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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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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영정[1]

성명

이순신(李舜臣)

출생

1545년 4월 18일[2]
음력 3월 8일

사망

1598년 12월 16일[3](53세)
음력 11월 19일

출생지

조선 한성부 건천동
(현 서울특별시 중구 인현동 1가 31-2 / 을지로18길 19)

국적

조선

본관

덕수 이씨

시호

충무(忠武)

여해(汝諧)[4]

기계(器溪), 덕암(德巖)

추존

영의정

1. 개요2. 직위3. 어록4. 외모5. 생애
5.1. 연표5.2. 태어나기 이전
6. 임진왜란 전야까지7. 임진년의 맹활약
7.1. 계사년 이후7.2. 어이없는 파직7.3. 명량 해전
7.3.1. 명량 해전 당시 전과7.3.2. 철쇄설
7.4. 전설이 되다
8. 논란과 음모론9. 전투 관련
9.1. 참전 목록9.2. 전술
10. 가족11. 후손12. 인격13. 권율과의 관계14. 평가15. 그 밖의 이야깃거리
15.1. 이순신 장검(長劍)에 얽힌 이야기15.2. 대중문화에서15.3. 화폐의 인물15.4. 이순신체
16. 현충사 박정희 현판 논란
16.1. 이순신 관련 문화재 소실
17. 관련 단체18. 관련 문서
18.1. 인물18.2. 같이 보기

1. 개요[편집]

성웅(聖雄)

미힐 데 로이테르, 호레이쇼 넬슨과 함께 세계사상 최고의 해군 명장 중 한 명
조선의 구원자이며 중과부적의 관념을 깬 희대의 영웅

조선 중기의 무인이며 임진왜란 시기 조선 수군을 통솔했던 지휘관. 는 여해(汝諧)이며, 시호충무공(忠武公)이다.[5] 연전연패를 거듭하며 졸전을 치른 지상군과는 달리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은 해상에서 연전연승을 거듭하며 적의 모든 보급로를 차단하여 적들의 북상을 저지하였다. 압도적인 승리와 강력한 해상 장악으로 불리한 전황을 뒤집어 절망에 빠진 조선 백성들에게 희망이자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외부의 적인 일본군과 항상 최전선에서 맞서야하고 내부에서는 갖은 시기와 모함과 멸시를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전투에서 패배를 모른 채 '손실이 최소화된' 승전을 거두고 한번은 정말 기적과도 같은 승리를 거두었으며, 임진왜란 최후이자 이순신 인생 최후의 전투인 노량 해전에서는 수군 최고 지휘관이란 위치에 있음에도 직접 전장에 뛰어들어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사후에도 조정에서는 끝없이 관직을 추증했고, 선비들은 찬양시(詩)를 지었으며, 백성들은 추모비를 세우는 등 많은 추앙을 받아왔다. 이는 일제강점기를 거쳐 현대에 와서도 마찬가지로, 대한민국 국민들이 가장 존경하는 위인으로 꼽힌다. 현대 한국에서 성웅[6], 명장, 군신이라는 최고급 수사들이 이름 앞에 붙어도 그 어떤 이의도 제기받지 않는, 한국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위인 중 1명이다. 가장 존경하는 위인 설문조사에서 세종대왕과 함께 늘 1위, 2위를 다투며 한국에서 "성웅"이라는 호칭은 일반적으로 이순신에게만 사용되고 있다.[7]

많은 사람들이 그저 나라를 구한 위인으로만 알고 있지만, 영웅이 아닌 평범한 인간으로서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경지를 이룬 성인(聖人)이다. 한 사람이 태어나서 겪을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절망과 역경, 시련을 겪으면서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는데, 여러 사람들의 질시와 모함, 부모와 자식의 죽음, 관리로서 받은 국가의 비합리적인 처우 등 육체적, 심리적으로 극한의 고통스러운 온갖 절망적인 상황을 좌절하지 않고 초인적인 정신력을 바탕으로 모두 이겨내며 천재적인 전술적, 전략적 능력을 발휘하여 존망의 위기에 처한 국가와 민족을 수호해냈다. 몇 전투는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공적을 세워 어떻게 이뤄낸 건지 아직도 학설이 분분할 정도이다.[8] 이런 사람이, 때마침 임진왜란 당시의 수군통제사였던 것이다. 말 그대로 난세의 영웅. 그야말로 어떻게 이런 실존조차 하기가 힘든 먼치킨급 인물이 때맞추어 전란이 벌어지는 시기에 등장하여 넘사벽스러운 활약상을 남겼는지 의심가는 사례라 할 수 있다.

때문에 21세기에는 일반적으로 나라를 구해내고 싸움은 모두 승리한 전통적인 구국영웅다운 모습으로 묘사되는 것이 주류지만, 작가에 따라서는 비관적이고 고독한 다크 히어로의 모습으로 묘사되는 것도 무리가 없는 인물. 그는 웃음이 적고 행동이 단아했으며 사고방식도 마냥 언제나 긍정적이지 않고 비관적으로 치닫는 면이 있었고, 그의 삶에서도 많은 고난과 핍박, 따돌림이 있었으나 좌절과 포기를 모른 채 제 사명에만 충실하게 전장에서 싸우기를 멈추지 않았다. 고난의 예를 몇 가지 간추려 보자면, 선조의 질투와 폄하는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고, 서인, 남인, 북인 등이 한때 당파를 가리지 않고 거의 모든 조정의 대신들이 그를 모함했으며 이순신의 친구였던 류성룡도 그랬었고 극소수만이 그를 변호한 적도 있었다. 또 자신의 신분을 높이고자 높으신 분들에게 뇌물을 주는 등의 부정행위를 하지 않고 무관으로서의 일에만 충실했기에 파직과 공을 세운 덕분의 복직이 한동안 반복되었다. 과거에는 무관으로 최초로 맡았던 직책을 6년 후에 승진 중 벼슬이 전부 깎여서 다시 맡아야 했던 적도 있었고, 녹둔도 사건 때 적의 침입으로 피해를 보았다가 반격했으나 이순신도 다리에 부상을 입는 등의 피해가 있었는데 이때 이일이 이순신과 이경록의 참수를 청하여[9] 이 시점에서 사형당할 뻔하기도 했지만 파직, 곤장, 백의종군을 당하고 겨우 생존했다. 익히 알려진 삼도수군통제사 자리를 원균에게 빼앗기고 압송되어 고문을 받고 없는 죄를 추궁받으며 상술한 거의 모든 조정 사람들의 모함으로 다시 사형의 위기를 맞았지만 겨우 살아남고 다시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그렇게 감당하기 힘든 일들을 겪고도 누구의 인정과 보상도 바라지 않고 조정에 대한 반역도 생각하지 않으며 나라와 백성을 구하기 위해 군인으로서의 일에만 최선을 다했고, 죽는 순간까지도 전장 속으로써 살신성인의 모습을 보였다.

또한 함대의 설계 및 훈련, 운영에도 탁월한 능력을 보였으며[10], 자기 휘하에 들어온 백성들을 잘 보살피고 다스려 칭송을 받으며 목민관으로서도 훌륭한 면모를 보였다. 다방면으로 뛰어난 업적과 왕에 대한 충성심으로 인해 적국 일본에서조차 사후 숭배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다만 업적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기 때문에 사후 이에 대한 논란들이 있어왔다란 말이 있는데 사료 하나도 제대로 수집 못 하고 편향적 논리에만 빠져 의심이란 단어를 어떻게 쓰고 있는가란 의문이 나올 지경이었다. 우선 북인들이 주도가 되어 편찬한 선조실록에서는 상대적으로 이순신에 대한 기사가 앞뒤가 안 맞고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는 사초들이 상당히 있고 그후에 서인이 주축이 되어 편찬한 선조수정실록은 반대로 근거가 없는 우상화의 시도조차 보이기도 한다란 말이 있는데, 실록을 편찬한 북인과 서인은 모두 이순신과 당적을 달리하는 사람들이다. 이순신 본인은 당파에 속한 인물이 아니었지만, 그나마 뒤통수 때리고 원균이 어떻게 비호를 받았는가를 입다문 류성룡의 사람이라는 인식이 강해서 남인으로 분류되었고, 북인과 서인은 남인과 대립 관계에 있던 당파들이다. 그런데 무슨 우상화 타령인가. 시호를 호란 두번 당해야 내리는 마인드가 제정신이라고 보이는 견해 자체가 제대로 검증한다란 말이 나오는지가 오늘날에도 성역이란 말에 형식적 휴내도 제대로 하지 않아 아쉬울 따름이다.

어릴때 이순신은 모든 걸 갖춘 완전 무결체의 모습으로 교과서에 표현하곤 했는데 실제 그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란 견해가 있다. 허나 명량에서 보인 행동은 신상필벌에다가 사람 대 사람으로서의 예의를 지닌 인격자였다. 거기에 전쟁에 대한 처음과 끝을 당대에서 근현대에서도 놀랄정도로 보일 능력을 보인 천재이다. 즉 교과서도 어느정도만 맞을 뿐. 신분귀하를 가리지 않고 의견에 귀기울이는 것부터 시작한 노력하려는 것에다가 정부란 인간들은 왕부터 시작해서 지만 아는 권력병 쓰레기란 존재들한테 온갖 핍박 받은 것을 가리는 소리인만큼 교과서 용어도 폄하하는 것이라 지적하는 견해가 나와야 하는 것이다.

2. 직위[편집]

[11]명 수군 도독[12] 조선국 증[13]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14] 대광보국숭록대부[15] 의정부 영의정[16] 겸 영 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17] 덕풍부원군
(有明 水軍都督 朝鮮國 贈 效忠杖義迪毅協力宣武功臣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 領議政兼 領 經筵 弘文館 藝文館 春秋館 觀象監事 德豐府院君)

[18][19] 정헌대부[20][21] 전라좌도 수군절도사겸 삼도수군통제사
(行 正憲大夫 全羅左道 水軍節度使兼 三道水軍統制使)

[22] 충무공 이순신 (諡 忠武公李舜臣)

상기된 80여 자의 기나긴 직위명들을 현대식으로 설명하자면, 이 충무공은 생전에 대한민국 해군참모총장으로서 장관급의 명예직과 예우를 받은 뒤[23], 해군 작전사령관 및 함대사령관을 겸직하고,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미 해군 원수직을 수여받은 셈이 된다. 나아가 사후에는 대한민국장과 태극무공훈장을 수여받았고, 총리급의 명예직과 예우를 수여받은 것이 된다. 훈장의 경우에는 다소 애매한 비유이지만, 수여된 관직들의 경우 일반인들이 쉽게 인식하는 현재의 관제로 비교하자면 위와 같은 셈이다.

여기에 덧붙이자면, 미 해군 대원수와 무임소 장관 직 및 명예 부통령 직을 동시에 받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즉, 무임소 장관 직과 명예 부통령 직은 대한민국 대통령이 취임함과 동시에 자동으로 주어지는 것이 되며, 대내외적 인정을 받기에 예우에서 밀리지만 미국에서는 동급으로 대우하는 셈이고, 죽은 뒤 200년 가까이 되어서야 미국에서 받은 최고위 계급과 유사한 국무 총리를 부여받은 격이다.

생전에 이순신이 계급이 낮을 때 장군이라고 불린 적은 있지만, 정작 가장 잘 알려진 시절에는 장군으로 불리지 않았다. 상기된 직책들 가운데 가장 품계가 낮은 직책이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인데, 수군절도사면 절충장군 품계로 장군이라는 글자가 들어가는 품계 중 최상의 품계이며 또한 당상관에 해당되었고 당연히 조선시대에 정3품 당상관 이상의 관리에게 장군이라는 호칭을 쓰는 일은 없었다. [24] 게다가 삼도 수군 통제사 자리는 종2품 직으로 가의/가선대부 품계가 필요했는데 이는 엄연히 영감이라고 불리는 문반 품계였으니 장군이라고 부르면 모욕이다. 그러나 현대의 통상적인 장군이라는 호칭이 대중들에게 좀 더 익숙하게 다가오는 말이었고, 여러 미디어에서 대중들에게 익숙한 장군이라는 호칭을 쓰면서 이순신 장군이라는 칭호가 굳어지게 되었다. 대한민국 해군이나 관련 관계자들은 현대에 육군 계열의 칭호로 쓰이는 장군 칭호를 기피하고 대신 해군이 사용하는 칭호인 제독을 붙여서 이순신 제독이라고 부르는 편이다. 현대 대한민국 국군에서 육군 장성은 장군, 해군 장성은 제독 칭호를 쓰기 때문이다.

시대적으로도 장군이라는 명칭은 맞지 않고, 현대 기준에서는 제독이라고 부르거나 당시 기준으로 수사영감, 통제사 영감, 통상대감(정헌대부 시절), 나으리 등으로 부르는 것이 맞다. 이순신/평가 항목 참조. 외국에서도 이순신 같은 해군 지휘관은 철저히 Admiral이라고 붙여 부른다.

3. 어록[편집]

三尺誓天(삼척서천) 山河動色(산하동색)
一揮掃蕩(일휘소탕) 血染山河(혈염산하)
석 자 칼에 맹세하니 산과 강이 떨고
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이도다.


이순신의 장검 두 자루에 새겨져 있는 문구이며, 해당 문구는 이순신의 친필이다.[25]


鑄得雙龍劍(주득쌍룡검) 千秋氣尙雄(천추기상웅)
盟山誓海意(맹산서해의) 忠憤古今同(충분고금동)
쌍룡검을 만드니 천추에 기상이 웅장하도다.
산과 바다에 맹세한 뜻이 있으니 충성스런 의분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같도다.


쌍룡검에 새겨져 있는 문구


閑山島月明夜上戍樓(한산도월명야상수루) 撫大刀深愁時(무대도심수시) 何處一聲羌笛更添愁(하처일성강적경첨수)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던 차에
어디서 일성 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이순신의 시조 ‘한산섬 달 밝은 밤에’


勿令妄動(물령망동) 靜重如山(정중여산)
망령되이 움직이지 말라! 산처럼 무거이 침착하라!


옥포 해전을 개시하면서


今臣戰船(금신전선) 尙有十二(상유십이)
戰船雖寡(전선수과) 微臣不死則(미신불사즉) 不敢侮我矣(불감모아의)
지금 신에게 아직 열두 척 전선이 있사옵니다.
전선이 비록 적으나 미천한 신이 죽지 않았으므로 적들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26][27]


『이충무공전서』, 이분, 「행록」에 실려있는 명량 해전에 앞서 올린 장계.


必死則生(필사즉생) 必生則死(필생즉사)
죽고자 하면 살 것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28]


난중일기[29]


此讎若除(차수약제) 死即無憾(사즉무감)
이 원수를 갚을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이충무공행록에 기록된 노량 해전을 앞두고 한 맹세


今日固决死(금일고결사) 願天必殲此賊(원천필섬차적)
오늘 진실로 죽음을 각오하오니, 하늘에 바라건대 반드시 이 적을 섬멸하게 하여 주소서!


백사집에 기록된 노량 해전을 앞두고 한 맹세


戰方急(전방급) 愼勿言我死(신물언아사)
싸움이 급하다. 부디 내 죽음을 말하지 말라.


노량 해전에서 전사하면서 남긴 유언[30][31] - 이분[32]의 충무공행록


4. 외모[편집]

파일:external/upload2.inven.co.kr/i10700173128.jpg
경남 창원시 진해구 해군사관학교에 세워진 이순신 동상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고

5. 생애[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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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연표[편집]

모든 날짜는 음력으로, 이순신의 나이는 세는나이로 기재하였다. 서력과 함께 조선 국왕의 재위년도를 표시하였다.

  • 1565년(21세) 명종 20년

    • 이즈음에 상주 방씨와 결혼. 그 전년도였을 수도 있다.

  • 1573년(29세) 선조 6년

    • 훈련원 별과에 응시, 낙마(落馬)해서 탈락하다.

  • 1576년(32세) 선조 9년

    • 2월 : 식년시 무과에 급제.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練院奉事)로 첫 관직 생활을 시작하다.[33]

    • 12월 : 종9품 함경도 동구비보권관(董仇非堡權管)으로 부임하다.

  • 1579년(35세) 선조 12년

    • 2월 : 종8품 한성훈련원 봉사로 재직.

    • 10월 : 충청도 병마 절도사 군관이 되어 충청도 해미 병영으로 가다.

  • 1580년(36세) 선조 13년

    • 둘째 형 이요신이 죽다.

    • 7월 : 전라 좌수영 관내 발포 종4품 수군만호(水軍萬戶)(종4품 이상의 무관부터 장군)로 전근, 서익이 불러 부당 인사를 제안하나 일언지하에 거절함.

  • 1582년(38세) 선조 15년

    • 1월 : 군기경차관[34]으로 온 서익이 과거의 일에 대한 보복으로 근무 태만이라 거짓 보고를 올려 발포 수군 만호 직에서 파직되다.

    • 5월 : 종8품 훈련원 봉사로 복직되다.

  • 1583년(39세) 선조 16년

    • 7월 : 함경도 남병사 이용이 이순신을 자신의 군관으로 삼다.

    • 8월 : 여진족 토벌의 공을 세워 훈련원 참군으로 승진하다.

    • 10월 : 경원 고을 건원보의 권관으로 자리를 옮기다.

    • 11월 15일 : 부친 이정이 74세의 나이로 별세하다.

  • 1584년(40세) 선조 17년

    • 1월 : 아버지의 별세 소식을 접하고, 잠시 벼슬을 떠나 삼년상을 치른다.

  • 1586년(42세) 선조 19년

    • 1월 : 복직하여 사복시 주부(종8품)가 되다.

    • 2월 : 종4품 조산보 만호(造山堡萬戶)(종4품 이상의 장군직)로 임명되다.

  • 1587년(43세) 선조 20년

    • 1월 : 맏형이었던 이희신이 사망하다.

    • 8월 : 정언신의 추천으로 녹도 둔전사의(鹿島 屯田事宜)도 겸직하다.

    • 10월 : 녹둔도 전투 발발. 이순신이 이일 측에 지원 병력을 요청했으나 거절, 그리고 전투 후 북병사 이일의 모함으로 1차 백의종군 처벌이 내려지다.

  • 1588년(44세) 선조 21년

    • 1월 : 여진족 시전부락 공격에 참가, 공을 세워 사면되어 백의종군 해제.

    • 6월 : 아산으로 내려가다.

  • 1589년(45세) 선조 22년

    • 1월 : 비변사에서 불차채용[35][36]을 하게 되자 이산해와 정언신의 추천을 받다.

    • 2월 : 이광의 추천으로 전라도 감사 휘하 조방장에 임명되다.

    • 11월 : 선전관으로 임명되어 서울로 올라가다.

    • 12월 : 류성룡의 천거로 전라도 정읍현감(종6품)이 되다.[37]

  • 1590년(46세) 선조 23년

    • 7월 : 류성룡이 고사리진 병마첨절제사(종3품)로 천거했으나 사간원의 반대[38]로 개정되다.

    • 8월: 평안도 만포진 병마첨절제사[39][40]로 천거되었으나, 역시 사간원에서 지나치게 진급이 빠르다는 이유로 개정되다.

  • 1591년(47세) 선조 24년

    • 2월 13일 : 이억기, 이천, 양응지와 함께 이순신을 남해 요해지로 임명하여 공을 세우게 하라는 선조의 전교를 받았고, 이전처럼 진급이 빠르다는 이유로 거절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종6품 정읍현감에서 종4품 진도군수(珍島郡守)로 승진시킨 후, 부임하기도 전에 종3품 가리포진 수군첨절제사(加里浦僉節制使)로 전임시켰으며, 이 또한 부임하기 전에 정3품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초수(超授)하다.

  • 1604년 선조 37년

    • 덕풍부원군으로 추봉되었으며 이후 좌의정에 추증되다.

  • 1643년 인조 21년

    • 충무라는 시호를 받다.

  • 1706년 숙종 32년

    • 충청도 유생들의 상소로 사당 건립을 윤허받다.

  • 1707년 숙종 33년

    • 숙종이 친히 현충사(顯忠祠)라는 현판을 하사하다.

5.2. 태어나기 이전[편집]

본관은 덕수 이씨로서, 고려 때의 중랑장 이돈수(李敦守)의 12세손이자 조선 초의 영중추부사였던 이변(李邊)의 후손이다. 아버지 이정(李貞)은 부인 초계 변씨와의 사이에서 네 아들을 두었는데, 신(臣)을 돌림자로 중국 고대의 성인인 복희, 제요, 제순, 대우 임금의 이름을 차례대로 붙여 희신(羲臣), 요신(堯臣), 순신(舜臣), 우신(禹臣)이라 지었다. 할아버지 이백록이 태몽에 나타나 이름을 '순'이라 지으라고 했다는 설화도 있지만, 이러한 견지에서 보면 설화가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높다.[45]

임진왜란 전까지만 해도 덕수 이씨는 문반에 가까웠는데, 할아버지가 기묘사화역적으로 몰려 처형당하고 집안이 무반으로 전환하게 되었다는 낭설이 퍼져 있지만 기록으로 보나 상식적으로 보나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46] 사실 덕수 이씨는 오늘날 한국 기준 인구 4만 명 정도의 적은 성씨치고는 파가 굉장히 많고 저마다 특색이 달랐다. 그 점을 무시하고 이이[47] 이식 같은 유명 인사 몇 명만 떠올리고 멋대로 문반 명문으로 결론짓고 상상의 나래를 편 것일 뿐이다.

기록상 이순신의 할아버지인 이백록(李百祿)은 사림파에 속하기는 했지만 기묘사화에 연루되지 않았으며 그 이후 기록에도 등장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백록은 기묘사화 이후에 관직에 진출했다. 1522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어느 순간부터 평시서 봉사를 역임하다가 시정잡배들과 어울리고 다닌다고 파직되었다거나, 중종의 국상 기간에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벌였다는 좋지 않은 기록이기는 하지만 당연히 그것으로 사형당하지는 않았다. 명종 3년에는 아들을 혼인시키기는 했지만 잔치를 벌였다는 것은 이백록이 아닌 이준으로 이백록은 무고하다는 탄원이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이러한 까닭에 집안 자체도 역적으로 몰리지 않았으며, 애초에 역적 집안 출신이면 무과고 잡과고 간에 과거 응시를 못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사육신의 한 명인 박팽년의 가문인데, 박팽년의 손자 박일산은 당시 멸문지화를 간신히 면해 후에 성종 때에 가문의 죄에 연좌되는 것을 면하고 이름까지 받았으나, 이후로도 박팽년의 자손들은 조상이 뒤집어쓴 역적의 오명을 벗기 전까진 과거 응시를 할 수 없어서 꽤 근래까지도 곤궁하게 살아야 했다.

또한 기묘사화에 연루됐던 사람들은 선조 1년에 신원[48]되어, 오히려 기묘사화에 연루된 이들을 기묘제현(己卯諸賢)이라 부르며 그것이 가문의 영광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조광조와 같이 사사되었던 김식의 증손자 김육(金堉)은 오히려 이로 말미암아 조정 대신 중에서도 산림과 대등한 인물로 여겨졌고 재상에 왕실과 인척까지 맺게 되었다. 그전부터 사림들은 기묘사화에 연루된 사람들을 동정적으로 보았고, 훈구 권신들에게 청렴한 선비들이 억울하게 희생된 것으로 여기는 여론이 강했으니 일이 이렇게 풀린 것이다. 여담으로 위의 김육이 기묘사화와 관련된 선비들의 전기를 집성한 기묘록(己卯錄)에는 이백록도 들어가 있기는 하지만 본편도 아닌 속집에, 그것도 별과에 천거된 사람의 하나로 이름만 올리고 있을 뿐이다.

그런고로 흔히 알려진 '칭기즈 칸 어록'[49]을 본따 창작된 이순신의 어록 중에서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마라. 나는 몰락한 역적의 가문에서 태어나 가난 때문에 외갓집에서 자라났다."는 대목은 엄연히 존재하는 기록을 무시하는 것이다.

6. 임진왜란 전야까지[편집]

1545년 봄에 서울 건천동 부근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인현동 일대이며, 때문에 이 근처에 충무로라는 이름을 붙였다. 소년 시절에 충남 아산으로 거주를 옮겼는데, 참외를 주지 않았다고 말을 몰아 참외밭을 짓밟았다는 등의 일화로 보아 어려서는 상당한 개구쟁이였던 모양이다.# 공이 20세 되던 1565년에는 무관 출신으로 보성 군수까지 지냈던 온양 방진(方辰)의 무남독녀와 혼인하였고[50][51][52], 22세 즈음에 처음으로 무예를 배우기 시작하였다.[53]

28세에 무과 별시에 응시하여 승마 도중에 갑자기 말이 넘어져 낙방했는데, 전하는 이야기에 따라서는 빈혈이었다고도 하고 이때 발목을 다쳤다거나 다리가 부러졌다고도 한다. 위인전에는 낙마한 직후 시험장 안에서 자란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 그 껍질로 다리를 동여매고[54] 시험을 속개했으나 결국 탈락했다고 묘사되어 있다. 다시 이로부터 4년이 지나 32세가 되던 1576년 2월이 되어서야 식년 무과에 급제하여[55][56][57] 12월에 함경도 동구비보에 종9품 권관으로 부임했다. 이렇게 이순신은 국경을 수비하는 야전에서 육군 초급 장교로 처음 공직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함경도 국경에서 근무하던 초급 장교 시절 <함경도일기>라는 진중 일기를 남겼다는 소문이 돈 적이 있는데, 사실은 이미 이 일기(단 하루치 뿐이었다)가 일반인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2000년대 중반부터 실은 위조품이 아닐까 하는 의혹을 받고 있었다. 다만 발견자인 노산 이은상, 그리고 이순신의 일기로 고증한 서지연구가 이종학 등이 워낙 쟁쟁한 인물이라 고민하고 있었던 것인데, 결국 몇몇 연구자들이 김성일의 유고집인 학봉전집에 실린 1579년 여행기 북정일록의 글자 몇 개를 바꾸고 날짜와 간지를 고증에 맞게 수정한 정교한 위조품임을 밝혀냈다. 이순신이 그 시기에 실제로 일기를 썼는지 안 썼는지를 단언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현재 발견된 실제 일기는 없다.

동구비보의 권관으로 3년을 근무한 이순신은 중앙직인 훈련원 봉사로 배속되었다. 종8품의 낮은 품계였으나 이순신은 병조정랑인 서익이 가까운 사람을 특진시키려 하자 반대했고, 이 때문인지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8개월 만에 충청도 절도사의 군관이 되었다. 일단은 좌천이라 할 수 있으나 이 일로 그는 이름을 알리게 됐다.

일본에 이상 징후가 포착되자 선조는 능력있는 장군들을 특진시켜 배치하게 되는데 이순신도 그 중 하나로 서른여섯에 전라도 고흥 발포진의 수군 만호(종4품)로 부임해서 최초의 수군 근무를 시작한다. 이 전까지 종8품 이하였던 이순신은 그야말로 파격적인 승진을 한 셈이다. 기록상으로 보아 발포는 판옥선 2척, 사후선 2척의 소형 수군 기지로 파악된다. 여기에서도 적지 않은 일화를 남겼는데, 오동나무 사건[58]과 이 사건 이후 부임해 온 전라 좌수사가 전임자인 서익의 말만 듣고 이순신을 해코지하려고 하다가 당시 전라 감영의 도사(都事) 직을 수행하고 있던 조헌이 이순신의 실제 근무 평점을 조목조목 들먹이고 타 진포와 비교하는 식으로 정면 논파해서 이순신에 대한 평가를 고쳤다는 일화가 제일 유명하다. 어쨌든 서익과의 악연은 계속 이어진 셈이었고, 이순신은 군기 경차관[59]으로 온 서익이 조정에 근무 태만이라고 거짓 상소를 올리는 바람에 1581년 2년 전 재직한 훈련원 봉사로 강등되었다.

이후 1583년 10월, 병마 절도사 발포 만호 시절 성박의 일로 이순신을 부당하게 괴롭혔던 전라 좌수사 이용이 함경도로 전근가면서 마침 모함을 받아 파직돼 있던 이순신을 일부러 지목해서 자기 종사관으로 삼아 함경도의 권관이 되었다. 다만 이는 이순신을 일부러 괴롭히려던 건 아니고, 이용이 잘못을 뉘우치고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이때 이순신은 여진족의 족장 울지내를 유인 작전으로 생포했다. 다만 상관 김우서의 모함으로 전공은 인정받지 못했다. 김우서는 이순신의 전공을 시기하여 상관에게 보고하지 않고 행동했다고 억지를 부렸다. 그래도 그 이후 동년 11월엔 훈련원 참군(종7품)이 되었다. 그러나 그 직후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는데 당시 북방 최전방에 있다가 귀경하고 있던 이순신이었기에 이 소식은 이듬해 1월에서야 이순신에게 전해졌다. 당시의 풍습에 따라 3년상을 지낸 이순신은 사복시 주부(종6품)로 복직되었다.[60]

1586년, 42세에 함경도 조산보 만호로 임명되었고, 1년 반 뒤에는 녹둔도의 둔전관을 겸했다. 이때 함경도 국경에서 근무 당시 북병사 이일에게 밉보여 녹둔도[61] 전투 이후 군관 이운룡, 이경록과 함께 자신의 첫번째 백의종군을 시작하게 된다. 보통 1,000명 이상의 기마병에게 기습당한 상황에서 불과 수십명으로 방어에 성공하고 반격까지 감행, 절반 이상의 포로를 구출해 피해를 최소화한 전투를 패전이라고 하진 않는다. 아군 피해도 방어가 취약하니 병력을 지원해 달라는 이순신의 요청을 북병사 이일이 거부해서 생긴 일이었으며 조정에도 대략적인 전말이 알려진 것으로 보인다.[62] 선조는 이일의 장계를 받고도 일반적으로 패배한 것과는 다르다고 구분을 짓고 장형을 친 후 백의종군으로 마무리지었다.[63] 아래는 관련 기록이다.

이경록(李慶祿)과 이순신(李舜臣) 등을 잡아올 것에 대한 비변사의 공사(公事)를 입계하자, 전교하였다.
“전쟁에서 패배한 사람과는 차이가 있다. 병사(兵使)로 하여금 장형(杖刑)을 집행하게 한 다음 백의 종군(白衣從軍)으로 공을 세우게 하라.”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선조 20년 10일 16일자'


녹둔도 전투는 조정에 이순신의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백의종군 석달만에 이일이 이끄는 400여 명의 여진족 토벌군에 합류해 선조 21년인 1588년 1월에 일명 '신전부락 전투'로 불리는 대대적인 여진족 토벌전[64]에서 추장인 우을기내(于乙其乃)를 생포하는 공을 세우고 백의종군을 끝낸 후 아산으로 가서 가족들과 함께 지냈다.

1589년 12월에 류성룡이 천거하여 전라도 정읍 현감이 되었다. 정읍이 독립된 현으로 만들어진 후 최초로 부임한 현감이 이순신이다. 이순신은 임지에서 선정을 베풀어 칭찬이 자자하였다. 1590년 8월 선조는 종3품의 직책인 고사리진과 만포진의 첨사[65]로 거듭 삼으려 했으나 한 번에 종6품에서 종3품(10급 승진)까지 진급할 수 없다고 논핵되어 개정되었다.

1590년부터 1591년까지 이순신의 인사 발령은 급속하게 진행되었다. 고을 현감, 육해군 절제사의 직책의 발령이 계속되었다. 이런 혼란스러울 정도로 급속한 인사 발령 및 승진은 당시 조선의 급박한 전쟁 준비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유능하고 실전 경험 있는 장수를 최전선에 배치하기 위한 특례였다. 또한 이는 이미 이순신이 이때부터 조정에 유망한 장수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간관들이 이순신이 관례에 어긋날 정도로 승진이 너무 빠르다고 말할 정도였다.

【사관원의 이순신의 승진 재검토 요청 1】

사간원이 아뢰기를,
"전라 좌수사 이순신(李舜臣)은 현감으로서 아직 군수에 부임하지도 않았는데 좌수사에 초수(招授)하시니 그것이 인재가 모자란 탓이긴 하지만 관작의 남용이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체차시키소서."
하니, (선조가) 답하기를,
"이순신의 일이 그러한 것은 나도 안다. 다만 지금은 상규에 구애될 수 없다. 인재가 모자라 그렇게 하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사람(이순신)이면 충분히 감당할 터이니 관작의 고하를 따질 필요가 없다. 다시 논하여 그의 마음을 동요시키지 말라." 하였다.
선조 25권, 24년(1591년 신묘 / 명 만력(萬曆) 19년) 2월 16일(계미) 2번째 기사


【사관원의 이순신의 승진 재검토 요청 2】

사간원이 아뢰기를,
"이순신은 경력이 매우 얕으므로 중망(衆望)에 흡족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인재가 부족하다고 하지만 어떻게 현령을 갑자기 수사(水使)에 승임시킬 수 있겠습니까. 요행의 문이 한번 열리면 뒤 폐단을 막기 어려우니 빨리 체차시키소서."
하니, (선조가) 답하기를,
"이순신에 대한 일은, 개정하는 것이 옳다면 개정하지 어찌 않겠는가. 개정할 수 없다."하였다.>선조 25권, 24년(1591년 신묘 / 명 만력(萬曆) 19년) 2월 18일(을유) 1번째 기사



이는 불차채용이라는 방식으로 비변사가 처음 선조에게 올린 불차채용 대상자 명단에는 이순신의 이름이 없었다. [66] 그러나 선조가 따로 몇몇 장수를 거론하여 추가시켰는데, 여기에 이순신이 포함되어 있었다.
1591년 2월에 선조는 이전의 논핵을 피하기 위해 벼슬의 각 단계마다 임명하여 제수하고 승진시키는 방법으로 정읍 현감에서 진도 군수로 승진시키고, 부임하기도 전에 가리포첨절제사로 전임하고, 곧바로 이번에도 부임하기도 전에 다시 전라 좌수사로 임명했다. 이 때 간관들이 승진이 너무 빠르다며 간하자 선조는 다른 사람의 승진은 좀 늦출 수도 있다고 하면서도 이순신의 전라 좌수사 발탁은 끝까지 고집했다.

드디어 1591년 47세로 정3품인 전라 좌도 수군 절도사에 임명되었다. 2년 만에 종6품에서 정3품이 된 것인데 이는 조선 왕조에서 빠른 속도의 승진으로 이름난 조광조와 비슷한 속도였다. 조광조는 2년 4개월 만에 종6품인 사간원 정언에서 정3품인 홍문관 부제학이 된다.[67]. 여기에서 유성룡과 선조가 얼마다 다급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는 전쟁을 확신하지 않았다면 절대로 둘 수 없는 무리수였다.

전라 좌수영은 5관 5포, 즉 5개 고을[68]과 5개 전문 수군 기지[69] 소속 병력을 지휘 하에 두고 있었으며, 이순신은 이들의 전력 강화에 주력했다. 유명한 거북선의 건조도 이 때부터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순신은 전란에 대비해서 실전과 완벽하게 동일한 수준의 훈련을 꾸준히 실행했다. 이순신은 자신의 휘하 군관들의 순번을 정해서 차례대로 가왜장(假倭將)으로 임명했고 이 가왜장이 이끄는 함선이 가왜장선이 되었다. 오늘날로 따지면 대항군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순신은 이마저도 엄격하게 진행했으며 제대로 된 격식을 갖춰서 가왜장으로 임명된 군관에게는 직접 가왜장 임명서를 발급하기까지 했다. 이순신은 전란을 대비해서 거북선만 건조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실전 훈련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7. 임진년의 맹활약[편집]

1592년 4월 13일 임진년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5월4일 최초의 출격 작전(일명 1차 출전)으로 옥포만에서 도도 다카토라가 이끄는 적선 26척을 전멸시켜 임진왜란 최초로 해전에서 승리를 거뒀다.[70] 옥포 해전은 임진년에 벌어진 여러 해전의 전형적인 모델을 이룬다. Search & Destroy. 즉, 수색 섬멸전은 이순신이 임진년 당시 사용했던 기본 전략이었다. 이 전투에서의 조선 수군 피해는 부상자 3명[71]. 옥포 이후 적진포와 합포에서 각각 5척과 15척을 추가로 격침하고 여수 전라 좌수영으로 귀환했다.

5월 29일에 이순신은 노량에 적선들이 왔다는 정보를 듣고 2차 출전을 시작, 사천에서 적선 12척을 격멸한다. 여기서 최초로 거북선이 투입됐다. 여기서 이순신이 조총에 부상을 입었다. 6월 2일에 왜선들이 당포에 집결해 있다는 걸 알고 당포로 향해 21척을 박살내고 당포에서 도망간 왜선들이 당항포로 도망갔다는 걸 알고 추격해 당항포에서 39척, 율포에서 7척을 격침했다. 2차 출정에서 조선 수군 총 전사자는 11명. 이 공으로 8월 16일 자헌대부 승자를 받는다.

7월 4일에 가덕도와 거제도 등지에 왜선 40여 척이 출몰했다는 정보를 들은 이순신은 3차 출전을 감행, 7월 6일 한산도 해전에서 승리한다. 이는 대첩이라 부를만큼 세계 해전사에서 의미 깊은 전투였다. 이때 사용한 전술은 거짓 후퇴로 인한 유인 후 함대 반전 및 포위 섬멸인데 이토록 복잡한 함대 운용을 보여준 해전은 거의 없다. 굳이 예를 들자면 일전에 펠로폰네소스 전쟁 때 알키비아데스가 이끄는 아테네 해군이 스파르타의 해군을 상대로 쓴 적이 있었다. 여기 참고. 이런 전술을 실전에서 육지에서라도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충분히 명장의 반열에 들어설 수 있을 정도다. 이순신은 항구에 틀어박힌 적의 주력을 한산도 앞바다까지 유인해서 격파했다.

여기서 흔히 세간에서 이순신의 장기로 인식되는 학익진이 처음으로 구사되었다. 학익진은 본디 단순한 포위 섬멸용 진형이나, 이순신은 이것을 거짓 도주하다가 돌연 180도 선회하면서 양쪽으로 날개를 펼쳐 적을 포위, 섬멸하는 전술로 개량하였다. 성능이 우수한 전함, 강도 높은 군사 훈련과 지휘관의 대담성만이 학익진 성공을 담보할 수 있었다. 거짓 후퇴 전술은 자칫 진짜 패퇴가 될 수 있는 매우 어려운 전술임을 생각해본다면 이순신의 역량을 짐작할 수 있다.

한산도 대첩은 규모로만 따지면 국지전이었으나 그 결과는 임진왜란 전체의 국면을 바꾸어놓았다. 적들은 남해안의 제해권을 조선에 넘겨주어야만 했다. 보급로가 끊겼으며 적의 서해 우회를 좌절시킴으로서 조선은 전라, 충청, 황해 등 주요 곡창 지대를 지켜냈다. 임진왜란에서 조선군과 의병들이 끈질기게 저항할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곡창 지대가 온전히 남아있었기에 가능했다. 조선군은 반격의 교두보를 확보했고, 지휘 계통 또한 회복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한산도 대첩 참고.

대승을 거둔 조선 수군은 가덕도로 향하려다가 안골포에 적선 40여 척이 있다는 보고를 받고 7월 10일 안골포에 도착하여 구키 요시타카, 가토 요시아키 등이 이끄는 왜선 40여 척을 추가로 박살내고 여수로 귀환한다. 총 전사자는 19명. 이제까지 보다는 조금 많은 편이지만 그래도 새발의 피 수준이다. 이 공으로 이순신은 정헌대부 승자를 받는다.

3차 출전으로 왜군의 수륙 병진 계획은 완전히 좌절됐으며 이 과정에서 가뜩이나 모자란 화약화포를 포함한 수많은 물자와 인력이 물고기밥이 되자 경악한 히데요시는 해전 금지령까지 내리고 만다.

일각에서는 이순신의 성과를 단순히 보급 차단 수준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으나 보급 차단은 보기에는 적 전투 병력 섬멸보단 그 비중이 가벼워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그 이상의 가치를 지녔다고 봐야 한다. 몇 백 년 뒤, 독일군의 북아프리카 전선 붕괴나 미국의 무기대여법 같이 해상 보급로는 그 유지에 따라 전선은 물론 전쟁의 흐름까지도 결정짓게 된다.

일본의 보급은 부산 항으로 하역된 물자가 육로로 이송되었으며,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기본 계획은 접수한 정복지에서의 현지 조달이었다는 의견도 있지만, 이것은 가다노 쓰기오나 기타지마 만지, 사토 가즈오 등 일본 측 역사학자들도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고 있다. 일본의 역사학자 기타지마 만지 교수는 당시 제대로 된 육로가 닦여 있지 않아 수레를 운용할 수도 없는 조선[72]에서 육로를 통한 보급은 불가능에 가까우며, 억지로라도 부산에서 조선의 각 전략적 요충지 및 주둔지까지 육로로 식량을 조달할 경우 이를 수송할 인원과 호위할 인원들이 대거 필요하고, 이들이 목적지까지 가면서 수송할 군량을 먹어 치우고(...) 빈 손으로 목적지에 도달하여 되려 본진에 돌아가야 하니 식량을 달라고 했을 상황이 발생했을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73]

게다가 보급 물품에는 군량 등 식량만 있는 것이 아니다. 조총의 탄환 및 조총의 부속품과 화약, 일본식 활의 화살 및 활대와 각종 병장기 관련 소모성 물품들이 필요하다. 현지 조달을 통해 식량을 그럭저럭 구했다 해도 이러한 것들은 현지 조달로 구할 수 없으며, 당연한 말이지만 장비 보급이 안 되면 제대로 싸울 수 있을 리가 없다.

따라서 이순신의 공로는 적의 해상 작전 전체의 봉쇄이자 보급로 차단이었으며 이를 통해 적의 기본 전략 자체를 붕괴시켰음을 의미했다.

8월 8일에 왜군이 김해양산 등지로 도주하려 한다는 정보를 받자, 이순신은 아예 적의 본거지가 돼버린 부산을 직접 공격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8월 24일에 4차 출전에 나섰다. 부산으로 향하는 길에 왜군이 5번이나 소규모 기습을 가하나 죄다 바닷속에 쓸어넣고 부산 앞바다에 나타나 대포로 포격을 퍼부어 왜선 100여 척을 죄다 가라앉힌다. 이때 전사자는 6명에 불과 했다. 여담으로 이렇듯 피해가 적었던 것은 거듭된 패전으로 조선 수군만 보면 학을 떼게 된 일본 수군이 조선군의 출현 직후 배를 버리고 죄다 육지로 도주해 버린 이유도 있다. 덕분에 손쉽게 적의 배를 싹쓸이 했지만 이순신이 신임하던 녹도 만호 정운이 전사해서 대승을 거두고도 이순신은 침울한 귀환을 했다.

부산포 해전의 결과로 왜군은 더욱 조선 수군을 기피하게 된다.

부산포 해전은 전략적으로 볼때는 빈배 100척을 불태우고 종전 보다는 피해를 많이 입었기 때문에 한산 해전과 같은 대접을 받지 못한다. 다만 그 이후로 왜군은 각지에 왜성을 쌓고 촘촘히 함선을 배치해서 종전처럼 조선 수군이 부산포를 공격하기 어려운 상황을 만들었고 그 결과 한산도에 주력을 전개하게 된다.

임진년의 이순신의 공적은 첫째 우선 해상에서 승전을 통해서 백성들에게 큰 희망을 주었고 의병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다시 말하면 해상에서의 승전이 없었다면 한방에 밀릴 뻔한 상황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왜군의 침공에 왕과 양반, 무장, 평민, 노비 가릴 것 없이 도망가기에 정신없었던 상황이었는데 해상에서의 승전은 민족의 자긍심을 높여서 왜군의 침공에 저항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둘째 왜군의 주력은 육군이 아닌 수군으로서 수군을 제압함으로서 전쟁 수행에 막대한 차질을 빚었다. 당초 왜군의 전략은 알려졌다시피 수륙병진이었고 해상에서의 승리는 따 놓은 것 처럼 왜군 지도부는 생각하고 있을 정도였다. 수군의 패배는 필연적으로 보급로를 끊기게 했고 고립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쉬운 예를 들자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군이 중국에서 전선을 유지하기 급급한 상황에 비견될 만 하다. 수군이 패함으로서 왜군은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만들었다. 셋째 호남 지역을 수호함으로써 조선군의 보급선을 확보했다는 점이다. 유일하게 호남이 온전하게 보존되어서 추후 명군의 파병과 전쟁 수행을 가능하게 할 수 있었다. 특히 이순신은 전력을 유지하면서도 둔전에 힘쓰고 백성들을 보호해서 인심을 얻었다.

7.1. 계사년 이후[편집]

계사년(1593년) 2월 6일에 조선 수군은 5차 출전을 하여 웅포에서 왜군을 7차례 공격해 왜선들을 격멸했으나 육지에서 왜성을 쌓고 버티는 전술로 전술 방향을 트는 바람에 작년에 비해서는 큰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

7월 15일에는 전라 좌수영 본영을 한산도로 이주하고 돌산도에 피난민들을 위한 터전을 개간했다.

8월 15일 이순신은 삼도 수군 통제사에 임명되었다. 삼도 수군 통제사는 경국대전에 없는 별정 직으로 전라 좌수영, 전라 우수영, 경상 우수영, 충청 수영으로 구성된 조선 수군 전체가 각 지휘관들의 갈등 없이 통제사 하나의 지휘를 따를 수 있는 직위였다. 현재로 치자면 해군 삼남 작전 사령관이나 해군 작전 사령관 급이라고 봐도 될 위치이다.

1594년에 6차 출전으로 당항포에서 다시 한 번 왜선 30여 척을 분멸하나, 담종인금토패문을 받고 병중인데도 불구하고 항의의 서한을 올린다. 금토패문과 평화 협상으로 전쟁은 소강 상태에 들어갔다.

이때 《난중일기》서 본격적으로 원균에 대한 혐오와 경멸이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1595년에는 아예 원균을 조선 수군에 두지 말아달라고 상소까지 올려 보낼 정도로 둘의 사이는 험악해진다. 이 개놈이 나중에 조선 수군 장병들을 상대로 저지를 일을 생각해 본다면, 이순신의 사람 보는 눈이 참 탁월하다고 하겠다. 단 이순신은 자신을 비호한 류성룡, 이원익과 시시콜콜한 요구에도 모두 응한 충직한 부하들을 제외하면 다른 대신들이나 무장들 또한 제법 거리를 두고 묘사했고, 구면일 경우엔 경멸감도 나타냈다는 면에서, 그 연장선으로 볼수도 있다. 특히 그는 장수 평가 기준도 몹시 까다로워서 이순신에게 높은 평가를 받은 무장은 별로 없다. 개중에는 나름 능력있는 장수도 있었지만 비교 대상이 이순신이니... 대신 그는 남에게 엄격한 만큼 자신에게는 배로 엄격했다. 또한 명이나 왜의 장수들에 대해서는 경멸감을 감추지 않았는데, 조선의 장군이 침략군의 장군에게 증오를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명나라 장수들이 조선에서 보여준 각종 범죄는 비난받기에 충분했다. 아무튼 둘사이의 영향인지 원균은 충청병사로 전직된다.

전쟁이 소강 상태에 들어가자 이번엔 기근과 전염병이 조선 수군을 괴롭혔다. 전쟁으로 인한 인명 피해, 대규모 징발, 토지 유실은 농업 생산량의 급격한 감소를 불러왔고 이는 3년에 걸친 지독한 흉년으로 이어져 보급과 병력 유지에 치명타를 입혔다. 여기에다 가공할 역병까지 겹쳐 수천의 장졸들이 역병으로 떼죽음을 당했으며, 이때문에 탈영병도 속출했다. 이순신은 1594년 4월 20일에 작성한 장계에서는 삼도 수군 17000여 명 中 사망자 1904명, 감염자 3759명. 도합 5663명의 비전투 손실을 입었음을 밝혀 당시의 처참한 상황을 전하고 있다.

이순신은 탈영병을 처벌하고 어떻게든 병역 자원 유지를 위해 애쓰는 한편 피난민, 유민들을 수습하고 둔전을 경작해서 보급을 자급자족하였다.

7.2. 어이없는 파직[편집]

"만약 이순신을 병신년정유년 연간에 통제사에서 체직시키지 않았더라면, 어찌 한산(閑山)의 패전을 가져왔겠으며 양호(兩湖)가 왜적의 소굴이 되겠는가. 아, 애석하다."
ㅡ<선조 실록> 선조 31년(1598년) 11월 27일, 사관의 팩트폭력논평


정유년(1597년)이 밝아오자 이순신에게 특이한 일이 두 가지가 발생했다.

첫 번째는 부산 왜영 방화 사건. 이순신이 자신의 부하들인 안위와 김난서 등이 부산 왜영에 숨어들어서 적의 배와 장비들을 불태웠다는 내용의 보고를 올렸는데, 이 보고 이후 이조 좌랑이던 김신국이 이순신의 보고를 허위 보고라고 올린 사건이다. 이원익의 추가 보고와 의금부의 조사 결과, 이순신의 보고는 아래 부하들이 허위로 이순신에게 보고를 올림으로써, 이순신이 왕에게 보고를 허위로 하게 되었다는 내용인데, 이게 이후에 이순신이 파직되는 이유 중 하나가 된다. 다만 의금부의 조사 결과와 이원익의 추가 보고만으로 이순신이 거짓으로 조정에 보고를 올려서 상을 받았다고 하기에는 무리인 부분이 많다. 조정에서의 인식은 분명히 이순신의 부하가 이순신에게 허위로 보고를 올려서 이순신이 거짓 보고를 하게 된 것이지 이순신이 단독으로 거짓 보고를 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근데 정작 부산 왜영 방화 사건의 관계자들이 조사를 받을때 고문을 받으러 서울까지 끌려간 사람은 이순신밖에 없다. 만약 정말 부산 왜영 방화사건을 조사하고자 했다면 이순신 뿐만 아니라 그 부하이자 왜영 방화 사건의 관계자인 안위나 김난서까지 같이 고문을 받았어야 하는데 정작 고문 받은 건 이순신 뿐인 것이다.

두 번째는 가토의 도해. 1597년에 일본의 이중간첩인 요시라로부터 가토 기요마사가 바다를 건너올 것이라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이 정보가 조정에 보고된 것이 1월 1일.[74] 조정에서는 즉각 비변사에서 회의를 거쳐서 이순신에게 출격 명령을 내렸는데, 문제는 이순신은 1월 6일부터 남해현에 공무차 들어갔다가 풍랑에 갇혀서 빠져나오지 못하던 상태였다.[75] 그렇게 시간이 흘러버리자 이미 가토는 바다를 건너서 부산에 도착해버렸고, 조정도 이를 파악하여 가토를 잡을 수 없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조정은 가토는 놓쳤지만 추가로 있을 상륙 부대에게 압박을 주기 위하여 부산포로 출격을 명했고, 이순신은 69척의 함대로 부산포를 타격하고 돌아온다.

하지만 이순신이 가토를 잡지 못했다고 책망하면서 자신이라면 잡을 수 있다고 한 원균의 장계가 조정으로 올라오고, 이와 더불어 이순신을 숙청하려고 이미 혈안이 되어있던 선조에 의해서, 이순신이 조정의 명에 따라 싸우지 않았다는 이유로 1597년 2월 26일, 이순신을 서울로 압송하였고 원균을 후임으로 임명하였다. 서울로 압송된 후인 3월 4일 감옥에 투옥된 이순신은 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이순신은 한 차례의 고문을 받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일부에서는 이순신이 이때 압슬형을 받았다고도 하나 실록에는 그러한 기록이 없다. 당시 실록에 나온 선조의 언행을 보면, 선조는 이순신을 두고 참으로 역적이다. 이제 가등청정의 목을 들고 온다고 해도 절대 용서할 수 없다, 임금과 조정을 기망했다, 반드시 죽여야 한다. 등의 이러한 언행 때문에 고신이 가벼웠다고는 보기 힘들다는 의견이 많다. 그전까진 잔병치레도 거의 없었던 이순신이 이 때의 후유증으로 이후 잔병치레가 잦아지게 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다만 백의종군 이전에도 이순신은 며칠 동안 앓았다는 기록도 있고, 거기에다 이순신은 당시 적잖은 나이였으며 게다가 엄청난 주당. 설상가상으로 몇 년 동안이나 미칠듯한 스트레스에 시달려 온 사람이다. 심한 고신을 받지 않았더라도 저 지경이면 누구든 몸 망가지기 십상이다. 때문에 건강 악화와 고신은 큰 상관이 없다는 주장도 있다.

게다가 이때 치명적일 만큼의 고신을 받았으면 그로부터 불과 몇 달 뒤에 그 명량 해전을 치를 수 있었겠느냐?는 말도 있다.[76] 고신 과정이 잘 드러나있는 남이의 옥사를 살펴보면, 사극에서 나오는 것처럼 무작위로 고문하는 것이 아니라. 문답 과정에서 제대로 된 답변이나 자복을 하지 않으면, 그에 대해 곤장 20대 ~ 40대를 때리는 방식으로 진행이 되었다. 때문에 심한 고신이라고 해도 당장 생명이 위험한 정도는 아니다.[77] 무엇보다도 고신의 목적은 죄인의 자복을 받아내는 것이지 죽이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이순신이 받은 고신으로 몸이 망가진 것은 사실이지만, 몸을 가누지 못할 만큼 만신창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아무튼 정탁이원익의 필사적인 만류로 고신은 한차례에 그쳤고, 4월 1일 28일간의 옥중 생활을 마치고 풀려나 권율의 진영이 있는 초계로 떠나 그곳에서 두 번째 백의종군을 시작했다.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이 당시 이순신이 어떻게 고문받았는지는 자세한 기록이 없다. 다만 이순신은 한 차례 형신을 받았다고 정탁의 신구차에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형신은 정강이를 때리는 고문이다. 물론 고통스러웠겠지만 강한 고신은 결코 아니다. 이순신이 옥에서 풀려나온 날 술을 마시고, 백의종군을 떠날 때 말을 타고 떠난다. 혼자서 말을 탈 수 있었다는 사실은 심한 고신은 아니었다는 증거이다. 물론 지금에서 보면 아무 죄없는 수군 최고 사령관을 억지로 잡아가서 고문을 한다는 자체가 문제였다.

난중일기에 이순신 본인이 쓴 기록에 의해도 출옥한 4월 1일에 가누지 못할 만큼 술을 마셨고, 이틀 뒤인 4월 3일에 말을 타고 나서 다음 날인 4일에 수원, 다다음 날인 5일 아침에 아산에 도착한다. 도성에서 아산까지는 직선 거리로도 90 km 가까이 되고 길을 따라갔다면 못해도 이틀간은 110 km는 말타고 달렸다는 말인데 몸이 상할 만큼 심한 고문을 받았다면 이틀 뒤에 이 거리를 말 타고 달리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하지만 목숨을 바쳐 왜적을 5년 동안 한 번의 패배 없이 막았지만 돌아온 건 모함, 파직과 고문으로 나라에 대한 배신감이 느꼈을 수도 있고 고신으로 인한 정신적 트라우마도 생길 수 있었다.

여담으로 위에서도 서술된 "1583년 10월, 병마 절도사 발포 만호 시절 이순신을 부당하게 괴롭혔던 전라 좌수사 이용이 함경도로 전근가면서 마침 모함을 받아 파직돼 있던 이순신을 일부러 지목해서 자기 종사관으로 삼아 함경도의 권관이 되었다.". 이 부분이 완전히 재현되었다. 이용을 이원익으로 바꾸고, 발포 만호 시절을 부산 왜영 방화 사건으로 치고, 자기 종사관 부분을 정탁과 만류하고, 사실상 변호하는 모양새로 치면 이순신은 정말로 데자뷰적 군 경력을 지내게 된 셈이다.

7.3. 명량 해전[편집]

그가 세운 최고의 업적이자, 성웅의 면모를 보여준 전투.

7월 16일 원균의 지휘 아래 출격에 나선 조선 수군은 칠천량 해전에서 소멸했다. 이 부분에 대해 원균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당시 조선군은 장비에 있어서 일본군보다 크게 뒤쳐지지 않았지만 이를 활용할 교리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고 병사들의 질이 낮아 사기를 담보하기 힘들었기에 이런 대규모 도주가 일어난 것"이라 말한다. 하지만, 장비 활용에 대한 교리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기술이다. 임진왜란 5년간 이순신이 지휘해서 벌인 해전만도 20회가 넘는데 운용 교리가 없었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병사들의 질이 낮았다는것도 마찬가지. 5년을 종군한 병사들이면 이미 베테랑 수준이다.[78][79] 질이 낮았다는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생각해보자. 차라리 사자가 지휘하는 양떼가, 양이 지휘하는 사자 떼를 이겼다는 속담이 더 잘 들어맞는다. 그만큼 지휘관의 역량이라는것은 중요한 것이다.

이순신이 힘겹게 모아놓은 300여 척[80]의 함대가 고스란히 사라졌고 이는 다시 말해 조선 수군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닌 전력이었다.[81] 단 한 번의 전투로 조선 수군의 전력 전체가 소멸한 것. 그나마 배설이 전함 10척을 수습해 진도로 퇴각했다.[82] 이 전함들은 이후 명량 해전에 투입되는 전설의 12척 중 10척이었다. 또 이후에 비정상적인 조선 수군의 전투력 회복을 근거로 이때 대부분의 조선 수군 함선들이 파괴된 것이 아니라 도주했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원균의 패전 책임은 분명했다. 그 후 원균의 생사는 불명. 왜군에게 죽었다는 것이 대체적인 인식이지만 전후 그를 목격했다는 증언도 있기에 도망쳤을 가능성도 있다. 그 처참한 패전으로 조선은 되찾은 남부 제해권을 다시 상실했다.

당황한 조정은 7월 23일 모친상을 당한 이순신을 다시 삼도 수군 통제사로 임명했다. 여담으로 이때 선조는 과인이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라는 교서를 내릴 정도로 저자세로 굴면서도 실제 품계는 원래보다 훨씬 강등된 절충 장군 품계를 주어 뒤통수를 쳤다. 중장이 억울하게 누명쓰고 해임되었는데, 정작 같은 직책으로 복귀할 땐 소장이 된 셈이다. 이렇게 될 경우 이순신은 다른 수군 절도사와 같은 품계 즉 계급이 되기에 지휘에 문제가 생길 수 있었지만, 실제로 일어나지는 않았다.[83] 그러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이순신이 지휘할 수군이 남아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통제할 수군이 없는 통제사였다.

다행히 배설이 칠천량 전장에서 미리 빼놓은 12척의 전선이 남아 있었다. 이순신은 다시 통제사로 제수되자마자 배설을 추궁해 배설이 숨겨놓은 함대의 위치를 알아내 함대를 인수하러 출발한다. 이때 곧바로 남해안으로 가지 않고 초계 -> 하동 -> 구례 -> 곡성 -> 순천 -> 보성 순으로 전라도 일대를 돌아다니며 병사를 모집하고 물자를 다 긁어가서 일본군의 수중에 떨어지는 것을 방지했다.

8월 15일, 선전관 박천봉이 찾아와 선조의 뜻을 알리는데, 이는 수군을 폐하고 충청도로 올라와 미래를 대비하는 것이 어떠느냐고 물어본 것이다. 하지만 이순신은 이를 거부하고 싸우기를 결심하는 장계를 올리는데, 이 장계가 바로 그 유명한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나이다(今臣戰船 尙有十二, 금신전선 상유십이)'란[84] 전설의 대사로 대표되는 '상유십이' 장계. 남해와 서해 남쪽을 완전히 내주더라도 어떻게든 훗날을 도모해보자고 정부에서 권하는 암울한 상황에서도 이순신은 싸우기를 결심한다.[85] 그 와중에 배설은 다시 탈영하여 종적을 감춘다.

9월 16일 이순신은 수습한 전함 13척(이후 1척이 더 보강되었다)과 어선 일부를 대동하고 명량에 출격했다. 이때 초반에 전투에 나선(이순신이 난중일기에서 가늠했던) 왜군 함선만도 133척에 달할 만큼 절망적인 전투였으나, 이순신은 수많은 왜선을 격침하고 결국 승리하여 왜군이 제해권을 잃게 만들었다.

세간에서는 보통 이순신이 명량에서 일자진을 펼쳐 축차 전술을 펼친 적을 막아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당시 이순신이 탄 대장선을 제외한 12척의 배들은 정오가 지날 때까지 대장선이 패배하는 대로 도망가기 위해 뒤에서 미적거리다, 거제 현령 안위가 먼저 대장선을 구원하러 가는 것을 보고 나머지 배들도 뒤늦게 전투에 동참하였다. 즉, 믿기지 않게도 이순신의 대장선은 단 한 척으로 전투의 중반부까지 왜군의 전선들을 무수히 폭침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가능했던 원인은 조선 수군의 주력선인 판옥선과 그에 실린 화포를 비롯한 조선의 장사정 무기들의 압도적인 전투력, 그리고 훨씬 열세였던 왜군의 해전 무기 체계(조총과 일본 활, 칼)와 명량 주변의 지형 및 해류, 마지막으로 이들 요소를 더 굳건하게 만든 이순신의 전투 의지였다.

2011년 4월에 나온 '한국군사과학기술학회지' 14권에 좀 더 충격적인 연구보고가 있다. 명량 해전이 일어난 날의 조류를 연구한 것으로, 과거 1965년1977년에 각각 당시 기준으로 측정했던 조류 측정치와는 달리, 전투 초기엔 오히려 조류의 유리함을 받은 것은 일본군이고, 반대로 통상의 상선은 가장 불리한 시기에 전투 초반을 싸웠다고 한다. # 비록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조류가 유리하게 바뀌었다고 하지만, 이렇게 되면 통제사의 상선은 기존의 해석과는 달리 지세까지 거슬러가며 혼자 전반부 전투를 감당했다는 게 된다.

이순신 본인도 난중일기에서 "실로 천행이다(此實天幸)"라고 표현했을 정도로 힘든 싸움이었으나, 어쨌든 명량 해전의 승리로 인해 조선은 칠천량 패전으로 궁지에 몰렸던 정유재란의 국면 전체를 뒤집을 수 있었다. 조선은 남부 제해권을 다시 회복했고 왜군의 서해 우회는 좌절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전라도 진출을 완전히 좌절시켰던 철벽 방어선 진주성[86]은 제2차 진주성 전투로 초토화 되었기 때문에 정유재란 초반 일본군은 영남 남부 지방의 통로를 무인지경으로 통과해 호남을 싹쓸이 했으나, 직산에서 명군의 빠른 진군과 완강한 저항에 직면해 패퇴한 후[87] 충청도 일대에서 퇴각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명량에서 이순신의 경이적인 승전보는 일본군의 뇌리에 서해를 장악당함으로서 보급을 차단당했던 임진년의 악몽을 되살리게 했고 일본군의 북진 의지는 완전히 꺾인 채 남해안으로 후퇴하여 겨울철임에도 왜성들을 쌓는 등 수성에만 주력하게 되었다. 이후 노량 해전이 벌어질 때까지의 2년간 해전은 3회. 일본 수군은 철저하게 이순신을 피하려고 했다.

명량 해전은 여러모로 뜻 깊은 해전이다. 첫째 신은 12척의 배가 있다는 말은 특히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12척의 배로 적을 상대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한 것은 놀라운 것이 아니다. 왜냐면 이순신 장군은 왜군의 전력을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군 함선이 허술하고 지금까지의 경험상 초기에 왜군의 선봉을 꺽으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걸 정확히 파악한 판단력은 가히 환상적이다. 손자병법에서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으리!"이라는 말이 여기에 정확하게 맞아들어갔다. 원균처럼 100여척이 넘는 배가 있어도 칠천량에 침몰시켜버린 것과 비교하면 MASTER가 무엇인가를 느끼게 하는 점이다. 둘째 장군은 무거운 책임감을 극복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헌신으로 주도적으로 전투를 이끌어서 승리를 이뤄냈다. 난중일기에 의하면 초기 기선 제압을 장군이 함으로써 추후 부하들이 합세해서 승리를 거두었는데 이것은 진정한 무인이자 지도자로서의 장군의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셋째 장군은 패배주의에 빠진 군을 재건하고 자신감을 불어넣어서 전쟁 수행에 있어서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7.3.1. 명량 해전 당시 전과[편집]

일반적으로 당시 왜선의 숫자는 난중일기의 133척, 그리고 확실히 격침한 왜선은 대략 31척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에 대해선 논란이 끊이질 않고 있다.

우선 왜군 전선이 133척이었다는 기록은 실록과 난중일기의 기록이다. 그리고 이 기록은 후대에 갈수록 수치가 높아지는 경향이 있으며 정조 대에 이르러서는 '500척'까지 불어나는 경향이 있다. 다만 현장에 있었던 이순신 본인이 당대에 남긴 기록인 난중일기의 수치가 대단히 설득력이 크고, 일본 쪽 기록과도 어느 정도 교차 검증이 되는 수치이다. 양측의 주장을 절충한다면, 500여척 중에 실질적으로 전투에 참여한 전투함의 수가 133척이고 나머지는 보급선, 수송선 등의 비전투함으로 볼 수도 있다.

한편 적선 31척을 격침하였다는 점에 대해서는, 충무공의 성격상 확실히 침몰한 적선만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실제 전과는 더 컸겠지만 일종의 축소보고를 한 것이라고 추정할 수있다.[88] 충무공은 도주한 적선이 수리를 받고 병력을 보충해 다시 오는 것을 극도로 싫어해서 적선을 단순히 전투불능으로 만드는 것을 넘어서 가능한한 확실히 격침시키기 위해 굉장히 신경을 많이 썼다. 일각에서는 적선 100척을 격파한 것이 아니냐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근거는 거의 없고, 다만 명량 해전 자체가 압도적인 숫적 열세속에서 그저 적선이 오는 족족 전투불능으로 만들어 돌려보내는 것만으로도 벅찼기 때문에 격침에 신경을 못쓴 결과가 '고작' 31척 격침이라는 거다. 실제로 전투원들이 멀쩡해도 선체에 장군전을 비껴맞고 침수되어 돌격능력을 상실하였거나, 배는 멀쩡해도 전투원 다수가 코 앞에서 조란환에 맞아 죽거나 중상을 입어서 공세능력을 상실한 적선의 수는 배로 많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있다. 그렇다면 대장선이 격침되고 사령관 구루지마 미치후사까지 죽었으며 후방의 도도 다카도라가 활에 맞아 손에 부상을 당했고 군감 모리 다카마사까지 세키부네에 타고 있다가 급히 빠른 소선으로 옮겨타 도망갔다가 바다에 빠졌으며 '무사히' 돌아간 적선의 수가 10여척 밖에 안된다는 것은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있는 것이다.

한편으로, 교차 검증 부분에서는 애초에 일본 문서에는 명량 해전에 참전한 수군의 척수는 물론, 참전 다이묘도 총지휘관인 도도 다카도라와 구루지마 미치후사 외에는 참전했는지 참전하지 않았는지 확인하기 어렵다. 만일 진법표에 나와있는 약 8000명의 일본 수군을 토대로 60 x 133해서 비슷하지 않냐고 말하는 것이라면, 그것 또한 틀린 것이다. 왜냐하면 진법표에 나와있는 일본 수군이 과연 수부 같은 비전투 인원을 계산한 것인지 아닌지도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명량 해전 문서에도 나와 있지만, 비전투 인원을 계산할 경우 진법표에 나와있는 일본 수군만으로도 거진 1만에 가까운 군세가 만들어진다. 더군다나 14일 탐망군관 임준영의 보고에서는 적선 200여 척이 확인되고 있다. 충무공의 조카 이분의 행록의 333척 기록을 믿기 힘들다고 폄하하지만, 행록의 기술은 이렇게 되어 있다.

그날 피난한 사람들이 높은 산봉우리 위에 올라가 바라보니 적선이 쳐들어오는데 300까지는 헤아렸으나 그 나머지는 얼마인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즉, 이분이 일부러 과장하고 싶어서 과장한 것이 아니라, 그는 그저 피난민의 증언을 충실하게 옮겼을 뿐이다. 더군다나, 500척 기술을 마치 정조 대에 과장한 것처럼 아는 사람이 있는데, 정조 대의 이충무공전서에 나오는 500척 이야기는 정조 대의 사람들이 알아서 부풀린게 아니라 당시 피난민들의 증언에서 나온 이야기를 이충무공전서를 편찬하면서 그대로 옮겨 썼을 뿐이다.

이를 간단히 말하자면, 명량 해전 참전 전체 왜군 선박수가 133척이라고 분명히 단정지을 수는 없다. 결론적으로 명량 해전에서 왜선의 숫자를 완벽하게 확인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한마디로 당시 왜군의 규모를 완벽하게 알 수는 없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자. 당시 적의 함대는 100여 척이든 300여 척이든 500여 척이든 새까맣게 쳐들어오는 상황이고, 그런 규모의 적함을 요격하겠다고 나선 아군 함대는 고작 13척에 불과했다. 이렇게 아주 급박한 상황에서 적함이 몇 척이나 되는지 일일이 세고 있을 여유가 없지 않은가.

7.3.2. 철쇄설[편집]

역사스페셜에서는 명량의 좁은 해역과 급한 조류를 이용, 명량 쪽에 배의 이동을 묶어두는 함정을 설치해 적의 연쇄충돌과 행동불능 상태를 이용한 뒤에 포격으로 쓸었다고도 하는 거 같지만, 그건 이 믿기지 않는 전적에 대해 나름대로 합리적으로 이해해 보려다 검증되지 않은 가설에 이끌려 오히려 단견적으로 해석한 결과이다.

우선 당시 왜군의 대선단을 빈약한 쇠사슬 같은 것으로 저지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무리 목선이라고 해도 화포를 포함한 각종 무기와 탑승자들의 수를 더하면 수백 톤에 달하는 무게인 데다, 이 정도의 무게를 가진 움직이는 물체를 저지할 쇠사슬을 만드는 건 현대 기술이라도 불가능하다.[89] 그리고 그런 데에 쓸 쇠사슬이 있었다면 차라리 화살이나 포환을 하나라도 더 만들었다는 게 정설. 이 철쇄설이 기록된 "호남절의록"이 있는데, 여기에 나온 철쇄설을 믿으려면 김억추가 검강으로 적선을 파쇄해버렸다(...)는 기록도 믿어야한다. 더구나 이 책이 나온 건 1907년. 그런데 철쇄설이 처음 등장한 것은 이중환의 택리지인데, 이를 통해 이전부터 철쇄설이 해당 지방에 돌았던 것이 사실임은 알 수 있다. 일본 학자 아오야기 쓰나타로의 정한역일한사적에도 일본군의 명량 패전 원인은 이것으로 지목하고 있다. 다만 앞에서 언급된 이유로 사실일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사실 철쇄는 수로 차단용이 아니라 항만 방어용으로 널리 쓰이던 것이다. 당장 전라 좌수영과 전라 우수영 모두 항만 입구에 철쇄가 설치돼 있었고, 이중 전라 좌수영 철쇄는 설치 포인트가 현재도 사적지로 남아 있다. 외국에서도 마찬가지 용도로 널리 쓰여서, 콘스탄티노플 공방전 때도 투르크 함대를 막기 위해 철쇄를 설치하자 메메드 2세가 함대를 통째로 육로 운송하는 것으로 대응한 바 있다. 다만 이 경우 보통 부표와 부표 사이를 연결하는 것으로, 적에게도 뻔히 보이기 때문에 안 걸린다. 애초에 접근 않게 만드는 게 목적인 것이다. 이런 항만 방어용 철쇄가 우수영에도 설치돼 있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고, 우수영은 명량 해협 서쪽 끄트머리에 있으므로 우수영 수비용 철쇄가 울돌목 차단용 철쇄로 오인된 것일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이런 해석과 연계해서 명량 해전 자체의 결전장이 해협 한가운데가 아니라 우수영 앞 바다라는 견해를 제시하는 경우도 있다. 참고로 이 견해는 이민웅 교수(해군 사관 학교 교수로 현역 해군 중령)의 저서 임진왜란 해전사(2004년)에서 처음 소개되었다. 그러나 현재 이를 지지하는 학자는 사실상 없거나, 있더라도 소수이다. 사실은 애초에 관심 가진 학자도 별로 없지만. 이 주장이 지지를 못받는 결정적인 이유는 울돌목이 지닌 최소한의 지형상의 유리함이 없다는 것이다. 울돌목은 그나마 소수로 길목을 막을 수 있다는 이점이 있었지만 우수영 앞바다는 그런 이점도 없는 허허벌판이라서 이런 곳에서 싸웠다가는 수적 열세로 인해 앞뒤로 포위되어 전멸당하기 알맞은 곳이다. 별도의 이야기지만 전쟁 중에 이순신이 부족하다고 한 쇠붙이는 동철, 즉 구리다.@

7.4. 전설이 되다[편집]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을 막기 위해 에 태어났다가 임진왜란이 평정되니
성스러운 자태를 감추어 바람같이 스러진 것이었다.


박종화 作 《임진왜란》 中


비록 명량 해전에서 대승을 거뒀으나 일본군이 동원한 함대는 300척이 넘었기에 얼마 못 가 이순신은 함대를 물린다. 그러나 몇 달 안 되어 이순신은 서해안에서 일본군을 전부 몰아내고 고금도에 통제영을 설치해 수군 재건에 주력했다. 다행히 명량 직후에 승전 소식을 들은 칠천량의 패잔병과 피난민들, 흩어진 전선들이 고금도의 새 통제영에 속속들이 합류하여 얼마 안 가 본래의 위용을 되찾는 데에 성공했다. 패잔병 및 전선의 합류를 통해 칠천량 해전 당시의 결과를 유추할 수 있다. 칠천량 해전 당시 통념처럼 조선 수군의 상당수가 칠천량 및 춘원포에서 말 그대로 궤멸된게 아니라, 의외로 적지 않은 함선 및 병력이 지휘 통제를 상실하고 뿔뿔히 흩어진 상태임을 알 수 있다는 뜻.

그 뒤 명나라 수군 제독 진린이 합류하였는데, 그는 무능하고 탐욕스런 인물이었으나 이순신은 처음에는 명 수군의 행패를 핑계로 본진에서 백성들과 함께 떠나려는 척을 하여 그에게서 명 수군의 지휘권까지 넘겨받는 한편, 이후 진린에게 자신의 공로를 기탄없이 그냥 넘겨주는 식의 '채찍과 당근'을 병용하여 그를 마음으로 감복하게 하였다. 이 때문었는지, 진린은 이순신에 대하여 이야(李爺) 혹은 노야(老爺)라는 경칭으로 불렀다는 이야기는 왕조실록에 전할 정도로 유명하다. 이는 실로 대단한 일인데, 중국어의 노야(라오예)는 '나으리, 주인마님'이란 뜻으로 하인이 집주인에게 쓰는 경칭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상관을 대하는 예로 통상 대인이라고 부른 것도 아니고 '노야'라고 불렀다는건 황제국 원정군의 수장이, 일개 제후국 장수의 부하를 자처했단 말이다! 게다가 진린은 1543년생으로 1545년생인 충무공보다 나이까지 많았는데도!

소설가 김경진은 이 부분에 대하여 진린 혹은 다른 명나라 장수에 의하여 이순신의 전공이 명 신종 만력제에게 상주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하였으나, 명 신종 실록 및 명대의 역대 상주문 중에는 그러한 것이 전혀 보이지 않아 의문이 있다. 참고로 이순신이 명 신종 실록에 보이는 것은 단 한 차례, 동정군이 명나라에 복귀한 1599년에 전사한 이순신에 대해 포상을 명하는 만력제의 조칙에서일 뿐이다. 이 때 전해진 물품이 아직도 현충사에 보존되어 있다. 그런데 신종 만력제가 이 당시를 전후해서 30년 동안 국사를 전혀 돌보지 않고 신하들도 만나지 않는 엽기적인 태업을 하고 있던 상황이라(...) 후에 정조실록에서 보면 확실히 명나라 직책으로도 수군 도독으로 된걸 보면 올라가긴 한 거 같은데 이와 관련된 기록이 발견되지는 않았다. 명사에서 기록되지 않은 명 황실에서 한 고문 방법이 동시기 조선왕조실록에 상세하게 기록된 것을 생각한다면, 당대 양 국가 모두 껄끄럽게 여길 가능성이 높다란 생각을 해야 할 일이다. 전해진 물품이 진린 개인이 만들어 전달했다는 감정을 한 교수 발언도 생각하면, 대체역사소설 이순신의 나라에서 나오는 선조의 주장처럼 이이제이를 바라는 것이다.

파일:external/www.topicsinkoreanhistory.com/Screenshot_2014-02-18-19-58-13.png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 후 왜군은 철수를 결정했다. 이순신의 함대는 명 함대와 합류해 철수하는 적 주력과 노량 앞바다에서 충돌한다. 뒤로는 조정과, 앞으로는 왜군과 싸워야 했던 고독한 영웅은 마지막까지 적과 싸우다 전사했다. 적선 200척이 격침되고 50척만이 도주했다.

도독(진린)은 공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는 세 번씩이나 배에 엎어지면서 "함께 일할 만한 사람이 없어졌구나!"라고 하였다. 남도 백성들은 공의 죽음을 듣고 분주히 길거리에서 통곡하였고 시장에 있던 사람들은 술을 마시지 않았다. 그 후 가족이 고향으로 반장(返葬)할 때 남중의 선비들이 제문을 지어 와 제사하였고 노약자들은 길을 가로막고 통곡하여 고을 경계까지 통곡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이항복, <백사집>


노량 해전이야말로 이순신의 인간적인 면모가 보인다. 종전까지는 이순신이 철저한 계획과 철두철미한 전략으로 완승을 거두었지만 노량 해전은 그럴 수가 없었다. 왜냐면 진린과 유정은 서로 내 손에 피를 안 묻히고 고향으로 돌아가자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4개로에 있던 왜군은 철병을 결정했고 이에 대응해서 조명 연합군이 추격을 했는데 유일하게 승리를 거둔 곳이 바로 노량 해전이다. 다른 곳에서는 일본군을 추격하는 둥 마는 둥 하거나 어설프게 공격하다가 반격을 당해서 피해를 엄청나게 입었다.

고시니는 진린과 협상을 해서 무사히 탈출하려고 했으나 장군의 반대 때문에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래서 1척만 포위망을 통과하게 해달라고 진린을 꼬여서 구원군 요청을 보냈고 왜군은 500여척에 달하는 원병을 파병하게 된다. 조선군과 명군 다 합쳐도 130여척에 불과한 전력인데다가 명군의 함선은 왜선보다 작은 상황, 진린도 조선 판옥선을 타고 있을 정도니...[90] 조명 연합군은 이제 여수와 사천 양쪽의 왜 수군에게 포위를 당하게 되는 상황에 이르르게 되었다. 물론 진린은 당근 그 상황을 회피하고 도망가려고 했겠지만 이순신이 단호하게 죽음을 각오하고 진린과 한판 붙은 끝에 노량에서 적과 한판 붙었다. 노량 해전은 쉽지 않은 해전이었다. 이미 전략적으로 역으로 포위당한 불리한 상황이었고 함선도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전장은 좁아서 백병전을 하는 지금까지 볼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것은 이순신이 결코 의도한 상황이 아니었다. 어쩔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잘 훈련된 조선 수군과 명의 연합군은 치열한 전투를 벌여서 기어코 승리를 이루어냈다. 이것이야말로 위대한 군인이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겠다. 노량 해전은 워낙 치열해서 대장선에 타고 있는 진린과 이순신이 서로 구원하는 상황까지 이를 정도였다. 전략과 전술보다는 평소 훈련이 전투의 핵심이 된 것이다. 어쨌든 조명 연합군은 승리하고 이순신은 전사하고 전쟁은 끝이났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임진왜란 기간 내내 이순신이 보여준 전략, 전술, 판단력, 철천지 원수 왜군에 대한 단호한 복수심, 민중을 사랑하는 애민정신, 부하들을 이끄는 통솔력, 그 어느 것도 모범이 되지 않은 것이 없다. 물론 시대와 상황이 만든 영웅이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이것은 이순신이 평소에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의 철저한 준비와 비관적으로 느낄 만큼 현실적인 판단력이 결합된 결과였다. 진정한 영웅이 무엇인가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순신의 죽음은 전투가 끝난 뒤에 알려졌고, 통곡이 바다를 덮었다고 전해진다. 그와 만나기 이전에 무능한 데다 부패했고 조선군 때리기도 주저하지 않으며 성질 포악한 명나라 도독이었던 진린은 그의 죽음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나는 나으리(老爺)께서 살아 와서 나를 구원한 것으로 생각했는데, 어찌하여 죽었는가?”라며 통곡했고, 그의 아들을 보고는 말에서 내려 손을 부여잡고 애통해 하였다. 이순신의 지휘 아래에서 대부분의 명군과는 달리 꽤나 엄한 군율 때문에 곤욕을 치렀던 명나라 수군 장졸들도 눈물을 흘렸다. 이순신의 유해가 실린 운구가 아산까지 올라가는 길엔 여기저기서 백성들이 너도나도 운구를 붙들고 "공이 실로 우리를 살렸는데, 이제 공이 우리를 버리고 어디로 가시오..." 하고 통곡하여 운구가 옮겨지는 데에 매우 애를 먹었을 정도였다는 대목에서는 정말 눈물이 날 지경. 한국 역사를 통틀어 이 정도로 민초들의 경애를 받은 위인은 없었을 것이다.

8. 논란과 음모론[편집]

이순신의 사망과 관련된 여러 설들과 각종 음모론을 모아놓은 문서. 검증되지 않은 집단 연구 내용을 포함하고 있으니 이를 감안해서 읽어야 한다. 해당 문서 참조.

9. 전투 관련[편집]

9.1. 참전 목록[편집]

출전

년도

날짜
(음력)

해전

아군 피해

성과

1차 출전

1592년
(선조 24년)[91]

5월 7일

옥포 해전
(玉浦海戰)

1명 부상[92]

적선 26척 격침

합포 해전
(合浦海戰)

피해 없음

적선 5척 격침 및 전멸

5월 8일

적진포 해전
(赤珍浦海戰)

피해 없음

적선 11척 격침[93]

­

­

2차 출전

5월 29일

사천 해전
(泗川海戰)

2명 부상[94]

적선 13척 격침 및 전멸

6월 2일

당포 해전
(唐浦海戰)

피해 없음

적선 21척 격침 및 전멸
구루시마 미치유키 전사

6월 5일

제1차 당항포 해전
(唐項浦海戰)

알 수 없음

적선 26척 격침
적 지휘관 전멸

6월 7일

율포 해전
(栗浦海戰)

알 수 없음[95]

적선 3척 격침,
4척 포획

­

­

3차 출전[96]

7월 8일

한산도 해전
(閑山島大捷)

19명 전사,
116명 부상

적선 59척 격침,
14척 나포,
와키자카 사베에,
와타나베 시치에몬 전사,
마나베 사마노조 사망[97]

7월 10일

안골포 해전
(安骨浦海戰)

피해 없음

적선 42척 격침 및 전멸,
3960여 명 전사

­

­

4차 출전[98]

8월 29일

장림포 해전
(長林浦海戰)

피해 없음

적선 6척 격침

9월 1일

화준구미 해전
(花樽龜尾海戰)

피해 없음

적선 5척 격침

다대포 해전
(多大浦海戰)

피해 없음

적선 5척 격침

서평포 해전
(西平浦海戰)

피해 없음

적선 8척 격침

절영도 해전
(絶影島海戰)

피해 없음

적선 9척 격침

초량목 해전

피해 없음

적선 4척 격침

부산포 해전
(釜山浦海戰)

6명 전사,[99]
25명 부상,
일부 전선 파손

적선 128척 격침,
3800여 명 전사[100]

­

­

5차 출전

1593년
(선조 25년)

2월 10일 ~ 3월 6일

웅포 해전
(熊浦海戰)[101]

협선 4척 전복

적선 51척 격침,
구와나 지카카쓰 전사,
2500명 전사

­

­

6차 출전

5월 2일

2차 웅포 해전
(熊浦海戰)[102]

피해 없음

추가바람

­

1594년
(선조 26년)

­

7차 출전

3월 4일

2차 당항포 해전
(唐項浦海戰)

피해 없음

적선 31척 격침 및 전멸

­

­

8차 출전

9월 29일

1차 장문포 해전
(長門浦海戰)

피해 없음

적선 2척 격침

10월 1일

영등포 해전
(永登浦海戰)

피해 없음

피해 없음

10월 4일

2차 장문포 해전
(長門浦海戰)

피해 없음

피해 없음

­

­

9차 출전

1597년
(선조 30년)

2월 10일

2차 부산포 해전
(釜山浦海戰)

피해 없음

알 수 없음

­

­

10차 출전

8월 27일

어란포 해전
(於蘭浦海戰)

불명

불명[103]

9월 16일

벽파진 해전
(碧波津海戰)

피해 없음

알 수 없음

9월 16일

명량 해전
(鳴梁海戰)

2명 전사로 기록
나머지 불명

적선 31척 격침,
도도 다카토라 부상,
구루시마 미치후사,
하타 노부토키 전사,
전사자 불명

­

­

11차 출전

1598년
(선조 31년)

7월 19일

절이도 해전
(折爾島海戰)

30여 명 추정[104]

적선 50여 척 격침[105]

9월 20일 ~ 10월 7일

장도 해전 / 왜교성 전투
(獐島海戰/倭橋城 戰鬪)[106]

조선 수군 130여 명 사상,[107]
명나라 전선 30여선 침몰 및 파손,
명 수군 2,000여 명 전사

적선 30여 척 격침,
11척 나포,
3,000여 명 사상

11월 19일

노량 해전
(露梁海戰)

조선 수군 10명 전사,[108]
300여 명 부상
명 수군 500여 명 사상

적선 200여 척 격침,
100여 척 나포,
150여 척 반파,[109]
2만 ~ 3만 명의 사상사(추정치)

9.2. 전술[편집]


그 당시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포격 위주의 전술을 구사하며 일시 집중타로 벽력같이 적선을 분멸하는 전략을 사용하곤 했다. 다만, 드물잖게 제기되곤 하는 정자전술(丁字戰術)과 학익진의 연관성은 사실무근이다. 이는 해군 전술과 무기 체계의 변화에 대한 역사적 이해가 부족해서 발생한 착각이다. 이순신의 함대 전술이 그 시대로부터 수백 년 앞선 것은 사실이었으나, 정자 전술과 연계시킬 이유와 근거는 전혀 없다. 당시 조선 수군 수준의 함포 사거리 가지고 정자 전술을 시도한다면 트라팔가 해전에서 딱 둘로 쪼개졌던 프랑스 – 스페인 연합 해군 꼴이 날 수도 있다. 당시에도 횡대로 늘어선 프랑스 연합함 대를 영국 해군이 종대로 들이쳤다. 정자 전술에 의미가 생긴 것은 함포 사거리가 5km를 넘어선 시대, 즉 19세기 후반 이후였다.

어쨌든 조선 수군은 당시 아시아에서 널리 쓰이던 해전 전술보다 한 단계 이상 발전한 전술을 통해 일본군을 압도했는데, 여기에는 이순신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보아야 타당하다. 그 이전의 해전 전술 관련 기록들에서는 이처럼 화력을 중시한 경향은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싸워서 피해를 최소한으로 하고 이길 수 있는 작전과 전장만을 택해 아군의 피해를 최대한 줄이고 적의 피해를 높이는 전술을 썼다.

김탁환을 비롯한 기괴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이길 수 있는 전장만을 택했다"라는 이유로 이순신을 까곤 하는데 사실 "이길 수 있는 전장만을 택했다"는 말은 지휘관에게 있어서 최고의 칭찬이자 명장이 되기 위한 필수 요소이다. 사실상 손자병법에 대해 학습 만화로도 읽어본 적 없으면서 까내려 보려는 심각할 정도로 무식한 소리이다. 또한, 손자병법에서의 원문인 '승병 선승이후구전' 이라는 말은 이기는 전장만 뷔페처럼 골라먹는 얌체같은 짓을 설명하는 말도 아니므로, 상기 비판은 정말 무식하기 짝이 없는 소리이다. 엄밀히 말해, 이 비판이 성립하려면 지휘관이 이길 수 있는 전장이 구성되기를 손놓고 기다리기만 하다가 결심의 시기를 놓치고 상황을 불리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이순신 장군은 이길 수 있는 전장을 만들기 위해 애썼으면서도, 임진년부터 7년동안 적과 마주한 전장에서 단 한차례도 왜군에 대한 우위를 잃지 않았다. 일련의 전투에서 이순신에게 지휘관으로서 미흡한 점이 드러난게 있었다면 왜군이 그 약점을 노렸을 것이나 그러한 약점이 발견되지 않으니 구태여 간첩을 이용한 첩보전으로 이순신의 실각을 노렸다 하는 전사(戰史)적 맥락도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이다. 물론 제2차 포에니 전쟁카르타고처럼 도저히 '이길 수 있는 전장'을 찾기 힘든 경우도 있지만, 그 전장을 이끈 한니발도 병사들의 피해와 자신의 실명까지 무릅써가며 (선택의 여지가 있다면) 최대한 '이길 수 있는 전장'을 추구해왔다.

'이기는 전장만을 선택한다'는 게 말이 쉽지 적장이 지도도 볼 줄 모르는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상대가 유리한 전장을 선택하게 해 줄 이유가 없다. 전투라는 것은 적군과 아군 양측이 맞붙기로 암묵적으로 합의한 위치에서 일어나는 것이고 전장 상황이란건 언제나 수많은 변수로 인하여 순간순간 변화하고 지리와 기상 등의 환경적 요소 역시 유동적이기에 단 한번의 전투 조차 이기는 전장을 만드는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졸장이라 기록된 인물들을 제외하고도, 명장으로 이름 떨친 이들조차 종종 이런 상황을 만들지 못하고 분루를 삼켜야 했던 기록들이 흔하게 있는 것은 괜히 그런 것이 아니다. 이순신이 아무리 유리한 전장을 선택해 봤자 왜군이 그걸 무시하고 응전하지 않으면 전투 자체가 일어나지 않고 당연히 승전도 없다. '전장 선택'은 병법(군사 이론)의 기본 중의 기본이자, 상대로 하여금 불리한 전장을 유리하다고 착각하게 만들어야 하는 고도의 심리전이 필요한 작업이다. '이기는 전장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다'라는 말은 '적장들을 마음대로 속여 넘기고 유린할 수 있다'라는 군대 지휘관에게는 최고의 극찬이나 다름없는 말이다.[114] 당장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 최고의 명장으로 꼽히던 신립이 전장 선택 한번 잘못 했다가 무슨 꼴을 당했는지를 보면 이길 수 있는 전장 선택의 중요성을 이해 못할 수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유리한 전장만을 선택해서 싸웠으니 당연히 이기는 거 아님?' 이라는 이유로 지휘관의 능력을 폄하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병법에 대하여 대단할 정도로 심각하게 무지한 탓에 최고의 칭찬을 욕인 줄 알고 하는 거다.

이순신은 손자병법에서 가장 큰 승리 다음으로 "아군 피해를 최소화 하고 적군을 물리치는 가장 이상적 논리를 따랐을 뿐"이고 어느 전투나 전장에서도 안전하고 승리가 보장이 되는 전투는 없을 뿐더러 전투 개시가 되면 아군 적군 할 것 없이 무조건 이기려는 작전을 펼지지 않는가? 반대로 "이길 수 없는 전장에서 싸움을 택했다면"이라는 말은 그야말로 스스로의 무식을 만천하에 까발리는 소리다. 원균하고 연대를 했을 때도 이순신은 원균이 제안한 작전을 들어주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지휘관이자 장군이라는 직책이 있는 자가 병법이나 전술, 전략을 모르고 부하와 병사들을 무의미하게 많이 희생시키고 승리하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115]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일본군은 계속 북쪽으로 북진하고 있었으며 조선 육군은 제대로 힘을 못 쓰고 연이어 패배하고 심지어 조선의 도성 턱밑인 용인에서 일본군의 2천 명도 안 되는 병력에 조선군 4만여 명이 패배하여 뿔뿔이 흩어진 상황이었다. 이순신 또한 이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특히나 국운이 달린 해전이고 조선 조정에서도 이러다할 지원도 받지 못한 상황이라서 소모전을 벌이면 일본군한테 결국은 밀리게 될것이 명확했으므로 조선 처지에서도, 이순신 처지에서도 예하 병력을 최대한 보전하는 완벽한 승리가 필요했다. 이에 이순신은 모든 상황을 면밀하게 고려하여 적에게 큰 타격을 주는 것만이 아니라 (지휘관이 중도에 전사해 혼전 양상이 된 노량 해전을 제외하고) 그가 수행한 모든 전투에서 조선군의 전력을 거의 완전하게 보전하기까지 했다. 거의 모든 승리가 병력 손실이 매 전투의 적군 손실과 비교하여 미미한 수준의 대승리였으며 이것은 그가 이길 수 있는 전장을 택해서 신중하게 싸웠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 덕에 전략적으로는 해로가 차단되어 왜 선봉군 병참에 심대한 타격을 주어 진격을 멈추게 하고, 결과적으로 왜군이 육로로 이어진 보급로에만 의존하게 되어 각지의 산발적 의병 활동이 효과적으로 왜군 보급에 타격을 줄 수 있는 바탕을 제공하였으며, 결과적으로 육지에서 싸우는 모든 왜군의 전쟁 수행 능력과 의지를 꺾을 수 있었다. 이순신의 공로가 바다에서만 이기고 그친게 아니라 그로 인해서 조선이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100% 승리의 확신이 없었던 전장(부산포)에서 선조가 요구한 대로 무리하게 싸웠다면 이와 같은 결과는 나오기 힘들었을 것이다.

또한 그의 전장 선택을 논함에 있어, 옥포, 한산도(견내량), 명량 해전, 노량 해전 등 몇몇 전투를 제외하고는 접전 당시에는 항상 조선 수군이 왜군보다 수적 우위를 유지했으며 거의 모든 전투가 왜군의 허를 찌르는 기습이나 유인 후 매복 공격으로 시작했다. 옥포, 한산도, 명량 해전은 전쟁의 판국을 뒤집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전투였는데, 수적으로 불리했던 이 해전들 중 옥포 해전은 기습으로, 한산도 해전은 유인 후 포위, 명량은 지형과 해류의 활용을 통하여 전술적으로 불리한 전장에서 치른 해전은 단 한 건도 없었다. 후위 병력과 함선까지 포함할때 최대 1,000대 1의 병력열세에 놓였던 저 명량 해전조차 좁은 물길과 빠른 유속으로 유명한 울돌목을 끼고 싸워 왜군의 수적 우위를 상쇄하고 전투 후반 왜군이 지리멸렬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했을 정도로 이순신의 전술적 식견과 지형 활용 능력은 탁월했다.

그의 전장선택 능력을 논함에 있어 명량 해전을 전술적으로 더 자세히 살펴보자면 지형이 좁고 조류가 거친 울돌목은 전장으로서는 최악으로 볼 환경이지만 당시 절대적으로 열세인 조선군의 처지에서는 압도적으로 많은 적군의 포위를 피하고 빠른 조류를 활용할 수 있는, 그나마 유리하게 전황을 끌어갈 수 있었던 곳이었다. 지형과 환경의 제약은 그 수가 많은 쪽에 더욱 불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명량 해전 당시 명량의 의미는 흔히 언급되는 전술적인 면보다도 전략적인 면에서 더 중요했다. 최단 시간 서해 진출을 위하여 명량 해전 당시의 여건상 마다할 이유가 없었던 요지였기에 일본군이 싸움에 응했던 것이지, 이순신이 명량이 아닌 다른 곳에 자리를 잡았다면 그냥 무시하고 지나갔을 것이다.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울돌목을 통과하게 되면 바로 진도를 지나 서해가 나오기 때문이다. 게다가 잊으면 안 되는 것은 정유재란 이후의 왜 수군의 지휘관들은 상당수가 다이묘이면서도 수군 경험이 있던 이들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수십 년간 해적질을 하며 수많은 전투를 경험한 베테랑인데다가 해상전에 있어서 절대 바보가 아니란 사실이다. 이런 왜장들이 스스로 불리한 지형까지 쫄래쫄래 기어들어오게 만들었던 사람이 바로 이순신이다. 한 예로 명량 해전에 참전한 구루시마 미치후사는 에히메 현 출신 무장으로, 이 지역의 구루시마 해협은 울돌목처럼 빠른 조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구루시마에게 있어 울돌목의 빠른 물살은 익숙한 환경이었다. 그리고 명량 해전 초반 일본군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조류를 타고 울돌목으로 몰려온 것을 보더라도 이들은 바보가 아니다.

내가 이기고 상대가 지는 상황과 지형으로 이끌어 싸우게 만든다는 것은, 상대방 스스로 하여금 스무 집을 제하고 두는 바둑이요, 차, 포에 마까지 떼게 하고 두는 장기이다.

또한 이순신은 정찰과 첩보를 통한 정보수집을 무척 중시해서 단 한 번도 왜군에게 기습을 당하지 않았고 왜군이 어설프게 기습이나 야습을 기도하다 조선 수군의 매복에 걸려 역으로 관광타기 일쑤였다. 《난중일기》만 보더라도 이순신 장군은 수많은 탐망꾼을 운용했음을 알 수 있다. 《징비록》에서는 어느 날 갑자기 밤에 일어나서는 기습이 있을 것 같다고 준비를 하라고 하자 얼마 안 있어 진짜로 왔다(…) 휘하 장군들은 (이순신 장군은 사람이 아니라) 귀신이 아닌가 했다고…. 상세하게 설명하자면 명량해전 전에 이순신 장군이 부하 장수들에게 왜적들이 기습에 능한 데다가 오늘 밤 달이 밝지만 간교한 왜적들이 이를 이용해서 오히려 기습을 해올 수가 있으니 정신 바짝 차리고 기습에 대비하라 명령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순신의 생각대로 왜군들이 기습을 걸어왔으며 명량 해전 전 칠천량 해전 후의 상태여서 우왕좌왕할 때 역시나 이순신 장군이 몸소 나가 쫓았다는 일화가 난중일기에 직접 나와있다.

이순신과 처음 맞붙어서 깨지고 이후에도 계속 깨진 도도 다카토라 뿐만 아니라 와키자카 야스하루, 구키 요시타카, 가토 요시아키 등의 나름 명망있던 장수들도 이순신에게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116] 결국 왜군은 계속된 참패로 본거지 부산마저 위험해지자 아예 요충지마다 진지를 쌓고 해전을 극력 회피하는 우주방어로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시마즈 요시히로고니시 유키나가도 노량에서 이순신에게 두들겨맞고 패하여 간신히 도주하기에 이른다.

또한 이순신 휘하의 조선 수군은 유독 엄격한 군율을 가진 걸로도 유명했다. 어느 정도로 가혹했냐면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보다 이순신을 더 두려워했으며 오죽하면 전사자보다 군율에 의한 처형자 숫자가 더 많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게다가 이순신이 지휘한 전투에서 침몰선은 0척, 사상자(死傷者)를 합하여 100여 명밖에 안 되는 숫자다. 오히려 역병으로 죽은 이가 더 많다. 사실 육군과 수군을 통틀어서 전사자보다 병사자가 절대적으로 많은 건 그 시대 전쟁의 특징이지만 특히 조선 수군은 그 정도가 심했다. 특히나 1594년 갑오년에 퍼진 역병으로 인해 수많은 수군들이 죽어나갔고, 수군 총 병력이 만명 이하로 떨어져 노심초사해진 이순신 장군은 전력의 공백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동분서주 움직여야 했다. 애초에 전사자 자체가 거의 없다시피 한 판에 병사자는 만 명을 넘는 수준이다. 전사자와 병사자 비가 1:100에 가까운 군대라니 최전선의 군대가 이렇다는 걸 현대인들 중에서 믿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군율과 전술의 접점은 바로, 지휘관에 대한 신뢰가 전장에서 지휘관의 지시에 일사분란하게 움직여 줄 수 있는 전술 구사를 좌우한다는 사실이다. 이순신이 평상시에 엄격하게 군율을 세우고, 훈련시켰던 결과가 전장에서 이순신이 깃발만으로 적게는 열두척, 많게는 백여 척의 함대를 일사분란하게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이고, 아무리 좋은 계획과 기민한 전장 판단력이 있더라도 휘하 병력을 자기 손발처럼 부리지 못한다면 아무리 유리한 전장에서도 패하는게 당연한 것이다.

다만 엄격한 군율을 적용한 것을 구실로 이순신을 곡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순신 본인에 대한 신뢰야말로, 그가 실질적으로 부하들을 통제하는 데 성공한 요인이다. 단순히 엄격한 군율을 강조하기만 하는 이였다면 다른 해전은 몰라도 명량 해전의 승리는 나올 수가 없다. 이순신이 평소 권위를 이용해서 사익을 챙기거나,[117] 승리를 위해 희생을 강요하거나, 부하들을 도구로 여기거나, 편의에 따라 원칙을 곡해하는 상관이었다면 그가 명량 해전처럼 누가 보아도 도박과도 같은 무모해보이는 승부수를 띄웠을 때 부하들은 '일본군에게 죽으나 이순신에게 죽으나 마찬가지'라 생각하고 기꺼이 그를 버리고 달아났을 것이다.[118] 명량 해전 당시 조정에서는 이미 '수군 폐지령'을 고려하고 있었으며 칠전량에서 패배했던 수군 장수들 중에는 명량 해전 당시까지도 이순신 함대에 합류하지 않고 은둔해있는 경우가 많았을 정도로 부정적인 전망뿐이었다. 이렇듯 모든 면에서 암담한 상황에서 적진을 향해서 돌격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경우 부하들은 그대로 도주하거나 항명하며 반란을 일으키려 했어도 이상할 게 없다. 특히 오늘날같이 매스미디어가 발달하지 못한 그 시대에서 '사고'를 일으키고 입 싹 닦는건 어려운 일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이순신의 돌격 명령을 병사들은 충실히 수행했다. 이를 군율에 대한 무서움으로 해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를 가능하게 해준 건 휘하 병사들의 이순신에 대한 존경과 신뢰 외에는 없다. 고금을 통틀어 군율만 바짝 죄어 벌어졌던 부하들의 하극상 행위들과 심지어 하극상 중의 하극상인 상관 살해를 당한 유명한 일화를 몇 가지 살펴보면 장비처럼 병사들을 엄격한 군율로 혹독하게 대했던 습관으로 인해 범강과 장달에게 살해당했다던가 루쿨루스처럼 휘하 병사들의 신뢰를 잃어 군대가 연전연승을 거듭하던 상황에서도 싸우길 거부했던 사례,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 당시 "일단 돌격" 명령에 불응하거나 전우를 즉결 처분한 소대장을 살해한 사건들이 대표적이다.[119] 이에 반하여 이순신의 병사들은 엄격한 군율과 절망적인 전황으로 어떻게 봐도 살아나갈 길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지휘관에 대한 신뢰를 놓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동서고금의 전쟁사를 통틀어 의외로 꽤 드문 경우다.

이순신의 엄격한 군율은 명나라 군사들에게도 적용이 되었다. 이순신 장군은 군율을 어긴 명군을 직접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을 진린으로부터 위임받았는데[120] 이로인해 명나라 수군만큼은 다른 명군에 비해 철저히 군율을 지키게된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은 그에 못지 않은 신망 역시 얻었다. 노량 해전에서 전사 소식이 알려지자 진린은 물론이고 타국인 명나라 수군들까지 통곡을 하는 것을 보면 이순신 장군의 인품이 외국인들까지 감명시킨 것.

이러한 신뢰와 군율이야말로 선진적인 화포 및 조선 기술과 함께 조선 수군의 승리를 보장한 가장 큰 원인으로 작용했다. 용인 전투칠천량 해전에서 보듯이 조선군은 사기가 낮아서 뛰어난 지휘관에 의한 엄격한 통제가 있지않으면 확실히 이길 수 있는 유리한 상황에서조차 붕괴해 도망치곤 하는 그러니까 이길 만한 싸움을 셀프 멘붕해서 부대가 와해되고 마는 고질적 문제를 갖고 있었는데 이순신에 대한 신뢰와 엄정한 군율로 이것이 방지되었기 때문이다.[121]

즉 이순신은 위대한 지휘관, 위대한 전술가로서 가져야만 하는 모든 덕목들을 다 갖추고 있었다. 역사적인 장군들은 모두 첩보와 병사들의 훈련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자신의 군대의 장점을 극대화할 수 있는 전술을 짰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이순신이 확실히 이길 수 있는 전장만을 택했다는 사실이 폄하될 수 없는 근거이고, 특히 군사학, 전쟁사와 관련된 사람들 중 이순신을 무능을 지적하려는 사람들이 틀렸다는 절대적 근거들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가진 수많은 장수들이 그 호전성이나 아집으로 혹은 전공을 더 쌓기 위해서 아군을 희생시키거나 학살을 자행하는 등 불필요한 전투를 치른 흑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에 비하면 항상 최소의 희생으로 최선의 효과를 취하였으니 오히려 칭송하고 찬양하여 마땅한 일이다.

또한 전술적인 면에서 이순신은 항상 왜군의 기동을 방해하는 상황을 만들어 놓고 싸웠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한산도 전투에서 유인한 뒤 포위하여 적을 묶어놓은 것이나 명량 대첩에서 좁은 길목으로 유인해서 자중지란(自中之亂)을 유도하여 싸운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전투 시 조선 수군의 집중된 화력과 함선의 높은 내구성 같은 장점은 극대화되었으며 일본 수군의 수적인 우세와 뛰어난 근접 전투력, 기동성은 봉쇄되었는데 이런 상황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철저한 첩보 능력, 원하는 전장으로 적을 유인할 때까지의 계략, 육지에서도 하기 힘든 전술 기동을 바다 위에서 완벽하게 해내는 기동 능력, 전투 개시의 시점, 전황에 따라 적을 이길 수 있는 포진, 특히 앞도적인 수적 열세 상황에서 발휘된 뛰어난 통솔 능력 등을 본다면 이순신의 군사적 재능은 전쟁내내 거의 자강하다 시피한 조선수군과 선조를 포함한 조정의 지휘 방해 행태까지 고려했을 때, 인류 역사상 최고라고 볼 수 있다.

이순신이 모든 전투에서 두루 갖추었던 조건들은 《손자병법》에 나오는 이상적인 승리의 조건과 동일하다.(싸우기 전에 이긴다.) 특히 정보에 있어서 우월함은 《손자병법》이 제일 강조한 조건인데, 이순신은 정보를 수집하고 활용하는 데에 있어 교과서적인 모범을 보였다. 《손자병법》이 제시한 이상적인 조건을 모두 충족시킨 지휘관은 한국 역사가 아니라 인류 역사를 통틀어 찾아봐도 몇 되지 않는다.

만약 이순신이 경상 우수사로 미리 부임해 있었다면 임진왜란이 임진왜변으로 기록되었으리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로 그의 전투 지휘 능력, 전략 / 전술은 절대적이었다. 비록 여러 부분에 있어 욕을 먹는 선조지만 적어도 북방 수비를 맡던 이순신을 반대를 무릅쓰고 파격적으로 승진시켜 수군의 중책을 맡긴 전쟁 초기까지의 인사 행정만큼은 아주 적절했다고 해야 하는데, 선조의 이순신 발탁이 무작정 선조의 안목으로 해석하기 어려운 근거가 이일 등의 사례다. 그리고 제일 심각한 근거로 경상 우수사에 원균을 임명했다.[122] 당시 전라도 수군이 좌수영, 우수영 모두 합쳐 함선이 최대 50척에 불과했는데 반해, 경상 우수영은 단독으로 최소 75척 ~ 최대 100척 가량을 동원할 수 있었다. 이는 경상도가 일본에 접해있는 최전선이기 때문이다. 여담으로 1년 만에 정5품 호조 정랑에서 정3품 광주 목사로 발탁된 권율도 특기할 만한 선조의 인사 행정이라 하겠지만, 앞서 원균과 이일 등의 사례 때문에 선조의 권력욕이 만든 작품이란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즉, 선조의 혜안이나 지혜를 운운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반쪽만 맞는 것이다.

또한 이순신의 사기적인 전공을 폄훼하기 위해 전국 시대의 주요 전장이 육상이어서 왜군은 육전에 능했지 해전에는 약했다는 허언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건 육군과 해군도 구분 못하는 헛소리다. 물론 육상 전력은 해전을 못했던 것은 맞으나 그건 지극히 당연한 것이며, 왜군 쪽도 바보가 아니라서 해전에는 왜구출신인 정예 해상전력을 보냈다. 여기서 정예 해상전력이란 뜻은, 빠른 배와 항해에 능숙한 선원들과 도선 및 백병전을 장기로 하는 전투병력을 갖췄다는 뜻이다. 전근대 시대의 해전은 결국 선상 백병전으로 귀결되며, 해적과 군인의 전력적 차이가 별로 없었다는 것[123]을 생각해보면 이 방면에서 일본의 왜구출신 해상 전력은 동아시아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수준이었다. 이렇게 도선 접전 또는 등선 육박전이 '하등한 전술'이 아니고 보편적인 수상전의 형태였음을 상기한다면, 조류와 바람을 타고 빠르게 기동할 수 있는 왜수군의 능력은 오히려 조선 수군을 상회하였으며, 이순신 장군은 그 문제를 훼파하고자 기동을 기동으로 대응하지 않고 '등선' 자체를 거부하는 형태로 전투선을 개량하고 화포를 탑재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수군은 빠르게 접근하여 붙은 다음 마치 적성에 오르듯 판옥선을 기어 올라가 접전을 벌였고 이억기, 최호의 함대와 김완의 함선도 그렇게 불타버렸다.

왜군이 수전에 약해서 이순신이 쉽게 이길 수 있었다고 허언을 뱉는 사람들은 위에 기술한 사실 외에도 칠천량 궤멸 당시 이억기최호 등이 휘하 판옥선들을 부려 진형을 짜고 대응했던 사실을 보지 않는다. 왜군이 수전에 약했다면 세키부네가 판옥선만큼 느렸다거나 왜군 병사들이 뱃멀미로 전투를 치르지 못했다거나 심지어 기동 중에 자기 배들끼리 부딪히는 등의 가장 기초적인 문제들이 기록되었어야 한다. 그러한 사실이 없는 점과 '왜 수군이 약하다'라는 전제로는 칠천량에서 고작 두 척의 세키부네에 등선을 허락하여 배를 내어준 김완이나 진형을 짜고 왜군 세키부네 함대와 맞붙은 이억기, 최호의 패배를 설명하지 못한다. 되려 이억기와 최호가 무능한 지휘관으로 낙인찍히는 궤변적 논리가 성립된다.

또한 전근대의 해전에서는 함선의 체급이 크다고 무조건 유리한 것도 아니었다. 판옥선은 세키부네보다 체급이 컸지만 그만큼 기동성이 낮았다. 오히려 숫적 우위를 활용하여 빠르게 접근해 포위하고 도선하려면 세키부네가 더 적합하였다. 즉 조선 측이 딱 하나 유리했던 부분은 판옥선과 세키부네의 전고 차이뿐인데 이순신은 이 하나로 기적같은 성과를 이뤄낸 것이다. 잘 보면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내내 철저하게 왜군의 등선할 기회를 주지 않도록 전투를 지휘했다. 병법상 아군의 이점을 극대화 하고 약점을 최대한 감추는 것은 말은 쉽지만 실제로 실천하는 것은 어려운데, 이순신은 그렇게 했다. 거기에 더하여 이순신은 중과부적의 왜군을 맞아 포격전과 함께 등선하는 왜군과 난전까지 벌였다.(정확하게는 기록상 안위의 배에 왜군이 다수 올라갔고, 다수가 전사하여 상황이 위급해지자 이순신이 적선 세 척을 부수고 구원했다고 되어있다.)

왜군이 약하다면 이억기와 최호는 명량에서의 이순신보다 많은 숫자의 판옥선을 부려 대응하였는데도 전멸하였겠는가? 김완이 고작 두 척의 세키부네의 등선을 허용하여 배를 빼앗겼겠는가? 이순신은 멀찌기 뒷걸음질친 열척의 전선은 내버려두고 응전하여 온 안위와 김응함까지 해서 고작 세 척의 판옥선으로 역류하는 물살을 견디며 몇 시간 동안 수십 척의 세키부네를 막았다. 최대한 적의 등선을 허용하지 않으려 했던 이순신이 왜군에게 유리한 해류 상황에서 격군들이 빠르게 지쳐 기동성이 저하되었을 것인데도 부순 적선만 31척이라고 장계에 올렸다.

덧붙여 이순신의 전공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그 모든 전공이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는 것이다. 당시의 조선군 전체는 물론이고 이순신 개인이 겪은 이전의 전쟁 경험은 모두 여진족이나 왜구와 맞붙는 소규모 비대칭 전투의 형태였지 국가 간의 전면전이 아니었다. 그나마 이순신은 처음부터 수군에서의 경험 자체가 많지 않았다. 전라 좌수사에 임명되기 전에 이순신이 수군에서 복무한 시기는 36살(1580년) 때 전라도의 발포 만호로 1년 6개월 남짓 복무한게 사실상 전부였다. 그 외에는 함경도 동구비보 권관, 조산 만호 등 육군에서 주로 활동했다.

또한 동아시아에서 본격적으로 제해권을 놓고 해전이 벌어진 것은 임진왜란이 처음이었기에 제해권의 중요도를 인식하고 있는 인물이 양군 수뇌부를 통틀어 거의 없었다. 당장 이순신 덕에 계속 이겨왔던 조선조차도 명량 해전의 승리 이전까지 수군 폐지령을 내리려 했을 정도로 제해권과 그로 인한 이득에 대해 무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은 칠천량의 초대형 참사 이후에도 제해권을 지키기 위해 단 한척의 전선으로라도 싸우려 한 것은 단지 용기와 결단력의 문제가 아니라 전황의 본질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명장'이라 하면 보통 거듭되는 전란을 겪으며 수많은 전투 경험이 쌓이고, 그렇게 축적된 경험을 토대로 중요한 전투에서 모범답안을 들고 나와 대승을 거두는 식으로 배출되곤 했는데, 200년간의 평화기를 겪은 조선에서 단지 소규모 교전만을 겪어 보고 그 이외엔 병법서를 탐독하며 독자적으로 전략 전술을 연구했을 뿐인 이순신이 첫 해전부터 마지막 해전까지 사소한 실책조차 보기 힘들었다는 것은 그가 단순히 모범적인 군인이 아니라 그야말로 천재적인 명장이었다는 것을 입증한다.

일례로 최후의 작전의 대가인 만슈타인도 1차 대전 참전과 라팔로 조약 기간의 연습 등의 경험을 토대로 2차 대전의 활약을 펼칠 수 있었으며, 나폴레옹도 사관학교와 1차 대불동맹과의 교전 등을 통해서 성장해 나갔으며, 칭기즈칸도 초창기 시절의 군사적 패배와 경험 등으로 육지에서 승전을 이어갔다. 알렉산드로스 대왕도 부친 필리포스 2세가 이룩한 군사혁신과 유리한 정치구도를 발판으로 군사적 업적을 이루었다.육군에서 타 군으로 이전하여 전공을 거둔 헨리 햅 아놀드나 밀히도 직전 시기의 신 병과인 공군을 직접 경험하고 공군으로 간 사람들이다. 직전 시대에 자신이 신 병과나 군사혁신의 단초와 관련된 참전하지도 못하고 체계적인 군사교리 교습과 연구 없이 이룬 충무공의 성과요약을 하면서 다른 군사적 천재와의 비교 결론을 독자에게 맡긴다.

1. 대전략적 구도부터 통찰하고, 그로 인해 제해권 개념을 인지하고 수뇌부에 강조한 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수뇌부로부터 온갖 음해와 견제에도 불구하고 조국과 백성(국민)에 대한 충절을 다하며 휘하 장졸에게 불변의 사회적 자본으로 기능한 점

2. 전략적 고찰로 군사 운용의 기초를 잡고 소모전에 휘말리지 않으며 지속적 작전을 위해 민심을 얻었으며, 전쟁 초기의 수세에서 현존함대전략의 요소를 활용하고 이후 한산도로 통제영을 이동시켜 견내량 이서 지역의 해상요새화로 전략적 변모를 꾀하며, 수급보다도 적선 완파를 통한 적 전력의 효율적 감쇄를 이룩한 점

3. 작전적 운용을 극대화하여 아군의 능력을 극대화해서 유지시키고 적의 장점을 거부한 점 (기습, 정찰중시, 화포 운용 적극성, 전장선택, 정찰강화 및 아군전투전력 보존 등)

4. 전술적으로 기본적 틀은 있으나 상황에 맞게 운용을 기하면서 항상 솔선수범을 한 점 (일자진, 학익진, 장사진으로 순환타격 등 진법의 다채로운 구현, 수급에 연연하지 않으나 사기 고취를 위해서는 활용하기도 한 점, 진두지휘로 조직력 강화 밑 통솔 극대화, 시간적-공간적 이점을 순간적으로 활용하는 즉각대처능력 등)

참고로 이 점 모두가 임금의 질시와 말 안 듣는 원균이란 희대의 트롤을 끼고 이룩한 가시적 성과이다.


전쟁 초기에 조선군은 장군과 사졸 가릴것 없이 도망치기에 바빴다. 평소에 엄격한 장군은 더욱 강력한 군율을 가차없이 적용해서 확실하게 군을 장악했고 이는 해전에서의 승리의 기반이 되었다. 병법에 충실한 전술로 결코 불리한 상황에서 싸우지 않았고 유리한 상황에서 적을 물리쳤다. 그렇지만 장군에게도 시련은 닥쳤고 백의종군까지 하는 상황에서도 결코 의지를 꺽지 않고 냉철한 판단력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기세로 왜군을 명량에서 물리쳤고 노량해전에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임에도 적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것은 평소 장군의 무인으로서 기본을 철저히 지킨 결과로서 예나 지금이나 장군의 전술은 연구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다.
특히나 인간의 한계를 극복한 명량 해전과 인간의 한계에 닥쳐서도 승리를 이끌어낸 노량 해전은 군인을 떠나 한 인간으로서 치열함을 보여준 장군의 면모를 느끼게 해준다.

10. 가족[편집]

가족으로는 아버지 이정(1511년 ~ 1583년), 어머니 변씨 부인(? ~ 1597년)과 아내 방씨, 첩 해주 오씨와 '부안댁'[124]이라는 이름의 첩실이 있었다. 방씨 부인과의 사이에 장남 이회, 차남 이열(이울), 3남 이면[125]과 딸 하나를 두었는데, 이순신의 장녀는 홍가신의 아들 홍비와 혼인했다. 그외 서자로 이훈, 이신과 서녀 두 명을 두었다. 또한 이순신의 서녀 중 한 명은 윤효전(1563년 ~ 1619년)의 첩이 되었는데, 윤효전은 바로 현종 ~ 숙종 연간 남인의 중심 인물이었던 윤휴의 아버지다. 다만 윤휴는 이순신 서녀의 소생이 아니라 윤효전의 적자고, 윤효전과 이순신의 서녀 사이에 태어난 사람은 윤영(1611년 ~ 1691년)으로 그가 윤휴의 이복 형이다.

이순신의 부친 이정은 음서로 벼슬에 올라[126] 최종 직위는 종5품 창신 교위에 이르렀으나 실무를 맡은 게 아니었고 일종의 임시직이나 명예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후 1604년에 아들 이순신의 막대한 훈공으로 좌의정에 추증되고 덕연 부원군에 추봉되었다.

전라 좌수사에 취임한 직후 어머니 변씨를 여수의 고움내라는 곳에 모시고 봉양했는데, 현대에도 여수에는 '이순신 자당기거지'[127]라고 해서 변씨가 살던 집이 남아 있다. 어머니도 상당히 강직한 여성이었는데, 《난중일기》를 보면 문안 인사를 하고 떠나는 아들 이순신에게 "가거라. 부디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라." 라고 격려한 기록도 남아 있다. 이때 이순신은 어머니의 모습을 "두세 번 타이르시고 조금도 헤어지는 마음으로 탄식한 빛이 없으셨다"라고 묘사하고 있다.[128] 1597년 이순신이 파직당하고 백의종군을 떠날 때, 변씨가 아들을 만나기 위해 배를 타고 오다가 병사했는데, 이순신은 어머니의 임종도 지키지 못하고 떠나야 했다. 이때의 이순신이 느낀 애통함은 난중일기에 잘 나타나 있다.

"어머니를 마중하려고 나가는 중에 아들 울이 종을 보내 "아직 배 소식이 없다." 하였다. (중략) 조금 있으니 종 순화가 와서 어머니의 부고를 알렸다. 뛰쳐나가 가슴을 두들기고 발을 동동 굴렀다. 하늘이 캄캄하다. 즉시 갯바위로 달려나가니 이미 배가 와 있었다. 이 애통함을 글로 다 적을 수가 없다."


정유년 4월 13일(1597년 5월 28일) 《난중일기》


이후 이순신은 상주(喪主)의 의무를 지키기 위해 고기를 먹지 않았는데, 선조가 이 소식을 듣고 고기를 하사한 적이 있다. 다른 인물이라면 순수하게 이순신의 건강을 걱정해서 고기를 먹고 몸을 추스르라고 볼 수도 있지만 하필 그 선조(…)인데다, 《난중일기》의 기록도 "주상께서 고기를 하사하니 비통하고, 또 비통하다"고 나와 있다(정유년 12월 5일). 따라서 이 일에 대해 선조가 일종의 충성심 테스트를 했고, 이를 눈치 챈 이순신이 복잡한 감정을 일기에 쓴 것이다. 더구나 정유년 12월 5일은 어머니에 이어 셋째 아들 이면이 왜군에 의해 세상을 떠난 뒤이기도 하다. 어머니와 아들을 한 해에 다 잃고 비통해하는 장수, 그것도 상주에게 고기를 내려준 것...[129]

아내인 방씨는 무관 출신인 방진의 딸이었는데, 대단한 여장부 기질이 있었던 모양. 어린 시절 방진의 집에 도적들이 쳐들어오자 방진이 활을 쏘며 저항했다. 화살이 다 떨어지자, 방씨가 베틀에 쓰는 대나무 가지를 쏟아내며, "여기 화살들이 있습니다!"라고 소리쳐서 화살이 많이 남아 있다고 속여서 도적들이 도망갔다는 야사가 있다. 또한 류성룡의 글[130]에 따르면, 사위인 홍비가 체구가 작아서 마음에 차지 않다며 집에도 들이지 못하게 하고,[131] 집안 노비들을 거느리고 직접 농사를 지어서 집안을 유지하며, 대단히 성격이 강해서 집안 사람들 중 아무도 그녀의 말을 거역하지 못한다고 나온다. 이에 대해 류성룡은, "참으로 장수(將帥)의 집안에는 장수의 아내가 있다"며 감탄했다. 류성룡은 저서인 《징비록》의 평가에서, 모두가 이순신 장군을 영웅적이고 위엄 있는 인물이고 장수로 생각하지만, 장수로서 위엄 있는 외모와는 거리가 멀었으며, 글을 읽는 단아한 선비 같다고 하였다. 난중일기에는 그녀도 병을 앓아서 전란 중에 사경을 헤멨다는 기록도 있는데, 아들 이회가 1603년 어머니의 병환 때문에 사직하는 상소를 올린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이순신의 전사 후인 1603년까지는 생존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가족에 대해 자상한 부친의 모습을 보여주는 일화가 몇 있다. 이순신의 두 형 이희신과 이요신은 각각 4명과 2명의 자식을 남기고 비교적 일찍 죽었는데, 이순신은 이 6명의 조카를 친자식 못지않게 잘 키워냈다. 특히 정읍 현감으로 부임할 당시에 이들 조카들을 데려가면 파직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우려[132]를 받았으나, 이순신은 "조카들이 부모가 모두 죽어 천애고아라 의지할 곳이 나뿐인데, 어찌 두고 가는가? 차라리 파직 당할지언정 조카들을 버릴 수 없다!"라고 말했다. 세조, 정희왕후: 뜨끔! 하지만 정읍 현감으로 있는 동안, 그의 가족들이 보여준 처신이나 조카들의 행동은 정읍 주민들에게 칭찬을 받을 만큼 대단했다고 한다. 이 조카들의 혼례를 다 치러낸 후에야 자신의 친자식의 혼례를 했을 정도. 또한 이순신의 셋째 아들 이면이 아산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은 날의 《난중일기》는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의, 심금을 울리는 애틋한 문장으로 가득하다.

"새벽 2시쯤 꿈에 내가 말을 타고 언덕을 달릴 때 말이 실족하여 내가 물에 빠졌다. 그런데 쓰러지지는 않았으므로 보니 면이 나를 끌어안고 있는 듯 했다. 이것이 무슨 징조인지 알 수가 없다.(중략) 천안에서 사람이 와서 집 편지를 전했는데, 겉봉을 뜯기도 전에 눈앞이 아찔하고 골육이 진동했다. 대충 뜯고 겉을 보니 '통곡'이란 두 글자가 써 있기로 면이 전사했음을 알았다. 통곡하고 또 통곡하도다! 하늘이 어찌 이렇게 어질지 못하실 수가 있는가.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게 올바른 이치인데 네가 죽고 내가 사는 것은 무슨 괴상한 이치란 말인가. 온 세상이 깜깜하고 해조차 색이 바래보인다. 슬프다 내 작은 아들아,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네가 유독 출중하고 영민하여 하늘이 세상에 남겨두지를 않으시는 것이냐, 나의 죄가 네게 화를 미쳤느냐. 나는 세상에 살아있지만 장차 어디에 의지하랴. 함께 죽어 너와 지하에서 지내며 울고 싶으나 네 형, 누나, 어미가 의지할 곳이 없어질 것이니 참고 연명하겠다만 혼은 죽고 가죽만 남아 부르짖고 서글피 울 뿐이다. 하룻밤을 넘기기가 한 해와 같도다."


1597년 10월 14일

"나는 내일이 막내 아들(이면)의 죽음을 들은 지 나흘이 되는 날인데도, 마음 놓고 울어보지도 못했다."


1597년 10월 16일


참고로 부하들이 있는 곳에서는 울지 않았는데, 이에 대해 《난중일기》에서는 종 강막지의 소금 창고에 "숨어서 울었다."고 나와 있다. 이분의 《이충무공행록(李忠武公行錄)》에 보면 공이 이로 인해 정신이 쇠약해졌다라고 하는데, 이순신이 이리도 슬퍼했던 이유는, 물론 자식을 잃은 부모로서의 슬픔도 있었겠지만 이면이 이순신 본인을 가장 많이 닮아서 유독 귀여워하던 자식이라는 점 때문이기도 했다.

셋째 아들 이면에 대해서는 후에 야사가 하나 전해 내려오는데, 죽은 면이 꿈 속에 다시 나타나 울며 "소자를 죽인 자가 근처에 있나이다."하고 사라지니 이순신이 꿈에서 깨서는 이상히 여겨 한참을 생각하다가 문득 아산에서 전투를 벌였던 포로들을 끌어오게 했다. 그리고 심문을 하는데 과연 그 중에 면을 죽인 자가 있어 즉시 그를 베어버렸다고 한다.

그럼에도 공사 구분은 상당히 엄격해서 아무리 상관이나 친인척이라도 예외가 없었다. 35세에 종8품 훈련원 봉사 시절에는 정5품 병조 정랑 서익이 원칙에 어긋나는 인사를 지시하자 칼같이 거절했다가 이듬해 종4품 수군 만호로 재직 중, 병조 정랑이었던 서익이 군기 경차관으로 와서 감찰로 트집을 잡아 파직되기도 했다. 같은 덕수 이씨였던 율곡 이이[133]가 이순신이 초급 군관 시절 한 번 만나보고 싶어했는데, 당시 이율곡은 지금의 국방부 장관에 해당하는 병조판서로 지낼 무렵이었다. 당시 이런 장관급이 호의를 보인다면 출세길 열렸다며 당장 튀어가고 현대에도 이런 고위 인사를 등에 업고 각종 청탁이나 비리를 저지르는 경우가 비일비재한데 이순신은 "(율곡께서) 병조 판서로 있으신 동안은 인사권이 있으시니, 저는 만날 수 없습니다." 라며 딱 잘라 거절했다. 물론 그 외에도 크고 작은 '로비' 권고에도 절대 흔들리지 않았는데 병조 판서 김귀영이 자신의 딸을 첩으로 주고 싶어했으나 거절하기도 했다. 이는 자신의 친인척도 마찬가지여서 장남인 이회와 조카 이분, 이완은 전쟁 내내 별다른 무관 관직조차 없이 일개 의병 신분으로 참전했다. 조선 시대에는 부정부패를 막기 위해서 친인척끼리는 같은 임지에서 관직을 하지 못하도록 규정하는 상피제가 있었는데 이를 충실하게 지킨 것. 이러니까 부하들에게 엄격하게 해도 다들 끽소리도 못하지. 조카 이완의 경우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야 무과에 급제하고 본격적으로 무관의 길을 걸었으며, 후에 정묘호란이 발생하자 의주성에서 후금군을 상대로 분전하다가 전사했다. 좌선조 우인조의 강력한 피해자이기도 하다. 선조의 병크로 일어난 임진왜란과 인조의 병크로 일어난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으로 아들 셋과 조카를 잃었다. 그의 아들인 이면은 임진왜란 때 전사했고 그의 서자인 이분과 이신은 이괄의 난에서, 조카 이완은 정묘호란에서 적과 싸우다 모두 전사했다.

11. 후손[편집]

5대손 이봉상(李鳳祥, 1676년 ~ 1728년)은 워낙 무능해서[134] 이인좌의 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지만 반란군에게 합류하기를 거부하고 피살되었는데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바로 "너는 충무공 집안에 충의가 서로 전해져 오고 있음을 듣지 못 했느냐? 왜 빨리 나를 죽이지 않느냐?" 였다. 이를 보아 충무공의 후예라는 자부심은 상당했던 모양이다. 결국 이 점을 높이 사 사후에 충민공(忠愍公)[135]으로 추존되고 조상인 이순신과 함께 현충사에도 배향되었다.

이외에도 정조 시기에는 이인수, 이승권 등이 있었다고 하며 근대에 들어오면 충무공의 후손답게 종가에서 독립운동가가 3대에 걸쳐 나왔다. 각각 12, 13, 14대 종손인 이세영, 이종옥, 이응렬 열사가 바로 그 분들이다.관련 기사. 현대에는 방송인 이종환, 배우 이미숙이 있다.

12. 인격[편집]

어릴 적부터 이어진 류성룡과의 우정이 유명하며[136] 그 탓에 정치적으로는 애초에 어디에도 쏠리지 않은 중립이었음에도, 동인, 그 중에서도 남인 계열로 여겨졌다. 단, 남인 계열로 여겨지기 시작한 건, 전라 좌수사가 되고 임진왜란 때의 전투로 주목받은 이후이다.

그가 남긴 기록이나 여러 문헌에 의하면 굉장히 깐깐한 인물이었으리라 생각된다. 또한 《충무공유사》의 기록을 해석한 결과, 원균을 가리켜 원흉(元兇)이라 부르며 싫어한 것이 밝혀져 충무공과 원균의 사이가 얼마나 나빴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난중일기를 보면 원균의 행패가 그나마 점잖으면 원균의 자인 평중을 붙여 "원평중", 또는 "원수사"라고 불렀지만, 행동이 도가 지나치면 가차없이 원흉이라 언급한다. 원균 역시 이순신이 지나칠 정도로 융통성 없다고 까대며 싫어했다. 결과적으로 보면 이순신다운 현안이였다.

小有違令(소유위령) 卽當軍律(즉당군율)
조금이라도 군령을 어긴다면 즉각 군법으로 다스리겠다!


명량 해전을 앞두고.


부하들에게 굉장히 엄격한 상관이었다. 《난중일기》를 보면, "부하 ○○가 기강이 태만하므로 베었다, 곤장을 때렸다' 등으로 가득 차 있다(예를 들어 김완이나 황옥현 등). 특히 많이 처벌받았던 자들이 관할 지역의 아전들. 참고로 고려 시대 지방의 지배계층이었던 향리들은 조선 건국 후 중앙 집권화 과정에서 수령에게 무보수로 봉사, 보좌하는 아전으로 굴러 떨어졌고, 이에 살 길이 어려워진[137] 아전들은 중간에서 갖은 비리를 저질렀는데, 이는 조선 시대 내내 큰 사회 문제였다. 이순신의 처지에선 나라의 존망이 걸려 목숨을 걸고 싸우는 판에, 그들의 비리나 과실을 눈감아 줄 리 만무했을 것이다.

대표적으로 《난중일기》 기사에, 첫 출진인 옥포 해전 출진 하루 전에 군졸인 황옥현(黃玉玄)이 군영을 탈영해 도주하다 붙잡았는데, 이순신은 이 황옥현을 그대로 참수했다. 사실 군졸 뿐만 아니라 장수들도 많이 도주한 사례가 있어서,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군기를 잡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난중일기》에 소개된 또 다른 일화로는, 아전 한명이 소를 데리고 군량을 가지고 오던 중, 강가에서 밥을 먹다가 잠시 술을 반주로 걸쳐 먹었는데, 그 사이에 소가 멋대로 움직이다 강에 빠져 죽었고 소에 실었던 군량은 모두 못 쓰게 되었다. 그리고 그 아전은 관리 소홀의 책임으로 참형에 처해졌다.(!!) 이순신의 수군은 기본적으로 모든 군량을 쪄서 가지고 다녔기 때문에, 물을 먹은 쌀은 군량으로서 가치를 상실했다. 이 때 죽은 소는 그날 병사들 저녁 식사로 제공되었다. 조선 수군: 올레!!!

명량 해전이 발발하기 전에 이순신은 수군을 수습하러 다녔는데, 이 때 훔친 소를 끌고 가던 절도범들이 주변을 혼란에 빠뜨리려는 목적으로 왜적이 온다고 떠벌리고 다니자 이들의 목을 베었다. 이를 가지고 이순신의 유일한 실수라는 비판이 있지만, 칠천량의 수군이 궤멸해서 가장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중임에도 범죄를 숨기고 혼란을 유발하고자 백성에게 왜적이 쳐들어온다고 유언비어를 말하고 다녔다는 점에서, 해당 범죄자들을 곱게 대해줄 이유가 없다는 게 중론이다. 신립, 이일이 적이 온다고 보고한 군사, 백성을 죽인 것은 지휘관과 참모들에게만 보고한 것으로 백성들에게 혼란을 일으킬 이유가 없는데 지휘관이 보고자를 죽인 것이므로 비난받아야 하지만, 이순신의 경우는 엄연히 다른 일이다. 게다가 조선 시대에는 소 절도범은 중죄인으로, 당시의 소 한 마리의 가치는 오늘날의 집 한 채의 가치에 맞먹을 정도였다.[138] 이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농경 사회에서 소는 생산 수단 그 자체다. 오늘날로 치자면 전쟁 중이라 정신 없는 틈을 타 엄연한 전략 물자인 휘발유, 경유 등을 털어갔다는 수준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당장 조선 시대에는 임금조차 우유를 타락죽에 약간 넣는 정도로만 먹을 수 있던 수준이였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세종대왕만 해도 우유를 좋아해서 우유를 생산하는 우유소를 설치했는데, 신하들의 상소로 폐지해야 할 정도였다.

불시에 병영을 순시해 무장과 병력 상태를 점검하는 일이 잦았는데, 무기에 녹이라도 슬어있으면 기본이 곤장 80대였다. 다만 곤장을 맞고 죽은 경우는 없고, 휘하 병력들이 평시에 잘 관리하면서 할 거 다 한 후에 시간이 남아 놀고 있는 모습을 보면 오히려 상을 주기도 하는 등 신상필벌을 엄격하게 적용한, 그야말로 완벽한 원리•원칙주의자의 모습이다.

또한 완벽주의자로 가차 없이 백성들을 징집해 수군으로 훈련시켰으며, 전함 건조 등의 일도 철저하게 했다. 당시 수군은 칠반천역(七般賤役) 중 하나로 여겨졌는데, 한번 입대하면 빠져나오기도 힘든데다 후손에게도 피해가 미치기에 탈영하는 사람이 많았고, 그로 인해 탈영자의 친족을 수군으로 강제 징발하는 법도 있었다. 그 법이 너무하다 하여 이 법을 폐지하자는 주장도 있었으나, 이순신은 장계를 2차례나 올려 그 일을 반대했다.[139] 그런데 백성들 처지에서 보면 육군보다는 믿음직하고 부유한 충무공 휘하의 수군이 복무하기 더 편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힘들어도 굶을 일은 없었다. 이순신은 섬에 둔전을 둬서 군량 확보에 신경을 써왔기 때문이다. 정유재란 이전에 해로 통행첩을 만들어 백성들에게 통행을 허가하는 대가로 쌀을 걷었는데, 며칠 안 가서 쌀 수천 석이 쌓였다. 이로써 군량 확보, 간첩선 방지, 백성들의 자유로운 통행이 보장되었다.

이외에도 철저한 엄벌주의자로, 수많은 부하들에게 형벌을 집행해서 어떻게든 수군에서 벗어나려 용쓰던 수졸들은 그를 무척 두려워했다. 그러나 최고 지휘관으로서 군대의 규율을 잡는 것은 원래부터 당연한 일이었고, 탈영, 물자 횡령, 적전(敵前) 도주는 현대에서도 최대 사형까지 당할 수 있는 중죄이다.[140]

때문에 후대의 역덕후 / 밀덕후들은 이렇게 엄정한 이순신의 군기 확립을 두고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사망 원인 2위 = 이순신"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1위는 전염병)[141]

하지만 상벌에는 항상 공정했으며, 백성들과 병사들의 식량 공급과 생계, 부정부패의 절대 엄금 등 민생에도 진심으로 최대한 신경 쓰는 등, 장군이자 목민관으로서도 병사들을 포함한 백성들을 진심으로 돌보고 보살펴 주었기에, 덕장(德將)의 면모도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이순신이 정읍 현감으로 일할 때 인근 태인현의 현감이 공석이라 태인 현감까지 겸임하게 된다. 그간 현감이 없어서 밀렸던 일들을 이순신 장군이 바로 그 자리에서 신속하고 공명정대하게 처리하는 모습을 보고 태인현의 백성들이 현감으로 임명해달라고 청할 정도로 사무 능력은 물론이고 목민관으로서도 훌륭했던 점을 알 수 있다.

이순신의 승첩 장계에서는 계급을 막론하고 일반 병졸이나 승려, 심지어는 노비까지도 가리지 않고 일일이 소속과 계급, 이름을 빼먹지 않고 적어 전공을 기록하고 있으며, 사망자 역시 신분을 가리지 않고 장계에 이름을 올려 적절한 보상을 받도록 해주었다. 따라서 백성과 병사들은 이순신을 매우 두려워하면서도 진심으로 존경하며 반기를 들 생각을 품지 않았다. 그리고 많은 문건에서 이순신이 벌하거나 벌하려 했던 죄인들이 한 행동들은 군기 위반, 탈영, 군용 물자 유용 및 횡령, 군무 이탈이나 군무 회피 알선, 유언비어 유포 등 현대 기준으로 봐도 전시엔 사형이나 중형을 피하기 힘든 중범죄였다. 정상적인 원리 원칙을 집행하는 이순신의 처분이었기에 엄격하지만 가혹하다 할 정도는 아니었다.[142] 애당초 가혹하기만 했다면, 수많은 백성들이 이순신의 통제영으로 피난 오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통제영 자체가 일본 수군과 싸우기 위한 전진 기지인만큼 전쟁터와 가장 가까운데도 말이다.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이 조선 수군을 완전히 전멸하게 만들고 백성들도 대부분 비참하게 죽어가게 된 상황에서, 이순신이 돌아오자 백성들은 울며 절하고 진심으로 기뻐했다고 한다. 이순신이 돌아오자 "원균의 살점을 강제로 뜯어서라도 먹고 싶다"고 하는 등 원균을 철저하게 증오하며, "장군께서 오셨으니 우리는 살았다"는 식으로 이순신의 귀환을 진심으로 반겼다.(《난중일기》 1597년 8월 6일)

이러한 모습을 보여서 존경할 만 하지만, 상관으로 모시기엔 힘든 인물이라고 평을 하기도 한다.# 능력이 엄친아급이니 보통 사람은 절대 따라해선 안 되는 인간의 표본이라고 평하는 사람도 있다. #

이런 만큼 사람을 평가하는 안목도 대단히 엄격했다. 원균은 말할 것도 없고, 난중일기를 보면 자신이 만나거나 문서를 통해 알게 된 사람에 대한 장단점을 매우 상세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 만큼 자기 자신에 대한 평가는 더더욱 엄격했다.

이렇게 사소한 것까지 철저히 신경 쓰는 섬세한 성격 탓인지 굉장히 자주 아팠던 것으로 추정된다. 《난중일기》에 "아파서 배에서 '웅크리고(縮) 있었다"거나 "밤새 토사곽란으로 고생했다", "혼절해 있었다" 등의 서술이 많다. 실제로 《난중일기》 중에 "아팠다"는 기록만 찾아도 수십 차례가 넘는다. 심지어 하루에 10여 회 이상을 연거푸 토했다는 일기도 있을 지경. 이는 정유년 삭직 당시 받은 고문의 후유증, 전쟁 때문에 제대로 된 식사와 휴식이나 치료가 없었던 점, 아래에 나오는 것처럼 과로와 스트레스를 잦은 음주로 해결한 점 등의 영향으로 추측된다. 다른 병세로는 특히 식은땀이 계속 흐른다는 내용이 매우 많다. 현대의 학자들은 만성 위염 또는 위궤양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또한 사람을 다루는 재주도 상당해서, 명량 해전 이후 명나라 도독첨사였던 진린하고 연합을 할 때도, 상대가 영의정인 류성룡이 최악의 연합이라고 평가할 정도로 성절이 포악하고 조선인 때리기 주저 없는 그 진린이었는데도, 이순신하고 같이 여러 전투를 겪으면서 '이대인(李大人)'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그 진린도 이순신이랑은 사이좋게 지냈는데, 도대체 원균은 얼마나 막장인 거냐!! 이순신이 수급을 양보해 공을 돌리기도 하고 명 수군의 행패를 이유로 병력 철수를 하려 하는 등 완급 조절을 통해 진린을 잘 주물렀다. 이러한 점이 유명 수군 도독이 부여된 여러 정황 중 하나가 아닌가란 말도 있다. 그러나 명량대첩을 다루는 기록과 기타 여러 군데에서 보이는 이순신의 행적은 그가 상대방을 대할 때 지위의 고하를 떠나 사람 대 사람으로서 예의를 해 왔다는 담백한 증거이다. 태생적으로 완벽하지 않은 사람이란 생명체들이 서로 어울려 살아가는 사회의 디딤돌이라 할 수 있는 사람 간의 예의를 무시한 결과가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빈번히 보이는 인적 자원 관리 문제라는 씁쓸한 지적을, 400여 년 전의 성웅이 몸소 그 역량을 보여 방증한 셈이다.

이순신의 취미라고 할 만한 것은 활쏘기와 음주. 의외로 《난중일기》에서 자신에게 찾아오면 술을 먹여 보냈다거나, 밤새 같이 술을 마셨다는 기록이 정말로 많이 나온다. 부하나 동료 아무개가 술 먹다 뻗어서 인사불성이 됐다는 기록도 많은 것을 보니 음주 스타일만큼은 두주불사이다. 그리고 조선 시대판 인생게임이라 할 수 있는 승경도 놀이를 즐겼다. 《난중일기》를 보면 의외로 부하 장수들과 함께 승경도 놀이를 즐기는 기록도 제법 자주 나타난다. 현대로 치면 4성 장군이 부하 장수들과 보드 게임을 돌렸다는건데, 이순신이 마냥 무섭고 엄한 사람이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143] 또 전란 중이지만 추석이 되면 여러 장수들과 모여 술과 반찬을 같이 나눠먹기도 했다. 이 역시 이순신이 풀어줄 땐 풀어주는 유연성을 갖춘 인물이였음을 보여주는 일화.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당대의 무인답게 활쏘기를 즐겼다. 《난중일기》에는 대개 15발 중 10발 ~ 11발 정도 명중했다고 한다. 《퇴마록》의 저자 이우혁은 후속작 《왜란종결자》에서 이 기록을 근거로, 이순신 개인의 무예는 그렇게까지 뛰어나진 않았다고 보았다. 하지만 장수로서 모자라다 싶을 정도로 못쏜다고 보기는 어려운데, 그에 대해서는 이러한 근거를 통해 이해할 수 있다. 정리해보자면, "장수들이 모여서 대결을 해보면, 대충 40발 초반이 꼴찌를 기록했는데 이순신 장군께서 (특별히 잘 맞히셔서) 기록해 놓으신 것이 43발이었다." 잘 쐈다 못쐈다는 게 보통 10여 발까지 차이는 나지 않고, 당시의 평균 수명과 나이를 생각할 때, 엄청나게 못쏘는 수준까지는 아니었고, 장수들 평균에서 조금 떨어지는 수준으로 보인다.[144] 한때 32살이라는 나이에 무과 시험에 합격을 했고, 합격 성적 역시 중간 성적으로 합격했기 때문에 무예 실력은 뛰어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당장 이우혁이 쓴 왜란종결자에서도 이러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이 합격한 식년 무과는 별시가 아닌 4년에 1번 열리는 정시로 총 합격 인원은 29명인데, 이는 문관을 뽑는 과거 시험보다 합격자 수가 더 적다. 게다가 이순신 장군이 응시한 식년 무과의 합격자 평균 연령은 34세로 당시 32세였던 충무공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은 17명이며, 최연소 합격자는 23세, 최고령 합격자는 52세였다. 이를 볼 때 이순신 장군의 합격 나이는 결코 늦은 것이 아니며 합격 성적 역시 29명 가운데 병과 4등으로 12등을 했다. 여기서 유의할 점은 합격자 대부분이 현직 군관들 즉, 직업 군인들이었으며 이순신 장군과 같은 일반 보인 출신은 단 4명에 불과했다. 이미 정식 무과 시험에 현역 군인들과 같이 합격했다는 것 자체부터가 뛰어난 무예를 지녔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엄청난 명궁의 실력은 아니지만 장수로서 갖춰야 할 기본 실력으로는 충분한 수준이라는 뜻.

한편 부정적인 요소는 아니지만 '여색'(女色)에 대한 논란이 있다. 우선 기록상 이순신이 혼전 연애를 했다는 증거는 없고, 정실 부인 및 첩들에게도 충실한 남편이었다. 난중일기를 보면 부하나 친지의 여성 가족들이 와서 잤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난중일기를 잘못 읽은 사람들은 이를 보고 당황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성관계를 했다는 내용은 당연히 아니고 이순신을 찾아 왔다가 그냥 하룻밤 머물고 갔다는 내용이다. 말 그대로 '숙박'을 의미한다. 그 외엔 특별한 날 부하들과 연회에 참석하거나 조정 인사들을 맞이하는 행사에 기생들이 동행했다거나, '여진'이라는 하녀와 성관계를 했다는 내용이 몇 번 나온다. 그런데 이것도 오역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리고 오역이 아니라 사실이라고 해도, 신분제 사회인 당시의 시대 상황을 감안하면 이 정도의 성생활은 용납이 가능한 자연스러운 수준이란 평가가 많다. 무엇보다 이순신이 여색으로 일을 망치거나 비난을 당했다는 기록은 하나도 없다. 그 반면 원균은 삼도 수군 통제사를 맡았을 때도 기생 때문에 대차게 비난받았다. 심지어 선조와 원균이 이순신을 억지로 탄핵할 때도 여색과 관련된 부분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역사적 사실과는 별개로 성웅도 여색과 무관하지 않았다는 점이 상당히 매력적인 소재로 작용하는지, 현대의 이순신과 임진왜란을 소재로 한 창작물 중에는 이런 식으로 이순신의 여자 관계를 창작해서 넣은 작품들이 제법 있다. 김훈칼의 노래에서도 '여진'이 중요한 소재로 등장한다.

아부를 하는 성격이 아니고 우직한 편이기 때문에 군인으로서 안 당해도 될 불이익을 꽤 당했다. 녹둔도 시절에는 군공을 세우고도 되려 처벌을 받았고 칠천량 해전에 나가지 않으려고 했다가 이순신을 경계하여 싫어한 선조에 의해 파직당하고 고문당하며 백의종군까지 했다. 그러나 선조는 원균이 조선 수군을 싸그리 말아먹고 나서야 이순신이 옳았음을 깨닫고 이순신을 재차 통제사에 임명하는 등, 이순신은 군인으로서 우여곡절이 많았다. 이순신은 윗사람에게 손을 비비며 입신양명하려는 스타일이 아니었으며, 매사에 현재 일어난 상황 그대로 판단하고 설명하는 성격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이순신보다 품계가 높은 윗사람, 특히 국왕 선조의 심기를 상하게 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한마디로 이순신 장군은 완벽주의적인 비관파였다. 완벽주의는 이루어질 수 없기에 비관적일 수 밖에 없다. 장군은 그래서 철저히 준비했고 군율을 엄격히 적용했다. 그래서 임진왜란 당시의 어떠한 상황에서도 장군은 이를 극복하고 전투에서는 항상 승리로 이끌었다. 대단히 현실적이지만 백성들에 대한 사랑이 있었다. 아마 본인이 어머님에 대한 효심이 가득했던 걸로 보아 가족 관계가 대단히 돈독했던 것 같다. 그래서 백성들에 대해서도 어버이같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던 걸로 보인다. 장군의 이러한 성향은 정치적으로는 좋지 않은 결과를 나타내서 원균의 재부상을 이끌게 되는 결과를 가져와 안타까울 뿐이다.[145]

장군은 의지가 강력해서 어머님과 자식의 죽음과 본인의 시련에도 불구하고 조선 수군을 통솔해서 최후까지 원수가 곱게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했다. 인간이 극복하기 어려운 모든 시련들을 극복하고 정의를 실현한 장군의 의지는 후세의 사람들에게 언제나 감동을 준다.

13. 권율과의 관계[편집]

어렸을 때 부터 친근하게 지낸 류성룡을 통해 권율과 처음 만났으며 이후에도 계속 서신을 주고 받았다고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이순신이 빌려준 함포는 권율이 행주산성에서 왜군을 격파하는 큰 도움이 되었고, 후에 권율은 이순신이 참수당할 위기에 처했을 때 정탁, 이원익과 함께 이순신을 구해내고 행정상 자신의 밑에 두어 정치척 공격으로부터 보호했다.

또한 권율의 사위 이항복 (후에 93대, 95대 영의정)은 최측근인 무관 안위를 보내 이순신을 돕게 했는데, 안위는 이순신의 오른팔격의 인물이 되어 장군께 욕은 좀 먹긴 하지만 명량 해전에 큰 공을 기여한다.

하지만 난중일기를 보면 1594년 - 1595년 (선조 27년 - 28년)에는 공무 및 인원 차출 등의 여러 정황에 대해 충돌하여 잠시 권율에 불만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재밌게도 1595년 8월 17일에 적은 일기 (일미일기)를 보면 권율이 원균을 질책하자 원균이 고개도 들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우스워했다고 적혀있다. 나중에 권율은 원균을 두들겨 팬다.[146]

행정 관계로는 조선군 내에서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 권율은 도원수였다. 삼도 수군 통제사는 오늘날의 해군 참모 총장에 상응하는 직위이고 도원수는 합동 참모 의장에 상응하는 직위이다.

14. 평가[편집]

후대의 평가와 각국의 평가를 모아놓은 문서. 일본 웹에서의 왜곡도 포함되어 있다. 문서 참조.

15. 그 밖의 이야깃거리[편집]

  • 얄궂게도 이런 먼치킨이 등장하여 이순신의 본관인 덕수 이씨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 무반 가문으로 손꼽히게 된다. 야 너희 조상님 누구냐 충무공이신데요 어 너 무반. 무과 급제는 267명이나 하는데 문관 급제는 단 1명에 불과할 정도다. 중요한 거는 원래 충무공 가문은 문반 가문이라는 것.[147] 그러니까 충무공의 후예라는 이유로 문반이 아닌 무반을 강요당한 정황이 보인다.[148] 그리고 정작 실록에 기록될 때는 충무공에 비해서 뭐뭐가 부족하다 식으로 기술되었다고. 조상을 잘 만난 건지, 잘못 만난 건지...

  • 동시기 같은 덕수 이씨 인물로 율곡 이이이광이 있었다. 이이는 이순신을 만나보고 싶다고 했으나, 이순신이 이이가 인사권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만나지 않겠다며 거절했다. 이광은 이순신을 발탁해 전라도 조방장, 선전관으로 삼았다. 다만 이전에 이광이 탄원서를 제출해 백의종군에서 벗어나게 했다는 기술이 있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이순신은 녹둔도 전투의 결과로 "다시 공을 세워 속죄하라"는 선조의 뜻에 의해 백의종군 처분을 받은 뒤, 3개월 만에 여진족 토벌전에 종군해 우두머리를 생포하고 공을 세워 사면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의 존재로 이순신이 역적의 가문에서 태어났다는 루머를 반박할 수 있다. 이순신의 덕수 이씨 가문이 정말로 역적의 가문이었다면 (이들과의 관계를 논외로 하더라도) 같은 가문인 이이와 이광도 역적의 가문에서 태어났다는 논리가 된다(...). 그야말로 이순신에 대한 쓸데없는 루머가 이순신 본인은 물론이고 여러 사람들에게까지 피해를 끼치는 셈이다.

  • 이순신의 필체가 담긴 친필 편지 원본이 발견됐다.관련 기사

  • 이순신에 대한 기록이 남은 문헌은 《난중일기(亂中日記)》, 《충무공전서(忠武公全書)》, 《난중잡록(亂中雜錄)》, 《충무공행록(忠武公行錄)》, 《통제사이충무공유사(統制使李忠武公遺事)》, 《충무공행장(忠武公行狀)》, 《충무공시장(忠武公諡狀)》, 《명량대첩비(鳴梁大捷碑)》 등을 비롯한 수많은 문헌이 있다.

  • 이순신 장군의 13대 종손이 독립 운동가로 활동하던 신문 기사가 발견되었다. #

  • 2013년에 《난중일기》에서 《삼국지연의》를 인용한 부분이 발견되었다.## 또한 《청성잡기(靑城雜記)》에서는 "충무공에게는 세상을 피해 은거한 도우(道友, 도 닦는 벗)가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몰랐지만 충무공만은 그를 알고 있어서, 큰 일이 있을 때면 매번 그와 상의하였다. 왜구가 침입하자 공은 사자를 통해 편지를 전하여 나랏일을 함께 도모하자고 부탁했다. 그는 늙은 부모가 있어 갈 수 없으니, 다만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를 공에게 보내면서, “이 책을 숙독하면 일을 충분히 이룰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공은 여기에서 효험을 얻은 것이 많았다."라는 글귀가 발견되었다.

  • 이순신 장군과 조선 수군의 평소 식단이 재현된 바가 있다.#,#,한국어 위키 백과 이순신 밥상 문서

    • 평소 좋아하던 식단 : 장국밥[149], 어육각색간랍[150], 멸치젓, 장김치

    • 백의종군 때 식단 : 연포탕[151], 과동침채, 고사리나물

    • 아플때 식단 : 앱쌀죽밥, 수포탕[152], 더덕 좌반, 과동침채(동치미)

    • 수군에 있을때 평상시 식단 : 쌀밥, 홍합 미역국, 봉총찜[153], 산갓침채

    • 수군 훈련시 식단 : 보리밥, 와각탕[154], 과동과, 청어 구이

    • 전투시 식단 : 통영 비빔밥, 산나물밥, 주먹밥

    • 수군 전투 승리 후 식단 : 석화죽(굴죽), 숭어전, 노루 고기 포, 설하멱[155], 술, 참외, 약과.

15.1. 이순신 장검(長劍)에 얽힌 이야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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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검 - 보물 제326호

이순신의 검은 현충사에 소장되어 있다. 약 2m에 가까운 크고 아름다운 길이 때문에 오래 전부터 이순신의 키는 2m 50cm(…) 내외가 될 것이라는 말이 퍼지기도 했다. 그러나 2009년에 동래성에서 출토된 조선 갑옷을 통한 추정과 이사벨라 비숍 여사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조선인의 평균적인 키가 164라는 결론이 나와서 실제로 키가 그렇게까지 컸을 가능성은 그다지 크지 않다. 하지만 키가 컸다는 이야기와 6척[156] 이라는 기록으로 보아 당시로서는 장신이었던 걸로 보인다. 더욱이 이순신 장군의 장검은 쌍수도로, 이 검의 태생은 척계광에 의해 중국에서 도입된 칼로, 그 뿌리는 왜구들이 쓰던 노다치이다. 조선인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작았다는 일본인들도 잘만 쓰던 칼인지라 이 검을 사용했다고 해서 거인일 리는 없다. 물론 이 장검은 실전용 검이 아닌 단순히 장식용 검이였다. 추가로 검날의 홈에 칠해진 붉은색이 이순신 사후 누군가에 의해 칠해진 페인트라는게 밝혀져 대한민국의 고고학계가 발칵 뒤집혔다. 지금은 복원 작업을 통해 페인트를 지웠지만, 이미 대중들에겐 충무공 환도는 붉은색이라고 각인되었으니 늦어도 한참 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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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에 촬영된 쌍용검.


그리고 이순신이 실전에서 사용한 칼인 쌍룡검의 행방은 며느리도 모른다고 하며, 근 100년이 되었다.

현충사에 소장된 이순신의 장검을 실전에서 사용한 검으로 착각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는데, 조선은 화약 병기나 원거리 병기에는 많은 투자가 이뤄진 반면(세종, 문종 참조), 도검 문화가 덜 발달한 국가다. 조선의 병과상 검을 사용하는 병과는 팽배수, 도수(조선 전기)나 등패수(조선 후기), 조총병(조총 + 쌍수도 / 장도 또는 요도)로 한정되어있었고,[157] 전반적으로 보병은 조총이 다른 무기들을 몰아내기 전까지는 위의 근접전 전문 병종들을 제외하면 장창(長槍)과 당파(钂鈀)로 무장하거나[158] 원거리에서 처리하는 방식을 선호했고, 기병에서도 월도(月刀) 같은 리치가 긴 도가 아니면 가장 선호되는 무장은 마편곤(馬鞭棍) 같은 기병용 타격 병기였다. 애초에 도검 자체에 대한 대우나 일반적인 인식도 《무예도보통지》에서 나오듯이 썩 좋지 않다. 조선의 도검 문화에 대해 쉽게 알 수 있는 것이 성호 이익의 《성호사설(星湖僿說)》인데, 성호사설에서 이익은, "우리 나라 병사들은 일본도를 얻으면 경사면을 갈아내는데, 이 경사면이 있어야 칼의 날이 손상당해도 쉽게 갈아서 쓸 수 있지만, 그걸 모르고 칼날의 경사면을 갈아내 버린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외에도 조선 초기 《문종실록》에서도, 병사들이 임의로 칼날을 분질러 길이를 줄이고, 불편하다는 이유로 검신을 아예 없애버리는 상황도 벌어져, 문종이 도검의 길이를 법적으로 정하는 사태가 벌어졌다는 점을 고려해야한다. 즉 이순신 장군의 장검은 그냥 장식용 검이다.

또한 이순신 본인부터가 도검에 대한 인식이 마뜩찮다. 일반적으로 왜검을 손에 넣으면 소유하거나 진상하는데, 이순신은 죄다 녹여서 물자로 전환시켰다. 이순신 본인은 검법이 맞지 않다고 했으나, 황진이 통신사를 수행하고 오면서 왜검을 사왔던 점, 조선이든 명이든 쌍수도를 적극 장려하려고 한 적이 있었던 점을 고려하면 어디까지나 전시 물자 확보를 위한 핑계였다고 볼 수밖에 없다. 또한 승산이 충분함에도 근접전에 들어가면 순식간에 패주하는 일이 많았던, 다시 말해 근접전 자체가 익숙지 않았던 조선군의 현황 속에서 일본도는 가지고 있어봤자 제대로 써먹기 힘들었다. 다만 이순신의 함대 내에 항왜(降倭) 출신 병사가 존재했음이 확인되므로, 이들은 자신의 일본도를 가지고 싸웠을 것이다.

현충사에 전시된 검에 대해서도, 왕권을 상징하는 태아검(太阿劍)처럼 장식용 및 군기 확립을 위한 장식이라고 설명되어 있으므로 요주의. 또한 《난중일기》에 이순신이 새로 검을 만든 것이 편하게 쓰였다는 말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는데, 이 장검은 태구련 등 대장장이들이 자신들이 대장장이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만든 장식용 검으로, 갑오년에 만든 물건이고, 이순신이 새로 만든 검은 그 뒤인 정유년 이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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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현충사 장검 날 옆면 홈 안에 칠해진 빨간 줄은 만들 때부터 있던 게 아니라, 누군가가 공업용 페인트로 칠을 해놓은 것이다. 언제 누가 무슨 이유로 칠했는지는 밝혀진 게 없으며, 페인트칠이란 사실이 2014년 8월 하순에서야 밝혀지면서 문화재청에서 이 페인트칠을 벗기기로 결정했다. 현재는 벗겨진 상태라고 한다.

15.2. 대중문화에서[편집]

15.3. 화폐의 인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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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정권이 퇴출되자 500원권의 인물로 선정되었다. 100원이 지폐이던 시절에는 500원권 지폐의 인물로, 100원이 동전이 된 현재에는 100원 동전에 그의 초상화가 새겨져 있다.
정주영이 조선소 건설 차관 도입을 위해 영국에 가서 이 지폐를 보여주며 '우리 한국은 세계 최초로 철갑선을 만든 민족'이라며 한국의 조선술을 설명했다는 이야기가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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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원 동전에도 삽입되있는데 구 100원 동전에 있는 이순신 장군은 구 500원권에 삽입된 이순신과 오묘하게 거의 비슷하다.

15.4. 이순신체[편집]

충무공의 사당인 현충사가 있는 충청남도 아산시에서 만들어 배포한 서체. 난중일기의 서체를 분석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서체의 유래가 유래라 그런지 무엇을 쓰든 비장함이 넘쳐흐르는 서체로, 트위터 등지에서 많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공개 당시의 관련 기사 다운로드 사이트

종류로는 이순신체와 이순신 돋움체가 있으며 이순신체는 이순신Bold, 이순신Regular이 있고, 이순신 돋움체는 Bold, 이순신 돋움체Medium, 이순신 돋움체Light가 있다.

한컴 오피스 한글에서 이순신Bold가 '댛' 글자가 보이지 않는 오류가 있는데, '댛'은 완성형 한글 2350자 내에 들어가지 않는 문자이므로 이는 오류가 아니라 애초에 만들어지지 않은 것이다.

16. 현충사 박정희 현판 논란[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현충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모신 현충사의 현판은 본래 사당이 지어질 당시 숙종 임금이 내린 현판을 쓰고 있었다. 그런데 1967년, 박정희는 그것을 떼버리고, 본인이 쓴 현판을 달아놓았으며, 본래의 현판은 구본전에 달아놔버렸다. 박정희가 쓴 해당 현판을 아직도 현충사에 걸어놓은 것이 논란이 되고 있다.

16.1. 이순신 관련 문화재 소실[편집]

2015년 8월에 이순신과 관련된 고서 중 하나가 문제가 되고 있는데, 해당 고서가 소실된 장계별책인지 다른 책인지 논란이 되고 있다.#

장계별책을 도둑질한 범인과 같은 교회에 다니는 지인인 덕수 이씨 15대 종부[159]인 최순선은 이미 2009년에 사기 혐의로 구속된 경력이 있고, 같은 해에 사채업자 전씨에게 현충사 소장 유물을 팔아넘기려다 사채업자가 어이가 없어 거부해버리는 사상 초유의 사태를 벌인 전력이 있고[160], 양자와 유산 문제로 법정 다툼을 벌이는 여러모로 유명하다. 그 외에도 한때 충무공 고택 터가 경매에 나가기도 했지만 다행히 후손들이 되찾았다. 일이 이렇게 된 이유는 종부 최순선이 충무공의 유물과 종가 재산을 담보로 사업을 벌였기 때문이다.

17. 관련 단체[편집]

  • 충무공이순신기념사업회

  • 한국서화교육협회 성웅이순신연구회

  • 여수지구이충무공유적영구보존회

  • 순천지구이충무공유적영구보존회

18. 관련 문서[편집]

18.1. 인물[편집]

18.2. 같이 보기[편집]

[1] 왼쪽부터 흔히 국사 교과서나 한국사 관련 서적들에서 충무공 이순신의 대표적인 초상화로 제일 많이 나오는 관복구군복갑주를 입은 초상화 모습이다. 물론 상상화이니, 실제 얼굴이라 생각하지 말자. 근데 갑주 영정은 고증이 틀린 영정이다.....[2] 엄밀히 말해서 그레고리 력은 교황 그레고리오 13세가 1582년에 개력했으므로 이순신이 태어났을 때에는 아직 서양에서도 그레고리우스력이 없었다. 참고할 기사는 #. 당시 유럽에서 사용하던 율리우스력으로는 4월 28일.[3] 여담으로, 이순신 장군과 똑같이 충무 시호를 받은 중국의 제갈량 역시 (세는나이) 54세의 나이에 사망한다.[4] <서경書經>에서 순 임금이 우 임금을 지목하며, "오직 너(汝)여야 (세상을) 화평(諧)케 하리라"(제왈무帝曰毋 유여해汝諧)고 말한 대목에서 추려 따왔다. 이 충무공의 휘가 "'순(舜)'임금 같은 성군을 모시는 신하(臣)"라는 점에서 이름자와 상보적이며, 이는 조선 시대에선 보편적인 작명법이었다. 또한, 이순신 장군의 행적으로 봐도 매우 알맞은 자라 할 만하다. 공의 어머니 변씨가 지어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참조[5] 시(諡)는 예법에 따라 통상 2자로 지었으며, 고전에서 추려 붙였다. 고전과 유교 경전에 따르지 않는 낱말은 제일 미시(美諡)로 꼽는 충(忠), 문(文), 무(武) 정도인데, 따라서 충무(忠武)라는 시호는 나라에 무예로서 큰 공훈을 세운 이에게 내리는 최고의 칭호다. 촉한제갈량, 남송악비, 공과 동시대인 조선김시민 등이 이 시호를 받은 대표 인물들이다.[6] 1931년 이윤재 작인 《성웅 이순신》이란 전기작품에서 최초로 이순신을 성웅(거룩한 영웅)으로 일컬었다.[7] 게다가 시호인 충무는 이순신 외에도 김시민과 같은 여러 장수들이 받은 시호이지만 오늘날 한국인들에게 충무공이라고 하면 바로 이순신 장군을 떠올릴 만큼 이순신장군 전용 시호가 되어 있다.[8] 김유신 문서에도 서술되어 있듯이, 김유신도 뛰어난 영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초월한 행적을 보여온 이순신과 비교하면 현실적인 영웅이라는 서술이 있을 정도이다. 그리고 김유신에 관한 유일한 기록인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은 삼국사기의 저자인 김부식이 열전을 쓰기 위해 참고할 삼국시대 당시의 기록이 부족했던 탓에 김유신의 후손이 쓴 김유신 행장록 원본 총 10권 중에서 내용을 추려서 옮긴 것이다. 그 때문에 실제 역사와 교차검증을 하게 되면 맞지 않는 경우도 발생한다. 김유신 열전에서는 김유신이 전투에 나갔다 하면 매번 승리를 거두고 돌아왔다고 묘사되지만, 실제 당시의 신라는 오히려 수도 서라벌까지 적국에 위협을 당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순신의 경우에는 비교적 근대의 일이고 조선왕조실록, 난중일기 같은 풍부한 조선 측 기록과 일본 측 기록들을 통해 교차검증이 된 것도 많아서 사실로 인정된다.[9] 좀 많이 뻔뻔한 것이 이일은 당시 북병사였는데, 이순신이 이전에 본인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나 거절했던 일이 들통나는 것이 두려워서 책임을 이순신과 이경록에게만 돌린 것이다.[10] 더구나 이순신은 식량, 병력 등을 중앙 정부에게서 단 한 번도 지원받지 않고 군대를 운용했으며, 오히려 전국이 털리는 바람에 교지를 쓰고 여러 필수적인 기록을 남길 종이마저 부족해진 중앙 정부에게 종이를 바치기도 했다. 한산도 일대에 둔전(屯田)을 만들어 식량을 자급자족했으며, 청어를 잡아 이를 군비로 활용하기도 했다. 당시 모든 이들이 기피하던 수군의 병력 유지를 위해 직접 발 벗고 뛰어다녀 강제 징집을 시전해 10,000명 이상의 병력을 중앙 정부의 지원 없이 유지했다. 이순신이 중앙 정부에 무언가를 요구했던 것은, 역병으로 병사들이 죽어나갈 때 의원을 보내달라는 것 한 번 뿐이었다. (반면 원균에게는 조정이 5천 명의 병력을 지원해주기까지 했다. 그러나 원균은 칠천량 해전에서 압도적인 우세에도 불구하고 참패하였다.) 즉, 이순신은 적들에게 포위된 상황에서 자급자족의 수단을 찾아 자체 보급을 했고, 그렇게 보급한 병력으로 왜를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두었다.[11] 한자는 '있을 유' 이지만, 국호 앞에 관용적으로 붙는 글자로 딱히 별다른 의미는 없다. 영어로 치면 'the' 정도에 해당한다. 또 꼭 중국만 쓰라는 법은 없어서 '有朝鮮' 이런 식으로 쓸 수 있다. 중국이 조선을 '소유'하고 있다는 소리가 아니다.[12]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정조 38권, 17년 7월 21일(임자) 첫 번째 기사. 명나라에서 도독 벼슬은 '정1품'이다. 명나라에서 친왕 급인 선조와 동급. 의전상으로는 황족 대우를 받는 선조보다 밀릴 수는 있어도 품계는 똑같다. 다만, 품계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는데, 도독직 수여 사실이 조선왕조실록. 그것도 열렬한 이순신의 팬덤으로 유명한 정조 시기에만 기록되지만, 정조 자신이 직접 쓴 일성록과 직접 주재했을 홍재전서와 특별히 신경 쓴 이충무공전서에 그 내용이 담겨있다. 그러나 정작 수여를 했던 명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명사(明史)와 명실록(明實錄)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고, 거기에 정조 때를 다룬 승정원일기에도 하나 없다. 충렬사에 소장된 도독인(印)의 글씨체도 다른 명나라 도독인의 글씨체와 전혀 달라 이 도독직 수여가 과연 사실인지는 여전히 논란 중이다. 동시에 압도적인 물증없이는 해결하기도 힘든 상황이다.[13] 추증받은 품계와 직위. 이순신에 대한 추증은 하도 여러 번 이루어져, 최종판이라 볼 수 있는 충무공 묘표를 따른다.[14] 선무공신은 임진왜란에서 공을 세운 신하들에게 내려졌는데, 그중 1등급이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이다. 한 등급이 낮아지면 두 글자씩 뺀다. 1등 공신을 받은 사람은 딱 세 명인데, 이순신, 권율, 그리고 원균이다. 심지어 선조는 조정 신료들이 탐탁지 않게 여김에도 불구하고 아득바득 우겨서 원균을 상기 등급에 봉한 반면, 이순신을 최고 등급 공신으로 봉하는 것에 대해서는 굉장히 껄끄러워 하는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 이미 공이 천하를 덮었고, 아무리 가리려 해도 가릴 수 없었기에 당연히 공신에 책봉되고 그것도 으뜸인 원훈으로 봉해진다. 공신 책봉 과정에서 선조가 보여준 모습은 이순신 장군에 대한 질투와 공포가 얼마나 막장까지 치달아 있었는지 잘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아이너리한건 이런 이순신을 살리고 천거에 응해서 낙하산 인사를 단행시킨게 선조 본인이었으니....[15] 정1품의 품계. 그것도 같은 정1품인 보국숭록대부보다 상위 품계이다.[16] 임진왜란 종전 직후에는 우의정, 그 후에 선무공신에 봉하며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영의정으로는 정조 때 가증. 이때 정조가 말하길, "충무공이 돌아가신 이래로 아직까지 영의정에 봉하지 않은 것은 잘못된 일이다." 과연 조선 시대 충무공 1등 팬이라고 할 만하다.[17] 영의정이 당연직으로 겸직하는 관직들이라 여기 같이 붙었다. 영의정이 겸직하는 관직 중에 세자시강원의 세자사(世子師)도 있지만 무관인지라 빠진 듯 하다. 같은 품계를 추증받은 권율은 문관 출신이라 그런지 세자사가 같이 추증되었다.[18] 이하는 전사 직전의 관직.[19] 과거 본 문단에는 이 行자를 행수법(行守法)에 따라 실제 받은 품계보다 낮은 직위에 임명될 경우에 붙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는데, 이는 사실과 조금 다르다. 증직이 되었을 경우 살아있을 때 지냈던 가장 높은 실제 관직 앞에 行자를 붙인다. 행수법에 따라 行자를 쓸 경우 이는 관계(官階)가 아니라 관직명 앞에 붙어야 한다. 즉 정헌대부 행삼도수군통제사의 식이다.[20] 정2품의 품계. 고려와 마찬가지로 조선의 문반 우대 / 우위를 보여준 예시로서 고위직을 문반이 장악하고 통제하기에 용이하고 군사 분야에서도 군 고위직에 문반들을 임명하는 것에 이상이 없게 하기 위한 장치. 무반도 병마 절도사가 되려면 종2품 가의대부 / 가선대부를 받아야만 한다. 무반 품계는 정3품 당상관인 절충장군이 최고이고, 그 이상으로 가려면 문반 테크를 탈 수밖에 없기 때문.[21] 이순신 장군이 정유년 파직되기 전 품계는 정2품 상계인 정헌대부였다. 그러나 이후 이순신 장군이 다시 복직될 때 품계는 정3품 절충장군인데 이는 선조가 "내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라며 겉으로는 사과를 하면서도, 한편으론 이순신 장군께 엿을 선사한 것이다. 오늘날 육군으로 치면 대장(진) 군사령관에게 반란죄 누명을 씌워 남영동 분실로 끌고가 물 고문하고, 이등병으로 강등시킨 뒤 상황이 급해지니깐 다시 군사령관으로 복직시키면서 계급은 투스타(...)로 준 격. 명량 해전의 기적 같은 대첩 이후에도 선조는 이순신 장군의 품계를 올려주는 것을 꺼렸다. 1년 전만 해도 정헌대부의 품계를 받은 분이었기 때문에 그냥 기존의 품계를 돌려주면 되지만 선조는 끝까지 버틴다. 결국 명나라 경리 양호나 군문 형개 등이 끈질기게 선조를 압박하며 이순신 장군의 벼슬을 올려주라고 조르자 그제서야 정헌대부의 품계를 돌려주는 제일의 찌질함을 선보인다.[22] 시호. 역대 임금이나 공신들에게 내리는 이름이다. 문반은 '文', 무반은 '忠'으로 시작하는 시호가 가장 격이 높다.[23] 실제로 대한민국의 해군참모총장은 대장 계급으로 장관급의 의전을 받는다.[24] 오늘날로 치면 사단장, 참모총장을 사관님, 장교님이라고 부르는 꼴이다.[25] 해당 검은 현재 현충사에 보관되어 있다.#[26] 원문: 임진년부터 5·6년간 적이 감히 호서호남으로 직공하지 못한 것은 수군이 그 길을 누르고 있어서입니다. 지금 신에게 아직 열두 척 전선이 있사오니(尙有十二 상유십이) 죽을 힘을 내어 막아 싸우면 이길 수 있습니다. 지금 만약 수군을 모두 폐한다면 이는 적들이 다행으로 여기는 바로서, 말미암아 호서를 거쳐 한강에 다다를 것이니 소신이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전선이 비록 적으나, 미천한 신이 아직 죽지 않았으니(微臣不死 미신불사) 적들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27] 죽을 힘을 다해 적을 막겠다는 필승의 신념과 함께, 수군을 폐하면 적이 즉시 서울까지 갈 수 있다고 하여 선조를 압박하고 있다.[28] 이순신 만화를 그리고 있는 미국인 만화가 온리 콤판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이순신의 명대사로 이걸 꼽았다. 정말 대단한 것은 이런 각오로 임한 명량 해전의 사망자가 매우 적었다는 것이다.사실상 전투 초반 내내 싸운 상선 한 척 사망자 포함 사상자 수가 5명이다. 그중 전사자는 이선지라는 이름의 격군(노잡이) 한 명. ㅎㄷㄷ.[29] 명량 해전 전날인 1597년 9월 15일.[30] 많은 사람들이 흔히 "적에게 알리지 말라"라고 알고 있지만, 이는 틀린 것이다. 보다시피 이 유언 중에 "적에게"라는 말은 한글이든 한자든 단 한 글자도 적혀 있지 않으며, 후세 사람들이 전쟁의 분위기에 맞추어 추가한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죽음을 적군이 알면 당연히 안 되고, 오히려 아군이 자신의 죽음을 알면 사기가 떨어질 것을 우려해서라고 봐야 한다. 무엇보다도 이순신의 부하들이 굳이 적에게 알리지 말라는 말을 유언으로까지 남겨야 할 정도도 바보가 아니다.[31] 사람에 따라서는 내 죽음은 승리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니 적을 물리치는 데 집중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어 "적에게"란 표현이 빠진 원문이 더 비장하다고 느끼기도 한다.[32] 이순신 장군의 조카[33] 늦은 나이에 급제하였다고 설명하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론 거의 평균적인 나이에 급제하였다.[34] 일종의 병기고 임시 검열관[35] 순서를 따지지 않고 채용하다.[36] 1587년에 전라도 손죽도를 왜구가 침범하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전라 좌수군은 싸울 생각을 하지 않고 피하기 바빴으며, 녹도 만호 이대원 만이 장렬하게 싸우다 전사하게 되었다. 이 사건 이후 일본에서 전쟁을 준비한다는 첩보와 징후를 감지하자, 조정에서 유능한 무관들을 특채로 채용하기 위해 이러한 제도를 시행한 것이다.[37] 이순신 장군의 일대기를 볼 때 이 정읍현감 시절이 그 분의 인생에서 그나마 평온했던 시기였다 할 수 있다. 정읍현감 이전엔 파직과 강등, 백의종군을 겪어야 했고 정읍현감 이후 전라 좌도 수군 절도사가 되어선 전쟁을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1년 뒤 임진왜란이 발발한 다음 충무공의 삶은 그야말로 눈물이 앞을 가린다. 무엇보다 정읍현감으로 재직하던 때는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지내던 시기였다.[38] 변방 수령은 만 1년이 되지 않으면 자리를 바꿀 수 없다.[39] 만포 첨사는 특별히 정3품 당상관으로 임명하는 자리다.[40] 성종 15년(1484년) 8월 8일(임술) 1번째 기사 경연 후 지평 한건 등과 위장 김유완의 체직·영안도의 양전 등을 논의하다. 연산 2년(1496년) 11월 13일(병진) 2번째 기사 정언 조원기가 이윤종을 만포 첨사로 제수하지 말 것을 건의하다, 연산 2년(1496년) 12월 9일(임오) 2번째 기사 가자, 김효강, 노사신 부자 등의 일로 구치곤 등이 경연에서 아뢰다, 연산 3년(1497년) 1월 22일(갑자) 4번째 기사 만포 진장에 무신으로 당상관인 재주있는 자를 보내기를 의정부가 청하다, 중종 20년(1525년) 11월 29일 갑신 4번째 기사 헌부가 김안정·서수천의 체직과 서원정 이구의 죄상에 대해 아뢰다, 명종 12년(1557년) 1월 12일(병인) 3번째 기사 조광원·이명·목첨·강섬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등의 실록 기사를 보면 만포 첨사를 당상관(정3품 上 절충 장군)으로 보임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41] 참고로 거북선에 대한 기록은 태종 때부터 있었다. 다만 태종실록에서 언급되는 귀선과 이순신이 건조했다는 귀선이 같은 종류의 배인지는 현재까지 불분명하다.[42] 난중일기에 의하면, 이때 가장 먼저 찾아온 사람이 바로 무의공 이순신 이라고 한다.[43] 난중일기 中: 丁酉 4월 19일 : 일찍이 길을 떠나며, 어머님 영전에 하직을 고하고 목놓아 울었다. 어이할꼬, 어이할꼬. 천지 간에 나 같은 자 또 어디 있으랴. 차라리 빨리 죽느니만 못하도다.[44] 난중일기 中: 1597년 10월 14일 : 저녁에 천안에서 사람이 와서 집 편지를 전하는데 겉봉을 뜯기도 전에 골육이 떨리고 심기가 혼란해졌다. 겉봉을 대강 뜯고 열의 글씨를 보니 바깥 면에 '통곡'이란 두 자가 쓰여 있기로 면이 전사했음을 알고 간담이 떨어지는 것도 모르고 목놓아 통곡, 통곡하였다. 하늘이 어찌 이리 어질지 못하시더냐,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듯 하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맞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살아 있으니 이렇게 어긋난 이치가 어디 있으랴. 천지가 흑암에 덮이고 해조차 빛이 변했구나. 슬프다 내 아들아. 네가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네 재주가 뛰어나 하늘이 이 세상에 놔두지 않는 것이냐. 내 죄가 많아 네 몸에 미친 것이냐. 내 지금 세상에 살아 있으나, 이제 어디에 의지하랴. 너를 따라 죽어 지하에서 같이 울고싶지만 네 형, 네 누이, 네 어머니가 의지할 곳이 없겠으니 아직은 참고 살겠으나 마음은 죽고 몸만 남아 통곡하고 통곡할 따름이다. 하룻밤 지내기가 1년 같도다.[45] 추가로 "아이 나이가 50이 지나면 북방에서 대장이 될 것이다"라는 말도 했다고 한다.[46] 이와 함께 이순신이 중인 출신임에도 삼도 수군 통제사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라는 낭설도 같이 퍼졌는데 이순신의 본가인 덕수 이씨는 엄연한 양반 가문이다. 그러므로 이순신 역시 양반이 맞는다.[47] 율곡 이이와의 일화 한 가지. 이이가 이조 판서로 재직하던 중 "우리 친척 중에 이순신이라고 똘똘한 아이가 있다면서? 얼굴 한번 보세."라고 말을 전했는데, 이순신은 "율곡 선생이 인사권을 가지고 있는데 내가 사적으로 만나면 안 될 것 같다."라면서 "인사권을 가지신 동안에는 만나뵙지 않겠다."라고 답했다고 한다.[48] 누명을 벗고 명예를 회복하는 것.[49] 김종래라는 작가가 쓴 『칭기스칸의 리더십 혁명』이라는 책의 서문에 나오는 내용이다. 근데 이 내용은 실제 칭기즈 칸이 한 말이아니라, 칭기즈 칸이 이랬으니 절망하지 말아라라는 의도로 작가가 만든 저술한 내용이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실제 그렇게 말한 것처럼 되었고 김종래 작가도 나중에 이게 돌고 돌아서 누가 실제 어록이라며 소개해주는 바람에 황당해했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칭기즈 칸 항목 참조.[50] 방진이 사망한 다음 온양의 집과 재산은 전부 이순신이 상속받았다. 현재 충남 아산의 현충사 이순신 고택이 당시 방진의 집이었다.[51] 민선6기 보성군수가 보성과 이순신이 연관이 많다면서 이순신을 밀어주기 시작했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이것이다. 근데 정작 조선 시대에는 고을 지방관을 반드시 그 고을 사람이 아닌 외지인으로 임명하는 상피제를 실시했기 때문에 방진이 보성 사람일 리가 없다.[52] 당시 병조판서였던 이준경이 예전에 자신의 부하였던 방진에게 이순신을 소개해주었다. [53] 성웅의 부인답게 방씨 부인도 슬기로운 성격이였다. 가장 잘 알려진 얘기로, 부인이 어릴 적 밤중에 도둑이 집에 들자 명궁인 아버지 방진이 활로 응사했다. 그러나 이미 내통자가 화살을 미리 치웠고, 게다가 밤중이라 시야가 좁아져 속수무책이던 상황이었다. 그때 아직 어린 방씨가 화살은 아직 많이 있다며 한 무더기의 화살을 가져왔고 그 얘기를 듣자 도적들은 지레 놀라 도망쳤다. 나중에 알고보니 화살이 아니라 여인들이 베를 짤 때 쓰는 대나무였다.[54] 버드나무의 껍질이나 잎은 해열, 진통에 효능이 있다. 버드나무에서 나오는 성분으로 만들어낸 약품이 바로 그 유명한 아스피린. 다만 이건 먹었을 때 효과가 나는 것이지 몸에 닿는다고 약 성분이 흘러들어오지는 않는다. 그러니 이걸로 다리를 묶어봐야 그저 다리를 고정했을 뿐, 딱히 진통 효과는 없었을 것이다.[55] 병과에서 4등을 했다. 한편 이 4년간의 공백을 소재로 다룬 영화가 박중훈이 이순신 역할을 맡은 천군이다.[56] 일각에선 시험에 늦게 합격했다고 하지만 이는 잘못된 것이다. 이때 이순신을 포함한 합격자들의 평균 연령대가 34세이고, 가장 나이가 어린 합격자는 23세, 가장 나이가 많은 합격자는 52세였으며, 이순신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17명이었다. 따라서 그는 늦게 합격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평균 연령대보다 조금 일찍 합격한 것이 된다.[57] 여기에 다른 에피소드가 있는데, 무과 시험을 치를 때 <무경>(武經)을 강하다가 황석공(黃石公)이란 대목에 이르자 시험관이 이순신에게 물었다. "장량이 적송자(赤松子)를 따라 놀았다고 했는데, 과연 장량이 죽지 않았을까?" 이에 이순신은 "사람이 나면 반드시 죽는 것이 이치요, 통감강목에 유후(留侯) 장량이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어찌 신선을 따라 죽지 않았을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그것은 꾸며진 얘기에 지나지 않습니다."라 하였다. 당시 무인들은 학문을 소홀히 하였던 시대라 시험관들은 "무인이 어찌 그런일까지 잘 할 수 있느냐?"라며 탄복했다고 한다.[58] 발포진의 관사에 수령이 오래 된 오동나무가 있었는데, 당시 이순신의 직속 상관이라 할 수 있는 전라 좌수사 성박이 이 오동나무를 베어 거문고를 만드려고 했으나, 이순신이 관사의 오동나무 또한 국가의 물건이니 사사로이 베어갈 수 없다고 제지한 일.[59] 병기의 수효, 관리 상태 등을 점검하는 직위.[60]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이런 과거 시험 이후부터 여기까지의 14년의 일대기가 통편집 + 나레이션화 되버리는 만행이 발생했다.[61] 1860년 베이징 조약 이후 러시아가 불법 점거하여 현재 러시아 영토이다. 추후 통일이 되면 영토 분쟁의 가능성이 높은 곳.[62] 이일이 패전한 책임을 물어 이순신을 출두시켰을 때, 이순신은 "저의 지원 요청을 거듭 묵살하신 것은 북병사 어른이 아닙니까? 또 싸우다 전사한 이는 있을지언정, 오랑캐를 물리치고 백성들도 구해내었으니, 제가 지원을 요청한 문서를 전하께 올리면 북병사께서도 문책을 면하지 못하실 것입니다."라며 논리정연하게 이일에게 항변했다.[63] 백의종군 자체는 보직해임 정도의 형벌로 장군을 병으로 강등시키는 것이 아니다.[64] 토벌군은 전사자 없이 여진족 전투원 380명을 죽이고 여진 가옥 200여 가구를 불태웠다.[65] 만포진의 병마첨절제사는 특별히 당상관으로 임명하는 자리이다. 이 시점에서 이미 선조는 이순신을 당상관 급 장수로 임명할 생각을 굳힌 듯.[66] 선조 22년(1589년) 1월 21일(기사) 1번째 기사 "비변사에서 무인을 불차채용한다고 하자 각 신료들이 올린 명단"을 보면 이산해, 정언신이 이순신을 불차채용 대상으로 천거했다.[67] 이후의 승진 속도도 비슷하다. 조광조는 그 뒤 6개월 만에 동지성균관사였던 종2품이 되었고 종2품은 삼도수군통제사의 품제와 같았다. 그 후 4개월 뒤 정2품인 사헌부 대사헌이 되는데 이순신 역시 1년 뒤인 1592년 한산도 해전을 계기로 정2품 상계 정헌대부까지 올라간다[68] 순천 도호부, 흥양현, 광양현, 낙안군, 보성군[69] 사도진 - 첨사, 여도진 - 만호, 녹도진 - 만호, 방답진 - 첨사, 발포진 - 만호[70] 육군과 수군을 통틀은 최초의 승전은 부원수 신각의 군대가 군을 무찌른 전투가 있다. 단, 전투 직후 도원수 김명원이 사실 관계를 확인하지도 않고 섣불리 장계를 올렸기 때문에 신각은 승리를 거두고도 적전 도주라는 어처구니없는 죄목으로 참형을 당한다.[71] 사실 왜군에 의해 부상을 입은 병사는 단 1명 뿐이었고, 나머지 2명은 수급을 탐낸 원균이 활을 쏘아대면서까지 전공을 가로채려다 좌수영 측에 부상자를 발생시킨 것이다.[72] 사실 이 때문에 조선은 하다못해 세금과 진상품도 조운선을 통해 수로로 조달했다. 단 수레가 안 쓰인 것은 아니다. 실록 기록을 보면 수운에서 받은 물자를 수레로 옮기기도 하고 함경도 등지에서 자주 쓰였다. 국가에서 지속적으로 관리 하기도 함참조[73]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 기타지마 만지 저 / 경인문화사 / 2008년 ,『이순신과 히데요시』 가다노 쓰기오 저 / 우석출판사 / 1999년[74] 사람들에게는 요시라가 1월 11일에 가토의 도해 정보를 처음 말했다고 알려져있지만, 실제 실록 기록을 살펴보면 가토의 도해 정보는 1월 1일에 처음 입수 되었고 1월 11일에는 요시라가 왜 움직이지 않냐고 채근하는 내용이다.[75] 보통 서울에서 전라도까지 파발이 가는 데 일주일 정도 걸린다.[76] 이순신이 백의종군 시작 후 불과 6개월 뒤에 명량 해전이 일어났다.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명량 해전 초반에는 완전히 통제사 무쌍 급으로 이순신의 배 혼자서 다 싸웠다.[77] 다만 역모 사건과 관련되었거나 기사환국에서 오두인, 박태보 등을 문초할 때처럼 왕권과 관련된 죄목이 명백할 경우엔 죽을 수 있을 만큼 강한 고신이 가해질 수도 있으나, 전후 사정을 봤을 때, 이순신에게 강한 고문이 가해졌다기보다는 남이의 옥사에서처럼 사실 관계를 우선 밝히는 양상의 고신이 가해졌을 것이다. 또는 이순신에 대한 분위기가 선조의 의도와는 달리 상대적으로 온건했을 가능성도 있다.[78] 더군다나 이게 어처구니없는 소리일 수 밖에 없는 것이, 그 많은 해전을 치렀음에도 전사자가 처형자, 병사자보다 훨씬 적었다.[79] 당시로부터 1600년 전인 카이사르는 5년 이상 종군한 군사들을 주축으로 물량에서 2배 많은 폼페이우스를 분쇄한 예도 있고, 2차 대전 때의 독일군은 독소 전쟁 개전 시점에서 실전 경험이 고작 2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도 유럽 최강의 군대로 군림했다. 이 사례는 조금이라도 숙련된 병사와 그렇지 않은 병사의 차이는 격이 다르다는 것을 나타낸다.[80] 주력 전선 판옥선과 소수의 거북선, 후선과 협선 및 척후선 포함[81] 조선 수군의 주 임무는 일본의 해적을 감시하고 임진왜란의 경우와 같이 일본의 정규군에 맞서는 것이기 때문에 조선에서는 해상 전력 대부분을 충청, 전라, 경상의 세도에 집중시켜 놓았다. 다른 지역 해상 전력의 경우 수군 절도사 직위를 해당 지역의 관찰사나 병마 절도사가 겸임할 정도로 유명무실했다.[82] 배설에 대한 부분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자세한 것은 배설 문서 참조.[83] 배설은 탈영했고, 김억추는 명량 해전 이후 육군으로 전근을 가버렸다. 그 이후 임명된 수사들(권준, 무의공 이순신, 안위)은 전부터 이순신 휘하에 있던 부장들이라 지휘 체계에 큰 혼선이 오지는 않았다.[84] 원문은 "今臣戰船尙有十二 出死力拒戰則猶可爲也, 戰船雖寡 微臣不死則不敢侮我矣." "지금 신에게 아직 12척의 전선이 있사오니 죽을 힘을 다해 막아 싸우면 능히 대적할 방책이 있습니다. 전선이 비록 적지만 미천한 신이 죽지 아니했으니 적이 감히 우리를 가벼이 업신여기지 못할 것이옵니다."[85] 근데 선조가 엄청난 오판을 내린 것이, 수군을 폐지하면 일본 수군이 서해를 장악해 수도인 한성으로 오는 길이 제대로 열리게 된다. 게다가 전처럼 평안도로 가서 중국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게 된다. 결국 육지에서 고립되다가 그대로 자멸하는 결과만 낳게 될 뿐이다.[86] 일본에선 제1차 진주성 전투 당시 진주성 지휘관인 진주목사 김시민을 모티브로 한 '모쿠소(목사)'라는 괴물을 만들기도 했다.[87] 소설가 김경진은 자신의 소설 임진왜란에서 직산 전투는 단순한 양군 충돌에 불과하다고 서술하고 있다. 실제 직산 전투는 도합 1만에 달하는 양군 병력이 6차례에 걸쳐 충돌한 상당히 큰 전투로 일본군은 선빵을 날린데다 지원군으로 기병대까지 투입하고도 명군을 이기는 데 실패했다. 그러나 직산 전투로 인한 일본 측의 사상자는 전무했고 일본군의 전력도 거의 온전이 보전한 채로 전투가 끝났기 때문에 사실상 직산 전투의 의의라고 해봐야 일본군의 진격을 가로 막은 것에 불과하다. 즉, 이건 섬멸전이었다기보다는 일본군을 밀어낸 '구축'의 의미가 더 강했던 셈.[88] 적선 31척을 부수고 수급 8개를 취하였다고 하는데, 배 31척이 깨졌는데 진짜로 왜군이 8명만 죽었을 리는 없다. [89] 다만 쇠사슬이 아닌 현수교 지탱 등에 쓰이는 강철 케이블이라면 가능한데, 손가락 두께의 특수강 수천 가닥을 꼬아서 만드는 이 케이블 기술은 1900년대 초에나 등장했다(...). 진짜 쇠사슬로 왜군 함선을 막았다면 통제사또께서 어디서 외계인 고문을 하신 걸지도... 비슷한 예로 중국 삼국 시대 말 가 망할 때 장강을 타고 상류에서 내려오는 서진 군대를 양자강에 쇠사슬을 쳐서 막아보려 했지만 진나라 군대는 기름 먹인 뗏목을 잔뜩 떠내려보낸 뒤, 거기에 불을 붙여서 쇠사슬을 녹여버렸다고 한다. 물론 쇠사슬이 저 정도 불에 녹아버릴 리는 없지만, (철쇄 중간의 부표가 붕괴되었을 가능성은 있다.) 고작 뗏목의 질량 낙하에 뚫렸다고 한다면 철쇄의 효력은 그저 안습일 따름(...).[90] 애초 명 수군 함선의 열악함 때문에 조선 수군들도 이를 한심하게 여기고 전력에 거의 도움이 안 될 거라 판단해 없는 것 보단 나으니 쪽수로 밀어보자는 게 이순신과 참모들의 분위기였다. 한편으로는 그 때문에 기함으로 쓰라며 판옥선 두 척을 새로이 건조해 진린에게 하달하는데, 이 부분은 드라마에서도 묘사되었다.[91] 1592년 한 해 전사자는 총 39명이고 부상자 162명이다. - 1967년, 이형석자 임진전란사 부표 1701쪽 ~ 1706쪽.[92] 임진장초 만력 20년. 1592년 5월 10일 계본.[93] 적선이 모두 격침되었다.[94] 전라 좌도 수군 절도사 이순신, 군관 나대용.[95] 2차 출전 모든 전투 총합해서 전사 11명, 부상 47명[96] 7월 6일 출전.[97] 할복 자살했다.[98] 8월 24일 출전.[99] 녹도 만호 정운 포함.[100] 함선이 128척이나 날라갔음에도 불구하고 전사자 수가 의외로 적은데, 당시 일본군은 해상으로 나오지 않고, 바다가 보이는 육상 진지에서 조선 수군을 상대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이순신도 더 많은 수의 적함을 날려버리는데 작전 목표를 두었다.[101] 총 5번의 교전이 있었는데 이를 세분화해서 나누는 경우도 있다.[102] 정작 난중일기 5월 2일자에는 전투 기사가 없다. 확인요[103] 양측 다 교전이 아닌 탐색전 형식이라 사실상 피해가 양측 다 없었다. 참고로 이 해전에서는 조선 수군 모두가 겁을 먹고 나서지 못하자, 이순신의 대장선이 직접 선두에 서서 일본군을 몰아냈다.[104] 출처는 위키피디아. 16,607명 전사라는 말이 있는데 출처를 알 수 없다. 이 정도 피해면 조명 연합군은 전멸당한 거다. 그러나 절이도 해전이 저렇게 대규모 해전이 아니라는 주장이 더 설득력 있다. 적선 50여 척을 격파했다는 식의 기록은 《선조수정실록》에서 나오는데, 《선조수정실록》은 전쟁이 끝나고 50년 뒤에 작성되었고, 이분의 행록에서도 절이도 해전에 다루나 소규모 해전으로 설명하고 있다.[105] 舜臣自領水軍 突入賊中 發火砲 燒五十餘隻 賊逐還 이순신이 수군을 지휘하여 일본 함대 속으로 돌진, 함포를 발사함으로써 50여 척을 불태움에 적군이 쫓겨 되돌아갔다.[106] 이순신의 단독 작전이 아닌 명나라 군과의 연합 전투다.[107] 이때 조선군의 피해는, 이순신이 반대했지만 명나라 수군의 무리한 단독 작전으로 왜군에게 쫓기자 어쩔 수 없이 도와주었고, 그 때문에 입은 피해다.[108] 삼도 수군 통제사 이순신, 가리포 첨사 이영남, 낙안 군수 박동룡, 흥양 현감 고득장, 명나라 수군 부총관 등자룡 등 포함.[109] 기록들에 따라 다른데, 확실한 건 300척 ~ 500여 척의 전선 중 50여 척만 살아 돌아갔다는 것이다.[110] 어떤 의미로는 그동안 저평가 되었던 가장 중요한 요소다. 다른 해전은 군율이나 사전 준비 등의 다른 요소들로 가려질 수도 있지만, 명량 해전은 이를 빼놓고는 설명할 수가 없다. 당장 이곳 나무위키에서도 명량 해전에 대해 말할 때 이순신 장군에 대한 신뢰를 언급 할 정도. 한동안 이를 인식하는 기류가 너무 적었다. 애당초 조선 왕조 실록의 사관조차 이순신의 죽음에 부쳐 "기율을 밝히고 군졸을 사랑하니 사람들이 모두 즐겨 따랐다(人皆樂附)"고 적고 있을 정도인데 조선 시대 사관이 정확히 파악한 요소를 현대 사회인 대한민국에서 이러한 가치를 짓밟는 기류가 절대적이었다는 평가로 해석해도 무방할 지경이다.[111] 공사에 관하여서는 규정과 절차 등을 상당히 중시하여 임관 이후 이순신에게는 정적과 함께 우호 인사가 상당히 많아졌다. 대표적인 사건이 발포 만호 시절, 직속 상관인 전라 좌수사의 영내 오동나무 벌목 명령을 거부한 사건이다.[112] 수색 정찰과 첩보의 중요성은 동서고금의 병법상 진리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동서고금의 작태 역시 이론과는 달리 야전 지휘관들이 쉽게 게을리하고, 게을리 하게 되는 요소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정보 수집과 정찰은 지휘관과 참모는 물론 일선 부대원들에게 일정 수준의 피로를 상시적으로 강요 하기 때문이다. 즉, 이 자체가 지휘 부담이기 때문에 졸장과 명장의 차이가 여기서 갈라짐에도 불구하고 야전 지휘관들의 계급 고하를 막론하고 이를 가벼이 여기거나 건너뛰었다가 패전하고 패가망신하는 경우가 매우 많았다. 이순신도 이런 이유로 인하여 정찰(탐망) 명령을 가벼이 여긴 부하를 호되게 혼내는 등, 군율을 엄격히 적용하였고, 이때문에 부하들로 하여금 종종 '기피하고 싶은', '적군보다 무서운' 상관으로 여겨지곤 했다.[113] 심지어 그 명량해전도 12척임에도 철저한 탐망 및 정찰, 경계를 소흘리 하지 않았기에 초기 왜군들의 습격을 보란듯이 격퇴했다. 게다가 이마저도 가장 앞장선 사람이 이순신이라고 난중일기에 기록되어 있다.[114] 게다가 이순신이 상대했던 일본 장수들이 어떠한 사람들인가? 당장 전국 시대를 거치며 무수한 전투를 경험한 전쟁의 베테랑이자 스페셜 리스트들이다. 그런 이들을 이순신은 마음대로 가지고 놀고 유린하는 클라스라는 것.[115] 그리고 원균은 이순신을 밀어낸 직후 이순신이 원균에 대해 가졌던 생각대로 칠천량 일대에서 당대 조선 최강이었던 조선 함대를 홀라당 말아먹게 된다.[116] 게다가 이들이 허명이나 떨친 그저 그런 똥별들이냐면 그것도 아니다. 와키자카 야스하루만 해도 용인 전투의 지휘관에 그것도 모자라서 그가 원래 육전보다 잘 하는 건 해전이었다. 혼자 한산도로 갔다가 얻어맞은 것도 다른 장수들과 합동으로 싸우라는 도요토미의 말에 난 강하다라고 무시하고 가서 그랬다. 게다가 이 인물은 시즈가타케의 칠본창 중 하나이다. 절대로 이순신 장군이 별것도 아닌 똥별 하나를 두들겨 패준게 아니라 일본 전국 시대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 장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것이다. 현대 일본에서야 인지도가 미미한 장수들이지만 당대 일본에선 수준급의 실력자들이었음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117] 이전에도 사익을 챙기긴 고사하고 챙길수 있는 기회마저 차버리는 일이 잦았다. 때문에 품계도 들쭉날쭉거렸고 아얘 한량 신세가 되버리는 일도 생겼다.[118] 아니 해전 당시에 이순신을 따라온 장수들조차도 머뭇거렸다. 이순신이 독려를 하고서야 적진으로 나아가 싸웠을 정도다. 사실 실제 기록상으로 최대 1:1,000이나 되는 압도적인 병력차가 있었던 데다가 칠천량 일대에서 완전히 와해되어버린, 거의 다 망해버린 수군 상태를 생각하면 이길거라는 확신에 차고 싸운다는 건 정말 미친 짓으로 받아들여졌으리라.[119] 한국 전쟁 당시에 지휘관의 즉결 처분 남용과 상관살해 사건이 큰 골칫거리로 여겨졌었다. 최일선 지휘관인 소대장은 상급 제대에서 하달되는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 "닥돌"을 강요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런 현상은 서울 재수복 이후 고착된 현재의 휴전선 근처의 고지전에서 크게 심화되었고, 항명 등 불복종 행위가 증가하자 이에 따라 즉결 처분도 상당히 빈번하게 일어났다. 더 큰 문제는 '무조건 군기', '무조건 복종'만 강요하며 부하에게 총질을 서슴치 않던 지휘관들이 자주, 아군 탄환에 죽어나가는 일이 많았다는 점이다. 심지어 소대장 직책을 수행한 소위, 중위 계급의 전사자가 비정상적으로 높았던 원인 중에 씁쓸하게 언급되곤 하는 상관 살해가 있다.[120] 중요한 사실은 진린은 징비록에서 밝혀진바에 따르면 성격이 워낙 지랄같아서 유성룡도 진린과 이순신이 같이 있게 될거라고 전해듣자 "우린 이제 망했다!" 라고 할 정도였다. 이순신의 대쪽 같은 성격에 진린같은 장수랑 같이 있는다면 불화만 일으키느라 제대로 일본군을 상대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121] 심리학이나 경영 분야에서는 이것을 가장 완벽한 형태의 카리스마적 리더십으로 연결하여 설명한다.[122] 웃긴건 이 인간이 이순신 전임 전라 좌수사다. 거기서 평판이 나쁘다면서 자르고 얼마 뒤 경상 우수사에 앉힌 것. 왜변에 대비한다며 이순신을 파격 승진시킨건 그렇다 치고, 전라 좌수영보다 더 왜에 가까운 경상 우수영을 원균에게 맡긴것만 봐도 석연치 않은 것은 기분 탓이 아니다.[123] 애초 이 시대엔 동서양을 막론하고 군인이 해적이고해적이 군인인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양쪽 중 하나가 '전직'인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농담을 섞어 말하자면 해군과 해적의 차이는 군복 깔맞춤(...)과 지휘체계가 정부냐 두목이냐 정도.[124] 난중일기에 언급되는데, 그녀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다. 그래서 부안댁을 이순신의 첩으로 보지 않는 견해도 있다.[125] 李葂, 1577년 ~ 1597년. 부친을 따라 종군한 형 대신 고향 아산에서 가족들과 있었는데, 정유재란 직후 이순신 일가를 해하려 온 일본군에 맞서다 죽었다. 결혼하지 않아 자녀는 없었다. 난중일기에서는 이 충무공이 두번째 백의종군 중 모친의 부고와 연이어 삼남의 죽음을 전해듣고 비통해한다. 아산 현충사 권역에 묘가 있다.[126] 이정의 조부인 이거(? ~ 1502년)가 정3품 당상관을 역임했다. 이순신에게 증조부가 되는 이거는 연산군의 세자 시절 스승이었고 강직한 간쟁으로 이름이 높아 '호랑이 장령'이라는 별명이 있었다고 한다.[127] '자당'은 상대방의 어머니를 높여부르는 호칭이다. 말 그대로 이순신 어머니의 기거지라는 뜻.[128] 《난중일기》, 1594년 1월 12일[129] 선조가 이순신에 대해서 악감정을 가지고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백의종군시키고 어머니와 아들을 잃어 비통에 빠진 신하에게 고기를 즐기라고 내어주는 행동은, 조선을 지배하던 유교적 도리를 서로 상충되게 하여 신하를 곤란하게 만든 것인데, 이 행동을 선조의 잔머리와 졸렬함으로 설명하지 않는다면, 선조는 매우 어리석고 멍청하기 그지 없었다는 예가 된다.[130] 출처: 문집인 《서애집(西厓集)》[131] 이에 대해 단순히 사위의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상대 집안에 대한 항의라는 해석도 있다. 이 사위의 아버지는 이순신의 친구인 홍가신이다. 그런데 홍비는 이 결혼이 재혼이었다. 홍비의 첫 번째 부인이 일찍 죽어서 이순신의 딸과 재혼한 것. 첩으로 들인 것이 아니라 재혼한 것이므로 딱히 문제될 것은 없어 보이지만, 조선 시대에 재취로 딸을 시집보내는 것은 그다지 반기지 않는 게 당시 풍습이었다. 이를 불편하게 여긴 방씨가 사위를 박대함으로써 홍가신 집안에게 항의 표시를 했다는 해석이다.[132] 조선은 유교 사상 덕에, 기본적으로 세금 = 백성의 부담으로 보고, 최대한 세금을 적게 걷어 필요한 데만 쓰는 식의 굉장한 긴축 재정을 강요받는 행정 체제를 가지고 있어서, 행정관이 가솔들을 데려와 먹여 살리는 것은 충분히 탄핵의 대상이 될 만한 일이다. 이른바 남솔(濫率)이라고 해서, 지방관이 가솔을 제한 이상으로 데리고 다니는 것이 당대의 문제로 인식되었다.[133] 단, 이이와 이순신은 19촌 관계로 당대에도 덕수 이씨라는 가문만 같지 사실상 남남이었다.[134] 오죽하면 그에 대한 탄핵 상소까지 올라온 적도 있었다. 다만 이는 이봉상이 잘못을 저질러서 그런 게 아니라 워낙 무능해서 그런 것이다.[135] 충성 충, 애쓸 민. 충성심은 높이 사지만 딱히 뭘 한 것은 없기에 그냥 '절개를 지키느라 애썼다'는 뜻이다.[136] 유성룡은 이순신이 삼도 수군 통제사에 파직될 때, 선조에게 "이순신은 저와 동향 사람인데, 강직하여 직무에 맞는 사람이라 여겼습니다"라고 하기도 했다. 그러나, 저런 이미지 때문에 끝까지 이순신 장군을 두둔했다란 잘못된 이미지가 형성되었다.[137] 왜냐면 조선의 중앙 집권화는 국가 경제력이 빈약한 상태에서 무리수를 두어 시행했기에 아전들에게까지 줄 재정이 없었다. 관리들의 녹봉조차 박봉이며 이것마저 줄 재정이 없어 못주는 게 다반사였다. 그러다보니 관료들은 녹봉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고 개인 재산에 대한 축재에 힘 쓸 수밖에 없었다. 과거 합격자들조차 그들에게 줄 녹봉이 없어 무보수로 일하거나 임용되기를 장기간 기다려야할 정도였다.[138] 소 5마리 ~ 6마리의 값은 상태가 양호한 호랑이 가죽 1장과 가격이 비슷한데 호랑이 가죽이라는 물건은 명나라와 청나라에 진상하는 용도로만 쓸 정도로 매우 귀한 물건이었다.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라는 속담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139] 조선만 이런 것은 아니고 옛 시절 해군은 어디든 마찬가지였다. 나폴레옹 전쟁 시기의 영국 해군이 오만 범죄자를 집어넣는 것으로도 모자라 밤에 호각을 분 순간 길거리에 있는 장정들을 닥치는대로 징집해 끌고 간 사실은 이미 혼블로워 같은 작품들을 통해 널리 알려진 사실. 그나마 이때의 조선은 아직 연좌제가 보편적이지 않던 시절이었고, 도망간 친족을 찾아내면 나갈 수라도 있었다.[140] 다음은 한국 군형법 기준 탈영 : 제27조(지휘관의 수소 이탈) 지휘관이 정당한 사유 없이 부대를 인솔하여 수소를 이탈하거나 배치 구역에 임하지 아니한 경우에는 다음 각 호의 구분에 따라 처벌한다. 2. 전시, 사변 시 또는 계엄 지역인 경우 :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 또는 금고, 물자 횡령 : 제75조(군용물 등 범죄에 대한 형의 가중) ① 총포, 탄약, 폭발물, 차량, 장구, 기재, 식량, 피복 또는 그 밖에 군용에 공하는 물건 또는 군의 재산상 이익에 관하여 「형법」 제2편 제38장부터 제41장까지의 죄를 범한 경우에는 다음 각 호의 구분에 따라 처벌한다. 1. 총포, 탄약 또는 폭발물의 경우 :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 2. 그 밖의 경우 : 사형, 무기 또는 1년 이상의 징역, 적전 도주 : 제30조(군무 이탈) ① 군무를 기피할 목적으로 부대 또는 직무를 이탈한 사람은 다음 각 호의 구분에 따라 처벌한다. 1. 적전인 경우 : 사형,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141] 임진왜란이 정유재란기까지 포함한 명사라면 이는 틀린 말이다. 이 경우 실제 조선 수군의 사망 원인 1위 = 원균, 2위 = 전염병, 3위 = 이순신이 된다.[142] 권율은 탈영병을 즉결 처분했다 하여 일시 해임되기도 했다.[143] 또다른 취미로는 부하장수들을 앉혀놓고 바둑 두는 것을 구경하는 것도 있다.[144] 이순신 장군은 《난중일기》에서 자신이 활쏘기를 얼마나 했는지를 '활 ~순(巡)을 쏘았다'라고 기록해 놓았는데, 여기서 '1순(巡)'은 한 사람이 차례대로 돌아가며 화살 다섯 개를 쏘는 것을 의미한다. '5순'을 쏘면 화살 25개를 쏜 것이고, '10순'을 쏘면 화살 50개를 쏜 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활쏘기를 하면 대개 10순을 쏘곤 했다.[145] 다만 이 건은 충무공의 인성과는 카테고리 자체가 다른 건이다. 애초 한 쪽이 올라 가면 다른 쪽은 내려갈 수밖에 없는 양립불가능한 파라미터의 결과니. 게다가 어차피 원균의 재부상은 당시 왕이었던 선조의 강력한 의지가 바탕이 된 탓이 크니 설령 이순신 장군이 정치만렙의 정치 스킬을 보여주었다 해도 별 수 없었다. 봉건주의 사회에서 왕이 한번 쳐내기로 마음먹었으면 어찌할 도리가 없으니.[146] 위에 보면 알 수 있지만 원균은 윤두수 등의 서인들이 선조를 꼬셔 (선조는 깐깐한 이순신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이순신을 쫓아나게끔 하고 낙하산으로 해군 참모 총장격인 삼도 수군 통제사가 된다. 그런 후 합동 참모 의장인 권율은 어이가 없어하다가 부산진 출정 명령을 이런저련 핑계로 무시하고 육군 30만명을 보내주면 출정하겠다고 하니 결국 분노가 터져 곤장 x40을 친다. [147] 심지어 율곡 이이조차도 덕수 이씨 가문인데 이순신에게 밀렸다. 성리학을 우선하던 조선 중후반 시기인데도 공자와 동급으로 올리는 문묘 배향에 종묘에까지 배향된 공신인 이이가 밀린 것만으로도 충무공에 대한 대우가 얼마나 넘사벽이었는지 알수 있다. 세운 업적을 생각하면 그럴 만도 하다.[148] 시대가 무인보다 문인이 좋은 대접을 받던 시절이니 결국 안 좋은 신세가 된 거다.[149] 밥에 고기와 적, 나물들을 고루 얹어 장국을 부어 먹는 국밥이다.[150] 생선전과 소고기 내장 모듬전[151] 두부를 지져 닭고기, 표고, 석이, 다시마 같은 재료들과 함께 끓여 여기에 가루즙을 풀어 넣어서 부드럽게 만든 두붓국.[152] 꿩고기를 다져 동글동글하게 빚어 쇠고기 장국에 넣어 만든 국.[153] 꿩고기의 살만 발라내어 쇠고기와 섞어 다진 것에 갖은 양념을 하여 꿩의 다리 모양으로 만든 후에 묽은 밀가루 반죽을 풀어 쪄 낸 음식.[154] 대합, 모시 조개, 재첩 등을 껍질째 씻어서 맹물에 넣고 끓인 국.[155] '눈 오는 날 찾는다'는 뜻으로 쇠고기 등심을 넓게 길게 저며 썰어서 꼬치에 꿴 후에 기름장에 양념을 발라 구운 것이다.[156] 현재 1척은 대략 30cm에 해당한다. 동시대에 명나라에서 1척이 현재와 비슷한 약 31.1cm인것을 보아 31*6=186.6cm라는 어느 정도 설명이 가능한 신장이 나온다.[157] 하지만 등패수(籐牌手) 의 경우 방패 안에 표창을 가지고 있어서, 기본적으로 이것을 투척한 후, 전방에서 아군의 진영을 보호하는 형태로 전투를 수행한다.[158] 당파로 적의 창을 잡으면 장창병들이 찌르는 방식[159] 宗婦, 가문의 종손의 부인을 일컫는 말.[160] 다만 이건 사채업자의 처지에서 현금화하기 어려워서 거절했을 가능성이 높다. 문화재는 현금화하기 어려운 재산에 속한다.[161] 실제로 이순신이 난중일기에서 원균을 "원흉(元兇)"이라 언급하는 기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