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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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육군 보병

싱가포르 전투에서 일본 육군 97식 전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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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10월 쇼카쿠에서 발진 대기 중인 제로센

후소급 전함 1번함 후소

일본군 / 구일본군
日本軍(にほんぐん) / 旧日本軍(きゅうにほんぐ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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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제국 육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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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제국 해군기

창립

1871년 1월 4일(메이지4년)

해체

1945년 9월 2일(쇼와20년)

본부

육군성: 도쿄도 우시고메구(현 신주쿠구)
해군성: 도쿄도 고지마치구(현 지요다구)

대원수

메이지 덴노(~12년)
다이쇼 덴노(~26년)
쇼와 덴노(~45년)

육군대신

오야마 이와오(초대)
시모무라 사다무(마지막)

해군대신

사이고 쓰구미치(초대)
요나이 미츠마사(마지막)

참모총장

아리스가와노미야 다루히토신노(초대)
우메즈 요시지로(마지막)

군령부총장

니레 카게노리(초대)
도요다 소에무(마지막)

병영형태

징병제(20세남성부터 3년제)

편제

일본제국 육군(Imperial Japan Army, IJA)
일본제국 해군(Imperial Japan Navy, IJN)


1. 개요2. 역사3. 최고 통수권자4. 계급5. 편제6. 문제점7. 전쟁 범죄8. 근대화의 선봉9. 일본군 육군과 해군의 관계10. 보급
10.1. 외양10.2. 실상10.3. 콩나물과 관련된 일화
11. 각종 부조리 및 악행과 그 원인
11.1. 구타11.2. 휴가, 휴식과 재충전의 박탈
11.2.1. 휴식과 재충전 기회의 박탈에 대한 보상: 음주, 약물, 일본군 위안부, 가혹행위
11.3. 부정부패 및
12. 한반도의 일본군
12.1. 개관12.2. 조선 군인12.3. 한반도와 남만주의 일본군 만행
13. 결론14. 대중 매체15. 기타 관련 문서
15.1. 참고 서적15.2. 조직체계, 계급체계, 주요 인물, 무기체계15.3. 관련 학설15.4. 관련 전투 및 사건15.5.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일본 제국 시절의 군대이자 일본 자위대의 실질적인 전신

동아시아에서 무차별한 전쟁범죄를 저지른 역사상 최악의 군대 중 하나

말 그대로 일본의 군대를 의미하지만, 현대 일본의 국가 방위를 책임지는 단체인 자위대는 비록 조직도 역할도 사실상 군대이지만 법적으로는 군대가 아니라 준군사조직이기 때문에 이 '일본군'이란 칭호는 자위대가 아니라 그 이전, 1945년 8월 15일 패망하여 완전히 해산하기 이전의 일본 제국의 군대를 의미한다. 종종 그 일제의 군대는 옛 일본의 군대라 해서 구 일본군이라고도 하지만, 상기한대로 자위대는 군대로 취급받지 않기 때문에 그냥 "일본군"이라고 해도 구 일본군을 지칭하므로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따라서 일제의 군대는 보통은 그냥 '일본군'이라고 칭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정확한 표현이다. 당시 그들이 자칭하던 정식 명칭은 "대일본제국 육군"과 "대일본제국 해군"이었지만 보통 칭할 때는 이렇게까지 길게 부르지 않는다.

아니면 황군이라는 표현이 많이 나오는데, 이는 "천황의 군대"라는 뜻이다. 그 앞에 '무적'이라는 수식어는 꼭 붙였는데, 참고로 황군이라는 표현은 30년대 초에도 생소했다. 하지만 이들의 패악질 때문에 중국인들은 대륙을 점령한 일본 육군의 신멸작전으로 대변되는 수많은 약탈 행위를 보며 누리 황(蝗)자를 써서 황군"", 즉 메뚜기 같은 군대라고 부르며 이를 갈았다고 한다.

2. 역사[편집]

해당 문서 참고.

3. 최고 통수권자[편집]

메이지헌법에 따르면 일본군의 최고 통수권자는 덴노다. 이는 원조인 독일 제국 헌법과 같다. 아니 심지어 영국도 군 통수권 자체는 국왕이 쥐는만큼 군주제 하에서 이 조항만은 오늘날에도 의외로 보편적이다. 그러나 이는 일본의 군국주의화를 촉진하는데 기여한 조항으로 볼 수 있는데 총리 이하 민간 정부가 육해군에 대해 지나치게 간섭하면 통수권 간범이라는 명목으로 디스를 할 명분을 제공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메이지 덴노 당시의 일본은 그저 원로와 웅번 출신 정계 거물들의 과두정에 가까웠는 바 이 조항은 그저 상징적인 의미에 불과했다. 이 시절에는 군정계의 거물들이 이전에 한솥밥을 먹던 처지라 나름 일치단결해서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했으니 문제는 되지 않았다. 그러나 1910~20년대이래 이런 거물들이 자연사하고 원로나 거물 정치인과 군인 간 네트워크가 끊기면서 문제는 불거졌다.[1]

당장 워싱턴 조약, 런던 조약 당시 해군력 제한으로 타격을 받은 해군이 민간 정부를 이러한 명목으로 공격했다. 덕분에 민간의 영향력은 꽤 약했으며 오히려 전현직 장성들이 이러한 영향력을 이용해 총리대신이나 각 부 대신[2]을 해먹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민간정부에서 군을 통제하는 시늉만 해도 바로 육군대신과 해군대신들이 나가버려서 내각을 붕괴시키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고, 나중에는 이누카이 츠요시처럼 총리를 암살할 정도로 막나갔다.

도조 히데키는 이러한 시스템 하에서 특기할 수 있는데 본인이 육군 내에서 상당한 거물이었고, 각종 대신을 본인이 겸임한 체제 하에서 독재적 권한을 행사했는데 이러한 영향력은 심지어 메이지 헌법에 명시된 덴노의 통수권마저 위협할 정도로 강했다는 지적이 적지 않았다. 심지어 도조 히데키사이판 전투 패배로 사퇴 후에도 여전히 막후 영향력을 행사했다. 다만, 그 도조 히데키도 해군은 어찌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역사로 말미암아 현행 일본국 헌법 하에서 통수권은 총리대신에게 있음을 규정하게 되었다.

4. 계급[편집]

5. 편제[편집]

6. 문제점[편집]

해당 항목 참조.

7. 전쟁 범죄[편집]


해당 항복 참조

8. 근대화의 선봉[편집]

2차대전 때 저지른 온갖 구시대적 악행이 익히 알려진지라 유명하지는 않지만, 일본의 개화기의 최선봉에 선게 일본군이었다.

비록 보신전쟁에서 최신식 문물이 들어왔지만 보신전쟁의 신식 문물은 신식 총기같은 무기류에 집중되어 있었고, 그나마도 전쟁에 참여한 병사들은 대부분 무사 출신의 사족들이라서 일반 백성들에겐 신식 문물 전파가 없다시피했다. 하지만 일본군이 창설되고 대대적으로 징병제가 실시되기 시작하자 일본 백성들에게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육식을 거의 하지 않고 채식과 어류만 즐겨먹던 일본인에게 일본군은 육류를 배급하여 제대 후에도 고기를 찾는 사람이 대폭 늘어나게 하였고, 게다짝이나 짚신을 신던 사람들에게 구두를 지급했으며, 일본식 옷만 입던 사람들에게 최초로 서양식 옷을 입게 해주었다.

또 당시 대부분의 일본인이 처음으로 기차를 타게 된 이유가 군대 입영때문이었으며, 굉장히 낮았던 성관계 시작 연령도 군대 입영 검사 이후까지 늦추게 되었다. 문제는 입영검사 후에 너도 나도 매춘굴로 가는 바람에 정작 입영할 때엔 성병에 걸려있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일단 군대에서 군인으로 쓰려면 일단 글자는 알아야 했으므로 기초적인 교육을 실시해주기도 했다.

또 아무리 무지렁이라도 하사관이나 상등병을 달고 제대하게 되면 시골에서 한자리를 꿰찰 수 있게 되는 등 나름대로 신분 상승의 기회를 주기도 했다.

문제는 딱 여기서 멈춰버렸다는 것. 근대화의 시동을 거는 것까지는 훌륭하게 해주었으나 거기서 멈춰버리고 되려 민간사회의 발전도 막아버리는 참사를 일으키게 되었다.

9. 일본군 육군과 해군의 관계[편집]

일본군의 해군과 육군은 서로 협력을 전혀하지 않는다. 실제로 일본제국이 삼국 동맹 조약을 맺기까지 일본제국내에는 혼란이 많았다. 미국의 유학파이소로쿠, 시게요시미츠마사가 강력히 반대하자 유명해졌다. 그러자 한 신문사에서 해군좌파3인방이라 비하하기까지 했다. 또한 일본제국의 해군성에 일본제국의 육군이 군사를 이끌고 포위하거나, 위협하기도 했다. 일본제국이 미드웨이해전에서 대패하자 점차밀려나게 되자 육군성은 해군성과 해군에 스파이를 보네서 일본제국해군이 미드웨이 해전에서 패전한걸 알게되었다. 일본제국내에는 미드웨이해전 승리라고 보고했었다.

10. 보급[편집]

10.1. 외양[편집]

20년대부터 개선이 시작되어 27년에 드디어 취사병이 채용(...) 되어 30년대부터는 제대로 된 식사를 할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개선으로 인해 군대에 대한 지원율이 높아질수있었다.[3]

그 이후로부터 중일전쟁이 본격화되기 전의 일본군은 서류상에서는 제대로인 주둔지에 있다면 보급과 복지 수준이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고 한다. 식사는 다양한 종류의 고기채소, 생선, 간식 등이 매 끼에 있었고 그 양도 결코 적지 않았다. 간식으로는 사이다양갱, 찹쌀떡 등이 나왔다. 또한 서양의 커다란 건빵을 현재 한국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먹고 보관하기 좋은 모양으로 개량하는 아이디어를 생각해 낸 것, 그리고 일부 건빵에 별사탕이 들어가는 아이디어를 생각해 낸 것도 일본 육군이다.

최정예라 불리며 일본의 수도인 도쿄일본 왕궁을 지키는 근위사단의 시설은 준수한 편에 속했다. 내무실은 전부 침대형에 2층짜리 건물에도 엘리베이터가 있었다고 한다. 특히 1928년에 준공한 보병 제3연대의 병사가 대표적으로, 새로운 철근 콘크리트 4층 건물로 만들어졌다. 당시로는 최신식 엘리베이터 4대와 리프트 2개가 있었고 화장실은 모두 수세식, 난방은 모두 증기 난방을 채용하고 있다. 다만 입대해서 사용하는 병사들은 시골 출신자가 많고 수세식 화장실의 고장이나 엘리베이터의 고장이 속출하여 속을 썩었다"고 한다(<陸軍建立史>, <<銀星>>, 제6권,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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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는 반합을 당시 일본군도 사용하고 있었다. 32년에 제정된 92식 반합을 주로 사용했다. 이 반합은 M31로도 불린, 독일이 31년에 제정한 코흐게쉬어 31형 반합(Kochgeschirr 31)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야마토급 전함의 경우 아직까지 해먹을 쓰던 당대의 함선에 비교할 때 초호화급인 침대를 두어 야마토 호텔이라고 불렸으며 실제로 야마토와 무사시의 사관 식당은 전쟁 전 일본의 해운회사들이 운영하던 호화여객선의 식당에서 일하던 실력좋은 요리사들을 장교들이 급여를 십시일반해 고용해서 운영했다.

게다가 공간 절약이 생명인 잠수함도 승조원 대비 침상 비율이 1:1이었을 정도다. 미 해군 잠수함이 1.5~1.75:1 정도였으며 소형 잠수정크릭스마리네U보트는 2:1의 비율을 보인 것에 비해 엄청난 비율이다. 대신 반대급부로 일본 해군 잠수함들이 싣고 다닌 어뢰는 1척당 6~10발이 다였다. 그것도 수상배수량 3천 톤이 넘는 이호형 잠수함들이 그랬다. 2천 톤 대의 미국 잠수함들이 어뢰를 24발씩 탑재했고 배수량이 1천 톤도 안되는 독일 해군의 7형 유보트들도 14발의 어뢰를 챙겼던 것에 비하면 터무니 없이 적은 수량이다.

그리고 어느 정도 보급선이 닿는 한 본토의 국민들이 굶어죽는 한이 있어도 일단 군인부터 먹이고 봤다. 대신 태평양 전쟁 후기 일본 민간인들의 삶은 처참하기 그지 없었는데, 당시 일본 민간인들의 1인당 하루 식량 배급량은 약 300g 정도였는데 보통 사람은 하루에 600g 정도의 식량을 필요로 한다. 확 와닿게 설명하자면, 하루하루 밥조차 제대로 못 먹고 산다는 현대 북한 주민들이 하루의 300g 정도의 식량을 배급받고 있다. 즉, 필요량의 절반밖에 배급되지 않은 것이다.[4]

여기에 양조차도 모자란 배급 식량에는 쌀이 나오기는 커녕 이나 고구마조차도 없었고 전쟁 이전 돼지들 사료로나 주던 콩껍질이나 고구마 줄기 같은 게 잔뜩 섞여있었다. 여기에 4인 가족 기준으로 단백질을 공급해줄 정어리가 2마리 배급[5]되었고, 규정상 15세 이하 어린이와 60세 이상 노인에 한해 1달에 딱 1번 과자가 배급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실제 어린 시절 태평양 전쟁을 체험한 노인들의 증언으로는 그런 거 없다.

양도 질도 엉망인 무언가를 배급 식량이랍시고 받은 당시 일본인들은 소위 '천장죽'이라 부르는 을 끓여 먹을 수밖에 없었는데, 죽이 어찌나 맹물처럼 맑은지 천장이 다 비쳐보인다는 씁쓸한 농담에서 '천장죽'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반면 패전 직전의 야마토 승조원의 증언 중에는 "매운 카레라이스사과바나나, 마카로니가 들어간 사라다가 맛있었으며, 내가 이러한 것을 먹어도 되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는 말도 있다. 일본 해군은 육군보다 그나마 상식적인데다 전시 이전엔 지원으로만 수병을 뽑았기에 보급에 좀 더 신경 쓴 점도 있다.[6] 그러나 육군 역시 기본적으로는 해군과 마찬가지로 주둔지에서는 해군보단 좀 떨어지지만 민간 서민 식사 이상으로 좋은 급식을 받았다.

하지만 일본군의 보급에서 좋은 점은 딱 여기까지라서 문제다.

10.2. 실상[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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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의 보급이 정상적이었을 때에 잡힌 일본 육군 포로

일본군의 보급이 끊어진 후에 라바울에서 잡힌 기아 상태의 일본 해군 포로들


일본군이 잘 나갔던 시절에도 일본군은 야전취사 장비를 구비하는 데 이상하게 소극적이어서 전장에서 제대로 밥을 먹으려면 지급받은 쌀과 반찬으로 밥과 국을 만들던가 민가에서 징발해야만 했다. 게다가 식량은 보급하면서 식량을 조리할 연료는 알아서 구해다 조리하라는 식으로 일체 보급이 없어 개개인이 문자 그대로 알아서 연료를 찾아다녀야 했다.

이것은 제1차 세계대전 초반까지는 모든 군대가 비슷했다. 1차대전 초반 이전의 모든 군대는 식량을 던져주면 사병 개개인이 알아서 조리해먹는, 즉 재료만 던져주는 식이었고 삼삼오오 모여 당번을 정하든 혼자 해먹든 알아서 조리해 먹었다. 그러던 것이 1차대전 초반 이후 참호전으로 인하여 대군이 좁은 전역에 고착되어 연료가 부족하고[7] 더구나 연료가 있어도 조리 과정에서 발생한 연기로 인해 포격받기 일쑤인 상황이 되자[8] 후방에서 조리하여 전방으로 추진하는 식으로 바뀌게 된다. 그 이전에는 취사병이라는 병과 자체가 군의 정식 편제에 없었다. 취사병과가 보편화되고 그에 따른 야전취사 장비를 적절히 보급하는 게 일반화된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저 모양이었다는 것은 일본군의 수준을 바닥까지 보이는 것이다. '군대는 먹어야 진군한다' 말을 곰곰히 생각해본다면 초등학생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것이다.

게다가 일본군은 사방팔방에서 다수의 인원이 불을 피우고 조리를 하였기 때문에 대량의 연기와 불꽃으로 인해 부대의 위치가 더더욱 쉽게 노출되었고, 덕분에 나무가 무성한 정글에서조차 미군의 정찰에 쉽게 발각되어 탈탈 털리는 경우들이 상당히 많았다. 더구나 전문적으로 조리를 익힌 취사병들이 소량의 연료만 써서 대량으로 취사하는 것과, 소규모 단위로 전투병들이 사방팔방에 불을 피우고 찔끔찔끔 조리하는 것은 시간의 활용과 연료 소모와 음식의 품질 면에서 효율성의 차원이 다르다. 게다가 전문 취사병들에게 맡기면 다른 부대원들은 전투 임무에 더 효율적으로 투입되며 조리 시간의 제약과 취사의 부담에서 상대적으로 여유로워질 수 있다는 점에서도 재료만 던져준 것은 바보짓 그 자체였다.

더구나 다수의 인원이 연료를 구해 조리하는 과정은 주변 민가에 엄청난 민폐를 끼쳤고, 결국 군인들이 점령지의 식량만 약탈한 게 아니라 땔감으로 쓰려고 멀쩡한 문짝이나 가구 같은 것도 거뒀을 정도로 철저하게 수탈을 했고, 이는 반일의식을 고취시키는 원인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일본군은 약탈만 한 게 아니라 미군에게 협력했다는 죄목이나 기타 대단하지 않은 명목으로 수시로 민간인살해하거나 혐의자가 1명만 있어도 해당 마을을 완전히 없애버리는 식으로 잔혹한 지배 정책을 펴서 태평양 전쟁 전역에 미군과 협력하는 수많은 게릴라가 나오게 된다.

게다가 전쟁 중에 병사의 수가 급속히 팽창하여 수백만에 달하는 병력을 모으게 되자, 복지는 어느새 뒤켠으로 밀려나 버렸다. 게다가 연합군의 공격으로 결국 보급마저 끊겨 태평양 등지에서는 몇 달을 굶은 병사들이 마침내 포로를 죽여 인육을 먹는 사건도 자주 목격되어 연합군과 일본 양측에 상세하게 기록되었다. 게다가 배고파서 먹은 건 그나마 정상참작의 여지라도 있지 그냥 재미로 먹은 막장스런 경우도 존재하는데 조지 워커 부시의 아버지인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도 이것 때문에 죽을 뻔했다(치치지마 식인 사건 항목 참조). 중국 등에 주둔한 부대들도 민간에서 식량을 조달하는 것이 주요 업무들 중 하나였고 당연하게도 현지인들의 격렬한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식량 보급의 중요한 부분을 그런 조달에 의존하는 것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부터 거대한 규모로 팽창한 군대를 유지하기에는 부적합했다. 일본군은 아예 전선 후방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식량을 조달하는 둔전 부대를 따로 운영했고, 그러고도 모자라서 교전지 근방에서는 당연하다는 듯이 약탈로 일관했다.[9]

장교사병의 차이도 심각했다. 초기 일본군은 병사들에게 쌀만을 지급하고 부식을 살 돈을 따로 줬다. 그래서 가난한 병사들은 부식비를 모았다가 월급에 보태 송금했는데 이러한 탓에 쌀밥만으로 배를 채워야 했다. 결국 반찬 없이 백미로만 밥을 먹으니 영양 불균형으로 각기병이 유행했다. 이 때문에 청일전쟁러일전쟁에서 많은 병사들이 각기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2차대전 종전까지 병사들은 장교의 잔반이 사병 식사보다 낫다라는 소리를 할 정도로 장교들은 다른 반찬들이 잘 나왔기 때문에 그런 거 없었다. 또 장교가 사병의 식단을 착복한 사례도 있었다. 따라서 사병들의 식단은 장교들의 식단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악했다.

영양 문제는 위에서 나온 각기병이 유명하지만 이러한 비타민 문제를 빼더라도 문제가 있었다. 영양학적으로 쌀이 밀보다 영양의 균형이 좋고 생각보다 단백질이 많은 편이지만 쌀과 밀 둘 다 필수 아미노산이 적다는 문제가 있다. 동양 식단에서 이걸 보완해주는 게 , 그 가운데서도 간장이나 된장 종류다. 각기병 문제가 아니었더라도, 이러한 부식이 없는 식생활을 했더라면 나중에라도 단백질 결핍 등의 문제가 나타났을 것이다.

그나마 해군은 백미 외의 다른 부식류를 충실히 하면 각기병 발병율이 낮아진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았던 반면, 육군은 각기병은 영양불균형 때문에 생기는 병이 아니라 미생물전염병이라면서 그냥 쌀밥을 먹였다. 당시 육군 군의총감(軍醫總監)이었으며 일본의 대문호이기도 한 필명인 모리 오가이로 잘 알려진 모리 린타로 장군 때문인데, 그는 독일 유학 경험이 있는 저명한 의학박사였지만, 각기병 미생물 원인론을 신봉했던 것이 문제였다. 당시는 각기병의 원인이 규명되지 않았던 시절이었으나 당장 일본에서 각기병을 부자병, 에도병 등으로 불렀으며 이 에도병 증상이 나타날 경우 메밀소바[10]를 먹으면 증세가 나아지더라 하는 경험적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었다. 모든 민간요법이 무턱대고 따라할 치료법은 아니지만, 효과가 있음이 알려진 방법임에도 단순히 독일 의학계에서 검증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완전히 무시한 모리 오가이의 병크는 크다.

결과적으로 일본군은 일본군 육군한 상비사단 분의 해당하는 병력인 1만여 명이 각기병에 걸려서 사망하거나 전투에 참가하지 못한 반면, 일본군 해군은 각기병 발병자가 없었다. 이는 각기병의 원인이 비타민B 부족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1차 세계대전 이후로도 계속되었는데 해결책으로 제안된 현미보리 혼식이 당시의 서민층 식사여서 병사들이 심한 소외감을 느낀다[11]는 의견이 컸고, 또한 야전취사에서 현미 및 보리가 에 비해 상대적으로 조리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한국군 역시 한국전쟁 당시 야전취사를 할 때는 조리에 시간이 걸리는 보리를 빼버리는 일이 많았다. 특히 집단 취사가 거의 배제된 일본군의 특성상 보리는 줘봤자 제대로 조리할 여건 자체가 안 나온다는 것이 큰 문제였다. 이 말은 그냥 만 주고 밥은 각자가 해먹으라는 소리로, 주둔지와 야전에서의 식사가 극단적으로 차이가 나게 만든 원인이기도 하다.

이러한 영양학적 문제는 1943년 이후 갑자기 상대적으로 나아졌는데 그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보급 체계가 붕괴되면서 아무거나 먹어야 했기 때문이다.

종합하자면 일본군의 보급은 전쟁이 벌어지기 전이나 특정 부대나 주둔지 등 특수한 곳에서만 정상적이었고, 전장 등 나머지 장소에서는 기본적인 보급 상태가 굉장히 열악했다. 오죽했으면 미군으로부터 입수한 전투식량으로 연명한 부대의 영양상태가 더 좋았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 물론 제1차 세계대전미군영국이나 독일 시민보다 잘 먹던 사람들이지만 노획한 전투식량이 매일 전원에게 줄 정도로 풍족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는 걸 감안하면, 얼마나 보급이 빈약한지 짐작이 불가능할 정도다. 다만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의 보급은 매우 풍족한 편이었다. <영웅 김영옥>에서 김영옥의 회고에 따르면 유럽 전장에서 식량 배급은 말할 것도 없이 초콜렛, 담배와 같은 기호식품조차 중분히 보급되었고, 미8군 사령관이었던 벤 플리트의 인터뷰에 따르면 아이스크림과 같은 특식도 자주 나왔다고 한다. 태평양 함대는 한 때 보급 받은 전투식량이 너무 많아 고생한(...) 적도 있을 정도.

사실 처음부터 일본군의 기본적인 보급 자체가 다른 나라와 크게 차이가 났다. 주적인 미군은 1인당 4톤의 보급물자를 지원받는 반면에 일본군은 1인당 0.9kg(2파운드) 정도만 받았다. 0.9톤을 잘못 쓴 게 아니라 진짜로 0.9kg이다. 차이가 그야말로 넘사벽이다. 물론 미군이 제법 많이 받는 것도 있지만 그걸 감안해도 일본군의 보급량은 독보적으로 처절하다.

10.3. 콩나물과 관련된 일화[편집]

러일전쟁 당시에 러시아군으로 수프만 쑤어먹어서 각기병으로 고생할 때 일본군은 콩을 키워 콩나물을 만들어 먹어서 각기병을 예방한 적이 있다. 물론 이것이 '결정적인' 승리 요인은 아니었다.

사실 러시아에서도 콩나물이 나오기는 했으나 식용인 줄 몰랐기에 먹지 않았다. 이 점은 미국도 마찬가지. 한국전쟁 당시 미군은 포로로 잡혔을 때 배식으로 나온 콩을 먹을 줄 몰라서 그냥 굶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군은 콩으로 가득한 러시아군의 식료품 창고를 보고 콩나물을 먹을 수 있게 됐다고 좋아했다. 식문화의 차이가 전투병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알 수 있는 사례다.

문제는 콩나물 자체가 아니다. 우리는 콩나물이 자라고 적군이 각기병에 시달리는 것을 보고 이 전장이 고착 상태에 빠진 전선임을 눈치챘을 것이다. 이 전선이 어디냐고? 바로 그 유명한 전설203고지다.

11. 각종 부조리 및 악행과 그 원인[편집]

대표적으로 일본군의 똥군기는 멀리 거슬러 올라가 보면 프러시아식의 엄격한 내무규율과 강한 군기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일본 제국은 당시 농민과 구 사무라이 출신이 대부분이던 일본군을 단기간에 근대화한 군대로 발전시키기 위해 프러시아식 군제를 도입했고, 그 전의 프랑스식의 자율적인 군사 제도보다는 일본 무가 사회의 분위기에 더 잘 맞아떨어지는지라 일본군 안에 급격히 퍼져 단기간에 근대화한 일본군의 모체로 거듭나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을 주었다.

단, 프러시아 등의 18세기 당시 엄격한 군기의식은 전열보병을 이용한 당시 전투방식에 기인한 바가 크다. 시대가 바뀌면서 구 시대의 이런 측면은 독이 되기 시작한다. 전열보병 항목 참조.

여기까지면 참 좋았는데, 이것이 변질되어 창의성을 말살한 간부 육성교육, 군 내 고위층 인사들의 교류와 토론 차단으로 인한 질적 저하, 폭력을 통한 강압적 통제가 합쳐져 일본군의 암덩어리로 자리잡았다. 이러한 점은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당장 대한민국 국군에 잔존하는 부조리의 상당수가 일본군의 영향을 크게 받았기 때문이다.

11.1. 구타[편집]

"병영은 형무소와 지옥 사이에서 지옥에 더 가까웠다."
― 모리가네 센슈, 중국 전선에서 5년간 종군했던 일본군 병사

"메이지 시대 일본군 창설기에는 천황 숭배 교육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군기가 세워지지 않았다. 만세일계인 신의 아들이기 때문에 천황에게 위대한 권위가 있다는 거지. 하지만 메이지 시대 초기의 일본인들에게 그러한 신화가 천황에게 목숨을 바쳐야 하는 이유로 받아들여질 수 있겠어? 누군지도 잘 모르는 사람을 위해서 죽을 각오가 되겠어? 그래서 군 지휘부는 폭력으로 철저한 군기 확립을 하려고 한 거야. 설명이 되지 않는 것을 납득시키는 방법으로는 폭력이 제일 쉽지."
카리야 테츠일본인과 천황


아래 만화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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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발의 겐>에서 묘사된 일본군의 폭력. 이것 뿐만이 아니라 1권의 나카오카 고오지의 훈련소 생활에서도 나온다. 만화적 과장이 다소 들어있지만 저런 일들이 실존했고 비일비재했다.

또 다른 일본군의 가혹행위를 코믹하게 묘사한 영화가 있다. 배경은 1931년도의 일본군인데 하는 가혹행위는 별 차이가 없고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아주 익숙한 장면이 많이 나온다. https://www.youtube.com/watch?v=k1FtfQBblCI

사실 군대 내의 가혹행위구타 문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있었던 일이었다. 가령 어 퓨 굿 맨, 풀 메탈 자켓미국 해병대를 다룬 영화에서도 가혹행위로 인한 사고나 자살 사례가 나오고, 현대 러시아군에서도 데도브쉬나라고 불리는 선임병들에 의한 가혹 행위로 불구가 되는 사례가 종종 있다.

그러나 최소한 다른 나라 군대에서는 이런 것들이 비정상적인 것으로 간주되었고,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근절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었고 또 지금도 노력하고 있다. 하다못해 일본군의 영향을 짙게 받은 한국군(특히 육군과 해병대)조차도 이게 잘못되었다는 사실은 최소한 인식하고, 아직까지 미흡한 면은 많고 또 그로 인한 사건사고도 끊이지 않고 있지만 어떻게든 구타와 가혹행위만큼은 철저하게 단속하려고 노력하고 있다.[12]

그러나 일본군은 아예 조직을 굴리는 기본적인 논리가 바로 이런 구타와 가혹 행위였다는 것이 문제다. 일본군은 단기간에 병사들의 충성심을 고양하고 통제한다는 명목을 내세워 구타를 묵인했다. 카리야 테츠의 만화 일본인과 천황에 따르면, 일본군 창설 당시, 각 군은 번주(藩主)에 충성하는 체제에서 국왕(덴노)에게 충성하는 체제로 만들기 위해, 애초부터 있지도 않은 권위를 세우기 위해 구타를 묵인했다. 실제로 이러한 구타에 정당성을 부여해준 것 중 하나가 메이지 덴노가 내린 상관의 명령=덴노의 명령으로 규정한 군인칙유로 일본의 근대화는 껍데기였을 뿐임을 말해준다.

그래서 하급 장교는 상급 장교에게 맞고, 상급 장교에게 맞은 하급 장교는 상급 부사관들을 때렸다. 하급 장교에게 맞은 상급 부사관은 하급 부사관을 때리고, 상급 부사관에게 맞은 하급 부사관들이 상급 병사를 때리며 그 상급 병사가 하급 병사를 때리고 하급 병사도 자기들끼리 만만한 상대를 두들겨 패는 구타의 쉼 없는 고리가 군 생활을 지배했다고 한다. 일본 총리 나카소네 야스히로의 회고에 의하면,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고 해군 경리장교로 배치받은 직후 고참이라는 놈이 나카소네와 그의 동기를 한 줄로 세운 다음 차례로 주먹으로 뺨을 갈기면서 이것이 하급자를 다루는 법이라고 가르쳐 줬단다. 이게 그 놈이 자신에게 처음으로 가르쳐준 것이었다고.

심지어 가혹한 체벌이 성행하던 수백년 전 전열보병 시대에 비교하더라도 일본군의 구타는 후진적이다. 우선 전열보병 시대의 체벌은 어디까지나 군형법상의 처벌이지 비합법적인 구타가 아니었다. 따라서 원칙적으로 아무런 권한 없는 고참병 따위가 아니라 장교가 직접 선고하고 공개적으로 집행하며, 심지어 이 행위엔 집행 도구나 횟수도 정해져 있었다. 물론 이러한 체벌의 강도 자체는 채찍질 수십에서 수백 대 수준이라 한 번 당하고 나면 초주검이 될 정도라 구타보다 낫다고 할 것이 없었지만, 적어도 군법의 테두리 안에서 집행되는 것이므로 이후 이런 태형에 관한 사항을 군법에서 없애자 비교적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그리고 문화적으로도 유럽군의 간부 사이에 구타는 존재할 여지가 없었다. 우선 장교끼리는 계급 차이가 나더라도 서로를 귀족이나 신사로서 존중하는 유럽의 사회 문화적 배경이 있기도 했고, 무엇보다 결투의 전통이 있기 때문이다. 설령 하급자라 해도 장교 계급인 부하를 함부로 대했다가는 악에 받친 부하에게 결투 신청을 받고 사이좋게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 그래서 장교끼리 막 대하는 것은 상식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결투에서 지면 부상을 당하거나 사망할 수도 있고, 이겨도 군법에 따라 처벌이나 좌천을 면키 어려우며, 거부하면 겁쟁이로 몰려 상류 사회에서 매장 당했다.

사실 이것은 일본군의 문제만은 아니며 폭력적인 일본 조직 사회의 문제이다. 90년대 일본 프로리그에 용병으로 왔던 한 미국 여자 농구 선수는, 자신은 맞지 않았음에도 일본 선수들에 가해지는 체벌에 충격을 받아 계약 기간도 채우지 않고 미국에 돌아가 일본 체육계를 비난하는 기자회견을 연 일이 있다. 체육 만화에 묘사되는 것에 의하면 아직까지도 일본 학원 체육에서는 이런 악습이 근절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사실 여기에는 좀 더 깊게 따지자면 일본식 선(禪)불교가 원조라는 주장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잘 알려진 영화인 <팬시 댄스>똥군기가 여기서 유래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장면들이 많이 나오고, 영화와 만화의 모델이라 할 수 있는 에이헤이지(永平寺)라는 절에서는 실제로 승려가 행자[13]를 구타한다거나 하는 일이 태연했다고 한다. 참고. 물론 만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인 만큼 과장이 상당수 있지만, 인터넷으로 이쪽 바닥에 있었다가 환속한 사람들 얘기를 들어보면 거의 비슷하다고 한다.[14]

그리고 몇몇 땡중들은 전시에 군국주의를 옹호하는 병크를 태연하게 저지르기도 했다. 참고, 참고 2. 브라이언 다이젠 빅토리아(Brian 'Daizen' Victoria)[15]가 1997년에 내놓은 <불교 파시즘(원제: Zen at War)>이라는 책을 보면 더 자세히 알 수 있다. 참고로 한국에서는 2013년에야 번역 출간되었다. 그리고 아래에서 설명할 정신주입봉도 사실은 다른 것도 아닌 일본죽비에서 변형된 것. 일본죽비는 거의 몽둥이에 가까운 수준으로, 타악기에 가까운 한국 죽비와는 차원이 다르다.

이와 별개로 일본군의 구타 자체가 최소 전국시대부터 유구하게 전해 내려오는 악습 중 하나라는 설도 있다. 애초에 센고쿠 다이묘였던 오다 노부나가가 가신 아케치 미츠히데를 폭행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래서 미츠히데가 반란을 일으킨 원인 중 하나로 보는 시선도 있다. 사실 그 시대에 구타만으로 끝나면 정말로 크게 봐주는 거고 대부분 그냥 즉결 처분하기 일쑤여서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 항목을 보다시피 일본군은 센코쿠 시대부터 시작해서 세이난 전쟁에 이르기까지 하도 서로 치고 박기만 해서 전쟁이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처럼 느끼는 데다가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으로 보이는 인명 경시가 만연했기 때문에 일본군 내에서는 즉결 처분이나 구타가 일상이라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게다가 강한 군기를 핑계로 병사들에겐 폭력을 당하고도 불만이나 하소연을 할 권리조차 박탈됐다. 구타 정도도 못 견디는 약골이 실전 상황은 어떻게 견뎌내겠냐는 정신 나간 논리 아래 구타를 피하거나 고통을 호소하면 하극상으로 취급하여 더 강력한 폭력을 행사했다. 복장, 내무생활, 군기, 기타 모든 핑계가 폭력을 정당화했고, 수많은 암기사항을 강요하며 암기를 못하면 때리는 식으로 폭력의 방식이 연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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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해군의 군인정신주입봉(軍人精神注入棒)


일본 해군은 아예 군인정신주입봉(軍人精神注入棒)이라는 구타 전용 몽둥이까지 애용했다. 사랑의 매 이쯤되면 완전 곤장, 태형이다. 군인정신주입봉에 맞을 때 하급병들은 한 줄로 죽 늘어서서 다리 가랑이를 벌리고 양손으로 발목을 잡아 엉덩이를 내미는 자세를 취해야 했다. 그럼 상급병이 온 힘을 다해 군인정신주입봉을 후려갈기는데, 하급병은 앞으로 쓰러지자마자 즉시 일어나 다시 자기가 맞을 차례가 오기를 기다려야 했다.

영화 <남자들의 야마토>에서 보면, 햇치를 안 닫은 주범이 누군지 추궁하다가 일반 사병을 때리려고 하는데 그것을 후임에게 시킨다. 그러자 그 후임이 "싫습니다" 하고 하자 "뭐 임마?" 하면서 "모범을 보여주지" 하고서 만세정신주입봉이 부러지자 나중에는 쇠파이프로 때리려 한다. 그리고 그 이후에 후임이 "아놔 뼈 부러지잖아" 하며 그 상관을 구타한다.

이 외에도 차렷 자세로 세워 놓고 명치를 위로 올려치기, 엎드려 뼏쳐 시켜놓고 다리 차서 넘어뜨리기, 아예 날을 잡아 손을 보기로 작정하고 상급병 여럿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주먹과 발로 뭇매 때리기 등이 난무했으니, 일본군 내에서 구타로 인한 의문사가 끊이지 않았던 것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16]

직접적인 구타 외에도 구보나 각개전투를 몇 시간씩 쉬지 않고 시킨다거나, 받들어 총 자세로 몇십 분씩 세워놓는 식의 가혹행위 또한 일상이었다. 이 지경이다 보니 하급병들은 차라리 부대가 전투에 투입되기를 간절히 바랐다고 한다.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전쟁터에 나가면 병사들을 이전처럼 철저하게 통제할 수 없어 구타는 그나마 후방에 있을 때보다 좀 잦아들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전선에서도 행군 중에 무거운 것은 무조건 하급병들이 들어야 한다거나, 식량이 떨어지면 아사자 비율은 하급병으로 내려올수록 급증하는 등의 부조리는 어김없이 나왔다. 1900년대 초반 일본군의 신병 훈련을 참관한 서양인은, 행군 훈련에서 탈진으로 사망자가 여러 명 나왔는 데도 부대가 아무 일 없었던 듯 돌아가는 광경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일본군은 심지어 자기들끼리 뺨을 때리도록 시키기도 했다. 박완서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라는 책에 자기가 초등학교 때 담임선생이 이것과 비슷한 벌을 자주 줬다는 내용이 나온다. 또 단편소설 <사수>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주인공과 평생을 악연으로 얽히고 결국은 사형수와 집행자 관계로 만나는 친구가 어릴 때 주인공과 수업 종료 몇 분 전에 떠들다 걸렸는데, 선생이 이 짓을 시켰다. 처음엔 미안한 마음이 앞섰지만 맞을수록 오기가 생겨서 결국은 싸움으로 번지고 말았다. 위의 사례들은 일제강점기에 학교에서 벌어진 일들이니 일본 군국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보아도 틀린 해석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총독은 모두 군인 출신으로 일본군부의 영향이 유독 강했다. 이것도 일본군에서 하던 원조 뺨 때리기에 비하면 엄청나게 순화된 것이다! 원조는 병사들끼리 조금이라도 망설이거나 봐주려고 하면 바로 고참이 "시범을 보여주겠다!"며 주먹으로 죽빵을 날리거나 슬리퍼로 얼굴을 사정없이 갈겨대기에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그걸 면하려면 서로 죽기 살기로 때려야 했다. 그 결과 전쟁 후의 일본에서는 아직 젊은데도 왼쪽 귀가 잘 안 들리는 사람들을 사회에서 흔하게 볼 수 있었다. 뺨은 보통 오른손으로 때리니까.

이렇게 해서 그 군기를 잡는 효과가 있었냐 하면, 이러한 폭력의 결과로 일본군 병사들은 판단 능력과 이성을 상실했고, 겉보기에는 상부에서 내리는 명령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정신건강에 크나큰 악영향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자발성이 없는 이러한 외형적인 군기는 병사들의 무단 이탈, 탈영, 명령 불복종, 심지어 상관폭행 등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심지어는 부사관이나 장교까지 처벌을 두려워해 탈영해서 마적단이 된 사례도 있다.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내무생활의 불만해소 차원에서 일본군은 을 이용했는데 심한 음주로 벌어지는 각종 사고도 큰 문제였다.

따라서 일본군은 겉으로 보기에는 엄청난 군기와 정신력을 보이는 듯하나, 실상은 가혹 행위로 정신병적인 기질을 보유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일본 점령지에서 한 민간인이나 포로 학살, 가혹 행위 등을 살펴보면 그 정도가 인종차별에 눈이 먼 나치 독일군유럽의 동부전선에서 벌인 만행 정도는 되어야 비교가 가능할 정도이다.

오죽하면 오키나와에 진주한 미국 해병대 중 일부가 민간인에게 강간이나 살해 등을 자행했다는 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키나와의 주민들은 대체적으로 미군은 일본군보다는 훨씬 더 주민들에게 잘 대해줬다고 평가했을 지경이다. 자세히 풀이하자면 일본군은 주민들에게 '미군이 주민들을 학살할 것'이라고 세뇌시켜놓아서 오키나와 전투 중 많은 주민들이 미군을 피해 동굴 등지로 숨었지만 전투 후 주민들을 구호하는 미군들에게 놀랐다는 증언도 있을 정도. 이 증언자는 물과 식량도 없이 며칠을 동굴 속에 숨어있다가 미군들에게 구조되었는데 한 미군이 자기 수통을 꺼내 자기가 먼저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건네주어서 독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그때서야 안심하고 물을 마셨다고 한다. 그만큼 일본군이 주민들을 통제하기 위해 허위로 세뇌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증언 중엔 일본군의 만행도 나오는데 동굴 속에 숨어있는 동안 아기가 울어대자 조용히 시키라고 다그치던 일본 장교가 아기를 죽였다고 한다. 이것은 2003년에 방영한 <사탕수수밭의 노래>라는 드라마에서도 나온다. 피난용 민간인 방공호에서 주인공 가족의 갓난아기인 막내가 울자 본토에서 온 일본군이 강제로 빼앗으려 했고, 어머니와 현지 교사가 말리자 "이래서 오키나와 놈들이 나약하다는 거다. 이 전투에서 지면 다 오키나와 놈들 책임이다"며 막말을 쏟아냈고, 이에 격분한 교사가 "당신들은 오키나와를 지키러 온게 아닌가요. 근데 왜 우리를 이렇게 박대합니까"고 정곡을 찌르자 쏴 죽이려 한다.[17] 비록 당시에 일본이 오키나와 주민을 식민지가 아닌 점령지 주민 취급했다지만, 법적으로는 엄연히 일본 국민인 오키나와 사람들에게도 이랬으니 중국인, 한국인, 동남아인들에게 잔혹했던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셈이다.

이런 구타는 사병들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고급 장교들 사이에서도 일반적이었다. 일례로 난징 대학살의 주범이고, 오키나와 전투에서 수석참모로 사실상 전투를 지휘한 전쟁 범죄자 조 이사무(長勇) 중장은 연대장이나 여단장급(영관급) 장교들까지도 전 부대원이 보는 앞에서 직접 주먹으로 뺨을 갈겼다. 이 때문에 사실은 자살한 게 아니라 분노한 부하들의 원한을 얻어 살해당하고 자살로 위장당한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건 지휘관의 권위를 손상시키고 부하 병사들에게 우습게 보이게 만들어서 각급 지휘관의 권위가 절대적이어야 하는 전시에는 말 그대로 미친 짓이었고, 일본군 패배의 한 원인이 되었다.

이런 참혹하기 그지없는 일본군의 구타와 병영부조리의 실태는 이미 당시 일본 사회 안에서도 어느 정도 알려져 있었으며, 당연히 일본 청년들이 군 복무를 기피하는 주요한 까닭이었다. 도망쳐 숨어버려 실종자로 처리되거나, 도피성 유학과 해외이민, 심지어 고의로 자해하거나 범죄자가 되어서까지 징병을 모면하려는 청년들이 속출했다.

폐해가 너무 심각하다 보니 맛이 갈 대로 간 일본군마저도 구타의 심각성을 어느 정도 깨닫게 되었다. 결국 너무 폐해가 심해서 일본군도 1944년에 대본영의 명령으로 구타나 영내폭력을 금지시키는 발표를 하는 등 내무생활에서 구타와 폭력을 추방하려 했으나 이미 구타가 너무 빈번했고 이 시점에는 군인들의 자질도 많이 떨어진 상황이라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다만, 일본군이 구타의 폐해를 고치려고 시도하게 된 때는 20년대부터다. 이 시점부터 병영에서 한 솥밥 먹고 사는 전우들은 다 가족이라는 의식을 교육시킴으로써 병영 문화를 개선하려고 노력하긴 했다.

그러다가 종전 이후 일본군이 강제 해산되어 더 이상의 개혁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실제로 소련군도 원한 문제를 제외하면 대민 사고를 많이 친 건 주로 후방에서 뒤늦게 징집한 보충병들이었고 이들의 상당수는 살인 같은 중범죄만 저지르지 않았다 뿐, 살면서 무수한 문제를 일으켜 온 양아치, 갱스터들이었다.

게다가 전투 중에도 이러한 폭력과 가혹 행위로 병사들을 통솔할 수는 없었기에 전투 중에는 잠깐 폭력의 고리가 느슨해졌는데, 이 때에는 병사들에 건 통제력도 느슨해진다는 큰 문제가 있다. 실제로 감시의 눈길이 없어진 일본 병사들은 자발적으로 적과 싸우지 않고, 그야말로 뿔뿔이 흩어져 전투력이 형체도 없이 소멸하는 때도 있었다. 후임이 원한이 있던 선임을 전쟁 중에 쏴 죽이고 적에게 죽은 걸로 은폐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사실 이보다 더욱더 심각한 건 자신들이 저지른 전쟁범죄에 가담하지 않는다고 그 부하를 구타하는 짓을 했다는 거다. 사실 학살과 민간인 강간이 익숙한 일본군으로서 학살에 가담하지 않는 부하들에게 명령 불복종이라는 이름으로 구타와 폭행을 저질렀다. 자세한 건 기무라 헤이타로타치바나 요시오를 참고. 그런데 사실 이건 당연히 비윤리적이지만 기술적으로는 어떤 의미로 합리적이다. 부하들 역시 이런 범죄행각에 끌어들임으로써 혼자만 깨끗하다는 인식을 지우고 공범자 인식을 키우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이는 베리야[18]도 부하들을 직접 고문과정에 참여시킴으로써 활용했다. 이 때문인지 현대 형법에선 개인 범죄보다 2인 이상의 조직 범죄에 대해서 더 강한 처벌을 한다.

그리고 이러한 폭력의 고리를 대한민국 국군 및 한국 사회가 상당수 물려받았으니 정말 문제가 심각하다. 완전히 물려받았다는 소리는 과장에 가깝지만[19] 일본군이 '기반'을 깔아둔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국군의 창설기에 구 일본군 장교, 정확히는 구 일본군 식으로 양성된 한국인 장교가 대량으로 들어오기도 했으니 20세기 후반까지 군대에서는 이러한 구타가혹행위가 줄을 이었다. 하지만 몇 년 간의 노력 끝에 21세기로 넘어갈 즈음에는 많이 사라졌다.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건 530GP 사건이었다. 항목 참고.

그러나 잊을 만하면 여전히 구타 사고와, 또 다른 사고가 나곤 한다. 대표적으로 2014년 발생한 제22보병사단 총기난사 사건제28보병사단 폭행사망 사건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잔재를 없애려는 노력은 아직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2012년 대한민국 국방부에서 일부 일본군 관련 단어를 공식적으로 순화시켰다. 예를 들면 "구보"라는 용어가 "뜀걸음"으로 바뀌었다.

조선인민군도 창설 당시에 구 일본군의 직접적인 개입이 없었을 뿐이지 일본군 식으로 양성된 인재들이 모여들어 간접적으로 일본군의 악습을 물려받았다. 거기다 소련식 위계질서가 섞이고 거기다 주체사상이라는 사이비 교리가 섞여들어가서 오늘날은 과거의 대한민국 국군 보다 더한 부조리 투성이가 되어있다.

대한민국 국군은 일본군의 일부 영향을 없애는데 성공했고 지금도 꾸준히 개선하고자 노력하지만, 북한군은 오히려 일본군과 똑같아지고 있다! 당연하지만 얘네들은 사실상 군국주의인 만큼[20] 군대 뿐만 아니라 사회에서까지 일본군 식의, 아니 일본군보다 더한 사회 부조리가 일어나고 있다.

솔직히 이런 악폐습이 100% 일본산이라고하기 힘든게 사실 이것의 시작은 근대 러시아군의 고문 기술을 받아들이며 시작되었다고 한다.[21] 다만 이게 일본군만의 악습이라 할 만큼 하필이면 이런 걸 군사 문화랍시고 들여와서 최강체로 만든것 자체가 일본군만의 문제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11.2. 휴가, 휴식과 재충전의 박탈[편집]

일본군도 규정상으로는 1년에 20일 정도의 정기휴가를 분명히 보장했다. 비교를 위해 설명하면, 한국군의 경우 육군 병은 8박 9일간의 정기휴가 3번, 해군은 육상 근무자 기준 기본 연가[22]에 8주당 2박 3일, 공군은 6주당 2박 3일 + 근무시간에 따라 추가되는 외박이 보장된다. 간부의 경우 공무원에 준하여 1년에 연가 21일을, 병가와 공가는 별도로 사용할 수 있다.

문제는 부대가 전장에 한 번 나가면 그 부대에서는 본토로 다시 철수할 때까지 휴가가 아예 없었다는 점이다. 태평양에서 휴가 나와봤자 갈 곳도 없는 코딱지만한 섬들에 주둔했던 부대들이야 그랬다 치더라도, 사이판처럼 비교적 크고 일본 민간인들도 꽤 거주하는 섬에서도, 심지어 대륙인 중국 전선이나 버마 전선에서도 어디를 막론하고 휴가가 일체 주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전방에서 큰 피해를 입은 부대를 후방으로 빼내서 휴식을 취하게 해주고 재충전을 시킨다는 개념도 거의 없었다.

"전쟁 중인데 휴식이라니 이게 무슨 배부른 소리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사람은 기계가 아니기 때문에 쉴 때는 쉬어야 된다. 심지어 기계도 재정비 없이 계속 돌리면 망가진다. 평시보다 극심한 피로를 겪는 군인들은 비전시일 때보다 전시에 휴식을 잘 취해야 한다.

당시에도 대부분의 강대국 군대들은 장병을 전쟁터에서 휴식 없이 몰아세우면 어느 순간에 육체적, 정신적 피로로 극한에 몰려서 산송장이나 마찬가지가 된다는 것을 잘 파악하고 있었기에 휴식, 휴가 등의 재충전 과정도 매우 중요시했다. 미국 같은 경우 훈련도가 높고 중요한 전력이 되는 인원, 부대일수록 더욱 휴식에 신경 썼고, 대표적인 정예부대인 육군 공수부대의 경우 작전이 끝나면 다른 부대와 교대하여 후방으로 빠진 뒤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 다음 작전에 최상의 상태로 투입되도록 하고 있었다. 해병대의 경우도 태평양에서 극심한 전투가 끝나면 역시 오스트레일리아 등으로 빠져서 충분히 쉬게 하였고, 조종사 같이 임무 수행에 최상의 컨디션이 보장되어야 하는 경우에는 몇 시간 실전 임무 뒤에는 휴식 기간을 가지도록 배려가 되어 있다. 근무환경이 열악한 잠수함 승조원들은 1개월 작전하고 돌아오면 몇 주간 순번을 나눠 휴가를 보내다가 복귀 후에도 근 2달 정도는 출동 준비 명목으로 편한 일을 하며 보내게 해줬다.

이런 특수병종이 아니더라도, 일선에서 피해가 심한 해당 제대(대대 - 사단) 전체를 상급 부대의 예비 부대로 지명, 후방으로 빼내어 수 일에서 수 주동안 쉬게 해줬다. 전투가 급하더라도 재충전을 위한 휴식은 중요한 것이다. 심지어 게르만과 슬라브 중 어느 민족이 절멸되느냐를 놓고 사투를 벌이고 있던 동부 전선의 독일군도 1944년에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동부 전선 자체가 사실상 붕괴를 맞기 전까지는 큰 피해를 입은 부대는 후방으로 빼서 재보충과 휴식을 주거나, 일정 기간 전선에서 복무한 군인에게는 휴가를 챙겨주도록 했다. 전쟁 후반으로 갈수록 전황이 막장이 되어 충분한 휴식과 재편성 없이 마구 밀어붙이긴 했다.

참고로 태평양 전구는 유럽 전구와는 다르게 휴식의 기간이 상대적으로 길었다. 어느 섬을 점령한 다음 차기 목표의 섬을 공략하는데는 육, 해, 공군을 융합한 정교한 입체계획이 필요했고 보통 수 개월의 시간이 걸렸다. 유럽 전선과는 다르게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많았다. 때문에 섬을 점령하는데 투입된 부대는 작전이 끝나고 하와이,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 같은 후방지역, 마리아나 제도, 그게 안된다면 기존에 확보한 전진기지가 있는 섬 중에 괜찮은 곳에서 몇 달간 주둔하면서 병력 보충[23]과 재훈련을 실시했다.

프랑스-독일 혼혈 독일군 병사인 기 사예르의 수필이라고 할 수 있는 <잊혀진 병사>에서도 화자가 정식으로 허락받은 휴가가 전선이 악화되어 취소되자 장교에게 조용하게 항의하는 장면이 있다. 물론 항의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옆의 친위대 장교가 주인공 분대의 활약을 보고 전송한 추천서를 들먹이며 진급으로 퉁치면서전선에 복귀한다. 이전에도 휴가를 나오는 장면이 나온다. 보통 열차를 타고 본토의 고향이나 안정적이고 기후도 좋은 프랑스 등 후방 점령지에서 몇주씩 휴가를 보내다 역순행 열차편으로 복귀했다.

하다못해 그때까지 총력전을 수행할 기반이 못된 중국조차도 1년 중 4개월은 전면 대치, 4개월은 적군 후방 유격, 4개월은 아군 후방기지에서 재훈련이라는 개념을 두어서 일정한 기간마다 군인들을 순환시키려고 했다. 그리고 예비 부대를 만들어 작전 도중에 군대를 교체하려고 노력하였다. 또한 어느 군대나 예비병력을 상당한 규모로 유지했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기존 투입부대의 휴식 과정에서의 전선 유지다. 절대 백만명 다 끌어다 전장 보내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이렇게 근대화를 수행하지 못한 중국조차 알았던 것이 바로 군인들의 사기 진작과 적절한 휴식이었다. 그러니까, 2차 세계대전의 주요 참전국 군대 중 오직 일본군만 일단 한 번 전선에 나오면 휴가가 절대 없었다. 휴가는 고사하고 현지에서의 외박이나 외출도 도저히 더는 영내에 병사들과 수병들을 잡아둘 수 없을 정도로 군기가 해이해진 막장스런 상황 같은 정말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허락해 주지 않았다.

사실 일본군의 경우에는 휴가를 '안' 보내주는 것 뿐만 아니라, '못' 보내주는 면도 있었다. 잔혹한 구타와 상급병들의 학대에 시달리던 하급병이나 조선 출신 병사나 수병을 휴가라고 내보내줬다간 십중팔구 그대로 멀리멀리 도망쳐 일본이 패망할 그 날까지 나타나지 않을 게 불 보듯 뻔하고, 상급병이라도 휴가다! 하고 비무장 상태로 영외에 나가 쏘다니다간 일본군의 학살, 강간, 약탈에 원한이 골수에 맺혀있는 현지 저항 세력이나 현지인들에게 쥐도 새도 모르게 끔살 당할지도 모르니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오히려 일본군은 고급 장교들을 위한 클럽이나 기생집은 전선 코 앞에까지 줄줄이 들어서는, 제정신이 있는 군대라면 상상도 못할 짓은 태연히 저지르고 있었으니, 병영 안에 통조림처럼 갇혀서 이 기막힌 꼬라지를 지켜봐야 했을 병사들과 하사관, 하급 장교들이 무엇을 느꼈을 지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일례로 무타구치 렌야임팔 작전 중에 사령부 옆에 기생집 차려놓고 5시면 기생집으로 칼퇴근했다거나, 필리핀에서 타이완으로 적전도주해온 도미나가 교지가 자기 차에까지 기생을 태우고 다녔다는 일화들이 존재한다.

당시 일본군 장교들도 이런 불만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었다. 평소에야 가혹행위를 통한 억압적인 분위기로 병사들의 반발을 억제할 수 있었지만, 그 통제가 느슨해질 수밖에 없는 전장에서는 부대가 일시에 붕괴하게 될 가능성도 있었다. 또한 그랬다간 자기들 목숨부터 위험해질 게 뻔하기에 휴가를 못 보내주는 대신 영내에서 병사들의 스트레스를 풀어줄 방안을 강구하기는 했다. 그런데 그 방법이 아주 악랄했다.

11.2.1. 휴식과 재충전 기회의 박탈에 대한 보상: 음주, 약물, 일본군 위안부, 가혹행위[편집]

쉬지 못하는 대신 사기 증진을 명목으로 정상적인 군대에선 있지도 못할 별의별 건전하지 못한 비정상적인 행위를 장려했다.

일본군과 사회 전반에 걸쳐 피로 회복제로 다량 지급된 히로뽕은 전시에 수많은 중독자들을 낳은 뒤 전후에도 사회 문제가 되었고, 술에 관대한 문화 역시도 군인들의 건강을 해치는 것은 마찬가지. 일본군 위안부도 강제로 끌려나온 점령지 여성들에게서[24] 강제로 성을 착취하여 스트레스를 풀라는 말이니 제정신이 아닌 것은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일본군이 병사들의 불만에 대한 불안 때문에 중국인 등 점령지의 민간인에 대한 가혹 행위를 적극적으로 명령하거나 또는 암묵적으로 조장하는 경향이 있었다는 것은 일본군 장교들의 회고에서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는 이야기이다. 병사들이 가지고 있는 불만의 총부리를 언제 자기가 속한 일본군 자체로 돌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일본군의 악행을 한층 더 부추겼던 것이다.

11.3. 부정부패 및 [편집]

"군대는 잔인해, 이젠 내가 자네에게 그것을 말하지 못할 이유가 없겠지. 내지의 군대는 뼛속까지 속속들이 썩었어. 해외에서 근무했을 때, 난 내지의 군대만큼은 명예와 위엄이라는 오래된 전통을 지키는 줄 알았었지. 불행히도 귀국 후 나는 그 말이 완전히 거짓이라는 사실을, 현실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추악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네. 처음엔 나도 장교로서 할 수 있는 한 품위를 지키려고 노력했었지. 그런데 바로 그게 내 몰락을 초래했다네. 난 내 마음을 다해 군을 사랑했네. 그래서 군대를 조롱하거나 좀먹는 놈들을 보면 참을 수가 없었지. 그래서 나는 소령들과 대령들, 연대장과 사단장 같은 커다란 장애물들과 부딪치는 것을 피할 수가 없었다네. 오직 상관을 기쁘게 해주는 것이 최우선이었어. 장교들 뿐만이 아니라 그들의 가족들까지도 기쁘게 해주어야만 했지... 나는 부대 하사관들 중 최선임자였던 보급계 하사관과 아는 사이였네. 그런데 그의 부인은 대대장의 집에서 떠날 수 있는 날이 없었지. 왜냐면 그녀가 거기 들락날락하면서 여러 가지 일을 봐주지 않으면 남편이 결코 진급할 수가 없었으니까. 그런 모습들이 날 너무나 부끄럽게 했네... 배급받은 보급품들은 곧바로 사령관에게 직행했고 그는 그것들을 사적인 선물용으로 다 써버리곤 했지... 자네도 시모라이 중위를 알고 있겠지? 그놈은 자기 부대원들한테 자기 집을 짓게 하고는 지금 거기서 살고 있어. 난 이런 부패를 참을 수가 없었네. 그래서 뭔가를 해보려고 애썼지만, 난 곧 지칠 대로 지쳐버렸어. 그건 한 사람이 하기엔 너무나도 큰 일이었지... 난 결국 해임당하고 병들어버렸네. 난 더 이상 기댈 곳이 없었지.
― 노마 히로시, <진공지대> 中


참고로 노마 히로시는 일본의 작가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징집되어 필리핀중국 북부 전선에 참전했으며 반체제 사상을 지녔다는 이유로 오사카 군 형무소에 투옥되었다(1943~44). 전후 군대에서 자신이 겪었던 생생한 체험을 바탕으로 일본의 2차 대전 후 쓰여진 전쟁소설 중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진공지대>를 집필하였다.

일본군은 외형적 군기의 확립에는 변태적으로 집착했음에도, 정작 정말로 군기가 엄히 선 군대라면 가장 먼저 근절시켰을 부패와 비리가 내부에서 범람했다. 장교들은 사병들의 식단부터 시작해 뜯어먹을 수 있는 모든 군수품을 중간에서 착복했고, 장교의 계급은 곧 그 장교 가족의 계급이었으며, 하급 장교의 가족들과 사병들은 상급 장교들의 사적인 일에 동원되어 노예처럼 부려졌다.

안 그래도 일본 제국의 국력 자체가 부실한 데다, 중요한 건 물자가 아니라 정신력이라는 병맛나는 생각이 충만한 군대가 일본군인데, 그나마 쥐꼬리만한 군수품도 중간에서 사정 없이 여기저기서 뜯어먹히니, 근위사단이나 전함 야마토 같은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부대에서 군수품이 모자라지 않을 날이 없었다.

그리고 하사관이나 상급병들은 하급병들에게 다른 중대에 몰래 들어가서 모자라는 보급품을 구해올 것을 묵시적으로 강요했다. 도둑질할 배짱이 없거나 양심의 가책 때문에 보급품을 훔쳐오지 못한 병사병신 취급을 받고 구타를 당했으며, 약삭빠르고 뻔뻔하게 보급품을 슬쩍해와 중대에 나눠 준 병사는 큰 칭찬을 듣고 똘똘한 병사로 대우받았다. 일단 한 번 보급품이 없어지면 도둑맞은 병사 역시 좋건 싫건 도둑질로 숫자를 채워 놓아야 했다. 간단히 말해 군대에서 도둑질을 배운 격이라 보면 된다.

일본군에서 모든 보급품은 국가의 재산이기도 했으나 명목상으로는 덴노의 하사품이었기 때문에, 일개 병사가 덴노의 하사품을 잃어버린다면 그 뒤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물론 진짜로 그렇게 생각하는 순진한 장교는 거의 없었다. 정말로 보급품을 덴노의 하사품이라 여겼다면, 감히 어떻게 그 하사품을 빼돌려 자기 배를 채울 생각을 할 수 있었겠는가?

이런 내부 사정 때문에 일본군 부대 간에는 서로 훔치고 도둑맞는 악순환의 고리가 끊일 날이 없었다. 일본군의 성전이자 모든 병영부조리의 근거였던 군인칙유에는 "군인은 충절을 다함을 본분으로 삼는다"고 적혀있었지만, 병사들은 상급자가 없을 때마다 "군인은 요령을 다함을 본분으로 삼는다"라고 자기들끼리 비웃곤 했다.

이렇게 군인정신주입봉은 군법보다 가깝고, 비열한 놈일수록 이득을 보며, 선랑한 이는 짓밟히고, 약한 자는 먹잇감이라는 것을 매일같이 뼈저리게 느껴온 일본군 병사들,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군인정신주입봉으로 맞아가며 문자 그대로 뼈저리게 느껴온 일본군 병사들은 먹은 짬밥에 정비례해 양심이 메말라갔다. 결국 그들은 자기나 자기가 속한 부대의 이익을 위해 타인에게 불이익과 고통을 주는 행동을 아주 자연스럽게 여기게 되었다.

12. 한반도의 일본군[편집]

12.1. 개관[편집]

1910~1945년 사이의 한반도에 있던 일본군에 대해서는 조선군(일본 제국) 항목을 참조할 것.

12.2. 조선 군인[편집]

조선 군인이란 신분도 있었는데 이들은 1907년에 해산당한 대한제국군 가운데 잔류해 일본군에 편입된 자들이다.

그 밖에 일본군에 편입이 아니라 입대한 인원은 조선인 일본군을 참고할 것.

12.3. 한반도와 남만주[25]의 일본군 만행[편집]

  • 1875년 운요호 사건.

  • 1894년 6월에 전주화약으로 이미 동학농민운동이 해산되었는데도 억지로 군대를 보내어 한성에 눌러앉았다. 6월 21일에는 조선의 내정 개혁을 요구하면서 경복궁을 기습으로 점거했고 동시에 여타 조선군 군영을 공략하여 한성을 장악, 흥선대원군을 꼭두각시로 내세우고 김홍집을 시켜 갑오개혁에 들어갔다. 이어서 7월 25일과 28일에 각기 해상과 육상에서 청군에게 선전포고 없이 선빵을 날리며 청일전쟁을 시작했으며 이러한 내정간섭에 반발하여 동학농민운동도 다시 봉기했다.

  • 1905년 을사조약 체결 때 이토 히로부미의 명령으로 체결 장소인 덕수궁을 대거 점령하고 고종황제와 관료들이 체결을 거부하게 될 때 언제든지 공격할 태세를 취하면서 대기하였으나 체결이 성사되면서 덕수궁에서 철군하였다.

  • 1907년 대한제국 군대 강제해산 때 해산에 분개하여 교전을 벌였던 대한제국 군인들을 제압하고 대거 사살 및 체포하며 그야말로 잔인무도한 만악과 만행을 저질렀다. 이후에도 해산당한 대한제국 군인들이 대거 합류한 의병이나 독립군과 연이은 교전을 벌였고, 급기야 호남에서 남한 대토벌 작전을 벌여서 이들을 말 그대로 쓸어내버렸다. 그 과정에서 벌인 만행은 이루 말할 수 없다.

  • 1919년 3.1 운동 때는 일본군과 일본 경찰이 합동 소탕작전을 벌인 끝에 만세운동에 참가한 독립운동가 및 애국자와 조선의 양민들을 대거 학살하였고, 육군이나 헌병은 물론 해군 병력까지 출동시켜서 만세운동을 저지하며 진압하는 강경책을 일삼았다. 이후에도 화성 제암리 학살사건을 저질렀고, 그 외 전국 각지에서 항일운동 및 만세운동을 하는 자들은 모조리 집단학살을 하였다.

  • 1920년에 참전한 봉오동 전투청산리 대첩에서는 홍범도, 김좌진 등이 이끌었던 조선 독립군에게 대거 병력이 전사하는 참사를 낳았다. 일본군 일부는 숙영지로 도망갔거나 무단탈영까지 하였으며 일부는 그 대한 보복으로 만주에 있는 조선 양민들을 모조리 잡아서 학살하였다. 1940년 한중 연합군 때에도 기습 작전에 휘말려서 대거 전사하였고, 일부는 숙영지로 도망갔거나 탈영하는 사태를 빚었다.

  • 1941년 태평양 전쟁을 계기로 조선의 무고한 청년 및 소년들을 강제로 징집하여 일본군에 강제로 편입시키고 연합국과의 교전을 강행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1945년 8월 일본의 패전에 따라 35년 만에 한반도에서 모두 철군하였다.

13. 결론[편집]

"일본군의 행동과 전술은 잡병 수준이다. 단체로 모여서 돌격밖에 할 줄 모르며 제대로 된 중화기도 없었다. 악에 받쳐 싸우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신력이라는 말도 안되는 힘으로 화력 차이를 극복하려고 한다."
존 바실론

"장군님. 저는 이러한 전투 방식은 일찍이 듣지도 보지도 못했습니다. 일본군은 포로가 되기를 거부합니다. 그들은 수류탄으로 자폭하거나 스스로 자결을 기도합니다."
미 해병대 제1사단 밴더크리프트 소장이 과달카날 전투가 끝난 뒤 해병대 사령관 홀컴 중장에게 보낸 보고서 中.

"일본군한테 중화기란 단지 장식품일 뿐이다. 그들은 정신력의 일본 문명이 서구 문명보다 우월하다고 믿는다. 이것이 소위 '야마토 정신'의 정체이며 우리 나라에 대한 경멸감의 원인이기도 하다. 이번 전쟁으로 그들도 무엇인가를 깨닫겠지만 그러기까지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나 클 것이 두렵다."
― 미국 해군, 과달카날 전투보고서.

"모두들 안심하라. 저들은 헛된 망상에 빠져 온갖 병영부조리로 인해서 내부로나 외부로나 상당히 흔들리고 있다. 이제 우리의 승리가 눈 앞에 있다!"
장제스 [26]


일본은 당시 아시아 최강을 자처했으며 군국주의에 발을 담가본 유일한 아시아 국가였다. 독립군은 '비정규군'이라는 태생적 한계상 병력과 물자의 수에서부터 열세였고, 외의 요소들 역시 '정규군' 일본군에 비해 너무 불리해 청산리 대첩 이후에는 별다른 큰 전과를 보이지 못하고 국토가 완전히 유린당한 이후 보급 등 기본적인 문제를 풀려면 중국군이나 소련군 등 다른 군대와 연합해야 했다. 영국, 미국, 네덜란드 등 식민지는 전투 의지가 중국군만도 못했고, 말도 제대로 안 통했으며, 당시엔 그럴싸한 공조도 안 되었다. 또한 소의 꼬리이탈리아보단 닭의 머리인 일본이기에, 더 주목을 받기 쉬운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자칭 아시아 최강 치고는 한수 아래로 여겨온 중화민국군조차 제대로 제압하지 못하고 이미 수렁에 빠진 상태였다.

이에 유명한 일화가 있다.

히로히토: 황국미국 사이에 이 벌어지면 육군은 어느 정도의 기간 안에 정리할 수 있다고 확신하는가?
스기야마 하지메: 남쪽 방면만 한다면 3개월 안에 정리할 수 있습니다.
히로히토: 스기야마 그대는 지나사변 발발 당시 육군대신이었지. 그때 그대가 지나사변은 1개월 정도면 정리할 수 있다고 한 말을, 짐은 아직 기억하고 있네. 그렇지만 4년이나 질질 끌었고 아직도 정리가 안 되지 않았나?
스기야마: 지나는 오지가 넓게 펼쳐져 있기에 예상과는 달리 작전을 잘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허나 폐하, 태평양은 도서 지역이기 때문에 더 수월할 수 있습니다!
히로히토: 뭐라고?! 지나의 오지가 넓다면 태평양은 더 넓지 않은가! 무슨 확신이 있어 3개월이라는 말을 하는 건가?

- 쇼와사, 한도 가즈토시


사실 일본군은 나름대로 새로운 시도를 많이 벌인 선구자적인 측면도 있다. 일본 육군스페인 내전과 더불어 도시에 대한 대규모 공습도 해봤는데, 이는 일본군의 대표적 전쟁범죄로도 거론된다. 충칭 대공습이라든가. 도쿄 대공습에서 커티스 르메이에게 영감을 준 게 바로 충칭 대공습이었다. 그리고 세계 최초로 전차의 집단운용을 통한 기동작전[27]을 시도했다. 다만 자기네들은 그닥 인지하지 못했고, 오히려 적국이 더 써먹었다는 점이 문제다. 할힌골 전투에서의 전훈은 그냥 무시하고 해당 전투를 패배한 전투라 하여 노몬한 '사건'으로 축소시키고 은폐하기에 바빴다. 그 뒤로도 전차는 물론 기본적인 대전차 수단에조차 딱히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았음은 덤이다. 전략폭격을 수행하는 역량도 연합군이 압도적이었고.

육군이 줄곧 열강 최약체였던 반면 해군은 외형적 하드웨어 면에서는 군축조약에서의 기준으로 보나 실제 총 톤수 기준으로 보나 3위 정도를 유지했으며, 영국은 대서양과 지중해에 대부분의 전력을 집중하고 있었고 태평양에 신경을 쓰고 있었던 미 해군진주만에서 큰 타격을 입으며 총 톤수 기준으로도 41년 시점에서 일본군 해군은 18만 톤을 기록, 13만 톤 정도까지 내려간 미국보다 우위에 있었으며, 태평양에서는 일시적으로 연합군을 상대로 우세했다고 볼 수 있다. 상대가 상대여서 그렇지 육군국인 프랑스나 이탈리아에 비하면 전체적으로 우수한 하드웨어를 보유했다고 할 수 있다. 레이더 등 전자기기는 대전기간 내내 열강 최저수준이었지만 광학기기 등은 일선급 물건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이 때 성장한 기업이 이후 니콘이 되는 일본 광학.

그러나 타란토 공습의 영향을 받은 진주만 공습으로 거함거포주의의 종말을 증명하기도 했지만, 정작 미국이 본격적으로 항공주병체제로 전환하는 사이 오히려 일본군은 여전히 전함이 주력이라는 인식을 버리지 못한 졸렬한 운용으로 세계 3위의 전력조차 제대로 운용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세계 3위라는 하드웨어도 결국 함대결전사상에 얽매여 군수지원능력과 등가교환한 결과였고, 일본 해군의 소프트웨어는 오히려 약소 해군국만도 못한 면모를 보인다. 정말로 일본해군은 귀축영미의 물량 때문에 패했나 진주만 공습 이후로도 거함거포주의를 버리지 못했다고 지적하는 NHK의 다큐멘터리. 일 해군의 신비주의적인 야전 계획 심지어 항공전 및 통상파괴전 관련 소프트웨어는 열강 최하위인 육군만도 못한 수준이었다. 일본 전사연구가의 관련 글 #2. 소프트웨어로는 러일전쟁 시절보다도 퇴보했음을 지적하는 3편 시레인 방위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NHK의 다큐멘터리, 이 부분은 육해군 공통 문제다.[28]

해군은, 1944년 이후 침공해오는 미 함대와 수륙양용부대를 요격함에 있어. 함대의 주 전력인 기동부대의 항모, 특히 정규항모를 공격 목표로 삼는 것을 고집했습니다. 그에 비해 육군은, 해병대나 육군 병사를 수송하는 수송선을 공격목표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당시 미 기동부대의 방공능력으로는 그 방공망을 돌파해 방공망의 중심에 위치하는 항모를 공격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또한, 미 기동부대의 내습은 해병대, 육군의 육상 병력과 함께 그 작전 목적인 요지(구체적으로는 도서지역)을 공략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하지만 기동부대와는 달리 수송선단의 직접호위는 정규항모와 비교해 소형인 호위항모 등의 비교적 취약한 전력이 담당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엄중히 방어된 기동부대의 정규항모보다 공격 성공 가능성이 높습니다. 또한, 육상 전력에 큰 피해가 나오거나, 상륙한 육상 전력에 대한 보급을 유지하지 못하게 되면 요지 점령 목적은 달성 불가능합니다. 적의 작전 목적을 저지한다는 의미로 보면, 육군의 견해가 목적에 적응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에 비해, 해군은 '적 함대의 주력을 격파하면, 그 재건에 시간이 걸려 전쟁 지속이 곤란해진다. 그러니 적의 주력을 공격한다'라는 생각을 러일전쟁의 승리로 굳히게 되었습니다. 그 가상적이 미국으로 바뀐 이후에도, 이 생각은 유지됩니다. 이 점에서 보아 해군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주적을 격멸한다는 것에 총력을 기울인 것이 됩니다. 또한, 진주만 공격까지는 그 주적은 전함이었지만, 미드웨이 해전 이후 그 주적은 항모가 됩니다. 전쟁의 양상이 변화했는데도 불구하고, 종래의 발상이 거의 고정관념화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해군이 항공운용의 원리원칙을 지킨 것은 어떤 의미로는 종래의 관념에 사로잡힌 것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보급 및 군수지원 경시는 일본 해군에 수많은 병폐를 남겼지만 대잠능력이나 해상호위능력에서도 치명적인 약점을 드러내, 43년 4월 이후 암호 해독과 호위항공모함의 투입 등 효과적인 대잠체계가 갖추어지며 대서양에서 연합국의 상선 손실이 격감하는 반면 #[29] 일본의 수송선 손실은 전쟁이 진행되며 확대 일로를 걸었고 # 이는 해상호위를 포기한 채 적 전투함 공격만으로 제해권을 장악할 수 있다고 믿은 극단적인 함대결전주의의 대가라고 할 수밖에 없다.

대국적 전략 면에서 추축국은 예외없이 치명적 오판으로 점철되어 있었으니 넘어가더라도, 한 번 소멸했다가 33년에 겨우 재건했고 영국해군의 20% 전력도 안 되리라 보였던 독일 해군이 부족한 전력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카드인 통상파괴전만으로도 아직 준비가 덜 되었던 영국과 미 해군까지 상당 기간 괴롭혔다.[30][31] [32]

선전포고도 없이 저지른 진주만 공습으로 일시적으로는 세계 1위 규모가 되기도 했지만[33], 통상파괴전에서의 실패는 말할 것도 없고 러일전쟁 이래 계속 상정해 갈고 닦아온 함대결전에서조차 미드웨이, 마리아나, 레이테 3연속으로 참패를 면치 못했다.[34]

그 외에 제로센도 여러 외부적 요인이 겹친 덕에 태평양 전쟁 초반 한정으로는 괜찮은 기체이기도 했고, 항모 관련 기술력 역시 독일에 한 수 가르쳐 줄 정도였다. 양국이 전쟁에 투입한 장비들의 수준 차이를 보면 대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싶겠지만, 베르사유 조약 체제하의 독일에서는 군사기술 습득이 사실상 금지되어 있었다. 육군이야 소련과의 비밀 조약을 통해 어떻게든 연구가 이어질 수 있었다지만 군함 정도 되는 물건은 그게 어려우니까...

그리고 산소어뢰 정도면 비밀병기라 칭해도 좋을 만큼 위력 하나는 괜찮기도 했다. 당장 대전기 관련 문서들을 봐도 숱하게 나오는 기록들이 '화력만 충분하면 나머지는 전장에서 알아서 운용할 테니 제발 쓸 만한 무기를 보내달라'는 요청 내지 호소들이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보면 산소어뢰의 화력 자체는 최초 등장 시점에서 확실히 좋은 축에 들었다. 문제는 지지부진한 개선과 제공권의 상실로 갈수록 써먹기 어려워졌다는 것이지만.

전쟁 말기의 카미카제, 가이텐 등의 삽질은 논외로 하고 따져본다면 군사적 측면에서 일본군의 가장 큰 문제점은 무기를 직접 운용하는 일선부대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뒷받침하는 행정, 전략의 결함이었다. 여기에 육해군 간의 대립, 각 군 내에서 다시 벌어진 각 파벌 간의 대립, 대미 개전을 위시한 전략적 삽질이라는 오판, 경직된 연공서열 체계, 총력전에 대한 무지, 보급 및 군수지원 경시, 민간 경제 등에 대한 지식 결여가 합쳐져 총체적 난국으로 다가왔다.

물론 이런 소프트웨어도 따지고 본다면 그만큼 돈을 발라야 한다는 반론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하다못해 일본 이상으로 막장이라는 중국군충칭에서 농성해서 지구전을 펼치면 어떻게 될 거라는 상황 판단하나는 잘한 점, 아니면 유고나 이후의 베트남 같은 나라들도 전략적 판단 하나는 잘한 점을 감안할 때 그토록 거대한 규모로 운용되었던 일본군의 문제가 심각했던 것이 확연하게 눈에 들어온다.

결국 아시아에서는 한 발 먼저 근대화에 성공하고 제국주의와 열강 대열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실상 러일전쟁부터 2차대전에 이르기까지 진짜 강대국과 전면전을 벌일 국력이 없다는 열강 최약체 국력과 체제 모순을 증명하게 된다.

2차대전기의 주요국 GDP를 비교해 보면 일본의 국력은 1차 대전에 겪은 극심한 소모전으로 인한 피해를 회복하지 못하고 대전 초반기 광탈한 프랑스나[35] 두고두고 웃음거리가 되는 이탈리아와 비슷한 수준밖에 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서도 프랑스나 이탈리아를 외형상으로는 압도하는 세계 3위의 해군력과 240만이 넘어가는 육군 병력을 유지하느라 보급 및 군수지원 역량을 희생시켜가면서까지[36] 외적 덩치는 일견 강대국 수준으로 키웠지만, 그렇게까지 해도 아시아 지역강국 수준밖에 안 되는 역량으로 한수 아래로 얕보던 중국조차 제대로 제압하지 못하면서 미국과 양면전쟁을 벌였으니 결과는 뻔할 수밖에. 일견 눈부셔 보이는 대전 초반기 남방작전의 성과조차 실은 서전기의 기습효과 및 연합군이 태평양전선에 배치했던 기종이 2선급이었다는 점에 힘입은 것에 불과하며, 미드웨이 해전 이후 미 해군, 육군이 모두 1선급 작전기를 투입하며 성능차이가 역전되고 개전시의 베테랑 탑승원의 소모와 맞물려 급속하게 소모율이 증가했다고 방위성 전사연구연보 15호 는 지적한다.

육군이 넘사벽으로 강한 독일, 소련은 해군이 박살나기 이전에 일본 본토를 치기에는 어려웠고 영국도 거리나 국력상 일본 본토까지 완전히 제압하긴 어려웠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역도 성립하고 다만 미국이 육군도 충분히 강하고 그것을 본토에 상륙시키고도 남을 능력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임팔 작전의 주력은 영국이었지만 애초에 남방작전 시점에서 영국은 대독전에 주력하느라[37]동아시아의 식민지를 6개월만에 빼았겼고 실론도 해군에 털렸다.[38] 고작 전쟁 막바지에 와서야 미얀마를 겨우 수복한 셈이다. 양면전쟁이야 서로가 각자 다른 상대하고 치르고 있었으니 이 패널티는 할 말이 없고, 사실 남방작전 시점에서 보더라도 일본군은 훗날 미군이 보여주는 것처럼 압도적 양적 우세를 보이진 않았고 미영이 그런 것처럼 당장 동원할 수 있는 여력은 똑같이 제한되어 있었다.

14. 대중 매체[편집]

14.1. 한국[편집]

일제강점기를 겪어왔던 한국의 입장에서는 주로 구한말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 및 드라마 등에서 빠짐없이 나온다. 여기서 나오는 일본군들은 한국 배우의 연기에 따라 다를 수도 있으나 역할상 조선인들을 폭행하고 잡아 죽이는 잔인하고 포악하며, 그 밖에도 소녀들을 속이거나 납치하여 일본군 위안부로 끌어가는 만행도 저지르고, 한국 영화나 드라마 등에서는 가장 나쁘며 포악한 존재로 나온다. 한국 영화나 드라마의 특성상 현재의 일본 자위대는 주요 소재로 안 다루는 편이라 현대가 배경이던 한국 드라마에는 자위대가 없지만, 한국 영화 한반도에서 대한민국 해군해상자위대가 대치하는 장면이 나온 적은 있으나 마지막에 아무 일 없이 서로 철수하였다.

문학 역시 예외 없이 일제강점기를 소재로 한 작품이면 글귀에 일본군의 악행과 만행이 나오고, 조선왕조를 소재로 한 역사소설에도 임진왜란을 거쳐서 일본군이 자주 등장한다. 구한말 및 근대를 소재로 한 소설 등에는 운요호 사건강화도 불평등조약, 동학농민운동을미사변 등을 거쳐 자주 그리는 편.

연극에서는 관객들이 보는 앞에서 연극 배우들이 일본군 연기를 맡으며 일본군의 만행과 악행을 재현한다. 영화나 드라마와는 달리 관객이 현장에서 바로 볼 수 있다는 특성을 보면 일본군의 모습이나 만행 등을 생생히 재현하는 셈이다.

그 밖에도 일부 3.1절 만세운동 재현행사 때 일본군으로 분장한 엑스트라들이 나와서 만세운동을 진압하는 재현을 거쳐서도 나오는데, 여기에서도 일본군은 악질적이고 살인마와도 같은 존재로 나온다.

다만 영화 놈놈놈이나 마이웨이와 같이 악랄한 측면보다도 일본군의 멍청함과 병신스러움이 더 드러나는 특이한 때도 있다. 특히 영화 암살의 경우 그냥 스톰트루퍼(...)

그런데 '백병원을 폭파하러 간 김두한'이라는 심영 관련 합성물에서 간호사로 나온다.

14.2. 중국[편집]

중국의 대중매체에서 나오는 일본군들은 중국 배우의 연기에 따라 다를 수도 있으나 역할상 중국인들을 폭행하고 잡아 죽이는 잔인하고 포악한 존재이며, 그 밖에도 소녀들을 일본군 위안부로 끌고 가는 만행도 저질렀으니 한국과 같이 중국 영화나 드라마 등에서는 가장 나쁘고 포악한 존재인 편이다. 일본군이 저지른 각종 만행들이 워낙 많고 잔혹하다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다. 중국의 악역(일본병사) 전문 배우는 "악당은 가장 비참하게 죽어야 한다"는 말로 일본군의 역할을 표현한 바 있다. 애초에 중국에도 '쪽바리'와 비슷한 어감의 '워누'(倭奴)라는 욕이 있으니 일본군을 미화시킬 수가 없는 환경이다.

다만 홍군(중국인민해방군의 전신)의 이야기를 다루는 대하드라마라면 악랄한데 엄청 잘 싸우는 것으로 묘사할 때도 있다. 2011년 방영한 <상해, 상해> 같은 드라마에서는 팔로군의 기습을 받은 일본군 트럭 속 소년병 엑스트라가 머리에 총알 관통상을 입는데도 비명 한 번 지르지 않고 눈을 부릅뜬 채 절명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팔로군 게릴라의 공세가 멈추자마자 트럭의 포장을 걷고 압도적인 기관총 화력으로 팔로군 게릴라를 학살하는 것으로 묘사. 물론 일본군이 잘싸웠다는걸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라 홍군의 뻥튀기된영웅적인 투쟁을 강조하려면 적이 그만큼 강력하다고 보여줘야 하니 자연스러운 일이다. 물론 실제로는 국민당이 주력이었고 공산당은 항일보다 세력확장에 더 치중하고 팀킬까지 저지르고 다녔지만.[39]

중국 온라인 FPS 광영사명 온라인에서는 중일전쟁 배경의 코옵 모드[40]에서 일본군이 적으로 등장하는데 사살해 보면 소속이 "일본군" 이 아니라 대놓고 그냥 "鬼子" 라고 표시되고 적들 중에서 상하이 맵의 상급 장교는 사살시 "전범(战犯) xx 사살" 이란 메시지가 뜨는 등 센카쿠 열도맵의 자위대[41]와 달리 게임 내 취급부터 경멸과 혐오가 가득 들어있다.

14.3. 서방권[편집]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적이었으므로 대부분의 일본군은 당연히 악역으로 나온다. 미국 쪽 매체에서는 대개 태평양 전쟁의 지옥 같았던 경험담이 들어가 엄청 쓰레기 같은 미치광이들로 묘사한다. 다만 소수로 동정적인 묘사를 하는 매체도 있다. 예를 들어 그린호넷케이토 같은 경우 일본군이었지만 난징 대학살을 목격하고 분노하여 같은 부대원들을 죽이고 탈영했다는 식의 뒷설정도 들어갔다. 다만 작품의 기초적인 설정 자체가 각이 딱 잡혀 있지 않아서 중국인이나 한국인으로 설정이 바뀌는 때가 있다. 심지어 코믹스 중 가장 후기 시간대를 다루는 코믹스에서 케이토는 히로인 포지션의 여성이다.

한때 한국에서 친일 논란이 일었던 더 퍼시픽은 의외로 무미건조하게 일본군을 조명한 편이다. 옹호의 시선 그런 것도 없이 일본 넷 우익들이 보면 뒷목 잡고 쓰러질 연출을 가감없이 넣어놓았다. 특히 오키나와 민간인들을 인간 폭탄으로 미군들에게 내보내 그 자리에서 폭사시켜 버리는 장면 등 일본군 막장 전설의 고증이 리얼하기에 한 화에서만 "Kill Japs"와 "Fucking yellow monkeys" 같은 과격한 대사가 쉴 새 없이 남발되고, 상술한 묘사를 포함하여 당시 일본군의 막장 행태와 병신스러움이 아주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한편으로 현대 일본의 위상이 한때 세계경제 2위까지 했고 지금도 세계적인 경제대국인 데다 잘 나갈 당시 적극적으로 자국의 문화를 미화, 포장하여 수출하여 서구에서 상당한 숫자의 와패니즈들, 즉 서양판 일빠들을 만들어 놓았다. 일본에 관한 것이라면 거의 뭐든지 신비주의적으로 보며 동경하는 이들에게 있어 총 들고 빵빵 쏴대는 적군을 앞에 두고 군도를 들어 "반자이!"라 외치며 돌격하는 일본군은 마치 무슨 판타지 군대를 보는 듯해 신선함!을 느끼게 했을 것이다. 물론 와패니즈들을 서방권 전체의 주류라고 볼 수는 없으며, 절대적으로 소수인 것이 현실. 미국 등지에 오타쿠 정보 전문 사이트에서 일본군이 사무라이들의 군대로 미화되는 경우도 종종 보이거나 이것 때문에 키배가 벌어지기도 한다.

가지고 있는 장비의 병신같지만 생긴건 신기한 참신성(?) 때문인지 의외로 콜렉터에게 인기가 있으며 특히 헬멧과 군모의 괴랄한 조합 때문인지 디자인상으로는 관심을 가지는 서양 밀덕들이 많으나 어디까지나 콜렉션을 위한 것 뿐이지 실용성이나 여러 면에서 일본군은 서양 밀덕들에게 까이는 쓰레기 장비들로 이루어진 군대다. 오히려 밀리터리 계열 서브컬쳐에 프로토타입 드립과 스토리가 진행되기 위한 과도한 정신력 드립에도 일조한 면이 있어서 개연성 있는 전쟁 스토리를 좋아하는 사람들한테도 대대손손 까이는 도움이 안되는 군대.

그나마 소위 말하는 보기에는 거대하고 위압적이지만 정작 싸워보면 쉽게 쓰러지는 악의 군대 클리셰를 현실에서 발생시켜서 때문에 악역으로는 쓸모가 있다는 것 정도? 웃기게도 재패니메이션에 제법 흔하게 나오는 클리셰이기도 하다. 일본의 일부 최하위 1% 멍청이들이 현대의 러시아군, 중국군, 한국군 상대로 목빠지게 바라는 절대 이루어지지 않는 클리셰이기도 하다.

14.4. 일본[편집]

사실 일본군의 막장스런 실태는 일본인들도 꽤 잘, 아니 주로 반전(反戰)을 주제로 하는 작품에서 일본군 내부의 부조리나 병크가 곧잘 나온다. 반면 유명한 사카이 사부로를 비롯 이런 부조리한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해 적과 싸우며 좋은 성과를 거둔 몇몇 인물들을 영웅담의 소재로 곧잘 쓴다. 물론 한편으로는 상당히 미화시켜 보여주거나 하는 때도 있지만 의외로 이쪽이 더 마이너하며 크게 인기도 없다. 애초에 보통 과거 역사에는 큰 관심이 없어서다.

일반적으로 일본 매체 내에서 일본군 내의 가혹행위나 부조리는 반전소설에서도 거의 묘사되지 않는다. 이는 독일과 매우 대조적인데, 독일의 여러 영화들은 2차대전을 묘사할 때, 나치를 옹호한다는 비판을 피하기 위해서인지는 몰라도 클리셰처럼 나치 독일의 군사조직들, 즉 슈츠슈타펠 뿐만 아니라 독일 국방군까지도 각종 만행이나 사악함을 반드시 짚고 넘어간다. 독일에서 만든 영화 특전 유보트(Das Boot)는 잠수함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이런 면이 잘 안 나타났기 때문에 독일 내에서 나치 시절의 군인을 옹호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원판인 TV시리즈를 보면 역시 사람 살기 힘든 곳임이 잘 나타난다

문제는 일본 영화에서는 아예 그런 거 없다는 점. 그러니 일본의 2차대전 영화들은 1950년대부터 제작되었지만, 대부분 일본군의 인간적인 면을 부각시키며 미화하며, 스스로 "국가를 지키기 위해 희생했다"는 식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는 <버마의 하프>나 <호타루> 같이 극우와 거리가 먼 반전 영화도 마찬가지며, 전쟁의 비극은 그리되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에 대한 반성은 전혀 없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한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에서 잠시 구타나 일본군의 육해군 갈등이 묘사되긴 하는데, 아마 일본인 감독이라면 이런 장면은 나오기 힘들었을 것이다.

다만 공통적으로 일본 군부가 고의로 전쟁을 일으켰다거나 민간인을 학살하는 등의 막장 군대다운 면모는 보통 안 보여준다. 이에 대해 자국민에게 "자국군이 악당이었다"라고 생으로 들이밀면 당연히 기분 나빠할 것이므로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고 얘기하는 의견도 있지만, 일본 사회가 과거사의 반성을 제대로 안했다는 뜻이다. 몇몇 부분 한정으로는 나타내기도 한다.

2003년에 방영한 <사탕수수밭의 노래>의 경우 방공호에서 아기가 울자 뺏으려는 일본군 본토 병사를 오키나와인 교사가 말리자 "이래서 오키나와 인이 나약하다고 소리 듣는 거다. 이번 전쟁에서 지면 너희 오키나와 놈들 때문이다"라면서 총으로 사살하려고 하거나 오키나와인 출신으로 징집된 아버지가 찾아낸 부상당한 미군 파일럿을 포로 대우고 뭐고 사살하려고 하는 일본군 장교가 나온다. 다만 이 경우는 오키나와 전투가 일본 우익들도 빼도 박도 못하게 일본군이 자국민에게 저지른 막장짓도 있고 오키나와 도민들도 기억하기 때문에 일본군에 대한 전적인 미화가 힘들다.

현대 독일인들은 나치 독일군의 만행을 부정도, 미화도 않는다. 이에 비해 일본은 일본군의 만행을 미화하거나 전범들을 영웅시까지 하니, 독일과는 참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독일도 과거를 곱씹으며 반성하기보다는 '흑역사니까 잘 수습하고 덮어버리자'에 가깝기 때문에 국내에 알려진 것처럼 아주 깨끗한 건 결코 아니지만[42] 일본은 그것을 2차 창작으로 이어 상품화하는 경우도 있다는 게 문제다.

가끔 일본산 가공전기 등에서는 멀쩡해 보이는(?) 모습으로도 있다. 그래서 일본산 가공전기지만. 게다가 대부분의 매체에서는 해군은미국과 동급으로 나온다.

그러나 모든 일본 매체가 일본군을 미화하는 것은 아니다. 게게게의 키타로로 유명한 만화가 미즈키 시게루의 작품 중 전쟁 경험을 바탕으로 한 만화들이 있는데, 거리낌 없이 묘사하는 당시 일본군의 막장 행태가 나오니 읽어보는 걸 추천한다. 작가 미즈키는 지옥과 같은 동남아시아 전선에 갔었고 왼팔도 잃었지만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왔으니 어설픈 동경이나 자기합리화가 아닌 생생한 당사자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내용이 일품이다.

오시이 마모루 작품에서는 일본군은 그리 안 나오지만 군대가 되려는 자위대가 자주 나오는 편으로 일단 작품상의 자위대는 까이는지 안 까이는 건지 모르는 애매모호한 세력으로 나오는데 일단은 전반적으로는 약해보이게 나온다. 일설에 따르자면, 오시이는 운동권적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고도 한다. 계엄령이 떨어져서 자위대 소속 치안군이 도쿄에 주둔하게 되는 패트레이버 2번째 극장판에서 여러가지 추태를 보이는데, 그 중 걸작인 것이 비행선이 추락하면서 가스가 누출되자 집단으로 패닉에 빠져서 멈춰있는 에스컬레이터로 올라가다가 전부 떨어지거나 하는 등의 추태를 보인다. 이 가스는 후에 착색가스로 밝혀졌다.

15. 기타 관련 문서[편집]

15.1. 참고 서적[편집]

  • 《미완의 파시즘》

  • 《일본 군비확장의 역사》

  • 《대본영의 참모들》

  • 《일본의 군대》

  • 《일본군사사》

  • 《왜 일본 제국은 실패하였는가》

  • 이노세 나오키 저《쇼와 16년 여름의 패전》

  • 한도 가즈토시 저《쇼와사》

  • 니얼 퍼거슨 저《제국》, 《증오의 세기》

15.2. 조직체계, 계급체계, 주요 인물, 무기체계[편집]

15.3. 관련 학설[편집]

15.4. 관련 전투 및 사건[편집]

15.5. 관련 문서[편집]


[1] 마침 1차대전 당시 독일도 일본제국과 유사하게 민간 정부가 군인을 통제하지 못해 문제로 군사독재가 이루어졌다.[2] 육군대신, 해군대신 외에 군과는 직접 관계 없는 부서들, 예를 들어 아라키 사다오 전 육군 대신은 예편 후 문부상을 했다.[3] 이상은 육군 이야기인데 해군은 진작부터 제대로 된 대우를 했고 그덕분에 병력을 지원제로 채우는 위엄을 보일수 있었다[4] 한마디로 개만도 못한 취급을 받은것이다[5] 정어리는 그리 큰 생선이 아니다. 정어리 2마리 정도면 현재 대형마트 등지에서 파는 통조림 한 캔 정도의 분량인데 이게 80g 정도이다. 80g의 생선으로 하루 4인 가족의 단백질을 보충하라는 것이다.[6] 이오지마 같은 격오지에서도 해군의 급양이 훨씬 좋아서 지휘관인 구리바야시 장군이 해군 지휘관과 협조, 육해군 급양을 동일하게 하기도 했다[7] 비만 오면 진창이 되는 곳에서 마른 장작을 구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지 상상해 보라. 더욱이 대규모 병력이 한 곳에 죽치고 대치 상황을 벌이고 있는데 연료가 남아나겠는가?[8] 이러한 이유때문에 병사들이 고향에 보낸 편지중에는 고체 알코올좀 보내달라는 편지도 있다. 연기가 나지않기에 포병으로부터 안전하고 그나마 음식을 따뜻하게 먹을수 있으니까.[9] 중세 유럽군대의 미칠듯이 느린 진군속도의 원인중의 하나가 바로 이 보급문제였는데, 당시 기술로는 이동수단이 마땅찮기도 했고, 더군다나 한번에 많은 수의 보급품을 보낼수가 없으니 현지조달하느라 시간까먹고 하다보면 시간다까먹고 진군속도는 떨어질수밖에.[10] 당시에는 도정과정이 완벽치 않아 메밀국수에 메밀껍질이 그대로 들어가 있었는데, 도정되지 않은 메밀 껍질 부분에 비타민 B가 포함되어 있어 실제로 각기병에 효과가 있었다.[11] 지금은 쌀밥이 흔한 밥 취급받고 콩밥 등의 혼식이 신경 쓴 건강식이라며 주목받지만, 쌀 생산량이 떨어졌던 전근대까지만 해도 100% 쌀로만 지은 쌀밥은 부의 상징이였고 혼식은 가난의 상징이였다. 오죽하면 윗 동네의 목표인 지상락원이 '이팝(쌀밥)에 고깃국 먹는 것'일 정도. 문제는 거긴 원래 목표에서 오히려 점점 더 멀어지고 있지만.[12] 단, 국군도 1980년대까지는 가혹 행위가 당연한 것으로 치부되었고 가혹 행위로 야기된 자살도 언론 검열에 의해 쥐도새도 모르게 덮어졌다. 당시에는 가혹 행위가 군인 정신을 만든다는 생각이 만연했으며 지금처럼 가혹 행위가 지탄받게 된 것은 다소 최근의 일이다.[13] 갓 출가한 사람. 승려가 되기 위해 교육을 받는 단계이다.[14] 참고로 부처님은 하루라도 먼저 온 사람이 선배고 그 법은 절대 바꾸지 말라고 했다. 물론 위와 같이 똥군기 부리라는 말은 절대 아니다. 카스트 제도가 횡횡하는 인도 사회에서 평등을 지키되, 교단의 질서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석가모니의 제자들은 아난다와 같은 왕족, 귀족도 있었지만 우바리와 같은 천민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교에는 깨달음이 있다. 행자 신분이라도 깨달음을 얻고 인가만 받으면, 그 절 최고 스님과 동급 대우를 받을 수 있다[15] 작가 본인도 에이헤이지에서 수행하고 고마자와 대학을 나온 미국인 불교 승려였지만 일본 불교사를 공부하는 와중에 이런 더러운 사실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16] 위의 사례 중 명치 올려치기만 봐도.. 명치는 심장에서 매우 가까운 급소다.[17] 참고로 이후 전개는 미군 전차의 포격으로 천장 일부가 무너져 내려 그 일본군은 사망한다.[18] 이 사람은 본인도 친히 고문과정에 참가했다.[19] 사실 대한민국 국군의 가혹행위는 단순히 일본군 탓이라 보기엔 광복 후의 막장스런 상황이 한몫 하기도 했고, 현 중화민국군의 전신인 국부군의 영향도 상당했다. 실제로 대만도 1990년대까진 한국만큼이나 군대 가혹행위 문제가 심각한 편에 속했다.[20] 대한민국에서 1987년 이후로 군사주의적 분위기가 서서히 사라져가고 있는 것과 매우 대조적이다.[21] 현대 러시아군에서 엽기적인 가혹행위가 있었다는 점을 보면 이를 짐작해 볼 수 있다.[22] 육군과 달리 해군은 부대 내규로 규제하지 않는 한 개인이 알아서 쪼개 쓸 수 있다.[23] 육군과 전쟁 후반기의 해병부대에는 전투일선으로 보충병의 수시증원이 이루어졌다.[24] 위안부는 단순히 한국에서만 징집한 것이 아니다. 식민지인 만주나 대만 지역은 물론, 전쟁 당시 점령지에서도 징집해 갔다. 그래서 당시 영국, 미국, 프랑스, 네덜란드 식민지였던 동남아시아 지역에 살던 본국 여성들도 같이 피해를 당했다.[25] 독립군의 주 활동 무대이기도 했으며, 러일전쟁 이래 일본의 세력권이었다.[26] 그런데 이는 대외적 고려가 있음을 감안해야 한다. 예산 셔틀인 전쟁을 잘 모르는 민간인이나 아니면 병사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서는 다소 적을 과소평가하고 아군을 과대평가하는 것이 군인들이나 상관들 입장에서는 합리적이다. 미국도 막상 유럽에 본격적으로 끼어들기 이전에는 그 악명높은 MG42를 디스하기도 했다. 이 분야 끝판왕은 병사 수첩[27] 전차의 집단운용 자체는 제1차 세계대전 기간인 1917년에 벌어진 캉브레 전투에서의 연합군으로 전투용 전차 378대를 포함하여 무려 476대의 전차를 동원한 바 있다.[28] 남방작전을 위한 육군 병력 수송을 위해 390만톤의 수송선을 징발했고 이는 민간경제활동과 군수물자 생산에 필수적인 민수용 수송선량 300만톤을 침해하는 결과로 이어졌다.[29] 단, 해당 링크에서 영국쪽 자료에 오류가 좀 있다. 영국에서 배치한 전투기의 최대 속력을 650km/h라고 했는데 템페스트가 695km/h, 스핏파이어도 720km/h의 속력을 기록했다. 일본의 경우 4식전은 일본에서 테스트 한 결과는 640km/h지만 미국에서 테스트했을시 680km/h를 기록.[30] 상술한 NHK의 다큐멘터리를 보면 개전 직전 일본은 1차대전기 영국(같은 섬나라) 수송선 상실량이 연간 보유량의 10% 정도였다는 것에 근거해(자신들이 해상호위를 방폐한 실정이라는 것은 생각하지도 않고)연간 예상되는 수송선 손실을 60~80만 톤으로 추산했다. 실제 총 손실량은 800만톤이 넘어가고 한 달에 50만톤 이상을 상실한 경우마저도 있다.[31]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들 잘 아는 대로 독일에서는 잠수함 통상파괴를 유력한 전략으로 여겼고 영국에서는 심각한 위협으로 간주해 각각 공격과 방어에 진력했다. 일본은? 결전 전력 구성에 정신이 팔려 시레인 방위나 통상파괴는 안중에도 없었다.[32] https://warandsecurity.com/tag/unrestricted-submarine-warfare/ 영국은 참고로 1차대전 당시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매월 약 15만 톤 이상, 최대 55만 톤 이하의 피해를 입었고 타국의 손실까지 합치면 그 배 안팎이었다. https://www.alternatehistory.com/forum/threads/how-much-shipping-did-the-u-boats-have-to-sink.408933/http://www.historynet.com/captain-frederick-john-walker-royal-navys-german-u-boat-menance.htm 2차대전 시기에는 개전 후 2년 내로만 영국해군은 대략 1000만 톤 안팎으로 피해를 본 것으로 추산된다. 다른 기사에서는 연합군 전체는 총 1500만 톤을 손실했다고 한다. 상선의 소티 대비 손실률은 전 기간을 통틀어서 1.7%이고 유보트가 잘 나갈떄도 2.5% 수준. 그리고 유보트가 격침시킨 배의 절반은 빈배이고 정말 중요한 물자는 별도로 빠른 수송선에 적재하고 매우 엄중한 호위를 받았기에 손실한 사례가 극히 드물다. 유보트의 진정한 가치는 유보트가 때려잡은 상선에 있는게 아니라 연합군이 여기에 대응하기 위해서 엄청난 비용을 퍼붓게 했다는 것이다. 가령 영국이 수송선단을 형성하면서 상선의 효율이 2/3으로 대폭 감소했는데 이건 유보트가 직접 준 피해와 비교할 수 없는 규모이다.[33] 정작 항만 시설과 항공모함은 타격을 주지도 못했고 피해는 속도도 느린 구식 전함이 대부분이었지만 함대결전사상에 근거해 향후 전황을 낙관하는 오판을 하게 된다(전사연구연보 15호) [34] 미드웨이가 일본이 이겨볼만한 마지막 전투였고 필리핀, 레이테에서는 양에서도 질에서도 상대가 안되는 상황에 몰렸다. 이 상황에서 이기려면 일본 지휘관이 그 어떤 미 해군 제독보다 뛰어나면서 미 해군 지휘관은 역사에 남을 멍청이여야 한다.[35] 프랑스만 피해가 큰건 아니었으나 인구수가 적었던 프랑스에게 이는 심각한 타격이었음.[36] 물론 전체 규모가 커진 만큼 군수지원능력의 절대치는 늘어났겠지만, 과달카날 전역, 임팔 작전같은 사례를 보면 군국주의 팽창정책을 펼치면서 오히려 러일전쟁 시기보다도 상대적으로 군수지원능력은 더 떨어졌다. 개전 직전 경제 및 군수물자 생산을 위해서는 민수용 수송선이 최소 300만톤 필요하다고 추산되었지만 시레인 방위를 방폐하면서 건설한 세계 3위 해군으로는 연합군의 통상파괴를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었고 43년이후 두드러지는 보급 문제와 병기, 군수물자의 신뢰성 및 품질저하도 섬나라의 경제활동에 필요한 최소한의 수송선도 유지하지 못한 것에 기인한다. 상술한 유라 후지오의 기고문은 일본 육해군항공 양쪽이 상정하지 않은 전장에서 싸우느라 그 근간이 꺾여버릴 정도의 타격을 입었음을 지적한다.[37] 그러므로 상술한 유라 후지오의 지적대로 태평양 전선의 전력이 2선급이었던 것. 일본의 초기 성과는 여기에 기인한다.[38] 영국은 독일, 이탈리아 해군과 이미 싸우고 있는 상황에서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가능한 병력을 빼온건데 보낸다는게 리벤지급 전함(...) 게다가 아직 고성능 함재기도 배치되기 전이라 비행장 인근이 아니면 제공권 장악도 장담하기 어려운 상태였다.[39] 아예 마오는 지금이 세력을 불릴 기회라고 세력을 불리는데 집중했고 심지어는 일본에게 중국을 침략해줘서 감사하다고 하기까지 했다.마오쩌둥 '일제 침략에 감사' 발언은 사실[40] 상하이 사변, 루거우차오 사건[41] 물론 공식 사이트에서는 "침략자 일본 도적떼(日寇)" 로 칭해지긴 하지만 게임 내에서 직접적으로 자위대를 멸칭으로 부르지는 않는다.[42] 냉전 시대 미국의 필요에 의해 재무장을 하면서 최소한의 표시를 한 것에 불과하다. 사실 유태인 학살을 제외하면 소련 내에서의 슬라브인 학살, 집시 학살 등은 아예 인정하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