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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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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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역임 직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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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공화당 총재

초대
정구영

제2~3대
박정희

권한대행
박준규

파일:박정희 원본.png

대통령 기록관 공식사진[1]

파일:박정희 전 대통령 초상화 원본.png

청와대 세종실 전실에 걸려있는 공식 초상화

파일:President_Park.png

대통령 재직 당시 공식 사진

대한민국의 제5~9대 대통령

이름

박정희 (朴正熙, Park Chung-hee)

출생일

1917년 11월 14일

출생지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상모동[2]

사망일

1979년 10월 26일 (61세)

사망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 안가[3]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독립묘역

본관

고령 박씨 직강공파 29세손

부모

아버지 박성빈, 어머니 백남의

형제자매

5남2녀 중 5남

배우자

김호남, 이현란[4], 육영수[5]

자녀

박재옥[6], 박근혜, 박근령, 박지만

학력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졸업 (2기)

병역

육군 대장 예편 (제2군사령부)

종교

무종교

재임기간

1963년 12월 17일 ~ 1979년 10월 26일

신체

158cm, B형[7]

별자리

전갈자리

십이지

뱀띠 (정사년)

취미

독서, 붓글씨, 역사책 읽기

중수 (中樹)

서명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71px-Park_Chung-hee_signature.svg.png

비고

일본육사 졸업 후 일제 괴뢰국인
만주군 장교 활동


1. 개요2. 생애
2.1. 유년 ~ 40대2.2. 군사독재2.3. 5대 대통령2.4. 6대 대통령2.5. 7대 대통령2.6. 8대 대통령2.7. 9대 대통령
3. 묘소4. 평가5. 기타
5.1. 각종 타이틀5.2. 저서5.3. 각종 친필들과 그림들5.4. 미디어에서
5.4.1. 박정희를 연기한 배우들
6. 둘러보기7.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제5·6·7·8·9대 대통령

경상북도 구미 출신이며 본관은 고령 박씨이고, 호는 중수(中樹)이다. 제18대 대통령박근혜의 친부이기도 하다.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찬탈한 후 관권/금권 선거, 3선 개헌10월 유신으로 장기 집권을 획책해 18년간 집권한 독재자[8]이자 임기를 측근암살로 마친 군인 출신의 정치인이다.

※ '개요' 문단은 토론24630, 토론37217토론39765에 근거합니다.

2. 생애[편집]

2.1. 유년 ~ 40대[편집]

파일:박정희.jpg

문경 훈도(교사)시절 박정희

일제강점기1917년 11월 14일, 경상북도 구미에서 하급 군관인 효력부위[9]를 지낸 농민 박성빈과 백남의 부부 사이에서 태어났다. 박정희 본인은 5남 2녀 중 막내다. 병을 앓고 있던 아버지의 간청으로, 19세이던 1936년에 집안 어른들이 16세의 김호남과 결혼을 시켰고, 이듬해에 딸 박재옥이 태어났다. 그러나 김호남과 사이가 좋지않았다고 한다.#

1932년 3월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대구사범학교에 응시했다. 당시 박정희 집안은 가난해 학비를 댈 엄두를 내지 못했고 진학을 포기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구미공립보통학교의 담임과 교장이 부모를 설득해 응시하게 되었다. 어머니 백남의는 박정희가 "합격하고 진학을 못 하면 한이 생긴다고 하여 불합격을 빌었다"라고 빌었다고 한다. 1932년 4월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10]에 제4기생으로 진학하였다. 정원 100명 중 박정희는 51등으로 합격하였다. 대구 시내 기숙사에서 등하교하였고, 품행평가에서 '양(良)'이 4번, '가(可)'가 1번이었지만 "군사 체육" 관련 교과목의 성적은 뛰어났다고 한다.[11] 1937년 3월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37년 4월 문경공립보통학교 교사로 4학년으로 부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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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3월 31일 만주신문(満洲新聞) 7면[12]
상단 우측으로부터 4번째 줄, 朴正熙 군(23)이라 나와 있다.[13]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중략)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滅私奉公), (犬馬)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


박정희 혈서(血書)전문

교사 재직하던 중, 어린 시절부터 군인에 대한 동경, 한국인 교사 차별 문제, 가족 문제[14] 1938년 11월, 만주군육군군관학교 1기[15][16]에 1차로 지원했지만 나이 제한[17]으로 거절당한다. 동료 유증선 선생의 권유로 탈락 재고하기 위해 면도칼로 새끼손가락에 피를 내 '혈서'를 학생시험 용지에 써서 보낸다.[18] 1939년 3월 만주신문에 개재되고, 이후 고향 선배이자 당시 시험관이었던 조선인 출신 만주군 간도특설대 대위 강재호(姜在浩)가 신문을 보고 후원자가 되고, 10월 도움을 얻어 군관 선발 시험을 본다.[19] 결국에 만주국육군군관학교에 2기로 합격자 240명 중 15등으로 입학한다.

파일:1942년 3월 만주 육군군관학교 졸업식.jpg

1942년 3월 24일, 만주일보(滿洲日報) 수석 박정희(추정)가 경례를 하고 상을 받는 3명의 우등생이 있다.[20]

예과(1942년)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수석 졸업생으로 "대동아 공영권 이룩하기 위한 성전(聖戰)에서 나는 목숨을 바쳐 사쿠라와 같이 훌륭하게 죽겠습니다"라고 선서하며, 만주국 황제 푸이에게 은사품으로 금장시계를 수여 받고 일본육사 유학생대 편입 특전을 받았다. 그리고 당시 만주군관학교 예과 상위 성적자에게 베풀어지는 관행에 따라 일본육군사관학교(신경육군군관학교) 본과(2년)에 진학해 졸업하였다.[21]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px-Park_Japan.jpg

1944년 6월, 만주군 육군 예비소위 시절 박정희 #,#2

1944년 4월 일본육사 57기를 3등으로 졸업해 견습군관으로 관동군 635부대에 배치된다. 그해 7월 황군(皇軍) 육군 소위 '만주군 제6군관구 소속 보병 제8단' '[22][23] 배장(排長:소대장)으로 근무한다. 같은 해 7월말 8월초까지 제8단의 2개 대대가 일본군과 합동으로 팔로군을 공격할 때 소대장으로 작전에 참가했다.[반론][25] 박정희는 부대에서 인정받는 엘리트로, 1944년 12월 23일 보병 8단 단장의 부관실에 부임해 작전참모 역할을 하는 을종(乙種) 부관 겸 부대의 단기(團旗)를 책임 관리하게 된다.

1945년 7월 중위로 진급한다. 1945년 8월 보병 8단 예하 각 부대는 둬룬(多倫)으로 진출해 소련군의 진격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받고 8월 10일에 출발하여 17일 집결했으나 일본이 패망 소식을 접하고, 8단의 중국인 군인들에 의해 신현준 등과 함께 직위에서 해임되고 무장을 해제당했다. 9월 팔로군의 지휘를 받는 6단과 함께 미윤으로 이동한 후, 9월 21일 도망치기 위해 소속 부대가 없어진 박정희는 신현준, 이주일 동료들과 함께 베이징 쪽으로 건너가, 일본군만주군에 소속되어 있던 장교 경험자를 찾고 있던 한국 광복군에 편입되어, 한국광복군 제3지대장 김학규가 지휘하는 제1대대(평진대平津) 제2중대장에 임명되어 광복군 장교로 활동하였으나, 4월 평진대(제1대대)가 해산한 후, 5월 8일 미군정의 방침에 의해 미군 수송선을 타고 부산항으로 귀국하였다.[26][27]

가까스로 도망쳐 나와 빈털털이로 고향 구미로 돌아오게 되었다. '다른 가족도 안정된 교사직을 버리고 출세한다고 만주로 갔다가 거지꼴로 돌아온 박정희에게 눈치를 주었다'고 한다.# 1946년 9월 귀국한 박정희는 조선경비사관학교에 입학해 3개월 단기과정을 마치고 12월 14일 2기로 졸업하고, 남조선국방경비대에 들어가서 포병 소위 계급을 부여받는다. 복무 도중에 셋째 형인 공산주의자였던 박상희대구 10.1 사건으로 경찰에게 사살되었다. 셋째 형 박상희의 친구였던 이재복(李在福)은 박상희가 죽자 그의 가족을 돌봐주는 등 박정희 집안과 가까운 사이였는데, 그러던 중 우익에게 피살된 형 박상희에 대한 복수심과 이재복의 권유로 남조선로동당에 들어가서 국군남로당 프락치들의 군사총책으로 활동하였다.[28]남로당 활동 당시 박정희는 공산주의자들이 남한에서 감행했던 작전 중에 가장 큰 규모였으며 가장 성공에 가까웠던 정부전복 기도사건(대한민국 국방경비대 침투사건)을 지도했다.

박원석이 공산주의자라는 것도 당혹스러운데, 그 위가 바로 박정희 소령이라 하니 더욱더 황당한 일이 었다.(중략)김창룡이 간 뒤 채병덕육군참모 총장이 내게 “김창룡이가 말하기를 박정희가 남로당 프락치인 것은 확실한 것 같은데 풀어줄 길은 있다고 하는구만...” 한가닥 실마리가 풀려가는 소리였다.(중략)공산주의자를 잡으러 갈 때 열 번 만 박정희를 앞세우고 얼굴을 내비치게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후략)"


김정렬 국방장관의 '김정렬 회고록' 1993년, 박정희 소령의 고난 116p~121p의 일부#원문#발췌

1948년 제 1연대 정보주임장교이자 육군본부 정보국에 근무하던 김창룡이 주도한 숙군 작업 도중에 여수·순천 반란사건과 연루돼 박정희가 체포되는데, 우선 남로당 군총책 이재복이 '거동수상자'로 잡히게 된다. 이재복에 이어 비서겸 군사연락책 김영식이 체포되면서 숙군 수사가 급진되는데, 수사팀은 김영식을 통해 명단을 얻게 된다. 이 명단에 '박정희 소령'이 포함되있었다. 결국 11월 11일 박정희는 체포된다. 수사 과정에서 사실을 순순히 시인하면서 군내 남로당 조직원 약 300명의 명단을 제공하고 숙군사업에 적극 협조한 점을 인정받아 1949년 2월 13일 1심에서 사형을 면하고 “파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동거녀 이현란은 공산주의가 싫어서 월남한 사람이었는데, 이것 때문에 박정희에게 실망했다. 게다가 박정희가 아내딸내미까지 둔 유부남이라는 사실도 이현란에게 들통났다. 3남 박상희가 경찰에게 총살당하고, 막내아들 박정희마저 무기징역 선고를 받자, 그 충격으로 어머니 백남의는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2심에서 “징역 10년으로 감형"되었고 같은 만주국 출신이자 당시 육본정보국장으로 김창룡의 직속상관 백선엽 대령의 구명으로, 사형을 면하고 예편되었으며 전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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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저 보고서에서 박정희의 남로당 시절에 대한 기록

다만, 박정희만 특별 대우를 받아 사면된 것은 아니고,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이응준이 혐의자들과 일일이 개별 면담한 뒤 상당수를 군문을 나가는 조건으로 훈방 조치했다고 한다.[29] 이후 민간인 신분인 군속으로 육군에서 근무하다가 6.25 전쟁이 발발하자 육군 포병소령으로 복귀하였고 육군본부 작전정보국 제1과장을 거쳐 9월 15일 중령으로 진급하고 대구로 올라가는 육군본부 수송지휘관을 맡았다. 1950년 2월에는 동거녀 이현란과 헤어졌다. 사실 이현란이 계속 박정희와 다투다가 끝내 가출했기 때문이다.[30] 같은해 11월에는 첫 아내 김호남과 갈라서고, 12월에 육영수와 재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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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12월 12일, 천주교 대구대교구 주교좌 계산성당에서 진행된 박정희-육영수의 결혼사진.

1952년 5월 이용문의 주도로 계획된 군부의 이승만 축출 시도에서, 이용문의 보좌관이었던 박정희 역시 정변 계획에 참여하였으나 계획은 미수로 끝나게 되었다. 1953년 11월 25일에는 육군 준장으로 승진하여 장군이 됐고 1955년 7월 14일에는 제5사단 사단장이 되었다.

1957년에는 소장 진급자 명단에 올랐을 때 과거 남로당 경력을 문제삼은 진급 담당자들[31]백선엽에게 항의하였지만, "박 장군에 대해선 내가 보장한다."며 박정희로 진급하는 데 또 도움을 주었다. 이 덕분에 박정희는 대통령이 된 후 백선엽을 "백 형"이라고 부를 정도로 그와 가까워졌다.

소장 계급으로 제6군단 부군단장으로 부임한 박정희는 1957년 제7사단 사단장, 1959년 7월 1일 육군 제6관구사령관이 되었으며 1960년 1월 21일 부산군수기지사령부 사령관으로 발령받으며 군내 요직을 거쳤다. 그런데 4.19 혁명으로 같은 해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고 민주당이 집권하자, 박정희는 육군본부 작전참모부 부장으로 부임했고 이종찬은 장면 국무총리에게 박정희의 중용을 건의하면서 출세가도가 열리는 듯했다.

하지만 장면 총리가 미 육군 제8군사령관 겸 UN군총사령관 육군대장 카터 매그루더와 논의하면서 육본을 통해 박정희의 남로당 활동 전력이 알려지면서 1960년 12월 15일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으로 좌천당한다. 또한, 당시 박정희를 좌익으로 지목한 김형일은 박정희와 원수 사이가 됐고, 이후 군정에 반대하다가 참모차장에서 예편됐다.

이 일로 앙심을 품은 박정희는 이전 상관이었던 이용문처럼 정변을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1961년 4월 19일을 거사일로 잡았다. 박정희는 4.19 혁명 1주년을 기념으로 학생들이 대규모 집회를 할 것으로 예상하였고, 이때 혼란을 틈타 집회를 진압하다는 명분으로 정권을 탈취할 생각이었지만, 아무 일도 없어 공황 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2.2. 군사독재[편집]

결국 박정희는 손에 피를 묻히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쟁취하였다. 그의 나이 만 43세에 쿠데타군 지도자로 추대된 것이다. 쿠데타군은 1961년 5월 16일 해병대 병력 일부를 시작으로 대한민국 제2야전군 상당수와 제1야전군의 일부가 유엔군사령부로부터 이탈하여 대한민국 정부 주요 기관 및 시설을 정복하기 시작하면서 실체를 드러냈다. 이는 박정희를 구심점으로 하는 사회에 불만이 가득한 장교들에 의해 계획적으로 이루어졌다. 육군 중장 장도영 관할 밖의 제1해병여단과 공수단을 비롯 서울 인근으로는 서울 동부의 제6군단 포병단, 서울 서부의 제30사단, 서울 남부의 제33사단, 서울 북부의 5사단 그리고 춘천, 대구, 광주, 부산에 주둔 중이던 군대들이 궐기하여 이른바 5.16 군사정변을 일으켰던 것이다. 한강대교를 방어하던 헌병 제7중대 소속 병사 두 명이 쿠데타군의 총격에 피살되었다.

KBS라디오방송국, 육군본부, 국방부, 6관구 사령부(제 1지휘소로 사용), 서울지방경찰청, 파출소, 중앙전화국, 시청, 도청, 발전소 등이 표적이 되었다. 정부 수반이 머물렀던 반도호텔(현 롯데호텔)[32]에는 육군 특수부대(GDT)의 기습이 가해졌다. 그러나 장면 총리가 호텔 맞은편의 주한미국대사관, 안국동 미국대사관 숙소를 거쳐 혜화동 가르멜 봉쇄수녀원[33]으로 피신하고, 여러 각료 또한 은신함으로써 작전이 실패하고 계엄령 승인을 얻지 못하게 된다. 이에 박정희는 오전 9시 경, 장면 총리에게 피신을 권한 후 체포당한 현석호 국방장관과 연금당한 장도영을 데리고 해군참모총장 해군중장 이성호 제독, 공군참모총장 공군중장 김신 장군, 해병대사령관 해병중장 김성은 장군과 함께 청와대로 향해 윤보선 대통령으로부터 계엄령 추인 및 혁명 지지를 요구한다. 하지만 대통령 또한 이를 완강하게 거절하며 오히려 사퇴 의사를 밝혔고, 오전 10시경 국회해산 및 비상계엄을 알리자 곧 북한군이 휴전선에 결집, 10시 18분 경에는 매그루더와 주한 미 대리대사 마셜 그린이 장면내각 지지를 선언하는 한편, 국민들이 군사봉기를 딱히 반겨주지도, 반대하지도 않았다.[34]

이에 정권군부에 넘어갔구나 하고 국민이나 미국이 믿게 하기 위해 그날 장도영 등을 앞세워 여러 포고문을 쏟아내는데[35], 전국의 모든 정당, 사회단체의 정치활동을 불법으로 하고 정치에 직접 관여하지 않은 대통령을 제외한 모든 정치인과의 협상을 배격할 것임을 밝히며, 국무위원, 정무위원을 모조리 체포하고, 대의원 헌법기관을 정지시키는 한편, 오후 7시부터 장면 정권의 모든 권력을 군사혁명위원회가 최종적으로 인수함에 따라 국가 기구의 전권을 행사할 것이고, 오후 8시를 기해 민의원, 참의원, 지방의원 등 국회는 모조리 해산한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이후 오후 10시 30분에 윤보선 대통령으로 하여금 민주당(1955년)원들의 신병을 전부 보장한다는 대가를 주고 대국민 특별담화 방송을 하게 하여 장면과 각료들에게 투항을 권고하였고 17일 내부 불만을 잠재우면서 장면의 동태를 예의주시하다가 그날 저녁부터 18일 아침까지 매그루더로부터 출동명령을 받은 야전사령본부청을 점령하고 대한민국 육군 제1군사령관 이한림의 체포를 단행한다.

한편, 장면 총리는 16일 외부에서의 접촉을 차단하고선 유엔군에 대한 개입을 요구하는 편지를 미대사관에 보냈다. 17일에는 오후 가까운 사이였던 경향신문 사장 한창우와, 18일 오전 국무총리고문 도널드 위태커와 비밀리에 접촉을 가지며 동향을 파악하였다. 이후 18일 장도영이 찾아와 설득한 끝에 대동하여 18일 12시 30분 군사혁명위원회에서 소집한 69차 임시국무회의에 참여하게 되는데 윤보선 대통령은 국무회의가 아니라 투항식에 참여한 것이었다고 회고하였다.[36]

이로써 박정희는 내각 총사퇴를 결의시키고, 국무회의 및 국무총리로부터 계엄령 승인을 얻어 1시간 뒤 윤보선 대통령이 이를 추인하도록 함으로써, 봉기 60여 시간 만에 마침내 제2공화국을 무너뜨리고 대한민국 정부, 대한민국 국회, 대법원의 역할을 포함한 대한민국의 전권을 군사혁명위원회로 가져온다.

이에 따라 박정희는 이튿날 아침 군사혁명위원회를, 장도영을 의장으로 하고, 자신을 부의장으로 하는, 국가재건최고회의로 개편하고 1962년 12월 31일까지 전국의 모든 정치인 활동을 일체 금지하시키며 미국과 비공식적인 면담을 가진 뒤 5월 23일 박-매그루더 협상을 타결함과 동시에 포고령을 내려 정기 간행물 1,200여 종을 모두 폐간, 6월에는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을 공포, 육군 보병중령 김종필을 위시한 중앙정보부를 발족시켜 세력을 견고히 한 다음, 7월 3일 인신 구속 등에 관한 임시 특례법(인신 구속 특례법)을 통과시킴에 따라 법관의 영장도 필요없고 형사소송법을 따를 필요없이 반혁명으로 의심되면 어떤 국민도 마음대로 구속, 압수, 수색할 수 있게 되어 의장 장도영과 43명의 인사들을 숙청하고[37], 의장직에 올라, 1961년 11월 11일 미국 초정에 따라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과 민정이양에 관한 회담을 나눈다.

동시에 민생 안정책으로 농가 부채 탕감, 농산물 가격 안정 정책을 실시해 농민들의 호응을 얻고 제2공화국에서 처벌중이던 3.15 부정선거 관련 책임자를 소탕, 정치깡패들을 일거에 체포 후 조리돌림하며 국민과 지식인들에게도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조용수같이 민간인이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사형 당한 일도 있다.[38]

1961년 6월 3일에는 윤보선 대통령이 조속히 민간에 정권을 넘겨야 하며 특히 이 문제에 대해서는 9월에 열리는 유엔 총회를 고려해야 한다고 한 것을 동아일보가 "조속한 정권 이양 필요"라는 제목으로 1면에 보도한 적이 있는데, 검열을 안 받고 이게 신문에 실려 동아일보 편집국장, 정치부 차장, 기사를 쓴 이만섭 기자를 비롯한 정치부 기자 등을 연행되고, 이만섭이 구속되었으며 윤보선 대통령의 비서관 유동준까지 최고회의에 끌려갔다고 한다.

한편 중앙정보부에서는 정치학, 법학, 경제학, 교육학학자들과 중앙정보부 간부를 포함한 21명으로 구성된 대외문제연구소를 설립하는데 여기서 1961년 10월에 1963년 8월 15일 민정을 이양한다는 전제하 군인들이 예편해 대선총선에서 승리함으로서 민정에서도 정권을 잡아야 하며, 선거 승리를 위해 군인이 참여할 정당을 만들어야 하고,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새 헌법과 선거 제도를 고안해야 한다는 계획서를 작성한다.

이에 중앙정보부 행정차장 이영근 총괄로서 1962년 1월 말부터 비밀리에 법조계, 언론계 등 각계 인사 52명으로 재건동지회를 결성, 1962년 4월 훈련원을 설치하고 1962년 말까지 1,000여 명의 요원을 교육했으며, 동시에 대외적으로는 1961년부터 1965년까지 일본 6개 재벌로부터 정치자금 총 6,600만 달러를 받아왔고, 대내적으로는 1962년 겨울 김상돈, 조중서 등 민주당 41인을 반혁명으로 몰아 체포하기도 한다.

또한 징벌적, 적극적 부쟁처리법으로서 재계를 강제 동원하거나 압박하는데 일례로 1962년 5월 25일에는 부정축재법 위반으로 김지태를 체포해 그의 문화방송, 부산문화방송, 부산일보 경영권을 중앙정보위원회로 압수, 결국 5.16장학회, 정수장학회로 넘겨주게 되는데 자금을 제공해달라는 요구에 김지태가 응하지 않하지 않은 것이 원인으로 알려졌었다.

또 다른 사례로는 1962년 6월 10일에는 중공업화를 통한 내포적 공업화 재원을 확보하기위해 미국 몰래 화폐개혁을 실시하고 잇따라 동결 조치를 발표하여 장롱 속에 있는 돈들을 끌어내고 재산에 따라 차등적으로 정부 출연기관 주식을 강매하게 하며 삼화제철등을 동원하려 한 것이 있다. 동시에 외국인 토지소유 금지법 등으로 인해 현금 위주로 재산을 축적하고 있던 국내 화교 상권을 타격하기도 했다. 덕분에 아시아 경제를 주름잡던 화교들이 한국에서 영향력은 크게 위축되었다. 그러나 예상과 다르게 지하경제가 없었고 사업 자금 동결에 따라 중소기업 가동률이 50% 밑으로 떨어지는 등 역효과만 나타나자 뒤늦게 이를 안 미국의 요구대로 실패를 인정, 이후 차츰 미국의 주장을 수용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박정희는 중공업화계획 연기, 재정 안정화, 금리 현실화, 환율 정상화, 한일수교 등 미국의 여러 요구에 대한 승낙을 발판으로 원조, 차관 등의 인센티브를 더 따내는 전략으로 선회하게 된다. 그렇게 1962년 12월 17일이 되자, 박정희는 개헌안을 국민투표에 부쳐 통과시키고[39] 26일 일원단제 및 대통령책임제를 핵심으로 하는 개헌헌법을 공포하고, 이튿날 대통령 선거 출마 의사를 밝히기에 이른다.

민정이양이 다가오자, 대통령 중심제와 단원제 국회를 뼈대로 하는 제5차 개헌을 공포하고, 증권파동을 통한 정치자금, 일본 재벌의 로비 자금 등으로 민주공화당을 창당하여 세를 불린다. 그리고 혁명공약에 따라 민간인 신분의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여 정변 당시 자신이 끌어내렸던 윤보선과 국민 선거로 맞붙는다.

당시 윤보선과의 선거에서 윤보선 측은 박정희의 남로당 경력을 두고 빨갱이로 몰아가면서 극렬한 공격을 퍼붓는다. 이에 박정희는 1963년 10월 5일 동아일보 1면 반단 광고로 다음과 같은 광고를 내면서 매카시즘적인 공격으로 모욕하지 말 것을 경고한다. 이후 반공을 국시로 내걸면서 소위 빨갱이 논란으로 정권을 공고화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굉장히 아이러니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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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10월13일 윤보선이, 박정희가 과거에 남로당에 가입해 "김학림, 조병건, 배명종"과 같이 무기징역을 받았다고 폭로하며, 1949년 2월 18일자 서울신문을 기사를 증거 제출했다는 것이 호외에 실렸다.동아일보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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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당시 동아일보 1면 광고문에서 발췌>
우리들은 이제 이 나라 사회의 근대화작업을 끈덕지게 방해하고 있는 일체의 매카시즘을 타도 청소해야 할 공동의 전선에 섰읍니다.
무슨 일이 있던지 우리는 차제에 한국적 매카시즘의 신봉자를 우리사회에서 일소시키기 위해 분연히 궐기하여 과감히 투쟁합시다.

2.3. 5대 대통령[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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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12월 17일 ~ 1967년 6월 30일(만 3년 195일).

정부의 시책을 이해하고 또한 협조하는 건실한 태도와 함께 근면한 생활인의 자세를 살려나가는 한 복지사회를 지향하는 우리의 노력과 분발은 반드시 그리고 하루 속히 결실될 날이 올 것을 나는 확신해 마지않습니다.

- 1964년 신년 연설 中

1963년 10월 15일, 박정희는 윤보선보다 0.97% 많은 표를 받음으로써, 5대 대선에서 승리를 거둔다.[40] 윤보선을 후보로 내세운 야권 세력은 허정송요찬의 사퇴로 표 결집을 시도했으나, 결국 박정희에게 투표 차로 패배하게 된다.

박정희가 내세운 젊고 과단성 있는 이미지로 혁신계 세력의 지지를 얻었고 군정 시기에 거둔 적극적인 중농정책 결과로 인해 호남, 영남 등의 농민층으로부터 많은 표를 받을 수 있었다. 또한 윤보선 후보가 박정희 후보의 남로당 시절 일을 거론하며,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의 색깔론을 들고 나왔는데, 당시 상대적으로 이념관계로 인하여 피해를 많이 본 호남, 영남 지역에서는 이에 대한 역효과가 발생하여, 박정희 후보가 해당 지역에서 압승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시각도 있다.

12월 12일 박정희는 김현철의 후임으로 최두선을 국무총리로 임명하고 김유택을 부총리, 정일권을 외무부장관으로 하는 제3공화국 초대내각을 구성하여, 12월 17일 5대 대통령에 취임함과 동시에 이를 출범시킨다.[41] 12월 20일에는 5.16에 참여했었던 제1해병여단[42]을 김성은 국방장관, 이후락 청와대 비서실장 등과 함께 방문해 시찰하고 21일 서민 필수품을 중심으로 하는 물가안정을 지시, 24일에는 점차적인 물가통제의 해제, 안정을 기조로 하는 장기경제개발계획의 합리적 추진, 내핍생활 장려, 수출 진흥을 골자로 하는 경제시책 4원칙을 발표하는 한편, 정일권 외무장관과 함께 한일국교 정상화에 대한 논의를 검토한다.

12월 30일에는 김현철을 대통령 전권특사로서 2개월간 우방 40여 개국에 친선 방문 시키고 이듬해 1월 6일 한입협상과 관련하여 김용식을 수석대표로 하는 전권교섭단을 일본에 파견, 한미일 상호협력 등을 어젠다로 미국과의 수뇌회담을 가졌다.

그러나 공화당 총재로서 대선에서 승리한뒤, 총선에서도 크게 승리하여 공화당이 의석의 62% 이상을 확보하였으나, 비(非) 공화당 인사를 중심으로 내각을 구성함에 따라 내적으로 개각 논란 등 잡음이 생기기 시작했고 외적으로는 겨울 쌀을 비롯한 생필품의 가격이 무섭게 올라 민심이 술렁이는 한편, 3월 9일 유진오 윤보선, 장준하, 장택상 등을 비롯한 200여 명의 야권 인사들을 주축으로 불리한 한일회담 백지화를 요구한 대일굴욕외교반대 범국민 투정위원회 결성 및 3월 24일 고려대, 서울대, 연세대 학생들을 필두로한 1차 6.3 운동을 분수령으로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최두선이 사퇴, 5월 11일 새 국무총리로 임명한 정일권이 제청한 내각으로 교체되고, 공화당은 내분에 빠지면서 6월 5일에는 공화당 의장 김종필이 사퇴, 6월 3일부터 56일간 서울에 비상계엄이 떨어지기도 하였다.

이승만 정부 시기부터 진행되던 한일국교정상화에 참여하였다. 이승만 시절 한일 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이유는 대통령 이승만 그 자신이 그래도 독립운동가 출신이었던 지라 일본에 대한 반감이 어마어마했던 것도 있고, 결정적으로 재산 청구권 문제와 평화선 문제가 있어 합의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박정희는 정권을 인정받아야 하는 불리한 위치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미국 대사관의 긴밀한 협력 아래 요청된 대일정상회담, 방미 등을 수용적으로 받아들이며 세력 기반으로 다지는 데 활용할 수 밖에 없었다.

이로써 박정희는 CIA의 비밀스러운 관여 속 1962년부터 중앙정보부김종필을 보내 일본 외무장관 오히라와 비밀교섭을 진행했다. 하지만, 독립 축하금(대일 청구권 자금) 형식으로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민간 상업 차관 1억 달러 제공이 결정되자 반대 여론이 들끓었는데, 식민지 시절에 관한 일본의 통렬한 반성이 누락된 굴욕적인 회담이었기 때문이었다. 독도 영유권 문제도 어물쩍 넘어가서 지금까지 영토분쟁의 원인이 되었다. 1964년,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한일 국교 정상화에 반대하는 시위(6.3 항쟁)가 일어났고 제17대 대통령 이명박도 반대시위에 참여했다가 옥고를 치렀다. 박정희는 비상계엄과 휴교령을 선포해 학생 운동을 진압하고 65년 한일기본조약을 체결한다.

1964년 7월 10일 정부는 공산 게릴라에게 고통받고 있는 베트남 공화국에 파병하기로 제안하고, 21일 국무회의를 거쳐 30일 만장일치로 국회 동의를 얻음으로써 양국간의 유대와 경제적 협력을 강화했다.[43] 연말 12월 6일부터는 서독을 직접 방문해 8일 하인리히 뤼프케 서독 대통령과 약 1시간 동안 정치, 경제 등에 관한 한독정상회담을 가지고, 이튿날 에르하르트 서독 수상과 회담을 가져 양국의 유대를 증진 및 경제협력의 구체적인 방법을 합의하였으며, 8일간 독일에서 머물다가 15일 귀국, 일본에서 미일경제회담을 마치고 방한해 청와대로 온 러스크 미 국무장관 일행과 29일 한미, 한일 전반을 협의한다.

이어 이듬해 1월 26일에는 정부 내 논의끝에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한민국 비전투부대 2,000여 명을 추가적으로 파병하기로 결정하는 한편, 4월 29일 말레이시아와 정삼회담, 5월 19일 미국 대통령의 초청에 따른 미국과의 정상회담을 통해 자유진영의 결속을 다지고 통해 베트남 수호 재천명과 한국에 대한 미국 차관 1억 5천만 달러 추가 등의 공동성명을 내고 5월 26일 귀국한다.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에 조인함으로써 한일국교 정상화를 도모하고 7월 2일 국무회의에서 베트남에 전투부대 1개사단을 파병을 결의, 8월 2일 대규모 군사 파병 계획을 공식화한다.

이 기간 동안 주로 경제정책을 추진했는데, 제1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 추진되었던 것도 이 시점이었다. 그러나 경제정책을 수월하게 하기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했으며 그것은 서독광부간호사 등을 파견해서 나온 수익금과 중동특수, 경제원조와 투자단 유치, 1964년부터 베트남 전쟁에 파병 때 미국으로부터 받은 경제적 지원과 1965년 한일기본조약을 맺고 일본으로부터 받은 자금 등으로 충당했다.

또한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린든 B. 존슨의 요청에 따라 베트남 전쟁 파병을 받아들여 1964년엔 태권도 교관단과 같은 비전투인력이, 1965년부터는 전투병 파병이 본격화 되었다. 이 당시 박정희는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방과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파병을 결정했다'라는 명분을 만들기 위해 국회 내에 파병 반대 세력을 계획적으로 조직하여 미국의 지원을 늘릴 수 있게끔 하는 영리한 외교 전략을 구사하였다.

실제로 브라운 각서에서 국군 장비의 현대화, 경제 개발을 위한 차관, 베트남 현지 건설 사업 참여권 등을 보장받았는데, 이로 인해 벌어들인 외화획득은 베트남 특수라 불리며 경제자금으로 쓰였다. 그러나 이중배상금지법을 도입하여 문제가 된다. 군인, 군무원, 경찰공무원이 훈련이나 전투시 상해를 입을 경우 다른 법률을 통해 보상을 받을수 있다면 국가배상 청구권을 제한하는 법률이다. 군인에 대한 배상액이 부담이 되어 제정했으나 대법원에 의해 위헌판결을 받자 유신헌법을 제정하면서 '헌법규정' 으로 도입한다.

이게 현행 헌법까지 유지되고 있는데 대표적인 악법으로 꼽힌다. 내곡동 예비군 총기난사 사건 피해자들이 국가배상 소송을 못 거는 이유도 바로 이 조항 때문. 헌법 조항에 대한 위헌시비가 나오는 이례적인 경우의 조항이다.

2.4. 6대 대통령[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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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7월 1일 ~ 1971년 6월 30일(만 4년).

1967년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는 경제발전의 성과에 대한 국민적 지지를 얻어, 또 다시 구태의연한 윤보선을 후보로 내세운 신민당을 큰 득표 차로 따돌리며 재선에 성공했다. 한편 김신조 사건푸에블로호 피랍사건이 연이어 터지자, 박정희 정부의 본격적인 공안 분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했다. 주민등록증 제도 또한 이 시기에 나왔는데, 제도의 목적도 불온 분자 색출에 용이하게끔 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리고 인민혁명당 사건동백림 사건 등 현재 모두 무죄 판결난 간첩 조작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져 훗날까지 많은 비판을 받게 된다. 동시에 박정희의 초법적 권력 행사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국가 안보 강화와 경제 발전을 구실로 3선 개헌을 단행, 야당인 신민당과 민주화 운동세력의 격렬한 반대 투쟁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국회의사당 별관에서 3선 개헌안 국민 투표 법안을 변칙적으로 통과시켰다.

3선 개헌은 공화당 내에서도 반발이 많았는데, 이미 그 시점에서는 "각하께서 2번 하셨으니 후계자로는 누굴 정하지?"라는 논의가 진행되고 있었다.1967년 대선 당시 김형욱은 박정희가 술자리에서 3선 욕심을 공공연히 피력하자, 솔직히 무서웠다고 훗날 회고록에서 밝혔다. 박정희는 당시, 후계자로 내정되다시피 한 김종필을 2인자 자리에서 몰아내기 위해 김형욱을 시켜 도청과 가택수색을 병행해가며 그를 옥죄였다. 또한 JP 계열 인사로 이루어진 국민복지회 소속 의원들을 줄줄이 잡아들여 중앙정보부[44]에서 고문하기에 이르는데 최영두 의원은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이미 3선 개헌이 확정된 시점에서부터 차기 집권이 확실시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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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개발 정책 또한 많이 이루어졌다. 해외 차관, 기술 협력을 통해 국가차원의 시멘트 공장, 비료공장을 꾸준히 세우며 수입대체산업화에 박차를 가했고, 농수산개발, 철도와 경인고속도로경부고속도로 등의 도로 건설, 발전소 및 송전 시절 건설, 댐 건설, 소비재 생산 장려하는 등 필리핀, 미얀마, 베트남, 인도네시아와 같은 정책을 펼쳤다. 특히 1970년대 건설된 경부고속도로는 오늘날 경제 개발의 상징 중 하나가 되었으며, 1970년부터는 일본의 도움을 받아 포항제철설립에 착수했다. 그 결과 수출액이 신장하고 수출주도산업화도 병행되었으며, 기간산업과 노동집약, 조립가공형 중화학공업또한 발전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양극화정경유착, 노동자 처우문제, 환경오염 문제 등이 심화되기 시작했다. 전태일이 분신한 사건도 바로 이 시기.

2.5. 7대 대통령[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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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7월 1일 ~ 1972년 12월 26일(만 1년 178일).

3선 개헌을 단행한 뒤 2년 만에 치러진 선거에서 박정희는 신민당의 김대중 후보를 53.2%의 득표율로 따돌리며 3번째 집권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전의 선거와는 달리 막걸리, 고무신 선거라 불리는 부정선거 의혹과 지역감정 유포 때문에 야당의 비판이 일었다. 김종필이 이미 이 선거에 당시 국가예산의 15%를 썼다고 증언한 바 있었고, 김대중에 대해서는 선거에서 이기고 개표에서 졌다는 말이 유행처럼 돌았다. 당연히 박정희는 정권의 위기감을 느꼈다. 농촌생활 진흥운동인 새마을운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국가주도의 경제성장 정책의 문제점이 표면화되기 시작해서, 전태일의 분신사건[45]으로 저임금, 장시간 노동으로 대포되는 노동계의 인권운동이 시작되었다.

국외에서는 닉슨 독트린으로 공산권과 자유주의 진영 사이에 평화 무드가 흐르자, 박정희도 이에 발맞춰 1971년부터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남북 적십자 회담을 시작했고 전두환 정권 때 이산가족 상봉이 실질적으로 이루어졌다. 72년에는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을 파견해 김일성과 만나게 한 뒤, 이에 대한 답례로 북한에서 보낸 박성철을 만나 비밀회담을 가졌다. 그리고 그 해 남북은 평화통일의 3대 원칙(자주,평화,민족대단결)에 합의한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였고 남북한 공식 대화기구로 남북 조절위원회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이 평화무드는 이후 벌어질 10월 유신에 대비해 국민여론을 완화시키기 위한 포석이었다. 이 시기의 경제정책 중 하나는 1972년 8월 3일 ‘경제안정과 성장에 관한 대통령긴급명령 15호'로 기업사채를 동결한 것이다. 이 긴급명령은 경제악순환의 근절과 기업이 고리사채에 허덕이는 것을 구제하기 위하여 기업사채를 월리1.35%, 3년 거치 5년 분할상환하도록 한 것이다.

2.6. 8대 대통령[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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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12월 27일 ~ 1978년 12월 26일(만 6년).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는 10월 유신을 선포하여 국회를 해산하고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시킨다. 그리고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해 모든 출판, 언론활동을 검열하였고, 단체활동도 제한되었다. 이런 억압적인 상황 속에서 박정희는 제3공화국 헌법을 폐기하고, 대통령에게 초법적인 권한을 주는 유신헌법을 통과시켜 저 유명한 체육관 선거를 통해 8대 임기를 시작한다. 자세한 내용은 10월 유신 문서 참조.

1973년 새마을운동을 본격적으로 실시하고, 중화학 공업 육성을 선언한다. 공업진흥청을 신설하고, 기능공 양성정책과 공업단지 조성계획을 수립한다. 1974년 8월, 1년 전 사건의 여파에 의한 것이라 평가받는 박정희 저격 미수 사건이 일어난다. 이후 차녀 박근혜가 박정희 사망 때까지 영부인 역할을 맡게 되었고, 이 사건으로 아내 육영수를 잃은 박정희는 큰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다. 10.26 사건을 일으킨 김재규는, 육 여사가 사망한 이후 박정희가 자식들을 애지중지하고 철저히 감싸고 돌았으며, 여성편력이 두드러졌다고 증언했다. 그 때문에 주변에서 박정희를 재혼시키려 애를 썼다고. 측근들이 궁중가에 대통령을 위해 젊은 여성들을 불러 술자리를 주선해주는 일이 빈번해졌다. 당시 사건의 변호사 안동일 씨가 전한 바에 의하면 10.26 사건의 간접적인 동기가 박정희의 문란한 사생활과 가족, 즉 자식들 문제 때문이었다고 하니, 육영수 여사의 사망은 적지 않은 파동을 일으킨 셈. 안동일 변호사와의 인터뷰 링크

이 해 8월에 바로 김대중 납치사건이 일어났고 미국과 일본에 강력한 항의를 받아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이후락이 물러나게 된다.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조. 1977년 부가가치세가 도입되었는데, 부마민주항쟁이 발생하게 된 원인 중 하나가 될 정도로 국민들의 반발이 심했다. 설상가상으로, 다음 해 2차 오일 쇼크가 터져서 물가가 폭등하고, 서민들의 불만은 극에 달하게 된다.

2.7. 9대 대통령[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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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12월 27일 ~ 1979년 10월 26일(303일)

이 시대를 함께 사는 온 국민과 더불어 항상 고락을 같이하면서, 우리 세대에게 주어진 엄숙한 소명을 받들어 헌신할 것을 조국과 민족 앞에 굳게 맹세하는 바입니다. 격동과 시련을 겪고 있는 세계 속에서 한민족의 찬연한 횃불을 밝힙시다.

- 1978년 12월 27일, 제9대 대통령 박정희 취임사 中

1969년 취임한 리처드 닉슨닉슨 독트린을 발표해, 데탕트 등 동아시아에 화해분위기를 조성하여, 군사적으로 동아시아에 군사적인 개입을 줄이는 모습을 보였다. 72년 중국[46]을 방문하고, 73년 베트남에서 미군이 철수하여 75년에 남베트남이 망하고 베트남이 공산화되자, 박정희는 미국을 불신하기 시작하고 비밀리에 핵개발을 추진하게 된다. 1974년 인도 공화국이 핵실험을 하여, 충격 받은 적이 있는 미국은 당연히 이를 눈치 채고 끊임없는 압박과 위협을 한다. 결국 76년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당시 미국이 보여준 강력한 대북 응징의지와 확고한 안보공약 이행을 높이 사 핵개발을 중지한다. 하지만 중앙정보부와 박동선이 미국 의회에 전방위 로비를 벌이다 발각된 코리아게이트 사건이 발생한다.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조.

이후 77년 인권을 외치며, 주한미군 철수를 공약으로 내세운 지미 카터가 당선됨으로써 다시 한미관계는 악화되기 시작한다. 그후 미국의 청와대 도청이 발각되는 등, 주한미군과 인권문제를 둘러싸고 한미관계는 역대 최악의 상태로 변한다. 얼마나 최악이었냐면, 정부가 학생들까지 강제동원하여 반미시위를 열었다. 언제인지 확실하진 않지만 핵개발도 다시 추진하기 시작하고, 미군철수에 대항하는 협상카드로 쓰였다. 결국 79년 2월 주한미군 철수 보류결정이 발표되었고, 카터와 한미정상회담 후 7월 철수 중지를 발표하면서 한미관계는 어느 정도 진정되는 듯했다.

부마고속도로를 건설하고, 경북 울진 원자력 발전소를 기공하였다. 1979년 YH 사건김영삼 총재 의원직 제명 파동이 터지자, 안 그래도 부가가치세, 오일쇼크로 불만이 극에 달한 시민들이 드디어 폭발하여, 부마민주항쟁이 일어난다.

항쟁이 절정을 이루던 때, 박정희는 궁정동 안전가옥 만찬석상에서 술자리 중에 10.26 사건으로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쏜 권총의 총탄을 맞고 사망했다. 장례는 1979년 11월 3일 국장으로 치러졌다.

3. 묘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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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수(中樹)[47] 박정희 전 대통령 묘소. 육영수 여사와 같이 안치되었으며, 대통령으로서 두 번째로 국립서울현충원(國立—顯忠院) 국가원수묘역에 자리하였다.


서울현충현 정문에서 직선방향으로 맨안쪽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당시 유명한 지관(地官)이 터를 골랐으며, 수맥을 막기 위해 토목공사를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앞을 내어다보면 앞에 장군 제1묘역과 한강을 중심으로 강북과 강남이 한눈에 보여진다.[48]

4. 평가[편집]

내용이 길어져 분리하였다. 자세한 사항은 박정희/평가 문서 참고.

5. 기타[편집]

  • 박정희 대통령은 사망 이후 1979년 11월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는데, 이는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주요 친일 행각을 행한 인물들을 담은 '친일인명사전'에 해당 인물명이 포함 되어 있어 논란이 일었다. 박정희뿐만 아니라 친일 활동을 공고히 한 장면 전 총리도 이 논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 1961년 11월 일본 수상 관저에서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의 발언.

    “경험도 없는 우리한테는 그저 맨주먹으로 조국을 건설하겠다는 의욕에 왕성합니다. 마치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킨 청년 지사와 같은 의욕과 사명감을 품고 그분들을 모범으로 삼아 우리나라를 빈곤으로부터 탈출시키고, 부강한 국가를 건설하려고 합니다.”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1961년 11월 11일

  • 조갑제가 저술한 박정희 전기 중 "4.19혁명 이후, 이병주(국제일보 주필) 황용주(부산일보 주필) 조증출(대구 사범 동기)와의 술자리"에서 박정희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미국에서 교포들을 모아 놓고 연설이나 하고 미국 대통령에게 진정서나 올리고 한 게 독립 운동이 되는 건가요? 똑바로 말해 그 사람들 독립 운동 때문에 우리가 독립된 거요? 독립 운동 했다는 거 말짱 엉터리요, 엉터리(…) 해방 직후 우후죽순처럼 정당이 생겨갖고 나라 망신시킨 자들이 누군데. 독립 운동 했습네 하고 나선 자들이 아닌가. (…) 독립 운동을 합네 하고 모두들 당파 싸움만 하고 있었던 거여. 그 습성이 해방 직후의 혼란으로 이어진 기라 말이다. 그런데도 민족의 체면을 유지했다고?"[49] #

    이번에는 박정희는 5.15사건, 2.26사건을 말하며 찬사를 하자, 황용주가 "천황 절대주의자이고 국수주의자 놈들이며 그들이 일본을 망쳤다"고 반박한다. 그러자 다음과 같이 답한다.

    "일본의 군인이 천황 절대주의자 하는 게 왜 나쁜가. 그리고 국수주의가 어째서 나쁜가(...). 그런 잠꼬대 같은 소릴 하고 있으니까 글 쓰는 놈들을 믿을 수 없다. 일본이 망한 게 뭐꼬. 지금 잘해 나가고 있지 않나. 역사를 바로 봐야 해. 패전 후 얼마 되지 않아 일본은 일어서지 않았나.” (...) “자유주의? 자유주의 갖고 뭐가 돼. 국수주의자들의 기백이 오늘의 일본을 만든 거야. 우리는 그 기백을 배워야 하네.”[50] #[51]

  •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이었던 백강(白岡) 조경한(趙擎韓) 선생의 외손자이자 민족문제연구가 심정섭씨가 외조부에게 직접 들은 바에 의하면, 박정희는 정변 이후 민정이양을 준비할 때 조경한 선생을 찾아가 입당을 권유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저는 다카기 마사오입니다. 저는 일제 때 친일 군인으로서 독립군 토벌에 앞장섰고, 해방 직후에는 광복군 중대장을 지냈습니다. 김구 선생님을 존경했지만 해방 후 한독당에 입당하지 못했고, 형제 때문에 남로당 입당해 공산 활동을 한 죄인입니다. 그러나 자수를 해서 대한민국 군인으로서 오늘날까지 살았습니다. 그러나 현재 나라가 반공 정신이 미약해지고 위기에 처해 이렇게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될 무렵(1970년 7월 7일), 당시 김종신 사회언론담당 비서관(전 부산문화방송 사장)은 박정희와 정강 장군을 만났는데, 정강 장군이 말하기를 "5.16 쿠데타가 일어난 아침 주동자가 박정희 소장이라는 말을 듣고 나라가 뒤엎어질 줄만 알았다. 나는 그(박정희)와 동기생이기 때문에 그의 전력을 어느 정도 알고 있어 위험한 인물로 봐 왔다" 그 후, 김종신 비서관은 선거 때마다 '사상논쟁'이 벌어졌으나 한번도 당사자의 시원한 해명이 없었기에 궁금해 용기를 내 물어본다. 그러자, 박정희는 이렇게 답변한다.

    "육사 교관으로 있을 때 형님 친구(이재복)되는 분이 찾아와 다음 일요일 모 장소에서 향우회가 있다면서 나더러 꼭 참석해 달라는 거야. 처음엔 거절하려다 사관학교 교관생활이 따분하기도 하고 해서 거길 갔었지. 그런데 그게 화근이 될 줄이야. 그날 향우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빨갱이였어. 나는 거기서 (남로당 입당원서에) 사인하거나 도장을 찍은 적은 없지만 그 일로 김창룡한테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고 재판도 받았지."#

  • 1967년, 광복군 출신 박영만은 픽션 소설 <광복군>이라는 책(上下 전2권, 협동출판사)을 출판한다. 흔히 비밀광복군설의 ‘원전’이다. 내용은 '박정희가 1945년 2월 광복군에 가담한 뒤 부대 안에 비밀조직을 만들었고 김학규 장군의 명령에 대기하고 있다가 일본이 명령을 대기하고 있었다'는 내용의 소설이다. 박정희를 찾아가기 전에 박영만은 만주군 간도 특설대 하사이자 박정희의 후배 박창암(朴蒼巖)에게도 찾아갔었다.

    "5·16 이후 반혁명사건으로 옥살이를 마치고 풀려난 박창암 前혁명검찰부장 앞에 박영만이 찾아왔다. 대뜸 ‘같이 박 대통령을 한번 도와보자. 어느 지하운동 리더의 공적을 박 대통령 것으로 만들고 싶으니 도와 달라’고 부탁했는데 박창암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러나 1967년 박영만은 기어이 ‘광복군’을 출간했다. (…) 박영만은 책을 박정희에게 전달했으나 환대는커녕 호통을 들은 것으로 전해진다."


    정윤회 저자 <실록 군인 박정희>, 2004, 118p중에서

    이를 두고 김승곤 前광복회장은 당시 상활을 이렇게 증언한다.

    “박영만은 청와대에서 돈을 받을 줄 알고 <광복군>을 썼는데, 내용을 훑어본 박정희 대통령은 ‘내가 어디 광복군이냐. 누가 이 따위 책을 쓰라고 했냐’며 화를 냈고, 결국 박영만은 돈 한푼 못 받고 거창하게 준비한 출판기념회도 치르지 못했다”#

  • 이토 히로부미와 놀라울 정도로 똑같이 죽었다. 둘 다 죽은 날이 10월 26일(이토 1909년, 박정희 1979년)에 둘 다 똑같이 저격당해(이토는 안중근에게, 박정희는 김재규에게) 죽었다.

"일본의 군인이 천황 절대주의자 하는 게 왜 나쁜가. 그리고 국수주의가 어째서 나쁜가(...). 그런 잠꼬대 같은 소릴 하고 있으니까 글 쓰는 놈들을 믿을 수 없다. 일본이 망한 게 뭐꼬. 지금 잘해 나가고 있지 않나. 역사를 바로 봐야 해. 패전 후 얼마 되지 않아 일본은 일어서지 않았나.” (...) “자유주의? 자유주의 갖고 뭐가 돼. 국수주의자들의 기백이 오늘의 일본을 만든 거야. 우리는 그 기백을 배워야 하네.”[52] #[53]

  • 지금의 세종시 일대인 공주시연기군 주변으로 행정중심복합도시의 서쪽 지역에 수도 이전을 하려고 계획했다는 사실이 사후에 알려졌다. 이 계획을 백지계획이라고 하며 대대적인 서해안 중화학/무역벨트 사업인 가로림만 계획과 연계되어 있었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10.26 사건으로 죽어 실행되지 못하였다. 70년대에 수도 이전과 충청 지역의 경제수준을 영남권 정도로 끌어올리는 사업을 단행했다면 지금의 수도권 과밀화 현상이 많이 완화되었을 것이라는 측면에서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충청도 수도 계획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세종시 계획으로 간접 계승된다.

  • '밤의 대통령'이라 불리며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던 방일영 조선일보 고문과 가까운 사이였다고 한다. 박정희는 첫 대통령 유세를 마친 뒤 방일영의 집으로 가서 기생들과 함께 '미꾸라지 잡기'라는 일본의 민속춤을 추면서 밤새 놀았는데, 이 사실이 육영수의 귀에 들어가 육영수는 청와대 비서들에게 다시는 박정희가 방일영의 집에 가지 못하게 하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 이동원 비서실장이 박정희 대통령 서독방문 시에 오는 길 영국런던에 가서 도시계획을 직접 한번 보시는 게 좋겠다고 하니까 박 대통령이 버럭 화를 내면서 "나라에 돈도 없는데 관광이나 다니게 됐어?"라고 한다. (이동원 회고록에서)

  • 미국의 밴스 특사는 존슨 대통령에게 박정희는 종종 재떨이로 영부인과 참모들을 때린다고 하면서 위험하고 불안정한 사람이라고 보고했다.#

  • 박지만이 육사에서 친구와 휴가를 나왔을 때, 아들 친구가 온다고 하니 대통령이라고 딱딱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되겠다 싶어서 꽃남방(?)을 입었다고 한다. 사진이 있으면 재밌게 봤을 텐데 아쉽다 아들 친구와 만났을 때는 아니지만, 휴가 가서 입은 모습이 찍힌 사진은 있다.

  • 교사 생활을 해서 그런지, 풍금도 잘켜고[55] 그림도 곧잘 그렸고 서예에도 취미가 있었다. 박정희는 당대의 명필이었다고 한다. 서예 전문가들은 역대 대통령 중 최고의 명필로 이승만을 꼽지만, 가장 값을 비싸게 치는 것은 박정희의 서체라고 한다. 하지만 윤제술에게 까였다. 군인 출신답게 날카로운 판본체에 가까운 글씨를 고수했으며, 현재는 바뀐 이전의 광화문 현판도 그가 손수 쓴 것이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일본에서 되찾아온 소전 손재형에게 지도를 받기도 했고 승마검도, 국궁을 즐기기도 했었다.

  • 그리고, 박정희가 직접 작사, 작곡한 노래는 유신정권 시절에 프로파간다를 위해 만들었던 나의 조국이 있다. 그런데 이 노래를 직접 들어보면 알겠지만, 엔카풍 음계를 갖다 쓴 왜색가요나 다름없다. 박정희가 왜색을 몰아낸다면서 이 곡 저 곡을 금지시켰던 시대였음을 감안한다면 상당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 유럽 방문 당시, 한자로 서명하려는 걸 본 측근 한 사람이 "각하는 대한민국 대통령이십니다."라 조언하자, 즉시 한글 사인으로 바꾸었다는 일화가 있다. 이후에도 박 대통령은 한글 서명으로 일관했다고 한다.

  • 비름나물이나 두부 같은 향토음식을 좋아했다고 한다.##

  • 일상생활이 검소했다는 주장이 있다. 허리띠가 해져도 모르다가 청와대 전속 이발사가 알려줘서야 알아차렸다거나, 여름에도 에어컨을 틀지 않고 겨울 난방도 적정 온도를 유지했다는 증언도 있었으며, 변기물을 아끼려 변기 뒷칸에 벽돌을 놓았었다는 것. 빈농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몸에 배인 생활습관의 영향으로 추정된다고 하며, 해외의 한국 근현대사 관련 학자나 정치학자들도 박정희의 생활이 검소했다고 평가했다.출처# 하지만 사망 당시 술자리를 보면 갈비, 장어, 송이, 전복 등의 고급 술안주를 차려놓고 연예인까지 불러 유흥을 즐긴 점을 감안하면 검소하다고 보기 어렵다는 의견도 있으므로,출처 이에 대한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이와 관련해, 육영수 여사의 사망 이후 검소하던 박정희가 사치스러워졌다는 의견도 있다.

    이한수 전 <서울신문> 사장은 "육 여사가 죽은 뒤 박 대통령의 주변에 '인의 장막'이 둘러쳐져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고 설명했다. 이씨뿐만 아니라 박 대통령 주변의 많은 인사들이 그의 '실정'의 원인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인간 박정희'의 소탈하고 서민적인 면모는 유신체제 출범 뒤 그 '물'이 많이 빠졌다는 게 주변 인사들의 증언이다. 이 무렵부터 그의 술자리에는 막걸리보다 '시바스 리갈'이 자주 올라왔고, 여자들과의 추문도 불거지기 시작했다. 물구나무 서기와 검도로 체력을 단련했던 그가 골프에 푹 빠진 것도 이 무렵부터다. 박 대통령이 '장학생'으로 관리하던 몇몇 기자들과 사이가 틀어진 것도 이때다. 박 대통령은 1978년 출입기자들과의 만찬에서 술에 잔뜩 취한 채 자신에게 비판적인 기사를 쓴 한 일간지 기자의 이마를 들이받아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그의 독재권력이 종말에 가까울수록 ‘인간 박정희’도 서서히 망가져갔던 것이다.

  • 1979년 신년 기자회견에서 '새마을운동 홍보 질문'을 배정받은 동아일보 강성재 기자가 사전 시나리오를 깨고, '각하' 호칭을 '대통령께서'로 바꾸고 미리 짜여진 질문에 이어 새마을 운동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차지철 경호실장은 눈초리를 올리며 권총을 만지작거렸다. 2달 뒤, 박정희는 청와대 출입기자 술자리에서 만취해 그 기자의 이마에 박치기를 날렸다고 한다. 그로부터 열흘 후, 박정희는 강 기자에게 정식 사과했다.#[56]

  • 1991년도엔, 제3공화국 정계인사들과 당시 모델이자 배우, 서울 고급 요정의 접대부로 일한 정인숙의 아들인 정종일 씨를 두고 정일권 전 국무총리 박정희 전 대통령, 이후락 전 중정부장, 박종규 전 경호실장 등 사이에 친자논란에 휩싸인 적이 있다. 비공식적인 내연관계였으며 꾸준히 모자에게 금전적인 도움을 주던 정 전 국무총리가 유력했으나 93년 주병진쇼에서 정종일 씨가 정 씨와의 통화중 " '당신은 나의 아들이 아니며 내가 모시던 분의 아들'"이라고 밝혀 친부의 행방이 묘연해졌다. 그러다 친자확인소송으로 인해 논란이 일던중 정일권 전 국무총리가 사망해 이 사건은 유야무야되었다. 2005년에 귀국하기 전까지 LA에서 머물던 정성일 씨를 기억하는 재미교포들의 증언에 따르면, 생김새나 화술도 번듯한 세일즈맨이었지만, 씀씀이가 버는 돈에 비해 헤펐으며, 스캔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또한, 본인을 ‘정 전 총리의 아들’이라고 자랑삼아 말하기도 했다고 한다. 현재 이 논란은 미궁 속으로 빠져 미확인으로 남게 되었다.#

  • 박정희가 정인숙불륜관계였다는 소문을 들은 육영수가 박정희에게 사실 여부를 따지며 대들자 진노한 박정희는 고함을 치면서 재떨이를 집어던졌다고 한다.[57]##

  • 위 목격담 이후 농이 하나 생겼는데, "박정희와 육영수가 싸우면?" 이라는질문에 육박전이라는 단어가 탄생했다. 이 드립을 고안한 전유성은 방송에서 이 언어유희를 자문자답하다가 3개월 동안 방송출연을 정지당했다.# 그런데 대통령 전용 비행기 승무원인 최은자 씨가 경남 진주로 가는 비행기에서 대통령 부부 앞에서 육박전 얘기를 했더니 둘 다 박장대소했다고 증언하였다.# 과잉충성??

  • 지방순시 중에는 전용차를 놔두고 슬쩍 지나가던 시외버스를 타고 승객들이랑 노가리 깐 적도 있었다는 증언이 있다. 승객들은 앞에 가는 전용차를 타신 높으신 양반에 대해 씹고 뜯었지만, 정작 그 높으신 양반이 자기네와 같은 차를 타고 있는 건 몰랐다고 한다. 식당에서 자신보고 박정희를 닮았다고 하는 주인장에게 "대통령이 날 닮았지."라며 뻔뻔하게 대꾸한 적도 있다는데, 아마 밑에도 있는 전주 삼백집 일화의 일부인 듯하다.

  • 1965년 미국 웨스트포인트에 있는 미국육군사관학교에 방문했을 때, 생도들을 사면해 준 일이 있었다. 미 육사는 방문하는 귀빈에게 특권 하나를 주는데, 대개 퍼레이드를 요청하거나 기념품을 받거나, 특별연설 정도였다. 그런데 박정희는 그 특권으로 현재 교정에서 징벌 중인 생도들의 사면을 요청하였고, 덕분에 크고 작은 징계를 받고 있던 260명의 생도들이 사면되었다. 훗날 이 생도들은 임관 후 다들 기피하는 한국 근무에 자원했다고 한다.

  • 70년대 중반 쯤 혜화동로터리 근처의 막걸리집에 박정희가 혼자 들어와 막걸리 한 사발을 시켜서 김치를 안주 삼아 마셨다는 말이 있다. 잠시 후 주인이 부스럭 소리가 나서 뒤돌아보니, 대통령이 막걸리 독에서 직접 또 한잔을 퍼고 있더란다. 다 먹고 나서 얼마냐고 묻고는 호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 계산하고 나가더라고.

  • 전주 지역 시찰을 마친 후 술을 마신 다음 날 아침에 콩나물국밥으로 유명한 삼백집에 수행원을 시켜 배달을 요청했는데, 하필 그곳 주인이 욕쟁이 할머니였다, 당연히 "이 썩을 놈아, 어따 대고 배달을 해달라고 지x이야! 와서 처먹어!"라는 호통이 날아왔고 이에 사색이 된 수행원이 보고하자 박정희는 "허허, 오라면 가야지."라면서 국밥집을 찾아갔다. 물론 수행원들이 미리 가서 제발 욕을 하지 마시라고 신신당부했지만 이에 개의치 않은 할머니는 계속 욕설 섞인 응대를 했고, 박정희가 국밥을 먹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반숙 계란을 가져오더니 "이놈 봐라? 니놈은 어찌 그리도 박정희를 닮았냐? 그런 의미에서 이거나 더 처먹어라."는 말까지 했다. 이에 박정희도 지지 않고 껄껄 웃으며 "할머니. 내가 박정희를 닮은 게 아니라, 박정희가 날 닮은 거요."라는 말로 응수했으며 연신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맛있게 국밥을 먹고 자리를 떴다고. 일설에 따르면 그 할머니는 작고하기 직전까지도 "그때 그 놈팽이는 박정희가 아니야!"라고 자신이 욕을 퍼부은 상대가 박정희였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고 한다. 박정희인 거 알고 그랬다고 하면 쥐도새도 모르게 죽었겠지.

  • 스웨터 수출하는 공장 시찰을 갔을때 대통령과 이야기를 나누던 어린 여공이 "공부 못한 게 한입니다."라고 하자, 사장과 논의해 야간학교를 세우기로 결정이 되었다. 고등공민학교, 혹은 산업학교라고 불린 이 교육기관은 정식학교가 아니었기 때문에 문교부에서 수료증은 몰라도 졸업증은 불허한다는 지침을 내리자, 다음 날 문교부 장관이 청와대에서 잔소리 들은 후에 관련 규정이 바뀌었다. 과거 교사 시절의 잔재인 듯... 교육자의 모습?

  • 경부고속도로 공사 당시, 박정희가 현장을 지휘하던 정주영 회장을 호출해서 만났는데, 정 회장이 하도 피곤해서 대통령이 이야기 하던 중에 졸았다고 한다. 하지만 박정희는 이를 탓하지 않고 오히려 피곤한 사람을 잡아두었다며 사과했다고. 이런 일과 달리, 박정희가 조선소 건립을 지시했는데 정 회장이 기술과 자본 문제로 난색을 보이자, "현대가 정 회장 개인 거요?"라고 호통치기도 했다고 한다. 다만 일방적으로 까라면 까라는 식은 아니었고, 조선소 건립 외자 유치에 있어 정부가 보증을 서주기로 약속했다.

  •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에 남한 면적 정도의 땅을 사서 대규모 농업 이민을 시키자는 계획을 세운 적이 있었다. 왜 그런 계획을 생각하냐는 물음에 "국내에 있을 땐 불만이 많더라도 외국 나가면 다들 애국자가 된다"라 했다고. 일본의 남미 이민을 보고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도 있다. 실제로 이때 시험적으로 매입한 토지가 아르헨티나에 있다. 야따마우까 농장으로서, 면적은 9만평. 서울시의 30~40% 정도 된다고 한다. 하지만 해당 토지는 염분이 많아 농장 경영에는 실패했다. 이때 아르헨티나에 이민 갔던 사람들은 다른 사업을 하면서 현지에서 기반을 잡았다. 오랫동안 있으나 마나 했던 이 땅에 대해 최근에 탄소 배출권 문제 해결에 이용해 보자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었고, 실제로 노무현 정권 시절 활용계획을 지시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후 활용계획은 백지회되었고, 박근혜 정권 시절 불법점거중인 현지인들에게 무상으로 양도하기로 합의하고 공증까지 채결했다고 한다. 우리 아빠가 산거니까 내가 선물로 줄게 #

  • 박정희는 개인적으로 나폴레옹 숭배자였고, 교사 생활이나 결혼 생활을 탐탁찮게 여겼다. 특히 결혼 생활이 불성실해서 형인 박상희에게 잔소리를 많이 들었다. 박정희의 초혼은 당시 농업국가의 사회분위기처럼 나이 차면 집안에서 결혼하라고 시켜서 결혼한 것이었다. 즉 박정희 본인과 배우자가 원해서 한 결혼이 아니였다는 것. 후에 육영수 여사와 재혼 후 육 여사가 피살되기 전까지 20년 넘게 해후한 것을 보면 역시 결혼은 서로 사랑하고 잘 맞는 사람들끼리 결혼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박정희의 큰형 박동희는 66세 때 동생이 정변에 성공하여 대통령이 된 뒤에도 고향인 구미면 상모동에서 농민으로 살다가 죽었다. 박동희는 1남 1녀가 있었는데, 아들 박재홍은 백수로 있다가 삼촌이 대통령이 된 다음 포항제철에 취직했고, 이후 민주정의당에 입당하여 국회의원으로 4선을 했다. 박정희의 큰누나 박귀희는 은씨 집안으로 출가해 3남2녀를 두었는데, 이 3남 중 차남 은희만의 아들이 바로 연예인 은지원이다. 둘째 누나 박재희는 박정희가 어릴 때 잘 돌봐주었고, 박정희가 대구사범학교에 다닐 때 남편 한정봉이 학비를 대주기도 했다. 당시 한정봉은 기자로 일했는데, 박정희가 만주갈 때 밑천으로 쓰려고 매형의 밥줄인 카메라를 가져갔다. 박정희가 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나서 이들 부부가 성북동으로 이사왔는데, 청탁꾼들이 하도 찾아와서 박정희는 경찰을 배치하고 둘째 누나 일가에 대해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함은 물론 상주군으로 내려가라고 압박을 가했다. 이 때문에 박재희는 단식투쟁 하며 섭섭함을 토로하기도 했다.

  • 김영삼의 회고록인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에 적힌 내용에 의하면, 1975년 영수회담에서 김영삼과 박정희가 단독회동을 가진 적이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박정희는 자신은 권력에 미련 없고 곧 민주주의를 하겠다고 김영삼에게 약속했지만, 1979년 김영삼 총재 의원직 제명 파동으로 김영삼의 뒷통수를 친다. 또한 부마민중항쟁을 무력진압하고, 중앙정보부와 김태촌을 이용하여 김영삼을 신민당에서 실각시키려는 시도를 한 점 등으로 미루어 보아 박정희가 한 약속에 진심이 담겨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 정작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치열하게 맞붙었던 김대중과는 1968년, 청와대 신년인사회의 단 한 번이 만남의 전부라고 한다. 자서전에서 김대중은 박정희에게 6.7 총선에서 내건 목포 지역 공약 이행을 부탁했고, 박정희는 시원하게 "그래야죠."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 후 김대중은 유신정권 에게 납치당해 공해상에서 죽을 뻔 하고 정치적 탄압을 받았다.[58]

  • 경상북도 구미에 위치한 박정희 생가는 경상북도 기념물 제86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정확한 주소는 경상북도 구미시 박정희로 107(상모동). # 박정희 생가 안에는 내부에 추모관이 마련되어 있는데, 그곳에서 박정희의 영정에 대고 기도를 하는(???) 사람들을 어렵게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야외에는 박정희와 육영수의 실물 사진으로 만든 패널이 설치되어 있는데 "어께에 손을 올리고 사진을 찍지 마시오" 라는 경고문이 옆쪽에 세워져 있다고. 생가 건물 아래쪽에는 중흥역사관이라는 이름의 박정희 홍보관이 설치되어 있다. 또한, 박정희 생가를 관리하는 구미시에서는 사이버박정희대통령(#)이라는 사이트를 운영하며 박정희의 업적을 홍보하고 있다. 해당 사이트에는 박정희에 대한 비판은 나와있지 않다.

    • 박정희의 딸 박근혜가 하야하지 않아서 화가 났다는 이유로 박정희 생가가 불에 탄 사건이 있다. 추모관 내부 및 영정들이 전부 불에 탔다고. # 불탄 박정희 생가는 9000만 원을 들여 원래대로 복원할 예정이라고 한다. 복원 비용은 화재보험 보상비로 우선 충당되지만, 부족할 경우 구미시 예산도 추가로 투입될 가능성이 있다. #

    • 낸시랭이 ‘박정희와 팝아트투어’ ‘박정희를 관광한다’는 이름으로 박정희 생가를 찾아 박정희의 실물 사진 패널의 뺨에 뽀뽀하는 사진을 올리고, 일행은 육영수 실물 사진 패널 앞에서 손가락욕을 하는 퍼포먼스 사진이 공개되어 논란이 된 바 있다. #

  • 박정희의 고향인 경북 구미에는 매년 박정희 탄신제가 열리고 있다. (2017년이 박정희 탄신 100주년이다.) 네티즌들에게 조롱거리가 된 반인반신 드립도 여기서 나온 것. 지역 보수 주민들은 물론 보수 성향이 짙은 노령의 대구경북도민, 새누리당 의원들, 지역 유지까지 참석하고 있다. 특히 2012년 제18대 대선 때 새누리당과 박사모의 노골적인 박근혜 지지로 논란을 빚었으며, 선관위는 이에 대해 "부적절하나 선거법 위반은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저기서 박정희를 칭송하는 심학봉 의원은 2015년 성추문 스캔들로 결국 의원직을 사퇴하였다. 대통령으로서 박정희의 행보는 둘째치더라도, 민주주의 국가에서 일개 인간에 불과한 박정희 부부 내외 동상에 절하고 소원을 비는 등 인간을 신격화한다(개인숭배)는 점에서 무신론자는 물론 기독교 계열에서도 비판하지만, 오히려 부촌인 도곡동개신교 교회 일각에서도 박정희 숭배를 진행하고 있다.# 경북의 일부 절에서도 박정희와 육영수의 초상화를 걸어놓은 곳을 더러 찾아볼 수 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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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정희 본인은 딱히 종교를 가지지 않았으나,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영부인 육영수의 영향을 받아서 친불교 성향을 약간 가졌다. 그래서 당시 불교계에서 승려병역을 수행하기 어려운 점을 언급하자 호국승군단이라는 준군사조직을 따로 만들어서 병역을 대신할 수 있도록 했다. (이후 전두환이 해산시켰다.)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을 비롯해 가톨릭 사제들이 정권 비판 발언을 자주하자, "정교 분리 지켜야 하는 거 아니냐? 이참에 우리도 종교에 개입할까?"라고 투덜거리기도 했다고... 하지만 의외로 천주교 자체에 대한 평가는 호의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딸 박근혜를 천주교 계열 미션스쿨성심여자중학교, 성심여자고등학교, 서강대학교에 보냈다. 그런데 안동교구 가톨릭농민회 사건 문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천주교=빨갱이란 인식을 심어준 것도 박정희 정권 때여서 우호적이었다고 하긴 힘들다.

  • 다른 독재 정권에 비해서 운동권을 대하는 태도는 '상대적인' 측면이기는 하지만 유화적이었다. 대학 내에 경찰이나 군병력을 투입하지는 않았고[59] 운동권 출신들도 사법시험에 합격시켰다.[60] 전두환의 5공화국 시절에는 백골단으로 대표되는 진압단이 대학 캠퍼스에 난입하여 학생들을 까고 전경들이 수시로 대학 내를 순찰했고, 최근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박근혜를 상대로 시위하던 학생들에게 사복경찰을 대거 투입하여 스크럼을 짜던 상황 등과 비교해보면 확실히 유화적이다.

  • 광주민주화운동 같은 대규모 유혈사태는 없었지만 김재규의 증언에 의하면 부마항쟁 때 박정희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겠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다만 박정희가 직후 사망했기 때문인지 실제로 유혈사태가 일어나지는 않았다.

  • 지금은 박정희에 대한 부정적인 면도 많이 알려졌지만, 김재규에 의해 암살된 1979년 당시에는 사회분위기가 정말 하늘이 무너졌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굉장한 충격이었다. 그 이유를 생각해보면 북한의 김일성 우상화와 비슷할 정도의 세뇌교육 때문일 것이다. 10월 유신을 한국적 민주주의라고 교육받고 국민교육헌장을 암송하도록 강요하였다. 국가의 권력에 대한 비판은 일반적인 뉴스나 교육, 강연에서는 이뤄질 수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박정희의 국장이 조선시대 왕의 장례와 같았을 것이다.

  • 성형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다만 외형적인 측면을 위해서가 아니라 축농증으로 알려진 부비동염을 앓고 있었기 때문. 호흡곤란이나 감기 증세를 동반한 장애를 고치려 60년대부터 수술을 하였으나 적절한 치료 방법이 없어 78년도에 다시 수술을 진행하여 완쾌하였다고 한다. 한국에서 2번에 걸친 성형을 했지만 결국 실패하여 일본으로 넘어가서 수술을 받아서야 증세가 없어졌다고 하는데, 이에 이전 수술 실패에 대해서 아무런 불평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김유혁 단국대 종신명예교수 증언

  • 제 9대 박정희 대통령 취임기념[61] 시계가 있는데, 역대 대통령 시계 중에서 가장 비싼 값에 거래되고 있다. 인기도 그렇고 매물도 적어서. 큰 특징으로는 역대 대통령 시계 중에서 유일한 기계식 시계이다. 요일 표시는 한자와 영어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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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년 박근혜 파면 이후 자식농사에는 대실패한 전직 대통령으로 이제는 기억에 남게 될 듯 싶다. 아버지의 후광을 업고 대통령이 된 박근혜가 자신의 이미지를 완전히 손상시켰고, 헌정사상 최악의 부패 사태를 초래하여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로 대통령직에서 탄핵당했다. 박근령은 일제 시기 일본의 한국 식민통치를 옹호하는 친일 망언과 독재자에 친일파였던 아버지 박정희를 대놓고 찬양하고 미화하는 등 극우 행위로 논란이 되고 있으며, 박지만은 상습적인 마약 복용으로 구속과 투옥을 반복했고, 마약 문제 뿐만 아니라 박근혜 5촌 살인사건 등 살인 범죄에 개입하였다는 의혹이 있다. 다만 박정희와 전처 김호남 소생의 장녀 박재옥은 물의를 일으키지 않고 조용히 생활하고 있으므로 제외.[62]

5.1. 각종 타이틀[편집]

5.2. 저서[편집]

  • 우리 민족의 나갈 길 (1962)

  • 국가와 혁명과 나 (1963)

5.3. 각종 친필들과 그림들[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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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70년대에 제작된 각종 비석들 중에 박정희 친필 비석이 심심찮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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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하게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이 1979년에 쓴 신년 휘호를 박근혜 대통령에게 선물로 주기도 하였다. 미국으로 이민간 사람이 판매하는 걸 푸틴이 개인적으로 구입하였다고 전하였다. 반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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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만큼 전문적으로 그림을 배우진 않은 것으로 보인다. 스케치나 수채화 그림들이 대부분. 못그린 건 아니지만 딱 기본기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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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도로 관련 구상도.

5.4. 미디어에서[편집]

5.4.1. 박정희를 연기한 배우들[편집]

이창환이 특히 박정희 전 대통령 전문 배우로 유명하다.

  • 이진수: KBS 드라마 욕망의 문의 박정희, MBC 드라마 제2공화국, 제3공화국, 전쟁과 사랑의 장년 박정희

  • 김상민: MBC 드라마 제3공화국의 아역 박정희

  • 홍경인: MBC 드라마 제3공화국의 청소년 박정희

  • 이창환: MBC 드라마 제3공화국의 청년 박정희, 제4공화국, 제5공화국의 박정희, 특집극 오른손과 왼손의 박정희, 단막극 베스트극장 - 대통령과 TV의 박정희, 예능 타임머신의 박정희, KBS 다큐멘터리 극장의 박정희, SBS 드라마 삼김시대, 야인시대의 박정희, 특집극 70분 드라마 - 가방을 든 남자의 박정희, 연극 인간 박정희의 박정희, 영화 잘 살아보세의 박정희, PBC 드라마 김수환 추기경에 관한 마지막 보고서의 박정희, MBN 다큐드라마 대한민국 정치비사의 박정희, SeMA 벙커 특별전시영상- '나, 박정희, 벙커'의 박정희

  • 독고영재: SBS 드라마 코리아 게이트의 박정희, MBC 드라마 영웅시대의 박정희

  • 이균식: 영화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의 박정희

  • 조영진: 영화 효자동 이발사의 박정희

  • 송재호: 영화 그때 그 사람들의 박정희

  • 김승훈: 영화 덕혜옹주의 박정희[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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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윤홍: 북한 영화 민족과 운명에서 박정희 역할을 맡았다. 북송선을 타고 온 재일교포 출신으로, 이 영화의 박정희 연기 덕분에 김정일로부터 "대통령 각하"라는 칭찬도 받고, 무명배우에서 공훈배우로 출세했다. 박정희 대통령과 닮게 나오려고 주사도 맞고, 튀어나온 입을 묘사하기 위해 촬영 때마다 안에 틀도 넣었다고 한다.[71]

6. 둘러보기[편집]

7. 관련 문서[편집]


[1] 아랫쪽 '대통령 기록관'이란 글씨가 좌우반전이 되어 있는데 원본은 이 구도가 맞다. 원래 사진을 좌우반전 시키고 '대통령 기록관' 글씨를 넣은 것. [2] 현 경상북도 구미시 박정희로 107(상모동 171). 경상북도에서는 1988년 이전까지 , 의 하위 행정구역으로 가 아닌 을 썼다.[3] 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효자로 97[4] 정식 결혼은 아니고, 사실혼 관계(동거)[5] 육영수 사후, 프랑스 유학 중이던 박근혜가 귀국해 영부인 역할 대행.[6] 김호남 소생.[7] 기사. 박근령 씨는 "아버지와 언니의 혈액형이 같다"며 "나는 A형인데, 아버지와 언니를 비롯해 모두가 B형이었다. 대담한 점이 닮지 않았나 싶다"고 말했다.[8] 5,6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국민의 지지를 받아 당선되었다. 6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한 박정희는 대통령의 3회 연임을 허용하는 3선 개헌을 통과 시킨다. 그리고 7대 대통령 선거에서 국민의 지지 감소로 야당 후보 김대중을 근소한 차로 누르고 당선한 박정희는 대내외적 대한민국 위협요인에 합법적인 개헌 절차를 통해 10월 유신을 단행하고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하였다. [9] 정9품. 지금으로 따지면 하사~중사 정도다.[10]경북대학교 사범대학의 전신[11] 이 성적표는 박정희 집권 기간에는 공개 금지였다.#[12] 만주신문은 1938.10.11~1944.3.31까지 출판해 왔다.일본 국회도서관[13] 창씨개명은 입학 후에 했다.[14] 아내 김호남과의 불화가 있었다.#[15] 1938.11.02 동아일보 / <만주국군 육사군사과생 모집> "지원자는 12월 20일까지 소정의 양식에 따라 치안부(治安部)에 신입하리라하엿다"는 내용의 기사.[16] 1936.7.25 동아일보 / <육군관제 개정골자> - "교육입퇴영등을 관장하는 현제군무국의 징모과(徵募課)도 인사국에 옮긴다"는 내용을 담고있다.[17] 만주신문과 동아일보 기사내용에도 알수 있듯 17세이상 20세미만 미혼(未婚)자를 대상으로 하고 있어 입학 자격 대상자가 아니었고 편지에서도 밝히듯 본인(박정희)도 알고 있었다.[18] 동료선생 유증선의 증언 #[19] 최고회의 의장 이낙선의 비방록, 이재기(李再起)의 증언 #[20] 경례하고 있는 사람이 박정희로 추정된다.[21] 박정희가 특별히 성적이 좋아서가 아니라 원래 만주군육군군관학교일본육군사학교의 예과 중 하나이고, 본과인 일본육사에서 최종 과정을 수료한 것 이라는 견해도 있다. 이런 견해는 박정희를 지지하는 보수층에서 주로 주장된다.[22] 만주군 보병 제8단'은 사실상 일본군 히노 다케오 소장이 만든 부대로 주로 팔로군, 동북항일연군 또는 소련과 전투를 벌이는 것이었다.[23] 일제시기(1910~1945) 조선인 소위의 일본육사 입학자는 87명 중 임관자는 63명으로 연평균 조선인 소위 1.75명, 만주국(1932~1945) 장교 임관자는 67명으로 연평균 조선인 소위 4.8명으로 전국에 한해 6.55명이 배출될 정도로 조선인으로써 소위가 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반론] 실제로 놀고 술먹을 기회가 많아 비교적 편히 지냈고 전투에 참여한 경험은 없었다고 주장한다. 중국인 동기생 고경인, 신현준 대위, 방원철 중위의 증언 #[25] 간도특설대 정보반 주재덕의 증언 #[26] 박정희의 '한국 국민에게 고함', 조희연의 '박정희와 개발독재시대'중에서[27] 일설에서는 소설 <광복군>과 이를 근거로 '비밀 광복군'설을 주장하나 근거가 미약하다.#[28] 셋째형 박상희의 친구 황태성(黃泰成)이 남로당 보증을 서줬다. 박정희는 황태성을 친형 박상희보다 더 잘 따랐다고 한다. 또한 대구사범과 만주군관학교 진로와 관련 조언을 구했다. 1946년 10월 황태성은 월북했고 1961년 8월 다시 남하한다. 1961년 12월 간첩죄로 체포되었고, 1963년 12월 14일 사형 선고를 받고 서울교도소에서 총살되었다.[29] 당시 김창룡의 숙군작업이 엉망진창이었기 때문에, 무고한 피해자가 매우 많았다. 이 때문에 군대 고위층이 최대한 구제하는 방침을 세우면서, 진짜 남로당 비밀당원이었던 박정희도 같이 살아났다.[30] 이현란과의 사이에 아들이 있었다는 기사가 있다. 생후 6개월에 사망.기사 [31] 그중에는 곽영주 경무관도 있었다. 이승만에게 나름 충성하고자 했던 곽영주가 박정희 대령의 과거 전력을 문제삼았던 것. 이때 곽영주 경무관이 좀더 유한 태도를 보였더라면 5.16 이후 열린 재판에서 구명될 여지도 있었을 것이라 보는 군 원로도 있다.[32] 2공화국 당시 청와대에는 군 통수권자 윤보선 대통령이 기거하고 있었고 총리 공관은 별도로 마련되지 않았다.[33] 1963년 강북구 수유동으로 이전했다.[34] 정변 직후 미 육군 제24군단 소속 첩보부대(Counter Intelligence Corps; CIC)는 여론조사를 실시했는데, 그 결과 10명 중 4명은 우호적, 2명은 다소 우호적이나 시기상조, 4명은 부정적이라고 답했다. 1961년 5월 31일 주한미국대사관은 미 국무부에 "서울대 학생들이 정변에 대해 찬성 50, 반대 50의 지지를 보이고 있다." 고 보고했다.[35] 김종필의 증언[36] 장면 총리는 퇴장하며 윤보선 대통령을 만나 "남미의 여러 나라처럼 군부 변란이 상습적으로 되어버린다면 이 나라의 앞날이 무척 염려스럽소"하고 윤보선 대통령과 생전 마지막 만남을 가졌다.[37] 국가보안법 및 반공법에의해 국가 재건 과업 수행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죄를 범한 자로 간주될 경우 이른바 반혁명죄[38] 2008년 1월 16일 서울중앙지법은 그에게 무죄를 선고하였다.[39] 투표율 85%, 찬성 79%[40] 투표율 85%, 박정희 469만 2,644표 득표(46.6%), 윤보선 454만 6,614표 득표(45.1%), 무효표 95만 표, 1등과 2등 차이 15만 6,026표[41] 민복기법무장관, 김성은국방장관, 김윤기교통부장관 등은 유임[42] 현 제2사단[43] 장교는 일일 6달러, 부사관은 일일 1달러를 미국에서 지급하기로 하다.[44] 여담으로 중앙정보부의 개설을 제안했던 자이자 초대 부장은 김종필 본인이었다. 자신이 고안한 기관에 자신이 당하는 아이러니함.[45] 분신 자체는 70년 연말이라 대통령 임기로는 6대에 해당[46] 그 당시 중국은 한국에게, 북한처럼 적대국이나 마찬가지였다.[47] 나무는 흔들림없이 중심을 잡고 서있어야 한다는 의미로 가운데 '중'과 나무 '수'를 썼다.# [48] 출저/두번째 사진 블로그 출저 [49] 위 문장구조는 토론 71369에 근거합니다.[50] 위 문장구조는 토론 71369에 근거합니다.[51] 결국으로는 이 발언에 대해 사쓰마 번 만으로의 주축과 전 일본 국민들이 구니노미야 나가코 여왕(이후 고준황후, 어머니 치카코 왕비로부터 색맹 형질을 이어받음) 한테로만 지지하여 (조슈 번 측근 한테서만 지지를 받는) 이치조 도키코(이후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왕과 혼인 성사를 하였음)를 압도하였다는 일본 천황가 색맹 사태 논란(쇼와 천황 혼례 시기)을 저지하려다 실패당하고도 현재를 거치는 회심의 앙갚음(신사 참배)으로 가하려는 조슈 번 출신 일본 정부 총리 인사들을 능멸하는 문제의 파탄 발언으로 지적당하고 있기 때문이며, 천황이 일본 국법을 제재하는 일본 제국에서 1945년부터 연합군한테서의 일제 패망->GHQ 설치(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따라 7년 뒤(1952년)에 해산)에 따라 현재로도 일본국 국적의 국민이 일본 국법을 제재하는 일본국으로 헌법을 개정(변경)하였다는 일본 열도의 법치 개정 시사를 박정희가 상세히 깨달았어야 하기 때문.[52] 위 문장구조는 토론 71369에 근거합니다.[53] 결국으로는 이 발언에 대해 사쓰마 번 만으로의 주축과 전 일본 국민들이 구니노미야 나가코 여왕(이후 고준 황후, 어머니 치카코 왕비로부터 색맹 형질을 이어받음) 한테로만 지지하여 (조슈 번 측근 한테서만 지지를 받는) 이치조 도키코(이후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왕과 혼인 성사를 하였음)를 압도하였다는 일본 천황가 색맹 사태 논란(쇼와 천황 혼례 시기)을 저지하려다 실패당하고도 현재를 거치는 회심의 앙갚음(신사 참배)으로 가하려는 조슈 번 출신 일본 정부 총리 인사들을 능멸하는 문제의 파탄 발언으로 지적당하고 있기 때문이며, 천황이 일본 국법을 제재하는 일본 제국에서 1945년부터 연합군한테서의 일제 패망->GHQ 설치(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따라 7년 뒤(1952년)에 해산)에 따라 현재로도 일본국 국적의 국민이 일본 국법을 제재하는 일본국으로 헌법을 개정(변경)하였다는 일본 열도의 법치 개정 시사를 박정희가 상세히 깨달았어야 하기 때문.[54] 정확하겐 주연인 최불암이 드라마에서 담배를 피울 때 박정희도 같이 피웠다고 한다. 그래서 육영수 여사가 직접 최불암에게 전화를 걸어 담배를 적당히 피워달라고 요청했다 한다.[55] 새마을 노래를 직접 작사, 작곡하기도 했다. 단, 작곡은 음악을 전공한 둘째딸 박근령이 박정희 대통령의 요청으로 자신이 했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반면, 풍금을 켜면서 직접 작곡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는 주장도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풍금 코드를 기반으로 노래를 만들고, 박근령이 곡을 다듬고 악보작업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56] 참고로 박치기 세례를 받은 강성재 기자는 이후 신군부에 언론통폐합 과정에서 해직당하였으나, 이후 민주정의당(...)에 입당하여 정치에 입문했으며, 신한국당 소속으로 15대 총선에 당선(서울 성북을)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57] 청와대 전 인사의 말을 인용한 조갑제의 책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에 의하면, 얼굴에 던져서 피멍이 들었다는 말은 사실은 아니라고 하나, 그렇다고 하는 증언도 존재함으로 의견은 분분하다. 그러나 육 여사의 눈두덩이에 피멍을 목격한 건 공통적인 증언.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당시 출입기자들 사이에선 주색으로 인한 부부싸움이라고 판단했다.# [58] 아이러니하게도 2000년대에 있었던 박정희 기념사업을 이끌었다는 김대중이었다. 역사화해작업을 주도하면서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가 김대중에게 직접 찾아와 유신정권의 탄압에 대해 용서를 구했다 한다. 김대중의 반응은 죽은 박정희가 살아돌아와 나에게 악수를 청하는 것만 같았다.였다고.[59] 대신 정보과 경찰들은 대학 캠퍼스 내에 늘 주둔하고 있었다.[60]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가 대표적으로 유신헌법을 공부하여 변호사가 된 경우다.[61] 1978.12.27[62] 그러나 일부에서는 박재옥 역시 그의 일가족들이 설악산 케이블카 사업의 경영권을 독점하고 과거 박정희 정권 시기 특혜를 받았다는 이유로 박재옥도 박근혜, 박근령, 박지만보다 덜할 뿐 몰염치하고 부패한 인물이라고 비판하는 이들도 더러 있다. 물론 박재옥 역시 논란이 없진 않아도 여전히 비난을 받고 있는 박근혜와 박근령, 박지만보다는 성품이 좋은 것은 분명하다.[63] 5~9대 대통령, 5선[64] 158cm. 당시 기준으로 봐도 성인 남성 치곤 작은 편이었다. 부인 육영수 여사가 170cm의 장신이라 대통령 위엄 떨어져 보인다고 측근들이 의자에 방석을 까는 등 최대한 크게 보이도록 기를 썼는데, 정작 당사자인 박 대통령은 자기의 작은 키를 거의 신경 쓰지 않았고, 되려 의자에 키높이 방석이 있는 걸 보고 화내면서 그걸 던져 치워버린 적도 있다.[65] 2017년 기준[66] 다만 논란이 있는 것이 이승만 대통령은 박승선이라는 여성과 1891년 혼례를 치뤘으며, 자녀까지 두었으나(후에 장티푸스로 사망) 별도의 이혼절차 없이 헤어져 지내다 프란체스카여사와 재혼했다. 조선말~일제강점기로 이어지는 혼란기에 호적제도 등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황이 이유인 듯 하며, 사실이혼으로 인정할 경우 박정희 대통령이 최초이자 유일한 이혼 경력이 있는 대통령은 아니다. 단, 법률 이혼은 기준으로는 박정희 대통령이 최초.[67] 재혼 경력이 있는 대통령은 이승만,윤보선, 박정희, 김대중 대통령이 있다. 윤보선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은 사별로 인해 재혼한 경우.[68] 일제강점기때 태어난 대통령으로는 최규하(1919년생),김대중(1924년생),김영삼(1927년생),전두환(1931년생),노태우(1932년생),이명박(1941년생) 전 대통령이 있으며, 더 추가될 가능성은 높지 않다. 김기춘이 재기해서 대통령이 된다면 모를까 16대 노무현 대통령은 1946년생으로 광복(미군정기 포함)이후 출생한 최초의 대통령이다.[69]니콜라에 차우셰스쿠보다 높고 그와 같은 랭킹이 다름아닌 김정일이다.[70] 여기서는 직접적으로 이름이 나오진 않고 박 의장이라고만 불린다.[71] http://blog.donga.com/nambukstory/archives/64102[72] 이사람의 친손자가 젝스키스은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