 보는 시각은 현대 유학보다는 보다 고대 주나라 종교의 시각에 가깝다.[9] 그렇다고 백성들을 천이라고 보는 것은 오히려 동학에 가깝다. 물론 어느 정도 의인화되어 인격신적으로 서술되는 면모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맹자의 서술은 일관적으로 '천도를 거스르면 저절로 백성이 떠나가고, 저절로 왕조가 망하게 된다'는 개념에 의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격신보다는 일종의 법칙에 가까운 개념이다.

그러나 일반 인민들 사이에선 차별없는 사랑 즉 겸애(謙愛)를 주장하고 쓸데없는 전쟁을 반대한 묵가가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유가의 눈에는 3년상을 폐지하여 기본적인 인도를 저버리고 음악을 폐지하여 예악을 중시하던 공자의 기본을 뒤흔드는 묵가가 좋게 보일 리 없었고, 맹자양주와 함께 묵자를 실컷 비판하기도 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혁명 사상'만을 들어 맹자의 유학이 기존에 유가가 중시하던 격식을 완전히 저버리려 했다고 보는 것은 무리다.

그러나 맹자주자로 대표되는 송대 성리학 이전에는 유가 사상의 주류를 차지하지 못했다. 오히려 주자 이전엔 순자공자의 적통으로 인정받는 경향도 있었다. 순자는 인간은 타고나면서 탐욕을 타고났다는 성악설을 주창했으며, 따라서 군주가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여 예(禮)를 확립하여 인민을 교화시켜야 한다는 사상을 주장하여 결과적으로 전체주의를 옹호하였는데, 이는 후술하듯 군현제로 인해 군주권이 급격히 상승한 전국시대의 기풍을 탔기 때문이다. 순자는 후에 이사, 한비자 등을 가르쳐 법가에도 영향을 주었다. 다만 법가는 이미 기원전 4세기 경 존재한 사상으로, 기원전 3세기의 인물인 순자에 의해 만들어진 사상은 아니다.

2.4. 진한시대[편집]

전국시대 이후 유가는 당시 유력하게 대두되던 법가와 충돌했다. 전국시대에는 기존에 유가가 숭상하던 주의 질서가 한껏 파괴되고, 주의 질서에 의거한 신분제가 하극상에 의해 나날이 뒤집어지며, 한편으로 법가의 변법(變法)에 의해 새로운 제도가 들어섰다.

변법의 여러 내용 중에서도 두드러지는 것은 '봉건제에서 군현제로의 전환'이다. 이는 제후, 경, 대부 등의 중간 권력 계층이 사라지고 일원적 권력의 전국 직할 통치 시대가 왔음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서 법가는 세습적 봉건 제후들을 완전히 소거시키고, 그 자리에 철저히 법(法)에 의거해 국가 행정을 처리할 일종의 행정 관료를 채워 넣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 결과 신권은 하락하고 군권은 급속히 상승한다. 중국은 이를 통해 제국의 시대로 나아가지만, 지식인 계층의 역할을 강조하던 유가 입장에서 이는 사형 선고와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중국 최초의 통일 제국이자 완전한 군현제 국가를 이룩한 법가 제국 진(통일왕조)의 시대에 유학자들과 법가 국가가 분서갱유라는 충돌을 낳게 된 것은 진시황 개인의 폭정 문제가 아니라 차라리 필연이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급격한 제국 질서의 구축과 광대해진 영토로 인한 법가 통치의 비효율[10]로 인해 진은 멸망하고, 전한이 들어섰다. 초한전쟁 이후 무너진 권위를 다잡기 위해 한고조숙손통를 위시로 한 유학자들을 받아들여 유가를 통치이념에 받아들였고, 한무제 때 결정적으로 이를 굳히게 된다. 하지만 이미 역사학계에서 한이 한동안 진의 통치 체계를 계승했음은 잘 알려진 바이다. 실제로 흔히 유교가 지배적이었다고 알려져 있는 한무제 대, 아니 이후의 후한 시대까지 하더라도 법가의 유풍은 계속해서 강하게 남아 있었다.

한편 한 대에는 훈고학이 발전했다. 진시황의 분서갱유로 인해 많은 문헌이 파괴되고 전승이 끊어졌기 때문에, 필사본이나 암기를 통한 구전으로 퍼져있는 유교 경전을 복원하고자 한 것이다. 암송에 의해 정리된 경전을 금문경전, 필사본 및 분서당시 숨겨놓은 원본(글자체를 기준으로 한대와 진대의 경전을 구분)의 발굴로 인해 정리된 것이 훈고경전이었다. 이 둘은 시대의 주류를 차지하기 위해 싸웠으나 당시에 주류를 차지한 것은 금문이었다. 그러나 후의 대세가 된 것은 고문이며, 금문경전은 『춘추』를 제외하고 모두 소실되어 전하지 않는다. 더 자세한 것은 고문학금문학을 참조.[11]

훈고학은 사실상 동양권 서지학의 뿌리라고 인식되는 학문이며, 당나라 시대까지 이어졌다. 고증학과 유사점이 많아, 서지적 연구가 중시되는 훈고학고증학을 한데 묶어서 '한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편 사회적으로 법제 등의 차원에서는 진을 많이 계승했으나, 한 초의 과진론(진의 과실을 논하는 담론)이 활발히 전개되면서 실패의 경험을 갖고 있는 법가 통치의 대안으로 유가적인 통치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특히 법에 의한 철저한 지방 통제에 대해 거부감을 느꼈던 호족 세력이 유학을 학습하고 향거리선제 등을 통해 중앙으로 진출하면서는 황제권 - 법가와 신권 - 유가의 대립이 두드러진다. 다만 예외적으로 왕망은 오히려 근본주의적인 유교를 도입하여 호족을 억누르려 했으나 철저히 실패하고, 호족의 지지를 받으며 들어선 후한 정권은 이들을 거스르는 통치를 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역사를 거치며 법가적 통치에 유가적 질서가 포용되는 상황이 한 무제동중서의 유교 확립을 통해서 서서히 유가적 명분이 법가적 도구를 통해 실현되는 상황으로 전환된다. 특히 전한 시대 중기를 넘어서면서 유가는 기(氣) 철학, 천재지변을 왕의 통치를 나타내는 지표로 파악하는 천인상관설(재이설), 음양오행설 등을 받아들여 사상의 폭을 넓혀나간다.

2.5. 위진남북조 시대와 당송 시대[편집]

이민족의 중국 유입과 혼란한 사회상, 그리고 이를 통제하기 위한 막부 체제의 형성 등으로 정적인 사회에서 많이 받아들여진 유교는 쇠퇴하였다. 대신 그 자리는 불교도교가 차지했으며, 화엄종, 천태종, 현학 등의 철학적 발전은 후에 성리학에서도 받아들일 정도로 체계적으로 발전하였다.

당대에도 불교도교는 황실의 지원을 받으며 크게 성장하였으나, 안사의 난 이후에는 외래 이념에 대한 대대적인 거부감으로 인해 불교가 회창폐불 등의 사상 탄압을 당하고, 노자의 본성이 이(李) 씨라는 점과 당의 국성이 이(李) 씨라는 점에서 도교를 많이 지원해주었던 당 황실의 권위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로 인해 상대적으로 유교가 두드러지게 되었는데, 고유 이념의 복원과 중국 고문의 계승 등을 주장한 한유, 이고 등의 고문 운동이 유교의 부활에 불씨를 지폈다.

이후 태극, 이[12] 등의 개념을 받아들여 기(氣)의 개념과 결합시키는 성리학의 조류가 당 후기부터 태동하기 시작했으며, 송나라 대의 주희(후에 주자라 불림)가 종합하여 성리학을 완성했다(이 때문에 성리학은 '주자학'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외에 성리학은 정주학,[13] 신유학이라고도 불린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교의 모습(이기론, 심성론)은 이때 다 만들어졌다. 이전까지의 유교는 현실적 도덕과 삶의 규범을 제시하는 매우 상식적인 가르침이었기 때문에 형이상학적인 영역은 별 관심이 없었으나, 이것으로는 사후세계나 인간의 지각, 영혼, 형이상, 세계관의 문제에 대해 조리 있게 설명한 불교도교에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이었기에 그네들의 방대한 우주론 및 개인적인 심성론을 흡수하면서 크게 발전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결국 성리학은 기존의 소박한 유교에 불교의 세계관과 도교의 음양사상에 영향을 받아 우주론적 해석을 적용한 것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견강부회(牽强附會)적인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주자는 사서집주를 만들면서 사실상 사서를 자기 스타일로 변형시켰다. 공자유교주자의 성리학이 같은 뿌리를 갖고 있음에도 일정한 간극을 두고 보아야 하는 점은 이 때문이며, 괴력난신을 말하지 않았던 유교가 조상 숭배 현상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갖은 신비적 요소를 도입한 것도 이 때문이다.

원나라 대에는 일시적으로 유학자들이 천대받으면서 쇠퇴하였으나[14] 원 말에는 중단되었던 과거를 재시행하는 등 성리학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성리학이 한반도로 유입되기 시작한 시기도 이 시기로, 충선왕이 원의 유학자들과 교류하고 안향원나라에 유학을 가면서 들여온 것이다. 이후 성리학사대부 계층의 형성에 영향을 미치고 이들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참고로 이 문서에서는 명청시대 단락에서 성리학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데, 성리학에 기반을 두고 일어난 명청시대 유학을 성리학과 대비하여 설명함으로 보다 손쉽게 이해하기 위함이다.

2.6. 명청시대[편집]

흔히 알려진 것과 달리, 명청시대에도 관학은 여전히 성리학이었다. 다만 과거가 장기화되고 명청시대의 급격한 인구 증가로 경쟁률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시험에서 합격할 수 있는 양식이 완전히 고정되었는데 이를 팔고문(八股文)이라고 한다. 이를 통해 제국의 이념은 한층 통일되었고 신사 계층이 확고해졌으나, 과거의 형식화를 불러오는 폐해를 낳았다.

명나라 후기에는 사회 혼란이 심해지면서 각지에서 자체적인 개혁론이 일어나는데, 왕양명으로 알려진 왕수인이 특히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 왕수인향약과 십가패법 보급을 통해 혼란스러워진 사회에 대한 통제와 질서의 회복을 꾀하였다. 그는 심학의 대가라고 할 수 있다. 흔히 양명학으로도 통칭되는데, 이는 왕수인의 이름에서 따온 물건으로, 주자의 이름을 따서 이름지은 주자학과 동일한 맥락하에 이름지어진 것이다.

양명학은 지행합일, 심즉리설 등을 주요 사상으로 삼았으며, 그에 따르면, 누구나 마음 안에 세상의 이치가 있음을 깨닫고 이를 실천하려 노력하면 성인군자의 도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 부분은 기존의 성리학과 별 차이가 없다. 기존의 성리학 역시 사람 안에는 '리', 즉 세상의 이치가 있음을 설파했기 때문이다. 양명학주자학의 차이라면 주자학은 '리'를 형이상으로 치고 '기', 그러니까 대강 뭉뚱그려 말하면 사람의 기질이나 마음을 형이하로 간주했다. 이 형이상과 형이하의 사이에 선악의 가치 판단이 들어가는데, 형이상 쪽은 순전한 선이며, 형이하는 선일 수도 있고, 선이 아닐 수도 있다. 즉 재언하면, '리'는 형이상학적인 이치로 절대선이며 개개인에게 이미 내재되어 있다 사람이 악하고 방종해지는 이유는 '리'라는 불변의 보석이 진흙 속에 묻힌 것처럼 형이하학적이고 동요되기 쉬운 기질이나 마음에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이 선해지고 현명해지기 위해서는 자신 안에 내재된 '리'를 밝혀내야 한다.

주자는 이를 위한 수련방법으로 격물치지를 천명했다. 물론 주자가 처음 한 말은 아니고 경전에 있는 말이다. 즉 악의적으로 말하면 주자가 일종의 견강부회를 했다고 할 수도 있다. 격물, 사물의 이치를 궁리해서, 치지, 깨달음에 다다른다는 얘기이다.[15]

왜 이게 가능한가? 주자에게 있어 '리'라는 것은 불변하는 천성적 선으로, 사람뿐 아니라 온갖 사물에 다 깃들어 있는 일종의 절대이치이기 때문이다. '리'가 나무에 깃들어 나무의 '리'가 발현되어 나무라는 실재 사물, 그러니까 기로 형성이 되고, 기왓장의 '리'는 기왓장에 깃들어 기왓장이라는 실재 사물이 나타나는 원리이며, 인간에게도 마찬가지로 인간의 '리'가 깃들어 하나의 인간 개체가 나타나게 된다. 그런데 이 '리'라는 건 조약돌에 깃들어 있는 '리'도, 풀때기에 깃들어 있는 '리'도, 인간에게 깃들어 있는 리도 다 똑같은 '리'다. 모든 사물에 깃든 '리'가 똑같지만 사물이 제각기 다른 이유는 그 '리'가 형이하학의 기로. 구체적인 사물로 발현되는 방식 또한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즉 각각의 사물에 깃들어 있는 '리'는 모두 동일하다. 여러 사물들에 차이가 있는 건 '리'가 발현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같은 종류라 할지라도 개체마다 성격에 차이가 있는 건 그 개체마다의 '기'가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리'는 천지만물에 깃들어 있으므로 학문을 이루기 위해 하나의 사물을 깊이 살펴서, 그러니까 격물함으로, 그 사물에 깃들어 있는 '리'를 파악한다. 한 사물의 '리'를 파악함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앞마당의 대나무의 '리'를 파악하고, 하늘에 떠가는 구름의 '리'를 파악하고, 하여튼 이런저런 '리'를 다 파악하면 어느새 치지에 다다르게 되는 것이다! 이 때 결코 서두르면 될 것도 안 되고, 될때까지 차근차근 모든 사물의 '리'를 하나하나 파악해야 된다!

왕양명의 대답은 간단하다. "그런 요식적 행위는 뜬구름 잡는 짓이다. 내가 우리집 앞마당의 대나무를 몇 달 몇 년을 보고 있었는데 '리'가 파악되기는커녕 머리만 아프고 우울증만 더해졌을 뿐. 사물을 파악하기 전에 자기 자신의 내면이나 제대로 파악하고, 밑도 끝도 없이 형이상학을 궁구할 시간이면 실천적인 행동에 나서라! "

주자의 성즉리를 왕양명의 심즉리와 대비시켜 볼 때 그 요지는, 리, 그러니까 하늘의 이치는 형이상학적인 성이며 형이하학적이고 갈대와 같은 우리의 마음과는 다른 물건이란 얘기다. 반면 왕양명은 그냥 우리 마음인 심이 즉 하늘의 이치인 '리'이니 양지(良知)하기만, 그러니까 우리의 마음을 그것을 올바르게 알기만 하면 된다. 이것이 치양지(致良知), 양지에 다다름이다.

그 수련법은 다르나, 똑같이 마음 속에 그 이치가 구비되어 있다는 점에 관해선 둘이 같아 보일지 모른다. 사실 크게 보면 별 차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세히 구별해 보면, 주자는 우리의 마음을 기로 여기고 절대선이자 이치라 할 수 있는 리와 분리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해 마음 속에 또 내재되어 있는 성을 '리'로 여기고 구체적 현상인 마음 자체에 대해선 경계했다. 왕양명은 구체적 사물인 '기'가 있다면 그 이치인 리가 없을 수는 없지만 구체적 사물인 '기' 없이는 이치인 리가 나타날 길이 없으니 리가 형이상의 세계에 고고하게 실존한다는 건 뜬구름 잡는 얘기이고 사실상 기와 리는 다를 바가 없으며 그러므로 기의 발현인 우리의 마음이 곧 리라 할 수 있다. 또한 리라 할 수 있는 우리의 마음을 제쳐놓고 외물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논해 봤자 우리의 마음과 관계가 없는 상태에서의 외물이란 것도 뜬구름 잡는 얘기다.[16]

왕양명은 제자들에게도 항상 외물을 살피는 것과 같은 개수작은 관두고 니 마음이 곧 리니까 그것을 잘 들여다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설파했다. 즉 치지, 먼저 깨닫고 나서 격물하라고 했는데 격물은 주자의 해석과 달리 했다. 주자는 격물을 사물을 바라보고 연구하라는 뜻으로 해석했으나 왕양명은 격물의 격자를 바르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물자를 사물이 아니라 활동, 사건 등으로 해석하였으니 간단히 말하면 일 잘하라는 뜻이다. 즉 왕양명이 논한 치지격물은 격물치지, 거경궁리나 독서 등을 중시하는 성리학과는 달리 수행자에게 그 행동을 촉구하는 바가 있다.

여기서 성리학과 양명학의 신분관에 차이가 생긴다. 성리학은 격물치지와 성즉리의 실행방법으로 선지후행(先知後行)을 내놓았다. 선지후행 자체는 도덕적으로 행동하기에 앞서 도덕상의 사리를 완전히 알아야만 한다는 것인데, 여기서 결론은 도덕(≒정치)의 주체가 성리학을 배우는 귀족계층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양명학은 심즉리와 치양지의 실행방법으로 지행합일(知行合一)을 들었다. 성리학이 말하는 것처럼 하늘의 주신 본성(혹은 천명)이 리가 아니라, 마음이 곧 리이기 때문에 도덕적인 행동을 함에 앞서서 도덕을 배울 필요는 없고, 행위는 양지를 실현시키는 존재로만 보는 것이다. 결국엔 도덕의 주체가 신분을 가리지 않고 평등하다는 것.

결국엔 양명학은 신분제의 붕괴에 기여했다는 의미를 가졌다. 그 후엔 급진 세력과 온건 세력으로 나누어져 사회상에 대한 담론을 논하고 서민 계층에게까지 스며드는 등 명 후기 번성하였으나 명의 멸망 이후에는 쇠퇴하였다. 따라서 청조에는 빛을 보지 못하고 잊혀졌으나 신해혁명이 벌어진 직후에는 육왕학이라는 이름으로 잠시 부활하여 공양학과 함께 전통 유교 시대의 끝을 장식하기도 하였다. "최후의 유학자"라고 불리는 양수명이 육왕학파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1988년 사망)

명나라 멸망 이후 양명학이 쇠퇴한 것은 양명학이라는 이단 학문이 퍼진 것이 명나라의 약체화를 불러왔다는 해석이 널리 퍼졌기 때문이다. 양명학은 말하자면 어느정도 인기를 얻은 일종의 이단이었던 셈이었는데, 이는 심학이 흔히 양명학이라고 불리는 것과 관련이 깊다. 성리학에서는 정호, 정이 형제나 주돈이 등 주희 이전의 고명한 사상가들도 많았으며, 불교가 위태롭고 유교가 흥성하려는 시절에 나타난 성리학과 큰 상관이 없는 유학자들도 재빨리 성리학의 계보에 갖다 붙였다. 주자도 당대 자신과 대립하던 심학 계열의 거두 육상산이 죽자 그를 조문하고 나서 고자가 죽었다면서[17] 강렬한 오럴 어택을 가했다. 더구나 왕양명의 후계자들 역시 사상적으로는 변변치가 못해 불교나 도교의 논설을 끌어다 쓰거나 유불도 일치점 따위의 학설을 논했으니 당시엔 핫할지 몰라도 결국에는 이단이란 공격을 받기 마련이었다. 더군다나 왕양명의 학문적 업적 역시 주자에 비해 밀렸다. 주자는 당시까지의 유교사상을 거의 집대성해서 자신의 철학사상을 이루었으며 온갖 경전에 대한 주석을 다는 등 업적이 다대했으나 왕양명은 그에 미치지 못했다. 게다가 청에서 양명학자가 어느정도 관리로 뽑혔지만 주로 성리학자가 뽑혔으며, 그 양명학도 고증학에 밀려 쇠퇴하였다.

또한 청대에 양명학이 쇠퇴한 이유 중의 핵심은 청나라가 이민족에 의해 세워졌다는 약점에서 비롯한 측면에 있다. 이민족에 의해 세워진 왕조라는 이유에서 정통성에서 약점을 잡히지 않기 위해서 한족보다도 더 굳건한 전통파 유교에 집착해던 것이다. 청나라는 왕조 초기부터 정통 주자학을 강조하며 청나라 황실은 유교의 수호자 역할을 자임하였다. "이민족이건 한족이건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중화문명의 핵심인 유교 정신에 누가 더 가깝냐 만주족이 세운 왕조이긴 하지만 한족보다도 훨씬 유교와 학문에 밝으면 우리야 말로 중화문명의 계승자가 될 수 있다"는 논리다. 따라서 청나라에서는 양명학과 같이 자유로운 해석을 허용하는 학문을 이단으로 탄압하였던 것이다.

청나라 대에는 정부에서 문자옥 등으로 유학자들을 탄압하고 정치에 대한 담론을 가로막으면서 자유로운 학설 연구가 위축되자 고대 경전을 다시 연구하여 고증하는 학문이 발달하게 된다. 극단적이 되면, 고대의 기록을 깡그리 부정해버리는 의고학파로 이어지게 된다. 양명학이 논리적인 측면에서 성리학을 공격했다면, 고증학은 더욱 근본적인 면에서 성리학의 각을 떳다. 간단히 말하면 "너네들이 공자의 말을 근거로 그런 주장을 하는데, 공자가 정말 그런 말을 한 적이 있기나 할까?"

이기론의 성리학과 심즉리설의 양명학의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인 면에 집착한다는 점을 공격하며, 고전을 꼼꼼이 연구하여 '실사구시'와 '경세치용'를 구현하고자 한 학문이다. 실사구시, 경세치용이라는 측면은 조선 후기 실학에 영향을 주었다. 특히 근기학파는 경세치용을 기치로 내세워 많은 현실 개혁안을 내놓았다.

하지만 고전의 철저한 검증이라는 측면은 고전의 검증에만 매달릴 경우 현실과는 동떨어진다는 모순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청조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이런 문제점이 부각된다. 이것은 고증학이 실용성을 구현하려 했다는 데에 반해, 한편으론 현실과 동떨어졌다는 지적이 공존하는 이유라 할 수 있겠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중국이 유학을 관학 삼은지 2000년이 넘었고 그 기간 동안 닦아진 유교의 헤게모니가 보통 공고한 것이 아니었다. 중국에서 정책을 펴거나 사상을 주장하려면 옛 성인의 어록에서 그 근거를 채집할 수밖에 없었기에 실사구시나 경세치용을 주장하면서도 성리학에게 대항하기 위해선 결국 주자보다 끗발 좋은 성현의 말씀을 찾아 옛 경전과 경전의 업데이트 기록을 뒤적거릴 수밖에 없고 그러자니 또 현실과는 자연히 멀어지는 모순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청 후기에는 드디어 유학의 마지막 흐름이라 할 수 있는 공양학이 등장했다. 청 대의 고증학이 형식에 치우치며 고증에만 치빠져 현실과 동떨어지자 이를 비판하며 등장했으나, 공양학이 등장하게 된 가장 커다란 계기는 서양 "오랑캐"들의 침공일 것이다. 이제껏 중국이 수많은 오랑캐들의 침략을 받았고, 현재 청 왕조도 오랑캐 왕조고, 오랑캐가 힘이 강하다면 질 수도 있다. 하지만 서양 오랑캐들의 침략은 이제까지와는 본질적으로 달랐던 것이, 지금까지는 설사 창칼로는 지더라도 기술 문물로 미개한 오랑캐들을 압도한 이후 다시 새로운 정신 승리 체계를 짜내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서양 오랑캐들은 기술문명은 중화문명의 기술문명을 압도했고, 그것을 따라잡으려는 노력이 사상적인 면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말이 기술문명에 대한 선망이었지, 실질은 압도적 군사력에 대한 열등감과 다른 말이 아니었다. 이는 우리가 잘 아는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개항기의 비극적 역사이다. 이 맥락에서 조금더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기술문명의 추적이 생사의 문제가 되었으니, 자극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강력한 기술 문명의 기원으로서 서양 사상에 다가가려는 노력이 일어났다. 점점더 제국주의 압박은 강해지기만 하여왔고, 중국인들 스스로 모든 방면에서 뒤떨어진 오랑캐로 스스로를 폄하하는 중국 역사상 초유의 사태에 이르렀다.

이렇게 기존 사회가 뿌리째 흔들리자, 기존 사회의 이념이었던 성리학적 이치의 사회적 효용이 크게 공격당하게 된다. 이에 공양학파는 성리학과 같은 기존 학설들을 과감하고도 거부한 후, 유교의 뿌리인 공자의 흔적을 더듬어 '춘추공양전'을 더듬어냈다. 그들은 춘추공양전의 해석을 중심으로 학설을 수립, 발전 사관을 제시하여 변법자강 운동 당시 캉 유웨이량치차오의 사상에 영향을 끼쳤다.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것 같은 변혁의 시대가 도래했지만, 공양학파의 시절까지도 유교의 거대한 그림자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 힘들었을 만큼 유교는 중국 사상의 근간이었다. 중세의 신학에 비견할 수 있다.

이들에게 반대해서 '중학위체, 서학위용'을 제시한 자강파 장지동의 사상이 중국과 마찬가지로 격변의 시대를 겪고 있던 조선에게도 지침이 되었다. 동도서기론이 이 계통이다. 그런데 '중학위체, 서학위용'은 사실 조리가 맞지 않았다. 중국의 철학에서 사용되는 체와 용의 개념은 단일한 실재의 상호 관련된 측면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적인 가치에 우선성을 부여하고 서양의 학문을 단순한 도구라고 헐뜯을 수 있게 해주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널리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유교의 변양은 사회변혁을 온전히 감당해낼 역량을 지니지는 못했다. 공양학자들이 사회의 근간 사상을 새롭게 발기해 보려고 고심하는 사이, 서구의 사상은 급속도로 들어왔다. 중국의 서양학자들은 공양학자들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나날이 더욱 격렬하고 더욱 빠르게 '문명국'이 '후진국'을 점령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제국주의적 사회진화론'을 전파했다. 또한 실증으로 이룩한 과학과 논리술에 바탕한 철학이야 말로 유일한 대안인 것처럼 보였다. 이것은 중국만의 상황이 아니라, 일본에서는 더욱 주효했다.

이러한 상황의 영향은 과학기술뿐 아니라 정신문명에도 해당한다. 그 나름대로 복잡한 전개가 있지만 공산혁명도 서구 사상의 전파의 좋은 예시가 될 수 있다. 결국 젊은 시절 공양학파였던 캉유웨이나 량치차오 같은 거목들마저 유교와 멀어지면서 유교가 국가의 기반 이념으로 존재하던 역사는 실질적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그러나 제국주의를 벗어난 지금 동양에서는 유교를 비롯한 동양의 사상들을 재독하기도 한다. 서구의 문명사 사상사에 대한 이른바 유럽중심주의적 함몰에서 벗어나는 주요한 실마리가 될 수도 있다는 사고에서이다.

3. 한국에서의 발전[편집]

3.1. 조선 중기 이전[편집]

한반도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유학의 기본 개념이 수용되었으나, 관학 정도고 백성들 사이에서는 불교만큼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과거 제도, 신라독서삼품과, 시조 등을 보면 귀족들의 공부용 혹은 문학적 유희 용도의 학문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유학자들의 꾸준한 노력 덕분에 백성들에게도 서서히 유교 사상의 비중이 높아지며 조선이 건국될 무렵에는 백성들도 상당히 많은 영향을 받게 된다.

한편으로 고려 중기에는 최충 등에 의한 사립 학교의 건립, 그리고 이에 맞서기 위한 정부 차원의 국자감 지원과 도서관 성립 등으로 문생들의 수효는 증가했으며, 향교의 건립도 이루어졌다.

무신정변으로 한때 문신들이 몰살당하면서 타격을 입기는 했지만 곧 이들이 없으면 국가운영 자체가 불가능해진다는 것을 깨달은 무신 집정자들에 의해 등용되거나 무신 유력가문과 혼인동맹을 통해 예전의 세력을 회복한다.[18]

최우가 등용한 사대부들은 신진사대부들이 아니며 이들은 최충헌 사후 잠시동안의 권력 공백기간 동안 최우에게 반기를 든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최우가 등용한 세력이었다.[19]

이들은 어디까지나 최씨 무신정권의 옹호하에 형성된 집단이었으므로 김준의 쿠데타로 인해 최씨정권이 붕괴하면서 엄청난 타격을 입었고 무신정권의 붕괴와 함께 원 간섭기가 시작되어 대부분 몰락하고 일부는 권문세족이 되었다.

그후 충선왕이 원나라로 나포되었을 때, 북경에서 만권당을 개설한 후 안향에게 파견 명령을 내린다. 이 안향에 의해 성리학이 수입되어 최씨정권때와는 다른 사대부 계층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공민왕의 사회 재건 시책에 따라 이색, 정몽주 등은 성균관의 재정비와 각지에서 향교의 재건이 이루어졌으나[20][21] 정작 이들은 공민왕이 결국 실패하여 완전히 멘붕해버려 그야말로 몰락하기 일보직전인 상황에서도 공민왕에게 도움을 주기는커녕, 이를 조롱하였을 뿐이다.[22]

공민왕이 살해 당한 후, 이인임, 염흥방, 임견미등에 의해 잠시동안 세력이 약화되어 있었으나 이때 우왕의 밀명을 받은 최영, 이성계등에 의해 이들이 숙청되었고 최영에 의한 신군부 정권이 들어선다.[23]

하지만 당시 신진사대부들은 이러한 정국을 두고볼수가 없었던게 아무리 최영이 권력에 욕심이 없는 사람이었다고 해도 일단은 정국을 주도하는 정치군인이 되어버린데다가 불과 백년도 안된 시점에 무신정권이라는 악몽을 경험한 그들로서는 최영의 집권을 절대로 묵과할수가 없었고 결국 그들이 찾아낸 것은 또 다른 신군부의 한 축인 이성계였다.[24]

마침내 위화도 회군을 통해 최영 정권이 붕괴되고 이성계의 신군부가 들어서게 되었으나 여기서 또 이들의 분열이 이루어지는데 고려라는 체제를 유지하면서 성리학의 국가를 만들어 나갈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성계를 그 매개채로 삼자고 주장한 정몽주를 위시한 신진사대부와 고려 대신에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여 성리학 국가를 만들어 나가자고 주장한 정도전의 신진사대부로 분열되어 버렸고 결국 승리한 쪽은 정도전의 신진사대부 세력.[25]

정도전, 조준, 남은 등의 신진사대부는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설하면서 국가 이념으로 성리학을 채택했고, 전국의 부, 목, 군, 현마다 1개의 향교를 건설하여 유교 이념의 전국적인 보급을 꾀했다. 독자적인 철학의 발전은 여전히 미미했으나, 전국에 양반 계층이 자리 잡은 것은 후대 성리학을 지배이념으로 강고히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이전에 천 년 동안 한반도의 주요한 국가적 이념이었던 불교는 강력한 숭유억불 정책으로, 국가적 이념으로서는 막대한 타격을 받았다.[26]

다만 조선 초기의 성리학은 그야말로 정치의 수단이었고, 그 자체를 목적으로 전도되지는 않았다. 유교적 제도를 기록한 '주례'를 이념적 기반으로 삼았다[27]. 성리학의 생활화(소학, 주자가례)는 초기에는 양반 가문에서만 한정되었다. 그 외에는 자주적 성향을 띄어 단군을 숭배하고 부국강병을 꾀하는 등, 이때 관학파들은 조선 초기의 문물제도 정비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 정도전이 불교를 혐오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고위층 중에서도 개인적으로는 불교를 멀리하지 않으려 한 인물들도 있는데 이성계의 최측근 중 무학대사가 있었고 세종[28]이나 세조도 그들 개인적으로는 독실한 불교 신자였을 정도로, 그리고 세종의 형 효령대군처럼 왕실의 종친이 기꺼이 승려가 되어 출가하는 사례가 나올 정도로 (효령대군은 승려가 된 적이 없다. 해당 문서 참조.) 불교를 완전히 뿌리뽑을 기세로 탄압하기만 한 것은 아니고 나름대로 융통성 있는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며 서로의 부족한 면을 메꾸기도 했다. 물리적 통치술은 유교, 정신적 수양은 불교라는 식으로.

여기서 정몽주, 길재 등의 온건 사대부들은 정계 주류에서 쫓겨나가, 사림파를 현성하게 되었다. 다만 이때 사림파들은 성종 이후에서야 본격적으로 정계에 진출했었고, 그 이전엔 아주 소수만 등용되었다.

3.2. 조선 중기[편집]

사대부 계층이 세운 조선에 이르러 성리학이 지배하게 되었고, 관학파(세조 이후로 훈구파)와 사림파의 정쟁 끝에 선조 시기때 훈구파 잔여세력이 사림파에 흡수되면서[29], 사림파의 세상이 되었다.

이는 간단히 말하자면 이데올로기로서의 우열보다는 쪽수에서 밀린 것이다. 관학파는 원래 기존 양반가문이나 양인계급에서 과거→성균관, 집현전 테크를 탔기 때문에 그 수가 한정되어 있지만, 사림파는 서원에서 능력있는 재목이다 싶으면 무한대로 뽑아올 수 있기 때문. 게다가 훈구파의 부정부패, 방납과 대농장의 폐단 탓도 있다.

성종 때부터 사림파가 등용되기 시작하고, 중종때에 들어 반정공신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해 조광조가 등용되었다. 조광조는 사림파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도학정치(道學政治)[30]를 펼쳤는데, 그 정도가 너무나 강경했으며, 독선적이고 부패하였다. 뇌물 비리는 없었지만 현량과의 공정성은 0에 수렴했으며, 유능하고 청렴해도 훈구파였으면 조광조 일파가 삼사를 동원해 파면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조광조는 이러한 부정부패를 군자-소인론으로 어물쩡 합리화해버렸다. 결국 훈구파는 물론이고, 중종에게마저 미움을 사 조광조 일파는 기묘사화로 제거되고 말았다. 이러한 조광조의 죽음은 모든 사림파들에게 화두를 던져주었고, 그것이 이기론의 발달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여기서 결국 이기론의 학문적 해석 차이로 퇴계학파와 율곡학파로 나뉘게 된다.

국사를 배울 때, 주리론이니 주기론이니 하는 말로 알려진 경우가 많은데. 원래 성리학은 퇴계학파부터 율곡학파까지 전부 주리론이다. 성리학 자체가 리를 중요시 하는 학문이기 때문. 하지만 여기서 기를 천시할 것인가, 기의 중요성도 인정할 것인가에 따라 주리론, 주기론으로 나뉘게 된다. 이는 한국 고유의 이기론 연구이자 성리학의 형성으로, 주자도 리와 기의 발동을 자세히 설명하지는 못했다.

퇴계학파는 흔히 주리론적 경향으로 알려진 것으로, 이황조식을 한 데 묶기도 하지만, 이 둘은 차이가 있다. 조식은 좀 더 불교적 성향이 강하며, 노장사상까지 포용했기 때문에 딱히 성리학자도 아니였다. 이황은 주자대전을 최초로 읽은 인물. 사실상 성리학이 제대로 자리잡은 이황 때부터다. 영남지방을 중심이 되며, 동인→남인 테크를 탄다.

퇴계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제시했는데, 사실 성리학적으로도 매우 이상한 주장이다. 원래 성리학에서 리(理)는 발동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 그러나 퇴계는 인간의 순선한 도덕성이 곧바로 발현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싶었기 때문에 주위의 논란을 무릅쓰고 이 주장을 밀어붙였다.

퇴계의 말에 따르자면 리는 정신과 관념을 의미하여, 사단[31]으로 표현된 절대 선이며, 기는 환경과 기질을 의미하여, 칠정[32]으로 이루어진 가선가악(可善可惡)한 것이기도 하다. (사단칠정논변)여기서 적절한 학문 수행으로 리로써 기를 누르고 도덕적인 생활과 지혜를 얻을 수 있다는 말. 예를 들어 퇴계는 조광조의 죽음을, 아직 조광조가 학문이 미숙하고 성정을 제대로 닦지 못했기 때문에, 말인 즉슨 리로써 기를 못눌러 자주 어그로를 끌다 죽었다고 까기도 했다.

이러한 강렬한 도덕주의는 남인으로 하여금 근왕주의적인 성향을 띄게 해주었다. 신분이 높을수록 리가 더 높다는 논리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성향은 예송논쟁에서 보여주었고, 후에는 의병운동이나 위정척사 운동의 주축이 되었으며, 이 계열에서 그리스도교가 수용되기도 한다. 리의 주체가 왕 대신에 하느님으로 대체된 것.

그리고 이 계열에서 일본 성리학에 영향을 미쳤는데. 임진왜란의 관료이자 의병장이었던 강항이 그 주인공이다. 강항은 이황의 제자 강준의 동생으로, 자기 형에게 성리학을 배웠으므로 엄연히 퇴계학파의 일원이라 할 수 있겠다. 그는 의병장으로 왜군과 싸우다 포로로 잡혀, 쿄토로 끌려가서 승려와 학자들에게 이황학파 계열 성리학을 전파하였다. 강항의 대표적인 제자가 일본 유학의 시조인 후지와라 세이카[33]. 세이카의 제자 하야시 라잔[34] 이후로 퇴계학파가 도쿠가와 막부의 주류 학문이 되었는데, 퇴계학파 특유의 근왕주의가 쇼군의 통치에 도움이 되었기에 통신사로 율곡학파의 학문이 전달되어도 주류 자리에서 놓치지 않았다. 다만 결국 퇴계학파의 근왕주의는 메이지 유신의 사상적 기반이 되어 덴노 중심의 통일국가 체제로 변하게 하였다. 근왕주의의 주체가 덴노를 받드는 쇼군이 아닌 덴노 그 자체가 된 것.

율곡학파는 주기론으로 알려져 있는 학파로, 기대승을 거쳐 이이로 대표되는 기호지방(경기도와 충청도를 가리키는 말) 중심으로 전개된 학파. 기대승은 퇴계의 학설에 반대하여 퇴계와 논쟁을 벌인 학자다. 이후 율곡 이이가 퇴계를 비판하면서 기발리승(氣發理乘)을 주장한다. 기만 발동하고 리는 기에 올라타기만 한다는 것. 따라서 순선한 마음이 따로 발동되는 게 아니라, 잘 발동된 감정이 순선한 마음이라는 주장이 된다. 그리고 주자의 이동기이설(理同氣異說)을 계승하여 이통기국(理通氣局)을 주장하는데, 이는 모두에게 통용되는 보편적 근원이며, 기는 국한된다는 말이다. 이러한 율곡학파는 서인 → 노론으로 테크를 탄다.

기의 중요성을 인정한 율곡학파는 환경과 제도의 개선을 중요시 여겨, 민생안정에 중요성을 설파했었다. 대표적인 예로 이이의 대동수미법과 십만양병설. 다만 이러한 민생안정론은 북벌론에서 제대로 악용하기도 했었다. 대표적으로 군사력 갖추고 북벌을 하려 한다면 민생이 파탄난다고 반대한 것이라든가. 실상은 서인들이 군권을 장악하고 있기에 괜히 처들어가다 군사가 박살나고, 왕권에 밀려 권력을 잃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사실 그 당시 청나라가 건재하긴 건재했었고. 그리고 율곡학파의 입장에선 리는 보편적인 특성이기 때문에 퇴계학파가 말하는 것처럼 신분이 차이가 리의 차이가 되지는 않는다. 이러한 학풍은 예송논쟁에서 보여주었고, 여기서 사회계약설과 흡사한 성향을 보였다.

우계학파는 율곡학파와 같이 성혼으로 대표되는 서인의 한 축으로, 성혼학파라고도 한다. 성혼은 율곡과 퇴계의 학문을 일부 비판하면서도 절충하였다. 이 우계학파가 서인 → 소론으로 테크를 타면서 소론이 성리학을 탄력적으로 이해하게 된다.

한편 조선 중기부터 양명학의 도입 시도가 있었으나 성리학의 교조화가 진행되면서 그 세력이 더욱 약해졌다(그렇다고 대놓고 탄압한 것은 아니다). 사실 성리학이 교조화되기 한참 전에 양명학의 도입이 시도된 바 있었는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황이 저서 '전습록변론'(왕양명의 저서인 <전습록>을 연구, 비판한 저서)에서 지나치게 관념적이고 유교에 맞지 않다며 맹렬한 비판을 가해 뿌리를 내리기가 거의 불가능해졌다. 게다가 양명학이 평등을 주장하고 신분제를 부정하는 면이 있기에 조선사회가 무너지는 꼴을 볼수 없었기도 하다.

3.3. 조선 후기[편집]

서양에 마녀사냥이 있었다면 조선 후기에는 유교 극단주의가 있었다.
17세기를 기점으로 조선은 중국보다 더 유교화된 사회로 평가받는 교조화된 성리학 천하를 달성하게 된다. 그 여파로 주자가례의 보급과 강요로 여권이 하락하거나 장자 상속이 이루어지는 등의 모습이 나타난 것도 이 때였으며, 전국에서는 향약이 시행되어 유교적인 사회 통제를 강화하였다. 통치의 차원에서는 유교 학파에 따른 논쟁이 활발히 벌어져 예송논쟁이 벌어지기도 하고, 전국 각지에는 서원이 설립되어 자신들의 학파를 고수하였다. 흔히 '18세기 서민 문화의 성숙'을 이전의 양반 성리학 문화와 대립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가례의 보급과 제사의 수행 등 개인 혹은 향촌 사회에서 성리학의 보급은 조선 후기에 오히려 큰 진전을 보았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 남인은 경기도 남인인 근기학파와, 경상도 남인인 영남학파로 갈라지게 된다. 근기학파는 경세치용을 기치로 내세운 중농학파로 토지재분배를 위한 자영농 육성을 주장했고, 영남학파는 서원과 향약을 강화하여[35] 위정척사파의 뿌리가 되었다.

노론 사이에서는 인(人)과 물(物)의 성(性)이 같느냐 다르느냐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는데, 이간을 중심으로 인물성동론(경기도 중심 낙론)이, 한원진을 중심으로 인물성이론(충청도 중심 호론)이 펼쳐졌다. 이를 호락논쟁이라 한다. 근데 이 논쟁의 본질은 리가 기에 제약되냐 안 되냐를 논쟁한 것이다. 말하자면 물(物)에도 리가 있느냐 없느냐 이런 논쟁이다. 인과 물의 성(리)이 다르다는 건, 인간과 사물은 다른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내재된 리도 다르다는 논리. 이것이 율곡학파의 주기론적 정통이다. 근데 인간과 사물의 성이 같다고 하면 뭐가 되었던 리는 제약되지 않고 보편적 성질을 띤다는 뜻이 된다. 인물성동론은 퇴계의 주리론적 경향을 많이 받은 사상이다.

결론을 말하자면 이 호락논쟁은 오랑캐에 대한 태도를 어떻게 볼 것이냐는 것이다. 당시엔 오랑캐는 사람 취급을 안하기에 물(物)에 들어가는데, 인물성이론과 인물성동론 자체는 오랑캐와 거리가 먼 이론이지만, 낙론의 논리는 인간이나 짐승이나 똑같이 리가 있으니 오랑캐도 리가 있으며 그들의 문화를 받아들여도 괜찮다는 것이고, 호론의 논리는 오랑캐는 짐승과 같아 리가 없으니 그들의 문화를 받으면 짐승처럼 된다는 것이다. 결국 호론이 대세가 되어서 낙론은 정계와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게 되는데. 결국 낙론은 이용후생을 기치로 내세운 북학파의 뿌리가 되었고, 호론은 영남학파와 같이 위정척사파의 뿌리가 되었다. 19세기 제국주의계를 강타한 사회진화론의 대선배

다만 이때 남인은 대체적으로 호론에 동의하였다. 퇴계학파의 이기호발설 자체가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한 인물성이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원론적인 차원에 가깝고. 남인의 인물성이론은 '인간에게만 오로지 리가 있고, 오랑캐에게도 사람이니 리가 있다.'는 것 정도다. 한마디로 인물성이론에서 호론과 남인의 차이는 오랑캐를 사람으로 보나 안보냐의 차이. 예를 들어 남인계 실학자 정약용의 「기예론」에서는 인물성이론이 얼마나 잘 나타나 있는지 볼 수 있다.

한편 이 시기 우계학파의 대표적인 인물로 갑술환국 이후로 남인의 처리문제에 대해 온건한 주장을 하면서 송시열과 키배를 벌였던 윤증이 있다.[36] 그리고 양명학을 집대성한 강화학파의 거두 정제두가 있으며, 이것이 한말때「유교구신론」으로 성리학을 비판하고 양명학을 주장한 박은식으로 이어진다. 그렇다고 우계학파가 양명학을 신봉하는 학파는 아니고 애초부터 성혼은 양명학과 거리가 있던 선비였지만, 양명학이 주자학과는 다른 관점을 제공하는 이념적 기반으로서 우계학파의 전통으로 이어졌었다.

한편 정제두를 비롯한 소론학자들을 중심으로 양명학이 명맥을 이어갔으며, 개화기 박은식은 유교 구신론을 펼치면서 그 근거를 양명학에 두기도 했다.

조선 말기 안동 김씨 세도가문은 고증학을 밀어주었는데, 당시 고증학은 고전 연구 부분에 집중되어 있었기에 현실 개혁에는 정작 도움이 되지 않았다.[37] 또한 고증학에 영향을 받은 실학자들은 성리학을 부정한 게 아니라 고증학을 통해 성리학의 문제점을 보완하고자 한 선비들이었다. 그러니까 고증학 = 실학은 아니라는 것이다. 고증학이라는 것이 사실 사상이기 보단 학문적인 연구 방법에 가까운 측면이 있다.

어쨌든 이 고증학은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까지 한반도에서 유행하면서 백과사전류 저서나 문헌 고증에 새 바람을 불어넣었다. 예를 들어 한백겸의「동서지리지」는 고대지명을 새롭게 밝히어 고구려의 발상지가 평안도가 아닌 만주라고 고증했으며, 한치윤의「해동역사」는 중국부터 일본까지 540여의 서적을 참고하여 한민족과 중국 및 일본, 여진에 대한 문화 교류를 상세히 기록했고, 추사 김정희는「금석과안록」에서 북한산비를 진흥왕 순수비라고 밝히어 당시 신라의 강역을 고증하였다.

3.4. 근현대사[편집]

19세기 이후 조선 사회는 대내외적으로 격심하게 동요하게 되어 이에 따라 유교도 중대한 변화를 맞이 하게 된다. 형식적으로는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았으나 실제 세도정치로 권력이 일부 집단에 종속됨에 따라 많은 유학자들의 정치적 진출이 좌절되었다. 또한 외세의 압박과 더불어 천주교의 확산으로 유교의 전통적 지위가 위협받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세기 말엽에 이르러 도학의 의리정신에 입각하여 주자학의 정통성을 회복하려는 노력과 함께 현실적으로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사회의 모순을 개혁하자는 움직임도 대두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학파분열은 활발하게 이뤄졌다. 그리고 학파에 따라서 성리설이나 의리론에서 다양한 입장들이 제기 되었다. 이 시기에는 사단칠정론, 인물성동이론 등 성리설에 대한 관심을 여전히 중요한 관심사였으나 무엇보다도 시대상황에 대한 위기의식으로 인한 의리론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었다. 즉, 역사적 위기에 대흥하여 유교의 근본이념을 재인식하고 도학정신을 재천명함으로써 위기를 극복하고 유교질서를 재정립하려는 학문적 추구와 실천적 의지가 이뤄졌다.

이러한 입장은 척사위정파에서 드러내고 있었다. 이들은 화의론적 의리론에 입각하여 서양세력을 오랑캐로 규정하고 강상(綱常)의 윤리를 밝혀 서양의 침략에 대비할 것과 외세의 압력에 저항하여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였으며,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여 의병을 일으키는 등 도학의 의리정신을 적극적으로 실천하였다. 이들은 민족의 자주성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라는 점과 서양의 물질문명에 대하여 도덕절 질서를 존중하는 유교적 전통문화의 우월성정신승리에 대한 신념을 보여준다는 점의 두 가지 측면에서 평가 될 수 있다. 다른 일부 유학자들은 전통적 생활양식과 제도를 개혁하고 새로운 외국 문문을 받아야 들어야 한다는 개화론을 전개하거나, 전통적인 정신문화와 외국의 물질문명을 적절히 조화시켜야 한다는 동도서기론의 입장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유교는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고 쇠퇴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갑오개혁을 계기로 사회제도가 근대적으로 개혁되고 서양식 교육제도가 일반화 하면서 통치이념으로서의 위치에서 급격한 쇠퇴와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이후 1910년 일제의 의한 국권박탈로 많은 유학자들이 자결하거나 국외로 망명했고 일부는 국내에서 심산유곡에 들어가 도학의 명맥을 유지하기도 하며 대동교(大同敎), 공교회(孔敎會) 등을 중심으로 한 유교개혁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유교국가로서의 조선의 소멸로 인한 정치적 기반이 완전히 사라짐과 함께 망국의 책임을 유교에 돌림으로 유교에 대한 극단적인 부정적 인식으로 인하여 유교는 그 기반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해방 이후에도 지속되었으며 서양 문물의 적극적 수용으로 인하여 종교학적[38]으로는 그 세력을 거의 잃은 것으로 보이지만, 사회적 활동을 계속하고 있고 현재까지고 의례와 윤리적 규범이 남아 있음으로 그 영향력을 부정할 수 없다. 특히 대한민국 정치의 경우 유교의 역성론과 민본주의적 시각의 흔적이 남아 있다.

결론적으로 앞으로 유교는 조선시대처럼 사회의 중심적 구성원리로서의 기능을 회복시킬 수 없겠지만, 개인의 가치관과 윤리규범에 대한 영향력은 상당 기간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4. 일본에서의 유교[편집]

일본에서 유교는 6세기에 들어왔다. 백제 출신의 도래인인 오경박사(五経博士)가 531년에 전파했다. 왕인논어를 들고 왔다는 얘기도 있어 5세기에 들어왔을 가능성도 있다. 일본에선 종교적 색채가 엷었고 지배층을 위한 제왕학에 가까웠다. 나라 시대헤이안 시대율령제가 쓰이자 관료를 양성하기 위해 유교 교육이 도입되었으나 일단 일본에는 과거시험이 없었고 불교가 융성하면서 존재감을 상실했다.

가마쿠라 막부에는 주자학이 전파되었다. 15세기에 이르면 오닌의 난이 일어나고 수도인 교토가 황폐화되면서 유학자들은 각 지방으로 들어갔으며 승려가 유학을 연구하는 일도 빈번하였다.

에도 막부가 들어서자 불교와 유교를 분리하여 유교를 제왕학으로 사용하였다. 특히 에도 막부의 쇼군들 중엔 도쿠가와 츠나요시 같이 유학을 장려한 인물들이 있었다. 무사층을 관료로 만들기 위한 노력이었고 사농공상의 마인드는 일본에서도 나타났다. 양명학이나 주자학이 기본이 되었으나 자기들 자체적으로 고전을 해석하는 식으로 일본 유학은 독자연구 독자발전하였고 무사 계층에서 발전하였다. 그리고 유학의 존왕양이 사상은 메이지 유신의 밑거름이 되었다. 메이지 같은 경우엔 상당히 유교적인 사고방식을 지닌 인물이었다. 교육칙어 등에서 유교적인 배경이 잘 나타난다. 다만 무사층을 제외한 일반 상민이나 평민들 사이에서 유학은 듣보잡이었다. 그때문에 현대 일본에서도 연구자를 빼면 유교를 아는 사람은 잘 없다.

다만 유교라고 직접적으로 강조하지 않았을 뿐이지, 에도 시대부터 장유유서 등의 종법질서 법칙을 무가제법도 등에 적용하면서 실제 일본 문화에서 유교의 영향은 상당히 크게 나타났다. 메이지 유신 이후로는 유교 도덕을 '수신' 등의 교과서 과목에 집어넣어 교육하면서 극단적인 충(忠)을 강조하는 등의 영향이 생겨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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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의 공자묘.

5. 류큐 왕국에서의 유교[편집]

오키나와 일대를 다스렸던 류큐 왕국명나라청나라와 직접적으로 교류하였다. 이 당시 쿠메36성(久米三十六姓)이라고 하는 복건성계 도래인들이 활약했으며, 이들을 통해 류큐 왕국은 유학을 받아들였다. 또한 상류층 자제들 대부분은 중국에 유학을 다녀왔다. 1676년에는 나하에 지성묘(至聖廟)가 세워져 공자, 자사, 증자, 맹자, 안연을 배향했다.

류큐 왕국의 대표적인 유학자로는 테이 쥰소쿠(程順則, 1663~1735)[39]가 있다. 1714년에는 그의 건의에 따라 지성묘에 유학 교육 기관인 명륜당(明倫堂)이 설치되어 중국어(관화)와 유교 경서를 교육하였다. 또한 중국의 유학서적인 육유연의(六諭衍義)[40]를 일본 본토에 소개하였는데, 일본 각지의 테라코야[41]에서 교재로 널리 쓰였다.

6. 베트남에서의 유교[편집]

베트남어로 유교는 뇨자오(Nho giáo)라고 부른다. 한나라때 중국의 지배를 받을때 유교가 베트남에 처음 들어오게 되었다. 유교를 처음으로 부흥하려 했던 시기는 리 왕조(1009년 – 1225년)[42]때로 하노이에 공자의 위패를 모신 문묘가 건설되고 과거 제도가 시행되었다. 그러나 베트남은 전통적으로 불교의 세가 강했고 후 레 왕조 이전 왕실들은 유교보다는 불교를 선호했기에[43] 불교와의 갈등이 있었다. 따라서 베트남에 유교가 처음 들어온 시기는 3세기였으나 불교를 선호하던 베트남인들에게는 15세기 이전까지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그러던 베트남에서 본격적으로 유교를 국정 이데올로기로 삼은 것은 호 왕조(1400년 ~ 1407년) 시기로, 쩐 왕조의 황위를 찬탈한 호꾸이리가 자신의 권력을 공고화 하기 위해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장려 했다. 그러나 호꾸이리가 자기 취향대로 유교 사상을 곡해[44]하는 문제가 있었고 호 왕조가 어용 세력화 하려 했던 호꾸이리식 유교 진흥 정책은 명나라의 침공으로 호 왕조가 멸망하면서 유야무야 됐다. 명을 격퇴하고 세워진 후 레 왕조(1428년 - 1788년) 시기에는 본격적으로 국가의 주요 이념으로 격상되어 베트남의 유교화가 더욱 가속화되었다[45]. 불교를 숭상하던 무신 세력과 유교를 숭상한 문신 세력의 권력 다툼때문에 초반에는 유교적 이념 확립이 더뎠지만 유학에 심취했던 성종은 유교적 가치와 규범을 장려해 과거 제도를 확대, 유교 지식인들을 육성함으로서 유교적 정치를 실현하게 됐다.

베트남의 유교 수용은 중국의 영향을 받던 북부지역에서 이루어졌고 베트남과 민족과 문화가 다른 참파[46]는 유교와는 거리가 멀었다. 불교와 더불어 베트남 역사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종교가 바로 유교.

7. 종교? 철학?[편집]

"유교를 종교로 보아야 하는가? 철학으로 보아야 하는가?"하는 논란이다. 논란을 벌이기 전에 먼저 종교철학이 뭔 소리인지 해당 문서들을 보고 정확히 알아보자.

막스 베버의 종교 사회학에 따르면 유교는 종교라 할 수 있다고 한다. 일단 합리적인 체계와 교단이란 것이 존재하고, 게다가 그 교리를 꾸준히 재생산해내는 집단이 존재하기 때문. 거기다 이를 믿는 이들의 연결 고리 또한 존재하기도 하는데다 그게 신이든 아니든 종교는 기본적으로 어떤 사회 내에서 공유되는 하나의 인식체계라 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게 막스 베버의 기본 관점이기 때문.

그러나 막스 베버가 동양을 이해하는 수준이 매우 피상적이었고, 현재로서는 별 설득력이 없는 이야기라고 주장되기도 한다. 유교의 집단은 교단이라기보다는 학파에 가까운데, 이런 학파도 교단 취급하면 칸트 학파, 헤겔 학파도 종교로 분류되어야 된다.

그런데 '종교'와 '철학'이라는 틀은 서양인들 특유의 헤브라이즘(그리스도교)과 헬레니즘(그리스철학)의 분리에서 기인한 것이며 이러한 분리는 서양 이외의 세계관에서는 찾아보기가 어렵다. 게다가 서양의 철학도 그 기원은 종교이기 때문에 알고 보면 서양에서도 종교와 철학은 분리가 안 된다. 예를 들어 서양철학의 근원에 해당하는 플라톤은 고대 희랍의 종교뿐만 아니라 오르페우스교의 영향을 받은 바, 플라톤의 이데아와 같은 형이상학적 아이디어가 피어날 수 있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예 제1원인(순수형상)을 신이라고 말한다. 다만 아리스토텔레스 또한 고대 희랍의 종교(그리스로마신화)을 의식함이 당연하였기 때문에, 따라서 제우스 혹은 우리에게 익숙한 아브라함 계열 신의 개념 및 느낌이 아니라 그저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 정도로 파악함이 옳다.

불교는 워낙 다양하기는 하지만 대체로 윤회라고 하는 사후세계를 중시하고 아미타불이나 미륵불처럼 신이나 다름없는 것들이 언급이 된다. 석가모니는 종교적인 인물이 아니기는 하지만 불교라는 종교는 그런 식으로만 전개되지가 않았다.

도교도 사원과 성직자가 있고 헌금도 받는다. 부적 만들어서 파는 것의 원조가 도교다.

힌두교의 경우도 '인도철학사를 보면 인도에서는 종교와 철학이 분리되지 않는다'라고 서론에서부터 언급하고 있다. 우파니샤드에서 비롯되는 다양한 인도철학에서는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을 아우르는 하나의 본체적 원리(브라흐만)를 말하는데, 이 원리는 동아시아-특히 도가사상의 도(道)와 같은 것이 아니다. 동아시아는 본체/현상의 이원론 자체가 없다. 특히 유교에서 언급되는 도는 그냥 상식적인 삶의 원리 같은 것이지 우주를 아우르는 대단한 원리 같은 게 아니다.

종교라는 것을 시공간을 초월하는 생각이라고 정의내린다면 유교는 당연히 종교가 아니다. 오히려 이데아나 물자체 같은 시공간을 초월하는 개념들을 자주 운운하는 서양철학마저 종교로 분류할 수 있다.

유교가 종교냐 아니냐를 따지려면 종교를 어떻게 정의할 건지부터 명확히 해야 되는데 그것부터가 애매하다. 서양철학자 중에도 그리스도인이 많았고 과학자 중에도 그리스도인이 많은데 그렇다고 철학과 과학을 그리스도교와 섞어서 생각해야 되는 것은 아니다.

종교와 철학을 분리한다는 것은 "철학은 종교적이지 않다."는 말을 내포하고 있는 말인데, 막상 유교의 경전들을 보면 종교적 성향을 근대서양사상처럼 거부하려고 애쓰지 않고 있으며, 서양에서는 그리스도교와 근대사상이 격렬한 충돌을 일으켰지만 동양에서는 그런 게 없었다고 보아서, 유교를 종교로 판단할 수도 있다. 더구나 불교를 통해 신비철학을 흠뻑 받아들여 본래의 유교에서 일신한 것이 성리학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유학을 종교로만 볼 수 없게 만드는 무시할 수 없는 사항들이 다시 제기된다. 서양 근대 사상에서는 예수를 중심으로 하는 신앙이 종교였고 이에 대한 거부반응이 종교와 철학을 구분하려는 시도들이었을텐데, 이렇게 보면, 유학도 불교에 대한 일련의 거부 반응이 있었다. 조선 유학을 노정한 자인 정도전의 불씨잡변과 같은 책을 비롯하여, 조선조 내내 이루어진 숭유억불정책도 어찌보면, 종교적 성향과 거리를 두려는 유학의 거부반응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성리학이 불교를 흡수하여 이루어진 전력이 있기는 하지만, 그러한 흐름의 핵심에 있었던 성리학자들도 불교에 대해서는 내내 적극적으로 거리를 두고 있었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피타고리안 종단, 오르페우스 밀교단 등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여 그를 종교인으로 취급하지 않는 것처럼, 유학, 특히 성리학에 대해서도 핵심적인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종교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철학의 반종교적인 특성을 강조해온 것의 역사도 복잡미묘하다. 이것은 근대철학의 탄생의 주문이다. 중세의 신학의 하위처럼 취급되던 철학이, 근대에 와서야 전세를 역전시켜서, 철학의 하위로 신학을 만들 수 있었는데, 이것은 종교적 인간관과는 다른 실존적 인간관을 묘사하려는 데카르트로부터 시작된 학자들의 분투가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근대 철학자들은 자신이 하고 있는 학문을 비롯하여, 철학으로서 연구하는 어떤 분야를 종교와는 다른 것으로 내세우려는 성향이 생긴 것이다.

명칭에 대한 이러한 문제들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47] 단어를 보면 비슷한 것 같지만 뉘앙스가 미묘하게 다른 말도 있고, 같은 현상을 나타내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단어가 달라져서 뉘앙스가 달라지는 일이 종종 있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분류할 때 애매함에도 불구하고, 분류하고자 할 때는 그 사람의 강조점이 드러난다. 유학이냐 유교나, 철학이냐 종교냐 문제는 고찰자가 유학의 어떤 측면을 강조하는지를 알 수 있는 주요한 지표다.

7.1. 천명(天命)[편집]

천(天)은 사람 위에 있는 공간을 기호화한 것으로, 처음에는 순수하게 천공을 의미하는 표현이었는데, 주나라가 패권을 장악할 때부터 하늘처럼 인간 세계를 뒤흔들 수 있는 힘의 기호로서 부각된 말이다. 초기에는 뚜렷한 인격신 개념은 없었고, 또한 주나라의 지역신은 아니다. 그러다가 천이라는 표현은 은나라에 와서 상제(上帝)와 거의 겹쳐지는데, 갑골문에서 보이는 종교성은 춘추전국시대가 되면 점차 사라진다.

춘추좌씨전 같은 것만 봐도 춘추시대에 중국에서 종교색이 약화되는 모습을 확인할 수가 있다. "나라가 잘 될 때는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나라가 망해가면 신의 말에 귀를 이울인다"는 표현까지 나온다. 공자가 등장할 때 쯤에는 천명을 인문주의적으로 해석하는 세계관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 시대에도 여전히 종교적 색채는 함께 보인다. 21세기인 지금도 성모마리아가 피눈물을 흘렸다는 걸로 난리치는 게 인간이다. 종교성은 지금도 공존하고 있다.

천명(天命)론은 천이 인간에게 물리적인 힘을 넘어 또 다른 힘을 가할 수 있는 주체임을 분명히 한 게 아니다. 천은 주체가 없다. 맹자도 천은 백성들의 귀로 듣고 백성들의 입으로 말한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백성들의 자연스러운 민심이 천이라는 뜻이지 천이 인간들을 조종한다는 그리스도교적인 말이 아니다.

맹자는 천명을 혁명과 결부시켜서 이전까지 위정자의 덕만이 천명과 결부되던 것을 사상적으로 전환시켜 '민심'과 '천심'이 동일하다고 주장하였다. 즉 일반민(民)과 신적인 힘(天)은 '민심 = 천심'이라는 소통로를 통해 연결되는 것이고, 이 시점에서 천은 일종의 '세계 원리'로 확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원칙적으로 천의 종교성은 상당히 사라졌고, 실제로 맹자의 사상도 현실성이 매우 강하다.

천이라는 말 자체가 고대의 신성 개념부터 후대의 천지자연적 개념까지 모두 축적된 표현이다. 공자나 맹자나 천을 신처럼 묘사하는 말을 한다. '민심이 천심이다', '민심을 따르지 않으면 왕조가 교체되어야 한다'라는 것은 요즘 철학용어로 말하자면 당위에 해당되는 것이다. 사실 맹자의 성선론이라는 것도 본성을 논했다기보다는 당위를 논하는 것에 가깝다. 하지만 맹자의 주장을 '맹자가 제시한 신적 권위를 따르는 종교'라고 볼 수 있다고 한다면, 인간이 선하게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신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칸트는 빼도박도 못하는 그리스도인이 된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유교는 은나라의 종교를 완전히 타파하겠다는 주장을 하지 않는다. 유교경전을 봐도 항상 하은주 3대를 함께 말한다. 따라서 유교가 종교성을 띠고 있었다고 봐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사후세계나 하느님이 결정한 운명이라든가 우주를 지배하는 하나의 원리 같은 현상에 대비되는 본체적 개념은 없다. 물론 종교가 꼭 본체적 개념을 포함해야 되는 건 아니다.

7.2. 제사(祭祀)[편집]

제사에서 다뤄지는 혼백은 본래 한 단어가 아니다. 유교를 창시한 공자는 눈으로 볼 수 없는 괴력난신을 입에 담지 않는다고 강조했으나, 유교와 별개로 도교를 비롯한 애니미즘적인 동양 세계관에서는 인간이 (氣)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는데, 대충 서양식으로 말하자면 기의 영혼적 부분을 혼(魂)이라 하고, 육체적 부분을 백(魄)이라고 한다. 혼과 백은 각각 천(하늘)과 지(땅)에서 온 것이고, 사람이 죽으면 혼과 백이 분리되어 각각 하늘과 땅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기본적인 생각. 후대 유교(혹은 성리학)은 다분히 초기 유교와 불교, 그리고 애니미즘을 일정량 섞어 결합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천과 지는 그냥 공기와 흙을 말하는 게 아니라 동양인들이 생각하는 천지라는 유기체의 두 측면을 가리키는 특수한 표현이다. 대충 세상도 천과 지로 구성되어 있고, 그 사이에서 태어나는 만물도 모두 천과 지를 포함한다고 생각하는 것.

따라서 혼과 백은 '초자연적 신'이 아니다. 동양인에게는 신적 힘이나 영혼도 만물과 마찬가지로 기(氣)로 이루어져 있으며, 세계의 모든 현상은 기의 움직임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하늘이나 산천이나 죽은 자에게 제사지내는 것이 초자연적 신을 숭배하는 모습과 외관상 똑같아 보이지만, 그 내부의 근거는 분명히 다른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그 기가 애니미즘 같은 순수 그 자체의 자연력은 아니고, 특히 한국에서는 풍수지리까지 끼얹으면서 다분히 기복신앙적인 면과 조상 숭배의 형태를 띄게 되었지만 말이다[48].

물론 혼과 백이 자연적인 것이라고 해도 그것이 현실의 인간 사회에 힘을 못 미친다는 소리는 아니다. 세계적으로 봐도 초자연적 신보다는 자연신이 많다. 그리고 과학적으로 본다면 혼과 백은 당연히 물리적으로 증명되지 않는다. 따라서 제사라는 것이 있지도 않은 것을 섬기는 종교적 모습으로 보이기 충분하다. 사실 신을 어떻게 정의할 것이냐의 문제이기도 한데, 반드시 인격신만을 신으로 여기지 않는 종교도 드물지 않으며, 불교도 기복적 성격으로 변질되었을 뿐 본래 신을 숭배하는 종교는 결코 아니다.

이에 대해서는 18세기부터 청나라의 제사를 바라본 타자인 가톨릭 계에서 논의가 존재했으며, 현재에도 유가 밖에 있는 타자가 보기에는 충분히 논란거리로 삼을 대상이 된다. 이것이 단순한 '조상을 공경하는 사회적 관습'인지 '종교적 행사'인지는 사람에 따라 얼마든지 평가가 다를 수 있으며, 사실 둘 다 포함된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그리고 사실 조선 이후 제사법은 주자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위배한 것이다. 신분에 따른 차등을 강조했던 주자는 3품 이상이 되는 벼슬자리에 있는 사람만이 고조까지의 조상을 기릴 자격이 있다고 보았으며, 그 아래 사람들은 부모의 제사만을 치르도록 가르쳤다. 즉 주자에게 조부 윗대의 조상들은 그렇게 예를 차릴 필요가 없는 존재들이었다. 애초에 몇 세대 터울 지는 윗세대에게 효성을 느낄 여지 자체가 적기도 하거니와 일반인들이 감당하기에 그 부담 또한 막심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와전된 조선에서는 벼슬이 없는 사람까지도 '효'를 4대 이전의 알지도 못하는 조상에게까지 소급하는 것을 당연시하게 되었다. 어쩌면 주자 본인은 정말 공경하는 마음도 없이 맹목적으로 조상의 제사를 지내는 행위가 자칫 허례허식으로 변질되는 것을 경계했을런지도 모른다.

7.3. 인문화의 역사[편집]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종교라는 것은 시공간을 초월한 인격신, 영원불멸한 사후세계를 가리키는 것인데, 물론 이는 종교를 정의하는데 있어 하나의 단선적인 기준일 뿐이고 실제 종교라는 것이 갖는 스펙트럼은 생각 이상으로 넓다. 긴말할 것 없이 사이언톨로지 같은 것도 종교 취급되는 현실을 상기해보자. 어쨌든 중기 이후의 유교는 물리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천(天)이나 혼 따위에 대해서도 중요하게 언급하는 편인데 이는 유교의 제사 예법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단지 죽은 자에 대한 예의'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천주교의 관점에서 제사를 해석한 것이 아니라 논어의 신종추원이라는 표현에서도 이미 언급되는 말이다. 죽은 자의 영혼에게 기(氣)를 북돋아 준다는 의미가 아니다. 원래 유교의 제사는 4대만 하게 되어있다. 즉 4대가 지나면 혼이 흩어져 없어진다는 것이다. 기를 북돋고 자시고 할 게 없다. 조선말기에 천주교가 유행할 때 유학자들이 천주교를 반대한 대표적 이유 중 하나가, "불교처럼 천당과 지옥을 말하기 때문"이었다.

조선시대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은 일정량 길흉에 관계된다는 신앙적 측면이 있기도 하지만, 그보다 자기 조상을 잘 모시냐 안 모시냐의 문제였다. 제사를 제대로 안 지낸다는 건 부모님을 내팽겨치는 불효막심한 놈이 된다는 뜻이었다. 그러니까 유교는 길흉화복을 비는 종교와는 비교적 거리가 있다. 그보다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불효자로 낙인 찍는 사회적 규약을 지탱하던 이론이었고, 이러한 면에서 윤리 수칙을 강제하는 종교적 측면이 있었다.

논어에 역(易)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은 물론 기본적으로는 점술(占術)을 의미하지만, 사실 오늘날 주역을 살펴봐도 알 수 있지만, 주역의 핵심은 점술이 아니라 세상의 변화(易)에 대한 논리다. 역이라는 문헌 자체가 점술로 출발해서 철학적 내용이 점점 증보된 책이다. 하지만 역(易)의 경우도 본질은 은나라 이전의 점복(占卜)에 두고 있으며, 이후 시대에서도 진지하게 믿는 건 아니었지만 역경의 사용 목적 중 하나가 점복술이었다 것은 분명하다.

성리학이 불교를 배척했던 것은 그것이 외래적인 종교였기 때문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49] 즉 성리학은 외래 종교를 타파하고 중국 고유의 종교를 되살리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종교는 그리스도교이슬람교 같은 종교는 아니기 때문에, 종교에 대해서 인문을 되살리려는 운동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이것이 경직되어 성인을 절대시하거나 현실을 도외시하고 형이상학에 집착하게 되면 종교와 별 차이가 없게 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성리학의 폐단이지 본질하고는 거리가 멀다. 그리고 성리학이 정확히 뭔지 알고 싶으면 해당 문서를 참조.

물론 성리학 이후에도 양명학이 등장했기 때문에 성리학이 곧 유교라고 할 수는 없다.

8. 경전[편집]

원래 진나라 때까지 유교의 경전이라고 하면 육경이였다. 그러나 진한교체기를 겪으면서 악경이 실전되어 복구되지 못하게 되었고 한무제 때 오경박사가 설치되어 관학화가 이루어졌다. 후한대에 논어와 효경이 중요시여겨지면서 오경에 더해 칠경이라고 불렀다. 당나라에 이르러서 시,서,역의 삼경, 의례, 주례, 예기의 삼례, 춘추삼전의 9경체계가 이루어졌고 당문종에 의해 논어, 효경, 이아가 더해져 12경이 되었다. 남송 때 맹자가 중요시되면서 경으로 높임을 받았고 13경이 완성되었다. 또한 송나라의 유학자들은 예기의 대학편과 중용편을 중시하였고 논어, 맹자에 독립된 경전으로써 대학과 중용을 포함해 사서라고 불렀다. 주자(주희)는 대학편과 중용편에 장구라는 주석을 달고 논어, 맹자에 집주라는 주석을 달아 사서장구집주를 편찬하였다. 사서에 삼경을 더한 것이 사서삼경이고 오경을 더한 것이 사서오경이다. 명나라 면력제 때 십삼경주소가 정식 간행되었고 청나라 때의 완원에 의해 십삼경주소가 다시 편찬되면서 현재까지 내려오고 있다.

  • 시(詩) - 시경이라고도 한다. 황하유역에 유행한 노래들의 가사를 모은 것.

  • 서(書) - 상서, 서경이라고도 한다. 춘추시대 이전부터 내려오는 문서를 모은 것.

  • 역(易) - 주역, 역경이라고도 한다. 말 그대로 세상의 변화의 이치를 논하고 있다.

  • 춘추좌씨전 - 역사서 춘추에 좌구명이 전을 더한 것.

  • 춘추공양전 - 춘추에 공양자가 전을 더한 것.

  • 춘추곡량전 - 춘추에 곡량숙이 전을 더한 것.

  • 예기 - 예에 대한 논문집. 여기에 사서에 속하는 대학과 중용이 들어있다.

  • 의례 - 국가의 각종 의례규범을 제시한 책.

  • 주례 - 주나라의 명의를 빌려 이상적 국가체제에 대하여 논한 책.

  • 논어 - 공자와 그 제자들의 어록. 사서 중 하나.

  • 맹자 - 맹자의 논변을 기록한 책. 송나라 때 재발굴. 사서 중 하나.

  • 이아 - 일종의 경전 어휘사전.

  • 효경 - 효에 대해 대화 형식으로 서술한 것.

9. 교육[편집]

한국에서 배울 수 있는 곳은 많다. 전국의 향교, 서원에서 배울 수 있고, 동네 어르신들도 대학, 논어 등의 경전을 읽으시고 서로 학습하는 스터디(?)가 있다. 하지만 과거와 같이 체계화된 학습이라기 보다는 사설 교습의 형태이고, 향교에서의 교육도 과거와 비교할 수 없다.

성균관대학교에는 유학대학이 설치되어있어 학부과정부터 학습이 가능하다.[50] 과거 조선을 지배하던 사상인 것 치고는 안습한 현재의 모습. 전공명도 '유학과', '유교과'가 아니다. 유학동양학과[51]라는 이름으로 개설되어 있는데, 학과명으로 볼 때에는 '유교'만 배운다기 보다는 동아시아의 역사, 철학, 정치, 미학, 문화, 사회 등을 배우는 사실상 '지역학'의 형태를 띄게 되었다.[52] 물론 대학&중용[53], 맹자, 논어와 같이 패기있어 보이는 과목도 있지만 중요성과 인기는 점점 떨어지고 있다.[54][55] 또한 유학동양학과에 입학하면 '양현재'에 들어갈 수 있는데, 사서와 중국어 과목을 각각 최소 하나씩 들어야 하며 이를 이수할 경우 학점에 따라 전액 또는 반액 장학금이 지급된다.[56] 또한 임간수업[57], 분향례, 해외연수, 사서대회 등에도 참여할 수 있다.

한자 자격증이 있으면 눈감고 들어가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현재는 그런 별도 전형은 없다. 과거에 한자 자격증, 한국사 자격증 또는 몇몇 내신 성적[58] 평균 2등급 이상일 경우 지원할 수 있는 별도의 수시 전형이 있었지만, 2011년도 입시를 마지막으로 학생부전형에 통합되어 사라졌다.[59] 독립 전형이 존속하던 당시에도 지원자격은 정통성을 위해 내거는 것이고, 사실은 내신으로 선발하는게 아니냐는 비판이 많았다. 예를 들면 국사 전학년 평균이 2등급이면 지원할 수 있었는데, 이 조건을 충족시키는 사람은 전국에 차고 넘친다. 게다가 당시에는 수시 전형을 100개를 지원하던 1000개를 지원하던 제약이 없었다. 이렇다보니 적성을 살린 인재 선발이라는 명제는 허울에 지나지 않고, 실체는 내신 자르기라는 것. 이후 이런 문제를 해소하기 위하여 한자 자격증, 한국사능력검정시험 2급 이상의 제한을 두기도 하였으나,[60] 한국사능력검정시험 2급의 난이도를 고려해볼 때 실질적인 효과가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어쨌든 지금은 학생부전형에 통합되어 사라진 지 오래인 수시 전형이다. 물론 현재에도 별도의 전형이 아닐 뿐 수시 전형 중 과별 전공예약생을 뽑는, 통합된 학생부 전형을 통해서 입학할 수 있다. 정시로 입학할경우, '인문과학계열'로 입학한 다음에 2학년 진입할 때 유학동양학과로 전공 진입을 하면 된다.[61]

점차 축소되는 한국의 인문학 현실 속에서 그나마 대학교에서 밀어주는 몇 안 되는 학과이다. 어쩔 수 없는게 성균관대학교의 간판이나 다름없는 학과이고 조금이라도 조선시대의 성균관과 연결고리와 정통성을 만들기 위해서는 학교에서 지원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600년 역사의 살아있는 근거 또한 교육부 등 국가에서 진행하는 인문과학 관련 프로젝트에서도 자주 참여를 하고있고, 그외에도 대기업 임원이나 국회의원, 군 장성 등이 유학대학원에 많이 있어서 어중간한 최고경영자과정보다 들어오는 돈이 많은 것 같다.

이렇다보니, 대학에서 '유학'을 배우기 위해서는 성균관대학교 '인문과학계열'에 일단 입학을 하거나, 유학동양학부에 편입을 하거나 복수 전공을 해야 한다. 사실상 개방되어있는복수 전공을 제외하면 둘 다 쉽지만은 않은 방법.인문과학계열 입학만 성공하면 전공진입은 간단한 건 함정 편입생도 꽤 많이들 오지만 편입생은 타과 복전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대학에서 유학을 배우고 싶다면 대학원 진학을 하는 것이 그나마 현실적인 방법이다.[62]

10. 유교에 대한 비판적 의견과 반론[편집]

이 항목을 읽기 전에 일부 이단변질된 유교적 전통 항목을 읽고 오자.

조선 멸망에 즈음하여 성리학은 발전의 걸림돌인 족쇄라는 인식이 확산되었고, 서양문명과 그리스도교의 보급에 의해 생활면에서도 많은 자리를 양보해줘야 했다. 결정적으로 일제강점기한국전쟁을 지나면서 유학자의 명맥이 끊기다시피 하였다. 또한 오늘날 대한민국국가나 한국 사회의 문제점에 대해서 직시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성차별, 전체주의, 노슬아치, 직업의 귀천, 남아선호사상, 똥군기, 호주제, 가부장제, 나이를 내세우거나 들먹이는 문화, 갑의 횡포등의 악습들을 정착 시키는데 일정 부분 영향을 끼쳤다. 대한민국에서는 해방 이후에도 제사, 성차별에 대한 개혁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은 결과 해방 후 여성들의 개신교 개종을 가속화 시켰다고 보기도 한다. 애당초 공자가 주장한 3년상은 당시 시점에서 봐도 묵자 등에 의해 허례허식이라고 까이는 경우가 있었다.

하지만 위 글에서 언급된 문제 중 일부는 조선왕조 혹은 현대 대한민국의 문제점이다. 열거된 문제를 모두 유교의 문제로 귀결시키는 것은 무리가 있다. 한 예로 직업의 귀천 항목을 보아도 사농공상은 단지 직업의 구분이었을 뿐 신분의 상하관계를 정한 게 아니었는데 조선시대에 왜곡 된 것이다. 박지원조차 중국 선비들을 만나 사농공상이 직업의 구분에 불과하냐고 물었을 정도. 또한 호주제, 똥군기 등 명백히 일본 식민통치와 군국주의의 잔재까지 유교의 폐단이라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 그러니까 현대에서 일어나는 병폐를 모두 유교의 탓으로 돌릴것이 아닌 문제의 정확한 원인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그 중에서 정말 유교에서 비롯됐는가도 생각해 봐야 한다. 불교도 비슷한 논리로 정도전등의 유학가들에 온갖 비난을 받고 조선시대의 비주류로 몰렸던 과거가 있다. 이에 대해서 정말 진지하게 불교가 고려를 멸망시킨 원인이라고 정말 생각하지 않는 한 과거의 폐단은 반복되선 안된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유교사상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종가나 종친의 경우 현대화가 된 지금도 유교사상을 따르고 있으며 종가 및 종친 출신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전 가족 및 종친들이 모두 모여서 명절이나 조상 기일 때 집단으로 제사 및 차례를 지내는 풍습이 있다. 지금도 일부 종가 및 종친쪽에서 차례를 지내는 모습을 보면 여전히 유교 방식 그대로를 따르고 있으며 일부 현대인들이 보기에는 너무도 생소한 제사 방식이 남아있다. 대부분의 일반가정에서는 제사상이나 차례상을 직접 만들거나 차리기도 귀찮다며 주로 온라인 등에서 배달 서비스로 대신하는 경우가 있지만 종가 및 종친에서는 조선 중대 이후 확립된 이 '의식'을 아직까지도 고수하고 있다. 아무리 힘들고 고달퍼도 이 곳에서는 반드시 유교 사상의 전통에 따라 모든 종친들이 수제로 한 차례 및 제사음식을 차려야 한다. [63] [64] [65]

특히 조선왕조 때부터 불교를 억제하는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 때문에 불교계와는 사이가 좋지 않다. 애초에 조선시대에는 사상적으로 근친관계인 양명학을 비롯해 그 어떤 학문/사상/종교와도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그나마 다른 사상은 싹이 틀 때부터 철저하게 짓밟은 반면 이미 성리학보다 앞서 존재했기에 일정 세력이 갖춰져 있던 불교는 확실히 척결하지 못했다. 조선의 유교계에서는 이미 망해버린 옛 고려의 흔적을 지우고 유림에 대한 지위를 강화하기 위해서 이 숭유억불 정책에 따라 고려왕조 때까지만 해도 국교(國敎)로 지정되었던 불교를 자신들의 유교로 바꾸게 했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단순히 지위강화의 목적만 있던 것이 아니라 건국 초기의 혼란한 상황을 유교를 통해 통제하려는 목적과 불교계가 가지고 있던 막대한 재산을 국고로 흡수하기 위한 실제적인 이유도 있었다. 이로 인해 당시 높은 신분과 지위를 받았던 승려들도 아예 신분제도상에서 천민으로 격하편입시킴에 따라 조선왕조 때는 승려들도 천민 신분이기 때문에 일반 천민들과 함께 막노동에 동원되거나 투입되기도 하였다[66].

근대 때부터 전래되어 온 개신교천주교 등과도 갈등 관계. 특히 서양에서 건너온 이교(異敎)라고 규정하여 '서학(西學)'으로 불렸던 시절 조선 내에서의 개신교 및 천주교도 탄압과 병인양요신미양요까지 발발하면서 조선 유림계의 반양(反洋)과 반(反) 기독, 반(反) 천주 성향이 더욱 짙어지기도 하였다. 사실 흥선 대원군은 천주교에 비교적 너그러운 편이었다. 일단 부인부터가 천주교 신자였으니까. 하지만 어른의 사정과 유림들의 거센 반발 앞에 대원군도 머리를 숙였고, 그렇게 해서 병인박해 등이 일어나 많은 외국인 신부와 국내의 천주교 신자들이 죽임을 당했다.

중국은 5.4 운동을 기점으로 유교에 대한 비판이 일기 시작했으며, 공산당 집권 후 유교의 폐해가 사뭇 크다고 진단하며 문화대혁명 시기 유교를 봉건시대의 악습으로 규정하고 철저히 유교의 경전과 유물들을 파괴했다. 이 탓에 중국에서는 80년대 후반에 유교 복원을 위해 한국의 성균관을 방문하여 종묘제례악을 비롯하여 유교식 예법, 제사법 등을 역수입해가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공산주의를 도입한 북한 역시 유교의 잔재를 악으로 규정하고 탄압하는 한편, 가부장주의 같은 유교의 부정적인 면만 뽑아다 주체사상이란걸 만들어버렸다. [67]

논어 양화편을 보면 여자와 소인은 다루기 어렵다. 가까이 하면 버릇없이 굴고, 멀리하면 원망한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 구절에 대해서 몇몇 옹호론자들은 이 구절이 앞뒤맥락없이 나오며, 누구나 마음대로 글을 집어넣고 뺄 수 있었던 시대상황, 그리고 공자의 태도들 볼 때 후대에 첨가되었다고 주장을 하나 근거가 희박한 것이 논어란 책 자체가 공자 자신이 저술한 것이 아닌 공자의 제자 중 하나였던 증자의 제자가 중심이 되어 각자 적어두었던 문서들을 편집해서 만든 공동저술이었고 진의 천하통일 후 진시황이 대대적으로 법가를 제외한 나머지 제자백가들을 탄압한 휴유증[68]으로 전한 때 사람들의 전승 및 몰래 숨겨두었다가 다시 찾은 문서들을 바탕으로 복원했던 역사 때문에 현존하는 논어는 전체적으로 앞뒤 문맥이 매끄럽지 못하며 비문이 꽤 있다.[69] 그리고 공자가 2500여년전 사람인 것을 생각해보자. 가부장적인 남성우월주의 문화가 '상식'이었고, 사방이 전란이었던 그 시대에 육체적으로 연약한 여자를 동등한 인간으로서 취급했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또한 공자가 직접 그 말을 했든 아니 했든 유교의 폐해를 얘기할 때 이 구절을 빼놓을 수는 없다. 조선시대 원문검색 사이트에서 이 말의 한문 구절인 '唯女子與小人爲難養也'만 검색해도 지겹도록 튀어나오며 조광조, 정철, 권근 등등 대표적인 유학자들이 잘만 써먹어왔다. 유교가 사실 공자만의 학문이 아니고 맹자, 순자, 동중서같은 후세의 수많은 유학자들이 참여한 일종의 공동철학이기 때문에 유교와 남녀 차별이 밀접하게 관련 있는 것은 분명하다. 또한 양화편의 진위 여부를 구실 삼아 사실 유교는 남녀차별적 학문이 아니라고 둘러대는 건 유교가 관학으로서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기나긴 역사에 비추어 보면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행태임 역시 분명하다. 뭐 음양이 조화를 이루어 화목함이 어쩌고 하는 경지를 운운하더라도 성의 차이를 근거 삼아 개인의 자유를 제약한다는 점에서 분명히 차별적인 사상이다.당장 칠거지악같은 악폐습을 보자.[70]

연장자와 연소자의 관계에 관련해서도 '유교 때문'이라는 여론이 강한데, 조선시대 기록을 살펴보면 4, 5살 차이나도 친구하던 사람들이 수두룩했고 심지어 15년 차가 나도 친구했던 사례도 있다[71]는 것을 들어 유교에서도 생각보다 연장자 - 연소자 관계가 유연했고, 연장자 존중은 세계적으로 흔한 일이며, 지금처럼 연장자 - 연소자 관계가 강고해진 것은 태평양 전쟁 패망 이전의 일본군 탓이다. 하루만 일찍 들어와도 선임으로 군림하려고 했던 것이 구일본군의 악습이다. 이것이 일본 사회와 그 식민지였던 조선 사회에 급속도로 퍼진 것이다. 하지만 전후 일본은 징병제가 폐지되고 문민정부가 세워져 군국주의의 잔재가 빠르게 사라진 반면, 한국은 80년대 후반까지 군사독재가 이어졌으며 현재도 징병제를 실시하고 있다. 이러한 구일본군의 악습이 일본에서 사라진 것은 한일 양국 전후의 역사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흘렀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현대에 들어와서 과학은 획기적인 발전일로를 걷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후세를 평가해 볼 때 유교는 과학의 발전을 가로막은 바가 많다고 할 수 있다. 천웨이핑이 지은 공자평전에서는 천문학을 예시로 들어 비판한 모양이다. 그러나 일단 이 유교 사상과 과학과의 관계는 진지하게 얘기하자면 문서를 하나가 아니라 몇 개는 새로 만들어야 할 만큼, 정말 진지한 연구가 가능한 영역이다. 왜냐면 일단 서구의 과학발전사 + 이를 평가하는 현대 과학철학 + 동양의 과학발전사 + 유교는 물론 도가나 묵가를 위시한 동양의 과학철학과도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천문학만을 놓고 볼 때 동중서의 천인감응설 등의 영향, 굳건한 황제의 통치에 권위를 더하기 위한 목적 등으로 한대에 천문학이 크게 발전했다. 이 위키에는 삼국지 매니아들의 영향으로 아직 동중서는 없어도 마융정현 항목은 꽤 상세하게 쓰여져 있다. 이 중 정현 항목을 보면 마융과 정현이라는, 각자의 세대를 대표하는 유학자 두 명이 둘 다 천문학에 능했으며 아예 이를 힘써 가르쳤음을 볼 수 있는데 후대 유학자들에게는 보기 어려운 광경이다. 그런데 당, 송, 명, 청 시기 중국 왕조는 하늘에 대한 제사 등 천명에 관련된 것은 독점하고 싶었기 때문에 서적으로 천문을 연구하는 것에 금지령을 내리고 위반자는 중형에 처했다. 그래서 중국 왕조는 남송에 이르러 혼의를 만들 것을 생각했는데 적합한 사람을 찾지 못했고 명말에 서광계는 역법을 수정할 때 민간에서 천문학 인재를 찾지 못해 한탄했다.

그런데 이를 유교에 의해 빚어진 천동설에 맞먹는 동아시아 과학사의 흑역사라고 단순하게 보자니 좀 석연치 않다. 왜냐면 일단 천동설부터가 서양 과학사의 흑역사가 아니고... 혹 서양 종교 세력에 의한 천문학 탄압과 동양 학문 세력에 의한 천문학 탄압을 동치로 넣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면 무리수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일단 천동설은 제법 정교한 이론이며 이를 뒤집는 결정적인 증거는 관측장비가 발달하고 나서야 제시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과학철학적으로 볼 때 시대에 맞는 이론이 나오고, 다음 시대에 다음 시대에 맞는 이론이 나온다고 해서 전시대 이론이 흑역사가 되지는 않는다. 뉴턴 만유인력이 흑역사인가?

그리고 유교가 본질적으로 과학, 혹은 각을 좁혀서 천문학을 탄압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었다면 상당히 옳은 지적이겠지만, 일단 공자부터가 세 명이서 같이 길 가다 보면 뭐라도 배울 게 떨어진다며, 배우라고 하는 건 엄청 강조하고 뭐라도 배우라고 하지, 배우지 말라거나 배우는 걸 금지하라거나 하지는 않는다. 뭐 맹자 같은 경우는 왕권신수설 비스무리한 사상을 부정하기는 해도 동중서 역시 유학자이므로 현대의 우리가 굳이 성리학 계열의 도통설을 따라서 도통을 계승한 맹자가 더 우월하므로 동중서의 학설은 돌아볼 게 못된다는 비판은 좀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왜냐면 왕권신수설 비끄무레한, 동중서의 천인감응설은 후대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할 때 조선에서 세종 시절에 열심히 혼천의 만들어서 천문관측한 것은 뭐가 되는가? 동아시아 과학사를 언급할 때 서양 학자들도 한반도 얘기는 거의 하지 않다가도 조선 세종 시절의 업적은 어지간해선 반드시 넣을 만큼 동아시아 과학사의 쾌거에 속한다. 조선은 본격 유교국가였으므로 이를 볼 때 유교가 뭐 본질적으로 과학, 혹은 각을 좁혀서 천문학을 탄압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얘기할 수는 없다.

또한 이를 본격적으로 대비해 보고 검증하기 위해서는 우주를 과학적으로 검증해 보려던 밀레토스 학파, 피타고라스나 유클리드가 제시하는 수학적 우주관, 플라톤이 중시한 수학, 아리스토텔레스가 정립한 논리학에서부터 시작하고 또 동양으로는 묵가, 도가, 유가의 비교부터 시작해야 되는데... 아무튼 얘기할 수 있는 건 유교는 서양 기준으로 정치철학, 윤리철학적인 면이 강하므로 어쨌든 진리 그 자체, 참 그 자체, 수학 그 자체를 탐구하기 좋아하는 서양의 사상과는 좀 차이가 있긴 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평가하려는 시도 자체는... 어쨌든 좀 정밀했으면 좋겠다는 희망이 있다.

사(士)의 경우, 즉 관료 및 공무원 계층은 국가를 총괄하는 마스터플래너이자 기득권층이므로 어느 사회에서나 우대받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문(文)적 자질을 지닌 지식인층을 공고화된 학습 체계를 통해 재생산하며, 결과적으로 실용 지식과 거리가 멀어지는 현상은 유교 문화권에서 강하게 나타난 현상이다. 유교의 영향으로 빠르게 이루어진 교육 시설의 보급과 학습 체계의 형성은 선진적이었다고 할 만하지만, 그 내용 차원에서는 신분제 및 안정된 사회와 결합하면서 기존 질서의 유지와 실용 지식과의 괴리를 불러왔으므로 복합적으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한편 전통 시대 다른 지역의 대다수 지배층들은 무력으로 권력을 유지하여 그 과정에서 피지배층들에게 피해를 준 반면, 상대적으로 유교 문화권에서는 학문에 권위를 둠으로써 동시대 어느지역보다 상대적으로 합리적인 통치를 가능케 했고 지배층 내부의 갈등에 의한 사회적 피해를 최소화하였다는 의견도 있다. 또한 유교 이념 내부에 존재한 빈자에 대한 구휼, 약자에 대한 보호 등의 순기능적 이념은 사회 안정에 기여했다. 그러나 유교 국가들 역시 피지배층의 불만을 공포로 잠재우기 위해 능지형, 거열형, 오체분시 같은 가혹한 형벌을 실시했으며,[72] 말 안 듣는 노비를 때려죽이는 등 심각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책임을 면죄받는 지배층도 존재했다. 애초에 동아시아에서 명분은 유교에서 취했지만, 그 내용 면에서는 법가에서 빌려와 채워넣은 것도 많았으며, 엄밀하게 따지자면 껍데기는 유교, 알맹이는 법가였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본문에서 일관적으로 강조한 것은 현대의 시각으로 전통 사회에 걸려 있던 여러 가지 제약을 무시하고, 다른 문화권과의 공정한 비교 없이 전통 사회에 유교가 남긴 영향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지만 그것 못지 않게 전근대의 유교 이념을 무작정 '아름다운 전통' 운운하며 현재의 악습을 정당화하는 데 쓰여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다룬 여권 문제, 연장자-연소자 관계 문제, 직업 간의 귀천 문제 등은 현대 사회에서는 당연히 해소되어야 하는 문제점이다. 애초에 어느 사회에서나 다른 이념을 수용할 때는 엄정한 비판 하에 사회에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장점을 수용하고 단점은 받아들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상식이다.

유교는 현대적 정치 이념과 거리가 멀고, 그러한 정치이념 안에서 가정되는 보편성을 갖추지 못했다. 인간 본성론의 보편주의가 정치 영역에서 완전히 실현되지 못했고, 애초의 그 인간 본성론 자체가 현대와는 들어맞지 않다. 현대의 정치이념은 고정된 형태의 인간 본성을 가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통 사회의 구조와 당시 사회에 걸려 있던 여러 가지 제약에 대한 이해 없이 현대의 기준만으로 유교를 평가하는 것은 금물이지만, 무작정 유교의 이념 가운데 현대의 민주주의, 평등과 인권 사상과 유사한 점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납득하기 힘들다.

이러한 비판이 한국인의 정신문화에 있어서 몹시도 중요한 까닭은 아직도 유교적 헤게모니가 한국 사회에 끼치는 영향이 지대하기 때문이다. 현대적 정치 이념과 유리되어 있음에도 여전히 한국 사회에는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사실상 우리 세대까지도 유교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보는 게 옳다. 제사 등의 풍습에서 장유유서 등의 사회문화를 거쳐 하극상이나 효도 등의 일상언어에 이르기까지 떨쳐내기 어려울 정도로 깊이 뿌리박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단순히 유교에서 벗어나려기보단 조금이라도 더 정확히 유교와 현대사회 간의 괴리를 파악해내 좋은 영향은 현대 사회에 맞는 뱡항으로 잘 순화해서 보존하고, 유교가 끼치는 악영향을 떼어내되 무엇보다도 그 악영향의 빈 자리를 한국 사회와 잘 들어맞는 올바른 사상으로 메꾸면서 또한 이러한 것을 사회 일선에서 실천해 나가도록 시민사회 등과 연계해 나가는 것이 한국 유학에서 몹시도 시급, 중요한 과제가 아닐까.[73]

11. 유명한 유학자[편집]

11.1. 중국[편집]

11.2. 한국[편집]

11.3. 일본[편집]

11.4. 류큐[편집]

11.5. 베트남[편집]

12. 기타 관련 문서[편집]


[1] 이 번역은 동양사상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서양인들의 번역. 유학은 공자교가 아니다. 공자교라고 해도 '공자의 가르침'이지 '공자주의'로 번역될 수가 없다.하지만 유교에서 공자를 몹시 신성시하는 점만을 떼놓고 보면서 추단한다면 서양인들에게는 공자를 떠받드는 무리로 보였을지도? 이를 고려하여 서양쪽에서도 실제로 동아시아 학계 내부와 소통하며 한자 문화권의 내재적 관점을 의식하고 있는 학자들은 유교를 표준 중국어로 직역한 Ruism, Ruist 등으로 번역하려는 시도가 있으나 아직까진 별로 호응을 받지 못하는 실태이다. 아무래도 의미 상의 왜곡이 좀 있다 한들 특정 인물과 직접 연관되어 그나마 개념이 구체적으로 확실하게 전달되는 '공자주의'에 비하면 귀에 잘 붙지 않는 모양이다.[2] 물론 이쪽은 도가와의 관계 문제도 있긴 하지만[3] 공자 스스로는 '북극성이 제자리에 있고 여러 별들이 이를 받들고 있는' 것으로 묘사했다(爲政以德、譬如北辰居其所而衆星共之). 즉 왕은 제 자리에서 제 역할을 해야 하고, 제후들은 이를 잘 받들어야 한다는 것이다.[4] 정명론을 서양의 운명론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동양에는 서양에서 말하는 처음부터 끝까지 프로그래밍되어 있는 운명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5] 애초에 천도라는 개념 자체가 제자백가가 형성되기 이전인 주나라 시대부터 전해져온 개념이다. 주나라의 신은 천(天)이었고, 이 천이 주는 운명이자 사명을 천명(天命), 그리고 이를 실행해 나가는 바람직한 '길'을 천도(天道)라고 한다. 이 개념은 제자백가 거의 모두가 공유했다. 문제는 천이 정해준 바람직한 길이 무엇이냐는 것이고, 법가 수준에 이르면 천의 역할을 거의 부정하는 단계까지 나아간다.[6] 가끔 이렇게 공자가 유가의 모범을 과거에서 찾았다고 하여 유가의 연원이 과거에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식의 이해라면 르네상스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에 시작되었다고 말하는 것도 가능하다. 당연히 르네상스는 그 시대의 사회상에 맞게 고대의 사상을 취합한 것이므로 이러한 설명은 부당하다. 유가 사상도 과거의 '모범적인' 기틀을 춘추시대 당시의 기준에 맞게 이용한 것이므로 유가 사상이 확립된 것은 춘추시대, 특히 공자에 의해서라고 말하는 것이 맞다.[7] '공자는 공자교가 아니고 유교이므로 공자 대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나 이것은 유가만의 주장에 가깝다. 이슬람교가 '무함마드교'가 아니라고 해서 무함마드에 의해 창시되었음을 부정할 수 있는가? 공자무함마드는 당대에 인간의 이상적인 상이 되는 '유(儒)'와 '이슬람'의 개념을 창조한 것이므로 타자에게서는 무리 없이 유교/이슬람교를 '창시했다'는 말로 표현되는 것이다.[8] 물론 노자의 판본 같은 경우에도 곽점묘 죽간본과 마왕퇴묘 백서본의 출토로 후대의 첨가 및 윤색이 뚜렷함이 확인되었으나, 위에서 인용한 노자의 문구는 현재 통용되는 왕필본 - 죽간본 - 백서본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문구다.[9] 본래 天이라는 문자를 보면 알 수 있는데, 영락없이 사람 형상이다.[10] 법가 통치는 철저히 중앙의 일원적 질서(이는 법으로 나타난다)에 의거한 전국의 직할 통치가 이루어져야 실행할 수 있는 체계다. 이를 위해 진시황이 전국에 도로를 깔고 수레의 바퀴 규격까지 하나로 통일했던 것이다. 하지만 광대해진 제국의 영토는 자연히 지방과 중앙의 연결을 약화시키면서 법가의 통치 효율을 떨어뜨렸다.[11] 덕분에 고대에 사용되던 언어에 대한 연구도 이루어져 이때부터 원시적인 자전도 나왔다.[12] 理, 본래 불법을 가리키는 불교 용어이나 많은 중국식 불교 용어가 그러하듯 본래 중국에 존재하는 단어나 개념 등을 차용한 사례이기 때문에 오히려 유교 측에서 역수입이 가능했다.[13] 뒤의 주자는 주희, 즉 흔히 알려져 있는 주자를 가리키고, 앞의 정자는 이정(二程), 즉 주희보다 선대의 성리학자인 정호, 정이 형제를 가리킨다.[14] 원나라는 신분제를 인종따라, 직업따라 나뉘었는데 남송인이 가장 천대받았으며, 그 중에 성리학자는 완전히 천 취급이었다. 허나 원나라의 수도였던 대도 중심으로만 이 정책이 유지되었을 뿐이지 중국 전역에 이 정책이 시행되지는 않았다. 애초에 몽골 제국은 정복은 해도 다스리지는 못하는 제국이었다.[15] 흥미롭게도 '과학'이란 말이 일제시기에 처음 도입되었을 때에 science의 다른 번역어로 '격물학'이라는 말과 경쟁했다. 승리한 말이 무엇인지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16] 그러나 서로간의 다름을 변별하려는 이 노력 또한 조금은 뜬구름처럼 보이는 게, 결국 구체적 행동이나 수양원리에 있어 둘의 동일성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심즉리라 하여 마음이 곧 이치라면, 모든 사람이 자기 마음가는 대로 행동해도 된다고 한다면 삼척동자라도 비웃을 터이다. 결국 왕양명도 심즉리라 하나 우리의 마음이 진정 원하는 바,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등등을 운운하는데 이 부분에 이르러선 주자의 리와 기를 둘로 나눈 주자와 별로 다를 바가 없다. 그렇다고 아주 같은 건 아니지만...[17] 심영 말고 전국 시대의 사상가 고자. 즉 심학 계열은 공자의 정통이 아니고 고자와 일맥상통하는 이단적 학파란 얘기다.[18] 심지어 무신정권 전반기 최고의 풍운아인 이의민 조차도 이들과의 연대가 매우 중요함을 알고있었다.[19]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신진사대부와는 달리 훈고학을 기반으로 한 세력이 최우가 등용한 사대부들이다.[20] 원 간섭기때 부터 고려 후기대에 이르기까지 사대부들이 중앙정치의 전면에 등장한 적은 거의 없다. 유일한 시기가 위화도 회군으로 인해 이성계의 신군부가 들어서고 난 다음부터의 시기[21] 아이러니 하게도 이러한 정책의 기반을 마련한 것은 다름아닌 그들과 그들의 후손격인 조선의 사대부들까지 무한대로 씹어댄 신돈이었다. 결국 신돈이 숙청 당한 후 원상복귀[22] 이는 당시 신진사대부들의 상황과 연계를 해야 하는데 이들은 신돈의 옹호하에 성장한 세력이지만 결국 신돈을 부정할 수 밖에 없는 입장이었고 마침내 신돈이 숙청 당하고 다시 등장한 권문세족들에 의해 처참한 패배를 당하고 만다. 옹호 세력이라고는 없는 상황에서 공민왕만을 바라보던 신진사대부 입장에선 공민왕에 대한 실망감이 이루 말할 수 없었을듯[23] 하지만 최영은 이전의 무신정권 집정자들과는 달리 도평의사사를 비롯한 정부 기관을 깔아뭉개며 권력을 유지하지는 않았기에 무신정권 집정자들과는 다른 평가를 받는다.[24] 신진사대부들의 입장에서는 이성계는 개경에 안정된 기반을 마련하고 있던 최영과는 달리 동북면이라는 깡촌을 기반으로 하고 있고 있는데다가 믿을 것이라고는 사병을 위시한 군사력에 불과해 충분히 자신들이 컨트롤 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기꺼이 이성계를 지원했다.[25] 이것이 이성계의 한계였다. 분명 본인도 막연한 야심을 가지고는 있었으나 이를 실행할 방법을 몰랐으며 이를 받쳐줄 세력또한 없었다. 그의 입장에선 분열된 사대부들의 논쟁을 그저 지켜보는 방법밖엔 없었다. 여기서 변수로 작용한게 이방원.[26] 물론 조선 초기에는 부분적인 불교진흥정책이 있기도 했지만, 신라나 고려 때에 비하면 불교에 대한 대우가 하늘과 땅 차이로 떨어진 것은 분명하다. 가령 신라나 고려 때는 도성 내에 황룡사흥왕사 같은 수천의 승려가 거주하는 국가사찰이 존재했지만 반대로 조선시대에는 사찰의 도성 내 건립 자체가 구한말까지 사실상 금지됐다. 자세한 사항은 숭유억불 문서 참조.[27] 정도전이 주례를 참고하여 조선경국전을 만들었으며, 그것이 경국대전의 근간이 되었다.[28] 정책적으로는 세종대에도 여러 억불정책을 펼쳤고, 세종 개인적으로는 불교를 믿기도 했다.[29] 대표적으로 서인의 창시자인 심의겸. 그는 명종의 처남으로, 엄밀히 말하자면 외척세력이자 '훈구파'라 불리게 되는 집단 소속이다. 다만 원래부터 친사림적 성향으로, 명종의 명령으로 율곡학파를 끌어모았기 때문에 사림파로 취급받은 것.[30] 여기서 道는 도교의 의미가 아니라 사림파 스타일의 성리학이다.[31] 측은지심, 사양지심, 수오지심, 시비지심.[32] 희, 노, 애, 락, 애, 오, 욕.[33] 원래는 승려로, 강항의 가르침을 받고 성리학자로 전직을 했다. 이 사람의 초상화를 보면 완전히 이황 코스프레다. 흠좀무[34] 정작 세이카는 관직 진출을 아예 하지 않았다. 도쿠가와 이야에스가 그에게 관직에 나설 것을 종용했지만 이를 거절하고 자기 제자인 라잔을 보낸 것. 말하자면 조선 후기의 산림과 비슷한 행보라 할 수 있다.[35] 이는 이유가 간단한데, 조광조 일파가 향약을 널리 보급하여 서원과 함께 사림파의 기반을 단단히 하여 결국 사림파의 세상으로 만들었듯, 자신들도 조광조 시절의 사림들을 따라해 향약과 서원을 강화하여 훗날 남인의 세상이 되는걸 준비하는 것이다. 이러한 풍조는 향쟁(鄕爭)이 벌어지는 것과, 사원을 남설하는데 원인이 되었다. 물론 조선 후기부터 향청이 수령이 지배하게 되어 수탈자문기구로 변하면서 구향(舊鄕)의 향촌지배력이 약화된 탓도 있다.[36] 원래 윤증은 송시열의 제자이긴 하지만, 아버지부터 송시열과 학문적 대립이 있어왔던 윤선거였으며. 윤선거의 아버지가 성혼의 제자 윤황이었기에 윤증은 율곡학파의 가르침을 받은 우계학파인 셈이다. 물론 윤증은 송시열과 키배도 있지만 그가 윤선거의 묘갈(墓碣)을 대충대충 쓴 것 때문에 제대로 어그로를 끌어 사제관계가 완전히 끊겼다. 여기서는 술이부작 참조바람. 참고로 윤증의 본가인 파평 윤씨는 고려시대때 지체높은 문벌귀족이었다.[37] 과거 국정 국사 교과서에선 세도가문이 고증학에 치우쳐 현실 개혁 의지를 잃어버렸다는 구절이 나온다.[38] 근현대사에 대해서 한국종교문화연구소의 연구를 바탕으로 했기에 종교학적이라고 언급했다. 다른 연구소의 내용이 있다면 추가하길 바란다.[39] 류큐 왕국 사람들은 중국식 이름인 카라나(唐名)와 일본/류큐식 이름인 야마토나(大和名)를 함께 사용했다. 테이 쥰소쿠는 카라나며, 그의 야마토나는 나구웨카타 쵸분(名護親方寵文)이었다.[40] 육유(六諭)란 명 태조 홍무제가 유교적 덕목을 바탕으로 발표한 여섯 가지 교훈들인데, 여기에 해설을 붙인 것이 육유연의다.[41] 寺子屋, 조선의 서당과 비슷한 초등 교육기관[42] 고려 시대때 한국에 정착한 이용상이 리 왕조의 왕족.[43] 리 왕조의 수립을 지원한 공신 중 한명이 승려 리반하인(Lý Vạn Hạnh, 萬行法師)였다.[44] 주공공자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는 성인이라고 주장하며 쩐 왕조의 섭정을 하고 있던 자신을 합법화했고, 황위 찬탈 이후에는 호꾸이리 자신을 순 임금(...)과 동일시 했다.[45] 개국공신인 응우옌짜이가 저명한 유학자였다.[46] 한자문화권인 베트남과 달리 참파는 인도 문화권.[47] 사실 이것이야말로 철학의 주종목이다. 거칠게, 농담삼아서 얘기하면 소크라테스의 작업은 단어 개념정리를 똑바로 해야지 우리가 선량하게 살 수 있지, 사람따라 이 말이 저 뜻 저 말이 이 뜻이면 사회가 혼란해지는 거 아니냐는 얘기이고, 플라톤은 아예 한 결 더 나아가 개념이라는 게 있는데 말이야... 잘 생각해 봐 이건 독립적인 존재야 너 나무를 보면 그게 무슨 나무던지 간에 그게 나무인 거 알지? 그럼 우리가 나무를 보면 나무라고 알 수 있는 그 무언가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겠어? 그러면 그 개념이란 것이 존재한다면, 정의라는 것도 존재하는 거 아니겠어? 동양으로 생각해 보면 명가의 인물들이 단어의 개념을 정리하면 혼란이 종식될 것이라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48] 실제로 제사 지내는 과정에서 읊는 발주문은 혼백을 마치 인격체처럼 대하면서 후손의 번영과 안녕을 기원하는 성격이 강하다. 이쯤 되면 순수한 기라기보다는 독자적인 의지와 행사력을 갖는 혼령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또 49제 같은 풍습도 불교의 영향으로 내세관을 도입한 결과라 할 수 있다.[49] 따지고 보면 유교도 외국인 중국이 기원이지만, 정치적으로는 외국이었지만 사상적으로는 중국을 외국이라고 보지 않았다.[50] 그러나 유학동양학과 학생이 아닌 대부분의 성균관대학교 학부생들 사이에서 유교에 대한 취급은 더도 덜도 아니고 딱 2학점짜리 졸업 필수 교양과목이다. 다만 PF 과목이 아니라 학점이 부여되는 과목이다.[51] 다만 과거에는 유학과가 있었다. 하지만 2002년 학과 통폐합 과정에서 한국철학과, 중국철학과, 유교철학과가 합쳐져서 현재의 유학동양학과로 편제되었다[52] 그러나 현재 교수진의 전공을 보면 일부 윤리학 전공을 제외하고는 모두 유교를 전공으로 하고 있으므로 실질적으로는 유교을 가르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불교 및 도교 관련 강의는 다 합해도 한 학기에 3개 이상 개설되는 경우가 없다.[53] 분량이 짧기에 책도 같이 출판되고, 수업도 한 학기에 끝낸다.[54] 2013년에는 맹자 강의가 수강인원 미달로 폐지된 적도 있었다.교수님들의 분노가 장난 아니었다 카더라[55] 이들 모두 전공핵심(전공기초) 과목으로 애초에 심화과목으로 개설되지도 않았으며, 경전 수업을 하나도 수강하지 않고 졸업이 가능할 뿐더러 이를 선호하는 학생도 상당수이다.[56] 문행 장학금이 확대되기 이전인 2012년 이전에는 입학 이후에 학부생이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전액 장학금 제도였다.[57] 의무적으로 참여해야 하며 방학 때 서원에 가서 놀고먹고집중적으로 공부하며 시험도 본다.[58] 주로 국어, 국사, 한문, 윤리 과목이 포함되어 있었다.[59] 마지막으로 존속했던 2011년도 입시에는 '동양학 인재 전형'으로 있었다.[60] 이 때 부터 한자 자격증이 있으면 들어갈 수 있다는 말이 나온 것으로 보인다.[61]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인문과학계열에서 가장 인기 많은 영문, 중문, 국문, 문정과와는 다르게 항상 자리가 남기 때문에 인문과학계열에 입학만 하면 전공진입은 쉽다.괜히 전공예약생을 뽑는게 아니다. 단과대 유지는 해야지[62] 유학대학의 경우 일반대학원에는 옛 편제가 남아 있어서 유교철학과, 한국철학과, 동양철학과로 나뉘어져 있고, 특수대학원으로서 유학대학원도 있다. 다만 진짜 학문을 하려면 일반대학원을 가야 한다. 특수대학원은 학문을 한다기보다는 교양과정의 업그레이드 수준에 머무는지라.....[63] 유교의 제사는 현대에는 비판 받는 대상이지만, 최초로 유교식 제사 의식이 주창된 춘추시대에서는 분명 어느 정도 가치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춘추시대의 혼란 기에는 아직 후대의 도교처럼 엄밀한 종교의 체계는 갖추지 못했으나 지역마다 등의 잡다한 신(神)을 섬기는 신앙이 상당히 번성한 것으로 보인다.[64] 문제는 이러한 숭배 의식이 무당의 지도를 받아 상당히 폐해를 끼치고 있었다는 점이다. 개 중에는 (실제로 춘추시대 이전의 풍속이 잔재한 것일수도, 새롭게 나타난 것일수도 있지만) 상나라의 풍속처럼 사람을 신에게 바치는 인신공양을 하는 숭배 의식마저 있었다. 예를 들어 황하하백에게 바치는 제사는 사람을 강에다 던져버리는 인신공양 의식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유교에서는 지속적으로 이러한 제사를 '음사(淫祀)', 즉 사악한 제사이며 복을 받을 수 없다고 하며 배척하고 (주나라의 의식에 기초를 둔) '올바른 제사'를 강조했다. 결국 전근대 시대에 유교의 제사 의식은 신을 빗대어서 벌이는 사이비 종교 풍속에 어느 정도는 제동장치가 되어주기는 했다.[65] 물론 유교식 제사가 가치가 있었다는 주장은 야만과 인신 공양 풍습이 남아 있던 춘추시대에서나 가능한 얘기라고 할 수 있다. 세계 각지에서 근대화와 계몽화가 이루어지던 조선 시대만 놓고 따져 봐도 제사 문화의 악습은 커버치기가 힘든 부분이다.[66] 일단 승려들의 공식적 신분은 정해지지 않았다. 천민취급도 사회적으로 규정된 팔반사천(八般私賤)중 하나로서 동급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허나 승려들에 대한 강제 부역이나 도첩제 등 여러가지 심각한 불이익 때문에 사실상 천민 취급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참고로 조선 당시에도 부역의 노동환경은 극악에 가까워 사망확률이 꽤 높았다.[67] 기존의 글에는 유교의 부활은 단순한 문화 복원 차원이라는 기술이 있었다. 하지만 현재 빠른 경제 성장으로 인하여 중국 내부 모순이 가중되자 본격적으로 유교의 상호 공존의 가치를 주목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에 따라 중국 정부는 정부의 주도하에 공자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가 제작되고, 대외 한어 학원의 공식 명칭을 공자학원으로 하며, 공자 제사를 집행하는 등 다른 문화 복원보다 더 큰 비중을 두고 유교를 복원시키고 있다. 단순히 문화 복원의 차원으로 격하시키는 것은 섣부른 진단이다.[68] 분서갱유는 후대 유학자들이 왜곡한 거지만 실제로 큰 타격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69] 공자의 일상생활을 설명한 10장 향당(鄕堂)편 맨 마지막 구절이 대표적인 예인데, 수레를 탈 때의 자세를 적은 구절 뒤로 뜬금없이 '사람 기척을 느낀 꿩들이 곧 날아 올라 빙빙 돌더니 다시 내려 앉았다. 공자가 말했다. "산마루의 꿩들이 때를 만났구나, 때를 만났어!" 자로가 꿩들을 향해 두 손을 모으자 꿩들은 다시 힘차게 날개짓을 하고 가버렸다.'라는 아무 부연설명도 없고 장의 전체 내용과 맞지도 않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 구절을 두고 수많은 유학자들이 무슨 의미인지 파악할려고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현재는 이 구절의 앞뒤에 무엇인가 내용이 있었는데 사라져 버리고 이 구절 역시 오자 등으로 변질되어 원래의 의미파악이 힘들어졌다고 본다.[70] 증자는 사람들이 "칠거지악에 속하지 않는다" 라고 말렸음에도 불구하고 밥을 설익게 지어 계모에게 봉양한 죄로 아내를 내쫓은 경력까지 있다.당시 유학자들에게 여성차별은 이미 뿌리깊게 박혀 있었다.증자 자신은 "난 그렇게 생각안함" 이라고 변명했지만 밥 설익게 지었다고 쫓아내다니 흠좀무[71] 이웃나라인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2, 3년차는 그냥 친구뻘이다. 실제로 나이가 한 살 많은 중국사람에게 깍듯이 존댓말을 썼더니 오히려 부담스러워했다는 이야기도 있다.[72] 어차피 유럽도 딱히 나을 건 없었다.교수척장분지형이나 화형같은 걸 보면.[73] 예를 들어 변질된 유교적 전통 항목에서 장유유서의 폐해를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이 지적은 별 의미가 없다. 왜냐면 장유유서의 옳고 그름이나 의의에 대한 판단 작업의 시작은 일단 철저히 유교적 맥락에서 파악되어야 하는 까닭이다. 한국인은 오랜 세월 동안 장유유서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어서 이 문화로부터 분리되기 힘든 것은 명약관화하다. 이를 위해서는 좋고 그름 및 폐해 척결이나 새로운 문화 도입에 대한 방법론을 주창하지 않고서 그저 장유유서가 나쁘다고 떠드는 것은 옆집 초등학교 3학년도 가능했었던 게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러한 판단 작업을 필요로 하는 것은 비단 장유유서만이 아니다. 다시 장유유서를 예로 들어 보자면, 21C 초반 한국사회가 가지는 장유유서에 대한 무조건적인 존중이나 무비판이 명백히 잘못되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이런 유교적 가치들은 기타 유교적 원칙이나 나머지 삼강오륜을 비롯한 여러 유교적 가치관들이나 원칙 등과 함께 체계적이고 유기적으로 작동하라고 만들어진 원칙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장유유서는 유교적 맥락 속에 활용되지 않으면 그 의미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 전통에 힘입어 장유유서만이 무비판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현재 한국 문화의 실정은 명백히 잘못된 것이다. 이와 같은 연구가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는 당연히 유교적 배경과 현대적 배경을 동시에 살펴보며 비판해야 되는 지점이므로, 한국사회는 지금 유교에 대한 깊은 식견과 연구를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다.[74] 베트남 최초로 베트남과 중국 양국의 과거에 동시에 합격했다. 덕분에 원나라에서 양국장원(兩國壯元)으로 불렸고 고려 사신들과 친분이 있었기에 고려를 방문하기도 했다.[75] 유학자인 동시에 중국의 침략과 식민 지배에 저항하여 무장 독립투쟁을 하던 사람이기도 했다. 결국 명나라를 몰아내고 후 레 왕조(1428년 - 1788년)를 만든 개국공신이 되었다. 난후도곤산감작이라는 한시로 유명하다.[76] 유학대학 유학동양학과에서 유교를 계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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