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일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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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

파일:러일전쟁 러시아화.jpg
파일:러일전쟁 일본화.jpg

명칭

러시아어: Русско-японская война
일본어:日露戦争(にちろせんそう)

날짜

1904년 2월 8일 ~ 1905년 9월 5일

장소

대한제국, 청나라 만주 남부, 동해, 사할린 섬

결과

일본 제국의 승리, 포츠머스 조약 체결

교전국

파일:러시아 국기.png 러시아 제국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00px-Flag_of_the_Kingdom_of_Montenegro.svg.png 몬테네그로 공국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000px-Merchant_flag_of_Japan_%281870%29.svg.png 일본 제국

지휘관

파일:러시아 국기.png니콜라이 2세
파일:러시아 국기.png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크로파토킨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900px-Naval_Ensign_of_Russia.svg.png지노비 로제스트벤스키

파일:external/6aeef4bbade74cfde192da0b9e62de6725b818894b5f63980822b5794a84e1dd.png무츠히토
파일:external/6aeef4bbade74cfde192da0b9e62de6725b818894b5f63980822b5794a84e1dd.png도고 헤이하치로
파일:external/6aeef4bbade74cfde192da0b9e62de6725b818894b5f63980822b5794a84e1dd.png 노기 마레스케

병력

약 50만 명

약 30만명

피해 규모

전사, 부상치사: 34,000 ~ 52,623명
질병사: 9,300 ~ 18,830
부상자: 146,032
포로: 74,369
사중 손실: 50,688

전사: 47,152 ~ 47,400
부상치사: 11,424 ~ 11,500
질병치사: 21,800 ~ 27,200

러일전쟁 주요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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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일본과 러시아에 압사당하는 한국.jpg

전쟁 당시 3국의 상황이 그려진 만평[1][3]


1. 개요2. 배경3. 주요 전투4. 경과5. 러일전쟁의 이면
5.1. 일본의 속사정5.2. 한국과 아시아에 미친 영향
6. 전후7.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파일:러일전쟁풍자화.jpg

파일:한국은 내가 먹을꺼야.jpg

" 나는 우리가 한국을 차지하는 걸 원하지는 않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본이 차지하도록 놔둘 생각도 없소. 그건 전쟁의 원인이 될 것이오."


― 1901년 니콜라이 2세프로이센의 알베르트 빌헬름 하인리히[4]에게 한 말(Christopher Clark, The Sleepwalkers: How Europe Went to War in 1914, p. 176)

러시아 제국,일본 제국,대한제국의 운명을 결정했으며, 그레이트 게임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한 전쟁.

1904년 2월 8일에서 1905년 9월 5일까지, 러시아 제국일본 제국대한제국에서 벌인 전쟁. 일본에서는 日露戦争(にちろせんそう)(일노전쟁; 니치로 센소)라고 부른다.

서구 열강 누구나 당연히 러시아가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러시아는 모두의 기대를 제대로 배신하고 말았다. 심지어 당시 영국에서는 사교클럽을 중심으로 전쟁의 양상에 내기를 건 사람들도 많았는데, 누가 이기느냐에 돈을 건 게 아니고 일본이 언제 패배하고 러시아가 언제 승리하느냐에 돈을 걸었다. 결국, 최종 승자는 일본이었기에 아무도 내기에 이기지 못하고 무효가 됐다.

일본 입장에서는 1894년에 치른 청일전쟁에서 청나라를 상대로 승리한 이후 10년 만에 대국(大國)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전쟁이자, 10년 전 청나라와의 전쟁 이후 연속으로 승전을 거두게 된 전쟁이었다. 그리고 승전의 대가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았다.

러일전쟁에서의 일본의 승리는 백인종 대국에 대한 유색인종 소국의 승리라는 세계사적 의미도 컸다. 1차 에티오피아 전쟁에서 에티오피아 제국이탈리아 왕국에 승리한 전례는 있지만, 이것은 영국과 프랑스의 전반적인 군사적 지원에 의한 것이었다. 따라서 러일전쟁에서의 일본의 승리는 유색인종 국가 자신의 군대에 의한 백인종 국가에 대한 근대에서의 첫 승리라고 할 수 있다.[5] 일본은 이걸 굉장히 자랑스러워하며, 나아가 대동아 공영권으로 이어진다. '우리 일본이 아시아의 대표로 양이들에게 한 방 먹였으니, 니들은 우리를 도와서 함께 싸워야 한다'는 얘기.

2. 배경[편집]


청일전쟁에서의 패배로 청나라는 일본에게 2억 냥이라는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지불하고(당시 일본 정부의 4년치 예산) 영토까지 할양했어야 했는데 그 중에 랴오둥 반도의 할양을 러시아가 반대하였다.[6] 러시아가 애타게 원하던 부동항으로 반도 끝자락의 천혜의 군항인 뤼순을 일본이 차지하게 되자, 러시아는 일본의 영향력이 너무 커질 것을 우려했다. 이에 일본의 세력 확대를 탐탁지 않게 여기던 독일 제국프랑스를 끌어들여서 삼국간섭으로 일본을 굴복시키고 이후 두 국가는 반목하게 된다.

이로 인해 러시아와 일본 두 나라는 한반도만주를 놓고 대립을 벌였다. 일본은 한반도에서 갖고 있는 일본의 우월한 이익을 러시아가 인정하면 일본은 러시아의 만주에서의 이익을 인정한다고 제안했지만, 러시아는 당연히 반대했다. 애시당초 러시아에게 일본은 한 주먹거리도 안 되는 약소국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일본 내부에도 만주와 한반도를 분리할 수 없는 것으로 인식해서 만한교환론을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만주 진출의 교두보로 삼기 위해 한반도를 차지하려는 속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1937년의 중일전쟁으로 나타난다.

특히 1896년 2월 고종아관파천으로 한반도에서 우월한 위치를 점유한 러시아는 일본을 꾸준히 압박하였다. 이 과정에서 1896년 5월의 베베르-고무라 각서,[7] 1896년 6월의 러청 비밀협정[8], 그리고 3일 뒤인 로바노프-야마가타 의정서[9]을 연이어서 체결하면서 궁지에 몰린 일본은 심지어 아관파천마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국면에 몰렸다. 심지어 이때 일본은 39도선을 중립지대로 하자는 제안까지 한다. 여기서 고종은 줄타기하면서 적당히 러시아 세력을 빌려 일본 세력을 몰아낸 후 대한제국을 선포했다.

문제는 1897년 11월 러시아와 밀약을 맺은 독일이 중국의 칭다오 주변을 점령하고 나선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러시아는 청나라와의 비밀협정을 파기하고 만주 중에서도 요충지인 뤼순다롄을 점령하게 된다. 그리고 청나라로부터 강제로 양도받아 해군기지를 건설한다. 이에 한반도 방면에 자원을 투입할 여유가 사라진 러시아가 양보하여 성립한 것이 1898년 4월에 일본에서 맺어진 로젠-니시 협정이다. 이 협정에서 양국은 대한제국의 자주성을 인정하여 내정 간섭을 자제하면서도, 일본인들이 대한제국 내에서 이룩한 상업 관계 발전을 저해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대한제국 내 일본 경제권의 우위를 인정하고 대신 만주 지역의 러시아의 지배권을 인정받으려는 것이었다.[10]

1900년 의화단 운동으로 '자국의 국민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러시아 군대가 만주를 점령하고 송화강을 경계로 북만주를 빼앗으려 하고 더 나아가 만주 전체를 노리자, 서양 열강들은 러시아에 대한 경계심을 가지게 되었고, 특히 만주에서 중국과 무역거래를 원했던 미국은 러시아의 만주 진출에 매우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11] 게다가 러시아가 태평양 지역에 가진 부동항이 없기 때문에[12] 부동항을 가지기 위해 대한제국과 청나라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

러시아는 15만 대군을 만주로 보내 점령하고 시베리아 철도 건설을 진행시켰으며, 일본 및 다른 열강들은 철수를 요구하면서, 러시아는 일시 만주 철군을 발표했으나 조선에서 사태 진전이 러시아에게 유리해지자 다시 철회하는 등 긴장이 고조되면서 상황은 점차 파국으로 치달았다. 그러나 이렇게 대립이 심화되면서도 정작 러시아는 충분한 전쟁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일례로 뤼순 요새도 선전만 난공불락이었지 실제로는 청일전쟁 당시 구축한 중국제 요새를 수복하고 약간 강화한 수준에 불과하였으며, 게다가 상당 부분이 미완성이라 무늬만 요새에 가까웠다. 여기에 더해서 유사시 유럽에 주둔한 병력과 물자, 장비를 보낼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대부분이 단선인데다가 아직 미완성이라 여러 곳에서 끊어진 상태였으며 수송능력도 매우 낮았다. 결정적으로 바이칼 호 근방 노선의 경우 호수 자체의 거대한 크기와 근방 지역의 절벽을 포함한 험준한 지형 덕분에 수십 km의 공백이 발생한 상태라 유사시 사용하기에는 문제가 많은 철도였다. 덕분에 나중에 가면 겨울의 추위 때문에 얼어붙은 호수 위에 철도를 임시로 부설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13] 물자 문제도 심각해서 석탄, 식량, 탄환, 무기, 옷 등 전쟁에 필요한 모든 것이 부족했다. 제정 러시아는 군대를 팽창시키긴 했으나 러일전쟁의 주요 무대인 극동 지역은 모든 게 부족한 상태였다. 항구의 경우 전함을 수리하기조차 어려웠다.

그래서 일단 전쟁 직전 러시아 차르 니콜라이 2세가 극동 총독 알렉세예프에게 내린 훈령을 보면 '일본이 백두산 천지까지 점령하더라도 허용할 것.'으로 되어 있다. 원래 러일전쟁 발발 당시 러시아는 부동항을 차지하기 위한 의지는 굉장히 강했으며, 심지어 1903년에 러시아가 한국을 분할 통치하자고 일본에 제안한 적도 있었고 1902년 9월 12일 주일 러시아 공사였던 로젠 남작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올린 보고서에서 한국 합병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러한 로젠 남작의 견해에 따라서 러시아 제국군은 만주에서의 철군을 철회, 1903년 압록강 국경지대의 용암포를 무단으로 점령하고 해군 기지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비록 미국과 영국, 일본 3국이 압박하여 물러나게 되나 이 용암포 사건은 일본에게 러시아에 대한 위기감을 고조시켜 러일전쟁의 한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러시아 입장에선 당장 시베리아 철도가 완공되지 않아 한반도까지 병력을 진출시킬 여력이 없었다.

일본은 이미 전쟁을 할 마음을 굳히고 있었고 내부에서는 전시 동원체제의 확립과 아시아주의 라는 이념무장, 만주 지역에 대한 대러시아 첩보망을 갖춰놓은 상태였다. 모든 게 러시아에게 불리했다.

물론 러시아도 바보는 아니었고 이에 대한 문제점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베리아 횡단 철도만 완성되면 유럽 러시아의 주력군과 물자를 러시아 철도를 통해 만주까지 보내면 그 정도 문제야 얼마든지 뒤집을 수 있다고 판단했고 그것은 옳은 판단이었다. 문제는 시베리아 철도가 완공되기 전에 먼저 일본이 공격할 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철도가 완전히 개통되지 못해서 제 역할을 못했다는 거지만.

3. 주요 전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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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뤼순 공방전[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뤼순 공방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2. 203고지 전투[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203고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3. 봉천 전투[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봉천 전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4. 쓰시마 해전[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쓰시마 해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경과[편집]

일본은 러시아의 전력을 세밀히 관찰해서, 유럽에서 극동까지 동원되는 러시아군이 약 10만에 불과하다고 평가했다.

당시 시베리아 철도는 미완성에다 단선이라 1개 대대를 뤼순으로 보내는 데도 40여 일이나 걸렸다. 러시아 극동군의 전력은 고작 10만 정도였는데 반해 일본군은 약 25만을 전선에 투입할 수 있었다.

비록 전체적인 전력은 러시아가 일본보다 훨씬 강하지만 7천 킬로미터가 넘는 극동까지 군대를 보내 전쟁을 벌일 수 없기 때문에, 러시아군이 본격적으로 작전에 나서기 전에 극동의 교두보를 강습해 제압한 다음 협상을 제안하면 승산이 있다고 본 일본은 선전포고 없는 기습공격[14]을 함으로써 러일전쟁이 발발한다.

이후 일본은 선전포고를 하기 이틀 전에 뤼순을 기습적으로 공격했고, 이에 러시아도 선전포고를 개시하여 전쟁에 돌입했다. 하지만 러시아는 제정 말기인지라 무기도 노후한데다 워낙에 거리가 멀어 지원이 어려웠고 병력도 분산되어 있는 어려운 처지였다. 한 예로 연발총용 탄환이 2,800만 발이 부족했다. 결코 28만, 280만이 아니다! 거기다 유럽의 러시아에서 보낸 방한복, 털모자는 전쟁이 끝난 뒤에야 전장에 도착했다.

반면 일본은 무엇보다 전장에서 매우 가까운 거리에 위치했으며, 한반도에 군대를 상륙시켜 대한제국에게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면서 후방의 안전을 확보했다. 영국도 역시 러시아의 남하정책 저지를 위해 일본에 막대한 차관을 저리로 지원하는 정책을 폈다.

러시아군 사령관 크로파토킨은 러일전쟁이 발발하고 40일이 지난 뒤에야 현지에 나타난다. 그 자신의 판단으로도 러시아 극동군의 전력은 대규모 회전을 치르기에 미비한 상태였으므로 객관적인 전력상의 우세를 점한 일본군과 정면 대결을 벌일 상황이 아니었다. 게다가 서부 러시아에서 지원이 오려면 무려 40일이 넘게 걸렸기 때문에 일본군을 내륙 깊숙이 유인해서 섬멸하자는 전략을 택한다. 하지만 일본 역시 인적, 물적 자원의 소모가 극심한 근대식 대규모 회전을 치러본 경험이 없어 몇 차례의 전투 후 본인들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그간 벌인 전쟁들과는 차원이 다른 피해 규모에다가 객관적인 국력의 현저한 열세로 인해 어떻게든 한 방 제대로 먹여 러시아군을 괴멸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크로파토킨이 의도한 장기전에 따라 러시아군은 매 전투마다 조금 불리해진다 싶으면 주저없이 철수해버렸고 봉천 전투 등에서 일본군은 러시아군을 압도적으로 괴멸시키지 못하고 그저 부분적으로 타격을 가해 후퇴시키기만 하게 되었다. 이러는 동안 슬슬 경제적 압박이 심해지고 있었고 여기에 일본군의 무능한 지휘력이 문제가 되었다.[15] 앞선 청일전쟁이야 상대가 상대였으니만큼 그럭저럭 먹혔고, 이후의 중화민국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러시아 제국은 좀 달랐고, 훗날 미국은... 덕분에 전쟁은 러시아에게 불리하게 돌아갔어도 함대를 보내면 상황이 개선되리라는 희망은 있었다.

가장 유능했던 스테판 오시포비치 마카로프 제독이 부임하여 몇 차례의 해전에서 병사들의 마음을 후려잡고 무능한 지휘관들을 쳐내고 유능한 지휘관으로 교체하는 등 강직하고 훌륭한 지휘관의 실력을 보여주었으나, 미처 러시아 해군이 집결하기 전에 기뢰가 터져 기함과 함께 전사하는 바람에 해상을 일본이 장악하게 됐다. 일본 역시 기뢰로 구축함 하츠세, 야시마에 순양함 요시노, 수뢰정 아카츠키, 포함 오시마를 잃었으나 마카로프 제독의 끔살을 본 러시아 해군 장교들의 행동은 소극적이기만 했다. 그 동안 일본은 한반도 전역을 점령했고 만주로 진군해 러시아군을 압박했다.

지독한 뤼순 공방전 이후 1905년 뤼순까지 점령하였고 봉천전투 패전으로 패색이 짙어지던 러시아는 국내외로의 상황이 점점 악화되어 갔고 결국 최후의 보루인 발틱함대 카드를 꺼내들게 된다.

결국 쓰시마 해전에서 일본과 러시아는 최후의 결전을 벌였다. 지노비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이 이끌고 온 발틱 함대는 이 해전에서 우월한 성능의 전함과 숙련도 높은 승조원들, 그리고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과 아키야마 사네유키[16]라는 명장을 보유한 일본 연합함대에게 전멸되었고, 결국 러시아는 미국의 중재로 일본과 포츠머스 협정을 맺고 전쟁을 끝내게 된다.

5. 러일전쟁의 이면[편집]

5.1. 일본의 속사정[편집]

포츠머스 조약에서 일본 측 대표였던 고무라 주타로 전권대사는 자신들이 승리했으므로 러시아로부터 전쟁배상금을 받아야겠다고 주장했다. 반면 러시아 측 대표였던 비테는 지금 국내사정 때문에 전쟁을 중단하려는 것뿐이지, 자신들이 패배한 것이 아니라며 한 푼도 낼 수 없다고 맞섰다.

이를 보면 우습게 보던 상대에게 참패하고 체면이 바닥까지 떨어진 러시아가 억지로 자존심을 세우려는 초라한 모습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비테의 말이 진실에 가까웠다.

  • 우선 뤼순 요새의 함락으로 러시아군은 큰 타격을 입었지만, 사실 일본군의 타격도 그에 못지 않았다. 뤼순을 공략하면서 일본군은 병력을 무려 3만 명이나 잃었기 때문이다. 개전 당시 일본이 확보한 군대는 20만에 불과했는데 그 중 1할 5푼에 가까운 전력을 상실한 것이다. 그러나 전투는 점점 확대되었고, 봉천전투에서 약 7만 명의 사상자를 낸 일본군은 상당수를 제대로 훈련도 받지 못한 신병으로 채워야 했다. 러시아 제정군도 많은 손실을 입기는 했지만, 상비군 100만을 유지하고 예비군 동원에도 여유가 있었다. 다만 유럽 전선에 항상 주전력을 배치해야 하는 러시아 제국은 그 여유를 살릴 수가 없었다.

  • 만주에서의 전쟁은 겉으로 보면 일본군이 일방적으로 승승장구한 것으로 보이지만,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기보다 단지 격전 끝에 러시아군이 물러나는 양상에 가까웠으며 일본군 역시 지속적으로 상당한 손실을 입고 있었다. 당시 러시아군은 아직 완전히 완성되지 않은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최대한 활용해서 유럽에 주둔 중인 주력 병력을 수송하고 만주 일대에 기본적으로 존재하던 병력은 이를 위한 시간을 번다는 전략을 세우고 있었다. 애초에 땅이 워낙 넓다 보니 철도 타고 여유롭게 뒤로 빠지면 이를 추격할 여건이 전혀 안 되는 일본군은 무작정 추격하다간 자멸하거나 반격당해서 괴멸되는 관계로 뒤를 도모해야 하는, 전혀 우선권이 없는 행동밖에 할 수 없었다. 애초에 러시아군의 기본 작전술이 빠르게 후퇴한 뒤에 따라오면서 힘이 빠진 적을 친다는 전략이니 대륙전을 해본 적이 없는 일본군이 그걸 따라갈 수가 없었다.[17]

    그 후 러시아군이 집결하자 일본군이 이를 공격한 봉천 전투에서 결국 일본군이 러시아군을 물리치고 승리하기는 했다. 그러나 전면 수세 방어로 참호를 파고 버티는 러시아군에 대한 포위 계획은 결국 러시아군의 신속한 퇴각으로 실패로 돌아간다. 31만 러시아군과 25만 일본군이 맞붙었던 봉천전투는 러시아군 9만에(개중 2만 명은 미처 퇴각하지 못한 포로) 일본군 7만 5천이라는 사상자 숫자에서 나타나듯이 일본의 일방적인 승리가 아니었으며, 일본군으로서도 역시 더 이상 러시아와의 전쟁을 계속할 여력이 없었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뤼순을 점령하고 봉천을 격퇴시키며 발트 함대를 전멸시킴으로써 승리를 주장했지만 인명 피해는 일본 측도 상당했던 것이다.

    러시아군은 비록 스스로 봉천 전투에서 물러난 것을 전투의 패배로 인식하긴 했으나, 기본적인 국력차를 고려할 때 전쟁에서 졌다고는 생각하지 않았고, 지속적인 병력 수송으로 최대 40만까지 북만주로 이동시켜 추후 공세를 노리나, 이전에 겪었던 몇 차례의 육전 패배와 사령부의 무기력함 때문에 강력한 공세로 나서지는 못했다. 반면에 일본군은 신속한 철도개설과 여러 갈래의 보급선 확보 등 보급에 최선을 다했지만, 기본적인 국력 부족으로 인해 보급이 한계에 달했으며, 그 결과 식량 공급도 부족했고 방한복조차 제대로 지급되지 않아서 일본군은 만주의 추위에 떨며 주먹밥으로 연명하느라 각기병에 시달리고 있었다.[18]

  • 일본의 재정도 이미 파탄 상태였다. 일본은 전쟁 수행을 위해 거액의 국채를 발행했지만 그 액수가 너무 늘어나자 영일동맹을 맺은 영국이나 우호국이었던 미국도 더 이상의 매입을 거부하게 되어 사실상 막다른 골목에 몰려 있었다. 당시 일본의 1년 세입이 2억 엔에 못 미쳤는데 러일전쟁 총전비는 이미 19억 8,400만 엔에 육박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군의 사정을 보면 알 수 있지만 러일 전쟁이 있었던 1905년 총군사비 / GDP가 23.69%......여기서 12억 엔을 영국과 미국이 지원하긴 했지만 만약 1~2개월 만에 전쟁이 지속되거나 러시아가 일본과의 협상을 거부하고 강경론으로 나간다면 일본은 국가 파산에 처할 위기였다. 물론 러시아도 만만찮은 전비를 지출하여 파산 위기에 있었으므로 피차 마찬가지였지만.

    이 때문에 휴전 협상에서 일본은 반드시 배상을 받아야 한다는 입장이었지만 러시아 전권대사 비테는 배상금 지불을 강력히 거부했다. 일본 전권대사 고무라는 어떤 식으로든 배상금을 받아내려 했으나 러시아 측의 '협상하기 싫으냐'는 압박에 결국 본국에 상의하게 되었고, 일본 정부는 모든 상황을 재점검한 후 도저히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므로 배상금을 받지 못하더라도 협정을 진행하라는 훈령을 내렸다. 이에 협정은 무사히 진행되었다. 결국 일본은 최우선 목표인 조선만을 건사할 수 있었고 다음 목적으로 요구했던 사할린 전체 할양도 남사할린 할양으로, 하얼빈-여순의 동청절도 이득권도 장춘-여순선의 권리 획득으로 그쳤다.

  • 당시 러시아가 전쟁 수행 의지를 잃어버리고 휴전협정에 나선 것은, 연전연패로 인한 사기 하락으로 인해 전쟁 수행 능력이 고갈되었고 여기에 일본의 상황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것도 큰 이유로 작용했으며 전략의 미흡함으로 인해 보급이나 병력의 보충에도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전쟁 중에 터진 피의 일요일 사건도 들 수 있다. 그런데 이 피의 일요일 사건 자체도 러일전쟁 초기 전투의 패배가 상당한 이유가 되었다. 만약 초기 전투에서 승리했으면 그 여파로 불만을 억누를 수 있었을 것이었다.[19] 얼핏 보면 일본에 내려진 천운으로 보이나, 단순한 행운이 아니었던 이유가 있었으니, 러시아에 있던 일본 외교관들은 비밀리에 러시아의 혁명가들에게 거액의 자금을 지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1903년에 러시아에서 벌어진 유대인 학살 사건, 상세히 설명하면 한 어린 소녀가 강간되어 임신당한 사건을 단지 소문으로 유대인이 저질렀다는 게 퍼지면서 유대교 회당을 비롯하여 유대인이라는 게 드러나면 사람들이 그냥 죽였다. 그런데 그 사건이 소녀의 친척이 저지른 걸로 드러났음에도 학살은 멈추지 않았고 이 와중에 수천에서 수만으로 추정되는 유대인 및 폴란드 소수민족들이 학살 및 약탈, 강간을 당했고 결국 미국으로 대거 이민을 갔고, 이를 갈던 미국 및 유럽의 유대인 부호랑 폴란드인들이 일본을 지지하여 국채를 사들인 점도 있었다.


어쨌든 러시아나 일본이나 전쟁 수행이 불가능했으므로 휴전협정에 비교적 만족할 만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상황은 일본 정부와 군부에서만 파악하고 있었을 뿐, 국민들에게는 일본군의 승리만이 선전되었으므로 막대한 배상금은 물론이고 당시 일본의 일각에서는 배상금뿐만 아니라 연해주캄차카 반도도 할양받자는 일본인들은 포츠머스 협정 내용에 빡쳐서 격렬한 분노를 표시했으며, 히비야 방화 사건 같은 반정부 폭동까지 일어났다. 당시 일본 측 대표는 일본 정부에서는 찬사를 받았지만 국민들에게는 공공의 적으로 몰려서 경호를 붙여야 하는 지경이었다. 또한 휴전협정을 주선한 미국에 대한 비난도 이어져 강렬한 반미 여론이 일어났으며, 이에 대해서 미국 언론에서도 일본 측의 황당무계한 행동을 비난하고 나섬으로써 양국 국민 간의 감정이 상당히 악화되었다.

이건 말 그대로 전쟁에 이겼다고 해도 남는 게 거의 없는 상황. 또한 사실상 전혀 이길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되어 한 번 모험 삼아 걸어본 전쟁에서 결과적으로 대승리를 거두게 됨으로써 "일본은 하늘이 지켜주는 나라다.", "아무리 상황이 안 좋아 보여도 정신력으로 무장하고 뛰어들면 어떻게든 된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본격적으로 자리잡게 되었고, 이후 군국주의가 본격적으로 발호하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

군국주의의 발호 외에도, 군사적인 면에서 러일전쟁은 결과적으로 일본군에 상당히 나쁜 영향을 끼쳤다. 우선 일본 육군은 위의 정신력 우월주의와 함께 봉천 전투, 203고지 전투 등을 겪으면서 반자이 어택 같은 보병의 총검 돌격을 통한 공세로만 일관된 전술에 집착하게 되었다. 또한 일본 해군은 쓰시마 해전의 승리를 통해서 함대결전사상점감요격작전에 뼛속까지 중독되어 버렸다. 이렇게 일본군에게 박힌 악영향이 이후 중일전쟁태평양 전쟁 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을 지경. 러일전쟁하고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사이에는 30년의 갭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당장 유럽, 미국의 사례를 보더라도 이들이 1차대전의 전훈을 달달 암기만 해서 2차대전 때 이를 경직적으로 복붙한 국가는 일본 이외 어디에도 없다. 다른 나라 군대에서 특정 전쟁을 이리 신화화하고 그 전쟁 전훈을 그 권위적으로 주입한 사례를 찾기는 어렵다. 일본 특유의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경직적 사회나 군대 분위기와, 본질적으로 강대국과 총력전을 벌일 역량이 없는 일본의 국력과 맞물려 영일동맹의 전성기 전수받은 군사기술, 독일이나 프랑스 등의 선진 군사학 유학도 무위로 끝나고 이후에는 오히려 정신력 제일주의로 퇴보하는 모습을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장고봉 사건/노몬한 사건이 발생하자 일본 육군의 대 소련전 준비는 현실을 도피한 것이라는 점이 명백해졌다. 이후 일본 육군의 보병조전은 대동아전쟁 종전까지 개정되지 않았다. - 일본 위키백과 보병조전 문서

그러나 지대장은 이 자리에 오기 전 육군보병학교의 재료창장으로서 '보병조전'을 편찬하고 오로지 보병을 중시하는 전법을 창도한 터라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에서 저 육탄 전법을 밀고 나간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했다...(중략)...나는 오카다의 이 말이 '과달카날전 해명'의 중요한 열쇠가 되리라고 생각했다. 일본군의 전통적인 전법의 잘못을 알아버린 이치키는 누구에게도 그 사실을 말하지 못한 채 자살한 것이 아닐까? - 쇼와 육군, 제2차 세계대전을 주도한 일본 제국주의의 몸통 #

일본 해군 참모본부의 작전 계획을 60여년이 지난 지금에서 되돌아 볼 때 우리는 두 가지 명백한 결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들 계획의 복잡성과 그들의 가상적(미해군)의 배치에 대한 낙관적인 가정이 그것이다. 비록 전간기 다른 국가의 해군들도 정교한 전술 계획을 준비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일본 해군의 그것은 복잡성 측면에서 타 국가들의 계획을 능가했다. 일본의 계획 입안자들은 그들의 함대가 일련의 복잡한 작전을 완수하기 위한 정확한 시간계획과 함대 운동 조정의 희망사항들에 탐닉했음에 틀림없다.
게다가 참모 본부의 전술가들은 일본 함대가 자신들의 전술을 전개하는 동안 미 함대는 수동적으로 그들이 예상한대로 움직인다는 너무나 순진한 가정에 의존하고 있었다. 사실상 미 해군의 전열은 일본이 파 놓은 함정에 쉽게 빠져들지 않았을 것이고 미국인들의 조심성은 일본 함대가 사전에 정확한 위치에 배치되는 것을 극도로 어렵게 만들었을 것이다.예를 들어 1930년대 미 해군의 작전 계획은 피켓함들을 함대 중심에서 75~100마일 까지 떨어진 동심원상에 배치하도록 상정하고 있었다.
오직 소수의 일본 장교들 만이 그들의 전략 및 전술 입안과정의 자기기만적 형식주의를 비난했다. 전후 호리 테이키치 제독은 미국을 상대로하는 도상 연습과 계획은 언제나 미 함대가 미리 결정된 가정에 따라 움직이도록 되어 있었다고 회상했다. 일부 일본의 작전입안자들은 현실적인 어려움들을 제쳐둔 체 대규모 해상 결전의 성공에 대한 확률에 대하여 거의 신비주의적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들은 영광스러웠던 과거처럼 다시 한 번 천운(天運)이 승리를 위한 최적의 조건을 제공하여줄 것이라고 가정했는지도 모른다. - Kaigun: Strategy, Tactics, and Technology in the Imperial Japanese Navy, 273~280 p, 288 p 번역: 일 해군의 야전 계획

'백발백중의 포 1문은, 백발일중의 포 100문을 이긴다'란, 러일전쟁 종결 후 도고 헤이하치로 연합함대 사령장관이 연합함대 해산사에서 한 말이라고 합니다. 해산사라고 말했습니다만, 다이쇼 전반기까지 연합함대는 전시 등에 임시로 편성되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러일전쟁이라는 전시가 종료된 것에 의해 해산되게 된 것입니다....(중략)...토고 사령장관의 말은 일본 해군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자군의 전함의 명중정밀도를 올려 백발백중으로 만들면, 수적으로는 우세하지만 명중정밀도는 뒤처지는 적 함대에 이길 수 있다는 의미가 붙게 되었습니다. 즉 전함 척수의 열세는, 훈련으로 보충하면 된다는 결론이 된 것입니다. 여기서 '월월화수목금금'이라는 휴일도 없이 맹훈련을 하는 일본해군의 전통이 시작되었습니다....(중략)...이런 요인에서 합리적인 판단으로 모험이라고 여겨졌던 '토고 턴'을 실행에 옮겼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연합함대 해산사에서 나온 말은, 정신론 등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실전경험과 냉철한 현상 파악에서 도출된 것이 되지는 않을까요...(중략)...토고 사령장관이 남긴 말의 배후에는, 이렇듯 제대로 된 동맹관계에 의해 지탱되는 기술적 우위도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부분을 감안하면 토고 사령장관의 말에는 당초 정신적 요소는 없고, 극도로 합리적인 배경에 기반한 것이라고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도와 배경에서 나온 말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은, 그 말이 나온 배경이 간단히 잊혀지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현재 우리들의 귀에 들어오는 경구로 남아있는 말도, 어쩌면 말한 본인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해석되고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또한, 이것은 러일전쟁에서 기술적 우위나 동맹관계의 뒷받침에 의해 합리적으로 승리를 거둔 일본 해군이, 그 40년 후 이것들 대신 정신론을 전면에 내세워서 대전쟁을 수행하다가 패배한 것과 이어지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해군은, '적 함대의 주력을 격파하면, 그 재건에 시간이 걸려 전쟁 지속이 곤란해진다. 그러니 적의 주력을 공격한다.' 라는 생각을 러일전쟁의 승리로 굳히게 되었습니다. 그 후 가상적이 미국으로 바뀐 이후에도, 이 생각은 유지됩니다. 이리하여 해군은 자신들의 생각하는 주적을 격멸하는 것에 전력을 기울였다는 것이 됩니다. 또한, 진주만 공격까지 그 주적은 전함이었습니다만, 미드웨이 이후 그 주적은 항모가 됩니다. 전쟁의 양상이 변화했음에도 불구하고, 종래의 발상이 거의 고정관념화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로 보아, 해군이 항공운용의 원리원칙을 지킨 것은 어떤 의미로는 종래의 관념에 사로잡혀 있던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20]

5.2. 한국과 아시아에 미친 영향[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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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는 물론 을사조약을 맺게 된 직접적인 계기라는 점에서 러일전쟁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없긴 하지만, 한국과 일본 외의 아시아 국가들 사이에서 러일전쟁은 상당히 큰 여파를 남겼다. 황인종이 백인에게 승리한 전쟁이라는 것 자체가 당시 아시아 국가들에게는 큰 충격이었던 것.

중국에서는 이미 청일전쟁으로 인해 일본에 대해 재평가하는 시각이 나타나기는 했지만, 러일전쟁은 뒤이어 그 영향을 증폭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 때 대표적으로 영향을 받은 인물이 바로 쑨원이다. 물론 당시만 해도 량치차오처럼 벌써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성에 대해 회의하고 돌아선 인물이 있기는 했지만.

베트남[22]에서도 일본에 대한 시각이 매우 좋아졌다. 일례로 1900년대부터 1920년대까지 베트남 독립 운동의 주축이 된 인물 중 한 명인 판쩌우찐은 러일전쟁을 위해 베트남 근해를 지나가는 발트 함대의 위용을 지켜보았고, 그 발트 함대가 일본군에게 무너졌다는 소식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전한다. 이후 베트남 민족 운동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자는 동유 운동이 일어나고 일본의 게이오 유숙을 본딴 통킹 의숙이 세워지는 등 한동안 일본의 영향을 크게 받게 된다.

일본의 승전은 이처럼 일본이 홍보하던 '대아시아주의'를 널리 퍼트리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다소 어이없는 일일지도 모르지만, 한국에서도 러일전쟁의 승전에 잠시나마 기뻐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상기한대로 일본 국민들조차 자세한 내막을 몰랐던 만큼 다른 아시아 국가들도 당연히 내막을 알 리 없는 상황이였고 이는 한국도 예외가 아닌지라, 어찌되었건 한국인들의 입장에서는 '그래도 좋든 싫든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동네 총각 vs 어느날 불현듯 들어온 백인 코쟁이'의 싸움 정도로만 알았기 때문. 물론 일본의 진짜 의도를 깨닫고는 바로 항일투쟁을 시작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한일 의정서, 제1차 한일협약 등의 조약은 기본적으로 러일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체결되었던 조약이었고, 경부선경의선의 건설도 매우 수탈적으로 이루어졌다. 명백히 주권을 침해하는 조약이었음에도 을사조약과 같은 반발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은 친일반민족행위자를 제외하고는 러시아로부터 한국을 지켜주겠다는 일본의 주장을 믿지 않았지만, 어쨌든 이미 중립을 유지할 국력이 존재하지 않았던 한국의 상황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독립협회 등의 활동처럼 한국 내에는 러시아를 경계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고종의 탄압으로 이미 독립협회는 소멸되고 모두 러시아 편을 들 뿐, 소수 친일파만이 일본을 믿고 지지하는 상태였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자 일본은 야멸차게 한국을 배신했다는 주장을 했다고 한다.

지난 번 이등(伊藤) 후작이 내한했을 때에 어리석은 우리 인민들은 서로 말하기를, "후작은 평소 동양 삼국의 정족(鼎足) 안녕을 주선하겠노라 자처하던 사람인지라. 오늘 내한함이 필경은 우리나라의 독립을 공고히 부식케 할 방책을 권고키 위한 것이리라." 하여 인천항에서 서울에 이르기까지 관민상하가 환영하여 마지 않았다. 그러나 천하 일 가운데 예측키 어려운 일도 많도다. 천만 꿈 밖에 5조약이 어찌하여 제출되었는가. 이 조약은 비단 우리 한국 뿐만 아니라 동양 삼국이 분열을 빚어낼 조짐인 즉, 그렇다면 이등후작의 본뜻이 어디에 있었던가?

당시 한국 내에 한중일이 연합해 러시아를 비롯한 서양 열강에 대응해야 한다는 이론이 널리 퍼진 상태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사고는 안중근의 동양평화론 등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볼 때, 한중일 연합은 국제 정세에 무지했던 탓에 벌어진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다. 쇄국 정책으로 문을 걸어잠근 수십 년 사이에 한국과 별 차이도 없던 일본은 국제 정세를 잘 타고 동아시아 최대의 패권국으로 성장했으니.

한때 친미파, 친러파였던 것으로 알려졌던 매국노 이완용은 이 때를 계기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전향하여 을사늑약의 주역이자 악역이 되어서 을사오적의 선봉장이 되었다. 이 전쟁이 터지기 전만 했어도 친러파였기 때문에 친일파도 배척했던 성향이었지만, 이 전쟁을 계기로 자신이 지지하고 있는 러시아가 일본에게 패망할 것을 예상하였고 여기에 미일간가쓰라-태프트 밀약까지 더해지자 결국은 일본 편에 들 수 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완전한 친일파로 변신하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결국 친일에 완전히 빠지게 되면서 을사늑약을 체결하고 5년 후에는 나라의 주권을 통째로 일본에게 넘겨버리는 주역으로서 평생의 친일 매국노가 되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국제정세를 파악하는 혜안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모습이기도 하다.

6. 전후[편집]

포츠머스 조약미국시어도어 루스벨트가 중재했다. 이 사건 덕분에 그는 노벨평화상을 수상했고, 러시아와 일본 모두 전쟁을 계속했다간 재정이 파탄나게 생겨서 반 강제적으로 전쟁을 끝내게 된다. 그러나 그 '평화' 덕분에 한반도는 끝내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23]

이후 패전한 러시아 제국의 무능을 비난하는 국민들의 목소리가 높아졌으나, 이를 무시하고 러시아 제국이 제1차 세계 대전까지 참전하자 견디지 못한 러시아인들의 분노로 제정이 붕괴되고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이 들어서게 된다. 또한 일본은 이때 서양의 열강인 러시아에게 승리하면서 다른 열강들로부터 그들과 동등하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고, 이후 한반도에 대한 식민 지배를 인정받았다.

문제는 일본인데, 이 전쟁에서 막대한 군비와 사상자를 냈음에도 불구하고 배상금도 없고 영토를 할양받은 남사할린도 당시로서는 큰 가치가 없는 곳이라 당연히 일본 국민들은 분노가 폭발했고 일본 전역에서 폭동이 발생하였다. 가까스로 계엄령을 선포하여 진압하였지만, 이후 일본 국민들의 불만이 급증해 1910년대 말부터 시작되는 민주주의 운동 '다이쇼 데모크라시' 의 근원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이 이 전쟁에서 얻어낸 가장 큰 성과는 열강으로의 인정이었고 이후 일본은 강대국으로부터 동아시아의 최강자이자 조정자라고 불릴 정도의 위신을 얻게 된다. 또한 중국과 러시아를 물리치고 대한제국을 속국으로 만든 다음 최종적으로 합병하였으며, 요동 등 남만주도 사실상 영향권 내에 편입시켰다.

그리고 대한제국의 독립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었던 세력 균형마저 깨졌다. 당장 한국의 입장에서는 둘이 계속 대립하다가 그 과정에서 완충지대로서 중립국으로 독립을 유지하는 것이 최선이었다.[24] 결국 러일전쟁 종전 후 을사조약을 맺으면서 한국은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하였고 얼마 안 가 일본에 강제병합되고 말았다.

이 전쟁은 또한 일본인들의 애국심을 고양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아래와 같은 삽화가 매 전투마다 수백 장, 수천 장 출판되어서 각 도시와 마을의 중심가에 걸려 모든 국민에게 일본군이 얼마나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덴노를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우는지를 상세히 보여주었다. 수많은 음악가들이 이때 애국심을 고취하는 군가를 연주, 녹음하였다. 군함행진곡, 눈의 진군, 히로세 중좌 등이 가장 대표적인 예이다.[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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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 인해 세계 정세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다. 일본의 패배를 생각하고 거문도를 점령해 해군기지화 하는 등 러시아군과 맞설 계획을 하고 있던 영국은 1세기 간 이어졌던 그레이트 게임을 종결했다. 이는 영러 협상으로 이어져 러불 동맹, 영불 협상과 함께 유럽 대륙에서 삼국협상이 탄생하고 이에 대응한 삼국 동맹이 상호 대립하는 구도를 형성하였다. 또한 10년 뒤 러시아 혁명의 도화선 중 하나가 되어 세계 공산화에 큰 족적을 남긴 소련 탄생의 배경도 됐다.

7. 관련 문서[편집]

[1] 일본제국러시아 제국망치와 모루가 되어 중간의 대한제국압사 당하는 모습이 해학적으로 그려져 있다. 일본이 한반도의 이권을 위해 주도적으로 벌인 전쟁이고, 방심하던 러시아에 승리하여 그 대가로 구한국을 침탈하여 속국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때리는 작은 망치 메이지 덴노와 멍한 표정을 지으며 맞는 커다란 모루 니콜라이 2세 그리고 크기상 제일 작으며 너덜 너덜해진 옷으로 중간에 끼여 고통 받는 고종 황제의 구도로 그려진 이 그림은 러일전쟁과 한국침탈의 능동 수동적 역할과 결과를 매우 적절하게 그려낸 정치풍자 그림엽서이다. 실제로 이 전쟁으로 러시아는 머리가 흔들릴 정도로 커다란 타격을 입었고[2] 한국은 곧바로 반신불수가 되었다가 5년 후 끝내 죽었다. 그리고 당대 세계 5대 열강이던 러시아 제국의 머리를 후려 친 동아시아 변방의 비문명국 취급을 받던 일본 제국은 신흥 제국주의 열강으로 세계무대에 우뚝서게된다. 러시아에서는 망치가 당신을 때립니다.[2] 사실 러일전쟁과 피의 일요일 사건과의 관계는 상호 호환적 관계이다.[3] 또한 이 그림은 다른 방면으로도 의미가 있는데 고종황제가 한국 역사상 최고집권자이자 정치인이자 공인이자 특정인으로서는 최초로 근대적 시사만평에 풍자된 사례중 하나라는 것이다. 중간에 끼어 있는 고종황제의 모자 형태가 익선관이 아닌 사모이긴 하나 중간에 엉뚱한 도승지이조판서를 그려 넣었을리는 없고 일본 제국러시아 제국사무라이불곰같은 상징이 아닌 각각의 군주의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구한국 역시도 동물이나 대표적인 일반사람의 모습이 아닌 관모를 쓰고 있는 사람으로 볼 때 고종황제로 보인다.강제 렙따;;; 맞는것도 서러운데ㅠㅠ 그래도 물건들에 비해서 사람인 고종이 제일 정상적이다 약소국인 한국에 대한 서양인의 무지이기도 할테고 정밀묘사화가 아닌 풍자만평이기 때문에 중요시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4] 빌헬름 2세의 동생으로 해군 원수. 1899년 방한하기도 했었다.[5] 단, 영국과 미국의 경제적 지원은 있었다.[6] 이에 명성황후강대국러시아의 으름장 한 번에 눈엣가시던 일본이 깨갱거리자, 각종 이권을 미끼로 러시아를 뒷배경 삼아 일본의 간섭을 막으려는 움직임을 보이게 된다. 당연히 조선을 먹어치울 기회를 살피고 있던 일본은 이를 좋게 볼 리 없었고, 곧 명성황후를 제거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7] 주조선 러시아 공사 카를 베베르와 주조선 일본공사 고무라 주타로 사이에서 체결. 일명 경성의정서 혹은 베베르 소촌 각서. 고종의 환궁과 조선의 자주권을 보장하고 조선 주둔 러시아와 일본군을 800명으로 제한했다.[8] 이홍장-로바노프 협정. 러시아, 청나라, 조선 가운데 하나라도 공격을 받으면 서로 협력하여 요격한다는 협정. 이를 위해서 청나라는 길림성흑룡강성을 통과하는 철도 부설권을 러시아에 넘겨줬다.[9] 조선의 군경 양성을 허용하고, 양국은 균형적으로 지원한다. 비밀 조항으로 만일 양국이 출병하게 되면 같이 출병하며 양국 사이에 군사중립거점을 둔다. 일명 모스크바 의정서 혹은 로바노프 산현 의정서.[10] 이 과정이 대한제국에 영향을 준 사건이 바로 1897년 12월 창설 예정이었던 한러은행이 다음해 3월로 연기된 것이다. 한국사 교과서에서는 이를 독립협회와 관련하여 만민공동회에서 투쟁으로 막아낸 것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고종이 대한제국을 수립하면서 일시 변심하고 러시아 군사 고문단을 해고하기로 한 것이 원인이고, 그나마 얼마 못 가 재개되었다.[11] 그래서 미국영국은 '러시아의 아시아 남하정책을 막기 위해서는 일본을 키워야 한다'는 일본에 우호적인 시각과 여론을 견지하게 되는 데 커다란 배경이 되었다. 이러한 시각이 1920년대 워싱턴 회의 체제까지 지속되었다.[12] 블라디보스토크는 부동항이 아니다.[13] 러일전쟁 말기에는 대부분의 문제가 해결되기는 했지만, 그때는 이미 패색이 현저해진 상태였다.[14] 단, 당시 전쟁 전 선전포고는 의무사항이 아니였으므로 국제법 위반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선전포고는 국가 간의 암묵적 전통이기에 일본은 미리 러시아가 1809년에 스웨덴을 기습공격했단 사실을 명목으로 사용하려 하였던 것이다.[15] 이 고질병을 정확히 말하자면 보급이나 장비 등에 제한이 가해질 수 밖에 없는 국력상의 문제를 일선 장병들과 중하급 지휘관들의 정신력으로 때워보려는 시도가 거의 처음 나타난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16] 봉천 전투에 참전한 아키야마 요시후루의 동생이다.[17] 만약에 전장이 주요 도시와 가까운 러시아 서부였다면 혹시 모를 일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이 당시의 일본군보다 몇 배는 막강했던 독일 국방군제2차 세계 대전 때 여기를 못 넘고 궤멸당한 걸 생각하면 보급에 한계가 있는 일본군이 러시아 서부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훨씬 넓디넓은 시베리아를 육로로 돌파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 가다가 다 죽겠다 이놈들아[18] 단 일본의 의료체계는 상당히 선진적이어서 비전투 손실이 이전보다 확실히 줄었을 수도 있었다. 문제는 그놈의 각기병 http://blog.naver.com/dreamofkgr/220372190056 [19] 결과적으로 피의 일요일 사건이 러시아 황실 붕괴→사회주의 혁명 테크의 시발점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차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수 있겠으나 이것은 제1차 세계 대전 시점의 사정이다. 러시아에서는 본격적으로 혁명의 열기가 높아지기 시작했고, 러시아 제국은 국내가 어지러운 상황에서 더 이상 외국과의 전쟁에 신경쓸 수 없게 된 것이다.[20] 일본 방위성 전사연구연보 15호 '태평양전쟁에 있어서 항공운용의 실상, 운용이론과 실제 운용의 차이' # 의 저자 유라 후지오가 항공자위대 OB 홈페이지 날개회에 기고한 요약문에서. # 번역 번역 [21] 결국은 대한제국의 운명이 뒤흔들린, 만주에서 치러진 전쟁이었다. 여기선 잘려 있는 삽화의 해설문에는 고종이 러일전쟁에서 중립을 선택했다는 기사가 짧게 나온다.[22] 러일전쟁 당시에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23] 종전 협정이 열렸던 포츠머스에서는 매년 포츠머스 조약체결일에 축제를 여는데, 자기네들이 중재하여 전쟁을 멈추고 세계 평화에 기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러일전쟁이 끝나고 불과 5년 만에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점을 생각해 보면 이는 지극히 강대국적인 발상이다.[24] 식민 제국주의 시대 당시의 태국이 대표적인 사례다. 필리핀을 식민지로 만든 미국과 캄보디아, 베트남, 라오스를 식민지로 만든 프랑스, 미얀마,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브루나이를 식민지로 만든 영국, 인도네시아를 식민지로 삼은 네덜란드 등 서양 제국주의 열강들의 사이에서 완충지대로서 독립을 유지했다. 다만 동남아시아를 식민지배하던 유럽이나 미국 등 서양 열강들이 지리적으로 붙어있지 않는 먼 나라들이였던 태국과 달리 한국은 구한말 당시 한반도에 대한 이권과 세력 확장을 노리던 일본이나 청나라, 러시아 등 여러 강국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기 때문에 태국과는 상황이 달랐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25] 비록 청일전쟁 시에 작곡되었지만 이때 처음으로 대규모로 이용되었다.[26] 주인공 부터가 러일전쟁 귀환병이다[27] 당시 일본에서 제작된 반전시[28] 러일전쟁 과정에서 일본이 시마네 현 고시를 통해 '점거'하고 해상 망루를 설치마개조한 것은 이미 유명한 사실. 게다가 점거와 동시에 원래는 울릉도를 가리키던 다케시마라는 이름까지 여기에 갖다 비벼놓았다. 사실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도 이때가 처음.[29] 사쿠라 대전이라는 작품 자체가 '만약에 러시아가 러일전쟁에서 승리했다면?' 을 전제로 한 IF 설정의 평행세계이다. 이쪽 세계관에서도 일본의 우경화의 움직임이 두 번 있었으나 두 번 다 망해버렸다. 러일전쟁에서 한 번, 20년 후의 일본 내에서 또 한 번.