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년식 소총
최근 수정 시각:
Type 30 三十年式小銃 30년식 소총 | |||||||||||||||||||||||||||||||||||||||||
![]() | |||||||||||||||||||||||||||||||||||||||||
종류 | |||||||||||||||||||||||||||||||||||||||||
원산지 | |||||||||||||||||||||||||||||||||||||||||
[ 펼치기 · 접기 ]
| |||||||||||||||||||||||||||||||||||||||||
C&Rsenal의 리뷰 동영상 | Forgotten Weapons의 리뷰 동영상 |
이전에는 무라타 소총 13년식·18년식이 주력으로 사용되었는데, 13년식의 경우 격발할 때마다 탄입대에서 일일이 탄을 꺼내 장전해야 하는 단발식이고, 18년식부터 탄창을 장착했지만 튜브식이어서 탄창에 일일이 장전하는 데 한계가 있어서 청일전쟁 중에 화력 부족을 드러냈다. 따라서 당시 세계적 추세인 연발소총(연발을 장전할 수 있는 탄창을 가진 소총)[2]을 개발할 필요가 있었다.
사용 탄약은 6.5×50mm SR이다. 38식 소총과는 달리 끝이 뭉툭한 30년식 실포를 사용한다.[3] 도쿄포병공창에서 생산하였다.
러일전쟁에서 주로 활약하였다. 특히, 명중률에 있어서 러시아군의 모신나강을 웃돌았고 이는 봉천회전을 비롯한 러시아군과의 주요 전투에서 승리의 원동력이 되었다.[4] 그러나 만주 등지의 거친 환경에서 약실에 이물질이 유입되어 작동 불능이 되는 문제가 잦았기 때문에 얼마 안 있어 이 점을 개선한 38식 소총으로 교체되는 운명을 맞는다.[5]
대한제국군에서 미쓰이 물산을 통해 약 1만정에 달하는 양을 수입하여 운용하였다. 신형 제식소총임에도 생산된 지 몇 년 만에 대한제국에 대량으로 수출될 수 있었던 이유는 미쓰이 물산에서 주한일본공사관 주재무관이었던 노즈 소좌에게 뇌물을 먹여 구식 무라타 소총 1만정을 수출한다는 식으로 서류를 위조했기 때문이다. 1905년에는 용산 군기창(軍器廠)을 통해 생산을 시도했지만, 실제로 생산이 이루어졌는지는 불확실하다.
사용 탄약은 6.5×50mm SR이다. 38식 소총과는 달리 끝이 뭉툭한 30년식 실포를 사용한다.[3] 도쿄포병공창에서 생산하였다.
러일전쟁에서 주로 활약하였다. 특히, 명중률에 있어서 러시아군의 모신나강을 웃돌았고 이는 봉천회전을 비롯한 러시아군과의 주요 전투에서 승리의 원동력이 되었다.[4] 그러나 만주 등지의 거친 환경에서 약실에 이물질이 유입되어 작동 불능이 되는 문제가 잦았기 때문에 얼마 안 있어 이 점을 개선한 38식 소총으로 교체되는 운명을 맞는다.[5]
대한제국군에서 미쓰이 물산을 통해 약 1만정에 달하는 양을 수입하여 운용하였다. 신형 제식소총임에도 생산된 지 몇 년 만에 대한제국에 대량으로 수출될 수 있었던 이유는 미쓰이 물산에서 주한일본공사관 주재무관이었던 노즈 소좌에게 뇌물을 먹여 구식 무라타 소총 1만정을 수출한다는 식으로 서류를 위조했기 때문이다. 1905년에는 용산 군기창(軍器廠)을 통해 생산을 시도했지만, 실제로 생산이 이루어졌는지는 불확실하다.
파생형으로 30년식 기병총, 35년식 해군총, 북지 12식 소총이 있다.
●費額請撥
軍部에셔 度支部에 照會되 軍器廠에셔 製作需用에 關 器械를 備置已久나 該廠事業預筭이 不敷之致로 迄未舉製作之役와 該械를 排置而不爲運動기로 全軆生錆야 將至廢棄니 僅少 事業費添筭額을 靳許이다가 製作도 不舉고 器械도 廢止하면 兩失의 害가 添筭의 費보다 不啻倍蓰더러 設廠 本義가 有欠矣라 此不可及今變通이옵기 現此日本三十年式步兵銃三十挺을 製作기로 將爲試甞이온 所需費額은 姑先以本部本廳將校服裝費中으로 二千圓을 撥劃야 軍器廠事業費로 流用이 妥當기 仰佈오니 查照承認야 趕速支撥라얏더라
●비용 청구 요청
군부에서 탁지부에 공문을 보내 이르길, 군기창에서 제작에 필요한 기계들을 이미 오래전부터 갖춰두었으나, 해당 공장의 사업 예산이 부족하여 제작 작업은 아직 시작되지 못했으며, 기계들을 방치한 채 가동하지 않다 보니 전반적으로 녹슬고 폐기될 상황에 이르렀다.
소액의 사업비 추가 예산조차 허락받지 못해 제작도 못하고, 기계도 쓸모없이 폐기된다면 이는 예산 절감보다 훨씬 더 큰 손실이며, 군기창을 설립한 본래 취지에도 어긋난다.
이 상황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어, 현재 일본 30년식 보병총 30정(挺)을 시험 제작하려 하며, 그에 필요한 비용으로 우선 본부 본청의 장교 복장비 예산 중에서 2천원을 전용하여 군기창 사업비로 돌리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되니, 이에 공문을 보내니 검토 후 승인하고 신속히 지급하라고 하였다.1906년 3월 18일자 황성신문 기사[9]
당시 군기창의 1일 생산량은 30년식 소총 10정과 실탄 3천 발이었다. 군기창 완성까지 투입된 비용 은 총 20만원이었다. 그러나 이노우에는 군기창의 무기 제조가 실제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라고 했다. 러일전쟁의 결과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 상태로 전락한 한국에서 군대가 유지되기 어려웠고, 따라서 무기 생산 역시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이다. 당시 군기창의 한국인 기사로는 김정우(金鼎禹)가 있었다.대한제국기 일본인 기술자 이노우에 요시후미(井上宜文) 연구, 김명수
本廠에셔 私役을 特許오니 內外國 僉君子 本廠에 注文시면 多小不拘고 隨請酬應사오니 照亮來議시오 諸(器械, 銃, 彈)新造或修理 大韓京城西署 龍山軍器廠 告白
본 공장에서는 사적인 주문도 특별히 허용하오니, 국내외 모든 신사 여러분께서는 본 공장에 주문하시면 크고 작음에 상관없이, 요청에 따라 성실히 응하여 제작 및 수리하겠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협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각종 기계류, 총기, 탄환 등의 신조 및 수리 – 대한 경성 서署 용산 군기창 공고1906년 4월 24일 대한매일신보 광고기사[10]
대한제국이 군기창에서 생산을 하려는 시도 단계까지는 갔던 것으로 확인이 된다. 위의 황성신문 기사를 보면 알 수 있듯 생산을 하라는 지시가 이루어졌고, 그 다음 연구자료를 보면 알 수 있듯 용산 군기창을 완성해서 제조하려는 시도가 있긴 했다. 위 기사가 올라온 직후 군기창에서는 총포와 탄약을 민간에 판매하기 위해 한동안 신문에 광고를 게재하기도 했다.
광고를 통해 군기창이 실제로 가동되었다는 사실이 확인되기에 30년식 소총 역시 제작되었을 가능성은 높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으로 30년식 소총을 콕 집어 그 생산 여부를 기록한 문서가 확인되지 않고 있어 확답은 이른 상황이다. 오히려 용산 군기창 완성 이후 러일전쟁의 여파로 생산이 물거품됐다는 주장도 있다. 방위사업청에서 운영하는 공식 매거진인 청아람에서도 생산이 시도되었다까지만 서술이 되어 있다. 용산구에서 발행하는 용산소식에서도 생산이 불가능하게 되었다고 언급되어 있다. @@ 참조
이후 1910년 8월 3일자 황성신문에 따르면 의관 이만영이 아마 의병에 공급할 목적으로 30년식 소총 144정을 확보했다가 일본 헌병에 체포되기도 했다. 이 중 용산 군기창에서 생산이 됐고 그 생산분이 있다면 얼마나 섞여 있는지는 불명이나, 민간에도 30년식 소총 상당량이 공급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광고를 통해 군기창이 실제로 가동되었다는 사실이 확인되기에 30년식 소총 역시 제작되었을 가능성은 높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으로 30년식 소총을 콕 집어 그 생산 여부를 기록한 문서가 확인되지 않고 있어 확답은 이른 상황이다. 오히려 용산 군기창 완성 이후 러일전쟁의 여파로 생산이 물거품됐다는 주장도 있다. 방위사업청에서 운영하는 공식 매거진인 청아람에서도 생산이 시도되었다까지만 서술이 되어 있다. 용산구에서 발행하는 용산소식에서도 생산이 불가능하게 되었다고 언급되어 있다. @@ 참조
이후 1910년 8월 3일자 황성신문에 따르면 의관 이만영이 아마 의병에 공급할 목적으로 30년식 소총 144정을 확보했다가 일본 헌병에 체포되기도 했다. 이 중 용산 군기창에서 생산이 됐고 그 생산분이 있다면 얼마나 섞여 있는지는 불명이나, 민간에도 30년식 소총 상당량이 공급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38식 소총이라는 개량형이 빨리 나온 탓에 1910년 경에는 거의 현역에서 퇴출되었다. 이렇게 퇴역한 30년식 소총들은 총신의 국화 문양에 특별한 표식을 찍어서 중학교[11] 교련용으로 뿌려지거나, 제1차 세계 대전 발발에 따라 총기가 부족한 연합국 각국의 요청에 따라 머나먼 해외로 팔려간다. 주로 러시아 제국(35만여 정)이나 영국(2만여 정)에서 대량으로 구매했는데, 러시아 판매분의 경우 혁명이 일어나면서 기존 정부가 소멸하여 대금을 떼먹힌다. 이렇게 러시아로 흘러든 30년식 소총은 러시아로부터의 독립을 위해 봉기한 핀란드나 에스토니아 등의 군대의 손에 접수되어 적백내전에 사용된다.[12][13][14] 영국으로 팔려간 소총도 상당수가 아라비아의 베두인 반군 지원용으로 사용되었고, 품질에 대한 불만이 상당했음을 T. E. 로렌스의 자서전 "지혜의 일곱 기둥"을 보면 알 수 있다.
6.25 전쟁에서는 공산군 진영이 사용하였으며 한국군 자료에서 노획된 물량이 확인된다.#
6.25 전쟁에서는 공산군 진영이 사용하였으며 한국군 자료에서 노획된 물량이 확인된다.#
[ 펼치기 · 접기 ] |
[ 펼치기 · 접기 ] |
[ 펼치기 · 접기 ]
| ||||||||||||||||||||||||||||||||||||||||||||||||||||||
[ 펼치기 · 접기 ] |
[ 펼치기 · 접기 ]
| |||||||||||||||||||||||||||||||||||||||||||
[ 펼치기 · 접기 ]
| |||||||||||||||||||||||||||||||
[ 펼치기 · 접기 ] |
[ 펼치기 · 접기 ]
| ||||||||||||||||||
[ 펼치기 · 접기 ] |
[ 펼치기 · 접기 ] |
[ 펼치기 · 접기 ]
| |||||||||||||||||||||||||||||||||||||||||||
[1] 후방 예비 부대는 여전히 구식 소총을 사용하였다.[2] 자동소총이 아니라 내부 탄창을 갖춘 볼트액션 소총을 가리킨다. 자동소총이 보편화한 현대의 사람에게는 낯선 개념일 수도 있지만 당시의 소총은 단발식이 주류이기 때문에 이 정도만 되어도 획기적인 발전이었다.[3] 기본적인 구조는 같으니 상호 호환은 가능하다. 하지만 그냥 사용하면 탄도가 달라져서 정확도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명중률을 위해서는 가늠쇠와 가늠자의 조정이 필요하다.[4] 1차 대전과 달리 러일전쟁은 전사자의 절반 이상이 총상에 의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건 총의 문제보다는 러시아 제국군의(소련군이라고 큰 차이는 없겠지만) 열악한 국내 사정으로 인해 생긴 전쟁 준비 부족과 그에 따른 사격훈련 부족으로 인한 문제일 가능성도 있다.[5] 또 다른 이유는 노리쇠 구조가 복잡해서 교체한 것도 있다. 정확하게는 30년식의 노리쇠는 8개 정도의 부품인데 이게 작은 부품들이 있어서 분해조립이 불편하고 생산시에도 정교한 가공이 추가로 필요했다. 그래서 노리쇠의 부품수를 줄여서(5개 정도, 연구자에 따라서 30년식 소총의 노리쇠 부품을 9개로, 38식 소총의 노리쇠 부품을 6개로 보는 경우도 있다.) 분해조립도 쉽고 생산 및 유지보수가 더 쉬운 38식으로 교체한 것.[6] 당시의 보병용 소총은 말 위에서 휴대하기에는 너무 긴 탓이다.[7] 기병은 어차피 휴대하고 있는 장검으로 기마 돌격하기 때문에 총검을 부착할 필요가 없다.[8] 그 이유는 기병 말고 짧은 총이 필요한 다른 병과(헌병, 치중병(보급 및 수송), 포병등)에게도 이걸 지급했는데 그들이 사용할 때는 착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기병만을 위해서 착검장치가 없는 부품을 만드는 것보다는 착검장치가 있는 부품을 다른 병과와 같이 쓰는 게 비용이 적게 든다.[9] ChatGPT 번역.[10] ChatGPT 번역.[11] 현재의 3년제 중학교가 아닌 당시의 5년제 중학교이다. 일명 구제중학교(舊制中學校).[12] 기존에 38식으로 알려진 총기 중 적지 않은 수가 실제로는 30년식일 가능성이 크다. 워낙 비슷하게 생겨서 구분이 힘든 데다 탄약까지 호환된다.[13] 이렇게 러시아로 흘러간 아리사카 계열 총들은 소련 성립 후에 자국 탄약을 사용할 수 없는 총기들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모두 퇴역하였지만 독소전 때까지도 예비물자로 창고에 보관하고는 있었다. 독소전 발발 후, 예비물자로 보관되어 있는 외국제 무기들을 조사해 보니 3260정의 작동 가능한 아리사카 계열 소총이 있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14] 대단히 웃기게도, 일본이 러시아에 판매한 다수의 30년식 소총 중 일부가 적백내전에서 적군에게 노획되었고, 이 적군이 노획한 30년식 소총 중 일부는 나중에 연해주에서 운송 문제로 인해 홍범도 등이 이끄는 독립군에게 싼값에 넘어갔다. 그런데 청산리 전투 시점에서 일어난 간도 참변 과정에서 독립군이 다수의 무기를 일본군에게 또 노획당하면서 10년의 대장정 끝에 도로 일본군의 손에 넘어가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일본군 >> 러시아 정부군 >> 러시아 적군 >> 한국 독립군 >> 일본군[15] 구분 방법은 먼지덮개의 유무와 장전손잡이 끝의 형상 차이이다. 30년식은 동그란 구형이고 35년식 해군총이나 38식은 누에고치 같은 타원형이다.[16] 단 겐지로는 후에 니헤이 테츠조가 쓰던 군용 무라타 소총을 주력으로 쓰게 되고, 오가타는 후에 갓 나온 신형 총기인 38식 소총을 주력으로 쓰게 된다.
![]()
이 저작물은 CC BY-NC-SA 2.0 KR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단, 라이선스가 명시된 일부 문서 및 삽화 제외)
기여하신 문서의 저작권은 각 기여자에게 있으며, 각 기여자는 기여하신 부분의 저작권을 갖습니다.
나무위키는 백과사전이 아니며 검증되지 않았거나, 편향적이거나, 잘못된 서술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무위키는 위키위키입니다. 여러분이 직접 문서를 고칠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의 의견을 원할 경우 직접 토론을 발제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