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딩로딩중

풍수지리

최근 수정 시각:

분류

주요 점복학

신의(神意)

시간

공간

인간

부호

자연형상

인위형상

계시

주물

물상

인상

인위

시상점
(時相占)

물상점
(物相占)

인상점
(人相占)

괘상점
(卦相占)

인위상점
(人爲相占)

계시점
(啓示占)

주물상점
(呪物相占)

점성술

풍수지리

관상학

주역

승부점

해몽

신장대

사주명리학

천체점/에어로맨시

수상학/카이러맨시

육효

인사점

현몽

수정구슬

토정비결

천기점

족상

타로 카드

기물점

공수

동전

아제레 이파(이파 점술)

동물점

혈액형점

윷점

심령술

신탁

방울

이릭 비티그

식물점

오쿨로맨시

카토맨시

데모노맨시

오룬밀라

게티아

출처: 《한국사주명리연구》(김만태 著, 민속원) 〈그림 4〉 점복의 유형


파일:external/miceandpup.files.wordpress.com/pungsu1.jpg

내가 만리장성 만들면서 땅의 지맥을 끊었으니 죽어 마땅하다. - 몽염


몽염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사마천도 부질없다고 깐 바 있다. 너무 맹신하지 말자.

1. 개요2. 한국의 풍수지리3. 구분4. 하위 항목

1. 개요[편집]


과 땅, 의 흐름을 읽어 이것을 길흉화복에 연결시키는 지리.

삼국시대불교의 교리와 민간에 뿌리내렸던 토속신앙이 결부되어 현재의 풍수지리가 되어 이어져 내려왔다는 설이 대세이며, 이후 조선시대에 완전히 정착해 널리 퍼져나갔다고 한다. 다만 제도화된 풍수지리사상 자체는 일단 중국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1] 사실 정설 정도가 아닌 것이, 중국의 풍수 사상은 삼국시대보다 천년 이전 시대에 등장한 것이다.

기본적으로는 산과 물의 형세, 동서남북의 방위 등을 고려해 입지가 좋은 곳을 찾게 되며, 이렇게 지리적 조건이 좋은 장소를 명당이라고 부른다. 이런 명당에 묘나 집을 짓게 되면 자손대대로 정기를 받아 복을 누리게 된다고 한다. 보통 배산임수의 형지가 대개 명당인 경우가 많다고 한다. 사실 이런 지형은 볕이 잘 들면서도 물을 쉽게 구할 수 있고 겨울에 찬 바람을 뒤의 산이 막아주는 효과가 있어 실제로도 사람이 살기 좋은 곳이다. 거기에 뒤의 산과 앞의 강이 자연적 방어벽이 되기 때문에 외적을 막기도 용이하다. 이떄문에 풍수지리를 전통적인 농업경제 사회에서 자연스레 발달한 지리적 지식에 훗날 기복신앙이 덧붙여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제도권 학계에서 풍수지리를 연구할 때는 이렇게 신비주의적인 측면보다는 자연과학적인 차원에서 풍수지리에 접근하는 경우가 많다. 이 학파의 유명인은 최창조 전 서울대 지리학과 교수. 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그 원리를 현대과학으로 재해석하려는 시도일뿐, 실제 지리학과 교수들이 "명당이 어쩌구 산의 기운이 어쩌구" 하는 풍수지리 자체를 옹호는 경우는 전혀 없다.

이와는 반대로 과거 선조들이 풍수지리에서 가졌던 신비주의 관점을 유지하거나, 그런 관점의 존재와 유래를 무시할 수 없다는 견해도 상당수 있다. 대개 돈 받고 터 봐주는 대중 사회의 지관이나 지관 시민단체들은 이쪽 노선이며,(이중에서도 젊은 연령층일수록 후자가 많다) 학계에서 비슷한 주장을 하는 사람으로는 조용헌 교수가 있다.

이 풍수지리로 인해 너도 나도 묫자리로 쓰기 좋은 명당 자리를 차지하려고 기를 쓰고 싸운 결과, 명당으로 점지된 장소는 순식간에 땅값이 치솟는 현상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 외에도 일제강점기시절 일본에서 풍수지리설에 입각해 조선의 주요요지에 쇠말뚝을 박아놓았다는 소위 "일제풍수모략설"도 있다. 대만에도 비슷한 설이 있는데, 이에 관해서는 해당 항목 참조.

이론 자체로만 보면 풍수지리는 국토를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일종의 인문지리학적인 학설로 현실을 반영[2]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풍수지리가 기본적으로 역사적 경험에 의거해 구성되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특히 한반도에서 유독 양택풍수에 목을 멘 이유가 산이 많은 지형적 조건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크다. 기본적으로 산을 북쪽에 끼지 않으면 살인적인 북풍을 버틸 방도가 없거니와, 풍수지리를 따르자면 도시 및 거주지를 분지 지역으로 몰아넣어 결과적으로 평야 지대의 농경지를 보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3]

다만 풍수이론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 이유는 역시 거의 모든 명리학(서양을 포함)이 갖는 대표적 특징에 기인하는데, 첫째. 음양오행주역 사상을 기반으로 했고, 둘째. 이 이론이 여간 해서는 '제대로' 파악하기 쉬운 이론이 아니라는 것이다. 셋째로 이 이론을 '제대로' 파악했다 해도 실제 현실에 적용하여 응용하고 풀어나가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그리고 어딜가나 돈을 노리는 사람, 실력에 차이가 있는 사람들이 널려 있기 때문에 과거나 지금이나 같은 지형을 놓고도 해석이 분분했고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시도도 많았다.


이 영상을 보면 정말 "아주 근거가 없는 건 아니라는 게 맞는 듯"(...) 명당이랍시고 비싼 돈 주고 샀는데 이래버리면 대판 싸움난다(......)
당연한 말이지만 길한 자리라고 해도 목적에 맞게 써야한다. 이건 상식이 부족해서 불러온 참사. 그리고 사실 수맥이라는 개념은 근대 들어 서양에서 도입된 것이라 전근대 풍수학에서는 크게 다뤄지지 않는다. 그저 땅을 파봤는데 물이 나오면 다른 자리를 잡는 정도에 불과하다.[4]

서구권에서는 중국어 발음을 따서 Feng shui라고 한다. 현대에도 풍수를 가장 진지하게 따지는 곳은 홍콩, 대만 등지 이며 중국 본토는 문화대혁명대약진 운동을 거치고 난 이후 풍수를 거의 따지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홍콩에서 풍수와 관련된 유명한 사례로 HSBC중국은행마천루를 짓게 되면서 일어난 해프닝.[5] 각 항목을 참조할 것.

사족으로 수맥은 동양의 풍수지리사상이 아닌 서양에서 유래한 개념. 그런데 자칭 풍수지리의 전문가라는 사람 중에서도 두 가지를 구별하지 못하거나 뒤섞어서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

2. 한국의 풍수지리[편집]

한국의 풍수지리의 유래는 흔히 신라 말기에 불교 선종의 승려들[6]중국에서 수입했다는 설이 대세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자생설[7], 신라 중기 도입설 등도 근거가 있어 여전히 논의되는 상태이다. 일단 물기가 샘솟는 땅에 만든 원성왕릉(괘릉)[8] 같은 사례를 봐도 신라 하대까지는 적어도 후세 사람들이 생각하는 풍수지리는 아예 도입되지 않았거나, 알려져 있었더라도 왕실과 귀족계층도 거의 신경쓰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다. 신라 때도 전불 7처[9] 같은 고유 신앙의 길지라는 개념은 있었지만 중국식 풍수지리와는 기준이 달랐다.

한국에서 풍수지리학문이 역사적으로 눈에 띄게 성장한 것은 후삼국시대로, 신라 말기 이전 도입설을 주장하는 쪽에서는 이 이전에는 극히 일부 지배계층만의 고급 지식이었다고 주장한다. 왕권이 약화되고 지방의 호족들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선종과 함께 인기를 끌고, 사회 전환의 추진력이 됐을 때였다. 호족들은 저마다 자신의 근거지를 명당화해 자기 권위를 확립하였으며, 지방에서 어느 정도 커진 호족들은 이를 사상적 기반으로 반란 루트를 타기도 했다.

이후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계속 발전하여 조선시대에 가장 번성하게 되었으며, 조선 중기 이후 사람이 살아가는 땅인 양택을 중심의 풍수학설이 사람이 죽은 뒤에 묻히는 땅, 음택을 중심으로 변화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변화는 설화나 야사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예컨대 신라시대에는 석탈해가 좋은 자리를 얻기 위해 호공의 집을 뺏었다고 하며 고려 시대에는 왕건의 아버지가 왕기를 받기 위해 개경에 자리잡았다고 하는데, 이는 주거 중심의 풍수지리의 학설을 반영하는 이야기이다. 반면 조선 시대에는 태조 이성계의 묏자리가 좋았던 덕에 이 되었다, 세종의 묘를 잘못 써서 장손이 망했다, 흥선대원군이 묏자리를 '만 대에 걸쳐 영화를 누리는 자리'가 아니라 '두 사람의 황제가 나오는 자리'에 잡아서 대한제국의 말로가 비참했다는 등 묏자리 중심의 풍수학설을 반영하는 이야기가 중심이다.

조선시대의 사대부 유학자들은 '풍수지리는 미신같은 괴력낙신이니, 그렇게 풍수가 중요하면 공자님이 왜 한마디도 언급을 안 했냐느니 이런 걸 추종해서야 되겠냐'고 신나게 떠들다가 조상 무덤 자리는 풍수지리 상으로 좋은 곳에 잡으려고 몇 대에 걸쳐서 산송을 일삼곤 하는 참으로 이중적인 행태를 보여주었다. 풍수를 믿던 유학자와 공자 말씀대로 미신이라고 까던 유학자가 따로 있었던 것 아닐까

현재의 풍수학설은 민간에서는 토착신앙 비스무리한 것이 되었다. 일반적으로는 묏자리 잡는 용도로 사용되는 일종의 미신 취급을 받지만, 그래도 아직 많은 사람들이 조상 묘는 명당에 모시려 기를 쓰고 있으며 관공서나 건물의 입주 등 실생활에도 응용되고 있다. 국립묘지, 박물관, 시청과 도청 급의 건물들은 모두 풍수를 고려하여 위치를 선정한다고 하며, 홍콩은 도시 자체가 풍수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심지어 세종특별자치시 건설에서도 풍수지리가 고려되었다. 정치에 이용되는 것도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물론 정치에 이용된 것치고 좋은 결말이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기업 건물이 풍수지리 자문을 받아 짓는다는 이야기는 이미 도시전설의 영역.

한국사에서 풍수지리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도시는 단연 개성으로, 도시 배치 자체가 송악산자락의 지형에 최대한 맞춰져있다. 궁궐인 만월대를 둘러싼 궁성은 시가지 서북쪽 끄트머리를 차지하고 있고, 궁궐의 정문은 동향으로 나 있으며, 도로망 역시 바둑판과는 거리가 멀다. 중국의 영향을 받아 궁궐이 도시의 중심에 위치하고 바둑판처럼 구획이 나뉜 부여군, 경주시, 서울특별시를 생각하고 개성시가지 지도를 들여다본 많은 사람들은 사회주의체제도 어찌하지 못한 그 난개발스러움에 적잖이 당황하기도.... 고려는 한국 양택풍수의 최전성기였던 시기로, 묘청이 풍수지리에 입각해 천도대상지로 건설한 평양 대화궁도 드넓은 대동강변이 아닌 평양 동북쪽 입불산 기슭에 쳐박혀있다. 서울로 따지면 풍수지리 좋다고 경복궁을 우이동에 박아넣은 꼴이다.이러니 나라가 그 모양이지

반면 한성은 세간에 파다한 인식과 달리 그다지 풍수지리의 영향을 크게 받은 도시는 아니다. 애초에 형세가 좋다고 하여 처음 도성공사를 시작한 곳은 계룡산 신도안이었고, 신도안 건설이 중지된 이후 천도논의에서 이 분야 전문직인 서운관 관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부소명당, 즉 송악 잔류를 강력하게 밀었으며, 그 와중에 하륜의 무악천도론도 제기되었다. 이런 모든 논란을 일거에 잠재운 것이 명에 사신으로 출장갔다가 돌아온 정도전으로, 그는 상소를 통해 송경(개성)이 국토의 중앙이기는 하나 땅이 너무 비좁아 도읍으로는 마땅치 못하다고 비판하는 한편, 쟤들이 음양술수 소리만 해대는데 중국사 봐도 그딴 거 없거등요?라며 한양 천도를 반대하는 풍수쟁이들을 대차게 디스하기도 했다.

이곳이 나라 중앙에 위치하여 조운(漕運)이 통하는 것은 좋으나 한되는 것은 한 골짜기에 끼어 있어서, 안으로 궁침(宮寢)과 밖으로 조시(朝市)와 종사(宗社)를 세울 만한 자리가 없으니 왕자의 거처로서 편리한 곳이 아닙니다. 신은 음양술수(陰陽術數)의 학설을 배우지 못하였는데, 이제 여러 사람의 의논이 모두 음양술수를 벗어나지 못하니, 신은 실로 말씀드릴 바를 모르겠습니다. 맹자의 말씀에, ‘어릴 때에 배우는 것은 장년이 되어서 행하기 위함이라.’ 하였으니, 청하옵건대, 평일에 배운 바로써 말하겠습니다.(중략) 천하의 큰 나라로서도 역대의 도읍한 곳이 수사처(數四處)에 지나지 못하니[10], 한 나라가 일어날 때, 어찌 술법에 밝은 사람이 없었겠습니까? 진실로 제왕의 도읍한 곳은 자연히 정해 좋은 곳이 있고, 술수로 헤아려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후략)
태조실록 6권 3년, 8월 12일(기묘) 2번째 기사.


도시의 입지 선정에 있어서 북악을 진산과 주산, 주맥 등을 따지는 수준의 기본적인 배려는 있었으나 기존에 아마도 풍수에 입각해 지었을 남경 이궁은 완전히 배제해버리고, 대신 북악산 아래에 네모반듯한 형태의 경복궁을 새로 지었는데 처음부터 풍수지리를 최대한 따졌다면 아마도 창덕궁과 같이 비뚤어진 모양새의 궁궐이 나왔을 것이다.풍수쟁이들은 경복궁을 저렇게 지어서 나라가 망한 거라고 이빨을 깐다

과학적 근거는 거의 없다시피하지만, 숭례문 화재 당시 수호상인 해태상이 이전되고, 서울역 앞에 있다던 화기를 가라앉히는 연못은 사라진 지 오래고, 관악산 서울대학교 출신 고위직이 많아졌을 때 비로소 숭례문에 화가 났다는 말도 있다.

오늘날 매스컴에서 논하는 풍수는 거의 말장난으로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인 식이 많다. 성공한 사람이 많이 나오면 대충 말로 둘러대서 이러쿵 저러쿵하여 말빨로 대충 처리한다.

미스터리, 심령 프로그램도 많이 다루는데, 프로그램 연출을 아주 무섭게 한다.

3. 구분[편집]

양택 풍수

사람이 사는 집을 지을 자리의 위치나 방향 등을 따져 좋은 자리에 집을 짓고 거주자와 후손들이 좋은 기운을 받는 것을 연구하는 풍수다.

음택 풍수

죽어서 묻힐 때 무덤 자리를 따져보고, 좋은 자리에 묻어 그 후손이 이익을 받는 것을 연구하는 풍수다. 대한민국은 현재 이 음택풍수가 과열되어 지나칠 정도로 호화롭게 장례를 하는 문화가 생기는 데 영향을 주었다.

실내 풍수

홍콩에서 처음 시작된 것으로, 인구가 밀집하여 더 이상 음택 풍수를 논하기 힘들어지자[11] 그대신 실내의 가구 배치나 배색 등으로 복을 불러들이고자 하는 풍수다. 홍콩 외에는 일본에서 상당히 성행하고 있다.

4. 하위 항목[편집]

[1] 풍수지리라는 말 자체가 중국어다.[2] 일례로 배산임수라 부르는 산을 등지고 물을 근처에 둔 지세는 실제로 농경사회에서 집 짓고 살기 좋은 곳이었다.[3] 1960년대 광주대단지, 1970년대 반월신도시 입지를 선정할 때에도 농경지 침범 여부가 큰 고려사항이었을 정도다.[4] 문제는 이놈의 수맥이 파자마자 튀어나오면 피할수라도 있지만 한참 후에 습기가 고여 물구덩이를 만드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5] 중국은행이 빌딩을 모양으로 지으니까 바로 옆에 HSBC가 빌딩 옥상에 대포모양 장식을 해버렸다는 흠좀무한 이야기이다.[6] 도선 등[7] 이쪽은 입지가 좁다.[8] 왕릉에 걸 괘 자를 쓰는 이유가 늪지를 메워 만들어서 물기가 항시 고이는 땅이라 관을 걸어놓는 장치를 했기 때문이다.[9] 천경림, 신유림 등 불교 이전 고유신앙의 7대 성지를 말한다.[10] 중국에서도 역대 수도들을 보면 죄다 장안 낙양 등등 몇 곳을 계속 돌려쓴다는 말이다.[11] 현재 홍콩은 공동묘지가 일반적인 매장방식이며 그 공동묘지에서 산책을 하고 점심식사를 할 정도로 주거지와 밀접해 있다.[12] 좌청룡 우백호는 배산임수를 논할 때 필요한 형세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