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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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반역대 미군정 지도자

대한민국 제5~9대 대통령
박정희
朴正熙 | Park Chung-hee

파일:President_Park.png
대통령 재임 중 사진[1]

파일:박정희대통령초상화.png
공식 초상화

이름

박정희 (朴正熙, Park Chung-hee)[2]

출생일

1917년 11월 14일

출생지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상모동[3]

사망일

1979년 10월 26일 (향년 61세)[4]

사망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 안가[6]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독립묘역

재임기간

1963년 12월 17일 ~ 1979년 10월 26일

서명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71px-Park_Chung-hee_signature.svg.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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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

고령 박씨 직강공파 29세손

부모

아버지 박성빈, 어머니 백남의

형제자매

5남 2녀 중 5남

배우자

김호남, 이현란[7], 육영수[8]

자녀

박재옥[9], 박근혜, 박근령, 박지만

학력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졸업 (2기)

병역

육군 대장 예편 (국가재건최고회의)

종교

불교[10]

신체

158cm, A형

약칭

중수 (中樹)

1. 개요2. 일생3. 묘소4. 평가5. 각종 타이틀6. 저서와 관련 서적7. 각종 친필들과 그림들8. 기타9. 미디어에서
9.1. 박정희를 연기한 배우들
10. 관련 문서11.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제5·6·7·8·9대 대통령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찬탈한 후 관권/금권선거, 3선 개헌10월 유신으로 장기 집권을 획책해 18년간 집권하였으나, 임기를 측근암살로 마친 군인 출신 정치인이다.

※ '개요' 문단은 토론1, 토론2에 근거합니다.

2. 일생[편집]

3. 묘소[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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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pbs.twimg.com/CwuYpxUXAAA4dl_.jpg

박정희 전 대통령 묘소. 육영수 여사와 같이 안치되었으며, 대통령으로서 두 번째로 국립서울현충원(國立—顯忠院) 국가원수묘역에 자리하였다.


서울현충원 정문에서 직선방향으로 맨안쪽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당시 유명한 지관(地官)이 터를 골랐으며, 수맥을 막기 위해 토목공사를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앞을 내어다보면 앞에 장군 제1묘역과 한강을 중심으로 강북과 강남이 한눈에 보여진다.[11]

4. 평가[편집]

내용이 길어져 분리하였다. 자세한 사항은 박정희/평가 문서 참고.

5. 각종 타이틀[편집]

6. 저서와 관련 서적[편집]

  • 저서

    • 우리 민족의 나갈 길 (1962)

    • 국가와 혁명과 나 (1963)

    • 민족중흥의 길 (1978)

  • 관련 서적

    • 남산의 부장들

    • 실록 민주화운동: 우리 강물이 되어 1권

    • 실록 청와대: 궁정동 총소리

    • 청와대 비서실 1~2권 - 김진 저

    • 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4.19 혁명에서 3선 개헌까지 1~2권

    • 한국 현대사 산책 1970년대편: 평화시장에서 궁정동까지 1~3권

    • 다시쓰는 한국현대사 2권 - 박세길 저

    •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 박정희 다시 태어나다

    • 실록 군인 박정희 - 정운현 지음

    • 개발 독재자 박정희 평전 - 김삼웅 지음

    • 만화 박정희(상, 중, 하) - 조갑제,이상무 지음

    • 만화 박정희 (상,하) - 백무현 지음

7. 각종 친필들과 그림들[편집]

파일:3oYfMnp.jpg

파일:RenR3yt.jpg

1960~70년대에 제작된 각종 비석들 중에 박정희 친필 비석이 심심찮게 보인다.

파일:external/image.ytn.co.kr/201609041153544336_t.jpg

특이하게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박정희가 1979년에 쓴 신년 휘호를 박근혜 대통령에게 선물로 주기도 하였다. 미국으로 이민간 사람이 판매하는 걸 푸틴이 개인적으로 구입하였다고 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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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만큼 전문적으로 그림을 배우진 않은 것으로 보인다. 스케치나 수채화 그림들이 대부분. 그림을 보면 알다시피 미술을 전공한 사람이 아닌 일반인 기준에선 상당한 수준이다.

파일:external/blog.joins.com/map.jpg
고속도로 관련 구상도.

8. 기타[편집]

  • 박정희는 사망 이후 1979년 11월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는데, 이는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주요 친일 행각을 행한 인물들을 담은 '친일인명사전'에 해당 인물명이 포함 되어 있어 논란이 일었다. 박정희뿐만 아니라 친일 활동을 공고히 한 장면 전 총리도 이 논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 5.16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뒤,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는 존 F. 케네디를 만나 미국을 방문하기 전에 1961년 11월 12일 일본의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총리를 첫 대면한다. 박정희는 기시 노부스케 前총리와 세계 2차대전때 일본군 수뇌부 출신들 및 정계 유력인사들[22]과의 자리에서 유창한 일본어로 다음과 같이 말하여 동석한 일본 정객들을 흐뭇하게 만들었다고 한다.[23]

    “경험도 없는 우리한테는 그저 맨주먹으로 조국을 건설하겠다는 의욕에 왕성합니다. 마치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성공시킨 청년 지사와 같은 의욕과 사명감을 품고 그분들을 모범으로 삼아 우리나라를 빈곤으로부터 탈출시키고, 부강한 국가를 건설하려고 합니다.”


    박정희, 1961년 11월

    또한,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 사관생도 시절 교장이었던 '나구모 신이치로(南雲親一郞)' 전 일본군 중장을 이케다 수상 관저 오찬장에 특별히 초청하여[24]# 큰절을 올렸다. 박정희는 나구모 신이치로 중장에게 “교장 선생님 덕택에 일본 육사를 나왔고 이제 한국을 대표해 일본 총리를 만나게 됐다”고 감사의 인사를 건네며 술을 따랐고 이를 본 일본 요인들은 박수로 화답하였다.#

  • 박정희 본인이 직접 집필한 저서인 <국가(國家)와 혁명(革命)과 나>에 서술된 다음 대목에서 그의 역사 의식을 엿볼 수 있다.

    '이 민족은 겨우 삼천리의 좁은 변강 속에서 세계 희유(稀有)의 순혈(純血) 동포이면서도 혹은 분방 혹은 상잔을 거듭하면서 오랜 세월동안 두터운 봉건 속에서 빈곤과 나락과 안일무사(安逸無事)주의의 악순환 속에서 분열 파쟁만을 일삼아 왔다. 단 한번 국가다운 국가를 세워 보지 못하였음이 오늘까지의 우리 역사다.'


    <국가와 혁명과 나> 1963, 22p

    또한, 박정희는 명치유신에 대한 무한한 경외감을 감추지 않았다.

    "명치유신(메이지 유신)이란 혁명과정을 겪고 난 지 10년내외에는, 일약 극동의 강국으로 등장하지 않았던가. 실로 아세아의 경이요, 기적이 아닐 수 없다." (167p)

    "명치유신은 그 사상적 기저를 천황절대제도의 국수주의적인 애국에 두었다.(중략)명치혁명인의 경우는 금후 우리의 혁명수행에 많은 참조가 될 것은 부정할 수 없기 때문에, 본인은 이 방면에 앞으로도 관심을 계속하여 나갈 것이다." (171-172p)


    <국가와 혁명과 나> 1963

  • 조갑제가 저술한 박정희 전기 중 "4.19 혁명 이후, 이병주(국제일보 주필, 소설가) 황용주(부산일보 주필) 조증출(대구 사범 동기)와의 술자리"에서 박정희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미국에서 교포들을 모아 놓고 연설이나 하고 미국 대통령에게 진정서나 올리고 한 게 독립 운동이 되는 건가요? 똑바로 말해 그 사람들 독립 운동 때문에 우리가 독립된 거요? 독립 운동 했다는 거 말짱 엉터리요, 엉터리 해방 직후 우후죽순처럼 정당이 생겨갖고 나라 망신시킨 자들이 누군데. 독립 운동 했습네 하고 나선 자들이 아닌가. 독립 운동을 합네 하고 모두들 당파 싸움만 하고 있었던 거여. 그 습성이 해방 직후의 혼란으로 이어진 기라 말이다. 그런데도 민족의 체면을 유지했다고?"[25] #

    이번에는 박정희는 5.15 사건, 2.26 사건을 말하며 찬사를 하자, 황용주가 "천황 절대주의자이고 국수주의자 놈들이며 그들이 일본을 망쳤다"고 반박한다. 그러자 다음과 같이 답한다.

    "일본의 군인이 천황 절대주의자 하는 게 왜 나쁜가. 그리고 국수주의가 어째서 나쁜가. 그런 잠꼬대 같은 소릴 하고 있으니까 글 쓰는 놈들을 믿을 수 없다. 일본이 망한 게 뭐꼬. 지금 잘해 나가고 있지 않나. 역사를 바로 봐야 해. 패전 후 얼마 되지 않아 일본은 일어서지 않았나.” “자유주의? 자유주의 갖고 뭐가 돼. 국수주의자들의 기백이 오늘의 일본을 만든 거야. 우리는 그 기백을 배워야 하네.”[26] #[27]

  •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이었던 백강(白岡) 조경한(趙擎韓) 선생의 외손자이자 민족문제연구가 심정섭 씨가 외조부에게 직접 들은 바에 의하면, 박정희는 정변 이후 민정이양을 준비할 때 조경한 선생을 찾아가 입당을 권유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저는 다카기 마사오입니다. 저는 일제 때 친일 군인으로서 독립군 토벌에 앞장섰고, 해방 직후에는 광복군 중대장을 지냈습니다. 김구 선생님을 존경했지만 해방 후 한독당에 입당하지 못했고, 형제 때문에 남로당 입당해 공산 활동을 한 죄인입니다. 그러나 자수를 해서 대한민국 군인으로서 오늘날까지 살았습니다. 그러나 현재 나라가 반공 정신이 미약해지고 위기에 처해 이렇게 혁명을 일으켰습니다"

  • 박지원 국회의원의 증언에 의하면 김종필은 사석에서 박정희에 대해 한번도 좋은 평가를 내린 적이 없었다고 한다. 박정희 정권시절 36살에 중앙정보부장, 45살에 총리를 역임하며 최근거리에서 박정희를 보좌해왔지만, 박정희의 행태에 원한이 많은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특히 박정희가 박근혜와 최태민과의 관계를 중앙정보부에 조사하게 하여 많은 것을 알아냈지만, 박정희가 하도 못된 짓을 많이 하는 바람에 딸한테 약점이 잡혀 아무 소리도 못 했다고 증언하였다.#

  •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될 무렵(1970년 7월 7일), 당시 김종신 사회언론담당 비서관(전 부산문화방송 사장)은 박정희와 정강 장군을 만났는데, 정강 장군이 말하기를 "5.16 쿠데타가 일어난 아침 주동자가 박정희 소장이라는 말을 듣고 나라가 뒤엎어질 줄만 알았다. 나는 그(박정희)와 동기생이기 때문에 그의 전력을 어느 정도 알고 있어 위험한 인물로 봐 왔다" 그 후, 김종신 비서관은 선거 때마다 '사상논쟁'이 벌어졌으나 한번도 당사자의 시원한 해명이 없었기에 궁금해 용기를 내 물어본다. 그러자, 박정희는 이렇게 답변한다.

    "육사 교관으로 있을 때 형님 친구(이재복)되는 분이 찾아와 다음 일요일 모 장소에서 향우회가 있다면서 나더러 꼭 참석해 달라는 거야. 처음엔 거절하려다 사관학교 교관생활이 따분하기도 하고 해서 거길 갔었지. 그런데 그게 화근이 될 줄이야. 그날 향우회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빨갱이였어. 나는 거기서 (남로당 입당원서에) 사인하거나 도장을 찍은 적은 없지만 그 일로 김창룡한테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고 재판도 받았지."#

  • 1967년, 광복군 출신 박영만은 픽션 소설 <광복군>이라는 책(上下 전2권, 협동출판사)을 출판한다. 흔히 비밀광복군설의 ‘원전’이다. 내용은 '박정희가 1945년 2월 광복군에 가담한 뒤 부대 안에 비밀조직을 만들었고 김학규 장군의 명령에 대기하고 있다가 일본이 명령을 대기하고 있었다'는 내용의 소설이다. 박정희를 찾아가기 전에 박영만은 만주군 간도 특설대 하사이자 박정희의 후배 박창암에게도 찾아갔었다.

    "5·16 이후 반혁명사건으로 옥살이를 마치고 풀려난 박창암 前혁명검찰부장 앞에 박영만이 찾아왔다. 대뜸 ‘같이 박 대통령을 한번 도와보자. 어느 지하운동 리더의 공적을 박 대통령 것으로 만들고 싶으니 도와 달라’고 부탁했는데 박창암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러나 1967년 박영만은 기어이 ‘광복군’을 출간했다. 박영만은 책을 박정희에게 전달했으나 환대는커녕 호통을 들은 것으로 전해진다."


    정윤회 저자 <실록 군인 박정희>, 2004, 118p 중에서

    이를 두고 김승곤 前광복회장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증언한다.

    “박영만은 청와대에서 돈을 받을 줄 알고 <광복군>을 썼는데, 내용을 훑어본 박정희 대통령은 ‘내가 어디 광복군이냐. 누가 이 따위 책을 쓰라고 했냐’며 화를 냈고, 결국 박영만은 돈 한푼 못 받고 거창하게 준비한 출판기념회도 치르지 못했다”#

  • 미국을 세번째 방문한 박정희는 한일수교에서 독도영유권 문제가 발생하자, 데이비드 딘 러스크 미국 국무장관과의 대화 중에 박정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는 미국 기록이 있다.

    ‘수교 협상에서 짜증스런 문제 가운데 하나가 독도문제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독도를 폭파시켜 없애버리고 싶다.'
    (President Park said he would like to bomb the island out of existence to resolve the problem)


    1965년 5월 18일, <한일협정 반대운동(6·3운동) 사료총집> 2권 231쪽##

  • 박정희가 친누나만큼이나 좋아했던 주현숙의 말에 의하면 1939년말 박정희가 주현숙의 집에 놀러와서는 "군인이 돼 높은 사람이 돼서 오겠다" 며 일본군가를 불렀고, 얼마 뒤 실제로 일본군 장교가 되었다고 한다.#

  • 박정희가 문경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시절 이미 결혼을 한 유부남이었음에도 결혼 사실을 감추고 한동안 '총각선생님' 행세를 했다고 한다. 더러 중매가 들어왔지만 기혼자임을 밝히지 않았는데, 당시 문경 초등학교 5학년에 재학 중이던 제자 정순옥을 제자 이상으로 좋아했다고 한다. 정순옥의 아버지를 장인으로 부를만큼 사이가 진전됐으나 박정희가 유부남이란 사실이 들통나는 바람에 관계가 깨졌다고 한다.#

  • 이토 히로부미와 놀라울 정도로 똑같이 죽었다.둘 다 죽은 날이 10월 26일(이토 1909년, 박정희 1979년)에 둘 다 똑같이 저격당해(이토는 안중근에게, 박정희는 김재규에게) 죽었다.

  • '밤의 대통령'이라 불리며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던 방일영 조선일보 고문과 가까운 사이였다고 한다. 박정희는 첫 대통령 유세를 마친 뒤 방일영의 집으로 가서 기생들과 함께 '미꾸라지 잡기'라는 일본의 민속춤을 추면서 밤새 놀았는데, 이 사실이 육영수의 귀에 들어가 육영수는 청와대 비서들에게 다시는 박정희가 방일영의 집에 가지 못하게 하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 '80년대 아이유'로 불렸던 이경미 씨는 2018년 5월 31일 KBS2 교양프로그램 ‘속보이는 TV 人 사이드(속보이는tv)’에 출연하여 박정희 정권 시절 궁정동으로 끌려간 적이 있다고 증언하였다. 이경미 씨는 박정희와의 일화를 꺼내며 “‘저 사람 좀 불러’라고 누가 말하면, 궁정동 쪽으로 픽업이 된다. 가서 노래를 부르는 거다”라고 군부독재정권의 부름으로 궁정동에 끌려갔다고 전했다. 이경미 씨는 당시의 악몽을 회상하며 "오죽했으면 죽고 싶었겠나. 내가 무슨 노리개나 장난감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치를 떨었다고 한다.#

  • 이동원 비서실장이 박정희가 서독방문 시에 오는 길 영국런던에 가서 도시계획을 직접 한 번 보시는 게 좋겠다고 하니까 박 대통령이 버럭 화를 내면서 "나라에 돈도 없는데 관광이나 다니게 됐어?"라고 한다. (이동원 회고록에서)

  • 미국의 밴스 특사는 존슨 대통령에게 박정희는 종종 재떨이로 영부인과 참모들을 때린다고 하면서 위험하고 불안정한 사람이라고 보고했다.#

  • 박지만이 육사에서 친구와 휴가를 나왔을 때, 아들 친구가 온다고 하니 대통령이라고 딱딱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되겠다 싶어서 꽃남방(?)을 입었다고 한다. 아들 친구와 만났을 때는 아니지만, 휴가 가서 입은 모습이 찍힌 사진은 있다.

  • 교사 생활을 해서 그런지, 풍금도 잘 켜고[29] 그림도 곧잘 그렸고 서예에도 취미가 있었다. 서예 전문가들은 역대 대통령 중 최고의 명필로 이승만을 꼽지만, 가장 값을 비싸게 치는 것은 박정희의 서체라고 한다. 군인 출신답게 날카로운 판본체에 가까운 글씨를 고수했으며, 현재는 바뀐 이전의 광화문 현판도 그가 손수 쓴 것이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일본에서 되찾아온 소전 손재형에게 지도를 받기도 했고 승마검도, 국궁을 즐기기도 했었다.

  • 그리고, 박정희가 직접 작사, 작곡한 노래는 유신정권 시절에 프로파간다를 위해 만들었던 나의 조국이 있다. 그런데 이 노래를 직접 들어보면 알겠지만, 엔카풍 음계를 갖다 쓴 왜색가요나 다름없다. 박정희가 왜색을 몰아낸다면서 이 곡 저 곡을 금지시켰던 시대였음을 감안한다면 상당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 유럽 방문 당시, 한자로 서명하려는 걸 본 측근 한 사람이 "각하는 대한민국 대통령이십니다."라 조언하자, 즉시 한글 사인으로 바꾸었다는 일화가 있다. 이후에도 박 대통령은 한글 서명으로 일관했다고 한다.

  • 비름나물이나 두부 같은 향토음식을 좋아했다고 한다.##

  • 일상생활이 검소했다는 주장이 있다. 허리띠가 해져도 모르다가 청와대 전속 이발사가 알려줘서야 알아차렸다거나, 여름에도 에어컨을 틀지 않고 겨울 난방도 적정 온도를 유지했다는 증언도 있었으며, 변기물을 아끼려 변기 뒷칸에 벽돌을 놓았었다는 것. 빈농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몸에 배인 생활습관의 영향으로 추정된다고 하며, 해외의 한국 근현대사 관련 학자나 정치학자들도 박정희의 생활이 검소했다고 평가했다.출처# 하지만 사망 당시 술자리를 보면 갈비, 장어, 송이, 전복 등의 고급 술안주를 차려놓고 연예인까지 불러 유흥을 즐긴 점을 감안하면 검소하다고 보기 어렵다는 의견도 있으므로,출처 이에 대한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이와 관련해, 육영수 여사의 사망 이후 검소하던 박정희가 사치스러워졌다가 현재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한수 전 <서울신문> 사장은 "육 여사가 죽은 뒤 박 대통령의 주변에 '인의 장막'이 둘러쳐져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고 설명했다. 이씨뿐만 아니라 박 대통령 주변의 많은 인사들이 그의 '실정'의 원인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인간 박정희'의 소탈하고 서민적인 면모는 유신체제 출범 뒤 그 '물'이 많이 빠졌다는 게 주변 인사들의 증언이다. 이 무렵부터 그의 술자리에는 막걸리보다 '시바스 리갈'이 자주 올라왔고, 여자들과의 추문도 불거지기 시작했다. 물구나무 서기와 검도로 체력을 단련했던 그가 골프에 푹 빠진 것도 이 무렵부터다. 박 대통령이 '장학생'으로 관리하던 몇몇 기자들과 사이가 틀어진 것도 이 때다. 박 대통령은 1978년 출입기자들과의 만찬에서 술에 잔뜩 취한 채 자신에게 비판적인 기사를 쓴 한 일간지 기자의 이마를 들이받아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그의 독재권력이 종말에 가까울수록 ‘인간 박정희’도 서서히 망가져 갔던 것이다.

  • 1979년 신년 기자회견에서 '새마을운동 홍보 질문'을 배정받은 동아일보 강성재 기자가 사전 시나리오를 깨고, '각하' 호칭을 '대통령께서'로 바꾸고 미리 짜여진 질문에 이어 새마을 운동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차지철 경호실장은 눈초리를 올리며 권총을 만지작거렸다. 2달 뒤, 박정희는 청와대 출입기자 술자리에서 만취해 그 기자의 이마에 박치기를 날렸다고 한다. 그로부터 열흘 후, 박정희는 강 기자에게 정식 사과했다.#[30]

  • 1991년도엔, 제3공화국 정계인사들과 당시 모델이자 배우, 서울 고급 요정의 접대부로 일한 정인숙의 아들인 정성일 씨를 두고 정일권 전 국무총리 박정희 전 대통령, 이후락 전 중정부장, 박종규 전 경호실장 등 사이에 친자논란에 휩싸인 적이 있다. 비공식적인 내연관계였으며 꾸준히 모자에게 금전적인 도움을 주던 정 전 국무총리가 유력했으나 93년 주병진쇼에서 정종일 씨가 정 씨와의 통화중 " '당신은 나의 아들이 아니며 내가 모시던 분의 아들'"이라고 밝혀 친부의 행방이 묘연해졌다. 그러다 친자확인소송으로 인해 논란이 일던중 정일권 전 국무총리가 사망해 이 사건은 유야무야되었다. 2005년에 귀국하기 전까지 LA에서 머물던 정성일 씨를 기억하는 재미교포들의 증언에 따르면, 생김새나 화술도 번듯한 세일즈맨이었지만, 씀씀이가 버는 돈에 비해 헤펐으며, 스캔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또한, 본인을 ‘정 전 총리의 아들’이라고 자랑삼아 말하기도 했다고 한다. 현재 이 논란은 미궁 속으로 빠져 미확인으로 남게 되었다.#

  • 박정희가 정인숙불륜관계였다는 소문을 들은 육영수가 박정희에게 사실 여부를 따지며 대들자 진노한 박정희는 고함을 치면서 육영수의 얼굴에 재떨이를 집어던졌다고 한다.[31]##

  • 위 목격담 이후 농이 하나 생겼는데, "박정희와 육영수가 싸우면?" 이라는질문에 육박전이라는 단어가 탄생했다. 이 드립을 고안한 전유성은 방송에서 이 언어유희를 자문자답하다가 3개월 동안 방송출연을 정지당했다.# 그런데 대통령 전용 비행기 승무원인 최은자 씨가 경남 진주로 가는 비행기에서 대통령 부부 앞에서 육박전 얘기를 했더니 둘 다 박장대소했다고 증언하였다.#

  • 지방순시 중에는 전용차를 놔두고 슬쩍 지나가던 시외버스를 타고 승객들이랑 노가리 깐 적도 있었다는 증언이 있다. 승객들은 앞에 가는 전용차를 타신 높으신 양반에 대해 씹고 뜯었지만, 정작 그 높으신 양반이 자기네와 같은 차를 타고 있는 건 몰랐다고 한다. 식당에서 자신보고 박정희를 닮았다고 하는 주인장에게 "대통령이 날 닮았지."라며 뻔뻔하게 대꾸한 적도 있다는데, 아마 밑에도 있는 전주 삼백집 일화의 일부인 듯하다.

  • 1965년 미국 웨스트포인트에 있는 미국육군사관학교에 방문했을 때, 생도들을 사면해 준 일이 있었다. 미 육사는 방문하는 귀빈에게 특권 하나를 주는데, 대개 퍼레이드를 요청하거나 기념품을 받거나, 특별연설 정도였다. 그런데 박정희는 그 특권으로 현재 교정에서 징벌 중인 생도들의 사면을 요청하였고, 덕분에 크고 작은 징계를 받고 있던 260명의 생도들이 사면되었다. 훗날 이 생도들은 임관 후 다들 기피하는 한국 근무에 자원했다고 한다.

  • 70년대 중반 쯤 혜화동로터리 근처의 막걸리집에 박정희가 혼자 들어와 막걸리 한 사발을 시켜서 김치를 안주 삼아 마셨다는 말이 있다. 잠시 후 주인이 부스럭 소리가 나서 뒤돌아보니, 대통령이 막걸리 독에서 직접 또 한 잔을 퍼고 있더란다. 다 먹고 나서 얼마냐고 묻고는 호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 계산하고 나가더라고.

  • 전주 지역 시찰을 마친 후 술을 마신 다음 날 아침에 콩나물국밥으로 유명한 삼백집에 수행원을 시켜 배달을 요청했는데, 하필 그곳 주인이 욕쟁이 할머니였다, 당연히 "이 썩을 놈아, 어따 대고 배달을 해달라고 XX이야! 와서 처먹어!"라는 호통이 날아왔고 이에 사색이 된 수행원이 보고하자 박정희는 "허허, 오라면 가야지."라면서 국밥집을 찾아갔다. 물론 수행원들이 미리 가서 제발 욕을 하지 마시라고 신신당부했지만 이에 개의치 않은 할머니는 계속 욕설 섞인 응대를 했고, 박정희가 국밥을 먹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반숙 계란을 가져오더니 "이놈 봐라? 니놈은 어찌 그리도 박정희를 닮았냐? 그런 의미에서 이거나 더 처먹어라."는 말까지 했다. 이에 박정희도 지지 않고 껄껄 웃으며 "할머니. 내가 박정희를 닮은 게 아니라, 박정희가 날 닮은 거요."라는 말로 응수했으며 연신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맛있게 국밥을 먹고 자리를 떴다고. 일설에 따르면 그 할머니는 작고하기 직전까지도 "그때 그 놈팽이는 박정희가 아니야!"라고 자신이 욕을 퍼부은 상대가 박정희였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고 한다.

  • 스웨터 수출하는 공장 시찰을 갔을때 대통령과 이야기를 나누던 어린 여공이 "공부 못한 게 한입니다."라고 하자, 사장과 논의해 야간학교를 세우기로 결정이 되었다. 고등공민학교, 혹은 산업학교라고 불린 이 교육기관은 정식학교가 아니었기 때문에 문교부에서 수료증은 몰라도 졸업증은 불허한다는 지침을 내리자, 다음 날 문교부 장관이 청와대에서 관련 규정이 바뀌었다.

  • 경부고속도로 공사 당시, 박정희가 현장을 지휘하던 정주영 회장을 호출해서 만났는데, 정 회장이 하도 피곤해서 대통령이 이야기 하던 중에 졸았다고 한다. 하지만 박정희는 이를 탓하지 않고 오히려 피곤한 사람을 잡아두었다며 사과했다고. 이런 일과 달리, 박정희가 조선소 건립을 지시했는데 정 회장이 기술과 자본 문제로 난색을 보이자, "현대가 정 회장 개인 거요?"라고 호통치기도 했다고 한다. 다만 일방적으로 까라면 까라는 식은 아니었고, 조선소 건립 외자 유치에 있어 정부가 보증을 서주기로 약속했다.

  •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에 남한 면적 정도의 땅을 사서 대규모 농업 이민을 시키자는 계획을 세운 적이 있었다. 왜 그런 계획을 생각하냐는 물음에 "국내에 있을 땐 불만이 많더라도 외국 나가면 다들 애국자가 된다"라 했다고. 일본의 남미 이민을 보고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도 있다. 실제로 이때 시험적으로 매입한 토지가 아르헨티나에 있다. 야따마우까 농장으로서, 면적은 9만평. 서울시의 30~40% 정도 된다고 한다. 하지만 해당 토지는 염분이 많아 농장 경영에는 실패했다. 이때 아르헨티나에 이민 갔던 사람들은 다른 사업을 하면서 현지에서 기반을 잡았다. 오랫동안 있으나 마나 했던 이 땅에 대해 최근에 탄소 배출권 문제 해결에 이용해 보자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었고, 실제로 노무현 정권 시절 활용계획을 지시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후 활용계획은 백지화되었고, 박근혜 정권 시절 불법점거중인 현지인들에게 무상으로 양도하기로 합의하고 공증까지 채결했다고 한다. #

  • 박정희는 개인적으로 나폴레옹 숭배자였고, 교사 생활이나 결혼 생활을 탐탁찮게 여겼다. 특히 결혼 생활이 불성실해서 형인 박상희에게 잔소리를 많이 들었다. 박정희의 초혼은 당시 농업국가의 사회분위기처럼 나이 차면 집안에서 결혼하라고 시켜서 결혼한 것이었다. 즉 박정희 본인과 배우자[32]가 원해서 한 결혼이 아니였다는 것.

  • 박정희의 큰 형 박동희는 66세 때 동생이 정변에 성공하여 대통령이 된 뒤에도 고향인 구미면 상모동에서 농민으로 살다가 죽었다. 박동희는 1남 1녀가 있었는데, 아들 박재홍은 백수로 있다가 삼촌이 대통령이 된 다음 포항제철에 취직했고, 이후 민주정의당에 입당하여 국회의원으로 4선을 했다. 박정희의 큰 누나 박귀희는 은 씨 집안으로 출가해 3남 2녀를 두었는데, 이 3남 중 차남 은희만의 아들이 바로 연예인 은지원이다. 둘째 누나 박재희는 박정희가 어릴 때 잘 돌봐주었고, 박정희가 대구사범학교에 다닐 때 남편 한정봉이 학비를 대주기도 했다. 당시 한정봉은 기자로 일했는데, 박정희가 만주갈 때 밑천으로 쓰려고 매형의 밥줄인 카메라를 가져갔다. 박정희가 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나서 이들 부부가 성북동으로 이사 왔는데, 청탁꾼들이 하도 찾아와서 박정희는 경찰을 배치하고 둘째 누나 일가에 대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함은 물론 상주군으로 내려가라고 압박을 가했다. 이 때문에 박재희는 단식투쟁 하며 섭섭함을 토로하기도 했다.

  • 김영삼의 회고록인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에 적힌 내용에 의하면, 1975년 영수회담에서 김영삼과 박정희가 단독회동을 가진 적이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박정희는 자신은 권력에 미련 없고 곧 민주주의를 하겠다고 김영삼에게 약속했지만, 1979년 김영삼 총재 의원직 제명 파동으로 김영삼의 뒷통수를 친다. 또한 부마민중항쟁을 무력진압하고, 중앙정보부와 김태촌을 이용하여 김영삼을 신민당에서 실각시키려는 시도를 한 점 등으로 미루어 보아 박정희가 한 약속에 진심이 담겨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 정작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치열하게 맞붙었던 김대중과는 1968년, 청와대 신년인사회의 단 한 번이 만남의 전부라고 한다. 자서전에서 김대중은 박정희에게 6.7 총선에서 내건 목포 지역 공약 이행을 부탁했고, 박정희는 시원하게 "그래야죠."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 후 김대중은 유신정권에게 납치 당해 공해상에서 죽을 뻔하고 정치적 탄압을 받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2000년대에 있었던 박정희 기념 사업을 이끈 장본인이 김대중이었다. 역사화해작업을 주도하면서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가 김대중에게 직접 찾아와 유신정권의 탄압에 대해 용서를 구했다고 한다. 김대중의 반응은 죽은 박정희가 살아 돌아와 나에게 악수를 청하는 것만 같았다.였다고.

  • 경상북도 구미에 위치한 박정희 생가는 경상북도 기념물 제86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정확한 주소는 경상북도 구미시 박정희로 107(상모동). # 박정희 생가 안에는 내부에 추모관이 마련되어 있는데, 그곳에서 박정희의 영정에 대고 기도하는 사람들을 찾아볼 수 있다.박정희와 육영수 영정에 참배하는 정몽준 또한, 야외에는 박정희와 육영수의 실물 사진으로 만든 패널이 설치되어 있는데 "어께에 손을 올리고 사진을 찍지 마시오"라는 경고문이 옆쪽에 세워져 있다고 한다. 생가 건물 아래쪽에는 중흥역사관이라는 이름의 박정희 홍보관이 설치되어 있다. 또한, 박정희 생가를 관리하는 구미시에서는 사이버박정희대통령(#)이라는 사이트를 운영하며 박정희의 업적을 홍보하고 있다. 해당 사이트에는 박정희에 대한 비판이 나와있지 않다.

  • 박정희의 딸 박근혜가 하야하지 않아서 화가 났다는 이유로 박정희 생가가 불에 탄 사건이 있다. 추모관 내부 및 영정들이 전부 불에 탔다고. # 불탄 박정희 생가는 9000만 원을 들여 원래대로 복원할 예정이라고 한다. 복원 비용은 화재보험 보상비로 우선 충당되지만, 부족할 경우 구미시 예산도 추가로 투입될 가능성이 있다. #

  • 낸시랭이 ‘박정희와 팝아트투어’ ‘박정희를 관광한다’는 이름으로 박정희 생가를 찾아 박정희의 실물 사진 패널의 뺨에 뽀뽀하는 사진을 올리고, 일행은 육영수 실물 사진 패널 앞에서 손가락욕을 하는 퍼포먼스 사진이 공개되어 논란이 된 바 있다. #

  • 박정희의 고향경북 구미에는 매년 박정희 '탄신'제가 열리고 있다. 네티즌들에게 조롱거리가 된 반인반신 드립도 당시 구미시장이었던 남유진의 발언에서 나온 것. 지역 보수 주민들은 물론 보수 성향이 짙은 노령의 대구경북도민, 새누리당 의원들, 지역 유지까지 참석하고 있다. 특히 2012년 제18대 대선 때 새누리당과 박사모의 노골적인 박근혜 지지로 논란을 빚었으며, 선관위는 이에 대해 "부적절하나 선거법 위반은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저기서 박정희를 칭송하는 심학봉 의원은 2015년 성추문 스캔들로 결국 의원직을 사퇴하였다. 대통령으로서 박정희의 행보는 둘째 치더라도, 민주주의 국가에서 일개 인간에 불과한 박정희 부부 내외 동상에 절하고 소원을 비는 등 인간을 신격화한다(개인숭배)는 점에서 무신론자는 물론 기독교 계열에서도 비판한다. # 경북의 일부 절에서도 박정희와 육영수의 초상화를 걸어 놓은 곳을 더러 찾아볼 수 있다.''' 참조 이는 구미시의 행정에도 치명적인 악영향을 주었는데, 탄신제를 여는 동안 구미시는 기존 공단의 노후화와 기업들의 이탈 등 지역경제 위기를 맞고 있었는데 이를 외면하고 탄신제를 지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더불어민주당 장세용 후보가 구미시장에 당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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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정희 본인은 딱히 종교를 가지지 않았으나,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영부인 육영수의 영향을 받아서 친불교 성향을 약간 가졌다. 그래서 당시 불교계에서 승려병역을 수행하기 어려운 점을 언급하자 호국승군단이라는 준군사조직을 따로 만들어서 병역을 대신할 수 있도록 했다. (이후 전두환이 해산시켰다.)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을 비롯해 가톨릭 사제들이 정권 비판 발언을 자주하자, "정교 분리 지켜야 하는 거 아니냐? 이참에 우리도 종교에 개입할까?"라고 투덜거리기도 했다고... 하지만 의외로 천주교 자체에 대한 평가는 호의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딸 박근혜를 천주교 계열 미션스쿨성심여자중학교, 성심여자고등학교, 서강대학교에 보냈다. 그런데 안동교구 가톨릭농민회 사건 문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천주교=빨갱이란 인식을 심어준 것도 박정희 정권 때여서 우호적이었다고 하긴 힘들다.

  • 박정희 정권 당시 육군 소위 신분이었던 노병천은 저서 <박정희 마지막 신앙고백 (부제:최초로 공개하는 박정희 전도 비화)> 을 통해,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목숨을 건 직언으로 "대통령 각하! 이대로 지옥 가시겠습니까?" 라며 기독교 복음을 전해 그에게서 마지막 신앙고백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박정희는 서거하기 불과 얼마 전에 대통령직에서 하야하면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했단다. 박정희가 서거하기 직전까지 온전히 예수님을 영접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호기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한 비하인드 스토리이다.

  • 다른 독재 정권에 비해서 대학 운동권을 대하는 태도는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혹은 상대적인' 측면이기는 하지만 유화적으로 보였다. 대학 내에 상시 주둔하는 정보과 경찰을 제외하면 직접적으로 경찰이나 군병력을 투입하지는 않았고 운동권 출신[33]들도 사법시험에 합격시켰다. 이는 전두환 정부 시절에는 백골단으로 대표되는 진압단이 대학 캠퍼스에 난입하여 학생들을 까고 전경들이 수시로 대학 내를 순찰했고, 박근혜정부에는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박근혜를 상대로 시위하던 학생들에게 사복경찰을 대거 투입하여 스크럼을 짠 것과 비교될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표면적으로만 유화적으로 보일 수 있을 뿐이었지 박정희 역시 독재자로서 대학 운동권을 잔인하게 탄압하였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는 피해자들 중 대학생이 다수 포함되어있는 최악의 용공조작사건 중 하나인 민청학련 사건이 있다.

  • 부산·마산지역 대학생이 주도했던 부마항쟁에 대하여 폭압적인 태도를 보이려 했다. 김재규의 증언에 의하면 "자유당 때는 최인규나 곽영주가 발포명령을 하여 사형을 당했지만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하면 대통령인 나를 누가 사형시키겠느냐?"라는 발포 명령을 시사하는 발언을 한 적도 있었다. 이렇게 부산과 마산에 광주민주화운동 같은 대규모 유혈사태가 있을 위기가 도래했지만, 박정희가 직후 사망했기 때문인지 다행히 실제로 유혈사태가 일어나지는 않았다.

  • 성형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다만 외형적인 측면을 위해서가 아니라 축농증으로 알려진 부비동염을 앓고 있었기 때문. 호흡곤란이나 감기 증세를 동반한 장애를 고치려 60년대부터 수술을 하였으나 적절한 치료 방법이 없어 78년도에 다시 수술을 진행하여 완쾌하였다고 한다. 한국에서 2번에 걸친 성형을 했지만 결국 실패하여 일본으로 넘어가서 수술을 받아서야 증세가 없어졌다고 하는데, 이에 이전 수술 실패에 대해서 아무런 불평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김유혁 단국대 종신명예교수 증언

  • 제9대 박정희 대통령 취임기념 시계가 있는데, 역대 대통령 시계 중에서 가장 비싼 값에 거래되고 있다. 인기도 그렇고 매물도 적어서. 큰 특징으로는 역대 대통령 시계 중에서 유일한 기계식 시계이다. 요일 표시는 한자와 영어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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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처음 최태민박근혜와의 관계를 들었을 때 화가 나서 최태민거세시키고 박근혜 근처에도 오지 못하게 하라고 지시를 내렸으나 공교롭게도 얼마 안 있어 육영수 여사가 문세광한테 암살 당했고, 이후엔 '애미 없는 것'이라고 딸을 감쌌으며 결국 주변의 충언에도 불구하고 지시가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나중엔 오히려 최태민이 마음에 안드는 도지사나 경찰총장을 호출하여 호통치거나 구국십자군이란 단체를 만들어 돈을 갈취하는 국정농단 행위를 방조하기 까지 하였다. 결국 최태민의 전횡을 방조하던 박정희를 보다못하여 결국 저격하게 되었다고 김재규는 항소이유보충서에서 밝힌 바 있다.

  • 2017년 박근혜 파면 이후 박정희는 자식 농사가 크게 실패했다는 부정적 이미지가 부쩍 늘었다. 아버지의 후광을 업고 대통령이 된 박근혜가 자신의 이미지를 완전히 손상시켰고, 헌정사상 최악의 부패 사태를 초래하여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로 대통령직에서 탄핵 당했다. 박근령은 일제 시기 일본의 한국 식민통치를 옹호하는 친일 망언과 독재자에 친일반민족행위자였던 아버지 박정희와 국정농단 사범인 친언니 박근혜를 대놓고 찬양하고 미화하거나 그들의 악행을 부정하는 등 극우 행위로 논란이 되고 있으며, 박지만은 상습적인 마약 복용으로 구속과 투옥을 반복했고, 마약 문제 뿐만 아니라 박근혜 5촌 살인사건 등 살인 범죄에 개입하였다는 의혹이 있다. 다만 박정희와 전처 김호남 소생의 장녀 박재옥은 물의를 일으키지 않고 조용히 생활하고 있으므로 제외. 그러나 일부에서는 박재옥 역시 그의 일가족들이 설악산 케이블카 사업의 경영권을 독점하고 과거 박정희 정권 시기 특혜를 받았다는 이유로 박재옥도 박근혜, 박근령, 박지만보다 덜할 뿐 몰염치하고 부패한 인물이라고 비판하는 이들도 더러 있다. 물론 박재옥 역시 논란이 없진 않아도 여전히 비난을 받고 있는 박근혜와 박근령, 박지만보다는 성품이 좋은 것은 분명하다.

9. 미디어에서[편집]

9.1. 박정희를 연기한 배우들[편집]

이창환이 특히 박정희 전 대통령 전문 배우로 유명하다.

파일:민족과 운명 박정희.png

  • 김윤홍: 북한 영화 민족과 운명에서 박정희 역할을 맡았다. 북송선을 타고 온 재일교포 출신으로, 이 영화의 박정희 연기 덕분에 김정일로부터 "대통령 각하"라는 칭찬도 받고, 무명배우에서 공훈배우로 출세했다. 박정희와 닮게 나오려고 주사도 맞고, 튀어나온 입을 묘사하기 위해 촬영 때마다 안에 틀도 넣었다고 한다.[35]

  • 이성민: 남산의 부장들[36]의 박정희

  • 이상훈: MBC 라디오 드라마 격동 50년의 박정희

  • 이승환: MBC 라디오 드라마 격동 50년의 박정희

10.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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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후 국장 때에 영정 사진으로 사용되었다. 박정희 생가에 비치된 영정 사진은 이와는 다른 것으로, 제복을 입고 아내 육영수와 함께 찍은 사진을 이등분하여 각각 비치했다.[2] 일본식 이름은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3] 현 경상북도 구미시 박정희로 107(상모동 171). 경상북도에서는 1988년 이전까지 , 의 하위 행정구역으로 가 아닌 을 썼다.[4] 박정희 그가 살아온 모든 일생의 일수가 총 22627일.[5][5] 1일의 기준일을 포함하여.(탄생 D-Day)[6] 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효자로 97[7] 정식 결혼은 아니고, 사실혼 관계(동거)[8] 육영수 사후, 프랑스 유학 중이던 박근혜가 귀국해 영부인 역할 대행.[9] 김호남 소생.[10] 어렸을 때는 강제로 개신교였다. 불교신자였던 육영수의 영향을 받아 친불정책을 많이 시행했었다. 무교라는 말이 있으나 일단 약력에는 불교로 되어 있다.[11] 출저/두번째 사진 블로그 출저 [12] 1963년 12월 기준 만 46세[13] 5~9대 대통령, 5선[14] 158cm로 자신의 딸보다도 작았다. 당시 기준으로 봐도 성인 남성 치곤 작은 편이었다. 부인 육영수 여사가 170cm의 장신이라 대통령 위엄 떨어져 보인다고 측근들이 의자에 방석을 까는 등 최대한 크게 보이도록 기를 썼는데, 정작 당사자인 박 대통령은 자기의 작은 키를 거의 신경 쓰지 않았고, 되려 의자에 키높이 방석이 있는 걸 보고 화내면서 그걸 던져 치워버린 적도 있다.[15] 두번째는 전두환 대통령으로 아직까지 쿠데타로 집권한 대통령은 이 둘 뿐이다.[16] 일제 강점기때 태어난 대통령으로는 최규하(1919년생), 김대중(1924년생), 김영삼(1927년생), 전두환(1931년생), 노태우(1932년생), 이명박(1941년생) 전 대통령이 있으며, 더 추가될 가능성은 높지 않다. 16대 노무현 대통령은 1946년생으로 광복(미군정기 포함)이후 출생한 최초의 대통령이다. 그의 딸이자 18대 대통령이였던 박근혜(1952년생), 현재 19대 대통령 문재인(1953년생)은 광복 이후 태어났다.[17] 후에, 집권기간이 짧은 최규하, 일본에서 태어난 이명박, 그리고 호남출신 김대중을 제외하면 현 대통령 문재인을 포함하여 전부 경상도 출신이다. 물론 초대랑 4대 역시 제외하겠지만. .[18] 사실 과거사까지 한국사를 통틀어 봐도 임기 중에 수반이 살해된 사례는 아주 드물다. 최후가 좋지 못한 왕들도 일단 왕위에서 내려온 다음에 처리된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 한참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야 고구려 모본왕 암살 사건, 백제 부여(책계/)분서 부자, 연개소문영류왕 시해, 고려 공민왕 시해 사건 정도가 꼽힐 정도다.[19] 18대 대통령인 박근혜가 그의 차녀이다. 그리고 그의 딸은 나라를 시원하게 말아드셨다.[20] 두번째는 친인척들의 비리조사 중 자살한 노무현 대통령[21] 케네디와 만날 당시에는 대통령이 아닌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신분이었다.[22] 기시 노부스케(岸 信介), 시나 에쓰사부로(椎名悅三郞) 등의 과거 일본의 만주 인맥들[23] 정치학자 강상중의 책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 에서는 11월 11일 일본 수상 관저 오찬회라고 서술하고 있으며#, 한홍구 역사학자는 신문사설에서는 11월 12일 아카사카의 요정이라고 서술하고 있다.#[24] 박정희 의장은 중앙정보부를 통해 일본 외무성에 나구모 신이치로를 한일회담 오찬장에 부를 것을 부탁했다.[25] 위 문장구조는 토론 71369에 근거합니다.[26] 위 문장구조는 토론 71369에 근거합니다.[27] 결국으로는 이 발언에 대해 사쓰마 번 만으로의 주축과 전 일본 국민들이 구니노미야 나가코 여왕(이후 고준 황후, 어머니 치카코 왕비로부터 색맹 형질을 이어받음) 한테로만 지지하여 (조슈 번 측근 한테서만 지지를 받는) 이치조 도키코(이후 후시미노미야 히로야스 왕과 혼인 성사를 하였음)를 압도하였다는 일본 천황가 색맹 사태 논란(쇼와 천황 혼례 시기)을 저지하려다 실패당하고도 현재를 거치는 회심의 앙갚음(신사 참배)으로 가하려는 조슈 번 출신 일본 정부 총리 인사들을 능멸하는 문제의 파탄 발언으로 지적당하고 있기 때문이며, 천황이 일본 국법을 제재하는 일본 제국에서 1945년부터 연합군한테서의 일제 패망->GHQ 설치(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따라 7년 뒤(1952년)에 해산)에 따라 현재로도 일본국 국적의 국민이 일본 국법을 제재하는 일본국으로 헌법을 개정(변경)하였다는 일본 열도의 법치 개정 시사를 박정희가 상세히 깨달았어야 하기 때문.[28] 정확하겐 주연인 최불암이 드라마에서 담배를 피울 때 박정희도 같이 피웠다고 한다. 그래서 육영수 여사가 직접 최불암에게 전화를 걸어 담배를 적당히 피워주십사 요청했다 한다.[29] 새마을 노래를 직접 작사, 작곡하기도 했다. 단, 작곡은 음악을 전공한 둘째딸 박근령이 아버지 박정희의 요청으로 자신이 했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반면, 풍금을 켜면서 직접 작곡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는 주장도 있다. 박정희가 풍금 코드를 기반으로 노래를 만들고, 박근령이 곡을 다듬고 악보작업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30] 참고로 박치기 세례를 받은 강성재 기자는 이후 신군부에 언론통폐합 과정에서 해직당하였으나, 이후 민주정의당에 입당하여 정치에 입문했으며, 신한국당 소속으로 15대 총선에 당선(서울 성북을)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31] 청와대 전 인사의 말을 인용한 조갑제의 책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에 의하면, 얼굴에 던져서 피멍이 들었다는 말은 사실은 아니라고 하나, 그렇다고 하는 증언도 존재함으로 의견은 분분하다. 그러나 육 여사의 눈두덩이에 피멍을 목격한 건 공통적인 증언.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당시 출입기자들 사이에선 주색으로 인한 부부싸움이라고 판단했다.# [32] 김호남. 이후 박정희는 육영수와 재혼하였다.[33] 대표적으로 문재인 대통령. 당시 문재인은 유신 헌법 반대 시위를 하면서 사법 고시를 준비하던 법학과 동기들에게도 열심히 시위 동참을 호소하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시 1차에 합격하였다. 하지만 이후 경희대학교 4학년 총학생회 총무부장으로서 반유신 집회를 주도한 것으로 구속되고 대학에서 제적당한 일을 보면 이게 결코 유화적인 태도라 볼 수는 없다.[34] 여기서는 직접적으로 이름이 나오진 않고 박 의장이라고만 불린다.[35] http://blog.donga.com/nambukstory/archives/64102 [36] 2018년 10월 크랭크인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