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니시 유키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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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西行長(こにし ゆきなが)
(1558년[1] ~ 1600년 음력 10월 1일, 양력 11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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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니시의 문장

1. 개요2. 생애
2.1. 유년기2.2. 가톨릭 신자2.3. 임진왜란2.4. 정유재란2.5. 세키가하라 전투 그리고 최후
3. 평가4. 가토 기요마사와의 관계5. 기타6. 대중 매체에서

1. 개요[편집]

일본 전국시대 무장. 가톨릭을를 믿었던 키리시탄(キリシタン) 다이묘중 하나로 유명하며, 세례명아우구스티노(Augustino).[2]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최초로 상륙한 일본군의 선봉장이라 국내에서는 임진왜란에 참전한 일본 무장 중 가토 기요마사와 더불어 매우 유명한 인물. 물론 역사책에서만 그런게 아니고, 당시 조선에서도 일본 장수 중에서 유명한 인물 중 하나였다. 임진왜란 관련 조선측 사료에서는 소서행장(小西行長)이나 그냥 행장(行長)이라는 표현으로도 등장한다. 다른 선봉장인 가토 기요마사와는 앙숙지간이다. 자세한 것은 밑의 내용을 참고.

반면 일본에서는 전국시대 일본의 장수들 중에서는 한국에 알려진 것만큼 유명하지는 않다. 전국시대 관련 매체에서 종종 비중있게 등장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임진왜란의 선봉장보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측근으로서의 면모가 부각되는 편이다. 임진왜란 때 악명을 떨쳐서 한국사에선 존재감이 뚜렷하지만 어디까지나 도요토미가 자신의 정권을 떠받칠 차세대 자원으로 육성하던 젊은 다이묘로, 임진왜란 개전 당시 30대 초반이었다.

2. 생애[편집]

2.1. 유년기[편집]

본래 사카이[3]의 상인의 아들이자 자신도 상인으로서 본명은 고니시 야쿠로였다고 한다. 최초 우키타 나오이에를 섬겼으며, 주로 외교시의 사자로 활동하였다. 1581년 우키타 나오이에가 사망한 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발탁되었다. 히데요시 밑에서는 후나부교(船奉行)로서 수군을 통솔하였고, 다이묘가 된 것은 1585년이다. 상인 시절에는 약종상(藥種商), 즉 약재를 주로 취급하였다.

2.2. 가톨릭 신자[편집]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고니시는[4] 군기로 붉은 비단 장막에 하얀색 십자가를 그린 것을 사용했고, 고니시의 휘하 병사들 다수도 가톨릭 신자였다. 고니시가 조선을 침략했을 때 그의 진중에는 교황청이 파견한 포르투갈 출신의 예수회 신부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가 사목했고, 밤마다 미사를 드렸다고 한다.

특히 부장이자 사위인 소 요시토시에게도 가톨릭을 믿으라고 권해서 세례성사를 받게 했고, 요시토시와 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외손자 고니시 만쇼는 훗날 예수회에 입회해 신부가 되었다. 그의 사촌 역시 세례를 받아 안토니오란 세례명을 받았다.[5]

고니시의 봉토였던 아마쿠사 제도는 '그리스도의 섬'이라고 불릴 정도였는데, 후에 시마바라의 난의 진원지가 된다.

2.3. 임진왜란[편집]

임진왜란 이전에는 대마도주인 사위 소 요시토시의 신변과 관련된 무역 문제[6]와 자신의 가톨릭 신앙 등의 이유로 침략을 반대하던 쪽에 서 있는 인물이었다. 이시다 미츠나리 등과 전쟁을 막기 위한 시도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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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뜻을 꺾는 데 실패하자 굳이 전쟁을 하겠다면 선봉에 서서 싸우겠다고 자원, 라이벌이었던 가토 기요마사에게 보란듯이 가장 먼저 조선에 상륙, 수도 한성을 일본군 중 가장 먼저 점령하고 평양까지 북상하였다.[7]

그러나 무리한 진격으로 공세종말점에 이르면서 평양에서 시간을 허비하게 되면서 의주에 있던 선조를 잡는데도 실패하고 남쪽의 조선 각지에서 군세를 수습한 조선 육군의 승리로 어려워지는 전세 상황. 보급문제와 명나라군 등의 등장으로 물러나게 된다. 한성까지도 겨우 후퇴하였고, 행주산성에서 권율의 3천 병사에게 대패하기도 하였다. 다만 이는 총대장인 우키타 히데이에의 잘못이 크다. 해당 항목 참조.

고니시의 한달간의 체류에 대해서는, 상인 출신이기에 가진 한계[8]라는 설과 고니시의 반전 의사라는 설, 보급부족 등의 설도 있다. 하지만, 평양까지의 빠른 진격으로 인한 반대급부로 병력들이 이미 상당히 지쳐있다고 보는 것이 진정한 원인으로 보는 것이 최근 견해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조선군들을 계속 상대하면서 경상도부터 평양까지의 긴 거리를 보군으로 단기간에 돌파한다는 것부터가 상당한 부담이였고 평양성 점령 후도 부상자가 상당하였다. 이순신의 활약으로 인한 보급 문제로 철수했다는 전의 서술과는 다르게, 평양성 점령 후 상당수의 군량과 평양성이라는 요충지를 획득했기에 고니시군은 어느 정도 버틸 보급 능력이 있었지만 이순신의 활약에 의한 추가 지원 가능성이 없어지고 명군의 도착이 부담이 되어서 철수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또 다른 견해도 있다. 애초에 전쟁에 반대했었던 그였기에, 전선의 확대 및 명군의 참전을 원하지 않았고 이에 명군참전의 마지노선을 평양이라 판단하고 북진을 멈췄다는 것이다. 종합하자면 특정한 문제가 아닌, 보급문제, 전선문제, 반전문제 등 복합적인 요소로 봐야 하겠다.

전쟁이 늘어지기 시작하자 이시다 미츠나리와 함께, 명과의 강화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고니시는 말빨로 한 이름 하는 명나라의 심유경과 함께 열심히 교섭을 해봤으나, 일본의 조공을 요구하는 명과 조선 8도 중 남쪽 4도(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강원도)를 요구하며 명의 황녀를 운운하는 일본 사이에 강화가 가능할 리가 없었다.

2.4. 정유재란[편집]

결국 고니시와 심유경이 양쪽 정부 모두에게 거짓을 고하고 명나라에게는 모든 요구조건이 수락되는 대신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일본 왕 책봉을 내리는 수준으로, 일본에는 명이 마치 일본을 인정한 것처럼 사기를 쳤다. 도요토미가 문맹임을 이용한 대사기극이었으나… 결국 붕괴[9], 심유경은 목이 잘리고 고니시는 마에다 토시이에, 요도도노 등의 간청으로 가까스로 살아남게 된다.

이후 고니시는 평소 원수같던 사이인 가토 기요마사를 조선의 손을 빌어 처리하고자 가토의 상륙 정보를 조선 조정에 흘렸으나, 이는 의도했던 바는 아니었지만 상상 이상의 수확을 거두게 된다.[10][11] 고니시가 흘린 정보는 이순신이 받아들이지 않아, 가토가 이미 상륙한 뒤라서 무용지물이 되었지만, 선조가 이에 낚이는 바람에 이순신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당하고 후임에 원균이 임명되면서 조선 수군을 전멸시키는 어마어마한 일을 해낸 것이다.[12] 이렇게 정유재란에 다시 참전하나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노량해전에 대패하면서 후퇴. 다만 이 때 고니시군은 명군을 매수하여 무사히 전장에서 벗어나 부산으로 철군하는 중이었고[13] 노량해전에서 죽을 뻔한 장수는 시마즈 요시히로였다.

2.5. 세키가하라 전투 그리고 최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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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고니시 유키나가의 진영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벌인 내전에서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를 지지하다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으로 참전하여 잘 싸웠으나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배신과 함께 공격당하여 패배, 1600년 교토의 로쿠조 강변에서 처형당했다. 가톨릭 신자라 할복을 하지 않고[14], 온갖 수모를 겪은 후 참수되었다. 죽기 전 같은 가톨릭 신자였던 쿠로다 나가마사를 통해 고해성사를 받게 해달라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요청했는데 거절당했다고 한다. 참수 시 불교승려가 관례적으로 고니시의 머리 위에 불경을 얹고 염불을 했는데 고니시가 "나는 키리시탄이다. 어딜 불교의 것을 나에게 들이대느냐!" 하고는 예수, 마리아를 외치며 죽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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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니시 유키나가의 동상

숙적 가토 기요마사의 공격을 받고 있던 우토 성은 끝까지 버티다가 고니시의 처형 소식이 들어오자 항복하고, 성을 지키던 고니시의 동생 유키카게는 할복하였다. 쓰시마 섬 도주 소 가문의 소 요시토시에 시집갔던 딸 마리아는 세키가하라 이후 이혼당하여 갓 낳은 아들과 함께 쫓겨났으며,[15] 아들은 모리 가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후 고니시의 가문은 멸문되었으며[16] 고니시의 봉토는 가토 기요마사가 소유하였다. 고니시의 가신들 역시 많은 수가 가토 가문으로 흡수되었다. 고니시의 우토 성을 점령한 가토는 그 성의 망루 하나를 자신의 구마모토 성에 옮겨 설치하고 "우토 망루"라고 불렀다고 하나, 후대의 연구에 따르면 우토 망루는 원래부터 있었고, 우토 성 출신 가신들이 있는 곳이라 하여 그렇게 부른 것이라고 한다.[17]

3. 평가[편집]

전쟁을 좋아하는 성향은 아니었지만 일단 전투에 임하면 돌아보지 않는, 소위 전형적인 군인이었다. 이 때문에 엄밀히 말하자면 조선에 끼친 피해 자체는 가토 기요마사보다 더 크다. 하지만 임진왜란을 반대해 주군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속여가면서까지 강화를 주도한 인물이기도 하기 때문에 일본 창작물보다는 한국 창작물에서 대우가 조금 더 좋은 편이며, 단순하고 과격하게 묘사되는 라이벌 가토 기요마사에 비해 더 말이 통하는 쪽으로 묘사되는 편이다.

일본에서도 한국에 잘 알려진 것처럼 가토 기요마사와 라이벌로 묘사하기도 한다. 일단 일본에서는 가토가 더 유명한 편인데, 둘이 라이벌격으로 대립한 건 사실이므로 가토가 좀 비중이 있으면 거기에 딸려가는 편이다. 단 일본에서는 인지도나 인기에서 가토에게 밀리고 대중매체에서도 잘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묘하게도 여성향에서는 인기가 좋은 편이다.

선봉장으로서 부산진성, 동래성을 함락시키고 탄금대 전투에서 조선의 주력군을 괴멸시키고 한양평양을 점령해 조선을 불바다로 만들었다는 점과 전쟁 반대, 화친을 위해 국서를 위조, 조선인 양녀 등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복잡한 인물로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는 인물이기에 한국에서는 다른 일본군 장수들과 비교했을 때 대우가 미묘하다. 당대 조선 조정에서조차 가토는 불구대천 원수로 여기면서도 고니시에게는 비교적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강화회담을 주도한 것에서 엿보이듯 일단 조선이 좋아할 만한 학문적 소양은 갖추고 있었던 것 같다. 일단 한문을 알고 있었다는 것 자체가 메리트다[18]

또 믿기 힘들겠지만, 제2차 진주성 전투가 일어나기 전에는 일본 몰래 미리 조선 측에만 알려 백성들을 대피시키자고 주장했다. 이는 조선왕조실록뿐아니라 일본의 사료인 프로이스의 일본사에도 나오는 내용으로 교차검증이 된다. 프로이스의 일본사에는 일본군이 심유경에게 알렸다고 되어있긴하지만 정황상 일본군=고니시라고 봐도 무방하다.

『我日本往晋州兵馬三十萬, 恐不能當, 修書密報。 今本府之民, 預避其鋒銳。 彼見城空人盡, 卽撤兵東回.』[19][20]


명나라와 일본이 화평조약을 맺은 와중에 뜬금없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진주 공격을 명하자 일본 장수 어느 누구도 그 명령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당시 명나라 사신 신분이었던 심유경부산에 왔을 때 이야기한 대목이다. 물론 화평약속을 깨는 공격이기에 반대한 것이기도 하다.

고니시의 이익은 쓰시마의 이익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그것은 분명하다. 순전히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전쟁을 막으려 했다는 것도 물론 맞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무의미한 전쟁을 끝내려고 무진장 노력했던 것은 사실이다. 애초에 사카이 상인 집안 출신이기 때문에 일찍이 외국과의 교역을 통해서 당시 조선과 명나라의 국력에 대해서도 냉정하게 인지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다이묘로서 주군 히데요시의 명령에 하복하는 것은 당연한 행동이었지만, 허무맹랑한 조선과 명나라 정복에는 애초부터 반대했을 가능성이 높은 인물.

오늘날 일본에서는 그다지 언급되지 않고[21] 높이 평가되지 못하지만 애초에 평범한 장수였다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선봉장으로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22] 여러가지로 생각해볼 점이 많은 인물임은 분명하다.[23]

4. 가토 기요마사와의 관계[편집]

가토는 바로 옆동네의 다이묘인데, 원래 이웃끼리가 더 사이가 안 좋은 법. 상시 접경에서 영토 문제로 다투었다고 한다.

다만 처음부터 사이가 나빴던 것은 아니다. 히데요시 집권후 지방 다이묘들을 견제하기 위해서 직신들을 각 지방에 골고루 분배했고 특히 둘의 영지가 있는 규슈시마즈가 자리하고 있고 옛 류조지 가문의 세력을 등에 업은 나베시마(鍋島) 가문[24]도 있었기 때문에 직신들 중에서도 제일 믿을 만한(혹은 능력 있는) 가토 기요마사구로다 간베에, 고니시 유키나가를 배치했다. 특히 가토와 고니시의 영지는 남북으로 붙어 있기 때문에 둘의 연계가 중요했다. 그때 당시만 해도 히데요시의 권력이 막강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영토로 싸운 기록은 없다. 오히려 히데요시의 구상에 걸맞게 서로 도와가면서 잘 지냈다.

다만 임진왜란 몇 년 전부터 가토가 영지 내 가톨릭 신자들을 박해하면서 가토의 영지 내 신자들이 대거 고니시 측으로 도망, 그들의 처우 문제로 다툰 적은 상당히 많다. 둘의 사이가 벌어진 것은 가토가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울산성 전투에서 고니시가 조선과의 화친을 위해서 가토의 지원요청을 묵살한 것이 가장 큰 이유다. 게다가 가토는 태화강물이 끊기고 먹을 것도 떨어지는 등 트라우마가 단단히 맺혔는지, 귀국 후 만든 구마모토 성은 식수공급용 우물을 120개 팠고 성내 다다미나 외벽재를 죄다 토란 줄기로 만들어서 유사시 장기간 농성에 대비할 수 있게 했다고 한다. 훗날 사쓰마 군대와 정부군이 격돌했을 당시 최대 격전지였다고 한다. 자세한 것은 서남전쟁 항목이나 구마모토 성 항목 참조.

이렇게 둘의 사이가 불구대천이라는 것은 매우 유명해서, 조선 사람들조차 이 둘이 원수지간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심지어 고니시 유키나가는 자신과 가토 기요마사가 원수지간이라는 것을 작전에마저 써먹기까지 했다.[25]

5. 기타[편집]

조선의 전쟁 고아들을 많이 양육했다고 하며, 그중 유명한 인물로는 조선인 양녀 오다 쥬리아가 있다. 평양 혹은 순천에서 주운 고아를 양녀로 삼아 이름을 오다로 짓고 가톨릭에 입교시켰다. 고니시의 사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시녀가 되었다가 막부의 가톨릭 박해로 유배되어 여생을 유배지에 보냈다. 또한 한국인 최초의 예수회 수도자복자 권 빈첸시오는, 유키나가의 딸인 고니시 마리아의 연줄로 신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호오를 떠나서, 당시 한일의 교회사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거물임은 분명하다.

임진왜란의 선봉장 경력 때문에, 아마 한국 사극에서 가장 많이 등장한 일본인 중 한 사람일 것이다. 행적때문에 보통 그나마 개념인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은 편. 8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한자를 그대로 읽어 한국에는 소서행장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6. 대중 매체에서[편집]

[1] 일본어 위키백과 小西行長 문서에 따르면, 『선조 실록』 선조 28년(1595년) 2월 10일(癸丑) 6번째 기사에 "행장 올해 서른 여덟(行長今年三十八)."이라는 설명이 유일한 기록이다. 역산하면 로쿠 원년(1558년)에 태어난 것이 된다.[2] 공교롭게도 칼의 노래를 집필한 소설가 김훈과도 세례명이 같다.[3] 지금의 오사카. 사카이 쪽이 아니라 산요 지방, 현재 고베, 히메지, 오카야마 지역이라고도 한다.[4] 사실 어린 시절에는 신앙심이 깊지 않았으나, 독실한 가톨릭 무장인 다카야마 우콘과 친교를 맺고 나서 신앙심이 깊어졌다고 한다. 이때를 기점으로 거의 사람이 달라져서, 거만했던 행동이 사라지고 온화하고 겸손한 성격이 되었으며, 오사카에 한센병 요양원을 세우고 고아원 사업에 힘썼다고 한다. 재미있게도 이는 고니시 자신의 세례명의 유래가 된 인물과도 비슷한 부분이다. 항목 참조.[5] 고니시 안토니오는 제4차 평양성 전투에서 전사한다.[6] 대마도는 조선에서 수입하는 물자에 경제를 많이 의존하고 있었으므로 조선과 사이가 나빠질수록 피해를 입는다.[7] 평양에 주둔하면서 조명연합군과의 전투 도중 동생과 사촌을 잃기도 하였다.[8] 단, 당시의 상인은 재력을 바탕으로 한 무력도 갖추고 있는 경우가 대다수였고, 고니시 자신도 '전투에서는 선봉에서 싸워야 한다'는 신조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9] 도요토미 본인은 문맹이어도, 비서 격으로 승려 사이쇼 조타이를 두고 있었으니 결국은 알게 됐다.[10] 사실 고니시 유키나가에 대한 일본측 사료가 적은지라 이 시기 고니시의 의도를 완벽하게 오늘날 우리가 알 수 없다. 대한민국에서는 고니시가 이간계를 써서 이순신을 모함하는데 성공했다는 식으로 이야기되는 경우가 많고 각종 매체에서도 이런 식으로 그리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이런 문제는 양국간의 교차검증을 해야 하는 문제라 고니시의 의도를 함부로 단정짓긴 어렵다. 나쁘게 보는 쪽은 고니시가 이간계를 써서 이순신을 모함하고 조선수군의 전력 약화에 성공했다고 보고, 우호적으로 보는 쪽은 애초에 전쟁에 반대였던 고니시가 단지 도요토미 히데요시한테 주작질이 모두 탄로났다는 이유로 갑자기 전쟁에 우호적으로 바뀔 사람이 아니었다고 본다.(죽을 때조차도 할복을 거부할정도였던 사람이니) 따라서 화친실패에 결정적 역할을 한 가토 기요마사를 말 그대로 조선 수군의 손을 빌어 몰래 알려 제거하려 했다고 본다.[11] 한편 가토가 상륙한 뒤에 고니시가 조선측에 아쉬워한 내용도 조선왕조실록에 있다. 「조선의 일은 매양 그렇다.(너희 나라가 하는 일이 매번 그렇다.) 기회를 잃었으니 매우 애석하나 이 뒤에도 할 일이 있다. 」"朝鮮事每每如此失機會, 可惜可惜, 然此後, 亦有所爲之事云。" [12] 다만 이 사건은 고니시가 해냈다기보다는 조선조정이 개삽질했다고 봐야 한다.[13] 최종적으로 전군이 퇴각을 완료한 시점은 11월 25일.[14] 가톨릭을 비롯한 기독교에서 자살은 금기사항. 같은 가톨릭 신자였던 안중근 의사도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후 그 자리에서 자결하지 않고 재판을 통해 사형당한 것도 이 때문이다.[15] 고니시 마리아의 아들은 외가의 성씨를 따라 고니시 만쇼가 되었고, 훗날 신부가 되었다. 그러나 고니시 만쇼 신부 역시 1644년에 에도 막부가톨릭 박해에 걸려들어 순교하였다.[16] 다만 직계는 아니지만 그의 후손들이 어느 정도 살아남긴 했던 것 같다. 경복궁 궁궐 지킴이 중 하나로 한국인과 결혼해 슬하에 1남 1녀를 둔 고니시 다카코(小西貴子)씨가 그의 후손 중 하나이며, 2007년에는 후손들이 한국을 방문했다는 기사도 있다.[17] 그래서 1980년대에 나온 소설인 김성한7년전쟁이나 엔도 슈사쿠숙적같은 작품에서는 과거의 설을 채택해 서술하고 있다.[18] 문을 숭상하던 조선과 달리 당시 일본에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물론이고 거의 대부분의 무장들은 한문을 제대로 몰랐다. 아니 한문은 고사하고 자기 이름도 일본어로 쓸 줄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일본 무장들이 본격적으로 교양을 갖추게 된 건 크고 작은 전쟁이 끝나고 무사들의 성격이 행정관리와 같이 변화하는 에도 시대였다.[19]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이번에 진주로 가는 우리 일본 군대가 30만 명이나 되니 아마도 당해내지 못할 것이다. 편지를 보내어 은밀히 알려 진주 백성들로 하여금, 미리 예봉(銳鋒)을 피하게 하라. 그렇게 하면 우리 일본 군대도 성이 텅 비고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을 보고는 곧 철병(撤兵)하여 동쪽으로 돌아올 것이다.』[20] 선조 40권, 26년(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년) 7월 10일(임술) 8번째기사[21] 아주 없진 않으며, 적어도 동상이 세워질 정도면 지명도가 꽤 있다는 말이다. 다만 동상이 세워질 당시 우토시에서조차 반대 의견이 많았는데, 그만큼 400년간 평가절하되었다는 이야기다.[22] 육전에서 별로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수군을 동원할 때는 항상 선봉에 섰으니, 군사적 재능도 뛰어났을 것이다. 키이의 사이가 정벌, 시코쿠의 초소가베 씨 정벌이나 규슈의 시마즈 씨 정벌에서 수군을 이끌고 큰 활약을 했다.[23] 고니시가 참여한 전투 중에 패전이나 성과가 크지 않은 전투는 대부분 본인이 주도적으로 역량을 발휘할 만한 기회가 없었던 경우 아니면 압도적인 우위에 밀려난 경우 둘 중 하나였다. 4차 평양성 전투는 조선군과 명군 등 5만이 투입되어 단순 비교로도 고니시군의 3배에 달했고, 오토모가 원군을 보내주지 않아 이미 3차에 걸친 전투로 지친 고니시 군이 감당하기 어려웠다. 행주대첩 등 다른 전투는 모두 주요 지휘관이 아니라 그 일원으로만 참여했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세키가하라 전투조차 고니시 군은 주축이 아니었다.[24] 이방자 비의 외가.[25] 고니시 유키나가는 가토 기요마사를 무찔러달라는 청탁을 해서 조선 수군의 지휘관을 개깡패 이순신에서 허접한 원균으로 교체시켜버린 건데 그렇게 해서 왜군의 대승을 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